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임 리와인더 (Time Rewinder)
- 이 소설은 소.라.넷(sora.net) 작가 "상상의신비"가 연재 중인 작품입니다.
무단 불펌을 삼가해 주시길 부탁드리며, 퍼가시더라도 출처와 작가명을 꼭 남겨주십시오.
창작가들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이자 도리입니다.
* 1부 48장
언제부터인가 나는.... 서연이가 날 위해 피임약을 먹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왔던 것 같다. 구태여 내가 신경을 쓰지 않더라도 그녀가 알아서 그렇게 하고 있으리라고 나는 줄곧 믿었다.
그녀는 언제부터 약을 입에 대지 않았던 걸까. 대체 어느 시점부터 그녀가 그렇게 마음 먹었는지 스스로 되짚어보려다, 나는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내가 추잡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그걸 알아서 뭐하게....?"
그걸 알아내면, 그 시점으로 되돌아가서 그 일을 없었던 것으로 지워버리려고?
"병신, 쓰레기, 한심한 새끼...."
극도의 자기혐오가 꾸역꾸역 솟구쳐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품 속에서 타임 리와인더를 꺼냈다. 어차피 옆집 여자가 사라진 시점 이전으로는 시간을 되감을 수 없으니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기도 했지만, 아마 그게 가능했다 할지라도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거냐?"
시간을 되감는 것으로 모든 일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아니, 실은 애초에 시간을 되감는 행위로 무언가를 해결해 보겠다는 생각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피로 얼룩진 시간을 거쳐서 간신히 그걸 깨달았음에도 내가 해결하기 힘든 상황에 직면하자 다시 한번 그 능력에 대해 떠올리고 있는 내가 너무도 싫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조용히 옷장을 열었다. 그리고 가장 깊숙하게 느껴지는 서랍 안쪽에다가 타임 리와인더를 마구잡이로 밀어넣고는, 그것이 눈에 보이지 않도록 옷가지들을 마구 쑤셔박았다. 몸에서부터 그 은백색의 초시계가 완전히 떨어져 나갔음을 실감하고나서 나는 옷장 문을 닫았다.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나는 저 시계를 꺼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스스로에게 하는 약속이었다. 여기서 타임 리와인더를 이용해 서연이의 임신을 없던 일로 해버리고 나면, 말이 좋아서 "없던 일"이지 사실 그것은 내 손으로 한 생명을.... 그것도 내 아이를 죽여버리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구역질이 치밀었다. 낙태 수술을 받는 것과 그게 도대체 뭐가 다르단 말인가?
옷장 문을 닫고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던 나는, 고개를 돌려 잠든 서연이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퉁퉁 부은 눈을 한 채로 얌전히 잠들어 있는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결국 오늘도 그녀를 내 방 침대 위에서 재워야만 했다. 그녀를 위해 이별해야겠노라고 기껏 다짐했지만 나는 그녀를 이 방 밖으로 보내주는 것조차 하지 못한 것이다.
"서연이는 왜 약을 먹지 않았던 걸까?"
나를 위해서 피임약을 먹는다고 말했던 서연이.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그녀가 약을 먹지 않았던 것은 그저 실수였을까, 혹시나 그녀가 일부러 그랬던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자니 세상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처럼 어지럽고 괴로웠다.
나는 그런 생각들을 그만두었다. 지금 그런 생각을 하는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아니, 의미가 있더라도 사실은 그런 생각을 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눈 앞에 닥친 현실을 그저 뇌리에 새기고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너무 힘겨웠다. 나는 기계처럼 판단도, 사고도 멈춘 채 그저 서연이가 내게 했던 말들을 머릿속에서 계속 되뇌었다.
"지난 주에 병원에 다녀왔어.... 3주차야. 자기한테는 언제 말해야 할지 계속 고민하고 있었어."
실타래가 끊어진 인형처럼 나는 뻣뻣해진 몸으로 서연이를 가만히 끌어안고만 있었다. 그녀는 내 품에 안긴 채로 그동안 내게 전하지 못했던 말들을 털어놓았다. 그녀가 그동안 얼마나 고민했을지, 혼자서 당황해 했을지를 나는 충분히 느낄 수 있었음에도.... 대답 한 마디 제대로 해줄 수가 없었다.
3주차라니....? 그 순간 마음 속에서 극도의 분노가 다시 한번 치솟아 오르는걸 느꼈다. 서연이를 향한 분노가 아니었다. 지환이와 한수, 그리고 현아에 대한 분노였다. 만약 서연이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들이 서연이를 강간했을 때, 이미 그녀의 뱃속엔 우리의 아이가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자칫 잘못했으면 서연이 뿐만 아니라, 뱃속의 아이에게까지 큰 일이 생겼을 것이라 생각하니 심장이 철렁 내려앉으며 손이 떨려왔다. 죽일 놈들.... 만약 그랬다면 정말로 놈들은 죽어야 마땅했다. 당장이라도 가서 또 한번 놈들을 죽여버릴까? 어쩌면 죽여버리고 나서 시간을 되감지 않는다면 좀 더 화가 풀릴지도 몰라.... 그런 생각들을 하다가, 어느 순간 내 스스로가 너무도 끔찍하게 느껴져 나는 몸서리를 쳤다.
"낳을 거야.... 낳고 싶어."
서연이가 그렇게 말했을 때, 마치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는게 싫었다. 부끄럽게도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유정이의 얼굴을 떠올렸다. 서연이가 나의 아이를 가졌다는데. 나는 서연이의 몸을 걱정하기 이전에 다른 여인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게 너무도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자기야, 무슨 생각해....?"
