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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자(無名者) - 1부4장 ← 고화질 다운로드    토렌트로 검색하기
16-08-22 00:50 1,033회 0건
*********무명자(無名者) 1부. 시련(試鍊)***************

1부 2장. 악몽의 계속 (3)***************



박재형의 말에 따르면 그는 상당히 능력 있는 교사였던 모양이다.
하지만 기업과는 달리, 교사들의 사회란 게 능력 있는 교사가 대접받는 곳은 아닌 모양이었다.

박재형은 학생들의 수준과 이해도 등을 꼼꼼히 점검하고, 그에 맞춰 교과서는 물론, 여러 문학 서적이나 신문 등을 편집하여 자체적으로 교재까지 만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박재형은 여러 동료 교사들로부터 그리 좋은 평을 들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자연히 다른 교사들의 수업과 비교가 되기 마련이니, 괜히 일을 만들어서 동료 교사들 피곤하게 한다는 반응이 나오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을까.
그래도 그에게 수업을 들은 학생들은 절대 다수가 박재형의 수업에 호평을 보냈고, 덩달아 올라가는 학부모들 사이에서의 성원도 대단했다.
급기야 시(市)나 전국 규모로 행해진 논술 발표회 등에서 장관 표창을 받기까지 하자, 박재형과 비교되는 다른 동료 교사들에 대한 학생과 학부모들의 불만은 높아졌다.
이에 동료 교사들은 박재형의 의욕에 찬 수업을 그만둘 것을 종용했고, 그딴 식으로 해서 촌지 받아 챙기려는 거냐는 노골적인 비난까지 받기에 이르렀다.
견디지 못한 박재형은 사표를 냈고, 자신의 소신대로 가르칠 수 있는 학원을 하나 시작하게 된 것이다.

적금과 보험 등을 모두 깨고 빚까지 내어 학원을 열었지만, 쉬운 게 아니었다.
학원을 본 궤도에 올리기 위해 학교에 근무하던 시절의 몇 배나 되는 노력을 기울이며 애쓴 끝에, 어느 정도 자리가 잡혀 한숨을 돌리게 되었다고 했다.
예전의 유명세를 기억하는 학부모들이 자녀들을 보내준 것도 있었고,
열심히 가르친 보람이 있어 입소문을 타게 된 것이 크게 작용했다.
나중에는 면접 등을 통해 학원생들을 골라 받아야 할 정도로 잘 나아가게 되어,
몸이 조금 힘들긴 해도 수입이 쑥쑥 늘기 시작했다.
빚을 다 갚고, 학원을 내기 위해 해약했던 적금과 보험 등을 예전보다 몇 개 더 들 수 있을 정도가 되어서 하루하루가 즐겁기만 했단다.

학원은 주상 복합 건물에 임대를 해서 냈는데,
위층에 입주해있는 집의 딸인 초등학생 이미경이 자신의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고 한다.

애가 똑똑하고 붙임성이 좋아서,
무척이나 딸을 갖고 싶어 했던 박재형에게는 그렇게 귀여워 보일 수가 없었다고 한다.
학원에 다닌 후로 애가 성적도 올라가서 그 집의 부모님들과도 꽤 친해지게 되었대나?

문제의 그날,

일찍 학원에 나온 박원장은 교재를 챙기는 등 그날의 강의를 준비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불쑥 그 아이, 이미경이 들어오며 인사를 했다.
이른 시간인데 웬일인가 싶었지만 반가운 마음부터 들었다고 한다.

박원장에게 살갑게 굴었던 미경이는
의자에 앉아 교재를 챙기고 있던 박원장과 책상 사이에 끼어들더니,
그대로 박원장의 무릎 위에 앉았다.
그리고는 ‘이게 뭐예요? 혹시 시험문제예요? 깔깔’ 하며 책상 위의 책을 뒤적였다고 한다.

그런 미경이가 너무 귀여웠지만,
조금 방해가 되어 미경이를 안아서 옆에 내려놓고, 이렇게 일찍 웬일이냐고 물었다고 한다.

학교 행사 때문에 일찍 왔는데 집에 아무도 없고 밥도 없고 그래서 그냥 학원에 왔다고 했다.
박원장은 얼른 지갑에서 만 원짜리를 하나 꺼내 건넸다.
놀라 사양하는 미경이의 등과 엉덩이를 몇 번 토닥여주며,
얼른 가서 맛있는 거 사먹고 게임도 좀 하고 오라며 등을 떠밀 듯 내보냈다고 한다.

미경이는 고맙습니다, 하면서 생글거리며 예의바르게 인사를 했고,
박원장은 늦둥이 딸에게 용돈을 준 것 같은 기분이 되어 흐뭇했대나?

그런데 그 다음날 머리가 짧고 체격이 단단한 사람들이 학원에 우르르 들어왔다고 한다.
그러더니 박재형씨 맞느냐고 확인하고는 그대로 박원장을 체포했다는 거였다.
얘기를 들어보니 긴급체포인 것 같았다. 바로 현성이 당했던 그것이었다.

