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의의 구속>
"...경계식?"
여왕과 닥터가, 가연과 선민이, 의아한듯한 표정을 표면에 띄우면서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설영이 강희에게 물었다.
"그게 뭐지? 경계식이라니?"
강희는, 여전히 이마에 송글송글 맺혀있을정도로 땀투성이였다. 지금 비록 육체적으로 시달리는건 아니었지만, 신체가 지칠대로 지쳐 있는것도 사실이었기에, 지금 그녀의 몸에 맺힌 땀방울들은 식은땀으로 인해 생겨난것이었다.
그때문인지, 창백해 보일정도의 안색이었지만, 강희는 입가에 피식 미소를 피워올렸다.
"훗....별거 아니에요. 아마도...제가 경계식을 발동하면....그건...여왕님한텐 좋은 일일수도 있고...안 좋은 일일수도 있겠네요...킥킥..."
설영은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뜻이지? 좋을수도...아닐수도 있다고?"
강희는 힘들게 고개를 두번 까닥이고는, 다시 말했다. 그녀의 입가에는 연신 자조적인 미소가 걸려있었다.
"그래요....어쨌건....여왕님이 원하시는대로는...될거에요.....나의 이성을 무너뜨리고 싶다고 그랬지요? 아하하...그건 확실히...이루어지겠군요...여왕님의 뜻대로말이죠.."
설영은 이제 긴장할대로 긴장하고, 속마음은 의문에 의문의 중첩, 꼬리에 꼬리를 무는 식이 되어가고 있었다.
"도대체....무슨....."
설영이 재차 질문을 하려는데 강희가 그녀의 말을 중도에 잘랐다. 강희는 헉헉대면서 조금씩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나정도의......나만큼의 힘을......이정도의 몸뚱아리로.....겨우 이만한 몸으로....수용하기가....통제하기가...쉬울거라 보세요?.....킥킥...."
꿀꺽
여왕과 닥터는 침을 삼키고, 가연과 선민은 계속 입술을 꽉 문채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네명 모두 강희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강희가 말을 이었다. 느리게...느리게....계속...계속...
"난....보통 사람과는.....차원이 달라......닉네임을 만들때.....나에게......이 나의 안에.....충분히...그런 닉네임으로 표현해도....문제될것이 없겠다는 심정으로....스스로를 비웃으면서 지은 닉네임이....티렉스에요....
힘....이런 무시무시한 힘이....내게 들이닥쳤던건...생기기 시작한건.....내나이....여섯살때의 일.....힘의 완성은.....중학교 1학년이 되던 때에...완성되었다고..추측하고 있죠...... 10년이 가까운 세월동안... 난 고통받았어요......"
강희는 눈을 감고 그때의 감정을 회상한다. 그때 당시의 기억은 두번 다시도 떠올리기 싫을만큼 끔찍한 기억.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스스로에게 너무 실망해 있었고,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깊게 침잠되어져 있어서, 그때의 암흑적인 분위기와 동화될수밖에 없었다.
(회상)
난 평범한 여자애였다. 아니, 평범하다고는 못하겠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이 세상에서 가장 좋으신 두 분을 부모님으로 두고 있으니까.
하늘에서 천사라도 내려온 걸까. 세상 어느 누가 자식을 사랑하지 않을까마는, 나를 낳으신 부모님께서는, 하나뿐인 딸이어서 그런지 정말이지 끔찍이도 나에게 잘 해주셨다.
내가 가지고 싶어하는 것, 먹고 싶은 것, 하고 싶어하는 것을, 모두 다 손에 쥐어주셨고 직접 떠먹여주셨으며 가능하게끔 해주셨다. 난 정말 행복했다. 행복한 여자애였다.
세상 그 어느것도 부러울것이 없을만큼. 그러던 어느 날....그 날이 들이닥쳤다.....
아버지가 아직 집에 귀가하시지 않았던 그 날, 어머니는 식사 준비를 하고 계셨다. 아버지만 집에 오시면 같이 저녁을 들면 되었던 날이다. 그 때까지는 순조로웠다. 아무 문제도 없었다.
"히잉~ 심심해...."
난 그런 식으로 투정을 부리면서 항상 아버지를 기다렸던 듯하다. 어릴때만 해도, 어머니보다는, 아버지와 같이 욕조에서 물장난을 치면서 노는게 더 재미있었다.
그 나이때는 마냥 아빠 아빠 하면서 졸졸 따라다니고, 당신께서 귀찮아 하실정도로 앵겨댔을 시절이니까. 아버지는 나를 씻길때 타월에 거품을 내서, 내 몸을 항상, 정성스레, 소중한 도자기를 만지듯 부드럽게 어루만져주셨다.
아버지는 날 씻기면서 나의 겨드랑이에 간지럼을 태우는걸 즐기셨다. 난 에헤헤 하고 웃으면서 그 분의 손아귀에서 벗어날려고, 도망쳤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분도 유쾌해 하셨고, 나도 즐거워했다. 아빠의 간지럼에서 벗어날려고 하는 나. 그런 나를 다시 잡은 후에 간지럼 태우려는 아빠.
일을 마치신 후에 아빠는, 아무리 피곤한 날이어도 나를 위해서 꼭꼭 하루에 한번, 그 소중한, 추억의 시간들을 만들어주셨다....
난 그날도, 생각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아빠에게서 팔이 제압되지 않고 겨드랑이를 보호할수 있을까. 그리고 역으로 아빠의 옆구리까지 공략할수 있을까 하고. 공격이라도 막아내는것 자체가 기적일 나이인데 역습까지 해볼 생각을 하다니. 난 정말 어릴때부터 어지간했던 듯하다.
"엄마~ 아빠 언제 와?"
난 계속 입을 삐죽이면서 투정을 했다. 엄마는 배시시 웃으면서 나를 달래셨다.
"조금만 기다리렴. 엄마가 식사 준비를 하는걸 보면 모르겠어? 하루 이틀도 아니잖니. 곧 오실거야"
"...씨이~"
난 괜한 심통을 부리면서, 계속 씨근거렸다. 그때.
딸그랑
소리가 난곳을 돌아보니 엄마가 싱크대쪽에서 실수로 숟가락을 하나 떨어뜨린게 시야에 들어왔다. 엄마는 고무장갑을 낀 손차림이었다.
엄마는 난처한 표정이 되더니 나를 보며 말했다.
"강희야. 숟가락좀 엄마한테 건네줄래?"
난 엄마 말을 듣고 곰곰히 생각하다가 갑자기 장난기가 생겼다.
"이히힛~!"
난 쪼르르 뛰어가서 바닥에 떨어진 숟가락을 들고 내 방으로 가지고 도망치다시피 내달렸다. 뒤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녀석~ 그거 엄마한테 주랬더니 어디로 가져가는거야? "
난 계속 헤헷~ 하고 웃으면서 엄마말을 무시하고 결국 내 방으로 치달려 들어왔다. 그리곤 침대에 누워서 숟가락을 가지고 만지작 만지작 거렸다.
생각해보니 밥먹으면서 맨날 쓰는데도, 자세히 들여다보거나, 관찰해본적이 없는 물건이었기에, 그날따라 호기심을 가득 담고 난 그걸 만지작거렸었다.
"흐음...이 부분이 조금 더 깊게 패여 있다면 밥을 더 많이 뜰수 있겠다~ 이히히~!!"
난 그렇게 계속 숟가락을 보고, 요모조모를 뜯어보듯이 살폈다. 오른손에귀에 쥐어져 있고, 엄지손가락으로는 오목하게 패인 그 부분을 재미삼아 엄지의 지문으로 눌러보면서.....그때였다...
투드득
"....?"
숟가락이, 갑자기, 사람의 목이라도 된 양, 내 쪽으로 머리를 숙인게 들어왔다. 마치...나에게 인사하듯이....
"...뭐야?"
난 이상해서 그걸 좀 자세히 보려고 무의식 중에 손아귀에 힘을 좀 더 주었다. 내쪽으로 가져오면서. 그러자...
쿠직
쿠지직
"...!!"
난 얼굴을 찡그렸다. 좀전까지 숟가락이라 불렸던 것이, 이상한 모양이 되고, 구겨진 종이처럼 돌돌 뭉친, 조그만 덩어리로 변해버린 것이 시야에 들어와서이다.
"..히익..!!"
난 너무 놀라 그걸 방의 구석에 휙 던져버리고 쪼르르 뛰어서 침대에 올라가 이불 속에 숨었다. 그리곤 오들 오들 떨었다.
"뭐야...뭐야...이상해...무서워....."
이상했다. 무서웠다. 좀전에 자신이 한 행동은, 자기 또래의 아이들이 할수 있는게 아닌것 같았다. 뭔가...이질적인 느낌. 사람이 해선 안될것을, 못할것을 했다는 느낌.
그런 기분이 나의 어린 마음속에 단박에 생성되었다.
난 이불 속에서 웅크렸다. 그렇게 웅크리고 있었다. 아빠가 돌아와서, 나를 품안에 안아올릴 때까지...
식사를 하면서 엄마는 나에게 물었었다.
"강희야, 아까 가져간 숟가락, 어쨌어?"
난...대답하지 않았다...고개를 숙이고...밥만 꾸역꾸역 입에 집어넣어댔다... 다행히도 아까처럼, 내 손에 쥐어진 숟가락이 구부러지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엄마도, 아빠도, 갑자기 말이 없어진 내가 의아하게 생각되는 눈치이신듯 했지만...더는 묻지 않았다....
난 그날 밤에 누워서 어두운 천장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괜찮아...자고 일어나면 잊혀질 일이야..."
하지만....그 날이 악몽의 시작일것이란건....정말 꿈에도 난 몰랐다.....
난 아침에 유치원을 가려 나서면서 방 구석에 던졌던, <숟가락>이었던 쇳조각덩어리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일과 중에 깜짝 놀랄 만한 일이 생겼다. 유치원의 내 단짝 친구를 한 사내녀석이 윽박지르면서 혼내는 장면을 본것이다. 내 친구는 울고 있었고 그녀석은 득의양양한 표정이었다. 난 화가 나서 단박에 쪼르르 다가가 다짜고짜 그녀석의 어깨를 밀어버렸다. 그러자....그녀석은 날아갔다.... 휭...하고...
"아니!! 저 여자앤 뭐에요? 댁네 집은 잘 사나보죠? 애한테 뭘 먹였길래 그리 힘이 쎄요? 우리 애가 어깨가 주저앉았다구요!!"
"죄송합니다..."
"고정하시고..."
아빠랑 엄마가 진땀을 빼는게 보였다. 난 나때문에 일이 이리 된줄 알았기에 눈물만 흘리면서 고개를 계속 조아렸다. 내가 연신 잘못했다고 빌고 용서를 구하자, 그 아주머니는 결국 화를 푸셨다. 그 아이는 나를 보면서 겁먹은 표정이었지만. 정말 미안해..잘못했어..하는 나의 몇마디에 배시시 웃고 나에게 다가와줬다...
그렇게..황당한 일이 몇번 있었던 것으로 나의 유치원 시절은 끝나고...초등학생이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진짜는 그때부터였던 것이다...
초등학교 1학년때, 아이들끼리 다툼이 일어났을 때, 여자애들 편을 들면서 남자애들을 상대로 주먹질을 했을때...그 아이들의 관절은 무사하지를 못했다.
부러져버린 아이는 없었지만, 내 손에 의해서 어깨가 주저앉거나 한 애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어린 나이들이었기에 빠져버린 어깨를 끼우기가 쉬웠던 일은 참 다행이다.
