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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4 23:30 522회 0건
부부의 침실에는 시종장과 집사, 그리고 핫산, 아로사가 잠든 엄마를 놓고 둘러서 있었다. 누구 하나 다를 바 없이 표정은 침통하기 그지없었고, 아로사의 얼굴은 거기서 좀 더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문이 열리고 땀에 흠뻑 젖은 나자르가 들어왔다. 아로사가 먼저 물었다.
“아이린은…?”
“어…. 이제 숨소리가 좀 돌아왔어.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 날 뻔 했어….”
나자르는 한바탕 마음을 졸였던 모양인지 숨을 크게 고르며 침대로 다가섰다. 어머니는 좀 어떠세요? 이제 좀 안정됐다. 돌아보지 않은 핫산이 말했다. 다행이네요. 시종장과 집사가 십 년 감수했다는 듯 하늘을 향해 눈을 감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는 나자르에게 아이린 옆에 누가 있느냐 핫산이 물었고, 시녀 셋을 붙여 두었다며 나자르는 그를 안심시켰다.
“… ….”
“너희들, 그만 가서 쉬어라. 시찰 때문에 며칠 집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피곤할 텐데…. 애들 썼다.”
여전히 부인을 내려다보며 핫산이 그들을 내보냈다. 독기가 잔뜩 오른 얼굴을 한 아로사의 손을 잡아끌며 나자르가 그 곳을 나섰다. 하아…. 이게 대체…. 탄식하듯 중얼거리던 나자르는 아로사가 성큼성큼 방을 지나 계단 쪽으로 가자 불러 세웠다.
“아로사, 어디 가?”
“….”
잠시 멈춰 선 아로사는 그러나 대답 없이 계단을 한 달음에 뛰어 내려갔다. 쟨 또 왜 저래…. 아로사는 한율의 공관을 향해 말을 전력으로 몰아갔다. 남의 집을 방문하기엔 늦은 시각이었지만 그런 것을 계관할 아로사가 아니었다. 용서할 수 없어…! 제대로 대답하지 않으면 칼이라도 뽑을 거야…! 말을 죽일 듯이 재촉하는 그녀는 마음속으로 계속해서 그렇게 다짐이라도 하듯 되뇌었다.
“아로사가 와요…?”
한율은 오밤중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얼굴이었다. 집사도 연유를 모르겠다는 듯 어깨만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왜 왔는지는 말 안합디까?”
“예, 저도 통…. 그런데 뭔가 화가 잔뜩 난 얼굴이었습니다.”
“화가 나요…?”
그는 계단을 내려가며 잠시 지난번 일을 생각했다.
“뒤끝이 있는 애 같진 않았는데….”
“예…?”
“아, 아닙니다. 가보죠 뭐….”
1층에 다다르기 전 아로사는 이미 계단 앞에 서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응접실에 있을 것이지 뭐하러 나와 있어…? 한율은 태연하게 말하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말없이 그가 다가올 때까지 기다린 아로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말을 거는 그가 더욱 괘씸하여 이를 악다물고 분기를 눌렀다. 칼이라도 뽑고 싶은 심정이었다.
“밤중에 웬일이야, 그런 얼굴을 하고…?”
쩍.
소리가 날 정도로 강렬한 따귀였다.
오랜 시간 수련을 해 온 아로사였다. 비록 여자이고, 살아온 환경이 다르다 하더라도 나름 꾸준히 연단을 해 온 아로사의 손은 한율의 고개를 돌아가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
“…!!”
집사의 실눈이 이번엔 정말 크게 벌어졌다. 헨야를 비롯한 다른 시종들도 그 자리에서 모두 경직되었다.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듯 집안엔 따귀 소리가 감돌다가 사라지도록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 ….”
“… ….”
아로사의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졌다.
“뭐야, 너…. 왜 이래…?”
“당신. 아이린한테 뭐라고 했어?”
“…. 뭐…?”
이거 원…이젠 반말일세…. 하는 얼굴로 한율은 그녀를 쳐다보며 헛웃음을 쳤다. 아로사는 다시 손이 올라갈 뻔 한 것을 간신히 참으며 그를 향해 재차 물었다. 아이린한테 뭐라고 말했냐고! 다짜고짜 따지고 드는데, 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봐야 말을 하든지 말든지 하지.
“그게 무슨 소리야? 아이린한테 내가 무슨 말을 어떻게 해?”
“아이린이 오늘 당신 보려고 의회경비대에 갔다 온 뒤로 이상해졌어. 정신은 반쯤 나가고 그러다가 목을 매서 자살을 할 뻔 했어!”
“…!!”
이번엔 따귀를 때렸을 때보다 더했다. 다들 이 엄청난 소식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모르는 듯, 뭔가 잘못 들은 게 아닐까 하는 얼굴을 한 이도 있었고, 제각기 표정들은 조금씩 달랐지만 경직되긴 매한가지였다.
