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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 리와인더 - 1부22장 ← 고화질 다운로드    토렌트로 검색하기
16-08-24 23:31 887회 0건
* 타임 리와인더 (Time Rewinder)
- 이 소설은 소.라.넷(sora.net) 작가 "상상의신비"가 연재 중인 작품입니다.
무단 불펌을 삼가해 주시길 부탁드리며, 퍼가시더라도 출처와 작가명을 꼭 남겨주십시오.
창작가들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이자 도리입니다.


* 1부 22장


302호에 들어와 본 경험은 이로써 두 번째다. 처음엔 무단 침입이었지만 이번에는 주인의 허락을 구한 방문이라는 점이 달랐다. 물론 그녀는 "좋아" 라거나 "들어와" 등의 뚜렷한 의사 표현을 해주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내가 그녀와 함께 대문을 넘는 것을 제지하지 않았다. 나는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이상하게 방 안의 분위기가 많이 바뀌어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더욱이 이상한 점은 내가 처음에 이 방에 들어왔을 때의 모습이 어땠는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질 않는다는 것이었다. 물론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 기억이 희석 되었을지도 모르는 것이긴 했지만 덕분에 어디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정확하게 꼬집어 말할 수가 없었다.

방문객이 있음에도 그녀는 태도의 변화가 전혀 없었다. 아니, 사실 내가 그녀의 평소 모습을 모르기에 변화가 있다 없다를 이야기 할 순 없지만 내게는 그렇게 보였다. 그녀는 나를 조금도 의식하지 않고 자유롭게 자신의 공간을 유영하듯 떠돌아 다녔고, 심지어 그 움직임에는 어떠한 목적 같은 것도 없어 보였다.

책상 위를 한번 보았다가, 의미 없이 돌아서서 책장을 한편 살펴보고, 책을 뽑거나 하는 등의 행위도 없이 다시 돌아서서 선반 한 구석을 빤히 응시하다가, 급기야 또다시 의미 없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단지 그러한 행위들의 반복이었다. 마치 유령이 여기저기를 배회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못이라도 박은 듯 나는 그 자리에 서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저, 저기...."

용기를 쥐어짜 내어본 목소리는 뜻밖에도 그녀의 움직임을 멈추어 세웠다. 그녀는 배회하던 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지만 역시나 먼저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그 모습에서 나는 어떻게든 내가 먼저 대화를 꺼내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도대체 무슨 말을 한단 말인가...?

"말씀드릴게 있어요."
"해 봐."

다행히도 그녀와 의사소통이 되고는 있었다. 나는 무심결에 가슴팍의 상의 안주머니 부분을 더듬었다. 타임 리와인더는 이미 그 기능을 멈춘지 오래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그것을 언제나 몸에 지니고 다녔다.

물론 이따금씩 시계가 자가 회복을 했는지 살펴보기 위함이기도 했지만, 그것을 내 몸에서 떨어뜨려서는 안 된다는 강박이 나를 그렇게 하도록 만들었다. 그렇기에 그 시계의 본래 주인을 만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그 물건은 그 자리에 얌전히 잠들어 있었다.

뭐라 구체적으로 표현할 순 없지만 이 방 안에 들어온 순간부터 줄곧 나는 어쩐지 상식적인 논리나 인과의 과정으로부터 내가 조금씩 벗어나 있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녀가 이 모든 상황을 알고 있다는 느낌을 진즉부터 버릴 수가 없었고, 이 공간에 발을 들이는 순간 그것이 확신으로 변했다.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를 내게 묻는다면 나는 그것을 설명할 수 없지만, 심지어 그녀가 지금 이 순간 내 품 속에 타임 리와인더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까지도 궤뚫어 보고 있다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어쩌면 나는 이전부터 그녀에게로 찾아오면 내가 구태여 에둘러 말하지 않아도 그녀가 무언가 답을 내려줄 거라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정보를 주는 것이든, 아니면 나를 응징하는 것이든 간에 그녀 스스로 무언가를 지시할거라 내심 여겨왔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런건 아니었나보다. 나는 내 스스로 그녀에게서 뭔가를 얻어내야 한다는 것을 알았고, 따라서 조금의 꾸밈도 없이 솔직하게 대화를 이끌어 가기로 했다.

"이것, 알고 계시죠?"

