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T THREE - the pursuit
"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런 말은 싫어요. 왠지 기분이 안 좋아 진단 말이에요. "
" 페릴... "
" 네, 할아버지. 왜... "
페릴은 자신의 손을 꼭 쥐며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빛을 보여주는 노인의 태도에 왠지 평소처럼 장난스러운 대답을 할 수 없다고 느끼며 말을 멈추고 입을 다물었다.
" 이 할아버지에게 한가지 약속해 주겠느냐? "
" ...네...? "
"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참고 견뎌내야 한다. 그리고 결코 화를 내지 말거라. 슬프면 울고 기쁘면 웃고 힘들면 투정도 부릴 수 있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화는 내지 말거라. "
" 네, 화내지 않겠어요. 약속 할께요. "
노인은 자신의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 천진스럽지만 꽤 진지한 대답을 하는 페릴을 보며 미소 지었다. 페릴은 자신의 대답이 할아버지의 마음에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얼굴 가득 환한 웃음을 지으며 그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 허허, 우리 페릴이 너무 커서 이제 늙은 할애비가 감당할 수 없겠는걸. "
- RoL -
노인은 침대 옆에 가만히 서서 페릴의 잠든 모습을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걸어온 시간의 무게가 고스란히 담긴 주름진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해 보였다. 한 동안 그렇게 페릴을 보고 있던 노인은 침대 옆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오른손을 그녀의 어깨로 가져갔다. 노인은 손바닥으로 노예의 낙인이 찍혀 있는 페릴의 어깨를 감싸 쥐고 눈을 감은 채 무언가에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 ...나를 지탱하고 있는 생명의 기운으로 세상의 모든 어긋난 추악함을 감추고 그 순결한 모습을 드러나게 하소서... HIDE CONTAMINATION(하이드 컨태미네이션)! "
노인의 입에서 흘러나오던 나직하지만 강한 의지를 담은 주문이 끝나자 그의 전신에서 푸르스름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빛은 천천히 그의 팔을 따라 페릴의 어깨를 감싸고 있는 손으로 모이면서 더욱 강렬한 기운을 띠었다. 노인의 손에서 페릴의 어깨로 옮겨가며 크기가 커진 빛의 덩어리는 조금씩 더 커지면서 방안을 온통 푸른 빛으로 뒤덮은 채 한참을 머물러 있다가 천천히 작아지기 시작했다.
" 하아... 하아아... "
빛이 완전히 사라지고 난 후 노인은 땀으로 흠뻑 젖은 어깨를 들썩이며 힘겹게 숨을 쉬었다. 처음의 모습보다 10년 이상은 늙어 보이는 노인은 침대 모서리를 짚고 힘겹게 몸을 일으켜 다시 페릴의 모습을 내려다 보았다.
" 그래... 이러면 되는 것을... 늙은 몸뚱이에 무슨 미련이 남아 지금껏 망설이고 있었는지... "
노인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페릴을 바라보던 시선을 옮겨 그것을 향하게 했다. 노인의 손에 들린 물건은 아무런 장식도 되어있지 않은 투박한 모양의 철제 펜던트였다.
" 이제 곧 자네 곁으로 갈텐데... 자네 얼굴을 어찌 볼지 걱정이구만... "
" 후우우우... "
노인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손에 들고 있던 펜던트를 페릴의 머리맡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 하지만 걱정은 말게나... 이 아이의 운명에 태양(日)의 기운이 담겨 있으니 언젠가 아무 근심 없이 밝게 웃을 수 있는 날이 올걸세... "
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던 노인은 고개를 돌려 마지막으로 페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 이젠 나도 쉬어야겠네... "
노인은 소리 나지 않게 살짝 문을 닫았고 방안에는 지금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모르고 꿈속을 헤매고 있는 페릴의 편안한 숨소리만 들려오고 있었다.
