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린츠 부부가 나를 안내한 곳은 지하실이었다. 무슨 비밀통로같은 것을 따라서 내려간 지하실은 굉장히 어두웠는데, 율린츠 부인이 짝짝 박수를 치자 천장에 박혀있는 커다란 유리 구체가 빛을 내며 안을 환히 밝혔다.
지하실에는 몇개인가 되는 상자와 인간 크기의 인형에 입혀져 있는 옷이 있었다. 상자야 무엇이 들었는지 관심이 없고, 중요한 것은 저 옷이다. 지하실을 밝히는 백광(白光)을 받아 은은히 빛나는 옷은 내 눈으로 보기에도 굉장히 아름다웠다.
우선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바지였다. 밑단이 조이지 않고 넉넉한 형태로, 평민들이나 입을 법한 통 넓은 바지였다. 양옆의 재봉선 주위를 미백색 옷감을 덧대고 그 둘레를 은사(銀絲)로 마무리했다. 그리고 웃옷도 화려하기는 마찬가진데, 바탕인 순백색에 비해 부드러운 빛이 나는 유백색 깃이 인상적이다. 소매에는 회백색 문양 장식이 있는데, 그 테두리는 역시 은사로 재봉하여 회백색과 순백색을 조화시켰다.
"대단하지 않아요?"
소녀가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이 어린 계집 아이의 눈은 이미 황홀경에 빠져 있었다. 하기사 대단한 옷이긴 하니까.
나는 가까이 가서 옷을 살폈다. 옷 옆에는 스탠드가 하나 세워져 있고, 거기에 뭔가 잔뜩 써 있었다.
"264년, 세젤 율린츠가 망토를 추가하다. 328년, 바인츠 율린츠가 왼쪽 가슴 주머니에 손수건을 추가하다. 367년, 헤디멜 율린츠가 손수건에 은사로 수를 놓다. 402년, 브렐딘 율린츠가 구두를 추가하다..."
그 밑에도 두줄인가 더 있었지만 굳이 읽을 가치는 없을 것 같다. 말하자면 이 옷은 율린츠 가문에게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나타내는 연표라는 것인데, 과연 율린츠 가문의 3명은 감상적인 표정이 되어 있었다.
"아쉽습니다. 저도 언젠가는 여기에 장식이라도 추가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러나 그가 추가할 것은 아마도 없지 않을까. 옷은 뭔가 덧붙일 것을 찾아내기 힘들 정도로 완벽에 가까우니까 말이다.
나는 한참동안이나 옷을 감상한 뒤에 물었다.
"이 옷, 입어봐도 되겠습니까?"
"그러시지요. 위에 탈의실이 있습니다."
재봉사 율린츠는 인형에게서 옷을 벗겨냈다. 망토를 먼저 떼어내고, 구김이 가지 않게끔 조심스럽게 옷을 벗겼다. 옷걸이를 가져오지 않은 탓에 바지와 구두를 들고, 그 아내가 망토를 펼친 채로 들고, 다시 딸이 웃옷의 어깨를 잡은 채로 조심스럽게 계단을 올라갔다.
"와아, 정말 잘 어울려요!"
소녀가 먼저 소리쳤다. 그녀의 눈은 황홀지경으로 반짝였다.
확실히 이 옷은 지금까지 내가 보고 입었던 옷 중에서는 최고다. 심미안으로 따지면 드래곤 못지 않은 인간들이 만든 것이니 어련할까. 지금까지 용케도 지켜왔다 싶을 정도로 대단했다.
겉보기도 그렇지만, 입었을 때의 느낌이 여느 옷과는 전혀 다르다. 내 신체의 치수에 맞춰 지은 것이니 당연할 수도 있겠지만, 정말이지 헐겁거나 꽉 끼는 느낌 없이 나긋나긋하기만 하다. 부드럽고, 관절을 굽히는데도 옷이 뻣뻣하거나 당기는 느낌이 거의 없다. 쥬리안트 제국이 추운 날이 거의 없는 탓인지는 몰라도, 옷은 굉장히 통풍이 잘 되어 시원하고 쾌적했다. 또한 아주 가볍기까지 했다.
