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편에서 많은 질책과 격려 감사드립니다.
역시 어거지로 뭘 맞춰간다는게 참 힘들 구나 하고 새삼 깨달았습니다.
앞으로 더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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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큰
1부 33장 위기의 시작(1)
이동철의 차를 타고 혜령과 지은은 집으로 향했다. 다른 사내들은 벤을 타고 이동철이 지시한 곳으로 출발했다. 민혁은 차를 몰고 정한수의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한 혜령은 한동안 마음을 진정시켜야만했다. 그러나 지은의 상태가 걱정이 되어 그녀의 찢어진 옷을 새 옷으로 갈아입히고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으로 향하는 차안에서 정면만 응시하는 이동철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런 대로 인상이 좋은 사람이었다. 어쩌다 자신을 납치하는 일에 휩쓸렸는지 모르지만 어쨌건 그의 눈빛은 달라져 있었다.
“정한수와는 어떻게 알게 됐나요..?”
혜령의 질문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동철이 조수석에서 뒤로 돌아 보았다.
“네.. 큰누님.. 그게 좀 복잡합니다.”
동철은 혜령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자신의 지난 일을 설명했다.
동철이 50명의 부하들과 연일 무술 훈련에 여념이 없을 때 산속으로 한 사람이 찾아 왔고 새로운 고수가 있으니 대련을 원한다고 하여 그는 부하들을 두고 단신으로 그를 따라 나섰다. 그러나 그것은 정한수의 함정이었다. 정한수는 그동안 폭력조직으로부터 일정한 돈을 받아오고 있었다. 그러다 동철의 등장으로 그 수입원이 끊기자 그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가 흡수했던 조직의 조직원 중 동철에게 불만을 품은 자들을 포섭했다. 그리고 그를 유인하여 창고에 가두었다. 그사이 정한수는 포섭한 깡패들에게 동철의 부하들이 있는 곳을 습격하라고 지시했고 그 일로 정한수는 10명의 부하를 잃었다. 남은 부하들을 미끼로 정한수는 그에게 자신의 밑에서 일할 것을 요구했고 그가 뜻을 굽히지 않자 그 자리에서 5명의 부하를 무작위로 처형했다. 동철은 더 이상 부하들의 무의미한 죽음을 보고 있을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정한수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그의 밑으로 들어간 것이다. 다행히 남은 부하들은 정한수의 조직에 들어가지 않도록 해체하겠다는 조건과 자신의 신분을 아귀라로 해 달라는 조건을 달았다. 아귀는 심해에서 바위처럼 위장하고 있다가 눈앞의 먹이를 잡아먹는 어류이다. 그가 아귀란 이름을 선택한 이유는 지금은 웅쿠리고 있을 때라고 생각하고 언젠가 눈앞의 먹이 즉, 정한수를 잡아먹겠다는 의미가 있었다. 정한수는 그걸 눈치 채지 못하고 그에게 전국 조직의 상납금 수금과 소소한 잡심부름을 시켰다. 그리고 그에게 자신의 심복으로 구성된 조직을 만들어 주었다. 따라서 그는 부하들에게 감시받고 정한수에게 함정이란 것을 모르게 하기 위해 철저하게 망가졌다. 그리고 병규를 통해 해체된 자신의 직속 부하들을 모으게 하여 다른 눈에 띠지 않도록 산속을 헤매며 무술연마에 전념하도록 지시했다. 언제가 될지 모를 기회를 위해 그도 준비가 필요했다. 따라서 그의 이중생활은 시작했고 정한수 앞에서는 철저한 악인의 모습으로 위장해야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자주하면 습관 된다고 했던가? 그의 철저한 악인 행위는 점점 그의 정신을 갉아 먹었고 어느 순간 돌아본 자신의 모습이 정말 악인이 되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던 중 정한수로부터 혜령을 납치하라는 지시를 받고 이 기회를 잘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정한수가 심어준 조직원들과 혜령과 지은을 납치해 별장으로 갔다. 그곳에는 미리 병규에게 지시하여 직속부하들이 잠복해 있다가 정한수의 조직원들을 처치하고 혜령과 지은을 잡아 두었다. 병규가 정한수의 조직원들을 제압하는 동안 동철은 정한수와 통화를 했고 이틀 후 별장에 들른 다는 그의 말에 거사 일을 이틀 후로 잡았다.
동철의 이야기가 끝날 때 쯤, 병원에 도착하여 서둘러 지은의 상태를 체크했다.
“난 가볼 곳이 있어요. 지은이를 잘 돌봐줘요.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연락주고요.”
“네.. 큰누님.”
동철이 혜령을 향해 90도 각도로 인사를 했다.
“민혁이가 철저하게 건달냄새를 지우라고 했을 텐데요? 기억 안나나요?”
혜령은 조금은 쌀쌀 맞게 그에게 핀잔을 주었다. 자신의 알몸을 가지고 희롱했던 그였기 때문에 그를 마주대하는 것이 불쾌했다.
“네... 큰누님. 앞으로 조심하겠습니다.”
동철은 가볍게 목례를 했다. 그리고 무슨 말을 더 하려다 뒤 돌아 걸어가는 혜령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
그는 말없이 진료실를 간판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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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들어온 혜령으로부터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게 된 심의원과 선거 사무실 직원들은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것은 엄연한 테러예요. 상대 후보를 감금하다니. 이 일은 조용히 넘어갈 일이 아닌 것 같네요.”
심의원이 혜령의 손을 잡고 다독이며 말했다.
“저도 그럴 생각입니다. 기자 회견을 준비하고 싶은데...”
혜령은 홍보담당을 맡고 있는 직원을 바라보았다.
“아... 그런데.. 의원님... 내일이 선거일이고... 이 일이 자칫 선거에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럴 수도 있겠는데요.. 이게 너무 엄청난 사건이라... 자칫하면 역풍을 맞을 수 있습니다.”
홍보담당 직원을 돕기 위해 다른 직원이 말했다.
혜령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지금 만약 사건을 터트리면 언론의 관심이 집중되고 여론에 밀려 경찰이 조사에 나서겠지. 아니면 검찰이든가.’
‘그렇다고 이일을 덮어두자니 병원에 있는 지은이가 너무 불쌍하잖아.’
‘그래! 우선은 그렇게 해야겠어!’
혜령이 생각이 정리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군요. 제 생각이 짧았어요. 이번 일에 대해서는 선거가 끝난 후로 미루기로 하죠.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넘기 수도 없는 일이예요. 제가 정한수를 만나 보겠어요.”
“아니.. 그건 너무 위험하지 않아요? 혜령씨를 감금했던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 앞에 나타나면 무슨 짓을 할지 어떻게 알아요?”
“심대표님 걱정 마세요. 이래봬도 제 한 몸은 지킬 수 있거든요. 아마도 정한수 앞에 제가 나타나면 적잖은 충격을 줄 수 있을 거예요. 그 후에 그가 알아서 행동하겠죠.”
“그렇긴 해도 너무 위험하지 않아요?”
혜령은 자신을 걱정하는 심대표와 직원들을 뒤로 하고 사무실을 나섰다. 물론 여유를 보이기 위해 고개를 돌려 윙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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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예상은 적중했다. 정한수는 자신의 앞에 서있는 여자가 혜령이라는 것에 허둥대며 소파에 쓰러지듯 앉았다.
“제가 이 자리에 있는 게 정후보님을 이렇게 놀라게 할 일인가요?”
혜령은 정한수를 내려 보며 팔짱을 꼈다.
“아...니... 그게... 아이고.. 어서 오세요.”
정한수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그녀에게 맞은 편 자리에 앉도록 손짓했다.
“몇 가지만 말씀드리려고 왔어요. 내일의 결과는 변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이번 일에 대해서는 선거 후 공식으로 조사를 의뢰하도록 하죠. 그동안 몸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
혜령은 그대로 서서 말했다. 그리곤 뒤로 돌아 당당하게 그의 서재를 나섰다. 그 모습을 정한수는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는 또 한 사람이 있었다.
민혁은 건너편 옥상에서 혜령이 정한수를 향해 거침없는 일침을 놓는 장면을 처음부터 보고 있었다.
‘누나는 정말 강심장이야.’
민혁은 혜령의 행동에 감탄을 하며 계속 정한수를 주시했다. 사실 그가 이곳에 다시 온 것은 정한수를 처형하기 위해서였다. 민혁의 손에는 저격용 라이플이 쥐어있었다. 그를 조준하고 있을 때 갑자기 혜령이 나타난 것이다. 그도 처음에는 깜짝 놀랐지만 그가 알고 있는 혜령이라면 충분이 예상했어야 했다.
‘역시 내가 처리하는 것보다는 누나가 직접 하는 게 더 낳겠지.’
건너편 정한수의 서재가 갑자기 부산해 졌다. 정한수는 서재를 이리저리 거닐며 생각에 잠긴 듯 했다. 그러나 전화를 들어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정한수요. 홍의원 부탁합니다.]
[의원님께서는 지금 회의 중 이십니다. 전화 메모 남겨 놓겠습니다.]
[어이 이봐! 지금 중대한 문제가 터졌다고... 얼른 바꿔!]
[의원님께서 회의 중 오는 전화는 메모만 남겨 놓으라는 지시가 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야이 시발년아! 너 죽고 싶어. 응.. 얼른 바꾸라면 바꾸지 뭔 말이 그렇게 많아!]
[.....]
[긴급이야! 긴급!]
[무슨 일이야?]
[아.. 형님.. 큰일 났습니다.]
[뭐가 큰일이야. 어디 전쟁이라도 터졌어?]
[아니 그게 아니고... 박혜령이 때문에 죽게 생겼습니다.]
[박혜령이 왜? 그건 네가 잘 처리했다고 하지 않았어?]
[근데.. 그게... 그년이 제 앞에 버젓이 나타났습니다.]
[에잉... 사람이 왜 그리 확실하지가 못해? 그래서?]
[그년이 엄포를 놓고 갔습니다. 선거 후에 공식 수사 의뢰하겠다고.]
[머리 아프군.]
[그년이 당선될 꺼 뻔하쟎습니까? 그럼 그땐 금빼찌 달고 설처대면 저 죽습니다. 형님.... 살려주십시오.]
[바보같은 놈. 여자하나한테 그렇게 쩔쩔 매서야.... 으음....]
[형님.. 형님..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일단... 일본에 가있어... 어차피 이번 선거 물 건너갔잖아. 일본에 가서 내가 시키는 일 좀 해...]
[일본 말입니까? 갑자기 일본은 왜?]
[길게는 나중에 다 알게 되니까... 그냥 시키는 대로 해...]
[바로 갑니까?]
[이 바보야! 생각 좀 해! 오늘 밖에는 시간이 없잖아. 내일 선거 끝나면 그년이 당장 네놈 목에 칼을 드리델텐데... 오늘 중으로 이 나라를 떠..]
[알겠습니다. 형님.]
정한수는 힘없이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서둘러 짐을 챙겨 집을 나섰다. 그 모습을 모두 지켜본 민혁은 무심코 넘겨 버렸다.
‘이로써 마무리 된건가? 좀 찜찜하군. 어쨌건 이제 나도 내 일에 전념할 수 있겠어.’
민혁은 찜찜함을 뒤로하고 자리를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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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때? 좀 괜찮아?”
병실로 들어오는 혜령과 민혁의 모습에 그동안의 무료함을 한꺼번에 날려버리듯 혜원이 침대를 박차고 내달렸다. 그리곤 민혁에게 폴짝 뛰어 안겼다.
