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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4 02:34 600회 0건
<놀이터에서>




생각해보니, 아이들과 어울리는 것은 오랜만의 일인 듯하다.



친, 외가쪽의 인척과 얼굴을 상면하게 되는, 생신 때나 축하기념일 등, 기념비적인 날일 때에나, 애들을 본다.



친척꼬마들 치고, 강희를 싫어할 애들이 없었기에, 그녀가 자리에 참석하기만 했다 하면 죄다 졸졸 그녀를 따라다니는 판이니, 아이들 보는데는 강희가 최고일거라고 어른들은 우스갯소리로 이야기하실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날이 자주 있는 것도 아니니, 나이 어린 동생이 있는것도 아닌 강희로선, 어린 애들과 놀아줄 기회 자체가 없는 셈이다.




정찬이를 처음 만났던 날, 자신에게 선뜻 다가온 그 애를 보고, 곧바로 집으로 데려갈 생각을 했던 것도, 아이들에게만은 쉽사리 마음을 허락할수 있는 그녀이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어쩌면, 최강희와 가장 데이트를 하기 쉬운 사람은, 멋들어진 남자가 아닌, 어린아이들이 최고로 적합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아무튼 이런, 좋은 날에, 강희는 강희 나름대로 생각을 많이 하는 참이었다.




"나 빼곤 다들 아이들이란 말이지...흠....저녁은....분식집으로 할까?"




그게 괜찮을 듯했다. 어린애들과 가보는 분식집이라니, 제일 무난하기도 하면서, 아이들도 좋아할 만한 일일 것이다.




그녀는 애들의 의중을 물었고, 애들은 좋다면서, 가자고 난리들이었다.




그래서 저녁은 분식 코스로 정해졌다...







"야야, 천천히들 먹어라. 아무도 안 뺏어 먹어..."




작은 입들이라곤 하지만 다섯명인걸 감안해서, 그녀는 적지 않은 양을 시켰다.




오뎅에 떡볶이에 순대에 오징어 튀김 등, 푸짐하다고 봐도 좋을 만한 양을 다양하게 시켜놓았는데, 애들은 마치, 손에 쥐인 포크가 창칼이라도 되고, 옆에 앉은 친구가 적으로 여겨지기라도 하는 듯이, 그리고 경쟁자로 보여지기라도 하는 듯이, 서로 하나라도 더 먹으려고 난리들이었다.




그 닭쌈같이 보이는 치열한 장소에서, 홍일점에 해당하는 미정이만이 천천히, 느릿하게 떡볶이의 맛을 음미하면서, 입을 오물거리는 장면을 보자, 강희는 그만 실소하고 말았다.




"훗...별로 우아해 보이진 않지만 말이지..."




립스틱 대신 떡볶이양념으로 입술을 붉게 발라가면서 먹는 미정의 모습에서 꼬마 숙녀의 기품을 기대하기란 어려운 일일 법했다.



강희는 다시 한번 애들에게 말했다.




"모자르면 더 시켜줄 테니까, 천천히들 먹으래두? 걸신 들렸니 이녀석들아?"




그녀가 그렇게 또 한번 채근할 때에야, 애들은 배시시 웃으면서 강희를 바라봐주곤, 손동작의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애들의 배를 든든하게 채워준 후에, 강희는 곧장 애들을 데리고 근방의 놀이터로 향했다. 원래 이 나이때는 뛰어노는게 제일이다.



애들은 그렇게 뛰놀면 되는거고, 자긴 그냥, 애들의 신나하는 모습을 지켜볼 작정이었다. 바람을 쐬는 것을 좋아하는 그녀이기에, 놀이터 의자에 앉아서 애들을 바라보며 저녁의 바람을 느껴볼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식사를 한 분식집에서 놀이터가 그다지 먼것도 아니었기에, 그들은 금새 목적지에 도착했다. 늦은 저녁이 아니었는지라, 놀이터엔 그래도 뛰노는 애들이 제법 있었다.




"읏X~ 미정아. 내리자..."




강희는 부드러운 동작으로 미정이를 내려놓았다. 그 후에, 애들에게 말했다.




"자 그럼...가서들 놀지 그래?"




"................."




애들은 말없이 강희를 쳐다만 보았다. 강희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물었다.




"왜들 그래? 할 말 있니?"




정찬은 그녀가 그렇게 묻자, 그녀에게 슬쩍 말했다.




"누나도..같이 놀아요"




강희는 정찬의 말을 듣고는 피식 웃었다.




"됐어. 누난 그냥....너희가 뛰노는걸 보기만 해도 행복해. 그러니 누난 신경쓰지 말고, 가서들 놀아"




강희가 그렇게 말하자, 애들은 서로 눈치를 좀 보다가, 배시시 웃더니 이번엔 성주가 말했다.




"그럼..누나도 놀고 싶음 바로 끼워달라고 해요. 히히~"




강희는 성주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더니 말했다.




"그래~알았다 이녀석아~"




그렇게 해서, 남자 애들은 일단 먼저 놀이터로 다 앞다퉈 튀어나갔는데...미정이는 혼자 남아 눈을 깜박이면서 강희를 보았다.




" ? 왜 미정아? 가서 놀잖구?"




강희가 미정을 바라보는데, 미정은 갑자기 의자위에 올려진 자기 가방 안을 뒤적거리더니(가방은 강희가 앉은 의자 옆에 다 모아 올려둔 상태였다) 안에서 춘 리가 그려져 있는 팬시를 꺼내들었다. 그리곤 강희앞에 내밀어 보이면서 흔들어 보였다.




"이거..항상 가지고 다녀요. 헤헤~"




강희는 미정에게서 잠깐 그걸 받아들고 살펴보았다.




"...유정이가 그린거네"




애초에 강희를 춘리 코스튬으로 할 계획을 세웠던 장본인이 한유정이다. 다른 팬시도 팬시지만, 이 팬시는 유정이 직접 실력발휘를 해서 그려내 코팅작업을 마친 팬시였는데, 만화부 회장은 거저 따낸게 아니라는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실력이 담긴 팬시였다.




원래, 정교한 맛이 강하면, 실사적인 느낌이 강해, 귀엽고 아기자기한 맛이 죽어버리기 일쑤이기에, 큐티한 그림체를 좋아하는 어린 나이의 애들에게 어필하기 어렵다.




근데 유정은, 그 2개는 어울릴수 있다는걸 입증이라도 하는듯이, 세심한 그림체를 테두리로 내세우면서도 캐릭터의 표정이나 동작의 묘사를 해놓은 부분은 깜찍하게 해놓아서, 정말이지 상당한 수준이라고 느낄수밖에 없는 것이다. 진정안도 한유정의 그림 솜씨엔 혀를 내두를 정도니.




강희는 유정을 생각하면서 잠시동안 그걸 만지작 거리다가, 미정이의 작은 손에 꼭 쥐어주곤, 등을 토닥여준 후에 친구들에게 가라고 말했다.




"자, 어서 가. 언니는 니가 뛰노는걸 보고 싶어. 빨리 가서 놀아"




"네. 헤헤~"




미정은 방긋 웃은 후에 이미 저 앞에서 놀고 있는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해, 내달리기 시작했다.




