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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4 23:29 410회 0건
연무장에선 연회상이 차려지고 있었다. 국왕과 궁정대신, 그리고 공주와 잉그라드의 황녀가 만찬과 함께 대련을 관전할 참이었다. 리토르나는 레이네와, 바루나는 미셀과 함께 연무장으로 들어섰다. 인사를 하고 자리한 그들의 앞에 하백과 근위 무사들이 둘러섰다.
“무례할지도 모르는 청을 수락해줘서 고맙소, 하백 공.”
“아닙니다, 폐하. 수련만으로 다진 재주라 폐하의 눈을 어지럽힐까 염려됩니다. 너그럽게 보아주십시오.”
바루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기만 했고, 궁정대신은 몰래 피식 하고 비웃음을 흘렸다. 말은 유창하게 잘 하는군…. 리토르나는 그런 걸 알면서도 그저 연무장 쪽을 보고만 있었다. 바루나의 턱짓으로 근위장이 명령을 내렸다. 근위무사 중 한 명이 연무장 중앙으로 하백과 함께 나섰다. 약간의 거리를 두고 마주선 그들은 서로를 향해 예를 올렸다.
“특이하군…. 저게 환국의 예법인가…?”
“그런 모양입니다.”
양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몸을 깊이 숙이며 인사하는 하백의 모습에 국왕과 궁정대신이 잡담을 나눈다. 각자가 병장기를 뽑아들고 자세를 취했다. 하백은 자세를 낮추며 검을 뒤로 뺐고, 근위무사는 검을 머리 위로 들어올리며 곧게 섰다. 레이네는 리토르나를 힐끗 쳐다보았지만 아무 표정도 읽어낼 수 없었다.
“먼저 오십시오.”
“….”
근위무사가 선공을 했다. 이마 위로 치켜든 검을 뒤로 넘겼다가 일격필살의 기세로 하백에게 달려들며 내리쳤다. 육중해 보이는 검날에 서린 기세가 제법 사나웠다. 이걸 그대로 받았다간 손목이 어떻게 될 것 같다. 하백은 옆으로 돌며 검등으로 그것을 흘려내곤 순식간에 상대의 등을 점유했다. 목에 검을 대어 승부를 끝내려는데, 근위무사의 몸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검격의 힘을 그대로 이용해 납작 엎드릴 만큼 몸을 웅크린 근위무사가 그 탄력으로 하백을 밀어붙였다.
“윽…!”
단련은 했다지만, 금속으로 만들어진 어깨의 갑주가 부딪쳐 오자 하백은 거기에 부딪치며 몇 걸음씩이나 밀려났다. 근위무사가 다시 검을 이마 위로 쳐들며 처음과 같은 자세를 취했다. 부딪친 팔이 욱신거렸다. 얼른 뒷걸음질을 치지 않았으면 뼈가 부러졌을 듯한 힘이었다. 하백은 집중력을 끌어올리며 몸을 앞으로 숙였다. 이번엔 자신이 나갈 심산이었다. 타핫 하는 기합성과 함께 몸을 날린 그의 속도는 근위무사보다 훨씬 빨랐다. 근위무사는 그가 돌진해오는 방향을 향해 슬쩍 검을 내리며 겨누었고, 하백은 다시 그의 옆으로 돌며 회전하는 힘을 이용해 검격을 날렸다. 육중한 검이 목을 향해 날아 들어오는 그의 검과 맞부딪쳤고, 근위무사는 다시 그를 향해 몸으로 밀어붙였다. 이번에도 몸싸움인가 하며 하백은 손을 내밀어 그 어깨를 막으려 들었으나, 상대는 몸을 낮춰 회전시키며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강렬하게 후려쳐 왔다.
“읍…!”
하백이 순간적으로 몸을 띄워 근위무사의 머리 위를 훌쩍 뛰어넘었다. 공중에서 한 바퀴 돌며 그의 앞에 착지했을 때, 근위무사는 이미 자신을 향해 다시 검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빠르다…!
그걸 맞았다면 갈비뼈가 몇 대는 나갈 정도로 맹렬한 팔꿈치 공격이었는데, 허공을 휘저은 뒤 곧바로 자세를 바꾸며 방어 태세를 갖추는 근위무사를 보며 그는 새삼 긴장감이 감돌았다.
