쥬리안트 제국은 3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나라다. 제국 건립 당시에 나는 긴 잠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그 건국은 실로 장대하여, 수행하는 전쟁마다 승리요, 제국으로의 격상을 선언했을 때도 감히 반대하는 나라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니만큼 200년쯤 전에 내가 수면에서 깨어나 첫 유희를 나왔을 때도 제도(제국의 수도)의 위상은 실로 대단했다. 어느 정도였는지를 말하자면 인간의 걸음으로는 한쪽 끝에서 반대쪽 끝까지 가는 데 한나절이나 걸렸다. 아무리 제도라고는 하지만 일개 도시로는 엄청난 규모가 아닐 수 없다.
"가만, 이 근처였던가?"
그런 도시가 200년이나 지나 오늘에 이른 것이다. 당연하다면 당연할 수 있겠지만, 완벽한 기억력을 지닌 나라고 해도 200년이나 전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을 대조하며 길을 찾는다는 것은 역시 무리였다.
찾는 거야 별거 아니다. 조그만 의상실이다. 솜씨에 비해 별로 대우받지 못하던 재봉사가 운영하고 있었는데, 내 옷을 지으라고 선수금을 좀 두둑히 주긴 했었다. 결국 옷을 찾지는 못하고 오늘에 이르긴 했지만...
"아... 저기..."
누군가 나를 부르기에 옆을 돌아봤다. 갈색 머리가 인상적인, 꽤나 예쁘장하게 생긴 소녀였다. 이 소녀 주위에는 꽤나 많은 여자들이 몰려 있었다. 지금까지 별로 인식하고 있지는 않았는데, 주변에 보이는 인간들 중에 남자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도 반수 이상은 나를 지켜보고 있었고.
"부르셨습니까, 레이디?"
나는 최대한 정중하게 말했다. 지금이야 내가 드래곤이라는 것을 드러내서 좋을 리 없으니 아주 인간다운 모습을 보여야 했다.
그러나 내 말을 들은 소녀는 얼굴을 붉히며 말을 심하게 더듬었다.
"저, 그게... 저기... 어디... 차, 찾고 계세요?"
일순간 주위 인간들의 분위기가 변했다. 내게 향해 있던 시선이 소녀에게로 돌아가며 싸늘한 눈초리로 바뀌어 버렸다. 이것... 좀전의 시녀들이 보였던 반응과 비슷한 것이 아닌가 생각도 해보지만... 글쎄, 어쨌든 내게는 좋은 일 아닌가.
"의상실을 찾고 있습니다. 율린츠라는 사람이 운영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소녀는 주변 시선 때문에 움츠러 들어 있다가 금세 화색이 돌아 대답했다.
"아, 알고 있어요!"
소녀는 큰 소리로 대답했다가 다시 얼굴을 붉혔다. 반응 참 신선한 아가씬데...
"안내해 주시겠습니까? 레이디..."
"샤이아 율린츠에요."
아? 율린츠? 그쪽 집안 딸인가?
"레이디 율린츠였군요."
"네. 안내해 드릴게요."
소녀는 웃음 가득한 얼굴이 되어 기세등등하게 사람들을 헤치고 걸어갔다. 주변 인간들의 시선이 묘한 것으로 바뀌었는데, 저 소녀가 당당해진 것과 연관이 있어 보였다. 안타까워 하면서도 노기를 띈, 굉장히 기묘한 표정들이었다.
소녀는 거침없이 죽죽 걸어갔다. 큰 길만 따라서 갔는데, 구획의 안쪽으로 굽이굽이 들어가야 했던 예전 기억과는 사뭇 다른 장소였다. 하긴 200년이나 지났으니 확장한다거나 옮기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것이려니...
"저기에요."
소녀의 손가락 너머에 있는 것은 꽤 큰 건물이었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것이, 비싼 유리를 왕창 붙여놓은 휘황찬란한 모습이었다. 유리 너머로 옷이 보이고 있었는데, 그 옷이라는 것들이 하나같이 화려하고 멋들어진 것들 뿐이라 지나다니는 인간들 모두 한번씩은 돌아보고 있었다.
"저게... 의상실입니까?"
"네!"
