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들은 젊은 여성의 뒤를 따라 걸어갔다.
여인은 청경채와 들깨를 심어놓은 너른 밭을 산보하듯이 천천히 지나갔다. 배추 싹처럼 푸릇푸릇 올라온 청경채가 한차례 솎아내기를 한듯 띄엄띄엄 줄을 맞춰 자라고 있었다.
"어머니께서 당신들을 쫓아내듯 내보내려 하시는걸 너무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세요. 어머니는 다른 사람에게 이용당하는 것을 아주 언짢아 하세요. 하긴 누구라도 이런 일에 얽히는 것을 좋아하진 않을 테지요."
갑자기 날이 더워진듯 디지털퍼머는 몸에서 땀이 나는 것을 느꼈다. 자기만 그런가하고 옆에 있는 쇼트웨이브를 보니 그녀 역시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보였다.
"우리가 뭘 잘못 했나요?" 쇼트웨이브가 물었다.
"아니요. 당신들이 그랬다는 것은 아니예요."
젊은 여성이 발걸음을 멈추고 이제 막 너다섯장 정도 잎이 달리기 시작하는 들깻잎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이 일에 책임이 있는 누군가, 당신들을 데려오기 위해 술수를 쓴 그 누군가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어머니를 이용했어요."
알듯 말듯한 여인의 말에 쇼트웨이브가 가만히 이마를 훔치며 물었다.
"당신의 어머니를 이용했다구요? 무슨 목적으로?"
"당신들을 이 곳에 붙잡아 놓으려는 목적이요." 당연한걸 묻는다는 듯이 여성이 대꾸했다.
"우리들을요?"
"네. 당신들을요." 젊은 여성은 다시금 좁은 길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붙잡아 놓으려 한다는건 이젠 정확한 표현이 아니죠. 더 정확히 말하자면 당신들은 이미 붙잡혔어요."
개울물이 흐르듯 산 위쪽에서 쉬지않고 산들바람이 불어내렸지만 언제부터인지 샘솟기 시작한 그녀들의 땀을 식혀주진 못했다.
"무슨 뜻인가요? 붙잡혔다는 것은." 디지털퍼머가 조바심을 내며 물었다.
"당신들은 이 곳의 것이 아닌 몸을 가지고 이 세상으로 왔어요. 짐작하시다시피 이것은 대단히 불안정한 일이죠. 그대로 좀 더 있었으면 아마 이곳에서 튕겨져 나갔을 거예요."
"원래 왔던 곳으로요?"
"운이 좋으면요. 아니면.." 여인이 어깨를 으쓱했다.
"어쨌든 결국 갈 곳은 한 곳뿐 아니겠어요? 어디를 가든 잠시 있을 뿐이지요."
디지털퍼머는 무심코 그 한 곳이라는게 어디냐고 물으려고 했지만 쇼트웨이브가 눈치를 주는 바람에 말을 삼켰다. 사실 그것은 물으나마나한 질문이었다.
"당신 말은 우리가 이제 이곳에서 안정하게 됐다는 뜻인가요?" 쇼트웨이브가 물었다.
"네. 그래요. 우리의 음식을 먹음으로써."
여인이 지나가는 길에 가까이 있던 들깨들이, 중력에 이끌리듯 여인을 향해 줄기를 약간 휘었다가 여인이 멀어지면 스프링처럼 탄력있게 곧게 펴지곤 했다. 마치 여인을 따라가고 싶지만 뿌리를 땅에 묻고 있어 그러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들은 뒤에서 이해할 수 없는 눈길로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특히 버섯은 효과가 좋죠. 당신들을 붙잡아 놓는데 말이예요." 여인이 여전히 표정없는 얼굴로 그녀들을 돌아보았다.
"당신들이 먹은 버섯은 배불뚝이깔대기 버섯이라고 부르는 것이예요. 혹시 아시나요?"
쇼트웨이브가 깊은 숨을 몰아쉬며 디지털퍼머를 쳐다보았다.
"독버섯이군요."
"그래요. 우리에겐 아무런 상관이 없지만 당신들이 가져온 몸에는 치명적이죠. 그 버섯 속의 어떤 성분이 당신들의 세포를 파괴하고 간과 콩팥의 기능을 마비시켜요. 당신네 쪽에선 그 성분을 무스카린이라고 부르죠. 당신들의 신경계는 화염 속에 빠진 나무조각처럼 불타버릴 거예요."
디지털퍼머가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우린 죽나요?"
"네." 여인은 너무나도 쉽게 대답했다. 디지털퍼머가 쇼트웨이브의 팔을 움켜 잡았다. 여인이 디지털퍼머를 쳐다보며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그건 당신네들 표현일 뿐이예요. 실제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무슨 뜻인가요?"
