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들이 탄 차의 서스펜션이 갑자기 나빠졌다.
82번 국지도는 단양 쪽을 향해서 난 길로, 청풍호반을 끼고 도는 수려한 도로였다. 산등성이를 타고 오르는 바람에 굽이굽이 굴곡이 많았고 그림같은 명승지도 곳곳에 널려 있었다. 지방도로라서 고속도로에 비할 수 없이 폭도 좁아지고 노면기울기 역시 나빠진 것도 이유가 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눈에 띄게 승차감이 나빠진다는 것은 좀 이상했다. 무엇보다 좌우의 롤링이 심해져서 불안한 느낌이 가중되었다. 디지털퍼머는 보조석 위의 안전손잡이를 잡지 않을 수 없었다.
"운전 좀 살살해,이 년아." 그녀가 빽 소리를 질렀다.
"아냐, 천천히 가는건데. 스태빌라이져가 나갔나.." 쇼트웨이브가 이상하다는 듯이 중얼거렸지만 곧 정상으로 돌아오리라고 생각하는지 별로 걱정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스태빌..뭐?" 디지털퍼머가 물었다.
"스태빌라이져." 그녀가 차의 속도를 조금 높이며 말했다.
"스태빌라이져 링크를 말하는거야. 좌우 바퀴를 연결해 주는 바인데 두 바퀴의 기울기가 다를 때.."
"아아..됐어. 그게 뭐든 나갔으면 빨리 들어오라고 해." 디지털퍼머가 잘 모르는 용어가 나오자 지겹다는 듯이 말을 끊었다. 쇼트웨이브가 작게 웃었다.
충주댐이 막히면서 내륙으로 물이 들어차기 전이었다면 산중턱쯤 되었을 부분에 테두리를 두르듯이 난 길이었지만 이젠 충주호를 따라 돌아가는 강변도로쯤 되는 길을 그녀들의 차가 위험스럽게 흔들리며 달리기 시작했다.
"날씨가 많이 안좋네."
밖을 구경하던 디지털퍼머가 혼잣말을 하듯 얘기했다. 그녀들이 국도를 타면서부터 끼기 시작했던 먹장구름이 이젠 태풍이라도 올듯이 두텁게 몰려들면서 해를 완전히 가리고 있었다. 마치 회색빛 부직포를 구겨서 넓게 펼쳐 놓은 것처럼 답답하고 음습한 하늘이었다.
도로가 기역자로 꺾여진 코너 부분 좀 앞쪽에, 제천시 상징물인 박달도령과 금봉낭자의 알록달록한 캐릭터가 새겨진 버스정거장 표지판이 마치 영역구획이라도 하듯이 음산한 하늘을 배경으로 삐죽 솟아올라 있었다. 박달도령의 눈동자가 그녀들의 차를 내려보았다고 느껴졌을 때였다.
코너에 접어든 차가 심하게 요동을 치며 순식간에 한쪽으로 쏠려나가기 시작했다. 디지털퍼머가 창틀에 머리를 부딪히며 비명을 질렀다. 댐퍼가 늘어날 수 있는 최대의 스트록 길이까지 인장되며 로워암을 잡아당겼다. 타이어가 곧바로 한계 그립력에 도달하면서 날카로운 마찰음을 긁어냈다. 차는 아스팔트에 길게 검은 자국을 긋기 시작했다. 어떤 일에서도 크게 당황하지 않는 성격인 쇼트웨이브조차 긴장하는 빛이 역력해졌다.
그녀가 자동변속기를 내리쳐 저단으로 바꾸며 한손으로 핸들을 감아 돌렸다. 차는 곧 강하게 엔진브레이크를 먹었다. 바로 이어 핸드 브레이크를 올리는 동시에 그녀의 오른발은 잘 훈련된 레이서처럼 브레이킹과 악셀링을 동시에 조작하기 시작했다. 매우 능숙한 힐앤토 기술이었다. 갓길을 넘어 가드레일에 부딪힐 듯이 커브의 끝지점까지 밀려난 차가, 재빠른 그녀의 조치에 보답이라도 하듯이 관성을 털어버리고 더이상의 미끄러짐 없이 아슬아슬하게 코너를 빠져나왔다. 맞은편 차선에서 검은 색 승용차가 라이트를 켠 채 빠른 속도로 그녀들이 탄 차를 비껴 지나갔다.
