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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마녀의 전설(The Legend of Five Witches) - 9부2장 ← 고화질 다운로드    토렌트로 검색하기
16-08-24 23:59 622회 0건
창작

다섯 마녀의 전설(The Legend of Five Witches) 9부 2장


본 야설은 강간, 윤간, 성고문 수준의 SM 등 비윤리적이고 중범죄에 해당하며 잔인하고 하드코어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취향의 글을 좋아하시지 않는 분은 읽으시지 말 것을 미리 권고 드립니다.





- 9부 - 이어지는 전설 (랑구르시아시 : 갈림길 / 저주받은 검) - 2장 -


쟌피르가 주영의 마부석 옆자리에 탄 채로, 방향을 일러주는 대로 마차를 몰자, 아까 지나쳤던 촛불 그림이 있는 여관보다 좀더 크고 근사해 보이는 여관이 나타났다.

여관의 하인들에게 마차를 맡기고 미영 일행이 여관 문으로 막 들어서려 할 때였다.

"아가씨들! 사흘을 굶었습니다! 한푼만 적선해 주십쇼!"

어느 늙은 거지 노인이 불쌍한 목소리로 미영 일행을 불러 세웠다.
누덕누덕 헤지고 더러운 누더기를 입었을 뿐 아니라, 왼팔이 어깨께에서 잘려 나갔고, 왼다리도 무릎께에서 잘려나가서 목발을 짚고 겨우 겨우 움직이는 중증 장애인이었다.
쉰을 좀 넘은 듯한 중늙은이였지만, 고생을 많이 한듯 군데군데 파란 빛이 남아 있는 덮수룩하고 지저분한 머리카락은 거의 새하얗게 새어 있었다.

돈을 밝히지만, 마음이 몹시 약한 면이 있는 "젖소" 은주가 돈주머니에서 돈을 조금 꺼내 거지 노인에게 내밀 때였다.

"채앵!"

갑자기, 미영의 아름다운 금빛 눈동자가 붉은 빛으로 변하더니, 긴 칼을 빼어 어느새 거지 노인의 목께에 들이대고 있었다.
주영과 수진만이 도중에 알아차리고 놀란 표정을 지었을 뿐, 다른 사람들은 칼을 빼는 것조차 볼 수 없었을 정도로 빠른 동작이었다.


"뭐죠, 당신은?"

미영이 차가운 음성으로 거지 노인에게 물었다.


"예? 보시다시피, 배고픈 거지 영감일 뿐입니다.
살려 주십쇼!"

거지 노인이 놀란 표정으로 몸을 움추리며 사정했다.


"왜 그래, 미영아?"

"젖소" 은주가 놀란 표정으로 묻자, 미영이 고개를 설레설레 젓더니 긴 칼을 다시 허리에 찬 칼집에 집어 넣었다.

"죄송합니다, 할아버지!
제가 뭔가 착각했나 봐요."

"젖소" 은주가 꺼내든 돈을 거지 노인에게 쥐어준 후, 미영의 행동에 잠시 놀랐던 일행들 모두 다시 여관으로 들어섰다.


호기심을 참지 못한 주영이 미영에게 물었다.

"흐음..... 방금 왜 그런거야, 언니?"


"미안! 재연씨 때문에 신경이 날카로와져 있었나 봐!
순간적으로 저 거지 할아버지에게서 엄청난 기운이 느껴졌었는데 다시 확인해 보니까 아니더라구."


돈을 받아들고, 절름거리며 목발을 짚고 여관에서 멀어져 가며, 거지 노인이 혼잣말로 작게 중얼거렸다.

"셍뜨 아미트레(여 성기사)? 하지만 아직 경험이 적은 것 같군."


꽤 먼 거리였지만, 놀라운 청력으로 노인의 말을 들은 주영과 미영 자매가 마주 얼굴을 쳐다 보았다.

"흐음..... 방금 언니는 셍뜨 바인(신성한 빛)을 쓰지도 않았는데 셍뜨 아미트레라는 걸 어떻게 안 거지, 저 거지 할아버지는?"


"자아! 가장 좋은 빈과 요리들을 가져오게!
아름다운 주인님들! 오늘은 주인님들의 충성스런 종 쟌피르가 근사한 저녁 식사를 대접하겠습니다!"

큰 테이블에 자리잡고 일행들을 부르는 매기아러 쟌피르의 넉살좋은 외침으로, 거지 노인에 대한 자매들의 대화는 거기서 단절되고 말았다.

녹색 청포도와 멜론, 야채 샐러드, 돼지고기 바베큐와 닭고기 요리, 버섯 스프, 새우와 생선으로 만든 해산물 요리까지.....
큰 시의 고급 여관 겸 식당답게 제법 다양하고 먹음직스런 요리들이 넓은 테이블을 덮었다.

"자! 정식으로 제 소개부터 올리겠습니다.
제 이름은 쟌피르 반 그레슬렌..... 서북쪽 끝에 조그만 영지를 갖고 있는 그레슬렌 남작가의 넷째 아들이랍니다.
동시에..... (쟌피르가 목소리를 조금 낮췄다) 5레벨의 매기아러(마법사)이기도 하죠.
사업상 보통 노인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친한 사람들만 알고 있는 얘기입니다만.....
아하하하하하하하하!"

매기아러 쟌피르가 오른손을 뒷통수에 댄 채 웃음을 터뜨렸다.


고개를 끄덕인 후, 일행의 리더격인 미영이 말을 이었다.

"저는 미리어 시엔(신미영)이라고 합니다.
마르 신님의 셍뜨 아미트레(여 성기사)이기도 하구요.

이쪽은 제 동생인 쥬리아 시엔(신주영).....

이쪽은 매기아러(마법사)이자, 정령사인 플로라 바카스(박은주).....

이쪽은 쟈넷 귀니비어(김지선).....
귀니아 여신님의 신관입니다.

이쪽은 수잔 리이(이수진).....

그리고..... 마지막으로 클로아 브라이언입니다."


매기아러 쟌피르의 녹색 눈동자가 반짝였다.

"혹시 샹드로 마을을 밤비르(흡혈귀)들로부터 구해주셨다는 세비레(구원자)님들이신가요?
들은 적이 있습니다.
셍뜨 아미트레 데 골쥬앙(금발의 여 성기사)와 셍뜨레 데 실비앙(은발의 성녀) 일행에 대한 얘기를....."


미영이 고개를 끄덕이는 가운데, 주영이 입을 삐죽하며 물었다.

"아까 아저씨가 할아버지에서 아저씨로 변신할 때 언니들이 셍뜨 바인(신성한 빛)을 비췄었는데 못 봤어요?"


"아하하하하하하!"

쟌피르가 손을 뒷통수에 댄 채 웃음을 터뜨렸다.
아마도, 뭔가 쑥스러운 걸 얼버무릴 때의 버릇인 듯 했다.

"아까는 제 준수한 모습으로 빨리 돌아오고 싶은 욕심에 그만 눈치 못 챘었답니다, 아름다운 주인님들!"


