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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4 23:28 611회 0건
서북 변방의 카몬 협곡에 도착하는 덴 상당한 시일이 걸렸다. 혼자서 말을 달려 왔다면 애저녁에 도착했을 임지는 두 배 이상의 시간이 걸려서야 겨우 당도했다. 마를렌을 데리고 온 데다 부친이 마련해 준 3백만 팡그에서 일부를 떼어 예스프리는 임지에 당도하기 전 병사들에게 나누어 줄 술과 식량, 그리고 의복을 넉넉하게 사들였다. 가면 일단 병사들을 휘두르기보다 마음을 위로해주라는 병부대신의 서한을 받고 나름 생각해 낸 방책이었다.
한겨울이 되어 가는 카몬 협곡의 추위는 혹독했다. 마차 안에서 슬쩍 커튼을 젖히고 보는 것만으로도 그 바람이 얼마나 매서운지 느껴질 정도였으니…. 예스프리는 모피를 두르고도 엄살을 부리는 마를렌을 보고는 피식 웃었다. 추운 걸 어떡해요…. 춥긴 뭘 이 정도로 그래. 여기서 어떻게 지내려고…. 도련님이 따뜻하게 해 주시면 되죠. 마를렌은 예스프리보다 나이는 많았지만, 그 앞에선 늘 애교를 부리곤 했다.
“여긴 내 임지야. 거기다 변방이라고. 집에 있을 때처럼은 어려워.”
“알아요, 안다구요~. 누가 뭐라나….”
시녀와 주인 사이라고 하기엔 격의가 없는 대화였으나 예스프리는 그런 것에 개의치 않은 지 오래였다. 마를렌의 자신을 향한 마음을 모르지 않았으니. 게다가 그는 신분이 엄격한 미키네오스의 사회 분위기에 조금은 염증을 느끼고 있기도 했다. 원칙을 중시하고 군율을 신탁처럼 떠받드는 그였지만, 자신의 도덕적 신념에 비추어 미키네오스의 신분 질서에는 모순이 많았다.
“많이…춥긴 춥군….”
마차에서 내린 그가 처음 한 말이었다.
성문에서부터 봤던 병사들의 모습은 그야말로 궁핍 그 자체였다. 여기 저기 기워서 더 기울 곳도 없어 보이는 장갑으로 겨우 찬바람을 막으며 차가운 창을 든 채 경계를 서는 병사는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그나마 바람을 피해 어디로 숨어들지 않았으면 다행이다 싶을 정도였다.
대대 통제실 앞에는 새로운 지휘관이 온다는 소식을 들은 중대장 다섯 명이 세차게 불어 닥치는 바람을 몸으로 받아내며 도열해 있었다. 마를렌을 마차 안에 두고 홀로 내린 예스프리는 무거운 안색으로 군례를 올리기 위해 줄지어 있는 병사들을 쓸어보았다. 경계 병력으로 나간 인원이 많은지, 신임 대대장을 향해 군례를 올리기 위해 모인 군사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키가 크고 마른 체구의 중대장이 앞으로 와 예스프리가 새로운 대대장인지 확인했다.
“신임 대대장이신 예스프리 그라토레 트레제게 경이십니까?”
“그렇네. 자네는…?”
그는 절도 있게 군례를 올리며 우렁찬 목소리로 답했다.
“군례 받으십시오! 카몬 독립대대 3중대, 성곽수비 담당관 제롬 모로니에입니다!!”
“음….”
제롬은 돌아서서 병사들을 향해 구령을 붙였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병사들 관리를 잘 해왔다는 것이 눈에 보였다. 그들의 동작은 제법 일치하여 보기에 그럴싸했다. 예스프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군사들이 도열한 가운데로 걸어 들어갔다.
“앉지.”
