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임 리와인더 (Time Rewinder)
- 이 소설은 소.라.넷(sora.net) 작가 "상상의신비"가 연재 중인 작품입니다.
무단 불펌을 삼가해 주시길 부탁드리며, 퍼가시더라도 출처와 작가명을 꼭 남겨주십시오.
창작가들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이자 도리입니다.
* 1부 6장
"오빠, 여기~!"
내가 도착했을 때는 학위수여식이 끝나고 졸업생들이 캠퍼스 내에서 학사모 촬영을 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현주가 손을 흔드는 곳으로 다가가니 현주 말고도 두 사람이 더 보였다. 현주의 어머님과 언니였다.
"아, 안녕하십니까, 어머니. 처음 뵙겠습니다. 최성진이라고 합니다."
"그래요. 딸애한테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바쁘신데 딸애 졸업식에도 와주시고 고맙네요."
"아, 아닙니다. 별 말씀을요."
여자친구의 어머니를 만나본 적은 처음이었다. 꼭 현주의 어머니가 아니더라도, 여친의 가족분들을 만나본 경험 자체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여친을 사귀어본 적도 몇 번 없으니까....
그렇기 때문인지 당황해서 말이 더듬더듬 나왔다. 현주의 어머니가 날 덜떨어진 젊은이로 볼까봐 걱정이다. 속으로 시간을 되돌려서 미리 대사 연습을 해올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곧 아차 싶어서 그만두었다.
이 무렵엔 곧잘 이런 식이었다. 시간을 되돌릴 만큼 심각한 일도 아닌데도 무언가 "완벽"을 추구하고 싶은 마음에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이 있으면 과거로 돌아가려는 생각부터 했다. 그 정도로 시간 되감기에 의존하고 있었다.
수명을 담보로 한다고는 했지만 그 수명이란게 평소에 눈으로 보거나 느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더 무감각해지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나 또한 이성으로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시계를 처음 손에 넣었을 때와는 다른 의미에서의 갈등으로 외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반가워요! 현주 언니 현아에요."
현주의 언니를 그 날 처음 봤다. 첫인상 만으로 나는 여러가지 복합적인 느낌을 동시에 받았다.
굳이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뭐랄까... 그녀는 동생과 닮았으면서도 달랐다.
"네, 반갑습니다."
"현주가 남자친구 자랑을 많이 해요. 한번 보고 싶었어요. 반가워요, 호호."
헬스장에서 현주를 처음 봤을 때가 생각난다. 현주와 사귀면서 그녀를 더 많이 알면 알수록 느꼈던 거지만 현주는 가끔 보면 칠칠 맞거나 맹한 구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성격에 어울리지 않게 아주 애교 있는 얼굴을 가졌다. 나는 가끔씩 현주의 그 고양이스런 외모가 성격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그런데 이제보니 그 외모는 언니를 빼다박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매는 생김새가 아주 비슷했다. 고양이 같은 얼굴부터 시작해서 애교 있는 눈매와 단순호치가 어울리는 밝은 미소.
모르긴 몰라도 언니 쪽도 남자 깨나 홀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빠, 나 학사모 어때? 잘 어울려?"
"응. 졸업 축하해. 자, 여기 선물."
나는 준비한 꽃다발과 선물을 건넸다. 학교 앞에서 급하게 구한게 아니라 꽃집에서 신경써서 고른 꽃다발과 백화점에서 고른 여성 향수였다. 오늘 아침에서야 졸업식에 오기로 했는데 당연히 이 선물을 미리 준비했을리는 없고, 덕분에 아침에 타임 리와인더의 파랑 바늘을 두어 바퀴 돌려야 했었다.
"엥? 이게 다 뭐야? 오빠 갑자기 연락받고 왔으면서..."
"미리 준비했지 뭐. 오늘 저녁에라도 주려고."
"와... 난 급하게 연락한거라 기대도 안 했는데... 또 너무 비싼거 사온거 아니야?"
"별 거 아니야."
사실 시간을 부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이상 돈이라는 것은 내게 별 의미가 없었다. 시간은 전능하다. 그 가치는 돈과는 비교할 수 없다. 마음만 먹으면 이 능력을 이용해서 돈을 버는 것은 일도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굳이 눈에 띌 정도로 부자가 되고 싶지는 않다. 그러면 주목을 받게 될 테니까. 그저 내가 원하는 대로, 즐거운 삶을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그걸로 족하다.
"와아~ 선물 뭐야? 나도 봐도 돼?"
"아, 언니 가만히 좀 있어."
"왜, 나도 궁금해애. 빨리 보여줘~"
별 거 아니라고는 했지만 아무렴 내가 가족들 보는 자리에서 별 거 아닌 선물을 가져왔을까. 빈손으로 와도 이해했을 현주의 성격상 이렇게 비싼걸 가져왔다는걸 알면 나중에 또 한 소리 하겠지만 이로써 체면은 세운 셈이다.
"자자, 찍을게요."
현주의 가족사진을 찍어주었다. 중앙에 학사모를 쓴 현주가 섰고 양 옆으로 어머니와 언니가 섰다. 현주와 나란히 서 있는 현주 언니의 모습을 보았다. 생김새가 닮았지만 분위기는 많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질감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나중에 알게 되었다.
"오빠, 이제 어디 갈거야?"
"글쎄."
"같이 밥 먹자."
"가족분들 계시는데 어떻게 그래."
"뭐 어때? 엄마 괜찮지?"
"그렇게 해요. 힘들게 딸애 선물까지 사오셨는데 그렇잖아도 그냥 보내기 미안했어요."
"아, 그, 그럴까요?"
사실 내가 불편해서였기도 했지만 현주는 의외로 나를 가족들에게 소개시키고 싶은 마음이었나보다. 가족들에게 소개시키고 싶을 정도라면 현주가 나를 좋아하긴 좋아하나보다 하는 생각이 들어 차마 거절하기도 힘들었다.
"그럼 나 잠시 학사모 반납하고올게~"
현주가 학사모와 학사복을 반납하러 과사무실에 다녀오는 동안 난 어쩔 수 없이 현주의 어머님과 언니와 함께 있어야 했다. 약간은 불편한 공기가 흘렀다. 어색함을 깨보려는 배려인지 현주 언니가 내게 말을 건다.
"직장인이세요?"
"아, 아뇨. 아직 학생입니다."
"아~ 의외에요. 돈을 잘 버시는 분인가보다 해서 물어본거에요."
"네? 왜요?"
"아까 그 향수, 비싼거잖아요?"
포장 겉표면의 로고를 보고 브랜드를 알아맞춘 것 같았다.
"그리고 입고 계신 옷들도 하나같이 전부 이름 있는 것들이구."
"......"
엄밀히 말하면 이 옷들은 내가 돈주고 산게 아니라 타임 리와인더의 능력을 이용해서 "훔친"것이나 다름 없었다.
타임 리와인더의 사용에 익숙해졌을 무렵, 내 머릿 속에는 늘 의문이 하나 떠나지 않았다. 내가 시간을 되감을 때, 시간축을 이동하는 주체는 나 하나 뿐이다.
그렇다면 조금만 생각해보면 상식적으로 내가 시간여행을 하는 순간 내가 입고 있던 옷이나, 들고 있던 물체나 (이를테면 휴대폰이라던지), 신고 있던 신발 등등은 모두 남겨진 채로 몸만 이동되어야 하는게 아닐까?
과거에는 이미 그 물체들이 있었던 "자리"가 따로 있었을테니 말이다.
하지만 아니었다. 생각해보면 내가 시간 되감기를 할 때마다 과거로 돌아간 나는 현재의 나와 같은 옷, 같은 신발을 착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타임 리와인더가 애초에 상식이란게 통하지 않는 물건이긴 했지만, 여태까지의 정황으로 미루어보면 이 시계도 나름대로 규칙과 합리성에 의해 움직이는 물건이란걸 나는 느끼고 있었다.
최대한 깊이 고민해본 끝에, 나는 결국 이런 결론을 내렸다.
[시간 이동을 하는 순간 내 신체에 닿아있는 물체들은 "함께" 시간을 되돌아간다.]
즉, 입고 있던 옷을 포함해서 내 몸에 닿아있는 것들은 내가 시간을 되감은 과거의 그 순간으로 함께 이동되는 것이다. 이용하고자 마음 먹으면 얼마나 편리한 룰인가? 가령 예를 들어, 갖고 싶은 물건이 있다면 먼저 그 물건에 손을 댄 이후에 시간을 되감으면 된다. 나는 그런 방식으로 내가 지금 입고 있는 모든 명품들을 손에 넣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손만 대면" 되는 것도 아니었다.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서 나는 몇 차례의 실험을 거쳤다. 종이컵을 하나 준비해서 우선 손 끝만 갖다댄채로 시간을 감아봤다. 종이컵은 따라오지 않았다. 이번엔 손에 움켜쥐고 시간을 감아봤다. 그러니 종이컵을 손에 쥔 채로 시간이 되감겼다.
이 점으로 미루어보건대, 이 법칙에도 물체를 시간 이동 시킬 수 있는 일종의 "경계"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아, 음.. 혹시 기분 나쁘셨나요?"
내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는 모습에 기분이 상했다고 오해한 것인지 현주 언니가 내 눈치를 살폈다. 나는 퍼뜩 잡생각에서 벗어나 손사래를 쳤다.
"아, 아뇨. 아닙니다. 그런데 남자 옷인데도 알아보시나봐요?"
"아, 하하, 제가 남자 옷을 좀 잘 알거든요."
"혹시 의류업 분야에서 일하시는건가요?"
"그런건 아니구요, 그냥 이 남자 저 남자를 다양하게 보다 보니까....?"
무슨 의미인지 묻고 싶었지만 왠지 물었다간 실례가 될 것 같아서 참았다.