"아우..머리 아파. 큰 일날뻔 했네. 어떻게 된거야." 부딪힌 머리를 문지르며 디지털퍼머가 걱정스런 목소리로 쇼트웨이브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모르겠어. 차가 갑자기 균형을 잃었어. 휠 얼라이먼트도 망가졌나..내가 운전을 잘못 해서 그런건지도 모르고." 그녀가 핸드브레이크를 풀면서 말했다. 차가 안정을 되찾자 자동변속기를 드라이브 위치에 놓고 가속을 해봤지만 차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멀쩡하게 주행을 하는 것이었다.
"일단은 괜찮은거 같은데. 돌아가면 점검을 받아봐야겠네." 그녀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날이 아주 깜깜해져 어스름한 저녁 무렵처럼 느껴졌다. 쇼트웨이브는 속도를 줄이며 미등을 켰다. 계기판에 연두색의 부드러운 조명이 들어왔다.
"몇신데 이렇게 어두워. 비 많이 오겠는데." 라디오의 주파수가 바뀌었는지 잡음이 크게 섞이면서 음악소리가 간헐적으로 끊겼다.
"라디오도 안돼. 산에 가렸나봐. 이그, 시골 정말.." 몇번 주파수를 맞추던 디지털퍼머가 단념한 듯 라디오를 껐다. 차 안에 정적이 흘렀다. 충주호의 물빛이 검게 반사되었다. 스산한 대기를 엿가락처럼 늘이며 차량이 천천히 전진했다.
"제천에서 사람들이 많이 죽었던거 알아?" 갑자기 생각난 듯 쇼트웨이브가 친구에게 말을 걸었다.
"응? 제천에서? 언제?"
"옛날에." 쇼트웨이브가 뒷머리를 좌석에 기대면서 얘기했다.
"생각하기에 따라선 그렇게 오래 전도 아니지,뭐. 광주나 제주도같은 경우도 민중들이 억울하게 많이 학살된 곳인데 그런 곳은 잘 알려져 있잖아."
"그런데?"
"그런데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제천 역시 그렇단 말야. 역사적인 사건도 있었지만 또 심란한 전설도 많아."
"심란해? 흠..그리구 제천에서 그렇게 사람이 많이 죽었는지는 몰랐는데."
"제천은 구한말 의병으로 아주 유명한 곳이었어. 우리 국사시간에도 배웠잖아. 유인석 장군, 생각나지? 그 사람도 제천사람이고."
"그래? 난 왜 생각이 안나지?" 고개를 갸웃하는 친구를 보며 쇼트웨이브가 코웃음을 쳤다.
"네가 뭔들 생각이 나겠니. 엄마 나이는 아니?"
"안다, 이 년아. 이것이 아주 못됐어." 디지털퍼머가 그녀를 노려봤다. 쇼트웨이브가 살짝 웃었다.
"여기서 두 번의 커다란 의병이 일어났어. 을미의병이 한번,그러니까 1895년에 일어났고. 을사년,1905년에 또 한번. 을사조약으로 나라가 넘어갔을 때 일어났지. 특히 처음 일어났던 을미의병은 충주를 점령하면서 남한강 일대와 중부지역을 휩쓸었을 정도였대."
"그래?" 디지털퍼머가 자세를 좀 편하게 고쳐앉았다. 이 친구는 어떤 때는 자동오르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위치를 누르면 준비된 음악이 연주되는 것처럼 머리 속에 축적되어 있던 지식이 시시때때로 넘쳐 흘러나왔다. 적절한 상황에 도달하면 기억이 촉발되는 것 같았다.
"응. 근데 말야, 우연히도 그 두번의 의병이 치명적으로 패퇴하는 곳이 여기 청풍이야. 지금 우리가 가는 곳 말야.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관군이나 일본군한테 죽었대. 특히 을미년에 일어났던 의병은 마지막에 청풍으로 넘어온 관군에 의해서 패하고 그때 의병장이었던 김상우가 전사를 하게 되는데, 그 사람이 죽기 전에 이런 말을 남겼어."
