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장 여왕의 명예
"누가 저에게 계책을 말해보세요."
파견부대의 괴멸 보고를 들은 올시니 왕국의 여왕 마리시아는, 즉시 중신회의를 열어, 아름다운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채, 늘어선 중신들을 재촉했다.
올시니 군 이만오천 대 사브리나 군 일만구천의 싸움이었다. 질 리가 없는 싸움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대패로 끝나, 총대장 게펜, 거기다 유력한 무장 챤드라, 그리고 만여 병사를 잃었다.
사브리나군은 일단 군사를 물렸지만, 가까운 장래, 대공세로 나설 것임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것은 전쟁의 초보인 마리시아에게도 예상할 수 있을 만큼, 누구도 부정하지 못했다.
그리고, 다음 전투에서 또다시 대패한다면, 올시니왕국은 멸망해, 사브리나왕국에 병합돼버릴 것이다.
마리시아는 중신들을 둘러보았다. 위엄있는 무표정 뒤에 감춰져 있는 그들 각각의 생각을 읽어내기에는 마리시아의 인생경험이 짧았다.
아버지에게서 이어받은 대대로 내려온 중신들이 앞에 있음에도, 마리시아는 고독했다.
무거운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입을 연 것은, 가장 연장자로서의 책임감을 느낀 재상 보넷트였다.
올시니왕국의 재상 보넷트는 올해 육십세. 명문귀족 출신으로 무장으로서와 외교관으로서 그리고 행정관으로서의 경험도 있어서, 세사에 밝고, 기지도 있는 인물이라는 평판을 듣고 있는, 누가 뭐라 할 수 없는 국가의 중추였다.
마리시아 같은 물정 모르는 계집애가 난세의 군주를 큰 문제없이 맡고 있는 것도 그의 수완이라고, 많은 이들이 믿고 있다.
그런 노련한 정치가인 그도, 반세기 동안 사귄 친구인 게펜을 잃은 것은 쇼크일 것이다. 순식간에 열 살을 더 먹어버린 듯 늙어보인다.
"황송한 말씀이지만, 지금은 적극적으로 평화적인 방법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소극책에 마리시아는 아름다운 얼굴을 당혹으로 일그러트렸다. 자신이 여왕에 즉위한 지 몇 개월도 지나지 않았는데, 올시니 왕국은 타국의 종속국이 돼야하는 것인가.
그에 대한 격렬한 반대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보넷트. 헛소리하지 마시오."
소리가 들린 쪽으로 마리시아가 시선을 돌리자, 데므루가스트가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올시니군에서 가장 뛰어난 무사인 그는, 가열찬 안광으로 모인 이들을 꿰뚫어 보며 열변을 토했다.
"조부 전래의 땅을 빤히 눈을 뜨고서 그냥 넘겨준다면, 우리는 역사대대로 비웃음을 받을 것이오. 다행히, 우리에게는 지오르 고개라는 철벽의 험지가 있소. 그곳을 사수하면 되오."
"하지만, 먼저 대군을 이끌고 출병한 귀공은, 패배하여 돌아오지 않았소이까. 모든 것을 잃는 것보다도, 일부를 내주고 멈추는 것이, 현명한 일이지요."
데므루가스트와 보네트가 서로 노려보았다. 그런 둘 사이로 끼어든 것은 연녹색 머리카락의 레이몬이었다.
"이 기회에 메리샨트왕국과 동맹을 맺고 사브리나에 대항하는 게 어떻습니까"
"그게 가능할까요?"
그 제안에 마리시아가 흥미를 보였다.
"조건만 맞으면 가능 할 겁니다."
"……돈, 입니까"
"그리고 영토의 일부할양. 그렇게 하면 만약의 경우에라도 여왕폐하는 메리샨트로 피신하실 수도 있습니다. 지금은 어떻게든 메리샨트를 아군으로 끌어들여 사브리나에 대항해야 합니다."
"행랑을 빌려줬다 안채까지 빼앗긴다, 는 속담도 있다."
오른쪽 뺨에서 턱까지 난 도흔을 만지작거리면서, 던지듯 말을 꺼낸 것은 다르게니스였다.
"게다가 타국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싸울 병사가 있을 리 없다. 사태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 뿐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다르게니스는 양손으로 쾅하고 책상을 쳤다.
"내 나라는 내 힘으로 지킬 뿐이다."
"동감!"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했다는 듯, 곧바로 데므루가스트가 동의했다.
"분명, 그 말대로다. 부질없는 소리를 했군."
자신이 틀렸다는 걸 인정한 레이몬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되었던 회의가 주전론으로 흘러가는 듯해 마리시아는 안도했다. 하지만, 바로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그럼 싸우는 걸로 하고, 누가 요격군의 지휘를 맡을 거지"
제안한 것은 여장군 메르디스였다. 누구에게 요격군의 지휘를 맡겨야 그 사브리나 여왕 비슈누에게 대항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도 저번보다 더 적은 병력으로.
"……"
그때 마리시아는 한 인물을 떠올렸지만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마리시아뿐만 아니라, 이 장소에 있는 전원이 같은 인물을 떠올리고 있다는 것은 그 무거운 침묵이 증명하고 있었다.
"저에게 궁여지책 하나가 있습니다.
궁정마술사 라미제르가 입을 열었다. 사리에라르 전투에서 무참하게 똥까지 지려버린 그녀였지만, 현재는 그런 흔적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신비하고 초연한 여자를 연기하고 있다.
마리시아는 매달리는 듯한 시선을 연상의 친구에게 보냈다.
"전 아드리안 영주 세륜을 등용해야 합니다.
"찬성"
즉각 소리를 높인 것은 여장군 메르디스뿐이다.
