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 델킨피에르의 회색빛 성벽이 보인다. 한가한 마을 사이로 높게 솟은 단단하고 흉측한 성벽이 역시 회색빛 이빨을 드러낸 채 으르렁거리며 주위를 내려보고 있다. 두려움. 그 악의에 식은땀이 솟는다. 그 잔혹한 선의에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적의. 저 성벽을 부숴뜨리고자 하는 적의가 땀인양 소름인양 그의 전신을 뒤덮는다.
“으음...”
처음이다. 델킨피에르 성을 보고 신음을 토한 것은. 이전까지 델킨피에르 성은 그저 성일 뿐이었다. 그가 돌아가야 할 집이 있는 성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성에는 그의 어머니가 없다. 그가 돌아가야 할 어머니가 없는 집은 그의 집이 아니다. 그의 어머니를 죽인 성은 단순한 성이 아니다. 증오해야 하고, 파괴해야 할 적일 뿐이다.
턱--!!
그의 살기를 느낀 모양이다. 어느새 다가온 프란츠가 그의 어깨 위로 건틀렛의 무게를 더한 두툼한 손을 올려온다. 묵직한 느낌이 어깨를 덮는 그 느낌에 칸피니스는 비로소 정신을 다잡는다. 증오와 적의를 자신의 깊은 곳에 간직한 채 평소의 모습을 회복한다.
“흥분하지 마라.”
“훗...”
자신의 충고를 가볍게 무시하는 그의 냉소에 프란츠는 비로소 안심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에 올린 손을 내린다.
“미우냐?”
“...”
“증오스러우냐?”
“...”
“죽이고 싶으냐?”
“...”
“모든 것을 부수고 싶으냐?”
“...”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나직이 물어오는 프란츠의 물음에 칸피니스는 묘한 웃음을 지으며 침묵을 지킨다. 입가에 매달린 미소는 비웃음인 듯 차갑다. 그러면서도 슬픔인 듯 축축하다. 프란츠는 알 수 없는 압력에 그만 묻던 말을 맘추고 칸피니스를 바라본다.
“...”
“...”
한참의 침묵. 말발굽소리와 갑옷이 마찰하는 쇳소리만이 들리는 사람만의 침묵이 계속된다. 멀리 성이 크게 다가올 때까지 사람의 침묵은 말과 쇳소리의 소란스러운 수다 속에 끈질기게 이어진다.
“훗!”
침묵을 깨뜨린 건 칸피니스의 코웃음이다.
“우스울 뿐이지. 우스워.”
“우습다라...”
“죽이는 건 어렵지 않아. 모두 부숴버리는 것도 불가능한 건 아니지. 안그래?”
“으음... 그렇겠지.”
“다만 그 끝에 무엇이 있는가가 문제지. 모두 죽여버리고, 모두 부숴버린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일 뿐이야.”
“흠...”
프란츠의 침음성은 칸피니스의 말에 대한 소극적 동의다.
“그래서... 앞으로의 계획은?”
“닷새 전에 이미 말하지 않았던가?”
“흠... 역시 그것 밖에 없는 건가?”
“복수에 미친 살인귀로 끝내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도 그렇겠지...”
“언제쯤 갈 수 있지?”
“무슨...?”
“파람블린츠.”
“아...”
프란츠는 반사적으로 주위를 둘러본다. 다행히 그들 주위에서 그들의 말을 엿듣는 사람은 없어보인다. 칸피니스와 보조를 맞추느라 일행의 한참 앞에서 이동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걱정할 것 없어. 다 생각하고 움직이는 거니까.”
“흠... 그런 것 같군. 하지만 이러면 의심을 받지 않을까?”
“무서워?”
“당연히. 나도 사람이니까. 괜히 몬스터 토벌 나갔다 죽은 조상 가운데 한 명에 들고 싶지는 않아구.”
“훗... 걱정할 것 없어. 저들이 보기엔 내가 심통난 걸 당신이 달래려 쫓아온 것으로 보일테니까.”
“그럴까?”
“당연하지. 저들은 당신이 아니라구. 저들이 아는 나는 당신의 비호를 받는 수파니의 혼혈아 정도에 불과할 걸?”
“음...”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행동하면 걱정할 것 없어. 저 병신들이 여기서 오가는 이야기를 짐작이라도 할 가능성은 거의 없을테니까.”
“후우... 알았다.”
큰 심호흡과 함께 프란츠의 표정도 평정을 되찾는다.
“이젠 좀 안심한 것 같군.”
“대충은...”
“그럼 이젠 대답을 들을 수 있겠지?”
“파람블린츠?”
끄덕--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보인 칸피니스의 눈빛이 대답을 강요하는 듯 무겁게 짓눌러온다. 날카로운 눈빛에 숨은 무거운 압력이다. 프란츠는 끝내 내뱉지 못한 숨을 속으로 삼켜 토하고 만다.
“한 달 안에 갈 수 있도록 하면 될까?”
“한... 달?”
“대략 그 정도는 필요할 것 같으니까.”
“흠...”
칸피니스는 잠시 생각에 잠긴다. 한 달이라는 시간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것이다. 하지만 한 달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없다. 스스로의 몸 하나만이 전부인 그에게 시간은 도리어 거추장스럽기만 할 뿐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대충 그정도면 괜찮을 것 같군.”
“괜찮은가?”
“그 이하로는 힘들잖아?”
칸피니스의 말대로다. 프란츠가 비록 영주의 자리에 있지만 영지의 일부를 직계도 아닌 서자에게 떼어주는 결정을 내리고 실행하는 데는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사실상 한 달도 무리하다 싶을 정도로 짧은 시간이다.
“그렇지.”
“불가능한 건 얘기하지 말자구. 가능한 것만 확실하게 추진하는 게 좋아.”
“흠...”
“어쨌든 한 달이면 되는거지?”
“아마도... 일이 어려워지면 그보다 더 걸릴 수도 있겠지만 파람블리츠는 누구도 원하지 않는 외진 곳이니까 별 문제는 없을거다.”
“다행이군.”