조사 받는 과정에서 알게 되었지만,
학원에 아르바이트 언어영역 강사로 채용한 E여대 졸업반 학생의 신고로 일어난 일이었다.
학원생중 하나가 학원장에게 성추행당하는 모습을 목격했다며 박재형을 고발했다고 한다.
그리고 입막음용으로 아이에게 돈을 주는 장면이라며 사진까지 찍어 증거로 첨부했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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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성은 그 말이 거짓말 같지가 않았다.

“원장님, 정말 그게 다입니까?”

“정말이에요, 선배님.
저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고, 그냥 귀여워서 그런 것뿐이고, 미경이도 웃으면서 갔다니까요.
그런데 그 망할 계집년이… 큭, 끄윽…”

이야기를 털어놓는 과정에서 감정이 격해졌는지 박원장은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거짓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경험을 통해 단련된 현성의 감(感)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경찰에서는 아무도 안 믿어주죠? 무조건 인정하라고만 하죠?”

박원장이 눈물이 맺힌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현성을 쳐다보았다.

“맞아요, 맞습니다. 제 말은 아예 듣지도 않으려고 해요.”

“변호사 부를 수 있으면 불러보라고 하면서 큰소리치죠?”

“맞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아세요?”

한숨을 쉬며 털어놓는 이야기를 들어보니 앞뒤가 맞았고 거짓말이 아니라는 느낌이 왔다.
현성만큼은 아니라 해도, 참 꼬여도 더럽게 꼬인 경우였다.

박원장의 말의 신뢰도를 높여준 것은 미경이의 부모님이 보냈다는 편지였다.
죄송하다며 오히려 미경이의 부모님이 사과를 하면서,
어떻게든 일을 빨리 수습할 테니 아무쪼록 몸조심하시라는 내용이 가득 차있었다.

박원장의 얘기를 들어보니,
그날 미경이 네의 친정 부모님이 교통사고가 크게 나서 그걸 수습하느라 미경이의 부모님은 얼른 뛰어갔고,
그 와중에 미경이가 혼자 남겨진 상황에서 이런 사건이 터진 거였다.

게다가 병원의 중환자실이고 해서 휴대폰도 꺼놓은 바람에,
경찰이 미경이의 일 때문에 부모님에게 연락을 하려고 해도 연락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미경이의 보호자로 학교 담임교사가 대신 불려오게 되었는데,
일이 꼬이느라고 그랬는지, 그 교사는 그 여대생과 학교 선후배였고 서로 아는 사이였던 것.

힘을 얻은 그 여대생은 인터넷에 글을 올리는 등 사건을 여론화하며 설쳐댔고,
삼류 언론들은 학원장의 학원 초등여학생 성추행, 인면수심(人面獸心) 어쩌고 하며 떠들어댔다고 한다.
그리고 담임 여교사까지 은근히 지원사격을 했다.

미경이의 부모님이 이를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검찰에 서류까지 올라간 상태였다고 한다.
한 마디로 속전속결로 처리가 된 것이다.

미경이의 부모님은 얼른 문제를 수습하려고 했다고 한다.
사실 재판부로 기소되기 전에, 검찰에서 잘 막으면, 기소유예는 물론, 사건 자체를 없던 것으로 만들기도 쉬운 편이다.

그러나 문제의 그 여대생이 또 나서서 설쳐대었다.
성범죄에서 오히려 사건을 숨기고 비밀로 덮어두려고 하는 어리석은 대처를 하여,
피해를 당한 어린이에게 오히려 죄책감을 갖게 하는 덜 떨어진 부모님이 어쩌고 하며 날뛴 것이다.
그리고 미경이의 담임교사까지 은근히 그 여대생의 편을 들었다.
여교사이고 여성단체에서도 활동하는 사람이기 때문이 아닌가 싶은데,
그 여자 때문에 미경이 부모님이 속이 상해서 미치겠다는 내용도 있었다.
교사라는 사람이 자기 제자인 미경이를 보호하거나 감쌀 생각은 않고,
그 여대생과 덩달아 설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바람에, 미경이는 오히려 극악한 성범죄의 피해자로 소문이 나서,
학교에도 다니지 못하게 되어 심리 치료를 받고 있다고 적혀 있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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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장은 거짓말을 하지 않은 게 확실한 듯했다.
박재형이 이런 편지까지 위조해서 갖고 다닐 이유는 없지 않을까?
미경이라는 여학생의 부모님이 이렇게까지 글을 썼다면, 이 사람은 정말 무고한 것이리라.

부모님도 당사자도 웃고 넘어가는 일을 이렇게까지 크게 부풀리는 그 여대생은 또 뭐고,
감싸주지는 못할망정 덩달아 떠들어대는 그 담임 여교사는 또 뭔가.
게다가 거기에 춤추며 장단까지 넣어주는 언론과 검경(檢警)은 또 뭔가!