“참나? 언니보다 민혁이가 그렇게 좋냐? 언니는 죽을 고비 넘기고 왔더니.”
“아냐.. 언니.. 언니도 보고싶었어. 병원에 있으니까 너무 심심하잖아. 그나저나 죽을 고비라니? 언니가 왜 죽어?”
“그럴 일이 좀 있었어. 저.. 이젠 좀 내려오지 않을래?”
“아니.. 나 저기 침대까지 안고 가줘. 히...”
“오면서 얘기 들었다. 정희는 좀 어떠니?”
금방까지도 밝게 웃던 혜원이 민혁의 몸에서 힘없이 떨어지며 두 눈에 눈물이 잔뜩 고여 금세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아직... 의식이 없나봐... 언니 어떻게 정희 불쌍해서.. 으앙...”
결국 그녀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런 그녀를 따뜻하게 안아주며 혜령이 그녀를 다독거렸다.
“괜찮을 거야.. 그래도 그만한 게 다행이지... 괜찮아.. 괜찮아..”
그녀의 다독임에도 불구하고 혜원의 울음은 한참을 지나서야 그쳤다.
“우리 자매가 민혁이에게 큰 빚을 졌네. 민혁이 아니었으면 나나 혜원이나 큰일 날 뻔했잖아.”
“그지.. 난 내 눈앞에서 뭐가 휙휙 하더니 그놈은 자빠져 있고 오빠가 내 앞에 떡 서있는 거야... 그때 오빠가 왜 이렇게 멋있던지.”
“난 그것보다 훨씬 멋진 모습을 봤는데. 그냥 막 날라 다니더라고. 아니 어떻게 그렇게 싸움을 잘해?”
“그냥 좀...”
“전에 얘기 했잖아..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도무지 알 수 없는 반대편 지구.. 크크크”
혜원은 신이 난 듯 갑자기 주먹을 쭉 뻗었다.
“나.. 이참에 깨달았어.”
“뭘?”
“무술을 배울꺼야.”
“무술을?”
“응... 갑자기 언제 또 이런 일이 생길지 모르잖아. 그때마다 오빠가 구해주러 오겠지만. 그래도 만일을 위해 배워야 겠어.”
“내가 도복입고 운동할 때 야만인이라고 했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게 누구더라?”
혜원이 갑자기 주변을 뒤적거렸다.
“뭐해?”
“응? 그 야만인이라고 했던 사람 찾고 있는데?”
“어이구...”
“헤...”
아픔이 있었고 아직도 잊히지 않는 아픔이 있지만 다시 평화가 찾아온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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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철씨!”
“아니 형님 동철씨가 뭡니까? 동생한테. 그냥 동철아 하세요.”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라뇨?”
민혁은 자신의 낙천적인 성격이 모두를 더 힘들게 만들게 됐다고 생각했다.
“사실, 혜령누나가 정한수에 대해서 강경하게 압박을 할 모양입니다. 그러다 보면 동철씨가 개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정한수를 사주혐의로 경찰의 수사를 의뢰하려면 뚜렷한 증거가 있어야 하고 수사 진행과정 중에 동철씨가 연류된 것과 실제 감금 행위를 한 동철씨를 빼고 수사가 진행될 수 없는 거지요.”
“아... 그렇군요. 결국은 지은 죄에 대해 죄값을 치러야 갰지요.”
동철은 한동안 고개를 숙이고 말을 잇지 못했다.
“알겠어요. 제가 자수를 하지요. 결자해지라고 제가 묶은 매듭이니 제가 풀어야 갰죠. 한가지 부탁이 있어요. 우리 아이들 말입니다. 그 애들은 관련이 없는 걸로 해주시면 안되겠습니까? 다 제가 잘못한 일이고 애들은 제 말만 따랐을 뿐입니다.”
“그건 제가 누나와 얘기를 나눠보죠.”
“그리고 정한수의 사주를 입증할 결정적인 증거는 제가 갖고 있습니다. 정한수가 제게 지시할 때 녹음해둔 녹취록이 있습니다. 그걸 증거로 정한수를 충분히 사주 혐위를 입증할 수 있을 겁니다. 여기...”
동철은 만년필 모양의 녹음기를 꺼내어 민혁에게 건냈다. 플레이 버튼을 누른 민혁은 녹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정한수의 목소리와 동철의 목소리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것으로 정한수를 사주혐의로 잡기에는 충분한 자료가 되었다.
민혁은 만년필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동철과 헤어졌다.
잠시 후, 민혁은 혜령과 마주앉아 있었다.
“누나, 동철씨와 얘기 해봤어요. 자수하겠답니다. 대신 자신의 단독 범행으로 해 달래요. 부하들은 실제로 납치에는 관여하지 않았데요. 그리고 여기 동철씨가 정한수에게 납치를 사주 받을 때의 대화를 녹취한 녹음깁니다.”
민혁은 주머니에서 녹음기를 꺼내 혜령에게 건넸다.
“그럼... 그 애들은 어떻게 할 거야?”
“알아보니까 학교에 다녀야할 아이들도 있더군요. 그래서 그 애들은 대안학교 같은 곳에 보낼 생각예요. 그리고 나머지는 제가 데리고 있으려고요.”
혜령은 정한수를 잡을 결정적인 증거를 제공한 동철의 부탁을 들어 주기로 했다.
민혁은 다시 동철과 그의 부하들이 있는 자신의 아파트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들을 모이게 하고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얘기 해 주었다.
처음에는 동철이 자수한다는 말에 자신들도 자수하겠다고 아우성치다 동철의 설득에 잠잠해 졌다.
“동철씨, 애들 중에 학교에 가야할 애들을 가려주세요.”
민혁의 말에 동철은 10명의 아이들을 뽑아냈다.
“이 아이들은 제가 학교를 알아봐서 학업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대안학교같은 곳이 있는데 직업교육을 받게 될 겁니다. 그리고 나머지 아.. 병규씨와 대웅씨를 포함해 5명은 저와 함께 할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료를 보니까.. 음.. 어디 있더라...”
민혁은 서류 뭉치를 뒤적이다 마침내 원하는 자료를 찾았는지 서류를 뽑아들었다.
“최형규가 누구지?”
민혁이 이름을 호명하자 날렵한 몸집이 사내가 손을 들었다.
“제가 최형隻求?”
“그래. 자낸 내 비서로 나와 늘 함께 다니도록 하지. 대웅씨는 학교로 돌아가는 아이들을 챙겨주세요. 병규씬 나와 일하는 친구들을 이끌어 주십시오.”
이렇게 해서 오늘 이후의 거취문제에 대해서 정리가 끝났다. 병규와 그 조원은 자신의 아파트에서 생활하기로 했고 대웅과 학교로 갈 아이들은 동철이 마련한 거처에서 생활하기로 했다.
“동철씨,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세요.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네. 우리 애들만 무사할 수 있다면 저야 괜찮습니다.”
민혁은 그들을 뒤로하고 형규와 함께 지은이 있는 병원으로 향했다.
혜원은 이미 퇴원 했지만 아직 지은이 회복 중이었다.
“지은이 누나! 나왔어...”
“어! 오빠 왔네. 우리 혜원이 지은이언니 간호하느라 혼났어.. 칭찬해줘..”
“그래.. 왔어? 별 일 없고..”
민혁은 혜원에게 대답대신 꿀밤주었다.
“응. 별 일 없지... 많이 좋아졌네?”
“응... 모두들 덕분이지...”
지은의 목소리는 예전과 같지 않았다. 갈라지는 목소리... 그때의 상처로 인해 성대를 3/1이나 잘라내야 했다. 그래도 다행인건 말하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아마도 평생을 그렇게 살아야 할 것이다.
“아.. 정희씨도 이 병원에 있지? 어때?”
민혁의 물음에 혜원의 얼굴이 굳어졌다.
“여전하지 뭐... 그때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힘들었을 테니까..”
정희는 수술이 끝나 후로 이틀이 지나서야 깨어났다. 그러나 정신적인 충격으로 인해 대인 공포증과 기피증이 생기고 말까지 잃어버렸다. 그저 멍하니 허공만을 바라보다 섬뜻 섬뜻 그날의 기억이 나는 지 진저리를 쳤다. 아무래도 그녀에겐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병실 분위기가 정희의 일로 무겁게 내려앉았다.
“아 맞다. 소개해 줄 사람이 있어. 형규야 들어와라.”
딸깍 소리와 함께 스르르 병실 문이 열렸다. 쭈뼛대며 들어오는 사람이 인영이 보였다.
날렵한 몸집의 사내가 병실로 들어섰다. 지은은 낯이 익은 얼굴이 들어오자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 잠시 고개를 돌렸다가 생각이 났는지 소리쳤다.
“넌....”
“아..안녕하셨습니까?”
그는 당황했는지 90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이젠 그에게서 지워져야 할 모습이었는데 당황하다보니 본능적으로 행동이 취해졌다.
“야야.. 이런거 하지 말랬잖아..”
“아! 네... 죄송합니다. 제가 정신이 없어서.”
민혁이 형규를 대리고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혜원이 벌떡 일어서서 요리조리 살피듯 형규를 뜯어보았다.
“인사해 혜원아. 형규야.. 그러고 보니 나이가 동갑인거 같은데..”
“아.. 반가워.. 난 박혜원이야.”
혜원이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는 바지춤에 손바닥을 쓱쓱 문질러 땀을 닦아내고 가볍게 혜원의 손을 잡았다.
“전... 최형규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민혁이 지은이에게 형규를 소개하려고 지은을 돌아보았다. 뜻밖에도 지은의 눈에선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사실 그날 별장에서 있었던 일을 지은은 아무에게도 얘기 하지 않았다. 혜령도 그 일에 대해선 물어도 대답을 회피하거나 불현 듯 화를 내기도 했다.
“... 누나.. 왜 그래?”
갑자기 형규가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 동철과 대결을 하던 날도 지은의 앞에 가장 먼저 무릎을 꿇었던 것이 형규였다.
형규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이 없었다. 가끔 어깨가 들썩이는 걸로 봐서는 울고 있는 듯 했다. 한동안 병실 안은 침묵이 흘렀다.
먼저 정적을 깬 건 다름 아닌 지은이였다.
“네가 형규였구나... 날 씻겨 줬던... 그래.. 네가 형규야... 기억할 수 있어.”
그랬다. 식사를 갖다 주러 왔다가 지은을 욕실에서 씻겨 주던 날렵한 몸집의 사내가 바로 형규였다.
“죄송합니다. 정말 그때는.... 용서해주십시오.”
“괜찮아.. 형규야... 이미 용서했어... 너희들 모두 이미 용서했어... 그러니까 울지 말고 일어나.”
그녀의 말에도 형규는 꼼짝 않고 더욱 머리를 조아렸다. 민혁이 형규를 일으켜 세워주자 그제야 마지못해 일어났다.
다소 진정이 됐는지 형규의 떨림이 줄어들었다.
“잠깐만요.”
형규가 머뭇거리다 기다리라는 말을 하고 병실 밖으로 나갔다가 무언가를 들고 있는지 뒷짐을 지고 침대 옆에 섰다.
“이거.. 받아주세요.”
형규가 내민 것은 언제 준비했는지 붉은 색 장미와 안개꽃이 소복한 꽃다발이었다. 그는 지은을 바로 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돌린 체 지은이 앞에 꽃다발을 내밀었다.
“이쁘구나. 나 주려고 가져 온 거니? 고마워.”
