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튿날 열린 정무회의에선 전쟁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론도 산맥 기슭에서, 그것도 마도들의 출현이 거의 없는 산맥의 끄트머리에서 수천의 마도들이 습격하여 호위대가 전멸을 하고, 대륙 전역의 귀환자들 일행이 일부 피해를 입었다고 하니, 보복전을 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압도적이었다. 게다가 개국 공신가문의 후예인 정무대신의 유고는 정벌론에 압도적인 무게를 달아주었다.
“그런데….”
“무슨 일인가?”
“잉그라드의 개입은 어떻게 봐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그 점이라면 트레제게 경께서는 염려 안하셔도 됩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좋은 일이면 좋은 일이었지, 나쁜 일은 아닙니다.”
“어째서 그런가…?”
기다렸다는 듯 말을 되받아내는 재무대신에게 바루나는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그를 응시했다. 이미 공주에게서 들었던 언질에 재무대신은 탄력을 받은 상태, 거침없이 말이 흘러나왔다.
“잉그라드 황실 직속부대가 거기 나타났다면, 그건 분명 일행에 황족 중의 한 명이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적어도 황태자 아니면 황녀 정도는 되겠지요. 그렇다면 황족의 안위가 마도들에게 위협을 당했다고 해보십시오.”
“잉그라드로서는 전쟁에 개입할 명분이 생기는 거로군…!”
신음하듯 하는 맞장구였지만 반색이 역력한 목소리, 궁정대신은 국왕을 향해 당장 잉그라드 황실로 사신을 보내야 한다고 주청했다. 그리고 국왕의 입가에 아무도 모르는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이런 멍청한 놈들…!!!”
쨍그랑 소리가 나며 사뇰의 머리에서 피가 흘렀다. 보고를 받은 레이네가 술잔을 집어던진 탓이었다. 그녀는 얼굴이 붉게 달아오를 정도로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듯 식식거리며 괜스레 침대보를 걷어찼다.
“그 말을 저희들 입으로 해서 어쩌자는 거야!!”
분을 어떻게 삭여야 될지 몰라 어쩔 줄 모르는 듯 그녀는 일어나서 방 안을 바삐 어슬렁거렸다. 손톱을 잘근잘근 씹는 그녀의 표정이 엉망이 되어 있었다.
“제 무덤을 파는군…, 어리석은 놈들….”
“당장 그 자들을 치진 않으실 테지요.”
“아직은….”
기분이 좋아보이는 바루나, 그러나 레이네는 엉망이 되어 있었다. 르로아가 찾아왔지만 그녀는 돌아누운 채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있었다. 좋은 일이 있었다며 엉덩이 부근의 치마를 걷어올리는 손을 사납게 찰싹 때리는 레이네, 르로아는 의아한 얼굴로 침대에 기대 앉았다.
“왜 그러시오, 공주…?”
레이네는 독살스러운 눈으로 홱 돌아보았다. 움찔하는 르로아는 자신이 뭘 잘못했나 하는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고만 있었고, 이어서 레이네의 뾰족한 호통소리가 후원을 울려댔다.
“좋은 일은 대체 뭐가 좋은 일이란 말이죠?! 어떻게 해서든지 그 능구렁이가 잉그라드 개입을 먼저 말하게 했어야지요!!”
“…, 하하…, 사소한 문제를 가지고 신경쓰는군. 누가 먼저 말했든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입니까? 어차피 이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선 잉그라드의 힘이 필요한 상황이니까….”
“그 후에는요?”
“…?”
“전쟁 후에는? 잉그라드 황실 친위대가 어떤 군사들인지 몰라요? 2천명 병력으로 2만 대군하고 붙어도 전사자 하나 생기지 않는 귀신들이에요. 그런 자들을 국내로 끌어들이자고 한 사람을 부왕이 어떻게 처리할 것 같은데요?”
“…!”
“그가 어떤 사람인지 몰라요? 신하들을 찍어누르고 누르다 못해 고개를 든다 싶으면 목부터 베는 사람인 거 모르냐고요!! 구실을 만들어줘서 대체 어쩌자는 거야, 이 미련한 인간아!!!”
발작적으로 소리치는 레이네의 말에 르로아는 뭔가에 한 대 얻어맞은 듯 멍한 얼굴이었다. 듣고보니 그랬다. 오래 전 일이었지만 교총의 권위를 세우는 과정에서 총장 직속의 성기사 부대 편성을 주장하고 직접 이끌기까지 했던 친형을, 교총의 명분으로 나라를 집어삼키려 든다며 반역의 죄를 뒤집어 씌우고 처형했던 것이 바로 국왕 바루나였다.
“제 형도 그래서 죽었는데, 신하인들 오죽할까.”
“이보시오, 공주. 나 좀 살려주시오. 뭔가 방도가 없겠소?”
다급해진 르로아가 애원하듯 발을 붙잡고 묻자 그녀는 발을 슬쩍 빼며 나 몰라라 하는 얼굴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시중 사뇰이 들고 있던 술잔을 들고, 담뱃대를 받아 천천히 한 모금 깊이 빨아들였다가 연기를 뿜는 행동이 느릿하게 이어졌다. 이제 너한테는 볼 일 없어, 라고 말하듯한 그녀의 행동에 르로아는 화가 치밀어올랐다.
“일단은 복지부동. 꼼짝도 하지 말고 납작 엎드려 있어요.”
“고… 공주…!”
“방법을 찾아볼 테니까. 내가 사람을 보낼 때까진 가만히 있으라구요.”
“….”
주도권을 완전히 빼앗긴 기분이었다. 그저 알겠다며 물러나는 수 밖에. 공주는 물끄러미 넋나간 얼굴로 침대에서 일어서는 그를 쳐다보다가 담뱃대와 술잔을 놓고 다가가 그의 등을 안았다.
“너무 불안해하지 말아요. 내가 당신을 지켜줄게요.”
표독스러운 얼굴에서 부드러운 말투가 흘러나왔다. 등에 묻힌 그녀의 얼굴을 볼 리 없는 르로아의 얼굴에도 조금 자신감이 되찾아왔다. 공주가 내 편이다. 그래, 걱정할 것은 없다. 는 얼굴이었다.
“당신한텐 손끝 하나 대지 못하게 할 거야.”
바이마샤르.
개국 원년부터 공화정의 형태를 유지해온 유일의 국가로, 미키네오스의 남쪽에 국경을 마주하고 자리해 있다. 크지 않은 나라로 시작했지만 개국 초부터 상업을 장려하여 전쟁이 아닌 부동산 매매를 통해 주로 영토 확장을 했고, 지금은 미키네오스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넓은 영토를 지닌, 보르틴 대륙의 강국 중 하나로 떠올라 있다. 그러나 론도 산맥을 서쪽에 두고 있는 탓에 바다를 통한 교역만이 가능할 뿐 육로를 통해서는 거의 타국과의 교역을 하지 못하고 있었고, 이는 보르틴 대륙의 다른 국가들도 별반 사정이 다르지 않았다.
수도 시락의 의회당 뒤뜰 언덕에서는 한 처녀가 무예 수련에 열중하고 있었다. 머리는 길지 않고 눈이 서글서글하니 눈썹이 치켜 올라가 매서운 인상을 가지고 있는 이 처녀는 의회의 여당 최고의원인 핫산 바슈미르의 수양딸 아로사였다. 올해로 스물 다섯이 된 그녀는 10년이 넘도록 하루도 빠짐없이 이렇게 무예를 익혀왔다. 언젠가 멸망한 자신의 모국을 위한 복수의 기회가 올 것임을 기대하면서.
후우~. 온 몸이 땀에 절은 아로사는 수련을 멈추고 앉아 책을 집어 들었다. 책의 겉표지에는 그녀의 모국인 환국의 표식이 새겨져 있었다.
“아로사! 아로사~!”
“?”
언덕 아래에서 나자르가 그녀를 부르며 다가오고 있었다. 뭔가 반가운 소식이라도 있는 듯 나자르는 희색을 띤 채 언덕을 올라오고 있었다.
“아슈람으로 갔던 미키네오스 사절단이 지금 성안으로 들어오고 있대!”
“어, 정말?”
십만 명의 군중들이 모일 수 있는 의회 앞 광장에는 벌써 융베리를 필두로 한 사절단과 수만 명의 귀환자들, 그리고 금빛의 천오백 군사가 들어와 자리하고 있었다. 이미 론지나아 근처에서 있었던 마도들과의 전투를 전해들은 터라, 사람들은 머나먼 땅에서 온 전설같은 군대를 구경하기 위해 구름처럼 모여들어 웅성거리고 있었다.
“한 번도 진 적이 없다면서?”
“싸움 시작할 때 잉그라드 만세~ 황제폐하 만세~ 한다던데.”
“멋있다~. 그런데 저거 진짜 금일까?”
“설마…, 저걸 다 금으로 하면 돈이 얼만데….”
“야, 잉그라드 황제면 그게 돈이겠어?”
“잉그라드 황제는 금이 어디서 솟아난대?”
총리인 기즈와 핫산, 그리고 야당 대표 토메즈 세츠페나스가 직접 나와서 그들을 맞이했다. 나라를 대표하는 세 명의 거두들은 융베리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명망만으로 뵙던 총장 예하를 이렇게 직접 뵈니, 무한한 영광입니다.”
