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집령이 떨어진 지 며칠이 지났다.
사절단과 귀환자 행렬은 아슈람을 떠나온 지 보름 정도가 지나 대륙의 극동 지역에 다다랐다. 아직 아쿠아리아스 대륙을 벗어난 건 아니었지만, 론도 산맥의 끝자락이 이 곳에 있는 까닭에 미키네오스에선 버젓이 근방에 행정구역까지 따로 두고, 영주에게 작위를 내리기까지 했다.
“뭐 이런 사람들이 다 있습니까? 다른 대륙에까지 자기 땅이라면서….”
“그럴만한 이유가 다 있네. 괘념치 말게.”
융베리의 말에 자와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뒤를 힐끗 돌아보았다. 지난번에 언뜻 마주쳤던 산등성이에서의 그 여행자. 그로부터 느꼈던 그 묘한 기운이 다시 느껴지고 있었다. 무예의 강약을 떠난,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느낌. 분명 그에게서도 리타처럼 마하수카의 경지에 오른 이들의 기풍은 느껴졌으나, 그와는 또 사뭇 달랐다.
“왜 그러나?”
“구루께서도 알고 계시지요?”
융베리는 무거운 안색으로 으음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전에 봤던 그의 알 수 없는 맹목적인 공포감. 자와카는 이유를 알고 싶었지만 물어볼 수가 없었다. 누군가에게 그토록 두려움을 느끼는 걸 그는 백수에 가까운 세월을 살면서도 본 일이 없었다. 그래서 더 묻기가 어려웠다. 직접 알아봐야겠군. 그렇게 다짐했다. 그를 찾아내는 일은 어렵지 않았으니까. 한율은 소집령이 떨어진 다음날부터 매일밤 카마산의 막사 근처를 배회하고 있었다. 위치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그 묘한 기운이 밤만 되면 더 가까이에서 느껴졌기에 그렇다. 그날 밤도 그랬다.
“차핫~!”
힘찬 기합과 함께 검이 앞으로 쭉 뻗어나갔다. 그리고 이어서 검끝이 그려내는 호선, 아래로 늘어뜨리는 검끝이 그대로 하늘로 치고 올라가고, 다시 뒤를 향해 내리쳐졌다.
흐음….
한쪽 다리를 꺾으며 급격히 자세를 낮추었다가 용수철처럼 튀어나가는 하백의 몸이 한바퀴 회전하며 검격에 위력을 더했다. 쉬잉 하고 공기를 갈라지는 소리가 나며 대번에 사람 허리만한 나무 줄기가 깨끗하게 베어져 나갔다.
하아…, 하아….
몇 번째 그 동작을 반복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검세 자체는 틀리지 않았는데, 어쩐지 뭔가가 미진했다. 땀에 절은 옷매무새를 바로 하며 다시 책을 들었다.
역시…! 지켜보던 두 눈이 반짝였다. 한율의 눈에 들어온 건 고향의 문양이었다. 저 미소년은 틀림없이 자신과 같은 민족이었다. 살아남은 이가 거의 없는 그 살겁에서 누가 어떻게 살아서 탈주를 했는지 몰라도, 아마 그 때쯤 태어난 아이가 아닐까, 그렇게 생각되었다. 하백이 며칠째 반복해서 연습하는 검세는 바로 그가 익혔던 고향의 검식이었다.
‘어차피 거들기로 했으니…, 동족 상봉도 한 번 해볼까나….’
그렇게 마음먹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몸이 붕 뜨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졌다. 동시에 몸이 굳은 듯 움직이질 못했다. 누군가 목덜미에 강력한 기운을 집중해서 움켜잡았던 것이다. 한율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대머리 아저씨…!’
“누군데 매일밤 여길 숨어들어오는가?”
굉장한 투기를 발산하는 목소리가 뒤통수를 후려갈기듯 들려왔다. 나직했지만 압도적인 음성이었다. 아…저…저기….
“구루님…!”
하백은 한쪽 풀숲에서 커다란 사내를 한손으로 쥔 채 모습을 드러내는 자와카를 보고는 얼른 검을 접은 뒤 예를 취했다. 자와카는 물론 컸지만 지금 그의 손에 잡혀 들어오는 이도 거구였다. 키가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보이는데다, 어깨나 가슴팍이 매우 두꺼워보였다. 한율은 하백의 발치에 내동댕이쳐졌다.
“아야! 아이~씨, 진짜…!!”
“말하라. 그대는 누군데 매일밤 이 곳으로 숨어들어오는가?”
이제보니 투기는 대단했지만 전의 자체는 별로 없어보였다. 죄 지은 게 없으니 한율도 별반 위축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그만한 투기라면 겪어볼 만큼 겪어본 터였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한테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대해도 되는 거요?! 아슈람의 무신장쯤이나 되는 양반이…!!”
투덜대며 얼른 일어나 앉는 한율의 말투, 무신장의 투기를 보고도 위축되지 않는 걸 보면 굉장히 강한가보다 싶었다. 하백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누구냐고 물었네. 아슈람에서 오지도 않았을 텐데…?”
“그야…, 뭐…. 며칠 전에 봤으니 아시겠지.”
잠시 뜸을 들이던 한율은 팔짱을 끼면서 자와카를 똑바로 쳐다봤다.
“난 한율이라고 합니다. 한율. 여기 있는 이 애송이랑은 같은 데서 왔지요. 카마산이 호위대를 한다기에 동행한 김에 좀 거들어볼까 했시다. 됐수?!!!”
“환국에서 오셨다고요?!!”
깜짝 놀란 하백이 먼저 물었고, 고개를 끄덕이는 한율을 향해 자와카도 놀란 얼굴로 진위여부를 물었다. 동족 상봉 좀 하겠다는데, 거 참…. 한율은 머리를 벅벅 긁더니 하백을 돌아보며 검식에 대해 말했다.
“이봐, 애송이. 단날검으로 펴야 할 검식을 양날검 갖고 연습을 하니, 그게 늘겠어? 디딤발의 강약도 틀렸어.”
“…예?”
“…!”
자와카의 얼굴이 굳어졌다. 한율이 말하는 것은 틀림없이 북방 타림대륙의 검식이었다. 보법의 강약과 속도, 무엇보다 타림대륙에선 한쪽에만 날이 선, 약간 휘어진 형태의 검을 사용한다고 들었다. 갑자기 나타난 동족, 그리고 자신의 검식에 대한 거침없는 평가. 하백 또한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그대로 굳어져 있었다.
보라, 천상의 종복들이여. 하늘의 가신들이여.
그대들, 땅의 주인들이여.
때가 이르러
하늘의 권능을 지닌 자 그대들에게 내려오리라.
종된 자로서 주인된 이를 알아보지 못하여
주인을 거스르는 죄가 창궐할지니
하늘을 읽는 죄인을 다스리고저 내려진 그대들,
주인의 분노를 마땅히 헤아릴 것이며
주인의 철퇴를 마땅히 행사할 것이며
마침내 죄를 사하게 할 것이니
종된 자의 종됨을 참되게 할 것이며
주인된 자의 주인됨을 참되게 할 지니라.
그대 하늘을 읽는 자여, 천주의 대역죄인이여.
태초의 옳음을 행할 때가 올지니
자연을 지배하는 자들의 어리석음은
그대들의 눈앞에 나타날 것이다.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다만 정해진 것은 그대들을 위함이
아니라 그들을 위함이라.
하늘과 땅, 삶과 죽음의 균형이
깨어지는 날, 그대들
조화의 칼을 들고 분연히 일어나
맞서 싸워야 하리라.
이에 하늘에서 내려오는 이들 있으니
그대들, 자비를 베풀지 말 지니라.
마법진을 펼쳐본 융베리는 또다시 불안에 떨고 있었다. 하백의 동족이 나타났다. 그가 바로 산등성이의 남자였다. 환국 신민들의 몰살은 틀림없이 그와 직결되어 있었다. 융베리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에게 자비란 없다. 차별도 없어. 오직 무차별적인 학살과 파괴다. 그건 그의 숙명이야…!’
진정이 되지 않았다. 리타의 말에 희망을 걸어볼 수도 있겠으나, 그렇다면 지금이 바로 맞서 싸워야 할 때였다. 그러나 이 같은 상황은 아니었다. 적어도 그가 예감했던 미래의 그 싸움은 이런 형태는 아니었다.
‘전하의 예상이 맞겠지…, 이미 마하수카의 영역에 계시는 분이니 그 분의 말씀이 맞겠지….’
자와카는 자와카대로 의문에 싸여 있었다. 대체 그가 뭐기에, 하백의 동족이고, 그 무예를 익힌 자라는 것 외에 특별할 것이 없었다. 말하는 품새 하며 행색까지, 그냥 보면 영락없는 행랑객에 지나지 않았다. 오히려 소탈해보이고 사람 좋아보이기까지 한 젊은이였다. 그런 그에게서 느껴지는 묘한 이질감, 그리고 융베리가 보여주는 그 절대적인 공포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백의 동족 때문입니까…?”
“…? 예, 전하.”
등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그는 얼른 예를 갖추며 한걸음 물러섰다. 리타는 말없이 그를 지나쳐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융베리가 일어나 그녀에게 예를 갖추었고, 그녀는 자리에 앉으며 말문을 열었다.
“융베리 구루께선 너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시선이 닿자 자와카는 직감적으로 그녀에게서 명령이 나올 것을 알아채곤 즉시 무릎을 꿇었다.
“그대의 임무는 여기까지입니다. 즉시 복귀하여 황명을 받드세요. 폐하께서 새 임무를 주실 겁니다.”
“그리하겠사옵니다. 부디 무사히 황도로 귀환하소서.”
극존칭이었다. 자와카는 그 말과 함께 그 큰 몸을 일으켜 오체복지의 예를 올리곤 막사를 나섰다.
“제가 알기로….”
“…?”
“몸을 엎드리는 것은 황제를 향해서만 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그가 나선 뒤 융베리가 묻자 리타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지었다. 그는 그런 사람입니다. 지금 했던 건 제가 아니라 황명 자체였지요. 융베리는 이전에 들었던 황제의 권위를 새삼 실감하며 놀랍다는 표정이었다.
“황제의 권위는…, 강한 군사력과 권력에서 나오는 게 아닙니다.”
“…음….”
“신민들의 안정과 번영이지요. 그들의 칭송이 바로 황제의 권위입니다.”
“그렇군요. 참…다릅니다. 언제나 느끼지만 말이지요.”
