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와의 거래에서 처음부터 밀린 형국이 된 병부대신은 라크라오스를 찾았다. 국왕을 오랫동안 모셨던 사람이니, 그의 방식을 가장 잘 알면서 그가 뭔가 조언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은 라크라오스 뿐이었다.
“공주님께 한 방 먹었군, 그래….”
사연을 들은 라크라오스는 예의 그 표정없는 얼굴에 잔잔한 미소를 띄웠다. 비웃는 것인지, 아니면 후임의 서투름에 대한 선배의 여유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플로랑은 고민이 가득 깃든 안색으로 물었다.
“공주님께 드릴 수 있는 것…. 대체 뭐가 있겠습니까…?”
“그보다는…, 공주님이 뭘 원하시는지부터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
“신하된 자로서 상전의 마음을 헤아리는 건 기본일세. 먼저 공주님이 어떤 분인지부터 알아야 하지 않겠나….”
“정무대신…!”
라크라오스는 차맛이 좀 썼는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쓴 입맛을 다셨다. 플로랑은 도무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에게 고민을 토로했다.
“정치적인 수싸움이 나라를 다스리는 과정에서 필연적인 것임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라를 위한다는 대의 앞에서조차 그런 것으로 시간을 지체한다는 것을 저는 납득할 수가 없습니다.”
“자네는….”
“….”
“…. 자네는 정치가 뭐라고 생각하나…?”
“… 시민들의 다양한 욕구들을 적절하게 조절하며 가장 공통된 만족을 이끌어내는 것을 정치라고 봅니다.”
분명하게 힘주어 말하는 플로랑의 대답을 듣고 라크라오스는 잠시 말이 없었다. 한참을 가만히 있더니, 라크라오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 가장 기본적인 거지….”
“또한 결코 훼손될 수 없는 대의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그 시민이란 건 비단 왕궁 밖에 살고 있는 사람들만을 말하는 건 아닐세.”
“… 귀족 대신들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군주가 아닌 자들을 말하는 걸세.”
“정무대신…!”
“폐하가 왕위에 오르시고 지난 20년간…. 나는 많은 신하들을 보아 왔네. 그들은 폐하를 일컬어 군주라고는 하면서도, 정치에서 폐하와 수싸움을 벌이느라 정신이 없었네.”
“….”
“가신으로서, 폐하의 신하로서 살아온 지가 30년이 조금 넘는 동안 나는 늘 신하는 상전과 줄다리기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 상전의 뜻을 헤아리고 상전이 원하는 것을 갖다 주는 사람이 바로 신하라고 믿어왔네. 지금도 그렇게 믿고….”
“… ….”
“공주님은 폐하의 따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폐하의 신하이기도 하네. 자네나 나보다는 더 높은 신분이라고는 해도, 그 사실은 변함없네. 그렇다면 공주님 역시 시민의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지.”
잠자코 듣고만 있는 플로랑.
“공주님께 자네가 뭘 해드릴 수 있는지는 내가 말해줄 수 있는 게 아닐세. 그건 자네의 능력에 따라 달라지는 일이니까….”
“….”
플로랑은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약간 주억거려 보였다.
“하지만 이미 자네의 대의 속에…, 그 답이 있는 것 같군….”
“….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가 공주님 역시 폐하의 신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군주가 아닌 자를 시민이라고도 했고…. 욕구를 조절하는 것이 정치라면…, 이미 자네는 그 방향을 알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단 말일세.”
라크라오스는 말을 아끼고 있었다. 직접적으로 콕 짚어 말해주기보다는 에둘러 그에게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었다. 플로랑은 눈을 굴리며 궁리하는 듯한 얼굴로 그의 말을 되새겨 보다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씀 감사합니다. 새기고 새겨서 방도를 찾아보도록 하지요.”
“도움이 되었길 바라네.”
“저도 그렇습니다. 그럼….”
집무실로 돌아온 그는 깍지 낀 손으로 이마를 두드리며 고심에 들어갔다. 혼잣말하듯 정무대신의 말을 되뇌어 보았다. 그로서는 아직 공주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했다. 일단은 그의 말에서 해답을 찾는 편이 빠르겠지…. 이곳에서 그보다 더 폐하와 왕녀를 잘 아는 사람도 없을 테니…. 그런데 도무지 방법이 안 떠오르는군, 방법이….
이렇듯 병부대신의 골머리를 썩게 만든 레이네는 국왕 바루나로부터 또 한 소리를 들어야 했다. 꼭 그래야 했느냐는 바루나의 물음에 레이네는 언제나 그랬듯 그를 자극시키는 말로 답변했다.
“폐하로부터 배운 것입니다. 제게 하실 질문은 아닌 듯합니다.”
“… ….”
한두 번도 아니었으니, 이 정도의 자극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 그러나 한 번쯤은 더 설득하려는 시도가 언제나 있어 왔다.
“네가 얼마나 패를 옮기는 데 능란한 지는 아비도 안다만…. 전에 말했지 않느냐. 병부대신은 패를 옮겨서 끌어들이기보다는 마음을 주는 편이 낫다고…. 그렇다면 굳이 그런 머리를 쓰지 않아도 될 것을 왜 하지 않아도 될 수고를 자처하는 거냐…?”
“마음이라니요, 폐하…?”
어이없다는 듯 레이네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낯섭니다, 폐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 그것도 두 번이나요.”
“…. 정치는 술수만으로 되는 일은 아니다.”
“술수가 정치에만 있는 것이 아닌 것이겠지요. 말씀을 거꾸로 하신 듯한데…. 오늘따라 실수가 잦으십니다, 폐하.”
“… ….”
바루나는 언제나 딸의 쿡쿡 쑤셔오는 말을 받아넘기는 일이 쉽지 않았다.
“어쨌든…. 현재 병부 내에서 몇몇 부실한 놈들을 빼면 메르히네 경의 인사 단행이건 뭐건…. 군부 인사들의 지지가 높아지고 있다. 두고는 봐야겠지만…, 아비가 보기에 그는 네 편으로 끌어들일 때 상당한 도움이 될 것 같구나.”
“생각해주시는 듯한 말씀 불쾌합니다, 폐하. 게다가 제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은 폐하께서 말씀하시는 바로 그 일입니다.”
“…. 거래로 얻은 사람이 물목에 대해 욕심이 없어진다면 어찌 하겠느냐…?”
“음…. 그야…다른 물목을 꺼내야겠지요. 그 자가 욕심을 낼 만한….”
담담하고 조용한 안색의 바루나와 달리 레이네는 시종일관 구연동화라도 하는 듯 다양한 표정과 제스처를 연발했다.
“그 물목이 없다면…, 그가 욕심을 낼 만한 물목이 네게 없다면 그 때 가서는 어찌 할 생각이냐…?”
“… ….”
여유롭던 레이네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그리고 이어지는 바루나의 말이 그녀를 강타했다.
“네 몸이라도 또 내놓을 생각이냐…?”
“…!!”
“사내들이 다 똑같다고 생각하지 말거라.”
“폐하…!”
치밀어 오르는 것을 억누르는 레이네. 그러나 바루나는 여전히 동요 없이 눈을 내려뜬 채 말을 이어갔다.
“대부분은 그렇지, 대부분은…. 계집 아니면 돈…, 그것도 아니면 권력이든 명예든…. 하지만 꼭 그런 사내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너는 아직 모르고 있는 것 같구나.”
