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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5 00:03 481회 0건
"이것 좀 잡아줄래요?"
코르셋으로 배와 허리를 조이고, 밑에는 견으로 만든 짧고 단순한 디자인의 패티코트를 입은 세르메가 금속제 버슬을 들고 로트렉를 불렀다. 테일러드 칼라를 단 줄무늬 재킷을 입고 있던 그가 버슬을 착용하려는 그녀 옆으로 다가왔다. 코르셋으로 완벽하게 줄여놓은 그녀의 허리는 마치 종이장처럼 얇고 가늘었다.
얼핏 봐서는 잘 알 수 없었지만 그녀의 아름다운 몸 안에는 머나먼 동양의 이국적인 피가 흐르고 있었다. 싸이렌처럼 사람을 끄는 그녀의 알 수 없는 매력은 그 피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몰랐다. 그녀의 아버지는 다혈질의 포르투갈 선원이었고 어머니는 스페인으로 팔려 온 중국인이었다. 그들은 선창에서 처음 만났으며 별 특별한 로맨스 없이 얼마 후 그녀가 태어났다. 그녀는 마치 집시처럼 아버지를 따라 온 유럽을 돌아다니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왠일이야. 투르뉘르는 유행에 뒤져서 싫다며." 그가 그녀의 뒤에서 버슬을 들자 그녀는 버슬에 달린 끈을 허리에 묶었다.
"그래요. 유행이 지났어요. 그리고 불편해요." 그녀는 웃으며 층층이 주름진 개더를 넣은 티어드 스커트를 둘렀다. 엉덩이 부분이 불룩하게 올라오자 그녀는 스커트의 뒷허리 쪽을 잡아당겨 그에게 잡고 있도록 시켰다. 그녀는 그곳에 드레이프를 내어 풍성하게 리본을 만들어 묶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녀의 날씬하게 패인 허리곡선과 도톰히 솟아오른 가슴,그리고 과장된 엉덩이의 실루엣이 강조되었다.
"어때요?" 그녀가 그를 돌아보며 물어보았다.
"시골에서 올라온 귀족같애." 그녀가 곧 샐쭉해지며 그를 노려보았다. 그가 소리없이 입을 벌리고 웃었다.
"농담이야. 예뻐, 다나." 다나는 아주 친한 친구들이 부르는 그녀의 애칭이었다. 그보다 좀 덜 친한 사람들은 그녀의 별칭을 부르곤 했는데 그것은 그녀의 부계쪽 성격을 말해주는 듯 했다. 그녀의 별명은 강력폭약이었다. 그녀가 앞머리에 쓸 작은 모자를 찾기 시작했다.
"유행이 지났다며 왜 이런 차림을 하는거야?"
"글쎄요." 그녀가 앵초꽃으로 장식된 작은 모자를 찾아들고 꽃이 떨어져 나간 곳이 없는지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실은 고백할게 있어서요." 그녀가 묘한 미소를 띠고 그를 쳐다보았다.
"뭔데?"
"식사하면서 얘기할께요."
모자에 드리워진 보라색 끈을 턱 밑에 묶고는 커다란 전면거울 앞에서 그녀는 자신의 차림새를 꼼꼼히 살펴보았다. 바이올렛 빛의 이브닝드레스가 맵시있게 그녀 몸에 둘러져 있었다. 타이트하게 조여진 상의와 풍성하게 늘어진 하의가 멋진 조화를 이루었다. 그가 약간 낡아보이는 짙은 외투를 걸치고 외출할 준비를 마쳤다.
"다 됐어요. 나가요." 길고 얇은 검은 색 횡편직물 장갑을 끼며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하얗고 조그만 우산을 팔에 걸고 노란색 손가방을 길게 늘어뜨렸다. 그녀가 그에게 다가왔는데 그가 쓴 실크햇이 그녀의 어깨근처에 머물러 있었다.