이야기가 다른 데로 새긴 했지만, 융베리는 리타의 말에 기대를 걸어보기로 한 것이었다. 마하수카의 경지, 그 중에서도 리타는 이미 생사의 경계를 뛰어넘은 듯 보였다. 놀라운 분이십니다, 전하께서는…. 물론이죠. 얼른 받아치는 리타의 말에 융베리는 남아있던 긴장감마저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이튿날 다시 출발한 일행이 향하는 곳은 론지니아였다. 엿새 정도의 길이라고 하니, 이제 아쿠아리아스 대륙은 거의 벗어났다고 보아야 했다. 한 가지 경계할 것은 론지니아로 들어가는 입구였다. 론도 산맥의 끝자락이었으나, 워낙 산세가 험준한 곳인지라 끝자락이라 해도 그 곳을 통과할 수 있는 평지는 기껏해야 널찍한 구릉, 아슈람의 연무장만한 구릉이 전부였다.
“웬 칼인가?”
“예?”
“그거, 그거….”
하백은 말에서 내려 한율과 함께 걷고 있었다. 기왕에 동족을 만난 김에 이야기도 듣고 싶었고, 무엇보다 그에게서 자신의 부족한 검세에 도움을 받고 싶기도 해서였다. 아쉬운 것은 전날 밤 자와카가 떠난 일이었다. 막사에 돌아와 보니, 자와카의 검과 서한이 남겨져 있었다.
‘하백 보거라. 나는 내 나라로 돌아간다. 황명을 받아 떠나는 것이니 직접 만나지 못하고 돌아가야 하는 것이 아쉽구나. 너는 재능이 뛰어나진 않으나 누구보다도 곧은 심지를 가진 아이다. 나는 오히려 그것이 무예에서 가장 중요한 재능이라고 생각한다. 네 마음을 믿고, 너의 신념과 소신대로 하거라. 멀지 않은 장래에 너에게 많은 혼란이 올 것이다. 그 때 지금 이 말을 기억하거라. 섣불리 남의 말을 듣지도 말고, 섣불리 남의 말을 의심하지도 말거라.
항상 너의 안녕과 발전을 기원하마. 또 만나게 된다면 지금과는 다른 네가 되어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단날검을 남긴다. 정진하거라.’
“거 참….”
알 수 없다는 얼굴로 혀를 끌끌 차는 한율. 나는 이런 스승이 있다고 자랑하려 보여준 서한을 보고 어쩐 일로 그런 반응을 보이는지 알 수 없었지만, 하백은 기분이 조금 상했다.
“고약한 양반 같으니…. 초면인 사람한텐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굴면서 자기 제자라 이거지…? 이 정도면 이게 어디 아비가 아들한테 하는 거지, 스승이 제자한테 하는 거냐?”
불만이 가득한 투였지만 픽 웃는 얼굴에 그런 기색은 없었다. 하백은 조금 기분이 풀어져선 다시 그에게 환국에 대해 물었다.
“움…, 우리나라 왕은… 환인이라고 했어. 왕자는 환웅이었고. 그 밑에 여기로 치자면 영주급인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런 사람들을 단군이라고 했지.”
“단군….”
“이름은 생각 안 나지만 내가 살던 지역 신민들은 우리 단군을 굉장히 좋아했었어. 훌륭한 분이었던 것 같어. 밭도 같이 갈고, 약초도 같이 캐고…, 나도 한 번은 그 양반하고 같이 새참을 먹었던 기억이 있어.”
“새참…?”
아니, 그보다 영주가 평범한 민초들과 함께 농사일을 했다는 것이 더 신기했다. 도무지 믿기지 않는 이야기였다. 있어, 일하다 중간에 먹는 거. 쉬면서. 그걸 새참이라고 했는데…, 한율의 이야기가 계속됐다. 항상 그러지는 못했어. 누가 뭐래도 영주는 영주니까. 왕이라고, 왕. 그런 양반이 한가하게 밭갈고 풀 캐겠어? 할 일이 태산이었을텐데.
“굉장히 큰 나라였겠군요. 영주들이 있었다면….”
“타림 대륙 전체를 차지하고 있었으니까. 그래봐야 뭐… 분지 근방의 호수를 둘러싼 영토이긴 했지만…. 호수도 호수라기보단 바다였으니까, 거의… 아슈람에서 여기까지 온 거리쯤은 되려나? 호수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려면….”
“예에…?!!”
배운 바로는, 그 정도면 미키네오스 왕국의 삼분의 일 정도에 해당했다. 그렇게 큰 호수가 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이어지는 한율의 말에 집중했다. 어쨌든 망한 나라야.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버렸어. 한율의 목소리가 살짝 가라앉았다. 앞서 가던 융베리와 리타가 슬쩍 뒤돌아보았다.
“하백이 동족을 만나더니 아주 신이 났나보네요.”
“그렇겠지요. 한 번도 자기 뿌리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을 테니까….”
“설마 아직도 불안해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하하, 그럴 리가요. 전하를 믿습니다.”
융베리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대를 해치는 이는 한율이 아니다. 그에 대한 확신만으로도 그는 한율에 대한 긴장감을 깨끗이 털어버렸다. 그러나 자신이 죽는다는 말이 부정된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자신이 걱정하는 대규모의 학살은 벌어지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 융베리를 안심시켜주는 믿음이었다. 리타는 비록 마하수카의 경지에 오르지는 못했으나, 한 대륙을 아우르는 거인의 의기와 배포에 감탄해 마지않았다.
“저어….”
“…? 뭐, 또 묻고 싶은 게 있어?”
“그런데 왜, 신민이란 말을 쓰죠? 이전에도 언뜻 들은 적이 있었는데….”
“아아…, 별 거 아니야. 네 책에 있는 그 이상한 새 있지?”
“아, 예.”
“그 세 발 달린 까마귀가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새라고 했잖아.”
“네. 까마귀….”
언제 들어도 이상한 이름이었다. 그래서 환국 사람들은 자기네가 하늘의 자손이라고 믿었어. 그래서 신의 백성들이라고 신민이라고 하는 거야. 거기서나 쓰는 말이야. 갑갑한 이쪽 동네 사람들은 모르는 말이지. 담배를 뻐끔 뻐끔 피워대는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하백은 생각에 잠겼다.
‘굉장한 자부심이구나…. 이 사람도 그래. 완전히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아니 그보다 자와카 구루님의 투기 앞에서도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대들었잖아. 잘못한 게 없다고 해도 구루님의 투기 앞에서 그러기가 쉽지 않을 텐데….’
“저어….”
“이봐.”
다시 말을 거는데 이번엔 홱 돌아본다. 전의라든가 투기라든가, 그런 것은 전혀 없었지만 어째 위협적인 눈빛이었다.
“나 오늘 종일 떠들어서 좀 힘들거든? 담배 좀 피우자, 응?”
“아, 예…, 죄송합니다. 쉬세요.”
하백을 향해 등을 지고 돌아눕는 한율의 눈은 카마산의 막사 너머로 가 있었다. 보이진 않지만 저 너머에 리타가 있다. 그의 숙명이 그녀를 적이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그의 의지는 그녀를 주인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아직 어느 쪽도 그를 완전히 잠식하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 말해 그는 계속 싸우는 중이었다. 몇 해 전 자신을 떠나보내며 스승이 했던 말을 되새겼다.
- 이것들은 내가 쓰던 것들이다. 때가 되기 전에는 절대 이 검들은 뽑히지 않을 게다. 골수에 박힌 네 숙명을 스스로 씻어냈다고 확신이 설 때, 그 때 이 검을 뽑거라.
환인의 표식이 새겨진 낡은 장검 한 자루와 길이가 제각각인 네 자루의 검을 한 매듭으로 묶어 내어놓으며 그에게 이른 말이었다. 정 연장이 필요하다면 이걸 쓰라며 던져준 목검의 검집이 손 끝에 닿았다. 잠시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던 한율은 이내 담배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와. 네가 하던 검식이 어디가 어떻게 잘못됐는지 알려줄게.”
“아, 네!!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그의 인사에 대해 손사래라도 치듯하는 한율의 반응은 그러나, 겸양이 아니었다. 아직 하백은 그 뜻을 모르고 있었다. 그것이 정말 감사하기란 어려운 일이란 사실을. 어쨌든 둘은 숲 속으로 들어가 너른 평지를 찾았다. 산맥의 시작이 여기서부터 느껴지는 지형인지라 충분히 넓은 평지를 찾기란 쉽지 않았으나, 하백을 가르치기엔 딱 맞는 넓이의 평지가 하나 나타났다.
“음. 네 스승이 남겨준 그 검으로 한 번 해봐.”
“예.”
하백은 마음을 추스르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한율의 눈에 기이하다는 듯한 빛이 떠오르는 순간 번개같이 발검이 이루어졌다. 단날검을 다뤄본 일이 없는 것도 아니었으니, 크게 다를 건 없었다. 베는 방향만을 잡으면 될 일이었다. 크게 찌르고 들어간 후 호선을 그리며 하늘로 높이 치솟았다가 크게 내려베고, 뒤로 물러서며 응축된 탄력으로 튀어나 다시 검을 크게 휘둘렀다. 쉬잉 하는 소리가 나며 나무 하나가 서걱 잘려나가는데, 그 모양새가 제법 볼만했다.
“헤에…, 제법이구먼.”
검을 거두어들인 하백은 그의 말에 약간 열적은 웃음을 띠었지만 이어지는 말에 찬물을 확 뒤집어 쓴 기분이 되었다.
“넌 안 하는 게 낫겠다.”
“예…?!”
“쯧….”
혀를 차며 앞으로 나서는 한율이 그는 못마땅했다. 틀린 구석이 있다면 지적해주고 고치게끔 하는 것이 가르친다는 말 아닌가. 가르쳐 주겠다며 나선 사람의 말치곤 너무 자신을 막 대한다는 생각에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뒤로 물러섰다. 이런 사람에게 표정까지 감춰가며 예의를 차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잘 봐. 어떤 차이가 있는지.”
그래봐야 제 자랑이겠지. 당신한테 그다지 배울 생각이 없어. 하백은 의도적으로 그로부터 눈을 슬쩍 돌렸다. 그가 그러는 것을 한율은 아는지 모르는지, 아랑곳 않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나무 막대기 하나를 들었다.
‘막대기…?’
검세를 펼치는데 막대기를 든다. 들어본 적도 없는 일이다. 그저 자세나 말해줄 것 같으면 맨손이나 막대기나 세상에 다시 없을 명검이나 그게 그거다. 다시 눈길을 슬쩍 돌리는 하백의 귀에 한율의 음성이 들어왔다.
“한 열 발만 뒤로 물러나 있지?”
“…?”
무슨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시키는 대로 물러나 본다. 얼마나 요란하게 움직이려고 그러나. 하백은 남몰래 혀까지 차면서 약간 짜증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그리고,
후우웅~.