“… …. 사내를 폐하로부터 배운 제가 그런 사내들을 어찌 알겠습니까…?”
독기가 가득한 한 마디였다. 바루나의 눈썹이 처음으로 꿈틀거렸다.
“…. 이제부턴…. 알아야 한다….”
“… ….”
그리곤 이내 다시 고요해지는 바루나의 모습을 보며 레이네는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어떻게든 이 사람이 화내는 꼴을 보고야 말리라. 만나러 올 적마다 다짐하고 또 다짐했지만, 이 사람 같지도 않은 인사는 그녀가 안간힘을 써도 눈썹 하나 까딱 하는 것으로 자신의 모든 폭력적 언어들을 흡수해버렸다. 여기서 폭발해버리면 지는 거다. 그런 생각으로 레이네는 불덩이처럼 치솟는 오기를 꾹 꾹 눌러 삼켰다. 잠시 동안의 침묵을 깨고 바루나가 입을 열었다.
“네 정보원들…. 내게 좀 빌려줄 수 있겠느냐…?”
“…?”
“…. 안 되겠느냐…?”
“…. 무슨 일인지 말씀해 보시지요.”
“…. 당장 필요한 일은 아니다.”
“…. 생각해 보지요.”
“원하는 것은…?”
“… 무얼 주시겠습니까…?”
“…. 사람을 주마.”
공주의 안색이 다시 굳어졌다.
이 인사가 왜 이렇게 적응 안 되게 굴고 있나…. 속으로 되뇌이고 있던 중 바루나가 눈을 바로떴다.
“하백을…. 네 시위로 주마….”
고작….
기가 막혔는지 텅 빈 웃음을 내뱉으며 무슨 이상한 물건이라도 보듯 자신을 보는 레이네에게 바루나는 다독이듯 말했다.
“그 아이…. 아직 정치에 전혀 때 묻지 않은 아이다. 한 번 마음을 주고받는 연습해본다 생각하고…. 잘 한 번 다듬어 봐.”
“안 되면 어찌 하시렵니까…?”
“…. 그 땐 네가 알아서 해야 하지 않겠느냐?”
“폐기물은 저한테 맡기시는 겁니까…?”
“아비더러 치워 달라 하면 치워 주고….”
뭐 어려운 일이겠느냐 선선히 말하는 바루나를 보며 레이네는 웃었다. 하하하하하… …. 하하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하…! 웃음소리는 점점 커졌다. 밖에서 듣고 있던 나다니엘이 응? 뭐지…? 하는 얼굴로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좋습니다. 폐하께서 재미있는 장난감을 주셨는데…. 한 번쯤 빌려드리지요….”
“…. 알았다. 필요할 때 말하마.”
“… …. 언제쯤 주실 겁니까…?”
“일단…. 근위 무사로서 기본적인 교육이 끝나고 나면…. 바로 보내주마.”
“…. 기대해 보지요. 장난감 고르는 폐하의 안목은 제가 신뢰하는 유일한 것이니까요. 그럼….”
마지막까지 독랄한 한 마디를 던져놓고 나가는 레이네의 말에도 바루나는 그대로 앉아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근위장은 ‘괜찮으냐’고 묻기도 이젠 민망했다. 한두 번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공주의 그와 같은 언행이 아무 이유도 없는 대서기가 아님도 알고 있었으니.
황녀의 친서가 작성되자마자 사신단 행렬을 서둘러 꾸린 궁정대신은 곧 미키네오스를 떠났다. 왕궁 앞 광장에서 국왕을 향해 예를 올린 미셀을 비롯한 사신단 일행은 한 명 한 명 국왕이 손을 잡고 격려의 말을 건네자 사뭇 감화된 얼굴로 온 힘을 다할 것을 마음속으로 한 번씩 더 다짐했다.
“모쪼록 황녀께서 직접 써 주신 친서가 양국의 우호관계를 위해 큰 힘이 될 수 있도록 성심을 다 할 것입니다. 거듭 감사드립니다.”
말은 그렇게 하고 있었지만, 황녀를 향해 인사하는 궁정대신의 속은 이제 넌 죽었다 하며 외치고 있었다. 의례적인 인사를 받으면서도 리토르나는 못내 그가 못마땅한지 그러시지요. 라는 한 마디로 받아넘겼다.
“황녀께서는 아직도 이 사람에 대해 노기가 풀리지 않으신 듯합니다, 그려, 하하하하….”
거기에 자리한 다른 모든 이들과 달리 바루나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리토르나를 달랬다. 레이네는 다른 건 몰라도 저 자의 저런 건 정말 닮을 만하다 여기면서, 그러나 동시에 그렇게 생각하는 스스로를 책망했다.
“공주가 오늘 이 부덕한 아비를 대신해서 황녀의 기분을 좀 풀어드리지. 그래줄 수 있겠지?”
“물론입니다, 폐하. 황녀께서 노여움을 푸시도록 성심을 다 하겠습니다.”
“그래, 그래….”
“어떠십니까? 오늘 함께 자리를 해 주시겠습니까?”
“공주님의 후의에 감사드립니다. 이왕 양국의 평화를 위해 나서기로 했다면 저 역시 성의를 다해야겠지요. 폐하의 나라를 위하는 마음에 저 역시 감복한 바가 큽니다. 노여움이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엷은 웃음을 띠며 응수하는 리토르나에게 목례로 화답한 후 돌아선 바루나의 얼굴은 무섭게 굳어져 있었다. 황녀와 국왕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대신들은 이게 대체 무슨 분위기인가 하는 기색이었으나 누구 하나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황녀는 보통 사람이 아닌 듯합니다. 친서를 써 주긴 했으나 저렇게 당당하게 나오는 것을 보면 뭔가 아직 숨겨둔 수가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럼 잉그라드만한 대제국의 황녀가 만만할 거라고 생각했나, 외무대신은?”
당황한 외무대신의 꼴을 보며 다른 대신들은 소리를 죽여 헛기침을 했다. 괜히 나섰다간 국왕에게서 무슨 민망한 말을 들을 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으니. 바루나는 손에 낀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대체 뭘까, 저 자신감은…. 이제 전쟁을 하는 것은 자명한 바, 적지나 다름 없는 이 곳에서 저렇게 당당할 수 있다면….”
“알 수는 없으나, 대국의 황녀로서 자존심을 지키려는 노력일 수도 있고….”
정무대신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뭔가 자신이 처한 상황을 한 번에 돌파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의 가능성이라면….”
“…. 뭐라고 보는가, 정무대신은…?”
잠시 뜸을 들이는 라크라오스의 입으로 모든 시선이 쏠렸다.
“황제의 군권이 이미 황녀에게 있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
“황제의 군권…!”
신음하듯 중얼거리는 바루나의 안색이 경직되었다. 다른 대신들도 모두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크게 술렁거렸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미키네오스는 잉그라드의 황군과 정면으로 격돌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사실이라면 이건 보통 일이 아닙니다, 폐하…! 황제의 환후가 위중한 이 때에 황녀가 군권을 가지고 있다면 잉그라드의 황군 전체가 이곳으로 몰려올 수도 있는 일입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염려할 일은 아니지 않소? 잉그라드의 황군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는 없으나, 그들이 여기 오려면 마도들이 잔뜩 숨어 있는 저 론도 산맥을 지나야만 합니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우리에게 큰 위협이 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만….”