- RoL -
EARTH 14th, KRANDOR 338
" 어차피 오늘 중으로는 도착하기 힘들 것 같으니 이쯤에서 쉬었다 가도록 할까? "
헤르난은 말을 타고 있는대도 불구하고 오랜 여행에 지친 기색이 완연한 세실리안을 돌아보며 말했다. 세실리안은 내심 기다리고 있던 헤르난 왕자의 말에 기쁜 내색을 감추며 대답했다.
" 예, 시장하실 텐데 뭔가 먹을걸 준비해 보겠습니다. "
헤르난은 세실리안의 대답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에서 내려 고삐를 잡고 길 한쪽의 공터로 걸어갔다. 말이 주변의 풀을 뜯어 먹을 수 있게 고삐를 묶어놓지 않고 그냥 풀어둔 헤르난은 공터 한쪽에 있는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세실리안이 분주하게 먹을 것을 준비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기 시작했다. 세실리안 역시 말을 그냥 풀어둔 채 공터 한 가운데 불을 피우고 그 위에 쇠로 만들어진 그릇을 올려놓았다. 그릇에 수통의 물을 부어 넣고 그 앞에 한쪽 무릎을 땅에 대고 앉아 손에 든 나뭇가지로 불을 이리저리 뒤적이고 있던 세실리안은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들어 헤르난을 보았다.
" 왜 날 따라온 건가? "
" 무슨 말씀이신지... "
세실리안은 헤르난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한 듯 말을 더듬었다.
" 애초부터 날 막을 생각 따위는 없었던 것 아닌가? 그렇지 않았다면 이런 것들... 마치 미리 준비했던 것처럼 여행하는데 필요한 온갖 것들이 쏟아져 나오지는 않았을 테니까... 자네 가방이 마법 가방이라도 되지 않는 한은 말이야. "
헤르난의 자신이 말해 놓고도 뭔가 맞지 않는 구석이 있다는 것을 느끼고 피식 웃어버렸다.
" ...... "
세실리안은 그의 말에 한마디도 대꾸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마치 다 보고 있었던 듯 헤르난은 정확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 우린 친구 아니었던가? "
세실리안은 왕자의 물음에 흠칫 놀랐지만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 왕자님의 가시는 길을 지켜드리고 싶었을 뿐 다른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
물론 자신의 말투에 담긴 딱딱함 까지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 그런가... "
세실리안은 자신의 대답에 수긍하는 듯한 헤르난의 반응을 보고 이제 막 물이 끓기 시작한 그릇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 RoL -
" 그분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
식사를 하는 내내 서로 한마디도 하지 않아서인지 식사가 끝난 후에도 계속되는 무거운 분위기를 바꿔보려는 듯 세실리안이 물었다. 세실리안의 질문을 받은 헤르난의 눈빛이 차분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머리 속에 떠오르기 시작한 사랑하는 여인의 모습을 더욱 선명하게 떠올리려는 듯한 눈빛이었다.
" 그녀를 처음 만난 건 제국 황제의 생일파티에서였어. 처음 리시안느를 봤을 땐 그녀가 공주인줄 알고 실수를 했었지. 그녀는 당황한 듯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이 평범한 귀족의 딸이라고 설명했었고... "
세실리안은 리시안느에 대한 말을 하면서 꿈을 꾸는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헤르난을 보며 가슴 한구석이 저려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 새하얀 드레스에 감춰진 가녀린 몸에 한눈에 정신을 잃을 정도의 아름다운 얼굴이었지. 어딘지 모르게 보호해 주고 싶은 생각이 들게 만들면서도 한편으로는 감히 가까이 가지 못할 위엄 같은걸 풍기는 인상이었어. 물론 그래서 제국의 공주인줄 착각까지 했던 것이겠지... "
헤르난은 잠시 말을 멈추고 가만히 모닥불을 바라보다가 일어서며 다시 말했다.
