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궁 후원 공주의 처소에서는 연회가 열렸다. 명목상으로는 평소에 도움을 많이 받은 궁정대신에게 감사의 표시로 열리는 연회였으나 그 자리엔 리토르나와 하백도 함께 하고 있었다. 무희들과 악사들이 흥을 돋우는 가운데 궁정대신은 무척 즐거운 듯 술잔을 기울이며 간간이 리토르나와 하백을 곁눈질했다. 제법 괜찮긴 한데…, 무슨 계집이 저렇게 큰가 그래…. 리토르나의 옆에 있던 하백은 궁정대신의 흘끔거리는 눈초리가 기분 나빴다. 아슈람에서 항상 마음을 곧고 담백하게 갖기 위해 애쓰는 이들만을 보며 자랐으니, 그렇게 번들거리는 눈동자를 대하는 것이 그로서는 생소한 일이었다. 리토르나는 그런 궁정대신의 눈길을 대충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모른 척하며 두 살 차이인 레이네와 마치 언니 동생 하듯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연회를 즐겼다.
“대주교에게 변을 당하실 뻔 하셨다고요, 들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셨겠어요. 그래, 상하신 곳은 없었나요?”
“네, 다행히…. 정말 깜짝 놀랐어요. 흉측한 물건을 들이대면서 껴안으려고 하는데 얼마나 놀랐던지….”
그 때의 상황이 생각난다는 듯 짐짓 진저리를 치며 대답하는 레이네는 영락없는 순진한 처녀였다. 궁정대신은 그 모습이 우스워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애를 먹다가 얼른 하백에게로 화제를 돌렸다.
“아, 그런데…. 듣자니까 황녀님의 친구분께선 환국 출신이시라고….”
“아, 네~. 환국 사람이죠. 하백.”
“예.”
“제가 알기로 환국은 여기서도 대륙 하나를 건너서 아득히 멀리 있었는데, 결례가 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아슈람에 계시게 되었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괜찮습니다. 제 부모님께서 환국을 떠나 아슈람으로 오셨을 때…. 전 갓난아이였습니다. 아는 것은 그 정도뿐입니다.”
“환국을 떠나시다니요? 아니, 그 나라는 신민들이 모두 스스로 하늘의 자손이라면서 번성하던 나라가 아닙니까?”
황녀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능글맞은 눈알을 돌리며 자신을 훑어보던 것으로 신경을 긁더니 이제는 숫제 대놓고 무례를 저지른다. 하백이 조금 주저하자 리토르나가 말참견을 했다.
“궁정대신께선 환국에 대해 들으신 바가 그 뿐인가 봅니다. 아마 전쟁 때문에 정신이 없어 다른 곳의 소식을 들을 여력이 없으셨나보군요.”
“….”
분위기가 약간 경색되자 레이네가 잔을 들었다. 자자, 그런 이야기는 그만들 하시지요. 좋은 자리입니다. 황녀님도 어서 잔을 드세요. 리토르나는 마주 웃어 보이며 잔을 들었고, 하백과 궁정대신도 마지못해 함께 했다.
“불행히도 제 모국은 멸망했습니다. 제가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지요.”
“저런….”
잔을 비운 하백이 오히려 거침없이 말하자 궁정대신은 몰랐다는 듯 혀를 차며 동정하듯 다시 그의 신경을 긁었다. 어쩌다 나라를 잃고 이 고생이십니까, 그려. 황녀의 표정이 다시 굳어지는 걸 보며 레이네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참으세요, 황녀님…. 궁정대신께서 조금 취하신 모양입니다. 그러나 미셀의 무례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런데 또 들어보니, 하백님께선 무예 수련에 아주 열정이 많으시다던데…. 이 자리에서 잠시 좀 보여주실 수는 없습니까?”
“궁정대신, 이제 그만하세요. 취하셨습니다.”
“아니…, 공주님. 제가 뭘요…? 오늘 이 자리는 절 위해 마련해주신 것이었잖습니까~. 그럼 제가 이 정도는 부탁을 드려볼 법도 한 것 같은데요.”
“군무가 보고 싶으시다면 무희를 시키면 되지 않습니까.”
“제가 듣기론 저 먼 북방의 대륙에선 무예도 춤과 비슷하다고 들었습니다. 우리 미키네오스의 군무와 어떻게 다른지 한 번 이 모자란 사람에게 견식을 좀 시켜 주십사 하는 건데….”
“미셀 포이아르 플라시니 경이라고 했습니까…?”
“….”
조금 무거워진 황녀의 음성에 그는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신을 정면으로 주시하는 리토르나의 시선에 딸국질이 났다. 국왕에게서나 받았던 그 압박감이 채 스무 살이 되지 않은 황녀에게서 그에게 전해져 왔다.
“하백의 부모님은 멸망한 환의 제후국인 하백의 단군이셨습니다. 왕족이란 말이지요. 불행하게도 나라가 사라졌다 하여 왕가의 후예를 그런 식으로 핍박하는 것이 미키네오스 궁내의 법도입니까?”
“… ….”
“단군…? 단군이 제후국의 군주를 가리키는 말인가 보죠?”
분위기가 싸늘해지기 시작하자 레이네가 나서보지만, 리토르나는 조금도 누그러들지 않았다. 궁정대신은 질 수 없다는 생각에 침을 꿀꺽 삼키고는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그…그렇군요. 그렇다면… 황녀의 호위무사들은 어떻습니까…?”
그것이 화근이었다. 리토르나는 그를 향해 칼날 같은 예기를 뿜어내며 차갑고도 무거운 꾸지람을 내렸다.
“무례한 자로다! 감히 황제와 황녀의 명령만을 듣는 대 잉그라드의 친위대 군사들에게 검무를 추어 달라 청하다니…! 명색이 대륙 최강국의 재상이라는 자가 어찌 이리 앞뒤 분간을 못하고 날뛰는가…!”
“이보시오, 황녀…!!”
테이블을 내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나던 궁정대신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리토르나의 뒤에 서 있던 비사카의 무시무시한 기세가 자신에게로 온통 쏘아져 오는 것을 느낀 탓이었다. 숨조차 쉴 수 없는 살의에 그는 저도 모르게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
레이네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궁정대신과 리토르나를 번갈아 보았고, 하백은 비사카의 투기에 식은땀을 흘렸다.
‘과연…. 잉그라드의 황실 친위대…!’
한율과는 또 다른 기세였다. 한율이 고요한 가운데 폭풍처럼 몰아치는 패도적인 투기였다면 비사카의 투기는 그보다 더욱 예리한 칼날 같은 투기였다. 이 순간 하백은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지는 기분을 지워내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그의 그런 기분과는 관계없이, 리토르나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레이네에게 양해를 구하곤 물러가기 전 궁정대신을 향해 한 마디 더 던졌다.
“궁정대신은 명심하라.”
“뭣…?!”
“다시 한 번 이 같은 무례를 저지른다면, 나 역시 앞뒤 분간하지 않고 즉시 그대의 목을 거둘 것이다.”
나직했지만 엄청난 한 마디였다. 미키네오스의 왕궁 안에서 왕궁의 모든 행정을 관장하는 궁정대신의 무례에 대한 대가를 목숨으로 받아내겠다는 장담은 국가 간의 외교적 마찰로 번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백은 그런 일들을 생각하기에 앞서 일단 레이네에게 양해를 구한 뒤 리토르나를 따라 연회장을 빠져나가 버렸고, 남은 궁정대신은 그제야 잔을 집어던지며 성질을 부렸다.