그보다는 현주 언니의 옷차림에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현주도 평소에 짧은 치마를 종종 즐겨입곤 하는 편이었지만, 이제보니 자기 언니만큼은 아니었다. 저런 옷을 평소에도 즐겨입는진 몰라도, 현주 언니의 치마 길이는 결코 길다고는 할 수 없는 동생의 치마 길이에 비해서도 심하게 짧았다. 조금만 허리를 숙여도 팬티가 보일 것 같을 정도였다.
코스모스 졸업을 할 때였으니 계절이 딱 미니스커트를 입기 좋은 날씨이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동생의 졸업식날 치고는 너무 야한 옷차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고 있는 것들이나 몸에 차고 있는 악세사리들이 하나 같이 고급이어서 그런지 그렇게 천한 느낌을 주지 않으니 묘한 일이었다.
나야 꼼수가 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나랑 나이 차이도 그다지 나는 것 같지 않은데.... 현주 언니야말로 돈을 잘 버는 직장에라도 다니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는 사이에 현주가 도착했다.
"밥 먹으러 가자~"
"응.. 그래."
졸업식날이다보니 대학로 근처에는 사람들이 그야말로 바글바글해서 식사할 곳 찾기도 힘들었다. 어쩔 수 없이 대학로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는 패밀리 레스토랑에 자리를 잡았다. 현주와 현주 언니의 성격이 활발한 덕분에 자리가 크게 어색하지는 않았지만 어머님이 내게 이따금씩 묻곤 하는 "그래, 공부는 열심히 해요?" 와 같은 질문들은 아무래도 조금 불편할 수 밖에 없었다.
문득 잊고 있었던 지환이 새끼 생각이 난다. 그 새끼만 아니었어도 여기서 당당하게 학과 수석이라고 말할 수 있었을 텐데... 쓰읍. 갑자기 또 미워지네.
"있지, 우리 오빠는 진짜 신기하다? 내가 말 안 한것도 알아서 다 척척해주고, 가끔은 진짜 텔레파시라도 쓰는 것처럼 내가 속으로 생각하기만 한걸 다 해줘. 엄마랑 언니도 봤지? 내가 오늘 아침에 오라고 한건데도 선물까지 준비해서 오는거."
현주는 끝도 없이 내 자랑을 재잘재잘 늘어놓는다. 오늘 처음 뵙는 가족들 앞에서 약간은 무안하게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얼굴이 붉어져 현주에게 눈치를 주었다.
"왜 그래, 부끄럽게."
"그냥 두세요. 현주 쟤 집에서는 더해요. 입만 열면 남친 자랑에... 어휴, 나도 서러워서 빨리 남친 만들어야지."
"현아 씨는 아직 애인 없으세요?"
"킥, 전 그런거 안 키워요."
알고보니 현주의 언니는 나와 나이가 같았다. 현주와 내가 나이 차가 두 살인데, 언니와도 두 살 차이라고 했으니 우리는 동갑인 셈이었다. 그렇다보니 대하기가 여간 불편한게 아니었다. 나이가 적으면 차라리 편하게 대할테고, 나이가 많으면 좀 친해진 다음 누나라고 부르던지 하면 될텐데 현주와 내가 결혼을 한 사이도 아니고보니 호칭을 정하는게 아주 힘들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현아 씨"라고 불렀다.
"언니 그래도 남자들은 많이 달고 다니던데."
"조용히 해, 기집애야. 쪼그만게 뭘 안다고."
"참나.. 누가 보면 이모뻘은 되는 줄 알겠다."
현아 씨가 현주를 쥐어박으려는 시늉을 하다가 실수로 포크를 쳐서 테이블 아래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포크가 내 앞쪽까지 굴러와서 내가 주워주려고 허리를 숙이는 순간 현아 씨도 테이블 아래로 허리를 숙여서 우리는 잠시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현아 씨와 손이 닿을락말락 한 거리에서 아슬아슬하게 멈춰선 순간 내가 더 잽싸게 포크를 줏었다. 나는 조금 당황했지만 현아 씨는 당돌하게도 나와 눈이 마주치자 고양이 같은 눈웃음을 지었다. 자기 동생보다 훨씬 더 짙고, 자기 동생보다 훨씬 더 요염하게 보이는 눈웃음이었다.
"봤지? 우리 오빤 매너도 좋아."
"알았어, 기집애야! 남친 자랑 하도 해서 남친 닳겠다. 그만 좀 해."
현아 씨가 핀잔을 주며 테이블 위로 허리를 일으켰다. 그 순간 나를 놀라운 것을 보았다.
"자, 잘못 본건가?"
테이블 아래로 허리를 숙인 탓에, 본의 아니게 현주 언니의 짧은 치마 속을 보게 되고 말았다. 사실 보통의 경우라면 테이블 밑으로 숙인다고 해서 치마 속이 보이지는 않겠지만, 현아 씨의 경우 치마 길이가 너무도 짧아 방금처럼 몸을 숙였다 다시 일으키는 순간에는 치마 속이 무방비로 노출될 수 밖에 없었다.
아주 짧은 찰나의 순간이지만 그 타이밍에 우연히도 그곳에 시선이 머물렀던 것이다.
"노팬티... 아니겠지?"
0.5 초도 안될 만큼 짧은 순간 잠깐 엿본 현주 언니의 치마 속에는 뭔가 있어야 할 것이 없는 느낌이었다. 살색이 아닌 무언가를 본 것 같기는 했지만 그게 아무리 봐도 팬티로는 보이지 않았다. 순간 맥박이 빠르게 뛰면서 얼굴이 확 붉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오빠, 왜 그래?"
"응? 아, 아냐."
당황한 것이 현주에게도 느껴졌는지 현주가 내 팔을 톡톡 치며 물었다. 나는 혹시라도 현주 언니가 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는건 아닌가 노심초사했다. 좌우지간 그 뒤로는 현주의 언니와 시선을 잘 마주할 수가 없었다.
그 후로는 밥이 입으로 넘어가는지 코로 넘어가는지 모를 만큼 정신없게 식사를 끝마친 것 같다. 식사가 끝나고 현주는 자기 동네로 돌아가 아버님이 퇴근하고나면 가족들끼리 좀 더 시간을 보낼 거라고 했다. 나는 어머님과 현주의 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현주 어머니의 차가 있는 곳까지 가족들을 배웅해주었다.
현주는 오늘 나와 시간을 많이 보내지 못해서 미안하다며, 내일은 단 둘이서 시간을 보내자고 했다.
"오빠, 그럼 저녁에 연락할게~"
"으응. 알았어. 근데 저기 현주야."
"응?"
"저기, 너희 언니 말야."
"우리 언니?"
"아, 아니다. 아무 것도 아냐."
"뭐야~ 뭔데?"
"아냐. 진짜 별거 아니야."
현주에게 말을 할까 하다가 그냥 넘기기로 했다. 구태여 입밖으로 꺼낼 만한 주제가 아니었다. 그러는 사이 현주 어머니가 주차장에서 차를 빼셨고, 나는 현주를 차에 태웠다.
"이따 전화해."
"응~ 알겠어."
현주네 가족이 차를 타고 가버리자, 나는 그 자리에 잠시 서있었다. 시계를 보았다.
적당한 시간이었다.
그냥 넘길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나는 구태여 그 날 다시 한번 시간을 되돌아갔다.
현주네 가족과 같이 있었을 때로 내가 시간 이동을 해버리면, 그 시점에서 여태껏 현주 가족과 함께 있었던 "나"는 지워져버리는 것이 되기에 혼란을 피하고자 졸업식 전으로 되돌아가야만 했다.
오늘 있었던 일을 대본처럼 똑같이 반복해서 다시 되풀이하는 것은 무척 지루한 일이었지만, 나는 현주 언니의 치마 속을 다시 한번 확인해보고 싶은 그 짖궂은 호기심을 도저히 억누르기가 힘들었다. 그게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던 일인지는 솔직히 나 자신도 잘 모르겠지만, 확실히 소득은 있었다.
다시 한번 확인해 본 현아 씨의 치마 속은 확실히 노팬티였다.
*
오랜만에 딸딸이를 쳤다. 여친의 언니를 생각하며 딸딸이를 친다는건 어떤 의미로 배우 부도덕한 일이었지만 오늘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그럴 만하긴 했다. 좆물 묻은 크리넥스를 변기통에 내려버리고 맥주를 한잔 하러 편의점으로 향했다. 왠지 작년 어느 날이 생각이 난다.
분명 그 때도 이렇게 딸딸이를 치고, 맥주를 사러가는 길이었다. 그렇게 나는 옆집 여자와 마주쳤고, 그게 계기가 되어서 타임 리와인더를....
"....꿈인가?"
데자뷰를 겪듯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니 옆집 여자가 복도를 걸어오고 있었다. 이 여자 혹시 자위의 정령이라도 되나? 딸딸이를 치고 나면 한번씩 나타나는?
"......."
그녀의 물건을 훔쳤다는 점이 제 발을 저려 내 태도를 뻣뻣하게 만들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그녀의 무미건조한 표정은 변함이 없었지만, 나는 다시 집으로 들어갈까 하다가 오히려 더 수상하게 보이겠단 생각에 그냥 복도를 걸어 그녀와 스쳐지나갔다.
나와 그녀가 서로 엇갈려 지나가는 순간, 나는 처음으로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다.
"안녕?"
"......."
심장이 멎을 뻔 했다.
"아, 안녕하세요."
반사적으로 존댓말이 튀어나온다. 그러고보니 그녀가 몇살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내게 아주 자연스럽게 말을 놓았다.
"또 보자."
그 한마디 뿐이었다. 그녀는 그 한마디만 남기고 문을 열어 302호로 들어가버렸다. 복도에 혼자 남은 나는 왠지 온 몸에 오한이 드는 오싹한 기분을 느끼고 도망치듯 그 자리를 떴다.
처음 들어본 그녀의 목소리는 얼굴 표정만큼이나 삭막했다.
*
"에이씨... 왜 이렇게 찝찝하지?"
