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자(無名者) 1부. 시련(試鍊)***************
1부 2장. 악몽의 계속 (2)***************
수갑과 포승에 칭칭 묶여서 구치소로 이송되어, 신분 확인을 거치고 소지품 검사, 신체검사를 받았다.
그리고는 연두색깔의 플라스틱 재질 비슷한 것으로 만들어진 숟가락과 젓가락을 나눠주었다.
그 수저로 거친 밥과 이상한 국과 양념도 제대로 안 된 이상한 맛의 반찬을 먹어야 했다.
유치장에서 처음 먹었던 관식(官食)보다는 나았지만, 사식(私食)에 비해서는 형편없었다. 그래도 먹어둬야만 했다.
식사가 끝나자 검은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파란색 죄수복을 입은 사람들을 인솔해왔다.
그들은 황토색의 수용복과 고무신을 각각 한 무더기씩 쌓아놓고는 각자 맞는 것을 골라 갈아입으라고 했다.
지금 입고 있는 옷과 신발 등은 모조리 반납되어 따로 보관, 즉 영치(領置)될 것이니 빨리 고르라는 독촉이 이어졌다.
그 옷들에 가까이 가지도 않았는데도 퀴퀴한 냄새가 났지만 저게 아니고는 입을 게 없을 판이었다.
고무신도 짝이 제대로 맞는 게 없었지만, 어쨌든 최대한 발을 넣고 끌고 다닐 수 있는 것들을 골라 신었다.
지금까지 입고 있던 속옷과 신발, 소지품 등은 몽땅 따로 수거되어, 신분확인과 지문날인을 거쳐 밀봉되었다.
그리고 조잡한 천 위에 역시 조잡하게 인쇄된 번호가 찍혀있는 번호표와 방번호를 받았다.
또 각자 폭 2cm에 길이는 15cm 정도 될 듯한 아크릴판도 하나씩 지급되었다.
현성의 것은 노란색이었는데 유성펜으로 쓴 것인 듯 현성의 이름과 생년월일, 혐의를 받고 있는 죄명이 씌어 있었다.
흘낏 좌우를 보니 하얀색인 사람도 있었고, 파란색인 사람도 있었다.
“번호표와 방번, 패찰 다 받았죠? 절대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잊어버리면 여러 가지로 골치 아파지니 간수 잘해요. 알겠습니까?”
“예….”
다들 시큰둥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편이었지만, 간간이 ‘장사 한두 번 해보나…’ 하는 소리가 섞여 나왔다.
현성은 조잡한 천 위에 희미한 푸른 잉크로 2174번이라고 찍혀 있는 번호표에서 잠시 눈을 떼지 못했다.
이것이 이제 앞으로 영원히 현성에게 붙어 다닐 주홍글씨가 되는 것은 아닐까.
“방번은 자기 옷의 오른쪽 가슴 위, 번호표는 왼쪽 가슴 위, 즉 주머니 바로 위에 답니다. 알겠습니까?”
뭐라고? 지금 이렇게 천 쪼가리들만 달랑 주고 뭘 어떻게 달라는 거야?
“패찰은 각자가 가야 할 방에 가면 다 알아서 처리될 거고, 번호표도 방에 가면 방 사람들이 다 알아서 해줄 겁니다.”
제복을 입고 곤봉, 가스총 등을 각각 찬 채로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 중 몇 명이 나오더니 외쳤다.
흠…. 그렇다면야….
현성은 그런대로 이해가 되었다. 방에 가면 이 번호표를 붙일 수 있는 방법이 있나 보다.
“자기 방번호가 ‘4나’로 시작되는 사람 이리로 모여요.”
“방번호가 ‘3가’로 시작되는 사람 이리로 모여요.”
방으로 인도할 사람들인 모양인지, 몇 명이 더 나와서는 그런 식으로 외쳤다.
현성은 자신의 방번호 앞 두 글자를 외치는 사람에게로 갔고, 다른 몇몇 사람들도 같이 모였다.
“교도관님, 저 다리가 많이 아픈데 지금 어떻게 좀 안 될까요?”
현성의 옆에 선 다리를 조금 절뚝이는 사람의 말이었다.
“일단 방에 가서 보고전을 내세요. 지금 급한 거 아니죠?”
“그야 그렇습니다만…”
“자, 그럼 갑시다.”
현성은 고무신을 질질 끌며 그 인솔자를 따라 걸었다.
제복 차림의 경비가 서 있는 철문을 몇 개 지나고, 등 뒤로 그 철문이 닫히고 자물쇠가 잠기는 것을 여러 번 겪었다.
마지막으로 도착한 철문 너머로, 쇠로 된 문이 다닥다닥 일렬로 붙어 있는, 마치 복도식 아파트를 연상시키는 곳이 보였다.
안쪽에서 역시 간수…, 아! 아까 교도관이랬나? 교도관인 듯한 사람이 현성 일행을 인수인계하는 듯했다.
철컹 철그럭
현성과 같이 온 사람들이 그리 들어가니, 등 뒤에서 다시 쇠창살문이 닫혔고 자물쇠까지 채워졌다.
이렇게 격리당해야 하는 인간으로 부당하게 낙인찍혔다는 생각에 현성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현성이 들어가야 할 방, 4다7방의 앞에 교도관은 잠시 현성을 대기시키더니,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육중하고 무식해 보이는 철문 옆에 역시 아크릴로 된 듯한 꽂이 같은 게 보였고, 아까 받았던 패찰들 같은 것이 주르륵 꽂혀 있었다.
쇠창살이 쳐진, 창문인 듯한 곳에서 얼굴이 몇 개 불쑥 솟아올랐다.
“야, 우리 방 신입 오나 보다. 신입!”
이런 망할!
현성은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내가 왜 이런 인간들과 같은 부류로 취급되어야 한단 말인가!
현성의 속이 조금 불편해졌고, 영화나 소설 등에서 본 감옥 속의 신입 신고식에 대한 얘기들이 떠올랐다.
신입식이라며 군기 잡겠다고 시비를 걸어오면 맞서 싸워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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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세상이 바뀐 것인지, 소설이나 영화가 멋대로 과장을 한 것인지는 몰라도,
소설이나 영화 등에서 읽고 본 것과는 달리, 구타 같은 것으로 신고식을 하려는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일이 그리 쉽게 쉽게 풀리지는 않았다.
현성이 들어올 때부터 유심히 바라보던, 아마도 이 방에서 방장인 듯한 사람이 현성을 알아본 것이다.
“하하, 그 S새끼가 너였구나! 어디서 봤다~ 봤다~ 싶었더니.”
“예? 무슨 말입니까, 형님?”
“왜 그 K대 나와서 빵빵한 대기업에 다니다가 여중생 두 명한테 오물 퍼 먹이고 변태 짓하면서 사진까지 찍었다는 그 S새끼 있잖아? 신문에서 보고 참 별나다 했더니… 왜 그… 내가 검찰에 조사 받으러 갔다가 실제로 봤다고 했잖아?”
“아아… 네! 전에 신문에 크게 나왔던 그 사람이….”
그 방장인 듯한 사람의 번호표 옆에는 붉은 동그라미 안에 역시 붉은 글씨로 ‘노’라는 글자가 씌어 있었다.
현성도 들은 얘기가 있었다.
여기서 조직폭력배들은 번호 옆에 그 조직 이름의 머리글자를 써놓는다고.
저 인상 더러운 방장인가 뭔가는, 무슨 ‘노’라는 이름으로 시작되는 폭력조직의 일원인 모양이었다.
“…….”
하지도 않은 일이었고, 법정에서도 그 억울함을 토로하며 싸울 생각이었던 현성은 심한 모욕감을 느꼈지만, 필사적으로 참으려 애썼다.
그러나 그 방장인 듯한 조폭의 일원은 계속해서 현성을 비아냥거리며 모욕을 주거나 욕을 퍼부었다.
경찰에서 겪은 물리적인 폭력도 고통스러웠지만, 이런 식의 언어폭력은 몸으로 겪는 고통보다 더 참기 힘들었다.
현성은 이런 모욕을 받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합기도, 태권도 등을 수련하며 실전에 가까운 대련을 많이 겪기도 했고, 힘이나 운동, 싸움에 늘 자신 있던 현성이었다.
그냥 한 번 뒤집어버릴까 싶었지만, 폭력사태는 엄하게 처벌된다는 것이 입소 전(前) 누누이 들어온 얘기였다.
구치소로 이송되어 올 때 이송 책임자인 듯한 사람이 몇 번씩이나 반복하여 강조하던 얘기였다.
“수틀리고 빈정 상한답시고 구치소에서 치고받고 싸워봐야 요즘 그거 인정해주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오히려 일이 커져서 형사사건이 되면 당연히 죄명이 추가되어 일이 꼬이죠. 형사사건은 안 된다고 해도, 보고서가 올라갈 정도의 일이 생기면, 앞으로의 검찰 조사는 물론이고 재판에 심각한 악영향이 갈 수 있으니 잘 판단해서 행동해요.”
생각보다 그 말의 무게는 무거웠다.
현성은 지켜야 할 것이 있고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참아야 한다. 어떻게든 참아야만 했다.
그러나 계속되는 모욕과 비난에 현성의 가슴속에서 뭔가 폭발할 것만 같았다.
“자아 자~ 그만들 하시고. 여기 다들 같이 생활할 사람들이고, 다 저마다 사정이 있고 그런데, 같은 처지의 사람들끼리 서로 얼굴 붉혀서 뭐 하겠습니까? 안 그래요, 방장님?”
누군가가 웃으며 끼어들었다.
듣기에는 좋은 말이지만, 자세히 곱씹어보면 같은 처지끼리 누가 잘났다 못났다 따지냐는 야유 같기도 했다.
그런데 그 조폭의 반응은 현성의 생각과는 완전히 달랐다.
“큼. 크흠, 반장님 말이니 내 여기서 그만하겠수다.”
그러더니 옆에 놓여있던 책을 들고 다시 읽기 시작했다.
“자자, 거기 자리 하나 만들어줘. 나 김석호라고 이 방의 배식반장인데 앞으로 같이 잘 지냅시다.”
배식반장? 그게 뭐지?