강희는, 그런 그들을 보며 흐뭇하게 미소짓다가, 말했다.




"아이스크림이라도 사와야겠어"




그렇게 그녀는 잠시 자리를 비웠다.










"흐흐~ 그래서 말이야. 크크~!! 내가 그냥~!! 턱뼈를 빠개놨잖아. 큭~!!"



"잘 했어~!! 그런 새끼는 반 죽여놔야돼~!! 하핫~!!"



"야 근데, 술 먹어도 되겠냐? 짭새가 지랄하지 않을까?"



"토끼면 되지 뭐. 그리고 한국사람들, 서로 서로 신경 끄고 산다. 신고도 안해 이런걸론"



"그런가? 흐흐~!!"



"근데 이동네는 놀이터가 뭐 이러냐? 시설이 왜이래?"



"글쎄말이다. 병신같은 동넨가보지 뭐. 크흐흐~!!"



다른 동네에서 놀러온 무리들인 걸로 보이는, 사복차림의 남자들 네명이 술병이랑 안주가 적잖이 담긴 봉투를 들고, 온갖 상소리를 작지도 않은 소리로 해대가면서, 놀이터 입구로 들어서자, 놀이터에서 놀고 있던 애들은 겁먹은 눈이 되더니 하나 둘 떠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결국 찬이네만 남았다.



정찬이네도 그 무리들을 못 본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냥 갈순 없었다. 주위를 둘러봤는데 강희가 없는 걸 보니, 어딜 잠시 갔나 본데, 그녀가 올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무서워 보이는 형들 4명이, 좀전까지 강희가 앉아 있던 의자에 엉덩이를 깔고 나선, 곧바로 안주며 술병이며 꺼내들고 마실 품새인데, 찬이네 일행의 가방이 죄다 그 의자 구석에 있었다.



딱 봐도 초등학생 가방이니, 놀이터에 아직 남아 놀고 있는 애들 다섯명의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했나보다.



그들은, 애들보고 와서 가져가라느니 뭐니, 가타부타 말도 없고, 지들끼리 시시덕거리면서 그렇게 놀자판을 연성하고 있었다.



정찬이 애들을 보면서 물었다.



"...어떻게 하지? 가방 가지고 와야 되나?"



성주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돈 든것도 아닌데..설마 건들라구? 그냥 냅두자"



미정이는 얼른 맞장구쳤다. 그녀는, 아직 아무 일도 없는데 벌써부터 겁을 잔뜩 먹은 모양이다.



"그래...가까이 가지말자... 저 오빠들...왠지 무서워"




정찬은 약간 인상을 쓰더니 말한다.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아무튼 불안해...성주야. 우리 둘이서 가지고 오자. 너희 셋은 무서우면 여기 있어"




항상 이 멤버 중에 가장 적극적인게 정찬과 성주이다. 성주나 정찬이나 서로의 의견, 행동에 대해서 많이 따라주는 편이었기에, 찬이가 이렇게 나오자 성주는 도와주겠다고 고개를 끄덕였고, 결국엔, 다섯이 모두 가까이 가보기로 했다.




주춤 주춤




약간 쭈뼛대면서 다가온 다섯명의 꼬마들을, 종이컵에 가득 부은 술을 막 입 속에 한꺼번에 털어넣으면서, 한 녀석이 물었다.




"뭐냐 니네들은? 가방 가지러 온거냐?"




정찬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그는, 자기보다는 훨씬 덩치크고 힘있어 보이는 4명의 형들이 시야에 가득 들어오자 왠지 무섭고 떨렸지만, 당당하게 말하려 애썼다.




"네..네. 그..그거 저희 가방이거든요? 가지고 갈께요"




정찬이 애써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걸 듣다가, 그들은 서로 크하하 하고 웃었다. 그러다 그들 중에, 가장 호리호리하게 생긴 녀석이 능갈맞게 웃으면서, 그들의 가방을, 정확히는 미정이의 가방을 집어올렸다.




"아..."




미정이는 오들오들 떨면서, 그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기만 할수밖에 없었다.




미정의 가방을 든 그녀석은, 괜시리, 아무 이유도 없는 듯한 동작으로 가방을 만지작 만지작 거리더니, 여자애를 보면서 말했다. 딱 보아도, 놀리려는 기색이 만면에 가득차 보였다.




"참~ 가방 꼬라지가..아기자기하게 생겼다야~ 크큭, 내가 너희들만할때도 이런 가방은 안 맸을 듯한데...."




".............."




미정이랑 애들은 기가 질려서 아무 말도 못하고 떨고만 있는 중이었다.




녀석은 피식피식 대면서, 계속 가방을 가지고 놀 생각인듯 했다. 성주하고 정찬은, 곤란해 하면서 인상을 찡그리는데...




"돌려주세요~!!"




미정이가 갑자기 기를 쓰기 시작했다. 의외의 일이었다. 그녀가 이렇게 나올줄은, 그녀의 친구들도, 그리고 의자에 앉은 놈들 넷도 생각치 못했다.




하지만, 미정의 가방을 만지작대던 녀석은, 그녀의 그런, 성난 고양이같이 보이는 모습이 재미있어 보이는지, 가방을 한손으로 들어 그녀 눈앞에 흔들어 보이면서 조롱하기 시작했다.




"야야, 꼬마야, 하하. 누가 안 준댔냐? 자..가져가라 가져가"




미정은 그가 그렇게 조롱하자, 입술을 꽉 물고선 얼굴이 달아올라 있다가, 후다닥 다가서서는 한 팔로 가방을 힘껏 당기기 시작했다.




"이잇!!"




그녀는 흥분한 얼굴이 되어선, 죽어라 기를 쓰면서 가방을 당겨대었지만, 그녀의 그런 행동 자체가 재미있는 그로서는, 그런 미정의 모습을 마냥 즐길 수작이었기에, 키득거리면서 오른팔로 가방을 꽉 잡고 절대 놔주지를 않았다.




미정의 친구들은, 자기들까지 나서면 남은 형들이 또 어떨지 몰라, 입술만 잘근거리면서 일단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빨리 강희 누나가 오기만을 바라면서.




기를 쓰면서 가방을 되찾으려고 애쓰는 미정을, 재미있다는 듯이 바라보던 녀석은, 문득 의아한 시선을 그녀에게, 정확히는 그녀의 왼손에 쥐어져 있는것에 주고 있었다.




"팬시?"




잘은 안 보이지만, 여자애의 손에는, 어떠한 캐릭터가 그려진 팬시같은게 있었다. 녀석은 갑자기 흥미가 동하기 시작했다.




"아, 꼬마야, 잠깐잠깐. 그건 뭐냐?"




그는, 가방을 두고 여자애와 잠시 실랑이를 벌이던 것을 중지하고는, 여자애의 손에 있는것을 가리켰다.




"!! 아..아무것도 아니에요!!"




