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에에에엑--!!”
파하핫---!!
오크 멱따는 소리와 함께 붉은 피가 튀어오른다. 비릿한 악취가 풍기는 붉은 피가 길고 예리한 검상을 타고 폭발하듯 솟구쳐 덮쳐온다.
“씨발!!”
욕 한 마디와 동시에 왼 발이 한 발짝 옆으로 움직이며 핏줄기의 공격을 피해낸다. 분수와도 같이 피를 뿜어내며 그대로 뒤로 누워버린 오크 뒤로 또다른 오크가 글레이브를 들고 흉험한 기세로 달려들고 있다.
“개썅!”
다시 욕 한 마디와 함께 검을 쥔 손을 뻗는다. 손에 들린 검은 칸피니스가 즐겨쓰는 양손검 바스타드 소드. 가끔 기분이 좋아지면 한손검처럼 쓰기도 하는 적당한 크기와 무게, 예리함을 갖춘 균형잡힌 검이다.
“꾸룩--!!”
“좆까!!”
아무래도 욕설은 습관인 듯싶다. 살기를 내뿜으며 격렬한 기세로 글레이브를 휘둘러오는 오크를 앞에 두고도 욕설이 나오는 것을 보니 말이다.
휘릭--!!
오크의 힘이 실린 글레이브는 무섭다. 단련된 기사만큼은 아니더라도 타고나기를 인간보다 강한 힘을 갖고 태어나는 오크의 힘은 일반 병사에 비할 바가 아니다. 자칫 제대로 맞기라도 한다면 플레이트메일조차도 종잇장처럼 우그러뜨릴 수 있을 정도로 위협적이다.
“좆도!!”
하지만 아무리 위협적인 공격이라도 맞지 않으면 그만이다. 칸피니스는 강하게 내리쳐오는 글레이브를 몸을 살짝 옆으로 움직여 어렵지 않게 피해낸다. 마치 짜고 하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동작이다. 여전히 그의 입에서는 욕이 끊이지 않는다.
“썅!!”
공격을 피했으니 이번에는 그가 공격할 차례다. 섬뜩할 정도로 예기를 발하는 푸르른 검신이 붉은 핏방울을 무늬처럼 거느리며 정면의 오크를 향해 빠르게 나아간다. 검면에 비치는 나뭇그늘이 검의 움직임을 따라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마치 숲 속을 미끌어져 나가는 듯 하다.
“쿠룩--!!”
자세가 불안정한 탓일까? 아니면 너무 오래 전투를 계속한 탓일까? 공격이 약간 얕았다. 평소라면 허리를 훑고 지나가며 창자며 콩팥이며 내장을 모조리 갈라버렸을테지만, 이번에는 바깥쪽 창자 하나를 끊은 것이 고작이다. 인간이라면 충분히 치명상이라 할 수 있겠지만 오크라면 위험하다.
“썩을!!”
칸피니스가 강하다고 하는 것은 판단보다 행동이 더 빠르기 때문이다. 오크가 상처의 고통을 무릎쓰고 글레이브를 휘둘러았을 때 이미 칸피니스는 그 자리에 남아있지 않다. 어느새 오크의 오른쪽으로 돌아가 다시 검을 휘둘를 기회를 노리고 있다.
“뒈?!”
다른 검사들과는 달리 칸피니스의 미학은 검을 부딪히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시끄럽기 때문이다. 고함소리, 비명소리로도 시끄러워 죽겠는데 칼까지 맞부딪히고 있으면 쓸데없이 정신이 사납다는 것이 그가 칼을 맞대는 것을 싫어하는 이유다.
“쿠레렉--!!”
이번 공격은 효과적이었다. 조금전 공격이 얕았던 것을 감안해서 조금 강하게 검을 찔렀기 때문이다. 오크의 단단한 근육을 뚫고 뼈를 끊으며 내장을 절단해가는 것이 손잡이를 통해 생생하게 느껴진다. 칸피니스는 경험으로 제대로 오크의 생명줄을 갈랐음을 알 수 있다.
파핫--!!
살짝 비틀어 검을 빼는 것과 동시에 피가 뿜어져 나온다. 내장을 가르면서 몸 안을 흐르는 동맥을 자른 까닭이다.
“썅!”
피 정도야 맞아준다고 죽거나 다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제껏 피가 묻지 않도록 애써 신경쓴 갑옷이 왠지 신경쓰인다. 왠지 한 방울의 피라도 묻으면 안될 것 같아 이번에도 힘껏 피를 피한다. 역시 욕을 동반한 상태다.
“빌어먹을!”
칸피니스가 특별히 싸울 때마다 입에 욕을 달고 다닌다거나 하는 타입인 것은 아니다. 성격이 직설적이고 경박한데다 자기중심적이기는 하지만 아무 때나 욕을 할 정도로 천박하지는 않다. 그런에도 지금 그가 이리 쉴 새 없이 욕을 씹어뱉는 이유는 한 사람 때문이다.
“개새끼!”
다음 상대를 찾아 휘도는 그의 시야로 막 오크 한 마리를 쓰러뜨리는 기사 한 명이 눈에 띈다. 투구 아래로 백금발 머리카락이 언뜻 보이는 기사는 매우 노련한 몸놀림으로 그다지 힘들이지 않으면서도 어느새 오크 한 마리를 베어가고 있는데, 칸피니스의 욕은 바로 그 기사를 향하고 있다.
“여어~~!!”
자신을 보는 시선을 느낀 것일까? 오크의 몸에 박혀있던 검을 빼낸 기사가 칸피니스를 돌아보며 손을 흔들어온다. 상당히 반갑다는 제스쳐. 하지만 칸피니스는 냉랭하게 고개를 돌릴 뿐이다. 마치 상대하기 싫은 더러운 물건을 본다는 듯 과격한 동작으로 그로부터 몸을 돌리고 잇다.
“프란츠 씹쌔꺄!!”
칸피니스의 화풀이 덕분에 엄한 오크 한 마리만 목이 날아가버린다. 물론 칸피니스가 화가 나있지 않았다 하더라도 살아남을 가능성은 없다. 다만 지금처럼 가차없이 순식간에 목이 베이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정도다.
“좆!!”
“개좆!!”
“씨앙!!”
“염병!!”
“개지랄!!”
“좆이나 빨아!!”
분이 치밀어오른 것인지 심해지는 욕설과 함께 칸피니스의 몸놀림이 더욱 격렬해진다. 더 빠르고, 더 강하게, 오크의 몸을 주저없이 베고 있다. 이제는 더 이상 피를 피하고 하는 여유도 없다. 그저 보이면 베고, 부딪히면 찌를 뿐이다.
“씨앙~!!”
하지만 오크의 수가 무한정인 것은 아니다. 칸피니스가 처음 맞닥뜨렸을 때 오크의 무리는 고작 200여마리에 불과했다. 물론 오크의 무리치고는 많은 수이기는 하지만 몬스터 토벌을 위해 나선 기사단 180여명에 비하면 그리 많은 것도 아니다. 한 사람 당 한 마리씩, 조금 실력 있는 20여명이 두 마리씩 상대하면 금방 처리할 수 있는 규모다. 그런 상황에서 미친듯 날뛰며 수십마리씩 베어댔으니 오크가 남아날 리 없다.
“뭐야? 벌써 끝이야?”
아쉽다기보다는 화가 난다는 표정이다. 분을 풀기 위해 더 많은 오크를 베어버리고 싶었는데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 오히려 그의 분을 자극한 것이다.
“더 없어? 없냐구?”
소리 지른다고 죽어버린 오크가 다시 살아나지는 않는다. 없는 오크가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도리어 풀어내지 못한 화가 엉켜 더욱 치밀어오를 뿐이다.
“씨발!! 오크 새끼들은 화풀이에조차 도움이 안돼!! 개썅!”
끝내 분을 이기지 못하고 오크의 시체에 화풀이해 보지만 그런다고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는 분이 풀리는 것은 아니다. 괜히 화만 더 북돋을 뿐이다.
“뭐 때문에 그리 화가 난거냐?”
한참을 발작하고 있으려니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의 곁으로 다가온다. 너무도 익숙한, 그리고 너무도 증오스러운 목소리다. 이 목소리야말로 그의 짜증의 원흉이다.
“씨발... 재수없어!!”
칸피니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앞으로 걸어간다. 돌아볼 것도 없다. 괜히 돌아봐야 부아받 돋을 뿐이다. 원치않는 사고라도 치게 되면 앞으로의 계획에도 큰 차질이 생긴다. 그런 생각으로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른 채 목소리로부터 멀어지겠다는 생각 하나로 무작정 걷는다.
“칸피니스...!!”
목소리가 뒤쫓아오지만 그의 걸음에는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다. 아무일도 없었던 양 처음 걷던 그대로 계속 걸어갈 뿐이다.
“칸피니스! 그쪽이 아니다!”
“신경끄쇼!”
“주둔지는 그 반대편이야! 그쪽은 위험하다!”
“때 되면 합류할테니까 걱정말고 혼자 가쇼!”
“칸피니스!!”
“씨발! 귀찮다니까! 저기 기사들하고 가서 놀아!”
“칸피니스!!”
쫓아오는 목소리가 귀찮아 발걸음 속도를 높인다.
“칸피니스!! 잠깐!!”