할 말을 끝낸 때문일까? 칸피니스는 다시 침묵으로 빠져든다. 칸피니스가 침묵하니 덩달아 프란츠로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조금의 침묵이 지난 후 다시 칸피니스의 입이 열린다.
“어머... 니... 는 성에 남아있을까?”
“글쎄...”
“아닐지도 모른다는 말인가?”
“엘레노아는 그녀를 무척이나 싫어했으니까.”
“엘레노아?”
칸피니스의 얼굴이 보기 흉하게 일그러진다. 엘레노아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참을 수 없는 증오와 경멸, 혐오가 일그러진 얼굴의 주름 사이로 노골적으로 흘러내린다.
“어머니의 흔적조차 성에 남기기 싫다는 뜻인가?”
“그럴지도...”
“그렇겠지. 그런 년이니까!”
“흠...”
“훗... 그 년이라면 분명 그렇게 했을거야. 그년이라면!”
엘레노아는 프란츠의 아내다. 델킨피에르 영지에 인접한 플로네츠 남작가의 둘째 딸로 슈베르티 백작가의 중매에 의해 아직 후계자 수업을 받고 있던 프란츠의 아내가 되었다. 현재 프란츠와의 사이에 히리스를 비롯한 2남 3녀를 두고 있다.
“썩을 년!”
엘레노아는 에렌프를 끔찍할 정도로 싫어했다. 특별히 프란츠를 사랑한 것도 아니면서, 프란츠의 사랑을 받는다는 이유만으로 에렌프를 질투하다 못해 증오하기까지 했다. 프란츠의 정부로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에렌프가 차별과 학대, 소외 속에 지내야 했던 데는 그녀의 그러한 증오가 큰 몫을 했었다. 그런 그녀가 끝내 에렌프의 죽음에 관여하게 되었다고 한다. 칸피니스의 그녀에 대한 증오가 더욱 강하고 격렬해질 수밖에 없다.
“후후훗... 재미있겠어. 그년을 강간하고, 강간하고, 또 강간해서,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꼴로 만들어준 다음에, 가장 잔인하고 고통스런 방법으로 죽이면 아마 재미있을거야. 사지의 근육을 끊고, 그 더러운 뼈를 뽑아 만든 의자 위에 앉힌 채 그 고통을 물어본다면 얼마나 통쾌할까? 안그래?”
칸피니스는 유쾌한 표정으로 프란츠의 의견을 구하려 하지만, 이미 그의 시야에는 프란츠가 보이지 않는다. 그의 살기를 견디지 못한 프란츠가 자신도 모르게 말고삐를 당겨 한참 뒤에 뒤쳐져 있기 때문이다.
두려움에 파랗게 질린 얼굴로 주저거리며 말을 몰아오는 모습이 정말 불쌍해 보인다. 그래도 제국 동남제후령에서 알아주는 기사 가운데 한 명이라는 프란츠 포르니르 델킨피에르 답지 않은 초라하고 비굴한 모습이다. 칸피니스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코웃음을 흘린다.
“뭐야? 무서운거야?”
“으... 음...”
“정말 무서운거야?”
“...”
수치심 때문일까?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프란츠가 다시 말을 몰아 그의 옆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얼굴은 긴장으로 굳어있는 것이 멀리서도 역력히 보인다. 역시나 한심한 녀석이다.
“쯧쯧... 그러니까 그런 덜떨어진 자식들에게 무시당하고 휘둘리기나 하지.”
푹 수그러든 그의 머리 위로 칸피니스의 가차없는 말이 아프게 던져진다. 차라리 모욕이었으면 싶을 정도로 냉정하고 단호한 목소리가 칼날처럼 그의 자존심을 시리게 후벼판다.
“당신도 각오해두는게 좋을거야. 엘레노아 그년만 죽이고 끝내지는 않을테니까. 아마 당신은 그녀의 죽음도 보지 못하고 죽게 될걸?”
“내가 그렇게 증오스러운가?”
“그런 점도 있기는 하지.”
“그럼...?”
“당신을 경멸하니까. 수치스러울 정도로 경멸하거든.”
“그래... 서?”
“응. 당연하지 않겠어?”
죽인다는 말을 하는 사람치고 칸피니스의 표정은 더없이 평온하기만 하다. 프란츠의 표정도 죽인다는 소리를 듣고 있는 사람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큰 변화를 보이지 않고 있다. 어찌 보면 체념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달관 같기도 한 묘한 느긋함이 느껴질 뿐이다.
“어쨌든 당신이 죽는 건 나중 일이니까 지금은 파람블리츠의 일만 생각하자구.”
“후우... 그렇겠지.”
“한 달 정도면 충분한거지?”
“물론.”
“그럼 그렇게 알고 기다리도록 하지.”
“기대해도 좋을거야.”
“후후훗... 당신따위에게 기대라... 웃기는군.”
“무슨...?”
“아냐, 아무것도. 어쨌든 맡은 일이나 제대로 하라고.”
흐느적흐느적 말에 몸을 맡기고 있는 칸피니스의 몸이 힘없이 이리저리 흔들린다. 어느새 그의 몸에서는 한 줌의 살기도, 한 오라기의 긴장도 남아있지 않다. 평소의 모습 그대로 느긋하게 풀어진 모습만이 보일 뿐이다.
“으음...”
프란츠는 칸피니스의 그같은 모습에 더 큰 두려움을 느낀다. 격렬한 증오와 분노조차도 한순간에 잠재워버릴 수 있는 그의 자제력에 가슴 저 깊은 곳을 서늘하게 옭죄이는 듯한 공포마저도 느낀다.
“서두르자고. 이제 조금 있으면 마을이야.”
“아... 알았다.”
이미 칸피니스는 그의 아들이 아니다. 칸피니스가 먼저 아들이기를 거부하기는 했지만 지금껏 그는 칸피니스가 자신의 아들이라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느낀 공포에서 그는 칸피니스의 본질을 깨닫는다. 그는 강자다. 그것도 냉혹하고 잔인하며 난폭한 강자. 증오와 적의까지 품고 있는 위험한 존재다. 델킨피에르의 이름을 이어갈 존재이기는 하지만 결코 그의 아들일 수 없는 존재다.