"넓은 탑안이 온통 녹색과 파란색으로 물들었었는데 못 알아챘었다니..... 어처구니가 없군!"

속으로 한숨을 쉬면서 미영은 생각했다.


"자, 이 도시의 식당에서 구할 수 있는 중에서는 가장 좋은 빈이랍니다.
한 잔씩 드시죠!"

쟌피르가 일행들 앞에 놓인 나무잔에 포도주로 보이는 붉은 액체를 반정도씩 따르더니 기분좋게 건배를 제안했다.

"아름다운 아가씨들의 건강을 위해서!"

"그리고, 쟌피르씨의 건강을 위해서!"

미영이 화답하는 가운데, 모두들 즐거운 표정으로 나무잔을 부딪쳐 건배했다.
맛을 보니 약간 독한 듯 하긴 했지만, 향기가 괜찮은 포도주였다.

"보르도 레드 와인하고 비슷한 맛이네."

원샷하듯 포도주를 비운 "젖소" 은주가 입술을 핥으며 기분좋게 감상을 말했다.

"맛있어요, 엄마!"

금발의 클로아도 즐거운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지만, 술이 무척 약한 듯 양볼이 벌써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와하하하하하! 한 잔씩 더 드시죠!"

쟌피르가 기분좋게 웃으며 "젖소"와 클로아에게 포도주를 다시 따라주는 걸 보며, 미영이 말했다.

"조금씩 마시렴, 클로아! 취한다!
주영아, 너도!"

"야옹! 야옹!"

어느새 취한 듯, 볼이 조금 달아오른 채 고양이 소리로 대답하는 주영을 보고 미영은 머리가 아픈 기분을 느꼈다.


"이곳 랑구르시아시는 어떤 곳이죠?"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가벼운 말투로 미영이 묻자, 미영의 바로 옆에 앉은 매기아러 쟌피르가 쾌활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시끄럽고 말썽이 많은 곳이죠.
가까이의 광산에서 금이 많이 나기 때문에 항상 한탕 노리는 뜨내기들이 붐비구요.
덕분에 저같은 매기아러(마법사)에게는 수입이 아주 좋은 곳이기도 하답니다.

랑구르스만 없다면 정붙이고 살만한 곳일지도 모르죠."


"랑구르스요?"

미영의 물음에 쟌피르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모르셨나 보군요.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이랍니다.
석달에 한 번씩 젊은 여자를 잡아먹죠."


미영은 달콤한 포도주의 취기가 오싹하게 깨는 기분을 느꼈다.
랑구르시아..... 랑구르스 + 아(~이 있는 곳), 이 세계에서 그런 지명은 괴물이 있다는 걸 뜻하는 경우가 많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인상적인 높은 성벽과 풍요로와 보이는 모습에..... 미처 생각이 미치질 못했었다.


다른 일행들은 포도주와 다른 요리들을 기분좋게 즐기며 떠드느라 나란히 앉은 미영과 쟌피르간의 얘기를 듣지 못하고 있는 듯 했다.

"어째서 석달에 한 번씩이죠?
석달에 한 번씩 굴밖에 나오는 건가요?"

"비슷하죠.
석달에 한 번씩 랑구르스가 동쪽 숲밖으로 나오면 제물로 바치기 때문이랍니다."

매기아러(마법사) 쟌피르가 이제는 어쩐지 약간 우울해진 듯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믿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미영이 입을 열었다.

"조그만 마을이라면 모르지만, 이곳 랑구르시아시는 높고 튼튼한 성벽에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큰 도시인데.....
괴물에게 사람을 제물로 바친단 말인가요?"


포도주 기운이 돌아선지 왠지 더욱 우울해진 표정으로 쟌피르가 대답했다.

"성벽 따위로는 랑구르스를 막지 못합니다.
랑구르스는 일어선 키가 삼십 헥사에 달하고 몸 길이는 아마 칠십 헥사에 달할 거대한 괴물이죠."


"헥사요?"


"참, 다른 세계에서 오셨다고 하셨든가요?"
1헥사는 이 정도 길이입니다."

자기 스스로 또다시 자기 잔에 포도주를 따른 후, 쟌피르가 양손을 벌려 헥사가 어느 정도 길이인지 보여주었다.
약 50센치 정도로 보면 될 듯 했다.


"몸 길이 삼, 사십 미터의 괴물이라..... 완전히 공룡 아냐?"

하지만 여전히 미영으로서는 납득이 가지 않는 점이 있었다.

"그렇게 큰 괴물이 겨우 석달에 한 번 사람 하나씩만 잡아먹어서 배가 찬단 말인가요?"


"벌컥! 벌컥!"

열받는 듯 물처럼 포도주를 들이킨 후, 나무 술잔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젊은 매기아러(마법사) 쟌피르가 대답했다.

"랑구르스는 단순한 괴물이 아닙니다.
아룡이라 불리는 드래곤의 일종이죠.
인간 이상의, 아마도 인간보다 훨씬 우월한 지성을 갖고 있으며.....
물론 말도 할 줄 압니다.

그리고..... 그 놈에게 인간의 여자는 식사가 아닙니다.
단순히 석달에 한 번씩 먹는 별미에 불과하죠.
그 놈의 식사로는 양떼와 소떼를 항상 숲으로 갖다 바치고 있습니다."


"딸꾹!"

진한 포도주를 과음한 탓인지 이제는 딸꾹질까지 하는 쟌피르를 보고 미영이 다시 물었다.

"그렇게 덩치가 크고 힘이 센데다 지성까지 있어서 꼼짝없이 여자들을 제물로 바치나 보죠?
해치울 방법이 없나요?"


제법 잘 생긴 쟌피르의 녹색 눈동자가 우울한 빛으로 반짝였다.
꽤 취한 듯 했지만 아직까지 생각이 흐려질 정도는 아닌 듯 했다.

"아실지 모르지만..... 드래곤이라 불리는 종족들의 가죽은 갑옷 열겹을 덧댄 만큼 두껍고 질기답니다.
왠만한 창이나 칼은 아예 들어가지도 않을 정도죠.

게다가 어떻게 된 일인지 랑구르스에게는 매기아조차 전혀 통하지 않는답니다.
오히려, 드래곤들에게는 매기아가 통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만.....

하지만.....

사실 랑구르스를 해치울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없기는 커녕..... 랑구르시아시 시민이라면 어린애라도 누구나 다 그 방법을 알고 있죠.

바로 그 점이 가장 열받는 점입니다!"

매기아러(마법사) 쟌피르의 목소리가 흥분으로 높아졌다.

"랑구르시아를 죽일 수 있는 방법이 바로 눈앞에 있고, 모두들 잘 알고 있는데도.....
사용할 수가 없으니.....
정말로 미칠만큼 열받고 펄쩍 뛰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그라페르"를 사용할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아주 간단히 랑구르스를 해치울 수 있을 겁니다!"