하지만 목소리 또한 발걸음 속도를 높여 쫓아온다. 숨소리나 발소리나 그를 따라잡기 위해 상당히 걸음 속도를 높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칸피니스는 좀더 걸음 속도를 높인다. 걷는다기보다는 뛴다고 하는 것이 걸맞는 듯 보이는 빠른 속도다.
“칸피니스!!”
혼혈이기는 하지만 칸피니스도 수파니의 혈통을 이었다. 숲에서 수파니보다 빠른 종족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물며 평소 숲에서 검술수련을 하던 칸피니스다. 숲에서 그보다 빠른 존재는 최소한 인간 중에는 없다. 갑옷 입은 중년의 기사라면 더더욱 따라잡을 수 없다.
“칸피니스!!”
목소리는 점차 멀어진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크기가 작아지는 것이 꽤나 거리가 벌어지는 모양이다. 왠지 기분이 좋아진 칸피니스는 걸음의 속도를 더욱 높인다.
“....”
뭐라 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 싶지만 무슨 소리인지는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숲속에서는 사람의 말소리가 멀리까지 뚜렷이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방심해서는 안된다. 자칫 걸음을 멈추고 뒤라도 돌아봤다가는 재수없는 얼굴을 봐야하는 끔찍한 경우도 무시할 수 없다.
바스락-- 바스락--
한참을 가니 나뭇잎 밟히는 소리만 들린다. 가끔 탁탁 튀기는 것은 나뭇가지가 밟혀 부러지는 소리다. 그 외에는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마치 칸피니스 혼자서만 존재하는 듯 적막만이 감돈다.
“개새끼! 떨궈버렸군.”
증오를 한참 담아 씹어뱉으며 뒤를 돌아보니 역시나 목소리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햇빛 한 점 들지 않는 숲의 어둠만이 한가득 나무들 사이를 채울 뿐이다.
“썩을 새끼!!”
칸피니스가 그토록 피하고 싶어하는 백금발의 기사는 프란츠 포르니르 델킨피에르, 델킨피에르의 자작이자 칸피니스의 생부가 되는 남자다. 칸피니스가 가장 싫어하고 증오해마지않는 바로 그 프란츠다.
칸피니스가 하루종일 기분나쁜 상태에서 욕을 입에 달고 있었던 것은 순전히 프란츠 포르니르 델킨피에르 자작과 함께 있어야 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저 꼴보기 싫은 프란츠가 가까운 곳에서 하루종일 그 위선의 가면을 쓴 채 어정거리는 걸 보고 있으니 절로 분통이 터져올라 욕을 참을 수 없었다.
“젠장젠장젠장...”
더 열받는 건 오늘이 바로 칼레아나의 방으로 잠입하는 날이었다는 점이다. 다른 건 다 용서하지만 여자와의 중요한 일을 방해하는 건 용서할 수 없다. 하물며 그 대상이 칼레아나라면 말할 필요도 없다.
“아아아... 그새끼만 아니었다면 지금쯤... 으흐흐... 씨발...”
아무리 생각해봐도 칼레아나의 알몸은 너무 아쉽다. 옷밖으로 보기에도 적당히 자란 것이 맛있어 보였는데. 나이가 아니이니 젖가슴이나 엉덩이나 아직 제대로 자라지 못했지만 그 나이치고는 나올 데는 나오고, 들어갈 데는 들어간 편이다. 더구나 검술을 익혀 탄력넘치는 근육은 안는 맛을 더해줄 것이다. 그런 것을 오늘 안을 수 있었는데 저 썩을 놈 때문에 이런 곳에서 몬스터나 잡느라 뒤로 미루게 되었으니 지금껏 프란츠를 살려두는 것만으로도 그의 인내심은 바닥나 있었다.
“칼레아나... 흐흐흑... 젠장...”
손을 움찔거리고 있으니 칼레아나와 수작부리며 만져보았던 그 앙증맞은 젖가슴이 손 안에 들어차 있는 듯싶다. 그 느낌을 피부의 따뜻함과 촉촉함을 더해 느낄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하니 아쉬움만 더해간다.
“칼레아나와 만나기로 한거냐?”
느닷없는 목소리. 그가 그토록 듣기 싫어 떨구려고 했던 목소리다.
“젠장!”
고개를 돌려보니 해가 서편으로 떨어지며 더욱 짙어진 어둠 속으로 나뭇잎을 뚫고 들어온 달빛을 반사하는 쇠갑옷이 보인다. 낮에 보았던 바로 그 갑옷이다. 프란츠 포르니르 델킨피에르의 그 갑옷.
“어떻게 쫓아온거유?”
코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어두운 숲속이다. 거기에 해까지 져서 더욱 어두워졌다. 흑암의 숲이라는 이름이 왜 붙었는가를 절실히 느낄 정도로 검은 어두움 그 자체인 숲에서 사람을 찾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엘프나 수파니가 아닌 이상에는. 칸피니스가 의아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같은 의문에 대해 프란츠는 단 한 마디로 대답한다.
“나도 기사다.”
“훗... 그렇군. 잊었수.”
하긴 델킨피에르 가문의 주인은 대대로 기사였다. 능력의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기사로서 제대로 교육받지 않으면 자작의 작위를 물려받을 수 없다. 잠시 그런 사실을 잊고 있었던 모양이다. 워낙에 싫은 인간이다보니 자작쯤 되면 작은 혼잣말 소리를 멀리서 듣고 추적할 수 있는 정도는 된다는 사실조차도 무의식중에 무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기딴에는 감탄한다고 한 말이지만 듣는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은 지 프란츠의 얼굴이 어둠속에서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확연히 일그러진다. 프란츠 따위 기사로 인정할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한 그의 말이나 태도가 그의 자존심을 사정없이 긁어놓은 때문이다.
“놀랍구려. 그 먼 거리에서 내가 혼잣말 하는 소리를 듣고 찾아오다니. 무늬만 기사는 아니었던 모양이오?”
“그렇게 놀라운 일인가?”
“당연히. 당신같은 쓰레기가 자작이라는 것도 놀라운데, 거기다 기사로서 제대로 수련까지 쌓았다니 놀랍기 그지없소. 쓰레기도 한 가지 장점은 있는 모양이오?”
“쓰레기? 나를 일컫는 말인가?”
“당연히!!”
조금전보다도 더욱 확연히 프란츠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어둠속으로 드러난 하얀 이가 이리저리 이지러지는 것을 보니 뺨이 분노로 파들파들 떨리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이는 듯 하다. 저 뻔뻔한 얼굴이 저토록 어찌할 바를 몰라하는 것을 보니 칸피니스는 내심 통쾌하다.
“나는 네 아버지다!”
“훗! 나는 에렌프 수파니의 아들이오!”
“나를 네 아버지로 인정할 수 없다는거냐?”
“당연히!”
무섭게 노려보는 프란츠에 비해 칸피니스의 표정은 태연하기만 하다. 비웃음마저 담뿍 머금은 채 빙글거리는 것이 어디서 개가 짖느냐는 태도다. 프란츠를 대화의 상대로 인정하지 못한다는 의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에렌프로 하여금 너를 낳게 한 것은 바로 나다. 내가 그녀를 안았기에 네가 태어난거다. 그런데도 에렌프의 아들이라는 건 인정하면서 내 아들이라는 사실은 인정할 수 없다는 거냐?”
“쯧쯧... 말은 바로합시다. 정확히 말하면 당신은 내 어머니를 강간한 강간범이야. 단순히 강간만 한 게 아니라 눈을 멀게 하고, 다리 근육을 끊어, 감금까지 한 흉악한 감금범이기도 하지. 나는 재수없게 당신같은 작자의 정액으로 인해 태어났을 뿐이고. 알겠수?”
“내 정액에서 태어났다고 하면서도 내가 아버지라는 사실은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냐?”
“훗~! 정액의 주인이면 모두 아버지요? 당신 진짜 그렇게 살아왔소?”
“그... 그건...”
당연히 할 말이 있을 리 없다. 프란츠 쯤 되면 나름대로 청렴하고 도덕적인 귀족이지만 역시 귀족이다보니 이런저런 여자 문제가 없지는 않다. 그나마 피임이라도 잘했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피임기술이 발달하지 못하다보니 불의의 임신 또한 얼마 되지는 하지만 전혀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가운데 지금 프란츠의 자식으로 인정받은 아이들은 몇 명 되지 않는다. 역시 귀족의 체통과 관습 때문이다. 칸피니스가 지적하는 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
“상황에 따라 자식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듯이, 부모 또한 마찬가지요. 내게 있어서 당신은 당신이 인정하지 못한 자식들처럼 부적격 부모일 뿐이거든. 있어봐야 수치스럽고 짜증만 날 뿐이오.”
“그... 그것은...”
“내게서 아버지 대접 받고 싶었다면 어머니께 잘 하지 그랬소? 아니면 내가 태어나자마자 당신 아들로 기르던가. 태어나고 나서 10여년을 어머니 아들로 내버려두고, 나중에서야 자기 아들이라고 주장해봐야 설득력이 없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흠... 그래서 나를 네 아버지로 인정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당연히!”
“그럼 왜 델킨피에르 성에 남아있는 것이냐? 나를 아비로 생각지 않는다면 왜 내 성에서 내 돈으로 먹고사는거지?”
“훗!!”
참지 못하겠다는 듯 웃음이 터져나온다. 하지만 일그러진 얼굴이나 광기로 번들거리는 눈빛이나 단순히 웃겨서 웃은 것은 아닌 듯 보인다.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웃음으로 뒤트린 채 분출되어버린 것이다.