‘나... 나의 선택은... 과... 연... 옳았던... 것... 일까...?’
두려움 속에 알 수 없는 불안이 치솟는다. 하지만 돌이키기에는 너무 늦었다. 델킨피에르를 위해서도 반드시 칸피니스여야 한다. 반드시 그래야 한다. 후회는 의미가 없다.
마음을 다잡은 프란츠는 힘차게 말을 몰아 칸피니스의 옆에 나란히 선다. 여전히 동요가 남아있지만 그 행동에는 조금의 흔들림이 없다. 모든 것을 결심한 결연함만이 보일 뿐이다. 그런 그의 상태를 눈치챈 것일까? 칸피니스의 얼굴에도 미미한 미소가 보이는 듯하다.
“어떻게 하지?”
화려한 방. 커다란 창으로 쏟아지는 빛을 받으며 히리스가 난처한 표정으로 안절부절 못하고 있다.
“어떻게 하긴. 사실대로 말해줘야지.”
히리스와는 대조적으로 칼레아나의 태도는 더없이 침착하고 냉정하다. 뻔한 답을 묻는다는 듯 그 대꾸는 시큰둥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하지만은 뭔 하지만?”
“어떻게...”
“어쩔 수 없잖아. 그게 사실인걸.”
“그래도...”
평소 히리스의 모습과는 다른 나약하기만 한 모습이다. 항상 당당하고 단호한 모습을 보여주던 그녀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무기력한 불안에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어... 어떻게... 어떻게 에렌프가... 어머니가... 사라졌다고... 도망쳤다고...”
“사라져? 도망쳐?”
히리스의 걱정하는 표정과는 달리 칼레아나는 그녀의 걱정 따위 아무런 가치 없다는 듯 차가운 비웃음만을 보일 뿐이다. 코웃음과도 같이 단속적으로 이어지는 반문 속에 그녀으 눈빛이 더욱 차갑게 빛난다.
“정말 그렇게 믿는거야?”
칼레아나의 물음을 마주하는 히리스의 눈빛이 슬픈 웃음으로 잠겨든다.
“아니.”
살짝 고개를 저으며 토해내는 그녀의 대답은 칼레아나의 기대에서 벗어난 것이다. 아니 그녀가 기대했던, 기대할 수 없으리라 믿었던 대답이다.
“그럼?”
“나도 바보는 아니니까. 앞도 보지 못하고 걷지도 못하는 그녀가 도망쳤다고는 믿지 않아. 그녀를 굳이 누군가가 납치했을 가능성도 없고.”
“그렇다는 건...?”
칼레아나의 다그치는 듯한 눈빛에 히리스는 고개를 끄덕여 그녀의 기대에 응해준다.
“네가 생각하는대로야.”
“그럼 언니도...?”
“그래. 에렌프는 분명 죽었을거야. 그것도 너와 나를 낳아준 어머니에 의해서.”
“알... 고 있었던... 거야?”
“당연하잖아. 나는 네 언니라고.”
어느새 히리스는 예전의 당당함을 되찾고 있다. 칼레아나를 주눅들게 만들었던 그 당당하고 단호한 언니의 모습이 되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다.
“내가 두려워하는 건 칸피니스야. 칸피니스가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느낄 분노와 증오가 두려운거야.”
“카... 칸피... 니스...?”
“그래.”
“그... 그도 알까? 그의 어머니가 어떻게... 되었는... 가... 를?”
거기까지는 생각지 못한 모양이다. 칼레아나의 표정이 조금전 히리스의 그것과 같이 불안과 두려움으로 인해 심하게 떨리기 시작한다.
“칸피니스도 바보가 아니거든. 아니 누구보다도 영리하지. 너나 나보다 더. 어머니 엘레노아와 그녀를 돕는 무리들보다도 더 영리해. 너와 내가 아는 일을 그가 모를 리 없지 않겠니?”
“그... 그럼...?”
불안한 예감. 질문해오는 그녀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리고 있다. 듣기 싫은 이야기를 억지로 청하는 듯한 머뭇거림 속에 눈빛마저도 갈등으로 이리저리 제자리를 찾지 못한다. 히리스는 그런 동생이 모습에 안쓰러운 표정이 된다. 하지만 그녀가 원치 않더라도 사실을 얘기해주어야 한다. 그것이 언니로서의 책임이다.
“피바람이 불거야.”
“피바람...?”
“그래. 모두 죽을거야.”
“카... 칸피니... 스가...?”
“응.”
“그... 그가 어떻게... 그... 그는...”
“혼자지. 맞아. 그는 혼자야.”
“그... 그런데...?”
“하지만 강하지.”
“가... 강... 하... 다...?”
“응. 그는 강해. 최소한 우리 형제와 어머니를 죽이기에는 충분할 정도로.”
“그... 그럼 어떻게...?
불안이 공포로 실체화된다. 그녀가 반했던 남자의 증오가, 분노가, 벼려진 칼이 되어 그녀를 찔러오는 듯한 절망이 더없이 두려운 공포로 그녀를 덮쳐온다. 눈썹이, 눈꼬리가, 입술이, 턱이, 온 몸의 피부가 그 공포로 쉴새없이 떨려오기 시작한다.
“막아야 해.”
“뭐...?”
“그를 막아야해.”
“막아...?”
“응. 그를 설득해야 해.”
“어... 어떻게...?”
“다음 기회를 노리도록... 다음 기회를 노려 복수하도록 그를 설득해야 해. 지금은... 지금은 위험해!”
“뭐...? 그... 그게 무슨...?”
생각지도 못한 말이라 칼레아나는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다. 복수를 막자는 게 아니라 다음 기회를 노리게 만들자니. 아직도 엘레노아와 다른 형제들에게 애정이 남아있는 그녀로서는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다. 하지만 히리스는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말을 이어간다.
“지금 괜히 복수한다고 나섰다가 자칫 그가 죽을 수 있어. 결코 그를 죽게 해서는 안돼.”
“그럼 엄마는? 오빠는? 힐레인은?”
“힐레인은 살 수 있을거야?”
“뭐...? 그... 그게 무슨...?”