발검을 하는 듯했다. 굉장한 소리가 들렸다. 이건 공기를 가르는 소리 따위가 아니었다. 이어서 땅을 뒤흔들 정도로 엄청난 진동과 함께 쿠웅 하고 묵직한 소리가 발밑에서부터 느껴졌다. 하백은 저도 모르게 눈을 돌렸고, 그 순간 그의 눈에는 한율이 발검을 했던 방향의 저편 나뭇가지 몇 개가 잘려나가는 것이 들어왔다. 들어본 적도 없는 현상이다. 강하게 내찌르며 발을 내딛는 데서 또다시 굉음과 함께 땅이 흔들렸다. 어이지는 호선과 하늘까지 치솟는 기세, 그의 눈에는 스승의 언월도와 같은 거대한 칼날이 한율의 손에 들려있는 듯 보였다. 크게 내려베는 동작과 함께 다시 내딛는 발 밑의 땅이 움푹 꺼지며 이번엔 더 큰 소리가 났다. 움츠리는 한율의 거구에서 뭔가가 흐르듯 했다.
마지막까지 하백은 그의 동작 하나하나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박차고 나가는 곳에 있었던 돌덩어리가 부서졌고, 크게 휘두르는 막대기가 그 궤적에 따라 세 그루 나무의 밑둥, 줄기, 그리고 가지를 각각 잘라냈다.
‘말도 안돼….’
난생 처음 느껴보는 충격이었다. 스승인 자와카와 맞선다고 해도 밀리지 않을 것 같았다. 더구나 한율은 아직 서른을 갓 넘은 나이라고 들었다.
“왜 하지 말라는지 알 것 같어…?”
막대기를 내버리고 옷매무새를 대충 가다듬으며 다가오는 한율의 말에도 하백은 얼얼한 표정으로 서 있기만 했다.
“… ….”
“이 녀석 보게. 이봐.”
“아, 예!”
얼이 반쯤 나간 얼굴로 있던 하백은 한율을 보는 것인지 마는 것인지, 초점이 사라진 눈빛이었다. 카마산쯤 됐다는 놈이 이딴 걸 보고 놀라다니…. 다시 혀를 끌끌 차는 한율. 그저 내버려 두기로 했다. 이야기는 내일 하자.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 하백의 상태는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침울하다기보다는 완전히 침전된 듯 보였다. 이렇게 죽상을 하고 있어서야 뭘 가르쳐주려고 해도 그럴 흥이 나지 않았다.
‘아닐 말로 내가 무슨 이놈 스승이 된 것도 아니고…. 좀 아깝긴 하지만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둘까….’
무슨 생각을 하는지야 뻔하고. 반성도 하고 좌절도 하겠지만 아직 하백의 나이는 한율의 반절 정도였다. 그런 생각으로 낙심할만한 나이였지만, 그대로 두면 위험해질 수도 있는 나이였다.
‘흠….’
어쩐지 그대로 좌절해버릴 것 같지는 않았다. 며칠 보지는 않았으나, 그렇게 나약해 보이는 아이는 아니었다. 한율의 눈이 여전히 가슴 앞섶에 품고 있는 책자에 가 닿자 이내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을 접기로 마음먹는다.
‘뭐, 됐다…. 알아서 깨닫게 되겠지. 몰라도 제 복이고.’
“하백이….”
“…?”
돌아본 융베리가 하백의 침중한 안색을 보곤 걱정스러운 말을 꺼냈다. 무슨 일이 있나요? 저 자를 만나고는 이튿날부터 계속 안색이 안좋은데…. 글쎄요…. 리타도 염려는 되었지만, 이유는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한율이 무예를 오랜 시간 연마해온 사람이란 것은 웬만한 눈짐작만 있어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카마산으로 살아오면서 누구보다도 칼 한 자루에 자기 자신을 내던지며 살아온 하백이었으니, 한율과 같은 사람을 만나서 저 꼴이 될 이유라면 아마도 한율이 무척이나 강한 사람이기 때문일 수 있었다. 융베리는 리타의 말에 다른 생각을 꺼내들었다.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던 건 아닐까요? 뭐…, 아니면 동족이 겪었던 참상에 대한 이야기라든가, 그에 관련된 뭔가….”
“그럴 수도 있겠군요.”
“숙영을 시작하면 그 때 막사로 가 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론지니아까진 이제 이틀 정도가 남아 있었다. 레몽의 시중이 그들에게 다가와 내일이면 론도 산맥을 넘어야 하니 이르지만 여기서 숙영을 하는 것이 낫다.는 그의 뜻을 전했고, 곧 군사들이 행군을 멈추며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카마산들도 따라서 움직였다. 막사가 세워지고 여기저기서 저녁식사를 준비하는 불이 피워오르는 동안 한율은 산기슭까지 올라 담뱃대를 물고 앉았다. 수만 명의 행렬들이 멈춰서 숙영 준비를 하는 모습들이 제법 장관이었다. 참 좋은 구경한다…. 싱글싱글 웃으며 혼잣말을 하는 그의 귀에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까지 와 있으면 위험할 텐데요?”
“어…?”
한율은 저도 모르게 담뱃대를 놓칠 뻔했다. 이상하게도 이 키 큰 여자만 보면 그는 긴장이 되고 벽이 둘러쳐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자신의 숙명 속에서 타협할 수 없는 적이기에 그런 것만은 아닌 듯했다. 그런 적이라면 비단 그녀뿐만은 아니었다. 자신을 가르친 스승조차도 그에게는 적이었다. 아니 그녀보다도 더욱 강대한 적이었다. 도저히 이겨낼 수 없을 정도로.
“아직도 나를 적이라고 생각하나요?”
“크음….”
대뜸 하대를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쉬운 사람이 아니었다. 나이는 분명 하백과 비슷해보였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리타의 뒤에는 융베리가 함께 오고 있었다. 저녁땐데…, 식사들 안하십니까? 엉뚱한 그의 물음에 리타가 웃음을 터뜨렸고, 융베리도 다소 긴장을 풀며 소리내어 웃었다. 리타를 아무리 믿는다 해도 그를 바로 앞에서 보니 긴장감이 절로 일어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좀 앉을게요.”
“그러시구려.”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담뱃대를 무는 한율.
말없이 자신을 훑어보는 리타의 시선이 불편한지, 그는 뻐끔뻐끔이 아니라 아예 뻑뻑 담뱃대를 빨아 연기를 잔뜩 내뿜었다. 인상을 잔뜩 구긴 채로 그렇게 연기를 내뿜다가 신경질적으로 담뱃대를 탁탁 턴다. 이제보니 귀여운 구석도 있다. 나이는 자신보다 열 살 이상 많았지만, 리타는 그의 그런 행동이 좀 귀여워 보이기도 했다. 한동안 그에게서 말문이 열리지 않을 것 같아 그녀는 차근차근 한율을 뜯어보았다. 좀 덜 씻고, 행색이 지저분해서 그렇지 추한 얼굴은 아니다. 떡 벌어진 어깨와 탄탄한 가슴, 그리고 두꺼운 목과 몸통, 헐렁한 상의였지만 그 안에 있는 팔이 쇠기둥처럼 단단할 것 같았다. 뭘로 깎는지, 고르지 못하게 비죽비죽 돋은 거친 턱수염과 각진 턱선이 강인한 인상을 주고 있었다.
“좀 씻고 옷만 잘 입으면 인기 있겠어요.”
“관두슈. 떠돌이 잡객놈이 무슨….”
다시 연초를 채워넣으며 한율이 무슨 일이냐 물었다. 융베리는 그의 행동 하나하나를 새기듯 눈여겨 보고 있었다. 노인네의 시선이 달갑지 않았지만, 한율은 일단 신경쓰지 않았다. 그저 있는 것만으로도 신경쓰이는 이 아가씨가 있는 까닭이었다. 하백이 좀 이상해서요. 그쪽을 만나고 나선 계속 저 모양이라서….
“내버려 두시구려. 저땐 저럴 수 있으니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요, 젊은이…?”
어라, 뜻밖에도 목소리가 아주 시원하다. 머리까지 맑게 해 주는 듯, 쭈글쭈글한 늙은이의 목소리인데도 청량감이 돌았다.
“환국의 검식을 공부하기에, 되지 않을 일이라고 보여줬지요.”
“보여…줬다고요?”
고개를 끄덕이는 한율. 말이 이어졌다.
“댁들처럼 책이나 들고파는 사람들에게는 생소한 이야기일 테지만, 어쨌든 저 아이에게 환국의 검식은 안 맞아요. 근본이 맞질 않으니까.”
“그게 무슨 뜻이죠?”
“원래 환국의 검식이나 권각술, 그러니까 간단히 말해서 쌈박질하는 것들은 모두 그 생활 속에서 나오는 거요. 밭갈이, 물 긷기, 뭐 그런 것부터 시작해서. 소몰이도 그렇고…. 그렇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생활 자체가 다른 곳에서 자랐으니 안 된다는 거지요. 보아하니 아슈람이란 데서 가르치는 쌈박질도 그저 주먹 딴딴하게 만들고 발길질 잘하는 것만 같진 않은데…, 생활 습성이 다르면 몸에 축적되는 기운도 다른 법이외다.”
“그렇군요. 그런 게 있었군요.”
융베리는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하백이 좀 안됐군요.”
“안될 것 없시다.”
“… ….”
“노인장도 아시겠지만…, 망하고 없는 나라. 세상 천지를 다 뒤져봐도 동족 하나 만나기가 벌판에서 벼락 맞아 죽느니보다 어려운 일이요. 기억에도 없는 뿌리를 찾는답시고 힘쓰느니 제 마음속에 뿌리 내릴 곳을 찾아야지요.”
심지가 굳기로 치자면 하백보다 그 뿌리가 백만 배는 더 깊고 강인해 보였다. 리타는 그가 점점 더 마음에 들었다. 물론 나이가 있고, 경지에 이르렀으니 그럴수도 있겠으나, 지금 그가 내뱉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는 사람의 냄새가 짙게 풍기고 있었다.
“사방 천지가 난리굿이니, 지금 할 일부터 차근차근 해 나가야 하지 않겠수.”
단순하고도 분명한 논리였다. 융베리는 그에 대한 긴장감이 풀어지는 걸 느꼈다. 그것은 한율이 경지에 이르러서도 아니고, 리타를 믿어서도 아니었다.
“이름이 한율이라고 했소?”
“….”
“환국 말로 큰 법도, 자연의 이치라는 뜻이지요?”
“…?! 우리말 아십니까?!”