"그라페르(쓰레기, 하찮음)라구요?"

미영의 고개가 갸우뚱했다.
이 나라 말이 아직도 서툴러서 잘못 알아들은게 아닌가 스스로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죄송합니다! 입버릇이 돼서요!"

단정하게 빗은 갈색 머리를 과장되게 꾸벅 숙여보인 매기아러 쟌피르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라페르(쓰레기)"의 원 이름은 사실 "그랑데르(위대함)"라고 합니다.
지금은 다들 "그라페르"라고 부르지만요.

말씀드리자면 꽤 긴 이야기랍니다.

그러니까, 처음 랑구르스가 나타나서 이 도시에 인간 제물을 요구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이백사십여 년 전의 일이라고 합니다.
그 이후로 계속해서 석달에 한번씩 순결한 처녀를 그 괴물에게 산 제물로 바쳐왔던 것이죠.

그러던 어느날..... 그러니까 약 사십여 년 전의 일이라고 들었습니다.
저도 들은 이야기일 뿐이니 꼭 이랬다고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만....."


......................................................................................................................


"휴우우우우....."

랑구르시아시의 영주인 다포드 반 앙리아 남작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고급스런 회색 쟈켓 아래 입고 있는 보라색 셔츠가 온통 식은 땀으로 젖어 있었다.
부친 매들 반 앙리아 남작으로부터 랑구르시아시를 물려받은 이래, 벌써 이십여 년째나.....
아직 어린애였던 일곱, 여덟 살때, 유모의 품에 안겨 겁에 질며 울면서 처음 봤던 것부터 치면 적어도 사십여 년째.....
그것도 1년에 4번씩 꼬박꼬박 보아온 광경이지만 도무지 익숙해지질 않았다.

살려달라고 울면서 애원하던 젊은 처녀의 비명소리가 아직까지도 귓가에 울리고 있는 듯 했다.


"괜찮나, 다포드?"

남색의 긴 신관복을 입은 - 남작과 마찬가지로 역시 오십이 조금 안되어 보이는 - 신관 남자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꽤 넓은 영주 집무실에는 다포드 남작과 신관 남자 두사람 뿐이었다.
고급스런 나무 테이블을 사이에 둔 채, 남작은 의자에 앉아 있었고, 신관 남자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그 앞에 서 있었다.


"응, 괜찮네! 괴물에게 무참하게 잡아먹힌 건 내가 아니니 말이야."

자조적인 목소리로 다포드 남작이 대답했다.

"자네야말로 좀 앉지 그러나, 스테판! 불편하게 서 있지 말고....."

남작이 테이블 맞은 편의 의자를 가리키며 신관에게 권했다.
다포드 남작과 스테판 신관은 어려서부터 친하게 같이 놀며 자라 허물없는 친구 사이였다.
지금도, 신경이 약한 편인 자기를 위로해 줄 생각으로 일부러 찾아와준 고맙고 의지가 되는..... 정말로 좋은 친구였다.


"정의와 수호의 신 마르신을 섬기는 사제가..... 아무도 지키지 못하는 주제에 어떻게 편히 앉을 수 있겠나!
그것도 셍뜨(성자)라는 헛된 이름만 높은 엉터리 사제 따위가 말이야....."

스테판 신관의 말에 남작의 회색 눈동자가 슬픔으로 흐려졌다.

"자네가 그렇게 말하면..... 영주인 나는 어떻게 하라고..... 이 친구야!"

쉰이 가까운 남작의 얼굴이 일그러지더니 분한 눈물이 회색의 눈동자에서 주르르 흘러내렸다.

"크으윽! 크윽! 정말로 견딜 수가 없네!
차라리 죽더라도 군대를 일으켜서 싸워보면 어떨까 싶어!
이대로는 도저히 참을 수가.....
나는 다포드 반 앙리아일세.
하지만..... 이제는 가문의 이름도 "앙리아" 대신 "랑구르시아"로 바꿔야 할거야.
이미 앙리아라는 이 도시의 옛날 이름을 사용하는, 아니 사용은 고사하고 기억하는 사람조차 아무도 없을테니 말이야."


슬픈 표정으로 스테판 신관이 고개를 저었다.
랑구르스를 군대로 죽일 수 없다는 것은..... 이미 서너 차례의 시도를 통해, 명확하게 확인된 것이었다.
그로 인해 수많은 병사들과 심지어 랑구르시아시 영주 두 사람의 죽음이라는 값비싼 댓가를 치러야 했다.
마음약한, 게다가 아미트(기사)라기 보다는 학자에 가까운 자신의 친구를 개죽음시킬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아니! 이봐요! 안됩니다! 영주님은 지금 바쁘시다니까요."

"안되긴 뭐가 안돼!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이 뭐가 있다는 거야!"

"막아라!"

"경비!"

영주 집무실밖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지는가 싶더니 "쾅!" 소리와 함께 거칠게 집무실의 큰 나무문이 활짝 열렸다.
세 명의 경비병들이 양쪽 팔에 달라붙은 채로, 땅딸막하고 굵은 팔 다리와 몸통, 긴 갈색 턱수염을 가진 나잉족 한 사람이 억지로 영주 집무실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당신이 앙리아시 영주요?"

"그... 그렇소만....."

미처 눈가에 난 눈물자국을 닦지도 못한 채, 다포드 남작이 놀란 표정으로 나잉족에게 물었다.
155 정도의 키를 가진 나잉족은 높은 의자에 앉은 남작과 비슷할 정도로 키가 작았으나, 굵은 몸통처럼 묵직한 목소리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영주라면..... 주민들을 보호해야지, 여자들을 괴물따위에게 제물로 바치다니 이게 뭐하는 짓이오?"

"이런! 무엄하다!"

양옆에서 나잉족을 잡고 있던 경비병들중 한 사람이 소리쳤으나, 다포드 남작은 오히려 경비병들에게 나잉족을 놓아주라고 손짓하면서 말했다.

"옳은 말씀이시오.
위대한 나잉족이시여.
내가 어떻게 해야 하겠소?"

사실..... 인간들에게 있어서 나잉족들은 존경의 대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자기들끼리 깊은 산속 광산에 틀어박혀서 어쩌다 특별한 사치품을 구할 때만 인간들과 접촉하는 종족.....
거래할 때면 아무 장식도 없는 투박한 물건들을 가져와서 말도 안되는 가격을 부르는 퉁명스럽고 고집스런 괴짜 종족.....
하지만, 그들이 만드는 물건들, 특히 무기류를 써 본 사람들은 - 터무니없는 가격때문에 비록 그 수는 매우 적지만 - 그 품질을 극찬하며 두고두고 가보로 간직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다포드 남작 - 랑구르시아시 영주 - 의 이례적인 태도는, 남작이 그만큼 물에 빠진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임을 보여주는 셈이었다.


"그야, 물론..... 그 괴물단지 랑구르스를 죽여버려야 하지 않겠소!"


나잉족의 대답에, 별로 넓지 않은 다포드 남작의 양어깨가 힘없이 늘어졌다.