언제부터 깨어있었던 걸까. 서연이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그녀는 여전히 나를 "자기"라고 부르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침대로 다가가 그녀가 누운 머리맡에 앉았다. 어둠 속에서 나를 올려다보는 서연이의 두 눈망울....
"미안해. 나 때문에 깼어?"
"아니야. 꿈을 꿔서 그래."
그녀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너무나도 안쓰러워 나는 그녀의 얼굴을 닦아주며 물었다.
"무슨 꿈이었는데?"
"자기가 날 버리고 떠났어. 나랑 아기를 버리고..... 그냥 그렇게 가버렸어. 그래도 나는 아이를 키웠어. 언젠가 자기가 돌아올거라고 생각하면서 말이야. 그렇게 기다리다가, 너무 지쳐서 깨버린 것 같아."
"........"
어쩌면 그녀는 그런 꿈을 꾸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저 나를 더욱 붙들고 두고 싶었던 것일 뿐. 하지만 그런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미안해, 서연아."
"미안하다고 하지 마."
한번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았다. 만약 서연이와 아이를 낳아서 키우게 된다면, 아마 우리는 결혼을 해야만 하겠지? 아이가 있는데 계속 연인 사이로만 지낸다는 것도 말이 안 되는 거니까.... 어쩌면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타임 리와인더가 도움이 될 지도 몰라. 적어도 돈 걱정을 할 필요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다른 문제들은?
"유정이는....?"
유정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관장님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들도 떠올랐다. 서연이와 결혼을 하게 되면 유정이와는 어떤 형태로든 더이상 만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결국 그녀는 자신의 가문으로 돌아갈 것이고, 거기에서 얼굴도 모르는 약혼자를 만나, 생각해 본 적도 없는 결혼을 하겠지.
"뭐야, 이게?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거지...? 도대체 왜...."
유정이가 원치 않는 결혼을 하게 되는걸 나는 두고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연이를 이대로 버리는게 과연 가당키나 한가? 이 시점에서, 그녀와 헤어지는 것은 더이상 단순한 결별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곧 나의 아이, 한 생명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느냐 없느냐의 선택이었다.
만약 그것을 선택이라고 표현한다면, 지금껏 살아오면서 내게 이만큼 가혹한 선택은 없었다. 무엇을 선택하더라도 나는 후회하게 될 것이고, 또한 누군가는 상처 입을 것이다. 신이라는 존재가 정말로 있다면 어떻게 이런 장난을 칠 수 있을까?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자기.... 나 안아주면 안 돼?"
"......."
영리한 여자이니만큼, 서연이는 내가 지금 힘겨운 갈등의 기로에 서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을 것이다. 내게서 온갖 고뇌와 번민이 느껴질 텐데도 그녀는 옆에서 자꾸만 내 옷깃을 잡아당겼고, 어린아이처럼 칭얼거렸다. 하지만 나는 그런 그녀를 미워할 수 없었다. 나는 품 안으로 그녀를 힘주어 끌어안았다.
"다음에 병원 갈 때.... 같이 가보면 안 될까? 응?"
"알았어. 그러자...."
왠지 그 순간의 그녀는, 그런 사소한 약속을 통해서 우리의 관계를 조금이라도 단단히 묶어두고 싶었던 것 같았다. 다시는 내 입에서 이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게끔 만들고 싶었던 것이리라.
서연이의 말 속에 담긴 의미를 대강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그녀의 부탁에 승낙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사람 새끼로 태어난 이상 차마 그 순간 거절의 대답을 할 수는 없었다.
"키스해 줘."
포옹을 하고, 약속을 했다. 하지만 그녀의 요구는 하나둘씩 더 늘어나고 있었다. 점점 더 뚜렷한 형태로,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이대로 계속해서 서연이의 요구를 들어주다보면 결국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 될지 나는 알고 있었기에 망설였다.
족쇄라고 여기기 싫었지만, 만약 서연이의 마음을 거절하지 못한다면 나는 결국 유정이와 이별하게 될 것이다. 생각하기 싫은 현실이었지만, 그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하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연이의 입술이 내 입술을 덮었다. 어떻게든 나에게서 조금이라도 더 많은 애정을 느끼려 하는 그녀의 애절한 몸부림을 나는 떨쳐낼 수 없었다. 뻣뻣하게 머뭇거리던 내 입술이 서연이의 입술을 어색하게 감싸고 들자, 그녀는 곧장 혀를 내밀어 내 혀를 휘감아 왔다.
서로의 혀가 얽히는 와중에 서연이는 조용히 손을 내밀어 나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내 손을 이끌어 자신의 젖가슴 위에 살며시 올려놓았다. 내가 아무리 세상에 둘도 없는 병신 머저리라고 해도 그녀가 지금 나와 섹스하길 원한다는 사실을 모를 만큼 멍청하진 않았다. 마음 속으로는, 손이 너무도 떨려와서 그녀의 몸을 어루만질 수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자.... 하고 싶어."
내 머뭇거림이 다른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했는지, 그녀는 결국 답답한 내 모습에 자신의 입으로 직접 그 말을 꺼냈다. 독하게 거절을 하지도 못하는 주제에, 나는 머뭇거리며 괜히 애매한 대답을 던지고 만다.
"괜... 찮을까?"
"부드럽게 하면 괜찮을 거야. 우리 아기 놀라지 않도록.... 평소하곤 다르게 조심해서 하자."