지은은 꽃다발을 받아 들고 향기를 맡았다. 향기로운 꽃내음으로 한결 그녀의 기분이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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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때와 같이 분주한 아침을 마지한건 민혁뿐이였다. 모처럼 식구들이 모두 각자의 방에서 꿈나라를 허우적대고 있다.
‘이런 날은 좀 쉬게 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그는 투덜거리며 아침 준비를 했다.
지은도 어제 완쾌되어 퇴원했다. 근 한달만의 귀가였다. 그녀의 귀가에 가장 반겼던 사람은 바로 준형이였다. 준형은 엄마가 퇴원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아침부터 문밖에 나가 기다렸다가 점심때 쯤에나 엄마를 태운 차가 골목 어귀에 들어서는 걸 보자마자 한달음에 달려갔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지은은 골목 어귀에서부터 준형이와 함께 집으로 걸어갔다. 그녀가 병원에 있는 동안 형규는 매일 민혁을 핑계 삼아 그녀를 보러 왔고 별 말 없이 한동안 머무르다 돌아가곤 했다.
혜령은 가족 중에 가장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 사건 다음날 치러진 선거는 당연 혜령의 당선이였다. 그리고 이후 당선사례를 위해 구민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그들과의 시간을 갖느라 꼭두새벽부터 자정까지 쉴 새 없이 뛰어다녔다. 정한수에 대한 후보납치 사주 사건도 이동철의 자수와 결정적인 녹취록까지 확보된 상태여서 처음에는 언론과 여론이 들끓었다. 그러나 경찰의 수사는 그리 빠르게 진행되지 못해 아직 정한수의 행방조차도 찾아내지 못했고 경찰의 지리멸렬한 수사결과발표로 지루함마저 느끼게 했다. 그러다 결국 국민들의 관심이 다른 곳으로 쏠리자 이동철의 단독범행으로 마무지 짓고 서둘러 수사팀을 해체했다.
국민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린 사건이란 바로 얼마 전 총리에 오른 박대표에 대한 섹스 동영상 파문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아이돌 가수 권치용의 자살로 박대표는 한없이 나락으로 떨어져 버렸다. 박대표가 여러명의 남자에게 애무를 받는 장면이나 고급 향락 서비스를 받은 그 모습이 그대로 동영상 속에 담겨 있었고 권치용의 자살 직전에 작성된 유서에 박대표에 대한 언급과 그로 인해 자신이 괴로웠던 일 등이 적혀 있어 자살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박대표와의 스캔들 때문인 것으로 발표되었다.
박대표는 사건을 수습하기 위해 동분서주 움직이며 여러 방면으로 빠져나갈 방법을 모색하고 있지만 여론의 목소리는 더욱 그녀를 압박했다. 그 여론의 배후에는 언론의 역할이 컸다. 국민들의 관심이 떨어지지 않도록 연일 그녀의 섹스 동영상, 권치용의 자살을 특집으로 다루며 국민들에게 세뇌하듯 어디를 보아도 박대표에 대한 얘기뿐이었다.
보수 언론이던 조선, 동아, 중앙신문도 이번에는 여당의 수장에 대한 비판에 서슬 퍼런 칼날을 들이 대었고 오히려 그것을 주도하는 듯한 인상도 풍겼다.
경찰의 입장도 어떤 사건보다도 빠르고 강력하게 박대표를 압박하였다. 곧이어 국회에서 특별 검사 안이 통과 되자 사건은 검찰로 이전되고 그녀를 더욱 압박해갔다. 과거 경찰과 검찰이 여당의 정치인에게 이렇게 강력하게 대응했던 적은 없었다. 한국당도 거의 대부분의 의원들이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다.
여론의 중심선 것도 보수 단체인 뉴라이트전국연합(실제 단체가 아닌 가상의 단체이오니 오해 없으시길)이었다. 그들은 한술 더 떠 그녀의 치부를 하나씩 하나씩 폭로하며 국민들의 관심을 박대표에게 고정되도록 유도하였다.
구수한 된장찌개의 향기가 온 집안에 퍼지며 꿈속을 헤매던 이들을 하나 둘 주방으로 모이게 했다.
“아웅~~ 냄새 너무 좋다.”
“아침부터 구수한게 입맛 당기는데...”
“오빠 아니었으면 우린 어떻게 살았는지 몰라?”
저마다 주방에 들어오면서 한마디씩 내뱉었다. 싱크대에 붙어 여전히 분주하게 움직이는 민혁은 심통이 났다. 그녀들의 말에 대꾸도 없이 더욱 요란한 소리를 내며 음식 만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우리 오빠... 심통난거야? 심통난 모습도 왜케 귀여워?”
혜원이 그의 등뒤에서 허리를 감싸 안으며 그를 위로해 주었다. 감싸 안은 손이 허리에 있을 때만해도 그런 행동은 위로였다. 그러나 거침없이 바지춤을 파고드는 그녀의 손이 민혁의 자지를 잡자 더 이상 위로가 아닌 에로였다.
“이모... 뭐해?”
그때 준형이가 주방에 들어오면서 혜원의 행동에 호기심을 갖고 물었다. 주방 안의 어른들은 화들짝 놀랐고 혜원은 얼른 손을 뺐다. 다행인건 민혁이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기 때문에 허리를 파고든 손의 위치가 준형의 입장에선 전혀 볼 수가 없었기 때문에 당해이었다.
“아이구... 내가 못살아. 준형이 교육에 자꾸 저해하는 요소를 만들거야? 내가 준형이랑 나가서 따로 살든지 해야지...”
지은은 준형을 안고 못 볼 것이라도 되는 양 아이의 눈을 가리고 일부러 멀리 돌아 식탁에 앉았다.
“그래... 집에 준형이가 있다는 걸 항상 잊지 마. 특히 혜원이는 더 조심하고.”
혜령이 마지못해 한마디 거들었다. 혀를 삐쭉 내밀고 무안한 듯 준형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혜원도 자리에 앉았다.
“이모하고 삼촌하고 너무 너무 사랑하는 사람이라서 그런 거야... 너두 이담에 커서 니 색시한테 사랑 많이 줘야 돼.”
“웅! 이모... 난 맨날 안고 다닐 꺼야. 쭈쭈도 만져 주구.”
마지막 말에 지은이 깜짝 놀라며 준형의 입을 막았다.
“하하하”
“호호호호”
혜령이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후 달라진 것이 있었다. 바로 주방 식탁 벽면에 벽걸이형 LED TV가 설치된 것이다. 그들이 즐겁게 일요일 아침 식사를 하고 있는 중에 TV에선 긴급 속보가 방송됐다.
[뉴스 속봅니다. EU가 그동안의 협조체제에 금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특파원을 호출하여 자세한 내용을 알아보겠습니다. 방성호 특파원!]
[네! 제가 있는 이곳은 벨기에 브뤼셀에 위치한 EU본붑니다.]
[오늘 전격적으로 프랑스와 영국이 EU를 공식적으로 탈퇴의사를 밝혔는데요. 자세한 소식 부탁합니다.]
[네.. 그렇습니다. 오늘 아침 프랑스와 영국은 대 정부 발표를 통해 EU연합에서 공식적으로 탈퇴의사를 발표했습니다. 탈퇴의 배경으로는 장기간의 경기 침체로 인한 경제파탄과 자국의 이익에 치명적인 위기라고 밝혔습니다. 2년전부터 시작된 세계 경기 침체는 여러 나라들이 연합된 EU연합에 그동안 불안한 요소를 제공하고 있었습니다. 독일과 헝가리 등의 중소국가 들의 경기 파탄으로 영국과 프랑스는 상대적으로 많은 제정을 그들 나라에 쏟아 부었는데요. 그것에 한계가 나타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번 프랑스와 영국의 탈퇴로 다른 주변국까지 탈퇴의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는 가운데 EU연합은 그에 대처하기 위해 부산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TV를 통해 흘러나오는 아나운서와 특파원의 소식은 혜령의 시선을 고정시키기에 충분했다. EU연합의 동맹관계가 깨지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과 중국, 일본의 경제 잠식을 경계하기 위한 그들의 동맹은 처음 시작될 당시에는 경제 강대국에 맞설 만큼 위력적이었지만 시간이 점차 흐르며 자국의 이익 격차가 심화됨에 따라 조금씩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었다. 그러다 결국 최근의 장기 경기 침체는 그들의 갈등을 더욱 심하게 만들었다.
“결국 분열이 되는 건가? 앞으로 국제 정세가 급변하겠는 걸?”
“언니 그럼.. 어떻게 되는 거야?”
“글세... 지켜봐야 알겠지만, 탈퇴 국가들이 더 늘어나겠지... 그리고 현재 경제침체에 대해서 자국의 이익에 최우선되는 정책을 추진하게 될 거야.”
“뭐 그렇다구 별로 달라질 것도 없을 거 같은데?”
“아니지. 그동안은 서로 공생관계에 있다가 떨어져 나간다면 그들 국가 간의 사이가 나빠질 꺼야. 그러다 자국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더욱 심한 경쟁을 시작하겠지. 너 혹시 알고 있니... 그동안 2차례 있었던 세계 전쟁이 모두 유럽에서 시작됐다는 걸...”
[끝으로 이번 사건으로 인해 우리나라도 그 여파가 상당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동안 EU연합과의 FTA가 전체적으로 탈퇴한 국가와의 재협상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입니다. MBC 뉴스 방성호였습니다.]
특파원의 마지막 멘트로 아나운서는 뉴스 속보를 마쳤다.
“아무래도 나가봐야 겠다. 지은아 넌 집에서 좀 더 쉬고 있어.”
“아니야. 언니. 나도 나갈게. 그동안 병원에서 지내느라 실무 감각이 무뎌진 것 같아서 말야..”
“괜찮겠어?”
“응..”
지은이 대답에 준형의 표정이 굳어졌다.
“엄마... 꼭 나가야해? 오늘은 나하고 놀아준다고 했잖아.”
“그래 지은아... 너 한 달 만에 집에 온 거잖니. 병원에서 준형이와 같이 있었다지만 그게 집에서 있는거랑 같니? 오늘은 준형이랑 놀아줘. 일이야 내일부터 해도 되잖아.”
“그래라.. 지은언니야. 준형이가 엄마 퇴원날짜를 얼마나 손꼽아 기다렸는데...”
지은은 가족들의 만류와 특히 준형의 울 것같은 표정을 보자 자신의 생각을 고쳤다.
“그럴게... 준형아 엄마 안갈게... 오늘 엄마랑 놀자.”
“정말이야... 안가고 나랑 놀아줄거야?”
“그러엄... 이제 밥 맛있게 마저 먹고 약속대로 놀이공원 가자.”
“와~아~”
준형은 다시 밝아진 표정으로 남아있는 밥을 한입에 털어 놓고 부리나케 2층으로 올라갔다.
“거봐... 좋아하잖아. 괜히 그런 말은 해서..”
“미안... 난 그저 언니를 돕고 싶어서...”
지은이 겸연쩍게 미소를 지었다.
“나도 나가봐야 겠어. 혹시 내가 조사하는 일과 관계가 있을지도 몰라서.”
“으잉... 그럼.. 나도 같이 가.”
“안돼. 지난 번일을 곰곰이 생각해봐.”
민혁이 혜원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지난 번 일이라니? 너희들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아아니~~~ 무슨일은... 없었어..”
혜원이 손 사례를 치며 극구 부인하는 모습이 무슨 일이 있었다고 솔직하게 얘기하는 것보다 더욱 신빙성 있게 들렸다.
“미야옹~ 미야옹~”
갑자기 민혁이 고양이 소리를 내자 혜원의 얼굴이 삽시간에 빨갛게 물들었다.