"죽일 방법이 없다오."


"그건 어째서요?"


랑구르시아시에서는 어린애라도 뻔히 아는 내용이었지만, 여하튼 쉰살 가까운 나이의 남작은 열심히 설명을 했다.

"우선 - 어째서인지 모르지만 - 랑구르스에게는 매기아(마법)가 전혀 통하지 않소.
심지어, 엄청난 돈을 주고 데려온 7레벨의 매기아러조차도 랑구르스에게는 상처 하나 입히지 못한 채, 한 입 간식거리가 되고 말았다오.
그 일은 내 증조부때 일이었지만.....

그렇다고 군대를 모아서 랑구르스를 해치우는 것도 불가능하오.
강한 활과 쇠뇌는 랑구르스의 가죽을 뚫을 수는 있지만 개미가 무는 정도에 불과하다오.
칼과 창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소드 바인(검기)을 쓸 줄 아는 아미트(기사)들의 경우에도 가죽을 살짝 뚫을 수 있는 정도에 불과하오.

치명상은 고사하고, 제대로 된 상처다운 상처 하나 입히지도 못하고, 그 거대한 덩치와 발에 깔려서 납작해지거나 큰 입에 삼켜질 뿐이오.

그런 시도를 했다가 이제까지 죽은 병사들만 아마 수천 명은 될거요.
마지막으로 그런 시도를 하셨던 내 조부께서도 결국 병사들과 함께 돌아가셨고....."


턱수룩한 갈색 수염의 털보 나잉족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나는 매기아 따위는 모르오.
하지만..... 요컨데, 그 가죽이 너무 질겨서 잘 뚫리지 않는게 문제라는거 아니오.

만약에....."

나잉족의 입가의 웃음이 더욱 커졌다.

"만약에..... 그 가죽을 숭숭 뚫을 수 있는.....
연한 쇠고기 자르듯 쉽게, 그 가죽을 썽둥썽둥 자를 수 있는 장검이 있다면 어떻소.

그래도..... 랑구르스를 죽일 수 없겠소?"


"꿀꺽!"

이마에 깊게 패인 몇 개의 주름살 아래 다포드 남작의 회색 눈동자가 기대감으로 반짝였다.

"그런 검을 가지고 있으시오? 위대하신 나잉족이시여?"


실망스럽게도..... 나잉족은 고개를 옆으로 저었다.

"아니오. 아직까지는 그런 검을 만들 필요가 없었으니 말이오."

그러나, 그의 말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한 자루 만들어줄 수는 있소."


"벌떡!"

다포드 남작, 앙리아시의 영주 - 아니 이제는 모두 랑구르시아시라고 부르게 된지 오래됐지만 - 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황급한 걸음으로 테이블을 돌아서 달려오다시피 한, 다포드 남작이 작은 키의 나잉족 앞에 무릎을 꿇으며 매달리듯 - 짧고 굵은 손가락들을 가진 - 나잉족의 양손을 잡았다.

"그렇게만 해준다면.....
그렇게만 해준다면..... 그대는 나와 앙리아시 모든 인간들의 진정한 세비레(구원자)요!

만들어만 준다면 그 보답은 황금으로 원하는 대로 치르겠소!"


나잉족이 히죽 입가에 웃음을 지었다.

"조급하게 굴지 마시오, 인간의 영주여!
내 마을로 돌아가서 만들어서 가져오려면 너무 번거로운데다 오래 걸릴거고.....
여기에 시설을 갖추고 만들자면..... 빨라야 3년은 걸리리다."


오랜 친구 스테판 신관은 물론, 경비병들도 보고 있는 앞이었으나, 오십에 가깝게 나이를 먹은 다포드 남작의 회색 눈에서 주르르 눈물이 흘러 내렸다.

"이미..... 이백 년이 다 차가도록 저 괴물에게 시달리며 사람을 제물로 바쳐왔소.
3년 정도 더 못 기다리겠소?

필요한게 있으면 뭐든지 말하시오."


털보 나잉족이 대답했다.

"우선 아주 능숙한 일꾼들과 대장장이들이 필요하오.
다섯 차례에 걸쳐서 일꾼들을 이십여 명, 대장장이들을 다섯 명씩 각각 보내주시오.
다섯 번 모두 매번 다른 사람들이어야 하오.

그들과 함께 먼저 내가 그 검을 만들 시설을 만들거요."


까다롭다고 들은대로, 이 나잉족 역시 자기의 제조 시설의 비밀을 인간들에게 절대로 알리고 싶지 않은 듯 했다.
다포드 남작이 긍정의 뜻으로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시설이 완성된 후, 사방 주위 30헥사(약 15미터)에 빙 둘러서 무장 경비병들을 밤낮으로 세우고 아무도 들어오거나 엿보지 못하게 해주시오.
심지어 영주 당신이라도 절대 안되오.
나는..... 매일 해가 뜨기 조금 전부터 큰 모래시계가 24번 떨어질 시간 동안(약 12시간) 일할거요."


남작이 다시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이 끝난 뒤에 나는 식사를 하고 쉴거요.
내가 좋아하는 고기 바베큐와 시원한 맥주를 부족하지 않게 잔뜩 준비해 주시오.

그리고..... 인간의 젊은 여자들이 내 이런저런 잔 시중을 들어줬으면 하오.
험험! 사실..... 인간족의 여자들이 우리 종족보다 외모가 나은 건 사실이니까 말이오.

나는 아무데서나 잘자니 잠자리는 크게 중요하진 않지만, 물론 편안한 편이 좋겠지."


역시 어렵지 않은 요구였다.
영주인 동시에, 그 자신이 상당한 학식을 갖추고 있는 다포드 남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각 종족별로 미적 기준이 달라서 자기 종족의 이성이 가장 예쁘게 보인다는 대다수 학자들의 주장은 수정되어야 겠군.
"인간이나 다른 종족이나..... 보는 눈은 다 똑같다!" 로....."


"원하는 모든 준비를 즉시 갖춰 주겠소!
그리고 그 외에..... 매달 황금으로 20,000세테르, 칼이 완성되면 200,000세테르를 추가로 드리도록 하겠소!"


"영주님!"

너무 엄청난 금액에 시 재정이 감당할 수 있을지 걱정스러워진 집사가 입을 열었으나, 다포드 남작의 표정은 진지했다.


나잉족이 수염 투성이의 얼굴에 히죽 웃음을 짓더니 말했다.

"나잉족 최고의 장인인 무챠바크가 3년간 아무 일도 못하고 만드는 명검이오.
1,000,000세테르를 줘도 살 수 없는 가치가 있다오.
하지만..... 좋소, 인간의 영주여!

나로서도, 아름다운 젊은 처녀들을 재미로 잡아먹는 그 빌어먹을 괴물은 없애고 싶으니까.
그 정도면 충분하오."


다포드 남작은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로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고맙소, 위대하신 나잉족이여!
정말 고맙소!"