다섯 명의 중대장들은 변방을 오랫동안 지킨 흔적이 역력했다. 거칠고 까칠한 수염과 그을린 얼굴들, 게다가 만년설로 뒤덮인 곳에서 항상 호된 바람을 맞으며 지낸 탓에 피부들은 딱딱하게 굳어 갈라져 있었다. 예스프리의 손이 가지런히 벗어 책상에 얹어 놓은 그들의 장갑으로 향했다. 중대장들이라 해서 사정이 다르지는 않았다. 서툴게 바느질을 하여 기운 장갑은 별 소용이 없어 보였다. 녹이 슨 갑주는 닦을 기름이 없어 물걸레 등으로 대충 다듬은 것이 틀림없었다. 지휘관급에게 지급되는 모피는 털이 군데 군데 빠져 입으나 마나 한 듯했다. 예스프리는 그들 몰래 깊이 한숨 지었다.
“통성명부터 하지.”
“1중대장 레미 벨보입니다. 성문 경비와 궁병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2중대장 제라르 실레르입니다. 돌격대를 담당하고 군마 조련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3중대장 제롬 모로니에입니다. 성곽수비 담당입니다.”
“4중대장 아펠입니다. 창술과 검술을 통해 백병전을 훈련시키고 있습니다.”
“5중대장 엔드릭손 포엘입니다. 병장기를 관리하며 전체적인 군수를 총괄하고 있습니다.”
“음…. 병력은 어떤가? 가장 많은 병력은 어느 쪽이지…?”
“아무래도 성곽 수비와 백병전 부대가 가장 많습니다. 직접 싸워야 하다 보니 그렇게 배치하였습니다.”
예스프리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현황 보고를 받겠느냐는 2중대장 제라르의 말에 그는 손을 내저었다. 아닐세.
“나는…. 아다시피 예스프리 그라토레 트레제게라고 한다. 신임 대대장을 맡긴 했으나 그대들보다 오히려 나이가 어리고 경험이 적다.”
“….”
“하지만 그대들이 적극적으로 나를 도와주고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면, 나는 전임 병부대신이셨던 아버님의 후광을 받아 이 자리에 왔다는 말은 적어도, 듣지 않을 수 있다고 믿는다.”
“… ….”
중대장들의 표정은 어라 이거 봐라, 제법이네…. 라는 듯했다. 그들은 서로 눈을 마주치며 일단은 괜찮은 것 같지…? 서로 서로 확인하는 모양이었다.
“잘 부탁한다.”
“예, 대대장님…!!”
보아하니, 정말 변방에 있어야 할 자들이 있는 듯싶었다. 예스프리는 속으로 만족스러워하며 1중대장에게 물었다. 경계 병력을 최소로 한다면 몇 명쯤 휴식을 줄 수 있겠는가? 이게 뭔 소린가 싶은 레미가 잠시 머뭇거리더니, …2천 5백 정도는 될 겁니다.
“2천 5백…. 음. 알겠네.”
예스프리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중대장들이 모두 벌떡 벌떡 몸을 일으켰다.
“오기 전에 4천 명 분의 모피와 장비들을 좀 마련해봤네. 그리고 술과 음식들을 좀 준비해왔어. 이 곳 상황이 많이 안 좋다는 말을 들었었지. 오늘 하루 만이라도 좀 병사들에게 배불리 먹고 쉴 수 있도록 했으면 싶네만….”
중대장들은 호박이 넝쿨째 굴러 들어오는 듯한 그의 말에 이게 무슨 횡재인가 싶으면서 동시에 감탄한 얼굴로 서로 마주보았다. 그러나 예스프리의 이어지는 목소리는 여전히 밝지 못했다.
“오다 보니 병사들의 모습이 말이 아니더군…. 배불리 먹고 편안히 잠 잘 자리가 없이 어떻게 그 무도한 마도들과 맞서 싸울 수 있겠는가. 즉시 경계에 투입되어야 할 1천여 병력들에게 혹한기 의복을 지급하여 경계태세에 투입시키고, 나머지는 그들이 경계 근무를 서는 동안 다른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게. 그리고 술과 음식을 풀어 배불리 먹이고. 어서들 움직이게.”
“예, 대대장님…!!”