마리시아는 허를 찔린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이전에 마리시아가 세륜을 등용하자고 했을 때, 극명한 혐오를 드러내며 반대했던 라미제르가, 설마 그의 등용을 말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국가존망의 위기가 되니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 것일까.
세륜은 어찌 보면 올시니 왕국에서는 전설적인 군사이다. 하지만, 그의 이름을 들은 데므루가스트는 침음성을 흘렸고, 레이몬은 어깨를 움츠렸고, 다르게니스는 혀를 찼다. 그들의 인내력으로도 이것은 작지 않은 시련이었다. 형의 평판이 신경쓰이는 클라우스는 사람들의 얼굴색을 살폈고, 마리시아는 복잡한 표정으로 생각에 빠졌다.
"반대하오. 그런 남자에게 국가의 운명을 거는 것은 제정신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오."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고 반대를 표명한 것은 재상 보네트였다.
회의에서 철저 항전이 대세로 흘러가는 것은 수용했지만, 그 세륜의 등용안에는 단번에 이의를 제기했다.
보넷트가 세륜을 싫어하는 데는 공서양속의 적이라는 공적인 이유 외에, 숨겨진 사적인 원한도 있었다.
불행히도 남편이 병사해 젊은 나이에 미망인이 되어 돌아온 그의 장녀가 세륜과 친밀한 사이였다. 그것만으로도 용서할 수 없는데, 귀여운 손녀의 처녀까지 빼앗겼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첫 손녀를 중고로 만든 것이다. 마음 같아선 능지처참을 한 후 시체는 불에 태워, 그 재를 새의 먹이로 주고 싶을 정도였다.
그리고 더욱 증오스러운 것은, 둘 다 세륜에게 수많은 여자 중 하나로 취급되는 것에도 상관하지 않고, 아직까지 그 남자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말이지 멍청한 딸과 손녀라고 생각하지만, 여자의 마음만은 아무리 가장이라고 해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기에 더욱 화났다.
결국 세륜의 등용에 찬성한 것은 라미제르, 메르디스, 클라우스 세 명, 반대는 보넷트 한 명, 레이몬 데므루가스트, 다르게니스 세 명은 기권을 해서, 마리시아는 예를 다해 세륜을 초빙해, 올시니 군의 실전총사령관이 되어달라고 청원하게 되었다. 하지만 마리시아의 부탁을, 세륜은 순순히 들어주지 않았다.
"저는 애송이에 불과하고, 올시니 왕국에는 역전의 장수들도 많은 데, 이제 와서 세상을 버린 신하를 등용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일단은 이미 세상에 나올 생각은 없다며 제의를 거절한 세륜이었지만, 그에게도 정에 대한 얽매임은 있었다. 동생인 클라우스가 가문의 이름을 생각해 달라며 눈물로 애원하고, 절친한 여장군 메르디스가 침대 위에서 귓가에 속삭이고, 시녀장 리사이아에게는 엉덩이를 맞고는, 일단은 비공식적으로 왕도 에레오노라로 올라와 마리시아와 비밀리에 대면하게 되었다.
마리시아와 만나기 위해 시녀의 안내를 따라가고 있는 세륜은 다소 침울했다. 그를 설득한 이들은 마리시아의 제시한 조건이 맘에 들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거절하면된다고 그를 달랬지만, 여왕의 부탁은 명령과 동의어다. 제안을 거절하면, 그 자리에서 목이 잘려도 할 말이 없다.
아름다운 정원이 내다 뵈는 산뜻한 회랑을 따라 걸으며 생각에 잠겨 있던 세륜은 안내를 하던 시녀가 예를 표하고 물러난 후에야 주의를 환기했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에 아마도 마리시아의 사적인 생활 장소인 듯한 청초한 별궁이 보였다. 그리고 그 입구에는 우아한 미모의 젊은 여성이 기다리고 있었다. 여왕인 마리시아가 일부러 바깥까지 마중을 나온 것이다.
"존안을 뵈니, 삼가 기뻐 마지않습니다."
세륜은 한쪽 무릎을 굽히고 인사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죠."
마리시아는 정중한 태도에서 나타나는 자신에 대한 냉엄한 거절을 느끼곤 서운하게 생각하면서도 세륜을 서둘러 안으로 들였다.
마리시아의 얼굴에는 역력하게 초조한 빛이 떠올라 있었지만, 천성적인 기품에 지탱되는 아름다움은 여전했다. 쓰러져가는 국가를 양 어깨로 떠받치려 하면서, 무력한 자신에게 절망하고 있는 것이다. 그 애처로움은 남성의 보호본능을 자극했다.
마리시아가 이끌고 간 곳은 햇볕이 좋은 고풍스럽고, 편안해 보이는 살롱이었다. 방안의 가구나 장식품들은 가격을 매길 수 없는 최고급품들이었다. 마리시아 본인은 사치를 할 생각은 없었다. 단지 태어났을 때부터 이렇게 생활해 온 것이다.
확실히, 마리시아가 최대한의 대우를 하려 하고 있는 것은 명확하다. 마리시아는 세륜을 소파에 앉게 하고, 손수 홍차를 타서 건넸다. 세륜이 유연한 태도로 홍차를 마시는 모습을, 마리시아는 긴장한 얼굴로 지켜보며 긴장으로 침을 삼키면서 용건을 꺼냈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다시 한번 부탁드리겠습니다. 세륜, 당신에게 올시니군의 지휘를 맡기고 싶습니다."
마리시아의 탄원을 세륜은 무표정하게 들어넘겼다.
차가운 거절이지만, 마리시아는 물러나지 않았다. 여왕이 직접 청을 해서 거절당하면 여왕의 권위에 상처를 입는다. 는 것도 있지만, 너무나 무례한 태도에 마리시아도 발끈한 것이다.