우리 아기.... 그 우리 아기라는 표현이 나로 하여금 얼마나 복잡한 감정을 느끼게 했는지 서연이는 알까.
급류에 휩쓸리듯이 우리는 무작정 몸을 섞기 시작했다. 아마 그것은 내가 지금까지 서연이와 했던 섹스들 중에서 가장 소극적인 섹스였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 섹스는 나와 서연이가 여지껏 맺어왔던 관계의 방식을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기도 했다.
육체의 감각, 강렬한 자극, 뒤섞이는 격정.... 처음으로 그런 것들을 모조리 내려놓은 채 우리는 그저 서로의 존재에 대해 집중했다. 쾌락을 우선으로 하지 않는 섹스. 나와 서연이가 그런게 가능할 거라고 어디 상상이나 했을까. 하지만 그 날 우리는 그런 섹스를 했고, 서연이가 그런 나의 변화로 인해 행복했는지는 모를 일이다.
"아...!"
어디를 어떻게 애무했는지도 모르겠다. 심지어 무슨 자극을 받고 내 물건이 빳빳하게 세워졌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저 내 물건이 지극히 조심스럽게 서연이의 몸 안으로 들어갔을 때, 그녀가 나지막한 탄성을 질렀다는 것이 기억 속에 희미하게 남아있다.
"괜찮아....? 안 아퍼?"
"으응.... 괜찮아. 좋아."
"불안해. 애가 다치면 어쩌지?"
임산부가 매사에 조심을 해야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막상 이런 상황이 되고보니 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조심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나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는걸 깨달았다. 이런 덜떨어진 놈이 애아빠랍시고 뱃속에 생명을 잉태시켜놨는데, 서연이는 얼마나 막막했을까 생각을 하니 눈물이 핑 돌았다.
나는 그 지옥 같았던 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서연이와의 섹스는, 한편으로는 나로 하여금 그 트라우마을 되새기게 만들 수 밖에 없는 과정이기도 했다. 나는 그걸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내 몸 아래에서 나를 조심스럽게 끌어안는 서연이의 얼굴을 보니.... 처음으로, 그 날의 다른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괜찮아."
그녀는 자신의 몸이 망가져가면서도,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그런 말을 했었다.
"힘들지만 괜찮아. 참을 수 있어. 나중에 자고 나면 다 잊어버릴거야. 난 자기랑 할 때가 가장 즐겁고 행복해. 내 마음 알지? 그러니까 불안해 하지 마. 무서워 할 필요도 없어."
눈가에 맺힌 눈물이 결국 참지 못하고 아래로 흘러내렸다. 그녀의 말대로 그녀는 결국 그 기억을 잊어버렸지만, 나는 그녀의 마음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 기억을 떠올리는 것이 여전히 너무도 힘들고 괴로웠지만, 그 와중에도 그녀가 내게 보여주었던 헌신적인 사랑을 나는 아마 평생토록 기억할 것이다.
"미안해, 서연아...."
"왜 그래, 자기야. 왜 울어?"
"다시는 널 울리고 싶지 않은데. 네가 눈물 흘리는 모습을 두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은데...."
바보같이 나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한번 울음이 터지고 나니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펑펑 흘렀다. 언제 이렇게 울어봤나 싶을 정도로 나는 하염없이 울었다. 떨리는 내 몸을 서연이의 두 팔이 감싸 안았다. 그녀는 내 등을 말없이 쓸어주었고, 나는 서연이의 품에서 울다 지쳐 그렇게 잠이 들었다.
아마.... 그 날도 가족에 대한 꿈을 꾸었던 것 같다.
*
그 어떤 일이 일어나도, 시간은 공평하게 흘러간다.
어느새 한 주가 흘러가 토요일이 되었다. 현주를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우리는 여느 때처럼 만나서 함께 거리를 걸었다. 데이트를 하는 내내, 나는 처음으로 현주를 만났을 때를 떠올려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그녀와의 만남에 이제와서 다른 의미부여를 하고 싶진 않았다. 나는 현주를 사랑했고, 현주도 나를 사랑해주었다. 그 자체로 우리의 만남은 소중한 것이었다. 나는 딱 거기까지만 생각하기로 마음 먹었다.
"헤어지자."
"벌써? 이제 겨우 초저녁인데.... 좀 더 있다 가도 돼."
아파트 입구에 다다랐을 때, 나는 현주에게 말했다. 왠지 그녀도 서연이와 마찬가지로 기껏 마음 먹고 내뱉은 말에 순 엉뚱한 대답을 했다. 어쩌면 여자들은 본능적으로 치명적인 말을 회피하려는 감각을 지니고 있는건 아닐까? 나는 어쩔 수 없이 다시 못 박았다.
"그게 아니라.... 우리 이제 그만 만나."
"뭐?"
이별하는 과정의, 특히 이런 순간의 괴로움을 쉽게 견딜 수 있는 사람은 그리 흔치 않을 것이다. 덤덤하게 여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굳어지는 현주의 얼굴을 보는건 역시나 힘든 일이었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갑자기가 아니야. 너는 나 같은 사람을 만나서는 안 돼."
서연이가 그랬듯이, 그녀도 결코 짧지 않은 지독한 침묵에 빠졌다. 어쩌면 내가 예전에 처음으로 그녀에게 이별하자는 것과 비슷한 이야기를 했을 때부터, 그녀는 내 입에서 재차 이런 말이 나올 것을 늘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화내거나 눈물을 흘리는 대신에, 지금껏 내게 한번도 보여준 적이 없는 딱딱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결국 나보다 서연 씨를 택했다는 거지?"