"죽음이란건 말이예요. 상대적인 거지요. 당신들 쪽에서 죽는다는 것은 이쪽에서는 안정하게 정착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랍니다."
그녀들이 숨을 들이켰다.
"다만 약간의 적응과정을 거칠 거예요. 어지럽다거나 몸이 불편하다거나 땀이 많이 난다던가.."
여인이 쇼트웨이브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 이유는 설명하지 않아도 이 아가씨가 알것 같군요."
디지털퍼머가 쇼트웨이브를 쳐다보았다. 입술을 깨물던 쇼트웨이브가 입을 열었다.
"무스카린은 부교감신경을 자극해서 땀을 흘리게 만들어. 전형적인 중독증상이지."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가 침울하게 말했다.
"죽음이 다가온 거야."
"그게 당신들이 치룬 값이랍니다." 여인의 말은 조용했지만 그것은 사형언도였다.
들깨가 심어져 있는 밭이 끝나고, 고구마 잎처럼 생겼지만 그보다 더 삐죽한 잎을 가진 공심채가 자라고 있는 이랑이 시작되었다.
"우리의 입장을 이해해주세요." 하지만 별로 이해를 구하지는 않는 투로 여인이 말했다.
"말하자면 이런 거예요. 당신들이 집에서 잘 지내고 있어요. 그런데 어느날 낯선 존재가 나타나요. 그 존재는 완전히 이질적인 존재예요. 이 세상 것이 아닌거죠. 그것만으로도 썩 좋은 기분은 아닐거예요. 그렇죠?"
공심채를 심은 흙은 검은 빛이 도는 갈색이었다. 찰지고 비옥한 이랑에 무성한 공심채 잎들이 넓게 자라고 있었다.
"그런데 더욱 안 좋은 것은 이 존재가 당신들 집으로 간 이유가 누군가의 꼬임에 빠졌기 때문이고, 그보다 결정적으로 더 나쁜것은 책임질 수 없는 이 존재를 원치 않는 죽음으로 몰고 가는 거죠. 당신들이 말이예요. 자, 그렇다면 당신들은 기분이 어떻겠어요?"
"그래두요." 디지털퍼머는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그래두 버섯찌게를 먹기 전에 이런 얘기를 해 줄 수 있지 않았나요."
여인이 허리를 숙여 공심채를 쓱 훑으면서 지나갔다. 그러자 공심채는 마치 아우성을 치듯 잎과 줄기를 떨며 그녀의 손길에 열광했다. 써치라이트를 받은 것처럼 짙푸른 녹색 빛이 잎면을 따라 번쩍였다.
"드디어 우릴 원망하기 시작하네요." 여인이 그녀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솔직히 말하죠. 당신들에게 이런 것들을 설명해줄 어떤 의무도 우리에겐 없어요. 우린 길을 잃어 가여워 보이는 두 영혼에게 그저 작은 친절을 베풀어 준 것뿐이예요. 식사를 대접해 준 것에 불과하다구요." 여인이 그녀들로부터 시선을 돌려 줄기상추와 쑥갓 사이로 난 길을 바라보았다.
"누가 이런 일을 꾸민 걸까요?" 쇼트웨이브가 말했다.
"그야 부적을 만든 자겠지요." 여인이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아무 말 없이 그녀들은 여인을 따라 걸었다.
"죄송해요. 제가 책망하는 말을 해서." 잠시 후 디지털퍼머가 말했다.
"저희는 이런 것에 대해서 잘 몰라요. 당황스럽고 겁나요. 이제 어떤 일이 일어나는 거지요?"
쇼트웨이브가 말을 이었다.
"좀 설명을 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이 부적이라는게 대체 뭐지요? 아까 그 분이 아주 지독한 것이라고 했는데.."
"언니 말씀이죠?" 여인이 말했다.
그녀들에게 일어난 이 이상한 일만 없었다면 아주 고즈넉한 오후였을 것이다. 산들바람과 적당한 기온, 그리고 주위를 꽉 채운 신선한 야채 냄새.
"이것은 보통 부적과는 좀 달라요." 여인이 잠시 말을 멈췄다. 쉽게 설명할 말을 찾는 중이었다.
"이해하기 쉽게 당신들이 온 세상을 실세계, 그 밖에 있는 세상을 허세계라고 부를께요. 보통 부적은 실세계에서 허세계의 어떤 것을 부리기 위해 발행하지요. 실물이 주체가 되는 거예요." 왼편으로 호도나무의 푸른 잎과 아직 익지 않은 연두색 호도열매가 보였다.