나는 안주머니에서 고장 난 타임 리와인더를 꺼내들었다. 은백색의 초시계를 보는 순간에도 그녀의 표정엔 전혀 놀라거나 하는 미동조차 없었기에 나는 나의 추측에 더더욱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난 당신이 이걸 알고 있었을거라 생각하지만.... 사실 내가 이것을 훔쳤어요. 당신 집에 몰래 들어와 우연히 이걸 발견했고 이 시계의 능력을 알게 되었죠. 이제와서 용서를 구하기엔 너무 늦었지만, 이런 믿지 못할 물건을 손에 넣고 나니까 도저히 당신을 다시 찾아올 수가 없었어요. 용서해 달라는 말을 하러 온 건 아니지만 그래도 우선 사과를 해야겠어요.... 미안해요."

그녀는 내 말을 듣는둥 마는둥하며 그리 넓지 않은 원룸의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조촐하게 마련된 책상 앞의 의자에 걸터앉았다. 간혹 한번씩 벽을 뚫고 들려오곤 했던 뭔가가 타들어가는 소리나, 미세하게 울리던 치직거리는 소음 따위의 근원지를 도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책상 위엔 그 어떤 연구나 실험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이 방에서 무얼 할 수 있는 건지 궁금할 정도로 방 안은 단촐했고, 심지어 황량하기까지 했다.

"흠, 그래서?"
"네?"

이건 대체 무슨 소리인가?

"찾아올 수가 없었다면서 이제와서 구태여 찾아오는 이유가 뭐지? 그게 고장났기 때문인가?"
"그, 그게..."

순간 말문이 턱 하고 막혔지만 그 와중에도 역시나 그녀가 시계의 고장까지도 궤뚫어 보고 있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급기야 나는 그녀가 외계인 혹은 인간이 아닌 존재는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지만 현실과 동떨어진 그 302호라는 공간이 나로 하여금 그 추측을 비교적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드는 것 같았다.

그 어떤 비상식, 비논리적인 이야기도 그 공간에서라면 통용될 것만 같은 기분이랄까.

"나, 나도 잘 모르겠어요. 당신이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지만 시계가 고장난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계를 고쳐달라고 부탁하러 온 건 아니고.... 솔직히 돌려드려야겠단 생각을 했던 것도 아닌데 왜 당신을 찾아오고 싶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요. 그저 당신을 만나야 뭔가가 풀릴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을 뿐이에요."

그녀의 그 건조하고 메마른 두 눈이 나를 직시했다. 눈과 눈이 마주치자 나는 소름이 끼칠 만큼 등골이 오싹하게 울려오는 그 이상한 느낌에 또다시 전율해야 했다. 솜털까지 섬짓하게 일어서는 이 기분은 대체 뭐란 말인가?

이것은 두려움이 아니다. 게다가 놀라움도 아니다. 그저 감각의 반응일 따름이다. 세포 하나하나가 이 여자의 존재를 받아들임에 있어 격렬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이게 뭐지? 라고 차마 물을 수도 없을 만큼 내가 너무 무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멍청하군."
"뭐라구요?"
"너는 너무 멍청해. 하긴 그래서 재미있지."

욕인지 칭찬인지 모를 소리를 내뱉는 그녀. 내가 뭐라고 답해야 하나를 고민하고 있는데 그녀가 느닷없이 키득거리며 웃음을 터뜨린다. 그녀가 그렇게 웃는 모습을 보는건 당연히 처음 있는 일이긴 했지만, 뜻밖이라기보단 너무도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킥킥. 그래, 넌 그렇게 멍청해야만 해. 넌 결코 똑똑해서는 안 되거든. 만약 그랬다면 그 시계를 너에게 주지 않았을 거야."

수수께끼 같은 그녀의 말을 해석하고픈 마음은 없었다. 다만 내 귀는 듣고 싶은 부분만 듣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마지막 말을 도저히 흘려들을 수 없었다.

"그게 무슨 의미에요? 당신이 나에게 시계를 준 거라구요?"
"네가 훔친게 아니라, 내가 네 손에 쥐어 준 거야. 예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테지."
"무슨 말이냐구요, 그게?"
"말 그대로 네가 그것을 줍도록 나는 유혹만 했을 뿐이란 거지. 너는 내 생각과 한 치도 다를 바가 없이 그것을 취했고, 또 그것을 사용해 왔어. 네 나름의 방식으로 말이지."
"당신이 내가 그걸 훔치도록 유도했다는 의미인가요?"
"그래."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이지만 이 방의 분위기 자체가 나의 감각을 현실로부터 동떨어뜨려놓고 있었기에 나는 구태여 그 사실을 의심하는데에 시간을 쓰지는 않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곧장 이유를 물었다.