현성이 박원장을 위로한 후 곶감을 나눠먹고 있는데, 다들 하나씩 돌아왔다.
신고식에서 현성은 이런저런 설레발로 얼렁뚱땅 넘어가면서 은근히 김석호에게 눈짓을 했다.
눈치 9단인 김석호도 자세한 걸 묻지 않았다.
방장과 배식반장이 그러니, 방 사람들 그 누구도 딴죽을 걸지 않았고 박원장의 신고식이 부드럽게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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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 박재형의 공소장(公訴狀)이 방에 날아왔다.
공소장은 당연히 서기(書記)인 현성의 손에 우선 들어왔다.
사건내용을 읽어보니 기가 막혔다.

‘피고인 박재형은 200X년 X월 X일 X시 경에 자신이 운영하는 OO 학원에서 피해자 이미경(당시 만 9세)을 무릎 위에 앉히고 몸을 더듬으며 자신의 성기를 이미경의 엉덩이와 성기 사이에 문지르는 등의 추행을 하였고, 이미경의 입을 막기 위해 현금 일만 원을 쥐어주며, 다시 엉덩이를 만지고 허벅지를 만지는 등의 추행을 한 것이다.’

원래는 이런 공소장은 봉사원,
즉 방장에 의해 검토되고 방 사람들에게도 그 내용이 다 공개되는 것이 보통이다.
대책을 논의하고 정보를 줄 것이 있으면 도와주겠다는 게 명분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수용생활의 무료함을 덜 수 있는 흥밋거리, 재밋거리, 이야깃거리가 되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리고 성범죄의 경우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어린이가 얽힌 경우라면 뭇매나 따돌림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뭇매를 주거나 따돌리는 그 사람들 역시 범죄자이면서 말이다.

현성은 공소장이 박재형의 말과 일치한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탄원서 등을 작성하는 데에 꼭 필요한 사건 번호와 죄명 등만 따로 적어놓은 후,
그 공소장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박재형의 눈에 고마워하는 눈빛이 뚜렷이 떠올랐다.
보고 들은 얘기가 있는 모양이었다.
방장 김석호는 공소장이 박재형의 것이란 걸 안 후부터 책을 들여다보며 아예 못 본체 했다.
방의 실세인 두 사람이 그렇게 나오니까 방의 다른 사람들도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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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식 시간에 빵과 우유를 쌓아놓고 같이 먹으면서,
방장 김석호가 현성을 다독이듯이 조심스레 제안했다.
차라리 술에 떡이 된 상태에서 뽕까지 맞고,
심신미약인 상태에서 한 일이라고 주장하는 수밖에 없지 않겠냐고.

전과가 12범이고 소년원부터 시작해 교도소를 들락거리며,
수많은 빵잽이들과 물총들을 접했던 자기의 눈으로 볼 때,
현성은 아무래도 진짜로 무고하다는 삘(feel?)이 딱 온다는 거였다.

어린 꽃뱀년들한테 걸린 게 분명하다는 견적이 딱 나오지만,
책만 들입다 파면서 공부만 해서 세상물정을 모르는 재판장들은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놈들이 아니라는 게 문제라며,
김석호는 핏대를 세우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초범에 대기업 사원이라면 대통령을 빽(back?)으로 둔 거나 마찬가지고,
술에 떡이 된 상태에서 얼결에 뽕까지 맞았다고 둘러대고,
심신미약을 주장하면서 눈물로 용서를 빌면,
작량감경(酌量減輕)(주1)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로 현성을 설득했다.

아무리 보고 또 봐도 자신의 눈에는 현성이 그런 범죄를 저지를 이유가 하나도 없어 보이기는 하지만,
딱 보니까 이런 상태에서는 도저히 무죄를 입증할 수 없다는 거였다.
그러니 어떻게든 초범에 심신미약을 내세워서 일단 최장기 집행유예라도 한 번 노려보자는 얘기였다.
그렇게 해서 일단 밖으로 나간 후, 증거를 수집해서 재심을 청구하는 게 어떠냐는 게 김석호의 말의 핵심이었다.

그러나 현성은 그럴 수 없었다.

자신은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그걸 인정하라는 말인가!

김석호는 잘 생각해보라며 현성의 등을 두들겨주었다.