"세륜, 당신도 올시니의 녹을 먹고 있는 몸이 아닙니까"
마리시아는 눈을 치켜뜨고 추궁했다.
세륜은 은거한 몸이지만, 은거비는 아드리안 성주 클라우스에게서 나오고 있다. 클라우스는 올시니 왕국의 신하니까, 마리시아의 말도 틀린 건 아니다.
그렇게까지 말하자 세륜은 겨우 입을 열었다.
"제가 지휘를 한다고 이긴다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아뇨, 반드시 이겨주지 않으면 곤란하지만, 멸망하더라도 최선을 다하고 싶습니다. 만약 세륜이 진다면 저는 항복을 각오하고 있습니다. 전에, 제가 그 정도 일에 화를 내지 않고, 세륜을 등용했다면, 오늘처럼 곤란한 결과에는 이르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면, 장이 끊어지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한도가 있지, 강간은 그 정도의 일이라고 말할 만한 게 아니다. 게다가 처녀를 빼앗기고 화를 내지 않는 여자가 있을 리가 없다. 마리시아의 분노는 정당했고, 나쁜 건 세륜이다.
"사리에라르 평원에 제가 있었다면 이겼을 거란 건 과대평가입니다. 그 전투에서 사브리나군의 기동력은 신의 경지였습니다. 섣불리 예측할 수 없습니다."
마리시아의 울음을 터트릴 듯한 표정을 바라보며, 세륜은 한숨을 쉬었다.
"여왕폐하가 계신 에레오노라에 조차, 레이몬경을 왕으로 세우자는 소리가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시겠죠. 국민은 직접 검을 들고, 군을 통솔해 나를 지킬 군주를 원하고 있습니다. 지금 올시니 주변의 국가들의 군주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전장에 나오고 있습니다. 도모스의 로렌드도 그렇고, 엑스터의 하우발도 그렇고, 사브리나의 비슈누도 그렇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 병사들과 함께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여왕폐하는 화살도 마법도 날아오지 않는 안전한 왕궁에 계시면서, 싸움은 신하에게 맡기고 있다. 이래서는, 병사나 국민이 우러러볼 리가 없습니다."
세륜의 말투는 담담했지만, 마리사아에게 전해진 충격은 적지 않았다.
"……분명, 분명히 그 말씀대로인지도 모릅니다. 저는 무기도 마법도 못 쓰는 쓸모없는 여자입니다. 지금까지 전장에 나가야 한다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저도 전장에 나가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전투의 전자도 모릅니다. 저를 보좌해줄 인물이 너무나도 필요합니다. 그것을 세륜, 당신에게 부탁하면 안 되는 겁니까"
마리시아의 정열을 대하는 세륜의 반응은 냉담했다.
"저는 이름보다 목숨이 소중합니다. 망해가는 나라에 충의를 바쳐, 후세에 열사로 이름을 남기고, 연민을 받고픈 생각은 없습니다. 살아있을 때 영달을 바라는 것입니다. 맛있는 요리를 먹고, 좋은 술을 마시고, 아름다운 여자와 사귀고, 재밌는 책을 보고,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관찰하고 싶습니다."
"……"
마리시아는 당혹으로 할 말을 잃었다. 그녀에게 있어 왕족으로서의 신분이 전부였기에, 개인적인 행복을 추구하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던 것이다.
"여왕폐하에게는 맘에 들지 않으시겠지요. 하지만 망해가는 나라를 따라 죽겠다는 자는, 거의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칭송받는 겁니다. 대다수의 사람은 저와 같은 사상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바람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은 국가에 사람들은 모이고, 사람이 모이는 국가야말로 강국인 것입니다."
빈잔을 테이블 위에 놓으며, 세륜은 태연하게 계속했다. 마리시아는 한마디도 부정하지 못하고, 온몸이 귀가 되어 듣고 있었다.
"군주가 군주답지 못해도, 신하는 신하다워야 한다. 같은 잠꼬대는 믿을 수 없는 말입니다. 난세가 되면 사람들은 유능한 주군을 찾아 방랑합니다. 저 하나 설득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나라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얼른 사브리나 여왕에게 항복해, 그 자비를 비는 게 어떠십니까"
"저는 올시니 왕국을 지키고 싶습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각오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에 세륜만큼 뛰어난 군략가는 없습니다. 당신의 협력을 얻는 것이 올시니가 살아남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과분한 평가이십니다. 어떻게 이 방자한 놈을 설득시키실 생각입니까?"
마리시아는 잠시 눈을 감고 깊게 심호흡을 해서 결심을 다지고 입을 열었다.
"저를 안아주세요. 올시니왕국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저의 정조를 드리겠습니다."
마리시아가 세륜을 설득하기 위해 준비한 비장의 수단이 이것이었던 모양이다.
세륜은 가볍게 놀라 눈을 크게 떴다가, 이어서 비웃는 듯한 쓴웃음을 띠고, 관심없다는 듯 대꾸했다.
"아쉽게도 저는 여자가 부족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한번 안아서 처녀를 빼앗은 여성에게는 아무런 흥미도 없습니다."
"……"
마리시아는 말을 잃었다. 그녀로서는 천길 벼랑 끝에 뛰어내리는 각오로 제시한 조건을, 아무렇지도 않게 짓밟힌 것이다.
"왜 그러십니까. 벌써 포기하신 겁니까. 당신은 자신의 여자의 매력으로 저를 움직이기려 하시는 거죠. 그럼 좀 더 노력을 해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멍하게 있던 마리시아에게 세륜은 유쾌한 듯 재촉했다.
"저에게 뭘 하라고 하시는 겁니까?"
"옷을 벗으세요."
마리시아는 순간적으로 눈썹을 찡그렸지만, 표정을 지우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벗기 시작했다.