하지만 이 배식반장이라는 사람의 위세가 생각보다 대단한 것인지,
이 사람의 말 한 마디, 손짓 한 번에 방장을 제외한 사람들이 순순히 따라주고 있다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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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호는 감옥, 즉 옛날 말로 감빵(감방:監房?)을 제집처럼 드나든다 하여, 빵잽이라고 불리는 부류의 사람이었다.
방의 배식반장을 맡고 있다는 그 사람은 어찌된 일인지 현성에게 호의적이었다.
들어온 첫날, 나이, 이름, 고향, 죄명, 사건 경위 등등을 설명해야 하는 신고식도 김석호 덕분에 얼렁뚱땅 넘어갈 수 있었다.
현성은 신참이라서 새로 신입이 들어올 때까지는 뺑기통(화장실) 바로 옆에서 자야만 했다.
의외로 화장실은 수세식이었고, 수도꼭지도 있어서 식사 후의 설거지도 거기서 하게 되어 있었다.
화장실 청소와 설거지는 역시 앞으로 신입이 들어올 때까지는 현성의 몫이었다.
배식반장 김석호는 현성에게 영치금(領置金) 잔고를 물어보았다.
영치금이란 수용자 각자의 계좌에 들어있는 돈을 말한다.
접견을 오거나 우편, 온라인 송금 등을 통해 수용자의 계좌에 돈을 넣어줄 수 있었다.
이런 곳에서도 돈은 필수였던 것이다.
현성은 뭐 별 탈이 있을까 싶어서 사실대로 말해주었다.
유치장에서 많이 썼고, 접견 온 사람이 별로 없어서 영치금이 거의 다 떨어졌다고.
그러자 김석호는 그 다음 날 여기저기 알아보더니,
사제(私製), 즉 구치소 내에서 수용자가 돈을 주고 사서 입는 깨끗한 수용복을 구해 와서는,
현성이 대충 바느질 몇 번으로 붙여 두었던 번호표까지 양면테이프로 다시 깨끗하게 붙여서 현성에게 주었다.
마침 아는 사람이 출소하면서 남겨두고 간 걸 재빨리 구해왔다고 했다.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찜찜한 마음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지만,
고맙다고 인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무슨 꼼수가 있다고는 해도 정말 고마운 일이었으니까.
덕분에 퀴퀴한 냄새가 나는 찜찜한 관제(官製) 수용복이 아닌,
몸에도 잘 맞고 깨끗하고 상쾌한 사제(私製) 수용복을 입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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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74번, 채현성, 검치.”
검치라는 말은 검찰청(檢察廳)에 송치(送致)되어 거기서 조사를 받는다는 말인 듯했다.
몇 번 현성은 검찰로 불려가 조사를 받았지만, 하지도 않은 짓을 했다고 인정할 수는 없었다.
현성의 부인이 계속되자, 검찰에서 추가조사가 필요한 경우에 한해 1차 연장 가능한 검찰 조사기간이 연장되었다.
현성은 전부 합쳐 근 보름 동안 거의 매일 수갑과 포승(捕繩)에 묶인 채로 검찰에 불려가야만 하는 셈이었다.
그런데 초기에는 가자 마자 대기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조사를 하곤 했었지만,
현성의 진술과 주장이 조금도 변하지 않아서 그럴까?
아침에 수갑과 포승에 묶여 불편한 버스를 타고 이동하여, 비둘기장―검사실에서 조사 받을 때까지 대기하는 일종의 유치장―에 처박아두고는,
공무원 퇴근 시간 때까지 현성을 부르지도 않고 그대로 놔두는 경우가 종종 발생했다.
결국 아침부터 하루종일 검찰의 비둘기장에 있다가 저녁에 바로 구치소로 되돌아가는 꼴이었다.
피곤한 노릇이었다.
비둘기장의 교도관이 대기자들에게 어디 기대거나 눕지 말라고 떠들고 다니긴 했지만,
이런 비둘기장 같은 곳에서 바닥에 눕는다는 것도 사실 무척 찜찜했다.
청소는 고사하고 냄새와 먼지 등으로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고,
재래식 뺑기통―변기통을 부르는 은어―이 구석에서 지독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뺑기통이 있는 화장실의 문은 삐걱거리며 제대로 닫히지도 않았으니까.
다들 잠시 있다가 가는 곳이다 보니 청소도 제대로 되지 않는 것 같았다.
게다가 계절도 여름으로 접어들고 있어서 악취와 파리 등으로 인한 불편함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제발 빨리 좀 조사해줬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이러려면 뭐 하러 불렀나 싶었다.
지쳐서 돌아오는 현성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김석호는,
그건 공갈 소환이니까 기죽지 말고 신경도 쓰지 말라며 검사들에게 욕을 퍼부었다.
그렇게 고달프게 만들어놓으면, 구치소에 돌아가서 방에 있는 것이 편하고 쉽게 느껴지니,
어떻게든 빨리 마치고 싶어서 피의자들 대부분은 점점 더 적극적으로 조사에 협조하게 마련이라는 거였다.
그걸 노리고 하는 짓이라나?
기가 막혔다. 세상에 이건 또 무슨 일이란 말인가.
양지(陽地)에서만 살아온 현성에게는 너무나 어이없는 일의 연속이었다.
알지도 못하는 여자애들을 성폭행했다는 죄를 뒤집어쓰질 않나.
형사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폭행을 가하지 않나.
검사라는 것들은 방에 쳐 박혀서 나오지도 않고,
나이 지긋한 검찰 사무관들이 조서 다 꾸미고 앉아서는 이 따위 공갈 소환이나 하지 않나.
이게 도대체 뭐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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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운 좋게 공갈소환이 되지 않고, 호송 교도관 두 명에게 인도되어 바로 검사실로 가게 되었다.
그런데 먼저 온 피의자의 조사가 끝나지 않았는지,
교도관 두 명과 포승에 묶인 피의자가 복도에 있었다.
교도관들이 서로 눈인사를 했다.
서로 경례를 않는 것으로 봐서, 아마 계급이 같은 모양이었다.
“아직 안 끝났어?”
“아, 가려던 중에 참고증인이 왔거든. 그래서 잠시 대기하고 있는 거야.”
그 피의자를 보니 검찰 조사를 위한 비둘기장에서 몇 번 안면이 있던 대학생이었다.
아마 여중고생 강간 등의 혐의로 왔다고 했던가?
현성 자신의 처지가 그래서인지, 2315번이라는 번호를 단 그 학생에게 안쓰러운 느낌이 들었다.
[나참. 말을 못 알아듣네. 집에 오늘 못 가고 싶어요?]
어라?
검사실의 문은 닫혀 있었지만, 의외로 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작은 소리였지만, 뭐라고 말하는지 알아듣기에는 충분했다.
[저 녀석이 맞다고, 저 사람이 한 짓이라고 한 마디만 하면 나머지는 우리가 다~ 알아서 한다니까요.
대전에서 여기까지 왔죠? 빨리 집에 가고 싶지 않아요?]
분명히 들렸다.
“이, 이…….”
2315번 피의자가 이를 악물더니 움찔대기 시작했다.
옆의 교도관들이 그 사람을 얼른 붙잡았다.
하지만 그 교도관들의 얼굴에는 적의(敵意)나 당황한 기색이 없었고,
짐짓 안 되었다는 동정심 같은 것이 얼굴에 드러나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일까?
2315번이 주변의 교도관을 좌우로 보면서 애원조로 말했다.
“저거 들으셨죠? 분명히 들으셨죠?”
눈물까지 그렁그렁 맺혀 있는 2315번의 얼굴이 침통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현성에게 들리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들리지 않을 리는 없다.
안 들었다고는 할 수 없었던 걸까?
두 교도관은 마지못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법정에서 증인 신청할게요. 제발 두 분 들은 대로만 증언해주세요. 네?”
두 교도관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웅성거리던 검사실 너머에서 이번에는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많이 되어봤자 고교생 내지는 여대생 정도로 생각되는 앳된 목소리였다.
[…그치만… 분명히 저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는데요…. 얼굴도 다르고 키도 완전히 다르…]
[이거 정말 답답한 학생이네.
우리가 추가 조사한다고 경찰차와 경찰 병력 데리고 학생 학교까지 가서 조사를 하게 되는 수도 있어요.
그러면 어떤 사건 때문에 왔다고 학교에 사전 공문도 보내야 되는데,
학교 전체에 다 알려지고 싶어요?
아까 그 사람이 그랬다고 한 마디만 하면 된다니까요. 학생도 좋고 우리도 좋고.]
자그마하고 겁먹은 듯한 여자애의 목소리를 압도하는 위압적인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대번에 돌아가는 상황을 알아챌 수 있었다.
비슷한 사건의 피해 여학생을 불러온 모양인데,
그 여학생은 저 2315번은 자신을 성폭행한 그 사람이 아니라고 확인해준 것 같았다.
그러나 검찰은 그 사건까지 저 2315번에게 뒤집어 씌워서 종결 처리하려고,
안의 그 여학생에게 저 사람이 맞다고 증언할 것을 강요하는 모양이었다.
“그게요…. 우리 교도관은 증언자격이 없어요.
교도소나 구치소 내의 사건이라면 몰라도…
이런 것과 관련되어서는 증언자격 자체가 인정되지 않거든요.”
고개를 돌리며 외면하는 두 교도관 사이로 2315번의 얼굴이 참담하게 구겨지더니, 아래로 푹 꺾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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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몇 년 전의 현성이었다면, 누가 이런 얘기를 해준다고 해도 전혀 믿지 않았을 것이다.
증거 법정주의를 견지하고 있는 현대 사법체계에서,
‘저 사람이 나 성폭행했어요’ 라고 여성이 주장한다고 해서,
아무런 증거도 없이 어떤 남자를 범죄자로 체포하고 처벌할 리가 있겠느냐며 비웃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거의 아무런 증거가 없다고 해도, 피해를 당했다고 주장하는 여성의 증언만 있다면,
그리고 그럴 듯한 정황만 갖춰진다면 간단하게 사건이 성립되는 게 현실이었다.
그리고 가해자로 지목된 남자가 권력이나 사회적 위치를 차지한 사람이 아닌 이상에야,
반대 증거를 내지 못한다면, 거기서 빠져나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예전에 현성이 상식으로 알고 있던 법률.