“으윽...”
혜원은 자리를 박차고 방으로 뛰어갔다. 물론 민혁을 째려보는 눈빛이 여지없이 그를 향해 비수가 되어 꽂혔다.
“뭔 일이야? 제가 저럴 때도 있고?”
“아니야.. 괜히 그러는 거야. 하하하.”
“칫... 아무튼 아침 잘 먹었어. 난 바로 가봐야 겠다.”
“아... 누나.. 잠깐만..”
민혁이 막 일어나려는 혜령을 잡았다.
“병규라고 알죠? 동철이 부하로 있던...”
“응.. 알고 있는데.. 왜?”
“그 친구가 꽤 사람이 쓸 만하더라고. 원래 조폭 같은데 있을 사람이 아니더라고. 보니까 전과기록이나 심지어 벌금 기록조차도 없었어. 그래서 말인데.”
“흠.. 그래.. 인상이 아주 다부지게 생겼긴 하던데. 그래서?”
“누나의 신변 보호를 위해 붙여 줄까 하고. 물론 비서나 수행원들이 있지만 그들이 위험한 상황일 때 누나를 보호할 수 있을지 걱정돼.”
“하긴... 그들이 정치는 9단일지 몰라도 무술은 0단일 테니까. 근데 전직이나 뭐 이런데 문제가 있지 않아.. 그 사람?”
“응... 동철씨를 만나기 전까지는 꽤 유명한 무도관 관장으로 있었어. 태권도며 합기도, 검도.... 또 뭐지.. 암튼 다 합치면 누나의 두 배 아니 세 배는 될 거야.”
“아... 무도관 관장이었어?”
“그리고 동철씨의 부탁도 있었고 말야...”
“그럼 좋아.. 일단 면접을 봐야 하니까. 이따가 사무실로 오라고 해. 내가 만나볼게.”
“응 누나 고마워.”
혜령이 주방을 나가자 민혁은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아... 병규냐?]
[네. 형님]
[지금 바로 혜령누나 사무실로 출발해... 옷 좀 깔끔하게 입고..]
[아.. 그럼 허락을 하신 겁니까?]
[아니 그건 아냐.. 우선 널 만나보고 싶대. 그러니까 절대로 건달행세하지 말고.]
[네 형님.]
[면접 보는 거니까. 준비 단단히 하고 가.]
[네 형님.]
[그래. 그럼...]
[아.. 잠시 만요 형님. 형규녀석이 바꿔달랍니다.]
[형규가? 바꿔봐.]
잠시 후 형규의 목소리가 들린다.
[형님. 형隻求?]
[응. 무슨 일이야?]
[지은누님께서는 퇴원하셨습니까?]
[어제 퇴원 이였잖아.]
[아..... 그럼 인제 집에만 계시는 겁니까?]
[글세. 아까 얘기로 봐선 내일부터 누나 사무실로 나간다던데.]
[아..... 아.. 저기... 아닙니다..... 저기... 그럼 오늘은 뭐하신다고........?]
형규가 말끝을 흐렸다. 민혁도 그동안 형규가 어떻게 했었는지 알고 있었다. 그는 매일 빠지지 않고 그녀의 병실을 방문했다. 물론 민혁과 같이 다니다 보니 매일 방문한 건 그저 민혁을 따라 다닌 것이라 생각할 수 도 있겠지만 그냥 따라만 다녔다면 꽃다발은 필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늘 병실에 들어가기 전 꽃다발을 손에 들고 있었다.
[놀이공원에 간다고 하던데... 준형이랑...]
[아.. 그렇습니까?]
[왜?]
[아닙니다. 그럼 들어가십시오.]
일방적으로 형규가 먼저 전화를 끊었다.
‘훗훗.. 이 녀석이...’
민혁은 그저 잔잔하게 미소를 지으며 식탁을 치웠다.
‘아.. 이거.. 정말... 설거지까지 내가 해야 하나? 그냥 다들 들어가 버리면 어떻게...’
그는 영락없이 가사 도우미가 돼버렸다.
분주하게 혜령은 출근 준비를 마쳤다.
대한민국의 국회의원은 6명의 비서관 및 보좌관을 둘 수 있다. 4급 보좌관 2명, 5급 비서관 1명, 그리고 6급, 7급, 9급 비서관을 각 1명씩으로 구성된다. 대부분 초선 의원인 경우 정당 의원은 기존 확보된 보좌관급 인재 중에서 4급 보좌관과 5급 비서관은 정당 차원에서 제공해 준다. 무소속 의원의 경우 국회의 국회의원실을 통해 공채로 선발하거나 낙선 의원들의 경력자들을 모집하기도 한다. 그리고 나머지 6,7,9급은 의원의 재량으로 선발한다. 따라서 4급, 5급은 정치적 경력이나 전문성을 요하기 때문에 각 정당에서 별도의 인재DB를 구축하고 있기도 한다. 6,7,9급은 말 그대로 수행비서들이다. 그들 중에는 운전기사도 포함되며 지역구 의원의 경우 민심의 수습이라든가 현장 조사와 같이 발로 뛰어야하는 일을 맡게 된다.
혜령은 초선의원으로써 정당으로부터 4급 보좌관 2명을 배속 받고 5급 비서관으로 지은이를 채용했다. 그리고 국회의원실에서 제공해준 인력DB를 바탕으로 6급과 7급 비서관을 채용했다.
국회의원들은 의례 크고 고급의 국산 승용차를 많이 타고 다닌다. 국정 업무를 위해 이동이 필요한 경우에는 국가에서 관용차와 기사가 제공되지만 대부분 자신의 차를 이용한다. 이유는 관용차는 SM5급 정도로 그들이 늘 타고 다니는 급하고는 차원이 틀리다. 그러니 국회의원들은 별도의 차량 유지비, 유류비 등을 따로 지급받게 된다.
그러나 혜령은 자신이 타던 1500CC급 준중형차를 그대로 사용하기로 했다. 그리고 아직 기사를 따로 두지 않고 손수 운전을 하고 다녔다. 그리고 사무실 근처까지 차를 타고 가서는 5KM 떨어진 주차장에 주차를 시키고 사무실까지 걸어서 출근했다. 그녀가 이러는 이유는 5KM를 걷는 동안 구민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며 그들의 얘기를 직접 듣기 위해서 였다. 이것은 주민들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받는 요인 중에 하나가 되었다. 일부러 그녀가 출근하는 시간에 그녀와 인사를 나누기위해 시간을 맞춰 나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오늘은 일요일이기 때문에 갑작스런 그녀의 등장에 사람들이 호들갑을 떨며 손을 흔들기도 하고 인사를 하기도 했다. 그런 행동에 그녀는 일일이 답했다.
“안녕하세요.. 잘 되시죠? 아! 안녕하세요..... 병순이 할머니... 이제 감기는 다 나으셨어요? 어머! 돼지엄마. 몸 풀었다면서요... 축하해요. 몸조리 좀 더하고 나오시지... 네.. 네...”
그녀는 5KM를 걸어가는 동안 입을 한 번도 쉴 수 없었다.
그녀가 사무실 앞에 도착했을 때 검은색 정장을 입은 한 사내가 부동자세로 서있었다. 그녀가 가까이 다가가자 그 사내는 그녀를 향해 30도 정도의 정중한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의원님.”
“아.. 병규씨? 호호”
그녀가 웃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병규는 자신이 생각하기에 최대한 깔끔하게 보이기 위해 헤어고정용 스프레이를 거의 한 통을 다 소비하여 머리카락을 바짝 붙여 넘겼다. 올빽 머리에 돌덩이처럼 굳어버린 머리카락이 그녀의 눈에는 작은 헬멧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에구.. 민혁이가 잔뜩 겁을 줬나보네.. 호호호 이건 근데 너무 웃긴다.’
그녀는 간신히 웃음을 참으며 그를 따라 들어오라고 손짓하며 사무실로 들어갔다. 사무실에는 미리 연락해 두었던 보좌관들이 출근해 있었다.
“안녕하세요. 의원님.”
“오셨어요. 의원님.”
“일찍 나오셨네.. 미안해요. 다들 일요일 날 불러내서... 아.. 그리고 전화로 얘기했던 자료는 흠.... 30분 후에 보고 받도록 하죠.”
그녀가 집무실로 들어가자 병규는 집무실 앞에서 머뭇거리며 어정쩡하게 서있었다. 보좌관들은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저 사내가 누구인지 속닥이다가 혜령이 다시 나오자 후다닥 자리에 앉아 바쁜 척했다.
“들어오지 않고 뭐해요?”
“아... 네...”
병규는 그녀를 따라 집무실로 들어갔다. 그녀의 집무실 한가운데는 회의용 원형 탁자가 하나 놓여 있었고 기억자형 책상과 그 주변에 허름한 책장들이 몇 개 있었다. 소박한 모습의 집무실이었다.
“앉아요. 민혁이에게 얘기 들었어요.”
“....”
“무도관 관장이셨다구요? 나도 태권도라면 좀 하는데. 얼마나 했었요?”
“넵.. 아버님께서도 무도인이셨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줄 곳 해왔습니다. 대학도 체육대학 태권도학과를 나왔습니다.”
“오.. 그래요. 국가대표나 출전 했던 경기는 없었나요?”
“아버님의 반대로 경기 출전은 한 번도 못했습니다.”
“아.. 안됐네요. 아버님께서 왜 그러셨을까요? 그리고 말 편히 하세요.”
“아.. 네. 아버님께선 진정한 무도인은 남 앞에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다스리는 것이라 하셨습니...다요.”
“그런데 어쩌다 동철씨를 만났죠?”
“우연히 제 무도관에서 대련이 있었는데 그때 감동 받았습니다. 그래서 저도 그 분께 대련을 요청했고 깨끗하게 제가 졌습니다. 그 날 이후로 그 분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흠.. 남자들은 참 우습군요.”
혜령은 이 사내가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별장에서의 기억 때문에 선뜻 결정하기 힘들었다.
“지난 잘못을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가 그녀의 의중을 읽었는지 먼저 선수를 치며 말했다.
“사실 난 당신이나 그 애들한테서 직접 그 짓을 당하지 않았지만 지은이는 많이 힘들었어요. 사무실에서 당신을 보면 그 일이 자꾸 생각 날 텐데. 힘들꺼예요.”
“....... 전......합...”
그가 무언가를 말하려다 그냥 입을 다물었다.
“뭐 할 얘기라도 있어요? 그냥 편하게 해요.”
“...... 그...날... 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 않았다니?”
“민혁 형님이 들어오시는 통에 전 보지도 못했습니다.”
“풋...”
혜령은 웃을 수 없는 얘기지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병규는 얼굴 전체가 땀으로 범벅이 되어 방울방울 맺혔고 그러다 보니 머리카락도 물기를 머금어 가공할 스프레이의 고정력을 무력화시켜 한줄기의 머리카락 묶음이 애교머리처럼 이마에 내려왔다. 그리고 그의 표정 또한 최대한 불쌍하게 보이려는지 울쌍이 다되어 있었다.
“아.. 그럼.. 지은이가 모를 수도 있겠군요.”
“....”
“그럼 우선은 같이 일 해보도록 하죠. 그리고 내일 지은이가 출근 했을 때 최종 결정을 할께요.”
“감사합니다. 열심히 보좌하겠습니다.”
혜령은 그를 대리고 사무실로 나가 다른 보좌관들에게 병규를 소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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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어거지로 뭘 맞춰간다는게 참 힘들 구나 하고 새삼 깨달았습니다.
