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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4 09:44 644회 0건
정례의회의 마지막 날인 이튿날, 야당 최고의원인 토메즈는 반가운 안건을 듣고는 얼굴에 화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의장단의 개회 선언에 이어 행정부에서 대변인이 나와 안건을 발표했다.
“오늘은 바이마샤르 정례의회의 마지막 날입니다. 따라서 아직 해결하지 못한 귀환자 지원금 규모에 관한 문제에 대한 조속한 여야간의 타결이 요구되는 바, 존경하는 의원님들께서는 의견의 격차를 줄이기 위한 토의를 좀 더 건설적으로 해 주시기 바랍니다. 에…또한, 마지막 날이니만큼 새로운 안건을 내어놓는 것은 명확히 비생산적인 행동이긴 하나, 조속히 처결되어야 할 문제인지라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지난 론지니아 전투에서 그 무훈이 높은 한율 공에 대한 인사안으로서, 여당 측에선 수도 방위의 책임이 있는 보위부의 군사자문직을 제안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야당의 의견을 수렴하여, 오늘 중으로 처결되기를 간곡히 당부드리는 바입니다.”
반색을 하며 쳐다보는 토메즈, 핫산은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번성하는 국가에는 당파를 넘어선 일치단결이 언제나 가장 앞서는 명분으로, 바이마샤르가 그런 식이었다. 정례의회가 끝난 후 열린 만찬에서 함께 자리를 한 토메즈와 핫산, 그리고 총리 기즈는 기분좋게 술잔을 부딪치며 화합을 다졌다.
“사실 핫산 의원께서 한율 공을 데리고 있으니 적잖이 부담이 됐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좋은 해결책을 내놓아주시니, 정말 감사하기도 하고, 전전긍긍했던 제가 부끄럽기도 하고 그러네요.”
“무슨 말씀을…. 저라도 그랬을 겁니다. 분열의 조짐이 조금이라도 보인다면 미리 싹을 제거해야지요. 안 그렇습니까?”
“그래그래, 그렇게들 해, 응? 그렇게들. 이렇게 마음을 합쳐주니 내가 총리노릇하기 얼마나 편한가, 응?”
“내년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
시민들은 의회의 일치단결을 매우 환영했다. 광장 대자보에 나붙은 정례의회 회의결과를 보고 모두들 의회를 칭찬하며 지지의 뜻을 표명했다. 이스마르 같은 놈들이야 늘상 서로 싸움이나 하느라고 한 해 예산안 통과도 못한다는데, 의원들이 참 대단해~? 자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모르나? 지난번에 대자보에 붙었었는데, 이스마르에선 예산 확보도 안돼서 난리라던데? 시끄럽겠네, 왕궁이…. 그보다 한율 공이 보위부에 간 것도 대단해. 군사 자문이면 대단한 거 아니야? 이건 정말 파격인데…? 이제 다른 나라 놈들이 우리보고 장사꾼 집단이라고 무시하지 못하겠어.
“할아버지, 들으셨어요?”
“뭘 말이냐?”
서재에 있던 핀은 차프라가 전해오는 소식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 역시 의회가 일치단결했다는 소식에는 만족하고 있었으나, 온전히 좋아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는 모양인지, 웃음 뒤에 한숨이 섞여 있었다.
“왜 그러세요?”
“…, 한율 공 말이다.”
“…예.”
“바이마샤르 시민도 아닌 사람을 조금 무리해서 보위부에 앉힌 것이 마음에 걸리는구나.”
“그게 왜요? 좋은 일이잖아요. 외지인이니까 요직에 앉히기는 그렇고….”
“그거야 그렇지만. 의원들이 바보는 아니야. 공로가 높다고 해서 상징적으로 앉혀놓기야 했지만, 거기 있어서는 혹여 전쟁이 나더라도 움직일 수 있는 실질적인 병력이 없어.”
“그거야 그렇지요.”
“결국 일시적으로 그 이름값을 좀 얻자는 것 뿐인데….”
“설마…, 그 다음 수순이 숙청이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그렇게까지야 하겠니. 바루나 국왕이라면 몰라도….”
핀은 책을 덮고는 연초를 꺼내 물었다. 피울래? 아, 예. 차프라는 그의 앞에 의자를 빼고 앉아 할아비의 연초에 먼저 불을 붙여주곤 자신도 하나 피워물었다.
“딱하게 됐구나, 한율 공이…. 퇴장이 꽤 쓸쓸하겠어.”
“….”
“왜 웃어?”
“전 이래서 정치는 못하겠어요. 할아버지는 앞일부터 생각하시잖아요. 어유~ 전 그거 머리 아파서 못해요, 못해….”
“헛, 그 놈 참….”

안식일 아침, 집에 돌아온 예스프리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지난 회의때 다쳤던 이마의 상처는 아물었지만, 대대장과 같은 중대장들의 핍박과 따돌림이 보통이 아니었다. 신경쓰지 않겠다 다짐하고 제 할 일만 열심히 하고는 있었지만, 견디는 일이 마음처럼 쉽지는 않았다.
“목욕 준비가 끝났습니다, 도련님.”
“어, 그래….”
벽난로 앞에 앉아있던 그는 시녀 마를렌의 말에 피곤한 몸을 일으켰다. 많이 피곤해 보이십니다. 음…. 발걸음을 옮기려다 자신의 동선을 막고 서 있는 마를렌을 보고는 멈칫했다. 고개를 약간 숙인 채 서 있는 그녀는 움직일 폼이 아니었다. 뭘 원하는지 알고 있었다.
“….”
다가오자 마를렌은 눈을 감고 그를 향해 턱을 들었다. 짧은 입맞춤이 있고 나서, 비로소 마를렌은 옆으로 물러서서 그가 지나가도록 해주었다. 따뜻한 물이 담겨 김이 모락모락 나는 목욕통에 몸을 담근 채 예스프리는 눈을 감았다. 마를렌은 그처럼 옷을 모두 벗은 채 따뜻한 물로 적신 수건을 접어 예스프리의 턱을 적셨다. 지난 안식일로부터 6일간 면도를 하지 않았는지, 예스프리의 턱에 돋은 수염들은 거칠었다. 숨소리가 길게 들려왔다. 면도날을 들어 대려던 마를렌이 그의 숨소리를 듣고는 다시 내려놓는다. 잠시 잠든 채로 둘 생각이었다.