“그럼 먼저 내 어머니부터 풀어주던가. 어머니만 자유로우면 어디든지 떠날 수 있으니까.”
“네 어머니는 내 여자다!”
“하하핫... 정말 뻔뻔한 자식이네! 아무 여자나 붙잡아놓고 강간하고 가두어놓으면 모두 당신 여자 되나?”
“가... 강간이 아니다. 나... 난 네 어머니를... 에렌프를...”
“훗... 사랑한다고 말하려고?”
어이가 없다는 듯 한 줄기 코웃음을 토해낸 칸피니스의 얼굴에는 노골적인 비웃음이 떠올라 있다. 어둠 속에 자세히 볼 수는 없지만 그의 전신에서는 프란츠도 느낄 수 있는 참을 수 없는 경멸이 뿜어져나오고 있다.
“그... 그래!”
발작적으로 외쳐보지만 이미 기세는 전과 같지 않다. 칸피니스의 경멸에서 에렌프의 무표정에서 느꼈던 것과 같은 것을 느낀 때문이다. 한없는 슬픔과 한없는 경멸, 그리고 어둡게 가라앉은 분노와 증오.
“야이~~ 쓰레기 새끼야! 넌 그러니까 쓰레기밖에 안되는거야.”
“그...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마음에 안들어? 그럼 죽여줄까? 바로 이 자리에서?”
“무... 무슨...”
진짜다. 지금 칸피니스에게서 뿜어지는 살기는 진짜다. 조용하면서도 차갑게 타오르는, 피부에 와닿으며 뜨거운 열기가 따갑게 느껴지는 이 살기에는 진심이 담겨있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프란츠는 마른침을 꿀꺽 삼킨다.
“걱정마라. 지금 당장은 죽이지 않을테니까. 어머니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그 더러운 목숨을 연장시켜주지. 물론 그 다음은? 흐흐흐흐흐...”
“에... 에렌프?”
“네놈이 싫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완전히 미친 건 아니거든. 괜히 너같은 놈 건드렸다가 어머니께 피해가 가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아.”
“나... 나에게 이러는 건 후환이 두렵지 않다는 거냐?”
“응!”
화가 난 것은 아니다. 단순히 억눌린 기세를 회복해보고자 한 번 윽박질러본 것 뿐이다. 하지만 여전히 칸피니스는 짧고 여유로운 말투로 그를 완벽히 무시할 뿐이다.
“뭐... 뭐라?”
“넌 멍청이잖아.”
“뭐라고?”
“넌 날 못죽여. 내 어머니도. 만일 죽인다면 네 마누라나 기사단의 명령이 있을 경우겠지. 그렇지 않은데 나를 죽이려 들었다간 너도 몬스터 토벌하다 죽어간 18명의 위대한 자작 가운데 한 명으로 기록될걸?”
“아... 알고 있는거냐?”
프란츠의 목소리가 자기도 모르게 떨려온다. 모르고 있으리라 생각했던 일들이 아직 어린 칸피니스의 입에서 술술 새어나오고 있으니 놀라움과 함께 수치심이 그를 지배해온다.
“당연히! 나는 바보가 아니니까.”
프란츠의 격동과는 반대로 칸피니스의 태도는 여전히 변함이 없다. 모르는 게 바보라는 듯 뻔뻔할 정도로 당당하게, 프란츠의 아픈 곳을 아무렇지도 않게 찔러대고 있다. 미워서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그... 그렇다면... 그렇다면 어쩔거냐? 네 어머니를 그... 들이... 죽이라 명령했다면? 그들이 나에게 네 어머니를 죽이고, 너를 죽이라 했다면? 그럼 너는 어쩔거냐?”
“죽여버릴거야!”
“죽여버린다고?”
“그래! 지금 당장 바로 너부터!”
이번의 살기는 조금 전과는 약간 다르다. 서늘하게 조용히 밀려드는 것이 마치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하지만 그 평온함 속에서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위험이 느껴진다. 최소한 프란츠 정도는 되어야 느낄 수 있는 그런 위험이다.
“나를 죽인다고?”
“못 죽일 것 같아?”
“네가 검술의 재능이 뛰어나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아직은 너무 어려. 이래뵈도 나는 제국동남제후령에서 알아주는 기사다.”
“훗!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거야? 지금 당장 해볼까?”
살기가 다시금 바뀐다. 그를 밀어내려는 듯 느리게 다가서는 살기는 마치 거대한 벽과 같다. 바늘 하나 들어갈 틈이 없는, 메테오로도 무너뜨릴 수 없는 절대의 벽이 형체없이 다가오는 듯한 압박감을 느낀다.
“시... 실력을... 숨기고 있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나도 그럴 거라고는 생각했어.”
“그... 그렇다면...”
“네 짐작대로야.”
“으으음...”
“의심스러우면 시험해볼까?”
“아니. 시험해볼 필요는 없겠지. 역시 너는 수파니의 혼혈이니까.”
“호오... 그럼 믿는건가?”
“물론. 너는 내 아들이기도 하니까.”
“흐흥...”
“화내지 않는건가?”
“그거야 당신이 뭐라 생각하든 당신 마음일테니까. 중요한 건 당신이 내 아버지가 아니라는 사실이지. 안그래?”
“그렇군.”
순순히 수긍하는 프란츠의 모습이 왠지 쓸쓸해 보인다. 하지만 칸피니스의 눈빛에는 조금의 동정도 느껴지지 않는다. 차갑고 써늘한 냉정함만이 살벌하게 빛나고 있을 뿐이다.
“어머니를 죽이라 하던가?”
“무슨...?”
“당신 말이 그런 뜻인 것 같아서.”
“그...”
“어머니는 나를 살려달라고 했을테고. 맞나?”
“어... 어떻게...”
“말했잖아. 나는 바보가 아니라고.”
“그렇군. 너는 바보가 아니었어. 아니 누구보다 영리한 아이였지.”
“내 짐작이 맞는다는 건가?”
“그래...”
당장에라도 분노에 사로잡혀 발작하리라 생각한 것일까? 프란츠의 목소리는 힘없이 잦아든다.
하지만 프란츠의 우려와는 달리 그의 긍정에도 불구하고 칸피니스는 여전히 냉정을 유지하고 있다. 살기조차도 잦아든 채 이전보다도 더욱 태연하고 침착한 모습이다.
“아... 무렇... 지도 않은... 건가?”
“당연히 아무렇지도 않을 리 없지.”
“그렇다면...?”
“어차피 이미 늦은 거 아닌가?”
“그건... 아마도 네 말이 맞을거다.”
“괜히 발작해봐야 죽은 사람이 살아돌아오지는 않아. 내가 대마도사라도 된다면 모를까 기껏해야 검술 좀 할 줄 아는 애송이에게 사람을 다시 살리는 재주가 있을 리 없고. 상황이라도 좋다면 모르겠지만 지금처럼 위험한 상황이라면 괜히 울고불고 난리피워봐야 나까지 죽을 뿐이지 않겠어?”
“내... 냉정하군.”
목소리가 저절로 떨린다. 그토록 경애하던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도 저토록 냉정하게 계산할 수 있다니. 슬픔마저 억누른 채 상황을 파악하고, 그에 대한 대처방법을 찾아내는 칸피니스의 모습에 프란츠는 본능적인 두려움마저 느낀다.
“칭찬 고맙군.”
“치... 칭찬인가?”
“그럼 ‘어머니~~!!’ 하고 외치며 울고불고 난리치다가 그놈들 손에 죽어야 한다는 건가?”
“그... 그건 아니지만...”
“그럼 좋은거잖아? 일단 냉정하니까 살아남을 수 있는 거고, 살아남을 수 있다면 복수도 할 수 있는 것 아니겠어?”
“그... 렇겠... 군...”
인정하기는 싫지만 칸피니스의 말이 옳다. 지금 감정에 휩싸여 섣불리 행동해봐야 불리한 건 칸피니스 뿐이다. 칸피니스가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저들의 배후를 혼자서 상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끝내는 자신만 목숨을 잃고 말 뿐이다. 그래서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기분나쁘더라도 칸피니스처럼 남의 일인양 냉정을 유지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일 수 있는 것이다.
“그나저나 얘기해봐. 뭔가 방법이 있을거잖아? 어떤 식으로 나를 저들의 손에서 구해낼 생각인거지?”
“그... 그건...”
“생각해둔 게 있을 거 아냐? 뭐야? 어디 변두리 장원이라도 떼어주어 혼자 살아가라고 할 장정인거야? 네 머리로는 그 이상의 생각은 무리일텐데?”
“어... 그...”
“맞는 모양이로군. 그럼 파람블린츠인가? 거기가 아니라면 그 인간들을 납득시킬 수 없을테니까.”
“대... 대단하군.”
“절반은 수파니니까.”
“수... 수파니?”
“그렇게만 알아둬. 어쨌든 대충 내 짐작이 맞는 모양이지?”
“그... 그래.”
“정말 뻔한 사람이로군. 고작 15살밖에 안된 나도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이라니. 부끄러운 줄 알라구.”