"이렇게 보니 이 옷의 주인이라는 느낌이 바로 오는군요. 잘 어울리십니다."
"고맙소. 나 또한 아주 마음에 드오."
나는 옷의 곳곳을 살피며 흡족해했다. 그럴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는 옷이다. 선수금으로 낸 보석이 과한 것이었나 하는 생각이 싹 날아가버릴 정도로.
"정말... 200년이나 전에 만든 된 옷인데 지금도 이렇게 멋지다니..."
소녀는 끝도 없이 감탄하고 있었다. 하긴, 생각해 보니 200년이나 된 옷이다. 지금의 유행과는 전혀 동떨어진, 고풍스럽기 그지없는 옷인 것이다. 나야 잘 모르지만, 유행에 민감한 이들이 이렇게 말한다면... 앞으로도 꽤 즐겨 입을 수 있을 것 같다. 보존마법도 걸려있는 것이, 앞으로 천년 정도는 거뜬하겠지.
"그럼 이 옷은 어떻게 할까요?"
율린츠 부인이 물었다. 저 옷은 내가 지금까지 입고 있던 옷이다. 별 장식 없는 백색 로브인데, 엘프들에게서 얻어낸 것이다. 나야 얻어내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얻어낼 수 있는 것이니... 줄까.
"드리겠소."
"네? 하지만 주신다고는 하셔도..."
"엘프들의 옷이오. 그리 가치 없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되오만."
내 말을 듣자마자 재봉사 율린츠가 옷을 낚아챘다. 그리고는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입만 떡 벌렸다. 한참이나 옷을 쓰다듬고 펼치고 빛에 비춰보이고 하다가 딸과 뭔가를 수군거렸다.
"다른 것은 몰라도, 엘프들의 센스가 어떤지 보여주는 옷입니다. 잘 쓰겠습니다."
아, 저 옷이 또 그런 용도로 쓰이는 건가? 저 히죽히죽대는 웃음은 아무래도 엘프들에 대한 우월감이 아닌가 싶다. 죽 둘러보기에도 이 안에 있는 옷 치고 저 로브보다 수준 낮은 옷은 없어 보였으니까.
옷에서 눈을 돌린 소녀가 나를 보며 다시 웃었다.
"정말 제가 사람은 잘 봤다니까요. 그 외모에 저런 시대착오적인 옷을 입는 건 죄악이에요! 하여튼 엘프들이란. 역시 "옷감은 엘프, 옷은 인간"이란 말이 딱 맞다니까요."
음, 그 정도였나. 겨우 200년 밖에 안 된 옷인데 저런 평이 나올 정도라니, 역시 인간들의 유행 변화는 너무 빠르다. 당시 인간들에게서도 저런 로브 형식의 옷이 유행하고 있었건만.
"어쨌든 잘 받았소. 오늘 저녁에 황태자의 즉위를 기념하는 파티가 있는데, 거기에 입고 나갈 생각이오."
"아! 그 파티에!"
재봉사 율린츠가 크게 놀랐다. 왜 놀라는지도 모르겠지만, 알아야 할 필요도 없다. 더 볼 일이 없어진 나는 몸을 돌려 출입구로 향했다. 가볍게 인사라도 남기고 나가려는데 그가 나를 불렀다.
"아, 잠깐 기다려 주십시오!"
"왜 그러십니까?"
의아한 표정으로 되묻자, 그가 넌지시 물었다.
"이런 말을 하기에는 좀 그렇긴 합니다만, 사실 그 옷의 명성에 뒤지지 않는 옷이 한벌 더 있습니다."
아니, 한벌이 더 있든 말든 대체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내가 귀찮아 하는 표정을 지었는데도 그는 말을 이어나갔다.