소녀의 대답은 크고 시원시원했다. 자랑스러워하는 것이겠지, 자신의 가계(家系)가 운영하는 것일 테니 말이다. 그리고 자랑스러워 할 만도 했다. 옷은 물론이고 건물까지도 굉장히 멋스러웠으니까. 저 정도가 되려면 돈이 얼마나 들어간 것일까.
"들어오세요."
나는 소녀를 뒤따라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두꺼운 나무를 철판으로 띠를 둘러 마감한 튼튼한 문을 통과하자, 향긋한 꽃내음와 함께 휘황찬란한 옷들이 시선에 들어왔다. 저 정도의 옷, 평민들을 상대로 파는 것은 설마 아니겠지.
"엄마, 손님 모셔왔어요."
"잘 했다, 샤이아."
대답을 한 사람은 역시 화사한 드레스를 입고 있는 여자였는데, 소녀의 모친으로 여겨질 정도로 나이들어 보이지는 않았다. 화장 덕분이려니 생각하고 있지만, 그 이상으로 품위 있고 차분한 분위기도 한몫 하고 있었다. 역시나 이 의상실이 평민을 상대로 장사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반증하는 모습이다.
"어떻게 찾아오셨나요?"
여자가 물었다. 이 상황에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잠시 망설였다. 200년이나 전에 맡긴 물건을 찾으러 왔다고 말하기에는 인간의 모습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대사다. 차라리 엘프의 모습으로 찾아왔다면 어색하지나 않을 텐데.
그러나 나는 여차하면 정체를 드러낼 요량으로 당당히 말했다.
"전에 옷을 주문하여 찾으러 왔습니다."
"어머나... 여기 오셨던 분이라면 제가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는데... 혹시 주문증은 가지고 계세요?"
주문증? 역시 규모가 커지면 그런 것도 필요해지나? 그러나 옛날 그 작은 의상실이었을 때 주문증 따위를 준 적은 없었다.
"주문증은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떤 옷인지는 확실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주문증을 받지 않다니, 일에 착오가 있었던 모양이네요. 어떤 옷이죠?"
나는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 주문했던 옷은 지극히 내 취향으로, 화이트를 주로 하여 은색 장식을 넣은 것이었다. 흰색이라 해도 색감에 따라 미묘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그 약간의 차이로 멋을 낸, 격식있는 제복 형식의 옷이었다. 내 주문대로 지어졌다면 미백색과 유백색이 어우러지고 회백색과 순백색으로 포인트를 주어 멋을 낸, 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흰색 일변도의 별스러운 옷이 되어 있을 것이다.
"여러 백색을 사용하고 은색 실과 단추로 장식한 옷입니다. 왼쪽 가슴에 "L"이 새겨져 있을 겁니다. 제 주문대로 만들어진 것이 맞다면 말입니다."
여자는 한참이나 생각했다. 한참도 보통 한참이 아니었다. 이리저리 기웃거리고 뒤적거리고 혀를 차기도 하면서, 정말 오랫동안이나 가게를 살폈다. 그리고는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그런 옷은 없네요. 주문받았다는 기록도 없어요. 혹시 다른 곳에 주문한 것이 아닌가요?"
그럴 리 없다. 내가 기껏해야 인간의 이름 하나 정도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은 드래곤의 기억력에 대한 모욕이다. 다만 주문한 게 최근이 아니었을 뿐이지.
"어, 엄마..."
소녀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여자를 불렀다. 여자가 의아한 눈으로 딸을 쳐다보자, 소녀는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그 옷... 있어..."
"있다니..."
여자는 믿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소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고개를 몇번인가 젓는 것으로 봐서는 스스로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있잖아... 그... 가보(家寶)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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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이아 율린츠라는 소녀의 아버지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뛰쳐나왔다. 그리고는 나를 주욱 훑어봤는데, 내 외모를 찬찬히 뜯어보는 시선이 심하게 노골적이라 분노까지 치밀었다.
"일단 외모는 선조님의 기록과 일치합니다만... 그 옷은 200년도 더 전에 주문된 것입니다. 주문자 본인일 리가 없지 않습니까?"
재봉사 율린츠가 물었다. 지금 내 겉모습은 인간이니 당연한 물음이다. 그러나 당연히 나올 질문에 대비조차 하지 않고 왔겠는가.