중대장들은 신이 난 기색들을 감추지 못하고 얼른 통제실을 뛰쳐나갔다. 이 날 대대 종합 훈련장에서 병사들은 예스프리가 구입해 온 술과 음식들을 나누며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가득한 변방에서의 고단함을 위로받았다. 그들이 잔치를 벌이는 동안 백여 명의 병사들이 번갈아 가며 혹한기 의복을 보급하였고, 2천 5백여 병사들은 새로운 대대장의 후한 인심을 칭찬하며 오래간만에, 아니 어쩌면 처음으로 카몬 협곡에서 마음껏 먹고 마셨다. 중대장들과 예스프리 또한 그들과 함께 훈련장에서 시간을 보냈다. 예스프리는 직접 술병을 들고 다니며 가능한 한 많은 군사들을 대면하여 그들과 얼굴을 익혔다.
“아직 스물 한두 살 밖에 안 됐는데…. 보통이 아니네….”
“그러게 말야, 역시 중앙에 있던 사람들은 달라….”
“두고 봐야지. 저런 것만 능한지 아니면 정말 제대로 전투를 할 수 있을는지…. 어쨌든 애송이는 애송이잖어.”
“말조심해, 이 사람아…!”
신임 대대장을 보며 감탄하던 2중대장 제라르는 5중대장 엔드릭손이 눈치를 주자 응? 하며 주위를 보다가 마를렌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는 찔끔했다. 들었나…? 변방에서 세월을 보낸 그들에게 고급스러운 모피와 드레시한 옷을 차려 입은 마를렌은 신비 그 자체였다. 게다가 미인이기까지 했으니. 그들은 의심의 여지없이 그녀가 예스프리의 부인일 거라고 생각했다.
“오셨습니까, 트레제게 부인.”
“추운데 왜 나오셨습니까. 먼 길 오시느라 고단하셨을 텐데….”
“부….”
‘부인’이란 말에 마를렌은 잠시 당황하는 듯하더니 이내 얼굴을 살짝 붉히며 웃음 지었다. 왕도에서 그랬다간 벼락을 맞을 일이었지만, 변방에서야 그런다고 어디 흉 되겠나 싶었다. 시치미를 뚝 떼고 웃음을 그친 그녀를, 중대장들은 마치 여신을 보는 듯한 눈길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닙니다. 대대장께서도 직접 병사들을 만나고 계신데 제가 가만히 있으면 도리가 아니겠지요….”
가볍게 웃는 그녀의 얼굴에 중대장들은 넋이 나간 듯 어허허…하고 웃으며 쑥쓰러워 했다. 직접 술을 따르는 마를렌의 손길에 특히 텁수룩한 수염이 난 덩치 큰 아펠은 손을 덜덜 떨기까지 했다.
“아니, 왜 이렇게 손까지 떨고 있어?”
“트레제게 부인께서 직접 따라주시는 건데 영광스럽지, 암…!”
“아름다운 부인께서 따라 주셔서가 아니고…?”
아무리 변방을 지키는 이들이라 하더라도 라크라오스 그라토레 트레제게의 이름은 미키네오스에서 모르는 이가 없었다. 비록 로이나르 군이 잉그라드 황군에게 배후를 압박당해 불리한 전세였다고는 해도, 견고하기 그지없는 왕도의 성을 정면으로 돌파하여 함락시키고 전쟁의 흐름을 뒤바꾼 장본인이 바로 예스프리의 부친이었다. 라크라오스는 이후에도 자처하여 변방을 돌며 남아 있는 마도의 군사들을 모조리 론도 산맥으로 쫓아내 국경선을 확실히 그었다. 게다가 스물 네 번의 전투를 통해 그가 잃은 병사의 수는 고작 2백이 채 되지 않았으니, 미키네오스의 군부 내에서 그는 거의 군신(軍神)으로 추앙을 받는 인물이었다. 중대장들은 그런 라크라오스의 무훈을 저마다 입에 올리며 그 며느리(로 생각되는 여인)에게 훌륭한 시아버지를 두었다고 한 마디씩 했다.
“춥다고 마차 안에서도 엄살을 피우더니, 여긴 언제 나왔어?”
“아, 도…!”
하마터면 ‘도련님’이라고 부를 뻔했다. 마를렌은 할 수 있는 한 중대장들 앞에서 부인 행세를 해 볼 참이었다. 그러나 예스프리는 한 방에 그녀의 소망(?)을 박살내버렸다.