"쥬리안트 제국의 초대 황제 폐하의 예복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그 옷이 모레 경매에 출품된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옷에 관심이 많으시면 한번 구경이라도 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됩니다만..."
"그것을 왜 알려주는 것이오?"
"손님에게 잘 어울릴 만한 옷이라서 그렇습니다. 초대 황제 폐하께서도 손님과 같은 은발이었다고 전해지니 말입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나는 별로 관심이 없다. 그것은 내것이 아니니까. 그리고 지금 이 옷만으로도 충분하고. 훌륭한 옷은 훌륭한 재봉사에게 맡기면 만들어지는 것이다. 내 것을 새로 만들면 되는데, 남이 입던 것을 취할 필요 따위는 없지 않나.
"되었소. 나는 이것으로 충분하오. 이만 가보겠소."
나는 아쉬워하는 기색이 역력한 율린츠 일가를 뒤로 하고 밖으로 나갔다. 인간들의 시선이 일순간에 내게 쏠리는 것이 느껴졌지만 신경쓸 일까지는 아니었다. 유유히 걸어 황궁 근처까지 간 나는 인간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안으로 이동했다.
-----------------------------------------------------------------------------
방에 돌아왔을 때는 어느덧 해질녘이었다. 유리창 밖에서 비쳐오는 붉은 빛과 방 안을 비추는 촛불이 어우러지는, 레드 드래곤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다.
시간은 꽤 많이 지났다고 생각했는데, 여자들의 치장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세르네린과 네르세린은 한창 장신구를 고르는 중이었고, 시녀들은 휴린에게로 몰려 이런저런 옷을 대어 보고 있었다. 가장 한가해 보이는 라이아는, 역시나 무척 엘프답게도, 간결하게 화장하고 소박한 드레스를 입은 것으로 준비가 끝나 있었다. 머리에 티아라(Tiara)를 올리기는 했지만, 그것까지는 차마 장신구라 하기에도 곤란한 수준이었다.
"오래도 걸리는구나."
"그럼요. 여자인 걸요."
라이아가 가볍게 대답했다. 그러나 대답을 하면서도 그녀는 매우 놀라고 있었다. 나를 바라본 채로. 그리고 그것은 휴린을 치장하던 시녀들도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굉장한 옷이네요."
"아아. 오래 전에 맡겨두었던 것이다."
나는 팔을 들어올리며 옷을 살폈다. 그러나 노을의 주홍빛 때문인지, 옷의 흰색들의 미묘한 빛깔을 제대로 구분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멋지다는 말이 나오는 것은 장식을 제외하더라도 대단히 맵시있게 만들어진 옷이란 뜻이다.
"잘 어울려요."
"음."
라이아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잘 어울린다니 다행이다. 사실 인간들의 의복 문화는 아직 경험이 많지 않은 내게 있어서는 쉬운 것이 아니니까. 역시 재봉사를 시켜 내게 딱 어울리는 옷을 짓게 만든 것은 잘 한 일이었다.
작업이 멈춘 것도 잠시, 시녀들은 다시금 휴린을 꾸미기 시작했다. 세르네린과 네르세린도 브로치며 헤어핀 따위를 고르기 시작했는데, 양손에 하나씩 들고 비교하던 좀전에 비하면 손을 좌우로 움직이기만 할 뿐, 머뭇머뭇하는 모습이 영 미더웠다.
"내가 나가 있는 편이 좋겠구나."
그녀들이 나를 신경쓰고 있다는 것 정도는 눈치챌 수 있다. 여자들이 치장하고 있는 방에 남자가 있는 것도 좋다고는 할 수 없는 노릇이고. 딱히 갈 곳은 없지만, 여기에 머물러 있는 것은 내가 답답하다.
"같이 갈게요."
치장을 이미 끝낸 라이아가 내 뒤를 따랐다.