앞으로 더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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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큰
1부 33장 위기의 시작(1)
이동철의 차를 타고 혜령과 지은은 집으로 향했다. 다른 사내들은 벤을 타고 이동철이 지시한 곳으로 출발했다. 민혁은 차를 몰고 정한수의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한 혜령은 한동안 마음을 진정시켜야만했다. 그러나 지은의 상태가 걱정이 되어 그녀의 찢어진 옷을 새 옷으로 갈아입히고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으로 향하는 차안에서 정면만 응시하는 이동철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그런 대로 인상이 좋은 사람이었다. 어쩌다 자신을 납치하는 일에 휩쓸렸는지 모르지만 어쨌건 그의 눈빛은 달라져 있었다.
“정한수와는 어떻게 알게 됐나요..?”
혜령의 질문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동철이 조수석에서 뒤로 돌아 보았다.
“네.. 큰누님.. 그게 좀 복잡합니다.”
동철은 혜령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자신의 지난 일을 설명했다.
동철이 50명의 부하들과 연일 무술 훈련에 여념이 없을 때 산속으로 한 사람이 찾아 왔고 새로운 고수가 있으니 대련을 원한다고 하여 그는 부하들을 두고 단신으로 그를 따라 나섰다. 그러나 그것은 정한수의 함정이었다. 정한수는 그동안 폭력조직으로부터 일정한 돈을 받아오고 있었다. 그러다 동철의 등장으로 그 수입원이 끊기자 그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가 흡수했던 조직의 조직원 중 동철에게 불만을 품은 자들을 포섭했다. 그리고 그를 유인하여 창고에 가두었다. 그사이 정한수는 포섭한 깡패들에게 동철의 부하들이 있는 곳을 습격하라고 지시했고 그 일로 정한수는 10명의 부하를 잃었다. 남은 부하들을 미끼로 정한수는 그에게 자신의 밑에서 일할 것을 요구했고 그가 뜻을 굽히지 않자 그 자리에서 5명의 부하를 무작위로 처형했다. 동철은 더 이상 부하들의 무의미한 죽음을 보고 있을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정한수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그의 밑으로 들어간 것이다. 다행히 남은 부하들은 정한수의 조직에 들어가지 않도록 해체하겠다는 조건과 자신의 신분을 아귀라로 해 달라는 조건을 달았다. 아귀는 심해에서 바위처럼 위장하고 있다가 눈앞의 먹이를 잡아먹는 어류이다. 그가 아귀란 이름을 선택한 이유는 지금은 웅쿠리고 있을 때라고 생각하고 언젠가 눈앞의 먹이 즉, 정한수를 잡아먹겠다는 의미가 있었다. 정한수는 그걸 눈치 채지 못하고 그에게 전국 조직의 상납금 수금과 소소한 잡심부름을 시켰다. 그리고 그에게 자신의 심복으로 구성된 조직을 만들어 주었다. 따라서 그는 부하들에게 감시받고 정한수에게 함정이란 것을 모르게 하기 위해 철저하게 망가졌다. 그리고 병규를 통해 해체된 자신의 직속 부하들을 모으게 하여 다른 눈에 띠지 않도록 산속을 헤매며 무술연마에 전념하도록 지시했다. 언제가 될지 모를 기회를 위해 그도 준비가 필요했다. 따라서 그의 이중생활은 시작했고 정한수 앞에서는 철저한 악인의 모습으로 위장해야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자주하면 습관 된다고 했던가? 그의 철저한 악인 행위는 점점 그의 정신을 갉아 먹었고 어느 순간 돌아본 자신의 모습이 정말 악인이 되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던 중 정한수로부터 혜령을 납치하라는 지시를 받고 이 기회를 잘 이용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정한수가 심어준 조직원들과 혜령과 지은을 납치해 별장으로 갔다. 그곳에는 미리 병규에게 지시하여 직속부하들이 잠복해 있다가 정한수의 조직원들을 처치하고 혜령과 지은을 잡아 두었다. 병규가 정한수의 조직원들을 제압하는 동안 동철은 정한수와 통화를 했고 이틀 후 별장에 들른 다는 그의 말에 거사 일을 이틀 후로 잡았다.
동철의 이야기가 끝날 때 쯤, 병원에 도착하여 서둘러 지은의 상태를 체크했다.
“난 가볼 곳이 있어요. 지은이를 잘 돌봐줘요.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연락주고요.”
“네.. 큰누님.”
동철이 혜령을 향해 90도 각도로 인사를 했다.
“민혁이가 철저하게 건달냄새를 지우라고 했을 텐데요? 기억 안나나요?”
혜령은 조금은 쌀쌀 맞게 그에게 핀잔을 주었다. 자신의 알몸을 가지고 희롱했던 그였기 때문에 그를 마주대하는 것이 불쾌했다.
“네... 큰누님. 앞으로 조심하겠습니다.”
동철은 가볍게 목례를 했다. 그리고 무슨 말을 더 하려다 뒤 돌아 걸어가는 혜령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
그는 말없이 진료실를 간판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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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들어온 혜령으로부터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게 된 심의원과 선거 사무실 직원들은 한동안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것은 엄연한 테러예요. 상대 후보를 감금하다니. 이 일은 조용히 넘어갈 일이 아닌 것 같네요.”
심의원이 혜령의 손을 잡고 다독이며 말했다.
“저도 그럴 생각입니다. 기자 회견을 준비하고 싶은데...”
혜령은 홍보담당을 맡고 있는 직원을 바라보았다.
“아... 그런데.. 의원님... 내일이 선거일이고... 이 일이 자칫 선거에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럴 수도 있겠는데요.. 이게 너무 엄청난 사건이라... 자칫하면 역풍을 맞을 수 있습니다.”
홍보담당 직원을 돕기 위해 다른 직원이 말했다.
혜령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지금 만약 사건을 터트리면 언론의 관심이 집중되고 여론에 밀려 경찰이 조사에 나서겠지. 아니면 검찰이든가.’
‘그렇다고 이일을 덮어두자니 병원에 있는 지은이가 너무 불쌍하잖아.’
‘그래! 우선은 그렇게 해야겠어!’
혜령이 생각이 정리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군요. 제 생각이 짧았어요. 이번 일에 대해서는 선거가 끝난 후로 미루기로 하죠.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넘기 수도 없는 일이예요. 제가 정한수를 만나 보겠어요.”
“아니.. 그건 너무 위험하지 않아요? 혜령씨를 감금했던 사람이잖아요. 그런 사람 앞에 나타나면 무슨 짓을 할지 어떻게 알아요?”
“심대표님 걱정 마세요. 이래봬도 제 한 몸은 지킬 수 있거든요. 아마도 정한수 앞에 제가 나타나면 적잖은 충격을 줄 수 있을 거예요. 그 후에 그가 알아서 행동하겠죠.”
“그렇긴 해도 너무 위험하지 않아요?”
혜령은 자신을 걱정하는 심대표와 직원들을 뒤로 하고 사무실을 나섰다. 물론 여유를 보이기 위해 고개를 돌려 윙크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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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예상은 적중했다. 정한수는 자신의 앞에 서있는 여자가 혜령이라는 것에 허둥대며 소파에 쓰러지듯 앉았다.
“제가 이 자리에 있는 게 정후보님을 이렇게 놀라게 할 일인가요?”
혜령은 정한수를 내려 보며 팔짱을 꼈다.
“아...니... 그게... 아이고.. 어서 오세요.”
정한수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며 그녀에게 맞은 편 자리에 앉도록 손짓했다.
“몇 가지만 말씀드리려고 왔어요. 내일의 결과는 변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이번 일에 대해서는 선거 후 공식으로 조사를 의뢰하도록 하죠. 그동안 몸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
혜령은 그대로 서서 말했다. 그리곤 뒤로 돌아 당당하게 그의 서재를 나섰다. 그 모습을 정한수는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는 또 한 사람이 있었다.
민혁은 건너편 옥상에서 혜령이 정한수를 향해 거침없는 일침을 놓는 장면을 처음부터 보고 있었다.
‘누나는 정말 강심장이야.’
민혁은 혜령의 행동에 감탄을 하며 계속 정한수를 주시했다. 사실 그가 이곳에 다시 온 것은 정한수를 처형하기 위해서였다. 민혁의 손에는 저격용 라이플이 쥐어있었다. 그를 조준하고 있을 때 갑자기 혜령이 나타난 것이다. 그도 처음에는 깜짝 놀랐지만 그가 알고 있는 혜령이라면 충분이 예상했어야 했다.
‘역시 내가 처리하는 것보다는 누나가 직접 하는 게 더 낳겠지.’
건너편 정한수의 서재가 갑자기 부산해 졌다. 정한수는 서재를 이리저리 거닐며 생각에 잠긴 듯 했다. 그러나 전화를 들어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정한수요. 홍의원 부탁합니다.]
[의원님께서는 지금 회의 중 이십니다. 전화 메모 남겨 놓겠습니다.]
[어이 이봐! 지금 중대한 문제가 터졌다고... 얼른 바꿔!]
[의원님께서 회의 중 오는 전화는 메모만 남겨 놓으라는 지시가 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야이 시발년아! 너 죽고 싶어. 응.. 얼른 바꾸라면 바꾸지 뭔 말이 그렇게 많아!]
[.....]
[긴급이야! 긴급!]
[무슨 일이야?]
[아.. 형님.. 큰일 났습니다.]
[뭐가 큰일이야. 어디 전쟁이라도 터졌어?]
[아니 그게 아니고... 박혜령이 때문에 죽게 생겼습니다.]
[박혜령이 왜? 그건 네가 잘 처리했다고 하지 않았어?]
[근데.. 그게... 그년이 제 앞에 버젓이 나타났습니다.]
[에잉... 사람이 왜 그리 확실하지가 못해? 그래서?]
[그년이 엄포를 놓고 갔습니다. 선거 후에 공식 수사 의뢰하겠다고.]
[머리 아프군.]
[그년이 당선될 꺼 뻔하쟎습니까? 그럼 그땐 금빼찌 달고 설처대면 저 죽습니다. 형님.... 살려주십시오.]
[바보같은 놈. 여자하나한테 그렇게 쩔쩔 매서야.... 으음....]
[형님.. 형님..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일단... 일본에 가있어... 어차피 이번 선거 물 건너갔잖아. 일본에 가서 내가 시키는 일 좀 해...]
[일본 말입니까? 갑자기 일본은 왜?]
[길게는 나중에 다 알게 되니까... 그냥 시키는 대로 해...]
[바로 갑니까?]
[이 바보야! 생각 좀 해! 오늘 밖에는 시간이 없잖아. 내일 선거 끝나면 그년이 당장 네놈 목에 칼을 드리델텐데... 오늘 중으로 이 나라를 떠..]
[알겠습니다. 형님.]
정한수는 힘없이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서둘러 짐을 챙겨 집을 나섰다. 그 모습을 모두 지켜본 민혁은 무심코 넘겨 버렸다.
‘이로써 마무리 된건가? 좀 찜찜하군. 어쨌건 이제 나도 내 일에 전념할 수 있겠어.’
민혁은 찜찜함을 뒤로하고 자리를 떴다.
************
“어때? 좀 괜찮아?”
병실로 들어오는 혜령과 민혁의 모습에 그동안의 무료함을 한꺼번에 날려버리듯 혜원이 침대를 박차고 내달렸다. 그리곤 민혁에게 폴짝 뛰어 안겼다.
“참나? 언니보다 민혁이가 그렇게 좋냐? 언니는 죽을 고비 넘기고 왔더니.”
