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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5 00:02 528회 0건
대청 밖은 여전히 흐려있었고 가끔씩 부는 바람에 무성한 무화과 나무 잎들이 하늘거리는 것이 보였다.
소쩍새 소리가 또다시 깊은 골짜기 사이로 흩어졌다. 잠시 후 김이 무럭무럭 나는 쟁반을 들고 부인과 젊은 여성이 대청으로 나왔다. 향긋한 생강과 콩비지 냄새가 구수하게 풍겨왔다. 부인은 버섯찌게가 들어있는 큼지막한 뚝배기와 하얀 쌀밥이 고봉으로 담겨있는 사기그릇 2개를 상 위에 내려놓았다. 어슷하게 썰어넣은 대파와 버섯이, 푸짐하게 덜어넣은 콩비지 사이사이로 먹음직스럽게 보였다.
"특이하네요. 버섯찌게에 비지를 넣나요?" 디지털퍼머가 재미있다는 듯이 물었다.
"모든 음식에 다 넣어요. 쉴 새없이 들어가지요. 비지는 매우 바쁜 재료거든요."
부인의 대답에 디지털퍼머는 무슨 소리냐는 듯이 쇼트웨이브를 쳐다보았다. 쇼트웨이브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소희라고 불리는 젊은 여성이 연한 물빛이 도는 넓은 사기 접시를 내려놓았는데 반찬은 오직 그것 하나 뿐이었다. 접시에는 특이한 냄새를 내는 나물이 참기름, 통깨와 함께 버무려져 있었다.
"이건 무슨 반찬이지요?" 쇼트웨이브가 물었다.
"고수겉절이예요." 젊은 여성이 대답했다.
"꼭 미나리같네요. 근데 냄새가 굉장히 나요. 이름이 고수예요?"
"네. 나물이름이기도 하고, 또 그 나물을 대하는 두가지 자세 중 하나이기도 하지요."
"두가지 자세요?"
젊은 여성이 쟁반을 들고 몸을 일으켰다.
"하나는 고수의 자세. 매우 깔끔하다고 좋아하며 받아들이는 자세지요. 또하나는 하수의 자세. 빈대냄새가 난다고 펄쩍 뛰는 거랍니다."
젓가락을 쥐어든 디지털퍼머가 지뢰의 뇌관을 해체하듯이 젓가락 끝으로 조심스럽게 고수겉절이를 건드렸다.
부인이 마지막으로 찻주전자를 하나 올려놓고 일어섰다.
"그럼 천천히 드세요."
부인과 젊은 여성이 빈 쟁반을 들고 방으로 사라졌다.

"이게 다야? 무식하게 큰 그릇에 담긴 찌게, 더 무식하게 큰 그릇에 담긴 밥 한 공기, 이상한 냄새나는 반찬 하나." 디지털퍼머가 작은 소리로 툴툴댔다.
"하나 더 있지. 저 주전자."
"뭐니,저건. 컵도 없구. 입대고 마시라는 거야?"
쇼트웨이브가 숟가락으로 찌게를 한입 떠서 먹었다.
"맛있어?"
"보기보단 괜찮네." 쇼트웨이브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포도는 왜 안줘. 밥 다먹어야 주나."
"이 와중에 지금 그게 먹고 싶니?"
"그럼. 공짜라는데."
디지털퍼머는 나물을 조금 집어서 입에 넣었다. 그러더니 얼굴을 찌푸리며 전속력으로 밥을 떠서 입안에 우겨넣었다.
"뭐야? 왜그래?"
아무 말 없이 찌게 한 숟갈을 더 입안에 넣고 볼이 메어지도록 그것을 먹고나서야 디지털퍼머는 겨우 말을 했다.
"끝내줘."
"좋은 쪽으로,나쁜 쪽으로?"
"아무래도 난 하수인가봐."
"그래?"
"먹어봐. 상어이빨 사이에 낀 해초를 긁어 먹는거 같애."
"안 먹을래."
"안돼. 혼자 먹긴 너무 아까와." 디지털퍼머는 고수겉절이를 한 젓가락 집어 쇼트웨이브 밥 공기에 올려놓았다.
"나쁜 년." 쇼트웨이브가 노려보자 디지털퍼머는 한쪽 볼에 바람을 넣고 곁눈으로 천정을 올려보며 딴청을 피웠다.