" 오늘 내가 말이 많았군. 이만 자도록 하지. 내가 먼저 보초를 설 테니까 자네는 눈을 좀 붙이도록 하게. "
" 아닙니다. 제가 먼저... "
" 명령이다. "
세실리안은 헤르난을 따라 일어서며 말을 하다가 그의 단호한 말투에 그만 멈출 수 밖에 없었다. 헤르난은 세실리안이 자신을 바라보는 안타까움이 가득한 눈빛을 보지 못한 채 숲 속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한참을 걸어서 공터의 불빛이 희미하게 보이는 곳까지 간 헤르난은 한 손을 나무에 짚은 채 고개를 들어 어둠에 휩싸인 숲을 노려보았다. 지금껏 잠재우고 있던 분노가 조금 전 리시안느를 생각하면서부터 다시 끓어오르고 있었다.
" 크읏... "
헤르난은 주먹을 쥐고 "쿵" 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나무를 강하게 치며 분노가 담긴 신음성을 흘렸다. 어디에 있는지도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답답함이 그의 분노를 더욱 가중시키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녀가 위험에 처해 있을지도 모른다는 걱정과 두려움이 분노의 원천이 되어 끊임없이 그를 괴롭히고 있었던 것이다.
" 도대체, 왜에~! "
헤르난은 자신을 리시안느와 함께 할 수 없게 만든 운명을 저주하며 어둠을 향해 분노를 가득 담은 고함을 질렀다. 그의 고함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숲 전체에 울려 퍼졌고 정적에 잠겨 안식을 취하고 있던 숲의 생물들을 깨우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푸드득 거리는 날갯짓 소리가 들리며 이름 모를 새들이 숲 위쪽으로 날아올랐고 멀리서 잠을 방해 받아서 화가 난 듯한 동물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질문에 대답을 해주지는 않았다. 다만 나무들 사이로 스산한 바람소리만이 그의 분노를 달래는 듯 들려왔고 그렇게 숲은 다시 정적에 휩싸여 갔다.
"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런 말은 싫어요. 왠지 기분이 안 좋아 진단 말이에요. "
" 페릴... "
" 네, 할아버지. 왜... "
페릴은 자신의 손을 꼭 쥐며 깊이를 알 수 없는 눈빛을 보여주는 노인의 태도에 왠지 평소처럼 장난스러운 대답을 할 수 없다고 느끼며 말을 멈추고 입을 다물었다.
" 이 할아버지에게 한가지 약속해 주겠느냐? "
" ...네...? "
"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참고 견뎌내야 한다. 그리고 결코 화를 내지 말거라. 슬프면 울고 기쁘면 웃고 힘들면 투정도 부릴 수 있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화는 내지 말거라. "
" 네, 화내지 않겠어요. 약속 할께요. "
노인은 자신의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 천진스럽지만 꽤 진지한 대답을 하는 페릴을 보며 미소 지었다. 페릴은 자신의 대답이 할아버지의 마음에 들었다고 생각했는지 얼굴 가득 환한 웃음을 지으며 그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 허허, 우리 페릴이 너무 커서 이제 늙은 할애비가 감당할 수 없겠는걸. "
노인은 침대 옆에 가만히 서서 페릴의 잠든 모습을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걸어온 시간의 무게가 고스란히 담긴 주름진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해 보였다. 한 동안 그렇게 페릴을 보고 있던 노인은 침대 옆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오른손을 그녀의 어깨로 가져갔다. 노인은 손바닥으로 노예의 낙인이 찍혀 있는 페릴의 어깨를 감싸 쥐고 눈을 감은 채 무언가에 정신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 ...나를 지탱하고 있는 생명의 기운으로 세상의 모든 어긋난 추악함을 감추고 그 순결한 모습을 드러나게 하소서... HIDE CONTAMINATION(하이드 컨태미네이션)! "
노인의 입에서 흘러나오던 나직하지만 강한 의지를 담은 주문이 끝나자 그의 전신에서 푸르스름한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 빛은 천천히 그의 팔을 따라 페릴의 어깨를 감싸고 있는 손으로 모이면서 더욱 강렬한 기운을 띠었다. 노인의 손에서 페릴의 어깨로 옮겨가며 크기가 커진 빛의 덩어리는 조금씩 더 커지면서 방안을 온통 푸른 빛으로 뒤덮은 채 한참을 머물러 있다가 천천히 작아지기 시작했다.