나한테 겁먹은 아이들도 많았지만, 그래도 내가 좋다면서 다가오는 아이들 역시 많았기에(그 애들은 남자애나 여자애나 내가 이쁘다고 그랬다. 뭐가 이쁘다는건지...) 왕따는 당해본적이 없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아이들이 있었기에, 날 아껴주고 좋아해주는, 친구들이 있었기에 그 어둠의 늪에서 헤어나올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어쨌건 초등학교 1학년때도 역시 유치원생때랑 비슷한 일이 더했음 더했지, 덜해지지 않고 이어지자, 난 점차 생기를 잃어갔다. 난 보통 애들하고 틀려도 너무 틀렸던 것이다. 힘! 그놈의 힘이 점차 강해지고 있었다. 원하지도 않는데, 바라지도 않는데, 갖고 싶다고 생각한 적조차도 없는데!!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것이 내 몸을 잠식해갔던 것이다. 난 점점 시도 때도 없이 힘이 몸속을 휘돌고 내달리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것들은 멋대로 나의 팔과 다리를 지배하면서, 어디 힘쓸때 없나, 부실것이 없나 하고 표면적으로 날뛰려는 양상을 띄고 있었다.
그리고 그 힘은 점점 나의 일상생활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물론 아빠랑 엄마가 크게 놀라실만큼, 집에서 뭔가를 저질른 적은 없다.
몸에서 이상한 반응이 오거나 느껴지거나 하면, 난 아이들과 놀고 오겠다면서 집 밖으로 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그런 이상한 느낌이 사라지면 집으로 돌아오는 식으로 부모님에게 걱정을 안끼쳐드리고 나의 힘을 숨길수 있었다...
난 결국 결단을 했다. 초등학교 1학년때부터, 난 산행을 했다. 집 근처에 있는 산을 매일, 꼬박꼬박 오르면서, 거기에 있는 나무나 돌, 흙을 상대로 힘 조절을 하는 연습을, 고행을 시작한 것이다. 내 몸에 이상한 기운이 떠돌때 난 모든걸 제치고 산을 올랐다.
난 8살때 이미, 내가 까딱하면 남에게 대단히 위험한 인물이 될수 있다는걸 깨달은 셈이다. 그럴수밖에 없었다. 내가 늦게 깨달으면, 반드시 누군가가 크게 다치고, 상처입을 테니까. 그건 절대 사절이었다.
난 그때부터 돌을, 나무를, 흙을 상대로 매만지면서, 잡으면서, 쥐면서, 쳐보면서, 여러 방법으로 힘의 강약 조절 운동에 들어갔다.
돌과 흙은 몰라도 나무는 생명체이기에, 되도록이면 죽은 걸 골라서 연습을 했다. 얇고 가는 나뭇가지를 숟가락,젓가락 대용으로 삼아 손에 쥐어보는 행동, 그런 연습, 노력을 끊임없이 했다.
하지만....쉽지 않았다. 아니, 어려운 일이었다. 초 1때 나의 힘은 이미 성인 남성의 근력이 낼수 있는 수준을 우습게 초월한 상황이었었다. 그리고 그 힘은 하루가 지날수록 점차 커져가고 있었다. 그런 거대한 힘의 강약 조절을 해낸다는게, 내가 내고 싶은 힘만큼 딱 뽑아내서 쓸수 있다는게, 그렇게 간단한 일일리가 없었다는것을 당시의 나는 몰랐던 것이다.
산을 오르면서, 그런 식의 운동에 들어갔지만, 나는 점차 기운이 없어지고, 말이 없어지는, 자폐 현상을 겪기 시작했다. 밥맛도 없었고, 나같은게 살면 세상에 너무 위험할것 같다는 생각에, 그 어린 나이에 이미 나는 자살을 수십, 수백차례 생각했었다.
나의 눈동자는 점점 검게 가라앉았고, 눈빛이 죽어가기 시작했다. 초등학생때 나는 자폐, 실어증의 증세를 보였다. 그때부터 몇년동안, 나의 마음은 그렇게 주저앉고, 정지해 있었던 것이다...
부모님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셨다. 그래서 나를 데리고 정신병원에 데리고 가려고 기를 쓰셨지만, 내가 끝끝내 고집을 부려서 그쪽에 신세를 진 일은 없다.
나는 염려했던 것이다. 하나뿐인 딸, 그 딸이 정신이 이상해서 병원에 들락날락한다고, 그런 애를 둔 부모라는 소리가 주위에서 나고,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는건, 절대 용납할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아버지, 어머니에게 그런 불명예를, 슬픔을 절대로 안겨줄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를 악물었다. 7년동안, 단 하루도 산을 오르는걸 쉬지 않았다. 중학교 1학년이 되던 그때까지. 힘이 완성되던 그날까지. 나 최강희는 피나는 노력을 했다.
물론, 그 10년 가까운 세월동안(6살때부터니까), 내가 힘들지 않았다고 하면, 이겨내기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고 하면 그건 완전 거짓말임에 틀림이 없다.
그 기간동안에, 난 진짜 눈물나게 노력했고, xx산의 일부 지형이 변해버릴정도로 애를 쏟았다. 그 노력! 그 고생!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할 것이다.
주저앉고 싶을때도 많았다. 절망이 닥쳐올때도 많았다. 자폐가 심할 때, 세상과 단절한채 학교도 휴학하고 집에서 일상을 보냈으니까.
가장 힘들었을때가, <경계식>이 내게 닥쳤을 때이다. 경계식...나는 그걸 그렇게 부른다. 내 안에 도사리는 어둠의 문을...
번민과, 고뇌에 시달리는 영역. 스스로를 죽이겠다는 자살의식.
바닥으로, 나락으로 가라앉겠다는, 무엇에도 얽매이고 싶지 않고, 관여하고 싶지 않다는 침잠심리.
그것이 바로 나의 경계식이다. 나의 눈동자가 죽는 시점. 내가 오감을 스스로의 의지로 떨어뜨려버리는 의식. 그 의식이 시작되는 기점이 경계식이다.
나의 뜻으로, 스스로를 죽이고자 할때, 내 스스로 가라앉고자 할때, 내가 머무는 곳. 나로 하여금 그 선을 넘어서게 하는 시점. 그게 바로...경계식...
난 과거에 경계식에 빠진 적이 있다. 자의의 구속. 자폐의 길. 그 암흑의 늪지대에 발목이 묶인 적이 있다.
스스로 빠졌다곤 하지만 그 또한 <구속>인건 틀림없기에, 나는 그것에서 빠져나오기가 정말 힘들었다. 그것에서 탈출하고 난 후에, 다시 한번 이 길에 빠지면 헤어나올수 있을까 하고 자문했을 때...나의 대답은...고개를 가로젓는 것이었다...
경계식에 빠져 허우적거릴 당시, 나를 그곳에서 구출해낸건, 건져 내신 것은...부모님....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나를 아껴주고, 나를 사랑해주는, 내가 가장 아끼고 존경하는 두 분.
그리고 집에서 죽음의 기운을 몸에 두르고 세상을 보려 하지 않던 나. 그런 나에게 꽃다발을 들고, 내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콜라를 사들고 위문을 와준, 병문안을 와준...소중한 친구들이 있었기에, 그런 고마운 이들이 있었기에....과거의 나는 경계식으로부터 벗어날수 있었다...
눈동자에 생기를 되찾은 이후, 난 아무리 힘들어도, 손에 쥐어진 모든게 으깨지고 찢어지고, 바스러져 먼지가 되어 흩날려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이를 악물었다. 9년!! 난 9년동안 암흑과 싸우고, 또 싸웠다. 그리고....중 1때....마침내...힘의 완성도.....제어의 완성도....이루어냈다....
14살때, 아버지와 어머니와 함께, 셋이서 오붓하게 아침식사를 했던 그 날...나는...스스로의 의지로....완력의 강약을 조절해서....부모님 앞에서....아무렇지도 않은 표정과...손동작으로....식사를 했다.... 밥을 먹고....국을 떴다...
그 단순한 손동작이...나에게 얼마나 벅차고 감격스러운 일이었는지.....설령 그 두 분들이라 해도 아실수는 없을것이다. 그 누구도 모를것이다. 그날, 나 최강희의 심정이 어떠했을지....난....아침 식사를 마치고...화장실에 들어가....세안을 했다....눈물을 펑펑 쏟으면서.....드디어 성공했다고....마침내 해냈다고....환희했다....그 날이...내 인생에서...가장 많은 눈물을 쏟아냈던 날이다....
경계식을 이겨낸 후에, 나는, 나의 성격에 변화가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힘의 강약 조절에 너무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탓인지, 자폐와 실어증을 겪고, 많은 번민과 복잡적인 감정심리에 대한 변천사를 끊임없이 겪었기 때문인지, 나의 감정에, <부작용>이라 할만한 것이 생겼다.
어릴땐 그렇지 않았다. 난 항상 상대를 배려하고, 위하고, 걱정했다. 8살때 산행을 하면서 그런 고행의 길을 시작한 것도, 순전히 남들을 다치게 하기 싫다는 마음 하나만으로 시작했던 일이다. 그만큼 나는 타인에 대해 깊은 이해심, 안쓰러움, 고마움, 감사, 배려 등의 좋은 감정을 많이 가지고, 지니고 있었던 여자애다.
하지만 경계식 이후로 나의 성격엔 부작용이 생겼다. 그것은 바로, <대단히 빠른 감정의 기복>, 즉 변화의 속도이다.
난 원래, 화가 나도, 어지간해선 잘 참는 성격이었다. 억누를수 있는 정도가 강했던 여자애다. 하지만, 살면서의 그 9년동안에 워낙 많은 일을 겪다 보면서, 난 상당히 다혈질인 여자애, 기분에 따라 움직이는 애가 되버렸다.
으쓱한 골목에서, 머릿수로 밀며 학생들의 금품을 갈취하는 나쁜 녀석들, 여자의 몸을 장난감처럼 생각하는 사내놈들, 남을 타고 억누르는데서 쾌감을 즐기고 환호하는 개자식들.
그런 새끼들을 보면, 그런것들이 시야에 들어오면, 난 결코 참지 못하는 성격이 되어버렸다. 그 자리에서 거의 처단하거나, 아주 작살을 내버리는 식으로 바뀐것이다.
그래서 난 살면서, 내가 보기에 <악>이라고 판단되거나, 빌어먹을 짓거리를 하는 인간들을 보면 결코 냅두지 않는, 아니, 오히려 거의 찾아다니면서 손을 보는 수준의 성격으로 변모했다. 난 그렇게 되버렸다.
하지만...동네 양아치 녀석들을 흠씬 패주고 집에 돌아오던 그 어느 날, 문득, (아아~ 이러면 안 되겠다...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그들도 사람, 인간이다. 변화의 계기를 아직 얻지 못했을 뿐인...불쌍한 인간들, 가련한 인생들이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던 것이다.
물론, 지금까지도 역시, 인간망종같은 녀석들을 보면, 그 자리에서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여전히 한다. 내 감정이 대단히 빠르게 변하는, 기복은 <부작용>이기에 그건 어쩔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난 깨달았던 것이다. 내가 정말 화가 나서 날뛰는 날에는, 누군가 크게 다치고, 죽겠구나. 그가 비록 악인이지만 사람일지어도... 죽여버릴지도 모르겠구나...하고.
그 날, 이 나에게, 하나의 성향이 생겼다. 결박. 구속. Bondgage라는 성향이, 스스로 묶이고 싶다는 성향이, 이 나의 마음 속에서 싹트는 계기가 되었던 날이다.
진정 내가 분노했을때, 난 내가 묶여 있어야 할 필요성을 깨달았다. 그런 상태일 때의 나는 철저히 결박되어져야 할 여자애라고 생각하게 된것이다.
M성향을 가지게 된 게 바로 그날이다.
난 인터넷에 들어가 Bondage관련 글을, 이미지를, 동영상을 검색하고 살펴보았다. 그 과정에서 어느 날, 붕대로 인해 몸이 미이라처럼 묶인, 가슴에서부터 발목까지 붕대로 몸이 결박되어진 여자의 사진을 보았다.
사진 안에는 쇼파에 누워 있는 여자 말고도 남자가 한명 있었다. 그 남자는 드러나 있는 여자의 맨발을, 정확히 말하면 발바닥을 간지럽히는 손동작을 취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 표정은 유쾌한 듯했다.
간지럽혀지는 여자도 입에 함박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내 시야에는, 물론 연출이겠지만 그 여자의 웃음이 그렇게 즐겁게 보일수가 없었다. 마치, 그 여자가 원해서 그런 간지럼을 당하고, 그런 웃음을 짓고 싶어하는 듯이 보였다.