“아냐.. 언니.. 언니도 보고싶었어. 병원에 있으니까 너무 심심하잖아. 그나저나 죽을 고비라니? 언니가 왜 죽어?”
“그럴 일이 좀 있었어. 저.. 이젠 좀 내려오지 않을래?”
“아니.. 나 저기 침대까지 안고 가줘. 히...”
“오면서 얘기 들었다. 정희는 좀 어떠니?”
금방까지도 밝게 웃던 혜원이 민혁의 몸에서 힘없이 떨어지며 두 눈에 눈물이 잔뜩 고여 금세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았다.
“아직... 의식이 없나봐... 언니 어떻게 정희 불쌍해서.. 으앙...”
결국 그녀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런 그녀를 따뜻하게 안아주며 혜령이 그녀를 다독거렸다.
“괜찮을 거야.. 그래도 그만한 게 다행이지... 괜찮아.. 괜찮아..”
그녀의 다독임에도 불구하고 혜원의 울음은 한참을 지나서야 그쳤다.
“우리 자매가 민혁이에게 큰 빚을 졌네. 민혁이 아니었으면 나나 혜원이나 큰일 날 뻔했잖아.”
“그지.. 난 내 눈앞에서 뭐가 휙휙 하더니 그놈은 자빠져 있고 오빠가 내 앞에 떡 서있는 거야... 그때 오빠가 왜 이렇게 멋있던지.”
“난 그것보다 훨씬 멋진 모습을 봤는데. 그냥 막 날라 다니더라고. 아니 어떻게 그렇게 싸움을 잘해?”
“그냥 좀...”
“전에 얘기 했잖아.. 보통 사람이 아니라고... 도무지 알 수 없는 반대편 지구.. 크크크”
혜원은 신이 난 듯 갑자기 주먹을 쭉 뻗었다.
“나.. 이참에 깨달았어.”
“뭘?”
“무술을 배울꺼야.”
“무술을?”
“응... 갑자기 언제 또 이런 일이 생길지 모르잖아. 그때마다 오빠가 구해주러 오겠지만. 그래도 만일을 위해 배워야 겠어.”
“내가 도복입고 운동할 때 야만인이라고 했던 사람이 있었는데 그게 누구더라?”
혜원이 갑자기 주변을 뒤적거렸다.
“뭐해?”
“응? 그 야만인이라고 했던 사람 찾고 있는데?”
“어이구...”
“헤...”
아픔이 있었고 아직도 잊히지 않는 아픔이 있지만 다시 평화가 찾아온 것 같았다.
***************
“동철씨!”
“아니 형님 동철씨가 뭡니까? 동생한테. 그냥 동철아 하세요.”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라뇨?”
민혁은 자신의 낙천적인 성격이 모두를 더 힘들게 만들게 됐다고 생각했다.
“사실, 혜령누나가 정한수에 대해서 강경하게 압박을 할 모양입니다. 그러다 보면 동철씨가 개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정한수를 사주혐의로 경찰의 수사를 의뢰하려면 뚜렷한 증거가 있어야 하고 수사 진행과정 중에 동철씨가 연류된 것과 실제 감금 행위를 한 동철씨를 빼고 수사가 진행될 수 없는 거지요.”
“아... 그렇군요. 결국은 지은 죄에 대해 죄값을 치러야 갰지요.”
동철은 한동안 고개를 숙이고 말을 잇지 못했다.
“알겠어요. 제가 자수를 하지요. 결자해지라고 제가 묶은 매듭이니 제가 풀어야 갰죠. 한가지 부탁이 있어요. 우리 아이들 말입니다. 그 애들은 관련이 없는 걸로 해주시면 안되겠습니까? 다 제가 잘못한 일이고 애들은 제 말만 따랐을 뿐입니다.”
“그건 제가 누나와 얘기를 나눠보죠.”
“그리고 정한수의 사주를 입증할 결정적인 증거는 제가 갖고 있습니다. 정한수가 제게 지시할 때 녹음해둔 녹취록이 있습니다. 그걸 증거로 정한수를 충분히 사주 혐위를 입증할 수 있을 겁니다. 여기...”
동철은 만년필 모양의 녹음기를 꺼내어 민혁에게 건냈다. 플레이 버튼을 누른 민혁은 녹음기에서 흘러나오는 정한수의 목소리와 동철의 목소리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것으로 정한수를 사주혐의로 잡기에는 충분한 자료가 되었다.
민혁은 만년필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동철과 헤어졌다.
잠시 후, 민혁은 혜령과 마주앉아 있었다.
“누나, 동철씨와 얘기 해봤어요. 자수하겠답니다. 대신 자신의 단독 범행으로 해 달래요. 부하들은 실제로 납치에는 관여하지 않았데요. 그리고 여기 동철씨가 정한수에게 납치를 사주 받을 때의 대화를 녹취한 녹음깁니다.”
민혁은 주머니에서 녹음기를 꺼내 혜령에게 건넸다.
“그럼... 그 애들은 어떻게 할 거야?”
“알아보니까 학교에 다녀야할 아이들도 있더군요. 그래서 그 애들은 대안학교 같은 곳에 보낼 생각예요. 그리고 나머지는 제가 데리고 있으려고요.”
혜령은 정한수를 잡을 결정적인 증거를 제공한 동철의 부탁을 들어 주기로 했다.
민혁은 다시 동철과 그의 부하들이 있는 자신의 아파트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들을 모이게 하고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얘기 해 주었다.
처음에는 동철이 자수한다는 말에 자신들도 자수하겠다고 아우성치다 동철의 설득에 잠잠해 졌다.
“동철씨, 애들 중에 학교에 가야할 애들을 가려주세요.”
민혁의 말에 동철은 10명의 아이들을 뽑아냈다.
“이 아이들은 제가 학교를 알아봐서 학업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대안학교같은 곳이 있는데 직업교육을 받게 될 겁니다. 그리고 나머지 아.. 병규씨와 대웅씨를 포함해 5명은 저와 함께 할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료를 보니까.. 음.. 어디 있더라...”
민혁은 서류 뭉치를 뒤적이다 마침내 원하는 자료를 찾았는지 서류를 뽑아들었다.
“최형규가 누구지?”
민혁이 이름을 호명하자 날렵한 몸집이 사내가 손을 들었다.
“제가 최형隻求?”
“그래. 자낸 내 비서로 나와 늘 함께 다니도록 하지. 대웅씨는 학교로 돌아가는 아이들을 챙겨주세요. 병규씬 나와 일하는 친구들을 이끌어 주십시오.”
이렇게 해서 오늘 이후의 거취문제에 대해서 정리가 끝났다. 병규와 그 조원은 자신의 아파트에서 생활하기로 했고 대웅과 학교로 갈 아이들은 동철이 마련한 거처에서 생활하기로 했다.
“동철씨,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세요.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네. 우리 애들만 무사할 수 있다면 저야 괜찮습니다.”
민혁은 그들을 뒤로하고 형규와 함께 지은이 있는 병원으로 향했다.
혜원은 이미 퇴원 했지만 아직 지은이 회복 중이었다.
“지은이 누나! 나왔어...”
“어! 오빠 왔네. 우리 혜원이 지은이언니 간호하느라 혼났어.. 칭찬해줘..”
“그래.. 왔어? 별 일 없고..”
민혁은 혜원에게 대답대신 꿀밤주었다.
“응. 별 일 없지... 많이 좋아졌네?”
“응... 모두들 덕분이지...”
지은의 목소리는 예전과 같지 않았다. 갈라지는 목소리... 그때의 상처로 인해 성대를 3/1이나 잘라내야 했다. 그래도 다행인건 말하는 데는 지장이 없었다. 아마도 평생을 그렇게 살아야 할 것이다.
“아.. 정희씨도 이 병원에 있지? 어때?”
민혁의 물음에 혜원의 얼굴이 굳어졌다.
“여전하지 뭐... 그때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힘들었을 테니까..”
정희는 수술이 끝나 후로 이틀이 지나서야 깨어났다. 그러나 정신적인 충격으로 인해 대인 공포증과 기피증이 생기고 말까지 잃어버렸다. 그저 멍하니 허공만을 바라보다 섬뜻 섬뜻 그날의 기억이 나는 지 진저리를 쳤다. 아무래도 그녀에겐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병실 분위기가 정희의 일로 무겁게 내려앉았다.
“아 맞다. 소개해 줄 사람이 있어. 형규야 들어와라.”
딸깍 소리와 함께 스르르 병실 문이 열렸다. 쭈뼛대며 들어오는 사람이 인영이 보였다.
날렵한 몸집의 사내가 병실로 들어섰다. 지은은 낯이 익은 얼굴이 들어오자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 잠시 고개를 돌렸다가 생각이 났는지 소리쳤다.
“넌....”
“아..안녕하셨습니까?”
그는 당황했는지 90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이젠 그에게서 지워져야 할 모습이었는데 당황하다보니 본능적으로 행동이 취해졌다.
“야야.. 이런거 하지 말랬잖아..”
“아! 네... 죄송합니다. 제가 정신이 없어서.”
민혁이 형규를 대리고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혜원이 벌떡 일어서서 요리조리 살피듯 형규를 뜯어보았다.
“인사해 혜원아. 형규야.. 그러고 보니 나이가 동갑인거 같은데..”
“아.. 반가워.. 난 박혜원이야.”
혜원이 그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는 바지춤에 손바닥을 쓱쓱 문질러 땀을 닦아내고 가볍게 혜원의 손을 잡았다.
“전... 최형규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민혁이 지은이에게 형규를 소개하려고 지은을 돌아보았다. 뜻밖에도 지은의 눈에선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사실 그날 별장에서 있었던 일을 지은은 아무에게도 얘기 하지 않았다. 혜령도 그 일에 대해선 물어도 대답을 회피하거나 불현 듯 화를 내기도 했다.
“... 누나.. 왜 그래?”
갑자기 형규가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 동철과 대결을 하던 날도 지은의 앞에 가장 먼저 무릎을 꿇었던 것이 형규였다.
형규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이 없었다. 가끔 어깨가 들썩이는 걸로 봐서는 울고 있는 듯 했다. 한동안 병실 안은 침묵이 흘렀다.
먼저 정적을 깬 건 다름 아닌 지은이였다.
“네가 형규였구나... 날 씻겨 줬던... 그래.. 네가 형규야... 기억할 수 있어.”
그랬다. 식사를 갖다 주러 왔다가 지은을 욕실에서 씻겨 주던 날렵한 몸집의 사내가 바로 형규였다.
“죄송합니다. 정말 그때는.... 용서해주십시오.”
“괜찮아.. 형규야... 이미 용서했어... 너희들 모두 이미 용서했어... 그러니까 울지 말고 일어나.”
그녀의 말에도 형규는 꼼짝 않고 더욱 머리를 조아렸다. 민혁이 형규를 일으켜 세워주자 그제야 마지못해 일어났다.
다소 진정이 됐는지 형규의 떨림이 줄어들었다.
“잠깐만요.”
형규가 머뭇거리다 기다리라는 말을 하고 병실 밖으로 나갔다가 무언가를 들고 있는지 뒷짐을 지고 침대 옆에 섰다.
“이거.. 받아주세요.”
형규가 내민 것은 언제 준비했는지 붉은 색 장미와 안개꽃이 소복한 꽃다발이었다. 그는 지은을 바로 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돌린 체 지은이 앞에 꽃다발을 내밀었다.
“이쁘구나. 나 주려고 가져 온 거니? 고마워.”
지은은 꽃다발을 받아 들고 향기를 맡았다. 향기로운 꽃내음으로 한결 그녀의 기분이 풀렸다.