“저런 발칙한 계집…!!”
그러나 이 행동은 레이네 앞에서 할 만한 행동이 아니었다. 왕녀의 앞에서 잔을 집어던져 깨뜨렸으니, 그 역시 무례하긴 마찬가지였다. 레이네는 이 자가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이구나 여기면서도 내색하지 않은 채 그를 달랬다.
“무희들은 물러가라. 궁정대신, 그만 화를 누르시지요.”
“공주께서도 보시지 않았습니까! 왕궁 한가운데서 감히 이 나라의 궁정대신에게 죽음으로 그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니요!”
“진정하십시오, 그만…!”
“제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습니까?!”
점입가경이로세…. 레이네는 르로아보다 이 자를 먼저 죽였어야 했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를 계속 달랬다. 그게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 알면 저런 말을 함부로 하겠습니까. 아직 어려서 뭘 모릅니다. 황녀라고 권한이 있으면 뭘 하겠습니까? 제까짓 게 뭘 할 수 있겠습니까? 겨우 군사도 1천 5백밖에 안 되는걸요. 미셀은 아직도 분을 삭이지 못한 듯 식식거리며 다른 잔을 들어 단숨에 비워버렸다. 그 1천 5백 군사도 벌써 여기서 아무것도 안한 채 시간만 보내고 있습니다. 일단 친서를 받을 때까진 황녀의 기분을 너무 거스르면 안 됩니다. 아시잖아요. 궁정대신은 그 말에 그제야 납득을 한 듯 입맛을 다시며 조금 숨소리를 낮췄다. 공주의 뒤에 시녀들과 서 있던 나다니엘은 그를 보며 오래 살지 못할 자군…. 속으로 중얼거렸다.
“다들 이 자리를 치우거라. 궁정대신께선 좀 더 오붓한 자리가 필요할 것 같구나.”
레이네의 그 말에 시녀들이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고, 미셀은 비로소 얼굴이 펴서 피식피식 웃으며 눈으로 레이네의 몸을 훑었다. 징그러운 시선에 레이네는 소름이 돋았지만 애써 참으며 그를 연회장 안쪽의 제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나다니엘이 그 뒤를 따랐다.
“아앗…! 안됩니다, 오늘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공주를 덥석 안아버린 궁정대신은 그녀가 몸을 도사리며 쏙 빠져나가자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체 뭐 하는 짓이냐 표정으로 물었다. 레이네는 눈길을 다른 데로 돌리며 조금 민망한 듯 혀를 찼다.
“오늘… 좀…, 어렵습니다. 몸도 좀 안 좋고요.”
“아…. 아아~!”
미셀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납득하는 듯 하더니 다시 레이네를 향해 돌진하여 그녀의 가냘픈 몸을 안고 침대로 뛰어들었다. 헉…! 미셀의 육중한 몸에 눌린 레이네는 숨이 턱 막히는 느낌에 저도 모르게 헛바람을 내뱉었다. 이놈이 이제 죽기 위해 용을 쓰는구나…! 레이네의 속에서 부아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거칠게 레이네의 옷을 벗겨내고 목이며 어깨며 가슴이며 핥고 빨아대기 시작했다. 헐떡거리는 숨소리가 역겨웠다. 나다니엘은 어금니를 꾸욱 깨물며 그가 하는 양을 지켜보고만 있었고, 분기를 억누르는 기색이 적나라한 나다니엘의 표정을 보고 레이네는 눈을 감아버렸다.
“내가 알기로…, 그 날이 되면…, 몸이 더 민감해진다는데…! 꼭 한 번 해 보고 싶었지요, 하하하….”
레이네는 그를 밀쳐내 보려 했으나 자신의 힘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걱정은 마십시오…! 피 묻은 제 것을 입에 넣어 달라 하진 않을 테니…! 이 정신 나간 색정가의 말에 레이네는 눈이 번쩍 뜨였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었다.
“시위장-!!”
미셀은 반사적으로 그녀의 몸에서 튕겨져 나와 침대에서 떨어졌고, 거의 동시에 시위장이 다급히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무슨 일이십니까?! 도대체 어디서 저런 재빠른 동작이 나올까 신기하기까지 했다. 미셀이 혹여 시위장에게 보일까 싶어 아랫도리를 추스르며 어색하게 서 있는 모양새를 보는 레이네의 눈은 기도 안 찬다며 어처구니없어하고 있었다. 시위장은 미처 방 안에서 일어났던 상황을 보지 못한 듯 그저 이게 무슨 분위기야? 하는 얼굴로 공주와 나다니엘, 그리고 미셀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기만 했다.
“험…험…. 시…실례가 많았소, 공주….”
실례가 많았소…? 그녀의 눈썹이 불쾌한 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치켜올라가자, 미셀은 더 이상 말하지 않은 채 얼른 밖으로 나가버렸다. 시위장은 대체 무슨 일이냐고 물어왔지만 레이네는 손을 내저으며 별 일 아니라 하곤 그를 다시 내보냈다.
“후우….”
한 차례 곤욕을 치른 그녀는 이마에 손을 얹고는 앉은 채 한숨을 내쉬며 열을 식혔다. 아무리 생각해도 궁정대신의 오늘 행동을 묵과하기는 힘들었다. 무슨 수가 없을까 생각하던 그녀는 고개를 세차게 가로젓고는 비토를 불렀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
“하아…. 너희들, 혹시 암살도 하나?”
“합니다.”
“…. 알겠어. 내가 필요해지면 말할 테니까…. 그 때 좀 일을 해줘.”
“알겠습니다.”
“아, 잠깐…!”
다시 사라지려는 그를 불러 세운 레이네는 그러나 아직도 진정이 되지 않는지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숨을 골랐다. 나다니엘이 그녀에게 다가서자 레이네는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았다. 비토의 눈이 맞잡은 두 손으로 잠시 향하더니 다시 공주에게로 돌아갔다.
“연초.”
시녀가 불을 붙여 나다니엘을 통해 공주에게 건넸다. 레이네는 그것을 숨을 고르듯 빨아 연기를 내뿜으며 나다니엘의 손을 어깨에 둘렀다. 그는 잠자코 미셀의 입술과 혀가 닿았던 하얀 어깨를 감싸 안으며 자신에게 기대오는 레이네에게 더 다가섰다.
“이쯤해서….”
숨결이 조금 진정된 공주가 입을 열었다.
“너희 정보조의 힘을 한 번쯤 국왕에게 보여줘야 할 것 같은데….”
“….”
“네 생각은 어때?”
“… …”
비토는 속으로 웃었다. 신뢰하지 않는다, 판단 유보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레이네는 은근히 자신에게 기대고 있었다. 잠시 뜸을 들인 그는 이내 언제나처럼 무심한 어조로 제 의견을 내놓았다.
“폐하께서 공주님을 경계하시게 될 수도 있습니다.”
“경계한다…?”
“…예.”
“…. 그래 하긴…. 너희들 능력이야 우리 입장에서 보면 마법처럼 보일 때가 많으니까…. 나다니엘, 네 생각은 어떠냐?”
고개를 끄덕이던 레이네가 그를 올려다보며 묻자, 나다니엘은 조금 당황한 듯 눈 둘 곳을 찾지 못한 채 말을 더듬었다.
“괜찮으니까 말해봐. 네 생각을 듣고 싶어서 그러니까. 난 아직 적절한 시기인지 판단이 잘 서질 않거든.”
“솔…직히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어서…!”
그는 머뭇머뭇 하더니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이놈은…, 왕궁 내의 분위기를 상세히는 알지 못하지만….”