"본인이오. 하프 엘프라 오래 살아있는 것일 뿐이라오. 그러나 엘프의 형질이 두드러지지 않아 외견상 인간과 다르지 않소."
"그걸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아무 엘프나 데려다가 확인시키면 될 일이오. 그보다 옷이나 보여주시오."
율린츠는 나름대로는 납득한 것도 같았다. 하지만 의심을 버리지 못했는지 다시 물었다.
"주문자라는 증거가 있으십니까? 증거를 보이지 않으면 믿을 수 없습니다."
주문자 본인이 왔는데도 내어 줄 수 없다는 말에는 차마 온화한 표정으로 대꾸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증거라니, 내 자신이 바로 증거인데 뭐가 더 필요하단 말인가. 증거라는 것을 미리 약속한 것도 아니고.
"어떻게 하면 증명이 되겠소?"
내 물음에 재봉사 율린츠는 한참이나 생각했다. 그로서도 별 수 없으리라. 본인인지의 증명을 대체 어떻게 할 수 있다고.
"이 머리칼... 염색 아닙니까?"
염색이라니! 이렇게나 찬란한 은발이 염색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나! 염료에 대한 기초 지식마저 없는 무지한 재봉사 같으니!
"모욕이오! 염색일 리 있소!"
내 큰 소리에 율린츠 부부가 잠시 움찔거렸다. 그러나 회복도 무척이나 빨라, 곧 흠흠거리며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아무래도 이런 일을 많이 겪은 모양이다.
"그러시면 혹시 증표같은 것은 없습니까?"
"주문증을 받은 적이 없는데 뭐가 있겠소."
율린츠 부부는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도무지 내가 주문자라는 것을 밝힐 만한 방법 따위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내가 생각해도 없는 것이 당연한데, 그들이라고 별 수 있으랴.
"사실..."
율린츠가 슬쩍 운을 띄웠다.
"그 옷은 저희 가보입니다. 비록 주인을 찾아가지는 못했지만, 그 옷이 알려지며 율린츠 가문은 큰 명성을 얻게 되었지요. 그 옷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부유한 율린츠 가문은 존재치 않았을 겁니다."
말을 빙빙 돌리고 있다. 그러나 내가 관심이 있는 것은 그런 너절한 이야기가 아니다. 가문의 역사가 어찌됐든 대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설마하니 훌륭한 옷을 주문해준 은혜라도 갚겠다는 건가?
"그 옷을 팔았다면 지금보다 더 큰 부자가 되어 있을 테지요. 그러나 선조께서는 주인이 아닌 자의 손에 옷을 넘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200년이나 지난 지금도 저희는 옷을 지키고 있습니다. 지금에 와서는 주인을 기다린다기 보다는 가문의 상징 정도로 두고 있습니다만..."
요점이 대체 뭐냔 말이다. 주인이 죽었을 게 뻔한데 내가 와서 주문자요 하고 있으니 거짓말이 뻔하다는 건가? 아니면 가문의 상징을 내줄 수는 없다고 말하는 건가? 주겠다는 거냐, 말겠다는 것이냐.
"지금까지 옷의 주인이라고 나타난 사람은 적게 잡아도 천을 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쉽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다시 말하지만, 내가 그 주문자요. 그 옷이 가문의 상징이 되어 있든 뭐가 됐든 나는 전혀 신경쓸 바가 아니오. 어서 옷이나 내주시오. 대금은 선수금으로 이미 지불하지 않았소."
"그것을 어떻게..."
율린츠가 크게 놀랐다. 어떻게라니, 대체 무엇에 놀랐기에? 선수금 지불인가?
"어떻게라니, 무슨 말이오?"
"선수금 지불 말입니다. 그것을 알고 계시다니... 그렇다면 얼마를 지불하셨는지도 기억하십니까?"
잠시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분명히 주긴 줬다. 그러나 "얼마"라고 딱 잡아서 따질 수는 없었다. 선수금이라고 말은 했지만, 그것이 돈은 아니었으니까.
"얼마를 줬는지는 그것을 처분한 사람이 알겠지. 정확한 액수까지는 모르오."
