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 비틀어진 태아"의 주제가 배배 꼬이며 변주되는 가운데, 그녀들 앞에 마련되어 있던 작은 탁자 위에 흰색 아마포가 씌워지고, 요리사 중 한 명이 허리춤 높이의 그 탁자에다 도마와 칼들을 바둑돌 정리하듯 늘어놓았다.
도마는 두껍고 널찍하게 다듬어진 향나무 토막이었는데, 얼마나 튼실한지 쪼개서 땔감으로 쓰면 그것만 가지고도 밤새 사우나 하나쯤은 너끈히 돌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부엌 용품 전시회 출품작이라도 되는 것처럼 끝없이 늘어놓은 칼들은, 다양한 형태에도 불구하고 공통적으로 모두 잡기 좋게 손 모양으로 홈이 파진 박달나무 손잡이가 달려 있었고 거기에 꿈틀거리는 용이 부조되어 있었다.
야채를 다듬을 것인지, 고기를 다듬을 것인지, 뼈를 자를 것인지, 심줄만 제거할 것인지, 가늘게 썰 것인지, 저밀 것인지에 따라 칼날의 길이와 폭이 각각 다른 칼들이, 철물점 가판대에 쇠붙이 공구들 펼쳐놓은 것처럼 도마 옆에 죽 놓여지자, 씨름선수처럼 몸집이 비대한 요리사가 그 중 쿠토 바트르(주: 야채와 고기를 다질때 쓰는 칼)와 쿠토 에망세(주: 고기를 얇게 썰때 쓰는 칼)를 양 손에 나눠 잡고 나섰다.
디지털퍼머는 부산한 요리사들의 움직임을 지켜보다가 아무래도 신경이 쓰인다는 듯 집사에게 물었다.
"대체 이 음악은 어떻게 된거예요, 어디서 들려오는 거죠?"
집사가 잘 이해가 안간다는 듯이 되물었다.
"음악이 어때서 그러시나요?"
"어디서 흘러나오는지 방향을 알 수가 없어서요. 아무리 살펴봐도 스피커도 보이질 않고.."
집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탁자의 모서리를 가만히 문질렀다.
"스피커라고 함은 라우드 스피커를 말씀하시는 거겠지요, 자석을 사이에 두고 코일이 움직여서 소리를 증폭시키는 장치 말입니다."
모서리를 문지르던 손을 멈추더니 집사는 소리가 나지 않게 탁자를 몇번 두드렸다.
"정말 꽤나 오래되었군요. 제가 그 장치를 처음 본 게 말이예요. 만들어지긴 이미 1898년에 만들어졌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특허를 따서 라우드 스피커를 상품으로 만든 건 1차세계대전 후 였어요. 제가 첫 모델을 봤던 게 1925년 봄이었습니다. 천둥의 소리라는 광고문구가 붙어있었는데 볼륨을 하도 높여놔서 사람들이 깜짝 놀라곤 했어요. 특허권자는 체스터 라이스와 에드워드 켈로그였는데, 득의양양해 하던 그들의 모습을 찍은 사진이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쇼트웨이브는 잔에 따라 놓은 물을 한 모금 마시려다가 집사가 느닷없이 늘어놓는 과거사에 손을 멈췄다. 집사는 반달모양으로 입꼬리를 내리더니 다시금 말을 이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인간이 듣는 소리라는 것은 이상하기 짝이 없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텔레파시나 그 밖의 다른 수단으로 의사교환을 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인간들의 의사교환 방식을 좀처럼 이해할 수 없을 겁니다. 밥 먹으러 가자는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서 서로의 주변에 있는 공기 압력을 변화시키니까요. 희안하지요. 하지만 그게 소리의 정체입니다. 인간은 성대를 떨어, 순간적으로 그를 둘러싼 공기에 소밀한 압력 상태를 만들어서 음파를 생성하고, 그것으로 고막을 울려 소리를 듣습니다. 스피커나 성대나 그런 점에선 매한가지인데, 스피커 역시 따지고 보면 대기압의 불안한 상태를 야기해 압력의 고저를 발생시키는 장치라고 볼 수 있겠지요."
디지털퍼머가 장황한 집사의 설명에 떫은 감이라도 씹은 표정으로 쇼트웨이브를 쳐다 보았다. 쇼트웨이브는 마시려다 만 컵을 들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요컨대 압력의 고저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스피커 따위는 필요없다 이건가요?"