“대체 당신한테서 무슨 말을 들어서, 무슨 일을 당했기에 그런 애가 목을 다 매서 죽으려고 해!! 말해!!”
“무슨 소리야, 아이린을 봤어야 무슨 말을 하든 무슨 짓을 하든 했을 거 아냐! 난 오늘 아이린 보지도 못했다! 그리고 무슨 자살을 해?! 아이린 아가씨가 왜 자살을 해?!”
“이젠 거짓말도 해…?”
“뭣이라…?”
아로사의 표정이 역겹다는 듯이 일그러졌다. 입꼬리에는 경멸하는 비웃음이 떠올랐다. 아로사는 말을 씹어뱉듯 이를 악다문 채 그를 향해 빈정거렸다.
“나~, 당신…. 정말 그렇게 안 봤는데…. 후…! 아주 혼자 사람 좋은 척은 다 하면서, 비겁한 짓은 뒤로 다 하고 다녔구나, 그 동안…?”
“…. 갖다 붙이면 다 말인 줄 알아?! 이 계집애가 진짜 어디서 지금…!”
“계집애, 계집애? 허, 참…. 그래도 계집애인 나는~, 너처럼 도망치며 살진 않아. 알아? 너처럼, 너.처.럼~.”
아로사는 막 나가고 있었다. 엄지손가락으로 한율의 가슴팍을 쿡 쿡 쿡 찌르며, 너처럼 니 가족이고 친구고 이웃 사람들 다 죽어 나가는데 혼자 살아 남아놓곤, 뭐…? 원한 가져봐야 그 사람들이 살아 돌아 오냐고? 어, 그래 너 말 잘했다. 그럼 세상에 원수 갚으려고 악다구니 쓰며 사는 사람들은 모두 인생 뻘로 사는 거겠다? 어? 너 잘났다, 이 자식아~ 어? 너 잘났어. 혼자 그렇게 성인군자 같은 소리 해가면서 도망치며 살아오더니, 이젠 여기서도 남의 집 딸 하나 죽일 뻔 해놓고 발뺌을 해? 아주 몸에 뱄구나…?
“….”
“아가씨, 말씀이 심하…!”
“가만히 있어, 이 종놈아…!!”
이번엔 뼈가 부러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아로사의 앙칼진 목소리는 그 소리에 묻혀 끝까지 나지 못했고, 아로사는 뒤로 날아가 정문에 부딪쳐 떨어져 내렸다. 한율의 손이었다.
“아….”
“… ….”
“위원님…!”
“가만히 계세요.”
아로사는 몸을 일으켰다. 이젠 손찌검이구나 싶었다. 더 참을 것도 없었다. 스릉. 소리와 함께 아로사의 검이 검집을 떠나 한율을 향해 겨누어졌다. 그래, 어디 오늘 끝장을 보자. 뻔뻔한 놈…. 네놈이 센 건 안다만…. 나도 네 놈 몸뚱이에 칼집 하나 낼 정도는 된다 이거야…. 어서 덤벼…, 어서 덤벼…!! 집사는 감으나 마나 한 눈을 감으며 어금니를 꾸욱 깨물었다. 어디서부터 무슨 오해가 시작되었는지 몰라도, 아로사의 행동에는 문제가 있었다.
“몹쓸 것….”
한율의 목소리가 천둥처럼 아로사의 온 몸을 뒤흔들었다. 어어…? 하는 얼굴의 아로사는 몸 내부가 무너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착각인지, 그 느낌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조금 어리둥절해 하는 아로사의 앞으로 어느새 다가선 한율은 그녀를 지그시 내려다보며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민족의 긍지를 저버리고 사는 건…. 바로 너다…. 하늘보다 높은 자가 없고…땅보다 낮은 자가 없으니…. 그를 잊은 자는 이미 환의 신민이 아니다.”
꾸짖는 말이었지만, 목소리는 전혀 그녀를 탓하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한율의 표정은 슬퍼 보이기까지 했다. 아로사는 주춤 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가 하는 말은 언젠가 읽어 본, 환의 국법에 나오는 기본이념에 관한 구절이었다.
“환의 신민이 아닌 자…원한을 품을 자격이 없고…. 또한 환의 신민이었던 자…, 원한을 품을 자유가 없다.”
아로사는 그의 말에 속절없이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자신의 앞에 서 있는 한율이 태산처럼 크게 느껴지자 스스로를 지켜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의 말에 논리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반박할 수 있는 근거도 자신에겐 얼마든지 있었다. 이전에 그가 비아냥대듯 했던 말들도 있었다. 그러나 아로사는 아무 저항도 못한 채 저도 모르게 검까지 놓쳐버리고 말았다.
“…가거라.”
“… ….”
“…어서 가거라. 너와 나는 더 이상 봐야 할 이유가 없으니…. 행여 다시 봐야 할 이유가 있다면…. 보게 되겠지.”