프란츠로서는 억울하다. 뛰어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보통 이상의 재능과 노력으로 최소한 평균 이상은 된다고 평가될 정도의 실력은 갖추고 있다 자부해왔던 프란츠다. 그것은 프란츠만의 생각은 아니다. 역설적이게도 프란츠를 견제하고 위협하고 있는 이들이 더 비중있게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프란츠가 무능한 것이 아니라 칸피니스가 너무 뛰어난 것이다. 15살이라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의 냉정함과 교활함은 인간의 범주를 넘어선 것이라 할 수 있다. 프란츠와 같은 보통보다 조금 나일 뿐인 정도의 사람과 비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하지만 프란츠는 그같은 불만을 입밖으로 꺼내지 못한다. 왠지 그런 말을 꺼냈다가는 자신이 너무도 비참해질 것만 같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저 속으로만 끙끙 앓을 뿐이다.
“나와 손잡을 생각 없나?”
왜 이런 말이 나오게 되었는지 프란츠 자신도 모른다. 아마도 기세로도 능력으로도 완전히 자신을 압도해버린 칸피니스에 대한 매료와 반발이 무의식 중에 표출된 듯하다. 그와 같은 뛰어난 재능과 힘을 자신의 것으로 하고 싶다는 욕망이 그아 처한 상황과 상승작용을 일으켜 자연스럽게 칸피니스에게 손을 내밀게 된 것이다.
“손?”
그런 프란츠의 입장을 알지 못하는 칸피니스로서는 황당하기만 한 제안이다. 죽여버리겠다고 다짐한 상대와 손을 잡다니. 자신을 죽이겠다 말한 상대에게 손을 내미는 프란츠의 정신상태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멀뚱히 프란츠만을 바라볼 뿐이다.
“그래. 아무래도 너와 나는 공동의 적을 둔 것 같으니.”
“공동의 적? 그들 말인가?”
“그래. 원래는 너와는 별로 적이 될 이유가 없었지만 이제는 상황이 다르지 않나?”
“그건 사실이지. 결국 어머니를 죽인 건 그들이니까.”
“그렇다면 최소한 그들에 대해서만큼은 공동의 적을 갖고 있는 셈이지. 일시적으로 서로 손을 잡을 수도 있다는 말이야.”
“그건 어머니와의 약속과는 별개인 건가?”
“물론.”
“흐음...”
“너는 분명 검술에 뛰어난 재능이 있다. 머리도 좋지. 하지만 세력이 없다. 명분도 부족하고. 그래서는 네가 바라는 바를 이룰 수 없다. 그러나 나는 그 세력과 명분을 제공해줄 수 있지. 어떠냐? 나와 손잡는게?”
분명 설득력 있는 제안이다. 프란츠가 말한 부분은 칸피니스도 심각하게 고민해왔던 것들이니까. 하지만 여전히 껄끄러운 부분이 남아있다.
“호오... 아들로서인가?”
“할 수 있다면 그러고 싶다.”
“꿈깨라는 말을 꼭 해주어야 하나?”
노골적인 조롱이 담긴 표정. 프란츠는 굴욕감을 견디기 위해 아플 정도로 이를 악문다. 아니 굴욕감만은 아닌 듯 싶다. 최소한 굴욕감은 이리 슬프지 않을 것이니. 이것은 어쩌면 상실감인지도 모른다.
“꿈... 인건... 가?”
“확실히!”
“그럼 동업자로서는 어떤가?”
“한 가지만 더 준다면 한 번 생각해볼만 하지.”
“뭔가?”
“당신 목!”
“내... 목?”
“응!”
한마디로 목숨을 달라는 말이다. 그러나 목숨을 달라는 말치고는 너무 태연하다. 마치 옷에 묻은 검불 하나 떼어달라는 것과 같은 태도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진심으로 다가온다. 그것이 칸피니스와 같은 종류의 사람들이 말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내... 목이 필요한건가?”
“어머니를 위해서!”
“에렌프를 위해서?”
“그래! 아무래도 자식된 도리로 복수 정도는 해주어야 할테니까.”
“에렌프를... 위한... 복수인... 건가?”
“응!”
“그렇다면... 거부할 수 없겠군.”
“호오... 어머니를 위해 기꺼이 죽어주겠다는건가?”
“아마도...”
“훗... 재미있군.”
“재미있나?”
칸피니스는 그저 웃을 뿐이다. 칸피니스에게는 프란츠의 머릿속이 뻔히 보인다. 프란츠가 제공하는 세력과 명분을 받아들인 이상 칸피니스는 델킨피에르의 이름을 이을 수밖에 없다. 프란츠가 제공하는 세력이나 명분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니까. 아마도 그는 자신이 죽더라도 자신의 피를 이은 칸피니스가 델킨피에르를 잇는다면 그것으로 좋다고 여기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기꺼이 목숨을 내놓겠다 말할 수 있는 것이겠지.
물론 에렌프에 대한 마음도 어느정도는 있을 것이다. 방법은 분명 개자식의 그것이지만 에렌프를 생각하는 것 만큼은 진심이니까. 하지만 그보다는 그의 델킨피에르의 가주로서의 입장이 더욱 우선이었을 것이다. 최소한 칸피니스가 보기에는 그랬다. 아마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뭐 좋아. 어쨌든 이걸로 거래 성립이네. 당신은 세력과 명분, 당신의 목을 제공하고 나는 당신에게 내 검과 머리를 제공하면 되는거지?”
“그래.”
“어쨌든 기대하겠어. 당신의 목을 자르는 그날을.”
“나는 저들을 모조리 죽여버릴 수 있는 그날을 기대하도록 하지.”
“그건 당신 마음대로. 그대신 죽이는 건 나야. 알지?”
“물론. 그건 네 일이다.”
다짐을 받고 나니 비로소 칸피니스의 얼굴에 밝은 미소가 지어진다. 보는 사람마저도 왠지 기분이 좋아질 정도로 밝고 유쾌한 웃음이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죽음을 전제로 한 웃음이라 생각하니 프란츠에게는 어둡고 음습한 불쾌감이 느껴질 뿐이다.
“알면 됐어. 이제 슬슬 돌아가야 하지 않아?”
“돌아가려고?”
“당연하지 않아? 연기는 철저한게 좋다구. 괜히 당신과 내가 따로 오래 떨어져 있어봐야 좋을 일 없다고. 오히려 나중에 귀찮아지기만 하지.”
“그건 그렇겠군. 너와 내가 오래 같이 있었다는 사실이 그들의 귀에 들어간다면 너나 나나 무사하긴 힘들거야.”
“그 말은 틀렸어. 나는 무사할거야. 문제는 당신이지!”
“그런가?”
“그래!”
단호함. 넘치는 자신감에 근거한 단호함이다. 당당한 기세가 마치 빛처럼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듯하다.
“문제는 당신이라구. 그러니까 항상 긴장하란 말야. 알겠어? 당신을 죽이는 건 나라구.”
“그런건가?”
“뭐, 다른 사람의 손에 죽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어차피 계약조건이었으니 계약을 이행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포기하는 수밖에 없는거잖아? 그러니 잘하라구.”
“훗... 냉정하군.”
“당연한거야.”
조금의 미련조차도 가질 수 없도록 못 박는다. 의도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드러난 그의 진심은 조금의 틈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뼈가 시려올 정도다. 깊이 생각해본 적 없는 칸피니스와의 관계가 절실하게 느껴질 정도로 그의 깊은 곳을 차갑게 헤집는다.
“어서 서두르라고!”
“알았다!”
잡스런 생각을 하기에는 밤의 숲은 위험하다. 흑암의 숲은 그중에서도 몇 배나 더 위험하다. 생각할 여유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프란츠는 생각을 멈춘 채 급히 칸피니스의 뒤를 따른다. 한시라도 빨리 기사단과 합류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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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강간범과 피해여성을 결혼시키는 경우도 흔했습니다. 꼴같잖은 순결이데올로기 때문이지요. 어떻게 강간범을 피해여성과 결혼시킬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저는 그 자체도 범죄행위라 생각합니다. 생각해보세요. 강간 피해여성들이 강간으로 인해 입는 상처라는 것은 순결 그 이상의 것입니다. 정신적인 외상으로 인해 평생 정상적인 성행위 자체가 불가능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강간범과 피해여성을 결혼시키다니요!!
칸피니스의 태도는 우리나라의 일반적 도덕관념에 따르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어찌되었든 아버지이고 아들이니까요. 하지만 칸피니스에게는 지극히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프란츠는 아버지이기 이전에 어머니를 강간하고 불행에 빠뜨린 원수이기 때문입니다. 즉 혈연적으로만 부자지간일 뿐, 어머니를 기준으로 보았을 때는 전혀 존중할 가치가 없는 쓰레기일 뿐이니 당연히 태도가 불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해해주셨으면 하네요.
색검마도지성전에서 대사가 주를 이루는 이유는 역시 사람 사이의 관계를 정의하는 것은 생각이고, 그 생각이 표출되는 것이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이 많습니다. 더구나 아직은 초반이라 액션이라든가 섹스가 본격적으로 등장할 시점이 아닙니다. 색마검천황에서와 같은 유쾌한 하렘까지는 가야 할 길이 멀지요. 그래서 아직 초반이기 때문에 주로 대사를 중심으로 캐릭터들 간의 관계와 그를 통한 사건의 전개를 묘사하는 데에 주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음회예고)) 다음회에 대한 계획 전혀 없음. 밑그림은 그려져있는데 확정되지 않아서리.... ?...
파하핫---!!