그 사진을 보면서 나는 과거를 회상했다. 욕조에서, 비누칠된 나의 겨드랑이를 간지럽히던 아버지를, 그리고 그 간지럼을 싫어하는 척하면서도 은근히 즐기는것 같았던 나 자신을. 생각해보면 나는 그런것에서 즐거움을 얻고, 매일매일 아버지와 욕조에서의 시간을 보내고 싶어했던 듯하니까.
잠시 고민해보던 나는, 내 성향에서 그렇게 Tickling. 간지럼을 그날에 역시 추가하게 된다.
나는 기분이 안 좋을때 묶이고 싶어했으니, 묶여 있으면서도 여전히 기분은 안 좋을 것이다. 한번 달아오른 나의 감정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는 성격이 되어버렸으니까. 하지만, 그런 기분일때, 간지럼을 당하면 어떨까. 어차피 난 묶여 있으니 반항은 못할테고, 웃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기분이 안 좋을때, 웃고 싶다고 생각했다. 비록 그것이, 스스로 진정 유쾌해서 짓는 웃음은 아닐지언정, 간지럼 그 행위 자체는 이 나에게 웃음을 가져다줄 테니. 내게서 웃음소리를 내게 만들테니. 그 기분에 취하고 싶었다. 그 기분에 몸을 맡기고 싶었다. 간지럼당하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합의>라는 명목 하에 나를 묶을 수 있는 S를 찾기 위해 나서기 시작했다. 그래서 하루하루, 틈날때마다 인터넷을 키고 쓸만한 까페가 없나 하고 찾아보게 되었다. 썩 그럴듯한 까페들이 보이지 않다가, 마침내 찾아낸것이 고등학생인 지금에 찾아낸 TBM이다.
상당히 활성화된 까페. 이정도로 활발한 까페가 있구나 싶었다. 회원수로 보나, 접속수로 보나, 자료로 보나, 그 무엇으로 따져보든지간에 우리 나라에서 톱에 들만한 까페였다. 무엇보다도, 내가 원하는 두 가지, Bondage와 Tickling에 관한 것을 다 다루는 까페라는 점이 나의 마음을 유독 끌었었다.
힘이 완성된 후로, 그리고 그걸 통제할수 있게 된 후로, 난 나의 힘을, 공룡에 빗대어 인터넷에서 티렉스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했다. 그 까페에도 역시 그 닉네임으로 가입했고...활동을 시작했다...그 까페에서의 활동이...그렇게 시작되었었다...
나는 그렇게....경계식, Tickling과 Bondage라는 성향이 내게 생긴 이유, TBM의 가입 계기를 회상해보면서...눈을 떴다....
"...프린세스?"
여왕은 그렇게 강희를 부르면서, 눈을 지그시 감고 있는 그녀를 불렀다. 강희가 눈을 감은채 제법 오랫동안 침묵했는데도 채근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녀가 워낙 지쳐보여서였기 때문이다. 강희의 얼굴빛은 여전히 파리한 수준이었으니까.
이윽고 강희는, 회상에서 벗어나 눈을 뜨더니, 여왕을 보면서 다시 말했다.
"좀전에도 말씀드렸지만...난 보통 사람하고...몸에 지닌 힘의 차이가...차원이 달라요. 항상 신경쓰지 않으면....목을 어루만진다고 하는 행위가...그 사람의 목뼈를 손쉽게 부러뜨릴수도 있고...친근감의 표현으로 어깨 위에 손을 올려보는 정도의 행위를 하고 싶을뿐인데....그 사람의 양 어깨뼈 관절을 나가버리게 할수도 있죠..."
이번엔 여왕이 침묵했고, 닥터가 물었다.
"아가씨가 힘이 쎄다는건 알고 있어. 하지만..아가씨는 지금 사우전드에 묶여 있네. 지금 힘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데...설마...그 경계식이란게...아직 아가씨에겐 감춰두고 있는 힘이 있다는건가? 그 경계식이란게.....쓸수 있는 힘의 정도를 더 높일수 있는걸 두고 말하는건가? 경계 라는 단어를 들먹이는것 자체가 이 나에겐 한계를 넘어서는 행위를 두고 말하는것 같이 들리는데?"
강희는 닥터의 말을 듣고 있다가 슬쩍 미소짓고 나더니 답해줬다.
"나름대로는...그럴듯한 추리. 멋있군요 박사님. 킥....하지만...아니에요. 경계식이란건...내 스스로...나를 가두겠다는 뜻이죠"
"...스스로를...가두어?"
닥터는 안경을 치켜올리면서 인상을 썼고, 설영이나 가연, 선민 역시 표정을 찌푸렸다.
설영은 화들짝 놀라서 물었다.
"무..무슨 소리야? 니 스스로 너를 가둔다고?"
강희는 입에 조소를 피워올렸다. 그녀는 닥터를 보던 시선을 돌리더니 여왕을 보았다.
"킥킥.....여왕님은...나를 미치게 만들거랬는데....소원대로 해드릴께요. 경계식에 들어가면 난 확실히 미친 여자애처럼 될테니....알아서 돌아버리는거니까 애써서 절 간지럽혀 미치게 만드는 수고는 안하셔도 되겠네요? 후훗~"
설영은 순식간에 얼굴빛이 파래지더니 외쳤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거야!! 그런 일이 가능하기나 할것 같아? 너...넌..."
강희는 여왕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말했다.
"그래서 제가 말했잖아요. 여왕님한테 좋을수도, 아닐수도 있다구요. 킥킥....난 나의 의지로 외부와 단절될수 있어요. 스스로의 뜻으로 세상과 차단되는 셈이죠....하게 되면...경계식은 살면서 두번째지만...그리고 나도 사실 그것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중요한 것은 다 알아요. 후후..."
"............."
"제 마음을 헝클어지게 한 후 마인드 컨트롤...매혹안이던가? 그걸 걸거라 했죠? 훗...안타깝지만...그렇겐 안될걸요? 난 여왕님의 꼭두각시를 할 생각이 없어요. 그런것이 되느니 차라리...내 뜻대로, 나의 의지로, 과거에 겪었던 그 늪에 들어가고 말래..."
설영은 닥터를 확 돌아보면서 물었다. 그녀의 얼굴은 한껏 긴장되어 있었다.
"닥터!! 이 애 말이 사실이에요? 자기 스스로 자폐에 든다는거잖아요? 이런게 의학적으로 가능하냐구요!!"
설영은, 강희가 설마 이런 선택을 할줄은 몰랐던지라 너무 당황해서 박사에게 괜히 성질부리다시피 목소리를 높였다.
닥터는 침중한 표정으로 서 있다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불가하오. 자폐는 스스로의 의지로 세상과 단절하는 점은 맞지만, 말 그대로 병이지. 자기가 원한다 해서, 그렇게 단기간에, 확 빠져들수 있는게 아니지. 아가씨는 지금...우리에게 협박을 하는건가?"
협박을 하는거냐고 닥터가 묻자 강희가 아하하 하고 웃었다.
"설마요...이렇게 아무것도 못하도록 묶여 있는 주제에 협박은 무슨...전 사실을 말했을 뿐이에요...제 말이 믿기지 않으신다면...뭐...차차 두고보시죠. 어차피 두분께는 시간이 남아돌지 않나요? 손해보실건 없을거라 보는데요"
강희의 대답중에 틀린 말은 없기에 침묵했지만, 닥터는 역시 꽤 당황한 얼굴이었다. 설영은 다시 강희를 돌아보았다.
강희 역시 설영을 시야에 담으면서 말했다.
"경계식은...내 맘대로...언제든 발동할수 있어요...살면서 언제든 그것에 난 빠져들수 있었죠. 내가 그것에서 헤어나온 이유는..그리고 헤어나올수 있었던 이유는...나를 아끼고 사랑해주는 소중한 분들, 그런 이들때문에 가능했던 것...그런 고마운 사람들을 위해서...난 경계식에서 벗어날수 있었고 이후 다시는 거기에 몸을 맡기지 않으리라 맹세했는데...여왕님이...박사님이 저에게...이런 선택을 할것을 강요하는군요"
"내...내가 언제...."
설영은 인상을 쓰면서 말을 이으려 했지만 강희가 더 빨랐다. 강희의 눈은 웃고 있었다.
"왜요? 이건 여왕님께서 원하던 것 아닌가요? 내가 미쳐버리길 원했잖아요? 내가 돌아버리길 원했잖아요? 그럼 이제 됐어요. 축하드려요. 제가 이루어드리죠. 그 바램은...킥...하지만....그 이상은...안돼요..."
".............."
강희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면서 말했다.
"두 분은....나에게...완벽한 구속을 안겨주었어요...그 점에선...아까 말했듯이..경의를 표하겠지만....나 최강희....결코 이런 구속, 이런 방식을 원하지 않았어...내가 끝까지 거절의 뜻을 밝혔는데도....끝끝내 나를 이렇게 옭아매다니....용납 못해...인정 못해요....그렇기에...분명히 말하죠...
난....그 누구에게도....억지로...강제로 휘둘리진 않아....나의 몸은 비록 이지경이고...날 꼼짝 못하게 해서...내 육체를 가져도....의지까지는 못 빼앗는다는것을 보여드리죠...여왕님과..박사님께....나의 긍지...자존심까지는...뺏기지 않는다는 것을..
두 분은..두 분의 S를 추구하세요. 난...비록 몸은 사로잡혔지만...나의 의식은 내 심층에서...스스로를 구속하고..옭아맬테니...까짓거 내 몸뚱아리정도쯤이야...맘대로 갖고 노세요. 대신...반응은 기대 하지 마시죠. 인형놀이가 될테니. 김빠진 콜라가 얼마나 맛없는진 아시죠? 킥...."
여왕도 닥터도, 한껏 눈썹이 찡그려졌다. 그런 그들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강희는 말했다.
"이것이....나.....최강희의...마지막 남은 의지....선택....자존심이니....뺏어갈 생각은 마세요...어림도 없으니까....."
여왕은 인상을 쓰면서 이를 갈다가 강희의 볼을 확 잡으면서 말했다.
"우!! 웃기지마!! 넌 나의 것이야!! 너의 몸! 마음! 다 내꺼야!! 내꺼란 말이야! 넌 나의 딸이 되어야 해! 경계식? 흥! 그런게 가능할리도 없겠지만, 설령 가능하다고 쳐도! 오히려 그때를 역이용하면 돼! 너의 이성이 제정신이 아니라면, 차라리 잘 되었지! 그때를 틈타서 너에게 매혹안을 걸면 되니까!!"
여왕은 강희를 죽어도 포기 못할 눈치였다. 그정도의 기세가 보여졌다. 강희는 피식 웃었다.
"소용없을걸요? 매혹안이란게 어느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내가 가라앉을 심층계엔 도달하지도 못할거에요. 너~~무너무 깊은곳이거든요? 나 거기 한번 빠져봐서 아는데..장담코...이번에 들어가면 난 못나와요.....괜한 짓 마시길..."
설영은 이빨을 뿌드득 갈더니 독설스럽게 외쳤다.
"흥! 계속 간지럽히면 니가 그런걸 할 새가 없을걸? 경계식이랬지? 그걸 쓸 기회를 주지 않을거야!! 일절 딴 생각을 못하도록 계속 티클링을 하면 되겠지. 그럼 넌 머릿속에 딴생각을 할 틈이 없을테고 말이야. 그럼 기다리고 있다가 매혹안을 걸면 돼."
강희는 그것도 예상한 듯이 웃으면서 바로 받아쳤다.
"킥킥....소용없어요...경계식의 발동조건은.....가만히 있는 평상시의 나일땐 그걸 하기가 힘들죠. 시간이 더 많이 걸린다 해야 하나? 하지만...이렇게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나를 몰아붙이면...아주 쉽답니다...전 지금 무척 지쳐 있거든요? 그냥 이거저거 다때려치고 쉬고 싶은 심정이에요. 지금 이런 심리상태의 저라면...오히려 제겐 더 유리하죠. 이런 상황이면 지금 당장에라도 들수 있을것 같은데...후후..."
