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남자는 아파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깔끔하게 다린 셔츠에 정장 바지.
평소보다 더 차려입은 느낌이다. 정장을 입으셨네요, 하고 말을 건네는 나에게
남자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응답했다.
“중요한 날이니까요.”
남자는 내 손을 잡고 아파트 방향으로 끌어당긴다. 다른 사람들의 눈은 의식하지 않는 듯
자연스럽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버튼을 누른 남자는 내 얼굴을 유심히 본다.
“긴장되나요?”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가 희미하게 웃는다. 조금 드러난 이가 유난히 하얗다.
“오늘은 말이 별로 없군요.”
“.......”
“뭐 괜찮아요. 나는 조용한 암캐가 좋습니다.”
땡,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우리 둘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복도를 거쳐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은 고요했다. 익숙한 가구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남자는 몸을 약간 숙여서, 현관에 멀거니 서 있는 내 귓가에 속삭였다.
“들어가요.”
무엇에 홀린 기분으로 나는 신발을 벗기 시작했다. 멍한 기분이었지만,
남자의 시선만은 선명하게 느껴진다. 남자의 찌르는 듯한 시선을 받으며
나는 거실로 들어섰다.
“앉아요.”
쇼파에 앉은 뒤 남자는 커피를 내왔다. 늘 끓여주던 연한 아메리카노다.
“어디 한번 볼까요? 글.”
나는 옆으로 매는 갈색 크로스백에서 종이뭉치를 꺼냈다. 출력한 상태로
보고 싶다는 남자의 주문 때문에 미리 출력해온 참이다. 집에 프린트기가 없어서
학교 복사실에서 출력해야 했는데, 복사기 앞에 서 있는 애들이 혹시라도 화면이나
출력물을 볼까봐 신경이 잔뜩 곤두서고 땀까지 흘렸다. 내 노력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종이를 넘기고 있다. 한 장, 한 장, 또 한 장.
나는 점점 더 초조해졌다. 하지만 남자는 마지막 한 장까지 넘기고 나서야
비로소 고개를 들었다. 나를 바라보는 눈에 연한 물기가 어려 있다.
“이건...... 실망스럽군요. 이렇게밖에 쓸 수 없었나요?”
“네? 글이 맘에 안 드시나요? 무슨 문제인데요? 문체나 전개가 어색하다든가...”
“쓸 데 없는 소리!”
나는 남자의 고함소리에 놀라 등받이에서 몸을 뗐다. 언제나 침착했던 남자가
이렇게 큰 소리를 지르는 것은 처음 본다.
“당신의 문체나 묘사력은 이미 충분히 분석했어요. 그런 부분에서 문제가 일어날 리가
없다는 확신이 있어서 일을 맡겼던 거예요. 그런데, 결과물은 다른 종류의 문제가 있군요.
아니...... 어쩌면...... 필연적인 건가.......”
남자는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암캐가 회초리 없이 뭘 제대로 할 수 있을 리가 없는데.”
“저기, 영민님, 저는.......”
“조용히!”
나는 입을 다물었다. 남자는 프린트를 추리더니 다시 한 뭉치로 만들어
탁자 가운데로 밀었다.
“나가요. 이거 가지고. 어쨌든, 수고했어요.”
“......전 못 가요.”
내 언성도 어느 새 높아져 있었다.
“이유도 모르고 이렇게 갈 수는 없어요. 분명, 조금만 더 쓰면 완성인데......”
“이유. 이유라... 정말 알고 싶나요?”
“당연하죠!”
남자가 소파에 몸을 묻었다. 피로를 느끼는 것 같기도 하고, 무언가 고민하는 것 같기도 했다.
“......모리씨. 다시 잘 생각해 봐요. 내가 실망한 이유를 들으면, 그에 상응하는
처벌도 받아야 합니다. 내가 주는 벌을 견딜 수 있겠어요?”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가슴 속에서 반항심이 무럭무럭 피어난다.
“무슨 이유인지 말이나 해보세요! 제가 듣고 수긍할 수 있다면, 영민님이
주시는 처벌 달게 받을 테니까.”
“그 말, 후회하지 않겠어요?”
“후회 안 해요!”
나는 고개를 꼿꼿하게 들고 남자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하지만 남자는 별다른 표정이 없다.
무엇을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문득 남자의 입술이 움직인다.
“탁자 위에 엎드려요.”
#14
나는 탁자 위에 상체를 얹고 엎드렸다. 다리는 무릎을 꿇었다. 남자는 출력물을
손에 든 채 서서 그런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남자의 목소리는 나지막하고 서늘했다.
“당신은 거짓말쟁이입니다.”
“......그거야.......소설은 원래.......”
“말 끊지 마세요. 현재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지 못하겠습니까.”
“.......”
남자는 파라락 출력물을 넘기다가 한 곳에서 멈춘다.
“5페이지, 첫번째 플 관전. 자연배설, 스팽. 내가 커피를 준 이야기까지 썼더군요.
그런데 당신 이야기는 왜 쓰지 않았죠?”
“네? 제 이야기라뇨?”
“이 부분.”