그는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이내 발을 움직여 정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주저앉아 있던 아로사는 두려움에 떨며 눈물까지 글썽이고 있었다. 왜 두러워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몸이 떨리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이 이상한 상황에 대해 다들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젓기만 했다. 집사만이 그녀에게 다가가 검을 들어 쥐어주며 달랬다.
“아가씨….”

제정신을 차린 아로사의 돌아가는 말발굽 소리가 멀찍이 들리는 곳에 한율은 우뚝 서 있었다. 마치 그 자리에 박혀버린 것처럼 그는 움직이지 않고 거기 서서 시선을 허공에 두고 있었다. 집사가 뒤에서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
“…아로사 아가씨는…. 성품이 성마른 분입니다.”
“… ….”
“…아이린 아가씨는…. 그런 일로 목을 맬 분이 아닙니다.”
“….”
“…. 뭔가… 다른 일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 ….”

“여보.”
“음.”
나란히 누운 가운데 누가 더하달 것도 없이 잠을 이루지 못하던 부부 중 엄마가 말을 꺼냈다. 보냅시다, 그냥…. …무슨 소리야? 엄마는 눈물이 나오는 걸 손으로 가렸다.
“그냥…. 한율 공이 싫다고 안하면 그냥….”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거론할 일이 아니라는 듯 대꾸하는 핫산에게 엄마는 신경질적으로 언성을 높였다. 그럼 어떡해, 애가 저 모양인데…! 핫산은 돌아누운 채 대답하지 않고 있었다. 성질 급한 엄마는 남편의 등을 떠밀듯 하며 재촉했다.
“말 좀 해봐~.”
“아, 좀….”
“뭐야, 당신…. 그 선거니 뭐니 하는 것 때문에 얻을 거 없어서 그러는 거야, 지금…?”
“아니 그런데 이 사람이….”
“똑바로 말해. 당신 정말 그런 생각 하는 거야?”
“말 같은 소리를 해. 아무리 그러기로서니 나라가 망하는 것도 아닌데 내가 그런 걸 신경쓰겠어, 지금…?”
“그런데 왜 안 된다고 해?”
“… …”
엄마는 정신이 든 뒤로 계속 울었는지 목소리가 정상이 아니었다. 여전히 눈물을 훌쩍거리며 그녀는 핫산을 더 재촉했다. 말 좀 해봐~, 왜 그러는 건지….
“당신은 그렇게 딸을 몰라?”
“…그게 무슨 소리야?”
“쟤가 어디 남자한테 거절당했다고 목이나 맬 애냐고….”
“…. 그럼 쟤가 왜 저런다는 건데…?”
“뭔가 다른 일이 있었을 거야. 그렇지 않고서야….”
“다른 일이라니, …다른 일이라니…?!”
“몰라, 나도…. 내가 어떻게 알겠어. 그런데 분명히 그래. 아이린이 좀 멋대로고 엉뚱한 데가 있긴 해도…. 자살 같은 걸 생각할 애는 아니야.”
“… ….”
엄마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설마….”
“…. 뭐…. 짚이는 거라도 있어…?”
“설마…, 한율 공이….”
핫산은 엄마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사뭇 궁금했다. 그녀가 튀어나갈 것을 방비하기 위해 양 손에 긴장을 한 채. 역시 엄마는 벌떡 일어나며 나갈 태세를 갖추었고, 핫산은 미리 준비한 대로 그녀를 끌어안고 레슬링을 하듯 침대로 다시 눕혀버렸다. 뭐 하는 거야, 당신…! 말해. 무슨 생각했어? 이거 놔 봐! 행동하기 전에 말부터 좀 하고 하란 말이야…! 그녀는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떠오른 생각을 떨쳐내기가 힘든 모양이었다.
“한율 공이 뭐? 말을 하라고.”
“우리 애 데려다가….”
“에잇 거 참…!!”
핫산은 어이가 없다는 듯 한바탕 혀를 쯧 하고 차고는 다시 누워버렸다. 그녀는 핫산의 어깨를 흔들며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고 했고, 핫산은 한율이 아이린을 만나지도 못했다는 말로 일축해버렸다.
“당신이 어떻게 알아.”
“한율 공이 의회당에 도착한 게 언젠데 그런 짓을 해. 시찰 끝나자마자 보위부 들러서 보고서 제출하고 갔어. 중간에 나 한 번 보고. 그러곤 바로 또 서쪽 성곽 경비대대로 시찰 나갔다고. 우리집하곤 정 반대로….”
“그 때 그랬으면…?”
“이 사람이 정말…!”
“그럴 수도 있잖아…!”
“애 들어온 게 언제야. 성곽 경비대가 얼마나 먼 지 몰라?”
“… ….”