잘 맞췄다는 듯 집사가 손가락으로 쇼트웨이브를 가리키며 말했다.
"바로 그렇습니다. 이미 아시다시피 이 곳에서 우리는 공간의 굴곡을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냈습니다. 소리를 인식하기 위해서 큰 압력은 필요없어요. 고막은 아주 예민하니까요. 미세하지만 고막이 진동할 수 있을만큼만 압력이 발생하도록 공간을 빠르게 접었다 펴길 반복하면, 거기서 생기는 압력 차로 인해 아가씨들의 귀는 소리를 듣게 되는 겁니다."
오렌지를 잘랐더니 바나나 속이 나온 것처럼 황당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그녀들을 향해 집사는 득의양양한 웃음을 보여주었다.
"말하자면 이 음악 소리는 공기를 매질로 하는 음파가 아니라 공간 그 자체가 매질이 되는 충격파입니다. 어떤가요, 음질 좋지 않습니까."
쇼트웨이브는 물을 다시 한 모금 마셨다.
"좋군요. 정신이 하나도 없을만큼."
요리사는 세르지오 레오네의 서부영화에서 나오는 총잡이들이 워커콜트라고 불리던 리볼버를 홀스터에서 뽑아 폼나게 돌려대듯, 숙련된 솜씨로 그 칼들을 바람개비처럼 돌려댔다. 벌목이라도 할 것처럼 쉭쉭대며 회전톱날 만큼이나 어지럽게 칼을 돌려대던 그가, 그 정도면 그녀들이 충분히 질겁했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칼날로 도마를 치며 회전을 멈추었다. 그러자 보조 요리사로 보이는 사람이 옆에서 황동 바스킷을 들고 서 있다가, 둥근 푸드 커버를 열어 그 안에 있던 커다란 연어 한 마리를 도마 위에 올려놓아 주었다.
칼 묘기를 보이던 뚱뚱한 요리사의 사촌쯤 되어 보이는 연어는, 태어나서 굶어본 적이 하루도 없어 보일만큼 살이 오른 싱싱한 놈이었는데, 지금 막 잡아올린 것을 바스킷에 담아왔는지 도마 위에서 사납게 퍼덕거렸다. 요리를 하기 위해선 포박이라도 해야할 것같은 상황이었지만, 요리사는 그러한 연어의 난동에도 아랑곳 없이 빠른 속도로 칼질을 시작했다.
껍질을 벗기고 살을 저미고 뼈를 바르는 동작이, 방아쇠를 당기면 공이치기가 일어나고 탄창이 회전되고 뇌관이 격발되는 일사불란한 리볼버의 더블액션 장치를 보는 것 같았다. 마치 항복을 하겠다는 표시로 링 바닥을 치는 프로레슬러처럼 연어는 꼬리 지느러미로 도마를 쳐댔으나, 미처 다섯번을 두드리기도 전에 요리사는 녀석의 몸 속에서 뼈를 빼내버렸다. 그는 양 손의 칼날을 세워 작은 북을 두드리듯 저며낸 연어 살을 다지기 시작했다.
"파르세(주: 다져서 속에 채워넣는 재료)를 만드는 겁니다. 연어로 만든 파르세는 담백하고 느끼하지가 않아 아가씨들의 입맛에 잘 맞을 거예요."
요리를 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집사가 설명했다.
다른 쪽에서는 쿠토 도피스(주: 야채를 손질하는 칼)을 사용해서 양배추와 당근, 버섯, 파 등을 다듬는 사람도 있었고, 쿠페 파테(주: 사각형의 금속 스크래퍼)를 가지고 밀가루와 달걀, 버터를 혼합한 반죽을 잘라내는 사람의 모습도 보였다. 마늘냄새와 비슷하지만 정확히 마늘이라고 말할 수 없는 매우 독특한 향기가 풍겨나오기 시작했다.
그녀들이 냄새를 맡았다는 것을 눈치챈 집사가 말했다.
"향기 좋지요? 이건 트뤼프 향입니다. 트뤼프에 대해서 잘 아시나요?"
집사가 물었다. 쇼트웨이브는 숨을 들이마셔 그 향기를 맡았다.
"그래요? 이게 트뤼프군요. 매우 비싼 서양송로버섯이라는 것 정도만 알아요. 먹어보진 못했어요."
