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들은 샌달우드의 달콤한 나무향이 가득한 몇 그루의 나무들 근처에 왔다.
향기나는 수풀 너머로는 과실수들이, 행진하려는 병정들처럼 열을 맞춰 늘어서 있었다. 여인은 여전히 천천히 걸으며 이곳저곳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들과 작물들에게 무심한 듯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꽃 색깔이 고운 나무들 사이로 여인이 걸음을 옮겼다. 붉고 노란 열매가 달린 낮은 키의 매자나무 곁에, 나뭇가지가 세 끝으로 갈라진 작살나무가 아주 특별한 보랏빛 색깔의 열매를 맺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들은 자신의 주위를 떠도는 나무의 달콤한 향도, 보라색 열매의 고운 빛깔도 제대로 인식할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악몽 같고 비상식적이었며 믿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지금까지 그녀들에게 해준 여인의 설명도 백퍼센트 믿을 수가 없었다. 지금 그녀들이 공감할 수 있는 단 하나의 확실한 실체가 있다면, 그것은 익사직전까지 그녀들을 침잠시키는 차가운 두려움의 물결이었다. 전율이 끊이지 않고 뼈를 타고 흘러 다녔다. 그녀들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껏 아무도 경험하지 못했던 거대한 공포가 그 곳에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디지털퍼머는 아까부터 입 안에서 맴돌았지만 무서운 나머지 하지 못했던 질문을 더이상 참지 못하고 꺼냈다.
"그럼 여긴 어딘가요? 저승인가요?"
여인은 억양없는 어조로 말했다.
"아니, 아직 그렇진 않아요." 여인의 밋밋한 말투는 디지털퍼머를 더욱 비현실적인 분위기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이 곳을 가리키는 말은 여러가지가 있어요. 너무너무 많죠. 그럴 수 밖에 없어요. 정의되지 않는 것이 이 곳의 특징이거든요. 에레보스, 스티지아, 명계, 명부, 황천, 하데스, 스올, 림보, 연옥 따위의 말들이 그것이예요."
살구나무의 늘어진 잎이 여인의 머리를 스쳤다. 가지에 달렸던 과육들이 곧 분홍색으로 익어가기 시작했다.
"이런 다양한 말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뜻은 경계라는 의미예요. 이승과 저승의 경계. 당신들이 살았던 공간과 앞으로 살아가야 할 공간의 경계. 더 나아가서 실상과 허상의 틈새를 말하는 것이지요."
여인의 발이 부드러운 황토흙과 그곳에 박아놓은 평평한 디딤돌을 밟았다.
"조심하세요. 이 곳은 그 어느 곳도 아니랍니다. 어떤 일이라도 발생할 수 있는 거친 황무지이고, 능력이 있다면 누구라도 침범할 수 있는 무주공산의 공간이지요. 그리고 이제는 설 곳을 잃은 당신들의 몸을 끌어가려 할 아귀들의 각축장이 될 거예요."
여인이 그녀들을 돌아보았다.
"일단 중심을 잃으면 당신들은 순식간에 그것들의 먹이가 될 거예요."
가차없는 여인의 말에 그녀들은 몸을 떨었다.
"중심을 잃는다는게 무슨 뜻인가요? 누가 우릴 먹이로 삼나요?"
"아귀들이지요. 당신들을 이곳에 불러들인 자들. 그 자들 외에도 신선한 육체에 굶주린 아귀들이나 영혼을 쥐어짜는 잔혹한 마귀들이요. 그것들에게 당신들은 정말 탐나는 먹잇감이예요."
여인이 찬찬히 그녀들을 살폈다. 낮은 먹구름이 두껍게 깔린 하늘이 점점 어두워졌다.
"중심을 잃는다는건 당신들이 자신을 지키려는 의지와 용기, 지혜와 자신감을 잃는다는 뜻이예요. 공포와 유혹에 넋을 잃어버리면 그것으로 끝이죠. 아귀들은 당신들을 뜯어먹으며 영원히 나올 수 없는 지옥의 밑바닥으로 끌고 들어갈거예요."
디지털퍼머는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대체 자신이 왜 이런 상황에서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그런 벌을 받아야할 어떤 나쁜 짓이라도 했단 말인가. 20년이 좀 넘는 짧은 인생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엄마, 아빠, 학창시절과 대학. 그게 그녀의 모든 것이었다. 그녀의 인생은 막 꽃피려는 순간에 끝이 나버린 것이다. 그녀는 엄마를 붙들고, 든든하고 따뜻한 품 안에서 위로받으며 울고 싶었다. 그러나 이게 꿈이 아닌 이상 그것은 불가능한 희망이었다.