그럼 뭐야…. 하는 얼굴로 훌쩍거리는 아내에게 핫산은 일단 아이린을 잘 보살피는 데 신경쓰라며 다독였다. 참, 그리고 혹시 모르니까…, 시종들 좀 풀어서 시락 시내에 마법사나 주술사들이 돌아다니는지 한 번 알아봐 바. 그런 사람들 없어진 지가 언젠데 그런 소릴 해…. 그래도 모르잖아. 여긴 교회가 그렇게 엄격한 데도 아니고…. 일단 그렇게 마무리는 지었지만, 그로서도 대체 딸아이가 무엇 때문에 목을 맸는지, 그것은 한 번쯤 한율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한율은 더욱 시찰에 박차를 가했다. 제법 규모가 큰 보병연대를 시찰하는 것은 이틀하고도 반나절이 더 걸렸다. 각 예하 대대와 중대의 총사들까지 일일이 만나며 도열은 되도록 생략하고 부대별 현황과 전투상황 시 군략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산처럼 쌓인 자료를 검토하고 보고서를 작성하느라 밤에는 거의 잠을 자지 않았다. 수도 외곽에 있는 독립중대인 두 곳의 창기병대는 한 번에 돌았다. 중대 규모의 부대인지라 군략 설명과 병력 현황 등에 대한 보고를 받는 일은 간단했지만, 기병대의 움직임이 워낙 넓은 만큼 지형을 돌아보는 데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그가 정한 시찰일정의 마지막 날, 미키네오스에서 온 사신단이 수도 시락의 성문으로 들어왔다. 사신단은 총리 일행과 가진 만찬을 통해 바루나가 보르틴 연합회 회의소집을 한 사실을 알리고, 3품 이상의 관품을 가진 이가 대표로 와주기를 청했다. 미리 준비를 하고 있었던 터라, 바이마샤르 의회에선 행정부와 함께 이튿날 바로 비정례의회를 열고, 누가 갈 것인지를 정하기 위해 서로 의견을 내놓은 끝에 여당 최고의원 핫산 바슈미르로 결론지었다.
“하하…, 든든합니다. 여당 대표께서 가시게 되니….”
“막중한 책임인데 부담이 좀 되는군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대표께서야 워낙 언변도 능하시고 협상도 잘 하시니, 이번에 우리 바이마샤르를 위해서 큰일을 하나 해 오실 것으로 믿겠습니다.”
토메즈 세츠페나스 야당 대표와 함께 회의실인 의결당을 나선 핫산은 옆에 기다리고 있던 비서관을 발견하곤 발걸음을 멈추었다. 야당의 집무실은 그와는 반대쪽에 있었다. 저는 그럼 이쪽으로…. 예. 가보십시오. 둘은 서로에게 인사를 하고 각자의 방향으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의원님, 한율 공이 와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한율 공이…?”
마침 한 번쯤 만나 볼 참이었다. 그는 어서 가자며 걸음을 재촉했다. 집무실 앞에 서 있던 한율이 그를 보고는 공손하게 두 손을 모으고 인사했다. 좀 달라 보였다. 그 동안 보지 못했던 식으로 인사를 하는 것도 그랬고, 한율의 표정도 전과는 달리 사뭇 무거워 보였다.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었지만 그의 마음속에 한 가닥 의심이 솟았다.
“안 그래도 한율 위원을 한 번 보려고 했었습니다.”
“…예….”
“…. 태우시겠습니까?”
“…. 아닙니다.”
핫산은 연초를 물어 불을 붙이고는 그를 향해 먼저 말을 꺼냈다.
“일단 제가 먼저 묻겠습니다. 혹시 지난 의회경비대 시찰하던 날, 우리 딸아이를 만난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 ….”
분명하게 망설임 없이 대답하는 한율을 보며 핫산은 진짜구나 싶었다. 그럼 대체 왜 그럴까. 눈썹을 찌푸리는 그의 얼굴에 근심이 떠올랐다. 한율은 얘기를 전해 들었다며 아이린과 부인의 안부를 물었다.
“그만그만합니다. 아이는 아직 좀….”
“…. 오늘 보위부장님께 사직서를 냈습니다.”
“…! 한율 위원…!”
“수리…하십디다.”
“… ….”
“그간 시찰했던 결과 보고서도 같이 냈습니다. 일은 제대로 했으니 탓하진 마십시오. 하하…. 뭐, 이 사람이 워낙 부실하다 보니 일 자체가 좀 부실할 수는 있겠지만….”
“… …. 그래서….”
분위기를 조금 풀어보려는 듯 웃었지만, 한 번 가라앉은 분위기는 떠지지 않았다. 핫산은 앞으로 어떻게 하겠느냐 물었다.
“절 이번 미키네오스로 가는 사절단 속에 넣어 주십시오. 병사로 해서요. 지휘관에게는 가자마자 미키네오스 군사로 넘겨주라고 귀띔도 해주시고요.”
“… ….”
차마 그러마고 대답을 얼른 못하고 핫산은 연초를 깨문 채 눈만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시선 둘 곳조차 마땅치 않은 모양이었다. 한율은 조금은 개운해진 목소리로 그에게 차분하게 말했다.