갑자기 변한 옆집 여자의 태도에서 나는 그녀가 뭔가를 읽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오싹한 기분을 느꼈다. 내가 생각해봐야 답도 없는 문제긴 하지만 얼굴을 잠깐 마주한 것만으로 그녀는 내게 크나큰 혼란을 남겼다.
"그, 그냥 잊어버리자. 시계를 돌려달라고 한 것도 아니잖아."
설사 그녀가 만에 하나 내가 절도범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그걸 돌려달라는 말을 하지 않는 이상 지금은 신경을 끄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생각해봐야 답도 없는 문제니까.
하지만 왠지 모를 찝찝함을 해소할 수 없는 그 답답한 기분은 날아가지 않았다. 만약 그녀가 진짜로 알고 있다면 언제 시계를 빼앗기게 될지 몰라. 시계를 빼앗기고 나면 내 삶은 어떻게 될까? 다시 예전의 그 자신감 없고 힘 없는 찌질이로 돌아가게 되겠지....? 그건 상상만 해도 싫다.
"에잇, 씨발...."
덕분에 자취방으로 들어가고 싶은 기분이 싹 사라졌다. 맥주를 사긴 샀지만 내 방으로 돌아가고 싶진 않았다. 옆집 여자를 다시 마주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별 수 없이 오늘은 바람이나 쐴까 해서 근처 강변도로로 향했다. 시원하게 트인 도로를 따라 걸으며 탁트인 강변을 구경하고 있자니 기분이 그래도 좀 나아지는 것 같다.
그 때였다.
"계속 달려!!"
위잉위잉위잉! 한 무리의 오토바이 떼가 미친듯이 폭주하며 강변도로를 달려 지나갔다. 선두의 오토바이 몇 대가 빠른 속도로 질주하며 도로를 쏜살같이 궤뚫고 지나가자 그 뒤로 몇 대의 오토바이들이 천천히 그 뒤를 따랐다. 물론 선두에 비해서 천천히 따라갔다는 것 뿐이지, 일반적으로 보면 도저히 안전하다고는 볼 수 없는 속도였다.
폭주족들이 분명했다.
"아직도 저런 낭만을 찾는 애들이 있네. 저러다 골로가지, 쯧쯧."
속으로 혀를 차고 있는데 그 중 유독 무식하게 바깥 쪽으로 붙어 운전하던 오토바이가 나를 박을 듯이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불과 몇 센티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비껴나갔지만, 대신에 내가 들고 있던 비닐 봉지가 찢기면서 안에 들어있던 맥주캔들이 강변 도로 위로 볼품없이 날아가고 말았다.
도로 바닥을 아무렇게나 굴러가는 내 아까운 맥주캔들...
"야이 새끼야! 그따위로 처몰고 다닐거면 그냥 나가 뒤져! 알았어!?"
열이 받쳐 소리를 버럭 질렀지만 듣기나 했을까. 그런데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비켜!"
"엇?"
뒤에서 따라오던 가장 후미의 오토바이 중 하나가 도로변에 서있는 나를 피하려다가 급하게 핸들을 꺾었다. 아슬아슬하게 비껴지나간 것은 좋았는데, 급하게 방향을 트느라 방금 전에 도로 바닥에 떨어져 이리 튀고 저리 튀던 맥주캔 하나가 재수없게도 오토바이의 앞바퀴 휠에 딱 걸려버린 것이다.
"어어엇?"
다행히 그 오토바이는 후미에서 따라오던 중이어서 속도가 그렇게 높진 않았지만, 앞바퀴가 걸린 탓에 위태롭게 비틀거리던 오토바이는 결국 삐긋하더니 달리던 와중에 옆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콰당 하는 소리와 함께 오토바이를 몰던 운전자가 도로 바닥에 튕겨져 맥없이 나뒹굴었다. 나는 기겁을 하며 달려갔다.
"이봐요, 괜찮아요?"
"......."
씨발, 설마 죽은건 아니겠지? 자세히 보니 몸이 움찔대는걸로 봐서 의식은 있는 것 같다.
"이봐요, 정신차려봐요. 그러게 오토바이 같은건 조심해서 타야지... 119 부를테니까 좀만 참아요."
"....놔."
순간 죽은 줄 알았던 폭주족 운전자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젠장... 재수 드럽게 없네."
"저기, 이봐요."
걱정해준 사람에게 이게 무슨 무례란 말인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가 신경질적으로 헬멧을 벗어던졌다.
바닥에 둔탁하게 나뒹구는 헬멧과 폭포수처럼 쏟아져내리는 길고 긴 머리카락.
"여... 여자잖아?"
놀랍게도 폭주족은 여자였다. 헬멧 안으로 들리던 목소리를 들었을 때 도저히 남자 목소리로 들리진 않았지만, 설마 진짜 여자일 줄은 몰랐다. 그것도 아주 젊은, 아니 어떻게보면 어리다고 할 만큼 앳된 외모의 여자였다.
"괘, 괜찮아요?"
하도 의외였기 때문인지 따지려던 내 말투가 갑자기 소심하게 바뀌었다. 그녀.... 라고 부르기엔 뭔가 애매한 그 여성 폭주족은 나를 흘끗 한번 보더니 말도 없이 일어나 쓰러진 오토바이를 일으켜세웠다.
"저기요."
"꺼져."
다른 말도 아닌 욕설이 돌아온다. 아니 이게 도대체 무슨....?
"야! 너 거기 잠깐 서 봐."
나도 참다못해 고함을 버럭 질렀다. 그러자... 오토바이에 탄 여자가 내게 보란 듯이 가운데 손가락을 쳐든다.
뻐... 뻑큐?
"이 년이 미쳤나!?"
하지만 그 순간 바르르릉 소리를 내며 저만치 달려가버리는 오토바이.
그 뒤를 이어 강변도로에 부는 바람이 얼빵한 얼굴로 서 있는 나를 스치고 지나간다.
"야 이 년아!! 너 내 눈에 띄면 진짜 단단히 혼날 줄 알아!!"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공허한 외침이 강변에 울렸다.
*
절대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지만, 하도 스펙터클하고 어이가 없었기 때문인지 아까의 그 찝찝한 기분이 다소 날아간 것 같다. 똥 밟은 셈 치자며 애써 잊어버리고 자취방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어? 현주야."
"오빠! 어디갔다 이제와?"
현주가 자취방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현주에게 자취방 위치를 대충 말해준 적은 있지만 아직 데려온 적은 없었기에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그녀를 보고 나는 무척 놀랐다.
"오빤 잠깐 바람 쐬고왔지. 넌 왜 여기있어? 가족들이랑 시간 보내기로 했잖아."
"아빠 엄마랑 같이 있다가 저녁 먹고 왔어. 언니는 약속있다고 가버렸고. 나도 그냥 잠깐이라도 오빠 얼굴 보려고 온거지 뭐."
"아아.. 그랬어?"
"치. 내가 왔는데 안 반가운가보네?"
"무슨 말이야. 완전 반갑지. 일단 들어갈래?"
자연스럽게 말하긴 했지만 사실 속으로는 과연 현주가 따라들어올까 궁금했다. 아무도 없는 밀폐된 공간에 현주와 단 둘이 있어보는건 처음이었기 때문에. 하지만 의외로 현주는 별 거부감 없이 자취방으로 따라들어왔다.
"여기가 오빠 방이구나."
제길. 하다못해 방바닥에 꼬슬꼬슬한 털들이라도 좀 치워둘걸. 이렇게 갑작스럽게 현주를 내 방에 들이게 될 줄은 몰랐다. 나는 지저분한 방이 창피해 죽겠는데 현주는 뭐가 그리 신기한지 이곳 저곳을 둘러보느라 바빴다. 뭐 대접할게 없나 냉장고를 뒤지고 있는데 현주가 갑자기 생각난 듯 날 혼내기 시작한다.
"아 참, 그리고! 다음부터 그렇게 비싼 선물 하지마. 난 그렇게 비싼 건줄 몰랐단 말야."
"알았어. 가족들 앞에서 잘 보이려고 그랬지."
"오빠, 나 말고 여자 사귀어본 적 몇 번 없지?"
"으응? 그건 왜?"
"여자는 꼭 비싼걸 준다고 좋게 보는게 아냐. 오빠는 평소 그대로도 충분히 멋있는데 굳이 항상 과하게 뭔가를 해주려고 하더라. 연애초보들이 잘하는 거거든, 그거."
"......."
정곡을 찔려 할말이 없었다. 우물쭈물하며 침대에 걸어앉아있는데 현주가 옆에 앉으며 내 허리를 껴안았다.
"그러니까 다음부턴 그러지마, 알겠지?"
"으응."
"그래도 그 마음 씀씀이는 너무 감동적이더라. 사실 그래서 갑자기 오빠가 보고 싶어졌어."
이렇게 침대에 나란히 앉아있는데 현주가 날 껴안기까지 하니 흥분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여기는 실내이지 않은가. 아무도 없는 조용한 방 안...
"현주야, 우리...."
"응? 왜?"
문득 현주와의 안 좋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모텔에서 현주를 덮치려다 뺨맞고 퇴짜맞은.... 물론 현주는 그 일을 기억도 못하고 있겠지만 나한텐 그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술에 취한 와중에서도 자기 몸을 보호했던 것을 보면 현주는 그렇게 함부로 몸을 허락하는 여자는 아닌 것 같았다. 사실 그래서 지금도 뭔가 조심스럽다.
하지만 그 때는 그 때고, 지금은 지금이다. 어느덧 현주와 사귄지도 시간이 제법 되었다. 게다가 현주도 나를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때는 망쳤지만, 지금이라면 이야기가 다를 것이다.
"웁.."
가타부타 말로 표현하는게 더 힘들 것 같아서 일단 에라 모르겠다 하며 입술을 덮쳤다. 현주의 도톰하고 앙증맞은 입술에 내 입술이 포개어졌다. 입술 끝에 닿는 몰캉한 느낌이 무척 아찔했다.
