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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4 23:28 547회 0건
루카스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죽는다는 생각에, 그리고 눈앞에 저승사자처럼 서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한율에 대한 항거할 수 없는 두려움에 그는 후들거리는 온 몸을 수습할 여력조차 없었다.
‘주…죽는다…!!’
바짓가랑이가 축축하게 젖어왔으나 루카스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전신의 감각이 풀려버린 듯했다.
“사령님…!!”
두려움에 떨며 죽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루카스를 구해낸 것은 나자르였다. 한율은 투기를 거두지 않은 채 이 귀찮게 하는 여자를 돌아보았다. 나자르는 호통을 치려다 한율의 기세를 대하고는 그 자리에서 경직되었다.
“이게 무슨…!!”
짙은 핏빛의 눈동자를 대하자 숨이 턱 하고 막혀왔다.
‘대…대체 이게 무슨…, 이 사람은…!’
이런 도깨비 같은 인간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해 본 적 없는 나자르였다. 그녀는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전율을 느끼며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서다가 이내 다리에 힘을 꽉 주었다. 여기서 물러나면 안 돼, 일단 사령님을 구해야…! 다행히 한율은 자신을 공격할 것 같지는 않았다. 흘끗 보이는 루카스는 이미 이지를 상실했고, 이대로 물러서면 한율은 반드시 루카스를 죽이고야 말 듯한 모양새였다. 나자르는 침착하게 한 걸음 물러서며 검을 뽑았다.
“… ….”
검 끝이 한율에게 겨누어졌다.
“내가 대신 상대해 주지.”
나자르는 냉정하고 침착했다. 상황이 이와 같고, 눈앞에 있는 한율은 그녀가 상대하기엔 턱도 없이 강한 자였다. 그럼에도 나자르의 눈빛은 단호하게 한율을 향했고, 겨누어진 검 끝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한율은 투기를 조금 거두어들였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상관을 폭행하고 난동을 부리는 건 용납될 수 없어…. 전시라면 즉시 그 목이 달아났을 것이다…!”
“…. 전시 체제로 이 사신단을 수행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그렇다면 그 목이라도 내놓겠다는 말인가?”
“… ….”
대답하지 않는 한율의 투기는 어느새 조용히 갈무리되고 있었다. 그러나 나자르는 방심할 수 없었다. 기운을 끌어올리지 않더라도 자신은 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의 눈빛, 어깨, 손, 허리, 허벅지, 무릎, 발, 모든 부분에 정신을 집중하여 그가 덤벼든다면 단 한 번의 검격으로 그와 승부를 낼 참이었다.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가능할까…. 의구심이 일었으나, 그것은 불필요한 생각이었다. 가능성의 여부를 떠나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다. 나자르는 그렇게 판단했다.
자신을 향해 일격필살의 기세로 검을 겨누고 서 있는 나자르를 한참 보고 있던 한율은 무겁게 입을 열며 발을 내디뎠다.
“…떠나지….”
“… ….”
눈을 감으며 자신을 향해 한 발 한 발 다가오는 한율에게선 어떤 기세도, 심지어 분기조차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자르는 이것이 속임수가 아닐까 생각하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런 그녀를 의식하지 않는 듯 한율은 성큼 그녀를 지나 태연하게 자신의 검을 집어 들었다.
“내가 떠나지…. 떠나 주지….”
루카스는 이 모든 상황을 보고 있으면서도 보지 못하는 듯했다. 나자르는 처음 보는 이 뛰어난 젊은 지휘관의 모습에 착잡한 심경을 감추지 못하며 검을 늘어뜨리곤 한율을 향해 돌아섰다.
“…. 전시에 탈영이라면…. 목숨으로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군율을 모르는 건 아니겠지…?”
“….”
검을 허리에 찬 한율이 눈을 뜨고 나자르에게 시선을 주었다. 어느새 그의 눈빛은 평소의 황적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마치 그 자리에 없는 사람처럼 한율은 아무 존재감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태연한 기색이었다. 그 모습을 한참 마주보던 나자르는 검을 들어 군막 밖을 가리켰다.
“…가.”
“… ….”
“어서 꺼져. 네가 여기서 순순히 목을 내놓으리라곤 생각 안 한다. 그렇다고 나를 비롯해서, 여기 호위대의 전원이 덤벼들어도 네놈 몸에 손끝 하나 댈 수 없겠지.”
“….”
“꺼져버려. 다신 네 놈 얼굴 따위 보고 싶지 않다.”
“….”
“대신 알아둬라. 네가 여길 떠나게 되면 바이마샤르에는 절대 다시 발붙일 수 없다는 사실을…. 넌 전시에 상관을 폭행하고 도주한 탈영병이다.”