"무슨 말?"
"내 비록 여기서 죽지만 죽어서라도 이곳을 피로써 봉쇄하리라."
"무섭다,이 년아." 디지털퍼머가 얼굴을 찡그리며 쇼트웨이브를 쳐다보았다.
"근데 그 말이 좀..수수께끼같지 않아?" 쇼트웨이브는 친구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뭐가?"
"음..대체로 전시에 하는 유언이라면 이순신 장군처럼 말해야 되는게 아닌가 싶어. 나 죽은 것을 적에게 알리지 마라. 이렇게 말야. 정말 수긍할만한 유언이지,그렇잖아. 아님 죽어서라도 나라를 지키겠다,아니면 왜놈들을 몰아내겠다,보통 이런 식으로 말해야 되는거 아냐?"
"그 사람 말도 그런 뜻 아냐?"
"다르지. 좀 이상하잖아. 피로써 이곳을 봉쇄한다. 평범한 의미는 아닌 거 같지않아? 저주하는 느낌이 강하잖아."
"아이씨..진짜. 그만해,이 년아." 디지털퍼머가 짜증스럽게 쏘아붙였다. 쇼트웨이브는 친구의 반응이 재밌는지 웃음을 지었다.
"근데 말야,역사적인 사실도 이렇거니와 제천은 전설도 좀 이상해."
"이것이 정말. 안그래도 날씨때문에 분위기 칙칙한데. 대체 왜 이러는건데." 친구가 듣기 싫다는 듯 안달을 하자 쇼트웨이브가 깔깔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잠시 침묵이 흐르자 디지털퍼머가 말했다.
"뭐가 이상한데?"
쇼트웨이브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렇지,뭐. 10초를 못 견뎌요. 무슨 애가."
"네가 궁금하게 만들어 놨잖아. 이 년아."
"나 참." 쇼트웨이브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궁금해?"
"응. 안 무섭게 얘기해."
"알았어,이 년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쇼트웨이브가 말했다.
"제천 송학면에 절골이란 마을이 있대. 지금은 절이 없는데 조선 중기 때만 하더라도 월명사라는 절이 있었다는거야. 그런데 하루는 그 절에 아름다운 여인이 한명 백일치성을 드리러 왔대."
"전설의 고향답네. 그래서?"
"그런데 승려들 중의 한 명이 그 여자 미모에 반한거야.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다가 어느 날 밤중에 잠시 절 뒤편으로 산책을 나간 그녀를 겁탈한 거지."
"미쳤어. 왜 나갔대. 밤중에. 무섭지도 않나. 그래서?"
"그래서 절로 돌아온 여자가 법당에서 자결을 했는데 목숨을 끊자 절이 갑자기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말았대."
디지털퍼머가 이게 무슨 얼토당토 않은 결말이냐는 듯이 친구를 바라봤다.
"대체 왜 사라졌대?"
"근데 그거야 말로 그 전설에 가장 적당한 결말 아니겠니? 난 그 전설을 듣자마자 정말 리얼한 결론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왜?"
"그 여자가 귀신이 돼서 나타났다 어쨌다 했으면 그냥 그런 전설이 됐을거야. 가장 일반적인 형태의 전설이잖아, 그치? 근데 이 전설은, 알지 못할 무언가가 이 세상으로 온 게 아니라 이 세상 것이 알지못할 어떤 곳으로 사라져버린거야."
쇼트웨이브가 주의깊게 운전을 하며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의병장의 말이 의미심장하다는게 이런 뜻에서 그래. 그의 말을 빌자면 그 여인의 원한이 절 자체를 봉쇄해 버린 거지. 이 세상으로부터 말야. 해석하자면 말야, 그 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그녀가 품은 원한의 힘이 비틀어낸 공간의 균열 속으로 끌려 들어가 사라진 게 아닐까. 시공은 평탄한게 아니잖아. 너두 알다시피 이리저리 굴곡져 있지."