"처분하다니,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보석이오. 작은 주머니로 한가득 줬으니, 이 건물 정도는 살 만큼 나왔을 거요."
재봉사 율린츠가 벌떡 일어났다. 그의 몸이 부르르 떨리는 것으로 봐서는 상당히 충격을 받은 듯 싶다. 그러나 그가 충격을 받았든 아니든, 중요한 것은 내 주장이 제대로 먹혔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렇지, 지금까지 나타난 거짓 주인이라는 인간들은 당사자가 아니면 알 수 없을 만한 것까지 알아내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어떤 보석이었는지 기억하십니까?"
"당연하오. 드워프들이 정교하게 커팅한 사파이어와 루비였소. 서로 긁히는 것을 막기 위해 다른 보석은 아예 담지도 않았소."
라고는 해봤자, 박박 긁어모아 자루 하나에 우겨넣는 것 자체가 보석을 망치는 행위지만 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보석에 흠집이 간다고 해도 가격이 꽤 나가는 것만은 옳기 때문에, 유희를 다녔을 당시에는 보석을 많이 챙겨 다니긴 했다. 부족하면 더 얻어내면 되는 것이라 별로 가치있게 여기지 않기도 했고.
나는 이렇게 별것 아니게 말했지만, 재봉사 율린츠는 고개를 푹 숙이며 한숨을 쉬었다.
"주문자 본인이 맞으시군요. 설마하니 선조님의 기록을 훔쳐봤을 리는 없으니..."
역시 기록을 남겨놨는가. 어쨌든 잘 되었다. 인간들이 그토록 탐낸 옷이라니 멋지게 지어졌겠지. 그것을 200년이나 지난 지금에 와서야 되찾는 것이다.
"따라오십시오. 옷을 내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한숨을 쉰다. 굉장히 아쉬워하는 기색이 역력한 한숨 말이다. 하기사 옷의 본래 주인인 나야 상관할 바 아니긴 하지만, 율린츠 가문의 입장에서는 가보가 사라지는 중대한 문제일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선조의 유지를 이루는 일이라면 좀 기뻐해도 좋은 일이지 않은가? 인간들의 탐욕이라는 것에는 아직 이해하기 어려운 구석이 남은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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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만큼 200년쯤 전에 내가 수면에서 깨어나 첫 유희를 나왔을 때도 제도(제국의 수도)의 위상은 실로 대단했다. 어느 정도였는지를 말하자면 인간의 걸음으로는 한쪽 끝에서 반대쪽 끝까지 가는 데 한나절이나 걸렸다. 아무리 제도라고는 하지만 일개 도시로는 엄청난 규모가 아닐 수 없다.
"가만, 이 근처였던가?"
그런 도시가 200년이나 지나 오늘에 이른 것이다. 당연하다면 당연할 수 있겠지만, 완벽한 기억력을 지닌 나라고 해도 200년이나 전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을 대조하며 길을 찾는다는 것은 역시 무리였다.
찾는 거야 별거 아니다. 조그만 의상실이다. 솜씨에 비해 별로 대우받지 못하던 재봉사가 운영하고 있었는데, 내 옷을 지으라고 선수금을 좀 두둑히 주긴 했었다. 결국 옷을 찾지는 못하고 오늘에 이르긴 했지만...
"아... 저기..."
누군가 나를 부르기에 옆을 돌아봤다. 갈색 머리가 인상적인, 꽤나 예쁘장하게 생긴 소녀였다. 이 소녀 주위에는 꽤나 많은 여자들이 몰려 있었다. 지금까지 별로 인식하고 있지는 않았는데, 주변에 보이는 인간들 중에 남자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도 반수 이상은 나를 지켜보고 있었고.
"부르셨습니까, 레이디?"
나는 최대한 정중하게 말했다. 지금이야 내가 드래곤이라는 것을 드러내서 좋을 리 없으니 아주 인간다운 모습을 보여야 했다.
그러나 내 말을 들은 소녀는 얼굴을 붉히며 말을 심하게 더듬었다.
"저, 그게... 저기... 어디... 차, 찾고 계세요?"