그들은 나란히 로셰슈아르 대로를 따라 산보하듯 아케이드를 거닐었다. 마차 몇대가 등불을 밝힌채 거리를 지나가고 가볍게 지팡이를 짚은 신사들과 귀부인들이 한담을 하며 여유롭게 걷고 있었다. 해가 뉘엇뉘엇 넘어가자 군데군데 세워져 있는 가스등에 하나씩 불이 들어왔다. 이윽고 디방 자포네라는 간판이 걸려있는 카페 콩세르의 목재 포치가 눈에 들어왔다. 카페 콩세르는 음식과 차를 팔면서 노래와 공연을 함께 보여주는 곳이었다. 값비싼 자작나무로 제작된 포치엔 정교한 솜씨로 히아신스들이 조각되어 있었는데 그 너머에서는 어김없이 노래와 피아노 연주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들이 안으로 들어가자 중앙의 자그마한 무대에서 피아노에 기대 노래를 부르던 여가수가 가볍게 아는 척을 했다.
"오늘 저녁엔 길베르가 공연을 하는군요." 그녀 역시 눈인사를 하며 그에게 말했다.
카페 안은 아직 시간이 일러서인지 비어있는 자리들이 군데군데 눈에 띄었다. 그는 아무 말없이 피아노 연주자에게 손짓을 하고는 그녀와 함께 벽 쪽에 붙은 탁자에 가서 앉았다. 젊고 창백해 보이는 피아노 연주자가 입에 담배를 문 채로 미소를 보내왔다.
"저 사람도 꽤나 입소문을 많이 타더군요." 그녀가 피아노 연주자를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에릭? 응, 재능있는 친구야."
"에릭이예요, 저 사람 이름이?"
"응,에릭. 에릭 사티라고 해. 한번도 만나 본 적 없어?"
"없어요. 같이 공연을 한 적이 없으니까 만날 일이 없죠,뭐."
그때 길베르라고 불렸던 여가수의 노래가 끝나고 카페 안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박수를 쳤다. 그들도 따라서 가벼운 박수를 쳤다. 여가수가 잠시 쉬기 위해 퇴장하고 곧 에릭 사티의 피아노 독주가 시작되었다. 카페 안의 분위기가 편안하게 풀어졌다.
몇 명의 남성들이 테이블에서 일어나 여가수를 따라 홀을 나갔다. 열광적인 팬들이었다. 매우 느리고 낯선 피아노의 선율이 카페 안을 담배연기처럼 채웠다. 같은 리듬이 시계추처럼 반복하면서 유리창에 비친 늦은 저녁햇살같이 시시각각 다채롭게 변주되었다.
"잘 치네요."
"그렇지? 대단히 재능이 있어. 들리는 말로는 정식으로 연주나 작곡수업을 받은 적이 없다는 거야. 처음엔 아버지한테서 배우고 나머지는 독학을 한거지."
"오,그래요?" 그녀는 다시 한번 연주자를 돌아봤다. 마치 깨지기 쉬운 달걀이라도 어루만지듯이 눈을 감고 천천히 몸을 흔드면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다. 아우라처럼 하얀 담배연기가 머리 위로 흘렀다. 연주는 계속되고 있었지만 다음 공연까지 잠시 쉬는 휴식시간이었다. 사람들이 공연에 집중했던 주의를 돌려서 같이 온 사람끼리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갸르송이 테이블로 다가왔다.

"뭐 먹을래요?"
"난 쿠르부용을 먹을래."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난 에스까르고로 하겠어요. 부르고뉴식으로 해주세요. 앙트레로는 퐁프 아뤼르를 주시고요. 에피타이저는.. 뷔뉴가 좋겠어요."
괜찮냐는 듯 그녀가 그를 향해 눈짓으로 의사를 물어왔다.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와인은 소테른으로 아무거나." 그가 말하자 그녀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샤토 디켐으로 주세요." 그녀가 쿡쿡 웃었다. 갸르송이 알았다고 말하고는 돌아가자 그가 말했다.
