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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4 23:57 453회 0건
쇼트웨이브는 침대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길게 늘어져 있는 디지털퍼머를 내려다 보았다.
침대의 매트리스는 물침대의 쿠션만큼이나 부드럽게 그녀의 체중을 분산시켰다. 카트에서는 갓 구운 빵의 냄새가 퍼져 올라와 좁은 오븐 속처럼 후텁지근하게 방 안을 채웠다. 쇼트웨이브는 엎드려 있는 디지털퍼머의 등을 마사지하듯 천천히 문질렀다.
"뭐 좀 안 먹을래, 괜찮겠어?"
먹지 않겠다는 뜻으로, 침대 속에 머리를 파묻은 채 디지털퍼머는 고개를 저었다. 쇼트웨이브는 그녀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그래, 좀 자라. 쉬어."

쇼트웨이브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 쪽으로 다가갔다.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는 건물들과 시가지, 그리고 그 뒤로는 제천시를 둘러싸고 있는 높은 산줄기가 거인의 검은 그림자처럼 어슴프레 솟아 있는 것이 보였다. 숨통을 동강낼 듯 위험스럽게 쳐져있는 쥐덫처럼 하늘 전면에 도사리고 있는 달빛은, 밤이 깊어진 탓에 농도가 더욱 짙어져 이젠 오크통에서 익어가는 포도주 빛깔로 대기를 물들이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아까 보아두었던 그 이상한 목조 건물 쪽으로 자연스럽게 돌아갔다. 바람 때문인지 아니면 자체 동력이 있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으나, 건물 앞에 서 있는 빨간 풍차가 천천히 돌아가고 있었다.
건물을 보고 있던 그녀가 흠칫 몸을 떨었다.
목조 건물의 모서리를 타고 오르는 누런 물체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아귀였다.
지붕 위에 올라선 아귀는 먹이를 발견한 고양이처럼 반대편 끝까지 천천히 기어가기 시작했다. 육식동물의 움직임처럼 조용하고 침착해 보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불안한 그 걸음걸이엔 그녀로서는 처음 느껴보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힘과 잔인함과 아주 고통스런 공포에 대한 예감. 그것은 영혼을 지배하는 악마의 걸음걸이였다.
아귀는 처마 끝에서 조용히 일어서 그녀가 거처하고 있는 시청 건물을 쳐다보았다. 늦가을 나무에 달린 호두처럼 주름투성이 탁한 갈색의 악마는 창문 가에 서 있던 그녀를 발견했다. 그가 날아오를 것처럼 몸을 죽 폈다. 그의 표정을 볼 수는 없었지만 그녀 역시 그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의 형태, 그의 시선, 그의 자세와 그가 풍기는 분위기, 저렇게 멀리 떨어져 있었건만 그와 대면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녀의 심장은 공포로 터질 것처럼 두근거렸다. 걷잡을 수 없는 두려움 속에서 그녀는 재빨리 태슬밴드를 풀러 커튼을 닫았다. 그녀는 뒤로 돌아 벽에 기대서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온 집안의 쓰레기를 긁어모아 꽉꽉 채워 넣은 10리터 짜리 쓰레기봉투처럼 무서움으로 넘쳐날 것 같은 그녀의 조그만 가슴은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우주는 확장되고 있지만 경계는 없어, 우주는 확장되지만 경계는 없어.."
쇼트웨이브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자신이 지어낸 위상학적인 개념 하나를 주문 외듯이 무의식 중에 되뇌였다.

흔히 사람들은 어떤 대상이 유한하려면 경계를 가져야 한다고 오해한다. 그러나 지구처럼 둥근 공을 생각해 본다면 알 수 있듯이 유한한 대상이 경계를 가지지 않을 수도 있다.
이 말은 지구 위 지표면의 한 지점에서 출발한 사람이 어떠한 가장자리에 도달하지 않고도 다시 제자리로 올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말하자면 지구의 표면은, 크기는 분명 유한하지만 어떤 경계도 없는 것이다.
만약 지구가 어떤 이유에선지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다고 상상한다면, 확장되는 대상이 유한하면서도 경계를 가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얼핏 듣기엔 모순처럼 여겨지는 이런 소리는 위상학의 단순 범주에 속하는 매우 기초적인 개념이지만, 그 단순함 속엔 마치 카페인이 잔뜩 들어간 얼음물처럼 쇼트웨이브의 정신을 차갑게 깨어나게 해주는 힘이 있었다.