미정은 얼른 손에 들고 있던걸 등뒤로 숨겼다. 하지만, 그는, 갑자기 미정의 어깨를 잡더니 확 하고 앞으로 끌어당긴 후에, 기어코 그녀의 손에 있는것을 빼앗아 들고야 말았다. 미정은, 그의 우악스런 손길이 그걸 채집어가려 할때, 정말 내주기 싫었지만, 안 주려고 손에 힘을 넣었다간, 그 소중한 것이 망가질까봐 그러지도 못하고 허망하게, 춘리 팬시를 빼앗기고 말았다.




"호? 춘리 아냐? 크하하~ 지금 때가 어느 땐데, 스파 캐릭 팬시야? 요새 얼마나 재미있는 게임이 많은데말야, 안그러냐? 푸하하~!!"




그는 웃으면서, 손에 들린 춘리 팬시를 장난스레 흔들어댔고, 그의 친구들도 그의 손에서 그걸 받아들더니, 한번씩 돌려가면서 그걸 보고는, 킬킬대기 시작했다.




"와하하~!! 꼬마야, 니가 춘리를 알긴 아냐? 이게 언제적 캐릭터인데말야? 하하하!!"



"나이에 좀 맞게 놀아라. 요새 티비에서 만화 뭐 하는진 몰라도, 그런 캐릭터 팬시를 사야지. 춘리가 뭐야, 춘리가, 크하하~!!"



녀석들은, 뭐가 그렇게 웃긴지, 입에서 침을 튀겨가면서 미정의 춘리 팬시를 놓고는 괴성이다시피 들릴정도로 꽥꽥댔고, 미정은 그들의 소리가, 구식 열차가 내지르는 경적소리보다도 10배는 듣기 싫었다.



부들 부들



미정의 몸이 점차 떨리기 시작하는 가운데, 결국은 사단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네 놈 중의 한놈이, 한가득 입에 가득 안주를 문채로, 으적대다가, 웃는 과정에서, 춘리 팬시의 코팅된 표면에 그놈이 게걸거린 안주찌꺼기파편 일부가 튀고 만 것이다.



투둑



"어? 이런? 흐하하, 미안미안. 웃다가 그만, 화 안났지? 크흐흐~"




"....!!"



미정은 이젠 울상이 되었다. 그녀는 얼마나 분한지, 몸을 바들바들 떨다가, 급기야는 눈에서 눈물을 한 방울 흘렸다.



미정이가 우는걸 보고선, 정찬과 친구들이 무척 당황해서 다가와 그녀를 달래는데, 그놈들은 사과다운 사과는 할 줄 모르는건지, 아니면 이런 꼬마에게 머리숙일순 없다는건진 몰라도, 별달리 미안한 기색도 없는 듯했다.



춘리 팬시를 더럽혔던 녀석이, 결국 그녀의 불붙은 마음에 기름을 끼얹는 짓을 하고야 말았다.



녀석은 종이컵에 담긴, 술을, 팬시에 한번 주르륵 하고 부었다.



"아아...!!"



미정이와 친구들이 인상을 찡그리면서 그걸 보고 있는데, 그녀석은, 지가 하는 행동에 합리화를 하려는 듯, 키득거리면서 연신 소주를 팬시에 부어가며 말했다.



"아아, 기다려봐라. 오빠가 소독시켜줄테니까. 알코올성이 있어서 깨끗하게 씻길거야. 크큭.."



그의 그런 행동을 보고 있다가, 순간 미정은, 입술에 피가 날정도로 꽉 물더니, 한달음에 후다닥 하고 다가서서 그의 정강이를 자신의 작은 발로 팍 하고 까버렸다.




딱!!




"!! 아!! 뭐, 뭐야? 꼬마야, 왜 그래?!"



미정은, 그에겐 대답할 가치도 못 느끼는듯이, 이번엔 종이컵을 들고 있던 그의 손목을 꽉 깨물어버렸다.



"!! 크악!! 이!! 이 꼬맹이가 미쳤나!! 야, 저리 안 떨어져?~!!"



그는 미정의 머리를 밀면서, 떼어내려 애를 쓰기 시작했는데, 꼬마애가 어찌나 표독스럽게 달려드는지, 몸까지 부들부들 떨어가면서 자기 손목을 물어대는 모습이 보이자, 진저리가 쳐지면서도, 한편으론 울컥 하고 화가 나기 시작했다.



"이런 썅~!! 야!! 안놔? 안놔?!! 들어서 던져버린다?!"



급기야는 욕설이 쏟아지기 시작했고, 그는 점차 팔에 힘을 넣기 시작했다.



미정이가 아무리 날뛰어도 그의 힘을 이겨낼수 없는 것은 자명한 사실. 그놈은 결국 미정이를 떼어내는데 성공했다.



"하아..하아..."




미정이는 순간적으로 너무 많은 힘을 써버려서 그런가, 뒤로 좀 비칠비칠 물러나더니, 놀이터 모래바닥에 그냥 아무렇게나 주저앉아버렸다. 그녀의 친구 두명이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고, 정찬과 성주는 이를 갈면서 녀석들 네명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이런 씨발... 미친 꼬맹이가..열라 아프네. 아 정말. 재수가 없을라니까"



"괜찮냐? 키킥~!!"



친구들은 킬킬대면서 그를 보았다. 꼬맹이한테 절절 매는 모습을 보니 웃겼나보다. 그는 친구들을 한번 험상게 쏘아보더니, 그때까지도 자기 무릎 위에 올려져 있던 춘리 팬시를 인상쓰며 쳐다보다가, 오른 손아귀에 쥐고는 와락 힘을 주기 시작했다.



꾸기적




"!!"




정찬과 성주는, 그의 순간적인 동작에, 눈을 크게 뜨고 경악하다가, 뒤를 돌아봤다.




돌아보자....미정이가...멍-한 눈길로 녀석이 하는 양을 보고 있는게 보였다. 그녀의 얼굴빛은 하얗게 탈색되어 있었다.



"아...으..."




미정은 얼굴을 기이하게 찡그렸다. 그리고 그렇게 굳어버린 석상처럼, 표정이 변할줄을 몰랐다.






데굴



녀석의 우악스런 손길에, 종잇장처럼 구겨져버린 그것은, 미정의 앞으로 던져져 몇바퀴 구르다가 바로 앞에서 멈췄다.


"............"



미정은 떨리는 손으로 그걸 들고는 입술을 깨물고, 또 깨물어대다가, 기어코는 어깨를 떨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아....아아......으아아앙~~!!"



놀이터에, 꼬마 여자애의 처절한 울음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먹을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길을 걷던 그녀의 귓가에, 여자아이의 슬픔에 찬 울음소리가 들려온 것도 바로 그때였다.









<충동>




"으앙~!! 흐아아앙~~!!"



여자애는 울었다. 슬픈 내면을 외양으로 표현할수 있는 최대치가 쥐어짜지는 듯한 울음소리였다. 너무나 처절해서 통곡소리로 들릴 정도였다.


춘리 팬시를 구겨 던져버린 놈 하며, 그의 일행인 녀석들은 하나같이 인상을 찡그렸다. 시끄러워 죽겠단 표정이었다.


"아씨발. 되게 시끄럽네..."


네 녀석 중, 미정의 가방을 두고 실랑이를 벌였던 녀석이, 아이들의 가방을 하나씩 집어가면서 정찬이네가 서 있는곳 앞에 하나씩 휙휙 하고 던졌다.