************
여느 때와 같이 분주한 아침을 마지한건 민혁뿐이였다. 모처럼 식구들이 모두 각자의 방에서 꿈나라를 허우적대고 있다.
‘이런 날은 좀 쉬게 해주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그는 투덜거리며 아침 준비를 했다.
지은도 어제 완쾌되어 퇴원했다. 근 한달만의 귀가였다. 그녀의 귀가에 가장 반겼던 사람은 바로 준형이였다. 준형은 엄마가 퇴원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아침부터 문밖에 나가 기다렸다가 점심때 쯤에나 엄마를 태운 차가 골목 어귀에 들어서는 걸 보자마자 한달음에 달려갔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지은은 골목 어귀에서부터 준형이와 함께 집으로 걸어갔다. 그녀가 병원에 있는 동안 형규는 매일 민혁을 핑계 삼아 그녀를 보러 왔고 별 말 없이 한동안 머무르다 돌아가곤 했다.
혜령은 가족 중에 가장 바쁜 나날을 보냈다. 그 사건 다음날 치러진 선거는 당연 혜령의 당선이였다. 그리고 이후 당선사례를 위해 구민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그들과의 시간을 갖느라 꼭두새벽부터 자정까지 쉴 새 없이 뛰어다녔다. 정한수에 대한 후보납치 사주 사건도 이동철의 자수와 결정적인 녹취록까지 확보된 상태여서 처음에는 언론과 여론이 들끓었다. 그러나 경찰의 수사는 그리 빠르게 진행되지 못해 아직 정한수의 행방조차도 찾아내지 못했고 경찰의 지리멸렬한 수사결과발표로 지루함마저 느끼게 했다. 그러다 결국 국민들의 관심이 다른 곳으로 쏠리자 이동철의 단독범행으로 마무지 짓고 서둘러 수사팀을 해체했다.
국민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린 사건이란 바로 얼마 전 총리에 오른 박대표에 대한 섹스 동영상 파문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아이돌 가수 권치용의 자살로 박대표는 한없이 나락으로 떨어져 버렸다. 박대표가 여러명의 남자에게 애무를 받는 장면이나 고급 향락 서비스를 받은 그 모습이 그대로 동영상 속에 담겨 있었고 권치용의 자살 직전에 작성된 유서에 박대표에 대한 언급과 그로 인해 자신이 괴로웠던 일 등이 적혀 있어 자살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박대표와의 스캔들 때문인 것으로 발표되었다.
박대표는 사건을 수습하기 위해 동분서주 움직이며 여러 방면으로 빠져나갈 방법을 모색하고 있지만 여론의 목소리는 더욱 그녀를 압박했다. 그 여론의 배후에는 언론의 역할이 컸다. 국민들의 관심이 떨어지지 않도록 연일 그녀의 섹스 동영상, 권치용의 자살을 특집으로 다루며 국민들에게 세뇌하듯 어디를 보아도 박대표에 대한 얘기뿐이었다.
보수 언론이던 조선, 동아, 중앙신문도 이번에는 여당의 수장에 대한 비판에 서슬 퍼런 칼날을 들이 대었고 오히려 그것을 주도하는 듯한 인상도 풍겼다.
경찰의 입장도 어떤 사건보다도 빠르고 강력하게 박대표를 압박하였다. 곧이어 국회에서 특별 검사 안이 통과 되자 사건은 검찰로 이전되고 그녀를 더욱 압박해갔다. 과거 경찰과 검찰이 여당의 정치인에게 이렇게 강력하게 대응했던 적은 없었다. 한국당도 거의 대부분의 의원들이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다.
여론의 중심선 것도 보수 단체인 뉴라이트전국연합(실제 단체가 아닌 가상의 단체이오니 오해 없으시길)이었다. 그들은 한술 더 떠 그녀의 치부를 하나씩 하나씩 폭로하며 국민들의 관심을 박대표에게 고정되도록 유도하였다.
구수한 된장찌개의 향기가 온 집안에 퍼지며 꿈속을 헤매던 이들을 하나 둘 주방으로 모이게 했다.
“아웅~~ 냄새 너무 좋다.”
“아침부터 구수한게 입맛 당기는데...”
“오빠 아니었으면 우린 어떻게 살았는지 몰라?”
저마다 주방에 들어오면서 한마디씩 내뱉었다. 싱크대에 붙어 여전히 분주하게 움직이는 민혁은 심통이 났다. 그녀들의 말에 대꾸도 없이 더욱 요란한 소리를 내며 음식 만들기에 여념이 없었다.
“우리 오빠... 심통난거야? 심통난 모습도 왜케 귀여워?”
혜원이 그의 등뒤에서 허리를 감싸 안으며 그를 위로해 주었다. 감싸 안은 손이 허리에 있을 때만해도 그런 행동은 위로였다. 그러나 거침없이 바지춤을 파고드는 그녀의 손이 민혁의 자지를 잡자 더 이상 위로가 아닌 에로였다.
“이모... 뭐해?”
그때 준형이가 주방에 들어오면서 혜원의 행동에 호기심을 갖고 물었다. 주방 안의 어른들은 화들짝 놀랐고 혜원은 얼른 손을 뺐다. 다행인건 민혁이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기 때문에 허리를 파고든 손의 위치가 준형의 입장에선 전혀 볼 수가 없었기 때문에 당해이었다.
“아이구... 내가 못살아. 준형이 교육에 자꾸 저해하는 요소를 만들거야? 내가 준형이랑 나가서 따로 살든지 해야지...”
지은은 준형을 안고 못 볼 것이라도 되는 양 아이의 눈을 가리고 일부러 멀리 돌아 식탁에 앉았다.
“그래... 집에 준형이가 있다는 걸 항상 잊지 마. 특히 혜원이는 더 조심하고.”
혜령이 마지못해 한마디 거들었다. 혀를 삐쭉 내밀고 무안한 듯 준형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혜원도 자리에 앉았다.
“이모하고 삼촌하고 너무 너무 사랑하는 사람이라서 그런 거야... 너두 이담에 커서 니 색시한테 사랑 많이 줘야 돼.”
“웅! 이모... 난 맨날 안고 다닐 꺼야. 쭈쭈도 만져 주구.”
마지막 말에 지은이 깜짝 놀라며 준형의 입을 막았다.
“하하하”
“호호호호”
혜령이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후 달라진 것이 있었다. 바로 주방 식탁 벽면에 벽걸이형 LED TV가 설치된 것이다. 그들이 즐겁게 일요일 아침 식사를 하고 있는 중에 TV에선 긴급 속보가 방송됐다.
[뉴스 속봅니다. EU가 그동안의 협조체제에 금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특파원을 호출하여 자세한 내용을 알아보겠습니다. 방성호 특파원!]
[네! 제가 있는 이곳은 벨기에 브뤼셀에 위치한 EU본붑니다.]
[오늘 전격적으로 프랑스와 영국이 EU를 공식적으로 탈퇴의사를 밝혔는데요. 자세한 소식 부탁합니다.]
[네.. 그렇습니다. 오늘 아침 프랑스와 영국은 대 정부 발표를 통해 EU연합에서 공식적으로 탈퇴의사를 발표했습니다. 탈퇴의 배경으로는 장기간의 경기 침체로 인한 경제파탄과 자국의 이익에 치명적인 위기라고 밝혔습니다. 2년전부터 시작된 세계 경기 침체는 여러 나라들이 연합된 EU연합에 그동안 불안한 요소를 제공하고 있었습니다. 독일과 헝가리 등의 중소국가 들의 경기 파탄으로 영국과 프랑스는 상대적으로 많은 제정을 그들 나라에 쏟아 부었는데요. 그것에 한계가 나타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번 프랑스와 영국의 탈퇴로 다른 주변국까지 탈퇴의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는 가운데 EU연합은 그에 대처하기 위해 부산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TV를 통해 흘러나오는 아나운서와 특파원의 소식은 혜령의 시선을 고정시키기에 충분했다. EU연합의 동맹관계가 깨지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과 중국, 일본의 경제 잠식을 경계하기 위한 그들의 동맹은 처음 시작될 당시에는 경제 강대국에 맞설 만큼 위력적이었지만 시간이 점차 흐르며 자국의 이익 격차가 심화됨에 따라 조금씩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었다. 그러다 결국 최근의 장기 경기 침체는 그들의 갈등을 더욱 심하게 만들었다.
“결국 분열이 되는 건가? 앞으로 국제 정세가 급변하겠는 걸?”
“언니 그럼.. 어떻게 되는 거야?”
“글세... 지켜봐야 알겠지만, 탈퇴 국가들이 더 늘어나겠지... 그리고 현재 경제침체에 대해서 자국의 이익에 최우선되는 정책을 추진하게 될 거야.”
“뭐 그렇다구 별로 달라질 것도 없을 거 같은데?”
“아니지. 그동안은 서로 공생관계에 있다가 떨어져 나간다면 그들 국가 간의 사이가 나빠질 꺼야. 그러다 자국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더욱 심한 경쟁을 시작하겠지. 너 혹시 알고 있니... 그동안 2차례 있었던 세계 전쟁이 모두 유럽에서 시작됐다는 걸...”
[끝으로 이번 사건으로 인해 우리나라도 그 여파가 상당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동안 EU연합과의 FTA가 전체적으로 탈퇴한 국가와의 재협상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입니다. MBC 뉴스 방성호였습니다.]
특파원의 마지막 멘트로 아나운서는 뉴스 속보를 마쳤다.
“아무래도 나가봐야 겠다. 지은아 넌 집에서 좀 더 쉬고 있어.”
“아니야. 언니. 나도 나갈게. 그동안 병원에서 지내느라 실무 감각이 무뎌진 것 같아서 말야..”
“괜찮겠어?”
“응..”
지은이 대답에 준형의 표정이 굳어졌다.
“엄마... 꼭 나가야해? 오늘은 나하고 놀아준다고 했잖아.”
“그래 지은아... 너 한 달 만에 집에 온 거잖니. 병원에서 준형이와 같이 있었다지만 그게 집에서 있는거랑 같니? 오늘은 준형이랑 놀아줘. 일이야 내일부터 해도 되잖아.”
“그래라.. 지은언니야. 준형이가 엄마 퇴원날짜를 얼마나 손꼽아 기다렸는데...”
지은은 가족들의 만류와 특히 준형의 울 것같은 표정을 보자 자신의 생각을 고쳤다.
“그럴게... 준형아 엄마 안갈게... 오늘 엄마랑 놀자.”
“정말이야... 안가고 나랑 놀아줄거야?”
“그러엄... 이제 밥 맛있게 마저 먹고 약속대로 놀이공원 가자.”
“와~아~”
준형은 다시 밝아진 표정으로 남아있는 밥을 한입에 털어 놓고 부리나케 2층으로 올라갔다.
“거봐... 좋아하잖아. 괜히 그런 말은 해서..”
“미안... 난 그저 언니를 돕고 싶어서...”
지은이 겸연쩍게 미소를 지었다.
“나도 나가봐야 겠어. 혹시 내가 조사하는 일과 관계가 있을지도 몰라서.”
“으잉... 그럼.. 나도 같이 가.”
“안돼. 지난 번일을 곰곰이 생각해봐.”
민혁이 혜원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지난 번 일이라니? 너희들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아아니~~~ 무슨일은... 없었어..”
혜원이 손 사례를 치며 극구 부인하는 모습이 무슨 일이 있었다고 솔직하게 얘기하는 것보다 더욱 신빙성 있게 들렸다.