그때 충주호를 둘러싼 큰 산봉우리 건너편 새까맣게 그늘진 하늘에서 거대한 전류의 스파크가, 땅을 향해 예측 불가능한 곡률의 선분을 그려내며 눈부신 섬광을 일으켰다. 곧 차창이 흔들릴만큼 강렬한 천둥소리가 뒤따랐다.
디지털퍼머가 작은 비명을 질렀다.
"아우,놀래라."
전조등을 켠 검은 차량이 맞은편 차선에서 그녀들이 탄 차를 쏜살같이 지나쳐갔다.
"어라.." 운전을 하던 쇼트웨이브 표정에서 좀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왜?"
무언가를 생각하듯 잠시 침묵을 지키던 쇼트웨이브가 말했다.
"나 말야, 차량 번호판의 넘버를 무의식적으로 외우는 버릇이 있는데 말야."
"응, 잘 알지."
사실이었다. 디지털퍼머는 드라이브를 하는 도중에 쇼트웨이브가 많게는 100개까지, 지나간 차의 번호를 순서대로 외우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참으로 특이한 뇌구조였다. 농담삼아 그녀가 교통과에 들어가면 뺑소니 사고가 없어질거라고 말하곤 했었다.
"방금 전에 지나간 차, 아까 우리가 커브길에서 사고날 뻔 했을 때 지나간 차야."
말이 끝나기 무섭게 디지털퍼머가 비명을 지르면서 발을 굴렀다.
"야,이 년아. 너 나 심장마비 일으켜서 죽일려고 작정했어? 응?"
"나도 좀 이상해. 내가 번호를 착각한걸까?"
"착각했겠지. 착각. 어떻게 한번 지나간 차가 또 지나갈 수 있어." 귀신이야? 라고 윽박지르고 싶었지만 귀신이란 단어가 왠지 섬?하게 느껴져 디지털퍼머는 말을 잇지 못했다.
"빨리 착각이라고 말해. 빨리." 그녀가 친구를 종용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안정을 얻고 싶었다.
"알았어,이 년아. 내가 착각했나봐." 쇼트웨이브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잘해. 알았어? 또 그런 착각하면 나 죽는거 볼 줄 알아." 디지털퍼머가 짐짓 인상을 긁었다.
82번 국지도는 단양 쪽을 향해서 난 길로, 청풍호반을 끼고 도는 수려한 도로였다. 산등성이를 타고 오르는 바람에 굽이굽이 굴곡이 많았고 그림같은 명승지도 곳곳에 널려 있었다. 지방도로라서 고속도로에 비할 수 없이 폭도 좁아지고 노면기울기 역시 나빠진 것도 이유가 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눈에 띄게 승차감이 나빠진다는 것은 좀 이상했다. 무엇보다 좌우의 롤링이 심해져서 불안한 느낌이 가중되었다. 디지털퍼머는 보조석 위의 안전손잡이를 잡지 않을 수 없었다.
"운전 좀 살살해,이 년아." 그녀가 빽 소리를 질렀다.
"아냐, 천천히 가는건데. 스태빌라이져가 나갔나.." 쇼트웨이브가 이상하다는 듯이 중얼거렸지만 곧 정상으로 돌아오리라고 생각하는지 별로 걱정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스태빌..뭐?" 디지털퍼머가 물었다.
"스태빌라이져." 그녀가 차의 속도를 조금 높이며 말했다.
"스태빌라이져 링크를 말하는거야. 좌우 바퀴를 연결해 주는 바인데 두 바퀴의 기울기가 다를 때.."
"아아..됐어. 그게 뭐든 나갔으면 빨리 들어오라고 해." 디지털퍼머가 잘 모르는 용어가 나오자 지겹다는 듯이 말을 끊었다. 쇼트웨이브가 작게 웃었다.
충주댐이 막히면서 내륙으로 물이 들어차기 전이었다면 산중턱쯤 되었을 부분에 테두리를 두르듯이 난 길이었지만 이젠 충주호를 따라 돌아가는 강변도로쯤 되는 길을 그녀들의 차가 위험스럽게 흔들리며 달리기 시작했다.
"날씨가 많이 안좋네."