"도대체 왜죠?"
"말했잖아. 네가 멍청하기 때문이라고."
"그러니까 그게 무슨 의미냐구요."
"쓸 데 없이 그 능력을 이용해서 세상을 바꾸겠다느니, 위대해지겠다느니 하는 허황된 꿈을 꾸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란 의미지. 너무 큰 꿈을 가졌거나, 지나치게 머리가 좋거나, 욕심이 과한 인간이 이 능력을 갖게 되면 내가 상당히 피곤해 지거든. 다행히 너는 여기에 아무런 해당사항이 없어. 너는 너무나도 무능하고, 소심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니까. 내 말 알아듣겠어?"
"아, 아니요."

그녀와 그렇게 긴 대화를 나누어 본 적은 없었지만 이렇게 소통을 하고 있음에도 그녀는 여전히 내게 수수께끼의 존재였다. 도대체 그녀가 하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마치 동화 속의 점성술사와 이야기를 하는 기분이었다. 말의 문맥을 알 수는 있었지만 그 뜻을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너는 부에 대한 욕심이 많은 것도 아니고, 명성을 남겨보겠다는 야망이 있는 것도 아니야. 신기한 일이지. 아마 조금만 더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조금이라도 더 많은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애썼을 텐데. 네가 그 능력을 얻고 나서 해왔던 일들이 뭔지 스스로 한번 생각해 볼래?"

물론 나는 이 시계의 능력을 그다지 폭넓게 이용해오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그녀의 말마따나 내게 그러한 의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부에 대한 욕망이 그렇게 크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부"라는 것 그 자체에 집착하지 않았다.

만약 내가 부귀영화를 누리는 삶을 갈망하는 인간이었다면 나는 이 시계를 손에 넣는 즉시 아마 돈을 벌기 위해 이 능력을 활용했을 것이다. 복권 한 장으로도 그것을 얼마든지 이룰 수 있으니 그 얼마나 손 쉬운 일인가?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내게 있어 "부"라는 것은 살아감에 있어 원하는 것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일 따름이다. 그것이 충족된다면 구태여 그 이상의 돈은 필요치 않다. 돈 그 자체가 삶의 목적인 사람도 있을테지만 내게는 그렇지 않다. 오히려 막대한 부를 이루었을 때 사람들로부터 주목을 받게 되는 것이 싫었다.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루고, 갖고 싶은 것을 가질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그 이상의 전능함을 지니게 된다면 오히려 내 삶이 지루하게 느껴질 것만 같았다. 그녀의 말처럼 내 그릇은 고작해야 그 정도였다.

"재미있게도 너는 그 능력을 고작해야 "여자"를 취하는 일에 활용하더군. 하긴 뭐 여색에 대한 욕망이라는 것 또한 사내의 삶을 움직이는 중요한 욕망일 테지. 하지만 그렇다고 보기에도 너는 너무 단조로웠어. 여자를 탐하고자 하는 거라면 얼마든지 더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야."

나는 그녀의 말을 끊지 않았다. 자칫 그녀의 말을 끊었다가 더이상의 설명을 듣지 못하게 될까 두려웠다.

"너는 그저 네 삶의 테두리 안에서 너라는 인간을 조금 더 윤택하게 만들어주는 정도로 그 능력을 활용해왔을 뿐이야. 정말 다행한 일이지. 네가 굳이 뭔가를 바꾸겠다고 설치고 드는 부류의 인간이 아니니까.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넌 이 시계를 갖게 되는 일조차도 없었을 거야."
"잠깐만요."

하지만 말을 끊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이 대목에서 나는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내가 어떤 인간인지를 미리 알고 있었다는 건가요? 말이 안 되잖아요. 나는 당신과 제대로 대화조차 해본 적이 없었는데...."
"왜 말이 안 되지?"