일순간 주위 인간들의 분위기가 변했다. 내게 향해 있던 시선이 소녀에게로 돌아가며 싸늘한 눈초리로 바뀌어 버렸다. 이것... 좀전의 시녀들이 보였던 반응과 비슷한 것이 아닌가 생각도 해보지만... 글쎄, 어쨌든 내게는 좋은 일 아닌가.
"의상실을 찾고 있습니다. 율린츠라는 사람이 운영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만..."
소녀는 주변 시선 때문에 움츠러 들어 있다가 금세 화색이 돌아 대답했다.
"아, 알고 있어요!"
소녀는 큰 소리로 대답했다가 다시 얼굴을 붉혔다. 반응 참 신선한 아가씬데...
"안내해 주시겠습니까? 레이디..."
"샤이아 율린츠에요."
아? 율린츠? 그쪽 집안 딸인가?
"레이디 율린츠였군요."
"네. 안내해 드릴게요."
소녀는 웃음 가득한 얼굴이 되어 기세등등하게 사람들을 헤치고 걸어갔다. 주변 인간들의 시선이 묘한 것으로 바뀌었는데, 저 소녀가 당당해진 것과 연관이 있어 보였다. 안타까워 하면서도 노기를 띈, 굉장히 기묘한 표정들이었다.
소녀는 거침없이 죽죽 걸어갔다. 큰 길만 따라서 갔는데, 구획의 안쪽으로 굽이굽이 들어가야 했던 예전 기억과는 사뭇 다른 장소였다. 하긴 200년이나 지났으니 확장한다거나 옮기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것이려니...
"저기에요."
소녀의 손가락 너머에 있는 것은 꽤 큰 건물이었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것이, 비싼 유리를 왕창 붙여놓은 휘황찬란한 모습이었다. 유리 너머로 옷이 보이고 있었는데, 그 옷이라는 것들이 하나같이 화려하고 멋들어진 것들 뿐이라 지나다니는 인간들 모두 한번씩은 돌아보고 있었다.
"저게... 의상실입니까?"
"네!"
소녀의 대답은 크고 시원시원했다. 자랑스러워하는 것이겠지, 자신의 가계(家系)가 운영하는 것일 테니 말이다. 그리고 자랑스러워 할 만도 했다. 옷은 물론이고 건물까지도 굉장히 멋스러웠으니까. 저 정도가 되려면 돈이 얼마나 들어간 것일까.
"들어오세요."
나는 소녀를 뒤따라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두꺼운 나무를 철판으로 띠를 둘러 마감한 튼튼한 문을 통과하자, 향긋한 꽃내음와 함께 휘황찬란한 옷들이 시선에 들어왔다. 저 정도의 옷, 평민들을 상대로 파는 것은 설마 아니겠지.
"엄마, 손님 모셔왔어요."
"잘 했다, 샤이아."
대답을 한 사람은 역시 화사한 드레스를 입고 있는 여자였는데, 소녀의 모친으로 여겨질 정도로 나이들어 보이지는 않았다. 화장 덕분이려니 생각하고 있지만, 그 이상으로 품위 있고 차분한 분위기도 한몫 하고 있었다. 역시나 이 의상실이 평민을 상대로 장사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반증하는 모습이다.
"어떻게 찾아오셨나요?"
여자가 물었다. 이 상황에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잠시 망설였다. 200년이나 전에 맡긴 물건을 찾으러 왔다고 말하기에는 인간의 모습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대사다. 차라리 엘프의 모습으로 찾아왔다면 어색하지나 않을 텐데.
그러나 나는 여차하면 정체를 드러낼 요량으로 당당히 말했다.
"전에 옷을 주문하여 찾으러 왔습니다."
"어머나... 여기 오셨던 분이라면 제가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는데... 혹시 주문증은 가지고 계세요?"
주문증? 역시 규모가 커지면 그런 것도 필요해지나? 그러나 옛날 그 작은 의상실이었을 때 주문증 따위를 준 적은 없었다.
"주문증은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떤 옷인지는 확실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주문증을 받지 않다니, 일에 착오가 있었던 모양이네요. 어떤 옷이죠?"