"절대 그것들에게 당신들을 알게 해서는 안돼요. 당신들의 과거나 중요한 기억, 특징..특히 이름 같은 것들을 말이지요. 이 곳에서 이름은 당신들의 모든 것이예요. 당신들의 이름을 알게 되면 아귀들은 당신들을 지배할 권력을 얻어요. 아시겠어요?" 여인이 조심스레 당부했다.
"이 집은 어떤가요? 무슨 집이지요? 이 집에서 보호받을 순 없나요?" 쇼트웨이브가 두려움에 잠겨버린 목소리로 말했다.
"이 집이 어떤 집인지 말할 순 없어요. 얘기했잖아요. 이 곳에선 남에게 정체를 알려줄 수 없다구요. 물론 당신들이 아귀는 아니지만 그래도 매우 위험한 일이예요. 다만 이 집은 과거의 어떤 곳, 쇠락한 성이자 신화의 장소라는 것 정도는 가르쳐 줄 수 있어요. 당신들은 내가 당신들의 언어로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요? 그렇지 않아요. 내가 쓰는 언어는 신화의 언어예요. 여러 언어로 분화되기 전에 존재했었던 언어의 원형, 아키타입이죠. 내가 당신들의 말을 쓰는게 아니라 당신들이 내 말을 당신들에게 맞게끔 해석하고 있는 거예요."
과실수가 심어진 밭도 이제 거의 끝나고 저쪽 끝에서 대문이 보였다. 여인이 쇼트웨이브를 바라보았다.
"이 집에서 보호받을 수 있느냐고 물었죠? 대답은 아니오 예요. 당신들은 여기에 머물 수 없어요. 어머니가 당신들을 나가라고 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큰 이유는 당신들이 포도를 먹었기 때문이예요."
"포도요?" 디지털퍼머와 쇼트웨이브가 서로 마주보았다.
"포도가 왜요? 그게 어때서요?"
"그건 이 집의 어두운 과거와 연관이 있어요. 모든 상황을 고려해 봤을 때 분명 당신들은 부적의 명령에 따라 포도를 달라고 했겠지만 그래도 마찬가지예요. 여기엔 예외가 없어요."
"어두운 과거? 그게 뭐죠? 그게 왜 추방의 이유가 되나요?" 안타까운 마음으로 디지털퍼머가 물었다.
"그 일 역시 얘기할 수 없어요. 현명하다면 당신들이 알아내겠죠."
어느덧 여인은 그녀들이 들어왔던 솟을삼문 앞에 도달했다.
"다 왔군요." 여인이 몸을 돌렸다.
"이제 가셔야 할 시간이예요. 내가 주의를 줬던 것을 기억하세요. 행운을 빌어요."
디지털퍼머가 울상을 하고 여인을 쳐다보았으나 여인은 표정의 변화없이 몸을 비껴선 채 치마 위로 두 손을 맞잡고 있었다. 그녀들이 나가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쇼트웨이브가 현관문의 문고리를 잡았으나 문을 열지는 않고 잠시 멈췄다. 그녀가 디지털퍼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문고리를 놓고 여인을 향해 몸을 돌렸다. 쇼트웨이브는 깊은 심호흡을 하고 여인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저희에게 호의를 보여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쇼트웨이브는 잠시 목을 가다듬었다.
"그래서 더욱 죄송해요. 이러고 싶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우리는 실질적인 도움이 필요해요.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도움을 주세요."
쇼트웨이브가 잠깐 망설였으나 이내 입을 열어 정확히 발음했다.
"소희씨."
순간 여인의 땋아올린 머리가 모조리 풀어지며 갈색의 거미줄처럼 방사형으로 곤두섰다. 타오를 듯한 분노와 배신감이 그 머리칼을 후광처럼 너울거리게 만들었다. 여인의 얼굴이 자외선에 노출된 형광물질처럼 푸르스름하게 빛나고 돌과 흙이 울어대는 귀곡성이 주위를 메웠다. 이내 강렬한 열풍이 그녀들을 휩쓸었다. 눈을 뜰 수 조차 없는 지독한 고통이 전신을 휘감으며 널름거렸다. 여인의 옷깃이 펄럭이며 장창처럼 그녀들을 겨눴다.