“하하하, 이 늙은이를 민망하게 하지 마시지요, 세 분. 이미 이 곳을 떠났던 지 오래인 사람입니다.”
“아직도 총장 예하의 저술들은 이 나라의 많은 젊은이들에게 지혜와 안목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저 역시도 그렇고요.”
“그만하십시다, 기즈 총리.”
민망한 낯색을 떠올리던 융베리가 옆에 서 있는 장대한 여자에게 눈을 슬쩍 돌리자 셋은 또한 동시에 그녀를 보고 정중하게 예의를 갖췄다.
“말씀을 전해들었습니다. 대국인 잉그라드의 황녀께서 바이마샤르를 방문하시다니, 무한한 영광입니다.”
“아닙니다. 지나는 길에 폐를 끼칠 생각은 없었으나, 사정이 그리 되었습니다. 환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무슨 말씀을…, 우리 바이마샤르로 오는 귀환자들도 귀국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저 군사들인 모양이군요.”
“예, 그렇지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수만의 귀환자들을 둘러싸고 진영을 갖춘 만샤르차크와 나바스암바라를 보는 기즈의 눈에 감탄의 기색이 역력했다. 특히 커다란 말 위에 올라타 거대한 창검을 들고 사방경계를 하는 만샤르차크의 위용이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핫산은 융베리의 뒤에 선 사절단을 향해 다시 인사를 건넸다.
“외무차장이시군요. 레몽 도메네크 경의 변고를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얼마나 상심이 크십니까?”
“그렇게 됐습니다. 그래도 전임 총장 예하께서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얼마를 머무르시건 이곳에서라도 편히 쉬다 가시지요. 성의껏 모시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몇 차례에 걸쳐 의례적인 인사와 위로가 오고 갔다. 토메즈가 의회당 객사로 안내하겠다며 그들을 인도했다.
“안으로 드시지요. 환영 파티를 열 생각입니다만….”
“아니 무슨….”
“황녀께서도 함께 자리를 빛내주셨으면 합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리타는 ‘파티’라는 말에 눈을 반짝 빛냈다. 아슈람에서 수행을 했다고는 하지만, 그녀는 아직 스무 살도 되지 않은 소녀였다. 게다가 처음 보는 곳에서 파티라니, 싫어할 까닭이 없었다. 활짝 웃으면서 좋아하는 그녀는 장대한 체격에 맞지 않게 발랄한 가색이었다.
“어떤 사람들인가요, 저들은…?”
객사에 들어서자마자 리타가 묻자 융베리는 담담한 신색으로 질문에 응했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겠습니까….”
“위험해 보이진 않던데요.”
“알고 계시는군요, 전하.”
둘은 함께 소리내어 웃었다.
“바이마샤르는 그래도 안정된 국가입니다. 개국 초부터 공화정이었고, 무역과 내수 상업에 많이 치중을 했지요. 군사력은 보르틴 연합체 중에서 중간 정도지만, 국력만큼은 무시 못할 나라입니다. 20년 전의 큰 전쟁에서 피해를 입긴 했지만 2백년 간 쌓아놓은 국력이 그 정도로 무너질 리는 없었지요. 아마도 이 대륙에서 가장 회복이 빨랐을 겁니다.”
“쓸데없이 다른 나라를 침범하거나 하진 않겠군요.”
“음모를 꾸며서 괜한 수를 쓰거나 할 필요도 없지요.”
여당 최고의원인 핫산은 총리와 함께 집무실에 있었다. 환영 파티를 연다고는 해도, 어쨌든 나랏일을 하긴 해야 했다. 비서관조차 내보낸 그들은 레몽의 죽음이 어떤 변화를 가져올 지 고심하고 있었다.
“어쩌면 귀환자들을 위해서 책정해 둔 예산을 모두 군자금으로 보내야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루나 국왕이라면 틀림없이 그러려고 들겠지….”
고개를 끄덕이는 총리. 명분으로서도 바루나가 전쟁을 일으키려 든다면 거기에 말려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군사는 얼마나 보내야 할까…?”
“글쎄요…. 아무래도 제가 보기엔 단순한 마도 정벌이 아니라, 론도 산맥을 집어삼키려 들 것 같은데….”
“그건 좀 무리가 아닐까?”
“레몽 도메네크 경은 미키네오스의 개국 공신가문의 가주였습니다. 왕가나 다름없다고요. 공작의 칭호를 가진 실세 중의 실세가 죽었으니, 바루나로서는 론도 정벌전 정도를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음…, 우리만으로 가능하겠어…?”
잠시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론도 정벌전. 20년 전의 전쟁에서 대륙 전체를 초토화시키다시피 했던 베슬리 얀 반 마르크 로이나르가 군사를 거두어들이며 자리한, 보르틴 대륙의 서부에서 북부에 이르는 거대한 산맥. 험준한 지형과 철새들조차 길을 잃어 산중에 떨어져 죽는다는 그 곳을 정벌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해 보지 않았다. 기즈로서는 그것이 가능해 보이지 않았다.
“잉그라드가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들이 개입할까? 게다가 잉그라드 황제들은 황족이 위협을 당했다고 해서 응징을 하러 나서는 그런 나라가 아닐세. 세습제이면서도 황족, 특히 황녀처럼 다음 황위를 이어받을 후계자들은 벼랑 끝으로 내모는 전통이 있잖은가.”
“만샤르차크와 나바스암바라라면 천오백만으로도 우리 연합체의 수만 대군과 맞먹습니다. 저들만으로도 성 몇 개는 충분히 빼앗을 수 있을 겁니다.”
“그래도 저들이 전쟁에 참전한다는 보장이 없질 않은가.”
핫산은 눈을 굴리며 씩 하고 웃어보였다.
“바루나 국왕이라면 해결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워낙 선수이고 하니….”
귀환자들과 함께 의회당 광장에서 막사를 치고 아무데나 퍼질러 앉아 연초를 피우고 있던 한율은 별안간 찾아온 의회의 서기관으로부터 파티에 참석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잠시 멍해있었다.
“나요?”
“예. 총리각하께선 대 잉그라드 제국 황녀 전하의 요청을 받아들여, 귀환자들을 지키는 데 용맹하게 싸우신 귀공의 공로에 직접 감사의 뜻을 전하고자 하십니다.”
“엄….”
사실은 나 때문에 그랬던 건데…. 한율은 좀 멋쩍어져서 머리를 긁으며 몸을 일으켰다. 가시지요. 뭐…, 그럽시다. 맛있는 것 좀 얻어먹지. 싸우느라 힘도 뺐는데…. 내색하지 않은 채 따라나서던 한율이 서기관을 불러세웠다.
“저기요.”
“예.”
“파티장…, 이거 괜찮은 거요?”
담뱃대를 흔들어보이는 한율. 결국 갖고 들어가진 못했지만, 연초를 피울 수는 있었다. 파티가 시작되면서 시중들이 술과 음식, 그리고 연초를 들고 다니며 초대된 사람들에게 일일이 묻고 다니는 꼴이 좀 우스워보이긴 했지만, 그는 일단 술보다 연초부터 집어들었다.
“흠…. 이거 좀 신기한데…?”
“당신 같은 골초는 처음 봐요.”
“으앗~!”
언제든 그를 화들짝 놀라게 만드는 목소리, 리타였다. 거 좀 안 놀래키고 등장하는 요령은 없나…? 어떻게 등장해야 안 놀라는데요? 툴툴거리던 한율은 지지 않고 되받아치는 리타의 말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연초를 뻑뻑 빨아댔다.
“… ….”
“… ….”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리타를 한율은 마주 훑어보았다. 뭘 쳐다보나…? 한참을 말도 없이 그렇게 보고 있자 한율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먼저 말문을 열었다. 나한테 뭐 묻었수? 뭘 그렇게 쳐다보고 있는 거요?
“이렇게 멀끔하게 차려입으니까…, 당신도 꽤 괜찮은데요?”
“…원 참….”
별 소릴 다 듣겠다는 얼굴로 다시 연초를 뻑뻑 빨아댄 그는 그녀를 향해 이봐요, 황녀 전하. 내가 아무리 당신한테 함부로 못한다고 해도….
“그 칼….”
그의 말을 딱 가로막았다. 리타의 시선이 닿아있는 곳은 그의 허리와 등에 찬 다섯 자루의 검이었다. 안 차고 다닐 수는 없어 허름한 주머니에 넣어 다니기가 곤란했으나, 검집에 묶어 둔 매듭이 단단했다.
“특히 허리에 매어둔 건 보통 칼이 아니군요.”
“….”
한율은 연초를 껐다.
역시 이 여자는 뭔가를 알고 있다.
“난 그대를 우군으로 만들고 싶어요.”
“…. 난 누구와도 함께할 수 없는 사람이요.”
“환인의 권능으로 하늘과 땅의 이치를 담은 검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 ….”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설마 모든 걸 꿰뚫어 보는 도깨비 같은 여자는 아니겠지. 한율은 머리를 굴려봤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틀림없이 자신보다는 높은 경지에 이르러 있는 사람이긴 했다.
“처음 봤구려.”
…?
“내 스승과 같은 경지까지 오른 사람 말입니다. 많이 봐줘도 스무 살 어림인 것 같은데, 대단한 사람이오, 그대는….”
“자신의 숙명과 정면으로 맞서는 사람만 할까요.”
추켜세워주는 듯한 말이었지만, 딱히 그렇게 들리지는 않았다.