여왕은 진저리치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런 그녀를 보면서 강희는 또박또박 말했다.
"절 손아귀에 넣었다고 아주 좋아하시는데....애석하지만 여왕님의 바램은 절반. 50퍼센트. 반쪽만 성공하겠네요? 후후...보아하니 여왕님은 사람의 몸은 물론이고 마음까지도 마음대로 할수 있다는것에 대단한 자긍심이 있으신것 같던데....애석하시겠지만...저는 예외니 포기해 주세요. 몸은 가져도 마음은 안될테니까요. 아하하.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세상엔 저같은 여자애도 있다는것을 말씀드리고 싶군요. 이 세상 모든게 여왕님이 원한다고 다 손아귀에 들어오는것은 아니라는것도 강조드리고 싶구요. 킥킥."
여왕의 프라이드를 깔아뭉개는 발언. 설영은 눈썹을 바들바들 떨었고 강희는 마침표를 찍듯이 말했다.
"좋으시겠어요? 제 몸도 가졌고, 미치는 꼴도 볼테니까요. 다시 한번 축하드려요 여왕님. 정신 나간 여자애 딸로 삼던 말던 잘 데리고 사세요. 경계식에 들어가면 저도 제가 어찌 되는지 아무것도 모르니까. 아참. 제 몸은 장악하셨으니, 마음껏 가지고 놀수 있겠네요. 반응은 없겠지만. 그래도 제 몸이 그렇게 좋다면, 그건 그것대로 여왕님이나 박사님의 만족에 들어가지 않을까요? 아하하~"
설영은 이젠 낯빛까지 확확 변하다가 부르르 몸을 떨더니 밖으로 나가버렸다. 심정같아선 또 티클링을 실행하고 싶었지만, 강희의 몸상태가 아직은 영 아니라고 판단되었기 때문에, 가연과 선민에게 특별한 지시를 내리치는 않고 나가버린 것이다.
닥터는 부리나케 화다닥 나가버리는 설영의 뒷모습을 보다가, 그녀와 대화할 필요성을 느끼고 같이 나가버렸다.
설영과 닥터가 나가자, 방에는 강희. 그리고 가연과 선민만이 남게 되었다.
여자애들은 다가와서 글썽이는 눈망울로 강희를 바라보다았다.
"언니..."
"강희 언니.."
강희는 여자애들의 젖은 눈을 바라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얘들아...잘 들어"
"네?"
"무슨..."
질문을 하려 했지만 그녀들은 강희에게 다시 제지되었다.
"쉿! 그냥 듣기만 해. 여왕님이 나중에 오시면...이 말을 꼭 전해줘. 알았지?"
"뭐..뭔데요 언니?"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요...꼭 언니가 어디 가버릴것만 같잖아..."
두 여자애는 더더욱 울상이 되었지만 강희는 생긋 웃어주고는 입을 열었다.
"꼭 전해드려. 그러니까 너희들이 전할 말은............"
여자애들은 강희의 말을 들으면서 얼굴빛이 점차 무거워졌다. 그리고...강희의 말이 끝나자, 물수건을 가져와서 그녀의 몸을 닦아주기 시작했다.
거실.
쇼파에 앉은 설영이 독한 양주를 연거푸 들이키는 것을 보다가, 닥터는 인상을 찡그리면서 더는 못 두고보겠다는 듯 술잔이 들린 그녀의 손목을 잡아쥐었다. 하지만 설영은 강하게 그의 손을 뿌리쳤다.
"놔요!!"
닥터는, 설영에게 완력을 쓰기가 싫었기에 고개를 가로젓더니 그녀의 손목을 놔주었다. 설영은 다시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설영은 입가에 술을 털어넣더니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아악! 정말!! 무슨 애가 저렇게 완강한거야!!"
닥터는 얼굴을 찌푸리다가 그녀를 달래듯 말했다.
"진정하시오. 여왕님. 자폐라는건 그렇게 자기가 마음먹었다고 단박에 들수 있는게 아니라고 말했잖소? 시간의 경과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나타나는게 자폐란 말입니다. 저 아이는 지금 우리의 심리를 자극해서 탈출을 꾀하는거란 말이오"
설영은 입술을 꽉 깨물고 있다가 닥터를 보았다.
"...그렇겠죠? 후....나도 듣고 믿지는 않았지만...그런게 가능할리가 없는데도...."
설영은 혼자 중얼중얼대다가 핫! 하고 생각난듯이 다시 강희의 방으로 뛰어갔다. 닥터는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있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쯧쯧...그러다 당신이 먼저 쓰러지겠소...."
설영은 다시 강희가 누워 있는 방으로 들어와서는 그녀를 보았다. 가연과 선민이 강희의 몸을 물수건으로 닦아주고 있었고, 강희는 눈을 감고 있었다.
강희가 자지는 않는다는것을 알기에 설영은 재빨리 다가와서 곧바로 외쳤다.
"잘 들어! 그 경계식인지 뭔지...난 믿지 않아. 넌 지금 나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걸거야. 하지만...만에 하나 그게 사실이라 쳐도...넌 그걸 못할거야"
강희는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싶어 눈을 슬쩍 뜨고 여왕을 바라보았다.
"무슨..."
강희는 질문을 하려 했지만 설영이 갑자기 아하하 하고 웃더니 강희에게 조소를 날리면서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마치, 비장의 카드를 꺼낸다는 듯이..
"인질이 있다는걸 알아야지. 만에 하나라도 니가 그런 짓을 하면....후후...유정이가 무사할지 모르겠네?"
"............"
강희는 그 말을 듣고도 무뚝뚝한 표정이었다. 설영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점점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너...너...설마!!"
그녀는 정말 설마 하는 심정을 담고 강희를 보았다. 이번엔 강희 쪽에서 입가에 미소를 피우더니 말했다.
"훗....난 이제 지쳤어요...내겐 힘도 없고...유정이를 구할수 있는 상황도 못 되죠...어차피 경계식에 들면 난 아무 상황도 인지할수 없어요. 말 그대로 외부와 차단되니까. 유정이를 죽이겠다구요?...정말 슬픈 일이지만...내겐 방법이 없군요...내가 할수 있는 선택은..이것뿐이에요..."
설영은 눈을 찢어지게 부릅떴다. 설마하니 최강희가 한유정을 포기하겠다는 뜻을 비칠줄은 몰랐던 것이다. 이게 최후의 카드였는데...
설영은 강희의 마음속 심리를 파악하기 위해, 그녀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면서 다시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정신계에 최고의 능력을 지닌 그녀이니만큼, 상대의 눈을 보면서 이야기하는것이 아무래도 감정동향 파악에 훨씬 쉬웠기 때문이다.
거짓말일거야 하는 마음으로, 설영은 강희의 마음을 슬쩍 떠봤다.
"노..농담 마. 유정이는 너의 가장 친한 친구잖아? 안 구할거야? 탈출해야지? 그래서 구해야지? 그래야 하잖겠어? 응?"
강희는 설영을 멀뚱멀뚱 바라보다 아하하 하고 낭랑한 웃음소리를 내더니 정말 웃긴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말했다.
"여왕님은 참으로 절 웃기시네요. 지금..도대체 저에게 뭘 바라시는거죠? 제가 탈출하기를 바라기라도 하는건가요? 절 이지경으로 해놓고?"
"그..그건..."
설영은 순간 할말이 궁해졌다. 강희는 다시 말했다. 입가에 조소를 문채로.
"도대체 지금 내가 뭘 할수 있죠? 이런 상황의 나보고..유정이를 구해야 하지 않겠냐구요? 아하하...정말 재밌네요....할수 있다면...정말로 그럴수 있다면 진작에 했겠죠...하지만..그럴수 없다는 현실이 슬플 따름이에요...아무튼...유정이를 이용해서 제 결심을 돌릴 생각을 하셨다면...잘못 짚으셨네요. 소용없으니까..."
설영은 입술을 잘근거리다가 말했다.
"내가 지금 불러서 죽어버리라고 그 애한테 말한다 해도?"
강희는 피식거렸다.
"그럼 난 당장에 경계식을 발동하죠...맘대로 하세요..난 세상의 빛을 안보고 말테니..."
"!!"
설영은 당황했다. 강희의 눈동자에서 진심임을 엿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하지만...도대체 그 경계식이란게 진짜 가능하긴 한거야? 스스로 폐인이 된다는게?"
그게 변수였다. 만에 하나라도 정말 그런게 가능하다면, 최강희의 마음까지 사로잡고자 하는 여왕으로서는 완전 다 된 밥에 재뿌려지는 격이기에 쉽사리 도발을 못하는것이다.
설영은 잔뜩 인상을 쓰고 있다가 가연과 선민쪽을 보더니 지시했다.
"...오늘은 몸조리를 잘 해주도록 해. 그리고..디저트는 억지로라도 먹여. 안 먹으려 하면 간지럽혀서라도 입을 열게 만들어. 뱉어내려 해도 강제로 먹여."
가연과 선민은 고개를 조아렸다.
"네 여왕님..."
설영은 다시 말했다.
"디저트를 들게 한 후에....에테르로 바로 재우고....씻긴 후에 내 방에 눕혀놔...오늘은 내가 직접....밤새 안마를 해줄거야...."
다시 한번 여자애들이 고개를 조아렸고, 설영은 그렇게 일단, 물러났다.
설영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강희는 속으로 생각했다.
"불쌍한 분....."
금요일.
가연과 선민은, 여왕의 방 침대에 누워 잠들어 있는 강희를, 씻기고, 머릿결을 정리해준 후에, 사우전드에 구속하고 나서, 아침 식사 준비까지 마친 후에, 강희가 눈을 뜨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그녀는 눈을 뜨지 않았다.
"...언니?"
"강희 언니?.."
예상 시간이 1시간 이상 지났는데도 강희가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를 않자 두 여자애는 불안한 표정이 되어서 그녀의 뺨을 더듬고 몸을 흔들어보았다. 하지만, 강희는, 무표정 그 자체로 눈을 감고 있을 뿐이었다.
선민은 당황한 채 강희의 몸을 막 흔들면서 그녀를 부르기 시작했고, 가연이 방을 뛰어나가 여왕에게 내달리기 시작했다.
"여, 여왕님!!"
설영은 인상을 찌푸렸다. 아침부터 왠 소란이야..하는 심정으로 그녀는 눈썹을 찡그렸지만....
"프..프린세스께서...."
화들짝
설영은 놀라서 슬리퍼도 벗어던지고 강희의 방으로 내달렸다.
화다닥
그녀는 눈을 감고 있는 강희의 뺨을 흔들어보고 살짝 쳐보기도 했다. 하지만...강희의 감겨진 눈은 뜨일 줄을 몰랐다.
"!!"
설영은 검지손가락을 강희의 코 밑에 가져다 대보았다.
"이..이럴...."
숨을 쉬는건지 안 쉬는건지조차 구분을 못할 정도로, 강희의 숨결은 미약했다. 설영은 다시 강희의 목과 손목을 잡아보면서 경동맥과 대동맥을 살피기 시작했다.
"왜..왜 이러지?"
미약했다. 미약해도 너무 미약했다. 설영이 인상을 한껏 찌푸리면서 닥터를 부르려 하는데, 그때 어느새 왔는지 그는 그녀의 옆에 다가와 쓰윽 손을 뻗었다. 강희의 눈쪽으로.
"..............."
그는 강희의 눈동자를 살폈다. 동공이 정지된듯 미동도 없었다. 그는 그렇게 그녀의 맥이며 동공의 상태 등. 몇몇 군데를 짚어보고 점검하더니 설영을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은 심각할 정도로 긴장된 G빛이었다.
"...지독하군....이정도면 식물인간 아니라....거의 코마상태로 봐도 이상할게 없소....."
설영은 비명을 질렀다.
"뭐..뭐에욧?!!"
닥터는 침중한 표정이 되어서 안경테를 올려쓰더니 중얼댔다.
"믿기지가 않는군...이런 게 가능하다니......"
"...경계식?"
여왕과 닥터가, 가연과 선민이, 의아한듯한 표정을 표면에 띄우면서 고개를 갸우뚱 거렸다.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설영이 강희에게 물었다.