오크 멱따는 소리와 함께 붉은 피가 튀어오른다. 비릿한 악취가 풍기는 붉은 피가 길고 예리한 검상을 타고 폭발하듯 솟구쳐 덮쳐온다.
“씨발!!”
욕 한 마디와 동시에 왼 발이 한 발짝 옆으로 움직이며 핏줄기의 공격을 피해낸다. 분수와도 같이 피를 뿜어내며 그대로 뒤로 누워버린 오크 뒤로 또다른 오크가 글레이브를 들고 흉험한 기세로 달려들고 있다.
“개썅!”
다시 욕 한 마디와 함께 검을 쥔 손을 뻗는다. 손에 들린 검은 칸피니스가 즐겨쓰는 양손검 바스타드 소드. 가끔 기분이 좋아지면 한손검처럼 쓰기도 하는 적당한 크기와 무게, 예리함을 갖춘 균형잡힌 검이다.
“꾸룩--!!”
“좆까!!”
아무래도 욕설은 습관인 듯싶다. 살기를 내뿜으며 격렬한 기세로 글레이브를 휘둘러오는 오크를 앞에 두고도 욕설이 나오는 것을 보니 말이다.
휘릭--!!
오크의 힘이 실린 글레이브는 무섭다. 단련된 기사만큼은 아니더라도 타고나기를 인간보다 강한 힘을 갖고 태어나는 오크의 힘은 일반 병사에 비할 바가 아니다. 자칫 제대로 맞기라도 한다면 플레이트메일조차도 종잇장처럼 우그러뜨릴 수 있을 정도로 위협적이다.
“좆도!!”
하지만 아무리 위협적인 공격이라도 맞지 않으면 그만이다. 칸피니스는 강하게 내리쳐오는 글레이브를 몸을 살짝 옆으로 움직여 어렵지 않게 피해낸다. 마치 짜고 하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동작이다. 여전히 그의 입에서는 욕이 끊이지 않는다.
“썅!!”
공격을 피했으니 이번에는 그가 공격할 차례다. 섬뜩할 정도로 예기를 발하는 푸르른 검신이 붉은 핏방울을 무늬처럼 거느리며 정면의 오크를 향해 빠르게 나아간다. 검면에 비치는 나뭇그늘이 검의 움직임을 따라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마치 숲 속을 미끌어져 나가는 듯 하다.
“쿠룩--!!”
자세가 불안정한 탓일까? 아니면 너무 오래 전투를 계속한 탓일까? 공격이 약간 얕았다. 평소라면 허리를 훑고 지나가며 창자며 콩팥이며 내장을 모조리 갈라버렸을테지만, 이번에는 바깥쪽 창자 하나를 끊은 것이 고작이다. 인간이라면 충분히 치명상이라 할 수 있겠지만 오크라면 위험하다.
“썩을!!”
칸피니스가 강하다고 하는 것은 판단보다 행동이 더 빠르기 때문이다. 오크가 상처의 고통을 무릎쓰고 글레이브를 휘둘러았을 때 이미 칸피니스는 그 자리에 남아있지 않다. 어느새 오크의 오른쪽으로 돌아가 다시 검을 휘둘를 기회를 노리고 있다.
“뒈?!”
다른 검사들과는 달리 칸피니스의 미학은 검을 부딪히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시끄럽기 때문이다. 고함소리, 비명소리로도 시끄러워 죽겠는데 칼까지 맞부딪히고 있으면 쓸데없이 정신이 사납다는 것이 그가 칼을 맞대는 것을 싫어하는 이유다.
“쿠레렉--!!”
이번 공격은 효과적이었다. 조금전 공격이 얕았던 것을 감안해서 조금 강하게 검을 찔렀기 때문이다. 오크의 단단한 근육을 뚫고 뼈를 끊으며 내장을 절단해가는 것이 손잡이를 통해 생생하게 느껴진다. 칸피니스는 경험으로 제대로 오크의 생명줄을 갈랐음을 알 수 있다.
파핫--!!
살짝 비틀어 검을 빼는 것과 동시에 피가 뿜어져 나온다. 내장을 가르면서 몸 안을 흐르는 동맥을 자른 까닭이다.
“썅!”
피 정도야 맞아준다고 죽거나 다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이제껏 피가 묻지 않도록 애써 신경쓴 갑옷이 왠지 신경쓰인다. 왠지 한 방울의 피라도 묻으면 안될 것 같아 이번에도 힘껏 피를 피한다. 역시 욕을 동반한 상태다.
“빌어먹을!”
칸피니스가 특별히 싸울 때마다 입에 욕을 달고 다닌다거나 하는 타입인 것은 아니다. 성격이 직설적이고 경박한데다 자기중심적이기는 하지만 아무 때나 욕을 할 정도로 천박하지는 않다. 그런에도 지금 그가 이리 쉴 새 없이 욕을 씹어뱉는 이유는 한 사람 때문이다.
“개새끼!”
다음 상대를 찾아 휘도는 그의 시야로 막 오크 한 마리를 쓰러뜨리는 기사 한 명이 눈에 띈다. 투구 아래로 백금발 머리카락이 언뜻 보이는 기사는 매우 노련한 몸놀림으로 그다지 힘들이지 않으면서도 어느새 오크 한 마리를 베어가고 있는데, 칸피니스의 욕은 바로 그 기사를 향하고 있다.
“여어~~!!”
자신을 보는 시선을 느낀 것일까? 오크의 몸에 박혀있던 검을 빼낸 기사가 칸피니스를 돌아보며 손을 흔들어온다. 상당히 반갑다는 제스쳐. 하지만 칸피니스는 냉랭하게 고개를 돌릴 뿐이다. 마치 상대하기 싫은 더러운 물건을 본다는 듯 과격한 동작으로 그로부터 몸을 돌리고 잇다.
“프란츠 씹쌔꺄!!”
칸피니스의 화풀이 덕분에 엄한 오크 한 마리만 목이 날아가버린다. 물론 칸피니스가 화가 나있지 않았다 하더라도 살아남을 가능성은 없다. 다만 지금처럼 가차없이 순식간에 목이 베이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정도다.
“좆!!”
“개좆!!”
“씨앙!!”
“염병!!”
“개지랄!!”
“좆이나 빨아!!”
분이 치밀어오른 것인지 심해지는 욕설과 함께 칸피니스의 몸놀림이 더욱 격렬해진다. 더 빠르고, 더 강하게, 오크의 몸을 주저없이 베고 있다. 이제는 더 이상 피를 피하고 하는 여유도 없다. 그저 보이면 베고, 부딪히면 찌를 뿐이다.
“씨앙~!!”
하지만 오크의 수가 무한정인 것은 아니다. 칸피니스가 처음 맞닥뜨렸을 때 오크의 무리는 고작 200여마리에 불과했다. 물론 오크의 무리치고는 많은 수이기는 하지만 몬스터 토벌을 위해 나선 기사단 180여명에 비하면 그리 많은 것도 아니다. 한 사람 당 한 마리씩, 조금 실력 있는 20여명이 두 마리씩 상대하면 금방 처리할 수 있는 규모다. 그런 상황에서 미친듯 날뛰며 수십마리씩 베어댔으니 오크가 남아날 리 없다.
“뭐야? 벌써 끝이야?”
아쉽다기보다는 화가 난다는 표정이다. 분을 풀기 위해 더 많은 오크를 베어버리고 싶었는데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 오히려 그의 분을 자극한 것이다.
“더 없어? 없냐구?”
소리 지른다고 죽어버린 오크가 다시 살아나지는 않는다. 없는 오크가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도리어 풀어내지 못한 화가 엉켜 더욱 치밀어오를 뿐이다.
“씨발!! 오크 새끼들은 화풀이에조차 도움이 안돼!! 개썅!”
끝내 분을 이기지 못하고 오크의 시체에 화풀이해 보지만 그런다고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는 분이 풀리는 것은 아니다. 괜히 화만 더 북돋을 뿐이다.
“뭐 때문에 그리 화가 난거냐?”
한참을 발작하고 있으려니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의 곁으로 다가온다. 너무도 익숙한, 그리고 너무도 증오스러운 목소리다. 이 목소리야말로 그의 짜증의 원흉이다.
“씨발... 재수없어!!”
칸피니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앞으로 걸어간다. 돌아볼 것도 없다. 괜히 돌아봐야 부아받 돋을 뿐이다. 원치않는 사고라도 치게 되면 앞으로의 계획에도 큰 차질이 생긴다. 그런 생각으로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른 채 목소리로부터 멀어지겠다는 생각 하나로 무작정 걷는다.
“칸피니스...!!”
목소리가 뒤쫓아오지만 그의 걸음에는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다. 아무일도 없었던 양 처음 걷던 그대로 계속 걸어갈 뿐이다.
“칸피니스! 그쪽이 아니다!”
“신경끄쇼!”
“주둔지는 그 반대편이야! 그쪽은 위험하다!”
“때 되면 합류할테니까 걱정말고 혼자 가쇼!”
“칸피니스!!”
“씨발! 귀찮다니까! 저기 기사들하고 가서 놀아!”
“칸피니스!!”
쫓아오는 목소리가 귀찮아 발걸음 속도를 높인다.
“칸피니스!! 잠깐!!”
하지만 목소리 또한 발걸음 속도를 높여 쫓아온다. 숨소리나 발소리나 그를 따라잡기 위해 상당히 걸음 속도를 높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칸피니스는 좀더 걸음 속도를 높인다. 걷는다기보다는 뛴다고 하는 것이 걸맞는 듯 보이는 빠른 속도다.