칼레아나의 눈이 불신의 빛을 담고 히리스를 노려보기 시작한다. 어머니와 형제의 죽음을 말하는 것치고는 너무도 담담한 모습인 언니를 도저히 인정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하지만 그 안에 숨은 작은 갈등을 히리스는 읽을 수 있다. 그녀도 같은 갈등을 경험했었으니까.
“나는 그가 좋아. 내 목숨보다도. 내 가족보다도 그가 좋아. 너는 그렇지 않니?”
“나... 나...?”
“그를 위해서라면 가족도 배신할 수 있어. 가족의 시체 위에서 그의 품에 안길 수 있어. 그가 살 수만 있다면 기꺼이 내 손으로 직접 가족들을 죽일거야. 넌 어때?”
“어... 언니...”
“너도 칸피니스가 좋다고 했지? 네가 칸피니스를 좋아하는 각오는 어때? 그를 위해 죽을 수 있니? 그를 위해 가족을 죽일 수 있어? 가족들의 피를 뒤집어쓴 그의 품에 안길 수 있어? 그런 각오로 그를 좋아하는거야?”
“어... 언니...”
턱--!!
어느새 등 뒤로 옷장이 그녀의 움직임을 가로막는다. 히리스에게 뿜어지는 살기에 저도 모르게 한참을 뒷걸음 쳤는지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할 옷장에 그녀의 등이 아프도록 밀착되어 있다.
“너의 각오는 어떻지? 너에게 그는 어떤 의미야? 그냥 호기심삼아 사귀어보려던 상대? 그정도니?”
“아... 아냐!”
“그럼?”
“나... 나는... 나는...”
“너는...?”
“나는... 나... 나는...”
쉽게 대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연인과 가족 가운데 누군가를 선택하는 것이 그리 쉽게 결론내려질 리 없다. 히리스도 그랬다. 그녀도 칸피니스의 본색을 알면서부터 그를 받아들이기까지 많은 고뇌의 시간이 필요했었다. 칼레아나라고 별다를 리 없다.
“답은 네 스스로 내려. 엄마를 도와 칸피니스를 치던지, 아니면 칸피니스가 엄마와 오빠들을 죽이는 걸 방관할 것인지... 그건 네 몫이야.”
툭--!!
말을 마침과 동시에 칼레아나의 앞에 떨어지는 것은 30센티미터 정도의 짧은 칼이다. 칼레아나가 호신용으로 매일 들고다니는 칼. 히리스는 그 칼을 들고 칼레아나에게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어... 언니... 나... 나를...?”
“응. 죽이려고 했었어.”
너무도 태연한 대답. 일순 그 의미가 제대로 입력되지 않는다.
“나... 나를...?”
“응. 네가 칸피니스의 일을 엄마에게 알릴 생각이라면 그대로 죽이려고 했었어.”
“그... 그럼...?”
“그 다음은 네가 스스로 생각해봐. 아마 너라면 나와 같은 결론에 다다를 수 있을테니까.”
“무... 무슨...?”
“너는 본질적으로 나와 같아. 아마도... 너도 그 사실을 분명히 깨닫게 될거야.”
“그...”
“그때쯤 되면 지금 내 행동을 너도 이해할 수 있을거야. 너와 난... 너무나도 닮은 자매... 니까...”
히리스의 표정에서 어느새 살기가 보이지 않는다. 조금전 살벌하기까지 하던 기세는 더이상 느껴지지 않는다. 언제나와 같은 단정하고 온화한, 그러면서도 엄격한 그녀의 모습이 그 자리를 대신할 뿐이다.
적응할 수 없을 정도의 빠른 변화다. 히리스의 평소와 같은 모습을 바라보는 칼레아나의 표정이 그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멍하니 허공을 떠돈다.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그녀의 머릿속에는 히리스의 말과 행동이 마치 풀지 못한 숙제인양 이리저리 얽혀 헤매이고 있다.
“너무 고민할 필요없어. 네가 느끼는 바대로, 원하는 바대로, 너의 몸과 생각을 맡겨. 그럼 네가 원하는 잡에 이를 수 있을거야. 아마... 도... 나와... 같... 은...”
히리스의 마지막 말은 아예 들리지도 않는다. 메아리인양 요란한 울림으로 온갖 생각이 뒤엉킨 사이로 헤집듯 파고들 뿐이다.
칼레아나의 의미없는 눈빛 위로 그렇게 긴 시간이 흐른다. 커튼을 스치운 바람이 히리스의 머릿결을 살풋 들었다 놓는다. 히리스의 얼굴에 유쾌한 웃음이 떠돈다. 너무나도 차갑고 단단한, 섬뜩할 정도로 따뜻하고 부드러운 웃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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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욕상실입니다. 돈 안되는 일은 일단 무조건 의욕상실입니다. 돈 되는 일도 못하고 있는데 돈 안되는 일로 바쁠 생각을 하니 아예 의욕이 안생깁니다. 그래서 요즘 연재는 거의 의무로 하고 있습니다. 처음 글 쓸 때의 자발적 의욕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이거라도 하지 않으면 왠지 무기력해질 것 같아서, 읽거주는 사람들 때문에 글을 쓰고 있습니다. 요즘 글의 퀄리티가 떨어지는 것은 아마도 그때문일 듯.
요즘 문체 하나를 실험하고 있습니다. 예전 야설 초기버전을 쓸 때의 그 문체입니다. 서사시 쓰려고 시도하던 때의 문체이기도 하구요. 제가 개인적으로 싫어하는 문체이기는 하지만, 또한 저에게 있어 가장 자연스러운 문체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야설에 가장 적합한 문체일지도 모르구요. 실험적으로 그 문체를 적용한 시험작을 한 번 써볼까 생각중입니다. 물론 카페에만요. 여러가지 한꺼번에 연재하면 조회수와 인기에 큰 지장이 있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거든요. 독자는 한 가지 타겟으로 고정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다음회예고>> 서울에 나타난 칸피니스. 하지만 텔레비전 뉴스를 보고 자신이 진정으로 있어야 할 곳을 깨닫는다. 그곳은 바로 미국. 미국인이 그리도 좋아하는 포로학대를 미국인들에게 돌려주기 위해 칸피니스는 워싱턴으로 향한다. 칸피니스... 네가 징계하고자 하는 그들이 늙은 남자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냐?