"그게 뭐지? 경계식이라니?"
강희는, 여전히 이마에 송글송글 맺혀있을정도로 땀투성이였다. 지금 비록 육체적으로 시달리는건 아니었지만, 신체가 지칠대로 지쳐 있는것도 사실이었기에, 지금 그녀의 몸에 맺힌 땀방울들은 식은땀으로 인해 생겨난것이었다.
그때문인지, 창백해 보일정도의 안색이었지만, 강희는 입가에 피식 미소를 피워올렸다.
"훗....별거 아니에요. 아마도...제가 경계식을 발동하면....그건...여왕님한텐 좋은 일일수도 있고...안 좋은 일일수도 있겠네요...킥킥..."
설영은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뜻이지? 좋을수도...아닐수도 있다고?"
강희는 힘들게 고개를 두번 까닥이고는, 다시 말했다. 그녀의 입가에는 연신 자조적인 미소가 걸려있었다.
"그래요....어쨌건....여왕님이 원하시는대로는...될거에요.....나의 이성을 무너뜨리고 싶다고 그랬지요? 아하하...그건 확실히...이루어지겠군요...여왕님의 뜻대로말이죠.."
설영은 이제 긴장할대로 긴장하고, 속마음은 의문에 의문의 중첩, 꼬리에 꼬리를 무는 식이 되어가고 있었다.
"도대체....무슨....."
설영이 재차 질문을 하려는데 강희가 그녀의 말을 중도에 잘랐다. 강희는 헉헉대면서 조금씩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나정도의......나만큼의 힘을......이정도의 몸뚱아리로.....겨우 이만한 몸으로....수용하기가....통제하기가...쉬울거라 보세요?.....킥킥...."
꿀꺽
여왕과 닥터는 침을 삼키고, 가연과 선민은 계속 입술을 꽉 문채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네명 모두 강희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강희가 말을 이었다. 느리게...느리게....계속...계속...
"난....보통 사람과는.....차원이 달라......닉네임을 만들때.....나에게......이 나의 안에.....충분히...그런 닉네임으로 표현해도....문제될것이 없겠다는 심정으로....스스로를 비웃으면서 지은 닉네임이....티렉스에요....
힘....이런 무시무시한 힘이....내게 들이닥쳤던건...생기기 시작한건.....내나이....여섯살때의 일.....힘의 완성은.....중학교 1학년이 되던 때에...완성되었다고..추측하고 있죠...... 10년이 가까운 세월동안... 난 고통받았어요......"
강희는 눈을 감고 그때의 감정을 회상한다. 그때 당시의 기억은 두번 다시도 떠올리기 싫을만큼 끔찍한 기억.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스스로에게 너무 실망해 있었고,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깊게 침잠되어져 있어서, 그때의 암흑적인 분위기와 동화될수밖에 없었다.
(회상)
난 평범한 여자애였다. 아니, 평범하다고는 못하겠다. 왜냐하면 나에게는, 이 세상에서 가장 좋으신 두 분을 부모님으로 두고 있으니까.
하늘에서 천사라도 내려온 걸까. 세상 어느 누가 자식을 사랑하지 않을까마는, 나를 낳으신 부모님께서는, 하나뿐인 딸이어서 그런지 정말이지 끔찍이도 나에게 잘 해주셨다.
내가 가지고 싶어하는 것, 먹고 싶은 것, 하고 싶어하는 것을, 모두 다 손에 쥐어주셨고 직접 떠먹여주셨으며 가능하게끔 해주셨다. 난 정말 행복했다. 행복한 여자애였다.
세상 그 어느것도 부러울것이 없을만큼. 그러던 어느 날....그 날이 들이닥쳤다.....
아버지가 아직 집에 귀가하시지 않았던 그 날, 어머니는 식사 준비를 하고 계셨다. 아버지만 집에 오시면 같이 저녁을 들면 되었던 날이다. 그 때까지는 순조로웠다. 아무 문제도 없었다.
"히잉~ 심심해...."
난 그런 식으로 투정을 부리면서 항상 아버지를 기다렸던 듯하다. 어릴때만 해도, 어머니보다는, 아버지와 같이 욕조에서 물장난을 치면서 노는게 더 재미있었다.
그 나이때는 마냥 아빠 아빠 하면서 졸졸 따라다니고, 당신께서 귀찮아 하실정도로 앵겨댔을 시절이니까. 아버지는 나를 씻길때 타월에 거품을 내서, 내 몸을 항상, 정성스레, 소중한 도자기를 만지듯 부드럽게 어루만져주셨다.
아버지는 날 씻기면서 나의 겨드랑이에 간지럼을 태우는걸 즐기셨다. 난 에헤헤 하고 웃으면서 그 분의 손아귀에서 벗어날려고, 도망쳤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분도 유쾌해 하셨고, 나도 즐거워했다. 아빠의 간지럼에서 벗어날려고 하는 나. 그런 나를 다시 잡은 후에 간지럼 태우려는 아빠.
일을 마치신 후에 아빠는, 아무리 피곤한 날이어도 나를 위해서 꼭꼭 하루에 한번, 그 소중한, 추억의 시간들을 만들어주셨다....
난 그날도, 생각하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아빠에게서 팔이 제압되지 않고 겨드랑이를 보호할수 있을까. 그리고 역으로 아빠의 옆구리까지 공략할수 있을까 하고. 공격이라도 막아내는것 자체가 기적일 나이인데 역습까지 해볼 생각을 하다니. 난 정말 어릴때부터 어지간했던 듯하다.
"엄마~ 아빠 언제 와?"
난 계속 입을 삐죽이면서 투정을 했다. 엄마는 배시시 웃으면서 나를 달래셨다.
"조금만 기다리렴. 엄마가 식사 준비를 하는걸 보면 모르겠어? 하루 이틀도 아니잖니. 곧 오실거야"
"...씨이~"
난 괜한 심통을 부리면서, 계속 씨근거렸다. 그때.
딸그랑
소리가 난곳을 돌아보니 엄마가 싱크대쪽에서 실수로 숟가락을 하나 떨어뜨린게 시야에 들어왔다. 엄마는 고무장갑을 낀 손차림이었다.
엄마는 난처한 표정이 되더니 나를 보며 말했다.
"강희야. 숟가락좀 엄마한테 건네줄래?"
난 엄마 말을 듣고 곰곰히 생각하다가 갑자기 장난기가 생겼다.
"이히힛~!"
난 쪼르르 뛰어가서 바닥에 떨어진 숟가락을 들고 내 방으로 가지고 도망치다시피 내달렸다. 뒤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녀석~ 그거 엄마한테 주랬더니 어디로 가져가는거야? "
난 계속 헤헷~ 하고 웃으면서 엄마말을 무시하고 결국 내 방으로 치달려 들어왔다. 그리곤 침대에 누워서 숟가락을 가지고 만지작 만지작 거렸다.
생각해보니 밥먹으면서 맨날 쓰는데도, 자세히 들여다보거나, 관찰해본적이 없는 물건이었기에, 그날따라 호기심을 가득 담고 난 그걸 만지작거렸었다.
"흐음...이 부분이 조금 더 깊게 패여 있다면 밥을 더 많이 뜰수 있겠다~ 이히히~!!"
난 그렇게 계속 숟가락을 보고, 요모조모를 뜯어보듯이 살폈다. 오른손에귀에 쥐어져 있고, 엄지손가락으로는 오목하게 패인 그 부분을 재미삼아 엄지의 지문으로 눌러보면서.....그때였다...
투드득
"....?"
숟가락이, 갑자기, 사람의 목이라도 된 양, 내 쪽으로 머리를 숙인게 들어왔다. 마치...나에게 인사하듯이....
"...뭐야?"
난 이상해서 그걸 좀 자세히 보려고 무의식 중에 손아귀에 힘을 좀 더 주었다. 내쪽으로 가져오면서. 그러자...
쿠직
쿠지직
"...!!"
난 얼굴을 찡그렸다. 좀전까지 숟가락이라 불렸던 것이, 이상한 모양이 되고, 구겨진 종이처럼 돌돌 뭉친, 조그만 덩어리로 변해버린 것이 시야에 들어와서이다.
"..히익..!!"
난 너무 놀라 그걸 방의 구석에 휙 던져버리고 쪼르르 뛰어서 침대에 올라가 이불 속에 숨었다. 그리곤 오들 오들 떨었다.
"뭐야...뭐야...이상해...무서워....."
이상했다. 무서웠다. 좀전에 자신이 한 행동은, 자기 또래의 아이들이 할수 있는게 아닌것 같았다. 뭔가...이질적인 느낌. 사람이 해선 안될것을, 못할것을 했다는 느낌.
그런 기분이 나의 어린 마음속에 단박에 생성되었다.
난 이불 속에서 웅크렸다. 그렇게 웅크리고 있었다. 아빠가 돌아와서, 나를 품안에 안아올릴 때까지...
식사를 하면서 엄마는 나에게 물었었다.
"강희야, 아까 가져간 숟가락, 어쨌어?"
난...대답하지 않았다...고개를 숙이고...밥만 꾸역꾸역 입에 집어넣어댔다... 다행히도 아까처럼, 내 손에 쥐어진 숟가락이 구부러지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엄마도, 아빠도, 갑자기 말이 없어진 내가 의아하게 생각되는 눈치이신듯 했지만...더는 묻지 않았다....
난 그날 밤에 누워서 어두운 천장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괜찮아...자고 일어나면 잊혀질 일이야..."
하지만....그 날이 악몽의 시작일것이란건....정말 꿈에도 난 몰랐다.....
난 아침에 유치원을 가려 나서면서 방 구석에 던졌던, <숟가락>이었던 쇳조각덩어리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일과 중에 깜짝 놀랄 만한 일이 생겼다. 유치원의 내 단짝 친구를 한 사내녀석이 윽박지르면서 혼내는 장면을 본것이다. 내 친구는 울고 있었고 그녀석은 득의양양한 표정이었다. 난 화가 나서 단박에 쪼르르 다가가 다짜고짜 그녀석의 어깨를 밀어버렸다. 그러자....그녀석은 날아갔다.... 휭...하고...
"아니!! 저 여자앤 뭐에요? 댁네 집은 잘 사나보죠? 애한테 뭘 먹였길래 그리 힘이 쎄요? 우리 애가 어깨가 주저앉았다구요!!"
"죄송합니다..."
"고정하시고..."
아빠랑 엄마가 진땀을 빼는게 보였다. 난 나때문에 일이 이리 된줄 알았기에 눈물만 흘리면서 고개를 계속 조아렸다. 내가 연신 잘못했다고 빌고 용서를 구하자, 그 아주머니는 결국 화를 푸셨다. 그 아이는 나를 보면서 겁먹은 표정이었지만. 정말 미안해..잘못했어..하는 나의 몇마디에 배시시 웃고 나에게 다가와줬다...
그렇게..황당한 일이 몇번 있었던 것으로 나의 유치원 시절은 끝나고...초등학생이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진짜는 그때부터였던 것이다...
초등학교 1학년때, 아이들끼리 다툼이 일어났을 때, 여자애들 편을 들면서 남자애들을 상대로 주먹질을 했을때...그 아이들의 관절은 무사하지를 못했다.
부러져버린 아이는 없었지만, 내 손에 의해서 어깨가 주저앉거나 한 애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어린 나이들이었기에 빠져버린 어깨를 끼우기가 쉬웠던 일은 참 다행이다.
나한테 겁먹은 아이들도 많았지만, 그래도 내가 좋다면서 다가오는 아이들 역시 많았기에(그 애들은 남자애나 여자애나 내가 이쁘다고 그랬다. 뭐가 이쁘다는건지...) 왕따는 당해본적이 없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아이들이 있었기에, 날 아껴주고 좋아해주는, 친구들이 있었기에 그 어둠의 늪에서 헤어나올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어쨌건 초등학교 1학년때도 역시 유치원생때랑 비슷한 일이 더했음 더했지, 덜해지지 않고 이어지자, 난 점차 생기를 잃어갔다. 난 보통 애들하고 틀려도 너무 틀렸던 것이다. 힘! 그놈의 힘이 점차 강해지고 있었다. 원하지도 않는데, 바라지도 않는데, 갖고 싶다고 생각한 적조차도 없는데!!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것이 내 몸을 잠식해갔던 것이다. 난 점점 시도 때도 없이 힘이 몸속을 휘돌고 내달리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것들은 멋대로 나의 팔과 다리를 지배하면서, 어디 힘쓸때 없나, 부실것이 없나 하고 표면적으로 날뛰려는 양상을 띄고 있었다.
