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뒤로 길게 이어진 구름같은 먼지들만이 질주하는 차가 지나온 궤적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것은 벌판에 널려있는 바위들과 곳곳에 솟아오른 낮은 구릉들을 피해 달리는 바람에 완만히 휘어진 곡선을 만들고 있었다.
그녀들의 앞쪽엔 마치 지진이라도 겪었던 것처럼 황폐한 바닥을 가르며 커다란 크레버스가 세로로 길게 시작되고 있었다. 가고자 하는 곳이 없었으므로 일단 쇼트웨이브는 용암의 강에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목표를 잡았다.
"손가락은 어때?" 사이드미러를 통해 뒤를 살피면서 쇼트웨이브가 물었다.
디지털퍼머는 손가락에서 골무를 빼 눈 옆에 들고 살짝 흔들어 보였다.
"좀 전에 물던 걸 놓았어."
"아프디?"
"아니, 아프기보단..굳이 표현하자면 반창고로 단단히 싸맨 느낌 정도."
"그래?" 쇼트웨이브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피식 웃었다.
"왜 웃어?"
"편리하겠다싶어서. 손가락 베었을 때 반창고 없으면 그거 아주 유용하겠다. 그치?"
"이 년아. 이걸 어떻게 반창고 대용으로 쓰니."
쇼트웨이브가 어깨를 으쓱했다.
"뭐..골무잖아."
무슨 소리냐는 듯이 인상을 긋고는 디지털퍼머가 골무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신기하네. 그냥 평범해 보이는데 말야. 박쥐무늬가 정교한거 빼놓으면."
골무를 관찰하는 그녀를 쇼트웨이브가 잠깐 보고는 이내 고개를 돌렸다. 하늘은 여전히 회색빛 장막을 드리운 커튼처럼 컴컴했다. 차 안에 설치된 조그만 전자시계는 3시 23분에서 24분으로 숫자를 하나 더 올렸지만 이젠 이 시간이 맞는지 틀리는지 알 길이 없었다. 아니, 모든 것이 바뀐 지금, 이 시각이 아침인지 저녁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럼 이젠 안 쫓아온다는 소린가."
쇼트웨이브는 차의 속도를 떨어뜨리고, 크레버스가 차의 왼쪽으로 가게끔 크게 우회한 다음 균열을 따라 차를 몰기 시작했다. 크레버스의 건너편 쪽으로는 지층이 융기해 만들어진 것이 분명해 보이는 고원이 병풍처럼 이어졌는데, 갈수록 깊어지는 크레버스와 더불어 커다란 협곡을 이루고 있었다. 고원으로 이루어진 절벽은 시루떡을 쌓아놓은 듯 다른 색깔의 퇴적암들이 층층이 쌓여있었다. 그것은 매우 낯설고 거친 느낌을 주는 풍경이었다.
"아까 그거 저승사자라고 했어?" 디지털퍼머가 물었다.
"그래. 우리 말로는. 서양에서는 천사라고 그래, 죽음의 천사." 모루처럼 생긴 커다란 바위를 비켜가며 쇼트웨이브가 말했다.
"별로 천사처럼 생기지는 않았던데." 그자의 얼굴을 직접 본 디지털퍼머가 다시 기억을 떠올리며 진저리를 쳤다.
"유대인들의 전설에 의하면 말야, 죽음의 천사는 신이 세상을 만든 첫날 만들어진 천사래. 창조주가 그를 만들고 나서 직접 그에게 이런 말을 했대. 모든 인간에 대해 전능한 권능을 너에게 주겠다, 단 한가지 경우만 제외한다면.이라고 말야."
"그게 뭔데? 한가지 예외라니? 안 죽는 법도 있다는 소리야?"
"글쎄, 그게 안 죽는 법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죽음의 천사가 힘을 행사하지 못하는 단 하나의 예외는, 토라를 통해서 죽음으로부터 자유를 얻은 인간이래."
"토라라면 유대교 경전?"
"응."
디지털퍼머가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난 그 말을 모든 사람이 죽음 앞에서 평등하다는 뜻으로 말한거라고 받아들였는데, 이제 그림 리퍼를 직접 보니까 좀 다르게 생각돼."
"어떤 식으로?"
"말그대로 인간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능을 받은 것으로. 그는 직접 우리에게 어떤 물리적인 힘을 행사할 수 있다고 여겨져."