이번엔 리타도 깜짝 놀랐다. 학식으로 치자면 역사에 길이 남을 대석학이라지만, 그가 설마 대륙 저 너머의 언어까지 알고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융베리가 민망하다는 얼굴로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그리 놀라실 것들 없습니다. 나는 종교학자이다보니, 세상에 있는 많은 종교와 사상들을 수집하고 연구했지요. 그러다 자연스럽게 환국 말을 조금은 알게 됐습니다. 우리 쪽에선 워낙 희귀한 자료이기도 하고요.”
“하여간…, 구루님도 참 대단하세요.”
“전하께서 제게 하실 말씀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응? 전하라니…? 좀 익숙한 표현이었다 싶어 물어보려던 순간, 갑작스럽게 한율의 머릿속에 강렬하게 울리는 소리가 있었다. 적이다, 적이다, 적이다, 적이다. 메아리치듯 반복해서 그 소리는 울렸다. 다른 게 있다면 점점 커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죽여, 죽여라, 죽여라. 적이다. 죽여라.
“왜 그래요?”
“이봐, 젊은이. 어디 안좋은가?!”
갑가지 머리를 감싼 채 식은땀을 흘리는 한율을 보며 리타와 융베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물어왔다. 뭔가 달랐다. 의식은 또렷했는데, 그 소리는 점점 커지고 시끄럽게 다가왔다. 자신을 향해 한 점의 기세도 내뻗지 않는 리타를 보고 한율은 확신했다. 이건 내 안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다.
“내려가, 어서! 사람들을 대피시켜!!”
“네…?”
“온다…! 마도들이야…!!”
“마도…! 마도…?!!”
“빨리 내려가!! 놈들의 목표는 나야!!”
“그 무슨….”
“어서 꺼지라고 여기서!!!”
머뭇거리던 그들은 돌아보며 벼락처럼 소리치는 한율의 기세에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다. 아무리 마하수카의 경지를 넘어섰어도, 시대를 풍미한 대석학이라도 그의 기세는 압도적이었다. 온 몸에서 투기가 뭉클뭉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등에 다섯 자루의 검을 짊어지고, 목검을 허리춤에 꽂아 뒤로 돌려놓았다. 시커먼 파멸의 기운이 숲 안쪽으로부터 몰려오고 있었다. 언덕 아래에서 카마산들이 분분히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한율의 온 신경은 전방에 쏠려 있었다.
“무슨 소리야, 마도들이라니?!”
“여긴 론도 산맥 끄트머리잖아.”
“마도들은 산맥 뿌리 쪽에 있는 거 아니었어?”
하백도 경황중에 검을 챙겨들긴 했지만, 정신이 집중되지 않았다.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론도 산맥의 산기슭에 즈음해서 숙영지를 정하긴 했지만, 마도들이 나타날 만한 지역은 아니었으니. 그러던 그의 눈에 단신으로 숲 앞에 버티고 서 있는 한율이 들어왔다. 그리고 언덕에서 황급히 내려오는 리타와 융베리가 보였다.
“구루님과 리타야! 먼저 구루님부터 모셔와!”
하백은 그렇게 외치며 한달음에 언덕까지 달려갔다. 홀로 맞서는 건 위험하다. 한율을 도와야 했다. 그는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함께 하겠…!”
말을 마치기도 전에 한율의 등짝이 사라져버렸다. 숲속에서 꾸역꾸역 나오는 소름끼치는 적의와 살의 속으로 한율은 혼자 몸을 날렸다. 위험하다고 소리치려던 하백은 마도들을 본 순간 움찔거렸다. 그들을 직접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는 실전경험이 거의 없었다. 실력으로만 치자면야 오로지 살의와 식욕만으로 움직이는 그들을 이겨내지 못할 리 없었건만, 이 정도의 살의를 그는 단 한 번도 경험해 본 일이 없는 것이었다.
쩌억 하는 소리들이 연속해서 터져나오고, 마도의 무리들 속에서 피분수가 솟구쳤다. 그렇게 느꼈다. 그게 피인지 뭔지 알 길은 없었다. 녹색의 끈적한 액체들이 여기저기서 솟구쳐 올랐고, 동시에 쇠를 긁어내듯한 징그러운 괴성이 그 안에서 여러 겹으로 난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사나운 들짐승처럼 움직이고 있는 한율이 언뜻언뜻 보였다. 그는 맨손이었다.
“이게 무슨 소리야?”
“정말 마도들이 오긴 온 거야?!”
“하백! 거기서 뭐 하고 있어?!”
언덕 위의 구릉에서 벌어지고 있는 격전이었다. 이상하게도 마도들은 한율의 주위를 꾸역꾸역 둘러쌀 뿐, 더 이상 내려오지는 않고 있었다. 바로 아래에서 진형을 갖추던 카마산들의 눈에 그 모습이 보일 리가 없었다. 단지 괴상한 비명소리와 한율의 맨손 공격에 마도들의 육신이 부서지는 파열음만이 언덕 아래로 간간이 내려왔다.
청각이 예민한 카마산들이 이 소리를 놓칠 리 없었다. 그들은 하백의 모습과, 언덕 위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몇 명의 병력이 모여 올라오기 위해 진을 갖추었다. 그 때였다. 반대편의 전방으로부터 시커먼 한 무리가 꾸역꾸역 몰려오는 모습이 모두의 눈에 들어왔다. 말할 것도 없이 마도의 무리들. 그들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던 사절단의 호위대장이 급히 칼을 뽑아들며 명령을 내렸다.
“호위대는 진형을 갖춰라!! 수비대형 일자방패진!!”
“어서 움직여, 어서!!”
군사들은 분주하게 움직이며 빠르게 진형을 갖추었다. 훈련이 잘 된 모습이었다. 그들은 순식간에 커다란 방패를 붙이고 다섯 겹에 걸친 일자형의 진을 이룬 채 창을 겨눴다.
“궁수는 발사하라!! 더 이상 몰려오지 못하게 최대한 속사하라!!”
다섯 겹의 방패진, 그들의 머리 위로 수백 발의 화살이 긴 호선들을 그리며 나아갔다. 이미 근거리까지 몰려 온 적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후방에 있던 마도들 사이로 떨어지는 화살이 적잖은 숫자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뭘 보고 있어!! 어서 올라가서 둘러싸!!”
자와카로부터 지휘를 인계받은 라이반이 버럭 호통을 치자 언덕 아래에서 우왕좌왕하던 카마산들이 정신이 번쩍 든 듯 언덕 위로 재빨리 오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오십 명에 가까운 병력이 일제히 언덕에 올랐고, 그들은 진형을 갖추기보다는 먼저 이 이상한 광경에 멈춰서기부터 했다. 꾸역꾸역 몰려드는 마도들, 그 안에서 활화산같은 살의와 적의, 그리고 동시에 파열음과 괴성이 솟구치고 있었다.
“이놈들이…!!”
잠시 반대편 전방을 보고 호위대의 선전을 확인한 라이반은 다시 언덕위를 보고는 이를 부득 갈며 얼른 뛰어올라갔다. 뭐 하는 거야, 이놈들아!! 당장 진세 갖추지 않고…!!
“저기….”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가리키는 카마산의 손 끝에, 수백의 마도들이 뒤엉켜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칼이며 창 등 각자의 병장기를 들고 분연히 뛰어올라온 그들에겐 관심도 없다는 듯, 그들은 그 사이에서 흘깃 흘깃 보이는 한율만을 목표로 미친듯이 날뛰고 있었다.
“이게 대체….”
호위대장은 앞뒤로 왔다갔다 하며 군사들을 독려하고 있었다. 화살은 계속해서 날아갔고, 이미 적의 선두는 방어진과 격돌해 있었다. 군사들은 서로 앞에 있는 동료를 방패로 받쳐주며 온 힘을 다해 버텼다.
“버텨라!! 죽을 힘을 다해 버텨!! 후방 기마대는 어떻게 됐나?! 측면으로 돌파하라고 지시한 게 언젠데 아직도 기척이 없어?!!”
“이미 전령이 행렬 뒤쪽으로 갔습니다! 지금쯤 오고 있을 겁니다!!”
오만이 훌쩍 넘는 행렬의 뒤쪽이었다. 지척에 있는 것처럼 즉시 반응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호위대장은 마음이 급했다. 적수가 너무 많았다. 방어진을 다섯 겹으로 펼쳤으니 쉽게 뚫리지야 않겠지만, 이미 궁병들은 쓸모가 없었다. 수천의 마도들이 사정거리 안쪽으로 완전히 들어와버렸으니, 남은 것은 백병전이었다.
“백병전이다!! 방어진은 물러서라!! 물러서!! 막사를 에워싼다! 원형진!!”
조금이라도 늦으면 적이 방어진의 측면을 돌아 들이칠 상황이었다. 호위대장은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조금 안심이 되었다. 무엇에 홀린 듯 살의로 똘똘 뭉친 마도들이었지만, 수적 우세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한 채 그들은 정면돌파만을 고집하고 있는 것이었다. 마침 오백 기의 기마대가 후방에서 함성을 지르며 질주해오고 있었다. 기마대 오백이면 이천의 보병도 상대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이 곳은 비교적 평지다. 승산이 있었다.
“됐어!!”
호위대장은 승기를 잡았다 확신하며 먼저 술렁거렸던 반대편 후방의 언덕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기엔 뭔가 좀 이상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다. 멀찍이 있는 곳이긴 했지만 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수십 명의 카마산들이 멀쩡히 병장기를 들고 서 있었고, 그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 마도의 무리들이 한데 뒤엉켜 야단법석이었다.
“대체 저게 뭐야…?”
뭉클뭉클 솟아나는 소름끼치는 기운이 그의 안면을 따갑게 찌르는 듯했다. 악마같은 놈들…. 이를 부득 갈며 검을 쥔 손에 힘을 주는 순간 그의 뒤통수로도 그 기운이 후려쳐 오기 시작했다. 동시에 메아리치는 소리가 있었다. 적이다. 적이다. 적이다. 적이다. 죽여, 적이다. 죽여라, 죽여. 한율의 머릿속에 울렸던 것과 같은 소리. 그리고 더 커진 소리였다. 그것은 방패진을 펴고 버티는 군사들에게도, 병장기를 바꿔쥐고 백병전을 준비하는 다른 군사들에게도 똑같이 들려왔다. 심지어 막사 쪽으로 피신해 있는 레몽과 다른 사절단 일행에게도, 마치 산의 울림처럼 똑같이 퍼져갔다.
“이…이게 무슨 소리야…?”