그리고 그 힘은 점점 나의 일상생활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물론 아빠랑 엄마가 크게 놀라실만큼, 집에서 뭔가를 저질른 적은 없다.
몸에서 이상한 반응이 오거나 느껴지거나 하면, 난 아이들과 놀고 오겠다면서 집 밖으로 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그런 이상한 느낌이 사라지면 집으로 돌아오는 식으로 부모님에게 걱정을 안끼쳐드리고 나의 힘을 숨길수 있었다...
난 결국 결단을 했다. 초등학교 1학년때부터, 난 산행을 했다. 집 근처에 있는 산을 매일, 꼬박꼬박 오르면서, 거기에 있는 나무나 돌, 흙을 상대로 힘 조절을 하는 연습을, 고행을 시작한 것이다. 내 몸에 이상한 기운이 떠돌때 난 모든걸 제치고 산을 올랐다.
난 8살때 이미, 내가 까딱하면 남에게 대단히 위험한 인물이 될수 있다는걸 깨달은 셈이다. 그럴수밖에 없었다. 내가 늦게 깨달으면, 반드시 누군가가 크게 다치고, 상처입을 테니까. 그건 절대 사절이었다.
난 그때부터 돌을, 나무를, 흙을 상대로 매만지면서, 잡으면서, 쥐면서, 쳐보면서, 여러 방법으로 힘의 강약 조절 운동에 들어갔다.
돌과 흙은 몰라도 나무는 생명체이기에, 되도록이면 죽은 걸 골라서 연습을 했다. 얇고 가는 나뭇가지를 숟가락,젓가락 대용으로 삼아 손에 쥐어보는 행동, 그런 연습, 노력을 끊임없이 했다.
하지만....쉽지 않았다. 아니, 어려운 일이었다. 초 1때 나의 힘은 이미 성인 남성의 근력이 낼수 있는 수준을 우습게 초월한 상황이었었다. 그리고 그 힘은 하루가 지날수록 점차 커져가고 있었다. 그런 거대한 힘의 강약 조절을 해낸다는게, 내가 내고 싶은 힘만큼 딱 뽑아내서 쓸수 있다는게, 그렇게 간단한 일일리가 없었다는것을 당시의 나는 몰랐던 것이다.
산을 오르면서, 그런 식의 운동에 들어갔지만, 나는 점차 기운이 없어지고, 말이 없어지는, 자폐 현상을 겪기 시작했다. 밥맛도 없었고, 나같은게 살면 세상에 너무 위험할것 같다는 생각에, 그 어린 나이에 이미 나는 자살을 수십, 수백차례 생각했었다.
나의 눈동자는 점점 검게 가라앉았고, 눈빛이 죽어가기 시작했다. 초등학생때 나는 자폐, 실어증의 증세를 보였다. 그때부터 몇년동안, 나의 마음은 그렇게 주저앉고, 정지해 있었던 것이다...
부모님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셨다. 그래서 나를 데리고 정신병원에 데리고 가려고 기를 쓰셨지만, 내가 끝끝내 고집을 부려서 그쪽에 신세를 진 일은 없다.
나는 염려했던 것이다. 하나뿐인 딸, 그 딸이 정신이 이상해서 병원에 들락날락한다고, 그런 애를 둔 부모라는 소리가 주위에서 나고,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는건, 절대 용납할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아버지, 어머니에게 그런 불명예를, 슬픔을 절대로 안겨줄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를 악물었다. 7년동안, 단 하루도 산을 오르는걸 쉬지 않았다. 중학교 1학년이 되던 그때까지. 힘이 완성되던 그날까지. 나 최강희는 피나는 노력을 했다.
물론, 그 10년 가까운 세월동안(6살때부터니까), 내가 힘들지 않았다고 하면, 이겨내기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고 하면 그건 완전 거짓말임에 틀림이 없다.
그 기간동안에, 난 진짜 눈물나게 노력했고, xx산의 일부 지형이 변해버릴정도로 애를 쏟았다. 그 노력! 그 고생! 어느 누구도 알지 못할 것이다.
주저앉고 싶을때도 많았다. 절망이 닥쳐올때도 많았다. 자폐가 심할 때, 세상과 단절한채 학교도 휴학하고 집에서 일상을 보냈으니까.
가장 힘들었을때가, <경계식>이 내게 닥쳤을 때이다. 경계식...나는 그걸 그렇게 부른다. 내 안에 도사리는 어둠의 문을...
번민과, 고뇌에 시달리는 영역. 스스로를 죽이겠다는 자살의식.
바닥으로, 나락으로 가라앉겠다는, 무엇에도 얽매이고 싶지 않고, 관여하고 싶지 않다는 침잠심리.
그것이 바로 나의 경계식이다. 나의 눈동자가 죽는 시점. 내가 오감을 스스로의 의지로 떨어뜨려버리는 의식. 그 의식이 시작되는 기점이 경계식이다.
나의 뜻으로, 스스로를 죽이고자 할때, 내 스스로 가라앉고자 할때, 내가 머무는 곳. 나로 하여금 그 선을 넘어서게 하는 시점. 그게 바로...경계식...
난 과거에 경계식에 빠진 적이 있다. 자의의 구속. 자폐의 길. 그 암흑의 늪지대에 발목이 묶인 적이 있다.
스스로 빠졌다곤 하지만 그 또한 <구속>인건 틀림없기에, 나는 그것에서 빠져나오기가 정말 힘들었다. 그것에서 탈출하고 난 후에, 다시 한번 이 길에 빠지면 헤어나올수 있을까 하고 자문했을 때...나의 대답은...고개를 가로젓는 것이었다...
경계식에 빠져 허우적거릴 당시, 나를 그곳에서 구출해낸건, 건져 내신 것은...부모님....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나를 아껴주고, 나를 사랑해주는, 내가 가장 아끼고 존경하는 두 분.
그리고 집에서 죽음의 기운을 몸에 두르고 세상을 보려 하지 않던 나. 그런 나에게 꽃다발을 들고, 내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콜라를 사들고 위문을 와준, 병문안을 와준...소중한 친구들이 있었기에, 그런 고마운 이들이 있었기에....과거의 나는 경계식으로부터 벗어날수 있었다...
눈동자에 생기를 되찾은 이후, 난 아무리 힘들어도, 손에 쥐어진 모든게 으깨지고 찢어지고, 바스러져 먼지가 되어 흩날려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이를 악물었다. 9년!! 난 9년동안 암흑과 싸우고, 또 싸웠다. 그리고....중 1때....마침내...힘의 완성도.....제어의 완성도....이루어냈다....
14살때, 아버지와 어머니와 함께, 셋이서 오붓하게 아침식사를 했던 그 날...나는...스스로의 의지로....완력의 강약을 조절해서....부모님 앞에서....아무렇지도 않은 표정과...손동작으로....식사를 했다.... 밥을 먹고....국을 떴다...
그 단순한 손동작이...나에게 얼마나 벅차고 감격스러운 일이었는지.....설령 그 두 분들이라 해도 아실수는 없을것이다. 그 누구도 모를것이다. 그날, 나 최강희의 심정이 어떠했을지....난....아침 식사를 마치고...화장실에 들어가....세안을 했다....눈물을 펑펑 쏟으면서.....드디어 성공했다고....마침내 해냈다고....환희했다....그 날이...내 인생에서...가장 많은 눈물을 쏟아냈던 날이다....
경계식을 이겨낸 후에, 나는, 나의 성격에 변화가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힘의 강약 조절에 너무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탓인지, 자폐와 실어증을 겪고, 많은 번민과 복잡적인 감정심리에 대한 변천사를 끊임없이 겪었기 때문인지, 나의 감정에, <부작용>이라 할만한 것이 생겼다.
어릴땐 그렇지 않았다. 난 항상 상대를 배려하고, 위하고, 걱정했다. 8살때 산행을 하면서 그런 고행의 길을 시작한 것도, 순전히 남들을 다치게 하기 싫다는 마음 하나만으로 시작했던 일이다. 그만큼 나는 타인에 대해 깊은 이해심, 안쓰러움, 고마움, 감사, 배려 등의 좋은 감정을 많이 가지고, 지니고 있었던 여자애다.
하지만 경계식 이후로 나의 성격엔 부작용이 생겼다. 그것은 바로, <대단히 빠른 감정의 기복>, 즉 변화의 속도이다.
난 원래, 화가 나도, 어지간해선 잘 참는 성격이었다. 억누를수 있는 정도가 강했던 여자애다. 하지만, 살면서의 그 9년동안에 워낙 많은 일을 겪다 보면서, 난 상당히 다혈질인 여자애, 기분에 따라 움직이는 애가 되버렸다.
으쓱한 골목에서, 머릿수로 밀며 학생들의 금품을 갈취하는 나쁜 녀석들, 여자의 몸을 장난감처럼 생각하는 사내놈들, 남을 타고 억누르는데서 쾌감을 즐기고 환호하는 개자식들.
그런 새끼들을 보면, 그런것들이 시야에 들어오면, 난 결코 참지 못하는 성격이 되어버렸다. 그 자리에서 거의 처단하거나, 아주 작살을 내버리는 식으로 바뀐것이다.
그래서 난 살면서, 내가 보기에 <악>이라고 판단되거나, 빌어먹을 짓거리를 하는 인간들을 보면 결코 냅두지 않는, 아니, 오히려 거의 찾아다니면서 손을 보는 수준의 성격으로 변모했다. 난 그렇게 되버렸다.
하지만...동네 양아치 녀석들을 흠씬 패주고 집에 돌아오던 그 어느 날, 문득, (아아~ 이러면 안 되겠다...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그들도 사람, 인간이다. 변화의 계기를 아직 얻지 못했을 뿐인...불쌍한 인간들, 가련한 인생들이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던 것이다.
물론, 지금까지도 역시, 인간망종같은 녀석들을 보면, 그 자리에서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여전히 한다. 내 감정이 대단히 빠르게 변하는, 기복은 <부작용>이기에 그건 어쩔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난 깨달았던 것이다. 내가 정말 화가 나서 날뛰는 날에는, 누군가 크게 다치고, 죽겠구나. 그가 비록 악인이지만 사람일지어도... 죽여버릴지도 모르겠구나...하고.
그 날, 이 나에게, 하나의 성향이 생겼다. 결박. 구속. Bondgage라는 성향이, 스스로 묶이고 싶다는 성향이, 이 나의 마음 속에서 싹트는 계기가 되었던 날이다.
진정 내가 분노했을때, 난 내가 묶여 있어야 할 필요성을 깨달았다. 그런 상태일 때의 나는 철저히 결박되어져야 할 여자애라고 생각하게 된것이다.
M성향을 가지게 된 게 바로 그날이다.
난 인터넷에 들어가 Bondage관련 글을, 이미지를, 동영상을 검색하고 살펴보았다. 그 과정에서 어느 날, 붕대로 인해 몸이 미이라처럼 묶인, 가슴에서부터 발목까지 붕대로 몸이 결박되어진 여자의 사진을 보았다.
사진 안에는 쇼파에 누워 있는 여자 말고도 남자가 한명 있었다. 그 남자는 드러나 있는 여자의 맨발을, 정확히 말하면 발바닥을 간지럽히는 손동작을 취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 표정은 유쾌한 듯했다.
간지럽혀지는 여자도 입에 함박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내 시야에는, 물론 연출이겠지만 그 여자의 웃음이 그렇게 즐겁게 보일수가 없었다. 마치, 그 여자가 원해서 그런 간지럼을 당하고, 그런 웃음을 짓고 싶어하는 듯이 보였다.