“칸피니스!!”
혼혈이기는 하지만 칸피니스도 수파니의 혈통을 이었다. 숲에서 수파니보다 빠른 종족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물며 평소 숲에서 검술수련을 하던 칸피니스다. 숲에서 그보다 빠른 존재는 최소한 인간 중에는 없다. 갑옷 입은 중년의 기사라면 더더욱 따라잡을 수 없다.
“칸피니스!!”
목소리는 점차 멀어진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크기가 작아지는 것이 꽤나 거리가 벌어지는 모양이다. 왠지 기분이 좋아진 칸피니스는 걸음의 속도를 더욱 높인다.
“....”
뭐라 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 싶지만 무슨 소리인지는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숲속에서는 사람의 말소리가 멀리까지 뚜렷이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방심해서는 안된다. 자칫 걸음을 멈추고 뒤라도 돌아봤다가는 재수없는 얼굴을 봐야하는 끔찍한 경우도 무시할 수 없다.
바스락-- 바스락--
한참을 가니 나뭇잎 밟히는 소리만 들린다. 가끔 탁탁 튀기는 것은 나뭇가지가 밟혀 부러지는 소리다. 그 외에는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마치 칸피니스 혼자서만 존재하는 듯 적막만이 감돈다.
“개새끼! 떨궈버렸군.”
증오를 한참 담아 씹어뱉으며 뒤를 돌아보니 역시나 목소리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햇빛 한 점 들지 않는 숲의 어둠만이 한가득 나무들 사이를 채울 뿐이다.
“썩을 새끼!!”
칸피니스가 그토록 피하고 싶어하는 백금발의 기사는 프란츠 포르니르 델킨피에르, 델킨피에르의 자작이자 칸피니스의 생부가 되는 남자다. 칸피니스가 가장 싫어하고 증오해마지않는 바로 그 프란츠다.
칸피니스가 하루종일 기분나쁜 상태에서 욕을 입에 달고 있었던 것은 순전히 프란츠 포르니르 델킨피에르 자작과 함께 있어야 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저 꼴보기 싫은 프란츠가 가까운 곳에서 하루종일 그 위선의 가면을 쓴 채 어정거리는 걸 보고 있으니 절로 분통이 터져올라 욕을 참을 수 없었다.
“젠장젠장젠장...”
더 열받는 건 오늘이 바로 칼레아나의 방으로 잠입하는 날이었다는 점이다. 다른 건 다 용서하지만 여자와의 중요한 일을 방해하는 건 용서할 수 없다. 하물며 그 대상이 칼레아나라면 말할 필요도 없다.
“아아아... 그새끼만 아니었다면 지금쯤... 으흐흐... 씨발...”
아무리 생각해봐도 칼레아나의 알몸은 너무 아쉽다. 옷밖으로 보기에도 적당히 자란 것이 맛있어 보였는데. 나이가 아니이니 젖가슴이나 엉덩이나 아직 제대로 자라지 못했지만 그 나이치고는 나올 데는 나오고, 들어갈 데는 들어간 편이다. 더구나 검술을 익혀 탄력넘치는 근육은 안는 맛을 더해줄 것이다. 그런 것을 오늘 안을 수 있었는데 저 썩을 놈 때문에 이런 곳에서 몬스터나 잡느라 뒤로 미루게 되었으니 지금껏 프란츠를 살려두는 것만으로도 그의 인내심은 바닥나 있었다.
“칼레아나... 흐흐흑... 젠장...”
손을 움찔거리고 있으니 칼레아나와 수작부리며 만져보았던 그 앙증맞은 젖가슴이 손 안에 들어차 있는 듯싶다. 그 느낌을 피부의 따뜻함과 촉촉함을 더해 느낄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하니 아쉬움만 더해간다.
“칼레아나와 만나기로 한거냐?”
느닷없는 목소리. 그가 그토록 듣기 싫어 떨구려고 했던 목소리다.
“젠장!”
고개를 돌려보니 해가 서편으로 떨어지며 더욱 짙어진 어둠 속으로 나뭇잎을 뚫고 들어온 달빛을 반사하는 쇠갑옷이 보인다. 낮에 보았던 바로 그 갑옷이다. 프란츠 포르니르 델킨피에르의 그 갑옷.
“어떻게 쫓아온거유?”
코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어두운 숲속이다. 거기에 해까지 져서 더욱 어두워졌다. 흑암의 숲이라는 이름이 왜 붙었는가를 절실히 느낄 정도로 검은 어두움 그 자체인 숲에서 사람을 찾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엘프나 수파니가 아닌 이상에는. 칸피니스가 의아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같은 의문에 대해 프란츠는 단 한 마디로 대답한다.
“나도 기사다.”
“훗... 그렇군. 잊었수.”
하긴 델킨피에르 가문의 주인은 대대로 기사였다. 능력의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기사로서 제대로 교육받지 않으면 자작의 작위를 물려받을 수 없다. 잠시 그런 사실을 잊고 있었던 모양이다. 워낙에 싫은 인간이다보니 자작쯤 되면 작은 혼잣말 소리를 멀리서 듣고 추적할 수 있는 정도는 된다는 사실조차도 무의식중에 무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기딴에는 감탄한다고 한 말이지만 듣는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은 지 프란츠의 얼굴이 어둠속에서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확연히 일그러진다. 프란츠 따위 기사로 인정할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한 그의 말이나 태도가 그의 자존심을 사정없이 긁어놓은 때문이다.
“놀랍구려. 그 먼 거리에서 내가 혼잣말 하는 소리를 듣고 찾아오다니. 무늬만 기사는 아니었던 모양이오?”
“그렇게 놀라운 일인가?”
“당연히. 당신같은 쓰레기가 자작이라는 것도 놀라운데, 거기다 기사로서 제대로 수련까지 쌓았다니 놀랍기 그지없소. 쓰레기도 한 가지 장점은 있는 모양이오?”
“쓰레기? 나를 일컫는 말인가?”
“당연히!!”
조금전보다도 더욱 확연히 프란츠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어둠속으로 드러난 하얀 이가 이리저리 이지러지는 것을 보니 뺨이 분노로 파들파들 떨리고 있는 것이 눈에 보이는 듯 하다. 저 뻔뻔한 얼굴이 저토록 어찌할 바를 몰라하는 것을 보니 칸피니스는 내심 통쾌하다.
“나는 네 아버지다!”
“훗! 나는 에렌프 수파니의 아들이오!”
“나를 네 아버지로 인정할 수 없다는거냐?”
“당연히!”
무섭게 노려보는 프란츠에 비해 칸피니스의 표정은 태연하기만 하다. 비웃음마저 담뿍 머금은 채 빙글거리는 것이 어디서 개가 짖느냐는 태도다. 프란츠를 대화의 상대로 인정하지 못한다는 의도가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에렌프로 하여금 너를 낳게 한 것은 바로 나다. 내가 그녀를 안았기에 네가 태어난거다. 그런데도 에렌프의 아들이라는 건 인정하면서 내 아들이라는 사실은 인정할 수 없다는 거냐?”
“쯧쯧... 말은 바로합시다. 정확히 말하면 당신은 내 어머니를 강간한 강간범이야. 단순히 강간만 한 게 아니라 눈을 멀게 하고, 다리 근육을 끊어, 감금까지 한 흉악한 감금범이기도 하지. 나는 재수없게 당신같은 작자의 정액으로 인해 태어났을 뿐이고. 알겠수?”
“내 정액에서 태어났다고 하면서도 내가 아버지라는 사실은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냐?”
“훗~! 정액의 주인이면 모두 아버지요? 당신 진짜 그렇게 살아왔소?”
“그... 그건...”
당연히 할 말이 있을 리 없다. 프란츠 쯤 되면 나름대로 청렴하고 도덕적인 귀족이지만 역시 귀족이다보니 이런저런 여자 문제가 없지는 않다. 그나마 피임이라도 잘했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피임기술이 발달하지 못하다보니 불의의 임신 또한 얼마 되지는 하지만 전혀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가운데 지금 프란츠의 자식으로 인정받은 아이들은 몇 명 되지 않는다. 역시 귀족의 체통과 관습 때문이다. 칸피니스가 지적하는 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
“상황에 따라 자식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듯이, 부모 또한 마찬가지요. 내게 있어서 당신은 당신이 인정하지 못한 자식들처럼 부적격 부모일 뿐이거든. 있어봐야 수치스럽고 짜증만 날 뿐이오.”
“그... 그것은...”
“내게서 아버지 대접 받고 싶었다면 어머니께 잘 하지 그랬소? 아니면 내가 태어나자마자 당신 아들로 기르던가. 태어나고 나서 10여년을 어머니 아들로 내버려두고, 나중에서야 자기 아들이라고 주장해봐야 설득력이 없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소?”
“흠... 그래서 나를 네 아버지로 인정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당연히!”
“그럼 왜 델킨피에르 성에 남아있는 것이냐? 나를 아비로 생각지 않는다면 왜 내 성에서 내 돈으로 먹고사는거지?”
“훗!!”
참지 못하겠다는 듯 웃음이 터져나온다. 하지만 일그러진 얼굴이나 광기로 번들거리는 눈빛이나 단순히 웃겨서 웃은 것은 아닌 듯 보인다.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웃음으로 뒤트린 채 분출되어버린 것이다.