“….”
“어차피….”
나자르는 검을 수습했다. 나가려던 한율은 아직 그녀가 할 말이 남아있는 것 같아 멈춰 섰다. 등 뒤에서 입술을 달싹거리며 뜸 들이는 나자르가 말을 마치길 기다렸다.
“… …. 어차피 네놈 스스로 말했듯…, 떠돌이 잡객놈이니…. 아쉬울 것은 없겠지….”
“…. 이제 가도 되겠나…?”
“…. 꺼져.”
그리고 한율이 군막 밖으로 나갔다.
나자르는 멀어지는 한율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을 무렵까지 그대로 있다가 눈을 깊이 감으며 나직하게 한숨지었다.

말을 전해들은 핫산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나자르는 침중한 안색으로 그의 반응은 예상했다는 듯, 해야 할 말을 이었다.
“일단…, 전시에 상관을 폭행하고 탈영을 했으니 각지에 수배령을 내리겠습니다. 잡히면 처형을 할 것이고, 저항한다면 그 자리에서 즉참을 할 것입니다. 군령대로요.”
“즉참이라니…! 아니, 그보다 전시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
“수행길에 오르기 전 군사들에게 분명히 말해뒀습니다. 다시 시락으로 돌아와 해산할 때까지 모든 체제를 전시체제로 운영하겠다고요. 그것은 루카스 사령과 상의하여 내린 결론입니다.”
“그거야…,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만….”
긴히 보고할 일이 있다는 말에 사신단의 마차에서 나와 나자르와 나란히 말을 타고 가며 이야기를 듣던 핫산은 미간을 찌푸리며 시름에 잠겼다. 대체 왜 그랬을까…. 그가 아는 한율은 사람을 해치는 것을 싫어하는 부류였다. 되도록 부딪치는 것을 피하고, 조금 손해를 입더라도 일이 원만하게 해결되는 쪽으로 행동하는 편이었다. 그런 그가 직속상관인 루카스를 폭행하고 탈영을 했다는 사실이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아버지의 그런 모습을 예상했던 나자르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고 보고를 마무리했다.
“호위대에서 뺄 병력이 없어 일단 병사 하나에게 서한을 주어 시락으로 보냈습니다. 시급한 사안이라 선조치하였습니다.”
“음…. 일단…. 말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단속 잘 해. 이유야 어쨌든지 간에 이런 일이 수행길에 벌어졌다는 건….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물론입니다. 철저히 단속하여 차질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알겠네…. 루카스 사령은 좀 어때? 한율 공에게 폭행을 당했다면 크게 상했을 텐데…. 이동에는 문제없나?”
“턱을 좀 다친 것을 제외하면 다행히 크게 상한 곳은 없습니다. 임무 수행에는 큰 차질이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 어쨌든…. 네 책임이 좀 더 커졌구나. 잘 부탁한다.”

한율이 사신단 수행길에 지휘관을 폭행하고 탈주했다는 소식은 시락 전체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소문은 공중에 떠다니기라도 하듯 순식간에 바이마샤르 전역으로 퍼져 나갔고, 시민들은 모일 때마다 론지니아 전투의 영웅이 저질렀던 만행을 입에 올리곤 했다. 원인에 대해선 아무것도 밝혀진 바 없는 이 사건에 대해 무수한 추측들이 난무했다. 한율이 허울뿐인 자리에 있었던 울분을 풀었다는 사람도 있고, 어떤 이들은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군부의 젊은 유망주에게 한풀이를 한 것 아니겠느냐 말하기도 했다. 확인된 사실은 없었으나 그들의 추측은 마치 사실처럼, 사람들의 입에서 살이 붙고 옷이 입혀져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소식을 전해들은 총리 기즈를 비롯한 의회의 모든 의원들과 국정에 관여하는 모든 이들 또한 저마다 의견이 분분했으나, 가장 분명한 사실에 대한 처결부터 서둘렀다. 전시 상관폭행 및 탈영 혐의로 전국 각지에 한율에 대한 수배령이 떨어지고, 도시와 마을 길목마다 경계 병력이 투입되었다.
“할아버지도 알고 계시죠?”
“한율 공 이야기 말이구나.”
식사를 하며 차프라가 그 이야기를 꺼내자 핀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 정신이라면 그럴 수가 없다며 기가 막혀 하는 차프라에게 할머니는 한율이 허울뿐인 자리에 앉았던 것을 언급했다.
“울분이 많이 쌓였겠지…, 따지고 보면 조용히 지나가도 좋을 사람 붙잡아 괴롭힌 꼴이니….”