“하나 잘못 알고 있는 게 있소.”
“무엇 말인가요?”
“환인의 권능은 고작 칼자루에 담겨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런 정신을 담아 만든 병장기라고 해도, 어디까지나 칼은 칼이오. 한갓 예리한 병장기일 뿐이지요.”
“하지만 그 칼이 그대의 신권을….”
“이보시오, 아가씨.”
이번엔 리타의 말을 한율이 가로막았다. 단호하고 묵직한 가로막힘에 리타는 저도 모르게 어깨가 살짝 움츠러들었다.
“숙명과 맞서 싸우는 건 바로 의지요. 검에 담긴 정신은 단지 그 의지를 잊지 않기 위한 매개물에 불과한 겁니다.”
그의 눈이 연회장 가운데, 사람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이야기를 나누는 곳으로 향했다.
“웃고 떠드는 저 가운데서도 속으로는 우는 자들도 있을 테고, 화내는 자들, 즐거워하는 자들, 또 어떤 이는 복수심을 불태우는 사람도 있을 거요. 그대의 경지가 그 아귀다툼을 담아내고 아우를 수 있을 때, 나는 기꺼이 그대를 위해서 칼을 뽑을 테지만. 아직은 아닙니다.”
한 방 제대로 먹은 격이었다. 대꾸도 못하고 서 있는 리타를 뒤로 하고, 한율은 술잔을 기울인 뒤 사람들이 모여드는 연회장의 가운데로 향했다.
“저 사람이라며?”
“단신으로 달려들어서 방어선을 지켰다던데, 사실일까요?”
“전장에서의 무훈이란 건 항상 부풀려지기 마련이지. 미련한 사람 같으니….”
“없는 얘기가 나왔겠습니까, 그래도….”
“멋있다, 그치…?”
“넌 저게 멋있어 보이니? 무식하게 크기만 하고, 잘 생긴 것도 아니네 뭐.”
아닌 게 아니라 한율은 정말로 눈에 띌 만큼 덩치가 컸다. 그가 가운데로 들어서자 몸에 달려있는 다섯 자루의 검들도 함께 눈에 띄었다. 연회장에서 칼을 차고 있는 거야 군인들이라면 누구라도 그렇게 하고 있었지만, 그 검의 모양새도 완전히 색다른 것이었으니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눈길이 그 곳으로 집중되고 있었다.
“그런데 저 사람…, 저 검들 말야….”
“어, 나도 보고 있어….”
그 중에서도 한율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 두 쌍의 눈길이 있었으니, 아로사와 나자르였다. 그보다는 어렸지만, 그들도 어렸을 적의 기억은 남아있는 이들이었고, 또한 바이마샤르에 살면서도 모국을 잊지 않은 이들이었다. 그러니 너무나 뚜렷하게 다섯 자루의 검을, 그것도 그 형식에 정확히 맞춰서 차고 있는 한율의 모습이 눈에 강렬하게 꽂힐 수밖에 없었다.
“귀공께서 단신으로 수백의 마도들을 제압한 그 기사분이시로군요.”
“아…, 예. 뭐 제압했다기보다….”
“어느 군에 소속되어 계시는지…?”
“혹시 소속이 없으시다면 이 곳에서….”
“어허…, 성급하기는.”
한율은 무척 곤란해하고 있었다. 바이마샤르에서 세도를 이루며 살고 있는 많은 귀족들이 그에게 다가와 대답할 틈이 없을 만큼 말을 걸어왔으니, 항상 혼자 떠돌며 한적하게 지내던 그에게 익숙치 않은 일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런 그를 멀찍이서 지켜보던 리타에게 융베리가 다가갔다.
“이제 저 젊은이는 완전히 노출되어 버렸습니다.”
“…, 무슨 의도가 있으셨던 건가요?”
“그야 미키네오스 국왕이 함부로 어쩌지 못하게 하시려는 거였겠지요.”
뒤에서 들리는 말소리였다. 돌아보는 융베리의 눈에 반색이 가득찼다. 간결하게 차려입은 복색이 화려하진 않지만 기품이 있어 보였고, 언뜻 완고해보이는 인상이었지만 반백의 머리카락과 눈가의 주름이 그런 것들을 반감시켜 주는 장년의 남자였다.
“핀…? 핀이 아닌가!”
“뭐?”
“핀 어르신이 오셨어?”
“어디? 어디에?”
융베리의 목소리는 다소 컸다. 연회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그 말에 웅성거리며 입구쪽으로 일시에 시선을 집중시켰다. 바이마샤르의 전임 총리, 세 차례에 걸쳐 총리를 연임하며 18년간 무너진 국력을 회복시키고 법제를 정비하고 강화하여 내부적 혼란을 잠식시킨 인물이었다. 자신에게 몰려 있던 귀족들의 기세(?)에 난감해하던 한율은 이순간 자신을 구해준 사람이 누군가 싶어 멀뚱한 얼굴로 입구 쪽으로 몰려드는 사람들을 쳐다봤다. 대단한 사람인가보네…, 한 번에 절루 다 몰리잖아…?
“우리 공화국의 전임 총리셨지요.”
곁에 다가서며 말하는 것은 여당 최고의원 핫산이었다.
“전후에 있었던 모든 혼란을 안정시킨 훌륭한 분입니다. 서로 갈라져서 정치 싸움이나 일삼던 의회를 안정시키고 법을 개편하고 경제적으로도 부흥시키고…, 아마 총리직에 대한 연임제한이 없었다면 지금도 저 분이 총리로 이 자리에 계셨을 겁니다.”
“아하….”
“실례하겠습니다.”
“아, 예….”
핫산이 가고 난 뒤 한율은 다시 연초를 하나 들어 입에 물면서 인파(?)속에 갇혀 보이지 않는 존경받는 정치인을 상상해봤다. 햐…, 저런 사람도 있긴 있구나, 정말로…. 우리 단군 어르신쯤 되려나….
“단군 어르신이라면….”
신음처럼 들리는 음성이었다. 옆에 다가선 스물 너댓쯤 되어 보이는 아가씨들. 한율은 약간 경직되었다. 이건 대체 뭔 일이야. 하는 얼굴이었다. 흑갈색의 머리카락과 금빛 눈동자, 전사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눈이 부리부리한 다른 한쪽의 처녀는 그와 비슷하지만 조금은 더 맑은 황적색의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
“환국에서…. 환국의 사무랑님…?”
사무랑은 환국에서 무예 수련을 위해 각 지역에 일정하게 마련된 수련장으로 모여든 남녀를 일컫는 말이었다. 오래간만에 듣는 단어였다. 그를 쳐다보는 아로사와 나자르는 자신들이 울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는 듯했다. 대체 뭐야, 이 동네는…. 망한 나라 사람들을 줄줄이 만나는구만. 하는 얼굴의 한율은 크게 격동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놀라운 일입니다, 하하하하…!!”
핫산은 자신의 수양딸들과 한율이 동족 출신임을 알고는 그들을 위해 연회장 밖에 따로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한율은 그런 자리가 오히려 더 어색하고 불편했지만 딱히 거절할 명분도 없었고, 무엇보다 아로사와 나자르의 태도가 너무나 절절하여 거절을 하기도 미안할 정도였다. 억지로가 되었든 어쨌든 일단 자리한 김에 찜찜한 기색을 내비칠 수는 없었다.
“처음에는 이 사람도 귀공의 검 다섯 자루를 보고 혹시나 했습니다만….”
“아, 예….”
“여기 아로사는 무척이나 모국을 자랑스러워합니다. 가끔은 아비인 제가 섭섭하기도 하답니다.”
“아버지…!”
핫산은 다시 웃음을 터뜨리며 한율에게 딱히 갈 곳이 없다면 얼마든지 머물러도 좋다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그럼 연회장으로 가지요. 젊은 사람들은 젊은 사람들끼리 어울려야지요. 그는 진정 정치를 하는 사람으로 보였다. 진심인지 아닌지 그런 것은 전혀 알 길이 없었고, 겉으로 사람을 대하는 태도 자체는 무척 호감을 갖게끔 했다.
“좋은 아버님을 두셨습니다.”
“말씀 낮추십시오, 사무랑님.”
“그래요. 편하게 하셔도 됩니다.”
“엄…, 뭐…, 그, 그럴까….”
바슈미르의 친딸인 아이린까지 함께 한 자리였다. 남자가 저 혼자 뿐이니 한율은 좀 많이 어색한 모양이었다. 그런 모양새를 보면서 리타와 융베리가 연회장 안에 있었다.
“전하께선 어쩌실 겁니까?”
“뭘 말인가요?”
“바이마샤르는 전하의 본국과도 교역이 많은 곳입니다. 돌아가시든 어떻든, 미키네오스보다는 여기 계시는 편이 더 안전할 텐데요.”
“그건 구루님도 마찬가지 아니던가요?”
“하하….”
“대단하세요. 바루나 국왕이 어떤 사람인지 알면서도….”
“그렇게…, 칭찬받을 일이 아닙니다. 전하.”
융베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조금은 묵직한 웃음을 지었다.
“저 자가 이대로 미키네오스까지 가게 되면 틀림없이 바루나는 그를 전쟁의 전면에 내세우려 들 겁니다. 일단 그가 피를 보게 되면 걷잡을 수 없는 학살이 일어날 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그것은 전하께서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 ….”