팍~!!


파박!!



애들이 서 있는 곳의 바로 앞에 제각기 떨어진 그것들은, 놀이터에 있는 모래바닥 위에 던져지면서 뿌연 모래며 먼지를 머금게 되었다.



"..............."



성주와 찬은 아무 말도 없었다. 그냥 그저, 허망한 눈길로, 부들 부들 떨 뿐이었다. 미정이는 이제 더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의 등을 토닥여주는 친구 두명도 슬프기는 매한가지였다.



"아......"



찬이와 성주는, 상대에 비해 힘이 없는 것에 대해, 너무 분하고 서러워서, 탄식조로 신음소리가 나왔다.



녀석들은 킬킬댔다.



"야, 가방 줬으니까 됐지? 형들이 오늘 기분이 좀 괜찮거든? 그거 들고 집에 가라 꼬마들아. 평소같았으면 그냥은 안 보내는데 말이야. 아오...주먹이 진짜!! 크흐흐~!!"



"저 계집애 빨리 좀 데리고 가. 시끄럽게 앙앙거리긴"



미정을 두고 그들이 욕지거리를 해대기 시작하자, 찬이와 성주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이렇게 된 이상 오기로라도, 그리고 미정이때문에라도, 그들에게 덤벼볼 양으로 그 작은 주먹들을 쥐기 시작했다.



꽈악


두 사람이 주먹을 쥐고 부들부들대자, 녀석들의 둘의 행동이 재미있어 보이는 모양이었다.


가방을 집어던진 놈이 호기롭게 말했다.



"호...싸우실라구? 근데....어쩌냐? 내가 오른팔 하나만 써도 니네들은 그냥 누울거 같은데 말야. 얘들아...크흐흐~"



상대한테 너무 모욕을 받자, 너무나 동요받은 찬과 성주는 이제 앞뒤 가리지 않고 앞으로 튀어나갈 찰나였다.



바로 그때...



".....무슨 일이지?"



여자의 목소리. 낮은 음색으로 퍼진 목소리지만, 그 목소리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차가움. 서늘함이 깃들어 있었다.







모두가 고개를 돌렸다. 그들이 있는 곳의 좌켠 쪽, 3 방향의 입구에서 왼쪽의 출구로 해당하는 방향에서, 이리로 곧장 다가온 듯한 여자.



"누나!!"



성주와 정찬은 반가워서 그녀를 보자마자 소리를 질렀다.



강희는 오른손에 아이스크림들이 들어 있는 비닐봉지를 검지손가락으로 건채 들고 있었는데, 애들 둘이 뛰어 나가오자 각자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도, 눈은, 눈만은, 의자에 앉아 있는 네녀석들을 뚫어지도록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 표정은 무표정이었는데, 아무 감정이 떠올라 있지 않은 듯했기에, 그래서 보는 이로 하여금 더욱 오싹한 분위기를 표출했지만, 얼굴이 얼굴인지라, 상대편에 해당하는 네 녀석은 넋을 놓은 상황이었다.



"오옷~~!! 이런 프리티걸이!!"



네 녀석은 강희를 보자, 눈들이 확 트이는걸 느꼈다. 자기들이 살아오면서 봐온 여학생 중에 가장 예쁜 여자. 보이쉬해 보이면서도 갸름한 턱선의 얼굴.



블랙 가죽 재킷을 둘렀는데도 S라인의 몸매가 여실히 살아나는 환상의 몸매. 가늘게 쭉 뻗친 종아리에서 느껴지는 각선미.



어느걸로 따져보아도 최고의 여자애였다.



녀석들이 그렇게 넋을 놓고 있는 판인데, 미정이 일어서서는, 구겨진 춘리 팬시를 들곤 으앙 하고 울면서 강희에게 달려왔다.



"언니~!! 흐아앙~!!"




미정이 쪼르르 하고 다람쥐처럼 달려와서 강희의 다리를 잡으려 하자, 강희는 아이스크림 봉지는 찬이에게 건네고, 부드럽게 미정을 품안에 받아 두손으로 안아올렸다.



"...좀전에 미정이가 운거구나. 그렇지?"



미정의 눈가에 그렁그렁 매달려 있는 눈물을 보면서, 강희는 왼손가락으로 여자애의 눈물을 닦아내주며 그리 물었다.



미정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강희의 어깨며 가슴에 고개를 묻고는 울먹대기 시작했다.



강희는 미정을 부드럽게 토닥여주면서, 찬이와 성주를 보면서 사정을 물었다.



"설명을 해볼래?"



그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네 남자애들은, 좀전에 있었던 일련의 사태에 대해 하나도 빠짐없이 강희에게 일러바치기 시작했다.



"그 다음에요~!! 팬시에다가 소주를 들이붓고는요!!~...."



"가방을 집어던졌어요. 저희 앞에다가~!!"



애들은 정말, 열심히, 하나도 빠짐없이, 방금 전에 있었던 일을 강희에게 모두 말했다.



"....그래? 그랬단 말이지...."



사태의 전말을 모두 듣고 나자, 강희는 안고 있던 미정을 조심스레 내려놓은 후에, 네 녀석에게 성큼 성큼 다가갔다.



애들과 강희가, 일행이란것을 알았을 때, 녀석들은 약간 주춤하는 분위기였지만, 그래도 상대가 세게 나올수는 없을것이라 생각했다. 당연했다.



저쪽은 남자 네명이고, 이쪽은 여자 한명에 꼬마애 다섯. 자기들이 꿀릴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고 생각한 그들은, 그저 강희의 미모에만 정신이 팔려, 히죽거리면서, 오히려 그녀가 말을 걸어오기만을 기다리는 상황이었다.



거리가 먼것도 아니었기에, 몇발자국을 디딘 후에, 미정의 가방을 집어던진 녀석의 앞에 바로 가서 선 강희.



"...왜...할말 있어? 아가씨?"



녀석은, 입가에 미소를 떠올리면서, 상대편 여자가 말하기를 기다렸다.



강희는, 녀석을 지그시 내려보다가, 그리고 그의 일행에게 한번씩 시선을 주다가, 다시 녀석을 보고는 또박또박 말했다.



".....일어나"



"?"



녀석은 어이가 없었다. 당차보이는 여자애이긴 했지만, 첫대사부터 반말이라니, 당돌해 보이기까지 하는것이다.



"지금...일어나라고....나한테 한말?"



녀석은 오른손 검지로 자기 얼굴을 가리켜 가면서 히죽거렸다. 강희는 아무 말도 없었다.



나머지 세 녀석도 키득거리는 가운데, 녀석이 히죽대더니, 말했다.



"그쪽이 일으켜준다면, 일어나보지"



".............."



강희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가, 오른손을 들어 자신의 앞머리칼을 한번 뒤로 쓸어넘겼다. 그녀의 미소는 어느새, 차가워져 있었다.



"크....크큭....키키킥...."



여자가 갑자기, 음산하게 웃어대자, 여자의 그런 행동이 사뭇 재미있는 듯, 그리고 이상하게도 보이는 듯, 녀석들은 흥미있어 하며, 그녀의 다음 반응을 기다렸다. 그리고....그들은.....그녀의 다음 행동에...확실히 반응했다.