"호오……"
마리시아의 속옷차림을 보고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던 세륜이 무심결에 몸을 내밀고 탄성을 토했다.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마리시아도 어느 정도는 예측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세련된 베이지색의 부드러운 실크로 된 캐미솔을 입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레이스가 잔뜩 달려있고, 가슴이 절반쯤 보일 정도로 깊이 패인데다, 잘록한 허리를 강조하듯 착 달라붙고, 매끈한 허벅지가 발원되는 비밀스러운 부분까지 보일 듯 짧다. 당장에라도 위에는 가슴이, 아래에선 팬티가 엿보일 듯하면서도 보이지 않는다. 아슬아슬한 노출이었다.
아마도 마리시아의 연상친구, 궁정마술사 라미제르 정도가 낸 지혜이겠지만, 지극히 남자의 가슴을 흔드는 고혹적인 미태(媚態)였다.
이러한 색정적인 속옷은, 어떤 여자가 입더라도 남자를 뇌살시킬 정도인데, 더구나 절세의 미녀가 입고 있는 모습은 세륜에게도 상당히 놀라웠다.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희생이라도 치를 생각이다. 나라의 미래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일개인인 마리시아의 자존심을 지키는 것 따위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나라를 다스리는 위치에 있는 이상, 나라의 이익을 우선하고, 자신은 어떤 수치라도 견뎌내기로 결론을 내린 것이 틀림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자랑스럽게 당당할 수 있는 것이다.
(과연, 여왕으로서의 대의명분. 상당히 멋진 자기 피난처를 발견했군요. 혐오하는 남자에게 안기더라도, 자신은 비장한 사명감에 도취하여 있으면 되니)
상대는 어떤 무리한 요구에도 응할 각오가 되어 있다, 이럴 때는 무리한 요구를 해주는 것이 예의일 것이다.
"부탁합니다, 커튼을 닫아주세요."
캐미솔을 벗기 위해, 떨리는 손으로 어깨끈을 잡은 순간, 각오하고 있었음에도, 너무나 부끄러워서 사지가 떨려 서있을 수 없게 된 마리시아가 몸을 웅크리고 탄원했다. 하지만 세륜은 그것을 무시하고, 내심의 동요를 숨긴 채 냉정하게 새로운 요구를 했다.
"음, 그대로 자위를 시작해 주세요."
"에……"
"왜 그러십니까. 그날 이후 한 달, 자위를 하지 않았다고는 하지 않으시겠죠. 여자라는 생물은, 쾌락을 모를 때는 그런 거 없이도 생활을 할 수 있지만, 한번 깨달아버리면, 그게 없으면 살지 못하는 생물입니다."
세륜은 마리시아의 무너진 표정과 태도를 보고, 그녀가 자위 습관이 들었다는 것을 간파했다.
세륜에게 강제로 범해지며 여자로서의 기쁨을 배우게 되기 전까지, 마리시아는 순진무구한 처녀였다. 성욕 같은 것도 없었고, 자위 같은 걸 해본 적도 없었으며, 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물론 남자를 원한 적도 없었다. 하지만 그 날 이후, 마리시아의 몸은 변해버렸다.
세륜의 지나친 처사를 당하고 밤이면 밤마다 베게를 적시던 마리시아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다른 감정이 솟아났다.
바로, 세륜의 굵은 자지에 다시 꿰뚫리고 싶다는 소망이었다.
그녀의 여체가 애욕에 눈을 뜬 것이다.
밤이면 밤마다 쑤셔오는 몸을 위로하며 수치로 가슴을 두근거리면서도, 세륜의 애무를 생각하면서 유방과 비지(秘地)에 손가락을 가져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보여주세요."
"에! 그, 그런, 그런 건 절대 할 수 없어요."
"뭐든지 하라는대로 한다고 하신댔죠. 평소에 하시던 여왕폐하의 자위를 보여주세요."
마리시아와 세륜의 시선이 교차했지만 결국엔 마리시아가 먼저 고개를 숙였다. 하얀장미처럼 아리따운 피부를, 불그레하게 상기시킨 마리시아는, 왼손으로 캐미솔 위에서 유방을 잡고, 천천히 주무르면서 또 다른 한손을 캐미솔 틈으로 넣어 팬티 너머로 비순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세륜은 마리시아의 양 허벅지를 붙잡고 강하게 좌우로 벌렸다. 캐미솔과 같은 재질의 팬티가 훤히 드러났다.
"아, 아아……너무해"
뒤집힌 개구리같은 무참한 자세로 강제로 자위를 하는 마리시아의 아름다운 눈가에 눈물이 반짝였다.
세륜과 단 둘이서 만나게 될거라는 걸 안 순간, 싫어도 다시 안길거라고, 또 그 날의 감미로운 여자의 기쁨을 맛보게 될 거라고 은밀하게 기대했었다. 그랬는데 이렇게 굴욕적인 짓을 강요당할 줄이야.
하지만 마리시아의 육체는 이성을 배반했다. 치욕으로 입술을 깨물면 깨물수록, 쾌감이 높아져, 입가에서 뜨거운 탄식이 새어나오고 애액이 멈추지 않고 넘쳐, 베이지색 팬티를 적셔 얼룩지게 했다.
이 여왕님은, 마조구나. 라고 세륜에게 확신시키기에 충분한 광경이다.
상기된 얼굴로 수음에 빠진 마리시아의 왼쪽 어깨끈이 언제부턴가 스르륵 흘러내려, 캐미솔 한쪽이 벗겨져, 볼록 예쁜 모양의 유방이 굴러 나왔다.
너무나 요염한 치태다.
"거기까지"
"에……?"
"누가 저에게 계책을 말해보세요."