“그럼 먼저 내 어머니부터 풀어주던가. 어머니만 자유로우면 어디든지 떠날 수 있으니까.”
“네 어머니는 내 여자다!”
“하하핫... 정말 뻔뻔한 자식이네! 아무 여자나 붙잡아놓고 강간하고 가두어놓으면 모두 당신 여자 되나?”
“가... 강간이 아니다. 나... 난 네 어머니를... 에렌프를...”
“훗... 사랑한다고 말하려고?”
어이가 없다는 듯 한 줄기 코웃음을 토해낸 칸피니스의 얼굴에는 노골적인 비웃음이 떠올라 있다. 어둠 속에 자세히 볼 수는 없지만 그의 전신에서는 프란츠도 느낄 수 있는 참을 수 없는 경멸이 뿜어져나오고 있다.
“그... 그래!”
발작적으로 외쳐보지만 이미 기세는 전과 같지 않다. 칸피니스의 경멸에서 에렌프의 무표정에서 느꼈던 것과 같은 것을 느낀 때문이다. 한없는 슬픔과 한없는 경멸, 그리고 어둡게 가라앉은 분노와 증오.
“야이~~ 쓰레기 새끼야! 넌 그러니까 쓰레기밖에 안되는거야.”
“그...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마음에 안들어? 그럼 죽여줄까? 바로 이 자리에서?”
“무... 무슨...”
진짜다. 지금 칸피니스에게서 뿜어지는 살기는 진짜다. 조용하면서도 차갑게 타오르는, 피부에 와닿으며 뜨거운 열기가 따갑게 느껴지는 이 살기에는 진심이 담겨있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프란츠는 마른침을 꿀꺽 삼킨다.
“걱정마라. 지금 당장은 죽이지 않을테니까. 어머니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그 더러운 목숨을 연장시켜주지. 물론 그 다음은? 흐흐흐흐흐...”
“에... 에렌프?”
“네놈이 싫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완전히 미친 건 아니거든. 괜히 너같은 놈 건드렸다가 어머니께 피해가 가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아.”
“나... 나에게 이러는 건 후환이 두렵지 않다는 거냐?”
“응!”
화가 난 것은 아니다. 단순히 억눌린 기세를 회복해보고자 한 번 윽박질러본 것 뿐이다. 하지만 여전히 칸피니스는 짧고 여유로운 말투로 그를 완벽히 무시할 뿐이다.
“뭐... 뭐라?”
“넌 멍청이잖아.”
“뭐라고?”
“넌 날 못죽여. 내 어머니도. 만일 죽인다면 네 마누라나 기사단의 명령이 있을 경우겠지. 그렇지 않은데 나를 죽이려 들었다간 너도 몬스터 토벌하다 죽어간 18명의 위대한 자작 가운데 한 명으로 기록될걸?”
“아... 알고 있는거냐?”
프란츠의 목소리가 자기도 모르게 떨려온다. 모르고 있으리라 생각했던 일들이 아직 어린 칸피니스의 입에서 술술 새어나오고 있으니 놀라움과 함께 수치심이 그를 지배해온다.
“당연히! 나는 바보가 아니니까.”
프란츠의 격동과는 반대로 칸피니스의 태도는 여전히 변함이 없다. 모르는 게 바보라는 듯 뻔뻔할 정도로 당당하게, 프란츠의 아픈 곳을 아무렇지도 않게 찔러대고 있다. 미워서 죽여버리고 싶을 정도로.
“그... 그렇다면... 그렇다면 어쩔거냐? 네 어머니를 그... 들이... 죽이라 명령했다면? 그들이 나에게 네 어머니를 죽이고, 너를 죽이라 했다면? 그럼 너는 어쩔거냐?”
“죽여버릴거야!”
“죽여버린다고?”
“그래! 지금 당장 바로 너부터!”
이번의 살기는 조금 전과는 약간 다르다. 서늘하게 조용히 밀려드는 것이 마치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하지만 그 평온함 속에서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위험이 느껴진다. 최소한 프란츠 정도는 되어야 느낄 수 있는 그런 위험이다.
“나를 죽인다고?”
“못 죽일 것 같아?”
“네가 검술의 재능이 뛰어나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아직은 너무 어려. 이래뵈도 나는 제국동남제후령에서 알아주는 기사다.”
“훗!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거야? 지금 당장 해볼까?”
살기가 다시금 바뀐다. 그를 밀어내려는 듯 느리게 다가서는 살기는 마치 거대한 벽과 같다. 바늘 하나 들어갈 틈이 없는, 메테오로도 무너뜨릴 수 없는 절대의 벽이 형체없이 다가오는 듯한 압박감을 느낀다.
“시... 실력을... 숨기고 있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나도 그럴 거라고는 생각했어.”
“그... 그렇다면...”
“네 짐작대로야.”
“으으음...”
“의심스러우면 시험해볼까?”
“아니. 시험해볼 필요는 없겠지. 역시 너는 수파니의 혼혈이니까.”
“호오... 그럼 믿는건가?”
“물론. 너는 내 아들이기도 하니까.”
“흐흥...”
“화내지 않는건가?”
“그거야 당신이 뭐라 생각하든 당신 마음일테니까. 중요한 건 당신이 내 아버지가 아니라는 사실이지. 안그래?”
“그렇군.”
순순히 수긍하는 프란츠의 모습이 왠지 쓸쓸해 보인다. 하지만 칸피니스의 눈빛에는 조금의 동정도 느껴지지 않는다. 차갑고 써늘한 냉정함만이 살벌하게 빛나고 있을 뿐이다.
“어머니를 죽이라 하던가?”
“무슨...?”
“당신 말이 그런 뜻인 것 같아서.”
“그...”
“어머니는 나를 살려달라고 했을테고. 맞나?”
“어... 어떻게...”
“말했잖아. 나는 바보가 아니라고.”
“그렇군. 너는 바보가 아니었어. 아니 누구보다 영리한 아이였지.”
“내 짐작이 맞는다는 건가?”
“그래...”
당장에라도 분노에 사로잡혀 발작하리라 생각한 것일까? 프란츠의 목소리는 힘없이 잦아든다.
하지만 프란츠의 우려와는 달리 그의 긍정에도 불구하고 칸피니스는 여전히 냉정을 유지하고 있다. 살기조차도 잦아든 채 이전보다도 더욱 태연하고 침착한 모습이다.
“아... 무렇... 지도 않은... 건가?”
“당연히 아무렇지도 않을 리 없지.”
“그렇다면...?”
“어차피 이미 늦은 거 아닌가?”
“그건... 아마도 네 말이 맞을거다.”
“괜히 발작해봐야 죽은 사람이 살아돌아오지는 않아. 내가 대마도사라도 된다면 모를까 기껏해야 검술 좀 할 줄 아는 애송이에게 사람을 다시 살리는 재주가 있을 리 없고. 상황이라도 좋다면 모르겠지만 지금처럼 위험한 상황이라면 괜히 울고불고 난리피워봐야 나까지 죽을 뿐이지 않겠어?”
“내... 냉정하군.”
목소리가 저절로 떨린다. 그토록 경애하던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도 저토록 냉정하게 계산할 수 있다니. 슬픔마저 억누른 채 상황을 파악하고, 그에 대한 대처방법을 찾아내는 칸피니스의 모습에 프란츠는 본능적인 두려움마저 느낀다.
“칭찬 고맙군.”
“치... 칭찬인가?”
“그럼 ‘어머니~~!!’ 하고 외치며 울고불고 난리치다가 그놈들 손에 죽어야 한다는 건가?”
“그... 그건 아니지만...”
“그럼 좋은거잖아? 일단 냉정하니까 살아남을 수 있는 거고, 살아남을 수 있다면 복수도 할 수 있는 것 아니겠어?”
“그... 렇겠... 군...”
인정하기는 싫지만 칸피니스의 말이 옳다. 지금 감정에 휩싸여 섣불리 행동해봐야 불리한 건 칸피니스 뿐이다. 칸피니스가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저들의 배후를 혼자서 상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끝내는 자신만 목숨을 잃고 말 뿐이다. 그래서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 기분나쁘더라도 칸피니스처럼 남의 일인양 냉정을 유지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일 수 있는 것이다.
“그나저나 얘기해봐. 뭔가 방법이 있을거잖아? 어떤 식으로 나를 저들의 손에서 구해낼 생각인거지?”
“그... 그건...”
“생각해둔 게 있을 거 아냐? 뭐야? 어디 변두리 장원이라도 떼어주어 혼자 살아가라고 할 장정인거야? 네 머리로는 그 이상의 생각은 무리일텐데?”
“어... 그...”
“맞는 모양이로군. 그럼 파람블린츠인가? 거기가 아니라면 그 인간들을 납득시킬 수 없을테니까.”
“대... 대단하군.”
“절반은 수파니니까.”
“수... 수파니?”
“그렇게만 알아둬. 어쨌든 대충 내 짐작이 맞는 모양이지?”
“그... 그래.”
“정말 뻔한 사람이로군. 고작 15살밖에 안된 나도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이라니. 부끄러운 줄 알라구.”