“도련님.”
문을 열고 들어온 시종 하나가 부르는데, 마를렌이 돌아보며 손가락을 입에 가져다 댔다. 욕실 안의 모습을 살핀 시종이 돌아가지 않고 할 말이 있는 얼굴로 어물쩡거리자 마를렌이 다가왔다. 공주님께서 오셨습니다. 도련님을 뵈러요. 마를렌은 알았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여주었다. 시종이 나갔다.
공주가 무슨 일로 도련님을…. 그녀는 잠든 예스프리의 어깨에 가만히 손을 얹고 조용히 그를 깨웠다. 어, 어…, 내가 잠든 모양이네. 마를렌은 공주의 방문을 알렸다.
“레이네 공주님이…?”
목욕을 하러 들어간 그가 옷을 챙겨입고 나와야 했기에, 레이네는 응접실에서 좀 기다려야 했다. 사람이 간 지 한참이 지나서야 아직 면도도 못한 모습의 예스프리가 서두른 기미를 내보이며 응접실로 들어섰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
“오셨습니까.”
한쪽 무릎을 꿇고 인사하는 그에게 자리를 권했다. 곧이어 마를렌이 차와 다과를 내왔다. 공주의 눈이 마를렌을 훑어보았다.
“예쁜 아이네. 네 시녀야?”
“예. 공주님.”
“으응~.”
감상하듯 자신을 훑어보는 공주의 눈길이 불편했지만 마를렌은 내색하지 않았다. 무슨 일일까. 물어보려던 예스프리보다 먼저 레이네가 말을 꺼냈다.
“오늘 아침에 왔나봐. 얘기 들었어. 왕도 직할대에 있다면서.”
“예. 그렇습니다.”
“갑자기 중대장이 됐으니 주위에서 못살게 구는 것들도 많을 텐데….”
“….”
“어때, 견딜만 해?”
“견뎌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풋…. 듣던 대로네.”
“무슨…?”
“군인 안했으면 놀고 먹을 사람이라고…. 근위장한테서 들었거든.”
“아….”
예스프리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런데 공주님께선 무슨 일로…?”
“아…, 아냐. 그냥…. 지난번에 얼굴 보고 나서 한 번쯤 볼까 하고 있었어. 그래도 어렸을 땐 친구처럼 지냈으니까….”
“그것 때문에 일부러….”
“그건 아니고. 마침 사원에 가는 길이었거든. 애도기간이잖아. 고해성사는 해야지.”
“그렇군요. 오늘이 마지막 날이었던가요?”
“응. 예스프리는 했어?”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저도 아직….”
“그래. 그럼 같이 가자. 나도 가는 길이니까….”
“아, 저는….”
“왜? 싫어?”
이제 막 집에 와서 목욕을 하다 말고 나왔다. 사원에 가려면 적어도 면도라도 하고, 옷이라도 갈아입고 가야 했으니 당장 가는 것은 무리였다. 그가 머뭇거리자 레이네는 더 이상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그래, 좀 쉬다가 오후에 가면 되지 뭐. 차 잘 마셨어. 그녀는 더 이상 시간을 끌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까지나 정치적인 행보였으니, 괜한 시간은 보낼 수 없었다. 그것은 자신이 그토록 미워하는 국왕과 똑같은 점이었다.
정무대신의 애도기간의 마지막 날이었으니, 고해성사를 위한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왕도 대교구의 본원은 상당한 규모였다. 명분상 독실한 신자를 표방하는 바루나 국왕이 집권하면서, 왕도 팡그릿샤에 있는 사원을 대교구의 본원으로 정하고 새로 지어 준 건물이었다. 레이네는 그 중에서도 비교적 외진 곳에 있는 고해성사소로 향했다. 이 날의 고해성사는 왕도 대교구의 대주교 윌토르가 주관하고 있었고, 그가 바로 첫 번째 교섭 대상자였다.
“오늘은 사람도 없군…. 이미 고해성사는 다 했을텐데. 마지막 날 내가 여기서 뭘 하는 거람….”
배가 나온 것을 제외하면 그리 추한 외모는 아니었다. 그는 말린 과일을 주워먹으며 가지 않는 시간을 보내느라 애쓰고 있었다. 그 배는 주전부리를 하는 습관 때문인 모양이었다.
“뭐야, 오늘 같은 날…?”
본당을 돌아 고해성사소 쪽으로 난 길에서 마차 소리가 나자 그는 이마를 찌푸리며 귀찮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각따각 하는 말발굽 소리와 함께 나타난 것은 왕실의 마차였고, 의외라는 듯 윌토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국왕은 벌써 왔다 가지 않았나…? 공주가 있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어버렸는지. 어쨌든 그는 마차에서 누군가 내리기 전에 얼른 말린 과일을 치우라 명령하고는 성사소로 들어갔다.
판공당 사제실에 앉아 문틈으로 밖을 보던 그가 무릎을 탁 쳤다. 그러고 보니 공주가 안 왔었구나. 건방진 것…, 여태 뭘하다 이제 와서 날 귀찮게 하는 거야? 못마땅한 얼굴로 거칠게 몸을 뒤로 기댔다. 이윽고 성도실로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가 들려왔고, 윌토르는 곁눈질로 공주가 무릎꿇고 앉는 것을 살폈다. 가로쳐진 격자가 있어 자세히 볼 수는 없었지만 상당한 미인인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의 눈에 이채가 스쳐갔다.
‘꼬맹이 때 보고 처음인데…, 훌륭하게 컸구만….’
으흠, 으흠…. 신의 뜻을 섬기며 신의 뜻으로 살아가는 고결한 성도여, 그대는 무슨 죄를 지어 이 곳에 이르렀는가. 신의 뜻을 섬기며 신의 뜻을 전하는 고결하신 신의 종이시여, 실로 부끄럽사오나 죄의 행함을 뉘우치며 참회하여 거듭나기 위해 왔나이다.