딱히 생각나는 곳이 없어 향한 곳은 황궁의 정원이었다. 이곳이 내것이 아니다 보니 자연스레 가 본 곳으로 향했을 뿐이다.
"저... 주인님."
라이아가 나를 불렀다.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였다.
"불렀느냐."
"네. 최근에 들은 소식이 있는데요..."
소식을 말하는 표정은 아니다. 별로 좋은 내용은 아니리라 짐작은 간다만...
"말해 보거라."
"노예 경매라는 것이 있대요."
노예 경매인가. 하지만 노예 경매 따위는 인간들에게는 흔한 것이 아닌가? 노예 제도라는 것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고, 노예가 소유물로 취급되는 이상 매매되는 것도 당연하다. 경매라는 형태야 노예를 조금이라도 비싸게 팔기 위한 방편이라고 생각되지만...
아직 몰랐던 것일까? 하기사 라이아는 지난 200년 동안이나 내게 묶여 있었으니, 실제로 세상을 경험한 것은 30년이나 될까 하는 수준이다. 그 중에 인간 세상을 경험한 것은 거의 없을 것이고.
"인간들은 노예를 사고 판다. 모르느냐?"
"네... 책에서 봐서 알고 있어요. 그런데..."
라이아의 표정이 우울해졌다. 아무래도 "소식"이란 노예 경매라는 것이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한동안이나 뜸을 들이더니, 울음이 약간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거기에서 엘프가 팔린대요."
아아, 그것인가. 하지만 엘프는 노예로 등록될 수 없을 것인데... 정상적인 노예가 아닌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파는 데 무슨 문제가 있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내가 첫 유희를 나왔던 200년쯤 전에도 노예 경매는 있었고, 거기에서도 엘프는 팔리고 있었다. 순혈이 아니라 하프나 쿼터가 대부분이었지만.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알고 계셨어요?"
"알고 있다. 인간들은 엘프도 노예로 부리니까. 자신의 노예를 파는 것은 노예를 부리는 주인의 당연한 권리다. 적어도 인간들의 법으로는."
내가 단정지어 말했지만, 라이아는 노예 이야기를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눈물을 고이며 절박하게 말했다.
"구해주세요."
"싫다."
정작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것이었나. 하지만 들어줄 수 없는 부탁이다. 귀찮은 일 따위는 질색이이란 말이다. 어차피 엘프는 옛날에도 팔리고 있었으니, 지금 팔리는 몇몇을 구한다고 해봤자 바뀌는 일 따위는 없다. 그렇다고 앞으로도 계속 엘프들을 구해준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 아예 노예 제도라는 것을 없애지 않고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물론 나라면 황제를 협박하여 노예 제도를 없애는 것도 가능하긴 하다. 하지만 인간들의 문화에 그렇게까지 깊이 관여할 생각 따윈 없다.
"구해주세요. 주인님은 돈도 많잖아요."
"귀찮다."
"구해주지 않으면 계속 귀찮게 할 거에요."
참 귀엽게도 협박하는구나. 그러나 앞으로도 계속 이 일로 나를 귀찮게 할 생각이라면 충분히 효과적인 협박이다.
나는 라이아의 말을 아예 끊어버릴 생각으로 맞대응했다.
"이 이상 귀찮게 굴면 너를 팔아버리겠다."
"그, 그런..."
물론 정말로 팔아버릴 생각은 없지만 말이다.
라이아는 울음을 꾹 참고 고개를 숙였다. 내가 말이 너무 심했을까. 하지만 정말로 엘프 노예를 구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불가능하단 말이다.
순혈 엘프도 아니고, 하프나 쿼터쯤 되면 태어날 때부터 노예라 풀어주는 것도 불가능하다. 즉, 나더러 엘프 노예를 구해주라는 말은 그들을 구입하여 내 노예로 삼으라는 말과 다르지 않단 얘기다.