그녀의 주문은, 지구 표면에는 존재하지 않는 2차원 경계를 우주적인 규모로 확대해서 적용했을 때 비슷한 방식으로 비유될 수 있는 3차원 경계에 대해 언급한 것이었다.
우주는 경계없이 확장한다. 견성성불하기 위한 선문답과도 비슷한 그 단순한 말을 반복하고 있노라면, 불교의 정수처럼 감춰진 깊은 의미가 어떤 형체를 띠며 그녀의 가슴 속에 자리잡곤 했다. 그림으로도 그릴 수 없고 말로도 설명될 수 없는 것이었지만, 경계없이 휘어지는 우주의 모호한 3차원적 모형이 구체적인 형태로 이미지화 되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러한 시각적 상상력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두 가지고 있는 것으로 여기고 있었지만, 사실 그런 능력은 매우 특수한 소수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

쇼트웨이브는 차츰 마음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눈을 뜨고 방 안을 바라보았다. 디지털퍼머는 그새 잠이 든 모양이었다. 웃을 때 보이는 그녀의 치열처럼 규칙적이고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하긴 고단하기도 했을 것이다. 숨소리에 맞춰 방 안의 조명이 차츰 어두워져 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는 아까 방을 둘러봤을 때 조명을 점멸할 수 있는 스위치를 찾을 수 없었던 걸 기억했다. 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방 안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쇼트웨이브가 움직이자 불빛이 어두워지던 게 멈춰졌다. 그녀는 방 문 앞까지 와서 손잡이를 조용히 돌리고 문을 열였다.
복도엔 아무도 없었다. 그녀들이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월워싱 조명이 벽을 향해 내리쬐고 있었고, 길게 펼쳐진 벽면 가득 그려진 벽화는 그 빛을 받아 불투명하게 반짝거렸다. 침실인지, 창고인지, 아니면 트랜지스터 라디오의 회로기판을 땜질하는 아파트형 공장인지, 대체 어떤 용도로 쓰는 방들인지는 모르겠지만, 승강기 앞까지 굳게 닫혀진 방문들이 이어져 있었다.
하나도 변한게 없었지만 그녀의 육감은 처음엔 느끼지 못했던 불순한 기운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녀는 그것이 무엇 때문인가 곰곰히 살펴보다가 곧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건 벽화에서 풍겨나오는 압박감 때문이었다. 그녀는 문에 기대 가장 가까운 곳에서부터 저편 끝까지 차례차례 벽화를 관찰했다.
벽화 속의 인물들은 그림의 주제에 따라 모두 다른 포즈를 하고 다른 각도로 위치해 있었지만, 그들의 눈은 매우 교묘하게 그려져 하나같이 그녀를 쳐다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춤을 추고 있는 무희도, 카페에서 술을 마시는 구경꾼도, 거울을 바라보고 있는 늙고 추레한 여인네들도, 심지어 서로 토론하는 것처럼 마주 보고 있는 등장 인물들마저도 자신들이 하고 있는 얘기거리엔 관심없는 듯 눈을 뒤로 돌려 그녀를 흘끔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눈을 비비고 나서 다시 한번 그림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느끼고 있는 강박감 때문에 혹시 착각을 일으키고 있는게 아닌가 싶어 자세히 벽화들을 보았지만, 그들의 시선은 뻔뻔스럽게도 여전히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마치 재미나게 놀고 있는 그들의 장소에 이방인처럼 불쑥 나타난 그녀 때문에 훼방을 받았을 때 보내는 시선같은 느낌이었다.
오금이 떨릴만큼 섬뜩해져 그녀는 방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그녀는 침대에 무너지듯 주저앉아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할 수만 있다면 지금 친구를 깨워 어디론가 달아나고 싶었지만 도망 갈 수도, 도망 갈 곳도 없었다. 개미핥기의 동굴 속에 추락한 개미처럼 좀체로 빠져나갈 수 없는 깊은 함정에 걸려든 느낌이었다.