“빠르군….”
“폐하의 근위무사입니다. 저 정도야….”
“아니…. 하백 공 말일세.”
“뭐…, 갑주를 걸치지 않았으니 당연하겠지요.”
궁정대신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레이네는 의외라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점점 대결에 빠져들었다. 다시 맞붙은 두 사람은 몇 수를 더 주고받았으나 쉽게 결판이 나지 않았다. 날래기로 치자면 하백이, 힘과 임기응변으로 치자면 근위무사가 월등했다. 서로가 서로의 단점을 서로의 장점으로 보완하고 있었다.
“놀랍군….”
그들의 경합을 보던 국왕과 궁정대신, 그리고 레이네는 와…. 하는 표정이었다. 근위장도 감탄하며 여기에 추임새를 넣었다. 세이부는 저와 함께 전장을 누볐던 백전의 전사입니다. 그런데 밀리지를 않는군요. 바루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그 말을 거들었다.
“익힌 무예의 종류가 다른 것 같긴 하지만…. 아직 공주보다도 어려 보이는데….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벌써 스무 번이 넘게 격돌했다. 두 사람 모두 호흡이 거칠어지고 있었으나, 애써 숨소리를 가다듬고 있었다. 보르틴 대륙의 전사들이 무거운 갑주를 걸치고 싸운대서 느린 줄만 알았더니…. 정말 대단하구나…. 하백은 그의 육중한 검과 맹렬한 공격을 받아내느라 팔이 저릴 지경이었다. 더 이상 맞붙게 된다면 자신이 질 것 같았다. 지는 일이 창피한 게 아니라고 배우긴 했으나, 그는 아직 스무 살도 되지 않은 ‘청소년’이었다. 이쯤 왔으니 호승심이 불타는 것이 당연했다.
‘이번으로 끝을 내야겠구나.’
그는 검을 등 뒤로 넘긴 후 크게 휘두르는 호선을 그리며 앞으로 향했다.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근위무사 세이부도 그가 이번 일격에 모든 것을 걸 것임을 알아채고는 검을 이마 위로 세웠다.
“차앗!!”
덤벼드는 하백의 발이 갈짓자를 그리며 검끝이 어지럽게 흔들렸다. 세이부는 그가 어디서 공격해올지 몰라 갈피를 못잡고 있다가 이내 하백의 어깨와 눈을 주시했다. 눈이 마주친 하백이 약간 당황하는 듯 검 끝의 흔들림이 멈추었다 싶었을 때 시야에서 하백이 위쪽으로 사라졌다. 세이부는 몸을 웅크려 그의 간격에서 벗어난 후 자신을 두 동강 낼 듯 사납게 내리쳐 지는 그의 검격을 향해 온 힘을 다해 검을 내뻗었다. 여태까지 겪은 하백의 힘은 자신으로서도 어설프게 흘려낼 수 없었기에 방심할 수 없었다.
“…!!”
마주 내뻗은 검이 허공을 갈랐다 싶었을 때 하백의 발이 그의 어깨를 밟고 그의 뒤로 넘어갔다. 황급히 돌아본 그의 시야에 하백은 없었다. 아래다…! 그는 전방을 향해 낮게 공중제비를 돌며 뒤를 향해 검을 올려쳤다. 그의 발목 부근을 향해 검신으로 날아들던 하백의 단군검과 세이부의 육중한 검이 부딪치며 강렬한 쇳소리를 냈다.
“…!!”
“… ….”
마지막 공격까지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리토르나를 제외한 그 자리의 모든 사람들이 감탄사를 내며 하백의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회심의 공격이었는데…. 실패한 하백이 이내 실망감을 거두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세이부는 그를 보며 검을 수습했고, 하백도 검을 집어넣었다.
“무승부라니….”
“대단한 솜씨입니다.”
“어허허허허….”
“굉장해요…!”