“삼백만.”
“…?”
“잉그라드 황군의 규모는 삼백만이다. 성밖에 주둔한 저와 같은 군사 삼백만이 황제의 명령에 따라서만 움직인단 말일세.”
대신들은 입이 쩍 벌어졌다. 고작 황실의 친위대에 불과한 부대가 미키네오스 전군의 여섯 배에 달한다니, 바루나가 허언을 하는 사람이 아님을 아는 그들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경악과 충격에 휩싸인 정적 속에서 병무대신이 나섰다. 그는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황녀는 양국의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친서를 써 준 상태입니다.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갈 지 알 수는 없으나, 폐하의 명을 받든 궁정대신의 외교적 능력은 대단합니다. 일단 플라시니 궁정대신의 능력을 믿고 어느 쪽으로 결론이 날 지 기다려야 합니다.”
정무대신과 바루나가 고개를 끄덕이고, 대신들도 동의하는 눈치를 보이는 가운데 그의 말이 이어졌다. 만일 최악의 경우 잉그라드의 황군이 이곳으로 몰려온다고 해도 우리에겐 이점이 많습니다. 저들이 지나 오는 최단 경로는 로이나르의 본거지로 추정되는 세 곳을 모두 지나야 합니다. 설령 본거지가 아니라고 해도 그 곳에 마도의 무리들이 수도 없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게다가 적진으로 가서 싸우는 것과 적을 안으로 끌어들여 싸우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저들은 저 험준한 론도 산맥을 지나오는 동안 지치게 될 것이고, 우리는 아군의 진지에서 충분한 휴식과 군량을 갖고 싸우게 될 것입니다. 일목요연하게 펼쳐놓는 병부대신의 의견에 회당에 감돌던 경악과 흥분의 분위기가 가라앉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황녀가 왕궁에 있다는 것입니다. 저들이 적진으로 쳐들어오기 위해선 적진에 대한 정보가 필요할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내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황녀와 성 밖에 주둔한 1천 5백의 군사들이겠지요. 그러나 그들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우리가 발을 묶어버릴 수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면 황군의 본대는 마음먹고 우리를 공격할 수가 없게 됩니다.”
숨을 고르고, 병부대신이 바루나를 향해 말을 마무리지었다.
“폐하. 설령 황녀에게 황제의 병권이 있다 해도 크게 염려하실 일은 아닌 듯합니다. 문제가 전혀 안 된다고 말할 수는 없겠으나, 우리에게 불리한 상황은 아니라 판단되옵니다.”
“그렇다고 해도 짐은 껄끄러운 상황이 발생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큰 전쟁을 앞둔 상황에서 그럴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일단은 가질 수 있는 모든 정보를 다 쥐고 있어야 할 것으로 판단됩니다. 일단 사실 여부를 알아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설사 황녀가 황제의 군권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에게 침략의 의지가 없음을 밝혔으니 그것을 행사할 명분이 황녀에겐 없습니다, 폐하.”
“참으로 명쾌한 분석입니다, 폐하…!”
“병부대신의 말이 옳습니다…! 일단은 황녀를 예의주시하시고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먼저일 것입니다…!”
너도 나도 입을 열어 병부대신의 말에 동조를 하고 나서자 바루나는 눈썹을 찌푸리며 핀잔을 주었다.
“쩔쩔매고 있다가 이제 갓 병부대신이 된 자가 말을 하고 나서니 거기에 갖다 붙이기는…, 그러고도 그대들이 십 수 년간 이 나라의 국정을 이끌어 왔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할 말이 없어져 고개를 숙인 대신들을 두고 바루나는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회당을 나섰다. 조용해진 회당을 뒤로 하고 회랑으로 나선 그는 주위에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자 비로소 근위장을 불렀다.
“예, 폐하.”
“병부대신이 공주에게 갔다던가…?”
“아직 가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 아직 고민 중인가….”
“…. 병부대신은 유능하며 또한 충성심이 깊은 자로 보입니다. 폐하의 뜻을 헤아려 만족스러운 결론을 이끌어 낼 것으로 생각됩니다.”
“…. 그대가 웬일로 묻지도 않은 의견을 말하는가…?”
“… ….”
“…. 그래 하긴…. 틀린 말은 아니지. 제대로 봤어.”
근위장에 말에 고개를 끄덕거리며 다시 발걸음을 옮기는 바루나의 얼굴은, 그러나 뭔가가 여전히 마음에 걸리는 듯 개운하지 못했다. 습관처럼 한숨짓는 바루나가 근위장에게 나직한 어조로 명령을 내렸다.
“미셀의 재산 조사…. 시작하게.”
“예, 폐하.”
왕궁 후원 공주의 시위무사로 배속된 하백은 그녀에게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이며 양 손을 들어 대례를 올렸다.
“론도 산맥의 정기를 받아 신의 뜻으로 이 땅에 선 위대한 대 미키네오스 왕국의 왕녀께 고해바치나니, 신 하백은 오늘부로 왕궁 후원의 시위무사가 되었나이다. 전지전능하시며 은혜로운 아버지 메르앙의 무한한 영광과 은총이 함께하시도록 몸과 마음을 다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하나이다.”
외우는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았으나, 하백은 말하면서도 번거롭다 여기고 있었다. 격식과 원칙을 중시하는 그라도 이 수식어만큼은 불필요한 말이 너무 많은 듯했다. 레이네는 한 발 다가서선 그의 앞에 반지를 낀 손을 내밀었다. 손등과 반지에 키스를 받은 후 그의 머리에 손을 얹더니, 의식에 필요한 말을 하지 않은 채 다시 손을 떼고 응접 탁자의 의자에 앉아버렸다.
“…. 일어서거라.”
“예, 공주님.”
하백이 몸을 일으켜 곧게 섰다. 그를 위아래로 찬찬히 살피는 레이네의 눈길에 이채가 스쳐갔다. 뭔가 달라졌어…. 처음 보았을 때의 그는 수려한 용모 외에는 그다지 볼 만한 것이 없었다. 칼을 차고 있었으니, 잘 생긴 칼잡이 소년 정도. 그것이 레이네가 하백으로부터 받았던 인상이었다. 자주 보지는 못했으나 이따금씩 마주칠 적에도 그는 늘 죽상을 하고 있었으니, 나라 없고 부모 없는 애송이가 속이 많이도 타는 모양이구나 하고만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자는 더 이상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달라졌군….”
“… ….”
“내가 말을 편히 해도 되겠지?”
“지당한 분부십니다.”
“…. 달라졌어, 확실히…. 처음 봤을 땐 그저 좀 예쁘장한 칼잡이라고만 여겼는데….”
“… …”
“기분 나쁜가…?”
“아닙니다. 저는 칼잡이가 맞습니다. 옳게 보셨습니다.”
“하지만 지금 보니…. 무슨 변화라도 있었는가?”
“말씀을 올릴 만큼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송구하오나, 말미를 조금 더 주신 후에 재차 물으신다면 그 때 말씀 올리겠습니다.”
“…. 그래, 그러지….”
레이네는 시녀에게 건네받은 담뱃대를 들고 연초를 피우며 잠시 말을 아꼈다. 위아래로 그를 훑어보며 몇 차례 연기를 내뿜던 그녀는 이내 나다니엘에게서 전표를 받아 내밀었다.
“받거라.”