" 하아... 하아아... "
빛이 완전히 사라지고 난 후 노인은 땀으로 흠뻑 젖은 어깨를 들썩이며 힘겹게 숨을 쉬었다. 처음의 모습보다 10년 이상은 늙어 보이는 노인은 침대 모서리를 짚고 힘겹게 몸을 일으켜 다시 페릴의 모습을 내려다 보았다.
" 그래... 이러면 되는 것을... 늙은 몸뚱이에 무슨 미련이 남아 지금껏 망설이고 있었는지... "
노인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더니 페릴을 바라보던 시선을 옮겨 그것을 향하게 했다. 노인의 손에 들린 물건은 아무런 장식도 되어있지 않은 투박한 모양의 철제 펜던트였다.
" 이제 곧 자네 곁으로 갈텐데... 자네 얼굴을 어찌 볼지 걱정이구만... "
" 후우우우... "
노인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손에 들고 있던 펜던트를 페릴의 머리맡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 하지만 걱정은 말게나... 이 아이의 운명에 태양(日)의 기운이 담겨 있으니 언젠가 아무 근심 없이 밝게 웃을 수 있는 날이 올걸세... "
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던 노인은 고개를 돌려 마지막으로 페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 이젠 나도 쉬어야겠네... "
노인은 소리 나지 않게 살짝 문을 닫았고 방안에는 지금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모르고 꿈속을 헤매고 있는 페릴의 편안한 숨소리만 들려오고 있었다.
EARTH 14th, KRANDOR 338
" 어차피 오늘 중으로는 도착하기 힘들 것 같으니 이쯤에서 쉬었다 가도록 할까? "
헤르난은 말을 타고 있는대도 불구하고 오랜 여행에 지친 기색이 완연한 세실리안을 돌아보며 말했다. 세실리안은 내심 기다리고 있던 헤르난 왕자의 말에 기쁜 내색을 감추며 대답했다.
" 예, 시장하실 텐데 뭔가 먹을걸 준비해 보겠습니다. "
헤르난은 세실리안의 대답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에서 내려 고삐를 잡고 길 한쪽의 공터로 걸어갔다. 말이 주변의 풀을 뜯어 먹을 수 있게 고삐를 묶어놓지 않고 그냥 풀어둔 헤르난은 공터 한쪽에 있는 나무 그루터기에 앉아 세실리안이 분주하게 먹을 것을 준비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기 시작했다. 세실리안 역시 말을 그냥 풀어둔 채 공터 한 가운데 불을 피우고 그 위에 쇠로 만들어진 그릇을 올려놓았다. 그릇에 수통의 물을 부어 넣고 그 앞에 한쪽 무릎을 땅에 대고 앉아 손에 든 나뭇가지로 불을 이리저리 뒤적이고 있던 세실리안은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들어 헤르난을 보았다.
" 왜 날 따라온 건가? "
" 무슨 말씀이신지... "
세실리안은 헤르난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한 듯 말을 더듬었다.
" 애초부터 날 막을 생각 따위는 없었던 것 아닌가? 그렇지 않았다면 이런 것들... 마치 미리 준비했던 것처럼 여행하는데 필요한 온갖 것들이 쏟아져 나오지는 않았을 테니까... 자네 가방이 마법 가방이라도 되지 않는 한은 말이야. "
헤르난의 자신이 말해 놓고도 뭔가 맞지 않는 구석이 있다는 것을 느끼고 피식 웃어버렸다.