“트레제게 부인께서 직접 저희들에게 술을 다 치시지 뭡니까, 대대장님! 이거 앞으로 몇 년은 마누라한테 술 얻어먹기가 싫을 것 같습니다…! 하하하하…!!”
호탕하게 웃어제끼는 1중대장 레미 벨보의 말에 예스프리는 그 무슨 쌩뚱맞은 소리냐는 얼굴로 마를렌과 중대장들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무슨 소린가, 그게…? 누가 트레제게 부인이라는 건가? 아니…, 여기 이 부인께서…. 부인은 무슨…. 피식 웃으며 자리에 앉는 예스프리를 원망스럽다는 듯 쳐다보는 마를렌.
“이 사람은 내 시녀일세.”
“예에…?!!”
“아니…, 그럼…, 트레제게 부인…. 저….”
“난 아직 혼인 안했네. 자, 한 잔 줘 보게.”
3중대장 제롬은 주먹을 쥔 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예스프리는 술을 따르며 그의 기색을 살피며 검을 뽑을 준비를 했다. 노예가 군부의 지휘관급들에게 사기를 친 모양새였으니 최전방에서 거친 세월을 보낸 지휘관들이라면 곧바로 칼을 뽑으려 들 수도 있는 일이었다.
“푸하하하하하하하…!!! 아하하하하하하…!!!”
그리고 뭔가 폭발하듯 제롬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다들 순간적으로나마 긴장했던 것이 민망했던지 그를 쳐다보며 왜 그러냐, 정신 차려라 한 마디씩 던졌고, 한참을 웃던 제롬이 술병을 들며 마를렌에게 권했다.
“워낙 기품이 있어 뵈고 또 아름다워서 저는 트레제게 부인인 줄만 알았습니다, 그려…! 자, 내 잔 한 잔 받게…! 대대장님, 괜찮으시겠습니까?”
“아, 그… 그렇게 하게. 하하…!”
화답하던 예스프리는 왕도에서 이런 일이 생겼다면 어땠을까를 잠시 떠올려 보았다. 이런 식의 반응도 변방이니 가능할 것이다. 그는 그렇게 여겼다. 늘 어려운 싸움을 해야만 하는 그들은 신분이나 명분쯤은 그다지 개의치 않는 듯했다. 동시에 그것은 그만큼 이 곳에서의 생활이 고단하다는 것을 방증하는 모습이기도 했다. 기분 좋게 웃으며 잔을 기울이는 예스프리의 안색에 염려의 빛이 슬쩍 끼어들었다.
이튿날부터 곧바로 순시에 들어간 예스프리는 전날 마음에 걸렸던 일들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셀 수도 없이 많은 마도들의 침입과 교전으로 인해 성벽 곳곳은 허물어져 있었고, 무쇠로 틀을 짜 만들어야 할 성문은 몇 겹의 나무로 덧대어져 있었다. 한 번 몰려오기 시작하면 적게는 수천, 많게는 일만에 달하기에, 성문을 열고 나갈 일이 별로 없었다는 것이 레미 벨보의 보고 내용이었다.
“쇠를 구하기가 힘든가…?”
“이미 보셨다시피…. 군사들 병장기 유지하기도 빠듯한 상태입니다.”
“그런가….”
예스프리는 성벽으로 오르던 중 아래에 서 있던 병사의 창끝을 발견했다. 날카롭게 갈려 있긴 했으나, 어쩐지 다른 창보다 길이가 짧은 듯했다. 왜 그러십니까…? 창끝을 새로 만들 쇠마저 부족하단 말인가…? 뭐 그 정도야 하겠습니까마는…, 그래도 일단은 아낄 수 있는 만큼은 아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하하…! 이 정도면 문제가 심각했다. 성벽 위에서 몰려오는 적들을 상대하려면 백병전도 백병전이지만 우선적으로 뒤에서 몰려오는 적수를 줄이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창끝이 짧아질 정도로 쇠를 구하기 어려운 상황에 궁병인들 화살을 충분히 확보하고 있을까. 아펠이 짓는 너털웃음에는 이런 처지에 대한 자위와 변방에 소홀해 온 중앙에 대한 냉소를 담고 있으리라. 시름하는 예스프리의 눈길이 협곡 양쪽으로 늘어선 산줄기를 따라 지평선에 걸린 몬듀아르크 쌍둥이 봉우리로 옮겨 갔다.