“죄를 말하시오.”
“…저는 오늘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대죄를 이르고자 왔나이다.”
목소리를 침중하게 가라앉힌 레이네가 준비해 둔 대사를 줄줄이 읊어내기 시작했다. 어린 날 저는 신의 뜻을 전하는 고결하고 영명하신 사제 한 분을 뵈옵고, 그 분께 제 영혼을 송두리째 빼앗겼나이다. 두 번의 안식년이 지나서도 그 분께선 여전히 제 마음속에 계십니다. 불결하고도 불경한 저의 마음을 다스려주소서. 듣고 있던 윌토르는 특이하군…, 속으로 중얼거리며 입맛을 다셨다.
“들으라. 흠모하는 마음이 어찌 죄가 될 수 있겠는가. 허나 그대가 흠모하는 자는 신의 종, 신의 뜻에 따라 사는 이는 오직…,”
“거두어 들일 수 없나이다…!”
울음 섞인 목소리와 함께 고개를 푹 숙이는 레이네. 어…? 뭔가 심상치 않은데, 이거…. 레이네는 어깨를 울먹이며 흐느끼고 있었다. 더 말이 나올 것 같다. 윌토르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그녀가 계속할 때까지 기다렸다.
“저는…, 오늘 사제실에 계시는 분이 뉘신지 알고 있습니다. 그 분을 만나기 위해 부정한 방법까지 동원하여, 그 분께서 성사소를 지키는 날을 택하여 왔나이다….”
“…!”
윌토르는 깜짝 놀랐다. 나…??
“한 번만…, 부끄럽고 죄스럽사오나 단 한 번만이라도 그 분을 뵈올 수 있다면…, 이 불경에 대한 어떠한 죄를 물으셔도 달게 받을 것입니다….”
레이네는 속으로 스스로에게 감탄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렇게 나는 연기를 잘할까. 눈물을 뚝뚝 흘리며 서럽게 울고 있는 자신이 낯설 정도로 그녀는 기막힌 연기력을 선보였다. 배우들도 내 앞에 오면 기가 죽을 거다, 레이네는 그렇게 생각하며 더욱 서럽게 울었다.
흠, 흠…. 격자 너머에서 헛기침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무슨 말이 나올까,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그가 이 기회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참회당으로 나아가 죄를 구하며 기도하라. 신께서 그대의 소원을 들어주실 것이니….”
됐다…. 고개를 숙인 채 회심의 미소를 지은 레이네는 고해를 마치는 기도문을 외우고 자리에서 일어나 성도실을 나섰다. 참회당에 들어가 기도를 하는 척 하며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데, 누군가 들어서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다가오는 발소리가 났다. 최대한 간절해 보이는 얼굴로 기도에 열중한 척을 해야 했다. 바로 옆에 윌토르가 다가온 기척이 있었지만 레이네는 모른 척 눈을 감은 채 기도하는 손을 풀지 않았다.
“공주….”
“…!!”
몇 번을 연습한 동작이었다.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눈을 동그랗게 뜨곤 멍한 표정으로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윌토르와 눈이 마주쳤다. 괜찮았어. 이 정도면…, 연습한 보람이 가슴에 차올랐다. 그리고 눈물.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고, 곧이어 뺨을 타고 눈물이 방울져 흘러내렸다.
“감사하나이다…, 감사하나이다…. 주여…, 주여….”
레이네는 거듭 거듭 그렇게 말하며 윌토르의 앞에서 울음을 삼켰다. 절절하게 와 닿는 그녀의 행동에 윌토르도 뭉클해졌다.
“너무 자책하지 마시오, 공주…. 사랑은 결코 죄가 아니라오.”
“흑…! 흑…!”
그는 그 자리에 앉아 공주의 어깨를 감쌌다. 한 줌에 쥐어질 듯 가녀린 어깨, 그는 속으로 이게 웬 떡이냐 싶었다. 야들야들하기도 해라…. 레이네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하오나…, 하오나…! 이루어질 수 없는 마음입니다…!”
“일단 울음을 그치시오, 공주. 이렇게 내가 앞에 오지 않았습니까.”
“주교님….”
윌토르는 그녀의 자그마한 얼굴을 감싸며 눈물을 닦아주었다. 고개를 든 레이네의 얼굴이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젖은 속눈썹이 무척이나 고혹적인 분위기를 자아냈고, 윌토르의 눈빛 속에서 욕정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부드러운 손짓으로 레이네의 얼굴에 얼룩진 눈물을 지워주며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여기는 아무도 없지…? 애도기간 마지막 날 여길 찾는 정신나간 놈도 없을 테고…. 어쨌든 공주가 이렇게까지 날 생각하고 있었다니. 놀랍긴 하지만….’
그는 눈을 감은 채 자신의 손길을 마음껏 느끼듯 뺨을 부벼오는 공주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봤다. 훌륭하게 컸네…, 아주 훌륭해…! 하얀 피부와 약간 동그스름한 턱선, 그에 비해 길고 가늘게 뻗은 목선이 아름다웠다. 침을 꼴깍 삼키며 조심스럽게 입술을 가까이 했다.
온다…! 레이네는 그가 입맞춤을 하려고 얼굴을 가까이 하는 것을 느꼈다. 모른 척 해야 했다. 이윽고 입술이 닿자 그녀는 깜짝 놀란 척 하며 온몸을 흠칫 떨었다. 혹시 모르니 눈도 크게 떴다. 가늘게 감긴 윌토르의 속눈썹이 보이고, 그녀는 다시 눈을 감으며 몸에서 힘을 뺐다.
‘남자를 조금도 모르는구나. 아유~~ 요 귀여운 것…. 그래 오늘 내가 남자를 가르쳐 주지…!’
입술을 가만히 맞댄 채 그에게 응해오는 레이네의 모습에 윌토르는 그렇게 확신했다. 그는 입을 벌리며 레이네의 입술 사이로 혀를 밀어넣었다. 공주의 앞니에 혀가 닿았다 싶은 순간 레이네는 깜짝 놀라며 얼른 뒤로 물러났다.