" ...... "
세실리안은 그의 말에 한마디도 대꾸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마치 다 보고 있었던 듯 헤르난은 정확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 우린 친구 아니었던가? "
세실리안은 왕자의 물음에 흠칫 놀랐지만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 왕자님의 가시는 길을 지켜드리고 싶었을 뿐 다른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
물론 자신의 말투에 담긴 딱딱함 까지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 그런가... "
세실리안은 자신의 대답에 수긍하는 듯한 헤르난의 반응을 보고 이제 막 물이 끓기 시작한 그릇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 그분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
식사를 하는 내내 서로 한마디도 하지 않아서인지 식사가 끝난 후에도 계속되는 무거운 분위기를 바꿔보려는 듯 세실리안이 물었다. 세실리안의 질문을 받은 헤르난의 눈빛이 차분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머리 속에 떠오르기 시작한 사랑하는 여인의 모습을 더욱 선명하게 떠올리려는 듯한 눈빛이었다.
" 그녀를 처음 만난 건 제국 황제의 생일파티에서였어. 처음 리시안느를 봤을 땐 그녀가 공주인줄 알고 실수를 했었지. 그녀는 당황한 듯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이 평범한 귀족의 딸이라고 설명했었고... "
세실리안은 리시안느에 대한 말을 하면서 꿈을 꾸는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헤르난을 보며 가슴 한구석이 저려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 새하얀 드레스에 감춰진 가녀린 몸에 한눈에 정신을 잃을 정도의 아름다운 얼굴이었지. 어딘지 모르게 보호해 주고 싶은 생각이 들게 만들면서도 한편으로는 감히 가까이 가지 못할 위엄 같은걸 풍기는 인상이었어. 물론 그래서 제국의 공주인줄 착각까지 했던 것이겠지... "
헤르난은 잠시 말을 멈추고 가만히 모닥불을 바라보다가 일어서며 다시 말했다.
" 오늘 내가 말이 많았군. 이만 자도록 하지. 내가 먼저 보초를 설 테니까 자네는 눈을 좀 붙이도록 하게. "
" 아닙니다. 제가 먼저... "
" 명령이다. "
세실리안은 헤르난을 따라 일어서며 말을 하다가 그의 단호한 말투에 그만 멈출 수 밖에 없었다. 헤르난은 세실리안이 자신을 바라보는 안타까움이 가득한 눈빛을 보지 못한 채 숲 속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한참을 걸어서 공터의 불빛이 희미하게 보이는 곳까지 간 헤르난은 한 손을 나무에 짚은 채 고개를 들어 어둠에 휩싸인 숲을 노려보았다. 지금껏 잠재우고 있던 분노가 조금 전 리시안느를 생각하면서부터 다시 끓어오르고 있었다.
" 크읏... "
헤르난은 주먹을 쥐고 "쿵" 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나무를 강하게 치며 분노가 담긴 신음성을 흘렸다. 어디에 있는지도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답답함이 그의 분노를 더욱 가중시키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녀가 위험에 처해 있을지도 모른다는 걱정과 두려움이 분노의 원천이 되어 끊임없이 그를 괴롭히고 있었던 것이다.
" 도대체, 왜에~! "
헤르난은 자신을 리시안느와 함께 할 수 없게 만든 운명을 저주하며 어둠을 향해 분노를 가득 담은 고함을 질렀다. 그의 고함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숲 전체에 울려 퍼졌고 정적에 잠겨 안식을 취하고 있던 숲의 생물들을 깨우기 시작했다. 여기저기 푸드득 거리는 날갯짓 소리가 들리며 이름 모를 새들이 숲 위쪽으로 날아올랐고 멀리서 잠을 방해 받아서 화가 난 듯한 동물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아무도 그의 질문에 대답을 해주지는 않았다. 다만 나무들 사이로 스산한 바람소리만이 그의 분노를 달래는 듯 들려왔고 그렇게 숲은 다시 정적에 휩싸여 갔다.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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