그것은 정말... 귀찮기 짝이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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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빨리 올려야 조아라 따라잡을 텐데 말이죠;;;
...라기보단, 거기 연재도 늦어지고 있구마는......
지하실에는 몇개인가 되는 상자와 인간 크기의 인형에 입혀져 있는 옷이 있었다. 상자야 무엇이 들었는지 관심이 없고, 중요한 것은 저 옷이다. 지하실을 밝히는 백광(白光)을 받아 은은히 빛나는 옷은 내 눈으로 보기에도 굉장히 아름다웠다.
우선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바지였다. 밑단이 조이지 않고 넉넉한 형태로, 평민들이나 입을 법한 통 넓은 바지였다. 양옆의 재봉선 주위를 미백색 옷감을 덧대고 그 둘레를 은사(銀絲)로 마무리했다. 그리고 웃옷도 화려하기는 마찬가진데, 바탕인 순백색에 비해 부드러운 빛이 나는 유백색 깃이 인상적이다. 소매에는 회백색 문양 장식이 있는데, 그 테두리는 역시 은사로 재봉하여 회백색과 순백색을 조화시켰다.
"대단하지 않아요?"
소녀가 나를 돌아보며 물었다. 이 어린 계집 아이의 눈은 이미 황홀경에 빠져 있었다. 하기사 대단한 옷이긴 하니까.
나는 가까이 가서 옷을 살폈다. 옷 옆에는 스탠드가 하나 세워져 있고, 거기에 뭔가 잔뜩 써 있었다.
"264년, 세젤 율린츠가 망토를 추가하다. 328년, 바인츠 율린츠가 왼쪽 가슴 주머니에 손수건을 추가하다. 367년, 헤디멜 율린츠가 손수건에 은사로 수를 놓다. 402년, 브렐딘 율린츠가 구두를 추가하다..."
그 밑에도 두줄인가 더 있었지만 굳이 읽을 가치는 없을 것 같다. 말하자면 이 옷은 율린츠 가문에게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나타내는 연표라는 것인데, 과연 율린츠 가문의 3명은 감상적인 표정이 되어 있었다.
"아쉽습니다. 저도 언젠가는 여기에 장식이라도 추가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러나 그가 추가할 것은 아마도 없지 않을까. 옷은 뭔가 덧붙일 것을 찾아내기 힘들 정도로 완벽에 가까우니까 말이다.
나는 한참동안이나 옷을 감상한 뒤에 물었다.
"이 옷, 입어봐도 되겠습니까?"
"그러시지요. 위에 탈의실이 있습니다."
재봉사 율린츠는 인형에게서 옷을 벗겨냈다. 망토를 먼저 떼어내고, 구김이 가지 않게끔 조심스럽게 옷을 벗겼다. 옷걸이를 가져오지 않은 탓에 바지와 구두를 들고, 그 아내가 망토를 펼친 채로 들고, 다시 딸이 웃옷의 어깨를 잡은 채로 조심스럽게 계단을 올라갔다.
"와아, 정말 잘 어울려요!"
소녀가 먼저 소리쳤다. 그녀의 눈은 황홀지경으로 반짝였다.
확실히 이 옷은 지금까지 내가 보고 입었던 옷 중에서는 최고다. 심미안으로 따지면 드래곤 못지 않은 인간들이 만든 것이니 어련할까. 지금까지 용케도 지켜왔다 싶을 정도로 대단했다.
겉보기도 그렇지만, 입었을 때의 느낌이 여느 옷과는 전혀 다르다. 내 신체의 치수에 맞춰 지은 것이니 당연할 수도 있겠지만, 정말이지 헐겁거나 꽉 끼는 느낌 없이 나긋나긋하기만 하다. 부드럽고, 관절을 굽히는데도 옷이 뻣뻣하거나 당기는 느낌이 거의 없다. 쥬리안트 제국이 추운 날이 거의 없는 탓인지는 몰라도, 옷은 굉장히 통풍이 잘 되어 시원하고 쾌적했다. 또한 아주 가볍기까지 했다.