땅이 갈라진 균열은 점점 넓어지고 점점 깊어졌다. 그것은 마치 땅 속 저 깊은 중심까지 이어진 듯 이젠 끝이 안 보일만큼 어두운 곳을 향해 파들어가고 있었다. 강물처럼 넓어지는 낭떠러지를 피하기 위해 쇼트웨이브는 사선으로 벌판을 가로질렀다.
"그 녀석은 왜 낫을 들고 있는거야?" 마치 성격 이상한 학교 친구에 대해서 묻듯이 디지털퍼머가 그자에 대해 물었다.
"그건 약간 전문적으로 말하자면 에티몰로지컬 미스컨셉션이라고 부르는 현상이야. 그러니까 어원학적인 착각에서 비롯된 일인거지. 말 실수가 발단이야." 물만난 고기처럼 쇼트웨이브가 전문용어를 주워담기 시작했다.
"말 실수로 인해서 낫을 들게 되었다구?"
디지털퍼머가 웃음을 터뜨렸다. 쇼트웨이브가 그녀를 힐끗 보았다.
"말하자면 그런 셈이지. 말 실수는 크로노스에서부터 시작해." 쇼트웨이브가 헛기침을 했다.
"크로노스는 수확의 신이었어. 그는 곡식을 벨 수 있는 작은 낫으로 표현되기도 했지. 시클이라고 부르는 낫이야."
쇼트웨이브는 잠깐 디지털퍼머의 눈치를 봤다. 좀 유화시켜서 표현할 말을 생각하는 중이었다.
"어..게다가 이 낫은 말야, 크로노스가 자신의 아버지인 우라노스의 성기를 거세하는 무기이기도 했어."
"성기? 남자 거기?" 디지털퍼머가 쇼트웨이브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 남자 거기."
"이런. 자기 아버지의 자지를 잘랐단 말야? 아들이?"
재미있어하며 디지털퍼머가 물었다.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쇼트웨이브가 디지털퍼머를 노려봤다.
"그런 말만 나오면 좋아죽지,응? 꼭 대놓고 말해야 돼?"
"뭐, 어때. 자지를 자지라 하고 보지를 보지라 하는건데. 원래 이름이 그런거잖아."
"아우, 됐어. 이 년아. 말을 말자."
디지털퍼머가 웃음을 지었다. 이런 상황이 되어서도 체면을 차리고 예절을 지키는 쇼트웨이브가 순진해 보였다. 하지만 상황이 나쁠 수록 그런 자기절제와 예의가 더욱 필요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제 믿을 것은 자기자신 밖엔 없는것 아니겠는가.
"왜들 그랬대? 부자지간이."
"그쪽 지방 신화가 대체로 그런 식이야. 아버지가 아들을 잡아먹고 아들은 커서 아버지한테 복수하고."
갈라진 균열은 이제 너무나 넓어져서 아주 커다란 계곡으로 변해 있었다. 마치 하늘로부터 날선 검이 내리쳐져 아물지 않고 벌어진 깊은 상처를 낸 것처럼 보였다. 균열 가까이 달리는 것은 매우 위험해 보였기 때문에 그녀들은 그곳에서 멀찍이 떨어졌다.
"좀더 은유적으로 생각해보면 말야. 곡식이라는 것들, 땅으로부터 돋아난 성기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아?" 조심스럽게 쇼트웨이브가 말했다.
"응?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봐, 처음엔 조그맣게 싹이 텄다가 점점 커지고 길어지잖아. 발기하는 거야. 그리고 열매가 달리고. 그건 사정하는 거지. 그 다음엔 그 무게 때문에 휘어지고."
풉,하는 소리를 내며 디지털퍼머가 웃었다.
"그건 알겠다. 사정한 다음에 쪼그라 드는 거구나."
"그래. 근데 그 곡물들을 말야. 열매가 달리는 순간, 그러니까 사정하는 순간에 낫으로 베어버리는게, 말하자면 수확이잖아. 그치?"
"오호. 그거 매우 잔인한 거네, 생각해 보니까. 절정의 순간 싹둑 자르는 거잖아."
쇼트웨이브가 잠시 웃었다.
"그래, 그게 크로노스였단 말야. 수확하는 자. 크로노스의 의미이자 과거였지. 그런데 원래의 크로노스가 점차로 왜곡되기 시작한거야. 그것은 이름에서 비롯되는데.."