밖을 구경하던 디지털퍼머가 혼잣말을 하듯 얘기했다. 그녀들이 국도를 타면서부터 끼기 시작했던 먹장구름이 이젠 태풍이라도 올듯이 두텁게 몰려들면서 해를 완전히 가리고 있었다. 마치 회색빛 부직포를 구겨서 넓게 펼쳐 놓은 것처럼 답답하고 음습한 하늘이었다.
도로가 기역자로 꺾여진 코너 부분 좀 앞쪽에, 제천시 상징물인 박달도령과 금봉낭자의 알록달록한 캐릭터가 새겨진 버스정거장 표지판이 마치 영역구획이라도 하듯이 음산한 하늘을 배경으로 삐죽 솟아올라 있었다. 박달도령의 눈동자가 그녀들의 차를 내려보았다고 느껴졌을 때였다.
코너에 접어든 차가 심하게 요동을 치며 순식간에 한쪽으로 쏠려나가기 시작했다. 디지털퍼머가 창틀에 머리를 부딪히며 비명을 질렀다. 댐퍼가 늘어날 수 있는 최대의 스트록 길이까지 인장되며 로워암을 잡아당겼다. 타이어가 곧바로 한계 그립력에 도달하면서 날카로운 마찰음을 긁어냈다. 차는 아스팔트에 길게 검은 자국을 긋기 시작했다. 어떤 일에서도 크게 당황하지 않는 성격인 쇼트웨이브조차 긴장하는 빛이 역력해졌다.
그녀가 자동변속기를 내리쳐 저단으로 바꾸며 한손으로 핸들을 감아 돌렸다. 차는 곧 강하게 엔진브레이크를 먹었다. 바로 이어 핸드 브레이크를 올리는 동시에 그녀의 오른발은 잘 훈련된 레이서처럼 브레이킹과 악셀링을 동시에 조작하기 시작했다. 매우 능숙한 힐앤토 기술이었다. 갓길을 넘어 가드레일에 부딪힐 듯이 커브의 끝지점까지 밀려난 차가, 재빠른 그녀의 조치에 보답이라도 하듯이 관성을 털어버리고 더이상의 미끄러짐 없이 아슬아슬하게 코너를 빠져나왔다. 맞은편 차선에서 검은 색 승용차가 라이트를 켠 채 빠른 속도로 그녀들이 탄 차를 비껴 지나갔다.
"아우..머리 아파. 큰 일날뻔 했네. 어떻게 된거야." 부딪힌 머리를 문지르며 디지털퍼머가 걱정스런 목소리로 쇼트웨이브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모르겠어. 차가 갑자기 균형을 잃었어. 휠 얼라이먼트도 망가졌나..내가 운전을 잘못 해서 그런건지도 모르고." 그녀가 핸드브레이크를 풀면서 말했다. 차가 안정을 되찾자 자동변속기를 드라이브 위치에 놓고 가속을 해봤지만 차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멀쩡하게 주행을 하는 것이었다.
"일단은 괜찮은거 같은데. 돌아가면 점검을 받아봐야겠네." 그녀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날이 아주 깜깜해져 어스름한 저녁 무렵처럼 느껴졌다. 쇼트웨이브는 속도를 줄이며 미등을 켰다. 계기판에 연두색의 부드러운 조명이 들어왔다.
"몇신데 이렇게 어두워. 비 많이 오겠는데." 라디오의 주파수가 바뀌었는지 잡음이 크게 섞이면서 음악소리가 간헐적으로 끊겼다.
"라디오도 안돼. 산에 가렸나봐. 이그, 시골 정말.." 몇번 주파수를 맞추던 디지털퍼머가 단념한 듯 라디오를 껐다. 차 안에 정적이 흘렀다. 충주호의 물빛이 검게 반사되었다. 스산한 대기를 엿가락처럼 늘이며 차량이 천천히 전진했다.
"제천에서 사람들이 많이 죽었던거 알아?" 갑자기 생각난 듯 쇼트웨이브가 친구에게 말을 걸었다.
"응? 제천에서? 언제?"
"옛날에." 쇼트웨이브가 뒷머리를 좌석에 기대면서 얘기했다.
"생각하기에 따라선 그렇게 오래 전도 아니지,뭐. 광주나 제주도같은 경우도 민중들이 억울하게 많이 학살된 곳인데 그런 곳은 잘 알려져 있잖아."