차라리 다음회 예고를 탄핵하세요!
“으음...”
처음이다. 델킨피에르 성을 보고 신음을 토한 것은. 이전까지 델킨피에르 성은 그저 성일 뿐이었다. 그가 돌아가야 할 집이 있는 성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성에는 그의 어머니가 없다. 그가 돌아가야 할 어머니가 없는 집은 그의 집이 아니다. 그의 어머니를 죽인 성은 단순한 성이 아니다. 증오해야 하고, 파괴해야 할 적일 뿐이다.
턱--!!
그의 살기를 느낀 모양이다. 어느새 다가온 프란츠가 그의 어깨 위로 건틀렛의 무게를 더한 두툼한 손을 올려온다. 묵직한 느낌이 어깨를 덮는 그 느낌에 칸피니스는 비로소 정신을 다잡는다. 증오와 적의를 자신의 깊은 곳에 간직한 채 평소의 모습을 회복한다.
“흥분하지 마라.”
“훗...”
자신의 충고를 가볍게 무시하는 그의 냉소에 프란츠는 비로소 안심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에 올린 손을 내린다.
“미우냐?”
“...”
“증오스러우냐?”
“...”
“죽이고 싶으냐?”
“...”
“모든 것을 부수고 싶으냐?”
“...”
말머리를 나란히 하고 나직이 물어오는 프란츠의 물음에 칸피니스는 묘한 웃음을 지으며 침묵을 지킨다. 입가에 매달린 미소는 비웃음인 듯 차갑다. 그러면서도 슬픔인 듯 축축하다. 프란츠는 알 수 없는 압력에 그만 묻던 말을 맘추고 칸피니스를 바라본다.
“...”
“...”
한참의 침묵. 말발굽소리와 갑옷이 마찰하는 쇳소리만이 들리는 사람만의 침묵이 계속된다. 멀리 성이 크게 다가올 때까지 사람의 침묵은 말과 쇳소리의 소란스러운 수다 속에 끈질기게 이어진다.
“훗!”
침묵을 깨뜨린 건 칸피니스의 코웃음이다.
“우스울 뿐이지. 우스워.”
“우습다라...”
“죽이는 건 어렵지 않아. 모두 부숴버리는 것도 불가능한 건 아니지. 안그래?”
“으음... 그렇겠지.”
“다만 그 끝에 무엇이 있는가가 문제지. 모두 죽여버리고, 모두 부숴버린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일 뿐이야.”
“흠...”
프란츠의 침음성은 칸피니스의 말에 대한 소극적 동의다.
“그래서... 앞으로의 계획은?”
“닷새 전에 이미 말하지 않았던가?”
“흠... 역시 그것 밖에 없는 건가?”
“복수에 미친 살인귀로 끝내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도 그렇겠지...”
“언제쯤 갈 수 있지?”
“무슨...?”
“파람블린츠.”
“아...”
프란츠는 반사적으로 주위를 둘러본다. 다행히 그들 주위에서 그들의 말을 엿듣는 사람은 없어보인다. 칸피니스와 보조를 맞추느라 일행의 한참 앞에서 이동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걱정할 것 없어. 다 생각하고 움직이는 거니까.”
“흠... 그런 것 같군. 하지만 이러면 의심을 받지 않을까?”
“무서워?”
“당연히. 나도 사람이니까. 괜히 몬스터 토벌 나갔다 죽은 조상 가운데 한 명에 들고 싶지는 않아구.”
“훗... 걱정할 것 없어. 저들이 보기엔 내가 심통난 걸 당신이 달래려 쫓아온 것으로 보일테니까.”
“그럴까?”
“당연하지. 저들은 당신이 아니라구. 저들이 아는 나는 당신의 비호를 받는 수파니의 혼혈아 정도에 불과할 걸?”
“음...”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행동하면 걱정할 것 없어. 저 병신들이 여기서 오가는 이야기를 짐작이라도 할 가능성은 거의 없을테니까.”
“후우... 알았다.”
큰 심호흡과 함께 프란츠의 표정도 평정을 되찾는다.
“이젠 좀 안심한 것 같군.”
“대충은...”
“그럼 이젠 대답을 들을 수 있겠지?”
“파람블린츠?”
끄덕--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보인 칸피니스의 눈빛이 대답을 강요하는 듯 무겁게 짓눌러온다. 날카로운 눈빛에 숨은 무거운 압력이다. 프란츠는 끝내 내뱉지 못한 숨을 속으로 삼켜 토하고 만다.
“한 달 안에 갈 수 있도록 하면 될까?”
“한... 달?”
“대략 그 정도는 필요할 것 같으니까.”
“흠...”
칸피니스는 잠시 생각에 잠긴다. 한 달이라는 시간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것이다. 하지만 한 달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없다. 스스로의 몸 하나만이 전부인 그에게 시간은 도리어 거추장스럽기만 할 뿐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대충 그정도면 괜찮을 것 같군.”
“괜찮은가?”
“그 이하로는 힘들잖아?”
칸피니스의 말대로다. 프란츠가 비록 영주의 자리에 있지만 영지의 일부를 직계도 아닌 서자에게 떼어주는 결정을 내리고 실행하는 데는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사실상 한 달도 무리하다 싶을 정도로 짧은 시간이다.
“그렇지.”
“불가능한 건 얘기하지 말자구. 가능한 것만 확실하게 추진하는 게 좋아.”
“흠...”
“어쨌든 한 달이면 되는거지?”
“아마도... 일이 어려워지면 그보다 더 걸릴 수도 있겠지만 파람블리츠는 누구도 원하지 않는 외진 곳이니까 별 문제는 없을거다.”
“다행이군.”
할 말을 끝낸 때문일까? 칸피니스는 다시 침묵으로 빠져든다. 칸피니스가 침묵하니 덩달아 프란츠로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조금의 침묵이 지난 후 다시 칸피니스의 입이 열린다.
“어머... 니... 는 성에 남아있을까?”
“글쎄...”
“아닐지도 모른다는 말인가?”