“뜸들이지 말고.”
“…. 그렇지만, 부녀지간의 힘겨루기는…. 바람직하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힘이 있다면 나누어 드리고 함께 하시는 편이….”
레이네의 표정이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나다니엘을 밀쳐내며 레이네는 비토를 향해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비토! 당장 이 놈을 잡아. 채찍질을 해야 제 주제를 알겠어…!
“안 됩니다.”
“…뭐…?”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안 된다’고 딱 잘라 말하는 비토는, 자신을 향해 이놈이 감히…라는 얼굴로 쳐다보는 레이네에게 사유를 설명했다.
“저를 비롯한 정보조원들은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을 하는 자들입니다. 그런 저희가 보통 사람을 채찍질하면 그의 몸은 토막이 나고 말 것입니다.”
“뭐…뭐…?”
“공주님께서 이 자를 죽이고자 하시는 게 아니라면, 시위들을 시키십시오. 그 편이 나을 것입니다.”
레이네는 자신이 명령을 해놓고도 비토가 아무렇지도 않게 섬뜩한 말을 뱉어내자 그만 딸국질을 하고 말았다.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이라면 몰라도 이 자가 하는 말은 어쩐지 오싹한 구석이 있었다. 레이네는 대체 그 이유가 뭔지 모르겠다며 속으로 투덜거리곤 이내 시위들을 불렀다.
한겨울이 되어 가는 계절의 테라스 한쪽에서 나다니엘은 윗도리가 벗겨진 채 피투성이가 되도록 채찍질을 당했다. 무표정한 사람은 레이네 뿐, 시녀들도, 때리는 시위 무사도, 그를 시키는 시위장도 모두 레이네의 잔인함에 기가 질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 중 아무도, 채찍이 나다니엘의 피부에 작렬하며 피가 튈 때마다 미세하게 일그러지는 레이네의 이마를 보지는 못했다.
정신을 잃지 않을 만큼만 채찍질을 당한 나다니엘은 시위 무사의 손에 이끌려 제 처소에 내동댕이쳐졌다. 신음소리 한 번 내지 않은 그를 보는 레이네의 표정이 약간 어두웠으나, 그녀는 문 앞에 서서 조금도 그런 기색 없이 냉정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다시 한 번 주제를 모르고 그 따위 말을 함부로 뱉었다간 네놈의 혀를 꼬챙이에 매달아 광장에 걸어놓을 줄 알거라.”
“… 예, 공주님….”
그 와중에도 대답을 하는 나다니엘의 모습에 레이네는 이를 악다물었다. 눈썹이 실룩거리는 것을 꾸역꾸역 참아내며, 그녀는 몸을 돌려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쾅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고 나다니엘은 그제야 채찍에 맞은 곳을 어루만지며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의자에 앉아 서랍을 여는데, 이번엔 문이 조용하게 열렸다.
“…. 또… 지시하실 일이라도….”
반사적으로 몸을 돌리며 바닥에 쓰러지듯 그가 엎드리자 들어온 이는 천천히 그의 앞으로 와 몸을 숙였다. 비토였다. 나다니엘은 그가 약봉투를 꺼내어 내밀자 그제야 고개를 들어 누군지 확인하곤 희미하게 웃었다.
“상처를 소독하고 곪지 않도록 하는 약이다. 몸을 소중히 하게.”
“…고맙습니다….”
비토는 그의 몸을 안아들어 책상에 앉혀주고는 다시 그 곳을 나섰다.
한편 방으로 들어간 레이네는 불안을 감추지 못한 채 등에 베개를 받치고 침대에 앉아 손톱을 잘근잘근 씹고 있었다. 다른 한 손에 들려 있던 연초가 다 타서 재가 떨어지고 있는데도 레이네는 의식하지 못하는 듯했다. 시녀가 재떨이를 가져다 얼른 받치며 떨어지는 재를 받아냈다.
“괘씸한 놈….”
“누가 말입니까?”
레이네는 깜짝 놀라 몸을 흠칫 떨었다. 언제 나타났는지 침대 옆에 비토가 유령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녀는 애써 기분을 감추려는 듯 헛기침을 해대며 그에게 지시도 없이 왜 나타났느냐 책망하듯 물었다.
“…. 의견을 물어보셨던 것은 공주님이셨습니다.”
“…. 뭐야. 네놈 주제에 지금 내게 충고라도 하겠다는 건가?”
“… ….”
비토는 말없이 손에 들고 있던 문서 보관함을 그녀의 앞에 내려놓았다.
“이…이게 뭔데…?”
“…. 그는 제가 본 이들 중에선…. 공주님께 무조건적으로 충성할 자입니다.”
“…이게 뭐냐고, 대체?”
“지시하셨던 것들입니다.”
“…?”
레이네는 대체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그를 흘기며 보관함을 열었다. 그 안에는 은백색의 파르스름한 보석으로 월계수 문양이 장식된 반지와, 그와 같은 재질과 문양의 밀부가 낡은 문서와 함께 들어있었다. 레이네는 직감적으로 그것이 뭔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 이건….”
스클로도프 가의 저택 지하실에는 부집사 단토와 항상 함께 다니던 시종이 손발이 묶인 채 무릎을 꿇고 앉아 불안에 떨고 있었다. 그 앞에는 단토가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고,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입단속 좀 하라고 했더니…. 어떻게 그리도 미련하냐….”
안됐다는 듯 혀를 차는 단토는 그러나 전혀 그런 표정이 아니었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루카스가 군복 차림으로 들어왔다. 이제 막 옷을 입은 듯 차림새는 매우 말끔했다.
“오셨습니까.”
“…. 이런 놈을 옆에 달고 다니니 자네도 아침부터 이 고생 아니겠어?”
“죄송합니다, 도련님.”
“잘 좀 해, 잘 좀….”
시종은 식은땀을 비 오듯 쏟으며 온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집안의 모든 하인들이 도련님을 알게 모르게 무서워한다는 건 알고 있었으나, 설마 입단속 좀 잘못했다 해서 이렇게 나올 줄은 상상조차 한 일이 없었다. 루카스는 한 차례 숨을 고르고는 검을 뽑아들었다.
“어쨌든. 이렇게 됐으니 일단 할 일은 해야지. 응?”
그의 눈이 떨고 있는 시종에게로 향했다.
“네놈 때문에 어머니에게서 안 들어도 될 말을 들었으니, 주인을 모욕한 대가는 치러야겠지. 네 혓바닥을 원망하거라.”
“도련님, 제가 하겠습니다.”
“비켜, 피 튀긴다.”
그리고 지체 없이 검이 내리쳐졌다.
출근을 하는 마차 안에서 부집사는 아침에 그가 차고 나왔던 검을 들고 있었다. 루카스는 연초를 입에 문 채 눈 내리는 창밖을 보며 중얼거렸다. 올해는 첫눈이 빠르군…게다가 많이도 왔어…. 그러다 흘끗 단토의 손에 들려 있는 검을 본다. 버려, 그거…. 더러운 피가 묻었어.
“예, 도련님.”
눈이 쌓여가는 길가에 검이 내던져졌다.
한율의 이 날 시찰은 바로 루카스의 부대였다. 그가 도착할 무렵 눈은 그쳤으나 제법 쌓인 터라 다니기가 그리 수월치는 않았다. 루카스는 지휘부의 정문으로 나아가 그를 환영했다.
“눈 오는데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위원님.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그럽시다. 어~ 참. 많이도 오네….”