"저기 저 요리사가 다듬는 버섯 보이시지요? 감자 비슷하게 생긴거 말이예요. 그게 트뤼프예요. 오늘 아가씨들께 요리해 드릴 것은 백송로지요. 하얀 트뤼프. 이 냄새는 트뤼프 고유의 향긴데, 암퇘지가 발정했을 때 풍기는 페로몬향이랑 비슷하다고들 합니다. 그래서 제가 살던 시대에선 트뤼프를 찾기 위해서 숫퇘지를 이용하곤 했었지요. 트뤼프는 주로 떡갈나무 밑의 잘 썩은 검은 흙 속에서 자라거든요. 땅 속에서 자라니까 사람 눈에 띄지 않아서 냄새에 민감한 숫퇘지나 개가 아니라면 트뤼프를 찾아낼 수 없습니다. 숫퇘지는 트뤼프만 보면 거의 미칩니다. 사람들이 빨리 달려들어서 떼어놓지 않으면 죄다 먹어치우지요."
말을 하는 도중 미리 준비해 차갑게 식혀 가지고 온 음식이 놓여졌다. 처음 놓여진 것은 생과일이 잔뜩 올라간 비스퀴였다. 바닐라 바바로아즈가 넘쳐나는 빵 위에 산딸기와 냉동딸기, 새빨간 자두와 까만 오디,멜론과 파파야 등이 마치 과일바구니를 연상시킬 만큼 수북하게 올라가 있었다.
음식을 놓은 요리사가 품위있는 몸짓으로 깍듯하게 인사를 하고 물러갔다.
"이 앙트르메의 이름은 샤를로트 오 프뤼입니다. 과일이 올라간 샤를로트라는 뜻이지요. 하얗게 쉬크르 글라스(주: 분당 혹은 슈거 파우더)가 뿌려진 빵 보이시지요? 샤를로트 둘레를 빙 둘러 감은 빵이요. 네, 그걸 비스퀴 퀴이에르라고 부릅니다. 이 비스퀴는 아가씨들을 위해서 특별히 샤르뜨뢰즈라는 리퀴르에 적신 것입니다. 이 리퀴르는 살구씨와 레몬, 카카오, 체리를 비롯한 12가지 식물의 정열을 우려내서 화주에 블렌딩한 것이지요. 리퀴르의 여왕이라고도 하는데, 만드는 비법은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고 있습니다."
집사가 마치 중성자 폭탄의 핵심기밀을 알려주는 사람처럼 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하지만 우리 요리사들 역시 훌륭한 맛의 샤르뜨뢰즈를 만들 줄 알지요. 그 맛의 비밀은 생강과 민트를 꿀과 함께 재워서 3개월간 숙성시킨 액에 있습니다. 아가씨들께서 술을 좋아하신다면 식사 반주로 한잔 내올 수도 있습니다만."
"됐거든요."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디지털퍼머가 한 마디로 딱 잘라 거절했다. 맛을 보여주지 못해 매우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집사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샤를로트의 핵심은 비스퀴라기 보다는 중간에 두터운 층을 형성한 바바로아와 그 위에 올려진 과일이예요. 오늘 드실 샤를로트엔 바닐라를 첨가한 초컬릿 바바로아를 사용했답니다. 푸딩보다 훨씬 더 부드러운 음식인데 아가씨들 입맛에 맞았으면 좋겠습니다."
쇼트웨이브가 집사의 설명이 끝나자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아까 집사님께서 저 샤를로트라는 것을 앙트르메라고 하셨죠? 앙트르메라면 디저트라는 뜻 아닌가요. 저희는 식사를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어째서 디저트가 먼저 나오는거죠?"
집사가 설명하기 힘든 질문을 요구받은 풋내기 강사처럼 수염 끝을 만지며 잠시 망설였다.
"앙트르메를 언제 먹을 것이냐 하는건 생각하시는 것처럼 쉬운 문제는 아닙니다. 음식의 격식이란 것이 매우 미묘할 뿐 아니라 일정한 격식을 따르는 사람들의 입장에선 자존심이 걸린 문제일 수도 있거든요. 아시고 계시겠지만 음식을 먹는 습관의 차이가 십자군 전쟁의 원인이 되었지 않습니까."
"뭐라구요? 십자군 전쟁의 원인이 음식 때문이었다구요?"
말로만 듣던 네시호 괴물을 본 사람처럼 쇼트웨이브가 눈을 크게 떴다.