"이렇게 보니 이 옷의 주인이라는 느낌이 바로 오는군요. 잘 어울리십니다."
"고맙소. 나 또한 아주 마음에 드오."
나는 옷의 곳곳을 살피며 흡족해했다. 그럴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는 옷이다. 선수금으로 낸 보석이 과한 것이었나 하는 생각이 싹 날아가버릴 정도로.
"정말... 200년이나 전에 만든 된 옷인데 지금도 이렇게 멋지다니..."
소녀는 끝도 없이 감탄하고 있었다. 하긴, 생각해 보니 200년이나 된 옷이다. 지금의 유행과는 전혀 동떨어진, 고풍스럽기 그지없는 옷인 것이다. 나야 잘 모르지만, 유행에 민감한 이들이 이렇게 말한다면... 앞으로도 꽤 즐겨 입을 수 있을 것 같다. 보존마법도 걸려있는 것이, 앞으로 천년 정도는 거뜬하겠지.
"그럼 이 옷은 어떻게 할까요?"
율린츠 부인이 물었다. 저 옷은 내가 지금까지 입고 있던 옷이다. 별 장식 없는 백색 로브인데, 엘프들에게서 얻어낸 것이다. 나야 얻어내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얻어낼 수 있는 것이니... 줄까.
"드리겠소."
"네? 하지만 주신다고는 하셔도..."
"엘프들의 옷이오. 그리 가치 없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되오만."
내 말을 듣자마자 재봉사 율린츠가 옷을 낚아챘다. 그리고는 아무런 말도 못하고 입만 떡 벌렸다. 한참이나 옷을 쓰다듬고 펼치고 빛에 비춰보이고 하다가 딸과 뭔가를 수군거렸다.
"다른 것은 몰라도, 엘프들의 센스가 어떤지 보여주는 옷입니다. 잘 쓰겠습니다."
아, 저 옷이 또 그런 용도로 쓰이는 건가? 저 히죽히죽대는 웃음은 아무래도 엘프들에 대한 우월감이 아닌가 싶다. 죽 둘러보기에도 이 안에 있는 옷 치고 저 로브보다 수준 낮은 옷은 없어 보였으니까.
옷에서 눈을 돌린 소녀가 나를 보며 다시 웃었다.
"정말 제가 사람은 잘 봤다니까요. 그 외모에 저런 시대착오적인 옷을 입는 건 죄악이에요! 하여튼 엘프들이란. 역시 "옷감은 엘프, 옷은 인간"이란 말이 딱 맞다니까요."
음, 그 정도였나. 겨우 200년 밖에 안 된 옷인데 저런 평이 나올 정도라니, 역시 인간들의 유행 변화는 너무 빠르다. 당시 인간들에게서도 저런 로브 형식의 옷이 유행하고 있었건만.
"어쨌든 잘 받았소. 오늘 저녁에 황태자의 즉위를 기념하는 파티가 있는데, 거기에 입고 나갈 생각이오."
"아! 그 파티에!"
재봉사 율린츠가 크게 놀랐다. 왜 놀라는지도 모르겠지만, 알아야 할 필요도 없다. 더 볼 일이 없어진 나는 몸을 돌려 출입구로 향했다. 가볍게 인사라도 남기고 나가려는데 그가 나를 불렀다.
"아, 잠깐 기다려 주십시오!"
"왜 그러십니까?"
의아한 표정으로 되묻자, 그가 넌지시 물었다.
"이런 말을 하기에는 좀 그렇긴 합니다만, 사실 그 옷의 명성에 뒤지지 않는 옷이 한벌 더 있습니다."
아니, 한벌이 더 있든 말든 대체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내가 귀찮아 하는 표정을 지었는데도 그는 말을 이어나갔다.