피해 여성의 몸에서 남성의 체모(體毛)나 정액 등이 검출되어야만 증거가 되느니 어쩌고는
한참 지나도 지난 구석기 시대의 법률이었다.
피해 여성이 조사를 받고 증거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모욕감을 느낀다는 이유로
여성부와 여성단체들이 나서서 목소리를 높인 덕분(!)에,
피해 여성의 증언만으로 사건이 접수되게 바뀐 지가 오래되었다는 것이다.
예전이었다면 현성도 이런 제도에 동감했을 것이다.
‘그러면 아무 죄도 없지만, 그 남자가 밉다거나, 돈을 뜯어내겠다 등의 목적으로,
여자가 남자를 허위 고소하는 경우는 어떻게 할 거냐?’
누군가 현성에게 이렇게 반문(反問)했다면, 옛날의 현성은 이렇게 대답했으리라.
‘그럴 리가 있어?
아무리 악감정이 있고, 합의금 등을 뜯어내겠다고는 해도,
강간당한 여자라는 수치스러운 낙인이 찍히는 걸 무릅쓰고 그런 거짓말을 할 여자가 어디 있겠어?
그리고 수사기관이 바보냐? 그런 걸 못 가려내게?’
하지만 지금의 현성이라면,
그리고 구치소나 교도소 내의 사람들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여자들이 이 나라에는 수두룩하다며 열에 열 모두 목청을 높이리라.
심지어는 공정한 수사를 해야 할 검찰에서도, 오히려 그런 걸 조장하고 있지 않는가 말이다.
[그러고 보니 비슷한 것 같기도 하지만…]
주눅이 든 듯 우물쭈물 거리는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이렇게 되는구나. 현성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죠? 자, 얼른 여기 서명하고 지장만 찍으면 돼요. 그래요, 아주 잘한 겁니다.]
희희낙락하며 또렷하게 들려오는 저 목소리.
분명히 현성의 귀에도 익숙한 그 검찰 사무관의 목소리였다.
그런데 이 검사실은 마약 전담 검사실인데,
그렇다면 저 학생은 성범죄에다 마약 혐의까지 받고 있는 것일까?
하는 짓을 보니, 그 마약 혐의도 보나마나 뒤집어 쓴 것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성은 저 2315번에게 동정이 갔지만, 아무 것도 해줄 수가 없었다.
나설 수가 없었다.
“으허헝…”
울고 있었다. 2315번은 울고 있었다.
‘난 분명히 들었어요. 내가 들은 대로 증언해줄게요. 법정에서 나를 증인으로 신청해요.’
이런 목소리가 목 바로 아래까지 올라왔다.
그러나 현성은 애써 그 말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내가 증언하겠다고? 아니지. 그게 될 턱이 있나?
구치소 동료 수감자의 말이 법정에서 증거로 채택될 리가 없잖아.’
욱!
현성은 자기혐오가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뒤이어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합리적(?) 이유들.
합리적이라고? 그래,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성은 깨달았다. 그건 변명이었다. 구실이었다. 회피였다.
자신 역시 검찰에서 조사를 받는 입장이었다.
지금 2315번에게 자신이 증언해주겠다거나 하는 얘기를 꺼내면, 분명 검찰의 귀에 들어갈 것이다.
그러면 검찰의 조사 과정에서 현성에게 심각한 불이익이 올 건 당연했다.
검경(檢警)에 공평무사(公平無私)함을 기대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하는 것은
현성 자신이 체험으로 느낀 것이었으니까.
현성 자신은 분명 그 불이익을 겁내고 있었다.
분명히 나서야 옳은 일에 나서지 않으려고 발뺌하면서 변명을 늘어놓고 있었다.
현성 자신도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으면서도,
다른 억울한 사람의 일에 대해서는 발을 빼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2315번의 들썩거리는 어깨가 복도 너머로 멀어지는 것을 보며,
현성은 한없이 비참해지는 자신을 느꼈다.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있었다.
결국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 놈이었던가.
삐걱
문이 열리며 검찰 직원인 듯한 남자가 여성 한 명을 인도하여 나왔다.
안에서 들려오던 얘기에서는 여학생이라고 했다.
얼굴을 보니 아무리 높게 잡아도 이제 갓 대학 신입생 정도의 나이일까?
울먹거리는 듯한 뒷모습으로 멀어져간 저 2315번이 아무리 범죄 혐의를 받고 있다고는 해도,
아직까지는 유죄가 확인된 사람도 아니다.
설령 저 여학생이 강간당했다는 것이 사실이라고는 해도,
분명 여학생 자신이 직접 보고 그 강간범이 아니라고 했었다.
그런데도 불편함과 불이익이 싫어서 무고한 사람을 가해자라고 지목하고 싶었나?
진짜 범인을 잡고 싶다는 생각은 없는 거냐?
그냥 가해자와 비슷한 류의 사람을 아무나 십자가에 매달기만 하면 그걸로 됐다는 거냐?
자연 그 여학생을 대하는 현성의 눈빛이 고울 리가 없었다.
그 여학생은 현성과 눈이 한 번 마주치자 흠칫 어깨를 움츠리더니,
종종걸음으로 직원과 함께 걸어가 버렸다.
2315번이 억울함에 울먹이며 사라져갔던 그 복도 너머로.
화가 났다.
그러자 퍼뜩 뭔가 떠올랐다.
어쩌면 저 여학생에 대한 적대감은 현성 자신에 대한 자괴감을 감추기 위한 것이 아닐까.
누군가 그랬던가?
지옥은 악을 행하는 사람들을 위한 곳이 아니라,
나서야 할 곳에 나서지 않고 못 본 체 외면하는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곳이라고 말이다.
늘 그래왔듯이 사무관 앞의 의자에 현성은 앉혀졌다.
“왜? 오랜만에 영계 보니 꼴리냐? 아직 정신 못 차렸냐? 더러운 새끼.”
현성이 그 여학생을 노려보던 것을 보았는지, 사무관이 현성에게 비아냥댔다.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감과, 검찰이 하는 짓에 대한 분노를 안고,
현성은 초지일관(初志一貫), 혐의 부인과 무죄 주장을 계속했다.
어쩌면 자신은 애초부터 비겁자였지만,
스스로는 그것을 모르고 지내왔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지금의 현성은 자신이 비겁자에 불과했다는 것을 방금의 일로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더 이상 비겁해지고 싶지는 않았다.
검찰 사무관이 눈을 부라리며 달래고 어르고를 반복했지만,
일말(一抹)의 선처와 호의를 구걸하려고,
하지도 않은 짓을 인정하며 용서를 비는 비겁한 짓은 할 수가 없었다.
연기된 검찰 조사의 시한(時限)도 끝나고 이제 재판부로 서류가 넘어가게 되었다.
현성은 재판부에서 스스로를 변호할 결심을 단단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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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치소는 범죄혐의가 있는 사람들을 재판과 조사 등의 편의를 위해 임시로 가두어둔 곳일 뿐,
확실한 죄인들을 가둬둔 곳은 아니다.
그래서 벌금이나 집행유예 등으로 출소하기도 하고,
1심이 끝나 항소심을 위해 사람들이 이동하는 일도 잦은 곳이다.
현성의 방에서도 8명 정원인 중형 거실의 수용인원이 5명으로 줄어든다 싶더니,
신참이 3명 들어오면서 현성은 중간 위치가 되었다.
그리고 처음부터 자신을 감싸주었고,
이후로도 은근히 현성을 챙겨주던 김석호가 그 방의 방장이 되었다.
초기에 변태 물총이라며,
운동시간 등에 현성에게 적의를 보이며 달려들려는 양아치나 조폭들에게서 그는 현성을 감싸고돌았다.
그의 말은 어지간한 교도관이나 폭력배들에게도 다 통했기에,
현성은 별다른 말썽에 휘말리지 않을 수 있었다.
물총이란 말은 강간범이나 성범죄자들을 구치소, 교도소 등에서 낮춰 부르는 은어(隱語)였다.
어찌된 게 미성년자, 특히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의 혐의를 받는 사람에게,
다짜고짜 폭력부터 쓰려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그 자신도 죄를 지어 잡혀온 주제에 말이다.
그래서 그런 종류의 죄로 들어온 경우, 신고식 때 거짓말로 죄명을 속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죄명과 수용번호, 생년월일과 이름 등을 쓴 아크릴 조각이 방 입구 바로 옆에 꽂히진 하지만,
피해자가 어리다는 걸 숨기거나 사건의 세부 내용을 다른 걸로 둘러대면 쉽게 넘어갈 수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검찰 조사가 마무리 될 즈음,
법원에 사건이 넘어가면,
공소 내용을 구체적으로 적은 공소장(公訴狀)의 사본이 피의자 본인에게 송부된다.
이는 보통 방장의 손으로 넘어가게 마련이다.
결국 신고식 때 숨기거나 둘러대서 잘 넘어간다고 쳐도 이때 다 들통 나는 것이다.
방장이 성질 더러운 조폭이거나 하면,
물총에다 사기꾼이나 모사꾼이라 하여 흠씬 더 터지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현성의 공소장은 김석호의 중개(?)로 현성에게 바로 전달되었다.
약간은 눈치를 보며 공소장을 읽는 현성에게 김석호가 속삭였다.
죄명과 사건번호만 따로 적어두고 나머지는 찢어버리라고.
읽어봤자 열불만 터질 테고,
공소 내용 등은 현성이 다 기억하고 있을 테니,
탄원서나 반성문, 항소 이유서 등을 쓸 때 꼭 필요한 죄명과 사건번호 등만 적어둔 다음,
발기발기 찢어버려도 별 탈 없다는 거였다.
김석호는 장난스레 발기발기라는 말에 강세를 주고는 피식 웃었다.
현성은 김석호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그는 적어도 인간적이었다. 죄인일지언정 악당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런데 현성이 명문대학 출신임은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이윽고 편지나 항소이유서, 탄원서, 반성문 등을 써달라는 등의 부탁이 하나둘 오기 시작했다.