“엘레노아는 그녀를 무척이나 싫어했으니까.”
“엘레노아?”
칸피니스의 얼굴이 보기 흉하게 일그러진다. 엘레노아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참을 수 없는 증오와 경멸, 혐오가 일그러진 얼굴의 주름 사이로 노골적으로 흘러내린다.
“어머니의 흔적조차 성에 남기기 싫다는 뜻인가?”
“그럴지도...”
“그렇겠지. 그런 년이니까!”
“흠...”
“훗... 그 년이라면 분명 그렇게 했을거야. 그년이라면!”
엘레노아는 프란츠의 아내다. 델킨피에르 영지에 인접한 플로네츠 남작가의 둘째 딸로 슈베르티 백작가의 중매에 의해 아직 후계자 수업을 받고 있던 프란츠의 아내가 되었다. 현재 프란츠와의 사이에 히리스를 비롯한 2남 3녀를 두고 있다.
“썩을 년!”
엘레노아는 에렌프를 끔찍할 정도로 싫어했다. 특별히 프란츠를 사랑한 것도 아니면서, 프란츠의 사랑을 받는다는 이유만으로 에렌프를 질투하다 못해 증오하기까지 했다. 프란츠의 정부로서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에렌프가 차별과 학대, 소외 속에 지내야 했던 데는 그녀의 그러한 증오가 큰 몫을 했었다. 그런 그녀가 끝내 에렌프의 죽음에 관여하게 되었다고 한다. 칸피니스의 그녀에 대한 증오가 더욱 강하고 격렬해질 수밖에 없다.
“후후훗... 재미있겠어. 그년을 강간하고, 강간하고, 또 강간해서,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꼴로 만들어준 다음에, 가장 잔인하고 고통스런 방법으로 죽이면 아마 재미있을거야. 사지의 근육을 끊고, 그 더러운 뼈를 뽑아 만든 의자 위에 앉힌 채 그 고통을 물어본다면 얼마나 통쾌할까? 안그래?”
칸피니스는 유쾌한 표정으로 프란츠의 의견을 구하려 하지만, 이미 그의 시야에는 프란츠가 보이지 않는다. 그의 살기를 견디지 못한 프란츠가 자신도 모르게 말고삐를 당겨 한참 뒤에 뒤쳐져 있기 때문이다.
두려움에 파랗게 질린 얼굴로 주저거리며 말을 몰아오는 모습이 정말 불쌍해 보인다. 그래도 제국 동남제후령에서 알아주는 기사 가운데 한 명이라는 프란츠 포르니르 델킨피에르 답지 않은 초라하고 비굴한 모습이다. 칸피니스는 자신도 모르게 피식 코웃음을 흘린다.
“뭐야? 무서운거야?”
“으... 음...”
“정말 무서운거야?”
“...”
수치심 때문일까?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프란츠가 다시 말을 몰아 그의 옆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얼굴은 긴장으로 굳어있는 것이 멀리서도 역력히 보인다. 역시나 한심한 녀석이다.
“쯧쯧... 그러니까 그런 덜떨어진 자식들에게 무시당하고 휘둘리기나 하지.”
푹 수그러든 그의 머리 위로 칸피니스의 가차없는 말이 아프게 던져진다. 차라리 모욕이었으면 싶을 정도로 냉정하고 단호한 목소리가 칼날처럼 그의 자존심을 시리게 후벼판다.
“당신도 각오해두는게 좋을거야. 엘레노아 그년만 죽이고 끝내지는 않을테니까. 아마 당신은 그녀의 죽음도 보지 못하고 죽게 될걸?”
“내가 그렇게 증오스러운가?”
“그런 점도 있기는 하지.”
“그럼...?”
“당신을 경멸하니까. 수치스러울 정도로 경멸하거든.”
“그래... 서?”
“응. 당연하지 않겠어?”
죽인다는 말을 하는 사람치고 칸피니스의 표정은 더없이 평온하기만 하다. 프란츠의 표정도 죽인다는 소리를 듣고 있는 사람이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큰 변화를 보이지 않고 있다. 어찌 보면 체념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달관 같기도 한 묘한 느긋함이 느껴질 뿐이다.
“어쨌든 당신이 죽는 건 나중 일이니까 지금은 파람블리츠의 일만 생각하자구.”
“후우... 그렇겠지.”
“한 달 정도면 충분한거지?”
“물론.”
“그럼 그렇게 알고 기다리도록 하지.”
“기대해도 좋을거야.”
“후후훗... 당신따위에게 기대라... 웃기는군.”
“무슨...?”
“아냐, 아무것도. 어쨌든 맡은 일이나 제대로 하라고.”
흐느적흐느적 말에 몸을 맡기고 있는 칸피니스의 몸이 힘없이 이리저리 흔들린다. 어느새 그의 몸에서는 한 줌의 살기도, 한 오라기의 긴장도 남아있지 않다. 평소의 모습 그대로 느긋하게 풀어진 모습만이 보일 뿐이다.
“으음...”
프란츠는 칸피니스의 그같은 모습에 더 큰 두려움을 느낀다. 격렬한 증오와 분노조차도 한순간에 잠재워버릴 수 있는 그의 자제력에 가슴 저 깊은 곳을 서늘하게 옭죄이는 듯한 공포마저도 느낀다.
“서두르자고. 이제 조금 있으면 마을이야.”
“아... 알았다.”
이미 칸피니스는 그의 아들이 아니다. 칸피니스가 먼저 아들이기를 거부하기는 했지만 지금껏 그는 칸피니스가 자신의 아들이라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느낀 공포에서 그는 칸피니스의 본질을 깨닫는다. 그는 강자다. 그것도 냉혹하고 잔인하며 난폭한 강자. 증오와 적의까지 품고 있는 위험한 존재다. 델킨피에르의 이름을 이어갈 존재이기는 하지만 결코 그의 아들일 수 없는 존재다.
‘나... 나의 선택은... 과... 연... 옳았던... 것... 일까...?’
두려움 속에 알 수 없는 불안이 치솟는다. 하지만 돌이키기에는 너무 늦었다. 델킨피에르를 위해서도 반드시 칸피니스여야 한다. 반드시 그래야 한다. 후회는 의미가 없다.