레이네도 바루나도, 심지어 궁정대신조차도 자신들이 박수를 치고 있는 걸 모르는 듯했다. 눈앞에 있는, 아직 솜털 같은 수염조차 나지 않은 이민족 소년에게 감탄한 기색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하백과 세이부가 서로를 향해, 그리고 바루나를 향해 다시 예를 올렸다.
“하백 공께선 혹시 어떤 계획이라도 갖고 있소…?”
아직도 감탄의 빛이 가시지 않은 바루나의 질문에 하백은 지체 없이, 갈 곳 없어 보살펴주시는 폐하의 은덕에 감사하며 지내고는 있으나 부끄럽게도 아직 정한 바는 없습니다. 그럼 내 청을 하나 하지. 궁정대신과 레이네는 이 멸망한 나라의 어린 왕손에게 청을 하겠다는 바루나의 말에 놀란 얼굴이었다. 리토르나는 담담히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드디어 기회가 온 건가…, 하백에게….’
“이 곳에 자리를 잡아보시는 건 어떻겠소?”
“….”
하백은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고개를 들어 바루나를 보았다.
“아직 어리신 듯한데도 그 뛰어난 솜씨 하며, 실전 경험이 없다는데도 임기응변을 운용하는 솜씨가 참 대단합니다. 어떻습니까? 이 왕궁의 근위대에서 한 번 그대의 자리를 찾아보시는 것이…?”
“…!”
순간 그의 뇌리에 떠오른 것은 리토르나의 말이었다. 기회란 준비된 자에게 찾아오는 법이네…. 그러나 하백은 이것이 진정으로 자신에게 기회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었다. 리토르나를 보니, 그녀는 눈을 감은 채 아무 표정도 짓지 않고 있었다. 선택은 네가 하는 것이다. 리토르나는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대답을 망설이는 그에게 바루나가 재차 물었다.
“폐하…! 하백 공의 무예가 뛰어나다 한들 어찌 곧바로 폐하의 측근인 근위무사로 임명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저 왕궁 경비대의 소임을…!”
저러다 미운털만 박히지…. 레이네는 혀를 끌끌 차며 바루나를 향해 반박하는 궁정대신을 안됐다는 얼굴로 쳐다봤다. 게다가 아직 나이도 어리니 경비대의 소대장 직 정도를 주심이 옳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궁정대신의 반대 의견에 바루나는 발끈한 듯 그를 향해 매정하게 나무랐다.
“궁정대신은 대체 언제까지 하백 공에 대해 그렇게 무례를 저지를 참인가?!”
“…!!”
“…!”
이 말에 궁정대신은 물론이거니와 근위장과 근위무사 세이부도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백은 괜히 자신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듯하여 찜찜한 얼굴이었고, 레이네는 호오…하는 얼굴로 부왕을 흘끗 쳐다보았다. 오직 리토르나만이 눈을 감은 채 아무 일 없다는 듯 있었다.
답답하다는 듯 바루나가 궁정대신을 향해 언성을 높였다.
“하백 공은 일국의 왕족이야, 그걸 모르는 그대가 어찌 그렇게 계속 무례를 하는가…!”
“…폐하…!”
“게다가 나이가 어리니까 근위무사를 청하는 게 아닌가?! 군사를 지휘해 본 경험이 전무할 것 같으니 지휘관을 맡길 수는 없고, 그렇다고 병사로 넣자니 그만한 무례도 없을 터…! 이전부터 곤욕을 치러 짐의 얼굴에 먹칠을 그렇게 해놓고도 아직 모자란가…?!”
“그런 것이 아닙니다, 폐하…!”
“더는 말하지 말라…!”
변명하려는 궁정대신의 말을 일축한 후 바루나는 다시 하백을 향해 잠시 일어났던 소란에 대한 사과부터 했다. 잠시 민망한 꼴을 보였소이다. 마음쓰지 말아주시오. 아닙니다, 폐하…. 저 때문에 괜한 분란이 생길까 두렵습니다. 바루나는 허…이 녀석 보게, 제법일세. 하는 투의 웃음을 흘리며 재차 그의 뜻을 물었다.
“폐하의 은덕을 삼가 모시겠나이다. 충성으로 보답하겠습니다…!”