“일단…. 가져 온 군자금의 일부로 병장기 정비를 하겠네. 다음 일은 그 다음에 생각하도록 하지….”
“그런데…, 대대장님.”
“…뭔가?”
“그 군자금들…, 사재로 마련해 오신 것으로 압니다.”
자못 심각한 얼굴로 말하는 엔드릭손을 향해 예스프리는 천천히 돌아섰다. 자신을 직시하는 엔드릭손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 튀어 나왔다.
“그 동안 이 곳 카몬 독립대대에 병부에서 다소 소홀했던 점, 불만이 없진 않습니다만…, 이토록 갑자기 거금을 들여 관리하고자 하시는 이유…, 혹시 정벌 때문입니까…?”
“…!!”
예스프리의 얼굴이 굳어졌다.

한편, 나다니엘도 하백으로 하여금 1백만 팡그를 예스프리에게 보낸 레이네의 의중에 대해 같은 질문을 했다.
“정벌…?”
레이네는 부왕에게서 온 문서들에 눈을 고정시킨 채 되물었다. 내가 왜 부왕의 정벌을 도와야 하지…? 기껏 돈을 보내놓고 이제 와서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의아해 하는 나다니엘은 일개 독립대대에 대한 1백만 팡그가 얼마나 큰 돈인지를 언급하며,
“정벌 준비가 아니라면 변방의 부대에 그만한 지원을 보내실 이유가 없다고 생각됩니다만….”
“… …”
그러다 레이네가 힐끗 돌아보자 얼른 입을 다물며 한 걸음 물러섰다. 시종관이 되고서도 여전히 한결같은 그 태도에 레이네는 속으로 웃었다. 그녀는 문서를 한쪽으로 밀어두고 시녀에게서 담뱃대를 받았다.
“내가 부왕의 정벌 의지에 힘을 실어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어…?”
“아닙니다, 공주님…! 그런 것이 아니라….”
“꼭 그 때문만은 아니야.”
“… ….”
“부왕이 만만찮은 사람이라서 일단 숙이고 가는 것만은 아니라고…. 예스프리에 대해 알아봤는데, 꽤 쓸만한 지휘관인 것 같아. 일단 내 사람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어? 부왕한테 숙이지 않으려면….”
국왕에 대한 레이네 마음에 맺힌 응어리가 나다니엘은 안타깝기만 했다. 그렇다고 그 마음을 풀기를 바라는 일조차 쉽지 않았다. 그저 남몰래 한숨만 지을 뿐이었다. 나다니엘의 기색을 눈치채고 있으면서도 레이네는 모른 척했다. 그보다 레이네는 지금 보고 있는 문서들에 더욱 흥미가 있었다. 오십만 에이커…, 이거 정말 엄청난데…. 중얼거리는 그녀의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궁정대신이 마음만 먹으면 왕궁 몇 개도 더 지을 수 있다더니…. 죽은 르로아보다 더 하네, 이건….”
“내사…자료입니까?”
“음…. 이걸 어떻게 활용한다….”
담뱃대를 문 채 재미있다는 듯 눈을 굴리는 레이네에게 시녀가 문을 열고 들어와 병부대신의 방문을 알렸다.
“공주님, 병부대신께서 뵙기를 청하십니다.”
“…. 모시거라.”
레이네는 담뱃대를 시녀에게 건네주곤 반듯하게 앉아 플로랑을 맞았다.
고민이 많았는지, 안색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플로랑의 안색을 살피는 레이네의 눈꼬리가 희미하게 웃었다. 먼저 말을 꺼내길 기다리기라도 하듯 둘은 말없이 서로 마주앉아 뜸을 들였다.
“술이 좋을까요…?”