“제가 그를 여기서 노출시킨 건…, 비단 그가 엄청난 살겁을 일으키지 않게끔 하려는 것만은 아닙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도 실은 두렵습니다.”
“구루님….”
“남들이 구세주 교리의 정립자다, 석학이다 떠들어대도…. 전 아직도 신은 인간을 버리지 않았다고 믿고 싶습니다. 구세주의 교리처럼 신은 인간을 사랑하고, 그래서 모든 인간을 자식처럼 여기고 있다고, 그런 제 바람이 눈앞에서 산산히 깨어져버릴까, 그것이 두렵기도 했습니다.”
“….”
“전하께선 이 늙은이를 어리석다 여기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닙니다. 무슨 말씀을….”
“그래도 저는 그 바람이 현실이 되었으면 합니다. 냉정하고 무자비한 신보다는…, 그래도 종교란 역시 위안을 얻는 곳이니까요. 사람은 약하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들릴 듯 말 듯한 대꾸가 리타의 입안에서 감돌았다. 잠시 둘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주변에서 연회 분위기가 무르익어가고 있었지만, 둘은 완전히 거기에서 떨어져 나온 사람들 같았다. 리타가 그 침묵을 먼저 깼다.
“난 미키네오스로 갈 겁니다.”
“…, 전하.”
“전에 병력이 너무 많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었지요.”
“아, 예. 혹시 그것과 관련이 있습니까?”
“예. 시락 성안으로 들어오기 직전에 전대장이 폐하의 밀지를 전달하더군요.”
“그렇습니까….”
연회가 끝나고 거처로 돌아온 리타는 융베리에게 황제의 밀지와 함께 받은 밀부를 꺼내어 보였다. 이게…, 뭡니까…?
“황제의 군권을 상징하는 밀부입니다.”
“황제의 군권…!!”
그것은 대단한 의미가 있었다.
“이 밀부는 그 중에서도 황실 친위대를 통솔할 수 있는 표식입니다. 다시 말하면 잉그라드의 최정예 부대에 대한 절대권한이죠.”
“그럼 본국에서….”
“사정은 말씀 안하셨습니다만, 무슨 일이 생겨도 생겼다는 뜻입니다. 아니면 생기려고 한다거나…. 밀서에서 말씀하시기를, 이 밀부를 임의대로 쓸 수 있도록 윤허할 것이나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시더군요. 바이마샤르에서 천오백 군사와 함께 귀국할 것인지, 아니면 좀 더 깊숙이 들어가서 험지를 살펴보고 올 것인지….”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내가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씨익 웃는 리타, 그녀는 이미 쉬이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거나 진배없었다. 융베리도 고개를 끄덕이며 웃을 뿐이었다. 역시 대국의 황녀쯤 되실 분입니다.
“짓궂은 분이십니다, 폐하께선….”
“강요로군요.”
“삼백만의 황군에 대한 통솔권을 모조리 넘겨주시곤 절더러 그냥 올 지 돌아서 올 지 선택을 하라니…, 모처럼 머리를 쓰신 듯한데. 차라리 그냥 멀리 돌아서 들어오라고 말씀을 하시든지요.”
“삼백만…!!”
입이 떡 벌어진 융베리를 보고 리타는 어? 이 노인네 몰랐나? 하는 눈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르고 계셨습니까? 아니…, 삼백만이면…. 그는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있었다. 황제의 친위대가 삼백만이면 대체 잉그라드의 군사력 전체는 얼마나 된다는 것인지.
“보르틴 연합체가 총력을 다해도 그만큼은….”
“그럴 테지요. 모르셨군요.”
백수에 가까운 융베리의 늙은 이마에 식은땀이 다 고일 지경이었다. 론지니아에서 보여준 만샤르차크와 나바스암바라의 위력은 그가 일찍이 본 적이 없는 것들이었다. 단 1천 5백의 군사로 그 정도라면 황실 친위대만으로도 보르틴 대륙 전체를 쓸어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잉그라드의 군사편제는 폐하의 직할대 외에도 황도방위사령부, 조정근위대, 그리고 제후들의 직할대와 그 산하에 있는 국경방위대까지 통합합니다. 다 합치면 7천만 정도 됩니다.”
잉그라드의 국력이 보르틴 대륙 전체를 합쳐도 맞상대를 할 수 있을 정도라는 건 그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잉그라드의 8백년 역사와 그 안에 녹아들어 있는 이념, 문화 등에 대해선 연구해본 바 있었으나 그들의 군사력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아는 바는 없었다. 그저 그 광대한 대륙을 다스리고 있으니 대단하겠다 싶은 정도였다. 그런데 7천만이라니. 상식적으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수치였다.
“….”
“난 구루님과 함께 미키네오스로 갈 것입니다. 위험이 많은 곳일수록 배우는 게 많은 곳 아니겠습니까?”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리타를 보며 융베리는 이미 그녀가 대국의 황제로서 갖춰야 할 배포와 의기가 충분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상한 검사가 한 명 있다고 들었는데…, 혹시 아는 바 없어요?”
“이상한 검사라니요?”
내사부장은 짐짓 모른 척했지만, 그런 것이 통할 리 없었다. 이미 나름의 정보망을 구축하고 있는 공주에게 정보를 주는 것이 자신뿐이 아님이야 자명한 일이었다. 레이네는 시선을 슬쩍 그에게로 던졌다.
“정말 몰라요?”
“그…게….”
레이네는 술잔을 빙글빙글 돌리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론지니아 전투에서 단신으로 수백의 마도들을 막아낸 전사가 있다고 하던데….”
내사부장의 얼굴이 긴장감으로 굳어졌다. 그 일을 아는 사람은 국왕과 정보 담당관 중에서도 극소수가 전부였다.
“왜 정보 담당관이 그걸 모를까? 혼자서 수백 명을 막아내는 거야 부풀려진 말이라고 쳐도…, 일단은 굉장한 전사라는 얘긴데….”
“사, 사실이라면 그렇겠지요.”
말까지 더듬는 내사부장의 손, 레이네의 잘록한 허리 능선을 따라 움직이던 손이 얼른 떼어졌다.
“부왕이 대체 무슨 생각일까요? 먹을 수 없는 건 버리는 사람인데…, 그처럼 좋은 물건을 남 줄 사람도 아니고…. 안 그래요?”
“공…공주님…!”
“뭐 일단은…, 두고 봐야죠.”
내사부장은 식은땀마저 뻘뻘 흘리며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그 말대로, 바루나 국왕은 한율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완전히 묻어둔 상태에서 일을 진행시키고 있었다. 워낙 잉그라드의 군세가 막강하고 그들이 보여 준 위력 때문에 크게 알려지진 않았지만, 그가 수백의 마도들을 단신으로 막아냈다는 정보의 진위 여부보다 중요한 것은 바루나에게 있어서의 활용가치였다.
그런 한율이 바이마샤르에서 완전히 드러나 버렸으니, 그를 암암리에 알아보고 활용가치를 재 보려는 바루나의 의도는 완전히 백지화된 셈이었다.
“융베리 원로는 다시 봐야겠군요….”
“으음….”
“괜찮으십니까?”
“…. 어차피 처음부터 계산에 없었던 인물이니 크게 문제될 건 없네.”
병부대신의 말에 별 일 아니라는 듯 선선히 넘기는 바루나였지만 그의 표정은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융베리 이놈, 내 일을 제대로 방해하고 나설 생각인가. 교총의 영역에 들어서자마자…. 라크라오스가 문서 하나를 꺼내놓으며 바루나의 생각을 멈추게 했다.
“말씀하셨던 사안입니다.”
“음….”
제법 두껍게 말린 문서였다. 펼쳐서 읽어내려가던 바루나의 표정이 약간 경직되며 신음처럼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일반 사병보다 정보원이 더 많군 그래….”
“예. 최근 들어서 대폭 늘린 것 같습니다. 운용자금에 대한 부분은 아직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그 놈…공주를 통해서 일단 잠재워 뒀더니 물밑에서 겁도 없이…, 철저하게 조사해봐. 돈줄을 쥐고 있는 놈이니 마음먹고 빼돌린다면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을 걸세.”
“예, 폐하….”
문서를 접어서 책상 아래에 놓는 바루나는 다시 융베리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문제는 그놈인데….”
“학자로서 명망이 드높은 자이긴 하지만, 정치적 술수로 봐도 대단히 유능한 자입니다.”
“유능한 만큼 위험한 놈이기도 하지…, 내게 등을 돌리려고 마음먹었다면 그만큼 상대하기 어려운 적수도 드물다네.”
“재무대신을 활용해 보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아무래도 자금을 쥐고 있는 자이니, 활용할 수만 있다면 그처럼 편리한 사람도 없을 것 같은데….”
“나쁘지 않은 생각일세.”
“자금 운용상황에 대한 조사를 먼저 하도록 하겠습니다.”
바루나는 라크라오스의 말을 가로막았다. 아니지, 아니야…. 그는 잠시 뜸을 들이며 뭔가를 생각하더니 이내 말을 바꾸었다. 운용자금에 대한 것은 조사를 멈추라 명했다.
“폐하, 무슨….”
“아직 그자는 쓸만해. 꽤 유능한 자일세. 기왕에 횡령을 할지도 모른다 치면, 그 돈으로 교총을 섭외하면 되지 않겠나.”
“… 그렇군요.”