파견부대의 괴멸 보고를 들은 올시니 왕국의 여왕 마리시아는, 즉시 중신회의를 열어, 아름다운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채, 늘어선 중신들을 재촉했다.
올시니 군 이만오천 대 사브리나 군 일만구천의 싸움이었다. 질 리가 없는 싸움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대패로 끝나, 총대장 게펜, 거기다 유력한 무장 챤드라, 그리고 만여 병사를 잃었다.
사브리나군은 일단 군사를 물렸지만, 가까운 장래, 대공세로 나설 것임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것은 전쟁의 초보인 마리시아에게도 예상할 수 있을 만큼, 누구도 부정하지 못했다.
그리고, 다음 전투에서 또다시 대패한다면, 올시니왕국은 멸망해, 사브리나왕국에 병합돼버릴 것이다.
마리시아는 중신들을 둘러보았다. 위엄있는 무표정 뒤에 감춰져 있는 그들 각각의 생각을 읽어내기에는 마리시아의 인생경험이 짧았다.
아버지에게서 이어받은 대대로 내려온 중신들이 앞에 있음에도, 마리시아는 고독했다.
무거운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입을 연 것은, 가장 연장자로서의 책임감을 느낀 재상 보넷트였다.
올시니왕국의 재상 보넷트는 올해 육십세. 명문귀족 출신으로 무장으로서와 외교관으로서 그리고 행정관으로서의 경험도 있어서, 세사에 밝고, 기지도 있는 인물이라는 평판을 듣고 있는, 누가 뭐라 할 수 없는 국가의 중추였다.
마리시아 같은 물정 모르는 계집애가 난세의 군주를 큰 문제없이 맡고 있는 것도 그의 수완이라고, 많은 이들이 믿고 있다.
그런 노련한 정치가인 그도, 반세기 동안 사귄 친구인 게펜을 잃은 것은 쇼크일 것이다. 순식간에 열 살을 더 먹어버린 듯 늙어보인다.
"황송한 말씀이지만, 지금은 적극적으로 평화적인 방법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소극책에 마리시아는 아름다운 얼굴을 당혹으로 일그러트렸다. 자신이 여왕에 즉위한 지 몇 개월도 지나지 않았는데, 올시니 왕국은 타국의 종속국이 돼야하는 것인가.
그에 대한 격렬한 반대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보넷트. 헛소리하지 마시오."
소리가 들린 쪽으로 마리시아가 시선을 돌리자, 데므루가스트가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올시니군에서 가장 뛰어난 무사인 그는, 가열찬 안광으로 모인 이들을 꿰뚫어 보며 열변을 토했다.
"조부 전래의 땅을 빤히 눈을 뜨고서 그냥 넘겨준다면, 우리는 역사대대로 비웃음을 받을 것이오. 다행히, 우리에게는 지오르 고개라는 철벽의 험지가 있소. 그곳을 사수하면 되오."
"하지만, 먼저 대군을 이끌고 출병한 귀공은, 패배하여 돌아오지 않았소이까. 모든 것을 잃는 것보다도, 일부를 내주고 멈추는 것이, 현명한 일이지요."
데므루가스트와 보네트가 서로 노려보았다. 그런 둘 사이로 끼어든 것은 연녹색 머리카락의 레이몬이었다.
"이 기회에 메리샨트왕국과 동맹을 맺고 사브리나에 대항하는 게 어떻습니까"
"그게 가능할까요?"
그 제안에 마리시아가 흥미를 보였다.
"조건만 맞으면 가능 할 겁니다."
"……돈, 입니까"
"그리고 영토의 일부할양. 그렇게 하면 만약의 경우에라도 여왕폐하는 메리샨트로 피신하실 수도 있습니다. 지금은 어떻게든 메리샨트를 아군으로 끌어들여 사브리나에 대항해야 합니다."
"행랑을 빌려줬다 안채까지 빼앗긴다, 는 속담도 있다."
오른쪽 뺨에서 턱까지 난 도흔을 만지작거리면서, 던지듯 말을 꺼낸 것은 다르게니스였다.
"게다가 타국을 지키기 위해 열심히 싸울 병사가 있을 리 없다. 사태를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 뿐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다르게니스는 양손으로 쾅하고 책상을 쳤다.
"내 나라는 내 힘으로 지킬 뿐이다."
"동감!"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했다는 듯, 곧바로 데므루가스트가 동의했다.
"분명, 그 말대로다. 부질없는 소리를 했군."
자신이 틀렸다는 걸 인정한 레이몬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되었던 회의가 주전론으로 흘러가는 듯해 마리시아는 안도했다. 하지만, 바로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그럼 싸우는 걸로 하고, 누가 요격군의 지휘를 맡을 거지"
제안한 것은 여장군 메르디스였다. 누구에게 요격군의 지휘를 맡겨야 그 사브리나 여왕 비슈누에게 대항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도 저번보다 더 적은 병력으로.
"……"
그때 마리시아는 한 인물을 떠올렸지만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마리시아뿐만 아니라, 이 장소에 있는 전원이 같은 인물을 떠올리고 있다는 것은 그 무거운 침묵이 증명하고 있었다.
"저에게 궁여지책 하나가 있습니다.
궁정마술사 라미제르가 입을 열었다. 사리에라르 전투에서 무참하게 똥까지 지려버린 그녀였지만, 현재는 그런 흔적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신비하고 초연한 여자를 연기하고 있다.
마리시아는 매달리는 듯한 시선을 연상의 친구에게 보냈다.
"전 아드리안 영주 세륜을 등용해야 합니다.
"찬성"
즉각 소리를 높인 것은 여장군 메르디스뿐이다.