“고맙습니다.”
“….”
“대표님께 고맙고…, 바이마샤르 시민들에게도, 총리 각하께도…. 아이린 아가씨에게도 모두 고맙습니다.”
“…한율 공….”
“아시다시피 나는 떠돌입니다. 돌아갈 곳도 없고, 오라는 곳도 없지요. 아무 데서나 등 붙이고 자면 거기가 집이고, 엉덩이 붙이면 거기가 내 자리입니다. 그러다 일어나면 또 남의 자리 되는 거고…. 그런 거지요.”
“… ….”
“그래도 여기 와서 대표님 덕에 하인들까지 부리면서 아주 폼나게 한 번 살아봤습니다. 하하…. 강가에서 물고기나 잡아먹고 산짐승이나 잡아먹던 제가 언제 이런 호강 한 번 해보겠습니까. 다 대표님 덕입니다.”
핫산은 시원시원하게 말하는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보였다. 한율도 마주 웃으며 담뱃대를 꺼냈다. 난 이게 체질에 맞아서요. 하하하…. 잠시 소리내어 웃어본다. 두 남자는 연초가 다 탈 때까지 말이 없었다. 그리고 담뱃대를 털어내며 한율이 침묵을 깼다.
“마지막으로 부탁이 하나 있습니다.”
“…. 말씀하시지요. 뭐든지….”
“…. 아이린 아가씨를 한 번 만나게 해주십시오.”
“… ….”
핫산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염려 마십시오. 뭐 아가씨 마음이 혹할 만한 이야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압니다.”
“… ….”
“다만…. 지금 아이 모습이 너무….”
“…. 그래서 만나려는 겁니다. 그나마…. 마지막으로 한 번이라도 볼 수 있다면 위로라도 될 수 있을까 싶어서요.”
“… 한율 공….”
“예전에 롬바르난이었던가…. 거기서 잠깐 살림 차린 여자가 있었지요. 한 반 년 정도였는데…. 그 여자가 그러더군요? 여자들은 그런 데서도 위안을 얻는다고…. 하하하하….”
그렇게 웃는 한율을 보면서도 핫산은 그처럼 대놓고 웃을 수가 없었다. 뭔가 자신이 크게 잘못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가 돌아간 후 줄로 연초를 피워대며 그는 비서관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런가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대표님의 결정은 물론…. 어떻게 보면 좀….”
“속 좁게 보인다…?”
“….”
“괜찮아. 나도 알아.”
“하지만 정치란 건 그렇지 않습니까? 아주 작은 데서부터라도 균열이 생기는 걸 방치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 어쩔 수 없다는 건 뭐 그렇다 치더라도…. 그 결정을 한다는 것이…. 그 입장이라는 것이 참…. 쉽지가 않구먼…. 그냥 왔을 때 지내다 가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좋았는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다 그는 피식 웃으며 연초를 껐다.
“장사꾼의 나라라는 오명 한 번 벗어보자고 괜한 사람 잡고 핍박한 것 같아서…. 영 뒤끝이 개운치가 않네….”

한율의 짐은 별로 없었다. 워낙에 덩치가 큰 탓에 새로 맞춰야 했던 옷가지며 신발이며 모두 다 내버려 둔 채 그는 여행객과 같은 차림으로 검 다섯 자루를 한데 묶어 짊어지고는 왔을 때와 같이 커다란 행낭 하나만을 등에 멨다. 집사를 필두로 한 시종들이 모두 나오려 들자 그는 손사래를 치며 그대로 있으라 했지만, 모두들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위원님….”
“왜들 이러십니까, 전 이제 위원도 뭣도 아닙니다.”
“….”
단 한 명에게도 그는 그 동안 함부로 반말을 하거나 명령을 하지 않았다. 한 번도 그런 주인을 둬 본 일이 없는 그들은 그가 가는 것이 못내 아쉬운 모양이었다. 한율은 그들 모두를 향해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공손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정말 잘 지내다 갑니다. 헨야는 울음을 터뜨렸고, 다른 시녀들이 그녀를 달랬다.
“생각보다 인기가 많으셨군요.”
“제가 원래 좀 은근히 많습니다. 하하….”
한율은 모두를 한 번 쓸어보았다.
“다들 그만 들어가세요. 이별은 짧게 하는 겁니다.”
그러고는 곧바로 돌아서서 휘적휘적 저택을 걸어 나갔다. 집사는 거칠 것 없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속으로 말했다. 네가 미키네오스로 가는 것이 나는 아직도 마음에 걸리는구나…. 하지만 길지 않은 지난 시간동안 네가 보여줬던 그 곧은 마음가짐을 한 번 믿어보마…. 믿고 지켜봐 주마….