“… ….”
“난 사람을 잘 믿는 편이 아니다. 더구나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일수록 경계를 하는 편이지. 먼저 네게 일을 하나 시켜봐야겠구나.”
“말씀하십시오.”
레이네는 후… 하고 연기를 내뿜은 뒤 담뱃대로 전표를 가리켰다.
“지금 네가 손에 든 것은 전표다. 1백만 팡그라는 거액이 들어간 전표지. 미키네오스 왕도에서 그걸 다루는 곳이 있다. 여기 이 아이가 지도와 서한을 하나 줄 것이다. 전표를 다루는 곳을 찾아 금액을 받은 뒤 카몬 협곡의 독립대대로 가거라. 거기 대대장에게 전하거라.”
“…. 예, 공주님.”
“그리고….”
“예. 말씀하십시오.”
나가려던 하백이 돌아서서 다시 레이네의 말을 기다렸다.
“황녀님과 아슈람에선 친구였다고…?”
“…. 황녀님의 신분을 몰랐기에 가능하였습니다.”
“어쨌든…. 내가 묻는 말에 정직하게 답하거라.”
“말씀하십시오.”
“황녀는…. 리토르나 황녀는 어떤 사람인가?”
“… ….”
하백은 무슨 뜻으로 묻는지 몰라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여태까지 객궁에만 있기는 했지만, 바보가 아닌 이상 미키네오스가 정치적으로 매우 민감한 상황임을 모를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지금 레이네가 묻는 의도부터 그는 알아야 할 것만 같았다. 대답을 못하고 있는 그에게 레이네가 재차 물었다.
“들리지 않을 리는 없고…. 왜 말을 못하는가…?”
“…. 무엇을 물어보시는지 알 수가 없어 그렇습니다.”
“말 그대로다. 황녀가 어떤 사람인지. 그걸 묻는 거다.”
“…. 황녀…님께선….”
“… …. 아무래도 내가 무슨 의도로 묻는지 그걸 몰라서 선뜻 대답을 못하는 모양이지?”
하백은 뜨끔했다. 마법사도 아니면서 어떻게 내 속을 알았을까. 그렇다고 경지에 오른 사람도 아닌 듯한데. 정치에 대해서는 젬병인 그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그 정도뿐이었다.
“이 미키네오스에서 여자는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제 할 몫을 얻지 못하는 곳이다. 난 내 몫을 얻기 위해서 황녀께 도움을 청할 생각이다. 그가 내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 무턱대고 도와 달라 하기보다는 먼저 가능성부터 타진해봐야 하지 않겠나.”
“….”
“말해보라. 그가 날 도울 수 있겠는가?”
“…. 황녀님께선 큰 분이십니다. 깨달음의 경지 또한 깊으시고 품으신 바 그 뜻이 매우 크십니다. 공주님께서 대의를 잊지 않으시고 길을 가고자 하신다면, 황녀님께서 기꺼이 공주님의 손을 잡고자 하실 것입니다.”
“… 대의…, 깨달음이라….”
레이네는 진지한 하백의 말을 되뇌어 보더니 피식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자신의 대답에 비웃음과 같은 반응을 보이는 레이네에게 하백은 반감이 조금 일어났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 너는 아직 정치며 세상사며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송구합니다. 제가 부족하여 공주님께 도움을 드리지 못했나이다.”
“…. 그건 앞으로 노력하면 된다. 중요한 건 내게 도움이 되고자 하는 마음가짐이지.”
“… ….”
“네 마음은 앞으로 차차 두고 보마. 일단 내가 시킨 일부터 시행하거라.”
“예, 공주님.”
레이네와 함께 자리한 연회에서 리토르나는 하백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레이네가 그를 어디로 보냈다 이야기를 해도, 그것은 이제 공주의 소관이며 자신과 관계가 없다는 말로 응수할 뿐이었다. 십 수 년을 함께 단짝으로 지냈다던 친구에 대한 리토르나의 이 같은 반응을 보면서 레이네는 역시 대국의 황녀답게 구는구나 싶었다.
“사실 좀 불편하긴 합니다. 폐하께서 저를 생각해 저의 시위무사로 배정해 주시긴 했으나, 그래도 왕가의 후예이신데 아랫사람으로 두기가 좀….”
“하백은 마음이 올곧고 충직한 사람입니다. 정치나 세상일에는 아직 많이 어두우나, 자신의 현재 위치에 대해서는 충실하려 들 겁니다. 공주께서는 그런 신경을 쓰지 않으셔도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 말씀해주시니 일단 마음은 놓입니다만…. 선뜻 이래라 저래라 옆에 놓고 시키기가 좀…. 아시잖습니까.”
“그러시기도 하겠지요. 이해는 됩니다.”
연주가 한창 무르익고 무희들의 몸짓이 점점 빨라져 갔다. 이윽고 연주와 춤이 끝나자 말없이 그것을 보고 있던 레이네가 잔을 들어 이전의 일에 대해 사과의 뜻을 밝혔다.
“저는 조마조마했답니다.”
“…무슨…?”
“황녀께 무례를 저지른 것이 비단 궁정대신만이 아니었기에, 아직도 제게 노여움을 갖고 계실까 하여 말이지요. 이 사람이 한 행동이 오히려 궁정대신보다 더욱 무례한 것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공주께서 하신 일은 나라를 위한 일이고, 궁정대신은 그저 여흥을 위해 잠시 분별을 잃었던 것뿐입니다. 공주의 마음을 모르지 않으니…, 더 이상 마음에 담아두지 마십시오.”
“고맙습니다. 황녀님의 너그러우신 말씀을 새기고, 다시는 그와 같은 무례를 저지르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잔이 비워졌다. 리토르나는 이제 술이 제법 입에 익었다. 자주는 아니었지만 공주와 한두 차례 마시기도 했었던 데다, 왕궁에서 마시는 좋은 술이다 보니 처음 마시는 것이었어도 속에 부담을 준다거나 하지 않은 까닭도 있었다. 다시 잔을 받으며 무희들을 보고 있던 리토르나에게 레이네가 속내를 꺼내놓기 시작했다.
“황녀께서 친서를 써 주시긴 했지만 그것으로 정리가 될 수 있을 만큼 이번 일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알고 계시지요…?”
“….”
리토르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께선 미키네오스가 이전처럼 강대한 국가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어느 나라의 통치자인들 그런 생각을 안 하겠습니까.”
“그리고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
“나라의 기반이 튼튼하고 국론이 하나로 결집되어야 그런 것이 가능하겠지요. 그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 하고 싶은 말씀이 무엇입니까?”
레이네는 말하기에 앞서 무희들과 악사들을 향해 눈짓했다. 그들은 곧 시종들의 안내를 받아 연회장을 나섰고, 레이네는 자신의 방으로 장소를 옮기자 제안했다. 선선히 그러자며 자리에서 일어나 리토르나는 레이네의 방으로 들어갔다.
“비사카는 접근하는 이가 없도록 하라.”
“예, 전하.”
“알아서 물려주시니 감사합니다.”
“저 자는 괜찮겠습니까?”
나다니엘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 아이는 제겐 분신과도 같습니다. 불편하지 않으시다면 저는 그냥 대동했으면 합니다만….”
“괜찮습니다. 뜻대로 하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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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저히 여기에 올릴 방법은 없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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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민망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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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님께 한 방 먹었군, 그래….”