"쥬리안트 제국의 초대 황제 폐하의 예복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그 옷이 모레 경매에 출품된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옷에 관심이 많으시면 한번 구경이라도 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됩니다만..."
"그것을 왜 알려주는 것이오?"
"손님에게 잘 어울릴 만한 옷이라서 그렇습니다. 초대 황제 폐하께서도 손님과 같은 은발이었다고 전해지니 말입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나는 별로 관심이 없다. 그것은 내것이 아니니까. 그리고 지금 이 옷만으로도 충분하고. 훌륭한 옷은 훌륭한 재봉사에게 맡기면 만들어지는 것이다. 내 것을 새로 만들면 되는데, 남이 입던 것을 취할 필요 따위는 없지 않나.
"되었소. 나는 이것으로 충분하오. 이만 가보겠소."
나는 아쉬워하는 기색이 역력한 율린츠 일가를 뒤로 하고 밖으로 나갔다. 인간들의 시선이 일순간에 내게 쏠리는 것이 느껴졌지만 신경쓸 일까지는 아니었다. 유유히 걸어 황궁 근처까지 간 나는 인간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안으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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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에 돌아왔을 때는 어느덧 해질녘이었다. 유리창 밖에서 비쳐오는 붉은 빛과 방 안을 비추는 촛불이 어우러지는, 레드 드래곤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다.
시간은 꽤 많이 지났다고 생각했는데, 여자들의 치장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세르네린과 네르세린은 한창 장신구를 고르는 중이었고, 시녀들은 휴린에게로 몰려 이런저런 옷을 대어 보고 있었다. 가장 한가해 보이는 라이아는, 역시나 무척 엘프답게도, 간결하게 화장하고 소박한 드레스를 입은 것으로 준비가 끝나 있었다. 머리에 티아라(Tiara)를 올리기는 했지만, 그것까지는 차마 장신구라 하기에도 곤란한 수준이었다.
"오래도 걸리는구나."
"그럼요. 여자인 걸요."
라이아가 가볍게 대답했다. 그러나 대답을 하면서도 그녀는 매우 놀라고 있었다. 나를 바라본 채로. 그리고 그것은 휴린을 치장하던 시녀들도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굉장한 옷이네요."
"아아. 오래 전에 맡겨두었던 것이다."
나는 팔을 들어올리며 옷을 살폈다. 그러나 노을의 주홍빛 때문인지, 옷의 흰색들의 미묘한 빛깔을 제대로 구분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멋지다는 말이 나오는 것은 장식을 제외하더라도 대단히 맵시있게 만들어진 옷이란 뜻이다.
"잘 어울려요."
"음."
라이아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잘 어울린다니 다행이다. 사실 인간들의 의복 문화는 아직 경험이 많지 않은 내게 있어서는 쉬운 것이 아니니까. 역시 재봉사를 시켜 내게 딱 어울리는 옷을 짓게 만든 것은 잘 한 일이었다.
작업이 멈춘 것도 잠시, 시녀들은 다시금 휴린을 꾸미기 시작했다. 세르네린과 네르세린도 브로치며 헤어핀 따위를 고르기 시작했는데, 양손에 하나씩 들고 비교하던 좀전에 비하면 손을 좌우로 움직이기만 할 뿐, 머뭇머뭇하는 모습이 영 미더웠다.
"내가 나가 있는 편이 좋겠구나."
그녀들이 나를 신경쓰고 있다는 것 정도는 눈치챌 수 있다. 여자들이 치장하고 있는 방에 남자가 있는 것도 좋다고는 할 수 없는 노릇이고. 딱히 갈 곳은 없지만, 여기에 머물러 있는 것은 내가 답답하다.
"같이 갈게요."
치장을 이미 끝낸 라이아가 내 뒤를 따랐다.
딱히 생각나는 곳이 없어 향한 곳은 황궁의 정원이었다. 이곳이 내것이 아니다 보니 자연스레 가 본 곳으로 향했을 뿐이다.