"그런데 그 부적은 완전히 반대예요. 실세계의 어떤 것을 부리기 위해 허세계에서 만들어졌어요. 철저하게 분리된 두 세계의 벽을 깊은 원한과 의지만으로 뚫어냈다구요. 이것은 아주 작은 규모에서 일어났다는 점만 제외한다면 무에서 물질을 창조한 개벽과 다를바 없는 사건이예요. 달랑 부적 한장이지만 실세계에다 물질을 만들은 것이죠."
아주 잠깐이지만 그녀는 야광충처럼 빛나는 눈으로 디지털퍼머와 쇼트웨이브를 쳐다보았다. 잠시 공기의 움직임이 멈추고 모든 소리가 자취를 감추었다. 그녀들을 둘러싼 대기에 숨막히는 요기가 터져버린 둑처럼 방전되었다. 그녀들이 놀라 얼어붙는 순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모든 긴장이 사라졌다.
그녀들은 격심한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난생 처음으로 그녀들은 말로만 듣던 이 세상 것이 아닌 것, 그러니까 귀신을 본 것이었다.
"말하자면 당신들에게 붙은 부적은 이승의 인간을 부리기 위해서 저승에서 발행한 부적이예요."
디지털퍼머는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이를 악물고 애를 쓰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녀들의 충격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인은 담담히 말을 이어나갔다.
"이 부적에는 2개의 기운이 서려있어요. 그러니까 두개의 부적을 교묘하게 하나로 합쳐 놓은 거지요. 하나는 쌍합부예요. 이성을 끌어당기지요. 두 분다 여성인 것으로 보아 이것을 발행한 자는 남자겠군요. 이건 그래도 괜찮아요. 나머지 하나가 문제지요." 여인이 발을 멈추고 두 손을 마주 잡았다.
"나머지 하나는 벽사부라고 불러요. 대도요참이 주 성질이예요. 아무나 함부로 쓸 수 없는 엄하고 무서운 부적이지요. 당신들 세계에서는 귀신을 잡아가두거나 없애버리는데 써요. 그런데 그것이 저승에서 당신들을 향해 발행되었어요. 당신들을 대도요참하거나 잡아 가기 위해서요. 당신들이 그 부적을 따라 여기에 온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니예요."
여인은 청경채와 들깨를 심어놓은 너른 밭을 산보하듯이 천천히 지나갔다. 배추 싹처럼 푸릇푸릇 올라온 청경채가 한차례 솎아내기를 한듯 띄엄띄엄 줄을 맞춰 자라고 있었다.
"어머니께서 당신들을 쫓아내듯 내보내려 하시는걸 너무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세요. 어머니는 다른 사람에게 이용당하는 것을 아주 언짢아 하세요. 하긴 누구라도 이런 일에 얽히는 것을 좋아하진 않을 테지요."
갑자기 날이 더워진듯 디지털퍼머는 몸에서 땀이 나는 것을 느꼈다. 자기만 그런가하고 옆에 있는 쇼트웨이브를 보니 그녀 역시 이마에 맺힌 땀방울이 보였다.
"우리가 뭘 잘못 했나요?" 쇼트웨이브가 물었다.
"아니요. 당신들이 그랬다는 것은 아니예요."
젊은 여성이 발걸음을 멈추고 이제 막 너다섯장 정도 잎이 달리기 시작하는 들깻잎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이 일에 책임이 있는 누군가, 당신들을 데려오기 위해 술수를 쓴 그 누군가가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어머니를 이용했어요."
알듯 말듯한 여인의 말에 쇼트웨이브가 가만히 이마를 훔치며 물었다.
"당신의 어머니를 이용했다구요? 무슨 목적으로?"
"당신들을 이 곳에 붙잡아 놓으려는 목적이요." 당연한걸 묻는다는 듯이 여성이 대꾸했다.
"우리들을요?"
"네. 당신들을요." 젊은 여성은 다시금 좁은 길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붙잡아 놓으려 한다는건 이젠 정확한 표현이 아니죠. 더 정확히 말하자면 당신들은 이미 붙잡혔어요."
개울물이 흐르듯 산 위쪽에서 쉬지않고 산들바람이 불어내렸지만 언제부터인지 샘솟기 시작한 그녀들의 땀을 식혀주진 못했다.
"무슨 뜻인가요? 붙잡혔다는 것은." 디지털퍼머가 조바심을 내며 물었다.
"당신들은 이 곳의 것이 아닌 몸을 가지고 이 세상으로 왔어요. 짐작하시다시피 이것은 대단히 불안정한 일이죠. 그대로 좀 더 있었으면 아마 이곳에서 튕겨져 나갔을 거예요."