"그래, 내가 가르쳐 준 것을 곧바로 나에게 써 먹을건가?"
장중하면서도 표독스런 음성이 사자후처럼 튀어나와 그녀들을 진탕시켰다. 여인과 그녀들 사이에 있었던 공기가 날이 선 작은 칼들처럼 직진하며 쇼트웨이브를 할퀴고 지나갔다. 이내 그녀들이 딛고 선 땅에 하얀 서리가 쌓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쇼트웨이브는 온 몸에 힘을 주고 땅에 버티어 섰다. 폭포수같은 압력이 그녀를 짓눌렀지만 신음을 지르며 버텨냈다. 쇼트웨이브는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올려 여인을 마주보며 소리 질렀다.
"나가서 죽으나 당신 손에 죽으나 매한가지예요. 이대로 나가면 우리는 하루도 버티지 못할거예요. 당신도 잘 알잖아요. 어차피 호의를 가지고 있었다면 조금만 더 베풀어주세요. 여기 있겠다는 소린 하지 않겠어요. 도움을 달라구요."
그녀들을 누르던 압력이 조금만 더 계속되었다면 쇼트웨이브는 아마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한계점에서 무서운 힘들이 눈녹듯 사라졌다. 땅바닥에 쌓였던 서리가 얼어붙어 그녀들의 신발을 하얀 구두처럼 만들고 있었다. 여인은 어느새 차분한 처음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뻔뻔스럽군요."
여인이 잠시 그녀들을 쳐다보다가 품에서 골무 하나를 꺼냈다.
"뻔뻔스럽지만 아주 똑똑해요. 자, 이걸 받아요."
디지털퍼머가 골무를 받았다. 비단으로 만들어진 작은 골무에 여러가지 색실로 정교한 자수를 넣었는데 앞면엔 박쥐가 뒷면엔 국화가 수놓여 있었다.
"항상 그걸 끼고 다니세요. 당신들에게 위험이 닥치면 골무가 손가락을 물듯이 조일 거예요. 일종의 경보지요. 물론 그게 당신들의 적을 쉽게 알 수 있도록 해 주지만 그것만 믿고 마음을 놓고 있어서는 절대 안돼요. 그건 현존하는 위험에 대해서만 경고를 줄 뿐이예요."
여인은 이번엔 품 속에서 빨간색과 파란색 두 개의 비단 주머니를 꺼냈다.
"이건 사용법을 아시죠?"
디지털퍼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어떻게 쓰는 거지요?"
여인이 한숨을 쉬었다.
"커다란 위험이 닥치면 여는 거예요. 많이 들어봤을텐데요."
디지털퍼머는 쇼트웨이브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렇군요. 많이 들어봤어요. 할머니가 해주시던 옛날얘기 같은 데서. 직접 보는건 이번이 처음이지만요."
디지털퍼머는 주머니를 받았다. 활짝 핀 모란꽃과 아직 피지 않은 봉오리, 조그마한 녹색 잎들이 치밀하게 수놓아진 깨끗하고 귀여운 주머니였다.
"이걸 두 개 주시는 이유는 우리가 위험을 두번 겪는다는 뜻인가요?" 쇼트웨이브가 물었다.
"아니요. 주머니가 나한테 두 개 밖에 없다는 뜻이예요." 여인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것은 미래를 예상하고 만들어진 주머니예요. 골무와는 달리 현존하지 않는 위협을 알아내서 당신들을 도와주지요. 주머니 하나엔 해결방법이 하나씩 들어가 있어요. 가장 중요한 점은 당신들한테 위험이 닥쳤을 때 그 위험에 맞는 주머니를 정확히 찾아 열 수 있느냐 하는 점이지요."
"그 위험에 맞는 정확한 주머니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지요?"
"알 수 없죠. 그건 운에 맡겨요. 아무도 모르는 일이거든요."
디지털퍼머가 고개를 설래설래 저으며 주머니를 두 개 모두 가방 속에 넣었다.
"자, 이제 모든게 끝난거 같군요. 그렇죠? 내가 드릴 수 있는 도움은 이게 다예요."
여인이 이렇게 말하며 다시 손을 맞잡았다.
"굳이 행운을 빌진 않아도 되겠어요. 영리하니까. 생각보다 잘 해나갈거 같군요."
여인의 얼굴에 아주 희미한 미소가 어렸으나 이내 사라졌다.
"그럼 안녕히."