“그래도 그렇죠…! 시찰까지 하면서 의욕을 보였던 사람이 그게 뭐 하는 짓이에요. 할머니는 편들 걸 드셔야지….”
“편을 드는 게 아니라 딱해서 하는 말이다.”
핀도 동의한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차프라는 괜히 제가 분을 터뜨리며 성마르게 굴었다. 저항하면 그 자리에서 즉참이라던데, 그런 놈이 도망가도록 놔 둔 호위대 놈들은 대체 뭘 한 건지…. 핀이 혀를 끌끌 찼다.
“이유에 대해서 밝혀진 게 없다고 했지…?”
“밝혀진 게 왜 없어요, 뻔하죠. 할아버지는 무슨 말씀이세요, 그게…?”
“보고된 이유가 없다고 들었는데…?”
“그걸 꼭 들어야 아세요…? 실권 없는 자리에 앉아서 어떻게든 뭐 좀 해보겠다고 시찰까지 했었는데 쫓겨난 꼴이잖아요. 마지막에 뭘 어떻게 잘못했는지 몰라도 병사로 좌천되기까지 했고….”
“… ….”
“사람 그렇게 안 봤는데…, 수행길에서 그런 짓을 하고…. 절대 용서하면 안 돼요. 바이마샤르 군부 전체에 수치를 주려고 작심을 한 거라고요.”
“…. 사실이 확인된 바 없는 걸로 넌 어떻게 그렇게 확신을 하니…?”
“할아버지…!”
“한율 공이 잘못을 저지른 건 사실이지만…. 그래서 벌은 받아야겠지만, 네가 어디 그냥 푸줏간이나 대장간 일을 하는 평민도 아니고…. 그래도 보위부 총사라는 녀석이 확인되지 않은 추측을 사실인 양 떠들고 다녀 버릇하면 큰일 난다.”
“… ….”
“이 일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는 말이다. 언제나 정확한 사실을 먼저 아는 게 중요해. 명심해 두거라.”
“…예.”
소식은 바슈미르 저택에도 당연히 전해졌다. 아로사의 말을 들은 엄마는 그가 자신을 핍박한 바이마샤르에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기 위해 처음부터 작심을 했으리라는 추측을 하며 분개했다. 나라 망신을 시켜도 유분수지…, 그 놈이 처음부터 그런 놈인 걸 알았어야 했어, 알았어야…. 아이린 일로 연초를 잠시 피웠던 엄마는 다시 연초를 입에 물고 짙은 연기를 내뿜었다. 아이린은…어떻게 할까요? …그게 무슨 소리니? 아시잖아요. 아이린이 어떤지…, 만약 한율 공이…. 공은 무슨 얼어죽을…!! 그 쳐죽일 놈 때문에 아이린이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네가 몰라서 그 놈 이름에다 ‘공’자를 붙여…?! 버럭 소리를 지른 엄마는 연초를 뻑뻑 빨아대곤 신경질적으로 비벼 껐다.
“내 그 놈 생각만 하면 이가 갈려서 잠도 안 와, 아주….”
“… ….”
식식거리는 엄마와 달리 아로사는 차분하다 싶을 정도로 조용했다. 평소 같으면 함께 화를 내고 길길이 날뛰어야 정상인 딸이 그러고 있었지만, 엄마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동족이라 마음이 좋지 않겠거니 하는 정도였다.
“아로사 아가씨가 마음이 안 좋으신가 보네요.”
“…그렇겠지. 그 놈 처음 만났을 때 얼마나 좋아했어. 생전 처음으로 동족을 만났는데…. 이런 일이 생겼으니 심란하기도 하겠지.”
“…. 참…. 그럴 사람 같지가 않았는데….”
“유모는 세상 그만 살고도 모르겠어? 사람 속 겪어봐야 안다더니…, 나 원 기가 막혀서….”
되씹고 곱씹던 그들의 눈으로 대문 밖에서 다가오는 마차가 들어왔다. 두세 명 정도가 탈 것 같은 작은 마차의 앞에는 보위부의 표식이 있었다. 뭐야, 저건…? 글쎄요…. 저건 보위부 표식인데요. 엄마와 유모가 1층으로 내려갈 즈음 마차에서 내린 보위부장과 정보부장이 정문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엄마를 보더니 그들은 정중하게 모자를 벗고 인사했다.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바슈미르 의원 부인. 평안하셨습니까?”
“네…, 오래간만이네요. 보위부장님과 정보부장님…이시죠?”
“예. 기억해주시는군요.”