"그런 말은 처음 듣는군요. 제가 알기로 십자군 전쟁은, 동로마 제국 황제인 알렉시오스 1세가 당시 교황이었던 우르반 2세에게 성지를 순례하는 기독교인들이 탄압을 받고 있으니 이슬람을 공격해 줄 것을 요청하면서 시작된 것으로 아는데요."
집사는 장난꾸러기 악동 때문에 골치를 썩는 교무 주임같은 얼굴로 대답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알고 있지요. 하지만 실제로 이 전쟁은 대단히 미묘한 개인적인 감정이 섞여 있습니다. 우르반 2세가 동로마 제국 황제의 지원 요청에 응했던 것은 예루살렘을 탈환하려는 야심 때문이기도 했겠습니다만, 무슬림들이 교황을 가리켜 라드(주: 요리에 사용하는 돼지기름)를 사용해 오파 플라(주: 달걀에 베이컨 따위를 부쳐 만드는 음식)를 만들어 먹는 야만인이라고 욕을 했던 것이 커다란 이유였습니다. 우르반 2세는 무슬림들의 인신공격에 대해 매우 격앙된 상태였어요. 그런 참에 동로마 제국 황제의 요청이 들어오자 본때를 보여줄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쇼트웨이브가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정말이지 믿을 수 없는 얘기군요. 근거 있는 소린가요. 대체 어디서 들으신 거죠?"
집사가 당황한 듯 헛기침을 하고는 잠시 식탁 위를 바라보았다.
"이런 말씀 드리면 분위기가 이상해질 것 같아서 별로 내키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실없는 소리를 하는 사람으로 인식될까봐 말씀드리는 겁니다. 사실 이 얘기는 우르반 2세에게 직접 들었습니다."
"예?"
디지털퍼머와 쇼트웨이브가 동시에 소리쳤다.
"놀라지는 마십시오. 제 나이가 그렇게 오래 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집사는 손을 벌려서 일단 그녀들의 놀람을 진정시켰다.
"이 곳이 저승과 매우 가깝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세요. 저는 매우 우연한 기회에 지옥불에 타고 있는 우르반 2세의 영혼을 보았습니다. 좀 아이러니 하지요. 교황이 지옥에 있다는게 말입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대단히 많습니다. 제가 보기에 인간의 영혼이 지옥으로 갈 것인지 말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성경이 아닌 듯 싶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지옥이 그 사람을 선택할 것이냐, 아니냐에 달려 있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살아 생전 어떤 사람이 지옥 갈 일을 했다면 지옥은 반드시 그를 선택합니다. 마치 자석을 금속에 문지르면 그 금속에 자기가 생기는 것처럼, 지옥에 끌어당겨지는 어떤 표식이 영혼에 남지 않나 싶은데 거기까지는 뭐, 제가 알 길이 없구요."
집사가 그녀들을 지긋이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지옥불 속에서 잿더미처럼 하얗게 변해있던 우르반 2세의 영혼에선 비밀이라고는 더이상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었지요. 그의 무의식과 의식을 아우르는 깊은 샘에서 감추고 싶은 모든 비밀과 프라이버시에 속하는 사적인 얘기들이 회를 뜬 물고기 살처럼 조각조각 흩어져 나오고 있었어요. 그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 그의 모든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까발려지는 것 만으로도 지옥같겠더군요. 그는 말하자면.."
집사가 말을 멈추고 잠시 어휘를 골랐다.
"지옥이 선택할 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쇼트웨이브는 집사의 얘기를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집사가 큰 소리로 말했다.
"뭐가 어쨌거나 말입니다. 제가 하려는 얘기는 음식을 먹는 격식이 매우 중요하다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이 격식은 하루 아침에 정해진 것이 아닙니다. 사실 프랑스 요리가 세계적인 표준으로 자리잡게 된 데는 천재적인 요리사들의 공이 컸습니다. 대표적인 두 명의 요리사가 앙토낭 카렘과 오귀스트 에스코피에지요. 이 두 명의 천재들에 의해 프랑스 요리의 방법과 격식, 그리고 식단의 순서가 정해졌습니다."
앙토낭 카렘이 식단을 정하건 말건 집사의 얘기가 지겨워진 디지털퍼머는 그녀들 앞에 놓여진 샤를로트 오 프뤼를 포크로 잘라내어 먹을 만큼 접시에 덜어내었다. 그녀를 따라 쇼트웨이브도 음식을 조금 가져왔다.