그 순간 그녀는 섬짓하게 웃었다. 그녀의 시선은 이제 내 얼굴을 떠나, 여전히 내 손에 애매하게 쥐어져 있는 은백색의 초시계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무리 멍청한 나라고 해도 그 순간 무언가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최성진. 나는 너를 잘 알아. 어쩌면 너보다도 더..."

그녀의 입에서 내 이름이 나왔음에도 나는 놀라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놀랐다. 하지만 그 놀람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이 공간, 이 분위기, 그녀의 눈빛이 막고 있었다.

"그렇지만 네가 살아가는 과정을 지켜보는건 매번 너무도 재미있는 일이지. 나는 그걸 지켜봐야만 하고... 그래서 내가 여기 있는 거니까."
"다, 당신은 누구죠?"

나는 처음부터 이 질문을 던졌어야 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녀가 내게 이 시계를 갖도록 만든 이유가 무엇인지, 또한 그로 인해 그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등의 의문은 이 질문을 해결하지 않고는 이야기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단지 웃을 뿐이었다.

그 한줄기 웃음만으로 그녀는 딱 잘라서 그 이상의 의문을 제시하는 것을 단호하게 거부했다. 이곳에 있는 한은 그녀의 뜻을 거스를 수 없다는걸 본능적으로 나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나는 알아야만 했다...

"너에게 다시 한번 그 능력을 주지."

그녀는 대답 대신 다른 이야기를 했다. 질문에 대한 대답만큼이나 유혹적인 이야기였기에 차마 반박하고 들 수도 없었다. 그저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어떻게 활용하든 나는 간섭하지 않겠어. 다만 대가가 따라아겠지."
"대가라면... 수명 말인가요?"
"수명?"

그녀는 다시 키득거리며 웃는다. 아무 것도 모르고 멍하니 서 있을 수 밖에 없었지만, 바보가 된 기분조차도 들지 않았다. 오히려 나의 무지를 인정하는 것이 이 상황에서의 최선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딴게 아니야. 수명이란건 아주 "기본적"인 것일 뿐이지. 내가 말하는 대가는 조건이다."
"조건이요?"
"그래. 그 능력을 다시 갖게 되는 조건으로 내가 말하는 것 하나를 이루어 줘야겠어."
"뭔데요?"

시간을 되돌리는 기계를 만약 그녀가 마음대로 수리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면, 그녀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간에 굳이 나를 거치지 않아도 뭐든지 이룰 수 있을 텐데. 왜 내게 그런 조건을 거는 걸까?

"그 능력을 갖음으로 인해 너는 남들보다 더 많은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되겠지. 그 어떤 선택을 하든 네 자유야. 하지만 단 한 가지, 네가 반드시 겪어야만 하는 선택의 순간이 너를 찾아오게 될 거야. 아마 너에게 있어선 더없이 중요한 선택일 테지. 그 순간이 왔을 때, 내가 원하는 대로 선택을 해주어야 해. 그렇게 약속할 수 있겠어?"
"선택....?"

그녀는 대체 무얼 알고 있는 걸까. 어쩌면 그녀는 정말 내 짐작대로 미래에서 시간을 되돌아 온 사람인 걸까? 그녀가 나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나는 그녀가 누군지 들어야만 했다. 하지만 그녀는 내게 그 질문의 기회를 주지 않았다. 단지 내게 물을 따름이다.

"약속할 수 있겠어?"
"조, 좋아요. 약속 할게요."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르고 나는 그렇게 무거운 약속을 한다. 시계의 능력을 되찾는 것은 내가 바라마지 않았던 일이고, 또한 그녀가 요구하는 그 선택의 의미를 나는 이 때 알지 못 했기에.

"좋아."

그녀는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녀가 일어나고 나서야, 나는 여태껏 내가 서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자각할 수 있었다. 다시 한번 좁은 방 안을 가로질러 움직인 그녀가 그 방 안에서 가장 큰 물체인 옷장 앞에서 멈추었다. 힘주어 양쪽의 문을 열어 젖히는 그녀.

"마, 말도 안 돼...."

보려고 해서 본 것이 아니었다. 그저 자연스럽게 본 것 뿐이다. 하지만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허물어지듯 주저앉고 말았다. 그곳은 옷장이 아니었다. 그저 보관함일 뿐이었다.