이들이 여긴 무슨 일일까. 남편은 사신단을 이끌고 바이마샤르 국경을 넘어갔는데…, 엄마의 생각을 읽기라도 하듯 보위부장은 말을 돌리지 않고 바로 용무를 꺼냈다. 전 보위부 군사자문 한율의 전시 상관폭행 및 탈주사건에 대해 조사할 것이 있어서 찾아뵈었습니다. 조사라니요? 그 놈이 우리랑 무슨 관계라도 있다는 건가요? 자못 앙칼지게 대꾸하는 엄마에게 정보부장이 이미 예상한 반응이라는 듯 웃는 낯으로 양해를 구했다.
“아닙니다. 그저 형식적인 조사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어차피 전국에 수배령이 내려졌으니 수사를 하는 모양만 갖추는 겁니다.”
“…. 그렇군요.”
“좀 외람된 청을 하나 해야겠습니다만….”
“말씀해보세요.”
엄마의 말투가 조금 누그러졌다.
“바슈미르 의원님의 따님께서…, 한율이 자문직에 있을 때 몇 차례 찾아갔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한율은 이곳에서 머무른 적도 있고요. 그래서 정보부장이 따님과 좀…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부인께서 양해를 해 주셨으면 합니다.”
“… …. 그런 건 어떻게 아셨나요…?”
“하하…, 저희는 국가의 안전을 책임지는 사람들입니다. 필요한 만큼 정보는 다 갖추고 있는 편이지요.”
“…. 그러…시지요.”
“고맙습니다, 부인. 몇 가지 형식적인 질문만 드리고 번거롭지 않으시도록 빨리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정보부장님…?”
“유모가 안내 좀 해 줘. 보위부장님은 저하고 말씀을 하시겠지요?”
“그렇습니다. 알아서 양해를 해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건강을 되찾은 아이린은 그러나 여전히 방에서 잘 나오지 않고 있었다. 주로 책상 앞에 앉아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책을 뒤적거리거나, 이따금씩 한율이 수련하던 것을 생각하며 따라하는 등 싱거운 일들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정보부장이 찾아온 이 날도 그녀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이렇…게 했었나…. 한율이 하던 동작을 어설프게 따라하던 아이린은 시종장이 들어오는 줄도 모르는 모양이었다. 문을 열고서도 몇 차례 다시 문을 두드려서야 아이린은 누가 들어왔다는 걸 알고는 얼른 몸을 곧추세우며 어색하게 섰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아니…, 그냥….”
“….”
시종장은 그녀가 한율의 수련 동작을 따라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측은한 마음이 일어났으나, 그런 것을 내비치며 말을 할 때는 아니었다. 손님이 오셨습니다. …? 손님이라뇨? 불쾌한 기색이 떠오르는 아이린에게 시종장은 얼른 정보부장이 왔다며 아이린을 응접실로 안내했다.
“몸이 불편하다는 말씀을 몇 번 들었었는데, 건강을 되찾은 것 같아 다행이군요. 나는 정보부를 맡고 있는 필립 마르네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아이린이라고 합니다.”
“예.”
니가 왜 날 찾아? 하는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자리하는 아이린에게 정보부장은 잠시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다. 음…. 그리고 이내 나오는 말이 그녀를 놀래켰다가, 이내 감격스럽게 만들었다.
“전 보위부 군사 자문 한율과 관련해서 몇 가지 형식적인 조사를 하고자 찾아왔습니다. 수행길에 상관을 폭행하고 탈주를 했다는 보고가 들어와서요.”
“네…?!”
“지휘관인 루카스 사령을 살해하려다 부지휘관 나자르 총사, 그러니까 아가씨의 언니 되시죠? 어쨌든 나자르 총사가 그를 말리자 그 길로 부대를 벗어나 도망을 쳤다고 하더군요.”
아이린의 눈에 눈물이 솟기 시작했다. 정보부장은 들고 온 서류를 보며 말을 이어 나갔다.
“일단…, 지휘관의 재량으로 수행길 호위대는 전시 체제로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전시에 그런 일을 벌였으니 군율에 따라 수배령을 내리고 체포·압송 즉시 처형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만…, 저항을 하게 되면 현장에서 즉참을 하는 것도 허용이 됩니다. 아가씨께서…. …? … …. 아가씨…?”
수배령이니 체포니 즉참이니 하는 이야기들은 더 이상 아이린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는 기도라도 하듯 두 손을 가슴에 모은 채 울음을 삼키며 솟구치는 눈물을 여과 없이 흘려내고 있었다. 개요를 설명하고 질문을 시작하려던 정보부장이 그제야 아이린을 보고는 말을 멈추었다.
“아이린 아가씨…? 왜 그러세요? 어디 불편한가요…?”
그녀는 어깨를 울먹이며 훌쩍거렸다.