도마는 두껍고 널찍하게 다듬어진 향나무 토막이었는데, 얼마나 튼실한지 쪼개서 땔감으로 쓰면 그것만 가지고도 밤새 사우나 하나쯤은 너끈히 돌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부엌 용품 전시회 출품작이라도 되는 것처럼 끝없이 늘어놓은 칼들은, 다양한 형태에도 불구하고 공통적으로 모두 잡기 좋게 손 모양으로 홈이 파진 박달나무 손잡이가 달려 있었고 거기에 꿈틀거리는 용이 부조되어 있었다.
야채를 다듬을 것인지, 고기를 다듬을 것인지, 뼈를 자를 것인지, 심줄만 제거할 것인지, 가늘게 썰 것인지, 저밀 것인지에 따라 칼날의 길이와 폭이 각각 다른 칼들이, 철물점 가판대에 쇠붙이 공구들 펼쳐놓은 것처럼 도마 옆에 죽 놓여지자, 씨름선수처럼 몸집이 비대한 요리사가 그 중 쿠토 바트르(주: 야채와 고기를 다질때 쓰는 칼)와 쿠토 에망세(주: 고기를 얇게 썰때 쓰는 칼)를 양 손에 나눠 잡고 나섰다.
디지털퍼머는 부산한 요리사들의 움직임을 지켜보다가 아무래도 신경이 쓰인다는 듯 집사에게 물었다.
"대체 이 음악은 어떻게 된거예요, 어디서 들려오는 거죠?"
집사가 잘 이해가 안간다는 듯이 되물었다.
"음악이 어때서 그러시나요?"
"어디서 흘러나오는지 방향을 알 수가 없어서요. 아무리 살펴봐도 스피커도 보이질 않고.."
집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탁자의 모서리를 가만히 문질렀다.
"스피커라고 함은 라우드 스피커를 말씀하시는 거겠지요, 자석을 사이에 두고 코일이 움직여서 소리를 증폭시키는 장치 말입니다."
모서리를 문지르던 손을 멈추더니 집사는 소리가 나지 않게 탁자를 몇번 두드렸다.
"정말 꽤나 오래되었군요. 제가 그 장치를 처음 본 게 말이예요. 만들어지긴 이미 1898년에 만들어졌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특허를 따서 라우드 스피커를 상품으로 만든 건 1차세계대전 후 였어요. 제가 첫 모델을 봤던 게 1925년 봄이었습니다. 천둥의 소리라는 광고문구가 붙어있었는데 볼륨을 하도 높여놔서 사람들이 깜짝 놀라곤 했어요. 특허권자는 체스터 라이스와 에드워드 켈로그였는데, 득의양양해 하던 그들의 모습을 찍은 사진이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쇼트웨이브는 잔에 따라 놓은 물을 한 모금 마시려다가 집사가 느닷없이 늘어놓는 과거사에 손을 멈췄다. 집사는 반달모양으로 입꼬리를 내리더니 다시금 말을 이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인간이 듣는 소리라는 것은 이상하기 짝이 없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텔레파시나 그 밖의 다른 수단으로 의사교환을 할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인간들의 의사교환 방식을 좀처럼 이해할 수 없을 겁니다. 밥 먹으러 가자는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서 서로의 주변에 있는 공기 압력을 변화시키니까요. 희안하지요. 하지만 그게 소리의 정체입니다. 인간은 성대를 떨어, 순간적으로 그를 둘러싼 공기에 소밀한 압력 상태를 만들어서 음파를 생성하고, 그것으로 고막을 울려 소리를 듣습니다. 스피커나 성대나 그런 점에선 매한가지인데, 스피커 역시 따지고 보면 대기압의 불안한 상태를 야기해 압력의 고저를 발생시키는 장치라고 볼 수 있겠지요."
디지털퍼머가 장황한 집사의 설명에 떫은 감이라도 씹은 표정으로 쇼트웨이브를 쳐다 보았다. 쇼트웨이브는 마시려다 만 컵을 들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요컨대 압력의 고저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스피커 따위는 필요없다 이건가요?"
잘 맞췄다는 듯 집사가 손가락으로 쇼트웨이브를 가리키며 말했다.