명실상부한 방의 2인자이고, 사동(舍棟) 내에서도 꽤나 자리를 잡은 현성,
그리고 빵잽이로서 어지간한 교도관과 조폭들과 이야기와 안면이 통하는 김석호가 심각한 분위기를 잡자,
방 사람들이 저마다 슬슬 눈치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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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성의 1심이 벌써 5개월째 질질 끌며 늘어지고 있었다.
김석호의 말에 따르면, 현성처럼 피의자가 사건 전체를 일관되게 부인하면 재판은 길어지게 마련이라고 했다.
그 5개월 동안, 현성은 근대사법체계의 구조와 실체를 조금씩 알 수 있었고, 그 앎은 점점 현성을 절망의 언저리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검경(檢警)의 일방적인 폭력이라고 해도 좋을 조사에 혹독하게 시달리면서도 일관되게 자신의 억울함과 무고함을 호소해온 현성이었다.
현성에게 있어 이제 검경(檢警)이란 어떻게든 죄인을 만들어내고, 그에 맞춰 조사결과를 짜 맞추려는 집단으로 밖에 생각되지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판사라는 사람들에 대해서만은 어느 정도의 희망을 갖고 있던 현성이었다.
그들은 검경(檢警)과 같은 입장이 아닐 테니, 재판에서 자신의 억울함과 문제점을 하나하나 토로하면 들어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현성이 부닥친 현실은 현성의 조그마한 기대와 희망을 산산이 부수고야 말았다.
말만 재판이고 심리(審理)일뿐, 경찰과 검찰에서 작성한 조서의 확인 작업 정도에 불과했던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판사(判事)라고 하면 사건의 잘잘못을 가려서 올바른 판결을 내리는 사람을 연상하게 마련일 거다.
TV 등에 나오는 판관 포청천 같은 명판관(名判官)은 아니라 해도, 최소한 그런 노력을 하는 사람일 테고 그럴 권한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하리라.
하지만 현성이 경험을 통해 내린 결론은 그와는 완전 딴판이었다.

이는 마치 운동경기와도 같다고나 할까?
운동경기의 이름은 재판이고, 경기하는 사람은 피의자와 검사이며, 시합장은 법정(法廷)이다.
그리고 법정에서 피의자와 검사는 서로 자신의 주장과 증거 등으로 상대의 주장을 꺾어야 되는, 재판이라는 이름의 경기를 하게 된다.
그리고 법정에서 피의자와 검사의 겨루기가 규칙을 준수하며 행해지는지를 살피고 규제하면서,
피의자와 검사 둘 중 보다 더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것이 어느 쪽이냐를 규칙에 의거하여 판단한 후,
어느 한쪽에 승리했다는 판정을 내려주는 심판이 바로 판사였다.
그리고 그 운동경기의 규칙이라는 것은 그 잘난 법전(法典)이었고.

다시 말해서 판사는 진실을 규명할 권한도 없고 의무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다만 피의자가 제출한 탄원서나 법정에서의 변론, 그리고 검경(檢警)에서 제출한 조서와 증거 등을 살펴서, 어느 쪽 말이 옳은 것이냐를 판결(判決)하는, 말 그대로 판사(判事)로서의 의무만이 있을 뿐이었다.
진실규명과 조사 같은 것은 오롯이 경찰과 검찰, 그리고 피의자의 의무였다.

현성은 몸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대학시절 배운 근대사회의 법치주의라는 것의 실체를!
판사는 법리(法理)를 판단하는 사람이지 진실을 규명하여 억울한 사람을 구제해주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피의자가 검경(檢警)의 논리를 반박하여 뒤엎지 못하면, 설혹 피를 토할 정도로 억울하다 해도 결코 그 억울함을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을.
그런데 일개 자연인(自然人)에 불과한 피의자가, 권력(勸力)과 인력(人力)을 갖춘 검경(檢警)의 논리를 반박할 수 있을까?
그것도 인신구속(人身拘束)된 상태에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증거나 증인을 무슨 수로 수집한단 말인가!
그래서 변호사라는 사람들이 필요한 것이겠지만, 그들은 법률의 전문가일지는 몰라도 피의자와는 어차피 남남인 것이다.
검찰조사실에서 느꼈던 점, 인권을 위해서는 불구속재판이 자리 잡혀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를 현성은 재판정에서도 몸으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막바지로 접어드는 듯한 분위기의 한 공판이었다.
자신의 죄를 계속해서 부인하는 등 죄질이 좋지 않다며 검사는 현성에게 15년을 구형(求刑)하였다.
현성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빵잽이 김석호는 하얗게 질려서 돌아온 현성에게, 그건 겁을 주려는 공갈구형이라며 염려 말라고 했다.
법원의 앵무새 검사 놈은 짬밥이 낮아서,
Z도 모르면서 담당 검사가 써준 서류를 보고 법정에서 그 서류를 읽는 역할만 하는 것뿐이라고 했다.

구형(求刑)은 말 그대로 검사가 법전(法典)의 형량(刑量) 등을 근거로 하여, 이 피의자에게는 이만큼의 형(刑)을 내려달라고 판사에게 허락을 구(求)하는 것이다.
모든 점들을 다 고려하여 실제 형량을 확정짓는 것은 판사의 권한이었다.

어쨌든 김석호의 말을 듣고 보니 정말 그런 것 같았다.

검찰 조사에 불려 나갔을 때도, 조사하는 것은 줄곧 그 고약한 성격의 검찰 사무관이었다.
현성의 사건 담당이라는 검사는 검치(檢致) 첫날에 한 번 슬쩍 보았고, 그 뒤에 검찰 조사기한이 끝나갈 무렵, 마지막 검찰 조사 때나 한 번 얼굴을 본 것에 불과했다.
그래서 그 윤재근이라는 검사의 얼굴은 기억하고 있었지만, 법원의 검사는 그 검사가 아니었다.