"......"
현주는 별다른 거부반응이 없었다. 나는 비로소 "됐다!" 싶어 속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역시 그 때와 지금은 다르다. 지금은 현주도 나를 좋아하고 있는 것이다.
현주의 보드라운 입술을 천천히 물고 빨다가 안으로 혀를 살짝 밀어넣었다. 뽀뽀에서 키스로 넘어갔음에도 현주는 가만히 있어주었다. 나는 현주가 긴장하지 않게끔 손을 꼭 잡아주었다. 얌전한 키스가 잔잔하게 이어졌다.
여태껏 여자 한 명 들어와 본 적 없었던 내 홀아비 자취방의 칙칙한 흑역사에, 어쩌면 오늘 현주가 새로운 한 획을 그어줄지도 몰랐다. 지금 분위기로 봐서는 거의 99프로 그렇게 될 것만 같았다.
매일 아무 생각없이 잠들었던 저 침대 위에서 사랑스런 여자친구와 마음껏 몸을 섞는다면?
상상만으로도 아랫도리가 뜨거워진다.
쪽쪽, 쪽쪽쪽.
낯뜨거운 입술 부딪히는 소리가 줄곧 울려퍼진지 10분쯤 되었을까. 혀와 혀가 엉키었고 서로의 타액을 주고받을만큼 키스가 제법 깊어졌다. 이제 슬슬 진도를 나가도 될 것 같았다.
"......"
손을 아래쪽으로 뻗어 현주의 부드러운 허벅지 위에 슬며시 얹어보았다. 헬스장에서 현주가 운동할 때, 나는 매번 현주의 허벅지가 너무도 탐스럽다고 생각했었다. 운동으로 다져진 탄력에 핫팬츠를 입으면 색기가 넘쳐흐를만큼 풍만한 볼륨감까지. 언젠간 그 허벅지를 성이 풀릴 때까지 주물러보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그게 바로 오늘이었다.
"오빠..."
입술이 약간 떨어지자 그 틈새로 현주의 꺼질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성욕을 더욱 부채질한다.
현주의 허벅지는 정말이지 황홀했다. 손 끝에 닿는 탄력부터가 너무도 아찔하다. 운동하는 여자의 매력을 터치 한번으로 느낄 수 있는 부분이었다. 이렇게 허벅지를 더듬고 있으니 왜 이 타이밍에 그게 떠오르는지는 모르겠지만 현주 언니의 생각이 났다. 현아 씨의 노팬티 치마 속....
그러고보니 아까 그녀의 노팬티를 떠올리며 딸딸이를 쳤었지. 언니 생각을 하면서 딸딸이를 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동생과 섹스를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오빠... 오늘은 안되겠어."
"으응?"
그런데 그게 내 김칫국이었다.
"미안해... 미안해... 진짜 오늘은 안되겠어... 오빠. 미안해...."
사실 방금 전까지의 분위기는 누가 보더라도 섹스 타이밍이었다. 굳이 사귀는 사이가 아니더라도 방금 전의 분위기라면 응당 옷을 벗고 침대 위에서 뒹굴기까지 한치의 막힘도 없어야 하는 것이 당연지사였다. 현주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입술을 떼고 나서도 연신 내 눈치를 살폈다.
"아냐, 괜찮아... 네가 마음의 준비가 안 됐으면 할 수 없지 뭐...."
사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내 마음 속은 장난 아니게 허탈한 상태였다. 한껏 불을 지펴놓고 이게 뭐란 말인가.
마음에 없는 대답을 하며 그 순간 속으로 타임 리와인더를 떠올렸다.
"오빠.. 미안해.. 진짜 미안해. 나도 오빠한테는 허락하고 싶은데.. 아직 시간이 좀 더 필요해.. 나 이해해 줄수 있어?"
"현주야, 왜 그래. 미안해 하지 않아도 돼. 나중에 준비 됐을 때 하면 되는건데 뭘."
"흐흑... 미안해... 진짜 미안... 흑흑..."
"혀, 현주야, 너 울어?"
살짝 짜증이 나 있긴 했지만 현주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자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미안하면 미안한거지 울긴 왜 울어?
나는 졸지에 섹스를 하려다말고 우는 여자친구를 달래주는 신세가 되어 한동안 현주를 끌어안고 가만히 있었다. 현주가 울음을 그치고 진정할 때까지 난 등을 두드려주었다.
"고마워, 오빠... 오빤 정말 좋은 사람이야. 많이 서운했지?"
"그, 그냥 조금... 허탈하긴 했는데. 괜찮아. 우리가 그거 하려고 만나는 것도 아니고."
"정말이야...? 정말 그렇게 생각해주는거지?"
"응..."
뭐 엄밀히 말하면 꼭 섹스를 하려고 여자를 만나는 건 아니지만, 여자를 만남에 있어 섹스는 필수다.
여자들은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르겠지만, 남자의 사고는 대개 그렇다. 하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고마워... 다음에 꼭 하자, 오빠."
"응. 알겠어."
난 말없이 현주의 등을 토닥거려줬다. 현주는 내 방에서 앨범이나 장난감 따위를 구경하며 같이 시간을 보내다가 버스 막차 시간이 가까워졌을 때가 되어서야 돌아갔다. 정류장까지 그녀를 바래다주고 자취방으로 돌아온 나는, 시간을 되돌려 자취방 앞에서 현주와 만나기 전으로 돌아가보았다.
그리고 다시 그녀와의 섹스를 시도해보았다. 하지만 마찬가지였다. 방식을 조금 바꿔서 시도해봐도 결과는 같았다. 허락할듯 말듯 하다가 결국은 미안하다고 울음을 터뜨리는 그녀.
나는 결국 쓰디쓴 실패를 몇 번이나 되풀이하고 난 끝에서야 이게 시간을 되돌린다고 해서 쉽게 풀릴 일이 아니라는걸 깨달을 수 있었다. 타임 리와인더의 법칙이라고 말하기에는 좀 어폐가 있었지만, 나는 실패 끝에 이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간을 되돌려도 불가능이 가능으로 바뀌지는 않는다.]
즉, 아무리 시간을 되감고 지랄을 하더라도 안 되는건 안 된다는 뜻이다. 힘으로 범하는 거라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도저히 불가능했다. 현주를 강간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타임 리와인더를 사용하면서 처음으로 능력의 한계에 봉착한 기분을 느꼈다. 아무튼 입맛이 썼다.
한 가지 신경쓰이는건 매번 거절을 하면서 그녀가 눈물을 보였다는 점이었다.
도대체 울긴 왜 우는걸까?
사실 솔직히 말하면, 타임 리와인더의 능력을 활용하기로 마음 먹은 이상 힘으로 그녀를 범하고 나서 시간을 되돌려도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긴 했다. 단순히 현주의 몸을 탐하고 싶은 거라면 그렇게 해도 그만인 것이다.
하지만 그 눈물이 자꾸 내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현주가 단순히 변덕이나 사소한 이유로 나를 거절한 것 같지는 않다는 느낌이 자꾸 나를 괴롭혔다. 결국 나는 현주와의 섹스를 포기하고 홀로 자취방 침대에 몸을 눕혔다.
잠이 오지 않는다.
"에라이, 그냥 힘으로 해버릴걸 그랬나? 어차피 시간을 되감고 나면 싸그리 다 지워질 일인데... 쓸 데 없이 내가 감성적으로 생각한 걸지도..."
성욕이 머리 꼭대기까지 치솟았다가 풀지 못한 채 혼자 삭히려니 쉽게 진정이 되지 않았다. 말똥말똥한 눈으로 그렇게 30분을 누워있었다. 딸딸이라도 쳐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이 시간에 누구지? 현주인가?"
"여보세요."
- 선배.
하지만 전화를 받아보니 현주 목소리는 아니었다. 액정에 뜬 번호도 모르는 번호였다. 선배라고 하는걸 보니 학교 사람인 것 같긴 한데, 목소리가 술에 취한 듯 어딘가 꼬부라져 있어 누군지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누구세요?"
- 저 서연이에요.
순간 나는 문자 그대로 "기겁"했다. 내가 잘못 들었나 싶었다.
"서, 서연이?"
- 지금 뭐해요?
용수철처럼 침대에서 몸을 벌떡 일으킨 나와는 대조적으로, 서연이는 말투가 아주 차분했다.
그런데 그 차분한 말투에는 누가 보더라도 취했구나 싶을 정도로 취기가 끼어있었다.
"이, 이 시간에 웬일이야...?"
문득 나는 내가 왜 서연이의 번호를 알아보지 못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녀는 내게 연락처를 준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단 한번도.
- 선배. 나 지금 대학로에 혼자 있는데 와줄 수 있어요?
"뭐?"
방학 이후로 서연이와는 얼굴조차 마주친 적이 없었다. 연락 같은건 해본 적도 없다. 그렇기에 나는 그녀의 말이 당황스럽기만 했다.
"지금은 너무 늦었지 않나?"
- 뭐... 싫으면 말구요.
"근데 너 취했어?"
- 그냥 조금....
혀가 꼬부라지는 말투를 보니 정상이 아닌 것 같긴 했다. 일단 어딘지를 물어보니 대학가 근처의 어느 술집 앞 벤치에 앉아있다고 했다. 조금 기다리라고 말해놓고는 전화를 끊었다.
옷을 챙겨입기 시작하는데 기분이 참 이상했다.
- 다음 화에 계속 -
글을 올린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소라 독자님들의 댓글과 추천을 보는게 한가지 낙이 되었습니다.
매화 댓글이 하나씩 달릴 때마다 꼼꼼이 챙겨보는 것이 일상의 스트레스도 잊게 해줄만큼 즐겁다고 할까요?
아무튼 독특한 즐거움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 이 소설은 소.라.넷(sora.net) 작가 "상상의신비"가 연재 중인 작품입니다.