남자가 가리킨 손가락은 남자의 암캐가 거실 바닥을 적시며 자연배설을
하는 부분에서 멈추어 있었다.
“화장실에 갔었잖아요.”
“......네? 잘 기억이.......”
“모리씨는 이 날 11분 41초 동안 화장실에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파라락, 출력물이 또 넘어갔다.
“두 번째 플이 있었던 날. 부부섭이 개처럼 짖으며 짝짓기를 했죠.
두 마리의 개가 짖기 시작하자, 모리씨는 화장실로 갔습니다. 이 때가 14분 34초.”
화장실에 간 시간을 재고 있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에 나는 입을
약간 벌린 채 남자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세 번째 플이 있던 날. 암수캐들의 교미와 집단관장이 있었죠.
관장쇼를 보던 모리님은 화장실에 갔습니다. 19분 1초.”
“.......”
“뭘 했습니까?”
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프린트를 나에게 들어 보였다.
“이렇게 오랜 시간동안 화장실에서 도대체 무엇을 했느냐는 말입니다. 그리고,”
남자의 목소리가 가볍게 끊어졌다 이어졌다. 평정심을 유지하기가 어려운 모양이다.
“왜, 그걸 글에 쓰지 않았습니까?”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남자가 그런 부분을 지적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미리 생각해두었던 답변들은 이 질문에 대해선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그건, 그냥, 어차피 저는... 관찰자 신분이니 당시 제 이야기를 쓰는 것보다는
본 이야기를 쓰는 좋다고 생각해서 그런 거예요. 일부러 그런 건.......”
“거짓말!”
남자는 화가 난 것 같았다.
“우리집 화장실에는 CCTV가 있습니다. 감금플을 할 때,
섭을 감시하기 위해서 달아 놨습니다. 거기에서 당신의 모습을 봤습니다.
자. 그래도 화장실에서 뭘 했는지 말씀 안하실 겁니까?”
나는 기절초풍을 했다.
“혹시 녹화가 된 건 아니지요?”
“글쎄. 당신의 대답에 따라서 달라질 겁니다.”
남자가 말에 눈앞이 뿌예진다. 내가 화장실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실시간으로
보고 있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 그걸 녹화하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그 영상이 유출된다면, 아니 거기까지 걱정할 필요도 없이 이 집의 주인이
그걸 보고 있었다는 것만 생각해도 수치스러워 견딜수가 없다.
남자가 다시 말한다.
“솔직하게 다 털어놓으세요. 모리씨.”
남자는 아파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깔끔하게 다린 셔츠에 정장 바지.
평소보다 더 차려입은 느낌이다. 정장을 입으셨네요, 하고 말을 건네는 나에게
남자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응답했다.
“중요한 날이니까요.”
남자는 내 손을 잡고 아파트 방향으로 끌어당긴다. 다른 사람들의 눈은 의식하지 않는 듯
자연스럽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버튼을 누른 남자는 내 얼굴을 유심히 본다.
“긴장되나요?”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가 희미하게 웃는다. 조금 드러난 이가 유난히 하얗다.
“오늘은 말이 별로 없군요.”
“.......”
“뭐 괜찮아요. 나는 조용한 암캐가 좋습니다.”
땡,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우리 둘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복도를 거쳐
집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은 고요했다. 익숙한 가구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남자는 몸을 약간 숙여서, 현관에 멀거니 서 있는 내 귓가에 속삭였다.
“들어가요.”
무엇에 홀린 기분으로 나는 신발을 벗기 시작했다. 멍한 기분이었지만,
남자의 시선만은 선명하게 느껴진다. 남자의 찌르는 듯한 시선을 받으며
나는 거실로 들어섰다.
“앉아요.”
쇼파에 앉은 뒤 남자는 커피를 내왔다. 늘 끓여주던 연한 아메리카노다.
“어디 한번 볼까요? 글.”
나는 옆으로 매는 갈색 크로스백에서 종이뭉치를 꺼냈다. 출력한 상태로
보고 싶다는 남자의 주문 때문에 미리 출력해온 참이다. 집에 프린트기가 없어서
학교 복사실에서 출력해야 했는데, 복사기 앞에 서 있는 애들이 혹시라도 화면이나
출력물을 볼까봐 신경이 잔뜩 곤두서고 땀까지 흘렸다. 내 노력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종이를 넘기고 있다. 한 장, 한 장, 또 한 장.
나는 점점 더 초조해졌다. 하지만 남자는 마지막 한 장까지 넘기고 나서야
비로소 고개를 들었다. 나를 바라보는 눈에 연한 물기가 어려 있다.
“이건...... 실망스럽군요. 이렇게밖에 쓸 수 없었나요?”
“네? 글이 맘에 안 드시나요? 무슨 문제인데요? 문체나 전개가 어색하다든가...”
“쓸 데 없는 소리!”
나는 남자의 고함소리에 놀라 등받이에서 몸을 뗐다. 언제나 침착했던 남자가
이렇게 큰 소리를 지르는 것은 처음 본다.