김석호의 말이 이어졌다.

성폭력범죄및피해자보호에관한법률위반에 청소년보호법이 걸려 있다고는 해도,
강간치상이나 강간등상해가 아니기 때문에 걱정 없다는 거였다.
다만 특수강간(주2)이 들어가 있고,
총포도검화약류소지에관한법률위반과 향정신성약품에관한법률위반이 조금 걱정이기는 하지만,
많아봐야 7년이라는 거였다.

피해자와 합의를 보고, 그 합의서에 피해자가 피고인의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면,
아주 운 좋은 경우, 현성이 초범이니까 집행유예의 가능성도 있다며 김석호는 슬쩍 현성의 눈치를 보았다.

김석호는 일단 어떻게든 여기서 나간 후에, 다시 싸워보라는 자신의 예전 권유를 현성이 다시 생각해볼 것을 돌려서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현성이 아무 말이 없어서인지 김석호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합의도 안 보고 무죄주장을 계속 하면, 이 새끼들은 일단 괘씸하게 보거든. 겉으로야 사법정의가 어쩌고 그러지만 속은 뻔하지. ‘감히 너 같은 놈이 우리 나으리들한테~’ 딱 이거라고. 그러다가 완전 재수 없는 경우는 들었다 놓거나, 최악의 경우 올려치기로 10년 정도를 받을 수도 있다고.”

보통 검찰이 구형한 형량에 비해서,
재판부는 여러 가지 정황을 고려하여 조금 낮은 형량을 선고하는 것이 보통이다.
들었다 놓는다는 것은 검찰이 구형한 것과 똑같은 형량을 재판부가 선고하는 경우를 말한다.
그리고 2심에 가서 피해자와 합의를 봤다거나 피해자의 선처 부탁 등의 변동사항이 있었는데도,
2심 재판부에서 이를 무시하고, 1심과 똑같은 형량을 피의자에게 선고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흠칫 굳어지는 현성의 낯빛에 김석호는 자신의 말이 좀 심했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얼른 말을 덧붙였다.

“하긴 뭐 그건 쌍팔년도 스토리고… 요즘이야 뭐 법정에서 재판장 낯짝에 고무신짝이라도 던져서 명중시키지 않는 이상 그럴 확률은 거의 없다고 봐야겠지 암~! 기껏해야 7년이라고.”

기껏해야 7년이라고?
그러나 그 7년이라는 숫자도 현성에게는 악몽이었다.
현성은 아무 것도 잘못한 일이 없었다.
그러니 합의를 볼 생각도 없었다.
뭘 잘못했다고 합의를 보라는 말인가?

피해자라고 주장하는 쪽과 합의를 보는 순간, 피고인은 자신의 범죄 혐의를 인정한다는 얘기가 된다.
그동안 여기에서 보고 듣고 한 경험을 통해 현성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당연한 얘기였지만 현성은 도저히 자신에게 씌워진 그 혐의를 인정할 수 없었다.

현성의 아버지는 충격에 쓰러져 자리보전을 하고 있었고,
어머니는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구명운동에 힘쓰고 있다는 얘기를 접견을 온 후배, 한수를 통해 들을 수 있었다.

끈질긴 현성의 무죄 주장 탓인지 재판은 지금까지 계속 미뤄져왔지만, 현성의 주장에 재판부는 그다지 귀를 기울이는 기색이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이런 제도 하에서는 가장 피의자에게 큰 힘이 되어야 할 현성의 변호인은 별 도움이 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현성의 변호사는 국선(國選), 즉 변호인이 없는 형사재판 피의자에게 국가가 의무적으로 배당하는 것이었으니까.
국선변호를 해봤자 변호사에게 배당되는 수당이 몇 푼이나 되겠는가!
돈도 되지 않는 변호를 맡았는데, 피의자에게 유리한 증거 수집 등에 발 벗고 뛰어다닐 변호사가 있을 리가 없었다.

검사는 일벌백계(一罰百戒)가 어쩌고 하며 죄를 저지른 사람은 응당 그에 해당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뭇 거창한 말의 내용과는 달리, 말하는 태도나 어조는 무덤덤하기 짝이 없었다.
하루 종일 저 짓을 하니 피곤하기라도 한 것일까!
수십 명의 피의자들이 저 잘난 앵무새 검사에게는 자신의 하루 일과에서 처리되는 여러 명 중의 한 명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 피의자이건, 그 사람에게는 이 재판이 일생을 망칠지도 되살릴지도 모르는 중요한 일이다.

왜일까? 왜 지금 떠오르는 걸까?
대학 시절 교양시간에 배웠던, 그리고 그때는 절감(切感)하지 못했던 말이 기억이 났다.

열 명의 범죄자를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한 명이라도 억울한 사람이 생기게 해서는 안 된다는 말.