가뜩이나 국왕으로부터 공개적인 망신을 당한 터에 하백이 그렇게 대답하자 궁정대신의 얼굴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는 듯 인상을 구기고 있었다. 입은 다물고 있었으나, 이를 악다문 모습이 그대로 드러났다. 하백을 보며 충성과 믿음을 다짐하는 바루나의 웃음 띤 눈이 슬쩍 궁정대신에게로 향했다.

임지로 떠나는 예스프리는 집안 식구들의 환송을 받았다. 집사, 부집사, 그리고 시종장이 따라 나섰다. 예스프리는 그만들 들어가라 했으나, 그들은 그가 출발할 때까지는 들어가지 않을 모양이었다. 트레제게 부인은 속상한지 아들이 가는 것을 나와 보지도 않았다. 어머니를 잘 부탁한다며 집사와 시녀장에게 당부하고, 예스프리는 다른 인사말 없이 마를렌과 함께 마차를 타고 훌쩍 멀어져갔다. 집에서 바로 임지로 떠난 예스프리처럼, 이 날부터 자신의 새로운 임지로 부임한 왕도사령부 직할대의 전임 돌격대대장은 의기양양하게 입궁하자마자 병부대신의 부름을 받아 야무진 꿈과 부푼 가슴을 안고 군부 수장의 집무실로 향했다. 그러나 거기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배속 명령서였다.
“군마 조련장이라니요…?”
“말뜻도 알려줘야 하나?”
어리둥절한 얼굴로 명령서를 받아 든 신임 군마 조련관을 플로랑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분주한 책상 위를 정리하며 물었다. 아니…, 병부대신. 저는 전임 대대장이었습니다, 어떻게 대대장의 직급에서….
“군마 조련관은 연대장 급일세. 승진을 축하하네.”
“병부대신…!”
“어허….”
플로랑은 그가 가지 않고 버티자 하던 일을 멈추고 눈을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군마 조련관은 납득할 수 없다는 듯 항의했다. 연대장 급이 말이 연대장 급이지, 부릴 병력도 없는 연대장이 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씀이십니까…! 플로랑은 허허 하고 웃더니 다시 손을 움직였다.
“왜 병력이 없는가. 군마가 얼마나 우리 미키네오스 군에 중요한 자원인지 자네가 모를 리가 없을 텐데. 게다가 전임 돌격대대장이었으니 더욱 군마의 중요성은 절실히 알 테고. 난 자네의 재주와 경험을 온전히 살릴 수 있는 인사를 했네. 하기 싫으면 사직서를 내든가….”
너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는 식의 말에 조련관은 기가 막혀 어쩔 줄을 몰라했으나, 군부의 수장에게 계속해서 대서다간 무슨 일을 당할 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어색하게 군례를 올리고 조련관이 나간 뒤 부총관이 키득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하여튼 병부대신께서도 대단하십니다. 그런 말씀으로 교묘하게 저 자의 속을 긁어 놓으시다니요.”
“난 긁지 않았네. 긁혔다면 저 자가 제 능력을 제대로 모르는 거지.”
플로랑은 좀처럼 웃는 법이 없었다. 설령 웃는다 해도 허허허…하고 얌전히(?) 웃거나 혹은 피식, 때로는 그저 소리없이 웃음을 짓거나 하는 것이 전부였다. 부총관은 플로랑이 그 말을 하면서도 전혀 웃질 않자 눈치를 보며 제 웃음소리를 민망해 했다. 책상에 어지럽게 흩어진 문서들을 분류해 놓던 플로랑은 문득 한쪽에 있던 자그마한 쪽지를 발견했다. 다른 문서들을 옆으로 밀어놓더니 그것을 잠시 들여다보고, 그는 이내 그 쪽지를 폐기처분했다.
“뭔데 그러십니까…?”
“아무것도 아닐세.”
깍지를 끼며, 플로랑은 잠시 고민하는 듯한 얼굴을 하더니 이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어딜 가십니까? 따라오지 말게. 다녀올 데가 있어. 부총관을 남겨두고 집무실을 나서려던 병부대신은 잠시 멈춰선 부총관에게 지방 독립부대들의 예산안 편성에 대한 자료를 준비하라 이르고는 다시 가던 길을 재촉했다. 일단 공주를 만나 볼 심산이었다. 국왕으로부터 언질을 받았으니 공주도 뭔가 준비는 해 두지 않았을까.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 ….”