이를 감지한 김석호가 구매물 등을 걸고 이를 중개하기 시작하면서, 현성의 입지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대학의 위탁 교육 과정 같은 것에 다니고 있는 교도관들이
학교에 제출할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을 도와달라며 찾아왔고,
또 승진 등을 위해 공부를 하는 교도관들은 공부를 도와달라는 요청을 하기도 했다.
그런 날에는 현성은 방 바깥으로 나가 교도관에게 공부를 가르쳤고,
답례로 방에 닭 훈제나 콜라 등이 우르르 들어왔다.
또 컵라면이 아닌, 끓인 라면을 방 전체 사람들이 얻어먹을 수도 있는 일도 생겼다.
현성의 입지는 더욱 더 올라갔다.
어지간한 재소자들뿐만 아니라, 교도관들도 현성을 대우해주게 되니,
일반 수용자들은 현성을 함부로 대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현성은 방에서 배식반장을 맡게 되었고, 서기(書記)까지 맡았다.
공소장이나 기타 서류 등을 챙기고 구매물품까지 관리하는, 명실 공히 2인자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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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후에 공소기각(주1)으로 출소하고, 또 보석으로 나간 사람도 있어서 방의 전체 인원이 줄었다.
게다가 아침에 검찰 조사로 두 명이 나가고,
좀 있다가 접견이 한꺼번에 와서 방에 현성 혼자 남아있게 된 어느 날이었다.
원칙적으로는 수용거실에 수용자 혼자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이런 경우 임시로 다른 방으로 옮겨놓아야 하겠지만,
혼자 남은 사람이 현성인 것을 본 교도관은 잘 지내냐는 한 마디만 하고 그냥 지나가버렸다.
그런데 잠시 후 신입이 들어왔다.
제법 지긋한 나이였다.
잔뜩 주눅이 든 분위기에 불안한 듯 현성의 눈치를 살피는 모습.
성범죄자!
그것도 미성년이나 어린이 성범죄자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현성은 더 이상 그런 사람들에게 욕설이나 조소를 퍼부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그런 꼴을 당하고 보니,
억울한 사정이 있는 사람이 한둘이 아닐 거라는 것이 현성의 생각이었다.
“신고식은 방장이 없으니 나중에 하시죠. 저는 이 방의 배식반장입니다.”
“아, 네, 선배님, 잘 부탁합니다.”
잔뜩 주눅이 든 표정이었다.
나이로 따지면 현성의 삼촌이나 작은 아버지 연배였다.
탁 봐도 만만해 보이는 인상에 어린이 대상 성범죄라니,
앞으로 얼마나 당할까 생각하니 딱하다는 생각이 드는 현성이었다.
철크덕
밖에서 교도관이 패찰―수용자의 번호와 생년월일, 죄명 등을 적어놓은 플라스틱 조각―을 입구 옆 벽에 있는 패찰판에 넣는 소리가 났다.
창가에 기대어 있던 현성의 눈에 얼핏 들어온 신입의 패찰 색깔은 노란색이었다.
강력범이다.
패찰의 색깔만으로도 구별이 된다.
강력범은 노란색, 다른 범죄는 흰색, 향정신성약품 등 관련 범죄는 파란색이었다.
현성은 마약 관련 범죄 일체를 부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현성의 패찰 색깔은 아직까지는 노란색이었다.
교도관이 창살 너머로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어이, 신입 아저씨. 그 선생님한테 잘 보여 두세요. 우리 사동의 고문 변호사십니다.
공소장 검토, 항소 이유서, 탄원서, 반성문, 게다가 어지간한 편지들까지 몽땅 그 선생님 손을 거치고 있다고요.”
“어휴, 부장님, 왜 또 그러세요?”
“하하. 현성 씨가 좀 잘 챙겨드려요.”
부장은 좌우를 슬쩍 살피더니,
배식구―배식이나 구매물품 등을 넣어주기 위해 벽에 뚫어 놓고 밖에서 잠글 수 있게 만들어놓은 구멍―를 열고,
종이에 싼 것을 들이밀었다.
눈치가 있는 현성은 아무 말 없이 얼른 받아 챙겼다.
부장은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얼른 치워요.”
“네, 고맙습니다.”
현성도 목소리를 낮춰 대답했다.
만져 보니 뭔가 먹을 것이었다.
어제 검방(檢房)했으니 오늘은 아마 검방이 없을 테지만, 빨리 먹어치우는 것이 좋다.
검방(檢房)이란 방을 검사하는 것을 말한다.
수용자들은 손재주가 좋은 사람들이 많고,
또 전과자들끼리 전해져오는 노하우가 서로 공유되곤 해서,
과장을 좀 보태서 말하면 대부분이 거의 맥가이버 수준이었다.
고참 교도관들이 간혹 하곤 하는 농담이 있다.
3개월 동안 검방을 안 하고 방치하면, 헬리콥터 만들어서 타고 달아날 사람들이 빵잽이들이래나?
사실 교도관이 이런 물품을 반입하여 전해주는 건 엄연히 규정 위반이고 무척이나 위험한 일이었다.
그리고 수용자들 중에서도 고발, 투서(投書) 전문의 골칫덩이가 있는 경우가 있다.
뭐라도 꼬투리 잡을 일이 있으면,
그걸 물고 늘어져서 교도관을 귀찮게 하든지 하여,
수용생활을 좀 더 편하게 누리려 한다거나 하는 것을 노리는 사람들이다.
혹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을 즐기는 듯한 사람들이기도 했다.
자꾸 그런 일이 반복되면 교도관들도 그런 사람은 피하려고 드니까.
어쨌든 그런 사람들을 여기서는 코걸이라고 불렀다.
좁은 곳에서 갇혀 지내는 탓일까?
밖에서는 대범하고 관대한 사람이라 해도,
이런 곳에서 갇혀 지내다 보면,
아무리 사소하고 조그마한 것이라도, 차별을 받거나 손해를 보는 것을 견디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구치소 측에서는 요령과 처세술을 잘 아는 빵잽이들 중에서,
통솔력이 있고 힘깨나 쓰는 사람들, 특히 조폭들을 봉사원이라는 이름으로 앉혀두고,
시끄럽고 큰 문제가 생기지 않는 한, 사소한(?) 폭력이나 위력과시(주2) 등을 사용해
수용자들의 질서를 잡는 것을 사실상 조장하고 있었다.
그게 관리에 더 편했으니까.
교도소에서는 그런 현상이 더 심하다는 얘기를 김석호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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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른 챙겨 넣은 곶감은 한 줄이나 되었다.
이런 곳에 있으면 가장 먹고 싶은 것이 단 것이다.
쵸코바[Chocolate-bar]가 구매가능물품이 된다는 소문은 있었으나,
늘 그렇듯이 소문은 소문일 뿐이니까 모르는 일이었다.
배식반장으로서 방 사람들이 돌아올 때까지 아껴두고 같이 나눠먹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껴두다가 들키면 곤란해진다.
얼른 먹어치우는 게 차라리 낫다.
우선 신입부터 챙겨야겠지만.
“아저씨, 성범죄입니까?”
“네? 네! 그렇습니다!”
“군대도 아니고 안 그러셔도 돼요. 성폭(주3)이에요, 성추행이에요?”
“성추행이고…….”
죄명과 사건 경위 등을 알리는 것이 신고식의 관례인데,
죄명 뒤로는 아무 말을 못하고 머뭇거리는 걸 보니 피해자가 어린 게 분명했다.
“피해자가 어린가요?”
“…….”
“아아, 알았어요. 됐습니다 됐어요.
나중에 신고식 할 때 그냥 성추행이라고만 하세요.
이름, 나이, 주소, 죄명 그런 것만 간단하게 외치시면 됩니다.
일단 그것만 말하고 다른 이야기는 자세하게 할 필요 없어요.”
“네, 알겠습니다.”
“근데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박재형이라고 합니다.”
“네, 저는 채현성입니다. 채현성. 이 방의 배식반장과 서기를 맡고 있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아, 네, 저야말로…”
일어서면서 인사를 해오는 모습을 보니 가정교육도 잘 받았고,
제대로 된 직장에 다니는 순진한 사람 같았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에 말려들었지?
“저도 성폭력입니다. 하지만 제가 겪고 보니 성폭력을 처리하는 것에는 문제점이 너무나 많더군요.
여자가 자신이 당했다고 고소하면 남자 말은 절대 안 들어주는 분위기더라고요.”
현성은 자연스럽게 운을 뗐다.
“그리고 살인, 폭력, 강도 등을 태연히 해치우는 인간들이
성범죄 관련된 사람들을 응징이라도 하겠다는 듯 달려드는 걸 보면 참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건 심리학에서 투영(投影), 투사(透寫)라고 하지요.
자신의 죄책감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켜 스스로 면죄부를 받으려는 심리…”
박재형은 차츰 고개를 끄덕이며 현성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마음이 조금씩 안정된 탓일까?
박재형은 자신이 당한 일, 자신의 사건을 하나씩 풀어놓기 시작했다.
무슨 사고를 친 사람들은 대개가 스스로를 합리화시키기 마련이니 50% 정도는 가려서 듣는다 해도,
이 사건은 뭔가 문제가 있어 보이는 사건이었다.
◆ 미주(尾註)*********************************************************
주1) 공소기각 : 형사소송에서 소송조건에 흠결이 있을 때에 법원이 소송을 종결시키는 것. 예를 들어 단순강간죄일 때 피해자와 가해자가 합의를 하여 가해자의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분명한 의사 표시가 있는 경우, 법원은 공소를 기각하고, 가해자를 방면한다.
주2) 위력과시 : 단체로 모여서 특정 장소에서 위력과 세력을 과시하는 행위. 조직 등의 명목으로 경찰의 관리대상으로 명단에 올라있는 사람들의 경우, 두 명 이상이 어느 장소에 모여서 서 있는 것 자체만으로 위력과시에 해당되어 입건이 가능한 경우도 있다.
주3) 성폭 : 성폭력을 줄여서 부르는 말
◆글쓴이의 변(辯)**********************************************************
오타, 비문(非文), 오류, 혹은 이야기 전개나 사건 등에 대한 의견이 있으시거나, 가르침 주실 분들께서는
언제라도 덧글 남겨주시거나 제 작가집필실의 자유게시판에 글 남겨주십시오.