그 넓은 보관함 안쪽에 똑같은 물체가 줄지어 족히 수십 개는 가지런히 늘어서 있었다. 마치 진열장에 전시된 예술품이라도 되듯이 똑같은 모양, 똑같은 형체, 똑같은 느낌의 은시계가 정렬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미 한번 그것을 가져본 자의 입장에서, 그 수십 개의 은시계들이 모두 타임 리와인더라는 사실을 모를 수가 없었다.

"어떻게 그게...."

아무리 이 공간이 내게 비현실을 잊게 해주는 곳이라고는 해도, 이 광경 앞에 내가 놀라지 않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내가 놀라는 것을 여전히 거부한다. 아무런 감정 없는 손길로 그 수 많은 은백색의 초시계 중 하나를 집어든 그녀가 내게 그것을 고스란히 건넨다.

"힌트를 하나 주지."

내가 그것을 받아들 생각도 못하고 있자 그녀는 내 발치에 그것을 아무런 미련도 없이 떨구었다. 메마른 목소리가 그 뒤를 잇는다. 조금 전보다도 확연히 생기가 사라진 건조한 목소리였다.

"네가 가지고 있었던 그것."

손아귀에 힘이 풀려 내가 가지고 있었던 타임 리와인더를 바닥에 흘리고 말았다. 내가 원래 가지고 있었던 그것....
신기하게도 그것은 바닥을 굴러가 그녀가 떨군, 그것과 똑같이 생긴 물체 옆에 가서 멈추었다. 생김새가 완전히 똑같은 두 물체가 나란히 놓여 있는 모습이 그렇게나 섬짓하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그건 고장 따위가 아니야."
"무, 무슨 말이에요?"
"물에 빠졌을 땐 고장이 났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엄밀히 말해서 그 물건엔 "고장"이라는 개념 정도는 스스로 회복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 만약 그게 단순 고장이었다면 지금쯤 충분히 자가 회복을 했겠지. 산산히 박살나지 않은 이상."
"그럼 이게... 다른 이유가 있어서 이렇게 된 거란 말이에요?"
"그래. 내가 보기엔 더이상 너를 주인으로 인식하지 않는 것 같은걸."
"뭐라구요?"
"그 시계는 누군가의 손에 닿을 때마다 그 누군가를 새로운 주인으로 인식하지. 하지만 그 사실이 그렇게 크게 중요친 않아. 어차피 사용자에 따라 주인은 계속해서 바뀌게 되어있고 그 능력을 이용하는 데에는 지장이 없으니까. 주인이 바뀐다고 해서 작동이 정지되거나 하는 일 따윈 없다는 얘기야. 하지만 이 시계는 더이상 너의 사용을 거부하고 있지. 바꿔 말하면 네가 다시 주인이 되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고. 그게 왜인 것 같아?"
"........"

내가 그걸 알 턱이 없었다.

"어쩌면 그 시계가 원래 주인의 손길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지도 모르지."
"무슨 말이죠? 원래 주인은 당신이 아닌가요?"
"아니. 난 주인이 아니야. 다만 그것들을 만들었을 뿐."

그게 그 말 아닌가? 도무지 그녀의 말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단지 그녀는 내가 어서 새로운 초시계를 손에 쥐길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거의 본능적인 이끌림에 힘입어 나는 그녀가 떨어뜨린 새로운 시계를 손에 쥐었다. 그러자 기묘한, 아주 기묘한 어떤 미증유의 감각이 스며들었다. 타임 리와인더가 다시 내게로 돌아온 것이다.

"이렇게 얘기할 수 있어서 나름대로 즐거웠어. 하지만 이제 나가줘야겠다. 할 일이 많거든."

즐거웠다고? 나는 그녀가 즐거웠다는 느낌은 조금도 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에서는 적어도 이제 떠나야한다는 느낌이 단호하게 묻어나왔기에 나는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섰다. 아직 풀지 못한 의문이 너무도 많음에도 불구하고, 대체 무엇을 물어야 할 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나, 나에게 구태여 다시 이걸 쥐어주는 이유는 뭐죠?"
"안 돼."
"네?"
"더 이상의 질문은 안 된다구. 오늘은 여기까지야."

뭐랄까... 그것은 비록 통보도 아니었고 명령도 아니었지만, 내게 그녀의 말을 거부할 수 있는 권리가 없었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그 뒤는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몽롱하게 일어서 마치 인형처럼 움직였던 것 같다. 제정신이 온전히 들고나니 어느새 302호가 아닌 그 옆의 내 방으로 돌아와 있었다.