“…. 주십시오.”
시녀들이 조용히 움직였다. 술병과 잔이 놓이자 음식이 나오지도 않았는데 레이네는 그에게 술을 권했다. 드시겠습니까…? 병부대신은 시녀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두 개의 잔이 모두 채워지자 공주가 먼저 잔을 들었다.
“내가 부왕의 정치적 동지이자 또한 장기말인 것을 병부대신께서도 짐작은 하고 계시겠지요.”
“동지…라 하셨습니까…?”
“나는 부왕의 신하임과 동시에 부왕의 핏줄이기도 합니다. 이 나라에서 부왕과 동지가 될 만한 사람이 나 말고 누가 있겠습니까…?”
‘역시 이 여자는…, 이 여자가 바라는 것은….’
“드시지요.”
레이네는 눈을 내리깔고, 플로랑은 눈을 들어 레이네를 보면서, 각각 잔을 비웠다. 첫 잔은 한 번에 깨끗하게 비워졌다. 고민이 많으셨나 봅니다. 제법 독한 술을 한 번에, 그것도 식사 시간이 한참 지난 이 때에 다 드시다니…. 웃음 띤 어조로 말하는 레이네가 시녀에게 고개짓을 하자 다시 잔에 술이 채워졌다.
“자칫….”
“….”
“방금 하신 말씀은 오해를 사실 수도 있습니다….”
“….”
“동지라는 것은, 동등한 위치에 있는 자가 쓸 수 있는 말입니다. 공주님께선 왕후가 아니십니다….”
“내가 부왕께 칼이라도 겨눌 거라는 말씀이신가요…?”
“….”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다. 마늘소스를 뿌려 구운 양고기와 몇 가지 익힌 채소, 그리고 과일이 상 위에 놓아지는 동안 두 사람은 또 말이 없었다. 시녀들이 나가야 입이 열릴 테지…. 레이네는 느긋하게 기다렸다. 여유롭게 웃음 짓는 레이네의 입술이 술에 젖어 반짝거렸다. 이윽고 시녀들이 모두 물러가자 플로랑은 나다니엘에게 잠시 눈길을 주었다.
“저 자는…시종관이 되고서도 늘 공주님의 거소에 머무르는군요.”
“…. 특별히 궁내의 업무를 봐야 할 때가 아니면 그렇습니다. 혹시 거슬리는 일이라도…?”
“아닙니다. 그저 면천이 되고 나서도 이곳을 지키는 걸 보니…, 공주님이 인복이 있는 분이란 생각을 해봤습니다….”
“인복이라….”
“충성을 다 하는 신하들이 많을수록 군주의 자리는 튼실해지고 그 권위가 서는 법이지요.”
“…. 그렇습니다.”
“…. 그 자리…, 갖고자 하십니까…?”
“…, 하하하하하…! 아하하하하…!”
레이네는 웃음을 터뜨렸다. 고개를 젖히며 웃는 그 모습을 플로랑은 그대로 보고만 있었다. 비웃음인지, 득의만면한 웃음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웃음 자체는 진실 되어 보였다. 웃음을 그친 레이네가 기대감을 살짝 감춘 표정으로 그를 살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양이 마치, 네가 주기라도 할 테냐? 라고 말하는 듯했다.
“드리지요.”
플로랑이 레이네의 표정에 대해 대답했다. 그는 결심을 굳혔다는 듯, 레이네를 똑바로 쳐다보며 뜻을 밝혔다.
“그 자리…, 공주님께서 원하신다면 제가 드리겠습니다. 그거면 저를 도와주실 이유가 되겠습니까…?”
“… ….”
레이네는 여전히 희미하게 갸웃거리고 있었다. 자신을 살피는 표정에 변화가 생긴 것을 플로랑은 감지했다. 이번엔, 네가 할 수 있겠어? 라는 얼굴이었다. 말없이 눈을 마주쳐 오는 그를 향해 레이네는 이내 고개를 가로저어 보였다.
“아직은 안 됩니다.”
“…?”
“그리고 성사될 수 없는 거래입니다.”
“공주님…!”