그리고 제 글에 대한 감상 등의 잡담성(?) 덧글도 언제라도 환영합니다. ^^;;
1부 2장. 악몽의 계속 (2)***************
수갑과 포승에 칭칭 묶여서 구치소로 이송되어, 신분 확인을 거치고 소지품 검사, 신체검사를 받았다.
그리고는 연두색깔의 플라스틱 재질 비슷한 것으로 만들어진 숟가락과 젓가락을 나눠주었다.
그 수저로 거친 밥과 이상한 국과 양념도 제대로 안 된 이상한 맛의 반찬을 먹어야 했다.
유치장에서 처음 먹었던 관식(官食)보다는 나았지만, 사식(私食)에 비해서는 형편없었다. 그래도 먹어둬야만 했다.
식사가 끝나자 검은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파란색 죄수복을 입은 사람들을 인솔해왔다.
그들은 황토색의 수용복과 고무신을 각각 한 무더기씩 쌓아놓고는 각자 맞는 것을 골라 갈아입으라고 했다.
지금 입고 있는 옷과 신발 등은 모조리 반납되어 따로 보관, 즉 영치(領置)될 것이니 빨리 고르라는 독촉이 이어졌다.
그 옷들에 가까이 가지도 않았는데도 퀴퀴한 냄새가 났지만 저게 아니고는 입을 게 없을 판이었다.
고무신도 짝이 제대로 맞는 게 없었지만, 어쨌든 최대한 발을 넣고 끌고 다닐 수 있는 것들을 골라 신었다.
지금까지 입고 있던 속옷과 신발, 소지품 등은 몽땅 따로 수거되어, 신분확인과 지문날인을 거쳐 밀봉되었다.
그리고 조잡한 천 위에 역시 조잡하게 인쇄된 번호가 찍혀있는 번호표와 방번호를 받았다.
또 각자 폭 2cm에 길이는 15cm 정도 될 듯한 아크릴판도 하나씩 지급되었다.
현성의 것은 노란색이었는데 유성펜으로 쓴 것인 듯 현성의 이름과 생년월일, 혐의를 받고 있는 죄명이 씌어 있었다.
흘낏 좌우를 보니 하얀색인 사람도 있었고, 파란색인 사람도 있었다.
“번호표와 방번, 패찰 다 받았죠? 절대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잊어버리면 여러 가지로 골치 아파지니 간수 잘해요. 알겠습니까?”
“예….”
다들 시큰둥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편이었지만, 간간이 ‘장사 한두 번 해보나…’ 하는 소리가 섞여 나왔다.
현성은 조잡한 천 위에 희미한 푸른 잉크로 2174번이라고 찍혀 있는 번호표에서 잠시 눈을 떼지 못했다.
이것이 이제 앞으로 영원히 현성에게 붙어 다닐 주홍글씨가 되는 것은 아닐까.
“방번은 자기 옷의 오른쪽 가슴 위, 번호표는 왼쪽 가슴 위, 즉 주머니 바로 위에 답니다. 알겠습니까?”
뭐라고? 지금 이렇게 천 쪼가리들만 달랑 주고 뭘 어떻게 달라는 거야?
“패찰은 각자가 가야 할 방에 가면 다 알아서 처리될 거고, 번호표도 방에 가면 방 사람들이 다 알아서 해줄 겁니다.”
제복을 입고 곤봉, 가스총 등을 각각 찬 채로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 중 몇 명이 나오더니 외쳤다.
흠…. 그렇다면야….
현성은 그런대로 이해가 되었다. 방에 가면 이 번호표를 붙일 수 있는 방법이 있나 보다.
“자기 방번호가 ‘4나’로 시작되는 사람 이리로 모여요.”
“방번호가 ‘3가’로 시작되는 사람 이리로 모여요.”
방으로 인도할 사람들인 모양인지, 몇 명이 더 나와서는 그런 식으로 외쳤다.
현성은 자신의 방번호 앞 두 글자를 외치는 사람에게로 갔고, 다른 몇몇 사람들도 같이 모였다.
“교도관님, 저 다리가 많이 아픈데 지금 어떻게 좀 안 될까요?”
현성의 옆에 선 다리를 조금 절뚝이는 사람의 말이었다.
“일단 방에 가서 보고전을 내세요. 지금 급한 거 아니죠?”
“그야 그렇습니다만…”
“자, 그럼 갑시다.”
현성은 고무신을 질질 끌며 그 인솔자를 따라 걸었다.
제복 차림의 경비가 서 있는 철문을 몇 개 지나고, 등 뒤로 그 철문이 닫히고 자물쇠가 잠기는 것을 여러 번 겪었다.
마지막으로 도착한 철문 너머로, 쇠로 된 문이 다닥다닥 일렬로 붙어 있는, 마치 복도식 아파트를 연상시키는 곳이 보였다.
안쪽에서 역시 간수…, 아! 아까 교도관이랬나? 교도관인 듯한 사람이 현성 일행을 인수인계하는 듯했다.
철컹 철그럭
현성과 같이 온 사람들이 그리 들어가니, 등 뒤에서 다시 쇠창살문이 닫혔고 자물쇠까지 채워졌다.
이렇게 격리당해야 하는 인간으로 부당하게 낙인찍혔다는 생각에 현성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현성이 들어가야 할 방, 4다7방의 앞에 교도관은 잠시 현성을 대기시키더니,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육중하고 무식해 보이는 철문 옆에 역시 아크릴로 된 듯한 꽂이 같은 게 보였고, 아까 받았던 패찰들 같은 것이 주르륵 꽂혀 있었다.
쇠창살이 쳐진, 창문인 듯한 곳에서 얼굴이 몇 개 불쑥 솟아올랐다.
“야, 우리 방 신입 오나 보다. 신입!”
이런 망할!
현성은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내가 왜 이런 인간들과 같은 부류로 취급되어야 한단 말인가!
현성의 속이 조금 불편해졌고, 영화나 소설 등에서 본 감옥 속의 신입 신고식에 대한 얘기들이 떠올랐다.
신입식이라며 군기 잡겠다고 시비를 걸어오면 맞서 싸워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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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세상이 바뀐 것인지, 소설이나 영화가 멋대로 과장을 한 것인지는 몰라도,
소설이나 영화 등에서 읽고 본 것과는 달리, 구타 같은 것으로 신고식을 하려는 낌새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일이 그리 쉽게 쉽게 풀리지는 않았다.
현성이 들어올 때부터 유심히 바라보던, 아마도 이 방에서 방장인 듯한 사람이 현성을 알아본 것이다.
“하하, 그 S새끼가 너였구나! 어디서 봤다~ 봤다~ 싶었더니.”
“예? 무슨 말입니까, 형님?”
“왜 그 K대 나와서 빵빵한 대기업에 다니다가 여중생 두 명한테 오물 퍼 먹이고 변태 짓하면서 사진까지 찍었다는 그 S새끼 있잖아? 신문에서 보고 참 별나다 했더니… 왜 그… 내가 검찰에 조사 받으러 갔다가 실제로 봤다고 했잖아?”
“아아… 네! 전에 신문에 크게 나왔던 그 사람이….”
그 방장인 듯한 사람의 번호표 옆에는 붉은 동그라미 안에 역시 붉은 글씨로 ‘노’라는 글자가 씌어 있었다.
현성도 들은 얘기가 있었다.
여기서 조직폭력배들은 번호 옆에 그 조직 이름의 머리글자를 써놓는다고.
저 인상 더러운 방장인가 뭔가는, 무슨 ‘노’라는 이름으로 시작되는 폭력조직의 일원인 모양이었다.
“…….”
하지도 않은 일이었고, 법정에서도 그 억울함을 토로하며 싸울 생각이었던 현성은 심한 모욕감을 느꼈지만, 필사적으로 참으려 애썼다.
그러나 그 방장인 듯한 조폭의 일원은 계속해서 현성을 비아냥거리며 모욕을 주거나 욕을 퍼부었다.
경찰에서 겪은 물리적인 폭력도 고통스러웠지만, 이런 식의 언어폭력은 몸으로 겪는 고통보다 더 참기 힘들었다.
현성은 이런 모욕을 받아야 할 이유가 없었다.
합기도, 태권도 등을 수련하며 실전에 가까운 대련을 많이 겪기도 했고, 힘이나 운동, 싸움에 늘 자신 있던 현성이었다.
그냥 한 번 뒤집어버릴까 싶었지만, 폭력사태는 엄하게 처벌된다는 것이 입소 전(前) 누누이 들어온 얘기였다.
구치소로 이송되어 올 때 이송 책임자인 듯한 사람이 몇 번씩이나 반복하여 강조하던 얘기였다.
“수틀리고 빈정 상한답시고 구치소에서 치고받고 싸워봐야 요즘 그거 인정해주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오히려 일이 커져서 형사사건이 되면 당연히 죄명이 추가되어 일이 꼬이죠. 형사사건은 안 된다고 해도, 보고서가 올라갈 정도의 일이 생기면, 앞으로의 검찰 조사는 물론이고 재판에 심각한 악영향이 갈 수 있으니 잘 판단해서 행동해요.”
생각보다 그 말의 무게는 무거웠다.
현성은 지켜야 할 것이 있고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참아야 한다. 어떻게든 참아야만 했다.
그러나 계속되는 모욕과 비난에 현성의 가슴속에서 뭔가 폭발할 것만 같았다.
“자아 자~ 그만들 하시고. 여기 다들 같이 생활할 사람들이고, 다 저마다 사정이 있고 그런데, 같은 처지의 사람들끼리 서로 얼굴 붉혀서 뭐 하겠습니까? 안 그래요, 방장님?”
누군가가 웃으며 끼어들었다.
듣기에는 좋은 말이지만, 자세히 곱씹어보면 같은 처지끼리 누가 잘났다 못났다 따지냐는 야유 같기도 했다.
그런데 그 조폭의 반응은 현성의 생각과는 완전히 달랐다.
“큼. 크흠, 반장님 말이니 내 여기서 그만하겠수다.”
그러더니 옆에 놓여있던 책을 들고 다시 읽기 시작했다.
“자자, 거기 자리 하나 만들어줘. 나 김석호라고 이 방의 배식반장인데 앞으로 같이 잘 지냅시다.”