프란츠로서는 억울하다. 뛰어나다고는 할 수 없지만 보통 이상의 재능과 노력으로 최소한 평균 이상은 된다고 평가될 정도의 실력은 갖추고 있다 자부해왔던 프란츠다. 그것은 프란츠만의 생각은 아니다. 역설적이게도 프란츠를 견제하고 위협하고 있는 이들이 더 비중있게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프란츠가 무능한 것이 아니라 칸피니스가 너무 뛰어난 것이다. 15살이라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의 냉정함과 교활함은 인간의 범주를 넘어선 것이라 할 수 있다. 프란츠와 같은 보통보다 조금 나일 뿐인 정도의 사람과 비교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하지만 프란츠는 그같은 불만을 입밖으로 꺼내지 못한다. 왠지 그런 말을 꺼냈다가는 자신이 너무도 비참해질 것만 같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저 속으로만 끙끙 앓을 뿐이다.
“나와 손잡을 생각 없나?”
왜 이런 말이 나오게 되었는지 프란츠 자신도 모른다. 아마도 기세로도 능력으로도 완전히 자신을 압도해버린 칸피니스에 대한 매료와 반발이 무의식 중에 표출된 듯하다. 그와 같은 뛰어난 재능과 힘을 자신의 것으로 하고 싶다는 욕망이 그아 처한 상황과 상승작용을 일으켜 자연스럽게 칸피니스에게 손을 내밀게 된 것이다.
“손?”
그런 프란츠의 입장을 알지 못하는 칸피니스로서는 황당하기만 한 제안이다. 죽여버리겠다고 다짐한 상대와 손을 잡다니. 자신을 죽이겠다 말한 상대에게 손을 내미는 프란츠의 정신상태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 멀뚱히 프란츠만을 바라볼 뿐이다.
“그래. 아무래도 너와 나는 공동의 적을 둔 것 같으니.”
“공동의 적? 그들 말인가?”
“그래. 원래는 너와는 별로 적이 될 이유가 없었지만 이제는 상황이 다르지 않나?”
“그건 사실이지. 결국 어머니를 죽인 건 그들이니까.”
“그렇다면 최소한 그들에 대해서만큼은 공동의 적을 갖고 있는 셈이지. 일시적으로 서로 손을 잡을 수도 있다는 말이야.”
“그건 어머니와의 약속과는 별개인 건가?”
“물론.”
“흐음...”
“너는 분명 검술에 뛰어난 재능이 있다. 머리도 좋지. 하지만 세력이 없다. 명분도 부족하고. 그래서는 네가 바라는 바를 이룰 수 없다. 그러나 나는 그 세력과 명분을 제공해줄 수 있지. 어떠냐? 나와 손잡는게?”
분명 설득력 있는 제안이다. 프란츠가 말한 부분은 칸피니스도 심각하게 고민해왔던 것들이니까. 하지만 여전히 껄끄러운 부분이 남아있다.
“호오... 아들로서인가?”
“할 수 있다면 그러고 싶다.”
“꿈깨라는 말을 꼭 해주어야 하나?”
노골적인 조롱이 담긴 표정. 프란츠는 굴욕감을 견디기 위해 아플 정도로 이를 악문다. 아니 굴욕감만은 아닌 듯 싶다. 최소한 굴욕감은 이리 슬프지 않을 것이니. 이것은 어쩌면 상실감인지도 모른다.
“꿈... 인건... 가?”
“확실히!”
“그럼 동업자로서는 어떤가?”
“한 가지만 더 준다면 한 번 생각해볼만 하지.”
“뭔가?”
“당신 목!”
“내... 목?”
“응!”
한마디로 목숨을 달라는 말이다. 그러나 목숨을 달라는 말치고는 너무 태연하다. 마치 옷에 묻은 검불 하나 떼어달라는 것과 같은 태도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진심으로 다가온다. 그것이 칸피니스와 같은 종류의 사람들이 말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내... 목이 필요한건가?”
“어머니를 위해서!”
“에렌프를 위해서?”
“그래! 아무래도 자식된 도리로 복수 정도는 해주어야 할테니까.”
“에렌프를... 위한... 복수인... 건가?”
“응!”
“그렇다면... 거부할 수 없겠군.”
“호오... 어머니를 위해 기꺼이 죽어주겠다는건가?”
“아마도...”
“훗... 재미있군.”
“재미있나?”
칸피니스는 그저 웃을 뿐이다. 칸피니스에게는 프란츠의 머릿속이 뻔히 보인다. 프란츠가 제공하는 세력과 명분을 받아들인 이상 칸피니스는 델킨피에르의 이름을 이을 수밖에 없다. 프란츠가 제공하는 세력이나 명분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니까. 아마도 그는 자신이 죽더라도 자신의 피를 이은 칸피니스가 델킨피에르를 잇는다면 그것으로 좋다고 여기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기꺼이 목숨을 내놓겠다 말할 수 있는 것이겠지.
물론 에렌프에 대한 마음도 어느정도는 있을 것이다. 방법은 분명 개자식의 그것이지만 에렌프를 생각하는 것 만큼은 진심이니까. 하지만 그보다는 그의 델킨피에르의 가주로서의 입장이 더욱 우선이었을 것이다. 최소한 칸피니스가 보기에는 그랬다. 아마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뭐 좋아. 어쨌든 이걸로 거래 성립이네. 당신은 세력과 명분, 당신의 목을 제공하고 나는 당신에게 내 검과 머리를 제공하면 되는거지?”
“그래.”
“어쨌든 기대하겠어. 당신의 목을 자르는 그날을.”
“나는 저들을 모조리 죽여버릴 수 있는 그날을 기대하도록 하지.”
“그건 당신 마음대로. 그대신 죽이는 건 나야. 알지?”
“물론. 그건 네 일이다.”
다짐을 받고 나니 비로소 칸피니스의 얼굴에 밝은 미소가 지어진다. 보는 사람마저도 왠지 기분이 좋아질 정도로 밝고 유쾌한 웃음이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죽음을 전제로 한 웃음이라 생각하니 프란츠에게는 어둡고 음습한 불쾌감이 느껴질 뿐이다.
“알면 됐어. 이제 슬슬 돌아가야 하지 않아?”
“돌아가려고?”
“당연하지 않아? 연기는 철저한게 좋다구. 괜히 당신과 내가 따로 오래 떨어져 있어봐야 좋을 일 없다고. 오히려 나중에 귀찮아지기만 하지.”
“그건 그렇겠군. 너와 내가 오래 같이 있었다는 사실이 그들의 귀에 들어간다면 너나 나나 무사하긴 힘들거야.”
“그 말은 틀렸어. 나는 무사할거야. 문제는 당신이지!”
“그런가?”
“그래!”
단호함. 넘치는 자신감에 근거한 단호함이다. 당당한 기세가 마치 빛처럼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듯하다.
“문제는 당신이라구. 그러니까 항상 긴장하란 말야. 알겠어? 당신을 죽이는 건 나라구.”
“그런건가?”
“뭐, 다른 사람의 손에 죽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어차피 계약조건이었으니 계약을 이행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포기하는 수밖에 없는거잖아? 그러니 잘하라구.”
“훗... 냉정하군.”
“당연한거야.”
조금의 미련조차도 가질 수 없도록 못 박는다. 의도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드러난 그의 진심은 조금의 틈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뼈가 시려올 정도다. 깊이 생각해본 적 없는 칸피니스와의 관계가 절실하게 느껴질 정도로 그의 깊은 곳을 차갑게 헤집는다.
“어서 서두르라고!”
“알았다!”
잡스런 생각을 하기에는 밤의 숲은 위험하다. 흑암의 숲은 그중에서도 몇 배나 더 위험하다. 생각할 여유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프란츠는 생각을 멈춘 채 급히 칸피니스의 뒤를 따른다. 한시라도 빨리 기사단과 합류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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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강간범과 피해여성을 결혼시키는 경우도 흔했습니다. 꼴같잖은 순결이데올로기 때문이지요. 어떻게 강간범을 피해여성과 결혼시킬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저는 그 자체도 범죄행위라 생각합니다. 생각해보세요. 강간 피해여성들이 강간으로 인해 입는 상처라는 것은 순결 그 이상의 것입니다. 정신적인 외상으로 인해 평생 정상적인 성행위 자체가 불가능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강간범과 피해여성을 결혼시키다니요!!
칸피니스의 태도는 우리나라의 일반적 도덕관념에 따르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어찌되었든 아버지이고 아들이니까요. 하지만 칸피니스에게는 지극히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프란츠는 아버지이기 이전에 어머니를 강간하고 불행에 빠뜨린 원수이기 때문입니다. 즉 혈연적으로만 부자지간일 뿐, 어머니를 기준으로 보았을 때는 전혀 존중할 가치가 없는 쓰레기일 뿐이니 당연히 태도가 불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해해주셨으면 하네요.
색검마도지성전에서 대사가 주를 이루는 이유는 역시 사람 사이의 관계를 정의하는 것은 생각이고, 그 생각이 표출되는 것이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이 많습니다. 더구나 아직은 초반이라 액션이라든가 섹스가 본격적으로 등장할 시점이 아닙니다. 색마검천황에서와 같은 유쾌한 하렘까지는 가야 할 길이 멀지요. 그래서 아직 초반이기 때문에 주로 대사를 중심으로 캐릭터들 간의 관계와 그를 통한 사건의 전개를 묘사하는 데에 주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음회예고)) 다음회에 대한 계획 전혀 없음. 밑그림은 그려져있는데 확정되지 않아서리.... ?...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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