여인은 뒤돌아서 왔던 길을 되돌아 가기 시작했다.
향기나는 수풀 너머로는 과실수들이, 행진하려는 병정들처럼 열을 맞춰 늘어서 있었다. 여인은 여전히 천천히 걸으며 이곳저곳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들과 작물들에게 무심한 듯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꽃 색깔이 고운 나무들 사이로 여인이 걸음을 옮겼다. 붉고 노란 열매가 달린 낮은 키의 매자나무 곁에, 나뭇가지가 세 끝으로 갈라진 작살나무가 아주 특별한 보랏빛 색깔의 열매를 맺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들은 자신의 주위를 떠도는 나무의 달콤한 향도, 보라색 열매의 고운 빛깔도 제대로 인식할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악몽 같고 비상식적이었며 믿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지금까지 그녀들에게 해준 여인의 설명도 백퍼센트 믿을 수가 없었다. 지금 그녀들이 공감할 수 있는 단 하나의 확실한 실체가 있다면, 그것은 익사직전까지 그녀들을 침잠시키는 차가운 두려움의 물결이었다. 전율이 끊이지 않고 뼈를 타고 흘러 다녔다. 그녀들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껏 아무도 경험하지 못했던 거대한 공포가 그 곳에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디지털퍼머는 아까부터 입 안에서 맴돌았지만 무서운 나머지 하지 못했던 질문을 더이상 참지 못하고 꺼냈다.
"그럼 여긴 어딘가요? 저승인가요?"
여인은 억양없는 어조로 말했다.
"아니, 아직 그렇진 않아요." 여인의 밋밋한 말투는 디지털퍼머를 더욱 비현실적인 분위기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이 곳을 가리키는 말은 여러가지가 있어요. 너무너무 많죠. 그럴 수 밖에 없어요. 정의되지 않는 것이 이 곳의 특징이거든요. 에레보스, 스티지아, 명계, 명부, 황천, 하데스, 스올, 림보, 연옥 따위의 말들이 그것이예요."
살구나무의 늘어진 잎이 여인의 머리를 스쳤다. 가지에 달렸던 과육들이 곧 분홍색으로 익어가기 시작했다.
"이런 다양한 말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뜻은 경계라는 의미예요. 이승과 저승의 경계. 당신들이 살았던 공간과 앞으로 살아가야 할 공간의 경계. 더 나아가서 실상과 허상의 틈새를 말하는 것이지요."
여인의 발이 부드러운 황토흙과 그곳에 박아놓은 평평한 디딤돌을 밟았다.
"조심하세요. 이 곳은 그 어느 곳도 아니랍니다. 어떤 일이라도 발생할 수 있는 거친 황무지이고, 능력이 있다면 누구라도 침범할 수 있는 무주공산의 공간이지요. 그리고 이제는 설 곳을 잃은 당신들의 몸을 끌어가려 할 아귀들의 각축장이 될 거예요."
여인이 그녀들을 돌아보았다.
"일단 중심을 잃으면 당신들은 순식간에 그것들의 먹이가 될 거예요."
가차없는 여인의 말에 그녀들은 몸을 떨었다.
"중심을 잃는다는게 무슨 뜻인가요? 누가 우릴 먹이로 삼나요?"
"아귀들이지요. 당신들을 이곳에 불러들인 자들. 그 자들 외에도 신선한 육체에 굶주린 아귀들이나 영혼을 쥐어짜는 잔혹한 마귀들이요. 그것들에게 당신들은 정말 탐나는 먹잇감이예요."
여인이 찬찬히 그녀들을 살폈다. 낮은 먹구름이 두껍게 깔린 하늘이 점점 어두워졌다.
"중심을 잃는다는건 당신들이 자신을 지키려는 의지와 용기, 지혜와 자신감을 잃는다는 뜻이예요. 공포와 유혹에 넋을 잃어버리면 그것으로 끝이죠. 아귀들은 당신들을 뜯어먹으며 영원히 나올 수 없는 지옥의 밑바닥으로 끌고 들어갈거예요."
디지털퍼머는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대체 자신이 왜 이런 상황에서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그런 벌을 받아야할 어떤 나쁜 짓이라도 했단 말인가. 20년이 좀 넘는 짧은 인생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엄마, 아빠, 학창시절과 대학. 그게 그녀의 모든 것이었다. 그녀의 인생은 막 꽃피려는 순간에 끝이 나버린 것이다. 그녀는 엄마를 붙들고, 든든하고 따뜻한 품 안에서 위로받으며 울고 싶었다. 그러나 이게 꿈이 아닌 이상 그것은 불가능한 희망이었다.