그 사진을 보면서 나는 과거를 회상했다. 욕조에서, 비누칠된 나의 겨드랑이를 간지럽히던 아버지를, 그리고 그 간지럼을 싫어하는 척하면서도 은근히 즐기는것 같았던 나 자신을. 생각해보면 나는 그런것에서 즐거움을 얻고, 매일매일 아버지와 욕조에서의 시간을 보내고 싶어했던 듯하니까.
잠시 고민해보던 나는, 내 성향에서 그렇게 Tickling. 간지럼을 그날에 역시 추가하게 된다.
나는 기분이 안 좋을때 묶이고 싶어했으니, 묶여 있으면서도 여전히 기분은 안 좋을 것이다. 한번 달아오른 나의 감정은 쉽사리 가라앉지 않는 성격이 되어버렸으니까. 하지만, 그런 기분일때, 간지럼을 당하면 어떨까. 어차피 난 묶여 있으니 반항은 못할테고, 웃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기분이 안 좋을때, 웃고 싶다고 생각했다. 비록 그것이, 스스로 진정 유쾌해서 짓는 웃음은 아닐지언정, 간지럼 그 행위 자체는 이 나에게 웃음을 가져다줄 테니. 내게서 웃음소리를 내게 만들테니. 그 기분에 취하고 싶었다. 그 기분에 몸을 맡기고 싶었다. 간지럼당하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나는 <합의>라는 명목 하에 나를 묶을 수 있는 S를 찾기 위해 나서기 시작했다. 그래서 하루하루, 틈날때마다 인터넷을 키고 쓸만한 까페가 없나 하고 찾아보게 되었다. 썩 그럴듯한 까페들이 보이지 않다가, 마침내 찾아낸것이 고등학생인 지금에 찾아낸 TBM이다.
상당히 활성화된 까페. 이정도로 활발한 까페가 있구나 싶었다. 회원수로 보나, 접속수로 보나, 자료로 보나, 그 무엇으로 따져보든지간에 우리 나라에서 톱에 들만한 까페였다. 무엇보다도, 내가 원하는 두 가지, Bondage와 Tickling에 관한 것을 다 다루는 까페라는 점이 나의 마음을 유독 끌었었다.
힘이 완성된 후로, 그리고 그걸 통제할수 있게 된 후로, 난 나의 힘을, 공룡에 빗대어 인터넷에서 티렉스라는 닉네임으로 활동했다. 그 까페에도 역시 그 닉네임으로 가입했고...활동을 시작했다...그 까페에서의 활동이...그렇게 시작되었었다...
나는 그렇게....경계식, Tickling과 Bondage라는 성향이 내게 생긴 이유, TBM의 가입 계기를 회상해보면서...눈을 떴다....
"...프린세스?"
여왕은 그렇게 강희를 부르면서, 눈을 지그시 감고 있는 그녀를 불렀다. 강희가 눈을 감은채 제법 오랫동안 침묵했는데도 채근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녀가 워낙 지쳐보여서였기 때문이다. 강희의 얼굴빛은 여전히 파리한 수준이었으니까.
이윽고 강희는, 회상에서 벗어나 눈을 뜨더니, 여왕을 보면서 다시 말했다.
"좀전에도 말씀드렸지만...난 보통 사람하고...몸에 지닌 힘의 차이가...차원이 달라요. 항상 신경쓰지 않으면....목을 어루만진다고 하는 행위가...그 사람의 목뼈를 손쉽게 부러뜨릴수도 있고...친근감의 표현으로 어깨 위에 손을 올려보는 정도의 행위를 하고 싶을뿐인데....그 사람의 양 어깨뼈 관절을 나가버리게 할수도 있죠..."
이번엔 여왕이 침묵했고, 닥터가 물었다.
"아가씨가 힘이 쎄다는건 알고 있어. 하지만..아가씨는 지금 사우전드에 묶여 있네. 지금 힘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데...설마...그 경계식이란게...아직 아가씨에겐 감춰두고 있는 힘이 있다는건가? 그 경계식이란게.....쓸수 있는 힘의 정도를 더 높일수 있는걸 두고 말하는건가? 경계 라는 단어를 들먹이는것 자체가 이 나에겐 한계를 넘어서는 행위를 두고 말하는것 같이 들리는데?"
강희는 닥터의 말을 듣고 있다가 슬쩍 미소짓고 나더니 답해줬다.
"나름대로는...그럴듯한 추리. 멋있군요 박사님. 킥....하지만...아니에요. 경계식이란건...내 스스로...나를 가두겠다는 뜻이죠"
"...스스로를...가두어?"
닥터는 안경을 치켜올리면서 인상을 썼고, 설영이나 가연, 선민 역시 표정을 찌푸렸다.
설영은 화들짝 놀라서 물었다.
"무..무슨 소리야? 니 스스로 너를 가둔다고?"
강희는 입에 조소를 피워올렸다. 그녀는 닥터를 보던 시선을 돌리더니 여왕을 보았다.
"킥킥.....여왕님은...나를 미치게 만들거랬는데....소원대로 해드릴께요. 경계식에 들어가면 난 확실히 미친 여자애처럼 될테니....알아서 돌아버리는거니까 애써서 절 간지럽혀 미치게 만드는 수고는 안하셔도 되겠네요? 후훗~"
설영은 순식간에 얼굴빛이 파래지더니 외쳤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거야!! 그런 일이 가능하기나 할것 같아? 너...넌..."
강희는 여왕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말했다.
"그래서 제가 말했잖아요. 여왕님한테 좋을수도, 아닐수도 있다구요. 킥킥....난 나의 의지로 외부와 단절될수 있어요. 스스로의 뜻으로 세상과 차단되는 셈이죠....하게 되면...경계식은 살면서 두번째지만...그리고 나도 사실 그것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중요한 것은 다 알아요. 후후..."
"............."
"제 마음을 헝클어지게 한 후 마인드 컨트롤...매혹안이던가? 그걸 걸거라 했죠? 훗...안타깝지만...그렇겐 안될걸요? 난 여왕님의 꼭두각시를 할 생각이 없어요. 그런것이 되느니 차라리...내 뜻대로, 나의 의지로, 과거에 겪었던 그 늪에 들어가고 말래..."
설영은 닥터를 확 돌아보면서 물었다. 그녀의 얼굴은 한껏 긴장되어 있었다.
"닥터!! 이 애 말이 사실이에요? 자기 스스로 자폐에 든다는거잖아요? 이런게 의학적으로 가능하냐구요!!"
설영은, 강희가 설마 이런 선택을 할줄은 몰랐던지라 너무 당황해서 박사에게 괜히 성질부리다시피 목소리를 높였다.
닥터는 침중한 표정으로 서 있다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불가하오. 자폐는 스스로의 의지로 세상과 단절하는 점은 맞지만, 말 그대로 병이지. 자기가 원한다 해서, 그렇게 단기간에, 확 빠져들수 있는게 아니지. 아가씨는 지금...우리에게 협박을 하는건가?"
협박을 하는거냐고 닥터가 묻자 강희가 아하하 하고 웃었다.
"설마요...이렇게 아무것도 못하도록 묶여 있는 주제에 협박은 무슨...전 사실을 말했을 뿐이에요...제 말이 믿기지 않으신다면...뭐...차차 두고보시죠. 어차피 두분께는 시간이 남아돌지 않나요? 손해보실건 없을거라 보는데요"
강희의 대답중에 틀린 말은 없기에 침묵했지만, 닥터는 역시 꽤 당황한 얼굴이었다. 설영은 다시 강희를 돌아보았다.
강희 역시 설영을 시야에 담으면서 말했다.
"경계식은...내 맘대로...언제든 발동할수 있어요...살면서 언제든 그것에 난 빠져들수 있었죠. 내가 그것에서 헤어나온 이유는..그리고 헤어나올수 있었던 이유는...나를 아끼고 사랑해주는 소중한 분들, 그런 이들때문에 가능했던 것...그런 고마운 사람들을 위해서...난 경계식에서 벗어날수 있었고 이후 다시는 거기에 몸을 맡기지 않으리라 맹세했는데...여왕님이...박사님이 저에게...이런 선택을 할것을 강요하는군요"
"내...내가 언제...."
설영은 인상을 쓰면서 말을 이으려 했지만 강희가 더 빨랐다. 강희의 눈은 웃고 있었다.
"왜요? 이건 여왕님께서 원하던 것 아닌가요? 내가 미쳐버리길 원했잖아요? 내가 돌아버리길 원했잖아요? 그럼 이제 됐어요. 축하드려요. 제가 이루어드리죠. 그 바램은...킥...하지만....그 이상은...안돼요..."
".............."
강희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면서 말했다.
"두 분은....나에게...완벽한 구속을 안겨주었어요...그 점에선...아까 말했듯이..경의를 표하겠지만....나 최강희....결코 이런 구속, 이런 방식을 원하지 않았어...내가 끝까지 거절의 뜻을 밝혔는데도....끝끝내 나를 이렇게 옭아매다니....용납 못해...인정 못해요....그렇기에...분명히 말하죠...
난....그 누구에게도....억지로...강제로 휘둘리진 않아....나의 몸은 비록 이지경이고...날 꼼짝 못하게 해서...내 육체를 가져도....의지까지는 못 빼앗는다는것을 보여드리죠...여왕님과..박사님께....나의 긍지...자존심까지는...뺏기지 않는다는 것을..
두 분은..두 분의 S를 추구하세요. 난...비록 몸은 사로잡혔지만...나의 의식은 내 심층에서...스스로를 구속하고..옭아맬테니...까짓거 내 몸뚱아리정도쯤이야...맘대로 갖고 노세요. 대신...반응은 기대 하지 마시죠. 인형놀이가 될테니. 김빠진 콜라가 얼마나 맛없는진 아시죠? 킥...."
여왕도 닥터도, 한껏 눈썹이 찡그려졌다. 그런 그들을 똑바로 쳐다보면서, 강희는 말했다.
"이것이....나.....최강희의...마지막 남은 의지....선택....자존심이니....뺏어갈 생각은 마세요...어림도 없으니까....."
여왕은 인상을 쓰면서 이를 갈다가 강희의 볼을 확 잡으면서 말했다.
"우!! 웃기지마!! 넌 나의 것이야!! 너의 몸! 마음! 다 내꺼야!! 내꺼란 말이야! 넌 나의 딸이 되어야 해! 경계식? 흥! 그런게 가능할리도 없겠지만, 설령 가능하다고 쳐도! 오히려 그때를 역이용하면 돼! 너의 이성이 제정신이 아니라면, 차라리 잘 되었지! 그때를 틈타서 너에게 매혹안을 걸면 되니까!!"
여왕은 강희를 죽어도 포기 못할 눈치였다. 그정도의 기세가 보여졌다. 강희는 피식 웃었다.
"소용없을걸요? 매혹안이란게 어느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내가 가라앉을 심층계엔 도달하지도 못할거에요. 너~~무너무 깊은곳이거든요? 나 거기 한번 빠져봐서 아는데..장담코...이번에 들어가면 난 못나와요.....괜한 짓 마시길..."
설영은 이빨을 뿌드득 갈더니 독설스럽게 외쳤다.
"흥! 계속 간지럽히면 니가 그런걸 할 새가 없을걸? 경계식이랬지? 그걸 쓸 기회를 주지 않을거야!! 일절 딴 생각을 못하도록 계속 티클링을 하면 되겠지. 그럼 넌 머릿속에 딴생각을 할 틈이 없을테고 말이야. 그럼 기다리고 있다가 매혹안을 걸면 돼."
강희는 그것도 예상한 듯이 웃으면서 바로 받아쳤다.
"킥킥....소용없어요...경계식의 발동조건은.....가만히 있는 평상시의 나일땐 그걸 하기가 힘들죠. 시간이 더 많이 걸린다 해야 하나? 하지만...이렇게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나를 몰아붙이면...아주 쉽답니다...전 지금 무척 지쳐 있거든요? 그냥 이거저거 다때려치고 쉬고 싶은 심정이에요. 지금 이런 심리상태의 저라면...오히려 제겐 더 유리하죠. 이런 상황이면 지금 당장에라도 들수 있을것 같은데...후후..."