사연을 들은 라크라오스는 예의 그 표정없는 얼굴에 잔잔한 미소를 띄웠다. 비웃는 것인지, 아니면 후임의 서투름에 대한 선배의 여유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플로랑은 고민이 가득 깃든 안색으로 물었다.
“공주님께 드릴 수 있는 것…. 대체 뭐가 있겠습니까…?”
“그보다는…, 공주님이 뭘 원하시는지부터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
“신하된 자로서 상전의 마음을 헤아리는 건 기본일세. 먼저 공주님이 어떤 분인지부터 알아야 하지 않겠나….”
“정무대신…!”
라크라오스는 차맛이 좀 썼는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쓴 입맛을 다셨다. 플로랑은 도무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에게 고민을 토로했다.
“정치적인 수싸움이 나라를 다스리는 과정에서 필연적인 것임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라를 위한다는 대의 앞에서조차 그런 것으로 시간을 지체한다는 것을 저는 납득할 수가 없습니다.”
“자네는….”
“….”
“…. 자네는 정치가 뭐라고 생각하나…?”
“… 시민들의 다양한 욕구들을 적절하게 조절하며 가장 공통된 만족을 이끌어내는 것을 정치라고 봅니다.”
분명하게 힘주어 말하는 플로랑의 대답을 듣고 라크라오스는 잠시 말이 없었다. 한참을 가만히 있더니, 라크라오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 가장 기본적인 거지….”
“또한 결코 훼손될 수 없는 대의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그 시민이란 건 비단 왕궁 밖에 살고 있는 사람들만을 말하는 건 아닐세.”
“… 귀족 대신들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군주가 아닌 자들을 말하는 걸세.”
“정무대신…!”
“폐하가 왕위에 오르시고 지난 20년간…. 나는 많은 신하들을 보아 왔네. 그들은 폐하를 일컬어 군주라고는 하면서도, 정치에서 폐하와 수싸움을 벌이느라 정신이 없었네.”
“….”
“가신으로서, 폐하의 신하로서 살아온 지가 30년이 조금 넘는 동안 나는 늘 신하는 상전과 줄다리기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 상전의 뜻을 헤아리고 상전이 원하는 것을 갖다 주는 사람이 바로 신하라고 믿어왔네. 지금도 그렇게 믿고….”
“… ….”
“공주님은 폐하의 따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폐하의 신하이기도 하네. 자네나 나보다는 더 높은 신분이라고는 해도, 그 사실은 변함없네. 그렇다면 공주님 역시 시민의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지.”
잠자코 듣고만 있는 플로랑.
“공주님께 자네가 뭘 해드릴 수 있는지는 내가 말해줄 수 있는 게 아닐세. 그건 자네의 능력에 따라 달라지는 일이니까….”
“….”
플로랑은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약간 주억거려 보였다.
“하지만 이미 자네의 대의 속에…, 그 답이 있는 것 같군….”
“….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가 공주님 역시 폐하의 신하라고 하지 않았던가. 군주가 아닌 자를 시민이라고도 했고…. 욕구를 조절하는 것이 정치라면…, 이미 자네는 그 방향을 알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단 말일세.”
라크라오스는 말을 아끼고 있었다. 직접적으로 콕 짚어 말해주기보다는 에둘러 그에게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었다. 플로랑은 눈을 굴리며 궁리하는 듯한 얼굴로 그의 말을 되새겨 보다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씀 감사합니다. 새기고 새겨서 방도를 찾아보도록 하지요.”
“도움이 되었길 바라네.”
“저도 그렇습니다. 그럼….”
집무실로 돌아온 그는 깍지 낀 손으로 이마를 두드리며 고심에 들어갔다. 혼잣말하듯 정무대신의 말을 되뇌어 보았다. 그로서는 아직 공주가 어떤 사람인지 알지 못했다. 일단은 그의 말에서 해답을 찾는 편이 빠르겠지…. 이곳에서 그보다 더 폐하와 왕녀를 잘 아는 사람도 없을 테니…. 그런데 도무지 방법이 안 떠오르는군, 방법이….
이렇듯 병부대신의 골머리를 썩게 만든 레이네는 국왕 바루나로부터 또 한 소리를 들어야 했다. 꼭 그래야 했느냐는 바루나의 물음에 레이네는 언제나 그랬듯 그를 자극시키는 말로 답변했다.
“폐하로부터 배운 것입니다. 제게 하실 질문은 아닌 듯합니다.”
“… ….”
한두 번도 아니었으니, 이 정도의 자극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 그러나 한 번쯤은 더 설득하려는 시도가 언제나 있어 왔다.
“네가 얼마나 패를 옮기는 데 능란한 지는 아비도 안다만…. 전에 말했지 않느냐. 병부대신은 패를 옮겨서 끌어들이기보다는 마음을 주는 편이 낫다고…. 그렇다면 굳이 그런 머리를 쓰지 않아도 될 것을 왜 하지 않아도 될 수고를 자처하는 거냐…?”
“마음이라니요, 폐하…?”
어이없다는 듯 레이네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낯섭니다, 폐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다니…. 그것도 두 번이나요.”
“…. 정치는 술수만으로 되는 일은 아니다.”
“술수가 정치에만 있는 것이 아닌 것이겠지요. 말씀을 거꾸로 하신 듯한데…. 오늘따라 실수가 잦으십니다, 폐하.”
“… ….”
바루나는 언제나 딸의 쿡쿡 쑤셔오는 말을 받아넘기는 일이 쉽지 않았다.
“어쨌든…. 현재 병부 내에서 몇몇 부실한 놈들을 빼면 메르히네 경의 인사 단행이건 뭐건…. 군부 인사들의 지지가 높아지고 있다. 두고는 봐야겠지만…, 아비가 보기에 그는 네 편으로 끌어들일 때 상당한 도움이 될 것 같구나.”
“생각해주시는 듯한 말씀 불쾌합니다, 폐하. 게다가 제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은 폐하께서 말씀하시는 바로 그 일입니다.”
“…. 거래로 얻은 사람이 물목에 대해 욕심이 없어진다면 어찌 하겠느냐…?”
“음…. 그야…다른 물목을 꺼내야겠지요. 그 자가 욕심을 낼 만한….”
담담하고 조용한 안색의 바루나와 달리 레이네는 시종일관 구연동화라도 하는 듯 다양한 표정과 제스처를 연발했다.
“그 물목이 없다면…, 그가 욕심을 낼 만한 물목이 네게 없다면 그 때 가서는 어찌 할 생각이냐…?”
“… ….”
여유롭던 레이네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그리고 이어지는 바루나의 말이 그녀를 강타했다.
“네 몸이라도 또 내놓을 생각이냐…?”
“…!!”
“사내들이 다 똑같다고 생각하지 말거라.”
“폐하…!”
치밀어 오르는 것을 억누르는 레이네. 그러나 바루나는 여전히 동요 없이 눈을 내려뜬 채 말을 이어갔다.
“대부분은 그렇지, 대부분은…. 계집 아니면 돈…, 그것도 아니면 권력이든 명예든…. 하지만 꼭 그런 사내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너는 아직 모르고 있는 것 같구나.”
“… …. 사내를 폐하로부터 배운 제가 그런 사내들을 어찌 알겠습니까…?”
독기가 가득한 한 마디였다. 바루나의 눈썹이 처음으로 꿈틀거렸다.