"바로 그렇습니다. 이미 아시다시피 이 곳에서 우리는 공간의 굴곡을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냈습니다. 소리를 인식하기 위해서 큰 압력은 필요없어요. 고막은 아주 예민하니까요. 미세하지만 고막이 진동할 수 있을만큼만 압력이 발생하도록 공간을 빠르게 접었다 펴길 반복하면, 거기서 생기는 압력 차로 인해 아가씨들의 귀는 소리를 듣게 되는 겁니다."
오렌지를 잘랐더니 바나나 속이 나온 것처럼 황당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그녀들을 향해 집사는 득의양양한 웃음을 보여주었다.
"말하자면 이 음악 소리는 공기를 매질로 하는 음파가 아니라 공간 그 자체가 매질이 되는 충격파입니다. 어떤가요, 음질 좋지 않습니까."
쇼트웨이브는 물을 다시 한 모금 마셨다.
"좋군요. 정신이 하나도 없을만큼."
요리사는 세르지오 레오네의 서부영화에서 나오는 총잡이들이 워커콜트라고 불리던 리볼버를 홀스터에서 뽑아 폼나게 돌려대듯, 숙련된 솜씨로 그 칼들을 바람개비처럼 돌려댔다. 벌목이라도 할 것처럼 쉭쉭대며 회전톱날 만큼이나 어지럽게 칼을 돌려대던 그가, 그 정도면 그녀들이 충분히 질겁했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칼날로 도마를 치며 회전을 멈추었다. 그러자 보조 요리사로 보이는 사람이 옆에서 황동 바스킷을 들고 서 있다가, 둥근 푸드 커버를 열어 그 안에 있던 커다란 연어 한 마리를 도마 위에 올려놓아 주었다.
칼 묘기를 보이던 뚱뚱한 요리사의 사촌쯤 되어 보이는 연어는, 태어나서 굶어본 적이 하루도 없어 보일만큼 살이 오른 싱싱한 놈이었는데, 지금 막 잡아올린 것을 바스킷에 담아왔는지 도마 위에서 사납게 퍼덕거렸다. 요리를 하기 위해선 포박이라도 해야할 것같은 상황이었지만, 요리사는 그러한 연어의 난동에도 아랑곳 없이 빠른 속도로 칼질을 시작했다.
껍질을 벗기고 살을 저미고 뼈를 바르는 동작이, 방아쇠를 당기면 공이치기가 일어나고 탄창이 회전되고 뇌관이 격발되는 일사불란한 리볼버의 더블액션 장치를 보는 것 같았다. 마치 항복을 하겠다는 표시로 링 바닥을 치는 프로레슬러처럼 연어는 꼬리 지느러미로 도마를 쳐댔으나, 미처 다섯번을 두드리기도 전에 요리사는 녀석의 몸 속에서 뼈를 빼내버렸다. 그는 양 손의 칼날을 세워 작은 북을 두드리듯 저며낸 연어 살을 다지기 시작했다.
"파르세(주: 다져서 속에 채워넣는 재료)를 만드는 겁니다. 연어로 만든 파르세는 담백하고 느끼하지가 않아 아가씨들의 입맛에 잘 맞을 거예요."
요리를 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집사가 설명했다.
다른 쪽에서는 쿠토 도피스(주: 야채를 손질하는 칼)을 사용해서 양배추와 당근, 버섯, 파 등을 다듬는 사람도 있었고, 쿠페 파테(주: 사각형의 금속 스크래퍼)를 가지고 밀가루와 달걀, 버터를 혼합한 반죽을 잘라내는 사람의 모습도 보였다. 마늘냄새와 비슷하지만 정확히 마늘이라고 말할 수 없는 매우 독특한 향기가 풍겨나오기 시작했다.
그녀들이 냄새를 맡았다는 것을 눈치챈 집사가 말했다.
"향기 좋지요? 이건 트뤼프 향입니다. 트뤼프에 대해서 잘 아시나요?"
집사가 물었다. 쇼트웨이브는 숨을 들이마셔 그 향기를 맡았다.
"그래요? 이게 트뤼프군요. 매우 비싼 서양송로버섯이라는 것 정도만 알아요. 먹어보진 못했어요."