"절대 그것들에게 당신들을 알게 해서는 안돼요. 당신들의 과거나 중요한 기억, 특징..특히 이름 같은 것들을 말이지요. 이 곳에서 이름은 당신들의 모든 것이예요. 당신들의 이름을 알게 되면 아귀들은 당신들을 지배할 권력을 얻어요. 아시겠어요?" 여인이 조심스레 당부했다.
"이 집은 어떤가요? 무슨 집이지요? 이 집에서 보호받을 순 없나요?" 쇼트웨이브가 두려움에 잠겨버린 목소리로 말했다.
"이 집이 어떤 집인지 말할 순 없어요. 얘기했잖아요. 이 곳에선 남에게 정체를 알려줄 수 없다구요. 물론 당신들이 아귀는 아니지만 그래도 매우 위험한 일이예요. 다만 이 집은 과거의 어떤 곳, 쇠락한 성이자 신화의 장소라는 것 정도는 가르쳐 줄 수 있어요. 당신들은 내가 당신들의 언어로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요? 그렇지 않아요. 내가 쓰는 언어는 신화의 언어예요. 여러 언어로 분화되기 전에 존재했었던 언어의 원형, 아키타입이죠. 내가 당신들의 말을 쓰는게 아니라 당신들이 내 말을 당신들에게 맞게끔 해석하고 있는 거예요."
과실수가 심어진 밭도 이제 거의 끝나고 저쪽 끝에서 대문이 보였다. 여인이 쇼트웨이브를 바라보았다.
"이 집에서 보호받을 수 있느냐고 물었죠? 대답은 아니오 예요. 당신들은 여기에 머물 수 없어요. 어머니가 당신들을 나가라고 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큰 이유는 당신들이 포도를 먹었기 때문이예요."
"포도요?" 디지털퍼머와 쇼트웨이브가 서로 마주보았다.
"포도가 왜요? 그게 어때서요?"
"그건 이 집의 어두운 과거와 연관이 있어요. 모든 상황을 고려해 봤을 때 분명 당신들은 부적의 명령에 따라 포도를 달라고 했겠지만 그래도 마찬가지예요. 여기엔 예외가 없어요."
"어두운 과거? 그게 뭐죠? 그게 왜 추방의 이유가 되나요?" 안타까운 마음으로 디지털퍼머가 물었다.
"그 일 역시 얘기할 수 없어요. 현명하다면 당신들이 알아내겠죠."
어느덧 여인은 그녀들이 들어왔던 솟을삼문 앞에 도달했다.
"다 왔군요." 여인이 몸을 돌렸다.
"이제 가셔야 할 시간이예요. 내가 주의를 줬던 것을 기억하세요. 행운을 빌어요."
디지털퍼머가 울상을 하고 여인을 쳐다보았으나 여인은 표정의 변화없이 몸을 비껴선 채 치마 위로 두 손을 맞잡고 있었다. 그녀들이 나가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쇼트웨이브가 현관문의 문고리를 잡았으나 문을 열지는 않고 잠시 멈췄다. 그녀가 디지털퍼머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문고리를 놓고 여인을 향해 몸을 돌렸다. 쇼트웨이브는 깊은 심호흡을 하고 여인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저희에게 호의를 보여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쇼트웨이브는 잠시 목을 가다듬었다.
"그래서 더욱 죄송해요. 이러고 싶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우리는 실질적인 도움이 필요해요.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도움을 주세요."
쇼트웨이브가 잠깐 망설였으나 이내 입을 열어 정확히 발음했다.
"소희씨."
순간 여인의 땋아올린 머리가 모조리 풀어지며 갈색의 거미줄처럼 방사형으로 곤두섰다. 타오를 듯한 분노와 배신감이 그 머리칼을 후광처럼 너울거리게 만들었다. 여인의 얼굴이 자외선에 노출된 형광물질처럼 푸르스름하게 빛나고 돌과 흙이 울어대는 귀곡성이 주위를 메웠다. 이내 강렬한 열풍이 그녀들을 휩쓸었다. 눈을 뜰 수 조차 없는 지독한 고통이 전신을 휘감으며 널름거렸다. 여인의 옷깃이 펄럭이며 장창처럼 그녀들을 겨눴다.
"그래, 내가 가르쳐 준 것을 곧바로 나에게 써 먹을건가?"