사령실로 들어간 한율은 따뜻한 차와 다과를 대접받았다. 눈이 많이 온 탓에 도열 준비가 늦어졌습니다. 잠시 여기서 몸을 좀 녹이시지요. 아니, 도열은 무슨 도열입니까, 그냥 여기서 하지요. 한율은 사람 좋게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그래도 론지니아 전투의 영웅께서 오시는데, 병사들 사기도 좀 생각해주십시오, 위원님, 하하~!”
“그 얘기 좀 이제 그만합시다. 대체 언제적 일인데….”
“얼마 안됐습니다? 작년 일이라고 눙치려 들지 마십시오. 하하하~.”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율은 찻잔을 기울였다. 루카스가 연초를 내밀자 사양치 않고 받아 몇 모금 빨아들이는 그에게 루카스도 연초를 피워 물면서 검술 시범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듣기로는 위원님께선 지금도 아침마다 검술 수련을 하신다던데…, 어떠십니까? 오늘 저희 수색대대 병사들에게 한 수 가르쳐 주시지요.”
“검술 수련이라기보단 그저 몸이 둔해질까 싶어 하는 것뿐입니다. 누구에게 보여줄 만한 것이 못 됩니다. 하하….”
“그럼 권각술이라도…, 론지니아 전투에선 맨손으로 싸우셨다던데요?”
“아니 대체 그…. 웬 소문이 그렇게 정확하게 난답디까?”
루카스는 크게 소리내 웃으며 영웅담은 언제나 그런 법이라고 그를 추켜세웠다. 한율은 어쩐지 좀 찜찜했다. 아침에 집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대단히 뛰어난 군부의 엘리트입니다. 학식도 정평이 나 있는데다 검술, 창술, 궁술, 권각술까지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게다가 이스마르에서 왕족의 후예로 있었기에 더 인기도 많습니다. 다만 왕위 계승다툼에 싫증이 나서 망명해 온 아버지와 달리 이자는 야심이 많고 정치적이라는 후문이 있더군요…. 자신에게 검술이나 권각술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걸 보니 자신을 시험해 보고 싶은 것은 아닌가 생각하며 한율은 말없이 연초를 뻐끔 뻐끔 빨았다. 잠시 한율의 얼굴을 살피던 루카스가 은근한 어조로 아이린의 이야기를 슬그머니 꺼냈다.
“그런데…이런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건 압니다만… 기왕 뵈었으니 위원님께 사적으로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말씀하시구려?”
“…아이린…아가씨 말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 ….”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그를 게슴츠레한 눈으로 쳐다보던 한율은 어색하게 웃으며 스스로를 책망하듯 하는 루카스의 말을 일축해버렸다.
“하하… 이거 참 부끄럽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사실….”
“난 관심 없소. 아이린 아가씨에 대해선….”
“….”
“…. 일하러 왔으니 이제 일합시다.”
“예, 위원님. 결례하였습니다.”
한율이 연초를 끄며 일어나자 즉각 따라 일어나는 루카스의 날카로운 시선이 한율의 등에 꽂혔다. 거짓말은 잘 못하는군…. 그래선 여기서 살아남기가 힘들 텐데….
정례의회는 열릴 때가 아니었지만 핫산은 집무실에 와 있었다. 보고서를 읽어보고 결재를 하고, 지방에서 올라온 여러 사안들도 검토해야 했다. 비서관은 옆에 서서 그가 말하는 자료들을 정리하며 일을 돕고 있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예.”
“연초부터 정신이 없네, 아주…. 자네도 나와 있었구먼.”
“비어텐 지방 교량설계 업체 문제로 나오셨나 보군요.”
“그런 지방 건설 문제는 지방 행정부에서 해줘야 하는데…. 에이 참…. 핀 어르신이 만들어 놓으신 건 좋은데 제대로 시행이 안 되니 이거 총리만 정신없네.”
“중앙이 그래서 바쁜 거지요…. 지방에선 아마 우리가 노닥거리고 있다고 욕만 실컷 할 겁니다?”
“하하하…! 그럴 거야. 나도 지방 행정부에 있을 땐 욕 많이 했었으니까.”
“아침 일찍 나오셨을 텐데 일 마치면 들어가 쉬시지 웬일이십니까?”
“아까 들어가는 길에 소식을 들었는데, 미키네오스 사신단이 어제 국경을 넘었다더구먼. 바루나가 드디어 전쟁 체제로 돌입하려는 모양이야.”
“사신단이 어제요?”
“음. 도착하면 비정례의회라도 열어야겠어. 행정부도 소집하고.”
“아니, 칙서 하나면 될 일을 뭔 사신단까지 보낸답니까? 어차피 이번에는 보르틴 연합회 회의소집이 이유일 텐데….”
“그만큼 신경을 쓰는 거지. 성의를 보여줘야 할 게 아닌가. 최대한 끌어 모으려면….”
“참 여러 가지로 곤란하게 만드는군요.”
“그러게나 말일세….”
한숨을 푸욱 내쉬던 기즈는 뭔가를 찾는 듯 문서를 뒤지는 핫산을 잠시 쳐다보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 시간 괜찮으면 같이 오후에 어딜 좀 가자고 하려고 했더니 안되겠구먼. 핫산은 어림없다는 듯 문서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손을 부지런히 놀리며, 안됩니다~. 제가 좀 많이 바빠서요. 누가 총리 자리에 덜컥 앉아버리는 바람에….
“이 사람이…, 여당 대표가 왜 바쁜지 이제 좀 알겠나?”
“총리가 되면 잊어버릴 겁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쳇…. 야박하긴…. 나 가네. 나오지 말게.”
“예~.”
해가 지고 촛불을 켜고 나고서도 한참이 지나서야 핫산은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종일 문서들을 붙들고 씨름을 했더니 눈이 욱신거렸다. 마차 안에서 눈을 감고 잠시 졸던 그는 먼저 씻기부터 하고 싶었다.
“조금 늦었네요.”
“어. 좀 일이 많아서…. 목욕물 좀 준비해 줘. 일단 씻어야겠어.”
“예, 의원님.”
“여보.”
“어. …. 왜…?”
집사에게 목욕물을 부탁하던 핫산은 부인의 표정을 보고는 할 말이 있는 듯하여 일단 목욕 준비를 중단시켰다. 부인은 응접실로 그를 안내했다.
“… ….”
“… ….”
한율은 찾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 역시 시찰 때문에 분주한 모양이었다.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은 핫산은 전에 말했던 것을 알리러 왔음을 알고는 말없이 한율의 이야기가 나오길 기다렸다. 이 날은 엄마도 아이린도 조용히 앉아 그의 말을 기다렸다.
“먼저…. 집무실로 찾아뵙지 않고 여기 온 건. 아이린 아가씨가 없는 데서 의원님께만 말씀드리는 것이 아가씨께 결례라고 생각해서였습니다.”
“…. 잘 하셨습니다.”
“….”
그리고 잠시 침묵이 일어났다. 아이린은 그의 입에서 제발 가겠다는 말만 나오지 않기를 바라며 눈을 감고 있었고, 엄마는 그런 딸의 손을 잡아주었다.
“…. 저를 보병으로 해서 일반 병사로 넣어주십시오. 연합군에 보낼 부대에 말입니다. 미키네오스로 가서, 거기서 미키네오스 군대로 재편성을 받든지 뭐…, 어떻게든 거기서 소속을 옮기게끔 처리를 해 주셨으면 합니다.”
“…!!”
“…!!!”
“한율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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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었습니다. 추석은 잘들 보내셨는지요.