레이네와 마주한 자리에서, 플로랑은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직감했다. 천연덕스럽게 무슨 일이냐며 앞에 앉아 자신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는 레이네는 아무래도 호락호락 원하는 정보를 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래도 일단…, 폐하의 언질도 있으셨으니….’
말이나 꺼내볼 참이었다. 그 다음 일은 그 다음에 생각하면 되었다.
“말씀이 없으시군요. 그저 제 얼굴이나 보자고 오셨다면 돌아가셔도 될 듯합니다만…?”
“폐하께서 공주님께 가보라고 하셨습니다.”
“…? 왜 제게…?”
“앙굴리마라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면 공주님께 도움을 청하라고 하셨기에 와 보았습니다. 언질을 받으신 줄로 압니다.”
레이네의 얼굴이 묘하게 웃고 있었다.
“와 보셨…다고요.”
“그렇습니다.”
“… ….”
그는 잠시 주위를 살폈다.
남자 노예가 있는 것도 조금은 의아한 일이었지만, 방 안에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기묘한 위화감이 돌고 있었다. 특히 시녀들의 표정에서 그런 것들을 알 수 있었다.
‘대체 이 방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기에 다들….’
“재미있군요.”
“…. 무엇이 말씀이십니까?”
“와 보셨다는 건…. 무슨 뜻이십니까?”
“…. 솔직하게 말씀을 드리는 편이 좋겠습니다.”
“그러셔야 할 겁니다.”
“폐하께서 언질은 주셨다고 하지만, 공주님께선 쉬이 정보를 제게 건네실 것 같지가 않았습니다.”
“….”
“정보란 곧 힘이니까요. 안 그렇습니까?”
“….”
공주의 눈이 짙게 웃었다.
“그렇습니다. 정보는 곧 힘이지요. 그러니 정보를 나누어 주는 것은 곧 힘, 권력을 나누어 주는 일이지요.”
“…. 그럴 것입니다.”
“그럼 그대는 내게 뭘 줄 수 있습니까?”
“….”
플로랑은 딱히 대답할 말이 없었다.
‘나라를 위한 일에서도 거래를 해야 하다니….’
문득 국왕이 당부했던 말이 떠올랐다. 자네가 편을 들어 줘. 정치가 뭘 위해야 하는지도 좀 가르치고…. 그게 이런 뜻이었나…. 그러면서 그는 저도 모르게 공주의 얼굴을 뜯어보고 있었다.
“좀 불쾌하군요. 아무리 재상이라지만 왕녀의 얼굴을 그렇게 쳐다보다니요.”
“아, 송구합니다. 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다른 생각을 하다 보니 그만….”
“…. 아직 대답을 하실 수 없습니까?”
“…. 아직은 없습니다.”
“그럼 생각해보십시오. 그대가 내게 무엇을 줄 수 있는지….”
“… ….”
“그 답을 가져오는 날, 정보를 드리지요.”
“알겠습니다.”
레이네의 방문을 나선 플로랑은 착잡한 심경이었다. 최소한 그가 아는 정치란 이런 뒷거래를 통한 것이 아니었다. 국왕이야 미키네오스를 다스리는 사람이니 어쩔 수 없이 기밀을 유지하며 신하들에게 따로 뭔가를 시키는 경우가 왕왕 생길 수 있다지만, 국왕의 언질에도 불구하고 거래를 요구하는 왕녀의 행동은 납득하기가 힘들었다. 후원에서 회랑으로 나오는 그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플로랑이 간 후 레이네는 시종관이 된 나다니엘의 손을 잡고 일어나 침대에 누웠다. 시녀들은 이 모습에 이젠 익숙한지 딱히 황망한 얼굴을 하지 않았다.
“예스프리가 오늘 임지로 떠났다고 했지…?”
“예. 카몬 협곡에 있는 독립대대라고 들었습니다.”
“거긴 꽤 험지라고 들었는데….”