마음을 다잡은 프란츠는 힘차게 말을 몰아 칸피니스의 옆에 나란히 선다. 여전히 동요가 남아있지만 그 행동에는 조금의 흔들림이 없다. 모든 것을 결심한 결연함만이 보일 뿐이다. 그런 그의 상태를 눈치챈 것일까? 칸피니스의 얼굴에도 미미한 미소가 보이는 듯하다.
“어떻게 하지?”
화려한 방. 커다란 창으로 쏟아지는 빛을 받으며 히리스가 난처한 표정으로 안절부절 못하고 있다.
“어떻게 하긴. 사실대로 말해줘야지.”
히리스와는 대조적으로 칼레아나의 태도는 더없이 침착하고 냉정하다. 뻔한 답을 묻는다는 듯 그 대꾸는 시큰둥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하지만은 뭔 하지만?”
“어떻게...”
“어쩔 수 없잖아. 그게 사실인걸.”
“그래도...”
평소 히리스의 모습과는 다른 나약하기만 한 모습이다. 항상 당당하고 단호한 모습을 보여주던 그녀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무기력한 불안에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어... 어떻게... 어떻게 에렌프가... 어머니가... 사라졌다고... 도망쳤다고...”
“사라져? 도망쳐?”
히리스의 걱정하는 표정과는 달리 칼레아나는 그녀의 걱정 따위 아무런 가치 없다는 듯 차가운 비웃음만을 보일 뿐이다. 코웃음과도 같이 단속적으로 이어지는 반문 속에 그녀으 눈빛이 더욱 차갑게 빛난다.
“정말 그렇게 믿는거야?”
칼레아나의 물음을 마주하는 히리스의 눈빛이 슬픈 웃음으로 잠겨든다.
“아니.”
살짝 고개를 저으며 토해내는 그녀의 대답은 칼레아나의 기대에서 벗어난 것이다. 아니 그녀가 기대했던, 기대할 수 없으리라 믿었던 대답이다.
“그럼?”
“나도 바보는 아니니까. 앞도 보지 못하고 걷지도 못하는 그녀가 도망쳤다고는 믿지 않아. 그녀를 굳이 누군가가 납치했을 가능성도 없고.”
“그렇다는 건...?”
칼레아나의 다그치는 듯한 눈빛에 히리스는 고개를 끄덕여 그녀의 기대에 응해준다.
“네가 생각하는대로야.”
“그럼 언니도...?”
“그래. 에렌프는 분명 죽었을거야. 그것도 너와 나를 낳아준 어머니에 의해서.”
“알... 고 있었던... 거야?”
“당연하잖아. 나는 네 언니라고.”
어느새 히리스는 예전의 당당함을 되찾고 있다. 칼레아나를 주눅들게 만들었던 그 당당하고 단호한 언니의 모습이 되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다.
“내가 두려워하는 건 칸피니스야. 칸피니스가 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느낄 분노와 증오가 두려운거야.”
“카... 칸피... 니스...?”
“그래.”
“그... 그도 알까? 그의 어머니가 어떻게... 되었는... 가... 를?”
거기까지는 생각지 못한 모양이다. 칼레아나의 표정이 조금전 히리스의 그것과 같이 불안과 두려움으로 인해 심하게 떨리기 시작한다.
“칸피니스도 바보가 아니거든. 아니 누구보다도 영리하지. 너나 나보다 더. 어머니 엘레노아와 그녀를 돕는 무리들보다도 더 영리해. 너와 내가 아는 일을 그가 모를 리 없지 않겠니?”
“그... 그럼...?”
불안한 예감. 질문해오는 그녀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리고 있다. 듣기 싫은 이야기를 억지로 청하는 듯한 머뭇거림 속에 눈빛마저도 갈등으로 이리저리 제자리를 찾지 못한다. 히리스는 그런 동생이 모습에 안쓰러운 표정이 된다. 하지만 그녀가 원치 않더라도 사실을 얘기해주어야 한다. 그것이 언니로서의 책임이다.
“피바람이 불거야.”
“피바람...?”
“그래. 모두 죽을거야.”
“카... 칸피니... 스가...?”
“응.”
“그... 그가 어떻게... 그... 그는...”
“혼자지. 맞아. 그는 혼자야.”
“그... 그런데...?”
“하지만 강하지.”
“가... 강... 하... 다...?”
“응. 그는 강해. 최소한 우리 형제와 어머니를 죽이기에는 충분할 정도로.”
“그... 그럼 어떻게...?
불안이 공포로 실체화된다. 그녀가 반했던 남자의 증오가, 분노가, 벼려진 칼이 되어 그녀를 찔러오는 듯한 절망이 더없이 두려운 공포로 그녀를 덮쳐온다. 눈썹이, 눈꼬리가, 입술이, 턱이, 온 몸의 피부가 그 공포로 쉴새없이 떨려오기 시작한다.
“막아야 해.”
“뭐...?”
“그를 막아야해.”
“막아...?”
“응. 그를 설득해야 해.”
“어... 어떻게...?”
“다음 기회를 노리도록... 다음 기회를 노려 복수하도록 그를 설득해야 해. 지금은... 지금은 위험해!”
“뭐...? 그... 그게 무슨...?”
생각지도 못한 말이라 칼레아나는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다. 복수를 막자는 게 아니라 다음 기회를 노리게 만들자니. 아직도 엘레노아와 다른 형제들에게 애정이 남아있는 그녀로서는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다. 하지만 히리스는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말을 이어간다.
“지금 괜히 복수한다고 나섰다가 자칫 그가 죽을 수 있어. 결코 그를 죽게 해서는 안돼.”
“그럼 엄마는? 오빠는? 힐레인은?”
“힐레인은 살 수 있을거야?”
“뭐...? 그... 그게 무슨...?”
칼레아나의 눈이 불신의 빛을 담고 히리스를 노려보기 시작한다. 어머니와 형제의 죽음을 말하는 것치고는 너무도 담담한 모습인 언니를 도저히 인정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하지만 그 안에 숨은 작은 갈등을 히리스는 읽을 수 있다. 그녀도 같은 갈등을 경험했었으니까.