여기서 쇼트웨이브가 잠깐 말을 멈췄다.
"어쩜 이리도 공교로울 수가."
"왜?"
"아까 그 여자가 그랬잖아. 여기선 이름이 모든 것이라고."
"응. 근데?"
"크로노스가 저승사자로서 그림 리퍼가 되는 중요한 계기가 이름의 혼동때문이야. 처음에 얘기했던 말 실수 말야. 고대 그리이스에는 시간이라는 뜻의 크로노라는 접두어가 있었어. 그런데 이 크로노가 시클로 표시되는 크로노스에 덧씌워져 버린거야."
"크로노와 크로노스라.." 디지털퍼머가 콧날을 천천히 두드리며 되뇌었다. 쇼트웨이브가 말을 이었다.
"그 여자 말을 빌자면 크로노가 크로노스의 모든 능력을 가져간 셈이 된거잖아. 크로노스의 이름에다가 자기 것을 덧씌웠으니까 말야."
디지털퍼머가 입술 사이로 김빠지는 소리를 냈다.
"이해는 가지만 좀 억지같애. 우리 쪽에서는 그저 어원적인 착각에 불과한 것이 여기서는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라니 말야."
"아니, 내 생각엔 거꾸로야."
"거꾸로라니?"
"이쪽 세상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 우리쪽 세상에 어떤 형태로든 반영이 되는데, 그게 주로 언어나 신화의 영역에서 의미의 변화로 반영이 되는게 아닐까."
"그러니까 이쪽 세상에서 먼저 일어나고 그게 우리쪽 세상에서 뭔가 변화되는 방향으로 반영된다 이거야?"
"그렇지. 실제 두 세상은 완전히 격리되어 있으니까 커다란 변화가 반영된다기 보다는 이렇게 언어의 측면에서 은밀하게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는게 아닐까 싶어."
"흠.."
디지털퍼머가 팔짱을 끼었다.
"그래서 크로노스는 어떻게 됐어?"
"그 두가지 말이 착각으로 인해 합쳐지는 바람에 시간과 운명을 지배하는 크로노스가 생기는거야. 새로운 크로노스지. 이 크로노스를 가리켜서 파더타임이라고 해. 시간을 의인화한거야. 이 의인화된 시간으로 죽음의 천사가 구체적인 모습을 갖게 되는거지. 이때 그가 들고 있는 낫도, 시클에서 사이드로 발전하는데 이게 그림 리퍼의 원형이야."
"더럽게 복잡하네." 디지털퍼머가 고개를 흔들었다.
"근데 네 말은 이런 어원적인 혼동이 실제로 일어난 일을 암시하는거다 이거지?"
쇼트웨이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크로노스가 있었겠고 그의 능력을 흡수하려는 여러 투쟁이 있었을거야. 그 중에서 보다 교묘한 몇몇이 차례로 성공을 해서 크로노스가 그림 리퍼로 진화해간거라고 생각해."
균열은 이제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넓어져 크레버스라기보다는 커다란 계곡을 만들었다. 계곡의 틈새 사이로 짙푸른 이끼들이 무성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그것은 마치 그 이끼들이, 어두운 계곡 속에서부터 거품이 넘쳐나듯 끓어올라 지표까지 튀어올라온 듯한 느낌을 주었다.
"이런 것이 사실이라면 다음에 그림 리퍼를 만났을 때 이용할 수도 있지 않을까." 쇼트웨이브가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어떻게?"
"우린 그의 과거와 이름을 안 셈이잖아. 우리도 그를 공격할 수 있는 무기가 있는거지."
디지털퍼머가 곰곰히 생각해보다가 말했다.
"싫어. 난 도망갈거야. 절대로 걔한테 한마디도 안할거야."
그녀가 고개를 절래절래 저으면서 말을 이었다.
"솔직히 넌 뭘 어떻게 할건데. 그 녀석이 나타나면 이름이라도 부를거야. 아까 그 여자 때처럼?"
쇼트웨이브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림 리퍼. 우린 너의 이름, 너의 과거, 그리고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 가서 발 닦고 주무시지. 이럴려구?"
쇼트웨이브가 웃음을 터뜨렸다.
"알았어. 이 년아. 같이 도망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그녀가 말했다.
그녀들이 황무지 한 가운데에서 번쩍이는 하얀 빛을 발견한건 차의 시계가 3시 38분으로 바뀌었을 시점에서였다. 그것은 음울하게 가라앉은 무채색의 음영 속에서 터진 작은 플래쉬 같았다.