레이네는 양고기를 덜어 자신의 앞에 놓는 나다니엘에게 살짝 웃어 보인 뒤 다시 플로랑을 보며 말을 이었다.
“외교를 위한 정보 하나와 왕위의 거래라니…,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이라고 보십니까…?”
“… ….”
“….”
운을 띄운 레이네의 표정은 그 말 그대로였다. 플로랑의 반응을 살피는 것도, 대답을 바라는 얼굴도 아니었다. 하지만 공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내가 원하는 게 그것이라고 해도 병부대신께서 지금 내게 약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란 건…, 스스로도 아실 텐데요?”
“…. 그렇습니다. 전 아직 그럴 만한 힘은 없습니다.”
“… …. 좀 무모하십니다. 그렇게 보지 않았는데요….”
후후훗 하는 웃음소리를 내며 레이네는 앞에 놓인 양고기를 입에 넣고는 잔을 들었다. 마음 편히 만찬을 즐기기라도 하는 듯한 그 모습을 보며 플로랑은 마음이 답답해져왔다. 철저하게 당하는군…. 밀려드는 패배감을 애써 진정시켰다. 어떻게 해서든 정보를 구할 수 있는 경로를 최대한 확보해야 하는 그로서는 여기서 물러설 수 없었다. 다시 시도를 하려는데 레이네가 선수를 쳤다.
“병부대신을 도우라는 부왕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언질을 받으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 예.”
“한 가지 확인해 두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 말씀하시지요.”
“이번 정벌…,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
“정직하게 대답을 하십시오. 거기에 따라 결정을 할 것입니다.”
웃음기를 거둔 레이네의 표정은 진지했다. 자신을 떠보려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자신의 뜻을 알고자 하는 것임을 표정으로부터 알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플로랑은 그 안에 무슨 생각이 들어 있을지 알아내기는 어려웠다. 레이네가 망설이는 그의 속내를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덧붙였다.
“…. 나는 병부대신을 돕기에 앞서, 대신께서 진정 이 나라의 충신인지 아닌지, 그것을 알고자 하는 것입니다. 뜻이 같아야 길을 함께 갈 수 있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더 이상 머리를 굴려봐야 나올 것도 없었다. 기왕에 밀리는 형국이라면, 속을 탁 털어놓고 그녀의 마음이 움직이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 저는 미키네오스가 예전의 위상을 되찾고…, 고결하고 정의로우며 품위 있는 나라이길 바랍니다.”
“고결…. 정의…, 품위….”
“…. 지난 전쟁에서 승전을 하고, 또한 현임 정무대신께서 국경선을 확실하게 확보해놓으시긴 했으나 우리 미키네오스의 변방은 지난 십 년 동안 마도의 무리들에게 괴롭힘을 받아온 것이 사실입니다.”
“….”
“우리의 주도 하에 안전한 론도 산맥을 보장해내는 일은, 단숨에 미키네오스의 국위를 드높일 수 있는 사안이라고 봅니다.”
“반드시…, 해야 한다…?”
“…반대는 쉬운 일입니다. 하지만 일을 되게 하는 것이 어렵고…, 또한 그것이 더욱 가치 있고 할 만한 것이라고…, 이 사람은 그렇게 믿습니다.”
“… ….”
그 말에 레이네가 반응을 보였다. 말을 마친 병부대신이 잔을 비우고, 시녀가 앞에 놓아 준 양고기를 먹는 동안 레이네는 그의 말을 음미하기라도 하는 듯 눈을 굴리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 말은…, 마음에 드는군요.”
“….”
“…. 그렇다면….”
“…?”
레이네는 부왕으로부터 받았던 문서들을 그의 앞에 내밀었다. 이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이것도 일이 되게끔 처리하실 수 있겠습니까…? 문서를 받아 읽어 내려가던 플로랑의 눈의 부릅떠졌다.
“이건…!”
“잉그라드에 사신으로 가 있는 궁정대신 미셀 포이아르 플라시니 경의 내사 결과입니다. 지금이 내사 기간인 것은 아실 테고….”
“… …!!”