국왕의 손이 다시 문서를 꺼내어 근위장에게 향했다.
“공주에게 전하라.”
“그런데….”
“무슨 일인가?”
“잉그라드의 개입은 어떻게 봐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그 점이라면 트레제게 경께서는 염려 안하셔도 됩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좋은 일이면 좋은 일이었지, 나쁜 일은 아닙니다.”
“어째서 그런가…?”
기다렸다는 듯 말을 되받아내는 재무대신에게 바루나는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그를 응시했다. 이미 공주에게서 들었던 언질에 재무대신은 탄력을 받은 상태, 거침없이 말이 흘러나왔다.
“잉그라드 황실 직속부대가 거기 나타났다면, 그건 분명 일행에 황족 중의 한 명이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적어도 황태자 아니면 황녀 정도는 되겠지요. 그렇다면 황족의 안위가 마도들에게 위협을 당했다고 해보십시오.”
“잉그라드로서는 전쟁에 개입할 명분이 생기는 거로군…!”
신음하듯 하는 맞장구였지만 반색이 역력한 목소리, 궁정대신은 국왕을 향해 당장 잉그라드 황실로 사신을 보내야 한다고 주청했다. 그리고 국왕의 입가에 아무도 모르는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이런 멍청한 놈들…!!!”
쨍그랑 소리가 나며 사뇰의 머리에서 피가 흘렀다. 보고를 받은 레이네가 술잔을 집어던진 탓이었다. 그녀는 얼굴이 붉게 달아오를 정도로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듯 식식거리며 괜스레 침대보를 걷어찼다.
“그 말을 저희들 입으로 해서 어쩌자는 거야!!”
분을 어떻게 삭여야 될지 몰라 어쩔 줄 모르는 듯 그녀는 일어나서 방 안을 바삐 어슬렁거렸다. 손톱을 잘근잘근 씹는 그녀의 표정이 엉망이 되어 있었다.
“제 무덤을 파는군…, 어리석은 놈들….”
“당장 그 자들을 치진 않으실 테지요.”
“아직은….”
기분이 좋아보이는 바루나, 그러나 레이네는 엉망이 되어 있었다. 르로아가 찾아왔지만 그녀는 돌아누운 채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있었다. 좋은 일이 있었다며 엉덩이 부근의 치마를 걷어올리는 손을 사납게 찰싹 때리는 레이네, 르로아는 의아한 얼굴로 침대에 기대 앉았다.
“왜 그러시오, 공주…?”
레이네는 독살스러운 눈으로 홱 돌아보았다. 움찔하는 르로아는 자신이 뭘 잘못했나 하는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고만 있었고, 이어서 레이네의 뾰족한 호통소리가 후원을 울려댔다.
“좋은 일은 대체 뭐가 좋은 일이란 말이죠?! 어떻게 해서든지 그 능구렁이가 잉그라드 개입을 먼저 말하게 했어야지요!!”
“…, 하하…, 사소한 문제를 가지고 신경쓰는군. 누가 먼저 말했든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입니까? 어차피 이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선 잉그라드의 힘이 필요한 상황이니까….”
“그 후에는요?”
“…?”
“전쟁 후에는? 잉그라드 황실 친위대가 어떤 군사들인지 몰라요? 2천명 병력으로 2만 대군하고 붙어도 전사자 하나 생기지 않는 귀신들이에요. 그런 자들을 국내로 끌어들이자고 한 사람을 부왕이 어떻게 처리할 것 같은데요?”
“…!”
“그가 어떤 사람인지 몰라요? 신하들을 찍어누르고 누르다 못해 고개를 든다 싶으면 목부터 베는 사람인 거 모르냐고요!! 구실을 만들어줘서 대체 어쩌자는 거야, 이 미련한 인간아!!!”
발작적으로 소리치는 레이네의 말에 르로아는 뭔가에 한 대 얻어맞은 듯 멍한 얼굴이었다. 듣고보니 그랬다. 오래 전 일이었지만 교총의 권위를 세우는 과정에서 총장 직속의 성기사 부대 편성을 주장하고 직접 이끌기까지 했던 친형을, 교총의 명분으로 나라를 집어삼키려 든다며 반역의 죄를 뒤집어 씌우고 처형했던 것이 바로 국왕 바루나였다.
“제 형도 그래서 죽었는데, 신하인들 오죽할까.”
“이보시오, 공주. 나 좀 살려주시오. 뭔가 방도가 없겠소?”
다급해진 르로아가 애원하듯 발을 붙잡고 묻자 그녀는 발을 슬쩍 빼며 나 몰라라 하는 얼굴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시중 사뇰이 들고 있던 술잔을 들고, 담뱃대를 받아 천천히 한 모금 깊이 빨아들였다가 연기를 뿜는 행동이 느릿하게 이어졌다. 이제 너한테는 볼 일 없어, 라고 말하듯한 그녀의 행동에 르로아는 화가 치밀어올랐다.
“일단은 복지부동. 꼼짝도 하지 말고 납작 엎드려 있어요.”
“고… 공주…!”
“방법을 찾아볼 테니까. 내가 사람을 보낼 때까진 가만히 있으라구요.”
“….”
주도권을 완전히 빼앗긴 기분이었다. 그저 알겠다며 물러나는 수 밖에. 공주는 물끄러미 넋나간 얼굴로 침대에서 일어서는 그를 쳐다보다가 담뱃대와 술잔을 놓고 다가가 그의 등을 안았다.
“너무 불안해하지 말아요. 내가 당신을 지켜줄게요.”
표독스러운 얼굴에서 부드러운 말투가 흘러나왔다. 등에 묻힌 그녀의 얼굴을 볼 리 없는 르로아의 얼굴에도 조금 자신감이 되찾아왔다. 공주가 내 편이다. 그래, 걱정할 것은 없다. 는 얼굴이었다.
“당신한텐 손끝 하나 대지 못하게 할 거야.”
바이마샤르.
개국 원년부터 공화정의 형태를 유지해온 유일의 국가로, 미키네오스의 남쪽에 국경을 마주하고 자리해 있다. 크지 않은 나라로 시작했지만 개국 초부터 상업을 장려하여 전쟁이 아닌 부동산 매매를 통해 주로 영토 확장을 했고, 지금은 미키네오스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넓은 영토를 지닌, 보르틴 대륙의 강국 중 하나로 떠올라 있다. 그러나 론도 산맥을 서쪽에 두고 있는 탓에 바다를 통한 교역만이 가능할 뿐 육로를 통해서는 거의 타국과의 교역을 하지 못하고 있었고, 이는 보르틴 대륙의 다른 국가들도 별반 사정이 다르지 않았다.
수도 시락의 의회당 뒤뜰 언덕에서는 한 처녀가 무예 수련에 열중하고 있었다. 머리는 길지 않고 눈이 서글서글하니 눈썹이 치켜 올라가 매서운 인상을 가지고 있는 이 처녀는 의회의 여당 최고의원인 핫산 바슈미르의 수양딸 아로사였다. 올해로 스물 다섯이 된 그녀는 10년이 넘도록 하루도 빠짐없이 이렇게 무예를 익혀왔다. 언젠가 멸망한 자신의 모국을 위한 복수의 기회가 올 것임을 기대하면서.
후우~. 온 몸이 땀에 절은 아로사는 수련을 멈추고 앉아 책을 집어 들었다. 책의 겉표지에는 그녀의 모국인 환국의 표식이 새겨져 있었다.
“아로사! 아로사~!”
“?”
언덕 아래에서 나자르가 그녀를 부르며 다가오고 있었다. 뭔가 반가운 소식이라도 있는 듯 나자르는 희색을 띤 채 언덕을 올라오고 있었다.
“아슈람으로 갔던 미키네오스 사절단이 지금 성안으로 들어오고 있대!”
“어, 정말?”
십만 명의 군중들이 모일 수 있는 의회 앞 광장에는 벌써 융베리를 필두로 한 사절단과 수만 명의 귀환자들, 그리고 금빛의 천오백 군사가 들어와 자리하고 있었다. 이미 론지나아 근처에서 있었던 마도들과의 전투를 전해들은 터라, 사람들은 머나먼 땅에서 온 전설같은 군대를 구경하기 위해 구름처럼 모여들어 웅성거리고 있었다.
“한 번도 진 적이 없다면서?”
“싸움 시작할 때 잉그라드 만세~ 황제폐하 만세~ 한다던데.”
“멋있다~. 그런데 저거 진짜 금일까?”
“설마…, 저걸 다 금으로 하면 돈이 얼만데….”
“야, 잉그라드 황제면 그게 돈이겠어?”
“잉그라드 황제는 금이 어디서 솟아난대?”
총리인 기즈와 핫산, 그리고 야당 대표 토메즈 세츠페나스가 직접 나와서 그들을 맞이했다. 나라를 대표하는 세 명의 거두들은 융베리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명망만으로 뵙던 총장 예하를 이렇게 직접 뵈니, 무한한 영광입니다.”
“하하하, 이 늙은이를 민망하게 하지 마시지요, 세 분. 이미 이 곳을 떠났던 지 오래인 사람입니다.”
“아직도 총장 예하의 저술들은 이 나라의 많은 젊은이들에게 지혜와 안목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저 역시도 그렇고요.”
“그만하십시다, 기즈 총리.”