한참을 그런 자세로 있던 그녀가 마침내 조용히 손을 내리고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벽장에서 담요를 꺼내 친구를 덮어주고, 자신도 덮을 것을 펴서 깔다가 문득 옆에 세워진 음식 카트에 시선을 주었다.
그녀는 그 위에 담겨진 음식들을 바라보다가, 집사가 오렌지 상귄느라고 소개해 준 디저트가 담긴 접시를 들었다. 그리고 냅킨 위에 올려져 있던 금빛 스푼을 이용해서 상귄느를 한 수저 덜어 입에 넣었다. 그녀는 상귄느가 혀에 닿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들풀처럼 향긋한 산딸기 퓌레와 크림처럼 연하게 응고된 젤라틴이 샘물같이 입안에서 녹아내리고, 설탕과 버터로 캐러멜화된 감미로운 용액 속에서 천연 헤즐넛 향이 향수처럼 뿌려졌다. 입 안에 든 상귄느 조각이 삼킬 새도 없이 녹아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맙소사."
그녀가 손에 들고 있는 디저트를 내려다 보았다.
"이건 거의 마약이야."
그녀는 접시에 담긴 음식을 몽땅 입 속에 털어넣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참으며, 카트 위에 다시 그것을 내려 놓았다. 위험한 폭발물을 치워 버리듯이 그녀는 카트를 밀어 침대로부터 좀 떨어진 곳으로 음식들을 치워놓고 신을 벗은 후 침대에 누웠다.
침대는 넓고 편안했다. 옆에 누워있는 디지털퍼머가 마치 제주도쯤에 떨어져 있는 것 같았다. 긴장이 풀어지자 쇼트웨이브는 제천시에 들어오면서부터 자신이 보았던 여러가지 사건과 주변 사물들, 그리고 집사가 했던 말들을 다시 떠올렸다. 천천히 어떤 결론이 도출되기 시작했다.
"그래..내일은 그걸 확인해 봐야겠어."
그녀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콘크리트로 싸 바른 무덤과도 같은 어두운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다음날 아침 그녀가 눈을 떴을때 이미 디지털퍼머는 자리에 없었다. 쇼트웨이브는 벌떡 일어나 방 안을 둘러보았다. 디지털퍼머가 화장대 앞에서 물끄러미 거울을 들여다 보는 것이 보였다.
"거기서 뭐해?"
디지털퍼머가 조용히 뒤를 돌아다 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약한 미소가 띄어 있었다.
"잘 잤어?"
"언제 일어났어? 속은 좀 괜찮아? 아픈데 없어?"
디지털퍼머는 입을 굳게 다물고 아무 말 없이 쇼트웨이브를 쳐다보았다. 잠시 그렇게 쇼트웨이브를 보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좀 이상해."
쇼트웨이브는 손가락으로 눌려 있는 자신의 머리를 빗어내렸다.
"몸이? 어디 안좋아?"
"아니, 정반대야."
디지털퍼머가 자리에서 일어나 방 안을 걸어다녔다. 마치 처음 걷는 사람처럼 자신의 발자국 하나 하나를 또박또박 확인하려는 것 같았다.
"이렇게 산뜻한 아침은 처음이야. 뭐랄까, 몸무게가 10킬로 그램은 줄어든거 같아. 정말이야. 날아다닐 수도 있을거 같아."
"뭐?"
쇼트웨이브는 눈쌀을 찌푸리며 뚱한 표정으로 디지털퍼머를 쳐다보았다.
"말 그대로야. 게다가 어제 밤엔 얼마나 깊이 잠이 들었는지..그렇게 깊게 잠들어 보긴 정말 오랜만이었어. 꿈도 꾸지 않았어. 눈을 감았다가 뜨니까 아침이더라구. 이렇게 깨끗한 정신으로 아침을 맞아본 적은 한번도 없었던 것 같아."
그녀가 창 가에 섰다가 갑자기 뒤로 확 돌았다.
"더 이상한 일은..아마 너도 믿지 못할거야. 아침에 얼굴이 너무 팽팽해서 거울을 봤더니, 글쎄 내 피부가 완전히 달라진거야."
그녀는 뺨을 손가락 끝으로 문질렀다.
"사실 나 눈가에 약한 기미가 생겨서 요새 좀 고민했었거든. 그런데 오늘 아침에 보니까 그게 다 없어진거야. 마치 우유처럼 뽀얗게 그렇게 변했어. 봐봐."