쓰윽



그녀는 왼발을 들었다.



그리고 쳐든 그 발을, 정확히는, 녀석들이 앉은 의자의 맨 가의 지점, 가방이 빠져서 공간이 생긴 지점을 겨냥했다. 그리고는...거칠게...다리를 내려놨다!!




쿠쿵!!


콰드득!!


우지끈!!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목각 재질로 만들어진, 어지간한 사람 두명의 허리둘레를 가진 듯해보일정도로 굵은 나무 의자. 그 의자가 지니고 있는 2개의 다리 기둥 가운데, 한쪽이 빠지직 하고 순식간에 균열을 생성하면서 갈라졌다.


강희가 다리를 내려놓아, 충격이 발생한 시점에서 반대편으로, 의자의 몸통 오른쪽이 시소처럼 들려지는것도 삽시간의 일이었다.



상황은 이미 정해져 있는 수순을 밟기라도 하듯이, 그녀의 탄력에 의해 반동의 힘을 받은 네 녀석은 퍼드득!! 하고...공중으로 부웅- 떠올랐다.




가장 오른쪽에 있던 녀석의 경우는 거의 2미터가 조금 안되게 가량 치솟아 올랐을 정도였기에, 맨 왼쪽의 녀석조차도 떠오르는데 전혀 지장이 없었다.




네 녀석은 순식간에, 자신들이 날개달린 새라도 된건지, 아니면 순간적으로 만유인력의 법칙을 배제시킬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것을 몸으로 증명하려 하는건진 몰라도, 그렇게 수 미터 가량을 공중으로 치솟았다....그러다가.....



역시 자기들은 새가 아니었다는 듯이...그리고 발바닥을 땅에 붙인 채로 살아가야 하는 생물이라는 듯이....도로 땅으로..떨어졌다.



털퍼덕


털썩



"아!! 크악~!!"


"아악!! 크헉~!!"


간접적으로 느꼈을 정도인데도, 순식간에 받은 엄청난 충격. 상대 여자애가 의자를 발로 밟아버리는 시점에서, 의자가 쩌르릉 하고 울렸었다. 의자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있던 그들의 머리부터 발 끝까지가 감전된듯이 짜릿!! 하고 울릴정도의 힘이 순간적으로 관통했던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몸이 수 미터정도 떠올랐다가 다시 땅바닥에 얼굴이며 몸통을 매어들 꽂았으니, 온 몸의 뼈다귀며 근육들이 아우성을 치고 있는 판이었다.



녀석들은 신음하면서 몸을 바들바들 떨며 아직 수습을 못하는 중이었다. 그런 그들을 내려다보면서 키득거리며, 싸늘한 음성으로 입을 여는 여자가 있었다.



"어머~ 미안해서 어쩌지? 내딴엔 일으켜준다고 해준건데, 실수를 해서 잠시 새가 된 기분을 선사해버렸네. 공중부양해보니 어떠니? 즐거워들? 킥킥킥..."



웃음소리와 함께, 장난으로 말하는 음성인데도, 그걸 듣는 이들은, 그게 그렇게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괴...괴물....."


어떻게 이럴수가 있단 말인가. 저 단단해 뵈는 나무 의자를, 여자 한명이 발로 밟았다고 아예 찌그러지게 만들어버리다니.



미정이의 팬시에 소주를 들이부었었던 녀석이 그녀를 올려다보며 거칠게 말했다.



"미...미친년...."



한편, 강희가 벌이는 행각을 뒤에서 보고 있던 꼬마애들은, 턱관절이 늘어질 정도로 입을 딱 벌리고 있는 판이었다.



"와...진짜..짱이다...."



환상적인 힘. 경이로운 파워. 땅 위를 걸어다니는 한명의 여자가 저런 힘을 보인다는 것 자체가 신기할 따름이다. 그들은 차마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강희에게, 미친년이라고 말한 녀석은, 입을 잘못 놀렸음을 금새, 뼈저리게 후회하게 되었다. 그녀가 자신을 다음 타겟으로 지정한 것이다.



쓰윽



오른손을 뻗은 강희는 녀석의 뒷덜미를 잡아쥐고는 놀이터의 모래 바닥에 지그시 누르기 시작했다.



꾸우욱!!




"우욱~!! 큽!! 우우우~!! 크허헙!!"



녀석은 팔이며 다리를 파닥대면서 발버둥쳐댔지만, 그녀의 손길에서 벗어난다는건 요원한 일이었다. 오히려, 그 커다란 대가리가, 점차 땅바닥에 약간씩 깊숙하게 패여가는 중이었다.



강희는 생글거리면서 말했다.



"먹어. 이자식아. 배 나온거 보니까 아무거나 잘 씹어먹게 생겼네. 이 놀이터 모래. 니가 다 쳐먹어. 알았어~?"



"우그그!! 우그그극~!!!"



녀석은 이제, 게거품을 무는지,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그때서야, 팔다리의 저릿한 기운이 어느정도 가신, 녀석의 일행인 세 녀석이 일어서서 곧장 그녀에게 달려오며 거칠게 외쳤다.



"이런 썅년이!!"



한 녀석이 한달음에 다가서서 그녀의 머리칼을 움켜쥐려 했다. 하지만...







고개를 돌린 강희는 곧장 녀석을 정면으로 마주보면서 키득 하고 웃었다. 그러면서 반각도로 팔을 안쪽에 넣은 후에, 녀석이 지근거리에 다가들때까지 기다렸다가, 놈이 사정권 내에 들자 부웅 하고 오른손을 휘둘렀다.



파팡~!!



안쪽으로 모인 손이 바깥쪽으로 돌며 반원을 그리면서 노린건, 녀석의 뺨. 강희는 손등으로 녀석의 뺨을 냅다 휘둘러 쳐버린것이다.



안면을 그녀의 손등으로 쳐맞은 녀석은 부웅 하고 일직선으로, 포탄이 날아가듯이 순식간에 뻗어나가더니 전방의 6미터정도 거리에 있던 그네의 기둥에 부딪혔다.



쿠...웅!!



녀석의 어깨와 그네기둥이 부딪혔는데, 쇠 재질임에도 불구하고, 딩- 하면서 그네기둥의 표면이 울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수직으로 곧게 뻗쳐 있던 기둥이 약간 비스듬히 휘어지는게 보였다.



부딪히면서 원형의 쇠기둥 표면이 일부 찌그러지며 기울어버렸고, 녀석의 어깨뼈는 추욱 하고 빠져있는듯했다. 관절이 나간것은 물론이고, 뼈 자체가 작살난게 틀림없었다.



주르륵



그네에 날아가 부딪혔던 녀석은, 그대로 정신을 잃어버렸는데, 정신을 잃자마자 양 코에서 코피가 주르륵 흘러나왔다.



"으...으으...."



친구 한놈이 쓩- 하고 그네에 날라가 저 지경이 된 걸 본 두 놈은, 감히 한 발짝을 떼어놓을 생각도 못하면서, 부들부들거리며 여자를 바라봤다.