......................................................................................................................


어느새 모두들 조용히 매기아러 쟌피르의 얘기를 듣고 있었다.
포도주에 너무 취했는지 발그레한 볼을 한 채 흐뭇한 표정으로 졸고 있는 클로아를 제외하고는.....


"흐음..... 무챠바크라면 오르크 쟈르칼 아저씨한테 도끼를 만들어 줬다는 그 나잉족이잖아?
지금은 수진이 언니 도끼가 됐지만....."

주영이 그 이름을 기억해내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 검이 만들어졌나요?"

옆에 몸을 기댄 채 졸고 있는 클로아의 긴 금발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주면서 "젖소" 은주가 물었다.


......................................................................................................................


"이제 만 3년이 꼬박 다 차 가는군, 다포드."

모처럼 친구인 다포드 남작을 찾아온 스테판 신관이 고운 붉은 색의 포도주를 친구의 잔에 부어주고 자신의 잔에도 부으며 입을 열었다.


가볍게 부딪쳐 건배하면서 다포드 남작이 흐뭇하게 웃었다.

"응! 이제 200년이 넘게 우리 도시를 괴롭혀온 괴물에게서 해방될 때가 된 거지!
랑구르시아시는 다시 예전의 앙리아라는 이름을 되찾게 될거야!"


조심스럽게..... 친구의 기분을 상하지 않도록 아주 조심스런 말투로, 스테판 신관이 다시 말을 꺼냈다.

"그 나잉족이 만들고 있는 검이 정말로 랑구르스를 죽일 수 있다고 확신하나?"


영주의 이마에 깊게 파진 주름살들이 꿈틀 움직였다.
하지만 이내 다시 웃는 얼굴로 돌아오며 영주가 대답했다.

"물론이네. 자넨 나잉족 무챠바크를 믿지 않는 것 같군."


여전히 조심스런 말투로 스테판 신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난 3년간, 거리에는 이런 저런 소문들이 계속 돌았다네.
그대로 말하기는 좀 민망하지만..... 자네가 사기꾼에, 여자를 밝히는 호색한, 나잉족에게 속고 있다는 소문이지.
특히, 많은 대장장이들이 검 한 자루 만드는데 3년이나 걸린다는 점에 코웃음을 치고 있다고 하네.
아무리 혼자 만든다지만, 검 한 자루 만드는데는 오래 걸려야 2, 3개월..... 서두르면 일주일밖에 안 걸린다고 말이야."


"하지만..... 일주일 걸려서 만든 검으로는 랑구르스의 가죽을 뚫을 수 없지."

붉은 포도주를 한 모금 들이마시며 다포드 남작이 입을 열었다.

"몇 번인가 식사라도 같이 하자는 핑계로 무챠바크를 불러서 넌지시 물어본 적이 있었네.
도대체 어떻게 만드는 건가, 혹시 더 앞당길 수는 없는가 하고 말이야.

무챠바크의 설명으로는 나잉족의 무기류는 우리 인간들처럼 화로로 철광석을 달군 후, 연해진 강철 덩어리를 망치로 두들기고 담금질을 해서 만들어지는게 아니라고 하더군.

몇 달에 걸쳐서, 아예 철광석을 물처럼 녹이고 걸러서 순수한 철을 골라낸 다음, 나잉족들만이 알고 있는 여러가지 광물들을 섞으면서 계속 화로에서 녹이고 다시 녹이기를 반복한다는 거야.
그 과정을 몇 달간 반복하면 인간들이 사용하는 강철과는 전혀 다른, 나잉족들이 "블라키르(검은 것)"라고 부르는 금속이 만들어진다는군.
"블라키르"는 녹이 슬거나 변하지 않고, 단단하면서도 깨지지 않는, 아주 특별한 금속이라고 하네.
내 생각으로는 그 녹은 금속을 그대로 거푸집 틀에 부어서, 두들기고 담금질을 해도 되지 않을까 싶네만.....
무챠바크는 그렇게 해서는 우리가 원하는 검이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하네.

검의 길이에 해당하는 길다란 금속덩이를 만든 다음, 계속 두들겨서 강도를 높이면서, 조각하듯 단단한 금속덩이를 조금씩 깎아내는 방식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하네.
그러면 날은 물론 손잡이까지 통째로 검은 색의 "블라키르"로 된 무기가 만들어진다는 거야."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신관이 물었다.

"나는 무기 만드는 거나 금속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일리가 있는 얘기인가?"


"나도 그런 쪽에 대해서 - 특히 나잉족들의 방식에 대해서는 - 아는게 없긴 마찬가지네."

솔직하게 자신의 무지를 시인하며 영주가 대답했다.

"다만..... 우리 인간의 대장장이들도 철광석만이 아니라 나무나 밀대를 태운 재를 같이 화로에 넣고 있다는 건 알고 있네.
그런 걸 같이 넣어서 철광석을 달군 후 망치로 두들기면 강도가 더 높아진다는 거야.
재 이외에 다른 광물들을 넣고 녹여서 강도를 높인다는 것은..... 일리가 있는 얘기일 수도 있네.
그리고 그렇게 만든 금속덩이를 두들기며 깎아서 무기를 만든다면....."

나직히 한숨을 쉰 후 영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검 한 자루 만드는데, 시간이 3년이나 걸린다는 것도 이해가 가는 얘기지.
아마 끔찍할 만큼 고되고 단조로운 반복 작업일 걸세.
우리 인간들로서는 감히 흉내낼 엄두도 내기 어려울 만큼....."


"벌컥!"

영주 집무실 문이 갑자기 거칠게 열렸다.

"기뻐하시오, 앙리아시의 영주여!
드디어..... 드디어 검이 완성되었소!"

갈색의 턱수룩한 수염을 거의 가슴께까지 늘어뜨린 털보 나잉족이 큰 입을 활짝 벌리고 웃고 있었다.
양옆에는 금발과 갈색 머리의 젊은 여자 둘을 끼고 있는 채였다.


"너무 너무 멋있어요, 무챠바크님! 이제 우리 랑구르시아시는 구원받은 건가요?"

무챠바크 왼편의 금발의 젊은 여자가 아양을 떨듯 나잉족에게 몸을 기대며 물었다.
키 155 정도의 무챠바크에 비해 여자의 키가 좀더 커서 사실 기대기 편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젊은 여자들도 무챠바크도 모두 즐거워 보였다.


"물론이지! 앞으로는 앙리아시라고 부르게! 하하하하하하하하하!"

쉰이 다 된 나이의 다포드 남작이 젊은이처럼 시원한 웃음소리를 터뜨렸다.

"수고하셨소! 위대하신 무챠바크시여!
그 검은 어디 있소?"


"씨이이익!"

나잉족 무챠바크가 큰 입 가득 미소를 지었다.
짧고 굵은 검지 손가락을 세운 채 흔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런 특별한 검을 선보이는데 겨우 "자! 여기 받으시오, 영주!" 해서야 되겠소?
그 랑구르스라는 괴물 놈에게 제물을 바치는 곳이 동쪽 성문 밖이라고 했었소?
시민들을 그 자리에 불러 모으시오.