"저게 뭐지? 저거 봤어?" 쇼트웨이브가 디지털퍼머에게 물었다.
"응, 나도 봤어." 디지털퍼머가 딱딱하게 굳었다.
"또 이상한 귀신 아냐? 응? 딴 쪽으로 도망가."
"골무는 어때?" 쇼트웨이브가 물었다.
"어..괜찮아. 물지 않는데."
잠시 망설이다가 쇼트웨이브가 말했다.
"그럼 위험한건 아닌가 본데. 한번 가까이 가볼까."
쇼트웨이브가 친구의 의견을 물었다. 아무래도 디지털퍼머는 불안했지만 그렇다고 계속 황무지를 헤매고 다닐 수 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 천천히 가다가 낌새가 이상하면 후딱 도망쳐."
"알았어."
쇼트웨이브가 하얀 빛쪽으로 차의 방향을 틀었다. 그곳까지는 그리 거리가 멀지 않았다. 장애물처럼 놓여있는 몇 개의 바위를 피해 천천히 차를 달리자, 잔잔한 파도처럼 물결치는 낮은 언덕들이 나타났다. 그녀들이 둔덕을 하나씩 건널 때마다 그 빛은 언덕 밑으로 사라졌다가 좀 더 가까와지고 커진 형태로 다시 나타나곤 했는데, 형체를 알아 볼 수 있을 만큼 커졌을때 그녀들은 빛의 정체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백금으로 만들어진 커다란 조상이었다.
벌거벗은 한 남자와 여자가 반쯤 누워 윗몸만 일으킨 채 서로 바라보고 있는 조상. 그것은 어두운 하늘 밑에서도 흰 빛을 퍼뜨릴만큼 순결한 백색을 띤 강렬한 플래티넘 덩어리였다.
아직 가까이 다가가지는 못했지만 그녀들이 있는 곳에서도 대충의 모습을 알 수 있을 만큼 어마어마한 크기였다.
"살리에라야." 그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디지털퍼머가 탄성처럼 내뱉았다.
"맞아. 그것도 엄청나게 큰 규모의 살리에라야." 쇼트웨이브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말하고는 차의 속력을 올렸다.
그녀들의 앞쪽엔 마치 지진이라도 겪었던 것처럼 황폐한 바닥을 가르며 커다란 크레버스가 세로로 길게 시작되고 있었다. 가고자 하는 곳이 없었으므로 일단 쇼트웨이브는 용암의 강에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목표를 잡았다.
"손가락은 어때?" 사이드미러를 통해 뒤를 살피면서 쇼트웨이브가 물었다.
디지털퍼머는 손가락에서 골무를 빼 눈 옆에 들고 살짝 흔들어 보였다.
"좀 전에 물던 걸 놓았어."
"아프디?"
"아니, 아프기보단..굳이 표현하자면 반창고로 단단히 싸맨 느낌 정도."
"그래?" 쇼트웨이브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피식 웃었다.
"왜 웃어?"
"편리하겠다싶어서. 손가락 베었을 때 반창고 없으면 그거 아주 유용하겠다. 그치?"
"이 년아. 이걸 어떻게 반창고 대용으로 쓰니."
쇼트웨이브가 어깨를 으쓱했다.
"뭐..골무잖아."
무슨 소리냐는 듯이 인상을 긋고는 디지털퍼머가 골무를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신기하네. 그냥 평범해 보이는데 말야. 박쥐무늬가 정교한거 빼놓으면."
골무를 관찰하는 그녀를 쇼트웨이브가 잠깐 보고는 이내 고개를 돌렸다. 하늘은 여전히 회색빛 장막을 드리운 커튼처럼 컴컴했다. 차 안에 설치된 조그만 전자시계는 3시 23분에서 24분으로 숫자를 하나 더 올렸지만 이젠 이 시간이 맞는지 틀리는지 알 길이 없었다. 아니, 모든 것이 바뀐 지금, 이 시각이 아침인지 저녁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럼 이젠 안 쫓아온다는 소린가."