“주…주교님…!!”
“공주…, 이건 자연스러운 일이오.”
“하지만 입맞춤에서 혀를 쓰는 건, 국법에서도 엄격히 금지하는 불결….”
“불결이라니…!!! 그럼 공주는 신의 뜻을 전하는 주교의 행동이 불결하다고 말하는 것이오…?!!”
“그건…, 아니지만….”
레이네는 난처한 얼굴로 울먹거리기까지 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윌토르는 한숨을 낮게 내쉬고는 그녀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신께서 우리에게 내리신 모든 것은, 그 나름의 사용처가 있는 것이오. 우리에게 혀가 있는 것은 맛을 보고 말을 하라고만 내려주신 것은 아니오.”
미친 놈…. 레이네는 속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사뭇 감화되어 가는 듯한 표정을 내비치고 있었다. 우리는 신으로부터 선사받은 모든 것을 최대한 활용하여, 우리 자신의 마음을 표현해야 하오. 그것이 신의 선물에 대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의 감사표시인 것입니다. 참 말 한 번 유창하게 잘 한다 싶었다. 궤변이긴 하지만 정말 레이네가, 윌토르가 생각하는 것처럼 무지몽매한 공주였다면, 제대로 걸려들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레이네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상한걸요….”
“이상하지 않소. 해 보면 내 말을 믿을 수 있을 것이오.”
“… ….”
레이네는 불안한 기색을 보이며 주위를 살피는 척 했다. 오늘은 아무도 오지 않습니다. 확인이라도 하듯 주위를 다시 한 번 살핀 레이네는 그를 보며 얼굴을 살짝 붉혔다. 윌토르가 다가서자 그녀는 턱을 살짝 들며 눈을 감았고, 이내 둘은 다시 입을 맞추었다. 이번엔 처음부터 혀가 입술을 비집고 들어왔다. 레이네는 몸을 가늘게 떨며 살며시 입술을 벌려 윌토르의 혀를 받아들였다.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조금 커지자, 윌토르는 그녀의 팔을 타고 올라가 슬그머니 어깨를 감싸안았다. 한 번 받아들여진 혀를 이번엔 더 깊이 넣었다. 레이네의 몸이 흠칫하다가 또다시 나긋나긋하게 풀어졌고, 두 손이 윌토르의 어깨로 올라갔다. 두툼한 손으로 감싸쥔 어깨로부터 미세한 경련이 전달되어 왔고, 윌토르는 이 고결한 여인이 자신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 확신하며 끌어안았다.
“으응….”
허리를 꽉 끌어안자 레이네는 가느다랗게 신음했다. 공주를 안았다는 사실이 그를 흥분시켰는지, 아랫배에 단단한 것이 느껴졌다. 새삼 역겨움이 치솟아 올랐지만, 레이네는 오히려 그의 혀를 빨아당기듯 파고들며 역겨움을 짓눌러버렸다. 조금만 더 참으면 이 자가 단초를 제공할 것이다. 레이네의 그런 예상은 곧바로 적중했다.
“악…!”
뾰족한 비명소리와 함께 레이네가 그를 밀쳐낸 것은 그의 손이 엉덩이를 끌어당기며 하복부를 밀착시켰을 때의 일이었다. 레이네는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혐오스럽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휘둥그레진 두 눈이 윌토르의 아랫도리에 불쑥 튀어나온 옷자락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당황하지 마시오, 공주.”
“저…저게 뭐에요?”
“이건 신께서 그대를 사랑하고 아껴주라는 뜻으로 내게 내리신 특별한 선물이지요. 신물입니다.”
하마터면 미친듯이 웃을 뻔했다. 어디서 저런 궤변을 주워듣고 섬기는지 기가 찰 노릇이었으나, 레이네는 모른 척 여전히 징그럽다는 얼굴을 한 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까지 더듬었다. 저…저게요…? 그렇다니까…. 자, 어서 이리 오시오. 다가서는 윌토르를 향해 손을 내밀어 멈추는 레이네. 확인이라도 하는 척해야 했다. 여기서 밀리면 주도권을 빼앗기게 된다고 되뇌이며 그녀는 침을 꼴깍 삼켰다.
“그…그걸로 어떻게 절 사랑해줄 수 있죠…?”
“모든 것은 내게 맡기시오. 내가 그대에게 신의 나라를 보여줄 것이오.”
“무…무서워요, 그것….”
“자아, 두려워 말고….”
다시 한 걸음 다가서고, 한 걸음 물러난다.
윌토르는 애간장이 탔고, 레이네는 간신히 웃음을 참고 있었다. 이 계집이 왜 이렇게 비싸게 굴어?하는 생각에 약간 짜증이 치밀어 올랐으나, 언제 공주를 한 번 안아볼까 싶어 윌토르는 다급해지는 마음을 꾹꾹 누르고 있었다. 자아, 자, 이리 오시오. 다시 해 봅시다. 이것은 흉측한 것이 아니오. 신의 선물이란 말이오. 오직 그대만을 위해 신께서 내게 내리신 신물이라 하지 않소.
“저…전 아직…, 죄송합니다. 주교님, 전 아직….”
“신의 사도가 하는 말을 믿지 못하고 신의 선물을 거절하겠단 말이오?!”
윌토르의 목소리가 짐짓 근엄해졌다. 표정까지 변한 윌토르가 버티고 서서 그녀에게 호통치듯하자, 레이네는 어깨를 움츠리며 뒤로 또다시 물러섰다. 그녀의 눈은 윌토르의 아랫도리를 계속 주시하고 있었다. 죄…죄송합니다. 주교님…. 전 아직 무서워요. 너무 갑작스러워서…. 신의 뜻을 거스르지 마시오. 모든 것은 오직 신의 뜻에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미안합니다. 전 아직 준비가 안됐어요…!”
레이네는 뒷걸음질을 쳐서 참회당의 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쾅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텅 빈 참회당을 울렸고, 울림이 잦아들 무렵 당당하게 서 있던 윌토르의 표정과 자세가 푹 풀어졌다.
“젠장…, 너무 순진한 것도 탈이군….”