“…. 이제부턴…. 알아야 한다….”
“… ….”
그리곤 이내 다시 고요해지는 바루나의 모습을 보며 레이네는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어떻게든 이 사람이 화내는 꼴을 보고야 말리라. 만나러 올 적마다 다짐하고 또 다짐했지만, 이 사람 같지도 않은 인사는 그녀가 안간힘을 써도 눈썹 하나 까딱 하는 것으로 자신의 모든 폭력적 언어들을 흡수해버렸다. 여기서 폭발해버리면 지는 거다. 그런 생각으로 레이네는 불덩이처럼 치솟는 오기를 꾹 꾹 눌러 삼켰다. 잠시 동안의 침묵을 깨고 바루나가 입을 열었다.
“네 정보원들…. 내게 좀 빌려줄 수 있겠느냐…?”
“…?”
“…. 안 되겠느냐…?”
“…. 무슨 일인지 말씀해 보시지요.”
“…. 당장 필요한 일은 아니다.”
“…. 생각해 보지요.”
“원하는 것은…?”
“… 무얼 주시겠습니까…?”
“…. 사람을 주마.”
공주의 안색이 다시 굳어졌다.
이 인사가 왜 이렇게 적응 안 되게 굴고 있나…. 속으로 되뇌이고 있던 중 바루나가 눈을 바로떴다.
“하백을…. 네 시위로 주마….”
고작….
기가 막혔는지 텅 빈 웃음을 내뱉으며 무슨 이상한 물건이라도 보듯 자신을 보는 레이네에게 바루나는 다독이듯 말했다.
“그 아이…. 아직 정치에 전혀 때 묻지 않은 아이다. 한 번 마음을 주고받는 연습해본다 생각하고…. 잘 한 번 다듬어 봐.”
“안 되면 어찌 하시렵니까…?”
“…. 그 땐 네가 알아서 해야 하지 않겠느냐?”
“폐기물은 저한테 맡기시는 겁니까…?”
“아비더러 치워 달라 하면 치워 주고….”
뭐 어려운 일이겠느냐 선선히 말하는 바루나를 보며 레이네는 웃었다. 하하하하하… …. 하하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하…! 웃음소리는 점점 커졌다. 밖에서 듣고 있던 나다니엘이 응? 뭐지…? 하는 얼굴로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좋습니다. 폐하께서 재미있는 장난감을 주셨는데…. 한 번쯤 빌려드리지요….”
“…. 알았다. 필요할 때 말하마.”
“… …. 언제쯤 주실 겁니까…?”
“일단…. 근위 무사로서 기본적인 교육이 끝나고 나면…. 바로 보내주마.”
“…. 기대해 보지요. 장난감 고르는 폐하의 안목은 제가 신뢰하는 유일한 것이니까요. 그럼….”
마지막까지 독랄한 한 마디를 던져놓고 나가는 레이네의 말에도 바루나는 그대로 앉아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근위장은 ‘괜찮으냐’고 묻기도 이젠 민망했다. 한두 번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공주의 그와 같은 언행이 아무 이유도 없는 대서기가 아님도 알고 있었으니.
황녀의 친서가 작성되자마자 사신단 행렬을 서둘러 꾸린 궁정대신은 곧 미키네오스를 떠났다. 왕궁 앞 광장에서 국왕을 향해 예를 올린 미셀을 비롯한 사신단 일행은 한 명 한 명 국왕이 손을 잡고 격려의 말을 건네자 사뭇 감화된 얼굴로 온 힘을 다할 것을 마음속으로 한 번씩 더 다짐했다.
“모쪼록 황녀께서 직접 써 주신 친서가 양국의 우호관계를 위해 큰 힘이 될 수 있도록 성심을 다 할 것입니다. 거듭 감사드립니다.”
말은 그렇게 하고 있었지만, 황녀를 향해 인사하는 궁정대신의 속은 이제 넌 죽었다 하며 외치고 있었다. 의례적인 인사를 받으면서도 리토르나는 못내 그가 못마땅한지 그러시지요. 라는 한 마디로 받아넘겼다.
“황녀께서는 아직도 이 사람에 대해 노기가 풀리지 않으신 듯합니다, 그려, 하하하하….”
거기에 자리한 다른 모든 이들과 달리 바루나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리토르나를 달랬다. 레이네는 다른 건 몰라도 저 자의 저런 건 정말 닮을 만하다 여기면서, 그러나 동시에 그렇게 생각하는 스스로를 책망했다.
“공주가 오늘 이 부덕한 아비를 대신해서 황녀의 기분을 좀 풀어드리지. 그래줄 수 있겠지?”
“물론입니다, 폐하. 황녀께서 노여움을 푸시도록 성심을 다 하겠습니다.”
“그래, 그래….”
“어떠십니까? 오늘 함께 자리를 해 주시겠습니까?”
“공주님의 후의에 감사드립니다. 이왕 양국의 평화를 위해 나서기로 했다면 저 역시 성의를 다해야겠지요. 폐하의 나라를 위하는 마음에 저 역시 감복한 바가 큽니다. 노여움이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엷은 웃음을 띠며 응수하는 리토르나에게 목례로 화답한 후 돌아선 바루나의 얼굴은 무섭게 굳어져 있었다. 황녀와 국왕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대신들은 이게 대체 무슨 분위기인가 하는 기색이었으나 누구 하나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황녀는 보통 사람이 아닌 듯합니다. 친서를 써 주긴 했으나 저렇게 당당하게 나오는 것을 보면 뭔가 아직 숨겨둔 수가 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럼 잉그라드만한 대제국의 황녀가 만만할 거라고 생각했나, 외무대신은?”
당황한 외무대신의 꼴을 보며 다른 대신들은 소리를 죽여 헛기침을 했다. 괜히 나섰다간 국왕에게서 무슨 민망한 말을 들을 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으니. 바루나는 손에 낀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대체 뭘까, 저 자신감은…. 이제 전쟁을 하는 것은 자명한 바, 적지나 다름 없는 이 곳에서 저렇게 당당할 수 있다면….”
“알 수는 없으나, 대국의 황녀로서 자존심을 지키려는 노력일 수도 있고….”
정무대신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뭔가 자신이 처한 상황을 한 번에 돌파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의 가능성이라면….”
“…. 뭐라고 보는가, 정무대신은…?”
잠시 뜸을 들이는 라크라오스의 입으로 모든 시선이 쏠렸다.
“황제의 군권이 이미 황녀에게 있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
“황제의 군권…!”
신음하듯 중얼거리는 바루나의 안색이 경직되었다. 다른 대신들도 모두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크게 술렁거렸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미키네오스는 잉그라드의 황군과 정면으로 격돌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사실이라면 이건 보통 일이 아닙니다, 폐하…! 황제의 환후가 위중한 이 때에 황녀가 군권을 가지고 있다면 잉그라드의 황군 전체가 이곳으로 몰려올 수도 있는 일입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염려할 일은 아니지 않소? 잉그라드의 황군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는 없으나, 그들이 여기 오려면 마도들이 잔뜩 숨어 있는 저 론도 산맥을 지나야만 합니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우리에게 큰 위협이 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만….”
“삼백만.”
“…?”
“잉그라드 황군의 규모는 삼백만이다. 성밖에 주둔한 저와 같은 군사 삼백만이 황제의 명령에 따라서만 움직인단 말일세.”