여자는, 방해하는 녀석들이 없어졌으니, 이제 다시, 할것을 하겠다는 듯이, 땅바닥에 사지를 뻗고 누워 있는 녀석의 두툼한 목살을 다시 잡아쥐었다.



그리고는...녀석을 그렇게 잡은채 앞으로 조금씩, 나아가기 시작했다.



"으~!! 그극!! 우그그그~!!"



입안에 모래며, 모래 안에 파묻힌 유리조각들, 기타 자잘한 쓰레기들이 혀이며 입천장에 달라붙어, 따끔거리는 충격을 주자, 녀석은 이제 눈깔을 뒤집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강희는 킥킥거렸다. 그녀의 두 눈에는, 분노가 가득해 보였고, 자신이 하는 행동에 대해서, 전혀 문제를 느끼지 않는 듯했다.



강희는 생글생글 웃으면서 바들바들 거리는 녀석에게 말했다.



"야이...개새끼야....니가 뭔데? 응? 니가 뭔데 아이를 울려? 니가 그렇게 잘났어? 응? 너 힘 쎄니? 어? 니가 그렇게 쎄? 니 친구들은? 힘 쎄? 응? 킥킥..."



"으으윽~!! 으그그....자...자모해허어요어...."



가까스로 녀석은 입안에 든 모래를 뱉어내면서, 잘못했어요라고 말하려 했지만, 강희는 알아듣지 못하겠단 반응이었다.



"응? 뭐라고 씨부리니? 킥..말을 할려면 똑바로 해. 사내새끼가 줏대가 없이 웅얼대기는... 가지가지 해요. 병신같은 새끼. 너같은 건 계속 모래나 쳐먹어. 내가 다 먹여줄테니까 말이야. 알았니?"



"자...자못...."



녀석은 이제 눈물을 줄줄 흘려대고 있었다. 옆 켠에서 우두커니 서 있는 두 놈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패닉 상태에 빠질대로 빠져 있었다.




강희의 그런 행동을, 잔인하기 그지 없는 행동을 보고 있는 아이들은, 그런 그녀의 모습에서, 아까 있었던 일에 대한 복수를 해낸, 통쾌함을 느끼기보다는, 한명의 이질적인 존재가 내뿜는 공포감에 몸서리가 처지고 있는 중이었다.



분명 자신들의 일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저 누나는, 저 언니는, 너무나 무시무시한 말과 행동을 하고 있었기에. 그녀가 아닌것만 같았기에...



하지만 강희는 조금도 멈출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생각하고 있었다.



<...약한 것들...>


<..자기보다 약자이면 마음껏 하고자 하는 족속들...>


<...나보다 약한 주제에...>


<..내가 마음만 먹으면....>


<...찢어죽이는것도...때려죽이는것도.....밟아죽이는것도......그리고....>


<...터트려 죽이는 것도......손쉽기 그지없는 일인데.....>


<...인형을 망가뜨리는것보다...쉬운데....>



어느새, 주위의 것은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살의가..오로지 살의만이, 살인충동만이, 그녀의 가슴속을 채운다.



인간같지 않은것들? 죽여야 한다.


밥맛같이 노는놈들? 없애야 한다.


절대 살려두어선 안된다. 살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것들은 왜 태어났단 말인가?


자기는 뭘 해야 할까? 그냥 학교 때려치우고 오늘부터, 보는 족족 죽여나가는 것도 괜찮은 삶 아닐까?


세상을 바꾸겠다는 거창한 꿈같은건 아니다. 그냥 꼴보기 싫을 뿐이다. 으시대는 새끼들이, 애들을 울리는 쓰레기들이, 신체적으로 약한 여자를 깔아 뭉개려 하는 개새끼들이....


그런 놈들이 싫을 뿐이다.... 죽이고 싶다는 생각이 가슴속에 가득찰 뿐이다....



그런 생각에 가득차 있어, 증오와 분노에 휩싸여 있는 강희의 귓가에..한순간,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니..."



그 소리는 처음엔, 잘 들리지 않았다. 분노의 감정에 휩쓸릴대로 휩쓸려 있는 자신이 듣기에, 그 소리는 너무나 미약했다. 하지만 분명, 되새겨보면, 자신이 아끼는 존재의 소리이다. 귀여운 목소리다. 아이의 음성이다. 강희는 핫 하고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들어올리자, 여자애가 울면서, 자신의 몸을 흔들어대고 있었고, 남자애들은 둥글게 자신을 둘러싸고 있었다.



"..너희들?"



강희는 멍한 시선으로 애들을 쳐다보았고...미정이가 으앙 하고 울면서 강희에게 말했다.



"흑..흑....언니 됐어요...이젠..그만 해요..미정이가 잘못했어요...언니 이러는거...보고 싶지 않아요. 흐흑..."




미정이는 주륵주륵 눈물을 흘리면서 강희의 팔을, 정확히는 깔아뭉개고 있는 녀석의 목을 붙잡고 있는 강희의 손을, 녀석의 목에서 떼어내려고 힘을 주고 있었다.



강희는 여전히 넋나간 시선으로 미정을, 그리고 애들을 돌아보면서 물었다.




"내가..내가 왜?...내가 어쨌는데? 그리고..보고 싶지 않다니?"




성주와 찬이, 그리고 애들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어댔다. 그러다 정찬이 말했다.




"누나가..누나같지 않았어요...무서웠어요......"




아이들은 그 다음 말을 내뱉고 싶어했지만,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왜냐하면...그들이 느낀 솔직한 감정은...




<괴물> 같은 모습의 존재를 보는 듯했으니까.....




미정은 계속 으앙 으앙 하고 울면서 강희의 품안에 파고들려고 했다.



"언니...그만 해요...네? 저 이제..아무렇지 않으니까..그러니까....훌쩍..."



"..아..."



강희는 낮게 신음하면서, 깔아뭉개고 있던 놈의 목을 놓았다. 그리고는...미정을 안아올려 꼭 하고 껴안으면서 말했다.



"미정아 미안...언니가.....언니가 잘못했어....미안해..미안해..."




미정은 계속 울어댔고, 강희는 그렇게 미정을 안은채, 한동안 우두커니 서 있기만 했다.



미안해...놀라게 해서 미안해. 무섭게 해서 미안해....










<균열>




사태는 종결에 들어갔다. 일이 이 지경이 되도록 만든 장본인들. 양아치인 네녀석 입장에선, 강희의 말에 전적으로, 절대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고, 그들의 심정은, 한시 바삐, 이 무시무시한 여자에게서 떠나고 싶을 따름이었다.



"저...."



멍하니 서 있던 두 놈 중의 한 놈이, 쭈뼛거리면서, 두려운 시선으로 강희를 살피며,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분위기상, 그녀가 보내주지 않는다면, 도망은 엄두도 못 낼 일이니까.



".....빨리 병원으로 데려가...살리고 싶다면..."



강희는 미정을 품안에 안은 채, 두 놈을 차가운 시선으로 쳐다보면서 말했다. 아직도 그녀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지만, 아이들이 있기에 인내하고 있는 중이었다.



"네..네.."