*


혼란스럽다. 상의 안주머니를 더듬어 보니 여전히 그것은 그 자리에 있다. 그것은 비록 예전과 같은 물체는 아니었지만 그것과 같은 능력을 지니고 있는 물건이었다. 새로웠지만 새롭지 않았다. 능력이 돌아왔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시계를 시험해 볼 필요성조차 느낄 수가 없었다.

"그녀"와의 만남은 너무나도 짧았지만 그 짧은 만남은 내게 혼란의 연속을 남겼다. 비루한 두뇌를 나로서는 그녀가 했던 말을 되짚어보는 것이 무의미하게 여겨질 정도로 알아낼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이제 나는 뭘 해야 할까? 그것만이 내게 떠올릴 수 있는 현실적인 물음이었다. 다시 돌아온 이 시계의 능력을 가지고....

"현아 씨."

이상하게 가장 먼저 떠오른 얼굴이 현아 씨였다. 오늘 내게 가장 큰 파문을 남겼던 인물이라 하면 당연히 그 여자의 얼굴을 먼저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시간을 되돌려서 그녀에게로 돌아가는 것이 과연 온당한 일인가? 물론 나는 내가 내렸던 선택에 대해 잘못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 결정을 번복하기 위해 시간을 되돌리고 싶진 않았다. 굳이 서연이와의 일까지 없었던 일로 하면서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대로 두었다간 현아 씨의 기억이 자꾸만 내 머릿 속에 남아 나를 괴롭힐 것이었다. 어떻게든 해결을 해야 하지 않을까?

나는 전능해졌다. 다시 능력을 손에 넣은 것이다. 내가 못할 일이 뭐가 있을까? 우선 부딪혀보고 안 되면 다시 길을 모색하면 그만이다.

"그래, 가보자."

자동차 키를 손에 쥐었다. 시계를 다시 손에 넣음으로 인해 예측하지 못할 앞일이 이제 두렵지 않아졌다. 이 시계는 내게 있어 그런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나는 현아 씨와 헤어졌던 호텔의 스위트룸으로 무작정 향했다.

옆집 여자와의 일은 나중에 생각해도 된다. 어차피 그 문제는 내 머리로 고민해봐야 답이 나올 문제가 아니다. 지금은 그저 눈 앞의 일에 집중하자. 그녀가 말했듯이, 내 삶의 테두리 안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거면 된다.

"현아 씨."

차는 쏜살같이 달려 호텔 앞에 금새 도착했다. 스위트룸 앞에 멈춰 선 나는 심호흡을 하고 문을 두드렸다. 그녀가 안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고, 또 있다 한들 그녀가 문을 열어줄지도 의문이었지만 우선 그렇게 했다. 더이상 행동에 망설임을 가질 이유가 없었기에.

"현아 씨, 최성진입니다. 문 좀 열어주세요."

문 안쪽에서 부스럭대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나는 잠자코 그 자리에서 가만히 기다렸다. 그리 짧지 않은 정적이 이어졌고, 곧이어 문이 열렸다.

"........"

현아 씨는 헤어지기 전의 모습 그대로였다. 불과 아까 전의 일인데 짧은 시간에 비해 많은 일이 있었기 때문인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것처럼 그녀의 모습이 이질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흐트러진 모습도, 몸을 아슬아슬하게 감싸고 있는 얇은 가운의 모습도 여전히 그대로였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녀의 얼굴이 붉어져 있었다는 것 뿐.

"현아 씨, 술 마셨나요?"
"왜 다시 왔나요?"

그녀는 질문을 질문으로 받았다. 나는 그녀의 목소리에 취기가 끼어있음을 어렵지 않게 느꼈다. 우선은 그녀를 안쪽으로 밀며 나 또한 룸 안으로 자연히 들어섰다. 그녀는 딱히 나를 제지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냥요."
"우리가 다시 볼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요."
"저랑 현주를 헤어지게 할 생각인가요?"
"......."
"그게 현주에게도 결코 좋은 선택이 아니라는걸 현아 씨도 알 거에요."
"그 얘기는 아까 이미 끝났지 않나요?"
"그래요. 그 얘기는 끝났죠. 그래서 지금부터 새로운 얘기를 해보려고 해요."