하아…하고 한숨을 내뱉은 그가 쩝쩝 소리를 내며 입맛을 다셨다. 못내 아쉬운 모양이었다.

병부대신의 저택.
목욕을 마친 예스프리는 침대에서 마를렌과 뒤엉켜 있었다. 등에 베개를 받치고 앉은 그의 위에 마를렌이 올라타 스스로 율동하며 예스프리의 몸을 더듬고 있었다. 그녀의 혀가 매끈하게 면도한 예스프리의 턱과 뺨, 입술을 핥으며 적시고, 때때로 예스프리의 입속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마를렌…, 오늘따라…, 더 야해, 몸짓이….”
“그런가요…? 도련님도…, 오늘따라 더 대단하세요.”
“그거야 네가… 그렇게 해 주는 거지.”
“도련님이…, 제 몸안에 가득해요…!”
그녀는 몸을 뒤로 젖힌 뒤 엉덩이를 앞뒤로 좀 더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벌어진 다리 사이로 자신의 남근이 들락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예스프리의 허리에도 더 힘이 들어갔다. 점점 커지는 그녀의 신음이 방문 밖으로 새어나갔다.
라크라오스는 응접실에서 검을 닦다가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들어온 아내를 맞았다. 무슨 일 있습니까, 부인…? 그녀는 의자를 빼어 앉아 시종에게 차를 시켜놓고 분기를 꾹꾹 눌러담은 목소리로 차분히 말문을 열었다.
“지금 예스프리가 뭘 하고 있는 줄은 아세요?”
“음…. 쉬고 있겠지.”
“마를렌과 또 그짓을 하고 있습니다. 대체 언제까지 마를렌 저 아이를 두실 생각이십니까?”
“… ….”
정중히 묻는 말투였지만 따지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는 잠시 부인에게 시선을 주다가 이내 검을 내려놓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예스프리에게 여자를 가르쳐야 된다고 한 건 부인이오. 난 그렇게 기억하는데…? 정도가 지나치다고 여기진 않으십니까? 가르치라고 들여보냈지, 지금 마를렌 그 아이가 하는 건 창부나 다름이 없다는 거, 후작께서 그걸 모르실 리가 없잖습니까.
“이보시오, 부인….”
다시 검을 들어 검신을 살피는 라크라오스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 여기는 듯했다.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시종들 앞이라 소리를 지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행여 마를렌이 예스프리와 마음이라도 주고 받을까 그게 걱정입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럼 대체 뭐가 문제요?”
“뭐라고요?”
검을 검집에 넣는다.
“말씀이라고 하십니까? 마를렌 그 음탕한 계집이 내지르는 소리가 문밖까지 들리고 있어요. 지금 저 아이는 예스프리를 병들게 하는 겁니다!”
“… …. 그만 일로 소리 지르는 부인은 또 어떻고요. 게다가 다 큰 아들 쉬는 방에는 왜 간답니까?”
“가긴 누가 갑니까?”
“그럼 더 문제로군. 하인을 시켜서 아들 방을 지켜보는 게, 그것은 점잖은 행동이라고 생각하시오?”
“후작…!!”
“마를렌은 노예입니다. 시장에서 사 온 애란 말이지요. 그런 아이에게서 정숙함을 바라는 것이 더 이상하지 않습니까? 왕도사령부 직할대의 중대장씩이나 된 아들 방에 시도때도 없이 시종을 보내는 부인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습니다.”
“…!!”
부인의 눈에 핏발이 섰다. 라크라오스는 안색 한 번 변하지 않은 채 검을 옆에 기대어 놓고 찻잔을 비워냈다. 그가 일어서서 검을 들고 나서는 동안 부인은 꼼짝않고 자리에 앉아만 있었다. 나가려는 문소리가 날 때 부인의 목소리가 라크라오스를 멈추게 했다.
“당신은….”
“….”
“정말 당신 주인을 닮았군요.”
“… ….”
“정말…, 아닌 척…. 미련한 척…. 하지만 정말…, 정말 많이 닮았어.”
“폐하를 모욕하지 마시오. 이 나라를 모욕하는 것이오.”
단호하게 말과 함께 문이 닫혔다.
한 차례 정사가 끝나고 난 후 예스프리는 곧바로 일어나 있었다. 점심식사를 하기 전에 부친과의 검투 약속이 있었다. 아직 옷을 입지 않은 마를렌이 그의 몸에 흐르는 땀을 닦아주고, 물로 다시 한 번 닦았다.
“….”
늘어져 있는 예스프리의 남근이 눈앞에 있었다. 그녀의 눈이 거기에서 떨어지지 않자 예스프리는 피식 웃었다. 왜 웃으세요, 도련님…? 여전히 그것을 쳐다보며 묻는 마를렌, 예스프리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더는 안 돼. 점심때가 지나고 나면 시간이 있을거야.”
“누가 뭐라고 했나요?”
생글생글 웃는 그녀가 예스프리의 남근에 가볍게 입맞춤했다.
“도련님께서 성안 근위대에 계실 때가 좋았는데….”
“매일 할 수 있어서…?”
“매일 뵐 수 있어서요. 도련님은 갈수록 절 음탕한 여자 취급을 하시는군요.”
“너야말로 나한테 너무 마음을 쓰는 거 아니냐?”
“제가 도련님 아니면 누구에게 마음을 쓴답니까?”
“한 마디도 안 지는군…, 하하….”
마를렌은 예스프리가 부친과의 검술 대련을 하기 위해 나간 뒤 비로소 주변 정리를 시작했다. 침대보를 벗겨내고 다시 깔고, 일일이 주위를 돌며 단단하게 고정시킨 뒤 자신의 옷을 치우고는 벗겨낸 침대보를 둘둘 말아들었다. 인형을 안듯 둥글게 말린 그것을 얼굴에 묻고 냄새를 깊이 들이마셨다.
‘도련님 냄새….’