“미야옹~ 미야옹~”
갑자기 민혁이 고양이 소리를 내자 혜원의 얼굴이 삽시간에 빨갛게 물들었다.
“으윽...”
혜원은 자리를 박차고 방으로 뛰어갔다. 물론 민혁을 째려보는 눈빛이 여지없이 그를 향해 비수가 되어 꽂혔다.
“뭔 일이야? 제가 저럴 때도 있고?”
“아니야.. 괜히 그러는 거야. 하하하.”
“칫... 아무튼 아침 잘 먹었어. 난 바로 가봐야 겠다.”
“아... 누나.. 잠깐만..”
민혁이 막 일어나려는 혜령을 잡았다.
“병규라고 알죠? 동철이 부하로 있던...”
“응.. 알고 있는데.. 왜?”
“그 친구가 꽤 사람이 쓸 만하더라고. 원래 조폭 같은데 있을 사람이 아니더라고. 보니까 전과기록이나 심지어 벌금 기록조차도 없었어. 그래서 말인데.”
“흠.. 그래.. 인상이 아주 다부지게 생겼긴 하던데. 그래서?”
“누나의 신변 보호를 위해 붙여 줄까 하고. 물론 비서나 수행원들이 있지만 그들이 위험한 상황일 때 누나를 보호할 수 있을지 걱정돼.”
“하긴... 그들이 정치는 9단일지 몰라도 무술은 0단일 테니까. 근데 전직이나 뭐 이런데 문제가 있지 않아.. 그 사람?”
“응... 동철씨를 만나기 전까지는 꽤 유명한 무도관 관장으로 있었어. 태권도며 합기도, 검도.... 또 뭐지.. 암튼 다 합치면 누나의 두 배 아니 세 배는 될 거야.”
“아... 무도관 관장이었어?”
“그리고 동철씨의 부탁도 있었고 말야...”
“그럼 좋아.. 일단 면접을 봐야 하니까. 이따가 사무실로 오라고 해. 내가 만나볼게.”
“응 누나 고마워.”
혜령이 주방을 나가자 민혁은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아... 병규냐?]
[네. 형님]
[지금 바로 혜령누나 사무실로 출발해... 옷 좀 깔끔하게 입고..]
[아.. 그럼 허락을 하신 겁니까?]
[아니 그건 아냐.. 우선 널 만나보고 싶대. 그러니까 절대로 건달행세하지 말고.]
[네 형님.]
[면접 보는 거니까. 준비 단단히 하고 가.]
[네 형님.]
[그래. 그럼...]
[아.. 잠시 만요 형님. 형규녀석이 바꿔달랍니다.]
[형규가? 바꿔봐.]
잠시 후 형규의 목소리가 들린다.
[형님. 형隻求?]
[응. 무슨 일이야?]
[지은누님께서는 퇴원하셨습니까?]
[어제 퇴원 이였잖아.]
[아..... 그럼 인제 집에만 계시는 겁니까?]
[글세. 아까 얘기로 봐선 내일부터 누나 사무실로 나간다던데.]
[아..... 아.. 저기... 아닙니다..... 저기... 그럼 오늘은 뭐하신다고........?]
형규가 말끝을 흐렸다. 민혁도 그동안 형규가 어떻게 했었는지 알고 있었다. 그는 매일 빠지지 않고 그녀의 병실을 방문했다. 물론 민혁과 같이 다니다 보니 매일 방문한 건 그저 민혁을 따라 다닌 것이라 생각할 수 도 있겠지만 그냥 따라만 다녔다면 꽃다발은 필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늘 병실에 들어가기 전 꽃다발을 손에 들고 있었다.
[놀이공원에 간다고 하던데... 준형이랑...]
[아.. 그렇습니까?]
[왜?]
[아닙니다. 그럼 들어가십시오.]
일방적으로 형규가 먼저 전화를 끊었다.
‘훗훗.. 이 녀석이...’
민혁은 그저 잔잔하게 미소를 지으며 식탁을 치웠다.
‘아.. 이거.. 정말... 설거지까지 내가 해야 하나? 그냥 다들 들어가 버리면 어떻게...’
그는 영락없이 가사 도우미가 돼버렸다.
분주하게 혜령은 출근 준비를 마쳤다.
대한민국의 국회의원은 6명의 비서관 및 보좌관을 둘 수 있다. 4급 보좌관 2명, 5급 비서관 1명, 그리고 6급, 7급, 9급 비서관을 각 1명씩으로 구성된다. 대부분 초선 의원인 경우 정당 의원은 기존 확보된 보좌관급 인재 중에서 4급 보좌관과 5급 비서관은 정당 차원에서 제공해 준다. 무소속 의원의 경우 국회의 국회의원실을 통해 공채로 선발하거나 낙선 의원들의 경력자들을 모집하기도 한다. 그리고 나머지 6,7,9급은 의원의 재량으로 선발한다. 따라서 4급, 5급은 정치적 경력이나 전문성을 요하기 때문에 각 정당에서 별도의 인재DB를 구축하고 있기도 한다. 6,7,9급은 말 그대로 수행비서들이다. 그들 중에는 운전기사도 포함되며 지역구 의원의 경우 민심의 수습이라든가 현장 조사와 같이 발로 뛰어야하는 일을 맡게 된다.
혜령은 초선의원으로써 정당으로부터 4급 보좌관 2명을 배속 받고 5급 비서관으로 지은이를 채용했다. 그리고 국회의원실에서 제공해준 인력DB를 바탕으로 6급과 7급 비서관을 채용했다.
국회의원들은 의례 크고 고급의 국산 승용차를 많이 타고 다닌다. 국정 업무를 위해 이동이 필요한 경우에는 국가에서 관용차와 기사가 제공되지만 대부분 자신의 차를 이용한다. 이유는 관용차는 SM5급 정도로 그들이 늘 타고 다니는 급하고는 차원이 틀리다. 그러니 국회의원들은 별도의 차량 유지비, 유류비 등을 따로 지급받게 된다.
그러나 혜령은 자신이 타던 1500CC급 준중형차를 그대로 사용하기로 했다. 그리고 아직 기사를 따로 두지 않고 손수 운전을 하고 다녔다. 그리고 사무실 근처까지 차를 타고 가서는 5KM 떨어진 주차장에 주차를 시키고 사무실까지 걸어서 출근했다. 그녀가 이러는 이유는 5KM를 걷는 동안 구민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며 그들의 얘기를 직접 듣기 위해서 였다. 이것은 주민들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받는 요인 중에 하나가 되었다. 일부러 그녀가 출근하는 시간에 그녀와 인사를 나누기위해 시간을 맞춰 나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오늘은 일요일이기 때문에 갑작스런 그녀의 등장에 사람들이 호들갑을 떨며 손을 흔들기도 하고 인사를 하기도 했다. 그런 행동에 그녀는 일일이 답했다.
“안녕하세요.. 잘 되시죠? 아! 안녕하세요..... 병순이 할머니... 이제 감기는 다 나으셨어요? 어머! 돼지엄마. 몸 풀었다면서요... 축하해요. 몸조리 좀 더하고 나오시지... 네.. 네...”
그녀는 5KM를 걸어가는 동안 입을 한 번도 쉴 수 없었다.
그녀가 사무실 앞에 도착했을 때 검은색 정장을 입은 한 사내가 부동자세로 서있었다. 그녀가 가까이 다가가자 그 사내는 그녀를 향해 30도 정도의 정중한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의원님.”
“아.. 병규씨? 호호”
그녀가 웃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병규는 자신이 생각하기에 최대한 깔끔하게 보이기 위해 헤어고정용 스프레이를 거의 한 통을 다 소비하여 머리카락을 바짝 붙여 넘겼다. 올빽 머리에 돌덩이처럼 굳어버린 머리카락이 그녀의 눈에는 작은 헬멧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에구.. 민혁이가 잔뜩 겁을 줬나보네.. 호호호 이건 근데 너무 웃긴다.’
그녀는 간신히 웃음을 참으며 그를 따라 들어오라고 손짓하며 사무실로 들어갔다. 사무실에는 미리 연락해 두었던 보좌관들이 출근해 있었다.
“안녕하세요. 의원님.”
“오셨어요. 의원님.”
“일찍 나오셨네.. 미안해요. 다들 일요일 날 불러내서... 아.. 그리고 전화로 얘기했던 자료는 흠.... 30분 후에 보고 받도록 하죠.”
그녀가 집무실로 들어가자 병규는 집무실 앞에서 머뭇거리며 어정쩡하게 서있었다. 보좌관들은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저 사내가 누구인지 속닥이다가 혜령이 다시 나오자 후다닥 자리에 앉아 바쁜 척했다.
“들어오지 않고 뭐해요?”
“아... 네...”
병규는 그녀를 따라 집무실로 들어갔다. 그녀의 집무실 한가운데는 회의용 원형 탁자가 하나 놓여 있었고 기억자형 책상과 그 주변에 허름한 책장들이 몇 개 있었다. 소박한 모습의 집무실이었다.
“앉아요. 민혁이에게 얘기 들었어요.”
“....”
“무도관 관장이셨다구요? 나도 태권도라면 좀 하는데. 얼마나 했었요?”
“넵.. 아버님께서도 무도인이셨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줄 곳 해왔습니다. 대학도 체육대학 태권도학과를 나왔습니다.”
“오.. 그래요. 국가대표나 출전 했던 경기는 없었나요?”
“아버님의 반대로 경기 출전은 한 번도 못했습니다.”
“아.. 안됐네요. 아버님께서 왜 그러셨을까요? 그리고 말 편히 하세요.”
“아.. 네. 아버님께선 진정한 무도인은 남 앞에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다스리는 것이라 하셨습니...다요.”
“그런데 어쩌다 동철씨를 만났죠?”
“우연히 제 무도관에서 대련이 있었는데 그때 감동 받았습니다. 그래서 저도 그 분께 대련을 요청했고 깨끗하게 제가 졌습니다. 그 날 이후로 그 분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흠.. 남자들은 참 우습군요.”
혜령은 이 사내가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별장에서의 기억 때문에 선뜻 결정하기 힘들었다.
“지난 잘못을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가 그녀의 의중을 읽었는지 먼저 선수를 치며 말했다.
“사실 난 당신이나 그 애들한테서 직접 그 짓을 당하지 않았지만 지은이는 많이 힘들었어요. 사무실에서 당신을 보면 그 일이 자꾸 생각 날 텐데. 힘들꺼예요.”
“....... 전......합...”
그가 무언가를 말하려다 그냥 입을 다물었다.
“뭐 할 얘기라도 있어요? 그냥 편하게 해요.”
“...... 그...날... 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 않았다니?”
“민혁 형님이 들어오시는 통에 전 보지도 못했습니다.”
“풋...”
혜령은 웃을 수 없는 얘기지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병규는 얼굴 전체가 땀으로 범벅이 되어 방울방울 맺혔고 그러다 보니 머리카락도 물기를 머금어 가공할 스프레이의 고정력을 무력화시켜 한줄기의 머리카락 묶음이 애교머리처럼 이마에 내려왔다. 그리고 그의 표정 또한 최대한 불쌍하게 보이려는지 울쌍이 다되어 있었다.
“아.. 그럼.. 지은이가 모를 수도 있겠군요.”
“....”
“그럼 우선은 같이 일 해보도록 하죠. 그리고 내일 지은이가 출근 했을 때 최종 결정을 할께요.”
“감사합니다. 열심히 보좌하겠습니다.”
혜령은 그를 대리고 사무실로 나가 다른 보좌관들에게 병규를 소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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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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