"저... 주인님."
라이아가 나를 불렀다.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였다.
"불렀느냐."
"네. 최근에 들은 소식이 있는데요..."
소식을 말하는 표정은 아니다. 별로 좋은 내용은 아니리라 짐작은 간다만...
"말해 보거라."
"노예 경매라는 것이 있대요."
노예 경매인가. 하지만 노예 경매 따위는 인간들에게는 흔한 것이 아닌가? 노예 제도라는 것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고, 노예가 소유물로 취급되는 이상 매매되는 것도 당연하다. 경매라는 형태야 노예를 조금이라도 비싸게 팔기 위한 방편이라고 생각되지만...
아직 몰랐던 것일까? 하기사 라이아는 지난 200년 동안이나 내게 묶여 있었으니, 실제로 세상을 경험한 것은 30년이나 될까 하는 수준이다. 그 중에 인간 세상을 경험한 것은 거의 없을 것이고.
"인간들은 노예를 사고 판다. 모르느냐?"
"네... 책에서 봐서 알고 있어요. 그런데..."
라이아의 표정이 우울해졌다. 아무래도 "소식"이란 노예 경매라는 것이 있다는 이야기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한동안이나 뜸을 들이더니, 울음이 약간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거기에서 엘프가 팔린대요."
아아, 그것인가. 하지만 엘프는 노예로 등록될 수 없을 것인데... 정상적인 노예가 아닌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파는 데 무슨 문제가 있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내가 첫 유희를 나왔던 200년쯤 전에도 노예 경매는 있었고, 거기에서도 엘프는 팔리고 있었다. 순혈이 아니라 하프나 쿼터가 대부분이었지만.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알고 계셨어요?"
"알고 있다. 인간들은 엘프도 노예로 부리니까. 자신의 노예를 파는 것은 노예를 부리는 주인의 당연한 권리다. 적어도 인간들의 법으로는."
내가 단정지어 말했지만, 라이아는 노예 이야기를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눈물을 고이며 절박하게 말했다.
"구해주세요."
"싫다."
정작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것이었나. 하지만 들어줄 수 없는 부탁이다. 귀찮은 일 따위는 질색이이란 말이다. 어차피 엘프는 옛날에도 팔리고 있었으니, 지금 팔리는 몇몇을 구한다고 해봤자 바뀌는 일 따위는 없다. 그렇다고 앞으로도 계속 엘프들을 구해준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 아예 노예 제도라는 것을 없애지 않고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물론 나라면 황제를 협박하여 노예 제도를 없애는 것도 가능하긴 하다. 하지만 인간들의 문화에 그렇게까지 깊이 관여할 생각 따윈 없다.
"구해주세요. 주인님은 돈도 많잖아요."
"귀찮다."
"구해주지 않으면 계속 귀찮게 할 거에요."
참 귀엽게도 협박하는구나. 그러나 앞으로도 계속 이 일로 나를 귀찮게 할 생각이라면 충분히 효과적인 협박이다.
나는 라이아의 말을 아예 끊어버릴 생각으로 맞대응했다.
"이 이상 귀찮게 굴면 너를 팔아버리겠다."
"그, 그런..."
물론 정말로 팔아버릴 생각은 없지만 말이다.
라이아는 울음을 꾹 참고 고개를 숙였다. 내가 말이 너무 심했을까. 하지만 정말로 엘프 노예를 구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불가능하단 말이다.
순혈 엘프도 아니고, 하프나 쿼터쯤 되면 태어날 때부터 노예라 풀어주는 것도 불가능하다. 즉, 나더러 엘프 노예를 구해주라는 말은 그들을 구입하여 내 노예로 삼으라는 말과 다르지 않단 얘기다.
그것은 정말... 귀찮기 짝이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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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빨리 올려야 조아라 따라잡을 텐데 말이죠;;;
...라기보단, 거기 연재도 늦어지고 있구마는......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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