쇼트웨이브는 차의 속도를 떨어뜨리고, 크레버스가 차의 왼쪽으로 가게끔 크게 우회한 다음 균열을 따라 차를 몰기 시작했다. 크레버스의 건너편 쪽으로는 지층이 융기해 만들어진 것이 분명해 보이는 고원이 병풍처럼 이어졌는데, 갈수록 깊어지는 크레버스와 더불어 커다란 협곡을 이루고 있었다. 고원으로 이루어진 절벽은 시루떡을 쌓아놓은 듯 다른 색깔의 퇴적암들이 층층이 쌓여있었다. 그것은 매우 낯설고 거친 느낌을 주는 풍경이었다.
"아까 그거 저승사자라고 했어?" 디지털퍼머가 물었다.
"그래. 우리 말로는. 서양에서는 천사라고 그래, 죽음의 천사." 모루처럼 생긴 커다란 바위를 비켜가며 쇼트웨이브가 말했다.
"별로 천사처럼 생기지는 않았던데." 그자의 얼굴을 직접 본 디지털퍼머가 다시 기억을 떠올리며 진저리를 쳤다.
"유대인들의 전설에 의하면 말야, 죽음의 천사는 신이 세상을 만든 첫날 만들어진 천사래. 창조주가 그를 만들고 나서 직접 그에게 이런 말을 했대. 모든 인간에 대해 전능한 권능을 너에게 주겠다, 단 한가지 경우만 제외한다면.이라고 말야."
"그게 뭔데? 한가지 예외라니? 안 죽는 법도 있다는 소리야?"
"글쎄, 그게 안 죽는 법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죽음의 천사가 힘을 행사하지 못하는 단 하나의 예외는, 토라를 통해서 죽음으로부터 자유를 얻은 인간이래."
"토라라면 유대교 경전?"
"응."
디지털퍼머가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난 그 말을 모든 사람이 죽음 앞에서 평등하다는 뜻으로 말한거라고 받아들였는데, 이제 그림 리퍼를 직접 보니까 좀 다르게 생각돼."
"어떤 식으로?"
"말그대로 인간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능을 받은 것으로. 그는 직접 우리에게 어떤 물리적인 힘을 행사할 수 있다고 여겨져."
땅이 갈라진 균열은 점점 넓어지고 점점 깊어졌다. 그것은 마치 땅 속 저 깊은 중심까지 이어진 듯 이젠 끝이 안 보일만큼 어두운 곳을 향해 파들어가고 있었다. 강물처럼 넓어지는 낭떠러지를 피하기 위해 쇼트웨이브는 사선으로 벌판을 가로질렀다.
"그 녀석은 왜 낫을 들고 있는거야?" 마치 성격 이상한 학교 친구에 대해서 묻듯이 디지털퍼머가 그자에 대해 물었다.
"그건 약간 전문적으로 말하자면 에티몰로지컬 미스컨셉션이라고 부르는 현상이야. 그러니까 어원학적인 착각에서 비롯된 일인거지. 말 실수가 발단이야." 물만난 고기처럼 쇼트웨이브가 전문용어를 주워담기 시작했다.
"말 실수로 인해서 낫을 들게 되었다구?"
디지털퍼머가 웃음을 터뜨렸다. 쇼트웨이브가 그녀를 힐끗 보았다.
"말하자면 그런 셈이지. 말 실수는 크로노스에서부터 시작해." 쇼트웨이브가 헛기침을 했다.
"크로노스는 수확의 신이었어. 그는 곡식을 벨 수 있는 작은 낫으로 표현되기도 했지. 시클이라고 부르는 낫이야."
쇼트웨이브는 잠깐 디지털퍼머의 눈치를 봤다. 좀 유화시켜서 표현할 말을 생각하는 중이었다.
"어..게다가 이 낫은 말야, 크로노스가 자신의 아버지인 우라노스의 성기를 거세하는 무기이기도 했어."
"성기? 남자 거기?" 디지털퍼머가 쇼트웨이브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래. 남자 거기."
"이런. 자기 아버지의 자지를 잘랐단 말야? 아들이?"
재미있어하며 디지털퍼머가 물었다.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쇼트웨이브가 디지털퍼머를 노려봤다.
"그런 말만 나오면 좋아죽지,응? 꼭 대놓고 말해야 돼?"
"뭐, 어때. 자지를 자지라 하고 보지를 보지라 하는건데. 원래 이름이 그런거잖아."
"아우, 됐어. 이 년아. 말을 말자."