문득 아침에 봤던 왕녀 레이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저 지나는 길에 얼굴이나 보고 간다며 들렀다지만, 마를렌은 그녀가 보통 사람이 아니란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 눈매하며 말씨라든가 표정 하나하나가 ‘그저 별 생각없이 들를’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레이네가 지내는 후원에선 꽤 오랫동안 웃음소리가 잦아들지 않고 있었다. 참고 참았던 웃음을 이제와 터뜨린 것이었다. 그녀는 말은 꺼내지 않고 혼자서 잘도 웃었다.
“공주님, 무슨 일로 그렇게….”
“아니야, 아니야… 킥킥킥….”
당당히 버티고 서서 근엄한 얼굴로 신의 뜻을 설파하는 가운데 뽈록 나온 아랫도리가 생각나자 레이네는 다시 허리가 끊어질 듯 웃어제꼈다. 아~~ 정말이지…참느라고 혼났어, 쿡쿡쿡…. 후원의 시종들은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지만 누구 하나 묻는 사람이 없었다.

한율은 자신이 얻은 관사를 보며 입이 딱 벌어졌다. 핫산의 공관만큼은 아니었지만, 열 대여섯 식구가 족히 살만한 저택이었다. 보위부 행정실장과 행정부의 담당관이 그를 안내했다.
“아주 크진 않지만 연회장도 있습니다. 조촐한 파티를 여는 덴 무리가 없을 겁니다. 관사이다보니, 하인들은 모두 행정부에서 관리를 합니다. 불편함이 없도록…,”
“아니…, 이게 그러니까…. 보위부 군사자문이란 자리에 앉는 사람이면 이 집에 살게 된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보위부라면 이 나라의 수도방위를 책임지는 곳입니다. 그 곳의 군사자문이시니, 관품은 5품에 해당하는 높은 직책입니다. 이 정도 예우는 받으셔야지요.”
“몇 품까지 있기에….”
“총 18품입니다. 총리각하께서 1품이시고, 의회 의원분들께서 2품. 행정부와 정보부, 보위부 등의 수장들이 3품이죠.”
“하아…. 이런 큰 집에서 살면 심심해서 어쩐다….”
“말씀하시면 짐은 저희가 옮겨드리겠습니다.”
“이게 다요.”
“예…?”
한율은 등에 맨 행낭과 다섯 자루의 검을 가리키며 다시 말했다.
“이게 다란 말입니다.”
“… …. 하하, 농담도 잘하십니다.”
“으응? 이 양반 좀 보게…. 정말 이게 답니다. 제가 원래 떠돌이였다는 거 모르십니까?”
“그래서 더 놀랐어요.”
그 날 저녁에 찾아온 아로사와 나자르는 뜻밖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누가 봐도 권력이나 재물 따위에 관심이 없는 천성적인 방랑자로 보이는데, 실권도 업무도 별로 없는 보위부의 자문직을 수락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한율은 열적게 웃으며 머리를 긁었다.
“왜 수락하셨어요? 한율 사무랑님 정도면 얼마든지 일선 지휘관이 되실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게 말이에요. 말이 그럴듯해서 5품 직책이지, 이 자리는 정말 할 일이 없다구요.”
“그래서 받아들인 거야.”
한율의 대답은 뜻밖이었다. 아로사와 나자르는 대체 무슨 연유에서냐고 따져묻기라도 하듯한 눈으로 그를 주시했고, 한율은 연초를 눌러담고는 불을 붙였다.
“만약 일선 지휘관 자리를 나한테 주려고 하셨다면 거절했을 거야.”
“아니, 왜요? 그렇게 강하시면서…,”
“난…, 군사를 지휘해 본 적이 없거든.”
“… ….”
일리 있는 말이었다. 여태까지 7년동안 방랑하면서 항상 사람이 없는 곳으로 다녔어. 이유는 설명하기 어렵지만…, 어쨌든 항상 혼자 싸워왔다고. 병사로 넣어준다면 모를까. 수백 수천 명 군사를 지휘한다는 게 주먹질 좀 할 줄 안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 아로사와 나자르는 수긍이 갔다. 그들 자신도 군부에서 지휘관으로 있는 터라 그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수락하실 것까진 없었잖아요. 차라리 여기서 군사 훈련을 맡거나, 아니면 하다 못해 양성소에서 훈련관으로 계셔도….”
“답답한 소리 말게. 내가 어떤 식으로든 세력을 갖는다는 인상을 주면, 자네들 아버님한테 득될 것이 없어. 애당초 나한테 이런 허울뿐인 자리를 제시하신 것도 저기 뭐야 그….”
“야당하고 충돌을 피하려고 하셨던 거요?”
“그래그래, 그 야당 대표 토 뭐시기 하는 아저씨랑 싸우기 싫대서 그런 거였거든. 처음부터 솔직하게 다 말씀하시니까 뭐…, 나도 싫진 않더라고.”
“그래도….”
“그만들 해둬. 난 편하고 좋아. 어차피 갈 곳도 없었고…. 잠깐 쉬었다 간다 셈 치고 여기서 좀 지내지 뭐, 하하하~.”
참 속없는 사람이다 싶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서도 아로사와 나자르는 태연한 한율이 답답하기만 했다. 다각다각 하는 말발굽 소리만이 집으로 가는 길 위에 늘어섰고, 이따금씩 번갈아가며 내쉬는 두 사람의 한숨소리만이 거기에 간간이 뒤섞여 주위에 내리는 어스름만큼이나 귀가길을 무겁게 하였다.
다각다각…, 다각다각….
반대편에서 누군가 말을 달려오는 소리였다. 둘 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마주보고는 소리가 나는 쪽을 주시했다. 뭐가 펄럭거리는 걸 보니 여자임에는 틀림없었다. 조금 가까이 오자 그들은 아니 쟤가 여긴 웬일인가 하는 얼굴로 말을 재촉했다. 다급하게 말을 몰아오는 사람은 아이린이었다.
“야, 너 여기서 뭐 해…?”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
“어…, 지금 와…?”
달리긴 말이 달렸는데 아이린이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말 타는 일이 익숙하지 않았으니 그도 이상할 일은 없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아로사와 달리 나자르는 뭔가 알 듯한 얼굴로 아이린을 묘한 표정으로 주시했다.