전 연휴를 무척 싫어하는지라...;; 몹시 괴로운 시간이었습니다. 일도 못하고..
글도 쓸 수 없고, 집에 가면 책도 보기가 힘들거든요. 저만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 집에서 살아 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그 건물이 좀 불편하더군요. 그래서
뭘 해도 집중도 안 되고 잠도 잘 안 옵니다.;;
기온이 뚝~ 떨어졌슴다. 감기들 조심하시고.. 담번엔 늦지 않도록 합져~.
“대주교에게 변을 당하실 뻔 하셨다고요, 들었습니다~. 얼마나 놀라셨겠어요. 그래, 상하신 곳은 없었나요?”
“네, 다행히…. 정말 깜짝 놀랐어요. 흉측한 물건을 들이대면서 껴안으려고 하는데 얼마나 놀랐던지….”
그 때의 상황이 생각난다는 듯 짐짓 진저리를 치며 대답하는 레이네는 영락없는 순진한 처녀였다. 궁정대신은 그 모습이 우스워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애를 먹다가 얼른 하백에게로 화제를 돌렸다.
“아, 그런데…. 듣자니까 황녀님의 친구분께선 환국 출신이시라고….”
“아, 네~. 환국 사람이죠. 하백.”
“예.”
“제가 알기로 환국은 여기서도 대륙 하나를 건너서 아득히 멀리 있었는데, 결례가 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아슈람에 계시게 되었는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괜찮습니다. 제 부모님께서 환국을 떠나 아슈람으로 오셨을 때…. 전 갓난아이였습니다. 아는 것은 그 정도뿐입니다.”
“환국을 떠나시다니요? 아니, 그 나라는 신민들이 모두 스스로 하늘의 자손이라면서 번성하던 나라가 아닙니까?”
황녀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능글맞은 눈알을 돌리며 자신을 훑어보던 것으로 신경을 긁더니 이제는 숫제 대놓고 무례를 저지른다. 하백이 조금 주저하자 리토르나가 말참견을 했다.
“궁정대신께선 환국에 대해 들으신 바가 그 뿐인가 봅니다. 아마 전쟁 때문에 정신이 없어 다른 곳의 소식을 들을 여력이 없으셨나보군요.”
“….”
분위기가 약간 경색되자 레이네가 잔을 들었다. 자자, 그런 이야기는 그만들 하시지요. 좋은 자리입니다. 황녀님도 어서 잔을 드세요. 리토르나는 마주 웃어 보이며 잔을 들었고, 하백과 궁정대신도 마지못해 함께 했다.
“불행히도 제 모국은 멸망했습니다. 제가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지요.”
“저런….”
잔을 비운 하백이 오히려 거침없이 말하자 궁정대신은 몰랐다는 듯 혀를 차며 동정하듯 다시 그의 신경을 긁었다. 어쩌다 나라를 잃고 이 고생이십니까, 그려. 황녀의 표정이 다시 굳어지는 걸 보며 레이네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참으세요, 황녀님…. 궁정대신께서 조금 취하신 모양입니다. 그러나 미셀의 무례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런데 또 들어보니, 하백님께선 무예 수련에 아주 열정이 많으시다던데…. 이 자리에서 잠시 좀 보여주실 수는 없습니까?”
“궁정대신, 이제 그만하세요. 취하셨습니다.”
“아니…, 공주님. 제가 뭘요…? 오늘 이 자리는 절 위해 마련해주신 것이었잖습니까~. 그럼 제가 이 정도는 부탁을 드려볼 법도 한 것 같은데요.”
“군무가 보고 싶으시다면 무희를 시키면 되지 않습니까.”
“제가 듣기론 저 먼 북방의 대륙에선 무예도 춤과 비슷하다고 들었습니다. 우리 미키네오스의 군무와 어떻게 다른지 한 번 이 모자란 사람에게 견식을 좀 시켜 주십사 하는 건데….”
“미셀 포이아르 플라시니 경이라고 했습니까…?”
“….”
조금 무거워진 황녀의 음성에 그는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신을 정면으로 주시하는 리토르나의 시선에 딸국질이 났다. 국왕에게서나 받았던 그 압박감이 채 스무 살이 되지 않은 황녀에게서 그에게 전해져 왔다.
“하백의 부모님은 멸망한 환의 제후국인 하백의 단군이셨습니다. 왕족이란 말이지요. 불행하게도 나라가 사라졌다 하여 왕가의 후예를 그런 식으로 핍박하는 것이 미키네오스 궁내의 법도입니까?”
“… ….”
“단군…? 단군이 제후국의 군주를 가리키는 말인가 보죠?”
분위기가 싸늘해지기 시작하자 레이네가 나서보지만, 리토르나는 조금도 누그러들지 않았다. 궁정대신은 질 수 없다는 생각에 침을 꿀꺽 삼키고는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그…그렇군요. 그렇다면… 황녀의 호위무사들은 어떻습니까…?”
그것이 화근이었다. 리토르나는 그를 향해 칼날 같은 예기를 뿜어내며 차갑고도 무거운 꾸지람을 내렸다.
“무례한 자로다! 감히 황제와 황녀의 명령만을 듣는 대 잉그라드의 친위대 군사들에게 검무를 추어 달라 청하다니…! 명색이 대륙 최강국의 재상이라는 자가 어찌 이리 앞뒤 분간을 못하고 날뛰는가…!”
“이보시오, 황녀…!!”
테이블을 내리치며 자리에서 일어나던 궁정대신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리토르나의 뒤에 서 있던 비사카의 무시무시한 기세가 자신에게로 온통 쏘아져 오는 것을 느낀 탓이었다. 숨조차 쉴 수 없는 살의에 그는 저도 모르게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
레이네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궁정대신과 리토르나를 번갈아 보았고, 하백은 비사카의 투기에 식은땀을 흘렸다.
‘과연…. 잉그라드의 황실 친위대…!’
한율과는 또 다른 기세였다. 한율이 고요한 가운데 폭풍처럼 몰아치는 패도적인 투기였다면 비사카의 투기는 그보다 더욱 예리한 칼날 같은 투기였다. 이 순간 하백은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지는 기분을 지워내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그의 그런 기분과는 관계없이, 리토르나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레이네에게 양해를 구하곤 물러가기 전 궁정대신을 향해 한 마디 더 던졌다.
“궁정대신은 명심하라.”
“뭣…?!”
“다시 한 번 이 같은 무례를 저지른다면, 나 역시 앞뒤 분간하지 않고 즉시 그대의 목을 거둘 것이다.”
나직했지만 엄청난 한 마디였다. 미키네오스의 왕궁 안에서 왕궁의 모든 행정을 관장하는 궁정대신의 무례에 대한 대가를 목숨으로 받아내겠다는 장담은 국가 간의 외교적 마찰로 번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백은 그런 일들을 생각하기에 앞서 일단 레이네에게 양해를 구한 뒤 리토르나를 따라 연회장을 빠져나가 버렸고, 남은 궁정대신은 그제야 잔을 집어던지며 성질을 부렸다.
“저런 발칙한 계집…!!”
그러나 이 행동은 레이네 앞에서 할 만한 행동이 아니었다. 왕녀의 앞에서 잔을 집어던져 깨뜨렸으니, 그 역시 무례하긴 마찬가지였다. 레이네는 이 자가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이구나 여기면서도 내색하지 않은 채 그를 달랬다.
“무희들은 물러가라. 궁정대신, 그만 화를 누르시지요.”
“공주께서도 보시지 않았습니까! 왕궁 한가운데서 감히 이 나라의 궁정대신에게 죽음으로 그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니요!”