"그런게 아니야. 진작 이랬어야 하는걸 욕심 때문에 미뤄왔던 거야. 나는 너에게 한번도 좋은 남자친구였던 적이 없었기 때문에.... 아름다운 이별을 하는건 힘들겠지만, 그래도 더이상 미루지 않는게 너에 대한 마지막 배려라고 생각해."
그 순간 얄궂게도, 바람이 불었다. 세찬 바람이 불어와 나와 현주 사이를 가르고 지나갔다. 현주라면 아마도 내게 할 말이 많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세월이 흐르고나서 현주의 마음 속에 내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 지가 조금은 궁금했다. 내가 그녀의 아픈 상처를 치료하는데 도움을 주긴 했지만, 그것이 과연 그녀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을 수 있을지는 모를 일이었다. 그것을 결정하는건 현주의 몫이었다.
"좋은 남자친구였어."
"응?"
하지만 현주는 내가 짐작했던 그 수많은 말들을 대신해서, 그렇게 답했다.
"좋은 남자친구였다구. 난 그렇게 생각해."
"현주야...."
마지막으로 한번 안아준다거나, 웃어준다거나 하는 것은 힘들거라 생각했다. 나는 현주에게 그럴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 여겼다. 하지만 현주는 그런 나를 대신해서 내게 다가오더니, 아주 가볍게 나를 살짝 한번 안아주었다.
"잘 지내. 그리고 오빠도 날 좋은 기억으로 남겨줘."
"......."
내게 있어 현주는.... 좋은 사람이었다. 두 말할 필요도 없이 그녀는 내게 과분할 정도로 좋은 연인이었다. 그녀는 마치 내가 데이트를 마치고 그녀의 집 앞에서 그녀를 보내주었던 것처럼, 그렇게 평소와 다름 없는 모습의 이별을 택했다. 엘리베이터를 타러 들어가는 현주의 뒷모습에 대고 나는 그녀에게 마지막 한 마디를 전했다.
"좋은 기억으로 간직할게. 꼭...."
그녀가 그 말을 들었을 지는 모르겠다. 현주의 모습이 사라진 자리를 나는 한동안 계속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녀와의 기억들이 남아있는 이 아파트 단지의 모습이 내 마음 한 켠에 오래도록 남을 것 같았다. 왠지 또 바보처럼 울어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나는 온갖 감정의 덩어리들을 바닥에 내려놓고, 걸음을 옮겼다.
단지를 나서는 길에 그녀를 마주치게 된 것은, 돌이켜보면 다행스런 일일지도 몰랐다. 어찌됐든 그녀와의 관계에서도 나름대로의 마무리가 필요했을테니 말이다. 어쩌면 그녀는 아까부터 줄곧 우리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던 듯, 너무도 자연스럽게 나타나 내 눈 앞에 섰다.
"현아 씨."
그녀는 말이 없었다. 그녀의 얼굴을 보았을 때, 나는 더이상 미칠 듯한 분노가 솟아오르지 않는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고, 또 그 사실에 스스로 감사했다.
피 튀기던 모습 앞에 비명을 지르던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비록 그녀는 그 기억을 잊어버렸겠지만, 여전히 그녀는 내게 있어 불쌍한 여인이었다. 내가 만났던 여인들 중에 가장 위험하고, 가장 어리석고, 가장 안쓰러운 여인.
"당신은 결국 이런 식으로 내 동생을 버리는 군요."
무미건조한 분노. 살아오면서 수많은 남자들을 미워했지만 진심으로 증오했던 것은 내가 겨우 두 번째라고 말했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누군가에게 그토록 미움 받는 존재가 된다는 것은 뭐랄까.... 마치 일부러 0점 짜리 시험지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었다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순전히 찍기만 해도 만들기 힘들다는 그 0점 짜리 시험지. 왜 구태여 그걸 만들어보려고 애썼던 걸까? 어디다 자랑이라도 하고 싶었던 걸까?
"현아 씨, 부탁이 있어요."
나는 그녀의 손 끝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다행히 그녀가 그걸 뿌리치지는 않았다.
"현주는 행복해질 수 있어요. 나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나면 틀림없이 행복해 질 거에요.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현아 씨가 달라져야만 해요. 지금의 모습 그대로 살아가면 안 돼요."
그녀는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답할 가치가 없다고 여겼을 수도 있고, 여전히 내게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어차피 받아들이는건 그녀의 역할이었고, 판단하는 것도 그녀의 몫이었다. 나는 내가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의 도리를 다할 뿐이었다.
아마도.... 분명 내심으로는, 그녀도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녀의 잘못된 선택이 결국엔 현주를 두 번이나 위험으로 몰고 갔지만 나는 애초에 그녀가 그 정도로까지 어리석은 인간은 아닐 거라 믿었다. 그저 나에 대한 분노로 잠시 눈이 멀었을 뿐이리라. 마음 속에 담아놓은 과거의 잔재만 천천히 내려놓을 수 있다면, 아마 현주 뿐만 아니라 현아 씨 본인도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역할이 내게 달린 것은 아니었다. 지극히 무책임하지만 나는 이만 그녀들의 앞에서 사라져줘야 했다.
"마음의 짐을 내려놓으세요. 그리고 당신의 행복을 찾으려 노력하며 살아보세요. 당신은 현주의 행복을 보는 것이 자신의 행복이라 여기고 있을지 모르지만, 현주도 분명히 당신이 진정으로 행복해지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할 테니까요. 미워하지도 않는 남자들을 애써 미워하려고 하는 삶은 이제 그만 두세요. 그런 미움을 마음 속에서 스스로 만들어내면서 살지 말아요. 당신을 위해서, 또 현주를 위해서...."