호위대장의 표정이 저도 모르게 공포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사절단과 귀환자 행렬은 아슈람을 떠나온 지 보름 정도가 지나 대륙의 극동 지역에 다다랐다. 아직 아쿠아리아스 대륙을 벗어난 건 아니었지만, 론도 산맥의 끝자락이 이 곳에 있는 까닭에 미키네오스에선 버젓이 근방에 행정구역까지 따로 두고, 영주에게 작위를 내리기까지 했다.
“뭐 이런 사람들이 다 있습니까? 다른 대륙에까지 자기 땅이라면서….”
“그럴만한 이유가 다 있네. 괘념치 말게.”
융베리의 말에 자와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뒤를 힐끗 돌아보았다. 지난번에 언뜻 마주쳤던 산등성이에서의 그 여행자. 그로부터 느꼈던 그 묘한 기운이 다시 느껴지고 있었다. 무예의 강약을 떠난,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느낌. 분명 그에게서도 리타처럼 마하수카의 경지에 오른 이들의 기풍은 느껴졌으나, 그와는 또 사뭇 달랐다.
“왜 그러나?”
“구루께서도 알고 계시지요?”
융베리는 무거운 안색으로 으음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전에 봤던 그의 알 수 없는 맹목적인 공포감. 자와카는 이유를 알고 싶었지만 물어볼 수가 없었다. 누군가에게 그토록 두려움을 느끼는 걸 그는 백수에 가까운 세월을 살면서도 본 일이 없었다. 그래서 더 묻기가 어려웠다. 직접 알아봐야겠군. 그렇게 다짐했다. 그를 찾아내는 일은 어렵지 않았으니까. 한율은 소집령이 떨어진 다음날부터 매일밤 카마산의 막사 근처를 배회하고 있었다. 위치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그 묘한 기운이 밤만 되면 더 가까이에서 느껴졌기에 그렇다. 그날 밤도 그랬다.
“차핫~!”
힘찬 기합과 함께 검이 앞으로 쭉 뻗어나갔다. 그리고 이어서 검끝이 그려내는 호선, 아래로 늘어뜨리는 검끝이 그대로 하늘로 치고 올라가고, 다시 뒤를 향해 내리쳐졌다.
흐음….
한쪽 다리를 꺾으며 급격히 자세를 낮추었다가 용수철처럼 튀어나가는 하백의 몸이 한바퀴 회전하며 검격에 위력을 더했다. 쉬잉 하고 공기를 갈라지는 소리가 나며 대번에 사람 허리만한 나무 줄기가 깨끗하게 베어져 나갔다.
하아…, 하아….
몇 번째 그 동작을 반복하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검세 자체는 틀리지 않았는데, 어쩐지 뭔가가 미진했다. 땀에 절은 옷매무새를 바로 하며 다시 책을 들었다.
역시…! 지켜보던 두 눈이 반짝였다. 한율의 눈에 들어온 건 고향의 문양이었다. 저 미소년은 틀림없이 자신과 같은 민족이었다. 살아남은 이가 거의 없는 그 살겁에서 누가 어떻게 살아서 탈주를 했는지 몰라도, 아마 그 때쯤 태어난 아이가 아닐까, 그렇게 생각되었다. 하백이 며칠째 반복해서 연습하는 검세는 바로 그가 익혔던 고향의 검식이었다.
‘어차피 거들기로 했으니…, 동족 상봉도 한 번 해볼까나….’
그렇게 마음먹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몸이 붕 뜨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졌다. 동시에 몸이 굳은 듯 움직이질 못했다. 누군가 목덜미에 강력한 기운을 집중해서 움켜잡았던 것이다. 한율은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대머리 아저씨…!’
“누군데 매일밤 여길 숨어들어오는가?”
굉장한 투기를 발산하는 목소리가 뒤통수를 후려갈기듯 들려왔다. 나직했지만 압도적인 음성이었다. 아…저…저기….
“구루님…!”
하백은 한쪽 풀숲에서 커다란 사내를 한손으로 쥔 채 모습을 드러내는 자와카를 보고는 얼른 검을 접은 뒤 예를 취했다. 자와카는 물론 컸지만 지금 그의 손에 잡혀 들어오는 이도 거구였다. 키가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보이는데다, 어깨나 가슴팍이 매우 두꺼워보였다. 한율은 하백의 발치에 내동댕이쳐졌다.
“아야! 아이~씨, 진짜…!!”
“말하라. 그대는 누군데 매일밤 이 곳으로 숨어들어오는가?”
이제보니 투기는 대단했지만 전의 자체는 별로 없어보였다. 죄 지은 게 없으니 한율도 별반 위축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그만한 투기라면 겪어볼 만큼 겪어본 터였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한테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대해도 되는 거요?! 아슈람의 무신장쯤이나 되는 양반이…!!”
투덜대며 얼른 일어나 앉는 한율의 말투, 무신장의 투기를 보고도 위축되지 않는 걸 보면 굉장히 강한가보다 싶었다. 하백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누구냐고 물었네. 아슈람에서 오지도 않았을 텐데…?”
“그야…, 뭐…. 며칠 전에 봤으니 아시겠지.”
잠시 뜸을 들이던 한율은 팔짱을 끼면서 자와카를 똑바로 쳐다봤다.
“난 한율이라고 합니다. 한율. 여기 있는 이 애송이랑은 같은 데서 왔지요. 카마산이 호위대를 한다기에 동행한 김에 좀 거들어볼까 했시다. 됐수?!!!”
“환국에서 오셨다고요?!!”
깜짝 놀란 하백이 먼저 물었고, 고개를 끄덕이는 한율을 향해 자와카도 놀란 얼굴로 진위여부를 물었다. 동족 상봉 좀 하겠다는데, 거 참…. 한율은 머리를 벅벅 긁더니 하백을 돌아보며 검식에 대해 말했다.
“이봐, 애송이. 단날검으로 펴야 할 검식을 양날검 갖고 연습을 하니, 그게 늘겠어? 디딤발의 강약도 틀렸어.”
“…예?”
“…!”
자와카의 얼굴이 굳어졌다. 한율이 말하는 것은 틀림없이 북방 타림대륙의 검식이었다. 보법의 강약과 속도, 무엇보다 타림대륙에선 한쪽에만 날이 선, 약간 휘어진 형태의 검을 사용한다고 들었다. 갑자기 나타난 동족, 그리고 자신의 검식에 대한 거침없는 평가. 하백 또한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그대로 굳어져 있었다.
보라, 천상의 종복들이여. 하늘의 가신들이여.
그대들, 땅의 주인들이여.
때가 이르러
하늘의 권능을 지닌 자 그대들에게 내려오리라.
종된 자로서 주인된 이를 알아보지 못하여
주인을 거스르는 죄가 창궐할지니
하늘을 읽는 죄인을 다스리고저 내려진 그대들,
주인의 분노를 마땅히 헤아릴 것이며
주인의 철퇴를 마땅히 행사할 것이며
마침내 죄를 사하게 할 것이니
종된 자의 종됨을 참되게 할 것이며
주인된 자의 주인됨을 참되게 할 지니라.
그대 하늘을 읽는 자여, 천주의 대역죄인이여.
태초의 옳음을 행할 때가 올지니
자연을 지배하는 자들의 어리석음은
그대들의 눈앞에 나타날 것이다.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다만 정해진 것은 그대들을 위함이
아니라 그들을 위함이라.
하늘과 땅, 삶과 죽음의 균형이
깨어지는 날, 그대들
조화의 칼을 들고 분연히 일어나
맞서 싸워야 하리라.
이에 하늘에서 내려오는 이들 있으니
그대들, 자비를 베풀지 말 지니라.
마법진을 펼쳐본 융베리는 또다시 불안에 떨고 있었다. 하백의 동족이 나타났다. 그가 바로 산등성이의 남자였다. 환국 신민들의 몰살은 틀림없이 그와 직결되어 있었다. 융베리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에게 자비란 없다. 차별도 없어. 오직 무차별적인 학살과 파괴다. 그건 그의 숙명이야…!’
진정이 되지 않았다. 리타의 말에 희망을 걸어볼 수도 있겠으나, 그렇다면 지금이 바로 맞서 싸워야 할 때였다. 그러나 이 같은 상황은 아니었다. 적어도 그가 예감했던 미래의 그 싸움은 이런 형태는 아니었다.
‘전하의 예상이 맞겠지…, 이미 마하수카의 영역에 계시는 분이니 그 분의 말씀이 맞겠지….’
자와카는 자와카대로 의문에 싸여 있었다. 대체 그가 뭐기에, 하백의 동족이고, 그 무예를 익힌 자라는 것 외에 특별할 것이 없었다. 말하는 품새 하며 행색까지, 그냥 보면 영락없는 행랑객에 지나지 않았다. 오히려 소탈해보이고 사람 좋아보이기까지 한 젊은이였다. 그런 그에게서 느껴지는 묘한 이질감, 그리고 융베리가 보여주는 그 절대적인 공포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백의 동족 때문입니까…?”
“…? 예, 전하.”
등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그는 얼른 예를 갖추며 한걸음 물러섰다. 리타는 말없이 그를 지나쳐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융베리가 일어나 그녀에게 예를 갖추었고, 그녀는 자리에 앉으며 말문을 열었다.
“융베리 구루께선 너무 염려하지 않으셔도 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시선이 닿자 자와카는 직감적으로 그녀에게서 명령이 나올 것을 알아채곤 즉시 무릎을 꿇었다.
“그대의 임무는 여기까지입니다. 즉시 복귀하여 황명을 받드세요. 폐하께서 새 임무를 주실 겁니다.”
“그리하겠사옵니다. 부디 무사히 황도로 귀환하소서.”
극존칭이었다. 자와카는 그 말과 함께 그 큰 몸을 일으켜 오체복지의 예를 올리곤 막사를 나섰다.
“제가 알기로….”
“…?”
“몸을 엎드리는 것은 황제를 향해서만 하는 것 아니었습니까?”
그가 나선 뒤 융베리가 묻자 리타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지었다. 그는 그런 사람입니다. 지금 했던 건 제가 아니라 황명 자체였지요. 융베리는 이전에 들었던 황제의 권위를 새삼 실감하며 놀랍다는 표정이었다.
“황제의 권위는…, 강한 군사력과 권력에서 나오는 게 아닙니다.”
“…음….”
“신민들의 안정과 번영이지요. 그들의 칭송이 바로 황제의 권위입니다.”
“그렇군요. 참…다릅니다. 언제나 느끼지만 말이지요.”