‘그 분이…, 그 분이… 아신 거야…! 루카스가 나한테 무슨 짓을 했는지…! 루카스가…! 그래서 날 위해서…! 날 대신해서…!’
“아가씨, 아이린 아가씨…?”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한율 님…, 고맙습니다….’
정보부장은 당황했다. 계속 불러도 대답은커녕 반응조차 없이 아이린은 울기만 하고 있었는데, 그 얼굴은 또한 기쁨에 겨워 벅찬 표정이었으니 사정을 모르는 그로서는 어리둥절할 밖에. 그것은 시종장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린이 어디가 안 좋은가 싶어 어깨를 감싸며 괜찮으냐 물어도 아이린은 그저 울기만 할 뿐 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가씨 왜 그러세요…? 괜찮아요…?”
무슨 말을 해도 귀에 들어갈 것 같지 않다고 생각한 시종장은 오늘은 날이 아닌 것 같다는 말로 상황을 종결시켰다.
“아무래도 오늘 아가씨께서 조사를 받을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죄송하지만 다른 날 다시 와 주시면 안 될까요…?”
“음….”
그러나 아이린에게 물어볼 것은 정보부장의 입장에선 꽤 중요한 것이었다. 그는 한율이 보위부 병사로 배속을 받아 입영하기 전날 아이린을 만났던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 때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그의 입장에서 한율을 잡아 들이는 데 결정적인 단서가 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중요한 질문이 있긴 한데…. 아가씨가 오늘 몸이 좀 안 좋은 듯하니…. 어쩔 수가 없군. 잘 보살펴 드리게.”
“예….”
“다음에 다시 찾아오도록 하지요. 좀 쉬어야겠군요.”
정보부장은 희미하게 웃어보이곤 울고 있는 아이린을 뒤로 하고 응접실을 나섰다. 핫산 대표 딸이 망나니라더니…, 소문이 너무 얌전하게 났군…! 투덜거리며 1층으로 내려오니 거기엔 이미 이야기를 끝냈는지 보위부장과 바슈미르 부인이 있었다. 자신을 보는 보위부장에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어 보였다. 보위부장도 한숨지었다. 이미 필립이 뭘 물어볼 지 들은 듯 엄마도 같이 한숨지으며 정보부장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아이가 계속 좀 안 좋아서요. 도움이 되어 드리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음…. 아무래도 오늘은 좀 안 좋은 날 같습니다. 혹시 가능하시다면…, 부인께서 직접 한 번 타이르면서 물어봐 주심이….”
“… ….”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저희로선 정말 중요한 일인지라….”
“…그래보도록 하죠…. 어차피 저도 한 번쯤은 물어볼 생각이었으니까요….”
“고맙습니다, 부인….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알아내는 대로 기별을 드리겠습니다.”
“그럼….”
마차에 오른 두 사람은 아무것도 건진 것이 없는 방문에 대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한숨부터 쉬었다. 보위부장이 연초를 꺼내 내밀자 정보부장이 됐다며 손을 내저었다.
“숨기거나 하는 기색은 없었어…?”
불을 붙이고 한 모금 빨아들인 보위부장이 연기를 내뿜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정보부장은 모자를 고쳐 쓰며 심란한 얼굴로 한숨지었다. 문제네…, 대표 딸네미가 제멋대로라더니…. 이건 뭐…,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왜…? 아냐, 아무것도…. 뭐라고 했기에 그래? 말이나 하면 다행이게…? 그게 무슨 소리야? 훌쩍 훌쩍 울기만 하더라고, 말을 해도 들어먹지도 않고…. 허허…. 푸념이라도 하듯 주거니 받거니 잡스러운 말들이 오갔다. 자넨 뭐 알아낸 거 있어…? 있으면 말했겠지…. 보위부장은 연초를 창밖으로 던졌다.
“부인도 답답한 모양이더라고~. 하긴 왜 아니겠어, 딸이 그 모양이니….”
“퓨우… ….”
마차가 멀어지는 걸 보며 방에 앉아 있는 아이린은 진정이 조금 되었는지 어깨만 간간히 울먹거릴 뿐, 더 이상 울지는 않았다. 남은 눈물이 찔끔 찔끔 나오고 있었다. 때때로 눈물을 닦아내는 그녀는 저도 모르게 훌쩍거리는 가운데 웃음을 섞었다.
“힛…, 헤헷….”