"그런데?"
"그런데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제천 역시 그렇단 말야. 역사적인 사건도 있었지만 또 심란한 전설도 많아."
"심란해? 흠..그리구 제천에서 그렇게 사람이 많이 죽었는지는 몰랐는데."
"제천은 구한말 의병으로 아주 유명한 곳이었어. 우리 국사시간에도 배웠잖아. 유인석 장군, 생각나지? 그 사람도 제천사람이고."
"그래? 난 왜 생각이 안나지?" 고개를 갸웃하는 친구를 보며 쇼트웨이브가 코웃음을 쳤다.
"네가 뭔들 생각이 나겠니. 엄마 나이는 아니?"
"안다, 이 년아. 이것이 아주 못됐어." 디지털퍼머가 그녀를 노려봤다. 쇼트웨이브가 살짝 웃었다.
"여기서 두 번의 커다란 의병이 일어났어. 을미의병이 한번,그러니까 1895년에 일어났고. 을사년,1905년에 또 한번. 을사조약으로 나라가 넘어갔을 때 일어났지. 특히 처음 일어났던 을미의병은 충주를 점령하면서 남한강 일대와 중부지역을 휩쓸었을 정도였대."
"그래?" 디지털퍼머가 자세를 좀 편하게 고쳐앉았다. 이 친구는 어떤 때는 자동오르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위치를 누르면 준비된 음악이 연주되는 것처럼 머리 속에 축적되어 있던 지식이 시시때때로 넘쳐 흘러나왔다. 적절한 상황에 도달하면 기억이 촉발되는 것 같았다.
"응. 근데 말야, 우연히도 그 두번의 의병이 치명적으로 패퇴하는 곳이 여기 청풍이야. 지금 우리가 가는 곳 말야.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관군이나 일본군한테 죽었대. 특히 을미년에 일어났던 의병은 마지막에 청풍으로 넘어온 관군에 의해서 패하고 그때 의병장이었던 김상우가 전사를 하게 되는데, 그 사람이 죽기 전에 이런 말을 남겼어."
"무슨 말?"
"내 비록 여기서 죽지만 죽어서라도 이곳을 피로써 봉쇄하리라."
"무섭다,이 년아." 디지털퍼머가 얼굴을 찡그리며 쇼트웨이브를 쳐다보았다.
"근데 그 말이 좀..수수께끼같지 않아?" 쇼트웨이브는 친구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뭐가?"
"음..대체로 전시에 하는 유언이라면 이순신 장군처럼 말해야 되는게 아닌가 싶어. 나 죽은 것을 적에게 알리지 마라. 이렇게 말야. 정말 수긍할만한 유언이지,그렇잖아. 아님 죽어서라도 나라를 지키겠다,아니면 왜놈들을 몰아내겠다,보통 이런 식으로 말해야 되는거 아냐?"
"그 사람 말도 그런 뜻 아냐?"
"다르지. 좀 이상하잖아. 피로써 이곳을 봉쇄한다. 평범한 의미는 아닌 거 같지않아? 저주하는 느낌이 강하잖아."
"아이씨..진짜. 그만해,이 년아." 디지털퍼머가 짜증스럽게 쏘아붙였다. 쇼트웨이브는 친구의 반응이 재밌는지 웃음을 지었다.
"근데 말야,역사적인 사실도 이렇거니와 제천은 전설도 좀 이상해."
"이것이 정말. 안그래도 날씨때문에 분위기 칙칙한데. 대체 왜 이러는건데." 친구가 듣기 싫다는 듯 안달을 하자 쇼트웨이브가 깔깔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잠시 침묵이 흐르자 디지털퍼머가 말했다.
"뭐가 이상한데?"
쇼트웨이브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렇지,뭐. 10초를 못 견뎌요. 무슨 애가."
"네가 궁금하게 만들어 놨잖아. 이 년아."
"나 참." 쇼트웨이브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궁금해?"
"응. 안 무섭게 얘기해."
"알았어,이 년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쇼트웨이브가 말했다.