이야기가 다른 데로 새긴 했지만, 융베리는 리타의 말에 기대를 걸어보기로 한 것이었다. 마하수카의 경지, 그 중에서도 리타는 이미 생사의 경계를 뛰어넘은 듯 보였다. 놀라운 분이십니다, 전하께서는…. 물론이죠. 얼른 받아치는 리타의 말에 융베리는 남아있던 긴장감마저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이튿날 다시 출발한 일행이 향하는 곳은 론지니아였다. 엿새 정도의 길이라고 하니, 이제 아쿠아리아스 대륙은 거의 벗어났다고 보아야 했다. 한 가지 경계할 것은 론지니아로 들어가는 입구였다. 론도 산맥의 끝자락이었으나, 워낙 산세가 험준한 곳인지라 끝자락이라 해도 그 곳을 통과할 수 있는 평지는 기껏해야 널찍한 구릉, 아슈람의 연무장만한 구릉이 전부였다.
“웬 칼인가?”
“예?”
“그거, 그거….”
하백은 말에서 내려 한율과 함께 걷고 있었다. 기왕에 동족을 만난 김에 이야기도 듣고 싶었고, 무엇보다 그에게서 자신의 부족한 검세에 도움을 받고 싶기도 해서였다. 아쉬운 것은 전날 밤 자와카가 떠난 일이었다. 막사에 돌아와 보니, 자와카의 검과 서한이 남겨져 있었다.
‘하백 보거라. 나는 내 나라로 돌아간다. 황명을 받아 떠나는 것이니 직접 만나지 못하고 돌아가야 하는 것이 아쉽구나. 너는 재능이 뛰어나진 않으나 누구보다도 곧은 심지를 가진 아이다. 나는 오히려 그것이 무예에서 가장 중요한 재능이라고 생각한다. 네 마음을 믿고, 너의 신념과 소신대로 하거라. 멀지 않은 장래에 너에게 많은 혼란이 올 것이다. 그 때 지금 이 말을 기억하거라. 섣불리 남의 말을 듣지도 말고, 섣불리 남의 말을 의심하지도 말거라.
항상 너의 안녕과 발전을 기원하마. 또 만나게 된다면 지금과는 다른 네가 되어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단날검을 남긴다. 정진하거라.’
“거 참….”
알 수 없다는 얼굴로 혀를 끌끌 차는 한율. 나는 이런 스승이 있다고 자랑하려 보여준 서한을 보고 어쩐 일로 그런 반응을 보이는지 알 수 없었지만, 하백은 기분이 조금 상했다.
“고약한 양반 같으니…. 초면인 사람한텐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굴면서 자기 제자라 이거지…? 이 정도면 이게 어디 아비가 아들한테 하는 거지, 스승이 제자한테 하는 거냐?”
불만이 가득한 투였지만 픽 웃는 얼굴에 그런 기색은 없었다. 하백은 조금 기분이 풀어져선 다시 그에게 환국에 대해 물었다.
“움…, 우리나라 왕은… 환인이라고 했어. 왕자는 환웅이었고. 그 밑에 여기로 치자면 영주급인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런 사람들을 단군이라고 했지.”
“단군….”
“이름은 생각 안 나지만 내가 살던 지역 신민들은 우리 단군을 굉장히 좋아했었어. 훌륭한 분이었던 것 같어. 밭도 같이 갈고, 약초도 같이 캐고…, 나도 한 번은 그 양반하고 같이 새참을 먹었던 기억이 있어.”
“새참…?”
아니, 그보다 영주가 평범한 민초들과 함께 농사일을 했다는 것이 더 신기했다. 도무지 믿기지 않는 이야기였다. 있어, 일하다 중간에 먹는 거. 쉬면서. 그걸 새참이라고 했는데…, 한율의 이야기가 계속됐다. 항상 그러지는 못했어. 누가 뭐래도 영주는 영주니까. 왕이라고, 왕. 그런 양반이 한가하게 밭갈고 풀 캐겠어? 할 일이 태산이었을텐데.
“굉장히 큰 나라였겠군요. 영주들이 있었다면….”
“타림 대륙 전체를 차지하고 있었으니까. 그래봐야 뭐… 분지 근방의 호수를 둘러싼 영토이긴 했지만…. 호수도 호수라기보단 바다였으니까, 거의… 아슈람에서 여기까지 온 거리쯤은 되려나? 호수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려면….”
“예에…?!!”
배운 바로는, 그 정도면 미키네오스 왕국의 삼분의 일 정도에 해당했다. 그렇게 큰 호수가 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이어지는 한율의 말에 집중했다. 어쨌든 망한 나라야.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버렸어. 한율의 목소리가 살짝 가라앉았다. 앞서 가던 융베리와 리타가 슬쩍 뒤돌아보았다.
“하백이 동족을 만나더니 아주 신이 났나보네요.”
“그렇겠지요. 한 번도 자기 뿌리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을 테니까….”
“설마 아직도 불안해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하하, 그럴 리가요. 전하를 믿습니다.”
융베리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대를 해치는 이는 한율이 아니다. 그에 대한 확신만으로도 그는 한율에 대한 긴장감을 깨끗이 털어버렸다. 그러나 자신이 죽는다는 말이 부정된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자신이 걱정하는 대규모의 학살은 벌어지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 융베리를 안심시켜주는 믿음이었다. 리타는 비록 마하수카의 경지에 오르지는 못했으나, 한 대륙을 아우르는 거인의 의기와 배포에 감탄해 마지않았다.
“저어….”
“…? 뭐, 또 묻고 싶은 게 있어?”
“그런데 왜, 신민이란 말을 쓰죠? 이전에도 언뜻 들은 적이 있었는데….”
“아아…, 별 거 아니야. 네 책에 있는 그 이상한 새 있지?”
“아, 예.”
“그 세 발 달린 까마귀가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새라고 했잖아.”
“네. 까마귀….”
언제 들어도 이상한 이름이었다. 그래서 환국 사람들은 자기네가 하늘의 자손이라고 믿었어. 그래서 신의 백성들이라고 신민이라고 하는 거야. 거기서나 쓰는 말이야. 갑갑한 이쪽 동네 사람들은 모르는 말이지. 담배를 뻐끔 뻐끔 피워대는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하백은 생각에 잠겼다.
‘굉장한 자부심이구나…. 이 사람도 그래. 완전히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아니 그보다 자와카 구루님의 투기 앞에서도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대들었잖아. 잘못한 게 없다고 해도 구루님의 투기 앞에서 그러기가 쉽지 않을 텐데….’
“저어….”
“이봐.”
다시 말을 거는데 이번엔 홱 돌아본다. 전의라든가 투기라든가, 그런 것은 전혀 없었지만 어째 위협적인 눈빛이었다.
“나 오늘 종일 떠들어서 좀 힘들거든? 담배 좀 피우자, 응?”
“아, 예…, 죄송합니다. 쉬세요.”
하백을 향해 등을 지고 돌아눕는 한율의 눈은 카마산의 막사 너머로 가 있었다. 보이진 않지만 저 너머에 리타가 있다. 그의 숙명이 그녀를 적이라고 말하고 있었지만, 그의 의지는 그녀를 주인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아직 어느 쪽도 그를 완전히 잠식하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 말해 그는 계속 싸우는 중이었다. 몇 해 전 자신을 떠나보내며 스승이 했던 말을 되새겼다.
- 이것들은 내가 쓰던 것들이다. 때가 되기 전에는 절대 이 검들은 뽑히지 않을 게다. 골수에 박힌 네 숙명을 스스로 씻어냈다고 확신이 설 때, 그 때 이 검을 뽑거라.
환인의 표식이 새겨진 낡은 장검 한 자루와 길이가 제각각인 네 자루의 검을 한 매듭으로 묶어 내어놓으며 그에게 이른 말이었다. 정 연장이 필요하다면 이걸 쓰라며 던져준 목검의 검집이 손 끝에 닿았다. 잠시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던 한율은 이내 담배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와. 네가 하던 검식이 어디가 어떻게 잘못됐는지 알려줄게.”
“아, 네!! 감사합니다!”
“감사는 무슨….”
그의 인사에 대해 손사래라도 치듯하는 한율의 반응은 그러나, 겸양이 아니었다. 아직 하백은 그 뜻을 모르고 있었다. 그것이 정말 감사하기란 어려운 일이란 사실을. 어쨌든 둘은 숲 속으로 들어가 너른 평지를 찾았다. 산맥의 시작이 여기서부터 느껴지는 지형인지라 충분히 넓은 평지를 찾기란 쉽지 않았으나, 하백을 가르치기엔 딱 맞는 넓이의 평지가 하나 나타났다.
“음. 네 스승이 남겨준 그 검으로 한 번 해봐.”
“예.”
하백은 마음을 추스르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한율의 눈에 기이하다는 듯한 빛이 떠오르는 순간 번개같이 발검이 이루어졌다. 단날검을 다뤄본 일이 없는 것도 아니었으니, 크게 다를 건 없었다. 베는 방향만을 잡으면 될 일이었다. 크게 찌르고 들어간 후 호선을 그리며 하늘로 높이 치솟았다가 크게 내려베고, 뒤로 물러서며 응축된 탄력으로 튀어나 다시 검을 크게 휘둘렀다. 쉬잉 하는 소리가 나며 나무 하나가 서걱 잘려나가는데, 그 모양새가 제법 볼만했다.
“헤에…, 제법이구먼.”
검을 거두어들인 하백은 그의 말에 약간 열적은 웃음을 띠었지만 이어지는 말에 찬물을 확 뒤집어 쓴 기분이 되었다.
“넌 안 하는 게 낫겠다.”
“예…?!”
“쯧….”
혀를 차며 앞으로 나서는 한율이 그는 못마땅했다. 틀린 구석이 있다면 지적해주고 고치게끔 하는 것이 가르친다는 말 아닌가. 가르쳐 주겠다며 나선 사람의 말치곤 너무 자신을 막 대한다는 생각에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뒤로 물러섰다. 이런 사람에게 표정까지 감춰가며 예의를 차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잘 봐. 어떤 차이가 있는지.”
그래봐야 제 자랑이겠지. 당신한테 그다지 배울 생각이 없어. 하백은 의도적으로 그로부터 눈을 슬쩍 돌렸다. 그가 그러는 것을 한율은 아는지 모르는지, 아랑곳 않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나무 막대기 하나를 들었다.
‘막대기…?’
검세를 펼치는데 막대기를 든다. 들어본 적도 없는 일이다. 그저 자세나 말해줄 것 같으면 맨손이나 막대기나 세상에 다시 없을 명검이나 그게 그거다. 다시 눈길을 슬쩍 돌리는 하백의 귀에 한율의 음성이 들어왔다.
“한 열 발만 뒤로 물러나 있지?”
“…?”
무슨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시키는 대로 물러나 본다. 얼마나 요란하게 움직이려고 그러나. 하백은 남몰래 혀까지 차면서 약간 짜증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그리고,
후우웅~.