참으로 혼자 보기 아까운 진풍경이었으나, 다행히 아무도 그녀를 보고 있지는 않았다. 약간 부어오른 눈을 굴리며 쭈그려 앉아있던 그녀는 다시 일어나 한율이 하던 수련을 떠올렸다. 그래, 그런 걸 해서 그렇게 강해진 거야, 그 분은…. 루카스 새끼는 기껏해야 군사 훈련이나 받았으니 한율님 상대가 될 리가 없지…. 아마 나자르가 말리지 않았으면 단매에 맞아 죽었을 걸…? 키득거리는 소리가 새어나오자 듣는 사람도 없는데 아이린은 얼른 입을 막고 주위를 살폈다. 루카스가 한율에게 사정없이 얻어맞는 상상을 하자 웃음이 터져 나와 참을 수가 없었다. 아이린은 입을 막으며 침대에 다이빙하듯 몸을 던져 베개에 얼굴을 묻고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 사람처럼 시원하게 소리를 질렀다.
“얘 좀…. 진정 됐을까…?”
“이따 저녁 때 식사하러 내려오면 그 때 보세요.”
“왜…? 많이 안 좋아 보였어…?”
시종장은 걱정스레 묻는 엄마에게 고개를 가로저어 보였다. 그런 건 아닌데…, 쉽게 그쳐질 것 같지가 않더라고요. 일단은 혼자 진정하게 내버려 두시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엄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하는 듯 다시 연초를 입에 물었다. 마님 요즘 연초 너무 자주 태우셔요. 유모 같으면 안 태우게 생겼어…? 이거라도 안 태우면 내 속이 시커멓게 타게 생겼는데…. 저도 한 대 피울게요. 앉아. 두 여자는 마주앉아 뻐끔 뻐끔 연기를 내뿜었다.
“한 번….”
“…?”
“올라가 보기는 해야겠어. 그냥 보고라도 와야….”
“마님…!”
엄마는 참지 못하고 시종장이 말릴 틈도 없이 일어나 거실을 나갔다. 말리려고 일어서던 시종장은 휭 허니 나가버리는 엄마를 보고 있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중얼거렸다. 누가 말려…. 그러다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는 소파를 발견했다. 엄마가 불붙은 연초를 그대로 소파에 던져놓고 간 탓이었다.
“아이고 이를 어째…! 이게 얼마나 비싼 시튼데…!!”
베개에 얼굴을 묻고 소리를 지르며 원 없이 웃던 아이린은 그러다 저도 모르게 잠들어 버렸다. 두드려도 기척이 없자 문을 열어본 엄마는 잠든 딸아이의 침대로 다가와 손수 아이린을 뒤집었다.
“얘는…. 자려면 바로 누워서 잘 것…. ?”
뒤집어 놓은 아이린의 얼굴은 웃음기가 떠올라 있었다. 얼굴엔 눈물 자국이 지워지지 않은 채였고, 눈이 약간 부은 것이 한참을 운 모양이었다. 엄마는 안타까운 얼굴로 한숨지으며 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내 딸이 미쳐가나 보다 싶었다. 웃으며 잠들다니…. 한참을 내려다보던 엄마는 아이린에게 이불을 덮어주었다. 깊이 잠든 듯, 그녀는 입술을 꼬물거리며 몸을 뒤척일 뿐 눈을 뜨지 않았다.
“… ….”
얼마나 잤는지 아이린이 깨어났을 땐 이미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집안은 모두 잠든 듯 조용했고, 아이린은 침대에서 일어나 밖을 보았다. 불 켜진 방이 없는 것을 보니 꽤 깊은 밤중인 듯했다. 해 지기 전부터 잤던 것을 생각하니 문득 민망해진 아이린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책상에 앉아 촛불을 켜고, 늘 그랬던 것처럼 의자에 쭈그려 앉았다. 커다란 눈망울을 이리 저리 굴리는 그녀의 머릿속에 낮에 정보부장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래…, 루카스 따위가 한율님의 상대가 될 리 없지…. 나도 조금만…, 한율님 만큼…, 아니, 그 반만큼만 강했다면 그 개자식한테 그런 일을 당하진 않았겠지….’
이를 부득 소리가 나도록 악문 아이린은 콧김을 내뿜으며 상상 속에서나마 루카스를 씹어 먹었다. 나쁜 새끼…, 유망주다 뭐다 떠받쳐 주니까 지가 제일 잘난 줄 알았겠지…, 쌤통이다…. 또 키득거리고, 다시 이를 갈고 하기를 반복하던 그녀는 한 순간 눈동자를 멈추곤 뭔가를 결정한 듯 고개를 힘있게 끄덕였다. 그래, 나도 강해지자. 한율님처럼…! 아니, 그만큼은 아니더라도 다시는 그런 놈들한테 당하지 않도록…! 강해져야 돼…! 주먹을 불끈 쥔 아이린의 눈빛이 제법 결연하게 빛났다.