“당신의 문체나 묘사력은 이미 충분히 분석했어요. 그런 부분에서 문제가 일어날 리가
없다는 확신이 있어서 일을 맡겼던 거예요. 그런데, 결과물은 다른 종류의 문제가 있군요.
아니...... 어쩌면...... 필연적인 건가.......”
남자는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암캐가 회초리 없이 뭘 제대로 할 수 있을 리가 없는데.”
“저기, 영민님, 저는.......”
“조용히!”
나는 입을 다물었다. 남자는 프린트를 추리더니 다시 한 뭉치로 만들어
탁자 가운데로 밀었다.
“나가요. 이거 가지고. 어쨌든, 수고했어요.”
“......전 못 가요.”
내 언성도 어느 새 높아져 있었다.
“이유도 모르고 이렇게 갈 수는 없어요. 분명, 조금만 더 쓰면 완성인데......”
“이유. 이유라... 정말 알고 싶나요?”
“당연하죠!”
남자가 소파에 몸을 묻었다. 피로를 느끼는 것 같기도 하고, 무언가 고민하는 것 같기도 했다.
“......모리씨. 다시 잘 생각해 봐요. 내가 실망한 이유를 들으면, 그에 상응하는
처벌도 받아야 합니다. 내가 주는 벌을 견딜 수 있겠어요?”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가슴 속에서 반항심이 무럭무럭 피어난다.
“무슨 이유인지 말이나 해보세요! 제가 듣고 수긍할 수 있다면, 영민님이
주시는 처벌 달게 받을 테니까.”
“그 말, 후회하지 않겠어요?”
“후회 안 해요!”
나는 고개를 꼿꼿하게 들고 남자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하지만 남자는 별다른 표정이 없다.
무엇을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문득 남자의 입술이 움직인다.
“탁자 위에 엎드려요.”
#14
나는 탁자 위에 상체를 얹고 엎드렸다. 다리는 무릎을 꿇었다. 남자는 출력물을
손에 든 채 서서 그런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남자의 목소리는 나지막하고 서늘했다.
“당신은 거짓말쟁이입니다.”
“......그거야.......소설은 원래.......”
“말 끊지 마세요. 현재 자신의 위치를 자각하지 못하겠습니까.”
“.......”
남자는 파라락 출력물을 넘기다가 한 곳에서 멈춘다.
“5페이지, 첫번째 플 관전. 자연배설, 스팽. 내가 커피를 준 이야기까지 썼더군요.
그런데 당신 이야기는 왜 쓰지 않았죠?”
“네? 제 이야기라뇨?”
“이 부분.”
남자가 가리킨 손가락은 남자의 암캐가 거실 바닥을 적시며 자연배설을
하는 부분에서 멈추어 있었다.
“화장실에 갔었잖아요.”
“......네? 잘 기억이.......”
“모리씨는 이 날 11분 41초 동안 화장실에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파라락, 출력물이 또 넘어갔다.
“두 번째 플이 있었던 날. 부부섭이 개처럼 짖으며 짝짓기를 했죠.
두 마리의 개가 짖기 시작하자, 모리씨는 화장실로 갔습니다. 이 때가 14분 34초.”
화장실에 간 시간을 재고 있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기에 나는 입을
약간 벌린 채 남자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세 번째 플이 있던 날. 암수캐들의 교미와 집단관장이 있었죠.
관장쇼를 보던 모리님은 화장실에 갔습니다. 19분 1초.”
“.......”
“뭘 했습니까?”
남자는 무표정한 얼굴로 프린트를 나에게 들어 보였다.
“이렇게 오랜 시간동안 화장실에서 도대체 무엇을 했느냐는 말입니다. 그리고,”
남자의 목소리가 가볍게 끊어졌다 이어졌다. 평정심을 유지하기가 어려운 모양이다.
“왜, 그걸 글에 쓰지 않았습니까?”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남자가 그런 부분을 지적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미리 생각해두었던 답변들은 이 질문에 대해선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그건, 그냥, 어차피 저는... 관찰자 신분이니 당시 제 이야기를 쓰는 것보다는
본 이야기를 쓰는 좋다고 생각해서 그런 거예요. 일부러 그런 건.......”
“거짓말!”
남자는 화가 난 것 같았다.
“우리집 화장실에는 CCTV가 있습니다. 감금플을 할 때,
섭을 감시하기 위해서 달아 놨습니다. 거기에서 당신의 모습을 봤습니다.
자. 그래도 화장실에서 뭘 했는지 말씀 안하실 겁니까?”
나는 기절초풍을 했다.
“혹시 녹화가 된 건 아니지요?”
“글쎄. 당신의 대답에 따라서 달라질 겁니다.”
남자가 말에 눈앞이 뿌예진다. 내가 화장실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실시간으로
보고 있었을 뿐 아니라, 심지어 그걸 녹화하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그 영상이 유출된다면, 아니 거기까지 걱정할 필요도 없이 이 집의 주인이
그걸 보고 있었다는 것만 생각해도 수치스러워 견딜수가 없다.
남자가 다시 말한다.
“솔직하게 다 털어놓으세요. 모리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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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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