나는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 주문했던 옷은 지극히 내 취향으로, 화이트를 주로 하여 은색 장식을 넣은 것이었다. 흰색이라 해도 색감에 따라 미묘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그 약간의 차이로 멋을 낸, 격식있는 제복 형식의 옷이었다. 내 주문대로 지어졌다면 미백색과 유백색이 어우러지고 회백색과 순백색으로 포인트를 주어 멋을 낸, 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흰색 일변도의 별스러운 옷이 되어 있을 것이다.
"여러 백색을 사용하고 은색 실과 단추로 장식한 옷입니다. 왼쪽 가슴에 "L"이 새겨져 있을 겁니다. 제 주문대로 만들어진 것이 맞다면 말입니다."
여자는 한참이나 생각했다. 한참도 보통 한참이 아니었다. 이리저리 기웃거리고 뒤적거리고 혀를 차기도 하면서, 정말 오랫동안이나 가게를 살폈다. 그리고는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그런 옷은 없네요. 주문받았다는 기록도 없어요. 혹시 다른 곳에 주문한 것이 아닌가요?"
그럴 리 없다. 내가 기껏해야 인간의 이름 하나 정도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은 드래곤의 기억력에 대한 모욕이다. 다만 주문한 게 최근이 아니었을 뿐이지.
"어, 엄마..."
소녀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여자를 불렀다. 여자가 의아한 눈으로 딸을 쳐다보자, 소녀는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그 옷... 있어..."
"있다니..."
여자는 믿지 못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소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고개를 몇번인가 젓는 것으로 봐서는 스스로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있잖아... 그... 가보(家寶)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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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이아 율린츠라는 소녀의 아버지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뛰쳐나왔다. 그리고는 나를 주욱 훑어봤는데, 내 외모를 찬찬히 뜯어보는 시선이 심하게 노골적이라 분노까지 치밀었다.
"일단 외모는 선조님의 기록과 일치합니다만... 그 옷은 200년도 더 전에 주문된 것입니다. 주문자 본인일 리가 없지 않습니까?"
재봉사 율린츠가 물었다. 지금 내 겉모습은 인간이니 당연한 물음이다. 그러나 당연히 나올 질문에 대비조차 하지 않고 왔겠는가.
"본인이오. 하프 엘프라 오래 살아있는 것일 뿐이라오. 그러나 엘프의 형질이 두드러지지 않아 외견상 인간과 다르지 않소."
"그걸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아무 엘프나 데려다가 확인시키면 될 일이오. 그보다 옷이나 보여주시오."
율린츠는 나름대로는 납득한 것도 같았다. 하지만 의심을 버리지 못했는지 다시 물었다.
"주문자라는 증거가 있으십니까? 증거를 보이지 않으면 믿을 수 없습니다."
주문자 본인이 왔는데도 내어 줄 수 없다는 말에는 차마 온화한 표정으로 대꾸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증거라니, 내 자신이 바로 증거인데 뭐가 더 필요하단 말인가. 증거라는 것을 미리 약속한 것도 아니고.
"어떻게 하면 증명이 되겠소?"
내 물음에 재봉사 율린츠는 한참이나 생각했다. 그로서도 별 수 없으리라. 본인인지의 증명을 대체 어떻게 할 수 있다고.
"이 머리칼... 염색 아닙니까?"
염색이라니! 이렇게나 찬란한 은발이 염색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나! 염료에 대한 기초 지식마저 없는 무지한 재봉사 같으니!
"모욕이오! 염색일 리 있소!"
내 큰 소리에 율린츠 부부가 잠시 움찔거렸다. 그러나 회복도 무척이나 빨라, 곧 흠흠거리며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아무래도 이런 일을 많이 겪은 모양이다.
"그러시면 혹시 증표같은 것은 없습니까?"
"주문증을 받은 적이 없는데 뭐가 있겠소."
율린츠 부부는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도무지 내가 주문자라는 것을 밝힐 만한 방법 따위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내가 생각해도 없는 것이 당연한데, 그들이라고 별 수 있으랴.
"사실..."
율린츠가 슬쩍 운을 띄웠다.
"그 옷은 저희 가보입니다. 비록 주인을 찾아가지는 못했지만, 그 옷이 알려지며 율린츠 가문은 큰 명성을 얻게 되었지요. 그 옷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부유한 율린츠 가문은 존재치 않았을 겁니다."