배식반장? 그게 뭐지?
하지만 이 배식반장이라는 사람의 위세가 생각보다 대단한 것인지,
이 사람의 말 한 마디, 손짓 한 번에 방장을 제외한 사람들이 순순히 따라주고 있다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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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석호는 감옥, 즉 옛날 말로 감빵(감방:監房?)을 제집처럼 드나든다 하여, 빵잽이라고 불리는 부류의 사람이었다.
방의 배식반장을 맡고 있다는 그 사람은 어찌된 일인지 현성에게 호의적이었다.
들어온 첫날, 나이, 이름, 고향, 죄명, 사건 경위 등등을 설명해야 하는 신고식도 김석호 덕분에 얼렁뚱땅 넘어갈 수 있었다.
현성은 신참이라서 새로 신입이 들어올 때까지는 뺑기통(화장실) 바로 옆에서 자야만 했다.
의외로 화장실은 수세식이었고, 수도꼭지도 있어서 식사 후의 설거지도 거기서 하게 되어 있었다.
화장실 청소와 설거지는 역시 앞으로 신입이 들어올 때까지는 현성의 몫이었다.
배식반장 김석호는 현성에게 영치금(領置金) 잔고를 물어보았다.
영치금이란 수용자 각자의 계좌에 들어있는 돈을 말한다.
접견을 오거나 우편, 온라인 송금 등을 통해 수용자의 계좌에 돈을 넣어줄 수 있었다.
이런 곳에서도 돈은 필수였던 것이다.
현성은 뭐 별 탈이 있을까 싶어서 사실대로 말해주었다.
유치장에서 많이 썼고, 접견 온 사람이 별로 없어서 영치금이 거의 다 떨어졌다고.
그러자 김석호는 그 다음 날 여기저기 알아보더니,
사제(私製), 즉 구치소 내에서 수용자가 돈을 주고 사서 입는 깨끗한 수용복을 구해 와서는,
현성이 대충 바느질 몇 번으로 붙여 두었던 번호표까지 양면테이프로 다시 깨끗하게 붙여서 현성에게 주었다.
마침 아는 사람이 출소하면서 남겨두고 간 걸 재빨리 구해왔다고 했다.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찜찜한 마음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지만,
고맙다고 인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무슨 꼼수가 있다고는 해도 정말 고마운 일이었으니까.
덕분에 퀴퀴한 냄새가 나는 찜찜한 관제(官製) 수용복이 아닌,
몸에도 잘 맞고 깨끗하고 상쾌한 사제(私製) 수용복을 입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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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74번, 채현성, 검치.”
검치라는 말은 검찰청(檢察廳)에 송치(送致)되어 거기서 조사를 받는다는 말인 듯했다.
몇 번 현성은 검찰로 불려가 조사를 받았지만, 하지도 않은 짓을 했다고 인정할 수는 없었다.
현성의 부인이 계속되자, 검찰에서 추가조사가 필요한 경우에 한해 1차 연장 가능한 검찰 조사기간이 연장되었다.
현성은 전부 합쳐 근 보름 동안 거의 매일 수갑과 포승(捕繩)에 묶인 채로 검찰에 불려가야만 하는 셈이었다.
그런데 초기에는 가자 마자 대기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조사를 하곤 했었지만,
현성의 진술과 주장이 조금도 변하지 않아서 그럴까?
아침에 수갑과 포승에 묶여 불편한 버스를 타고 이동하여, 비둘기장―검사실에서 조사 받을 때까지 대기하는 일종의 유치장―에 처박아두고는,
공무원 퇴근 시간 때까지 현성을 부르지도 않고 그대로 놔두는 경우가 종종 발생했다.
결국 아침부터 하루종일 검찰의 비둘기장에 있다가 저녁에 바로 구치소로 되돌아가는 꼴이었다.
피곤한 노릇이었다.
비둘기장의 교도관이 대기자들에게 어디 기대거나 눕지 말라고 떠들고 다니긴 했지만,
이런 비둘기장 같은 곳에서 바닥에 눕는다는 것도 사실 무척 찜찜했다.
청소는 고사하고 냄새와 먼지 등으로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고,
재래식 뺑기통―변기통을 부르는 은어―이 구석에서 지독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뺑기통이 있는 화장실의 문은 삐걱거리며 제대로 닫히지도 않았으니까.
다들 잠시 있다가 가는 곳이다 보니 청소도 제대로 되지 않는 것 같았다.
게다가 계절도 여름으로 접어들고 있어서 악취와 파리 등으로 인한 불편함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제발 빨리 좀 조사해줬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이러려면 뭐 하러 불렀나 싶었다.
지쳐서 돌아오는 현성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김석호는,
그건 공갈 소환이니까 기죽지 말고 신경도 쓰지 말라며 검사들에게 욕을 퍼부었다.
그렇게 고달프게 만들어놓으면, 구치소에 돌아가서 방에 있는 것이 편하고 쉽게 느껴지니,
어떻게든 빨리 마치고 싶어서 피의자들 대부분은 점점 더 적극적으로 조사에 협조하게 마련이라는 거였다.
그걸 노리고 하는 짓이라나?
기가 막혔다. 세상에 이건 또 무슨 일이란 말인가.
양지(陽地)에서만 살아온 현성에게는 너무나 어이없는 일의 연속이었다.
알지도 못하는 여자애들을 성폭행했다는 죄를 뒤집어쓰질 않나.
형사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폭행을 가하지 않나.
검사라는 것들은 방에 쳐 박혀서 나오지도 않고,
나이 지긋한 검찰 사무관들이 조서 다 꾸미고 앉아서는 이 따위 공갈 소환이나 하지 않나.
이게 도대체 뭐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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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운 좋게 공갈소환이 되지 않고, 호송 교도관 두 명에게 인도되어 바로 검사실로 가게 되었다.
그런데 먼저 온 피의자의 조사가 끝나지 않았는지,
교도관 두 명과 포승에 묶인 피의자가 복도에 있었다.
교도관들이 서로 눈인사를 했다.
서로 경례를 않는 것으로 봐서, 아마 계급이 같은 모양이었다.
“아직 안 끝났어?”
“아, 가려던 중에 참고증인이 왔거든. 그래서 잠시 대기하고 있는 거야.”
그 피의자를 보니 검찰 조사를 위한 비둘기장에서 몇 번 안면이 있던 대학생이었다.
아마 여중고생 강간 등의 혐의로 왔다고 했던가?
현성 자신의 처지가 그래서인지, 2315번이라는 번호를 단 그 학생에게 안쓰러운 느낌이 들었다.
[나참. 말을 못 알아듣네. 집에 오늘 못 가고 싶어요?]
어라?
검사실의 문은 닫혀 있었지만, 의외로 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작은 소리였지만, 뭐라고 말하는지 알아듣기에는 충분했다.
[저 녀석이 맞다고, 저 사람이 한 짓이라고 한 마디만 하면 나머지는 우리가 다~ 알아서 한다니까요.
대전에서 여기까지 왔죠? 빨리 집에 가고 싶지 않아요?]
분명히 들렸다.
“이, 이…….”
2315번 피의자가 이를 악물더니 움찔대기 시작했다.
옆의 교도관들이 그 사람을 얼른 붙잡았다.
하지만 그 교도관들의 얼굴에는 적의(敵意)나 당황한 기색이 없었고,
짐짓 안 되었다는 동정심 같은 것이 얼굴에 드러나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일까?
2315번이 주변의 교도관을 좌우로 보면서 애원조로 말했다.
“저거 들으셨죠? 분명히 들으셨죠?”
눈물까지 그렁그렁 맺혀 있는 2315번의 얼굴이 침통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현성에게 들리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들리지 않을 리는 없다.
안 들었다고는 할 수 없었던 걸까?
두 교도관은 마지못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법정에서 증인 신청할게요. 제발 두 분 들은 대로만 증언해주세요. 네?”
두 교도관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웅성거리던 검사실 너머에서 이번에는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많이 되어봤자 고교생 내지는 여대생 정도로 생각되는 앳된 목소리였다.
[…그치만… 분명히 저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는데요…. 얼굴도 다르고 키도 완전히 다르…]
[이거 정말 답답한 학생이네.
우리가 추가 조사한다고 경찰차와 경찰 병력 데리고 학생 학교까지 가서 조사를 하게 되는 수도 있어요.
그러면 어떤 사건 때문에 왔다고 학교에 사전 공문도 보내야 되는데,
학교 전체에 다 알려지고 싶어요?
아까 그 사람이 그랬다고 한 마디만 하면 된다니까요. 학생도 좋고 우리도 좋고.]
자그마하고 겁먹은 듯한 여자애의 목소리를 압도하는 위압적인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대번에 돌아가는 상황을 알아챌 수 있었다.
비슷한 사건의 피해 여학생을 불러온 모양인데,
그 여학생은 저 2315번은 자신을 성폭행한 그 사람이 아니라고 확인해준 것 같았다.
그러나 검찰은 그 사건까지 저 2315번에게 뒤집어 씌워서 종결 처리하려고,
안의 그 여학생에게 저 사람이 맞다고 증언할 것을 강요하는 모양이었다.
“그게요…. 우리 교도관은 증언자격이 없어요.
교도소나 구치소 내의 사건이라면 몰라도…
이런 것과 관련되어서는 증언자격 자체가 인정되지 않거든요.”
고개를 돌리며 외면하는 두 교도관 사이로 2315번의 얼굴이 참담하게 구겨지더니, 아래로 푹 꺾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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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몇 년 전의 현성이었다면, 누가 이런 얘기를 해준다고 해도 전혀 믿지 않았을 것이다.
증거 법정주의를 견지하고 있는 현대 사법체계에서,
‘저 사람이 나 성폭행했어요’ 라고 여성이 주장한다고 해서,
아무런 증거도 없이 어떤 남자를 범죄자로 체포하고 처벌할 리가 있겠느냐며 비웃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거의 아무런 증거가 없다고 해도, 피해를 당했다고 주장하는 여성의 증언만 있다면,
그리고 그럴 듯한 정황만 갖춰진다면 간단하게 사건이 성립되는 게 현실이었다.