여전히 아무런 대답이 없는 그녀. 나는 잡았던 그녀의 손끝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등을 돌렸다.
사라지는 내 모습을 보면서도 현아는 끝내 말이 없었다. 나는 왠지 모르게 언젠가는 그녀와 한번쯤 더 마주치게 될 일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지만, 생각과는 다르게 그것이 우리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 이후, 그녀의 소식을 접한 것은 신기하게도 먼 훗날 학과 동문회에서였다. 그 자리에서 나는 우연히 지환이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녀석은 어느 보험 회사의 젊은 여성 설계사를 강제로 겁간한 혐의를 받고, 증거자료로 호텔 스위트룸에서 촬영된 몰래카메라의 영상이 제출되어 빼도 박도 못하는 실형을 선고받았다고 한다.
학과 동창들의 입소문에 의하면, 지환이를 고소한 그 여성 설계사가 너무도 치밀한 증거를 들이민데다가 보통 독한 여자가 아니어서 재판 끝에 지환이를 감옥으로 보내버렸다며, 하필 건드려도 그런 여자를 건드렸다고 딱하게 여기는 눈치였다.
그들은 정말로 지환이가 그 여성 설계사를 추행한 것인지, 아니면 지환이가 단순히 꽃뱀에게 잘못 물려 인생을 망친 경우인지를 두고 자기들끼리 옥신각신거렸고, 술자리에서의 이야기가 대개 그렇듯이 결국엔 그 또한 하나의 술안주로 전락해버렸다.
우연히 듣게 된 동창들의 그 이야기에서, "현아"라는 이름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지만 나는 지환이를 고소한 그 여성 설계사의 정체를 알 수 있을 듯 했기에 일부러 말을 아꼈던 것 같다. 좌우지간 그 때 나는 오랜 세월 기억에 묻어두었던 그녀의 이름을 한번 더 끄집어 낼 수 있었고, 그 이후로는 이름조차 떠올릴 일이 다시는 없었다.
*
기말고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곧, 나의 졸업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학번은 달랐지만 학년은 같았기에, 아마도 나는 서연이와 함께 졸업을 하게 될 것이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열심히 시험 공부에 임했다. 아니, 임하려고 했다. 비록 공부에 집중이 안 되는 상황인게 너무도 당연하긴 했지만 그래도 노력만은 해보려고 했다. 아마도 이번 학기에서 중간고사까지의 내 성적은 완벽에 가까울 것이다. 중간고사를 치를 때는 타임 리와인더를 썼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젠 그러고 싶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그 날 밤, 옷장 속에 타임 리와인더를 묻어버린 이후로 다시는 그것을 도로 꺼내지 않기 위해 나는 마음을 다잡고 있었다. 글쎄, 어쩌면 살아가면서 정말로 힘든 순간이 온다면 한번 쯤은 크게 갈등할 지도 모르지.... 하지만 내 노력으로 해결 가능한 일이라면 웬만해선 그러고 싶지 않았다.
"너무 열심히 하는거 아니야? 쉬엄쉬엄 해."
서연이가 내 책상에 손수 타 온 커피 한잔을 내려놓았다. 요새 들어서 서연이는 부쩍 잠이 늘었다. 처음엔 같이 공부를 해보려고 책상 앞에 나란히 앉았던 그녀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또 요새 그녀는, 함께 있다보면 입덧을 자주 하곤 했다. 배도 서서히 눈에 띌 만큼 부풀어오르고 있었다. 평소 그녀를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아직까지는 살 쪘냐는 식으로 의아해하고 넘길 수 있는 수준이었지만, 아마 앞으로 점점 더 뱃속의 아이는 커질 것이고 주변 사람들도 자연히 알게 될 것이다.
지난 주에 나는 그녀와 함께 산부인과에 다녀왔다. 함께 사진을 보고, 아이의 윤곽을 보았다. 의사선생님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귀기울여 들었다. 나처럼 예비 신부의 손을 잡고 병원을 방문한 사람들도 드문드문 보이긴 했지만, 서연이처럼 젊고 아름다운 산모를 데리고 온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불편하기도 했고, 부끄럽기도 했다. 하지만 서연이 앞에서는 내색하지 않았다.
"자기, 있잖아...."
"응."
어느새 졸음에서 잠깐 깨어난 서연이가 조심스러워하며 내 눈치를 살폈다. 서연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할 때엔 집중해서 들어주는 것이 요새들어 버릇이 되어버렸다. 나는 펜을 내려놓고 책을 덮었다. 그러자 서연이가 머뭇거리며 말을 꺼냈다.
"아빠 엄마가, 자기를 만나고 싶어해. 집에 데려와보라고...."
"그러셨어?"
서연이의 집에서 얼마나 큰 난리가 났을지, 안 봐도 훤한 일이었다. 대학도 아직 졸업하지 않은 꽃 다운 나이의 딸이 누군지도 모를 놈의 아이를 덜컥 배어왔으니.....
그녀의 부모님이 받으셨을 충격과 분노를 생각하면, 솔직히 당장이라도 그 분들이 자취방으로 달려와 내 뺨을 후려치지 않는 것이 놀라울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선은 나를 집으로 불러서 이야기를 해보겠다고 하시는걸 보면, 서연이의 부모님이 얼마나 참을성 있는 분들인가를 말해주는 극적인 단면이기도 했다.