그래서 다들 보는 앞에서 화려하게 검을 선보입시다.
좋은 이름도 하나 지어주면 더 좋을거요, 인간의 영주여!"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다시 한번 시원한 웃음을 터뜨리며 다포드 남작이 나잉족 무챠바크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거 아주 좋은 생각이오. 그렇게 합시다!"


스테판 신관은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행히 저 수선스런 나잉족은 최소한 완전히 사기꾼은 아니었던 듯 했다.
친구를 위해서나 랑구르시아 시민들을 위해서나 잘된 일이었다.
"셍뜨(성자)"라고 불리는, 최소한 중급의 셍뜨 바이너(신성한 빛의 사용자)로서, 그것도 정의와 수호의 신인 마르신의 사제로서 자기도 뭔가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해줄 수는 없을까.....
스테판 신관은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다음날, 해가 중천에 뜬 정오 무렵.....
랑구르시아시의 동쪽 성문 밖 넓은 공터에는 적어도 만 명이 넘어 보이는 수많은 남녀노소의 시민들이 모여 있었다.
모두들 기대감에 부푼 얼굴로 고급스런 보라색 천으로 덮여 있는 무언가를 둘러싼 채로 웃고 떠들고들 있었다.
사람들이 너무 가까이 오거나 천을 미리 들춰보지 못하도록, 십여 명의 경비병들이 창을 든 채 지키고 있었지만 경비병들 자신도 들뜬 얼굴로 웃고 있었다.

"길을 여시오!
영주님의 행차시오!"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경비병들의 외침과 함께 고급스런 영주의 마차가 천천히 넓은 동문을 빠져 나왔다.


"위대하신 영주님 만세!"

"위대한 앙리아시 만세!"

"위대한 나잉족 무챠바크 만세!"

영주의 집사로 보이는 나이 지긋한 사내의 선창에 이어, 시민들도 기꺼이 영주와 무챠바크를 위해 입을 모아 만세를 외쳤다.
잠시후, 마차 문이 열리며 랑구르시아시 - 아마도 이제는 다시 앙리아시가 될 - 영주 다포드 남작과 그의 부인, 그리고 나잉족 무챠바크가 내렸다.
만 명이 넘는 사람들의 눈동자들이 일제히 쳐다보는 가운데..... 나잉족 무챠바크가 짧고 굵은 다리를 열심히 놀려 보라색 천이 덮여 있는 곳으로 먼저 걸어갔다.
이어, 수염 투성이의 얼굴 가득 환한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인간족의 영주여!
이것이 나잉족 최고의 장인 무챠바크가 3년이나 걸려서 만든 최고의 명검이오!"

무챠바크가 정말로 나잉족 최고의 장인인지는..... 모여있는 인간족들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모두들 기대감에 부풀어 술렁거리는 가운데, 무챠바크가 "휘익!" 소리와 함께 보라색 천을 걷었다.


"..... 오오오오오오오오오! ....."

"..... 저것이 그 검이로군! ....."

"..... 랑구르스를 한 칼에 죽이고 토막토막낼 수 있다는....."

칠흑처럼 검은 빛의, 칼날과 칼받침, 손잡이 모두가 통째로 검은 금속으로 된, 전체 길이 1.5미터 가량의 상당히 길고 묵직해 보이는 양날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챠바크가 미리 와서 용케 잘 찾아냈는지 마치 단상처럼 넓적하고 평평한 큰 바위 위에 - 다시 고급스런 보라색 천을 깔고 그 위에 - 양날검이 곱게 놓여 있었다.


군중들 사이에서 짙은 남색의 긴 신관복을 입은 남자가 모습을 드러내더니 천천히 다가왔다.
영주와 친해서 자주 방문한 탓에, 낯이 익은 경비병들도 그를 제지하지 않고 가까이 걸어오도록 했다.

"..... 셍뜨(성자) 스테판 리에(님)! ....."

셍뜨(성자)로서 널리 존경받는 그의 모습에 시민들이 다시 웅성거렸다.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스테판 신관이 입을 열었다.

"정의와 수호의 신이신 마르 신님의 사제로서 저도 조금이나마 도움이 돼드리고 싶습니다, 영주님!"

공적인 자리라 존댓말로 입을 연 신관이 새까만 양날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더니 양손을 하늘을 향해 쳐들며 소리높이 기도했다.

"정의와 수호의 신이신 마르 신이시여!
이 검을 축복하시어..... 진정한 수호의 검이 되게 하소서!"

높이 쳐들린 그의 양손이 파란 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 셍뜨 바인(신성한 빛)! ....."

"..... 나뚜랄레(과연), 셍뜨(성자) 리에(님)! ....."

랑구르시아 - 아니, 이제는 아마도 앙리시의 - 시민들이 놀라움으로 웅성거리는 가운데.....
바위 위의 보라색 천위에 눕혀진 채, 놓여있던 양날검이 스테판 신관의 셍뜨 바인에 호응하듯 파란 빛을 내며 반짝이기 시작했다.

"..... 오오오오! 저것 봐라! ......"

"..... 마르 신님의 축복이 임하셨다! ....."


이어, 놀랍게도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는데 칠흑처럼 검은 양날검이 천천히 공중으로 떠오르면서 파란 빛이 더욱더 강해졌다.
칼날을 아래쪽으로 향한 채로 공중에 떠오른 양날검은 마치 새파란 태양처럼 검 전체에서 눈부실 만큼 파란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 오오오오오오오오오! ....."


너무나도 영광스럽고 감격스런 그 모습에 앙리아시의 시민들은 눈물을 흘리며 열광했다.


잠시후, 파란 빛이 천천히 사라져 가면서, 양날검이 천천히 공중에서 내려오기 시작했다.
소리도 없이 바위 위에 닿은 검날이 천천히 - 마치 바위가 연한 두부라도 되는 것처럼 - 깊숙히 박히기 시작했다.
최소한 날 길이의 절반 이상, 깔아놓은 보라색 천을 뚫고 바위속에 검날이 깊숙히 박혀 들어갔다.


"..... 오오오! 저 모습 좀 봐! ......"

"..... 단단한 바위를 젤리처럼 쉽게 뚫어 버리는군! ....."

"..... 저 검이라면 정말로 랑구르스를 잡을 수 있겠어! ....."



"나잉족이 만들고, 그 위에 신의 축복을 받은 위대한 검이여!
그대를 "그랑데르(위대함)"라고 일컫노라!"

다포드 남작이 목청을 높여 선언했다.


앙리아시 시민들은 만세를 부르며 소리높여 열광했다.

"..... 그랑데르 만세! ....."

"..... 만세! ....."

"..... 만세! ....."