레이네의 눈이 침대에 놓여 있던 몇 장의 문서들 중 손에 집어든 것을 빠르게 훑었다. 카몬 협곡. 몬듀아르크 쌍둥이 봉우리의 기슭. 서북부 변방. 론도 산맥의 출입구. 독립대대 병력 3720. 5개 중대. 기마병 3백 17, 그리고 나머지 보병…. 되뇌이듯 중얼거리던 레이네가 나다니엘을 향해 물었다.
“너, 군략에 대해선 좀 아니…?”
“군략에 대해선 잘 모릅니다.”
“흠…. 공부해 둬. 앞으로 좀 더 쓸모 있어지고 싶거든….”
“예, 공주님.”
“비토.”
“….”
“이곳의 군사에 대한 내용은 이게 전부인가?”
“요약입니다.”
“더 자세히 말해봐.”
“협곡이므로 산지입니다. 기마병 자체는 수비형 부대에서 중요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산지에서 기마병은 거의 쓰이지 않지요.”
“그런데 왜 기마병이 3백이 넘지…?”
“만일 카몬 협곡에서 전투가 벌어진다면 그것은 공성전이 될 것입니다. 성 안에서 적을 방비하는 형태의 전투입니다. 더구나 협곡이기 때문에 적병은 한 번에 많은 수가 몰려올 수 없습니다.”
“…. 그래서…?”
“쉽게 함락되지 않습니다. 만일 적병이 겹겹이 싸여서 온다면 궁병을 동원해서 최대한 뒤에서 밀려드는 적의 수를 줄이고, 이미 앞에 몰려온 적들의 수가 많지 않다면 기마병을 이용해 성문을 열고 나가 섬멸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렇군…. 좁은 곳에서 싸우려면 기마병들이 뛰쳐나가는 것만으로도 위협이 되어야겠어.”
“그렇습니다.”
“…. 배워.”
“예.”
언제나처럼 두 말 없이 대답하는 나다니엘에게 문서를 치우라 한 레이네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뭔가를 생각하더니 비토에게 그만 가보라는 손짓을 했다. 그가 사라지고 나서 나다니엘을 불렀다.
“예, 공주님.”
“한 100만 팡그 정도 준비를 해 놔.”
“알겠습니다.”
“…. 안 궁금해…?”
“…. 궁금합니다.”
“그런데 왜 안 물어봐…?”
“…. 말씀해주실 때까진….”
“언제까지 노예처럼 굴 건지 모르겠군….”
“….”
“예스프리에게 보낼 거야. 아무래도 화살도 필요할 테고, 기마병들을 단단히 무장시키려면 그 정도는 있어야 할 테니….”
“… ….”
“…. 신경… 쓰여?”
“…. 아닙니다. 제가 듣기로도 예스프리 그라토레 트레제게 대대장은 상당히 능력 있는 젊은 지휘관입니다. 그런 사람을 공주님의 사람으로 만든다면 큰 힘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가. 궁이나 한 바퀴 돌고 와.”
레이네의 눈빛이 돌연 차가워졌다. 나다니엘은 공손하게 예를 올리고는 방을 나섰고, 레이네는 괜히 심통난 얼굴로 시녀들에게 연초를 요구했다.

보르틴 연합회의에 참석하기 위한 사신단의 출발 전날, 군사들의 상황을 마지막으로 점검한 루카스는 나자르에게 간단히 술이나 한 잔 하자며 그녀를 비어있는 의회경비대 사령실로 빼왔다.
“오늘 같은 날 술이라니…. 사령님도 참 엉뚱하세요.”
“뭐, 긴 여정일 테니. 다 같이 잘 해보자는 거지. 하하….”
“다 같이라뇨?”
“음…. 한 명 더 불렀어. 곧 올 거야.”
“네…? 저랑 사령님 말고 다른 지휘관이 또 있습니까?”
“아니. 지휘관이 아니라 병사야. 그것도 초짜.”
루카스의 말에 나자르는 설마 했다. 그리고 그 예상이 맞아 들어갔다. 먼저 사령실에서 그와 술잔을 놓고 잔을 채우던 중 한율의 목소리가 밖에서 들렸다.
“한율입니다.”
“음, 들어오십시오!”