발검을 하는 듯했다. 굉장한 소리가 들렸다. 이건 공기를 가르는 소리 따위가 아니었다. 이어서 땅을 뒤흔들 정도로 엄청난 진동과 함께 쿠웅 하고 묵직한 소리가 발밑에서부터 느껴졌다. 하백은 저도 모르게 눈을 돌렸고, 그 순간 그의 눈에는 한율이 발검을 했던 방향의 저편 나뭇가지 몇 개가 잘려나가는 것이 들어왔다. 들어본 적도 없는 현상이다. 강하게 내찌르며 발을 내딛는 데서 또다시 굉음과 함께 땅이 흔들렸다. 어이지는 호선과 하늘까지 치솟는 기세, 그의 눈에는 스승의 언월도와 같은 거대한 칼날이 한율의 손에 들려있는 듯 보였다. 크게 내려베는 동작과 함께 다시 내딛는 발 밑의 땅이 움푹 꺼지며 이번엔 더 큰 소리가 났다. 움츠리는 한율의 거구에서 뭔가가 흐르듯 했다.
마지막까지 하백은 그의 동작 하나하나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박차고 나가는 곳에 있었던 돌덩어리가 부서졌고, 크게 휘두르는 막대기가 그 궤적에 따라 세 그루 나무의 밑둥, 줄기, 그리고 가지를 각각 잘라냈다.
‘말도 안돼….’
난생 처음 느껴보는 충격이었다. 스승인 자와카와 맞선다고 해도 밀리지 않을 것 같았다. 더구나 한율은 아직 서른을 갓 넘은 나이라고 들었다.
“왜 하지 말라는지 알 것 같어…?”
막대기를 내버리고 옷매무새를 대충 가다듬으며 다가오는 한율의 말에도 하백은 얼얼한 표정으로 서 있기만 했다.
“… ….”
“이 녀석 보게. 이봐.”
“아, 예!”
얼이 반쯤 나간 얼굴로 있던 하백은 한율을 보는 것인지 마는 것인지, 초점이 사라진 눈빛이었다. 카마산쯤 됐다는 놈이 이딴 걸 보고 놀라다니…. 다시 혀를 끌끌 차는 한율. 그저 내버려 두기로 했다. 이야기는 내일 하자.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도 하백의 상태는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침울하다기보다는 완전히 침전된 듯 보였다. 이렇게 죽상을 하고 있어서야 뭘 가르쳐주려고 해도 그럴 흥이 나지 않았다.
‘아닐 말로 내가 무슨 이놈 스승이 된 것도 아니고…. 좀 아깝긴 하지만 알아서 하게 내버려 둘까….’
무슨 생각을 하는지야 뻔하고. 반성도 하고 좌절도 하겠지만 아직 하백의 나이는 한율의 반절 정도였다. 그런 생각으로 낙심할만한 나이였지만, 그대로 두면 위험해질 수도 있는 나이였다.
‘흠….’
어쩐지 그대로 좌절해버릴 것 같지는 않았다. 며칠 보지는 않았으나, 그렇게 나약해 보이는 아이는 아니었다. 한율의 눈이 여전히 가슴 앞섶에 품고 있는 책자에 가 닿자 이내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을 접기로 마음먹는다.
‘뭐, 됐다…. 알아서 깨닫게 되겠지. 몰라도 제 복이고.’
“하백이….”
“…?”
돌아본 융베리가 하백의 침중한 안색을 보곤 걱정스러운 말을 꺼냈다. 무슨 일이 있나요? 저 자를 만나고는 이튿날부터 계속 안색이 안좋은데…. 글쎄요…. 리타도 염려는 되었지만, 이유는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한율이 무예를 오랜 시간 연마해온 사람이란 것은 웬만한 눈짐작만 있어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카마산으로 살아오면서 누구보다도 칼 한 자루에 자기 자신을 내던지며 살아온 하백이었으니, 한율과 같은 사람을 만나서 저 꼴이 될 이유라면 아마도 한율이 무척이나 강한 사람이기 때문일 수 있었다. 융베리는 리타의 말에 다른 생각을 꺼내들었다.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던 건 아닐까요? 뭐…, 아니면 동족이 겪었던 참상에 대한 이야기라든가, 그에 관련된 뭔가….”
“그럴 수도 있겠군요.”
“숙영을 시작하면 그 때 막사로 가 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론지니아까진 이제 이틀 정도가 남아 있었다. 레몽의 시중이 그들에게 다가와 내일이면 론도 산맥을 넘어야 하니 이르지만 여기서 숙영을 하는 것이 낫다.는 그의 뜻을 전했고, 곧 군사들이 행군을 멈추며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카마산들도 따라서 움직였다. 막사가 세워지고 여기저기서 저녁식사를 준비하는 불이 피워오르는 동안 한율은 산기슭까지 올라 담뱃대를 물고 앉았다. 수만 명의 행렬들이 멈춰서 숙영 준비를 하는 모습들이 제법 장관이었다. 참 좋은 구경한다…. 싱글싱글 웃으며 혼잣말을 하는 그의 귀에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까지 와 있으면 위험할 텐데요?”
“어…?”
한율은 저도 모르게 담뱃대를 놓칠 뻔했다. 이상하게도 이 키 큰 여자만 보면 그는 긴장이 되고 벽이 둘러쳐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자신의 숙명 속에서 타협할 수 없는 적이기에 그런 것만은 아닌 듯했다. 그런 적이라면 비단 그녀뿐만은 아니었다. 자신을 가르친 스승조차도 그에게는 적이었다. 아니 그녀보다도 더욱 강대한 적이었다. 도저히 이겨낼 수 없을 정도로.
“아직도 나를 적이라고 생각하나요?”
“크음….”
대뜸 하대를 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쉬운 사람이 아니었다. 나이는 분명 하백과 비슷해보였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리타의 뒤에는 융베리가 함께 오고 있었다. 저녁땐데…, 식사들 안하십니까? 엉뚱한 그의 물음에 리타가 웃음을 터뜨렸고, 융베리도 다소 긴장을 풀며 소리내어 웃었다. 리타를 아무리 믿는다 해도 그를 바로 앞에서 보니 긴장감이 절로 일어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좀 앉을게요.”
“그러시구려.”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담뱃대를 무는 한율.
말없이 자신을 훑어보는 리타의 시선이 불편한지, 그는 뻐끔뻐끔이 아니라 아예 뻑뻑 담뱃대를 빨아 연기를 잔뜩 내뿜었다. 인상을 잔뜩 구긴 채로 그렇게 연기를 내뿜다가 신경질적으로 담뱃대를 탁탁 턴다. 이제보니 귀여운 구석도 있다. 나이는 자신보다 열 살 이상 많았지만, 리타는 그의 그런 행동이 좀 귀여워 보이기도 했다. 한동안 그에게서 말문이 열리지 않을 것 같아 그녀는 차근차근 한율을 뜯어보았다. 좀 덜 씻고, 행색이 지저분해서 그렇지 추한 얼굴은 아니다. 떡 벌어진 어깨와 탄탄한 가슴, 그리고 두꺼운 목과 몸통, 헐렁한 상의였지만 그 안에 있는 팔이 쇠기둥처럼 단단할 것 같았다. 뭘로 깎는지, 고르지 못하게 비죽비죽 돋은 거친 턱수염과 각진 턱선이 강인한 인상을 주고 있었다.
“좀 씻고 옷만 잘 입으면 인기 있겠어요.”
“관두슈. 떠돌이 잡객놈이 무슨….”
다시 연초를 채워넣으며 한율이 무슨 일이냐 물었다. 융베리는 그의 행동 하나하나를 새기듯 눈여겨 보고 있었다. 노인네의 시선이 달갑지 않았지만, 한율은 일단 신경쓰지 않았다. 그저 있는 것만으로도 신경쓰이는 이 아가씨가 있는 까닭이었다. 하백이 좀 이상해서요. 그쪽을 만나고 나선 계속 저 모양이라서….
“내버려 두시구려. 저땐 저럴 수 있으니까….”
“무슨 일이 있었던 거요, 젊은이…?”
어라, 뜻밖에도 목소리가 아주 시원하다. 머리까지 맑게 해 주는 듯, 쭈글쭈글한 늙은이의 목소리인데도 청량감이 돌았다.
“환국의 검식을 공부하기에, 되지 않을 일이라고 보여줬지요.”
“보여…줬다고요?”
고개를 끄덕이는 한율. 말이 이어졌다.
“댁들처럼 책이나 들고파는 사람들에게는 생소한 이야기일 테지만, 어쨌든 저 아이에게 환국의 검식은 안 맞아요. 근본이 맞질 않으니까.”
“그게 무슨 뜻이죠?”
“원래 환국의 검식이나 권각술, 그러니까 간단히 말해서 쌈박질하는 것들은 모두 그 생활 속에서 나오는 거요. 밭갈이, 물 긷기, 뭐 그런 것부터 시작해서. 소몰이도 그렇고…. 그렇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생활 자체가 다른 곳에서 자랐으니 안 된다는 거지요. 보아하니 아슈람이란 데서 가르치는 쌈박질도 그저 주먹 딴딴하게 만들고 발길질 잘하는 것만 같진 않은데…, 생활 습성이 다르면 몸에 축적되는 기운도 다른 법이외다.”
“그렇군요. 그런 게 있었군요.”
융베리는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하백이 좀 안됐군요.”
“안될 것 없시다.”
“… ….”
“노인장도 아시겠지만…, 망하고 없는 나라. 세상 천지를 다 뒤져봐도 동족 하나 만나기가 벌판에서 벼락 맞아 죽느니보다 어려운 일이요. 기억에도 없는 뿌리를 찾는답시고 힘쓰느니 제 마음속에 뿌리 내릴 곳을 찾아야지요.”
심지가 굳기로 치자면 하백보다 그 뿌리가 백만 배는 더 깊고 강인해 보였다. 리타는 그가 점점 더 마음에 들었다. 물론 나이가 있고, 경지에 이르렀으니 그럴수도 있겠으나, 지금 그가 내뱉는 말 한 마디 한 마디에는 사람의 냄새가 짙게 풍기고 있었다.
“사방 천지가 난리굿이니, 지금 할 일부터 차근차근 해 나가야 하지 않겠수.”
단순하고도 분명한 논리였다. 융베리는 그에 대한 긴장감이 풀어지는 걸 느꼈다. 그것은 한율이 경지에 이르러서도 아니고, 리타를 믿어서도 아니었다.
“이름이 한율이라고 했소?”
“….”
“환국 말로 큰 법도, 자연의 이치라는 뜻이지요?”