배속된 보위부로 가기 전에 한율은 핫산에게 허락을 구한대로, 바슈미르 저택을 찾았다. 오래간만에 한가롭게 걸으며 거기까지 가니 이미 해가 길어져 있었다. 이렇게 멀었나…? 그는 허허 웃으며 제가 온 길을 뒤돌아보고는 담장이 높게 옆으로 둘러쳐진 정문으로 다가갔다.
“음…. 이거 뭐…. 이런 식으로 온 적이 없다보니….”
그는 이리 저리 정문을 살피더니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철봉이 이어 붙여진 정문이 요란한 소리를 냈고, 안에서 이어 사람이 나왔다.
“아니, 한율 위원님 아니십니까?”
“하하, 나 위원 그만뒀습니다.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나온 사람은 부집사였다. 그는 기별을 받았다며 문을 열어주었고, 한율은 그의 안내를 받아 집으로 들어갔다. 1층 정문을 들어서니 부인과 시종장이 서 있다가 인사해왔다. 어서오세요. 의원님에게서 기별을 받았습니다. 예, 안녕하셨습니까. 네. 의원직을 그만두셨다고요. 하하, 예. 내일부터는 보위부 의회경비대의 병사로 있을 예정입니다. 네…. 이번 미키네오스 사절단에 같이 가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게 됐습니다. 오늘이 마지막으로 뵙는 게 되겠군요. 주거니 받거니 하는 말은 그저 속없는 껍질일 뿐이었다. 부인은 그를 보는 것이 꽤 불편한 듯했다. 자신 때문에 딸이 그렇게 됐거니 여긴다면 무리한 일도 아니다 싶었다. 한율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3층으로 올라갔다.
“… ….”
아이린은 침대에 앉아 초점을 잃은 눈으로 멍하니 앉아있었다. 그 날 나가지 않았다면…. 아니, 그 전에 한율에게 갔을 때, 옷이라도 벗고 그에게 달려들었다면, 그래서 한율에게 안겼었다면 이런 일이 있었을까 상상도 해보고, 한율이 여기 있을 때 술이라도 먹여서 달려들었었다면 어땠을까 상상도 해보고, 아이린의 머릿속에선 여러 가지 가정들이 어지럽게 얽히며 흩어졌다 모이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항상 맨 마지막은 루카스의 마차 안에서 느꼈던 그 데인 듯한 통증과 목젖까지 치솟을 듯한 갑갑함이었다. 그리고 그 때마다 다리 사이가 욱신거렸다.
노크 소리가 들렸다.
“아이린 아가씨.”
얼굴을 묻고 다시 소리 죽이며 울던 아이린은 문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다시 멍청해졌다. 어…, 내가 뭘 잘못 들었나….
“한율입니다.”
“…네….”
그녀는 저도 모르게 거기에 대답했으나, 자신이 대답을 했는지 하지 않았는지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듯한 얼굴로 문 쪽을 쳐다보았다. 문이 열리고, 처음 보았을 때의 그 차림으로 한율이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짐승털을 덧댄 녹색의 낡고 결 거친 외투에 허리에 질끈 걸어맨 검은 띠, 거기에 꽂힌 목검과 등에 맨 행낭, 그리고 어깨에 짊어진 다섯 자루의 검까지. 모두가 그를 처음 봤을 때 그대로였다. 아이린은 자신이 환상을 보는 것으로 생각했다.
“아가씨…!”
사흘을 먹지 못한 상태에서 루카스에게 그런 변을 당하고, 그 뒤로도 제대로 뭘 넘기지 못한 탓에 아이린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다. 핼쓱하게 들어간 얼굴이 푸석푸석해져 있었고, 눈 밑이 꺼져서 마치 병자와 같은 행색이었다. 하얀 피부와 대조되던 짙은 갈색의 머리카락도 힘없이 흩어져 있었고, 목에는 힘줄이 그대로 드러나 길고 가늘은 목선이 더욱 가냘퍼 보였다.
“세상에…. 이게 대체….”
그는 다가가 저도 모르게 아이린의 손을 잡으며 그녀의 모습을 살폈다. 이게… 이게 대체 무슨 꼴이에요, 아이린 아가씨…. 이…. 말을 잇지 못하는 한율의 얼굴로 아이린의 손이 천천히 올라와 닿았다.
“꿈…. 아니네요….”
“이… … 이 미련한 아가씨야, 어쩌자고 작심을 하고 이렇게…!”
흑…. 아이린은 뭔가가 터져나오듯 울기 시작했다. 한율은 자신을 향해 얼굴을 묻어오는 아이린을 거부하지 않으며, 부서질 것 같은 그 어깨를 토닥거렸다. 더 울 힘이나 있겠나마는, 울 만큼은 울게 할 심산이었다. 대체 누가 무슨 일로 아이린을 이렇게 만들었을까. 핫산이나 부인, 아로사와 나자르만큼이나 그 역시 궁금했다. 해가 약간 더 기울어질 때까지 운 아이린은 이제 울 힘도 정말 없어 보였다. 아이린의 눈물을 닦아주며 한율은 뭘 좀 먹었느냐 물었다.