"그리고 나도 자기네 부모님을 한번 뵈어야 하지 않을까?"
"음...."
그러고보면 타지에서 자취 생활을 하면서도, 부모님께 연락을 드린지가 참 오래 된 것 같다. 하지만 기껏 오랜만에 연락해서 드린다는 소식이 "손자를 안겨드릴 것 같습니다."라면 너무하지 않은가. 아직은 자신이 없어 그동안 집에 알리기 꺼려했던 것인데, 서연이는 용기를 내어 부모님께 말씀드렸다니 참 놀라운 일이었다.
그녀의 용기가 감탄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론 어쩐지 그녀가 나보다 더 적극적으로 지금의 이 현실을 받아들이려 애쓰는 것 같아서 마음이 무거웠다. 보통은 남자 입장에서 여자가 불안해하지 않도록 이끌어줘야 마땅한 것일 텐데.... 이런 내가 만약에 서연이와 가정을 이룬다 쳐도, 정말 그녀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까?
"미안해. 공부하는데 내가 또 괜히 심란하게 했지?"
"아냐. 그런 말 하지마."
나는 서연이의 배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아이를 지우고 싶지 않았다. 그건 나 또한 그녀의 마음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 사실을 받아들이려면 필연적으로 또 하나의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유정이는.... 어떻게 지낼까?"
어느 날부턴가, 유정이는 학교에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녀가 머물렀던 같은 건물의 원룸으로 찾아가봐도 유정이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이따금씩 유정이가 없는 그녀의 방 안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밤이 늦어서야 다시 내 방으로 돌아오곤 하는 것을 반복하곤 했다.
서연이는 유정이가 나와 같은 건물에 잠깐 동안 살았었다는 사실을 끝내 알지 못했다. 나도 구태여 그녀에게 그걸 밝히고 싶지 않았다. 다만 유정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게 미치도록 궁금할 뿐이었다.
아마도 그녀는 그 눈부시게 아름다운 한옥집에서 관장님과 함께 머물고 있을 것이다. 이 건물이 아니면 그녀가 지낼 곳은 그 곳 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내가 유정이를 만나기 위해 그녀의 원룸으로 찾아가는 것과, 그 한옥집을 다시 찾아가는 것은 차원이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적어도 그 한옥집을 다시 내 발로 방문할 때에는, 관장님이 내게 하셨던 이야기에 대한 대답 정도는 스스로 결정한 상태여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럴 수 없었다. 뱃속에 내 아이를 품은 여인을 두고 관장님과 그 문제에 대해 논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우선은 서연이와 양가 부모님을 만나뵙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만 신경을 썼다.
내가 두 가지 기로에서 어떤 갈등을 하고 고민을 하든, 내가 맞닥뜨려야 할 문제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눈 앞에 닥치는 대로 우선 중요한 것들을 해결해 나갈 수 밖에 없다. 어차피 그 문제들은 싫으나 좋으나 해결되어야만 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피한다고 해서 피해지는게 아닌, 그리고 피하려고 해서도 안 될 문제들.
그래서 나는 유정이를 보러가고 싶은 너무도 간절한 그 바람을.... 애써 잠시동안 마음 속에 묻었다.
"자기야."
"응."
서연이가 내 어깨에 얼굴을 기대며 팔을 둘러왔다.
"나.... 우리 사이가 그렇게 시작이 아름답지 못했다는거 알고 있어. 그리고 지금도 내가 아이를 핑계로 자기를 내 옆에 묶어두려 하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불편한 것도 인정해. 하지만 난 자기를 정말 사랑해. 자기가 다른 모든 것들을 잊고 나와 함께 해준다면, 우리가 누구보다 행복하게 살 수 있을거라고 나는 믿어. 자기 마음 속에 아직 누군가가 남아있다는거 알고 있지만 그래도 자기가 내 곁을 지켜주기로 한다면 나는 행복할 거야. 시간이 지나면 해결 될 테니까."
"........"
시간이 지나면.... 정말 그럴까?
"그러니까 자기가 내 마음을 믿어줬으면 좋겠어. 지금 내가 보여줄 수 있는게 이 마음 밖엔 없지만, 그래도 자기가 계속 혼란스럽다면 자기를 사랑하는 내 마음에 대해서 떠올려 줘. 그러면 아마 조금은 편해질 거야...."
비록 나는 내 명확한 의지로 결정을 내리지 않았지만, 물고기가 물살에 휩쓸려 가듯이 나는 그렇게 서연이의 곁에 머물러가고 있었다. 그게 자의든 타의든 나는 서연이의 곁을 떠날 수가 없었고, 그것은 그 자체로 이미 하나의 선택이 되어버린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 당시의 내게는 너무도 어려운 문제였다....
*
기말고사가 끝났고, 겨울방학이 찾아왔다. 말이 겨울방학이지 나와 서연이에게는 졸업이나 다름 없었다. 내년에 졸업식이 남아있긴 하지만 아마 그 때까지는 이제 학교에 갈 일이 좀체 없을 것이다.
학기 마지막 무렵에, 서연이는 결국 학회장 자리를 다른 누군가에게 넘겼다. 올해 행사들도 거의 마무리 되었기 때문에 남은 일이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연말 결산이나 다음 년도 회장 선출 등의 중요한 일들이 몇 가지 남아 있었고, 서연이는 지금은 그런 문제에 신경 쓰는 것보다 태아의 건강을 먼저 챙기기로 결정한 것이다.