디지털퍼머가 웃음을 지었다. 이런 상황이 되어서도 체면을 차리고 예절을 지키는 쇼트웨이브가 순진해 보였다. 하지만 상황이 나쁠 수록 그런 자기절제와 예의가 더욱 필요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제 믿을 것은 자기자신 밖엔 없는것 아니겠는가.
"왜들 그랬대? 부자지간이."
"그쪽 지방 신화가 대체로 그런 식이야. 아버지가 아들을 잡아먹고 아들은 커서 아버지한테 복수하고."
갈라진 균열은 이제 너무나 넓어져서 아주 커다란 계곡으로 변해 있었다. 마치 하늘로부터 날선 검이 내리쳐져 아물지 않고 벌어진 깊은 상처를 낸 것처럼 보였다. 균열 가까이 달리는 것은 매우 위험해 보였기 때문에 그녀들은 그곳에서 멀찍이 떨어졌다.
"좀더 은유적으로 생각해보면 말야. 곡식이라는 것들, 땅으로부터 돋아난 성기라고 생각할 수 있지 않아?" 조심스럽게 쇼트웨이브가 말했다.
"응?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은 없는데."
"봐, 처음엔 조그맣게 싹이 텄다가 점점 커지고 길어지잖아. 발기하는 거야. 그리고 열매가 달리고. 그건 사정하는 거지. 그 다음엔 그 무게 때문에 휘어지고."
풉,하는 소리를 내며 디지털퍼머가 웃었다.
"그건 알겠다. 사정한 다음에 쪼그라 드는 거구나."
"그래. 근데 그 곡물들을 말야. 열매가 달리는 순간, 그러니까 사정하는 순간에 낫으로 베어버리는게, 말하자면 수확이잖아. 그치?"
"오호. 그거 매우 잔인한 거네, 생각해 보니까. 절정의 순간 싹둑 자르는 거잖아."
쇼트웨이브가 잠시 웃었다.
"그래, 그게 크로노스였단 말야. 수확하는 자. 크로노스의 의미이자 과거였지. 그런데 원래의 크로노스가 점차로 왜곡되기 시작한거야. 그것은 이름에서 비롯되는데.."
여기서 쇼트웨이브가 잠깐 말을 멈췄다.
"어쩜 이리도 공교로울 수가."
"왜?"
"아까 그 여자가 그랬잖아. 여기선 이름이 모든 것이라고."
"응. 근데?"
"크로노스가 저승사자로서 그림 리퍼가 되는 중요한 계기가 이름의 혼동때문이야. 처음에 얘기했던 말 실수 말야. 고대 그리이스에는 시간이라는 뜻의 크로노라는 접두어가 있었어. 그런데 이 크로노가 시클로 표시되는 크로노스에 덧씌워져 버린거야."
"크로노와 크로노스라.." 디지털퍼머가 콧날을 천천히 두드리며 되뇌었다. 쇼트웨이브가 말을 이었다.
"그 여자 말을 빌자면 크로노가 크로노스의 모든 능력을 가져간 셈이 된거잖아. 크로노스의 이름에다가 자기 것을 덧씌웠으니까 말야."
디지털퍼머가 입술 사이로 김빠지는 소리를 냈다.
"이해는 가지만 좀 억지같애. 우리 쪽에서는 그저 어원적인 착각에 불과한 것이 여기서는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라니 말야."
"아니, 내 생각엔 거꾸로야."
"거꾸로라니?"
"이쪽 세상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 우리쪽 세상에 어떤 형태로든 반영이 되는데, 그게 주로 언어나 신화의 영역에서 의미의 변화로 반영이 되는게 아닐까."
"그러니까 이쪽 세상에서 먼저 일어나고 그게 우리쪽 세상에서 뭔가 변화되는 방향으로 반영된다 이거야?"
"그렇지. 실제 두 세상은 완전히 격리되어 있으니까 커다란 변화가 반영된다기 보다는 이렇게 언어의 측면에서 은밀하게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는게 아닐까 싶어."
"흠.."
디지털퍼머가 팔짱을 끼었다.
"그래서 크로노스는 어떻게 됐어?"
"그 두가지 말이 착각으로 인해 합쳐지는 바람에 시간과 운명을 지배하는 크로노스가 생기는거야. 새로운 크로노스지. 이 크로노스를 가리켜서 파더타임이라고 해. 시간을 의인화한거야. 이 의인화된 시간으로 죽음의 천사가 구체적인 모습을 갖게 되는거지. 이때 그가 들고 있는 낫도, 시클에서 사이드로 발전하는데 이게 그림 리퍼의 원형이야."