마리시아는 허를 찔린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이전에 마리시아가 세륜을 등용하자고 했을 때, 극명한 혐오를 드러내며 반대했던 라미제르가, 설마 그의 등용을 말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국가존망의 위기가 되니 찬밥 더운밥 가릴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 것일까.
세륜은 어찌 보면 올시니 왕국에서는 전설적인 군사이다. 하지만, 그의 이름을 들은 데므루가스트는 침음성을 흘렸고, 레이몬은 어깨를 움츠렸고, 다르게니스는 혀를 찼다. 그들의 인내력으로도 이것은 작지 않은 시련이었다. 형의 평판이 신경쓰이는 클라우스는 사람들의 얼굴색을 살폈고, 마리시아는 복잡한 표정으로 생각에 빠졌다.
"반대하오. 그런 남자에게 국가의 운명을 거는 것은 제정신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오."
얼굴을 새빨갛게 붉히고 반대를 표명한 것은 재상 보네트였다.
회의에서 철저 항전이 대세로 흘러가는 것은 수용했지만, 그 세륜의 등용안에는 단번에 이의를 제기했다.
보넷트가 세륜을 싫어하는 데는 공서양속의 적이라는 공적인 이유 외에, 숨겨진 사적인 원한도 있었다.
불행히도 남편이 병사해 젊은 나이에 미망인이 되어 돌아온 그의 장녀가 세륜과 친밀한 사이였다. 그것만으로도 용서할 수 없는데, 귀여운 손녀의 처녀까지 빼앗겼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첫 손녀를 중고로 만든 것이다. 마음 같아선 능지처참을 한 후 시체는 불에 태워, 그 재를 새의 먹이로 주고 싶을 정도였다.
그리고 더욱 증오스러운 것은, 둘 다 세륜에게 수많은 여자 중 하나로 취급되는 것에도 상관하지 않고, 아직까지 그 남자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말이지 멍청한 딸과 손녀라고 생각하지만, 여자의 마음만은 아무리 가장이라고 해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기에 더욱 화났다.
결국 세륜의 등용에 찬성한 것은 라미제르, 메르디스, 클라우스 세 명, 반대는 보넷트 한 명, 레이몬 데므루가스트, 다르게니스 세 명은 기권을 해서, 마리시아는 예를 다해 세륜을 초빙해, 올시니 군의 실전총사령관이 되어달라고 청원하게 되었다. 하지만 마리시아의 부탁을, 세륜은 순순히 들어주지 않았다.
"저는 애송이에 불과하고, 올시니 왕국에는 역전의 장수들도 많은 데, 이제 와서 세상을 버린 신하를 등용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일단은 이미 세상에 나올 생각은 없다며 제의를 거절한 세륜이었지만, 그에게도 정에 대한 얽매임은 있었다. 동생인 클라우스가 가문의 이름을 생각해 달라며 눈물로 애원하고, 절친한 여장군 메르디스가 침대 위에서 귓가에 속삭이고, 시녀장 리사이아에게는 엉덩이를 맞고는, 일단은 비공식적으로 왕도 에레오노라로 올라와 마리시아와 비밀리에 대면하게 되었다.
마리시아와 만나기 위해 시녀의 안내를 따라가고 있는 세륜은 다소 침울했다. 그를 설득한 이들은 마리시아의 제시한 조건이 맘에 들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거절하면된다고 그를 달랬지만, 여왕의 부탁은 명령과 동의어다. 제안을 거절하면, 그 자리에서 목이 잘려도 할 말이 없다.
아름다운 정원이 내다 뵈는 산뜻한 회랑을 따라 걸으며 생각에 잠겨 있던 세륜은 안내를 하던 시녀가 예를 표하고 물러난 후에야 주의를 환기했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에 아마도 마리시아의 사적인 생활 장소인 듯한 청초한 별궁이 보였다. 그리고 그 입구에는 우아한 미모의 젊은 여성이 기다리고 있었다. 여왕인 마리시아가 일부러 바깥까지 마중을 나온 것이다.
"존안을 뵈니, 삼가 기뻐 마지않습니다."
세륜은 한쪽 무릎을 굽히고 인사했다.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죠."
마리시아는 정중한 태도에서 나타나는 자신에 대한 냉엄한 거절을 느끼곤 서운하게 생각하면서도 세륜을 서둘러 안으로 들였다.
마리시아의 얼굴에는 역력하게 초조한 빛이 떠올라 있었지만, 천성적인 기품에 지탱되는 아름다움은 여전했다. 쓰러져가는 국가를 양 어깨로 떠받치려 하면서, 무력한 자신에게 절망하고 있는 것이다. 그 애처로움은 남성의 보호본능을 자극했다.
마리시아가 이끌고 간 곳은 햇볕이 좋은 고풍스럽고, 편안해 보이는 살롱이었다. 방안의 가구나 장식품들은 가격을 매길 수 없는 최고급품들이었다. 마리시아 본인은 사치를 할 생각은 없었다. 단지 태어났을 때부터 이렇게 생활해 온 것이다.
확실히, 마리시아가 최대한의 대우를 하려 하고 있는 것은 명확하다. 마리시아는 세륜을 소파에 앉게 하고, 손수 홍차를 타서 건넸다. 세륜이 유연한 태도로 홍차를 마시는 모습을, 마리시아는 긴장한 얼굴로 지켜보며 긴장으로 침을 삼키면서 용건을 꺼냈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다시 한번 부탁드리겠습니다. 세륜, 당신에게 올시니군의 지휘를 맡기고 싶습니다."
마리시아의 탄원을 세륜은 무표정하게 들어넘겼다.
차가운 거절이지만, 마리시아는 물러나지 않았다. 여왕이 직접 청을 해서 거절당하면 여왕의 권위에 상처를 입는다. 는 것도 있지만, 너무나 무례한 태도에 마리시아도 발끈한 것이다.