두 녀석은 덜덜 떨면서, 각자 한 놈씩 맡고 업은 후에, 후다닥 퇴장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강희는, 놀이터 출구를 나서기 시작하는 녀석들의 등뒤에, 한마디를 덧붙이는걸 잊지 않았다.



"...생각같아선....찢어죽여버리고 싶지만...애들 덕분에 숨이 안떨어진줄 알아라들....또 내 눈에 들 날이 오면...알아서 생각하고...."



"예...예 누나...."



"...너희같은 것들에게 누나라고 불리고 싶지도 않아. 개새끼들아. 빨리 꺼져버려. 1분 1초도 보기 싫어"



"네..그....그럼..."



두 녀석은, 발등에 불이라도 떨어진 양, 자신들과 비슷한 덩치의 친구들을 업었는데도, 놀랄만큼 빠른 속도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역시 인간은, 생명의 위협이 느껴지는 순간엔, 미지의 힘이 발현된다는게 진실인듯하다...



"..........."



강희는 말없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시간은 대략 6~7시 사이의 전후인듯...



강희는 아이들에게, 시간의 여유가 아직 있는지를 물었다.



애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고..그녀는 애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말했다.



"아이스크림....먹을수 있을려나 모르겠다..."



찬이가 들고 있던 봉지에서 아이스크림을 꺼내, 표면을 손가락을 눌러보더니, 배시시 웃으면서 말했다.



"후후..꽁꽁 얼어 있었나봐요. 얼마 안 녹았어요 누나. 히히~"



강희는, 씁쓸하게 웃다가 애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누나가...머리가 좀 아파서...공원에 같이 가줄래? 안 머니까..아이스크림은 거기서 가서 먹어도 돼"



애들은 모두,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강희는, 아이들의 가방을 손수, 모두 털어준 후에, 어깨에 매어주고 나선...미정을 안고..공원으로 가기 시작했다.








항상, 자신이 앉는 자리. 그 자리는 오늘도 비어 있었다.



털썩



그녀는, 벤치에 엉덩이를 내려놓고 나선, 지갑에서 만원짜리 한장과, 오천원짜리 한장을 빼든 후에, 애들을 보며 말했다.



"누가 좀...미안한데...콜라를 사다주겠니? 누나가 직접 가고 싶은데...지금 좀..맥이 없구나..하하.."



그녀는 정말로, 기운이 없는 듯, 힘없이 웃으면서, 애들에게 부탁했다. 남자애들 둘이 다녀오겠다고 그랬고, 성주와 정찬, 그리고 미정이 남아 있기로 했다.



"콜라를...10캔 정도 사와줘. 그리고 남은 돈은..너희 먹거나 마시고 싶은걸 사면 돼"



애들은 모두 눈을 크게 뜨면서 물었다.



"그걸 누가 다마셔요?"



강희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가 다 먹을거야. 난 콜라를 좋아하거든"



콜라를 아무리 좋아해도, 열 캔을 다 마실수 있을까. 의구심이 안 들수가 없었지만, 결국, 애들은 수긍했고, 두 아이가 사러 갔다.



콜라를 사러 가는 아이들을 보면서, 강희는 속으로 생각했다.



"...거의 집에서만 마시는데....오늘은 왜....."



스스로도 잘 알수가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한가진 확실했다. 지금의 자신은.....힘들어 하고 있다는 것을..



꿀꺽꿀꺽



아이들이 사온 콜라가 오자마자, 그녀는 거침없이, 마셔대기 시작했다. 어찌나 빨리 마시는지, 사오고 나서 불과 10분이 안 지났는데, 그녀는 벌써 다섯 캔째를 마시고 있었다.



애들은 모두, 강희를 걱정스레 쳐다보기 시작했다. 성주가 불안한 시선을 그녀에게 계속 주면서 물었다.



"누나...너무 빨리 마시는거 아니에요?"



그가 보기에, 누나의 얼굴은 어느새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처음엔 못 느꼈는데, 가만 보아하니, 왠지 취한 듯해 보이는 모습이다.



누나는 눈동자를 느리게 기울여, 부드러운 시선과 표정으로 자신을 시야에 담더니, 배시시 웃어주면서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말했다.



"아..아냐....누나는 원래.. 이렇게 마신단다...하하..."



그녀에게 있어 콜라는 술이나 마찬가지. 안주도 없이 콜라만을 계속 내리마셔대는 그녀였기에, 어느새 취기가 제법 올라 있었다.



"누나(언니)는 콜라에 취하나보네?"



남자애들과 미정이 그렇게 짐작하고 있는 가운데, 강희는 콜라를 마시면서 오래 된 과거부터 근래까지의 일들을 회상하고 있었다.



상념이 많아지고, 복잡해지면서, 그녀는 갑자기, 가슴 속이 찌릿해짐을 느꼈다.



쿠쿵!!


"!! 윽..."



강희는 오른손을 가슴에 올리고, 심장을 움켜쥐는 듯한 동작을 취하면서, 고통스러운 듯 인상을 찡그렸다.



애들은 놀라서 강희에게 다가와 그녀의 팔이며 다리를 짚어대면서 물었다.



"언니...왜 그래요?"



"누나!! 괜찮아요?"



강희는, 애써 웃어주면서, 애들에게 괜찮다고 말했다. 그녀는 생각에 잠겼다.



"균열이.....균열이 생기는것 같군...."



2차 경계식의 여파일 가능성이 컸다. 아니면 점점 커져 가는 트라우마때문이거나....가속이 붙는 감정변화의 속도. 살인충동..



온갖 것이 자신의 마음 속을 휘달리고, 근심에 들게 하고 있었다.



강희는, 좀전에, 자신이 그토록 콜라를 마시고 싶어했던 것에 대한 이유를 알수 있었다. 벗어나고 싶은 것이다. 자신은.



모든 괴로움에서, 해방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순간적인 충동으로 그렇게 콜라를 찾았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안주도 없이, 벌컥벌컥 마셔대고 있는 것이다.



강희는, 콜라를 마시는 속도에 가속을 붙이기 시작했고, 애들이 그녀를 걱정하여 말리는데도 아랑곳 않고, 결국, 10캔의 콜라를 깨끗히 비워버렸다.



비틀



강희의 고개가 휘청대자, 성주와 미정, 그리고 애들이 놀라 부축하려 했지만, 강희는 피식 웃어주며 그들의 행동을 물리더니, 갑자기 주머니를 뒤지기 시작했다.



"?"



아이들이 모두, 그녀가 무엇을 꺼내려는 것일까 하고 궁금해 하는 가운데, 그녀가 바지 주머니에서 꺼내든 것은, 은빛을 내뿜는 수갑.



강희는, 정찬에게 시선을 주더니, 그에게 그것을 건네면서, 등을 비스듬히 돌리고, 양 손을 뒤로 모아 깍지를 끼면서 말했다.



"찬아...수갑을....수갑을 채워줘..."



정찬은 인상을 찡그리면서 물었다.



"누나..저...지금..기분도 안 좋아보이는데..굳이 지금..."



그는 강희가 염려되어서 그렇게 말을 떠듬떠듬 이어나갔지만, 강희는 천천히 고개를 도리질치면서 말했다.