“…?! 우리말 아십니까?!”
이번엔 리타도 깜짝 놀랐다. 학식으로 치자면 역사에 길이 남을 대석학이라지만, 그가 설마 대륙 저 너머의 언어까지 알고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융베리가 민망하다는 얼굴로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그리 놀라실 것들 없습니다. 나는 종교학자이다보니, 세상에 있는 많은 종교와 사상들을 수집하고 연구했지요. 그러다 자연스럽게 환국 말을 조금은 알게 됐습니다. 우리 쪽에선 워낙 희귀한 자료이기도 하고요.”
“하여간…, 구루님도 참 대단하세요.”
“전하께서 제게 하실 말씀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응? 전하라니…? 좀 익숙한 표현이었다 싶어 물어보려던 순간, 갑작스럽게 한율의 머릿속에 강렬하게 울리는 소리가 있었다. 적이다, 적이다, 적이다, 적이다. 메아리치듯 반복해서 그 소리는 울렸다. 다른 게 있다면 점점 커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죽여, 죽여라, 죽여라. 적이다. 죽여라.
“왜 그래요?”
“이봐, 젊은이. 어디 안좋은가?!”
갑가지 머리를 감싼 채 식은땀을 흘리는 한율을 보며 리타와 융베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물어왔다. 뭔가 달랐다. 의식은 또렷했는데, 그 소리는 점점 커지고 시끄럽게 다가왔다. 자신을 향해 한 점의 기세도 내뻗지 않는 리타를 보고 한율은 확신했다. 이건 내 안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다.
“내려가, 어서! 사람들을 대피시켜!!”
“네…?”
“온다…! 마도들이야…!!”
“마도…! 마도…?!!”
“빨리 내려가!! 놈들의 목표는 나야!!”
“그 무슨….”
“어서 꺼지라고 여기서!!!”
머뭇거리던 그들은 돌아보며 벼락처럼 소리치는 한율의 기세에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다. 아무리 마하수카의 경지를 넘어섰어도, 시대를 풍미한 대석학이라도 그의 기세는 압도적이었다. 온 몸에서 투기가 뭉클뭉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등에 다섯 자루의 검을 짊어지고, 목검을 허리춤에 꽂아 뒤로 돌려놓았다. 시커먼 파멸의 기운이 숲 안쪽으로부터 몰려오고 있었다. 언덕 아래에서 카마산들이 분분히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한율의 온 신경은 전방에 쏠려 있었다.
“무슨 소리야, 마도들이라니?!”
“여긴 론도 산맥 끄트머리잖아.”
“마도들은 산맥 뿌리 쪽에 있는 거 아니었어?”
하백도 경황중에 검을 챙겨들긴 했지만, 정신이 집중되지 않았다.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론도 산맥의 산기슭에 즈음해서 숙영지를 정하긴 했지만, 마도들이 나타날 만한 지역은 아니었으니. 그러던 그의 눈에 단신으로 숲 앞에 버티고 서 있는 한율이 들어왔다. 그리고 언덕에서 황급히 내려오는 리타와 융베리가 보였다.
“구루님과 리타야! 먼저 구루님부터 모셔와!”
하백은 그렇게 외치며 한달음에 언덕까지 달려갔다. 홀로 맞서는 건 위험하다. 한율을 도와야 했다. 그는 당연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함께 하겠…!”
말을 마치기도 전에 한율의 등짝이 사라져버렸다. 숲속에서 꾸역꾸역 나오는 소름끼치는 적의와 살의 속으로 한율은 혼자 몸을 날렸다. 위험하다고 소리치려던 하백은 마도들을 본 순간 움찔거렸다. 그들을 직접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는 실전경험이 거의 없었다. 실력으로만 치자면야 오로지 살의와 식욕만으로 움직이는 그들을 이겨내지 못할 리 없었건만, 이 정도의 살의를 그는 단 한 번도 경험해 본 일이 없는 것이었다.
쩌억 하는 소리들이 연속해서 터져나오고, 마도의 무리들 속에서 피분수가 솟구쳤다. 그렇게 느꼈다. 그게 피인지 뭔지 알 길은 없었다. 녹색의 끈적한 액체들이 여기저기서 솟구쳐 올랐고, 동시에 쇠를 긁어내듯한 징그러운 괴성이 그 안에서 여러 겹으로 난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사나운 들짐승처럼 움직이고 있는 한율이 언뜻언뜻 보였다. 그는 맨손이었다.
“이게 무슨 소리야?”
“정말 마도들이 오긴 온 거야?!”
“하백! 거기서 뭐 하고 있어?!”
언덕 위의 구릉에서 벌어지고 있는 격전이었다. 이상하게도 마도들은 한율의 주위를 꾸역꾸역 둘러쌀 뿐, 더 이상 내려오지는 않고 있었다. 바로 아래에서 진형을 갖추던 카마산들의 눈에 그 모습이 보일 리가 없었다. 단지 괴상한 비명소리와 한율의 맨손 공격에 마도들의 육신이 부서지는 파열음만이 언덕 아래로 간간이 내려왔다.
청각이 예민한 카마산들이 이 소리를 놓칠 리 없었다. 그들은 하백의 모습과, 언덕 위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몇 명의 병력이 모여 올라오기 위해 진을 갖추었다. 그 때였다. 반대편의 전방으로부터 시커먼 한 무리가 꾸역꾸역 몰려오는 모습이 모두의 눈에 들어왔다. 말할 것도 없이 마도의 무리들. 그들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던 사절단의 호위대장이 급히 칼을 뽑아들며 명령을 내렸다.
“호위대는 진형을 갖춰라!! 수비대형 일자방패진!!”
“어서 움직여, 어서!!”
군사들은 분주하게 움직이며 빠르게 진형을 갖추었다. 훈련이 잘 된 모습이었다. 그들은 순식간에 커다란 방패를 붙이고 다섯 겹에 걸친 일자형의 진을 이룬 채 창을 겨눴다.
“궁수는 발사하라!! 더 이상 몰려오지 못하게 최대한 속사하라!!”
다섯 겹의 방패진, 그들의 머리 위로 수백 발의 화살이 긴 호선들을 그리며 나아갔다. 이미 근거리까지 몰려 온 적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후방에 있던 마도들 사이로 떨어지는 화살이 적잖은 숫자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뭘 보고 있어!! 어서 올라가서 둘러싸!!”
자와카로부터 지휘를 인계받은 라이반이 버럭 호통을 치자 언덕 아래에서 우왕좌왕하던 카마산들이 정신이 번쩍 든 듯 언덕 위로 재빨리 오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오십 명에 가까운 병력이 일제히 언덕에 올랐고, 그들은 진형을 갖추기보다는 먼저 이 이상한 광경에 멈춰서기부터 했다. 꾸역꾸역 몰려드는 마도들, 그 안에서 활화산같은 살의와 적의, 그리고 동시에 파열음과 괴성이 솟구치고 있었다.
“이놈들이…!!”
잠시 반대편 전방을 보고 호위대의 선전을 확인한 라이반은 다시 언덕위를 보고는 이를 부득 갈며 얼른 뛰어올라갔다. 뭐 하는 거야, 이놈들아!! 당장 진세 갖추지 않고…!!
“저기….”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가리키는 카마산의 손 끝에, 수백의 마도들이 뒤엉켜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칼이며 창 등 각자의 병장기를 들고 분연히 뛰어올라온 그들에겐 관심도 없다는 듯, 그들은 그 사이에서 흘깃 흘깃 보이는 한율만을 목표로 미친듯이 날뛰고 있었다.
“이게 대체….”
호위대장은 앞뒤로 왔다갔다 하며 군사들을 독려하고 있었다. 화살은 계속해서 날아갔고, 이미 적의 선두는 방어진과 격돌해 있었다. 군사들은 서로 앞에 있는 동료를 방패로 받쳐주며 온 힘을 다해 버텼다.
“버텨라!! 죽을 힘을 다해 버텨!! 후방 기마대는 어떻게 됐나?! 측면으로 돌파하라고 지시한 게 언젠데 아직도 기척이 없어?!!”
“이미 전령이 행렬 뒤쪽으로 갔습니다! 지금쯤 오고 있을 겁니다!!”
오만이 훌쩍 넘는 행렬의 뒤쪽이었다. 지척에 있는 것처럼 즉시 반응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호위대장은 마음이 급했다. 적수가 너무 많았다. 방어진을 다섯 겹으로 펼쳤으니 쉽게 뚫리지야 않겠지만, 이미 궁병들은 쓸모가 없었다. 수천의 마도들이 사정거리 안쪽으로 완전히 들어와버렸으니, 남은 것은 백병전이었다.
“백병전이다!! 방어진은 물러서라!! 물러서!! 막사를 에워싼다! 원형진!!”
조금이라도 늦으면 적이 방어진의 측면을 돌아 들이칠 상황이었다. 호위대장은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조금 안심이 되었다. 무엇에 홀린 듯 살의로 똘똘 뭉친 마도들이었지만, 수적 우세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한 채 그들은 정면돌파만을 고집하고 있는 것이었다. 마침 오백 기의 기마대가 후방에서 함성을 지르며 질주해오고 있었다. 기마대 오백이면 이천의 보병도 상대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이 곳은 비교적 평지다. 승산이 있었다.
“됐어!!”
호위대장은 승기를 잡았다 확신하며 먼저 술렁거렸던 반대편 후방의 언덕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기엔 뭔가 좀 이상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다. 멀찍이 있는 곳이긴 했지만 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수십 명의 카마산들이 멀쩡히 병장기를 들고 서 있었고, 그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 마도의 무리들이 한데 뒤엉켜 야단법석이었다.
“대체 저게 뭐야…?”
뭉클뭉클 솟아나는 소름끼치는 기운이 그의 안면을 따갑게 찌르는 듯했다. 악마같은 놈들…. 이를 부득 갈며 검을 쥔 손에 힘을 주는 순간 그의 뒤통수로도 그 기운이 후려쳐 오기 시작했다. 동시에 메아리치는 소리가 있었다. 적이다. 적이다. 적이다. 적이다. 죽여, 적이다. 죽여라, 죽여. 한율의 머릿속에 울렸던 것과 같은 소리. 그리고 더 커진 소리였다. 그것은 방패진을 펴고 버티는 군사들에게도, 병장기를 바꿔쥐고 백병전을 준비하는 다른 군사들에게도 똑같이 들려왔다. 심지어 막사 쪽으로 피신해 있는 레몽과 다른 사절단 일행에게도, 마치 산의 울림처럼 똑같이 퍼져갔다.
“이…이게 무슨 소리야…?”
호위대장의 표정이 저도 모르게 공포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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