"저기 저 요리사가 다듬는 버섯 보이시지요? 감자 비슷하게 생긴거 말이예요. 그게 트뤼프예요. 오늘 아가씨들께 요리해 드릴 것은 백송로지요. 하얀 트뤼프. 이 냄새는 트뤼프 고유의 향긴데, 암퇘지가 발정했을 때 풍기는 페로몬향이랑 비슷하다고들 합니다. 그래서 제가 살던 시대에선 트뤼프를 찾기 위해서 숫퇘지를 이용하곤 했었지요. 트뤼프는 주로 떡갈나무 밑의 잘 썩은 검은 흙 속에서 자라거든요. 땅 속에서 자라니까 사람 눈에 띄지 않아서 냄새에 민감한 숫퇘지나 개가 아니라면 트뤼프를 찾아낼 수 없습니다. 숫퇘지는 트뤼프만 보면 거의 미칩니다. 사람들이 빨리 달려들어서 떼어놓지 않으면 죄다 먹어치우지요."
말을 하는 도중 미리 준비해 차갑게 식혀 가지고 온 음식이 놓여졌다. 처음 놓여진 것은 생과일이 잔뜩 올라간 비스퀴였다. 바닐라 바바로아즈가 넘쳐나는 빵 위에 산딸기와 냉동딸기, 새빨간 자두와 까만 오디,멜론과 파파야 등이 마치 과일바구니를 연상시킬 만큼 수북하게 올라가 있었다.
음식을 놓은 요리사가 품위있는 몸짓으로 깍듯하게 인사를 하고 물러갔다.
"이 앙트르메의 이름은 샤를로트 오 프뤼입니다. 과일이 올라간 샤를로트라는 뜻이지요. 하얗게 쉬크르 글라스(주: 분당 혹은 슈거 파우더)가 뿌려진 빵 보이시지요? 샤를로트 둘레를 빙 둘러 감은 빵이요. 네, 그걸 비스퀴 퀴이에르라고 부릅니다. 이 비스퀴는 아가씨들을 위해서 특별히 샤르뜨뢰즈라는 리퀴르에 적신 것입니다. 이 리퀴르는 살구씨와 레몬, 카카오, 체리를 비롯한 12가지 식물의 정열을 우려내서 화주에 블렌딩한 것이지요. 리퀴르의 여왕이라고도 하는데, 만드는 비법은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고 있습니다."
집사가 마치 중성자 폭탄의 핵심기밀을 알려주는 사람처럼 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하지만 우리 요리사들 역시 훌륭한 맛의 샤르뜨뢰즈를 만들 줄 알지요. 그 맛의 비밀은 생강과 민트를 꿀과 함께 재워서 3개월간 숙성시킨 액에 있습니다. 아가씨들께서 술을 좋아하신다면 식사 반주로 한잔 내올 수도 있습니다만."
"됐거든요."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디지털퍼머가 한 마디로 딱 잘라 거절했다. 맛을 보여주지 못해 매우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집사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샤를로트의 핵심은 비스퀴라기 보다는 중간에 두터운 층을 형성한 바바로아와 그 위에 올려진 과일이예요. 오늘 드실 샤를로트엔 바닐라를 첨가한 초컬릿 바바로아를 사용했답니다. 푸딩보다 훨씬 더 부드러운 음식인데 아가씨들 입맛에 맞았으면 좋겠습니다."
쇼트웨이브가 집사의 설명이 끝나자 이상하다는 듯이 물었다.
"아까 집사님께서 저 샤를로트라는 것을 앙트르메라고 하셨죠? 앙트르메라면 디저트라는 뜻 아닌가요. 저희는 식사를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어째서 디저트가 먼저 나오는거죠?"
집사가 설명하기 힘든 질문을 요구받은 풋내기 강사처럼 수염 끝을 만지며 잠시 망설였다.
"앙트르메를 언제 먹을 것이냐 하는건 생각하시는 것처럼 쉬운 문제는 아닙니다. 음식의 격식이란 것이 매우 미묘할 뿐 아니라 일정한 격식을 따르는 사람들의 입장에선 자존심이 걸린 문제일 수도 있거든요. 아시고 계시겠지만 음식을 먹는 습관의 차이가 십자군 전쟁의 원인이 되었지 않습니까."
"뭐라구요? 십자군 전쟁의 원인이 음식 때문이었다구요?"
말로만 듣던 네시호 괴물을 본 사람처럼 쇼트웨이브가 눈을 크게 떴다.