끝물에 이르러 역할을 넘겨받게 되었으니 이번에 자리를 맡게 된 학회장은 사실 후임이라기보단 대리에 가까운 개념이었지만 어쨌거나, 이 소식을 통해 우리 과의 학회장은 올해 총 두 번이나 교체가 되었다는 점으로 잠시 동안 교내에서 구설수에 올랐다.
이 사건의 여파는 나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왜냐하면 서연이가 학회장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과정에서 그녀의 임신 사실이 학과 내에 파다하게 퍼져버렸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입소문을 통해 알게 된 것이겠지만 일부 지인들의 경우는 서연이가 직접 이야기를 해주기도 했기에, 그것은 이제 학교 사람들에게도 빼도 박도 못하는 사실이 되어버렸다.
누군가는 경악했고, 누군가는 부러워했고, 누군가는 그저 수군거렸다. 하지만 나는 귀를 닫고 신경을 꺼버렸다. 아무 상관도 없는 이들이 뒤에서 재잘대며 입방아를 찧어대는 것이야 한 때 내가 지겹도록 겪은 일이었으니 말이다. 나는 그저 두 가지가 걱정될 뿐이었다.
첫 번째는 서연이가 느낄 심적 부담이었다. 아무래도 그런 입소문에 있어서는 남자보단 여자 쪽이 느낄 부담이 더 크지 않겠는가. 하지만 의외로 서연이는 그런 문제들에 있어서 무덤덤한 반응이었다. 어차피 알게 될 사실을 사람들이 조금 일찍 알게 된 것이 뭐 그리 대수겠냐고 그녀는 과감히 받아넘겼다. 이전에도 서연이의 강한 멘탈에 이따금씩 놀라곤 했던 기억이 있지만, 다시 봐도 그녀는 정말 강한 여인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이 이야기를 듣고 나서 유정이가 보일 반응이었다. 아마도 이것이야말로 내가 그동안 가장 두려워했던 문제일 것이다. 새삼스럽게도 나는 서연이의 임신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 유정이와 한번도 만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그녀는 이미 이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을까? 그래서 어쩌면 나를 보지 않으려 하는 걸까? 얼굴을 못 본 것이야 둘째치고, 우리는 그동안 전화나 메시지조차 주고 받은 적이 없었다. 나는 그동안 유정이가 가문의 문제로 바빴기 때문일 것이라며 스스로를 애써 달래왔지만, 사실 조금만 생각해봐도 그건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유정아."
유정이가 보고 싶었다. 사무치도록 그녀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겨울방학 첫 날에, 나는 결국 더 참지 못하고 유정이를 찾아서 예전에 내가 잠시 신세를 졌던 그 한옥집을 찾아나섰다.
유정이가 내려주었던 그 정류장에서부터 시작해, 그녀가 나를 오토바이로 태워주었던 길을 최대한 더듬어가며 거슬러 올라갔다. 걸어서 가기에는 먼 거리였지만 나는 아랑곳 않고 두 다리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집을 찾아가는 그 여정의 가운데, 나는 왠지 익숙하게 느껴지는 넓고 고요한 풀밭을 만났다. 그 순간 눈에 눈물이 글썽이며 맺혔다. 그곳은 나와 유정이가 사랑을 나누었던, 그녀가 나의 상처를 보듬어주었던 소중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바로 그 장소였다.
이정표도 표지판도 없이, 정처없이 걷던 내 눈에 산이 들어왔다. 관장님과 내가 함께 올랐던 그 싱그러운 녹빛의 산. 나는 정신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산 밑에 그림처럼 자리잡고 있는 한옥집이 보였다.
"유정아....!"
고요한 적막이 내리깔린 마당에 들어서서 유정이를 불러보았다. 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하지만 안쪽에서 들려오는 대답도 없었고, 말 없이 고개를 빼꼼 내미는 유정이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유정아! 관장님!"
여전히 너무 넓게만 느껴지는 한옥집 마당과 안채를 돌아다니며 나는 하염없이 유정이를 불렀고, 관장님을 불렀다. 하지만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완연한 쌀쌀함을 품고 있는 겨울바람이 나 말곤 아무도 없는 그녀의 본가를 황량하게 휩쓸고 지나갔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유정아! 어디있어? 대답해 줘!"
이 곳에 오면 반드시 유정이가 있을 것이라 믿었다. 마당에 허무한 메아리가 수차례 울렸지만 유정이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소리치는 내 눈가에 바보처럼 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유정아....!"
목이 갈라질 때까지 한옥집을 배회하다가, 나는 평상 위에 힘 없이 주저앉았다. 마지막으로 유정이와 함께 밥을 먹었던 바로 그 자리였다. 아름다운 추억을 남겼던 그 자리에 지금은 차가운 바람만이 불어오고 있었다.
*
주말에 서연이의 부모님을 뵙기로 한 것이 어느새 하루 전으로 다가와 있었다. 내가 많이 긴장했다고 생각했는지 서연이는 계속 전화를 걸어서 나를 안심시켜주려고 애썼다. 자신이 부모님께 계속해서 좋게 말을 하고 있다며, 가족들을 설득하려고 지금도 애쓰고 있다는 등.... 그런 얘기들을 하며 나를 달래려고 했던 것 같다.
- 긴장하지 말고 내일 약속한 시간에 만나. 내가 마중나가 있을게.
"응.... 아, 아니야. 몸도 불편한데 그냥 집에 있어. 내가 집으로 찾아갈게."