"제천 송학면에 절골이란 마을이 있대. 지금은 절이 없는데 조선 중기 때만 하더라도 월명사라는 절이 있었다는거야. 그런데 하루는 그 절에 아름다운 여인이 한명 백일치성을 드리러 왔대."
"전설의 고향답네. 그래서?"
"그런데 승려들 중의 한 명이 그 여자 미모에 반한거야.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다가 어느 날 밤중에 잠시 절 뒤편으로 산책을 나간 그녀를 겁탈한 거지."
"미쳤어. 왜 나갔대. 밤중에. 무섭지도 않나. 그래서?"
"그래서 절로 돌아온 여자가 법당에서 자결을 했는데 목숨을 끊자 절이 갑자기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말았대."
디지털퍼머가 이게 무슨 얼토당토 않은 결말이냐는 듯이 친구를 바라봤다.
"대체 왜 사라졌대?"
"근데 그거야 말로 그 전설에 가장 적당한 결말 아니겠니? 난 그 전설을 듣자마자 정말 리얼한 결론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왜?"
"그 여자가 귀신이 돼서 나타났다 어쨌다 했으면 그냥 그런 전설이 됐을거야. 가장 일반적인 형태의 전설이잖아, 그치? 근데 이 전설은, 알지 못할 무언가가 이 세상으로 온 게 아니라 이 세상 것이 알지못할 어떤 곳으로 사라져버린거야."
쇼트웨이브가 주의깊게 운전을 하며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의병장의 말이 의미심장하다는게 이런 뜻에서 그래. 그의 말을 빌자면 그 여인의 원한이 절 자체를 봉쇄해 버린 거지. 이 세상으로부터 말야. 해석하자면 말야, 그 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그녀가 품은 원한의 힘이 비틀어낸 공간의 균열 속으로 끌려 들어가 사라진 게 아닐까. 시공은 평탄한게 아니잖아. 너두 알다시피 이리저리 굴곡져 있지."
그때 충주호를 둘러싼 큰 산봉우리 건너편 새까맣게 그늘진 하늘에서 거대한 전류의 스파크가, 땅을 향해 예측 불가능한 곡률의 선분을 그려내며 눈부신 섬광을 일으켰다. 곧 차창이 흔들릴만큼 강렬한 천둥소리가 뒤따랐다.
디지털퍼머가 작은 비명을 질렀다.
"아우,놀래라."
전조등을 켠 검은 차량이 맞은편 차선에서 그녀들이 탄 차를 쏜살같이 지나쳐갔다.
"어라.." 운전을 하던 쇼트웨이브 표정에서 좀 의아한 빛이 떠올랐다.
"왜?"
무언가를 생각하듯 잠시 침묵을 지키던 쇼트웨이브가 말했다.
"나 말야, 차량 번호판의 넘버를 무의식적으로 외우는 버릇이 있는데 말야."
"응, 잘 알지."
사실이었다. 디지털퍼머는 드라이브를 하는 도중에 쇼트웨이브가 많게는 100개까지, 지나간 차의 번호를 순서대로 외우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참으로 특이한 뇌구조였다. 농담삼아 그녀가 교통과에 들어가면 뺑소니 사고가 없어질거라고 말하곤 했었다.
"방금 전에 지나간 차, 아까 우리가 커브길에서 사고날 뻔 했을 때 지나간 차야."
말이 끝나기 무섭게 디지털퍼머가 비명을 지르면서 발을 굴렀다.
"야,이 년아. 너 나 심장마비 일으켜서 죽일려고 작정했어? 응?"
"나도 좀 이상해. 내가 번호를 착각한걸까?"
"착각했겠지. 착각. 어떻게 한번 지나간 차가 또 지나갈 수 있어." 귀신이야? 라고 윽박지르고 싶었지만 귀신이란 단어가 왠지 섬?하게 느껴져 디지털퍼머는 말을 잇지 못했다.
"빨리 착각이라고 말해. 빨리." 그녀가 친구를 종용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안정을 얻고 싶었다.
"알았어,이 년아. 내가 착각했나봐." 쇼트웨이브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잘해. 알았어? 또 그런 착각하면 나 죽는거 볼 줄 알아." 디지털퍼머가 짐짓 인상을 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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