무단 불펌을 삼가해 주시길 부탁드리며, 퍼가시더라도 출처와 작가명을 꼭 남겨주십시오.
창작가들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이자 도리입니다.
* 1부 6장
"오빠, 여기~!"
내가 도착했을 때는 학위수여식이 끝나고 졸업생들이 캠퍼스 내에서 학사모 촬영을 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현주가 손을 흔드는 곳으로 다가가니 현주 말고도 두 사람이 더 보였다. 현주의 어머님과 언니였다.
"아, 안녕하십니까, 어머니. 처음 뵙겠습니다. 최성진이라고 합니다."
"그래요. 딸애한테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바쁘신데 딸애 졸업식에도 와주시고 고맙네요."
"아, 아닙니다. 별 말씀을요."
여자친구의 어머니를 만나본 적은 처음이었다. 꼭 현주의 어머니가 아니더라도, 여친의 가족분들을 만나본 경험 자체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여친을 사귀어본 적도 몇 번 없으니까....
그렇기 때문인지 당황해서 말이 더듬더듬 나왔다. 현주의 어머니가 날 덜떨어진 젊은이로 볼까봐 걱정이다. 속으로 시간을 되돌려서 미리 대사 연습을 해올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곧 아차 싶어서 그만두었다.
이 무렵엔 곧잘 이런 식이었다. 시간을 되돌릴 만큼 심각한 일도 아닌데도 무언가 "완벽"을 추구하고 싶은 마음에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이 있으면 과거로 돌아가려는 생각부터 했다. 그 정도로 시간 되감기에 의존하고 있었다.
수명을 담보로 한다고는 했지만 그 수명이란게 평소에 눈으로 보거나 느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더 무감각해지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나 또한 이성으로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에, 시계를 처음 손에 넣었을 때와는 다른 의미에서의 갈등으로 외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반가워요! 현주 언니 현아에요."
현주의 언니를 그 날 처음 봤다. 첫인상 만으로 나는 여러가지 복합적인 느낌을 동시에 받았다.
굳이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뭐랄까... 그녀는 동생과 닮았으면서도 달랐다.
"네, 반갑습니다."
"현주가 남자친구 자랑을 많이 해요. 한번 보고 싶었어요. 반가워요, 호호."
헬스장에서 현주를 처음 봤을 때가 생각난다. 현주와 사귀면서 그녀를 더 많이 알면 알수록 느꼈던 거지만 현주는 가끔 보면 칠칠 맞거나 맹한 구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성격에 어울리지 않게 아주 애교 있는 얼굴을 가졌다. 나는 가끔씩 현주의 그 고양이스런 외모가 성격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그런데 이제보니 그 외모는 언니를 빼다박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매는 생김새가 아주 비슷했다. 고양이 같은 얼굴부터 시작해서 애교 있는 눈매와 단순호치가 어울리는 밝은 미소.
모르긴 몰라도 언니 쪽도 남자 깨나 홀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빠, 나 학사모 어때? 잘 어울려?"
"응. 졸업 축하해. 자, 여기 선물."
나는 준비한 꽃다발과 선물을 건넸다. 학교 앞에서 급하게 구한게 아니라 꽃집에서 신경써서 고른 꽃다발과 백화점에서 고른 여성 향수였다. 오늘 아침에서야 졸업식에 오기로 했는데 당연히 이 선물을 미리 준비했을리는 없고, 덕분에 아침에 타임 리와인더의 파랑 바늘을 두어 바퀴 돌려야 했었다.
"엥? 이게 다 뭐야? 오빠 갑자기 연락받고 왔으면서..."
"미리 준비했지 뭐. 오늘 저녁에라도 주려고."
"와... 난 급하게 연락한거라 기대도 안 했는데... 또 너무 비싼거 사온거 아니야?"
"별 거 아니야."
사실 시간을 부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이상 돈이라는 것은 내게 별 의미가 없었다. 시간은 전능하다. 그 가치는 돈과는 비교할 수 없다. 마음만 먹으면 이 능력을 이용해서 돈을 버는 것은 일도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굳이 눈에 띌 정도로 부자가 되고 싶지는 않다. 그러면 주목을 받게 될 테니까. 그저 내가 원하는 대로, 즐거운 삶을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그걸로 족하다.
"와아~ 선물 뭐야? 나도 봐도 돼?"
"아, 언니 가만히 좀 있어."
"왜, 나도 궁금해애. 빨리 보여줘~"
별 거 아니라고는 했지만 아무렴 내가 가족들 보는 자리에서 별 거 아닌 선물을 가져왔을까. 빈손으로 와도 이해했을 현주의 성격상 이렇게 비싼걸 가져왔다는걸 알면 나중에 또 한 소리 하겠지만 이로써 체면은 세운 셈이다.
"자자, 찍을게요."
현주의 가족사진을 찍어주었다. 중앙에 학사모를 쓴 현주가 섰고 양 옆으로 어머니와 언니가 섰다. 현주와 나란히 서 있는 현주 언니의 모습을 보았다. 생김새가 닮았지만 분위기는 많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질감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나중에 알게 되었다.
"오빠, 이제 어디 갈거야?"
"글쎄."
"같이 밥 먹자."
"가족분들 계시는데 어떻게 그래."
"뭐 어때? 엄마 괜찮지?"
"그렇게 해요. 힘들게 딸애 선물까지 사오셨는데 그렇잖아도 그냥 보내기 미안했어요."
"아, 그, 그럴까요?"
사실 내가 불편해서였기도 했지만 현주는 의외로 나를 가족들에게 소개시키고 싶은 마음이었나보다. 가족들에게 소개시키고 싶을 정도라면 현주가 나를 좋아하긴 좋아하나보다 하는 생각이 들어 차마 거절하기도 힘들었다.
"그럼 나 잠시 학사모 반납하고올게~"
현주가 학사모와 학사복을 반납하러 과사무실에 다녀오는 동안 난 어쩔 수 없이 현주의 어머님과 언니와 함께 있어야 했다. 약간은 불편한 공기가 흘렀다. 어색함을 깨보려는 배려인지 현주 언니가 내게 말을 건다.
"직장인이세요?"
"아, 아뇨. 아직 학생입니다."
"아~ 의외에요. 돈을 잘 버시는 분인가보다 해서 물어본거에요."
"네? 왜요?"
"아까 그 향수, 비싼거잖아요?"
포장 겉표면의 로고를 보고 브랜드를 알아맞춘 것 같았다.
"그리고 입고 계신 옷들도 하나같이 전부 이름 있는 것들이구."
"......"
엄밀히 말하면 이 옷들은 내가 돈주고 산게 아니라 타임 리와인더의 능력을 이용해서 "훔친"것이나 다름 없었다.
타임 리와인더의 사용에 익숙해졌을 무렵, 내 머릿 속에는 늘 의문이 하나 떠나지 않았다. 내가 시간을 되감을 때, 시간축을 이동하는 주체는 나 하나 뿐이다.
그렇다면 조금만 생각해보면 상식적으로 내가 시간여행을 하는 순간 내가 입고 있던 옷이나, 들고 있던 물체나 (이를테면 휴대폰이라던지), 신고 있던 신발 등등은 모두 남겨진 채로 몸만 이동되어야 하는게 아닐까?
과거에는 이미 그 물체들이 있었던 "자리"가 따로 있었을테니 말이다.
하지만 아니었다. 생각해보면 내가 시간 되감기를 할 때마다 과거로 돌아간 나는 현재의 나와 같은 옷, 같은 신발을 착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타임 리와인더가 애초에 상식이란게 통하지 않는 물건이긴 했지만, 여태까지의 정황으로 미루어보면 이 시계도 나름대로 규칙과 합리성에 의해 움직이는 물건이란걸 나는 느끼고 있었다.
최대한 깊이 고민해본 끝에, 나는 결국 이런 결론을 내렸다.
[시간 이동을 하는 순간 내 신체에 닿아있는 물체들은 "함께" 시간을 되돌아간다.]
즉, 입고 있던 옷을 포함해서 내 몸에 닿아있는 것들은 내가 시간을 되감은 과거의 그 순간으로 함께 이동되는 것이다. 이용하고자 마음 먹으면 얼마나 편리한 룰인가? 가령 예를 들어, 갖고 싶은 물건이 있다면 먼저 그 물건에 손을 댄 이후에 시간을 되감으면 된다. 나는 그런 방식으로 내가 지금 입고 있는 모든 명품들을 손에 넣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손만 대면" 되는 것도 아니었다.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서 나는 몇 차례의 실험을 거쳤다. 종이컵을 하나 준비해서 우선 손 끝만 갖다댄채로 시간을 감아봤다. 종이컵은 따라오지 않았다. 이번엔 손에 움켜쥐고 시간을 감아봤다. 그러니 종이컵을 손에 쥔 채로 시간이 되감겼다.
이 점으로 미루어보건대, 이 법칙에도 물체를 시간 이동 시킬 수 있는 일종의 "경계"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아, 음.. 혹시 기분 나쁘셨나요?"
내가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는 모습에 기분이 상했다고 오해한 것인지 현주 언니가 내 눈치를 살폈다. 나는 퍼뜩 잡생각에서 벗어나 손사래를 쳤다.
"아, 아뇨. 아닙니다. 그런데 남자 옷인데도 알아보시나봐요?"
"아, 하하, 제가 남자 옷을 좀 잘 알거든요."
"혹시 의류업 분야에서 일하시는건가요?"
"그런건 아니구요, 그냥 이 남자 저 남자를 다양하게 보다 보니까....?"
무슨 의미인지 묻고 싶었지만 왠지 물었다간 실례가 될 것 같아서 참았다.