여왕은 진저리치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런 그녀를 보면서 강희는 또박또박 말했다.
"절 손아귀에 넣었다고 아주 좋아하시는데....애석하지만 여왕님의 바램은 절반. 50퍼센트. 반쪽만 성공하겠네요? 후후...보아하니 여왕님은 사람의 몸은 물론이고 마음까지도 마음대로 할수 있다는것에 대단한 자긍심이 있으신것 같던데....애석하시겠지만...저는 예외니 포기해 주세요. 몸은 가져도 마음은 안될테니까요. 아하하.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세상엔 저같은 여자애도 있다는것을 말씀드리고 싶군요. 이 세상 모든게 여왕님이 원한다고 다 손아귀에 들어오는것은 아니라는것도 강조드리고 싶구요. 킥킥."
여왕의 프라이드를 깔아뭉개는 발언. 설영은 눈썹을 바들바들 떨었고 강희는 마침표를 찍듯이 말했다.
"좋으시겠어요? 제 몸도 가졌고, 미치는 꼴도 볼테니까요. 다시 한번 축하드려요 여왕님. 정신 나간 여자애 딸로 삼던 말던 잘 데리고 사세요. 경계식에 들어가면 저도 제가 어찌 되는지 아무것도 모르니까. 아참. 제 몸은 장악하셨으니, 마음껏 가지고 놀수 있겠네요. 반응은 없겠지만. 그래도 제 몸이 그렇게 좋다면, 그건 그것대로 여왕님이나 박사님의 만족에 들어가지 않을까요? 아하하~"
설영은 이젠 낯빛까지 확확 변하다가 부르르 몸을 떨더니 밖으로 나가버렸다. 심정같아선 또 티클링을 실행하고 싶었지만, 강희의 몸상태가 아직은 영 아니라고 판단되었기 때문에, 가연과 선민에게 특별한 지시를 내리치는 않고 나가버린 것이다.
닥터는 부리나케 화다닥 나가버리는 설영의 뒷모습을 보다가, 그녀와 대화할 필요성을 느끼고 같이 나가버렸다.
설영과 닥터가 나가자, 방에는 강희. 그리고 가연과 선민만이 남게 되었다.
여자애들은 다가와서 글썽이는 눈망울로 강희를 바라보다았다.
"언니..."
"강희 언니.."
강희는 여자애들의 젖은 눈을 바라보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얘들아...잘 들어"
"네?"
"무슨..."
질문을 하려 했지만 그녀들은 강희에게 다시 제지되었다.
"쉿! 그냥 듣기만 해. 여왕님이 나중에 오시면...이 말을 꼭 전해줘. 알았지?"
"뭐..뭔데요 언니?"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요...꼭 언니가 어디 가버릴것만 같잖아..."
두 여자애는 더더욱 울상이 되었지만 강희는 생긋 웃어주고는 입을 열었다.
"꼭 전해드려. 그러니까 너희들이 전할 말은............"
여자애들은 강희의 말을 들으면서 얼굴빛이 점차 무거워졌다. 그리고...강희의 말이 끝나자, 물수건을 가져와서 그녀의 몸을 닦아주기 시작했다.
거실.
쇼파에 앉은 설영이 독한 양주를 연거푸 들이키는 것을 보다가, 닥터는 인상을 찡그리면서 더는 못 두고보겠다는 듯 술잔이 들린 그녀의 손목을 잡아쥐었다. 하지만 설영은 강하게 그의 손을 뿌리쳤다.
"놔요!!"
닥터는, 설영에게 완력을 쓰기가 싫었기에 고개를 가로젓더니 그녀의 손목을 놔주었다. 설영은 다시 술잔을 입에 가져갔다.
설영은 입가에 술을 털어넣더니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아악! 정말!! 무슨 애가 저렇게 완강한거야!!"
닥터는 얼굴을 찌푸리다가 그녀를 달래듯 말했다.
"진정하시오. 여왕님. 자폐라는건 그렇게 자기가 마음먹었다고 단박에 들수 있는게 아니라고 말했잖소? 시간의 경과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나타나는게 자폐란 말입니다. 저 아이는 지금 우리의 심리를 자극해서 탈출을 꾀하는거란 말이오"
설영은 입술을 꽉 깨물고 있다가 닥터를 보았다.
"...그렇겠죠? 후....나도 듣고 믿지는 않았지만...그런게 가능할리가 없는데도...."
설영은 혼자 중얼중얼대다가 핫! 하고 생각난듯이 다시 강희의 방으로 뛰어갔다. 닥터는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있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쯧쯧...그러다 당신이 먼저 쓰러지겠소...."
설영은 다시 강희가 누워 있는 방으로 들어와서는 그녀를 보았다. 가연과 선민이 강희의 몸을 물수건으로 닦아주고 있었고, 강희는 눈을 감고 있었다.
강희가 자지는 않는다는것을 알기에 설영은 재빨리 다가와서 곧바로 외쳤다.
"잘 들어! 그 경계식인지 뭔지...난 믿지 않아. 넌 지금 나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걸거야. 하지만...만에 하나 그게 사실이라 쳐도...넌 그걸 못할거야"
강희는 갑자기 무슨 소리인가 싶어 눈을 슬쩍 뜨고 여왕을 바라보았다.
"무슨..."
강희는 질문을 하려 했지만 설영이 갑자기 아하하 하고 웃더니 강희에게 조소를 날리면서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마치, 비장의 카드를 꺼낸다는 듯이..
"인질이 있다는걸 알아야지. 만에 하나라도 니가 그런 짓을 하면....후후...유정이가 무사할지 모르겠네?"
"............"
강희는 그 말을 듣고도 무뚝뚝한 표정이었다. 설영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점점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너...너...설마!!"
그녀는 정말 설마 하는 심정을 담고 강희를 보았다. 이번엔 강희 쪽에서 입가에 미소를 피우더니 말했다.
"훗....난 이제 지쳤어요...내겐 힘도 없고...유정이를 구할수 있는 상황도 못 되죠...어차피 경계식에 들면 난 아무 상황도 인지할수 없어요. 말 그대로 외부와 차단되니까. 유정이를 죽이겠다구요?...정말 슬픈 일이지만...내겐 방법이 없군요...내가 할수 있는 선택은..이것뿐이에요..."
설영은 눈을 찢어지게 부릅떴다. 설마하니 최강희가 한유정을 포기하겠다는 뜻을 비칠줄은 몰랐던 것이다. 이게 최후의 카드였는데...
설영은 강희의 마음속 심리를 파악하기 위해, 그녀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면서 다시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정신계에 최고의 능력을 지닌 그녀이니만큼, 상대의 눈을 보면서 이야기하는것이 아무래도 감정동향 파악에 훨씬 쉬웠기 때문이다.
거짓말일거야 하는 마음으로, 설영은 강희의 마음을 슬쩍 떠봤다.
"노..농담 마. 유정이는 너의 가장 친한 친구잖아? 안 구할거야? 탈출해야지? 그래서 구해야지? 그래야 하잖겠어? 응?"
강희는 설영을 멀뚱멀뚱 바라보다 아하하 하고 낭랑한 웃음소리를 내더니 정말 웃긴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면서 말했다.
"여왕님은 참으로 절 웃기시네요. 지금..도대체 저에게 뭘 바라시는거죠? 제가 탈출하기를 바라기라도 하는건가요? 절 이지경으로 해놓고?"
"그..그건..."
설영은 순간 할말이 궁해졌다. 강희는 다시 말했다. 입가에 조소를 문채로.
"도대체 지금 내가 뭘 할수 있죠? 이런 상황의 나보고..유정이를 구해야 하지 않겠냐구요? 아하하...정말 재밌네요....할수 있다면...정말로 그럴수 있다면 진작에 했겠죠...하지만..그럴수 없다는 현실이 슬플 따름이에요...아무튼...유정이를 이용해서 제 결심을 돌릴 생각을 하셨다면...잘못 짚으셨네요. 소용없으니까..."
설영은 입술을 잘근거리다가 말했다.
"내가 지금 불러서 죽어버리라고 그 애한테 말한다 해도?"
강희는 피식거렸다.
"그럼 난 당장에 경계식을 발동하죠...맘대로 하세요..난 세상의 빛을 안보고 말테니..."
"!!"
설영은 당황했다. 강희의 눈동자에서 진심임을 엿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하지만...도대체 그 경계식이란게 진짜 가능하긴 한거야? 스스로 폐인이 된다는게?"
그게 변수였다. 만에 하나라도 정말 그런게 가능하다면, 최강희의 마음까지 사로잡고자 하는 여왕으로서는 완전 다 된 밥에 재뿌려지는 격이기에 쉽사리 도발을 못하는것이다.
설영은 잔뜩 인상을 쓰고 있다가 가연과 선민쪽을 보더니 지시했다.
"...오늘은 몸조리를 잘 해주도록 해. 그리고..디저트는 억지로라도 먹여. 안 먹으려 하면 간지럽혀서라도 입을 열게 만들어. 뱉어내려 해도 강제로 먹여."
가연과 선민은 고개를 조아렸다.
"네 여왕님..."
설영은 다시 말했다.
"디저트를 들게 한 후에....에테르로 바로 재우고....씻긴 후에 내 방에 눕혀놔...오늘은 내가 직접....밤새 안마를 해줄거야...."
다시 한번 여자애들이 고개를 조아렸고, 설영은 그렇게 일단, 물러났다.
설영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강희는 속으로 생각했다.
"불쌍한 분....."
금요일.
가연과 선민은, 여왕의 방 침대에 누워 잠들어 있는 강희를, 씻기고, 머릿결을 정리해준 후에, 사우전드에 구속하고 나서, 아침 식사 준비까지 마친 후에, 강희가 눈을 뜨기만을 기다렸다. 하지만...그녀는 눈을 뜨지 않았다.
"...언니?"
"강희 언니?.."
예상 시간이 1시간 이상 지났는데도 강희가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를 않자 두 여자애는 불안한 표정이 되어서 그녀의 뺨을 더듬고 몸을 흔들어보았다. 하지만, 강희는, 무표정 그 자체로 눈을 감고 있을 뿐이었다.
선민은 당황한 채 강희의 몸을 막 흔들면서 그녀를 부르기 시작했고, 가연이 방을 뛰어나가 여왕에게 내달리기 시작했다.
"여, 여왕님!!"
설영은 인상을 찌푸렸다. 아침부터 왠 소란이야..하는 심정으로 그녀는 눈썹을 찡그렸지만....
"프..프린세스께서...."
화들짝
설영은 놀라서 슬리퍼도 벗어던지고 강희의 방으로 내달렸다.
화다닥
그녀는 눈을 감고 있는 강희의 뺨을 흔들어보고 살짝 쳐보기도 했다. 하지만...강희의 감겨진 눈은 뜨일 줄을 몰랐다.
"!!"
설영은 검지손가락을 강희의 코 밑에 가져다 대보았다.
"이..이럴...."
숨을 쉬는건지 안 쉬는건지조차 구분을 못할 정도로, 강희의 숨결은 미약했다. 설영은 다시 강희의 목과 손목을 잡아보면서 경동맥과 대동맥을 살피기 시작했다.
"왜..왜 이러지?"
미약했다. 미약해도 너무 미약했다. 설영이 인상을 한껏 찌푸리면서 닥터를 부르려 하는데, 그때 어느새 왔는지 그는 그녀의 옆에 다가와 쓰윽 손을 뻗었다. 강희의 눈쪽으로.
"..............."
그는 강희의 눈동자를 살폈다. 동공이 정지된듯 미동도 없었다. 그는 그렇게 그녀의 맥이며 동공의 상태 등. 몇몇 군데를 짚어보고 점검하더니 설영을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은 심각할 정도로 긴장된 G빛이었다.
"...지독하군....이정도면 식물인간 아니라....거의 코마상태로 봐도 이상할게 없소....."
설영은 비명을 질렀다.
"뭐..뭐에욧?!!"
닥터는 침중한 표정이 되어서 안경테를 올려쓰더니 중얼댔다.
"믿기지가 않는군...이런 게 가능하다니......"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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