“진정하십시오, 그만…!”
“제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습니까?!”
점입가경이로세…. 레이네는 르로아보다 이 자를 먼저 죽였어야 했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를 계속 달랬다. 그게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 알면 저런 말을 함부로 하겠습니까. 아직 어려서 뭘 모릅니다. 황녀라고 권한이 있으면 뭘 하겠습니까? 제까짓 게 뭘 할 수 있겠습니까? 겨우 군사도 1천 5백밖에 안 되는걸요. 미셀은 아직도 분을 삭이지 못한 듯 식식거리며 다른 잔을 들어 단숨에 비워버렸다. 그 1천 5백 군사도 벌써 여기서 아무것도 안한 채 시간만 보내고 있습니다. 일단 친서를 받을 때까진 황녀의 기분을 너무 거스르면 안 됩니다. 아시잖아요. 궁정대신은 그 말에 그제야 납득을 한 듯 입맛을 다시며 조금 숨소리를 낮췄다. 공주의 뒤에 시녀들과 서 있던 나다니엘은 그를 보며 오래 살지 못할 자군…. 속으로 중얼거렸다.
“다들 이 자리를 치우거라. 궁정대신께선 좀 더 오붓한 자리가 필요할 것 같구나.”
레이네의 그 말에 시녀들이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고, 미셀은 비로소 얼굴이 펴서 피식피식 웃으며 눈으로 레이네의 몸을 훑었다. 징그러운 시선에 레이네는 소름이 돋았지만 애써 참으며 그를 연회장 안쪽의 제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나다니엘이 그 뒤를 따랐다.
“아앗…! 안됩니다, 오늘은….”
방에 들어서자마자 공주를 덥석 안아버린 궁정대신은 그녀가 몸을 도사리며 쏙 빠져나가자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체 뭐 하는 짓이냐 표정으로 물었다. 레이네는 눈길을 다른 데로 돌리며 조금 민망한 듯 혀를 찼다.
“오늘… 좀…, 어렵습니다. 몸도 좀 안 좋고요.”
“아…. 아아~!”
미셀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납득하는 듯 하더니 다시 레이네를 향해 돌진하여 그녀의 가냘픈 몸을 안고 침대로 뛰어들었다. 헉…! 미셀의 육중한 몸에 눌린 레이네는 숨이 턱 막히는 느낌에 저도 모르게 헛바람을 내뱉었다. 이놈이 이제 죽기 위해 용을 쓰는구나…! 레이네의 속에서 부아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거칠게 레이네의 옷을 벗겨내고 목이며 어깨며 가슴이며 핥고 빨아대기 시작했다. 헐떡거리는 숨소리가 역겨웠다. 나다니엘은 어금니를 꾸욱 깨물며 그가 하는 양을 지켜보고만 있었고, 분기를 억누르는 기색이 적나라한 나다니엘의 표정을 보고 레이네는 눈을 감아버렸다.
“내가 알기로…, 그 날이 되면…, 몸이 더 민감해진다는데…! 꼭 한 번 해 보고 싶었지요, 하하하….”
레이네는 그를 밀쳐내 보려 했으나 자신의 힘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걱정은 마십시오…! 피 묻은 제 것을 입에 넣어 달라 하진 않을 테니…! 이 정신 나간 색정가의 말에 레이네는 눈이 번쩍 뜨였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었다.
“시위장-!!”
미셀은 반사적으로 그녀의 몸에서 튕겨져 나와 침대에서 떨어졌고, 거의 동시에 시위장이 다급히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무슨 일이십니까?! 도대체 어디서 저런 재빠른 동작이 나올까 신기하기까지 했다. 미셀이 혹여 시위장에게 보일까 싶어 아랫도리를 추스르며 어색하게 서 있는 모양새를 보는 레이네의 눈은 기도 안 찬다며 어처구니없어하고 있었다. 시위장은 미처 방 안에서 일어났던 상황을 보지 못한 듯 그저 이게 무슨 분위기야? 하는 얼굴로 공주와 나다니엘, 그리고 미셀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기만 했다.
“험…험…. 시…실례가 많았소, 공주….”
실례가 많았소…? 그녀의 눈썹이 불쾌한 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치켜올라가자, 미셀은 더 이상 말하지 않은 채 얼른 밖으로 나가버렸다. 시위장은 대체 무슨 일이냐고 물어왔지만 레이네는 손을 내저으며 별 일 아니라 하곤 그를 다시 내보냈다.
“후우….”
한 차례 곤욕을 치른 그녀는 이마에 손을 얹고는 앉은 채 한숨을 내쉬며 열을 식혔다. 아무리 생각해도 궁정대신의 오늘 행동을 묵과하기는 힘들었다. 무슨 수가 없을까 생각하던 그녀는 고개를 세차게 가로젓고는 비토를 불렀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
“하아…. 너희들, 혹시 암살도 하나?”
“합니다.”
“…. 알겠어. 내가 필요해지면 말할 테니까…. 그 때 좀 일을 해줘.”
“알겠습니다.”
“아, 잠깐…!”
다시 사라지려는 그를 불러 세운 레이네는 그러나 아직도 진정이 되지 않는지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숨을 골랐다. 나다니엘이 그녀에게 다가서자 레이네는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았다. 비토의 눈이 맞잡은 두 손으로 잠시 향하더니 다시 공주에게로 돌아갔다.
“연초.”
시녀가 불을 붙여 나다니엘을 통해 공주에게 건넸다. 레이네는 그것을 숨을 고르듯 빨아 연기를 내뿜으며 나다니엘의 손을 어깨에 둘렀다. 그는 잠자코 미셀의 입술과 혀가 닿았던 하얀 어깨를 감싸 안으며 자신에게 기대오는 레이네에게 더 다가섰다.
“이쯤해서….”
숨결이 조금 진정된 공주가 입을 열었다.
“너희 정보조의 힘을 한 번쯤 국왕에게 보여줘야 할 것 같은데….”
“….”
“네 생각은 어때?”
“… …”
비토는 속으로 웃었다. 신뢰하지 않는다, 판단 유보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레이네는 은근히 자신에게 기대고 있었다. 잠시 뜸을 들인 그는 이내 언제나처럼 무심한 어조로 제 의견을 내놓았다.
“폐하께서 공주님을 경계하시게 될 수도 있습니다.”
“경계한다…?”
“…예.”
“…. 그래 하긴…. 너희들 능력이야 우리 입장에서 보면 마법처럼 보일 때가 많으니까…. 나다니엘, 네 생각은 어떠냐?”
고개를 끄덕이던 레이네가 그를 올려다보며 묻자, 나다니엘은 조금 당황한 듯 눈 둘 곳을 찾지 못한 채 말을 더듬었다.
“괜찮으니까 말해봐. 네 생각을 듣고 싶어서 그러니까. 난 아직 적절한 시기인지 판단이 잘 서질 않거든.”
“솔…직히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어서…!”
그는 머뭇머뭇 하더니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이놈은…, 왕궁 내의 분위기를 상세히는 알지 못하지만….”
“뜸들이지 말고.”
“…. 그렇지만, 부녀지간의 힘겨루기는…. 바람직하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힘이 있다면 나누어 드리고 함께 하시는 편이….”
레이네의 표정이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나다니엘을 밀쳐내며 레이네는 비토를 향해 앙칼지게 쏘아붙였다. 비토! 당장 이 놈을 잡아. 채찍질을 해야 제 주제를 알겠어…!
“안 됩니다.”