쇼트웨이브가 반찬을 입에 넣고 씹었다.
"뭐 그렇게 나쁘진 않은데."
디지털퍼머가 코웃음을 쳤다.
"고수났네,고수났어." 디지털퍼머는 반찬접시를 쇼트웨이브 쪽으로 밀었다.
"너 다 드세요."
"고맙지만 그렇게 땡기지는 않네요." 쇼트웨이브는 다시 접시를 제자리로 밀었다. 디지털퍼머가 다시 찌게를 한 입 먹었다.
"찌게는 맛있네."
그녀들은 천천히 식사를 시작했다.

"이 집에 사는 사람들은 스케일에 대한 감각이 없는거 같애." 디지털퍼머가 음식을 씹으며 주위를 둘러 보았다.
"왜?"
"이 집도 그렇고. 밥이랑 찌게 주는 양도 그렇고. 인심이 후해서 좋긴 하지만 말야. 그리고 이 상 좀 봐. 찌게랑 밥공기 두 개랑 반찬 한 접시 올리는데 뭐 이렇게 큰 상을 가져오냐구."
"주전자 하나도 있어."
"그래,이 년아. 주전자 한번 되게 크다."
쇼트웨이브가 버섯을 떠 먹으며 곰곰히 생각하다가 말했다.
"이런 것도 공간지각력에 속하는 걸까."
"무슨 소리야?"
"네가 말한대로 이 집 사람들이 스케일에 대한 감각이 없다고 친다면 그게 공간지각력이 부족해서 그러는게 아닐까하고."
"그건 머리가 나쁘다는 소리야?"
"그렇다고 볼 수 있지. 아이큐가 낮다는 소리가 되니까. 아이큐 측정에는 공간지각력 측정이 포함되거든."
"글쎄, 아까 보니 그렇게 아이큐 모자라는 사람들 같진 않던데."
쇼트웨이브는 비지를 덜어서 밥에 올렸다.
"남성 호르몬이 공간지각력 향상에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가 있었어."
"헛소리 하지 말라고 그래. 우리 아버진 교통사고만 잘 내더라."
"물론 나도 그런 식의 연구는 별로 믿진 않아. 그리고 그 연구가 맞다고 하더라도 지금 우리한테 의미있는 결론은 한가지 밖엔 없어."
"뭔데?"
"이 집에 남자가 없다는 거지."
디지털퍼머가 멀뚱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우리한테 무슨 의미가 있어."
"모르겠어? 너 이 집 며느리 되는건 물 건너 간거야. 아들이 없으니까."
디지털퍼머가 숟가락을 입에 문채 킥킥거리다가 쇼트웨이브를 노려봤다.
"똑똑한 년. 좋은 머리를 꼭 나쁜 쪽으로 쓰지. 응?"

많아 보이던 밥이 금새 사라졌다.
버섯찌게도 거의 바닥을 드러냈고 고수겉절이만 아직도 접시에 듬뿍 담겨 있었다. 그녀들은 밥공기에 차를 따라 한모금씩 마셨다. 밋밋하고 담담한 맛이 나는 차였다.
"이게 무슨 차야?"
"비파꽃잎을 달인 차라오."
또다시 귓가에 대고 얘기하는 듯한 할머니의 목소리에 그녀들은 화들짝 놀랐다. 어느새 와 있었는지 그늘 쪽에 세 명의 여성이 나란히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정말 왜 이러세요. 적응 안되게."
디지털퍼머는 밥 공기를 놓치는 바람에 약간 쏟은 찻물을 손으로 닦으며 말했다.
"폐를 맑게 하고 위를 조화롭게 만들지. 비파꽃잎은 감기치료에 좋다우. 우리가 이런 말을 한다는게 좀 이상하긴 하지만 비파꽃잎으로 만든 차는 객담해소에 탁월하지요."
"이렇게 좋은 차를 드셔서 할머니께서 정정하신가봐요." 디지털퍼머가 밥공기를 감싸잡으며 말했다.
"오, 아니야. 우리가 비파차를 좋아하는 이유는 효능 때문이 아니라 비파 열매 때문이라우. 우리는 비파 연주를 좋아하는데 그 열매가 꼭 비파처럼 생겼지요."