“대신들이 재물을 쌓는 방법을 모르시진 않을 테지요. 때문에 형식적으로 치러지는 내사에선 아무것도 밝혀지는 바가 없을 겁니다. 폐하께서 원하시는 정보를 얻는 것은 내사를 통해서가 아니지요.”
“이게…, 폐하의 뜻이란 말씀이십니까…?!”
“어쩌시겠습니까? 그 문서에 따르면 궁정대신은 횡령과 부당한 방법에 의한 재물은닉이 도를 넘어선 것 같은데요….”
“… ….”
플로랑의 안색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이렇게 해서…. 신하를 내치는 건가….’
“방법은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 가지지요.”
마치 제 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한 레이네의 말에 플로랑은 뜨끔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두십시오. 이 정보를 드리는 이유는, 폐하께서 경을 진정으로 신뢰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을요.”
“…. 연유를…. 여쭤 보아도 되겠습니까….”
“…. 군주의 신뢰가…, 부담스러우십니까…?”
“….”
침중한 음성으로 플로랑은 질문의 요지를 밝혔다. 궁정대신을 제거해야 할…, 연유 말입니다. 레이네의 눈빛이 싸늘하게 가라앉았고, 플로랑은 미처 그를 발견하지 못했다. 찬바람이 불 것 같은 목소리로 레이네가 그를 나무랐다.
“좀 무례하신 듯합니다. 그 질문은…. 납득할 수 없다면 칼이라도 뽑아 반대를 하실 요량입니까…?”
“…공, 공주님…!”
크게 당황한 플로랑을 향한 꾸짖음이 변명할 틈을 주지 않았다. 영악한 레이네가 한 번 잡은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나는 경께서 진정으로 이 나라를 생각하는 분인지 아닌지, 아직 모릅니다. 충정은 혀를 놀려 바치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걸 확인해보고자 군주의 신뢰를 보여주었는데, 그 신뢰에 대한 응답이 겨우 이거라면….”
플로랑은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레이네의 발 앞에 꿇어 엎드렸다. 그의 행동이 레이네의 말을 멈추게 했지만, 레이네는 여전히 엎드린 그의 등에 싸늘한 시선을 내려놓았다.
“제 언사가 마음을 불편케 해드렸다면 사죄 드리겠습니다…! 송구합니다, 공주님…! 하오나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일을 되게 하기 위해선 저로서도 납득할 수 있는 명분이 필요하다는 분에 넘치는 생각을 했을 뿐입니다…!”
“군주의 명령보다 더한 명분이 있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는 다만 국왕 폐하와 공주님의 깊은 심기를 헤아리는 데 스스로 부족함이 있어 가르침을 청하고자 했을 뿐입니다…! 헤아려 주십시오…!!”
레이네의 입가에 엷은 웃음기가 돌았다. 플로랑의 목소리는 간절했다. 그는 처분을 기다리는 죄인처럼 엎드린 채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고, 레이네가 음식을 먹고 잔을 비우는 동안에도 움직이지 않았다. 시녀로부터 담뱃대를 받아 들고, 한 차례 연기를 내뿜고서야 레이네는 입을 열었다.
“…. 믿어보지요.”
“…. 감사합니다, 공주님…!”
“…. 정보를 드리겠습니다.”
득의만면한 웃음을 가득 담은 레이네의 표정을 플로랑은 보지 못했다. 그는 거듭 머리를 조아리며 감사의 뜻을 표하기만 할 뿐이었다. 완벽하게 당했다. 그는 갓 스무 살을 넘은 왕녀에게서 두려움을 느꼈다. 이따금씩 정무회의에서 볼 수 있는 국왕의 그것과는 또 다른 압박감이 왕녀에게서 느껴졌다. 식은땀과 같은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인복이 있다는 그대의 말…. 책임지기를 바랍니다.”
“예, 공주님…! 성심을 다하겠나이다…!!”
“…. 지켜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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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었습니다. 요즘은 정말이지 정신이 없어서...;; 단지 복사해서 붙여넣기만 하는 건데도
날짜를 계속 놓치는군요. 죄송합니다. 알람이라도 맞춰놓든가 해야지 이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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