“…뭐…?”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안 된다’고 딱 잘라 말하는 비토는, 자신을 향해 이놈이 감히…라는 얼굴로 쳐다보는 레이네에게 사유를 설명했다.
“저를 비롯한 정보조원들은 사람이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을 하는 자들입니다. 그런 저희가 보통 사람을 채찍질하면 그의 몸은 토막이 나고 말 것입니다.”
“뭐…뭐…?”
“공주님께서 이 자를 죽이고자 하시는 게 아니라면, 시위들을 시키십시오. 그 편이 나을 것입니다.”
레이네는 자신이 명령을 해놓고도 비토가 아무렇지도 않게 섬뜩한 말을 뱉어내자 그만 딸국질을 하고 말았다.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이라면 몰라도 이 자가 하는 말은 어쩐지 오싹한 구석이 있었다. 레이네는 대체 그 이유가 뭔지 모르겠다며 속으로 투덜거리곤 이내 시위들을 불렀다.
한겨울이 되어 가는 계절의 테라스 한쪽에서 나다니엘은 윗도리가 벗겨진 채 피투성이가 되도록 채찍질을 당했다. 무표정한 사람은 레이네 뿐, 시녀들도, 때리는 시위 무사도, 그를 시키는 시위장도 모두 레이네의 잔인함에 기가 질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 중 아무도, 채찍이 나다니엘의 피부에 작렬하며 피가 튈 때마다 미세하게 일그러지는 레이네의 이마를 보지는 못했다.
정신을 잃지 않을 만큼만 채찍질을 당한 나다니엘은 시위 무사의 손에 이끌려 제 처소에 내동댕이쳐졌다. 신음소리 한 번 내지 않은 그를 보는 레이네의 표정이 약간 어두웠으나, 그녀는 문 앞에 서서 조금도 그런 기색 없이 냉정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다시 한 번 주제를 모르고 그 따위 말을 함부로 뱉었다간 네놈의 혀를 꼬챙이에 매달아 광장에 걸어놓을 줄 알거라.”
“… 예, 공주님….”
그 와중에도 대답을 하는 나다니엘의 모습에 레이네는 이를 악다물었다. 눈썹이 실룩거리는 것을 꾸역꾸역 참아내며, 그녀는 몸을 돌려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쾅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고 나다니엘은 그제야 채찍에 맞은 곳을 어루만지며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의자에 앉아 서랍을 여는데, 이번엔 문이 조용하게 열렸다.
“…. 또… 지시하실 일이라도….”
반사적으로 몸을 돌리며 바닥에 쓰러지듯 그가 엎드리자 들어온 이는 천천히 그의 앞으로 와 몸을 숙였다. 비토였다. 나다니엘은 그가 약봉투를 꺼내어 내밀자 그제야 고개를 들어 누군지 확인하곤 희미하게 웃었다.
“상처를 소독하고 곪지 않도록 하는 약이다. 몸을 소중히 하게.”
“…고맙습니다….”
비토는 그의 몸을 안아들어 책상에 앉혀주고는 다시 그 곳을 나섰다.
한편 방으로 들어간 레이네는 불안을 감추지 못한 채 등에 베개를 받치고 침대에 앉아 손톱을 잘근잘근 씹고 있었다. 다른 한 손에 들려 있던 연초가 다 타서 재가 떨어지고 있는데도 레이네는 의식하지 못하는 듯했다. 시녀가 재떨이를 가져다 얼른 받치며 떨어지는 재를 받아냈다.
“괘씸한 놈….”
“누가 말입니까?”
레이네는 깜짝 놀라 몸을 흠칫 떨었다. 언제 나타났는지 침대 옆에 비토가 유령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녀는 애써 기분을 감추려는 듯 헛기침을 해대며 그에게 지시도 없이 왜 나타났느냐 책망하듯 물었다.
“…. 의견을 물어보셨던 것은 공주님이셨습니다.”
“…. 뭐야. 네놈 주제에 지금 내게 충고라도 하겠다는 건가?”
“… ….”
비토는 말없이 손에 들고 있던 문서 보관함을 그녀의 앞에 내려놓았다.
“이…이게 뭔데…?”
“…. 그는 제가 본 이들 중에선…. 공주님께 무조건적으로 충성할 자입니다.”
“…이게 뭐냐고, 대체?”
“지시하셨던 것들입니다.”
“…?”
레이네는 대체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그를 흘기며 보관함을 열었다. 그 안에는 은백색의 파르스름한 보석으로 월계수 문양이 장식된 반지와, 그와 같은 재질과 문양의 밀부가 낡은 문서와 함께 들어있었다. 레이네는 직감적으로 그것이 뭔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 이건….”
스클로도프 가의 저택 지하실에는 부집사 단토와 항상 함께 다니던 시종이 손발이 묶인 채 무릎을 꿇고 앉아 불안에 떨고 있었다. 그 앞에는 단토가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고,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입단속 좀 하라고 했더니…. 어떻게 그리도 미련하냐….”
안됐다는 듯 혀를 차는 단토는 그러나 전혀 그런 표정이 아니었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루카스가 군복 차림으로 들어왔다. 이제 막 옷을 입은 듯 차림새는 매우 말끔했다.
“오셨습니까.”
“…. 이런 놈을 옆에 달고 다니니 자네도 아침부터 이 고생 아니겠어?”
“죄송합니다, 도련님.”
“잘 좀 해, 잘 좀….”
시종은 식은땀을 비 오듯 쏟으며 온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집안의 모든 하인들이 도련님을 알게 모르게 무서워한다는 건 알고 있었으나, 설마 입단속 좀 잘못했다 해서 이렇게 나올 줄은 상상조차 한 일이 없었다. 루카스는 한 차례 숨을 고르고는 검을 뽑아들었다.
“어쨌든. 이렇게 됐으니 일단 할 일은 해야지. 응?”
그의 눈이 떨고 있는 시종에게로 향했다.
“네놈 때문에 어머니에게서 안 들어도 될 말을 들었으니, 주인을 모욕한 대가는 치러야겠지. 네 혓바닥을 원망하거라.”
“도련님, 제가 하겠습니다.”
“비켜, 피 튀긴다.”
그리고 지체 없이 검이 내리쳐졌다.
출근을 하는 마차 안에서 부집사는 아침에 그가 차고 나왔던 검을 들고 있었다. 루카스는 연초를 입에 문 채 눈 내리는 창밖을 보며 중얼거렸다. 올해는 첫눈이 빠르군…게다가 많이도 왔어…. 그러다 흘끗 단토의 손에 들려 있는 검을 본다. 버려, 그거…. 더러운 피가 묻었어.
“예, 도련님.”
눈이 쌓여가는 길가에 검이 내던져졌다.
한율의 이 날 시찰은 바로 루카스의 부대였다. 그가 도착할 무렵 눈은 그쳤으나 제법 쌓인 터라 다니기가 그리 수월치는 않았다. 루카스는 지휘부의 정문으로 나아가 그를 환영했다.
“눈 오는데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위원님.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그럽시다. 어~ 참. 많이도 오네….”
사령실로 들어간 한율은 따뜻한 차와 다과를 대접받았다. 눈이 많이 온 탓에 도열 준비가 늦어졌습니다. 잠시 여기서 몸을 좀 녹이시지요. 아니, 도열은 무슨 도열입니까, 그냥 여기서 하지요. 한율은 사람 좋게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그래도 론지니아 전투의 영웅께서 오시는데, 병사들 사기도 좀 생각해주십시오, 위원님, 하하~!”
“그 얘기 좀 이제 그만합시다. 대체 언제적 일인데….”