그와는 대조적으로, 일벌백계(一罰百戒), 즉 한 명을 호되게 벌하여 본보기를 보임으로써, 백 명이 조심하게 만든다는 그 말을 무덤덤하게 내뱉는 검사의 모습을 보는 지금보다 그 말이 현성의 가슴에 와 닿았던 때는 없었다.
무엇보다 그 말은 예전의 현성이 조소(嘲笑)를 보냈던 말이기도 했다.

마침내 1심의 한계시한을 넘기 전에 판결을 내려야만 하는 입장에 있을 터인 판사는 선고공판 날짜를 통보하기에 이르렀다.
선고공판, 즉 결심(結審) 날짜는 구속된 날짜로부터 6개월이 되기까지 5일을 남겨놓은 화요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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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밝았다.
화요일이었다.
오늘이 선고가 떨어지는 날이다.

이날의 아침식사 시간에는 누구도 밥을 비벼먹지 않았다.
멋모르는 신참이 마아가린 등으로 비벼먹으려고 했어도, 김석호는 요령껏 막으면 막았지, 욕이라고는 단 한 마디도 입에 올리지 않았을 테고 손도 대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이런 곳에서 통하는 미신이라면 미신이었고 금기라면 금기였다.

출정(出廷), 즉 심리(審理)나 구형, 선고 등을 위해 법정에 출두하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특히 선고를 위한 출정을 가는 사람이 그날 방에 있으면 방 사람들은 절대 밥을 비벼먹어서는 안 된다.
비빈다는 것은 밥과 여러 가지를 섞어서 뒤집고 엎고 한다는 것이므로, 재판이 비비꼬인다는 것과 통한다나 해서 재수 없다며 다들 금기시하는 것이었다.
그간 현성이 쌓아온 인덕이라면 인덕일까?
그런 것을 증명하는 듯 방의 아침 분위기는 지나칠 정도로 조용했다.

김석호가 완전 신품인 새 속옷과 양말을 건넸다.
그런 마음 씀씀이가 고맙지 않을 리가 없었지만 현성은 침묵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2174번 채현성. 출정(出廷)!”

아침 식사 후, 이런저런 준비를 마치고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바로 출정 통고가 왔다.


포승과 수갑에 겹겹이 결박되어 호송차로 법원을 향하는 현성의 마음은 무거웠다.
어떤 낙관적인 기대도 할 수 없었다.

검찰이나 법원 건물 내로 들어오면 포승은 풀리고, 수갑도 두 개에서 하나로 줄어든다.
교도관 법원경찰이 둘러싼 법정 밖 대기실에서,
다른 재판 대기자들과 함께 의자에 앉아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현성은 비참한 심정이었다.

꽉 닫힌 법정의 문 너머에서 희미하게 나무망치 소리가 들려오곤 했다.
눈물을 흘리며 나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희희낙락하며 수갑까지 풀린 채로 나오는 사람도 있었다.
아마 무죄를 선고받거나 집행유예가 선고된 사람이리라.

“2174번 채현성.”

현성의 번호와 이름이 호명되었다.
일어서는 다리에 쩌릿한 긴장감이 번졌다.
문이 열리고 자주 보던 법정 안으로 들어가면서,
높은 단상에 무표정하게,
그러나 경멸의 감정이 은연중에 드러나 있는 얼굴로 앉아 있는 그 판사를 올려다보았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심장이 쿵쿵거렸다.

“피고 성명과 수번, 주민번호를 말해봐요.”

“이름 채현성, 2174번, 주민번호 8XXXXX-1ZZZZZZ.”

“확실합니까?”

“확실합니다.”

“예, 아니오로만 답변하세요.”

“…예.”

“검사, 최후 발언하세요.”

법복을 입은 그 앵무새 검사가 서류를 쥐고 일어섰다.
그리고 안경을 고쳐 쓰고는 현성을 한 번 쳐다본 후 입을 열었다.

“피고는 어린 여학생들의 마음에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는 죄를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반성의 기미가 없는 등 그 죄질이 극히 좋지 않다 하겠습니다.
늘어만 가는 성범죄와 각박해져 가는 사회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서라도,
재판부의 엄정한 처벌을 바라 마지않습니다. 이상입니다.”

현성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정말 할 수만 있다면 저 검사의 코를 뭉개고 턱뼈를 부숴주고 싶었다.
억울하기 짝이 없었다.

“변호인, 최후 변론하세요.”

현성의 국선변호인이 일어섰다.
기대도 되지 않았지만 저절로 귀가 기울여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피고인이 비록 여러 죄의 혐의가 있다고는 하나, 피고인은 그 모든 혐의들을 부인하고 있으며, 그 부인 내용 역시 반복되는 진술 속에서도 조금도 어긋남이 없이 지금까지 줄곧 일관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피고인은 명문대를 최고의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던 사람이며, 국내굴지의 대기업에 바로 입사, 견실하고 훌륭한 직원으로 평가받던 사람으로서 곧 승진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평범한 가정 출신인 피고가 혼자서 그런 것들을 다 이루어내려면 대단한 절제와 노력을 기울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절제와 노력이 결실을 맺게 하려면 당연히 대단한 지적 능력이 필수적일 것입니다. 그런 지적 능력을 갖춘 피고인이 이러한 일들을 저지르면, 지금까지 피고인이 기울인 절제와 노력으로 이룬 이 모든 것들을 송두리째 파괴하게 되리라는 것을 과연 몰랐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요?

