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탈은 몇시간째 그 자리에 서서 시연을 바라보았다.

인간의 피를 먹었다는 사실에 역겨워 눈, 코, 입에서 피를 토해내고

곧, 복통을 동반하는 피의 갈증이 찾아오면 바닥에 엎드려 자신이 토해냈던 피를 핥아 먹는 시연을.

평생을 인간으로서 살아왔던 시연의 가치관과 이제 뱀파이어로 새롭게 태어나 갖게된 피에 대한 본성이 다투는 모습을.

피를 먹고 잠시 정신이 들때마다 시연은 새빨간 눈물을 흘리며 빌었다.

"제발 멈추게 해줘"

"우웨에에에엥ㄱ에엑억..억..어...허..."

"컥....끄으....윽"

"후릅~! 쩝.쩝.쩝. 아~"

"...이제 그만...웁.."

"우에에에에엑그헥..엑.웩."

"하...하....윽...큭..."

시연이 인간의 피를 먹고 다시 토해낼때마다,

토해내는 피의 양은 줄어들고 있었다.

시연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의, 아니, 그녀의 몸은 타인의 생피를 조금씩 소화해내고 있었다.





본디 뱀파이어라면 자고 있어야할 대낮이지만, 크리스탈은 괴로워하는 시연을 혼자 내버려둘 수 없었다.

그저...그저 묵묵히 시연을 지켜볼 뿐이었다.

뱀파이어가 된다는 것.

그것은 한때 자신의 동족이었던 인간을

이제는 그저 움직이는, 보온성이 좋은, 4리터짜리 혈액 주머니로만 보아야만 하는 저주.

더이상 햇빛 아래에서 살아갈 수 없게되는 저주.

특히 여성 뱀파이어라면 한달에 한번 평생 연쇄 살인을 저지르게 되는 저주.

이러한 뱀파이어의 삶을 원했던 여자 뱀파이어는 없었다.

뱀파이어 사회에서 여성 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

그것은 뱀파이어 사회의 심각한 성비 불균형 때문에 가능했다.

여성 혁명 전, 뱀파이어 사회의 남녀 성비는 1:79였다.

십대, 이십대, 삼십대 모습의 여성 뱀파이어들의 대부분은

생리 때마다 깨진 독에 물 붓듯 피를 마시지 않으면 견딜 수 없었기에,

뱀파이어로 사는 것은 저주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아무리 좋아하는 인간 남성을 찾았다고 해도 물지 않았다.

대부분의 여성 뱀파이어들은 자신들로 인해 뱀파이어가 될 걱정이 없는 동성 인간들만을 물었다.

이들은 스스로를 양심적 동성식주의자(Homovore-ist)라 불렀다.

하지만 남성 뱀파이어들은 그러한 동성식주의자들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성에 관계없이 모두 다 취하는 Omnivore인 자신들은 비양심적이란 말인가?

뱀파이어가 인간을 무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 아닌가.

뱀파이어가 된 후, 그들은 강해진 자신들의 힘으로 자신들이 갖고 싶던 모든 것을 취할 수 있었기에.

그들은 하나하나가 많은 백성들과 넓은 영토를 차지한 왕으로서의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러다가 인간 여성을 사랑하게 되면, 그저 취하여 뱀파이어로 만들 뿐이었다.

하지만 노화하지 않고, 자연사의 개념이 없는 뱀파이어들에게

남성으로서 성적 충동으로 인해 맺어진 여성 뱀파이어와의 관계는 언젠가는 지루해질 뿐이었다.

그렇게 남성 뱀파이어들은 계속 다른 여성들을 감염시켜왔으나,

여성 뱀파이어들은 자신이 걸린 저주를 다른 이에게 옮기기는 싫었기에,

뱀파이어 사회는 이런 비정상적인 성비 구조를 나타내게 된 것이었다.

남성 뱀파이어들은 그 수는 적었지만, 남성은 남성이기에 신체적 조건이 여성 뱀파이어들보다 뛰어나

꽤 오랜 세월동안 여성 혁명은 일어나지 못했다.

여성 뱀파이어들의 혁명은 인간 문명의 발전과 함께 가능해졌다.

인간들은 나무로 배를 만들어 바다로 나아갔고, 돌아오는 배들은 항상 귀금속을 싣고 돌아왔다.

특히, 그 귀했던 금이 무역의 발전과 함께 지나치게 많아지자,

화폐로서 금화의 사용이 보편화되었고, 기존의 기축 화폐였던 은화는 시장에서 구축되었다.

금속 가공술의 발전과 저렴해진 은, 이는 모든 여성 뱀파이어들이 은제 무기로 무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마침내 여성 뱀파이어들은, 자신의 욕심을 주체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타인에게 저주를 퍼트리는 비양심적인 남성 뱀파이어들을 모조리 숙청할 수 있었다.

남성 뱀파이어들이 모조리 죽자, 더이상 새로 탄생하는 여성 뱀파이어는 없었고,

여성 뱀파이어들은 신념상의 이유로 인간 남성을 뱀파이어로 만들지 않았으므로

그때 이후로 더이상 뱀파이어가 되는 이는 없었고, 뱀파이어 인구는 줄어들뿐, 결코 늘어나지 않았다.

바로 어제 크리스탈이 시연을 물기 전까지.

시연은 수백년간 안정되어있던 여성만의 뱀파이어 사회를 혼란에 빠뜨릴 수 있는 존재였다.

생물학적 남성인 시연은 죽어야한다.

하지만 어제 물리고, 바로 몇시간 전에 눈을 뜬 시연이 무엇을 알겠는가.

나에게 물리지만 않았더라면...

크리스탈은 계속해서 피를 토하고 다시 먹고 또 토하는 시연의 불쌍한 모습을 보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