다음날 바슈미르 저택에선 난리가 났다. 아이린이 서한 한 장만 달랑 남겨놓곤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것이 그 이유였다. 아로사는 출근도 않은 채 엄마와 함께 거실에 앉아 있었고, 아가씨가 집을 나가도록 단속을 제대로 하지 못한 당직 시종은 지하실에 갇혀 집사 노이만에게 호되게 벌을 받아야 했다.
“이…이…, 이…게 사실이야…?”
서한을 읽는 엄마의 손이 푸들푸들 떨리고,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얼굴까지 붉게 달아오르며 핏줄이 불거지는 엄마를 보며 아로사는 무슨 일이냐 물었지만, 엄마는 대답하지 못한 채 눈 둘 곳을 몰라 어쩔 줄을 모르는 듯했다.
“이리 줘 보세요. 뭔데…?”
빼앗듯 서한을 받아 든 아로사 역시 서한을 읽으며 눈이 부릅떠졌다.
‘그 동안 나 때문에 걱정을 끼쳐드려서 죄송해요. 돌봐주고 위로해줬던 엄마랑, 지금은 미키네오스로 가시는 아빠랑, 아로사, 나자르, 그리고 집사와 시종장 유모에게도 감사하고 죄송하다는 말씀 전하고 싶어요.
저는 오늘 집을 떠나서 한율 공에게 갑니다. 제가 당했던 일을 다시 겪지 않기 위해서, 강해지기 위해서 한율 공을 선생으로 모시고 무예를 배울 생각이에요. 아시겠지만 한율 공은 군부에 있는 어떤 사람보다도 강해요.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일지도 몰라요. 그 분은 분명히 여기에서 배우지 못하는 어떤 특별한 무예를 배웠을 거라고 생각해요.
오해를 풀어드리기 위해서 서한을 남깁니다. 제가 그 동안 힘들어했던 건 물론 한율 공 때문이기도 하지만, 한율 공은 오히려 저를 달래고 위로하고, 힘을 주고 갔어요. 아로사도 알겠지만 한율 공이 갖고 있는 신비한 능력이 저를 먹게 하고 움직이게 해 주었답니다. 제가 그렇게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있었던 건 모두 루카스 때문이에요.
한율 공을 만나기 위해 의회당으로 가던 날 루카스를 만났습니다. 제대로 먹지 못했던 제가 말을 타고 가던 중 어지럼증이 있어서 잠시 쉬는데 마차로 태워다 주겠다며 호의를 베푸는 척 했었죠.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날 제가 의회당으로 간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어요. 그 날 루카스는 저를 겁간했습니다. 제가 반항하자 찍어 누르고 칼을 뽑아 위협하기까지 했어요. 루카스는 나라에서 높으신 의회의 어르신 댁 딸이 옷이 찢어진 몰골로 집에 들어가면 집안이 어떻게 되겠느냐며 협박하기까지 했습니다. 저는 어쩔 수 없이 루카스에게 반항하지 못하고 당해버렸고, 루카스는 그 이후에도 저에게 꽃과 위로 서한을 보내며 저를 희롱했습니다.
한율 공이 수행길에 루카스를 폭행했던 건 아마 그 사실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분은 자신이 지명수배를 당하고 위기에 몰릴 것을 알면서도 절 위해서 그런 무모한 행동을 하셨던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니 그 분을 더 이상 비난하거나 욕하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간곡히 부탁드려요.
저는 한율 공을 찾아갈 겁니다. 찾아가서 열심히 무예를 배워서 강해져서 돌아올게요. 다시는 힘이 없어서 당하는 일이 없도록 강한 검사가 되어 돌아올 겁니다. 여행길에 필요한 돈은 제가 조금 챙겼으니 너무 걱정 마세요. 다녀올 때까지 모두 건강하세요. 엄마 사랑해요. 아빠한테도 사랑한다고 전해주세요.’
엄마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당장 정보부랑 보위부에 사람 보내서 알려….”
“마님…!”
“그리고 당장…, 이 서한…, 필사해서 애 아빠한테 보내…. 지금 당장…!!”
“마님, 진정하세요…!”
“내 말 안 들려…?!! 당장 사람 보내고 이거 애 아빠한테 보내라고!!!”
발작적으로 소리지르는 엄마는 분을 못 이겨 눈물을 뿌리고 있었다. 시종장은 집사에게 눈짓을 하고는 엄마를 진정시켰다. 집사는 문 밖으로 나가 무슨 일인지 궁금해 모여든 시종들을 모두 해산시켰다.
“빨리들 제 자리로 안 돌아가…? 그리고 서한 가져온 거 누구야? 그 서한 읽어보거나 내용 아는 사람들 여기 남아.”