그러므로 그런 창창한 미래를 위험에 빠뜨리는 행동을, 그것도 명백한 증거가 남게 될 것이 분명한 자신의 주거지에서, 이렇듯 명석한 두뇌를 가진 피고가 저질렀다고 보기에는 석연치 않은 부분이 많으므로, 이 공소내용에 있는 범죄들이 정말 피고에 의해 저질러졌는가 하는 것에 대한 합리적 의심의 근거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한 모든 점들을 고려하여, 존경하는 판사님의 현명한 판결을 부탁드리겠습니다.”

현성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저 무성의한 변호사의 입에서 나온 말 치고는 제법 설득력이 있었다.
그러나 판사의 말이, 분명히 현성에 대한 적의를 담은 말이 이어졌다.

“피고인, 최후 발언하세요.”

판사의 말에서 명백히 드러나는 현성에 대한 저 적대감.
억울했다.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이 고무신이라도 벗어 들어서 판사의 저 낯짝에 집어던지고 싶었다.
하지만 참아야 했다.

“할 말 없습니까?”

“저는… 그런 짓을 저지른 적이 없으며, 그런 일을 생각해본 적도 없습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만 저는 무고합니다.
어느 한쪽의 말만 듣고 이런 식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분명 옳지 않으며…”

“네, 됐고요. 그럼 선고하겠습니다.”

판사는 현성의 말을 중간에 끊고 들어왔다.
존댓말이기는 했지만 현성에 대한 판사의 태도가 드러나는 것 같았다.
현성은 분노와 억울함으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법정이 조용해졌다.
판결문인 듯 종잇장을 집어 들고 있었다.
망할. 이미 다 결론이 나와 있으면서, 왜 최후 변론, 최후 발언 어쩌고 하는 건가.

“피고인 채현성에게 징역 7년을 선고합니다.”

땅땅땅

나무망치 소리가 법정을 울렸다.
현성은 분명히 보았다.
부장판사의 입술 끝이 묘하게 비틀어지며 한쪽으로 올라가는 것을.
그리고 오른쪽에 배석해있는 여자 판사가 매서운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는 것을.

어쩌면… 저들은 죄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미워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상념은 오래 가지 못했다.
현성의 옆으로 교도관이 붙더니 현성을 밖으로 인도한 것이다.




◐◑◐◑◐◑◐◑◐◑◐◑◐◑◐◑◐◑◐◑◐◑◐◑◐◑◐◑◐◑◐◑◐◑




갈 때는 포승에 묶여 수갑을 두 개나 채우고 같이 갔건만,
구치소로 돌아가는 길에는 포승도 수갑도 차지 않은 채로,
게다가 교도관들이 앉는 자리 바로 옆에서 농담 따먹기를 하는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호송버스는 교도관이나 호송 병력이 앉는 자리와 수용자가 앉는 자리 사이에,
쇠창살과 철사 그물이 튼튼하게 쳐져 있다.
그리고 복도와 일직선으로, 그 그물 사이에 쇠문이 달려 있는 구조였다.

저 사람은 그 쇠문 건너편에 타고 있었다.
저 사람과 이곳에 있어야만 하는 사람들을 나누는 저 쇠창살과 철사 그물은 이 버스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앞으로도 영원히 따라 다니며 주변 사람들과 사회로부터 이쪽 건너에 있는 사람들을 격리시키려 들 것이다.

선고 공판이 있는 날에 저렇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세 가지 경우였다.
첫 번째는 무죄 판결이나 공소 기각,
두 번째는 선고 유예(주3),
세 번째는 집행 유예다.

무죄 판결은 극히 드물다고 하지만, 공소 기각은 단순 강간의 경우 자주 볼 수 있는 예였다.
단순강간죄는 친고죄(親告罪), 즉 피해자의 고소와 처벌 의사가 있어야만 성립되는 범죄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그런 종류의 죄를 저지른 피의자가 1심 판결 전에 피해자와 합의를 본다거나 하여,
고소자가 가해자를 처벌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피력(披瀝)하면,
법원은 이를 사건으로 취급할 수 있는 권리가 사라지므로, 검찰이 제기한 공소를 기각하는 것이다.
당연히 피의자(被疑者)는 그 공소의 기각과 동시에 자유의 몸이 된다.

벌금 판결이 나오는 경우도 포함되긴 했지만,
벌금으로 끝나는 경우는 대부분 불구속 재판인 경우가 많아서, 구치소에 들어올 일은 별로 없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포승도, 수갑도 없는 저 사람이 그 누구보다도 대단해보였다.

구치소에 돌아와서 포승(捕繩)과 수갑이 풀리고,
인솔 교도관과 함께 방으로 돌아가는 현성의 발걸음은 한없이 무거웠다.