"누나가 원하는 거야...마음을... 안정시키고 싶어서 그래...부탁이니까..채워줘"



애들이 몇번 더 말렸지만, 강희는 눈을 감은채 묵묵히 고개를 저을 뿐이었고, 결국 찬은 강희의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찰칵



강희는, 수갑을 찬 후에, 후욱...하고 한숨을 쉰 후 자신의 무릎을 내려다보았다.



"언니..왜 그래요?"



미정이, 불안한 눈길로 연신 강희를 보았지만, 무릎을 보면서 고개를 숙여버린 그녀인지라, 앞머리칼이 흘러내려 눈동자를 가리는 통에, 표정을 볼수가 없었다. 그리고, 언니가 대꾸도 하지 않는 통에, 그녀로선 걱정스럽기 짝이 없었지만, 강희로선, 미정에게 대답을 하기 싫어 그런게 아니라, 너무 깊은 사심에 잠겼기에 미처 질문이 들리지 않은 탓이었다.




강희는 타는 듯이 끓어오르는 염원이 담긴 여러 물음들을, 그리고 여러 생각들을 가슴 속에서 자문했다....



도대체....나의 완벽한 구속자가 있긴 있을까?....진정 있을까.....



어쩌면,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는건 아닐까?...진정안이 정말 나의 완벽한 구속자일까?



그가 가장 이상적인 인물인것인가?... 이 이상을 바라는것 자체가 욕심인건 아닐까?



어쩌면 나는....너무나 높은 것을....너무나 아득한 것을 바라는것은 아닐까....



왜 나는 이렇게 힘이 강하지?....난 평범한 여자애이고 싶었는데....



나도....지금 같이 있는 애들만할 때는...얘들처럼 뛰어놀고 싶었는데....



왜....모든게 복잡하게....풀리지 않을것만 같은 실타래처럼....



얽혀있는걸까.....




놀이터에서 뛰어놀던 아이들의 모습이 순간 떠올랐다. 행복해 보였다. 즐거워 보였다. 포근해 보였다. 모든것이 그렇게 아름다워 보일수가 없었다.



자신은...그때의 자신은....지금 같이 있는 얘들만한 나이때의 자신은....어땠는가.



그걸 생각하니, 그녀의 가슴 속에 파문이 일기 시작했다. 수면 위에 퍼지기 시작한 물길의 파동.



그건 겉잡을수 없이, 넓게 퍼져가고, 온갖 과거의 회상, 그리고 상념. 종내에는 그녀의 트라우마를 자극하기 시작했다.




또도독



검은색의 바지에, 물방울이 떨어졌다. 영롱한, 은빛의 액체를 머금은 그것은, 삽시간에 눈동자에 맺혔고, 순간적으로 자신의 바지에, 무릎 위에 떨어져 내렸다.


눈물을 흘리고 싶어 흘린 것이 아니다. 14살 때 이후로, 제어의 완성을 이룬 후로, 부모님의 임종 외에는 다시는 눈물을 흘리지 않으리라 결심한 자신이니까.


다만...다만, 북받쳤을 뿐이다. 복합적인 문제인 것이다. 삐걱거리고 있는 것이다. 내면이. 심리가.


중 1때, 화장실에서 펑펑 운 그 날 이후로, 절대 울지 않겠다고 단언했건만, 요새 들어, 흔들림이 부쩍 잦아지고 있었다.


여왕과의 두번째 조우에서, 욕탕 내에서 벌어진 일들의 그 순간, 최면에 걸린 한유정의 모습을 보고 너무나 안타까워 눈물을 쏟아내었던 그때!!


그때 깨져버렸다. 파문의 시작, 균열의 태동은 그때부터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때의 상황은, 너무 절망적이었다. 그리고, 막연하게나마, 짐작하고 있었다. 그녀는 감이 좋으니까.


어쩌면...어쩌면 유정이를 구하지 못할지도 모르겠다고...그리고, 또 어쩌면...구하는게 불가능하다고 판단해서 자포자기하는 상황이 올지도 모르겠다고..


그런 예감을 당시에 받았었다. 그 여러가지 만감이 순간적으로 교차했었기에, 터져나왔던 눈물이다.


실제로, 자신은 포기했었지 않은가. 2차 경계식을 발동한 것이 그 증거이다. 자아의 이성이 맹렬히 비난했었던 점을 되새겨보면, 그만큼 자기 자신에게 실망하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자아의 이성은 강희의 내면인격의 일부에 해당하는 존재임이 틀림없으니까.



한유정을 포기하고, 경계식에 들다니, 얼마나 한심스러운 일인가. 도망쳤다는 말밖에 안될뿐, 그 어떠한 변명도 통하지 않는다.



물론, 약간의 확신이 있었다. 강희가 보기에, 여왕은, 그렇게 쉽사리, 여자들을 죽일수 있는 타입의 여인은 아닌듯했다. 어쨌거나 그녀는, 엄청난 레즈비언이었으니까. 아름다운 여성 자체에 두드러진 미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한유정보고, 자살하라는 명령을 내리기가 쉽지는 않을거라는게 강희 나름의 판단이었다.



자신을 사로잡기 위해서, 유정을 이용했던 것이고, 자신을 잡은 이상 목적달성은 이룬 판에, 한유정보고 굳이 자살을 하라고 할 이유가 없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행한 일이다. 물론, 거의 도박이었지만.



하지만, 되새겨보면 그 역시 말도 안 되는 소리이다. 강희에 대한 여왕의 집착은 광적일 정도였다. 어쩌면, 한유정이나 여자들보고 진짜 죽으라고 했을 가능성도 농후했던 것이다.



물론, 강희의 짐작은 맞았었다. 여왕은, 강희의 여린 마음을 이용하고자, 최면에 걸린 한유정을 위시한 여자들을 들먹인 것이지, 일체 손댈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강희가 분명 동요할만한 일이기에 그렇게 엄포를 놓았을 뿐.



그래서, 강희가 진짜로 경계식에 들어버린 후에도, 그녀의 심성을 손아귀에 넣을수 없다고 절망한 여왕이, 자포자기에 이르렀을 뿐, 한유정이나 최면에 걸린 여자들에게 어떠한 행위를 가하지 않았던 것이다. 여왕은, 진정 미인을 사랑하는 여자니까.



결국 그 일은, 나름대로는 잘 풀린 것 같지만, 강희에게는 아니었다. 안 그래도, 어두운 내면이 마음속에 가득 차 있지만, 쾌활한 척 하는, 씩씩한 척 하는 그녀일 뿐이다.



외강내유란 말이 이토록 잘 어울리는 여자애도 없다.



한유정을 포기했다는 그때의 일은, 그것대로 커다란 못이 되어 그녀의 가슴속에 틀어박혀버린 것이다.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계단에 앉아 대화를 나눌때도, 눈물을 글썽대었던 게 기억났다. 그만큼 마음이 약해져 있다는 증거이다.



아까의 일도 문득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살인충동. 그것은 점점, 커져가고 있다. 자신을 잠식해가고 있다.



진정안을 만났던 그 날, 이곳에서 자신에게 죽도록 쳐맞은 그 10명의 녀석들.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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