모두들 기쁨에 넘쳐 소리지르는 가운데, 심지어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마저 적지 않게 있었다.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앙리아시의 영주, 다포드 남작이 천천히 "그랑데르"를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바위에 박혀 있는 양날검의 손잡이를 두 손으로 잡고, 검을 잡아 뽑..... 으려고 했다.

"이잇!"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잇! 이이이이이잇!"

별로 건장한 체격이 아닌 데다가, 이제 오십 가까이 나이를 먹은 영주가 쑥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뒤를 돌아 보았다.

"나도 예전같지 않나 보군.
누가 좀 도와주게!"


앙리아시의 시민들이 그 광경을 보며 즐겁게 웃음을 터뜨리는 가운데, 덩치 큰 경비병 하나가 나섰다.
큰 두손으로 양날검의 검은 손잡이를 잡고 힘껏 잡아 당겼다.

"이야앗!
이야아아아아아아아아앗!"


아무리 잡아당겨도 빠지지 않는 모습을 보고 여기저기서 들리던 웃음소리가 점점 잦아 들었다.
오래지 않아, 일만 명이 넘게 모여 와글거리던 동문 밖 공터가 순식간에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흐뭇하게 웃으며 옆에 서 있던 나잉족 무챠바크도 뒤늦게 사태를 알아차리고 눈이 튀어나올 것 같은 표정을 짓더니, 다급하게 뛰어오며 소리쳤다.

"비켜 봐!"

경비병을 밀치듯 밀어낸 나잉족의 인간보다 훨씬 굵은 두 팔에 힘줄이 불거질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

"우하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압!"

그러나 여전히 검은 바위에 깊이 박힌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건가, 스테판?"

다포드 남작이 놀란 표정으로 오랜 친구에게 물었으나, 스테판 신관 예상못한 사태에 역시 놀라서 입이 다물어지 않는 표정이었다.
다행히, 뭔가 해결책이 떠올랐는지 스테판 신관이 다시 제자리에 무릎을 꿇더니 하늘을 향해 양손을 쳐들며 소리높여 기도를 올렸다.

"정의와 수호의 신이신 마르 신이시여!
이 검에 내려주신 특별한 축복과 은총에 감사 드립니다!
이제 이 검을 뽑아서 축복받은 검을 사용하게 하소서!"

요컨데..... "그만 장난치고 놔, 임마!" 라는 취지의 기도를 신께 소리 높여 올리자.....
셍뜨(성자)로 존경받는 신관답게 양손에서 찬란한 새파란 셍뜨 바인(신성한 빛)이 빛을 발했으나.....
이번에는 검이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또한 바위에서 빠질 기미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우하아아아압! 우하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한참 용을 쓰던 나잉족 무챠바크가 검을 잡고 있던 손을 놓더니,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오십에 가까운 점잖은 스테판 신관의 멱살을 잡고 거칠게 흔들며 소리쳤다.

"야! 이 돌팔이 신관아!
축복 필요없으니까, 취소시켜!
저 검은 축복같은 거 없어도 이미, 어떤 괴물의 가죽이든 뚫을 수 있는 검이라구!
빨리! 취소시켜!"


"이럴리가! 이럴리가 없어!"

다포드 남작이 넘어질 듯 급한 걸음으로 다시 검에 달려와 양손으로, 아니 온몸으로 손잡이에 매달려 용을 썼다.

"이이잇! 이이이이잇! 빠져라! 제발 빠져!"

그러나, 검은 바위에 반 이상 깊숙히 박힌 채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나이 지긋한 남작이 히스테릭한 비명을 소리높이 질렀다.


"..... 으으으으으! ....."

"..... 이게 어떻게 된거야? ....."

"..... 마르 신께서 축복이 아니라 저주를 내리셨잖아! ....."

"..... 흑흑! 흐흐흐흐흐흑! 어떻게 해! ....."

여기저기서 비탄어린 목소리와 함께 여자들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일만여 명의 랑구르시아시 시민들 - 잠깐 앙리아시 시민으로 돌아올 뻔 하다 말았던 - 은 절망속에서 비명을 지르고, 눈물을 흘리며..... 절규했다.


......................................................................................................................


"그렇게 해서..... 나잉족 무챠바크가 만든 위대한 검 "그랑데르(위대함)"는 "그라페르(쓰레기)"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씁쓸한 표정으로 다시 자신의 빈 잔에 포도주를 부으며 매기아러(마법사) 쟌피르가 이야기를 마쳤다.


"그래서, 지금도 그 검은, 바위에서 빠지질 않고 있나 보죠?"

"젖소" 은주가 안됐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물론이죠.
알고 보니..... 마르 신의 저주는 그 검에만 내려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잉족 무챠바크는 정과 망치를 들고 주변의 바위를 쪼아낼 생각을 해냈지만.....
검이 박혀 있는 주변의 바위들도 아무리 죽어라 두들겨도 흠집 하나 나질 않았다고 합니다.
그 점은 지금도 마찬가지구요."

쟌피르의 대답에 미영이 고개를 저었다.

"저는 샹드로 마을에서 셍뜨 아미트레(여 성기사)가 될 때 마르 신님을 접한 바가 있어요. (3부 내용 참조)
그 분은 제가 정의를 수호하고 생명을 지키기를 원하셨었어요.
저주를 내리고 훼방을 놓으실 분이 아닙니다!"


매기아러 쟌피르가 고개를 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이제는 꽤 취한 듯, 갈색 콧수염과 약간의 턱수염을 길렀지만, 제법 매끈한 인상의 얼굴이 발그스름해진 상태였다.

"어쨌든 "그라페르(쓰레기)"는 아직까지도 빠지지 않고 있습니다.
다포드 남작님께서는 눈물을 흘리며 나잉족 무챠바크에게 검을 다시 만들어줄 수 없냐고 물었지만, 무챠바크는 마주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하고 떠나갔다고 합니다.

"검이라면야..... 백 번이라도 기꺼이 다시 만들 수 있소!
아니..... 열받아서라도 정말 다시 만들고 싶소!
하지만 마르 신께서는 명백하게..... 내가 검을 만드는 것을 원하지 않고 있소!
나는 신앙생활하고는 거리가 멀지만..... 하지만, 명백하게 드러난 신의 뜻을 감히 거스를 수는 없지 않소!"

그러면, 원래 검을 완성하면 주기로 약속했던 금화 이십만 세테르를 가지고 가라고 다포드 남작님께서는 말씀하셨지만, 무챠바크는 눈물을 흘리면서 고개를 젓고 그냥 떠나갔다고 하더군요.


더 황당하고 열받는 상황은 그로부터 몇 주후에 발생했다고 합니다.
늘 인간 제물을 바치던 자리 근처의 바위에 꽂혀 있는, 전에 없던 검을 본 랑구르스가 물었던 것이죠.

[이. 검.은. 색.의. 검.은. 뭐.냐? 인.간.의. 영.주!]

"이거 말씀이십니까? 그냥 장식품입니다.
이 주변이 너무 썰렁해 보여서요! 하하하하하하하!"