민망한 낯색을 떠올리던 융베리가 옆에 서 있는 장대한 여자에게 눈을 슬쩍 돌리자 셋은 또한 동시에 그녀를 보고 정중하게 예의를 갖췄다.
“말씀을 전해들었습니다. 대국인 잉그라드의 황녀께서 바이마샤르를 방문하시다니, 무한한 영광입니다.”
“아닙니다. 지나는 길에 폐를 끼칠 생각은 없었으나, 사정이 그리 되었습니다. 환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무슨 말씀을…, 우리 바이마샤르로 오는 귀환자들도 귀국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저 군사들인 모양이군요.”
“예, 그렇지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수만의 귀환자들을 둘러싸고 진영을 갖춘 만샤르차크와 나바스암바라를 보는 기즈의 눈에 감탄의 기색이 역력했다. 특히 커다란 말 위에 올라타 거대한 창검을 들고 사방경계를 하는 만샤르차크의 위용이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핫산은 융베리의 뒤에 선 사절단을 향해 다시 인사를 건넸다.
“외무차장이시군요. 레몽 도메네크 경의 변고를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얼마나 상심이 크십니까?”
“그렇게 됐습니다. 그래도 전임 총장 예하께서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얼마를 머무르시건 이곳에서라도 편히 쉬다 가시지요. 성의껏 모시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몇 차례에 걸쳐 의례적인 인사와 위로가 오고 갔다. 토메즈가 의회당 객사로 안내하겠다며 그들을 인도했다.
“안으로 드시지요. 환영 파티를 열 생각입니다만….”
“아니 무슨….”
“황녀께서도 함께 자리를 빛내주셨으면 합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리타는 ‘파티’라는 말에 눈을 반짝 빛냈다. 아슈람에서 수행을 했다고는 하지만, 그녀는 아직 스무 살도 되지 않은 소녀였다. 게다가 처음 보는 곳에서 파티라니, 싫어할 까닭이 없었다. 활짝 웃으면서 좋아하는 그녀는 장대한 체격에 맞지 않게 발랄한 가색이었다.
“어떤 사람들인가요, 저들은…?”
객사에 들어서자마자 리타가 묻자 융베리는 담담한 신색으로 질문에 응했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이겠습니까….”
“위험해 보이진 않던데요.”
“알고 계시는군요, 전하.”
둘은 함께 소리내어 웃었다.
“바이마샤르는 그래도 안정된 국가입니다. 개국 초부터 공화정이었고, 무역과 내수 상업에 많이 치중을 했지요. 군사력은 보르틴 연합체 중에서 중간 정도지만, 국력만큼은 무시 못할 나라입니다. 20년 전의 큰 전쟁에서 피해를 입긴 했지만 2백년 간 쌓아놓은 국력이 그 정도로 무너질 리는 없었지요. 아마도 이 대륙에서 가장 회복이 빨랐을 겁니다.”
“쓸데없이 다른 나라를 침범하거나 하진 않겠군요.”
“음모를 꾸며서 괜한 수를 쓰거나 할 필요도 없지요.”
여당 최고의원인 핫산은 총리와 함께 집무실에 있었다. 환영 파티를 연다고는 해도, 어쨌든 나랏일을 하긴 해야 했다. 비서관조차 내보낸 그들은 레몽의 죽음이 어떤 변화를 가져올 지 고심하고 있었다.
“어쩌면 귀환자들을 위해서 책정해 둔 예산을 모두 군자금으로 보내야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루나 국왕이라면 틀림없이 그러려고 들겠지….”
고개를 끄덕이는 총리. 명분으로서도 바루나가 전쟁을 일으키려 든다면 거기에 말려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군사는 얼마나 보내야 할까…?”
“글쎄요…. 아무래도 제가 보기엔 단순한 마도 정벌이 아니라, 론도 산맥을 집어삼키려 들 것 같은데….”
“그건 좀 무리가 아닐까?”
“레몽 도메네크 경은 미키네오스의 개국 공신가문의 가주였습니다. 왕가나 다름없다고요. 공작의 칭호를 가진 실세 중의 실세가 죽었으니, 바루나로서는 론도 정벌전 정도를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음…, 우리만으로 가능하겠어…?”
잠시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론도 정벌전. 20년 전의 전쟁에서 대륙 전체를 초토화시키다시피 했던 베슬리 얀 반 마르크 로이나르가 군사를 거두어들이며 자리한, 보르틴 대륙의 서부에서 북부에 이르는 거대한 산맥. 험준한 지형과 철새들조차 길을 잃어 산중에 떨어져 죽는다는 그 곳을 정벌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해 보지 않았다. 기즈로서는 그것이 가능해 보이지 않았다.
“잉그라드가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들이 개입할까? 게다가 잉그라드 황제들은 황족이 위협을 당했다고 해서 응징을 하러 나서는 그런 나라가 아닐세. 세습제이면서도 황족, 특히 황녀처럼 다음 황위를 이어받을 후계자들은 벼랑 끝으로 내모는 전통이 있잖은가.”
“만샤르차크와 나바스암바라라면 천오백만으로도 우리 연합체의 수만 대군과 맞먹습니다. 저들만으로도 성 몇 개는 충분히 빼앗을 수 있을 겁니다.”
“그래도 저들이 전쟁에 참전한다는 보장이 없질 않은가.”
핫산은 눈을 굴리며 씩 하고 웃어보였다.
“바루나 국왕이라면 해결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워낙 선수이고 하니….”
귀환자들과 함께 의회당 광장에서 막사를 치고 아무데나 퍼질러 앉아 연초를 피우고 있던 한율은 별안간 찾아온 의회의 서기관으로부터 파티에 참석해달라는 요청을 받고 잠시 멍해있었다.
“나요?”
“예. 총리각하께선 대 잉그라드 제국 황녀 전하의 요청을 받아들여, 귀환자들을 지키는 데 용맹하게 싸우신 귀공의 공로에 직접 감사의 뜻을 전하고자 하십니다.”
“엄….”
사실은 나 때문에 그랬던 건데…. 한율은 좀 멋쩍어져서 머리를 긁으며 몸을 일으켰다. 가시지요. 뭐…, 그럽시다. 맛있는 것 좀 얻어먹지. 싸우느라 힘도 뺐는데…. 내색하지 않은 채 따라나서던 한율이 서기관을 불러세웠다.
“저기요.”
“예.”
“파티장…, 이거 괜찮은 거요?”
담뱃대를 흔들어보이는 한율. 결국 갖고 들어가진 못했지만, 연초를 피울 수는 있었다. 파티가 시작되면서 시중들이 술과 음식, 그리고 연초를 들고 다니며 초대된 사람들에게 일일이 묻고 다니는 꼴이 좀 우스워보이긴 했지만, 그는 일단 술보다 연초부터 집어들었다.
“흠…. 이거 좀 신기한데…?”
“당신 같은 골초는 처음 봐요.”
“으앗~!”
언제든 그를 화들짝 놀라게 만드는 목소리, 리타였다. 거 좀 안 놀래키고 등장하는 요령은 없나…? 어떻게 등장해야 안 놀라는데요? 툴툴거리던 한율은 지지 않고 되받아치는 리타의 말에 고개를 가로저으며 연초를 뻑뻑 빨아댔다.
“… ….”
“… ….”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리타를 한율은 마주 훑어보았다. 뭘 쳐다보나…? 한참을 말도 없이 그렇게 보고 있자 한율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먼저 말문을 열었다. 나한테 뭐 묻었수? 뭘 그렇게 쳐다보고 있는 거요?
“이렇게 멀끔하게 차려입으니까…, 당신도 꽤 괜찮은데요?”
“…원 참….”
별 소릴 다 듣겠다는 얼굴로 다시 연초를 뻑뻑 빨아댄 그는 그녀를 향해 이봐요, 황녀 전하. 내가 아무리 당신한테 함부로 못한다고 해도….
“그 칼….”
그의 말을 딱 가로막았다. 리타의 시선이 닿아있는 곳은 그의 허리와 등에 찬 다섯 자루의 검이었다. 안 차고 다닐 수는 없어 허름한 주머니에 넣어 다니기가 곤란했으나, 검집에 묶어 둔 매듭이 단단했다.
“특히 허리에 매어둔 건 보통 칼이 아니군요.”
“….”
한율은 연초를 껐다.
역시 이 여자는 뭔가를 알고 있다.
“난 그대를 우군으로 만들고 싶어요.”
“…. 난 누구와도 함께할 수 없는 사람이요.”
“환인의 권능으로 하늘과 땅의 이치를 담은 검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요…?”
“… ….”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설마 모든 걸 꿰뚫어 보는 도깨비 같은 여자는 아니겠지. 한율은 머리를 굴려봤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틀림없이 자신보다는 높은 경지에 이르러 있는 사람이긴 했다.
“처음 봤구려.”
…?
“내 스승과 같은 경지까지 오른 사람 말입니다. 많이 봐줘도 스무 살 어림인 것 같은데, 대단한 사람이오, 그대는….”
“자신의 숙명과 정면으로 맞서는 사람만 할까요.”
추켜세워주는 듯한 말이었지만, 딱히 그렇게 들리지는 않았다.
“하나 잘못 알고 있는 게 있소.”
“무엇 말인가요?”
“환인의 권능은 고작 칼자루에 담겨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런 정신을 담아 만든 병장기라고 해도, 어디까지나 칼은 칼이오. 한갓 예리한 병장기일 뿐이지요.”