루카스는 여전히 그에게 공대를 하고 있었다. 나자르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졌지만, 루카스는 그를 모르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면서까지 한율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 오셨습니까…, 아니 군례는 무슨…. 자자, 앉으시지요. 한율이 제법 각 잡힌 군례를 올리자 루카스는 손사래를 치며 그에게 자리를 권했다.
“저는 이제 병사입니다. 사령님께서 제게 공대를 하시다니요.”
나자르를 본 한율의 안색도 그다지 좋지는 않았다. 루카스는 어색한 분위기를 풀기라도 하려는 듯 조금은 경박하게까지 들리는 웃음소리를 내며 그에게 잔을 권했다.
“아무리 병사라도 어떻게 한율 공에게 함부로 반말을 하겠습니까. 자, 받으시지요. 내일부턴 먼 길 가는데, 오늘은 한 잔 하시고 편히 주무십시오.”
“사령님….”
“어, 어? 왜…?”
능청스럽게 자신을 쳐다보는 루카스를 향해 나자르는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 말고 한숨을 지었다. 딱딱하기는…. 루카스는 억지로 한 순배 돌린 후 다시 잔을 채웠다.
“연초 태우시지요.”
“….”
한율은 사양치 않고 그것을 받아 불을 붙였다. 셋 다 연초를 입에 물고는 연기를 내뿜는 중에 아무 말이 없었다. 루카스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짐짓 난감한 얼굴을 했다.
“이상한 일이군요.”
“…?”
“두 사람…. 같은 출신이라고 꽤 친했던 걸로 아는데….”
“….”
루카스의 말에 둘 중 어느 하나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 그는 처음으로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코로 연기를 짙게 뿜어냈다. 팔짱을 낀 채 연초를 피우던 나자르가 그의 말을 기다리는 듯 연초를 입에서 떼고 그를 주시했다.
“오늘 두 사람을 부른 이유는 그겁니다. 여기서 팡그릿샤까지는 꽤 먼 길이오. 그런데 지휘관과 병사가 서로 껄끄러우면 되겠습니까?”
“…. 지휘관과 병사가 껄끄러울 일이 뭐가 있습니까? 명령을 내리고, 듣지 않으면 군율로 다스리면 될 일입니다.”
“나자르 총사, 자네 그렇게 빡빡하게 굴 이유가 뭐야?”
“전 원칙을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계속 그런 식으로 나올 텐가?”
“… …”
루카스는 술잔을 비워내고 다시 한 잔을 채웠다.
“일단…. 나자르 총사의 말은 틀렸다. 무조건 군율로 다스린다고 해서 되는 건 아니야. 알면서 하는 소리인 것 같긴 하지만….”
“… ….”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지 묻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가는 동안 계속 이런 분위기면 대단히 불편해집니다. 지휘를 하는 데 문제가 생긴단 말이지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한율은 고개를 끄덕이며 싱긋 웃어보였다.
“왜 모르겠습니까, 사령님. 불편함이 없도록 명령에 절대복종하겠습니다.”
“….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란 거, 잘 아시잖습니까…. 대체 왜들 그러는 겁니까? 어? 왜들 그래? 두 사람, 같은 곳 출신 아니야? 내가 이런 말 하는 거 고깝겠지만, 나라 망하고 이런 기회, 거의 없지 않았습니까?”
“나라가 망해서 이렇습니다. 하하….”
“이보세요, 한율 공…!”
“농담 아닙니다. 이렇게 먼 곳에서 한 핏줄 만나는 거, 사령님 말씀대로 쉬운 일 아닙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어디 돈독하길 합니까, 서로 위해주길 합니까? 이러니 망한 겁니다, 그 나라가…. 하하하하…!”
한율의 말에 나자르는 저도 모르게 연초를 부러뜨려 버렸다. 부들부들 떨리는 그녀의 몸이 분기를 억누르고 있다는 걸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루카스는 낭패라는 듯 한숨을 토해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사람들, 심각하네…. 한율은 앞에 놓인 잔의 술을 한 입에 털어 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병사에 불과한 제게 이런 대우도 해주시고, 고맙습니다. 최선을 다해 가는 길 내내 어긋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한율이 깍듯이 군례를 올리고 나가는 동안 나자르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머리를 쥐어뜯는 듯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루카스는 비릿하게 웃더니 이내 골치 아프다는 표정으로 싹 바꾸며 나자르를 향해 책망하듯 물었다.