가엾게도 다포드 남작님께서는 눈물을 흘리면서 누가 들어도 뻔한 거짓말을 하셔야 했답니다.
랑구르스는 차갑게 비웃었을 뿐 더이상 추궁하지는 않았지만.....
울화통이 터졌는지, 다포드 남작님께서는 그뒤 몸져 누워서 두어 달 뒤에는 그만 돌아가시고 말았답니다.
그래서..... 당시에는 갓 어린애를 벗어난 나이였던, 그 아들인 현 영주님께서 뒤를 잇게 되셨다고 하더군요.

본인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많은 사람들의 염원을 허무하게 깨뜨리고, 오랜 친구까지 죽게 만든 자책감 때문인지.....
그 얼마후 스테판 신관도 시름시름 앓다가 죽고 말았답니다.
마지막에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고 하더군요.

"마르 신님! 어째서..... 어째서....."

그 덕분에.... 위스토아 대륙 전체에서, 마르 신님은 귀니아 여신님과 함께 가장 인기가 있는 신이지만..... 유일하게 이곳 랑구르시아시에만은, 지금까지도 마르 신님의 신자는 거의 없다시피 하답니다."


"키킥킥킥!"

발갛게 달아오른 귀여운 얼굴로 주영이 웃음을 터뜨렸다.


"별로 웃을만한 결말은 아닌데?
얘가 포도주를 너무 많이 마셨나?"

미영은 머리가 아픈 기분을 느꼈지만, 주영은 여전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우리가 랑구르시아시를 구해주자, 언니들!
우리는 강하잖아!
그런 저주받은 검 따위 없어도 우리라면 괴물을 해치울 수 있어!"


신중한 성격의 미영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아마..... 우리에게도 무리일거야!
랑구르스라는 괴물은 몸 길이가 삼, 사십 미터는 되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우리는 거의..... 고양이에게 덤비는 조그만 새앙쥐 정도 밖에 안돼.
그보다 더 심할 수도 있고.....

아무리 강하고 초월적인 새앙쥐라도 고양이한테도 그런 힘이 통할지는 좀....."


"아니요!"

뜻밖에도 "아가씨" 지선이 아름다운 은빛 눈동자에서 눈물까지 흘리며 단호한 목소리로 외치듯 입을 열었다.

"설사 무리라고 해도..... 우리는 싸워야 해요!

재연씨처럼 세계를 정복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사람들을 구원해 주지도 못한다면.....
우리가 얻은 특별한 힘은 아무 의미도 없게 돼요!

지난번, 오르크들의 무리에 둘러싸여서 이제는 꼼짝없이 죽게 되나 보다 생각했을 때.....
저는.....
저는 결심했어요.
여기서, 살아남는다면..... 다시는 뒤로 숨거나 피하지 않겠다고.....

다른 사람들을 돕고 구하기 위해..... 제게 주어진 이 힘을 사용하겠다고....."


"아가씨"를 제외한 미영 일행 - 미영, 주영, 수진, "젖소" 은주 - 은 서로 얼굴을 쳐다 보았다.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상황 파악이 잘 안되는 듯, 매기아러(마법사) 쟌피르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좋아!"

기분좋은 얼굴로 주영이 가장 먼저 외쳤다.

"어차피..... 나약한 인간들이나, 밤비르(흡혈귀), 오르크들 따위 말고 좀더 강한 상대와 싸워보고 싶던 참이었거든."

소리도 없이 오른손 손톱이 30센치 길이로 늘어났다.
크고 아름다운 루비처럼 붉은 눈동자가 어쩐지 위험스런 느낌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게다가 내 사랑하는 주인님께서 정의의 용사가 되시겠다면야.....
기꺼이 도와드릴 수 밖에요. 야아옹!"

어리광부리는 고양이같은 소리를 내면서, 주영의 오른손 손톱이 다시 줄어들었다.
이어, 바로 옆에 앉은 "아가씨" 지선의 치렁치렁한 은발 머리의 뒷머리를 움켜 잡고 약간 거친 느낌으로 잡아 당겨, 붉은 입술에 진하게 키스했다.


"웁! 우우웁!"

"아가씨"는 눈을 뜬 채로 갑작스런 딥 키스에 당황하는 듯 했으나 곧 얌전히 몸을 맡기며, 눈을 감고 주영의 품에 몸을 기댔다.


"꿀꺽!"

붉은 단발머리와 긴 은발의 두 명의 여자들이 진하게 키스하는..... 그림처럼 아름다운 모습을 보면서 매기아러 쟌피르가 침을 삼켰다.

"혹시..... 쥬리아(주영)씨는 인간이 아닌가요?"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상황에 머리가 아픈 기분을 느끼며 미영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말씀드린 대로..... 제 동생이에요.
우리는 다른 세계에서 왔지만, 인간이 맞답니다."


"젖소" 은주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모르는 사람들..... 심지어 다른 세계 사람들이지만.....
다시 돌아가긴 틀린 것 같으니, 우리도 이제..... 이 세계 사람이나 마찬가지야.
나는 사람들을 구해주고 싶어.
클로아와 볼피아 마을 사람들을 구해줄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야."

"아가씨" 정도는 아니지만, 꽤 희고 고운 손이, 자신에게 기대어 이제는 완전히 잠들어 있는 클로아의 금발머리를 사랑스러운 듯 쓰다듬어 주었다.


수진이 뒤이어 입을 열었다.

"랑구르스는 굉장히 강할 것 같군.
실은..... 나도 주영이처럼 좀더 강한 상대와 싸워보고 싶었었어.
내가 얼마나 강해졌고, 어디까지 강해질 수 있는지 시험해보고 싶은 생각도 있고....."


"휴우....."

미영은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세계"를 우리 인간들의 세계라는 의미로 사용할 때는..... 세계 정복을 노릴 수도 있지 않을까 싶을 만큼, 우리는 확실히 강해.
하지만, 랑구르스는 덩치가 크고 마법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 밖에 모르지만..... 어쩌면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존재일 수도 있어.
적어도..... 장난 삼아서, 또는 시험 삼아서 가볍게 시도해볼 일은 아니야.
죽게 될 수도 있어.

그래도 랑구르스와 싸울 생각들이야?"


아직까지도 거칠게 키스하고 있는 주영을 조심스럽게 밀어내며, "아가씨" 지선이 가장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주영이 "아가씨"를 약간 투정하는 표정으로 쳐다본 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긴 연녹색 머리의 "젖소", 남자처럼 짧은 갈색 단발머리의 수진도 뒤이어 고개를 끄덕였다.


"휴우....."

미영이 다시 한번 짧은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색깔외에는 주영과 똑같아 보이는 크고 아름다운 금빛 눈동자가..... 뒤이어 생기있게 반짝거렸다.
놀랍게도 그 얼굴은 밝게 웃고 있었다.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사실 나도..... 사람들을 구해주고 싶어.
랑구르스와 싸워보고 싶은 생각도 있고.....

그럼..... 랑구르스를 해치울 계획을 짜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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