그보다는 현주 언니의 옷차림에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현주도 평소에 짧은 치마를 종종 즐겨입곤 하는 편이었지만, 이제보니 자기 언니만큼은 아니었다. 저런 옷을 평소에도 즐겨입는진 몰라도, 현주 언니의 치마 길이는 결코 길다고는 할 수 없는 동생의 치마 길이에 비해서도 심하게 짧았다. 조금만 허리를 숙여도 팬티가 보일 것 같을 정도였다.
코스모스 졸업을 할 때였으니 계절이 딱 미니스커트를 입기 좋은 날씨이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동생의 졸업식날 치고는 너무 야한 옷차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고 있는 것들이나 몸에 차고 있는 악세사리들이 하나 같이 고급이어서 그런지 그렇게 천한 느낌을 주지 않으니 묘한 일이었다.
나야 꼼수가 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나랑 나이 차이도 그다지 나는 것 같지 않은데.... 현주 언니야말로 돈을 잘 버는 직장에라도 다니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는 사이에 현주가 도착했다.
"밥 먹으러 가자~"
"응.. 그래."
졸업식날이다보니 대학로 근처에는 사람들이 그야말로 바글바글해서 식사할 곳 찾기도 힘들었다. 어쩔 수 없이 대학로에서 좀 떨어진 곳에 있는 패밀리 레스토랑에 자리를 잡았다. 현주와 현주 언니의 성격이 활발한 덕분에 자리가 크게 어색하지는 않았지만 어머님이 내게 이따금씩 묻곤 하는 "그래, 공부는 열심히 해요?" 와 같은 질문들은 아무래도 조금 불편할 수 밖에 없었다.
문득 잊고 있었던 지환이 새끼 생각이 난다. 그 새끼만 아니었어도 여기서 당당하게 학과 수석이라고 말할 수 있었을 텐데... 쓰읍. 갑자기 또 미워지네.
"있지, 우리 오빠는 진짜 신기하다? 내가 말 안 한것도 알아서 다 척척해주고, 가끔은 진짜 텔레파시라도 쓰는 것처럼 내가 속으로 생각하기만 한걸 다 해줘. 엄마랑 언니도 봤지? 내가 오늘 아침에 오라고 한건데도 선물까지 준비해서 오는거."
현주는 끝도 없이 내 자랑을 재잘재잘 늘어놓는다. 오늘 처음 뵙는 가족들 앞에서 약간은 무안하게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얼굴이 붉어져 현주에게 눈치를 주었다.
"왜 그래, 부끄럽게."
"그냥 두세요. 현주 쟤 집에서는 더해요. 입만 열면 남친 자랑에... 어휴, 나도 서러워서 빨리 남친 만들어야지."
"현아 씨는 아직 애인 없으세요?"
"킥, 전 그런거 안 키워요."
알고보니 현주의 언니는 나와 나이가 같았다. 현주와 내가 나이 차가 두 살인데, 언니와도 두 살 차이라고 했으니 우리는 동갑인 셈이었다. 그렇다보니 대하기가 여간 불편한게 아니었다. 나이가 적으면 차라리 편하게 대할테고, 나이가 많으면 좀 친해진 다음 누나라고 부르던지 하면 될텐데 현주와 내가 결혼을 한 사이도 아니고보니 호칭을 정하는게 아주 힘들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현아 씨"라고 불렀다.
"언니 그래도 남자들은 많이 달고 다니던데."
"조용히 해, 기집애야. 쪼그만게 뭘 안다고."
"참나.. 누가 보면 이모뻘은 되는 줄 알겠다."
현아 씨가 현주를 쥐어박으려는 시늉을 하다가 실수로 포크를 쳐서 테이블 아래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포크가 내 앞쪽까지 굴러와서 내가 주워주려고 허리를 숙이는 순간 현아 씨도 테이블 아래로 허리를 숙여서 우리는 잠시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현아 씨와 손이 닿을락말락 한 거리에서 아슬아슬하게 멈춰선 순간 내가 더 잽싸게 포크를 줏었다. 나는 조금 당황했지만 현아 씨는 당돌하게도 나와 눈이 마주치자 고양이 같은 눈웃음을 지었다. 자기 동생보다 훨씬 더 짙고, 자기 동생보다 훨씬 더 요염하게 보이는 눈웃음이었다.
"봤지? 우리 오빤 매너도 좋아."
"알았어, 기집애야! 남친 자랑 하도 해서 남친 닳겠다. 그만 좀 해."
현아 씨가 핀잔을 주며 테이블 위로 허리를 일으켰다. 그 순간 나를 놀라운 것을 보았다.
"자, 잘못 본건가?"
테이블 아래로 허리를 숙인 탓에, 본의 아니게 현주 언니의 짧은 치마 속을 보게 되고 말았다. 사실 보통의 경우라면 테이블 밑으로 숙인다고 해서 치마 속이 보이지는 않겠지만, 현아 씨의 경우 치마 길이가 너무도 짧아 방금처럼 몸을 숙였다 다시 일으키는 순간에는 치마 속이 무방비로 노출될 수 밖에 없었다.
아주 짧은 찰나의 순간이지만 그 타이밍에 우연히도 그곳에 시선이 머물렀던 것이다.
"노팬티... 아니겠지?"
0.5 초도 안될 만큼 짧은 순간 잠깐 엿본 현주 언니의 치마 속에는 뭔가 있어야 할 것이 없는 느낌이었다. 살색이 아닌 무언가를 본 것 같기는 했지만 그게 아무리 봐도 팬티로는 보이지 않았다. 순간 맥박이 빠르게 뛰면서 얼굴이 확 붉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오빠, 왜 그래?"
"응? 아, 아냐."
당황한 것이 현주에게도 느껴졌는지 현주가 내 팔을 톡톡 치며 물었다. 나는 혹시라도 현주 언니가 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는건 아닌가 노심초사했다. 좌우지간 그 뒤로는 현주의 언니와 시선을 잘 마주할 수가 없었다.
그 후로는 밥이 입으로 넘어가는지 코로 넘어가는지 모를 만큼 정신없게 식사를 끝마친 것 같다. 식사가 끝나고 현주는 자기 동네로 돌아가 아버님이 퇴근하고나면 가족들끼리 좀 더 시간을 보낼 거라고 했다. 나는 어머님과 현주의 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현주 어머니의 차가 있는 곳까지 가족들을 배웅해주었다.
현주는 오늘 나와 시간을 많이 보내지 못해서 미안하다며, 내일은 단 둘이서 시간을 보내자고 했다.
"오빠, 그럼 저녁에 연락할게~"
"으응. 알았어. 근데 저기 현주야."
"응?"
"저기, 너희 언니 말야."
"우리 언니?"
"아, 아니다. 아무 것도 아냐."
"뭐야~ 뭔데?"
"아냐. 진짜 별거 아니야."
현주에게 말을 할까 하다가 그냥 넘기기로 했다. 구태여 입밖으로 꺼낼 만한 주제가 아니었다. 그러는 사이 현주 어머니가 주차장에서 차를 빼셨고, 나는 현주를 차에 태웠다.
"이따 전화해."
"응~ 알겠어."
현주네 가족이 차를 타고 가버리자, 나는 그 자리에 잠시 서있었다. 시계를 보았다.
적당한 시간이었다.
그냥 넘길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나는 구태여 그 날 다시 한번 시간을 되돌아갔다.
현주네 가족과 같이 있었을 때로 내가 시간 이동을 해버리면, 그 시점에서 여태껏 현주 가족과 함께 있었던 "나"는 지워져버리는 것이 되기에 혼란을 피하고자 졸업식 전으로 되돌아가야만 했다.
오늘 있었던 일을 대본처럼 똑같이 반복해서 다시 되풀이하는 것은 무척 지루한 일이었지만, 나는 현주 언니의 치마 속을 다시 한번 확인해보고 싶은 그 짖궂은 호기심을 도저히 억누르기가 힘들었다. 그게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던 일인지는 솔직히 나 자신도 잘 모르겠지만, 확실히 소득은 있었다.
다시 한번 확인해 본 현아 씨의 치마 속은 확실히 노팬티였다.
*
오랜만에 딸딸이를 쳤다. 여친의 언니를 생각하며 딸딸이를 친다는건 어떤 의미로 배우 부도덕한 일이었지만 오늘 있었던 일을 생각하면 그럴 만하긴 했다. 좆물 묻은 크리넥스를 변기통에 내려버리고 맥주를 한잔 하러 편의점으로 향했다. 왠지 작년 어느 날이 생각이 난다.
분명 그 때도 이렇게 딸딸이를 치고, 맥주를 사러가는 길이었다. 그렇게 나는 옆집 여자와 마주쳤고, 그게 계기가 되어서 타임 리와인더를....
"....꿈인가?"
데자뷰를 겪듯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니 옆집 여자가 복도를 걸어오고 있었다. 이 여자 혹시 자위의 정령이라도 되나? 딸딸이를 치고 나면 한번씩 나타나는?
"......."
그녀의 물건을 훔쳤다는 점이 제 발을 저려 내 태도를 뻣뻣하게 만들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그녀의 무미건조한 표정은 변함이 없었지만, 나는 다시 집으로 들어갈까 하다가 오히려 더 수상하게 보이겠단 생각에 그냥 복도를 걸어 그녀와 스쳐지나갔다.
나와 그녀가 서로 엇갈려 지나가는 순간, 나는 처음으로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다.
"안녕?"
"......."
심장이 멎을 뻔 했다.
"아, 안녕하세요."
반사적으로 존댓말이 튀어나온다. 그러고보니 그녀가 몇살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내게 아주 자연스럽게 말을 놓았다.
"또 보자."
그 한마디 뿐이었다. 그녀는 그 한마디만 남기고 문을 열어 302호로 들어가버렸다. 복도에 혼자 남은 나는 왠지 온 몸에 오한이 드는 오싹한 기분을 느끼고 도망치듯 그 자리를 떴다.
처음 들어본 그녀의 목소리는 얼굴 표정만큼이나 삭막했다.
*
"에이씨... 왜 이렇게 찝찝하지?"