“하지만 그 칼이 그대의 신권을….”
“이보시오, 아가씨.”
이번엔 리타의 말을 한율이 가로막았다. 단호하고 묵직한 가로막힘에 리타는 저도 모르게 어깨가 살짝 움츠러들었다.
“숙명과 맞서 싸우는 건 바로 의지요. 검에 담긴 정신은 단지 그 의지를 잊지 않기 위한 매개물에 불과한 겁니다.”
그의 눈이 연회장 가운데, 사람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이야기를 나누는 곳으로 향했다.
“웃고 떠드는 저 가운데서도 속으로는 우는 자들도 있을 테고, 화내는 자들, 즐거워하는 자들, 또 어떤 이는 복수심을 불태우는 사람도 있을 거요. 그대의 경지가 그 아귀다툼을 담아내고 아우를 수 있을 때, 나는 기꺼이 그대를 위해서 칼을 뽑을 테지만. 아직은 아닙니다.”
한 방 제대로 먹은 격이었다. 대꾸도 못하고 서 있는 리타를 뒤로 하고, 한율은 술잔을 기울인 뒤 사람들이 모여드는 연회장의 가운데로 향했다.
“저 사람이라며?”
“단신으로 달려들어서 방어선을 지켰다던데, 사실일까요?”
“전장에서의 무훈이란 건 항상 부풀려지기 마련이지. 미련한 사람 같으니….”
“없는 얘기가 나왔겠습니까, 그래도….”
“멋있다, 그치…?”
“넌 저게 멋있어 보이니? 무식하게 크기만 하고, 잘 생긴 것도 아니네 뭐.”
아닌 게 아니라 한율은 정말로 눈에 띌 만큼 덩치가 컸다. 그가 가운데로 들어서자 몸에 달려있는 다섯 자루의 검들도 함께 눈에 띄었다. 연회장에서 칼을 차고 있는 거야 군인들이라면 누구라도 그렇게 하고 있었지만, 그 검의 모양새도 완전히 색다른 것이었으니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눈길이 그 곳으로 집중되고 있었다.
“그런데 저 사람…, 저 검들 말야….”
“어, 나도 보고 있어….”
그 중에서도 한율에게서 눈을 떼지 않는 두 쌍의 눈길이 있었으니, 아로사와 나자르였다. 그보다는 어렸지만, 그들도 어렸을 적의 기억은 남아있는 이들이었고, 또한 바이마샤르에 살면서도 모국을 잊지 않은 이들이었다. 그러니 너무나 뚜렷하게 다섯 자루의 검을, 그것도 그 형식에 정확히 맞춰서 차고 있는 한율의 모습이 눈에 강렬하게 꽂힐 수밖에 없었다.
“귀공께서 단신으로 수백의 마도들을 제압한 그 기사분이시로군요.”
“아…, 예. 뭐 제압했다기보다….”
“어느 군에 소속되어 계시는지…?”
“혹시 소속이 없으시다면 이 곳에서….”
“어허…, 성급하기는.”
한율은 무척 곤란해하고 있었다. 바이마샤르에서 세도를 이루며 살고 있는 많은 귀족들이 그에게 다가와 대답할 틈이 없을 만큼 말을 걸어왔으니, 항상 혼자 떠돌며 한적하게 지내던 그에게 익숙치 않은 일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그런 그를 멀찍이서 지켜보던 리타에게 융베리가 다가갔다.
“이제 저 젊은이는 완전히 노출되어 버렸습니다.”
“…, 무슨 의도가 있으셨던 건가요?”
“그야 미키네오스 국왕이 함부로 어쩌지 못하게 하시려는 거였겠지요.”
뒤에서 들리는 말소리였다. 돌아보는 융베리의 눈에 반색이 가득찼다. 간결하게 차려입은 복색이 화려하진 않지만 기품이 있어 보였고, 언뜻 완고해보이는 인상이었지만 반백의 머리카락과 눈가의 주름이 그런 것들을 반감시켜 주는 장년의 남자였다.
“핀…? 핀이 아닌가!”
“뭐?”
“핀 어르신이 오셨어?”
“어디? 어디에?”
융베리의 목소리는 다소 컸다. 연회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그 말에 웅성거리며 입구쪽으로 일시에 시선을 집중시켰다. 바이마샤르의 전임 총리, 세 차례에 걸쳐 총리를 연임하며 18년간 무너진 국력을 회복시키고 법제를 정비하고 강화하여 내부적 혼란을 잠식시킨 인물이었다. 자신에게 몰려 있던 귀족들의 기세(?)에 난감해하던 한율은 이순간 자신을 구해준 사람이 누군가 싶어 멀뚱한 얼굴로 입구 쪽으로 몰려드는 사람들을 쳐다봤다. 대단한 사람인가보네…, 한 번에 절루 다 몰리잖아…?
“우리 공화국의 전임 총리셨지요.”
곁에 다가서며 말하는 것은 여당 최고의원 핫산이었다.
“전후에 있었던 모든 혼란을 안정시킨 훌륭한 분입니다. 서로 갈라져서 정치 싸움이나 일삼던 의회를 안정시키고 법을 개편하고 경제적으로도 부흥시키고…, 아마 총리직에 대한 연임제한이 없었다면 지금도 저 분이 총리로 이 자리에 계셨을 겁니다.”
“아하….”
“실례하겠습니다.”
“아, 예….”
핫산이 가고 난 뒤 한율은 다시 연초를 하나 들어 입에 물면서 인파(?)속에 갇혀 보이지 않는 존경받는 정치인을 상상해봤다. 햐…, 저런 사람도 있긴 있구나, 정말로…. 우리 단군 어르신쯤 되려나….
“단군 어르신이라면….”
신음처럼 들리는 음성이었다. 옆에 다가선 스물 너댓쯤 되어 보이는 아가씨들. 한율은 약간 경직되었다. 이건 대체 뭔 일이야. 하는 얼굴이었다. 흑갈색의 머리카락과 금빛 눈동자, 전사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눈이 부리부리한 다른 한쪽의 처녀는 그와 비슷하지만 조금은 더 맑은 황적색의 눈동자를 갖고 있었다.
“환국에서…. 환국의 사무랑님…?”
사무랑은 환국에서 무예 수련을 위해 각 지역에 일정하게 마련된 수련장으로 모여든 남녀를 일컫는 말이었다. 오래간만에 듣는 단어였다. 그를 쳐다보는 아로사와 나자르는 자신들이 울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는 듯했다. 대체 뭐야, 이 동네는…. 망한 나라 사람들을 줄줄이 만나는구만. 하는 얼굴의 한율은 크게 격동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놀라운 일입니다, 하하하하…!!”
핫산은 자신의 수양딸들과 한율이 동족 출신임을 알고는 그들을 위해 연회장 밖에 따로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한율은 그런 자리가 오히려 더 어색하고 불편했지만 딱히 거절할 명분도 없었고, 무엇보다 아로사와 나자르의 태도가 너무나 절절하여 거절을 하기도 미안할 정도였다. 억지로가 되었든 어쨌든 일단 자리한 김에 찜찜한 기색을 내비칠 수는 없었다.
“처음에는 이 사람도 귀공의 검 다섯 자루를 보고 혹시나 했습니다만….”
“아, 예….”
“여기 아로사는 무척이나 모국을 자랑스러워합니다. 가끔은 아비인 제가 섭섭하기도 하답니다.”
“아버지…!”
핫산은 다시 웃음을 터뜨리며 한율에게 딱히 갈 곳이 없다면 얼마든지 머물러도 좋다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그럼 연회장으로 가지요. 젊은 사람들은 젊은 사람들끼리 어울려야지요. 그는 진정 정치를 하는 사람으로 보였다. 진심인지 아닌지 그런 것은 전혀 알 길이 없었고, 겉으로 사람을 대하는 태도 자체는 무척 호감을 갖게끔 했다.
“좋은 아버님을 두셨습니다.”
“말씀 낮추십시오, 사무랑님.”
“그래요. 편하게 하셔도 됩니다.”
“엄…, 뭐…, 그, 그럴까….”
바슈미르의 친딸인 아이린까지 함께 한 자리였다. 남자가 저 혼자 뿐이니 한율은 좀 많이 어색한 모양이었다. 그런 모양새를 보면서 리타와 융베리가 연회장 안에 있었다.
“전하께선 어쩌실 겁니까?”
“뭘 말인가요?”
“바이마샤르는 전하의 본국과도 교역이 많은 곳입니다. 돌아가시든 어떻든, 미키네오스보다는 여기 계시는 편이 더 안전할 텐데요.”
“그건 구루님도 마찬가지 아니던가요?”
“하하….”
“대단하세요. 바루나 국왕이 어떤 사람인지 알면서도….”
“그렇게…, 칭찬받을 일이 아닙니다. 전하.”
융베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조금은 묵직한 웃음을 지었다.
“저 자가 이대로 미키네오스까지 가게 되면 틀림없이 바루나는 그를 전쟁의 전면에 내세우려 들 겁니다. 일단 그가 피를 보게 되면 걷잡을 수 없는 학살이 일어날 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그것은 전하께서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 ….”
“제가 그를 여기서 노출시킨 건…, 비단 그가 엄청난 살겁을 일으키지 않게끔 하려는 것만은 아닙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도 실은 두렵습니다.”
“구루님….”