"원래 왔던 곳으로요?"
"운이 좋으면요. 아니면.." 여인이 어깨를 으쓱했다.
"어쨌든 결국 갈 곳은 한 곳뿐 아니겠어요? 어디를 가든 잠시 있을 뿐이지요."
디지털퍼머는 무심코 그 한 곳이라는게 어디냐고 물으려고 했지만 쇼트웨이브가 눈치를 주는 바람에 말을 삼켰다. 사실 그것은 물으나마나한 질문이었다.
"당신 말은 우리가 이제 이곳에서 안정하게 됐다는 뜻인가요?" 쇼트웨이브가 물었다.
"네. 그래요. 우리의 음식을 먹음으로써."
여인이 지나가는 길에 가까이 있던 들깨들이, 중력에 이끌리듯 여인을 향해 줄기를 약간 휘었다가 여인이 멀어지면 스프링처럼 탄력있게 곧게 펴지곤 했다. 마치 여인을 따라가고 싶지만 뿌리를 땅에 묻고 있어 그러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들은 뒤에서 이해할 수 없는 눈길로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특히 버섯은 효과가 좋죠. 당신들을 붙잡아 놓는데 말이예요." 여인이 여전히 표정없는 얼굴로 그녀들을 돌아보았다.
"당신들이 먹은 버섯은 배불뚝이깔대기 버섯이라고 부르는 것이예요. 혹시 아시나요?"
쇼트웨이브가 깊은 숨을 몰아쉬며 디지털퍼머를 쳐다보았다.
"독버섯이군요."
"그래요. 우리에겐 아무런 상관이 없지만 당신들이 가져온 몸에는 치명적이죠. 그 버섯 속의 어떤 성분이 당신들의 세포를 파괴하고 간과 콩팥의 기능을 마비시켜요. 당신네 쪽에선 그 성분을 무스카린이라고 부르죠. 당신들의 신경계는 화염 속에 빠진 나무조각처럼 불타버릴 거예요."
디지털퍼머가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우린 죽나요?"
"네." 여인은 너무나도 쉽게 대답했다. 디지털퍼머가 쇼트웨이브의 팔을 움켜 잡았다. 여인이 디지털퍼머를 쳐다보며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그건 당신네들 표현일 뿐이예요. 실제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무슨 뜻인가요?"
"죽음이란건 말이예요. 상대적인 거지요. 당신들 쪽에서 죽는다는 것은 이쪽에서는 안정하게 정착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랍니다."
그녀들이 숨을 들이켰다.
"다만 약간의 적응과정을 거칠 거예요. 어지럽다거나 몸이 불편하다거나 땀이 많이 난다던가.."
여인이 쇼트웨이브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 이유는 설명하지 않아도 이 아가씨가 알것 같군요."
디지털퍼머가 쇼트웨이브를 쳐다보았다. 입술을 깨물던 쇼트웨이브가 입을 열었다.
"무스카린은 부교감신경을 자극해서 땀을 흘리게 만들어. 전형적인 중독증상이지."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가 침울하게 말했다.
"죽음이 다가온 거야."
"그게 당신들이 치룬 값이랍니다." 여인의 말은 조용했지만 그것은 사형언도였다.
들깨가 심어져 있는 밭이 끝나고, 고구마 잎처럼 생겼지만 그보다 더 삐죽한 잎을 가진 공심채가 자라고 있는 이랑이 시작되었다.
"우리의 입장을 이해해주세요." 하지만 별로 이해를 구하지는 않는 투로 여인이 말했다.
"말하자면 이런 거예요. 당신들이 집에서 잘 지내고 있어요. 그런데 어느날 낯선 존재가 나타나요. 그 존재는 완전히 이질적인 존재예요. 이 세상 것이 아닌거죠. 그것만으로도 썩 좋은 기분은 아닐거예요. 그렇죠?"
공심채를 심은 흙은 검은 빛이 도는 갈색이었다. 찰지고 비옥한 이랑에 무성한 공심채 잎들이 넓게 자라고 있었다.
"그런데 더욱 안 좋은 것은 이 존재가 당신들 집으로 간 이유가 누군가의 꼬임에 빠졌기 때문이고, 그보다 결정적으로 더 나쁜것은 책임질 수 없는 이 존재를 원치 않는 죽음으로 몰고 가는 거죠. 당신들이 말이예요. 자, 그렇다면 당신들은 기분이 어떻겠어요?"