갑자기 변한 옆집 여자의 태도에서 나는 그녀가 뭔가를 읽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오싹한 기분을 느꼈다. 내가 생각해봐야 답도 없는 문제긴 하지만 얼굴을 잠깐 마주한 것만으로 그녀는 내게 크나큰 혼란을 남겼다.
"그, 그냥 잊어버리자. 시계를 돌려달라고 한 것도 아니잖아."
설사 그녀가 만에 하나 내가 절도범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그걸 돌려달라는 말을 하지 않는 이상 지금은 신경을 끄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생각해봐야 답도 없는 문제니까.
하지만 왠지 모를 찝찝함을 해소할 수 없는 그 답답한 기분은 날아가지 않았다. 만약 그녀가 진짜로 알고 있다면 언제 시계를 빼앗기게 될지 몰라. 시계를 빼앗기고 나면 내 삶은 어떻게 될까? 다시 예전의 그 자신감 없고 힘 없는 찌질이로 돌아가게 되겠지....? 그건 상상만 해도 싫다.
"에잇, 씨발...."
덕분에 자취방으로 들어가고 싶은 기분이 싹 사라졌다. 맥주를 사긴 샀지만 내 방으로 돌아가고 싶진 않았다. 옆집 여자를 다시 마주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별 수 없이 오늘은 바람이나 쐴까 해서 근처 강변도로로 향했다. 시원하게 트인 도로를 따라 걸으며 탁트인 강변을 구경하고 있자니 기분이 그래도 좀 나아지는 것 같다.
그 때였다.
"계속 달려!!"
위잉위잉위잉! 한 무리의 오토바이 떼가 미친듯이 폭주하며 강변도로를 달려 지나갔다. 선두의 오토바이 몇 대가 빠른 속도로 질주하며 도로를 쏜살같이 궤뚫고 지나가자 그 뒤로 몇 대의 오토바이들이 천천히 그 뒤를 따랐다. 물론 선두에 비해서 천천히 따라갔다는 것 뿐이지, 일반적으로 보면 도저히 안전하다고는 볼 수 없는 속도였다.
폭주족들이 분명했다.
"아직도 저런 낭만을 찾는 애들이 있네. 저러다 골로가지, 쯧쯧."
속으로 혀를 차고 있는데 그 중 유독 무식하게 바깥 쪽으로 붙어 운전하던 오토바이가 나를 박을 듯이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불과 몇 센티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비껴나갔지만, 대신에 내가 들고 있던 비닐 봉지가 찢기면서 안에 들어있던 맥주캔들이 강변 도로 위로 볼품없이 날아가고 말았다.
도로 바닥을 아무렇게나 굴러가는 내 아까운 맥주캔들...
"야이 새끼야! 그따위로 처몰고 다닐거면 그냥 나가 뒤져! 알았어!?"
열이 받쳐 소리를 버럭 질렀지만 듣기나 했을까. 그런데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비켜!"
"엇?"
뒤에서 따라오던 가장 후미의 오토바이 중 하나가 도로변에 서있는 나를 피하려다가 급하게 핸들을 꺾었다. 아슬아슬하게 비껴지나간 것은 좋았는데, 급하게 방향을 트느라 방금 전에 도로 바닥에 떨어져 이리 튀고 저리 튀던 맥주캔 하나가 재수없게도 오토바이의 앞바퀴 휠에 딱 걸려버린 것이다.
"어어엇?"
다행히 그 오토바이는 후미에서 따라오던 중이어서 속도가 그렇게 높진 않았지만, 앞바퀴가 걸린 탓에 위태롭게 비틀거리던 오토바이는 결국 삐긋하더니 달리던 와중에 옆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콰당 하는 소리와 함께 오토바이를 몰던 운전자가 도로 바닥에 튕겨져 맥없이 나뒹굴었다. 나는 기겁을 하며 달려갔다.
"이봐요, 괜찮아요?"
"......."
씨발, 설마 죽은건 아니겠지? 자세히 보니 몸이 움찔대는걸로 봐서 의식은 있는 것 같다.
"이봐요, 정신차려봐요. 그러게 오토바이 같은건 조심해서 타야지... 119 부를테니까 좀만 참아요."
"....놔."
순간 죽은 줄 알았던 폭주족 운전자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젠장... 재수 드럽게 없네."
"저기, 이봐요."
걱정해준 사람에게 이게 무슨 무례란 말인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가 신경질적으로 헬멧을 벗어던졌다.
바닥에 둔탁하게 나뒹구는 헬멧과 폭포수처럼 쏟아져내리는 길고 긴 머리카락.
"여... 여자잖아?"
놀랍게도 폭주족은 여자였다. 헬멧 안으로 들리던 목소리를 들었을 때 도저히 남자 목소리로 들리진 않았지만, 설마 진짜 여자일 줄은 몰랐다. 그것도 아주 젊은, 아니 어떻게보면 어리다고 할 만큼 앳된 외모의 여자였다.
"괘, 괜찮아요?"
하도 의외였기 때문인지 따지려던 내 말투가 갑자기 소심하게 바뀌었다. 그녀.... 라고 부르기엔 뭔가 애매한 그 여성 폭주족은 나를 흘끗 한번 보더니 말도 없이 일어나 쓰러진 오토바이를 일으켜세웠다.
"저기요."
"꺼져."
다른 말도 아닌 욕설이 돌아온다. 아니 이게 도대체 무슨....?
"야! 너 거기 잠깐 서 봐."
나도 참다못해 고함을 버럭 질렀다. 그러자... 오토바이에 탄 여자가 내게 보란 듯이 가운데 손가락을 쳐든다.
뻐... 뻑큐?
"이 년이 미쳤나!?"
하지만 그 순간 바르르릉 소리를 내며 저만치 달려가버리는 오토바이.
그 뒤를 이어 강변도로에 부는 바람이 얼빵한 얼굴로 서 있는 나를 스치고 지나간다.
"야 이 년아!! 너 내 눈에 띄면 진짜 단단히 혼날 줄 알아!!"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공허한 외침이 강변에 울렸다.
*
절대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지만, 하도 스펙터클하고 어이가 없었기 때문인지 아까의 그 찝찝한 기분이 다소 날아간 것 같다. 똥 밟은 셈 치자며 애써 잊어버리고 자취방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어? 현주야."
"오빠! 어디갔다 이제와?"
현주가 자취방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현주에게 자취방 위치를 대충 말해준 적은 있지만 아직 데려온 적은 없었기에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그녀를 보고 나는 무척 놀랐다.
"오빤 잠깐 바람 쐬고왔지. 넌 왜 여기있어? 가족들이랑 시간 보내기로 했잖아."
"아빠 엄마랑 같이 있다가 저녁 먹고 왔어. 언니는 약속있다고 가버렸고. 나도 그냥 잠깐이라도 오빠 얼굴 보려고 온거지 뭐."
"아아.. 그랬어?"
"치. 내가 왔는데 안 반가운가보네?"
"무슨 말이야. 완전 반갑지. 일단 들어갈래?"
자연스럽게 말하긴 했지만 사실 속으로는 과연 현주가 따라들어올까 궁금했다. 아무도 없는 밀폐된 공간에 현주와 단 둘이 있어보는건 처음이었기 때문에. 하지만 의외로 현주는 별 거부감 없이 자취방으로 따라들어왔다.
"여기가 오빠 방이구나."
제길. 하다못해 방바닥에 꼬슬꼬슬한 털들이라도 좀 치워둘걸. 이렇게 갑작스럽게 현주를 내 방에 들이게 될 줄은 몰랐다. 나는 지저분한 방이 창피해 죽겠는데 현주는 뭐가 그리 신기한지 이곳 저곳을 둘러보느라 바빴다. 뭐 대접할게 없나 냉장고를 뒤지고 있는데 현주가 갑자기 생각난 듯 날 혼내기 시작한다.
"아 참, 그리고! 다음부터 그렇게 비싼 선물 하지마. 난 그렇게 비싼 건줄 몰랐단 말야."
"알았어. 가족들 앞에서 잘 보이려고 그랬지."
"오빠, 나 말고 여자 사귀어본 적 몇 번 없지?"
"으응? 그건 왜?"
"여자는 꼭 비싼걸 준다고 좋게 보는게 아냐. 오빠는 평소 그대로도 충분히 멋있는데 굳이 항상 과하게 뭔가를 해주려고 하더라. 연애초보들이 잘하는 거거든, 그거."
"......."
정곡을 찔려 할말이 없었다. 우물쭈물하며 침대에 걸어앉아있는데 현주가 옆에 앉으며 내 허리를 껴안았다.
"그러니까 다음부턴 그러지마, 알겠지?"
"으응."
"그래도 그 마음 씀씀이는 너무 감동적이더라. 사실 그래서 갑자기 오빠가 보고 싶어졌어."
이렇게 침대에 나란히 앉아있는데 현주가 날 껴안기까지 하니 흥분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여기는 실내이지 않은가. 아무도 없는 조용한 방 안...
"현주야, 우리...."
"응? 왜?"
문득 현주와의 안 좋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모텔에서 현주를 덮치려다 뺨맞고 퇴짜맞은.... 물론 현주는 그 일을 기억도 못하고 있겠지만 나한텐 그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술에 취한 와중에서도 자기 몸을 보호했던 것을 보면 현주는 그렇게 함부로 몸을 허락하는 여자는 아닌 것 같았다. 사실 그래서 지금도 뭔가 조심스럽다.
하지만 그 때는 그 때고, 지금은 지금이다. 어느덧 현주와 사귄지도 시간이 제법 되었다. 게다가 현주도 나를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때는 망쳤지만, 지금이라면 이야기가 다를 것이다.
"웁.."
가타부타 말로 표현하는게 더 힘들 것 같아서 일단 에라 모르겠다 하며 입술을 덮쳤다. 현주의 도톰하고 앙증맞은 입술에 내 입술이 포개어졌다. 입술 끝에 닿는 몰캉한 느낌이 무척 아찔했다.