"더럽게 복잡하네." 디지털퍼머가 고개를 흔들었다.
"근데 네 말은 이런 어원적인 혼동이 실제로 일어난 일을 암시하는거다 이거지?"
쇼트웨이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크로노스가 있었겠고 그의 능력을 흡수하려는 여러 투쟁이 있었을거야. 그 중에서 보다 교묘한 몇몇이 차례로 성공을 해서 크로노스가 그림 리퍼로 진화해간거라고 생각해."
균열은 이제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넓어져 크레버스라기보다는 커다란 계곡을 만들었다. 계곡의 틈새 사이로 짙푸른 이끼들이 무성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그것은 마치 그 이끼들이, 어두운 계곡 속에서부터 거품이 넘쳐나듯 끓어올라 지표까지 튀어올라온 듯한 느낌을 주었다.
"이런 것이 사실이라면 다음에 그림 리퍼를 만났을 때 이용할 수도 있지 않을까." 쇼트웨이브가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어떻게?"
"우린 그의 과거와 이름을 안 셈이잖아. 우리도 그를 공격할 수 있는 무기가 있는거지."
디지털퍼머가 곰곰히 생각해보다가 말했다.
"싫어. 난 도망갈거야. 절대로 걔한테 한마디도 안할거야."
그녀가 고개를 절래절래 저으면서 말을 이었다.
"솔직히 넌 뭘 어떻게 할건데. 그 녀석이 나타나면 이름이라도 부를거야. 아까 그 여자 때처럼?"
쇼트웨이브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림 리퍼. 우린 너의 이름, 너의 과거, 그리고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 가서 발 닦고 주무시지. 이럴려구?"
쇼트웨이브가 웃음을 터뜨렸다.
"알았어. 이 년아. 같이 도망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그녀가 말했다.
그녀들이 황무지 한 가운데에서 번쩍이는 하얀 빛을 발견한건 차의 시계가 3시 38분으로 바뀌었을 시점에서였다. 그것은 음울하게 가라앉은 무채색의 음영 속에서 터진 작은 플래쉬 같았다.
"저게 뭐지? 저거 봤어?" 쇼트웨이브가 디지털퍼머에게 물었다.
"응, 나도 봤어." 디지털퍼머가 딱딱하게 굳었다.
"또 이상한 귀신 아냐? 응? 딴 쪽으로 도망가."
"골무는 어때?" 쇼트웨이브가 물었다.
"어..괜찮아. 물지 않는데."
잠시 망설이다가 쇼트웨이브가 말했다.
"그럼 위험한건 아닌가 본데. 한번 가까이 가볼까."
쇼트웨이브가 친구의 의견을 물었다. 아무래도 디지털퍼머는 불안했지만 그렇다고 계속 황무지를 헤매고 다닐 수 만은 없는 노릇이었다.
"그럼 천천히 가다가 낌새가 이상하면 후딱 도망쳐."
"알았어."
쇼트웨이브가 하얀 빛쪽으로 차의 방향을 틀었다. 그곳까지는 그리 거리가 멀지 않았다. 장애물처럼 놓여있는 몇 개의 바위를 피해 천천히 차를 달리자, 잔잔한 파도처럼 물결치는 낮은 언덕들이 나타났다. 그녀들이 둔덕을 하나씩 건널 때마다 그 빛은 언덕 밑으로 사라졌다가 좀 더 가까와지고 커진 형태로 다시 나타나곤 했는데, 형체를 알아 볼 수 있을 만큼 커졌을때 그녀들은 빛의 정체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백금으로 만들어진 커다란 조상이었다.
벌거벗은 한 남자와 여자가 반쯤 누워 윗몸만 일으킨 채 서로 바라보고 있는 조상. 그것은 어두운 하늘 밑에서도 흰 빛을 퍼뜨릴만큼 순결한 백색을 띤 강렬한 플래티넘 덩어리였다.
아직 가까이 다가가지는 못했지만 그녀들이 있는 곳에서도 대충의 모습을 알 수 있을 만큼 어마어마한 크기였다.
"살리에라야." 그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디지털퍼머가 탄성처럼 내뱉았다.
"맞아. 그것도 엄청나게 큰 규모의 살리에라야." 쇼트웨이브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이 말하고는 차의 속력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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