"세륜, 당신도 올시니의 녹을 먹고 있는 몸이 아닙니까"
마리시아는 눈을 치켜뜨고 추궁했다.
세륜은 은거한 몸이지만, 은거비는 아드리안 성주 클라우스에게서 나오고 있다. 클라우스는 올시니 왕국의 신하니까, 마리시아의 말도 틀린 건 아니다.
그렇게까지 말하자 세륜은 겨우 입을 열었다.
"제가 지휘를 한다고 이긴다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래도 상관없습니다. 아뇨, 반드시 이겨주지 않으면 곤란하지만, 멸망하더라도 최선을 다하고 싶습니다. 만약 세륜이 진다면 저는 항복을 각오하고 있습니다. 전에, 제가 그 정도 일에 화를 내지 않고, 세륜을 등용했다면, 오늘처럼 곤란한 결과에는 이르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면, 장이 끊어지는 것 같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한도가 있지, 강간은 그 정도의 일이라고 말할 만한 게 아니다. 게다가 처녀를 빼앗기고 화를 내지 않는 여자가 있을 리가 없다. 마리시아의 분노는 정당했고, 나쁜 건 세륜이다.
"사리에라르 평원에 제가 있었다면 이겼을 거란 건 과대평가입니다. 그 전투에서 사브리나군의 기동력은 신의 경지였습니다. 섣불리 예측할 수 없습니다."
마리시아의 울음을 터트릴 듯한 표정을 바라보며, 세륜은 한숨을 쉬었다.
"여왕폐하가 계신 에레오노라에 조차, 레이몬경을 왕으로 세우자는 소리가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시겠죠. 국민은 직접 검을 들고, 군을 통솔해 나를 지킬 군주를 원하고 있습니다. 지금 올시니 주변의 국가들의 군주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전장에 나오고 있습니다. 도모스의 로렌드도 그렇고, 엑스터의 하우발도 그렇고, 사브리나의 비슈누도 그렇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 병사들과 함께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여왕폐하는 화살도 마법도 날아오지 않는 안전한 왕궁에 계시면서, 싸움은 신하에게 맡기고 있다. 이래서는, 병사나 국민이 우러러볼 리가 없습니다."
세륜의 말투는 담담했지만, 마리사아에게 전해진 충격은 적지 않았다.
"……분명, 분명히 그 말씀대로인지도 모릅니다. 저는 무기도 마법도 못 쓰는 쓸모없는 여자입니다. 지금까지 전장에 나가야 한다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저도 전장에 나가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전투의 전자도 모릅니다. 저를 보좌해줄 인물이 너무나도 필요합니다. 그것을 세륜, 당신에게 부탁하면 안 되는 겁니까"
마리시아의 정열을 대하는 세륜의 반응은 냉담했다.
"저는 이름보다 목숨이 소중합니다. 망해가는 나라에 충의를 바쳐, 후세에 열사로 이름을 남기고, 연민을 받고픈 생각은 없습니다. 살아있을 때 영달을 바라는 것입니다. 맛있는 요리를 먹고, 좋은 술을 마시고, 아름다운 여자와 사귀고, 재밌는 책을 보고,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관찰하고 싶습니다."
"……"
마리시아는 당혹으로 할 말을 잃었다. 그녀에게 있어 왕족으로서의 신분이 전부였기에, 개인적인 행복을 추구하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던 것이다.
"여왕폐하에게는 맘에 들지 않으시겠지요. 하지만 망해가는 나라를 따라 죽겠다는 자는, 거의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칭송받는 겁니다. 대다수의 사람은 저와 같은 사상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바람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은 국가에 사람들은 모이고, 사람이 모이는 국가야말로 강국인 것입니다."
빈잔을 테이블 위에 놓으며, 세륜은 태연하게 계속했다. 마리시아는 한마디도 부정하지 못하고, 온몸이 귀가 되어 듣고 있었다.
"군주가 군주답지 못해도, 신하는 신하다워야 한다. 같은 잠꼬대는 믿을 수 없는 말입니다. 난세가 되면 사람들은 유능한 주군을 찾아 방랑합니다. 저 하나 설득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나라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얼른 사브리나 여왕에게 항복해, 그 자비를 비는 게 어떠십니까"
"저는 올시니 왕국을 지키고 싶습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각오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에 세륜만큼 뛰어난 군략가는 없습니다. 당신의 협력을 얻는 것이 올시니가 살아남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과분한 평가이십니다. 어떻게 이 방자한 놈을 설득시키실 생각입니까?"
마리시아는 잠시 눈을 감고 깊게 심호흡을 해서 결심을 다지고 입을 열었다.
"저를 안아주세요. 올시니왕국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저의 정조를 드리겠습니다."
마리시아가 세륜을 설득하기 위해 준비한 비장의 수단이 이것이었던 모양이다.
세륜은 가볍게 놀라 눈을 크게 떴다가, 이어서 비웃는 듯한 쓴웃음을 띠고, 관심없다는 듯 대꾸했다.
"아쉽게도 저는 여자가 부족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한번 안아서 처녀를 빼앗은 여성에게는 아무런 흥미도 없습니다."
"……"
마리시아는 말을 잃었다. 그녀로서는 천길 벼랑 끝에 뛰어내리는 각오로 제시한 조건을, 아무렇지도 않게 짓밟힌 것이다.
"왜 그러십니까. 벌써 포기하신 겁니까. 당신은 자신의 여자의 매력으로 저를 움직이기려 하시는 거죠. 그럼 좀 더 노력을 해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멍하게 있던 마리시아에게 세륜은 유쾌한 듯 재촉했다.
"저에게 뭘 하라고 하시는 겁니까?"
"옷을 벗으세요."