“한율 공 공관으로 가. 얼른들 들어가. 난 그럼….”
“뭐? 니가 거길 왜 가? 그것도 이 시각에, 야, 야…!!”
아로사의 말이 끝나기도 채 전에 아이린은 흐럇~ 하면서 다시 말을 달렸다. 사무랑님이 뭘 잊어버리셨나…?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리는 아로사의 팔을 툭 치는 나자르는 웃는 낯이었다. 뭔가 아는 눈치였다. 왜 웃어? 너 뭐 알어? 너 진짜 모르고 있어? 뭔데…? 나자르는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로 되묻는 아로사를 보더니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으면서 말을 재촉해버렸다.
“야, 뭔데…, 어? 야, 말 안해줘?!”
한율은 뭔가로 한 대 얻어맞은 얼굴로 멍하니 담뱃대를 입에 문 채 굳어버렸다.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아이린의 얼굴은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급하게 왔다는 티가 났다.
“일단…. 앉으시지요.”
하아…, 하아….
숨을 진정시키며 그녀가 자리에 앉자 한율이 물이든 차든 마실 것을 부탁하고 그도 자리에 앉았다. 이런 대책없는 아가씨를 봤나…하는 얼굴로 쳐다보는 한율을 의식하는지 마는지 아이린은 숨을 고르고는 무슨 말인가를 하기 위해 뜸을 들이는 기색이었다.
“… ….”
무슨 말이 나올까. 한율은 잠자코 기다리면서 담배연기를 뿌옇게 만들었다. 이윽고 단단히 결심한 눈빛을 하고 그를 똑바로 쳐다본 아이린의 입에서 어처구니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한율 공. 나와 혼인해주세요!”
쿨럭쿨럭. 쿨럭쿨럭. 쿨~럭…, 쿨럭쿨럭…. 폐가 튀어나올 정도로 격하게 기침을 한 한율은 겨우 가슴을 진정시키곤 조금의 동요도 없이 단호하게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아이린에게 황망한 눈길을 던졌다. 이 아가씨가 철이 없어도 단단히 없구만 하는 눈길이었지만, 아이린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사랑해요.”
“….”
“사랑한다고요. 사랑해요!”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한쪽 무릎을 꿇으며 제대로 예의를 갖추어 절을 했다. 한율은 크게 당황하며 저도 자리에서 일어나 이게 무슨 짓이냐며 그녀를 일으켜 세우려 했으나, 다시 고개를 바짝 쳐드는 기세에 놀라 멈칫했다.
“한율 공, 나의 남편이 되어주시겠어요?”
“… ….”
난처하기 이를 데 없는 얼굴로 이 당돌한 아가씨를 쳐다보던 한율의 입에서 깊고 긴 한숨이 퍼져나왔다. 이봐요, 아가씨…. 일으켜 세우려는 그의 목에 아이린이 와락 달려들어 안겨버렸다.
“차 준비…. 어엇…!”
그 순간 들어오던 집사가 깜짝 놀라 뒤로 한발짝 물러났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그의 목을 힘껏 끌어안고는 그 말만 반복하는 아이린, 한율은 이 상황을 어떻게 해명해야 할 지 몰라 집사를 쳐다보면서 씁쓸하게 웃기만 했다.
“그게 정말이야?!”
계속해서 조르고 조르던 아로사는 목욕을 하고 나서야 나자르에게서 아이린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그걸 아직도 몰랐어? 너 눈치도 알아줘야겠다, 정말…. 혀를 차는 나자르의 말에는 개의치 않고 아로사는 손뼉을 마주치며 반색을 했다.
“잘됐다아~, 그럼 사무랑님하고 우린 가족이 되는 거네?”
“…. 잘 되기만 한다면 그렇겠지….”
“…? 무슨 말이야? 아이린이 차이기라도 한다는 거야?”
“….”
나자르는 얼른 대답하지 않고 슬립으로 갈아입었다. 답답하다는 듯 재촉하는 아로사에게 그녀는 연초를 꺼내 불을 붙이곤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한율 공은 바이마샤르 시민이 아니잖아, 원래….”
“그런데 이제는 시민이 됐잖아. 거기다 허울뿐이라곤 해도 5품 관품에 보위부 자문이야. 뭐가 문제야? 지위 높겠다, 돈 넉넉하게 받겠다.”
“너 그게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니…?”
“안될 건 뭐야? 바이마샤르는 민족 차별도 없고 외지인이라고 차별하거나 하는 것도 없잖아. 멀리 잉그라드 사람들도 들어와 귀화해서 혼인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너야말로 왜 안된다고 생각하는 건데…?”
“한율 공이 세력을 갖는 인상을 주는 것부터가 안좋다고 생각해서 던져주듯 한 게 보위부 자문직이야. 그런데 만약에 아이린이랑 혼인한다고 해봐. 야당하고 신경전 벌어질 조짐이라도 보이면 싹을 잘라내는 분이 아버지셔. 그런데 한율 공하고 아이린이 혼인하는 걸 허락하실 것 같애?”
“차라리 그렇게 해서 아버지가 세를 키우시면 되잖아. 나쁠 게 뭐 있어?”
“지금 당장 그렇게 한다고 치자. 그런데 선거는 가장 가까운 게 내후년이야. 그것도 의회 내에서 이루어지는 선거고, 전국적인 대선은 그 후년이나 되어야 한다고. 한율 공의 무훈이 높고 이름이 알려진 건 사실이지만, 그런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 내후년, 그 후년까지 그 명망이 이어질 것 같아?”
“너 진~짜 복잡하다…. 군인이면서 그런 생각까지 하며 어떻게 사니…?”
“말 돌리지 마. 난 지금 현실을 말하고 있는 거야.”
“몰라, 난 그런 거…. 사실 사무랑님이 뭐가 모자라? 인물 그만하면 괜찮겠다, 거기다 강하고. 인품 좋고….”
“인품 좋은지 어떻게 알아?”
“그게 무슨 소리야?”
아로사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불쾌한 티가 드러났다.