가타부타 더 망설일 것도 없이 나는 현아 씨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취기에 흔들리고 있던 그녀의 몸이 힘없이 내 품안으로 안겨 들어왔다. 현아 씨가 몽롱한 눈을 치켜뜨며 내게 묻는다.

"뭐하는 거에요?"
"당신 말대로 한번 해 봐요."
"뭐라구요?"
"이유가 어찌 됐든, 뒷일이 어떻게 되든 간에 당신 말대로 해보자구요. 당신이랑 자고 싶어요. 지금은 그것만 생각할게요. 혹시 이게 잘못된 선택이라면 내가 되돌려 줄테니까."

이제보니 테이블 위에 놓인 와인잔이 보인다. 피처럼 붉은색 와인이 유리잔 속에서 고요하게 파문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녀가 얼마나 그 자리에 오랫동안 앉아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잠깐만... 갑자기 왜 이러는 거에요?"
"조용히 해요. 이제부터는 내가 우리 관계의 주인이니까."

시계가 되돌아오면서 내게 자신감 이상의 어떤 오만함까지 돌아왔나보다. 더이상 그녀가 어렵거나 무섭지 않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우리 사이의 분위기를 주도하는 쪽은 그녀였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비록 그녀는 모르겠지만 그 시계 하나가 그만큼 어마어마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당황하는 그녀를 안아들어 막무가내로 침대 위에 던졌다. 날씬한 그녀의 몸이 맥없이 푹신한 침대 위에 흐트러지듯 내려앉는다. 더이상 이것저것 따질 이유가 없는 나는 오로지 단 하나, 본능에만 충실하기로 마음 먹었다.

이 날 나는 시계의 힘에 의지하여, 처음으로 "찌질함"으로의 회귀를 선택했다.


- 다음 화에 계속 -


이번 글은 시간이 약간 걸렸네요, 죄송합니다
좀 신경이 쓰이는 일이 있었습니다

우연히 알게 된 야담넷이라는 사이트에 제 글이 옮겨지고 있는걸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타임 리와인더와, 뜨락에님의 심연 작품이 게시판에 게시되어 있어 너무 당황스러워 뜨락에님께 쪽지도
보냈었는데 더 알아보고 나니 같은 SF 장르라서 같은 게시판에 있었던 것이고, 다른 게시판으로 가보니 저 뿐만이 아닌 거의 모든 소라 작가님들의 작품이 자동으로 그곳으로 펌되고 있는 모양이더군요

저는 이런 일이 처음이라 몰랐지만 소라넷 작가님들께는 이런 불펌 문제가 빈번했나 봅니다
푸른산호초님께 문의 쪽지를 드렸더니 다행히 산호초님께서 친절하게 조언을 잘 해주셔서 지금은 당황했던게 그래도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네요

불펌 문제가 워낙 빈번한 일이라고 하니 제가 여기에 대처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고민하게 됩니다
대처를 한다면 어떤 식으로 해야 할지도 고민이고, 그대로 두자니 찝찝하네요ㅜㅜ

아마 지금 쓰고 있는 이 글도 자동으로 그 사이트에 옮겨질걸 생각하니 오늘 틈틈이 글을 쓰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못내 찝찝하여 제대로 써지지도 않는 그런 기분이었습니다. 저는 소라 대부분의 작품들이 야담넷으로 옮겨지고 있길래 소라넷과 야담넷이 연계된 사이트인가 하는 생각도 했는데 혹시 이 사이트를 잘 아는 독자님이 계신지요?

이 상황에서 어떻게 받아들이는게 좋은지, 의연하게 생각하고 그냥 두는 것이 나을지 아니면 대처를 한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조언을 해주실 수 있는 독자님이 계신다면 조언 한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ㅠ

지금 제 생각으로는 다음 화부터는 푸른산호초님께서 말씀해주신 방법대로 다음 23장부터는 처음에 소설 내용이 아닌 공지글을 올리고, 시간 간격을 띄워 본문을 업로드함으로써 자동펌을 방지하는 방법을 쓰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됩니다. 혹여 다음 장부터 본문 업로드 이전에 내용 없는 공지글이 올라오더라도 독자님들의 너른 양해를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무튼 나름대로 애정을 가지고 쓰는 글인데 함부로 펌이 되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받아 약간 심란한 며칠을 보냈네요ㅜㅜ 글 업로드가 늦어진 점은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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