현성의 도움을 받아 이전부터 쩔쩔 매던 영어 과목에서 제법 점수가 올라간 사동 담당 교도관이
인솔 교도관에게서 현성을 인수 받았다.
교도관은 지그시 아랫입술을 깨물면서 현성을 맞아주었다.
방 사람들도 모두 현성을 반기기는 했지만,
몇 년 형을 받았는지,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누구도 묻지 않았다.
담당 교도관은 현성에게 담요 펴고 좀 누워서 자든지, 잠이 안 오면 누워서 눈이라도 감고 있으라고 했다.

현성은 이미 방의 2인자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사동의 거의 전 수용자의 항소 이유서나 반성문 등의 초고를 잡아주는 것 등을 통해
사동에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런 현성이 몇 년을 선고받았는지는,
현성이 돌아오기도 전에, 호송 임무를 맡은 교도관을 통해 이미 다 얘기가 퍼진 모양이었다.
분위기가 그랬다.

원래 일과시간에는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눕거나 이불을 펼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런데도 현성에게 꽤나 신세를 져왔던 탓인지,
그 담당 교도관은 방장인 김석호에게 환자 보고전을 소지를 통해 하나 내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은 진통제와 가벼운 수면제를 지급했다고 근무 일지에 기록할 테니,
보안과장이나 소장이 오지 않는 한은 괜찮을 거라고 했다.
그리고 마음 좀 가라앉히라며 현성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들기고는,
문을 닫아걸고, 자신의 책상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소지라는 말은 일본어의 청소를 뜻하는 소제(掃除)의 일본어 발음 소오지(そう-じ)에서 온 것 같았다.
형이 확정된 기결수들 중에서 뽑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소(所) 내의 청소나 배식(配食) 등의 잡일 등을 맡으며,
낮 동안 소(所) 내를 돌아다니며 교도관의 일을 보좌하는 수용자들이다.

이들은 여호와의 증인 등 비교적 규칙을 잘 따르거나 부지런한 사람들이 뽑혀 배치되는 게 보통이었다.
또 대부분은 이십대 초반이나 중반이었다.
나이가 많으면 아무래도 다루기 어렵다는 것 때문일까?
그리고 강력범 등이 뽑히는 경우도 거의 없었고, 대부분이 비교적 경미한 죄질이었다.

어쨌든 평소의 현성이라면 교도관의 그런 배려에 감사의 인사를 했겠지만,
지금의 현성에게는 그런 말이 나올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

어느덧 방에서 중간 정도의 위치가 된 박원장과,
현성을 형이라고 부르며 잘 따르던 방의 막내 조창문이 방구석에 현성의 이불을 두툼하게 깔았다.
그리고 박원장과 김석호가 현성을 조심스레 이끌어서 이부자리에 눕혔다.

조창문이 현성의 발언저리에서 부스럭거리더니, 발에서 양말이 벗겨지는 느낌이 왔다.
보통 때 같았으면 벌떡 일어나며 현성이 직접 벗었겠지만,
지금 현성은 일어날 기운도 없었다.
아니, 일어나고 싶지도 않았다.
양말을 벗어서 챙긴 조창문이 다시 조심스레 이불을 현성에게 덮어주었다.

고맙다고 말해야 했다.
그러나 현성의 마음속에서 계속 되뇌어지는 말은 한 마디 뿐이었다.

세상에 이런 법도 있어?! 난 아무 나쁜 짓도 하지 않았단 말이야!

그래, 그랬다.
현성은 분명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걸 인정하지 않았다.
그날 하루를 현성은 아무 것도 먹지 않았다.
아니, 먹을 수가 없었다.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미주(尾註)**************************************************************
주1) 작량감경(酌量減輕) : 범죄의 정상(情狀)에 참작할 만한 사유가 있을 때 법관의 재량으로 형벌을 감경해주는 것(형법 53조).
주2) 특수강간 : 흉기 기타 위험한 물건을 휴대하거나 2인 이상이 합동하여 강간하는 것
주3) 선고 유예 : 경미한 범죄 등에 대해 일정한 기간 형(刑)의 선고를 유예하고, 그 유예기간을 사고 없이 지내면 형의 선고를 면제해주는 것


◆글쓴이의 변(辯)*****************************************************************
건의나 지적, 오류 등등에 대해서는 제 작가집필실의 자유게시판이나 덧글을 이용해주시기 바랍니다.
환영하겠습니다. 사실 자유게시판이 너무 썰렁해서요. ^^;;
그리고 심각한(?) 덧글 외에, 제 글에 대한 감상이나 잡담성(?) 덧글도 환영합니다. ^^;;;

양해를 구할 점이 있습니다. 제 글은 연재속도를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부디 양해 부탁 드리겠습니다.

제 글이 조회수가 상대적으로 적긴 하지만, 덧글과 추천으로 응원해주시는 분들의 숫자는 조회수 대비 비율을 보면, 상당히 대단한 편이네요. 성원해주시는 분들에게 감사 인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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