"미쳤어. 와인 한병으로 일주일치 급여를 다 날릴셈이야?"
"네,그럴 셈이에요."
"대체 무슨 일이야." 그녀가 물끄러미 피아노를 연주하는 연주자 쪽을 바라보았다.
"처음 듣는 곡인데 저게 뭐지요?" 그녀가 물었다.
"그가 직접 작곡한 거야. 짐노페디라고 하더군."
"짐노페디? 그게 무슨 뜻이래요?"
"그게 말야, 고대 스파르타의 제전 행사 중의 하나였대. 근데 그 행사라는게 음..젊은이들이 모두 발가벗고 군무를 하는 것이었어." 그녀가 재미있다는 웃었다.
"밤에 했겠군요. 그렇죠?" 그도 따라서 웃었다.
"그랬겠지. 커다란 모닥불을 피워놓고 북을 두드리면서."
그녀가 한손으로 턱을 괴고 그 광경을 상상하는 듯이 벽에 걸린 불빛을 바라보았다.
"북소리가 쿵쿵 사람들의 심장을 야생말처럼 뛰게 만들었을 거예요. 니켈로 도금된 커다란 술잔이 사람들 사이로 쉬지않고 돌아다녔을 테구요,거기엔 술이 철철 넘쳤겠지요. 일체감이 회반죽처럼 튼튼하게 군중들을 뭉쳐놓았을테지요. 군무가 달아오르면 사내들이고 여인들이고 할 것없이 모든 사람들은 점점 도취감에 빠졌을테고 아마 그들은 자기들이 옷을 벗는지도 몰랐을 거예요." 그녀가 테이블에서 손을 떼고 그에게 가까이 얼굴을 댔다.
"그들이 섹스도 했을까요?" 그가 피식 웃었다.
"집단 혼음?"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으이구, 생각하는 거 하곤." 그가 핀잔을 주자 그녀가 깔깔거렸다.
"알고 싶어요. 당신 생각." 그는 어깨를 으쓱했다.
"안했다면 이상한거겠지. 아마도 그게 짐노페디의 클라이막스였을거야." 그녀가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게 그 제전의 목적이자 절정이었을거예요. 현대 사람들이 이렇게 피폐한 것도 자신들의 성욕을 고대 사람들처럼 건강하고 격정적으로 해소할 수 있는 길이 막혔기 때문일지도 몰라요."
"당신은 만약 짐노페디가 부활한다면 거기 참여하겠군. 그렇지?"
"물론이죠. 그런 기회를 왜 놓쳐요." 그들이 동시에 웃었다. 갸르송이 야채와 감자를 썰어넣은 따뜻한 수프를 테이블에 놓았다.

"혹시 타베르니에 블루라고 알아요?" 그가 수저로 스프를 떠서 입에 넣었다.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딨어. 루이 14세가 타베르니에라는 보석상인한테서 사들인 푸른색 다이아몬드 아냐.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100캐럿이 넘었다고 하던데 말야. 프랑스 혁명 때 도둑 맞았고 그 뒤에 런던으로 팔려갔다는 소리가 있던데."
"보여줄게 있어요." 그녀는 노란 손가방을 열고 줄이 없는 펜던트 하나를 꺼냈다. 푸른 색의 커다란 보석이 박혀 있었다. 그의 눈이 커졌다.
"타베르니에 블루예요. 정확히 112캐럿이예요. 컷팅이 별로 안 좋아서 다시 손을 대야 하겠지만 말이예요." 그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디서 났어?" 그녀가 펜던트를 다시 가방 안에 넣었다.
"며칠 전에 나를 쫓아다니던 팬한테서 받았어요. 결혼하자고 하더군요. 말하자면 프로포즈인 셈이예요."
"누군데?" 그녀가 잠자코 그를 바라보았다.
"부자."
"흠." 그가 다시 스프를 떠 먹었다. 뭔가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다시 말을 했다.