그리고 가해자로 지목된 남자가 권력이나 사회적 위치를 차지한 사람이 아닌 이상에야,
반대 증거를 내지 못한다면, 거기서 빠져나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예전에 현성이 상식으로 알고 있던 법률.
피해 여성의 몸에서 남성의 체모(體毛)나 정액 등이 검출되어야만 증거가 되느니 어쩌고는
한참 지나도 지난 구석기 시대의 법률이었다.
피해 여성이 조사를 받고 증거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모욕감을 느낀다는 이유로
여성부와 여성단체들이 나서서 목소리를 높인 덕분(!)에,
피해 여성의 증언만으로 사건이 접수되게 바뀐 지가 오래되었다는 것이다.
예전이었다면 현성도 이런 제도에 동감했을 것이다.
‘그러면 아무 죄도 없지만, 그 남자가 밉다거나, 돈을 뜯어내겠다 등의 목적으로,
여자가 남자를 허위 고소하는 경우는 어떻게 할 거냐?’
누군가 현성에게 이렇게 반문(反問)했다면, 옛날의 현성은 이렇게 대답했으리라.
‘그럴 리가 있어?
아무리 악감정이 있고, 합의금 등을 뜯어내겠다고는 해도,
강간당한 여자라는 수치스러운 낙인이 찍히는 걸 무릅쓰고 그런 거짓말을 할 여자가 어디 있겠어?
그리고 수사기관이 바보냐? 그런 걸 못 가려내게?’
하지만 지금의 현성이라면,
그리고 구치소나 교도소 내의 사람들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여자들이 이 나라에는 수두룩하다며 열에 열 모두 목청을 높이리라.
심지어는 공정한 수사를 해야 할 검찰에서도, 오히려 그런 걸 조장하고 있지 않는가 말이다.
[그러고 보니 비슷한 것 같기도 하지만…]
주눅이 든 듯 우물쭈물 거리는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이렇게 되는구나. 현성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죠? 자, 얼른 여기 서명하고 지장만 찍으면 돼요. 그래요, 아주 잘한 겁니다.]
희희낙락하며 또렷하게 들려오는 저 목소리.
분명히 현성의 귀에도 익숙한 그 검찰 사무관의 목소리였다.
그런데 이 검사실은 마약 전담 검사실인데,
그렇다면 저 학생은 성범죄에다 마약 혐의까지 받고 있는 것일까?
하는 짓을 보니, 그 마약 혐의도 보나마나 뒤집어 쓴 것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성은 저 2315번에게 동정이 갔지만, 아무 것도 해줄 수가 없었다.
나설 수가 없었다.
“으허헝…”
울고 있었다. 2315번은 울고 있었다.
‘난 분명히 들었어요. 내가 들은 대로 증언해줄게요. 법정에서 나를 증인으로 신청해요.’
이런 목소리가 목 바로 아래까지 올라왔다.
그러나 현성은 애써 그 말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내가 증언하겠다고? 아니지. 그게 될 턱이 있나?
구치소 동료 수감자의 말이 법정에서 증거로 채택될 리가 없잖아.’
욱!
현성은 자기혐오가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뒤이어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합리적(?) 이유들.
합리적이라고? 그래,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성은 깨달았다. 그건 변명이었다. 구실이었다. 회피였다.
자신 역시 검찰에서 조사를 받는 입장이었다.
지금 2315번에게 자신이 증언해주겠다거나 하는 얘기를 꺼내면, 분명 검찰의 귀에 들어갈 것이다.
그러면 검찰의 조사 과정에서 현성에게 심각한 불이익이 올 건 당연했다.
검경(檢警)에 공평무사(公平無私)함을 기대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하는 것은
현성 자신이 체험으로 느낀 것이었으니까.
현성 자신은 분명 그 불이익을 겁내고 있었다.
분명히 나서야 옳은 일에 나서지 않으려고 발뺌하면서 변명을 늘어놓고 있었다.
현성 자신도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으면서도,
다른 억울한 사람의 일에 대해서는 발을 빼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2315번의 들썩거리는 어깨가 복도 너머로 멀어지는 것을 보며,
현성은 한없이 비참해지는 자신을 느꼈다.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있었다.
결국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 놈이었던가.
삐걱
문이 열리며 검찰 직원인 듯한 남자가 여성 한 명을 인도하여 나왔다.
안에서 들려오던 얘기에서는 여학생이라고 했다.
얼굴을 보니 아무리 높게 잡아도 이제 갓 대학 신입생 정도의 나이일까?
울먹거리는 듯한 뒷모습으로 멀어져간 저 2315번이 아무리 범죄 혐의를 받고 있다고는 해도,
아직까지는 유죄가 확인된 사람도 아니다.
설령 저 여학생이 강간당했다는 것이 사실이라고는 해도,
분명 여학생 자신이 직접 보고 그 강간범이 아니라고 했었다.
그런데도 불편함과 불이익이 싫어서 무고한 사람을 가해자라고 지목하고 싶었나?
진짜 범인을 잡고 싶다는 생각은 없는 거냐?
그냥 가해자와 비슷한 류의 사람을 아무나 십자가에 매달기만 하면 그걸로 됐다는 거냐?
자연 그 여학생을 대하는 현성의 눈빛이 고울 리가 없었다.
그 여학생은 현성과 눈이 한 번 마주치자 흠칫 어깨를 움츠리더니,
종종걸음으로 직원과 함께 걸어가 버렸다.
2315번이 억울함에 울먹이며 사라져갔던 그 복도 너머로.
화가 났다.
그러자 퍼뜩 뭔가 떠올랐다.
어쩌면 저 여학생에 대한 적대감은 현성 자신에 대한 자괴감을 감추기 위한 것이 아닐까.
누군가 그랬던가?
지옥은 악을 행하는 사람들을 위한 곳이 아니라,
나서야 할 곳에 나서지 않고 못 본 체 외면하는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곳이라고 말이다.
늘 그래왔듯이 사무관 앞의 의자에 현성은 앉혀졌다.
“왜? 오랜만에 영계 보니 꼴리냐? 아직 정신 못 차렸냐? 더러운 새끼.”
현성이 그 여학생을 노려보던 것을 보았는지, 사무관이 현성에게 비아냥댔다.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감과, 검찰이 하는 짓에 대한 분노를 안고,
현성은 초지일관(初志一貫), 혐의 부인과 무죄 주장을 계속했다.
어쩌면 자신은 애초부터 비겁자였지만,
스스로는 그것을 모르고 지내왔는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지금의 현성은 자신이 비겁자에 불과했다는 것을 방금의 일로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더 이상 비겁해지고 싶지는 않았다.
검찰 사무관이 눈을 부라리며 달래고 어르고를 반복했지만,
일말(一抹)의 선처와 호의를 구걸하려고,
하지도 않은 짓을 인정하며 용서를 비는 비겁한 짓은 할 수가 없었다.
연기된 검찰 조사의 시한(時限)도 끝나고 이제 재판부로 서류가 넘어가게 되었다.
현성은 재판부에서 스스로를 변호할 결심을 단단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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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치소는 범죄혐의가 있는 사람들을 재판과 조사 등의 편의를 위해 임시로 가두어둔 곳일 뿐,
확실한 죄인들을 가둬둔 곳은 아니다.
그래서 벌금이나 집행유예 등으로 출소하기도 하고,
1심이 끝나 항소심을 위해 사람들이 이동하는 일도 잦은 곳이다.
현성의 방에서도 8명 정원인 중형 거실의 수용인원이 5명으로 줄어든다 싶더니,
신참이 3명 들어오면서 현성은 중간 위치가 되었다.
그리고 처음부터 자신을 감싸주었고,
이후로도 은근히 현성을 챙겨주던 김석호가 그 방의 방장이 되었다.
초기에 변태 물총이라며,
운동시간 등에 현성에게 적의를 보이며 달려들려는 양아치나 조폭들에게서 그는 현성을 감싸고돌았다.
그의 말은 어지간한 교도관이나 폭력배들에게도 다 통했기에,
현성은 별다른 말썽에 휘말리지 않을 수 있었다.
물총이란 말은 강간범이나 성범죄자들을 구치소, 교도소 등에서 낮춰 부르는 은어(隱語)였다.
어찌된 게 미성년자, 특히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성범죄의 혐의를 받는 사람에게,
다짜고짜 폭력부터 쓰려는 사람들이 꽤 있었다.
그 자신도 죄를 지어 잡혀온 주제에 말이다.
그래서 그런 종류의 죄로 들어온 경우, 신고식 때 거짓말로 죄명을 속이는 사람들도 있었다.
죄명과 수용번호, 생년월일과 이름 등을 쓴 아크릴 조각이 방 입구 바로 옆에 꽂히진 하지만,
피해자가 어리다는 걸 숨기거나 사건의 세부 내용을 다른 걸로 둘러대면 쉽게 넘어갈 수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검찰 조사가 마무리 될 즈음,
법원에 사건이 넘어가면,
공소 내용을 구체적으로 적은 공소장(公訴狀)의 사본이 피의자 본인에게 송부된다.
이는 보통 방장의 손으로 넘어가게 마련이다.
결국 신고식 때 숨기거나 둘러대서 잘 넘어간다고 쳐도 이때 다 들통 나는 것이다.
방장이 성질 더러운 조폭이거나 하면,
물총에다 사기꾼이나 모사꾼이라 하여 흠씬 더 터지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현성의 공소장은 김석호의 중개(?)로 현성에게 바로 전달되었다.
약간은 눈치를 보며 공소장을 읽는 현성에게 김석호가 속삭였다.
죄명과 사건번호만 따로 적어두고 나머지는 찢어버리라고.
읽어봤자 열불만 터질 테고,
공소 내용 등은 현성이 다 기억하고 있을 테니,
탄원서나 반성문, 항소 이유서 등을 쓸 때 꼭 필요한 죄명과 사건번호 등만 적어둔 다음,
발기발기 찢어버려도 별 탈 없다는 거였다.
김석호는 장난스레 발기발기라는 말에 강세를 주고는 피식 웃었다.
현성은 김석호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그는 적어도 인간적이었다. 죄인일지언정 악당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런데 현성이 명문대학 출신임은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이윽고 편지나 항소이유서, 탄원서, 반성문 등을 써달라는 등의 부탁이 하나둘 오기 시작했다.