디지털퍼머가 침대로 성큼성큼 걸어와 그녀 옆에 앉아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 원래부터 깨끗한 피부를 가지고 있던 디지털퍼머인지라, 쇼트웨이브가 보기엔 그녀의 말처럼 크게 더 깨끗해진거 같지는 않았지만, 당사자가 틀림없이 그렇다고 주장하니까 약간 더 하얗게 변한거 같기도 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그래, 좀 더 깨끗해 진거 같기도 하고.."
"정말이라니까. 귀 뒤에 작은 여드름이 나서 곪으려고 했었는데 그것도 없어졌어."
"진짜?"
그녀는 머리카락을 젖혀 말간 귀 뒷부분 살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쇼트웨이브로서는 그곳에 여드름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본 적이 없었으므로 그저 어깨를 들썩일 수 밖에 없었다.
"갑자기 왜 피부가 깨끗해 진거지?"
디지털퍼머는 머리를 내리고 자세를 바로 했다.
"글쎄, 나도 그게 좀..그래서 아까 생각해 봤는데, 어제 그 변기에서 숙변을 제거했기 때문에 그런게 아닐까 싶어."
"뭐?"
쇼트웨이브가 말도 안되는 소리라는 듯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냐. 내 생각이 맞아. 그것 말고는 다른 이유가 없어."
진지한 표정으로 팔짱을 끼며 디지털퍼머가 얘기를 했다.
"한때 미용으로 장 세척이 유행한 적이 있었어. 생각 나? 몰라? 난 우리 이모가 그걸 받은 적이 있어서 기억을 하는데 말야. 대장의 융모들 있잖아, 그 사이 사이에 숙변 찌꺼기나 소화되고 남은 음식 찌꺼기들이 끼어서 오래 되면 아주 몸에 나쁜 독성물질들이 체내로 흡수된다고 하더라구. 배냇똥이라고 그러잖아. 그렇게 오래된 똥들. 장세척을 해서 그런게 씻겨나가면 이모가 그러는데 그렇게 몸이 가뿐할 수가 없다는거야."
디지털퍼머가 자신의 배를 바라보았다.
"어제 나한테 했다는 그 치료말야, 이모가 말하던 장 세척 정도는 상대도 안될 만큼 강력한 거였어. 난 거의 죽는줄 알았다니까."
"그래서?"
쇼트웨이브는 마치 자신이 장 세척을 받고 있는 것처럼 얼굴을 찡그리며 물었다.
"강력한 만큼 훨씬 더 깨끗하게 세척된 거 아니겠어. 이모 말이 맞다면 효과도 더 좋았을 테고.."
디지털퍼머가 흘겨보는 친구의 눈초리를 보더니 말을 흐렸다. 잠시 그렇게 그녀를 보고 앉아있던 디지털퍼머가 말을 이었다.
"너도 한번 받아봐."
"미쳤니, 이 년아."
쇼트웨이브가 소리를 질렀다.
"그래야 정말 효과가 있는 건지 알 수 있잖아. 정말 기분이 너무나 상쾌하다니까."
"시끄러."
쇼트웨이브가 말도 안되는 소리라는 듯이 못을 박았다. 디지털퍼머는 난처한 듯한 얼굴로 살짝 웃더니 자신의 머리를 긁었다.
"사실 난 한번 더 받아보려고 해."
쇼트웨이브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너 미쳤어?"
"아니, 안 미쳤어. 네가 몰라서 그래."
디지털퍼머가 정색을 했다.
"정말 이렇게 상쾌한 아침은 처음이라니까. 상쾌하다는 말, 잘 안 와닿지? 몸의 세포 하나 하나가 깃털처럼 가벼워진거 같은 느낌이야. 그게 치료 때문이라면 어제 그 고통 정도는 충분히 감수할 수 있어. 아니, 생각해보면 참을 수 없을 만큼 그렇게 고통스럽지도 않았던 거 같아."
디지털퍼머는 어이가 없어 입을 벌리고 있는 쇼트웨이브의 코 끝을 살짝 쳤다.
"우리 이모는 돈 내고 장 세척도 받았는데 이것아, 이건 공짜잖아. 뭐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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