"당신 생각을 알고 싶어요. 내가 당신을 좋아하는거 알죠? 당신이 나를 붙잡는다면 난 타베르니에 블루를 포기할 거예요."
그가 깜짝 놀라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그는 그녀의 말이 농담이 아님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그녀든 아니면 다른 누구든 결혼은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기에는 그의 신체적인 장애가 너무 치명적이었던 것이다. 비록 그녀의 매력이 아주 특별한 것이긴 하였지만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의 핸디캡이 그에게 입힌 깊은 정신적 상처를 치유하기엔 부족했다.
그녀는 그의 눈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는 아무 말 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것이 거절의 뜻이라는 것을 알았다. 예상대로였지만 그래도 실망스러운 것은 사실이었다. 그녀는 잠자코 수프를 저었다. 와인과 함께 메인 디쉬가 나왔다.
"미안해."
"괜찮아요." 그녀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모리스 주아양과 작가인 폴 발레리,작곡가인 가브리엘 포레 그리고 근래 안면을 튼 반 고흐 형제들이었다. 그들이 그와 그녀가 앉아있는 것을 보더니 인사를 하기 위해 다가왔다.
"파리에서 제일 유명한 스타가 여기 있었군." 폴 발레리가 그녀의 손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오랫만이예요,폴."
"어젠 정말 끝내줬어. 물랑루즈가 날아가는 줄 알았어요. 진짜 강력폭약이야." 포레가 그녀의 카드리유를 흉내내자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브뤼셀 전시회 얘기는 들었어요, 레이몽. 축하해요." 고흐 형제 중 형인 빈센트가 그에게 말했다.
"고마워요."
"괜찮다면 그림 얘기를 좀 하고 싶어요. 저희가 당신 그림을 몇점 구입하고 싶은데요." 동생인 테오가 얘기했다.
"저야 뭐, 언제든지 환영이죠." 그가 팔을 벌리며 말했다.
"이봐,레이몽. 이건 내가 소개시켜 준거야. 그림이 팔리면 한턱 쏘는거 잊지말라구." 모리스 주아양이 장난스럽게 한쪽눈을 찡긋하며 그의 어깨를 쳤다. 인사가 끝나자 다들 구석에 있는 커다란 테이블로 몰려갔다. 가기 전에 모리스 주아양이 그와 그녀에게 한마디 했다. "식사 끝나면 우리한테 합석해요. 사업얘기도 있고 술이나 한잔 하자구요."

그가 그녀와 자신의 잔에 와인을 채웠다. 그리고 조용히 식사를 시작했다.
그녀가 갑자기 눈물을 글썽이며 외쳤다. "정말이지 너무 비참하군요. 도무지 식사를 할 수가 없어요. 당신은 얼마나 냉정한지..어떻게 한마디로 딱 잘라서 거절할 수 있죠, 네? 고민도 안해보고 말예요. 당신이 그렇게 잘났어요? 정말 너무해요. 남들이 알면 난 얼마나 웃음거리가 될까."
그녀는 손가방을 열고 손수건을 꺼내서 눈가에 눌렀다. 그는 그녀를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라 조금 당황했다. 그녀의 손을 잡으려고 했을 때 그녀가 말했다.
"이런 얘기까진 안 하려고 했는데..전 아기를 가졌어요. 그래요. 바로 당신의 아기예요. 레이몽."
그가 얼마나 놀랐는지 포크를 떨어뜨렸다. 그가 낮은 신음소리를 냈다. 거짓말을 할 여자는 아니었다.
세상에,아기라니..화약을 잔뜩 재운 피스톨의 총구가 눈 앞에서 터진 것 같았다. 관자놀이가 쑤셔오고 정체를 알 수없는 격정이 가슴에서 일렁였다. 그는 먹는 것도 잊은 채 멍하니 식탁 위에 팔을 올려 두 손을 마주 잡았다. 별명은 아주 적당했다. 그녀는 정말 강력폭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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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2016-08-11
접속일 2024-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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