대신들은 입이 쩍 벌어졌다. 고작 황실의 친위대에 불과한 부대가 미키네오스 전군의 여섯 배에 달한다니, 바루나가 허언을 하는 사람이 아님을 아는 그들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경악과 충격에 휩싸인 정적 속에서 병무대신이 나섰다. 그는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단 황녀는 양국의 충돌을 방지하기 위해 친서를 써 준 상태입니다.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돌아갈 지 알 수는 없으나, 폐하의 명을 받든 궁정대신의 외교적 능력은 대단합니다. 일단 플라시니 궁정대신의 능력을 믿고 어느 쪽으로 결론이 날 지 기다려야 합니다.”
정무대신과 바루나가 고개를 끄덕이고, 대신들도 동의하는 눈치를 보이는 가운데 그의 말이 이어졌다. 만일 최악의 경우 잉그라드의 황군이 이곳으로 몰려온다고 해도 우리에겐 이점이 많습니다. 저들이 지나 오는 최단 경로는 로이나르의 본거지로 추정되는 세 곳을 모두 지나야 합니다. 설령 본거지가 아니라고 해도 그 곳에 마도의 무리들이 수도 없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게다가 적진으로 가서 싸우는 것과 적을 안으로 끌어들여 싸우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저들은 저 험준한 론도 산맥을 지나오는 동안 지치게 될 것이고, 우리는 아군의 진지에서 충분한 휴식과 군량을 갖고 싸우게 될 것입니다. 일목요연하게 펼쳐놓는 병부대신의 의견에 회당에 감돌던 경악과 흥분의 분위기가 가라앉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황녀가 왕궁에 있다는 것입니다. 저들이 적진으로 쳐들어오기 위해선 적진에 대한 정보가 필요할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내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황녀와 성 밖에 주둔한 1천 5백의 군사들이겠지요. 그러나 그들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우리가 발을 묶어버릴 수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면 황군의 본대는 마음먹고 우리를 공격할 수가 없게 됩니다.”
숨을 고르고, 병부대신이 바루나를 향해 말을 마무리지었다.
“폐하. 설령 황녀에게 황제의 병권이 있다 해도 크게 염려하실 일은 아닌 듯합니다. 문제가 전혀 안 된다고 말할 수는 없겠으나, 우리에게 불리한 상황은 아니라 판단되옵니다.”
“그렇다고 해도 짐은 껄끄러운 상황이 발생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큰 전쟁을 앞둔 상황에서 그럴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일단은 가질 수 있는 모든 정보를 다 쥐고 있어야 할 것으로 판단됩니다. 일단 사실 여부를 알아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설사 황녀가 황제의 군권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에게 침략의 의지가 없음을 밝혔으니 그것을 행사할 명분이 황녀에겐 없습니다, 폐하.”
“참으로 명쾌한 분석입니다, 폐하…!”
“병부대신의 말이 옳습니다…! 일단은 황녀를 예의주시하시고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먼저일 것입니다…!”
너도 나도 입을 열어 병부대신의 말에 동조를 하고 나서자 바루나는 눈썹을 찌푸리며 핀잔을 주었다.
“쩔쩔매고 있다가 이제 갓 병부대신이 된 자가 말을 하고 나서니 거기에 갖다 붙이기는…, 그러고도 그대들이 십 수 년간 이 나라의 국정을 이끌어 왔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할 말이 없어져 고개를 숙인 대신들을 두고 바루나는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회당을 나섰다. 조용해진 회당을 뒤로 하고 회랑으로 나선 그는 주위에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자 비로소 근위장을 불렀다.
“예, 폐하.”
“병부대신이 공주에게 갔다던가…?”
“아직 가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 아직 고민 중인가….”
“…. 병부대신은 유능하며 또한 충성심이 깊은 자로 보입니다. 폐하의 뜻을 헤아려 만족스러운 결론을 이끌어 낼 것으로 생각됩니다.”
“…. 그대가 웬일로 묻지도 않은 의견을 말하는가…?”
“… ….”
“…. 그래 하긴…. 틀린 말은 아니지. 제대로 봤어.”
근위장에 말에 고개를 끄덕거리며 다시 발걸음을 옮기는 바루나의 얼굴은, 그러나 뭔가가 여전히 마음에 걸리는 듯 개운하지 못했다. 습관처럼 한숨짓는 바루나가 근위장에게 나직한 어조로 명령을 내렸다.
“미셀의 재산 조사…. 시작하게.”
“예, 폐하.”
왕궁 후원 공주의 시위무사로 배속된 하백은 그녀에게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이며 양 손을 들어 대례를 올렸다.
“론도 산맥의 정기를 받아 신의 뜻으로 이 땅에 선 위대한 대 미키네오스 왕국의 왕녀께 고해바치나니, 신 하백은 오늘부로 왕궁 후원의 시위무사가 되었나이다. 전지전능하시며 은혜로운 아버지 메르앙의 무한한 영광과 은총이 함께하시도록 몸과 마음을 다하여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하나이다.”
외우는 자체는 그리 어렵지 않았으나, 하백은 말하면서도 번거롭다 여기고 있었다. 격식과 원칙을 중시하는 그라도 이 수식어만큼은 불필요한 말이 너무 많은 듯했다. 레이네는 한 발 다가서선 그의 앞에 반지를 낀 손을 내밀었다. 손등과 반지에 키스를 받은 후 그의 머리에 손을 얹더니, 의식에 필요한 말을 하지 않은 채 다시 손을 떼고 응접 탁자의 의자에 앉아버렸다.
“…. 일어서거라.”
“예, 공주님.”
하백이 몸을 일으켜 곧게 섰다. 그를 위아래로 찬찬히 살피는 레이네의 눈길에 이채가 스쳐갔다. 뭔가 달라졌어…. 처음 보았을 때의 그는 수려한 용모 외에는 그다지 볼 만한 것이 없었다. 칼을 차고 있었으니, 잘 생긴 칼잡이 소년 정도. 그것이 레이네가 하백으로부터 받았던 인상이었다. 자주 보지는 못했으나 이따금씩 마주칠 적에도 그는 늘 죽상을 하고 있었으니, 나라 없고 부모 없는 애송이가 속이 많이도 타는 모양이구나 하고만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자는 더 이상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달라졌군….”
“… ….”
“내가 말을 편히 해도 되겠지?”
“지당한 분부십니다.”
“…. 달라졌어, 확실히…. 처음 봤을 땐 그저 좀 예쁘장한 칼잡이라고만 여겼는데….”
“… …”
“기분 나쁜가…?”
“아닙니다. 저는 칼잡이가 맞습니다. 옳게 보셨습니다.”
“하지만 지금 보니…. 무슨 변화라도 있었는가?”
“말씀을 올릴 만큼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송구하오나, 말미를 조금 더 주신 후에 재차 물으신다면 그 때 말씀 올리겠습니다.”
“…. 그래, 그러지….”
레이네는 시녀에게 건네받은 담뱃대를 들고 연초를 피우며 잠시 말을 아꼈다. 위아래로 그를 훑어보며 몇 차례 연기를 내뿜던 그녀는 이내 나다니엘에게서 전표를 받아 내밀었다.
“받거라.”
“… ….”
“난 사람을 잘 믿는 편이 아니다. 더구나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일수록 경계를 하는 편이지. 먼저 네게 일을 하나 시켜봐야겠구나.”