“나도 나쁜 분이라곤 생각 안해. 하지만 인품이 좋다 나쁘다를 말할 수 있을 만큼 우린 그 분에 대해 아는 게 없어.”
“너 진짜…, 너 대체 어느 편이야?”
“이게 편을 나누는 얘기야? 거기다 인물 그만하면 괜찮다는 건 또 누구 눈인데? 솔직히 말해서 그 아저씨, 수염 나니까 완전 산적이더라.”
“야!”
한편, 인물 그만그만 괜찮다는 말을 없는데서나마 들은 한율의 얼굴은 죽상이 되어 담배연기에 자욱하게 둘러싸여 있었다. 대답을 들을 때까지 가지 않겠다는 걸 억지로 타일러 보낸 후 그는 벽난로 앞에 앉아 술과 함께 연초를 줄에 끼고 있었다.
“전임이셨던 분도 상당한 애연가셨는데…, 이번 위원님께서는 더하시군요.”
“아…. 괴로우십니까? 이거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연초는 저도 태우는걸요. 그나저나 그 담뱃대는 정말 특이하군요.”
“예…,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제 모국에서 쓰던 겁니다.”
“들었습니다. 환국 출신이시라고….”
“예….”
그리고 잠시 둘 다 말이 없었다. 장작 타는 소리와 이따금씩 담배연기 뿜어내는 소리만이 실내를 감돌았다. 같이 하시겠습니까? 나쁠 것 없지요. 한율이 술을 권하자 집사는 약간 떨어진 곳에 있던 의자를 가져와 앉으며 그의 술통을 받아들고 한모금 마셨다. 꿀꺽꿀꺽 넘어가는 소릴 들으니 술을 들이키는 것이 제법 호쾌해보였다.
“크음…. 굉장히 센 술이군요.”
“허어…, 대단하십니다. 이걸 그렇게 드시다니….”
무게가 한결 가벼워진 술통을 들어보며 한율은 놀라워했다. 마흔을 조금 넘은 듯도 하고, 그보다 훨씬 많아 보이기도 하는 은백색 머리의 집사는 빙긋이 웃으며 연초를 꺼내 물고는 불을 붙였다.
“머리아프시겠습니다.”
“예…? 아……. 퓨우~~~~, 정말 미치겠습니다…. 어쩌자고 그렇게 철이 없는지…. 아니, 이 밤중에 혼자 말을 타고….”
“청혼까지 하시고요. 그것도 기사들이 귀족 아가씨들에게 하듯이….”
“그게 그런 거였습니까?”
“예….”
담담히 웃는 집사의 입에서 핫산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이 곳에 1년 이상 계실 거라면 말이지요.”
“…? 무슨 말입니까? 뭘요…?”
“곧 전쟁이 일어날 겁니다. 내년이 되면 동원령이 떨어지거나, 혹은 모병을 하겠지요. 론지니아 전투로 인해 명분도 잡았고요.”
“누가 명분을 잡았다는 겁니까…?”
“미키네오스의 국왕 바루나입니다.”
“… …”
“이상하게 여기시겠지요. 하지만 이번 귀환자 행렬은….”
“사정은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연합체의 주도권이 미키네오스에게로 넘어갔다는 것도 알고 있고요.”
“그러시군요.”
“그런데 내가 왜 위험하다는 겁니까…?”
“애초부터 위원님을 여기에서 노출시킬 생각이 바루나에겐 없었습니다. 위원님이 세우셨던 전투에서의 무훈은 사실상 잉그라드 군의 무훈에 밀려서 묻혀있었던 것이 사실이니까요.”
“크흠…. 실은 내가 더 많이 때려잡았는데…, 한 사람당으로 치면 말이죠.”
괜히 분한 척을 하는 한율을 보며 집사는 재를 한 차례 털었다.
“…, 바루나에겐 먼저 시간이 필요했을 겁니다. 위원님이 어떤 사람인지, 어디서 왔는지, 어떤 명분으로 싸우는지. 그런 것들을 알아내서 위원님이 적인지 아군인지를 판단하려 했겠지요.”
“아니 무슨….”
“그런데 위원님이 여기서 노출되어 버리니, 바루나로서는 손을 쓸 틈이 없어져버린 겁니다. 따로 알아봐야 할 이유도 사라져 버렸고요. 제가 보기에 위원님의 노출 자체는 큰 문제가 안될 것 같지만, 정작 여기서 상징적으로나마 군부의 직책에 앉으신 것 때문에 바이마샤르는 커다란 상징적 위상을 갖게 됐습니다. 마도들을 단신으로 물리친 위대한 영웅이 바이마샤르 군부에 있다는 거죠. 그것만으로도 바루나는 공화국을 견제하려 들 겁니다.”
한율은 기가 막혔다.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 그는 아는 바가 별로 없었지만, 듣기에 따라서는 쓸데없는 생각들이기도 했으니. 아니, 마도놈들 좀 때려잡았다고 내가 적인지 아군인지…, 아니 그보다, 세상에 적 아니면 아군밖에 없습니까? 그리고 이웃나라가 뭘 하건 무슨 상관이래요?
“바루나는 그런 사람입니다. 20년 전의 전쟁으로 가장 피폐해진 나라가 바로 미키네오스입니다. 전 국토가 초토화되다시피했죠. 그걸 일으켜 세운 사람이 바로 지금의 국왕 바루나입니다. 혼란기를 잠재우는 권력자들의 방식은….”
“… ….”
“사람이 할 짓이 아닌 것들이 많은 법이지요.”
이순간 한율은 누구보다도 눈앞에 있는 이 노인이 가장 놀라웠다. 언뜻 보기엔 그저 실눈의 사람 좋은 이웃 아저씨 같았으나,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마치 모든 상황을 한 눈에 꿰뚫어 보듯 거침없고 또한 설득력이 있었다.
“대체 누구십니까, 당신은…?”
“이 집의 집사입니다.”
“…누가 그걸 물었습니까…?”
“무슨 뜻으로 물으시는지 몰라 답변해드릴 수가 없습니다.”
능청스럽게 대답하는 집사의 말에 한율은 크하핫~ 하고 웃음을 터뜨려버렸고, 집사도 함께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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