세 여성은 똑같은 동작으로 몇걸음 앞으로 걸어나왔다. 그 알 수 없는 일체성은 그녀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괴괴한 대청 안에는 미세한 용담향의 향기가 얼어붙은 듯 떠돌았다.

"식사를 다 마치신거 같은데 더 원하는 거라도 있나요?"
이번엔 부인이 말을 했다. 그녀들은 얼굴을 마주보다가 말을 꺼냈다.
"후식도 주시나요?"
"필요하시다면요."
"귀한 포도가 있다고 들었는데 맛 좀 봐도 될까요?"
할머니를 비롯한 세 명의 여성이 또다시 흠칫 놀라는게 보였는데 놀란 정도를 말하자면 이번엔 코끼리에게 밟힌 정도가 아니라, 늦은 오후에 수다나 떨기 위해서 옆집 아줌마 집으로 마실 나갔다가 난데없이 떨어진 박격포탄에 맞은 것 같았다.
"음.." 할머니가 약한 신음을 흘렸다. 중년 부인이 할머니의 귀에 대고 또 무언가를 속삭였다.
"그렇다고는 해도 포도라니. 포도우럭 매운탕도 아니고, 포도달걀말이도 아니고, 순두부 포도찌게도 아니고 포도샤브샤브도 아니야. 포도라구. 이 아가씨들은 날포도를 먹겠다는 얘기야, 지금."
그녀들은 자신들이 무슨 잘못을 했나싶어 약간 겁을 집어 먹은채 눈치를 보고 있었다.
"문제가 있다면 저희 포도 안 먹어도 돼요."
세 여성이 동시에 그녀들을 쳐다보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아니예요. 아무런 문제 없어요. 문제가 없어서 문제지요. 아귀가 너무 잘 맞거든요."
곧 부인이 침묵을 깨뜨리며 소희라고 불리는 여성한테 살짝 눈짓을 했다. 그 여성이 방으로 사라졌다가 방금 씻은 듯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연한 자줏빛 포도 송이를 접시 한가득 들고 돌아왔다.
"한번 맛 좀 보세요."
그녀들 앞에 포도송이가 놓여졌다.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 굉장히 먹음직스런 포도였다. 포도 알맹이 하나하나에 햇빛을 받은 스테인드글라스같은 투명한 광채가 일렁였다.
"이게 그라비뇽 누아라는 품종인가요?" 쇼트웨이브가 부인에게 물었다.
"이것에 이름은 없어요." 부인이 고개를 흔들며 말을 이었다.
"이것은 포도 중의 포도, 그 기원에 존재하는 단 하나의 포도, 역사를 구동시킨 욕망의 포도예요. 그건 부를 수 조차 없지만 또한 아무렇게나 불러도 되죠." 부인이 쇼트웨이브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라비뇽 누아라면 검은 무덤이라는 뜻인가요? 뭐, 성의는 없어보이지만 적절한 이름인거 같네요."
그녀들이 설명을 들으며 입을 벌렸다.
"우린 프랑스어를 몰라요. 무덤. 그게 그런 뜻이었나요?" 디지털퍼머가 약간 당황하며 말했다.
"정확히는 아니예요. 그라비뇽이라면 무덤이라는 뜻을 어떤 마을 이름으로 변형시킨거 같은데, 무덤으로 덮인 마을이 연상되는군요. 무덤으로 뒤덮여 검게 변한 어떤 마을."
"더 끔찍하네요." 디지털퍼머가 가만히 포도를 응시했다.
알 수 없는 유혹이 포도에 존재했다. 그것은 예감되는 맛과, 시각이 불러일으키는 아름다움이 일치하는 지점에 위치했다. 이 포도는 향마저도 강렬했다. 마치 열매가 아니라 꽃인 듯 포도에서는 달디 단 향내가 소용돌이쳐 나오고 있었다.
그녀들은 포도를 한 알씩 따서 입에 넣었다. 싱그럽고 달콤한 즙이 입 안에 가득 퍼졌다. 난초가 가득 핀 들판 한 가운데서 온 몸에 달빛을 받으며 서 있는것 같았다. 아지랑이같은 어린 시절, 아득히 잊혀졌던 먼 옛날의 기억이 향수처럼 되살아났다. 만화주인공이 그려져 있는 빨간 책가방, 장난처럼 뜯어먹던 아카시아 꽃잎. 무심코 포도를 씹었는데 씨가 씹히지 않았다.