이를 감지한 김석호가 구매물 등을 걸고 이를 중개하기 시작하면서, 현성의 입지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윽고 대학의 위탁 교육 과정 같은 것에 다니고 있는 교도관들이
학교에 제출할 보고서를 작성하는 것을 도와달라며 찾아왔고,
또 승진 등을 위해 공부를 하는 교도관들은 공부를 도와달라는 요청을 하기도 했다.
그런 날에는 현성은 방 바깥으로 나가 교도관에게 공부를 가르쳤고,
답례로 방에 닭 훈제나 콜라 등이 우르르 들어왔다.
또 컵라면이 아닌, 끓인 라면을 방 전체 사람들이 얻어먹을 수도 있는 일도 생겼다.
현성의 입지는 더욱 더 올라갔다.
어지간한 재소자들뿐만 아니라, 교도관들도 현성을 대우해주게 되니,
일반 수용자들은 현성을 함부로 대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고 현성은 방에서 배식반장을 맡게 되었고, 서기(書記)까지 맡았다.
공소장이나 기타 서류 등을 챙기고 구매물품까지 관리하는, 명실 공히 2인자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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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후에 공소기각(주1)으로 출소하고, 또 보석으로 나간 사람도 있어서 방의 전체 인원이 줄었다.
게다가 아침에 검찰 조사로 두 명이 나가고,
좀 있다가 접견이 한꺼번에 와서 방에 현성 혼자 남아있게 된 어느 날이었다.
원칙적으로는 수용거실에 수용자 혼자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이런 경우 임시로 다른 방으로 옮겨놓아야 하겠지만,
혼자 남은 사람이 현성인 것을 본 교도관은 잘 지내냐는 한 마디만 하고 그냥 지나가버렸다.
그런데 잠시 후 신입이 들어왔다.
제법 지긋한 나이였다.
잔뜩 주눅이 든 분위기에 불안한 듯 현성의 눈치를 살피는 모습.
성범죄자!
그것도 미성년이나 어린이 성범죄자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현성은 더 이상 그런 사람들에게 욕설이나 조소를 퍼부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그런 꼴을 당하고 보니,
억울한 사정이 있는 사람이 한둘이 아닐 거라는 것이 현성의 생각이었다.
“신고식은 방장이 없으니 나중에 하시죠. 저는 이 방의 배식반장입니다.”
“아, 네, 선배님, 잘 부탁합니다.”
잔뜩 주눅이 든 표정이었다.
나이로 따지면 현성의 삼촌이나 작은 아버지 연배였다.
탁 봐도 만만해 보이는 인상에 어린이 대상 성범죄라니,
앞으로 얼마나 당할까 생각하니 딱하다는 생각이 드는 현성이었다.
철크덕
밖에서 교도관이 패찰―수용자의 번호와 생년월일, 죄명 등을 적어놓은 플라스틱 조각―을 입구 옆 벽에 있는 패찰판에 넣는 소리가 났다.
창가에 기대어 있던 현성의 눈에 얼핏 들어온 신입의 패찰 색깔은 노란색이었다.
강력범이다.
패찰의 색깔만으로도 구별이 된다.
강력범은 노란색, 다른 범죄는 흰색, 향정신성약품 등 관련 범죄는 파란색이었다.
현성은 마약 관련 범죄 일체를 부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현성의 패찰 색깔은 아직까지는 노란색이었다.
교도관이 창살 너머로 불쑥 얼굴을 내밀었다.
“어이, 신입 아저씨. 그 선생님한테 잘 보여 두세요. 우리 사동의 고문 변호사십니다.
공소장 검토, 항소 이유서, 탄원서, 반성문, 게다가 어지간한 편지들까지 몽땅 그 선생님 손을 거치고 있다고요.”
“어휴, 부장님, 왜 또 그러세요?”
“하하. 현성 씨가 좀 잘 챙겨드려요.”
부장은 좌우를 슬쩍 살피더니,
배식구―배식이나 구매물품 등을 넣어주기 위해 벽에 뚫어 놓고 밖에서 잠글 수 있게 만들어놓은 구멍―를 열고,
종이에 싼 것을 들이밀었다.
눈치가 있는 현성은 아무 말 없이 얼른 받아 챙겼다.
부장은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얼른 치워요.”
“네, 고맙습니다.”
현성도 목소리를 낮춰 대답했다.
만져 보니 뭔가 먹을 것이었다.
어제 검방(檢房)했으니 오늘은 아마 검방이 없을 테지만, 빨리 먹어치우는 것이 좋다.
검방(檢房)이란 방을 검사하는 것을 말한다.
수용자들은 손재주가 좋은 사람들이 많고,
또 전과자들끼리 전해져오는 노하우가 서로 공유되곤 해서,
과장을 좀 보태서 말하면 대부분이 거의 맥가이버 수준이었다.
고참 교도관들이 간혹 하곤 하는 농담이 있다.
3개월 동안 검방을 안 하고 방치하면, 헬리콥터 만들어서 타고 달아날 사람들이 빵잽이들이래나?
사실 교도관이 이런 물품을 반입하여 전해주는 건 엄연히 규정 위반이고 무척이나 위험한 일이었다.
그리고 수용자들 중에서도 고발, 투서(投書) 전문의 골칫덩이가 있는 경우가 있다.
뭐라도 꼬투리 잡을 일이 있으면,
그걸 물고 늘어져서 교도관을 귀찮게 하든지 하여,
수용생활을 좀 더 편하게 누리려 한다거나 하는 것을 노리는 사람들이다.
혹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을 즐기는 듯한 사람들이기도 했다.
자꾸 그런 일이 반복되면 교도관들도 그런 사람은 피하려고 드니까.
어쨌든 그런 사람들을 여기서는 코걸이라고 불렀다.
좁은 곳에서 갇혀 지내는 탓일까?
밖에서는 대범하고 관대한 사람이라 해도,
이런 곳에서 갇혀 지내다 보면,
아무리 사소하고 조그마한 것이라도, 차별을 받거나 손해를 보는 것을 견디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구치소 측에서는 요령과 처세술을 잘 아는 빵잽이들 중에서,
통솔력이 있고 힘깨나 쓰는 사람들, 특히 조폭들을 봉사원이라는 이름으로 앉혀두고,
시끄럽고 큰 문제가 생기지 않는 한, 사소한(?) 폭력이나 위력과시(주2) 등을 사용해
수용자들의 질서를 잡는 것을 사실상 조장하고 있었다.
그게 관리에 더 편했으니까.
교도소에서는 그런 현상이 더 심하다는 얘기를 김석호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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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른 챙겨 넣은 곶감은 한 줄이나 되었다.
이런 곳에 있으면 가장 먹고 싶은 것이 단 것이다.
쵸코바[Chocolate-bar]가 구매가능물품이 된다는 소문은 있었으나,
늘 그렇듯이 소문은 소문일 뿐이니까 모르는 일이었다.
배식반장으로서 방 사람들이 돌아올 때까지 아껴두고 같이 나눠먹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껴두다가 들키면 곤란해진다.
얼른 먹어치우는 게 차라리 낫다.
우선 신입부터 챙겨야겠지만.
“아저씨, 성범죄입니까?”
“네? 네! 그렇습니다!”
“군대도 아니고 안 그러셔도 돼요. 성폭(주3)이에요, 성추행이에요?”
“성추행이고…….”
죄명과 사건 경위 등을 알리는 것이 신고식의 관례인데,
죄명 뒤로는 아무 말을 못하고 머뭇거리는 걸 보니 피해자가 어린 게 분명했다.
“피해자가 어린가요?”
“…….”
“아아, 알았어요. 됐습니다 됐어요.
나중에 신고식 할 때 그냥 성추행이라고만 하세요.
이름, 나이, 주소, 죄명 그런 것만 간단하게 외치시면 됩니다.
일단 그것만 말하고 다른 이야기는 자세하게 할 필요 없어요.”
“네, 알겠습니다.”
“근데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박재형이라고 합니다.”
“네, 저는 채현성입니다. 채현성. 이 방의 배식반장과 서기를 맡고 있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아, 네, 저야말로…”
일어서면서 인사를 해오는 모습을 보니 가정교육도 잘 받았고,
제대로 된 직장에 다니는 순진한 사람 같았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에 말려들었지?
“저도 성폭력입니다. 하지만 제가 겪고 보니 성폭력을 처리하는 것에는 문제점이 너무나 많더군요.
여자가 자신이 당했다고 고소하면 남자 말은 절대 안 들어주는 분위기더라고요.”
현성은 자연스럽게 운을 뗐다.
“그리고 살인, 폭력, 강도 등을 태연히 해치우는 인간들이
성범죄 관련된 사람들을 응징이라도 하겠다는 듯 달려드는 걸 보면 참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건 심리학에서 투영(投影), 투사(透寫)라고 하지요.
자신의 죄책감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켜 스스로 면죄부를 받으려는 심리…”
박재형은 차츰 고개를 끄덕이며 현성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마음이 조금씩 안정된 탓일까?
박재형은 자신이 당한 일, 자신의 사건을 하나씩 풀어놓기 시작했다.
무슨 사고를 친 사람들은 대개가 스스로를 합리화시키기 마련이니 50% 정도는 가려서 듣는다 해도,
이 사건은 뭔가 문제가 있어 보이는 사건이었다.
◆ 미주(尾註)*********************************************************
주1) 공소기각 : 형사소송에서 소송조건에 흠결이 있을 때에 법원이 소송을 종결시키는 것. 예를 들어 단순강간죄일 때 피해자와 가해자가 합의를 하여 가해자의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분명한 의사 표시가 있는 경우, 법원은 공소를 기각하고, 가해자를 방면한다.
주2) 위력과시 : 단체로 모여서 특정 장소에서 위력과 세력을 과시하는 행위. 조직 등의 명목으로 경찰의 관리대상으로 명단에 올라있는 사람들의 경우, 두 명 이상이 어느 장소에 모여서 서 있는 것 자체만으로 위력과시에 해당되어 입건이 가능한 경우도 있다.
주3) 성폭 : 성폭력을 줄여서 부르는 말
◆글쓴이의 변(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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