“나는 그가 좋아. 내 목숨보다도. 내 가족보다도 그가 좋아. 너는 그렇지 않니?”
“나... 나...?”
“그를 위해서라면 가족도 배신할 수 있어. 가족의 시체 위에서 그의 품에 안길 수 있어. 그가 살 수만 있다면 기꺼이 내 손으로 직접 가족들을 죽일거야. 넌 어때?”
“어... 언니...”
“너도 칸피니스가 좋다고 했지? 네가 칸피니스를 좋아하는 각오는 어때? 그를 위해 죽을 수 있니? 그를 위해 가족을 죽일 수 있어? 가족들의 피를 뒤집어쓴 그의 품에 안길 수 있어? 그런 각오로 그를 좋아하는거야?”
“어... 언니...”
턱--!!
어느새 등 뒤로 옷장이 그녀의 움직임을 가로막는다. 히리스에게 뿜어지는 살기에 저도 모르게 한참을 뒷걸음 쳤는지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할 옷장에 그녀의 등이 아프도록 밀착되어 있다.
“너의 각오는 어떻지? 너에게 그는 어떤 의미야? 그냥 호기심삼아 사귀어보려던 상대? 그정도니?”
“아... 아냐!”
“그럼?”
“나... 나는... 나는...”
“너는...?”
“나는... 나... 나는...”
쉽게 대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연인과 가족 가운데 누군가를 선택하는 것이 그리 쉽게 결론내려질 리 없다. 히리스도 그랬다. 그녀도 칸피니스의 본색을 알면서부터 그를 받아들이기까지 많은 고뇌의 시간이 필요했었다. 칼레아나라고 별다를 리 없다.
“답은 네 스스로 내려. 엄마를 도와 칸피니스를 치던지, 아니면 칸피니스가 엄마와 오빠들을 죽이는 걸 방관할 것인지... 그건 네 몫이야.”
툭--!!
말을 마침과 동시에 칼레아나의 앞에 떨어지는 것은 30센티미터 정도의 짧은 칼이다. 칼레아나가 호신용으로 매일 들고다니는 칼. 히리스는 그 칼을 들고 칼레아나에게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던 것이다.
“어... 언니... 나... 나를...?”
“응. 죽이려고 했었어.”
너무도 태연한 대답. 일순 그 의미가 제대로 입력되지 않는다.
“나... 나를...?”
“응. 네가 칸피니스의 일을 엄마에게 알릴 생각이라면 그대로 죽이려고 했었어.”
“그... 그럼...?”
“그 다음은 네가 스스로 생각해봐. 아마 너라면 나와 같은 결론에 다다를 수 있을테니까.”
“무... 무슨...?”
“너는 본질적으로 나와 같아. 아마도... 너도 그 사실을 분명히 깨닫게 될거야.”
“그...”
“그때쯤 되면 지금 내 행동을 너도 이해할 수 있을거야. 너와 난... 너무나도 닮은 자매... 니까...”
히리스의 표정에서 어느새 살기가 보이지 않는다. 조금전 살벌하기까지 하던 기세는 더이상 느껴지지 않는다. 언제나와 같은 단정하고 온화한, 그러면서도 엄격한 그녀의 모습이 그 자리를 대신할 뿐이다.
적응할 수 없을 정도의 빠른 변화다. 히리스의 평소와 같은 모습을 바라보는 칼레아나의 표정이 그녀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멍하니 허공을 떠돈다.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그녀의 머릿속에는 히리스의 말과 행동이 마치 풀지 못한 숙제인양 이리저리 얽혀 헤매이고 있다.
“너무 고민할 필요없어. 네가 느끼는 바대로, 원하는 바대로, 너의 몸과 생각을 맡겨. 그럼 네가 원하는 잡에 이를 수 있을거야. 아마... 도... 나와... 같... 은...”
히리스의 마지막 말은 아예 들리지도 않는다. 메아리인양 요란한 울림으로 온갖 생각이 뒤엉킨 사이로 헤집듯 파고들 뿐이다.
칼레아나의 의미없는 눈빛 위로 그렇게 긴 시간이 흐른다. 커튼을 스치운 바람이 히리스의 머릿결을 살풋 들었다 놓는다. 히리스의 얼굴에 유쾌한 웃음이 떠돈다. 너무나도 차갑고 단단한, 섬뜩할 정도로 따뜻하고 부드러운 웃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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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욕상실입니다. 돈 안되는 일은 일단 무조건 의욕상실입니다. 돈 되는 일도 못하고 있는데 돈 안되는 일로 바쁠 생각을 하니 아예 의욕이 안생깁니다. 그래서 요즘 연재는 거의 의무로 하고 있습니다. 처음 글 쓸 때의 자발적 의욕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이거라도 하지 않으면 왠지 무기력해질 것 같아서, 읽거주는 사람들 때문에 글을 쓰고 있습니다. 요즘 글의 퀄리티가 떨어지는 것은 아마도 그때문일 듯.
요즘 문체 하나를 실험하고 있습니다. 예전 야설 초기버전을 쓸 때의 그 문체입니다. 서사시 쓰려고 시도하던 때의 문체이기도 하구요. 제가 개인적으로 싫어하는 문체이기는 하지만, 또한 저에게 있어 가장 자연스러운 문체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야설에 가장 적합한 문체일지도 모르구요. 실험적으로 그 문체를 적용한 시험작을 한 번 써볼까 생각중입니다. 물론 카페에만요. 여러가지 한꺼번에 연재하면 조회수와 인기에 큰 지장이 있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거든요. 독자는 한 가지 타겟으로 고정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다음회예고>> 서울에 나타난 칸피니스. 하지만 텔레비전 뉴스를 보고 자신이 진정으로 있어야 할 곳을 깨닫는다. 그곳은 바로 미국. 미국인이 그리도 좋아하는 포로학대를 미국인들에게 돌려주기 위해 칸피니스는 워싱턴으로 향한다. 칸피니스... 네가 징계하고자 하는 그들이 늙은 남자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냐?
차라리 다음회 예고를 탄핵하세요!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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