“남들이 구세주 교리의 정립자다, 석학이다 떠들어대도…. 전 아직도 신은 인간을 버리지 않았다고 믿고 싶습니다. 구세주의 교리처럼 신은 인간을 사랑하고, 그래서 모든 인간을 자식처럼 여기고 있다고, 그런 제 바람이 눈앞에서 산산히 깨어져버릴까, 그것이 두렵기도 했습니다.”
“….”
“전하께선 이 늙은이를 어리석다 여기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닙니다. 무슨 말씀을….”
“그래도 저는 그 바람이 현실이 되었으면 합니다. 냉정하고 무자비한 신보다는…, 그래도 종교란 역시 위안을 얻는 곳이니까요. 사람은 약하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들릴 듯 말 듯한 대꾸가 리타의 입안에서 감돌았다. 잠시 둘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주변에서 연회 분위기가 무르익어가고 있었지만, 둘은 완전히 거기에서 떨어져 나온 사람들 같았다. 리타가 그 침묵을 먼저 깼다.
“난 미키네오스로 갈 겁니다.”
“…, 전하.”
“전에 병력이 너무 많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었지요.”
“아, 예. 혹시 그것과 관련이 있습니까?”
“예. 시락 성안으로 들어오기 직전에 전대장이 폐하의 밀지를 전달하더군요.”
“그렇습니까….”
연회가 끝나고 거처로 돌아온 리타는 융베리에게 황제의 밀지와 함께 받은 밀부를 꺼내어 보였다. 이게…, 뭡니까…?
“황제의 군권을 상징하는 밀부입니다.”
“황제의 군권…!!”
그것은 대단한 의미가 있었다.
“이 밀부는 그 중에서도 황실 친위대를 통솔할 수 있는 표식입니다. 다시 말하면 잉그라드의 최정예 부대에 대한 절대권한이죠.”
“그럼 본국에서….”
“사정은 말씀 안하셨습니다만, 무슨 일이 생겨도 생겼다는 뜻입니다. 아니면 생기려고 한다거나…. 밀서에서 말씀하시기를, 이 밀부를 임의대로 쓸 수 있도록 윤허할 것이나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시더군요. 바이마샤르에서 천오백 군사와 함께 귀국할 것인지, 아니면 좀 더 깊숙이 들어가서 험지를 살펴보고 올 것인지….”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내가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씨익 웃는 리타, 그녀는 이미 쉬이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거나 진배없었다. 융베리도 고개를 끄덕이며 웃을 뿐이었다. 역시 대국의 황녀쯤 되실 분입니다.
“짓궂은 분이십니다, 폐하께선….”
“강요로군요.”
“삼백만의 황군에 대한 통솔권을 모조리 넘겨주시곤 절더러 그냥 올 지 돌아서 올 지 선택을 하라니…, 모처럼 머리를 쓰신 듯한데. 차라리 그냥 멀리 돌아서 들어오라고 말씀을 하시든지요.”
“삼백만…!!”
입이 떡 벌어진 융베리를 보고 리타는 어? 이 노인네 몰랐나? 하는 눈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르고 계셨습니까? 아니…, 삼백만이면…. 그는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있었다. 황제의 친위대가 삼백만이면 대체 잉그라드의 군사력 전체는 얼마나 된다는 것인지.
“보르틴 연합체가 총력을 다해도 그만큼은….”
“그럴 테지요. 모르셨군요.”
백수에 가까운 융베리의 늙은 이마에 식은땀이 다 고일 지경이었다. 론지니아에서 보여준 만샤르차크와 나바스암바라의 위력은 그가 일찍이 본 적이 없는 것들이었다. 단 1천 5백의 군사로 그 정도라면 황실 친위대만으로도 보르틴 대륙 전체를 쓸어버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잉그라드의 군사편제는 폐하의 직할대 외에도 황도방위사령부, 조정근위대, 그리고 제후들의 직할대와 그 산하에 있는 국경방위대까지 통합합니다. 다 합치면 7천만 정도 됩니다.”
잉그라드의 국력이 보르틴 대륙 전체를 합쳐도 맞상대를 할 수 있을 정도라는 건 그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러나 잉그라드의 8백년 역사와 그 안에 녹아들어 있는 이념, 문화 등에 대해선 연구해본 바 있었으나 그들의 군사력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아는 바는 없었다. 그저 그 광대한 대륙을 다스리고 있으니 대단하겠다 싶은 정도였다. 그런데 7천만이라니. 상식적으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수치였다.
“….”
“난 구루님과 함께 미키네오스로 갈 것입니다. 위험이 많은 곳일수록 배우는 게 많은 곳 아니겠습니까?”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리타를 보며 융베리는 이미 그녀가 대국의 황제로서 갖춰야 할 배포와 의기가 충분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상한 검사가 한 명 있다고 들었는데…, 혹시 아는 바 없어요?”
“이상한 검사라니요?”
내사부장은 짐짓 모른 척했지만, 그런 것이 통할 리 없었다. 이미 나름의 정보망을 구축하고 있는 공주에게 정보를 주는 것이 자신뿐이 아님이야 자명한 일이었다. 레이네는 시선을 슬쩍 그에게로 던졌다.
“정말 몰라요?”
“그…게….”
레이네는 술잔을 빙글빙글 돌리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론지니아 전투에서 단신으로 수백의 마도들을 막아낸 전사가 있다고 하던데….”
내사부장의 얼굴이 긴장감으로 굳어졌다. 그 일을 아는 사람은 국왕과 정보 담당관 중에서도 극소수가 전부였다.
“왜 정보 담당관이 그걸 모를까? 혼자서 수백 명을 막아내는 거야 부풀려진 말이라고 쳐도…, 일단은 굉장한 전사라는 얘긴데….”
“사, 사실이라면 그렇겠지요.”
말까지 더듬는 내사부장의 손, 레이네의 잘록한 허리 능선을 따라 움직이던 손이 얼른 떼어졌다.
“부왕이 대체 무슨 생각일까요? 먹을 수 없는 건 버리는 사람인데…, 그처럼 좋은 물건을 남 줄 사람도 아니고…. 안 그래요?”
“공…공주님…!”
“뭐 일단은…, 두고 봐야죠.”
내사부장은 식은땀마저 뻘뻘 흘리며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그 말대로, 바루나 국왕은 한율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완전히 묻어둔 상태에서 일을 진행시키고 있었다. 워낙 잉그라드의 군세가 막강하고 그들이 보여 준 위력 때문에 크게 알려지진 않았지만, 그가 수백의 마도들을 단신으로 막아냈다는 정보의 진위 여부보다 중요한 것은 바루나에게 있어서의 활용가치였다.
그런 한율이 바이마샤르에서 완전히 드러나 버렸으니, 그를 암암리에 알아보고 활용가치를 재 보려는 바루나의 의도는 완전히 백지화된 셈이었다.
“융베리 원로는 다시 봐야겠군요….”
“으음….”
“괜찮으십니까?”
“…. 어차피 처음부터 계산에 없었던 인물이니 크게 문제될 건 없네.”
병부대신의 말에 별 일 아니라는 듯 선선히 넘기는 바루나였지만 그의 표정은 다른 말을 하고 있었다. 융베리 이놈, 내 일을 제대로 방해하고 나설 생각인가. 교총의 영역에 들어서자마자…. 라크라오스가 문서 하나를 꺼내놓으며 바루나의 생각을 멈추게 했다.
“말씀하셨던 사안입니다.”
“음….”
제법 두껍게 말린 문서였다. 펼쳐서 읽어내려가던 바루나의 표정이 약간 경직되며 신음처럼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일반 사병보다 정보원이 더 많군 그래….”
“예. 최근 들어서 대폭 늘린 것 같습니다. 운용자금에 대한 부분은 아직 확보하지 못했습니다.”
“그 놈…공주를 통해서 일단 잠재워 뒀더니 물밑에서 겁도 없이…, 철저하게 조사해봐. 돈줄을 쥐고 있는 놈이니 마음먹고 빼돌린다면 흔적을 찾기가 쉽지 않을 걸세.”
“예, 폐하….”
문서를 접어서 책상 아래에 놓는 바루나는 다시 융베리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문제는 그놈인데….”
“학자로서 명망이 드높은 자이긴 하지만, 정치적 술수로 봐도 대단히 유능한 자입니다.”
“유능한 만큼 위험한 놈이기도 하지…, 내게 등을 돌리려고 마음먹었다면 그만큼 상대하기 어려운 적수도 드물다네.”
“재무대신을 활용해 보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아무래도 자금을 쥐고 있는 자이니, 활용할 수만 있다면 그처럼 편리한 사람도 없을 것 같은데….”
“나쁘지 않은 생각일세.”
“자금 운용상황에 대한 조사를 먼저 하도록 하겠습니다.”
바루나는 라크라오스의 말을 가로막았다. 아니지, 아니야…. 그는 잠시 뜸을 들이며 뭔가를 생각하더니 이내 말을 바꾸었다. 운용자금에 대한 것은 조사를 멈추라 명했다.
“폐하, 무슨….”
“아직 그자는 쓸만해. 꽤 유능한 자일세. 기왕에 횡령을 할지도 모른다 치면, 그 돈으로 교총을 섭외하면 되지 않겠나.”
“… 그렇군요.”
국왕의 손이 다시 문서를 꺼내어 근위장에게 향했다.
“공주에게 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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