"그런 말은 처음 듣는군요. 제가 알기로 십자군 전쟁은, 동로마 제국 황제인 알렉시오스 1세가 당시 교황이었던 우르반 2세에게 성지를 순례하는 기독교인들이 탄압을 받고 있으니 이슬람을 공격해 줄 것을 요청하면서 시작된 것으로 아는데요."
집사는 장난꾸러기 악동 때문에 골치를 썩는 교무 주임같은 얼굴로 대답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알고 있지요. 하지만 실제로 이 전쟁은 대단히 미묘한 개인적인 감정이 섞여 있습니다. 우르반 2세가 동로마 제국 황제의 지원 요청에 응했던 것은 예루살렘을 탈환하려는 야심 때문이기도 했겠습니다만, 무슬림들이 교황을 가리켜 라드(주: 요리에 사용하는 돼지기름)를 사용해 오파 플라(주: 달걀에 베이컨 따위를 부쳐 만드는 음식)를 만들어 먹는 야만인이라고 욕을 했던 것이 커다란 이유였습니다. 우르반 2세는 무슬림들의 인신공격에 대해 매우 격앙된 상태였어요. 그런 참에 동로마 제국 황제의 요청이 들어오자 본때를 보여줄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쇼트웨이브가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정말이지 믿을 수 없는 얘기군요. 근거 있는 소린가요. 대체 어디서 들으신 거죠?"
집사가 당황한 듯 헛기침을 하고는 잠시 식탁 위를 바라보았다.
"이런 말씀 드리면 분위기가 이상해질 것 같아서 별로 내키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실없는 소리를 하는 사람으로 인식될까봐 말씀드리는 겁니다. 사실 이 얘기는 우르반 2세에게 직접 들었습니다."
"예?"
디지털퍼머와 쇼트웨이브가 동시에 소리쳤다.
"놀라지는 마십시오. 제 나이가 그렇게 오래 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집사는 손을 벌려서 일단 그녀들의 놀람을 진정시켰다.
"이 곳이 저승과 매우 가깝다는 사실을 기억해 주세요. 저는 매우 우연한 기회에 지옥불에 타고 있는 우르반 2세의 영혼을 보았습니다. 좀 아이러니 하지요. 교황이 지옥에 있다는게 말입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대단히 많습니다. 제가 보기에 인간의 영혼이 지옥으로 갈 것인지 말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성경이 아닌 듯 싶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지옥이 그 사람을 선택할 것이냐, 아니냐에 달려 있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살아 생전 어떤 사람이 지옥 갈 일을 했다면 지옥은 반드시 그를 선택합니다. 마치 자석을 금속에 문지르면 그 금속에 자기가 생기는 것처럼, 지옥에 끌어당겨지는 어떤 표식이 영혼에 남지 않나 싶은데 거기까지는 뭐, 제가 알 길이 없구요."
집사가 그녀들을 지긋이 바라보다가 말을 이었다.
"지옥불 속에서 잿더미처럼 하얗게 변해있던 우르반 2세의 영혼에선 비밀이라고는 더이상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었지요. 그의 무의식과 의식을 아우르는 깊은 샘에서 감추고 싶은 모든 비밀과 프라이버시에 속하는 사적인 얘기들이 회를 뜬 물고기 살처럼 조각조각 흩어져 나오고 있었어요. 그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 그의 모든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까발려지는 것 만으로도 지옥같겠더군요. 그는 말하자면.."
집사가 말을 멈추고 잠시 어휘를 골랐다.
"지옥이 선택할 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쇼트웨이브는 집사의 얘기를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집사가 큰 소리로 말했다.
"뭐가 어쨌거나 말입니다. 제가 하려는 얘기는 음식을 먹는 격식이 매우 중요하다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이 격식은 하루 아침에 정해진 것이 아닙니다. 사실 프랑스 요리가 세계적인 표준으로 자리잡게 된 데는 천재적인 요리사들의 공이 컸습니다. 대표적인 두 명의 요리사가 앙토낭 카렘과 오귀스트 에스코피에지요. 이 두 명의 천재들에 의해 프랑스 요리의 방법과 격식, 그리고 식단의 순서가 정해졌습니다."
앙토낭 카렘이 식단을 정하건 말건 집사의 얘기가 지겨워진 디지털퍼머는 그녀들 앞에 놓여진 샤를로트 오 프뤼를 포크로 잘라내어 먹을 만큼 접시에 덜어내었다. 그녀를 따라 쇼트웨이브도 음식을 조금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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