“말씀하십시오.”
레이네는 후… 하고 연기를 내뿜은 뒤 담뱃대로 전표를 가리켰다.
“지금 네가 손에 든 것은 전표다. 1백만 팡그라는 거액이 들어간 전표지. 미키네오스 왕도에서 그걸 다루는 곳이 있다. 여기 이 아이가 지도와 서한을 하나 줄 것이다. 전표를 다루는 곳을 찾아 금액을 받은 뒤 카몬 협곡의 독립대대로 가거라. 거기 대대장에게 전하거라.”
“…. 예, 공주님.”
“그리고….”
“예. 말씀하십시오.”
나가려던 하백이 돌아서서 다시 레이네의 말을 기다렸다.
“황녀님과 아슈람에선 친구였다고…?”
“…. 황녀님의 신분을 몰랐기에 가능하였습니다.”
“어쨌든…. 내가 묻는 말에 정직하게 답하거라.”
“말씀하십시오.”
“황녀는…. 리토르나 황녀는 어떤 사람인가?”
“… ….”
하백은 무슨 뜻으로 묻는지 몰라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여태까지 객궁에만 있기는 했지만, 바보가 아닌 이상 미키네오스가 정치적으로 매우 민감한 상황임을 모를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지금 레이네가 묻는 의도부터 그는 알아야 할 것만 같았다. 대답을 못하고 있는 그에게 레이네가 재차 물었다.
“들리지 않을 리는 없고…. 왜 말을 못하는가…?”
“…. 무엇을 물어보시는지 알 수가 없어 그렇습니다.”
“말 그대로다. 황녀가 어떤 사람인지. 그걸 묻는 거다.”
“…. 황녀…님께선….”
“… …. 아무래도 내가 무슨 의도로 묻는지 그걸 몰라서 선뜻 대답을 못하는 모양이지?”
하백은 뜨끔했다. 마법사도 아니면서 어떻게 내 속을 알았을까. 그렇다고 경지에 오른 사람도 아닌 듯한데. 정치에 대해서는 젬병인 그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그 정도뿐이었다.
“이 미키네오스에서 여자는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제 할 몫을 얻지 못하는 곳이다. 난 내 몫을 얻기 위해서 황녀께 도움을 청할 생각이다. 그가 내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 무턱대고 도와 달라 하기보다는 먼저 가능성부터 타진해봐야 하지 않겠나.”
“….”
“말해보라. 그가 날 도울 수 있겠는가?”
“…. 황녀님께선 큰 분이십니다. 깨달음의 경지 또한 깊으시고 품으신 바 그 뜻이 매우 크십니다. 공주님께서 대의를 잊지 않으시고 길을 가고자 하신다면, 황녀님께서 기꺼이 공주님의 손을 잡고자 하실 것입니다.”
“… 대의…, 깨달음이라….”
레이네는 진지한 하백의 말을 되뇌어 보더니 피식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자신의 대답에 비웃음과 같은 반응을 보이는 레이네에게 하백은 반감이 조금 일어났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 너는 아직 정치며 세상사며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송구합니다. 제가 부족하여 공주님께 도움을 드리지 못했나이다.”
“…. 그건 앞으로 노력하면 된다. 중요한 건 내게 도움이 되고자 하는 마음가짐이지.”
“… ….”
“네 마음은 앞으로 차차 두고 보마. 일단 내가 시킨 일부터 시행하거라.”
“예, 공주님.”
레이네와 함께 자리한 연회에서 리토르나는 하백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레이네가 그를 어디로 보냈다 이야기를 해도, 그것은 이제 공주의 소관이며 자신과 관계가 없다는 말로 응수할 뿐이었다. 십 수 년을 함께 단짝으로 지냈다던 친구에 대한 리토르나의 이 같은 반응을 보면서 레이네는 역시 대국의 황녀답게 구는구나 싶었다.
“사실 좀 불편하긴 합니다. 폐하께서 저를 생각해 저의 시위무사로 배정해 주시긴 했으나, 그래도 왕가의 후예이신데 아랫사람으로 두기가 좀….”
“하백은 마음이 올곧고 충직한 사람입니다. 정치나 세상일에는 아직 많이 어두우나, 자신의 현재 위치에 대해서는 충실하려 들 겁니다. 공주께서는 그런 신경을 쓰지 않으셔도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 말씀해주시니 일단 마음은 놓입니다만…. 선뜻 이래라 저래라 옆에 놓고 시키기가 좀…. 아시잖습니까.”
“그러시기도 하겠지요. 이해는 됩니다.”
연주가 한창 무르익고 무희들의 몸짓이 점점 빨라져 갔다. 이윽고 연주와 춤이 끝나자 말없이 그것을 보고 있던 레이네가 잔을 들어 이전의 일에 대해 사과의 뜻을 밝혔다.
“저는 조마조마했답니다.”
“…무슨…?”
“황녀께 무례를 저지른 것이 비단 궁정대신만이 아니었기에, 아직도 제게 노여움을 갖고 계실까 하여 말이지요. 이 사람이 한 행동이 오히려 궁정대신보다 더욱 무례한 것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공주께서 하신 일은 나라를 위한 일이고, 궁정대신은 그저 여흥을 위해 잠시 분별을 잃었던 것뿐입니다. 공주의 마음을 모르지 않으니…, 더 이상 마음에 담아두지 마십시오.”
“고맙습니다. 황녀님의 너그러우신 말씀을 새기고, 다시는 그와 같은 무례를 저지르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잔이 비워졌다. 리토르나는 이제 술이 제법 입에 익었다. 자주는 아니었지만 공주와 한두 차례 마시기도 했었던 데다, 왕궁에서 마시는 좋은 술이다 보니 처음 마시는 것이었어도 속에 부담을 준다거나 하지 않은 까닭도 있었다. 다시 잔을 받으며 무희들을 보고 있던 리토르나에게 레이네가 속내를 꺼내놓기 시작했다.
“황녀께서 친서를 써 주시긴 했지만 그것으로 정리가 될 수 있을 만큼 이번 일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알고 계시지요…?”
“….”
리토르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폐하께선 미키네오스가 이전처럼 강대한 국가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어느 나라의 통치자인들 그런 생각을 안 하겠습니까.”
“그리고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
“나라의 기반이 튼튼하고 국론이 하나로 결집되어야 그런 것이 가능하겠지요. 그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 하고 싶은 말씀이 무엇입니까?”
레이네는 말하기에 앞서 무희들과 악사들을 향해 눈짓했다. 그들은 곧 시종들의 안내를 받아 연회장을 나섰고, 레이네는 자신의 방으로 장소를 옮기자 제안했다. 선선히 그러자며 자리에서 일어나 리토르나는 레이네의 방으로 들어갔다.
“비사카는 접근하는 이가 없도록 하라.”
“예, 전하.”
“알아서 물려주시니 감사합니다.”
“저 자는 괜찮겠습니까?”
나다니엘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 아이는 제겐 분신과도 같습니다. 불편하지 않으시다면 저는 그냥 대동했으면 합니다만….”
“괜찮습니다. 뜻대로 하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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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저히 여기에 올릴 방법은 없네요.;;
그림을 보실 분들은 블로그를 방문해주세욥...ㅎ. 이거 홍보처럼 돼서
좀 민망하군요.
haewon.egloos.com/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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