시종들은 우물거리며 서로 눈치를 살폈다. 다들 모른다는 듯 눈빛을 주고받았지만, 이미 그들 사이에 말이 퍼져 있을 것을 모를 집사가 아니었다.
“집사 비켜봐.”
아로사가 문을 열고 나오자, 집사 노이만은 옆으로 물러섰다. 아로사는 핏빛으로 변한 눈동자로 시종들을 쓸어보았다. 그 눈빛에 시종들은 겁에 질려 벌벌 떨었다. 아로사의 눈동자는 분기가 차오를 때마다 붉게 변하곤 했었다.
“지금부터 단 한 명도 여기서 움직이지 마. 그리고 묻는 말에 정직하게 대답해. 그렇지 않으면….”
소름끼치는 살의로 번뜩이는 그녀의 목소리가 시종들을 짓눌렀다. 아로사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들었다. 시종들은 모두 경직되어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했다.
“모조리 이 검에 피를 묻혀야 할 거야.”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그녀를 말리기 위해 뭐라고 말을 하려던 집사는 아로사의 살기등등한 기세를 보고는 저도 겁을 먹고 물러섰다. 도저히 자신이 말릴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아로사는 하얗게 질려 떨고 있는 시종들을 하나하나 쓸어보며 서한의 내용을 아는 사람은 앞으로 나서라 명령했다.
“… ….”
“….”
눈치를 보던 시종들이 하나 둘 머뭇머뭇 앞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넷…. 네 명이 앞으로 나섰다. 아로사의 성격을 아는지라 그들은 나서면서도 오줌이라도 지릴 듯 벌벌 떨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자신들의 목을 향해 떨어질 것 같은 아로사의 검날에 그들뿐만 아니라 다른 시종들과 집사의 시선까지 집중되어 있었다.
“너희들뿐이야…?”
“… ….”
“누구 또 없어…? 지금 나서.”
아로사가 재촉했지만 더 이상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는 검을 거두어 들였다. 집사를 비롯한 시종들 모두가 한숨 놓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로사의 눈동자에 서려 있던 핏빛도 조금 사그라져 있었다.
“너희들,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 예, 예, 아가씨…!”
“절대로 입을 열지 않겠습니다…!”
“… …. 이 비슷한 이야기라도 내가 집 밖에서 듣는 날이 바로 너희들이 죽는 날이야. 알아들어?”
“예, 아가씨…!!”
아로사는 다른 시종들을 향해서도 경고했다.
“너희들도 마찬가지야. 이 일에 대해서 더 이상 궁금해 하지 마. 목을 잘 간수하고 싶으면 질문조차 해선 안 된다. 알아듣겠어?”
질려 있던 시종들은 그제야 안심이 되는 듯 몸을 깊이 숙이며 아로사의 말에 따를 뜻을 나타냈다. 아로사는 집사에게 단속을 잘하라며 마무리했다.
“마님, 지금 주인어른께서는 중요한 일로 가셨어요. 거기다 루카스까지 거기 있습니다….”
“… ….”
“그 곳에서 일이 생기게 해선 안 됩니다, 마님…!”
“…. 나도 알아…. 조용히 좀 해 봐….”
불만 붙여놓고 입에 한 번 대지도 않은 연초를 쥔 손이 떨리고 있었다. 엄마는 아직도 이 일이 실감이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얼굴을 가린 다른 한 손 아래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시종들을 단속하고 온 아로사는 깊이 한숨을 내쉬며 그 옆 소파에 앉았다.
“넌 어서 출근해….”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 넌 보위부 총사야. 빨리 가….”
“어머니…!”
“빨리 가라는 말 안 들려?! 빨리 출근해…!!”
버럭 야단을 치는 엄마는 울고 있었다. 짧지만 깊게 한숨을 내쉰 아로사는 착잡한 얼굴로 일어났다. 시종장이 그녀를 따라 나섰다. 정문을 나가기 전 돌아본 아로사는 시종장이 뭘 걱정하는지 알 것 같았다.
“아가씨….”
“걱정 마. 내가 아무리 멍청해도…. 이런 일 입에 담을까….”
“… ….”
“…. 어머니 잘 부탁해. 일찍 올게.”
“예. 다녀오세요.”
아로사는 굳게 입을 꾹 다문 채 말을 재촉했다. 흐럇~! 늦은 시각인지라 처음부터 그녀는 말을 전력으로 몰았다. 대문이 열리고, 아로사가 나가고, 다시 대문이 닫혔다. 말발굽 소리는 순식간에 멀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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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런님이 이미 다음 내용을 예상하고 계셨군요. ㅋㅎ..루카스는 아직 좀 쓸모가 있어서
살려뒀습니다. 죽는 건 꽤 이야기가 진행된 다음의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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