장중하면서도 표독스런 음성이 사자후처럼 튀어나와 그녀들을 진탕시켰다. 여인과 그녀들 사이에 있었던 공기가 날이 선 작은 칼들처럼 직진하며 쇼트웨이브를 할퀴고 지나갔다. 이내 그녀들이 딛고 선 땅에 하얀 서리가 쌓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쇼트웨이브는 온 몸에 힘을 주고 땅에 버티어 섰다. 폭포수같은 압력이 그녀를 짓눌렀지만 신음을 지르며 버텨냈다. 쇼트웨이브는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올려 여인을 마주보며 소리 질렀다.
"나가서 죽으나 당신 손에 죽으나 매한가지예요. 이대로 나가면 우리는 하루도 버티지 못할거예요. 당신도 잘 알잖아요. 어차피 호의를 가지고 있었다면 조금만 더 베풀어주세요. 여기 있겠다는 소린 하지 않겠어요. 도움을 달라구요."
그녀들을 누르던 압력이 조금만 더 계속되었다면 쇼트웨이브는 아마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한계점에서 무서운 힘들이 눈녹듯 사라졌다. 땅바닥에 쌓였던 서리가 얼어붙어 그녀들의 신발을 하얀 구두처럼 만들고 있었다. 여인은 어느새 차분한 처음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뻔뻔스럽군요."
여인이 잠시 그녀들을 쳐다보다가 품에서 골무 하나를 꺼냈다.
"뻔뻔스럽지만 아주 똑똑해요. 자, 이걸 받아요."
디지털퍼머가 골무를 받았다. 비단으로 만들어진 작은 골무에 여러가지 색실로 정교한 자수를 넣었는데 앞면엔 박쥐가 뒷면엔 국화가 수놓여 있었다.
"항상 그걸 끼고 다니세요. 당신들에게 위험이 닥치면 골무가 손가락을 물듯이 조일 거예요. 일종의 경보지요. 물론 그게 당신들의 적을 쉽게 알 수 있도록 해 주지만 그것만 믿고 마음을 놓고 있어서는 절대 안돼요. 그건 현존하는 위험에 대해서만 경고를 줄 뿐이예요."
여인은 이번엔 품 속에서 빨간색과 파란색 두 개의 비단 주머니를 꺼냈다.
"이건 사용법을 아시죠?"
디지털퍼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어떻게 쓰는 거지요?"
여인이 한숨을 쉬었다.
"커다란 위험이 닥치면 여는 거예요. 많이 들어봤을텐데요."
디지털퍼머는 쇼트웨이브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렇군요. 많이 들어봤어요. 할머니가 해주시던 옛날얘기 같은 데서. 직접 보는건 이번이 처음이지만요."
디지털퍼머는 주머니를 받았다. 활짝 핀 모란꽃과 아직 피지 않은 봉오리, 조그마한 녹색 잎들이 치밀하게 수놓아진 깨끗하고 귀여운 주머니였다.
"이걸 두 개 주시는 이유는 우리가 위험을 두번 겪는다는 뜻인가요?" 쇼트웨이브가 물었다.
"아니요. 주머니가 나한테 두 개 밖에 없다는 뜻이예요." 여인이 어깨를 으쓱했다.
"이것은 미래를 예상하고 만들어진 주머니예요. 골무와는 달리 현존하지 않는 위협을 알아내서 당신들을 도와주지요. 주머니 하나엔 해결방법이 하나씩 들어가 있어요. 가장 중요한 점은 당신들한테 위험이 닥쳤을 때 그 위험에 맞는 주머니를 정확히 찾아 열 수 있느냐 하는 점이지요."
"그 위험에 맞는 정확한 주머니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지요?"
"알 수 없죠. 그건 운에 맡겨요. 아무도 모르는 일이거든요."
디지털퍼머가 고개를 설래설래 저으며 주머니를 두 개 모두 가방 속에 넣었다.
"자, 이제 모든게 끝난거 같군요. 그렇죠? 내가 드릴 수 있는 도움은 이게 다예요."
여인이 이렇게 말하며 다시 손을 맞잡았다.
"굳이 행운을 빌진 않아도 되겠어요. 영리하니까. 생각보다 잘 해나갈거 같군요."
여인의 얼굴에 아주 희미한 미소가 어렸으나 이내 사라졌다.
"그럼 안녕히."
여인은 뒤돌아서 왔던 길을 되돌아 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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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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