“….”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는 한숨을 내쉬며 음식을 좀 내오라고 밖에다 대고 말했다. 아이린의 목소리가 가늘게 흘러나왔다.
“이제 넘기질 못해요….”
“넘길 수 있어요…! 내가 넘기게 해 줄게, 내가….”
“….”
한율은 그녀의 손을 쥐고는 위치를 계속 바꿔가며 손가락으로 꾹 꾹 누르기 시작했다. 조금 아팠던지 아이린은 눈썹을 찡그렸으나 손을 빼려 하지 않았다. 어쩌면 손을 뺄 힘조차 없었는지도 몰랐다. 한율은 다른 한 손을 들어 아이린의 목 뒤로 가져가 그녀의 머리에서부터 등의 줄기를 타고 내려오며 손바닥으로 슬슬 문질렀다. 조금만 있어봐요. 수프 정도는 거뜬히 넘길 수 있을 테니까…. 아이린은 눈을 들어 그를 쳐다봤다. 뭔가 또 알 수 없는 방법으로 나를 치료하고 있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의 입가에 희미하게 웃음기가 떠올랐다.
“뭐…뭐 하시는 거에요…?”
“거기 두고 가요.”
“뭐 하시냐구요~?”
“안 잡아먹으니까 거기 두고 가라고…!”
푹 하고 웃음이 터졌다. 정말 오래간만에 들어보는 한율 특유의 표현이었다. 안 잡아먹으니까 두고 가라. 아이린의 눈에서 다시 눈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제 몸에서 뽑아낼 물기도 없는 듯한데 어떻게 눈물이 나오는지, 스스로도 신기했다. 시녀가 나가고 난 뒤, 등을 문지르는 한율의 손바닥이 느껴지지 않는다 싶더니 신비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허기져서 폐까지 마른 듯 숨쉬기가 곤란하던 증상이 차츰 나아지면서 타는 듯 아려오던 윗배의 느낌도 사라져갔다. 동시에 아랫배도 편안해지며 몸이 곧게 펴졌다. 한율의 이마에 땀이 약간 배이기 시작했다.
“이제… 그만하세요….”
“입 다물어요. 기운 빠져.”
그의 말은 단호했다. 눈을 감은 채 계속해서 등을 문지르며 손을 지압하는 한율의 이마에서 땀방울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이젠 목소리마저 제대로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그녀가 아아아-하는 소리를 내자 한율은 그제야 손을 멈추고 땀에 젖은 얼굴로 수프 그릇을 들었다.
“자, 이 한 그릇 먹을 기운은 있을 거야.”
“어떻게…한 거에요…?”
“일단 잡숴…. 먹고 얘기하자고요. 응?”
아닌 게 아니라 손을 들기도 힘겨웠던 터에 수프 그릇을 받아드는데도 무거운 줄을 몰랐다. 아이린은 스푼으로 떠서 후후 불더니 입에 넣고 꿀꺽 삼켰다. 씹을 것은 없었다. 목으로 넘어가는 따뜻한 느낌과 함께 속이 편안하게 음식을 받아들이는 것이 느껴졌다. 이 마법 같은 일에 그녀는 신기해하며 한 번 더 떠먹었다. 비어있는 곳이 채워지는 듯한 기분과 함께 입맛이 약간 돌아오는 듯도 했다.
“그래, 옳지. 잘 먹네.”
아이를 다루듯 옆에서 추임새를 붙이던 한율을 쳐다본 아이린은 문득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져 그에게 수프 그릇을 내밀었다. 뭐야, 왜 날 줘요? 먹여줘요. 기운이 좀 나나보네? 하는 얼굴로 쳐다보는 그에게 그릇을 내밀며 재촉했다.
“어서….”
“허, 참…. 에 뭐 그럽시다. 기왕에 시작한 거 끝까지 봉사하지 뭐.”
한율은 그녀가 원하는 대로 수프 그릇과 스푼을 받아들고 그녀에게 한 번 두 번 떠먹이기 시작했다. 서너 번 삼키고 나자 아이린은 생글생글 웃기까지 했다. 이거 정말 애네….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딱히 내색하진 않았다.
이 장면을 본 시녀는 얼른 아래층으로 내려가 엄마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엄마는 물 한 모금 삼키는 것도 힘들어하고 수프를 먹으면 반은 토해내던 아이린이 한율의 이상한 치료에 기운을 차려 혼자 수프 그릇을 들고 떠먹었다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혹시….”
“….”
“한율 공…. 마법사 아닐까요…?”
“…. 정말 그런가 봐…. 그… 뭐? 어떻게 했다고…?”
“이…이렇게요. 손을 잡고 꾹 꾹 누르면서….”