"그래두요." 디지털퍼머는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그래두 버섯찌게를 먹기 전에 이런 얘기를 해 줄 수 있지 않았나요."
여인이 허리를 숙여 공심채를 쓱 훑으면서 지나갔다. 그러자 공심채는 마치 아우성을 치듯 잎과 줄기를 떨며 그녀의 손길에 열광했다. 써치라이트를 받은 것처럼 짙푸른 녹색 빛이 잎면을 따라 번쩍였다.
"드디어 우릴 원망하기 시작하네요." 여인이 그녀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솔직히 말하죠. 당신들에게 이런 것들을 설명해줄 어떤 의무도 우리에겐 없어요. 우린 길을 잃어 가여워 보이는 두 영혼에게 그저 작은 친절을 베풀어 준 것뿐이예요. 식사를 대접해 준 것에 불과하다구요." 여인이 그녀들로부터 시선을 돌려 줄기상추와 쑥갓 사이로 난 길을 바라보았다.
"누가 이런 일을 꾸민 걸까요?" 쇼트웨이브가 말했다.
"그야 부적을 만든 자겠지요." 여인이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아무 말 없이 그녀들은 여인을 따라 걸었다.
"죄송해요. 제가 책망하는 말을 해서." 잠시 후 디지털퍼머가 말했다.
"저희는 이런 것에 대해서 잘 몰라요. 당황스럽고 겁나요. 이제 어떤 일이 일어나는 거지요?"
쇼트웨이브가 말을 이었다.
"좀 설명을 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이 부적이라는게 대체 뭐지요? 아까 그 분이 아주 지독한 것이라고 했는데.."
"언니 말씀이죠?" 여인이 말했다.
그녀들에게 일어난 이 이상한 일만 없었다면 아주 고즈넉한 오후였을 것이다. 산들바람과 적당한 기온, 그리고 주위를 꽉 채운 신선한 야채 냄새.
"이것은 보통 부적과는 좀 달라요." 여인이 잠시 말을 멈췄다. 쉽게 설명할 말을 찾는 중이었다.
"이해하기 쉽게 당신들이 온 세상을 실세계, 그 밖에 있는 세상을 허세계라고 부를께요. 보통 부적은 실세계에서 허세계의 어떤 것을 부리기 위해 발행하지요. 실물이 주체가 되는 거예요." 왼편으로 호도나무의 푸른 잎과 아직 익지 않은 연두색 호도열매가 보였다.
"그런데 그 부적은 완전히 반대예요. 실세계의 어떤 것을 부리기 위해 허세계에서 만들어졌어요. 철저하게 분리된 두 세계의 벽을 깊은 원한과 의지만으로 뚫어냈다구요. 이것은 아주 작은 규모에서 일어났다는 점만 제외한다면 무에서 물질을 창조한 개벽과 다를바 없는 사건이예요. 달랑 부적 한장이지만 실세계에다 물질을 만들은 것이죠."
아주 잠깐이지만 그녀는 야광충처럼 빛나는 눈으로 디지털퍼머와 쇼트웨이브를 쳐다보았다. 잠시 공기의 움직임이 멈추고 모든 소리가 자취를 감추었다. 그녀들을 둘러싼 대기에 숨막히는 요기가 터져버린 둑처럼 방전되었다. 그녀들이 놀라 얼어붙는 순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모든 긴장이 사라졌다.
그녀들은 격심한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난생 처음으로 그녀들은 말로만 듣던 이 세상 것이 아닌 것, 그러니까 귀신을 본 것이었다.
"말하자면 당신들에게 붙은 부적은 이승의 인간을 부리기 위해서 저승에서 발행한 부적이예요."
디지털퍼머는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이를 악물고 애를 쓰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녀들의 충격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인은 담담히 말을 이어나갔다.
"이 부적에는 2개의 기운이 서려있어요. 그러니까 두개의 부적을 교묘하게 하나로 합쳐 놓은 거지요. 하나는 쌍합부예요. 이성을 끌어당기지요. 두 분다 여성인 것으로 보아 이것을 발행한 자는 남자겠군요. 이건 그래도 괜찮아요. 나머지 하나가 문제지요." 여인이 발을 멈추고 두 손을 마주 잡았다.
"나머지 하나는 벽사부라고 불러요. 대도요참이 주 성질이예요. 아무나 함부로 쓸 수 없는 엄하고 무서운 부적이지요. 당신들 세계에서는 귀신을 잡아가두거나 없애버리는데 써요. 그런데 그것이 저승에서 당신들을 향해 발행되었어요. 당신들을 대도요참하거나 잡아 가기 위해서요. 당신들이 그 부적을 따라 여기에 온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니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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