마리시아는 순간적으로 눈썹을 찡그렸지만, 표정을 지우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벗기 시작했다.
"호오……"
마리시아의 속옷차림을 보고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던 세륜이 무심결에 몸을 내밀고 탄성을 토했다.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마리시아도 어느 정도는 예측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세련된 베이지색의 부드러운 실크로 된 캐미솔을 입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레이스가 잔뜩 달려있고, 가슴이 절반쯤 보일 정도로 깊이 패인데다, 잘록한 허리를 강조하듯 착 달라붙고, 매끈한 허벅지가 발원되는 비밀스러운 부분까지 보일 듯 짧다. 당장에라도 위에는 가슴이, 아래에선 팬티가 엿보일 듯하면서도 보이지 않는다. 아슬아슬한 노출이었다.
아마도 마리시아의 연상친구, 궁정마술사 라미제르 정도가 낸 지혜이겠지만, 지극히 남자의 가슴을 흔드는 고혹적인 미태(媚態)였다.
이러한 색정적인 속옷은, 어떤 여자가 입더라도 남자를 뇌살시킬 정도인데, 더구나 절세의 미녀가 입고 있는 모습은 세륜에게도 상당히 놀라웠다.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희생이라도 치를 생각이다. 나라의 미래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일개인인 마리시아의 자존심을 지키는 것 따위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나라를 다스리는 위치에 있는 이상, 나라의 이익을 우선하고, 자신은 어떤 수치라도 견뎌내기로 결론을 내린 것이 틀림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자랑스럽게 당당할 수 있는 것이다.
(과연, 여왕으로서의 대의명분. 상당히 멋진 자기 피난처를 발견했군요. 혐오하는 남자에게 안기더라도, 자신은 비장한 사명감에 도취하여 있으면 되니)
상대는 어떤 무리한 요구에도 응할 각오가 되어 있다, 이럴 때는 무리한 요구를 해주는 것이 예의일 것이다.
"부탁합니다, 커튼을 닫아주세요."
캐미솔을 벗기 위해, 떨리는 손으로 어깨끈을 잡은 순간, 각오하고 있었음에도, 너무나 부끄러워서 사지가 떨려 서있을 수 없게 된 마리시아가 몸을 웅크리고 탄원했다. 하지만 세륜은 그것을 무시하고, 내심의 동요를 숨긴 채 냉정하게 새로운 요구를 했다.
"음, 그대로 자위를 시작해 주세요."
"에……"
"왜 그러십니까. 그날 이후 한 달, 자위를 하지 않았다고는 하지 않으시겠죠. 여자라는 생물은, 쾌락을 모를 때는 그런 거 없이도 생활을 할 수 있지만, 한번 깨달아버리면, 그게 없으면 살지 못하는 생물입니다."
세륜은 마리시아의 무너진 표정과 태도를 보고, 그녀가 자위 습관이 들었다는 것을 간파했다.
세륜에게 강제로 범해지며 여자로서의 기쁨을 배우게 되기 전까지, 마리시아는 순진무구한 처녀였다. 성욕 같은 것도 없었고, 자위 같은 걸 해본 적도 없었으며, 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물론 남자를 원한 적도 없었다. 하지만 그 날 이후, 마리시아의 몸은 변해버렸다.
세륜의 지나친 처사를 당하고 밤이면 밤마다 베게를 적시던 마리시아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다른 감정이 솟아났다.
바로, 세륜의 굵은 자지에 다시 꿰뚫리고 싶다는 소망이었다.
그녀의 여체가 애욕에 눈을 뜬 것이다.
밤이면 밤마다 쑤셔오는 몸을 위로하며 수치로 가슴을 두근거리면서도, 세륜의 애무를 생각하면서 유방과 비지(秘地)에 손가락을 가져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 보여주세요."
"에! 그, 그런, 그런 건 절대 할 수 없어요."
"뭐든지 하라는대로 한다고 하신댔죠. 평소에 하시던 여왕폐하의 자위를 보여주세요."
마리시아와 세륜의 시선이 교차했지만 결국엔 마리시아가 먼저 고개를 숙였다. 하얀장미처럼 아리따운 피부를, 불그레하게 상기시킨 마리시아는, 왼손으로 캐미솔 위에서 유방을 잡고, 천천히 주무르면서 또 다른 한손을 캐미솔 틈으로 넣어 팬티 너머로 비순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세륜은 마리시아의 양 허벅지를 붙잡고 강하게 좌우로 벌렸다. 캐미솔과 같은 재질의 팬티가 훤히 드러났다.
"아, 아아……너무해"
뒤집힌 개구리같은 무참한 자세로 강제로 자위를 하는 마리시아의 아름다운 눈가에 눈물이 반짝였다.
세륜과 단 둘이서 만나게 될거라는 걸 안 순간, 싫어도 다시 안길거라고, 또 그 날의 감미로운 여자의 기쁨을 맛보게 될 거라고 은밀하게 기대했었다. 그랬는데 이렇게 굴욕적인 짓을 강요당할 줄이야.
하지만 마리시아의 육체는 이성을 배반했다. 치욕으로 입술을 깨물면 깨물수록, 쾌감이 높아져, 입가에서 뜨거운 탄식이 새어나오고 애액이 멈추지 않고 넘쳐, 베이지색 팬티를 적셔 얼룩지게 했다.
이 여왕님은, 마조구나. 라고 세륜에게 확신시키기에 충분한 광경이다.
상기된 얼굴로 수음에 빠진 마리시아의 왼쪽 어깨끈이 언제부턴가 스르륵 흘러내려, 캐미솔 한쪽이 벗겨져, 볼록 예쁜 모양의 유방이 굴러 나왔다.
너무나 요염한 치태다.
"거기까지"
"에……?"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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