엄마는 시녀의 모습을 보고는 따라해 보더니, 시종장을 쳐다보았다. 시종장도 따라해 보고 있었다. 이런 주문도 있었나요…? 글쎄, 나도 처녀 때나 봤어서….
수프 한 그릇을 다 비운 한율은 아이린의 손을 잡고 앉아있었다. 이제 해야 할 말을 할 때였다. 아이린도 그가 자신에게 사랑고백 따위를 하러 온 것이 아님은 알고 있었다. 그래도 아이린은 그가 떠나겠다는 인사를 하러 오지 않았기를, 어리석게도 바라는 그 마음을 버리지 못했다.
“나는…. 내가 혼인을 할 수 없는 이유는….”
한율은 연말 연회때 이야기하지 못했던 것을 먼저 꺼냈다. 아이린 아가씨는 절대 이해할 수 없겠지만…, 또 믿을 수도 없겠지만…. 나는…. 죽지 않는 사람이에요. 팔 잘리고 목 잘리고 그래도 안 죽는 그런 건 아니지만…, 자연적으로 늙어 죽지 않아요. 아이린은 묻거나 대꾸하거나 반박하지도 않고 그저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7년 정도 방랑 생활을 하면서… 얼마간 정착을 해 본 적도 있긴 해요. 물론 정착이라고 할 만큼 오래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여자도 있었고. 어쩌면 애도 어딘가에 있을지도 몰라. 하하…. 아이린도 함께 웃음지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러죠. 늙지 않고 영원히 사는 방법 같은 거…, 그런 것만 있으면 뭐든지 하겠다고…. 그런데…, 그건 축복이 아니라 형벌이에요. 난 아직 서른 셋밖에 되지 않았으니 그게 형벌인 걸 모르고는 있지만…. 어렴풋이는 느껴요.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이 아름다운 이유는…. 바로 단 한 번 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죽어야만 하기 때문이라고 말이죠. 아이린이 얼마나 이해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어쩌면 전혀 엉뚱한 소리라고 할지도 모르죠.
“아니에요….”
그녀는 천천히 머리를 저으며 그의 손을 꼭 잡았다.
“이해는 되지 않지만…. 마음속에 담아 둘게요. 꼭…기억할게요.”
“…. 어떤 점쟁이가 날더러 평생 마도들에게 쫓기면서 살아야 한다더군요. 난 그런 말 믿지 않았는데…. 글쎄 한 7년 돌아다녀 보니 사실이더라고요? 어딜 가든 떼로 와서 떼로 맞고 떼로 죽고….”
“풋….”
“참 미련맞게도 산다, 이놈들…싶었는데, 정말 끝도 없이 밀려오더라고요. 그렇게 싸우다 싸우다 지겨워지면 잠시 정착하고…. 지금 모두 다 말하려면 복잡하고…, 또 내가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이니까 그냥…, 내가 좀 잘못한 게 많다고만 할게요. 난…, 아이린이 싫어서가 아니에요. 내 죄가 많아서…. 내… 죄가 너무나 많아서….”
“….”
아이린은 그의 얼굴을 만졌다. 무슨 말인지 반의 반도 이해하지 못했으면서도 다 이해한다는 듯, 다 알아들었다는 듯 아이린은 그저 웃으며 그를 쳐다보았다. 한참을 그렇게 쳐다보던 그녀가 눈을 감으며 입술을 가져왔다. 한율은 딱히 피하지 않고 그녀의 입맞춤을 받았다. 생기가 없는 입술이 그의 입술에 와 얹혔다. 아주 잠깐, 입술이 맞닿은 정도였지만 한율이 이때까지 겪은 중 가장 길고 여운이 넘는 것이었다.
“….”
“….”
한율은 짧고 가벼운 입맞춤의 짙은 여운을 음미라도 하듯 담담한 얼굴로 잠시 말을 멈추었다. 아이린의 손이 그의 커다랗고 두툼한 손으로 파고들었다.
“…아이린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
“힘들 땐 그냥…, 힘들어 하세요. 충분히 힘들어 해야 다시…. 살아갈 수 있으니까. 견뎌 내려고 하지 말고….”
“…. 네.”
“대신…. 몸이 상하지 않게 잘 돌봐주고…. 어쨌든 살아있어야 뭐든 다시 할 거 아닙니까. 진흙탕에서 뒹굴고 이리 저리 채이고 그래도…. 우리 환의 옛말 중에 개똥밭에 굴러도 죽느니 보단 낫다는 말이 있어요. 그 말 그대로죠…. 세상에 큰 일 많다 많다 해도, 역시 사람 태어나고 죽는 것보다 큰일은 없습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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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고민되는 것이, "어디에서 잘라내야 할까"입니다. 이야기를 그냥 나오는대로 풀어쓴
것이다보니, 한 회 한 회 끝맺음을 어디에서 해줘야 할까 늘상 골치아프군요.
이번 회는 좀 길었습니다. 끝맺음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커음..봐줍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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