“이봐, 나자르 총사. 저게 대체 무슨 말이야? 말 좀 해 보지. 두 사람…, 아니, 아로사랑 나자르 총사랑 한율 공 사이에 무슨 일 있었어…? 말 좀 해 봐…!”
“…. 그저….”
“…아이린 아가씨 때문인가…?”
“…. 그렇게만 알아주십시오….”
루카스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여전히 눈을 감고 있던 나자르는 그가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모두가 퇴실을 하고 없는 실무관 복도를 핫산은 유령처럼 조용한 발걸음으로 걸어나오고 있었다. 사령실은 실무관의 끝에서 아래층으로 가야 했으니, 다시 막사로 가려면 이 복도를 반드시 지나야 했다.
“….”
“….”
한율은 복도 끝에 누군가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서 있는 품으로 보나 느껴지는 기운으로 보나, 아로사였다. 그는 조금 걸음을 빨리 하여 가까이 다가가 군례를 올리곤 다시 지나치려 했다.
“왜….”
“…?”
“왜… 그랬지…?”
아로사의 목소리는 조금 뾰족하게 날이 서 있었다. 날카롭다기보다는 다소 신경질적인 음성으로 느껴졌다. 한율은 그녀에게 돌아서서는 완연한 군인의 말투로 대답했다.
“무얼 물어보시는지 알 수 없어 대답할 수 없습니다. 질문의 요지를 알려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 그 날…. 왜 날 힘껏 치지 않았지…?”
“… ….”
“…. 넌 그 날 날 힘껏 치지 않았어. 생각해보니 그래. 왜 그랬지…?”
“… ….”
“봐준 건가…? 그런 거야…?”
“…. 죄송합니다.”
“말을 해 봐, 말을. 그 땐 몰랐는데, 너무 흥분하고 그래서 몰랐는데, 생각해 보니까 알겠더라고. 소리만 컸지, 잠깐 아프기만 했지, 다친 곳은 없었어. 넌 분명히 일부러 그렇게 쳤던 거야. 맞지?”
“… ….”
“대답 안 해…? 상관이 묻는데…?”
“…. 맞습니다.”
“왜 그랬어.”
“…. 저는….”
“머뭇거리지 말고 대답 안 해?”
“자격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무슨 소리야, 그게.”
“저는 아로사 총사님을 벌할 자격이 없었습니다. 비록 총사님께서 집사님께 종놈이라고 하신 것은 잘못되었으나, 그 외에 달리 총사님께서 제게 지적하셨던 것은 모두 맞는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알아듣게 말을 해 봐.”
“그게 전부입니다.”
“알아듣게 말을 해야 할 거 아냐!”
버럭 화를 내며 소리를 지르자 아로사의 목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한율은 그 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그녀의 앞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능청을 떠는 것인지 원칙을 지키는 것인지.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그 모습에 아로사는 괜히 분통이 터져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었다.
“… …. 가.”
“예, 알겠습니다.”
군례를 올리고 가려던 그의 발걸음을 아로사가 붙들었다.
“다시는….”
“….”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
“…. 나타나지 않겠습니다.”
복명복창을 하고, 돌아서서 다시 군례를 올리고, 사라져 버렸다. 텅 빈 복도에서 아로사는 뭔가가 북받쳐 올라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입술을 깨문 그녀의 감은 눈에서 눈물이 흘러 뺨을 타고 턱에 방울져 떨어졌다. 그 자리에 천천히 주저앉으며 아로사는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하늘보다 높은 자 없고…땅보다 낮은 자 없으니…그를 잊은 자 환의 신민이 아니다…환의 신민이 아닌 자 원한을 품을 자격이 없고…환인의 신민이었던 자 원한을 품을 자유가 없다…. 그녀가 한 번도 겪어본 일 없는 그런 표정으로 한율이 했던 말들이 그녀의 머리 속에 환청처럼 남아 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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