“얼마 안됐습니다? 작년 일이라고 눙치려 들지 마십시오. 하하하~.”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율은 찻잔을 기울였다. 루카스가 연초를 내밀자 사양치 않고 받아 몇 모금 빨아들이는 그에게 루카스도 연초를 피워 물면서 검술 시범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듣기로는 위원님께선 지금도 아침마다 검술 수련을 하신다던데…, 어떠십니까? 오늘 저희 수색대대 병사들에게 한 수 가르쳐 주시지요.”
“검술 수련이라기보단 그저 몸이 둔해질까 싶어 하는 것뿐입니다. 누구에게 보여줄 만한 것이 못 됩니다. 하하….”
“그럼 권각술이라도…, 론지니아 전투에선 맨손으로 싸우셨다던데요?”
“아니 대체 그…. 웬 소문이 그렇게 정확하게 난답디까?”
루카스는 크게 소리내 웃으며 영웅담은 언제나 그런 법이라고 그를 추켜세웠다. 한율은 어쩐지 좀 찜찜했다. 아침에 집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대단히 뛰어난 군부의 엘리트입니다. 학식도 정평이 나 있는데다 검술, 창술, 궁술, 권각술까지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게다가 이스마르에서 왕족의 후예로 있었기에 더 인기도 많습니다. 다만 왕위 계승다툼에 싫증이 나서 망명해 온 아버지와 달리 이자는 야심이 많고 정치적이라는 후문이 있더군요…. 자신에게 검술이나 권각술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걸 보니 자신을 시험해 보고 싶은 것은 아닌가 생각하며 한율은 말없이 연초를 뻐끔 뻐끔 빨았다. 잠시 한율의 얼굴을 살피던 루카스가 은근한 어조로 아이린의 이야기를 슬그머니 꺼냈다.
“그런데…이런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건 압니다만… 기왕 뵈었으니 위원님께 사적으로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말씀하시구려?”
“…아이린…아가씨 말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 ….”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그를 게슴츠레한 눈으로 쳐다보던 한율은 어색하게 웃으며 스스로를 책망하듯 하는 루카스의 말을 일축해버렸다.
“하하… 이거 참 부끄럽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사실….”
“난 관심 없소. 아이린 아가씨에 대해선….”
“….”
“…. 일하러 왔으니 이제 일합시다.”
“예, 위원님. 결례하였습니다.”
한율이 연초를 끄며 일어나자 즉각 따라 일어나는 루카스의 날카로운 시선이 한율의 등에 꽂혔다. 거짓말은 잘 못하는군…. 그래선 여기서 살아남기가 힘들 텐데….
정례의회는 열릴 때가 아니었지만 핫산은 집무실에 와 있었다. 보고서를 읽어보고 결재를 하고, 지방에서 올라온 여러 사안들도 검토해야 했다. 비서관은 옆에 서서 그가 말하는 자료들을 정리하며 일을 돕고 있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예.”
“연초부터 정신이 없네, 아주…. 자네도 나와 있었구먼.”
“비어텐 지방 교량설계 업체 문제로 나오셨나 보군요.”
“그런 지방 건설 문제는 지방 행정부에서 해줘야 하는데…. 에이 참…. 핀 어르신이 만들어 놓으신 건 좋은데 제대로 시행이 안 되니 이거 총리만 정신없네.”
“중앙이 그래서 바쁜 거지요…. 지방에선 아마 우리가 노닥거리고 있다고 욕만 실컷 할 겁니다?”
“하하하…! 그럴 거야. 나도 지방 행정부에 있을 땐 욕 많이 했었으니까.”
“아침 일찍 나오셨을 텐데 일 마치면 들어가 쉬시지 웬일이십니까?”
“아까 들어가는 길에 소식을 들었는데, 미키네오스 사신단이 어제 국경을 넘었다더구먼. 바루나가 드디어 전쟁 체제로 돌입하려는 모양이야.”
“사신단이 어제요?”
“음. 도착하면 비정례의회라도 열어야겠어. 행정부도 소집하고.”
“아니, 칙서 하나면 될 일을 뭔 사신단까지 보낸답니까? 어차피 이번에는 보르틴 연합회 회의소집이 이유일 텐데….”
“그만큼 신경을 쓰는 거지. 성의를 보여줘야 할 게 아닌가. 최대한 끌어 모으려면….”
“참 여러 가지로 곤란하게 만드는군요.”
“그러게나 말일세….”
한숨을 푸욱 내쉬던 기즈는 뭔가를 찾는 듯 문서를 뒤지는 핫산을 잠시 쳐다보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 시간 괜찮으면 같이 오후에 어딜 좀 가자고 하려고 했더니 안되겠구먼. 핫산은 어림없다는 듯 문서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손을 부지런히 놀리며, 안됩니다~. 제가 좀 많이 바빠서요. 누가 총리 자리에 덜컥 앉아버리는 바람에….
“이 사람이…, 여당 대표가 왜 바쁜지 이제 좀 알겠나?”
“총리가 되면 잊어버릴 겁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쳇…. 야박하긴…. 나 가네. 나오지 말게.”
“예~.”
해가 지고 촛불을 켜고 나고서도 한참이 지나서야 핫산은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종일 문서들을 붙들고 씨름을 했더니 눈이 욱신거렸다. 마차 안에서 눈을 감고 잠시 졸던 그는 먼저 씻기부터 하고 싶었다.
“조금 늦었네요.”
“어. 좀 일이 많아서…. 목욕물 좀 준비해 줘. 일단 씻어야겠어.”
“예, 의원님.”
“여보.”
“어. …. 왜…?”
집사에게 목욕물을 부탁하던 핫산은 부인의 표정을 보고는 할 말이 있는 듯하여 일단 목욕 준비를 중단시켰다. 부인은 응접실로 그를 안내했다.
“… ….”
“… ….”
한율은 찾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 역시 시찰 때문에 분주한 모양이었다.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은 핫산은 전에 말했던 것을 알리러 왔음을 알고는 말없이 한율의 이야기가 나오길 기다렸다. 이 날은 엄마도 아이린도 조용히 앉아 그의 말을 기다렸다.
“먼저…. 집무실로 찾아뵙지 않고 여기 온 건. 아이린 아가씨가 없는 데서 의원님께만 말씀드리는 것이 아가씨께 결례라고 생각해서였습니다.”
“…. 잘 하셨습니다.”
“….”
그리고 잠시 침묵이 일어났다. 아이린은 그의 입에서 제발 가겠다는 말만 나오지 않기를 바라며 눈을 감고 있었고, 엄마는 그런 딸의 손을 잡아주었다.
“…. 저를 보병으로 해서 일반 병사로 넣어주십시오. 연합군에 보낼 부대에 말입니다. 미키네오스로 가서, 거기서 미키네오스 군대로 재편성을 받든지 뭐…, 어떻게든 거기서 소속을 옮기게끔 처리를 해 주셨으면 합니다.”
“…!!”
“…!!!”
“한율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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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었습니다. 추석은 잘들 보내셨는지요.
전 연휴를 무척 싫어하는지라...;; 몹시 괴로운 시간이었습니다. 일도 못하고..
글도 쓸 수 없고, 집에 가면 책도 보기가 힘들거든요. 저만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 집에서 살아 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그 건물이 좀 불편하더군요. 그래서
뭘 해도 집중도 안 되고 잠도 잘 안 옵니다.;;
기온이 뚝~ 떨어졌슴다. 감기들 조심하시고.. 담번엔 늦지 않도록 합져~.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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