마치 의문에 답이라도 해주는 듯 부인이 말했다.
"그 포도엔 씨가 없어요. 대를 잇지 못하죠. 그게 그 포도가 희귀한 이유예요."
할머니가 말했다.
"자, 이제 말을 해봐요. 아가씨들은 어떻게 여길 왔지."
쇼트웨이브가 얼른 껍질을 뱉어냈다.
"저흰 제천을 지나다가 식사를 하려고 들른 거예요. 우연히 여기가 맛있다는 소릴 듣고.."
"누구한테 들었지요?"
"책에서 봤어요. 안내책자."
"책을 가지고 있나요?"
디지털퍼머가 가방을 뒤져 안내책자를 꺼냈다. 버섯찌게 집을 소개한 면을 펴서 내밀자 할머니가 받아들었다.
"맞나요?"
부인이 묻자 할머니가 잠시 사이를 두고 신중히 대답했다.
"맞아. 정교하군."
할머니는 책을 덮어 다시 디지털퍼머에게 돌려줬다.
"뭐죠? 무슨 일인가요?"
"그건 부적이라오."
"부적이요?" 쇼트웨이브가 놀라서 되물었다.
"부적이라면 노란 종이에 빨간 글씨로 뭔가 써있는거 아녜요?" 마찬가지로 놀란 디지털퍼머가 말했다.
부인이 할머니를 한번 쳐다보더니 대답했다.
"그렇지 않아요.부적엔 여러가지 형태가 있지요. 실물이 될 수도 있고 글씨가 될 수도 있지. 보석이나 장신구가 될 수도 있고. 머리카락이나 손톱, 터럭, 뼈처럼 사람 신체의 일부가 될 수도 있어요. 어떤 소원이나 원한이 담기느냐에 따라서 다르지요. 크게 말해서 의지를 담아둘 수 있다면 세상 모든 것이 부적이 되는거예요."
그녀들은 잠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겨우 목청을 가다듬고 디지털퍼머가 물었다.
"이건 어떤 부적인가요?"
"글쎄, 뭐랄까.. 한마디로 아주 지독한 것."
"지독해요?"
그때 할머니가 엄격한 어조로 말했다.
"그만. 이제 그만 하지."
할머니는 그녀들을 쳐다보았다.
"이제 아가씨들이 어떻게 여기에 왔는지 알았어. 사특하고 요사스런 일이야."
할머니가 혀를 쯧쯧 찼다.
"아가씨들이 벌인 일이 아니라도 마찬가지야. 이제 식사를 다 했으니 아가씨들은 갈 길을 가요. 소희야."
할머니가 젊은 여성을 돌아보았다.
"너는 아가씨들을 바래다 드려라." 말을 마친 할머니가 돌아서서 방으로 들어갔다. 부인은 아무 말없이 쟁반에 그녀들이 다 먹은 식기를 담아서 건너편 방으로 사라졌다. 대청 밖에서는 젊은 여성이 가만히 서서 그녀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들은 돌연한 집주인들의 태도변화에 어안이 벙벙했지만 어쩔 수 없이 젊은 여성을 따라 대청을 나설 수 밖에 없었다.
밖은 아까보다 좀 더 흐려진거 같았다. 산들바람은 여전히 사과나무 끝에서 배나무 가지 끝까지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저.." 젊은 여성이 걷기 시작하자 쇼트웨이브가 말을 걸었다.
"우린 아직 돈도 안 냈는데요."
"아뇨. 이미 충분한 값을 치루셨어요."
"우리가요? 언제요?"
젊은 여성이 한숨을 쉬며 그녀들을 바라보았다.
"여기가 어딘지 모르세요? 하나도?"
"식당인줄 알았어요. 정말이예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당신들은 부적에 이끌려서 어떤 경계를 넘어왔어요. 말하자면 여긴 당신들이 살던 곳이 아니예요."
"말도 안돼." 디지털퍼머가 자신도 모르게 말했다.
"믿던 안 믿던 그건 당신들 마음이예요." 그녀를 지긋이 응시하며 젊은 여성이 얘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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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2016-08-11
접속일 2024-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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