"......"
현주는 별다른 거부반응이 없었다. 나는 비로소 "됐다!" 싶어 속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역시 그 때와 지금은 다르다. 지금은 현주도 나를 좋아하고 있는 것이다.
현주의 보드라운 입술을 천천히 물고 빨다가 안으로 혀를 살짝 밀어넣었다. 뽀뽀에서 키스로 넘어갔음에도 현주는 가만히 있어주었다. 나는 현주가 긴장하지 않게끔 손을 꼭 잡아주었다. 얌전한 키스가 잔잔하게 이어졌다.
여태껏 여자 한 명 들어와 본 적 없었던 내 홀아비 자취방의 칙칙한 흑역사에, 어쩌면 오늘 현주가 새로운 한 획을 그어줄지도 몰랐다. 지금 분위기로 봐서는 거의 99프로 그렇게 될 것만 같았다.
매일 아무 생각없이 잠들었던 저 침대 위에서 사랑스런 여자친구와 마음껏 몸을 섞는다면?
상상만으로도 아랫도리가 뜨거워진다.
쪽쪽, 쪽쪽쪽.
낯뜨거운 입술 부딪히는 소리가 줄곧 울려퍼진지 10분쯤 되었을까. 혀와 혀가 엉키었고 서로의 타액을 주고받을만큼 키스가 제법 깊어졌다. 이제 슬슬 진도를 나가도 될 것 같았다.
"......"
손을 아래쪽으로 뻗어 현주의 부드러운 허벅지 위에 슬며시 얹어보았다. 헬스장에서 현주가 운동할 때, 나는 매번 현주의 허벅지가 너무도 탐스럽다고 생각했었다. 운동으로 다져진 탄력에 핫팬츠를 입으면 색기가 넘쳐흐를만큼 풍만한 볼륨감까지. 언젠간 그 허벅지를 성이 풀릴 때까지 주물러보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그게 바로 오늘이었다.
"오빠..."
입술이 약간 떨어지자 그 틈새로 현주의 꺼질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성욕을 더욱 부채질한다.
현주의 허벅지는 정말이지 황홀했다. 손 끝에 닿는 탄력부터가 너무도 아찔하다. 운동하는 여자의 매력을 터치 한번으로 느낄 수 있는 부분이었다. 이렇게 허벅지를 더듬고 있으니 왜 이 타이밍에 그게 떠오르는지는 모르겠지만 현주 언니의 생각이 났다. 현아 씨의 노팬티 치마 속....
그러고보니 아까 그녀의 노팬티를 떠올리며 딸딸이를 쳤었지. 언니 생각을 하면서 딸딸이를 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동생과 섹스를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오빠... 오늘은 안되겠어."
"으응?"
그런데 그게 내 김칫국이었다.
"미안해... 미안해... 진짜 오늘은 안되겠어... 오빠. 미안해...."
사실 방금 전까지의 분위기는 누가 보더라도 섹스 타이밍이었다. 굳이 사귀는 사이가 아니더라도 방금 전의 분위기라면 응당 옷을 벗고 침대 위에서 뒹굴기까지 한치의 막힘도 없어야 하는 것이 당연지사였다. 현주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입술을 떼고 나서도 연신 내 눈치를 살폈다.
"아냐, 괜찮아... 네가 마음의 준비가 안 됐으면 할 수 없지 뭐...."
사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내 마음 속은 장난 아니게 허탈한 상태였다. 한껏 불을 지펴놓고 이게 뭐란 말인가.
마음에 없는 대답을 하며 그 순간 속으로 타임 리와인더를 떠올렸다.
"오빠.. 미안해.. 진짜 미안해. 나도 오빠한테는 허락하고 싶은데.. 아직 시간이 좀 더 필요해.. 나 이해해 줄수 있어?"
"현주야, 왜 그래. 미안해 하지 않아도 돼. 나중에 준비 됐을 때 하면 되는건데 뭘."
"흐흑... 미안해... 진짜 미안... 흑흑..."
"혀, 현주야, 너 울어?"
살짝 짜증이 나 있긴 했지만 현주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자 나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미안하면 미안한거지 울긴 왜 울어?
나는 졸지에 섹스를 하려다말고 우는 여자친구를 달래주는 신세가 되어 한동안 현주를 끌어안고 가만히 있었다. 현주가 울음을 그치고 진정할 때까지 난 등을 두드려주었다.
"고마워, 오빠... 오빤 정말 좋은 사람이야. 많이 서운했지?"
"그, 그냥 조금... 허탈하긴 했는데. 괜찮아. 우리가 그거 하려고 만나는 것도 아니고."
"정말이야...? 정말 그렇게 생각해주는거지?"
"응..."
뭐 엄밀히 말하면 꼭 섹스를 하려고 여자를 만나는 건 아니지만, 여자를 만남에 있어 섹스는 필수다.
여자들은 이해하지 못할지도 모르겠지만, 남자의 사고는 대개 그렇다. 하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고마워... 다음에 꼭 하자, 오빠."
"응. 알겠어."
난 말없이 현주의 등을 토닥거려줬다. 현주는 내 방에서 앨범이나 장난감 따위를 구경하며 같이 시간을 보내다가 버스 막차 시간이 가까워졌을 때가 되어서야 돌아갔다. 정류장까지 그녀를 바래다주고 자취방으로 돌아온 나는, 시간을 되돌려 자취방 앞에서 현주와 만나기 전으로 돌아가보았다.
그리고 다시 그녀와의 섹스를 시도해보았다. 하지만 마찬가지였다. 방식을 조금 바꿔서 시도해봐도 결과는 같았다. 허락할듯 말듯 하다가 결국은 미안하다고 울음을 터뜨리는 그녀.
나는 결국 쓰디쓴 실패를 몇 번이나 되풀이하고 난 끝에서야 이게 시간을 되돌린다고 해서 쉽게 풀릴 일이 아니라는걸 깨달을 수 있었다. 타임 리와인더의 법칙이라고 말하기에는 좀 어폐가 있었지만, 나는 실패 끝에 이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간을 되돌려도 불가능이 가능으로 바뀌지는 않는다.]
즉, 아무리 시간을 되감고 지랄을 하더라도 안 되는건 안 된다는 뜻이다. 힘으로 범하는 거라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도저히 불가능했다. 현주를 강간하고 싶지는 않았기에 타임 리와인더를 사용하면서 처음으로 능력의 한계에 봉착한 기분을 느꼈다. 아무튼 입맛이 썼다.
한 가지 신경쓰이는건 매번 거절을 하면서 그녀가 눈물을 보였다는 점이었다.
도대체 울긴 왜 우는걸까?
사실 솔직히 말하면, 타임 리와인더의 능력을 활용하기로 마음 먹은 이상 힘으로 그녀를 범하고 나서 시간을 되돌려도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긴 했다. 단순히 현주의 몸을 탐하고 싶은 거라면 그렇게 해도 그만인 것이다.
하지만 그 눈물이 자꾸 내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현주가 단순히 변덕이나 사소한 이유로 나를 거절한 것 같지는 않다는 느낌이 자꾸 나를 괴롭혔다. 결국 나는 현주와의 섹스를 포기하고 홀로 자취방 침대에 몸을 눕혔다.
잠이 오지 않는다.
"에라이, 그냥 힘으로 해버릴걸 그랬나? 어차피 시간을 되감고 나면 싸그리 다 지워질 일인데... 쓸 데 없이 내가 감성적으로 생각한 걸지도..."
성욕이 머리 꼭대기까지 치솟았다가 풀지 못한 채 혼자 삭히려니 쉽게 진정이 되지 않았다. 말똥말똥한 눈으로 그렇게 30분을 누워있었다. 딸딸이라도 쳐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이 시간에 누구지? 현주인가?"
"여보세요."
- 선배.
하지만 전화를 받아보니 현주 목소리는 아니었다. 액정에 뜬 번호도 모르는 번호였다. 선배라고 하는걸 보니 학교 사람인 것 같긴 한데, 목소리가 술에 취한 듯 어딘가 꼬부라져 있어 누군지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누구세요?"
- 저 서연이에요.
순간 나는 문자 그대로 "기겁"했다. 내가 잘못 들었나 싶었다.
"서, 서연이?"
- 지금 뭐해요?
용수철처럼 침대에서 몸을 벌떡 일으킨 나와는 대조적으로, 서연이는 말투가 아주 차분했다.
그런데 그 차분한 말투에는 누가 보더라도 취했구나 싶을 정도로 취기가 끼어있었다.
"이, 이 시간에 웬일이야...?"
문득 나는 내가 왜 서연이의 번호를 알아보지 못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녀는 내게 연락처를 준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단 한번도.
- 선배. 나 지금 대학로에 혼자 있는데 와줄 수 있어요?
"뭐?"
방학 이후로 서연이와는 얼굴조차 마주친 적이 없었다. 연락 같은건 해본 적도 없다. 그렇기에 나는 그녀의 말이 당황스럽기만 했다.
"지금은 너무 늦었지 않나?"
- 뭐... 싫으면 말구요.
"근데 너 취했어?"
- 그냥 조금....
혀가 꼬부라지는 말투를 보니 정상이 아닌 것 같긴 했다. 일단 어딘지를 물어보니 대학가 근처의 어느 술집 앞 벤치에 앉아있다고 했다. 조금 기다리라고 말해놓고는 전화를 끊었다.
옷을 챙겨입기 시작하는데 기분이 참 이상했다.
- 다음 화에 계속 -
글을 올린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소라 독자님들의 댓글과 추천을 보는게 한가지 낙이 되었습니다.
매화 댓글이 하나씩 달릴 때마다 꼼꼼이 챙겨보는 것이 일상의 스트레스도 잊게 해줄만큼 즐겁다고 할까요?
아무튼 독특한 즐거움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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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 2016-08-1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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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 | 황진이-19금 성인놀이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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