말을 빙빙 돌리고 있다. 그러나 내가 관심이 있는 것은 그런 너절한 이야기가 아니다. 가문의 역사가 어찌됐든 대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설마하니 훌륭한 옷을 주문해준 은혜라도 갚겠다는 건가?
"그 옷을 팔았다면 지금보다 더 큰 부자가 되어 있을 테지요. 그러나 선조께서는 주인이 아닌 자의 손에 옷을 넘기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200년이나 지난 지금도 저희는 옷을 지키고 있습니다. 지금에 와서는 주인을 기다린다기 보다는 가문의 상징 정도로 두고 있습니다만..."
요점이 대체 뭐냔 말이다. 주인이 죽었을 게 뻔한데 내가 와서 주문자요 하고 있으니 거짓말이 뻔하다는 건가? 아니면 가문의 상징을 내줄 수는 없다고 말하는 건가? 주겠다는 거냐, 말겠다는 것이냐.
"지금까지 옷의 주인이라고 나타난 사람은 적게 잡아도 천을 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쉽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다시 말하지만, 내가 그 주문자요. 그 옷이 가문의 상징이 되어 있든 뭐가 됐든 나는 전혀 신경쓸 바가 아니오. 어서 옷이나 내주시오. 대금은 선수금으로 이미 지불하지 않았소."
"그것을 어떻게..."
율린츠가 크게 놀랐다. 어떻게라니, 대체 무엇에 놀랐기에? 선수금 지불인가?
"어떻게라니, 무슨 말이오?"
"선수금 지불 말입니다. 그것을 알고 계시다니... 그렇다면 얼마를 지불하셨는지도 기억하십니까?"
잠시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분명히 주긴 줬다. 그러나 "얼마"라고 딱 잡아서 따질 수는 없었다. 선수금이라고 말은 했지만, 그것이 돈은 아니었으니까.
"얼마를 줬는지는 그것을 처분한 사람이 알겠지. 정확한 액수까지는 모르오."
"처분하다니,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보석이오. 작은 주머니로 한가득 줬으니, 이 건물 정도는 살 만큼 나왔을 거요."
재봉사 율린츠가 벌떡 일어났다. 그의 몸이 부르르 떨리는 것으로 봐서는 상당히 충격을 받은 듯 싶다. 그러나 그가 충격을 받았든 아니든, 중요한 것은 내 주장이 제대로 먹혔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렇지, 지금까지 나타난 거짓 주인이라는 인간들은 당사자가 아니면 알 수 없을 만한 것까지 알아내지는 못했던 모양이다.
"어떤 보석이었는지 기억하십니까?"
"당연하오. 드워프들이 정교하게 커팅한 사파이어와 루비였소. 서로 긁히는 것을 막기 위해 다른 보석은 아예 담지도 않았소."
라고는 해봤자, 박박 긁어모아 자루 하나에 우겨넣는 것 자체가 보석을 망치는 행위지만 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보석에 흠집이 간다고 해도 가격이 꽤 나가는 것만은 옳기 때문에, 유희를 다녔을 당시에는 보석을 많이 챙겨 다니긴 했다. 부족하면 더 얻어내면 되는 것이라 별로 가치있게 여기지 않기도 했고.
나는 이렇게 별것 아니게 말했지만, 재봉사 율린츠는 고개를 푹 숙이며 한숨을 쉬었다.
"주문자 본인이 맞으시군요. 설마하니 선조님의 기록을 훔쳐봤을 리는 없으니..."
역시 기록을 남겨놨는가. 어쨌든 잘 되었다. 인간들이 그토록 탐낸 옷이라니 멋지게 지어졌겠지. 그것을 200년이나 지난 지금에 와서야 되찾는 것이다.
"따라오십시오. 옷을 내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한숨을 쉰다. 굉장히 아쉬워하는 기색이 역력한 한숨 말이다. 하기사 옷의 본래 주인인 나야 상관할 바 아니긴 하지만, 율린츠 가문의 입장에서는 가보가 사라지는 중대한 문제일 것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선조의 유지를 이루는 일이라면 좀 기뻐해도 좋은 일이지 않은가? 인간들의 탐욕이라는 것에는 아직 이해하기 어려운 구석이 남은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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