- 치, 같이 데리고 들어가는게 아빠 엄마 눈에도 더 보기 좋을 것 같아서 그래.
전화를 끊기 전에, 서연이는 휴대폰 너머로 뽀뽀하는 듯한 소리를 들려주었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요새들어 그녀는 애정을 표현하는데에 더욱 거리낌이 없었다. 어쩌면 그게 아이에게도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 생각했을지도.
통화가 끝나자 나는 휴대폰을 손에 쥐고 의자에 몸을 기댄 채,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되는 걸까? 결국은 이 방향으로 흘러가는게 맞는 걸까? 언제나 유정이를 운명의 상대라고 생각해왔는데.... 그건 그냥 내 착각이었나?
전화가 울렸다. 서연이가 참 어지간히도 내 걱정이 되나보다. 이 늦은 시간에 전화가 오는걸 보니, 당연히 서연이일거라 생각하며 화면에 떠오른 이름도 확인하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
"나 괜찮아. 이제 그만 달래줘도 돼."
- 오빠.
그 순간, 나는 정말로 심장이 입으로 튀어나오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유.... 정아?"
- 잘 지내고 있나요?
유정이의 목소리였다. 내가 그토록 듣고 싶었던....
"유, 유정아. 진짜 유정이니? 지금 어디야? 어디서 뭐하고 있어? 나... 나는 네가...."
가슴이 쿵쾅거렸고, 목소리가 떨렸다. 말이 너무 횡설수설 나와서 내가 뭐라고 떠들고 있는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갈라지는 목소리로 한참 동안 유정이에게 지금 어디에 있는지, 그동안 왜 연락이 안된 건지, 학교엔 왜 안 나왔는지 등에 대해서 두서 없이 물었던 것 같다. 그 지극히 감정적인 동요를 유정이는 말없이 차분하게 듣고만 있다가, 쓸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 오빠....
"으응."
- 서연 언니 소식 들었어요.
"......."
들었구나. 짐작은 했지만 유정이의 목소리를 통해 들으니 돌덩이 하나가 마음 속에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 실은 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어느날 원룸에 갔을 때.... 때마침 바깥으로 나오는 오빠랑 서연 언니를 먼발치에서 보고 있었거든요. 확신할 순 없었지만 서연 언니의 모습을 보는 순간 한 눈에 짐작할 수 있었어요. 아이를 품고 있다는걸.... 그리고 얼마 전에 자퇴 신청을 하러 학교에 갔을 때 소문을 듣고는 확실히 알 수 있었죠.
"그, 그럼 넌 그것 때문에 그 동안....."
- .......
유정이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나는 문득 불안해졌다. 강해보이지만 실은 누구보다 여린 유정이의 속을 알고 있기에, 그녀가 이런 상황에 마주하여 무슨 생각을 할지 나로서도 대강 짐작이 갔다. 그래서 너무도 불안했다.
- 오빠, 나는 내일 일본으로 떠나요.
"뭐?"
깜짝 놀라 눈에서 흐르던 눈물마저 멎어버렸다. 유정이는 담담한 말투로 계속 말했다.
- 아버지와 함께 일본으로 돌아갈 거에요. 얼마 전에 아버지와 오빠가 나누었던 얘기를 저도 전해들었어요. 오빠도 짐작하고 있었죠....? 내가 곧 떠날 것이란걸.
"하, 하지만 이렇게 빨리...."
관장님께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그 시기가 이렇게 빨리 찾아올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따져 물으려다가 나는 멈칫하고 말았다. 설마 나 때문에 일부러 빨리 떠나려는 걸까....?
- 오빠, 나는....
"가지 마, 유정아! 난 아직...."
목소리가 이어나오지 않았다. 뭐라고 말해야 좋을까? 아직 난 너를 버린게 아니라고? 아직 서연이와 결혼한게 아니라고? 그런 구질구질한 이야기를 늘어놓아야 하는 걸까? 내 이런 고민에도 유정이는 차분하게 자신이 하려던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 오빠, 나는 가족의 품으로부터 오랜 시간을 떨어져 살아봤기 때문에 잘 알 수 있어요. 아이에게는.... 부모의 품이 꼭 필요해요. 곧 태어날 어린 아이라면 더더욱 말이에요....
"유정아....."
- 예전에 나와 했던 약속을 기억하나요? 내가 어디에 있든지 내 곁에 있어달라고 했던....
유정이가 내 모습을 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나는 바보처럼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유정이는 보지 않고서도 내 대답을 들은 것 같았다.
- 그 약속, 못 지켜줘도 난 오빠를 절대 원망하지 않을게요. 대신 마지막으로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줬으면 해요.
"뭐, 뭐든지 좋아.... 어서 말해 줘."
- 내일 공항으로 와줄 수 있나요?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얼굴을 보고 싶어요. 그리고 나도.... 오빠에게 꼭 해야 할 이야기가 있어요.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유정이가 불러주는 항공편의 시간을 손에 받아적었다. 혹시라도, 만에 하나 그것을 잊어버릴까봐 잉크로 새기고 또 새겼다.
"물론이야.... 꼭 갈게. 무슨 일이 있어도 갈 거야. 난 널...."
- 아직도 절 사랑하나요?
지금에 이르러서는 너무 잔인한 질문이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아이를 배에 품고 있는 서연이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 감정을 속일 수는 없었다....
"사랑해. 정말 사랑해."
- 그러면.... 내일 꼭 나를 보러 와줘요.
유정이는 그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 그녀에게로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돌아온 목소리라곤 전화가 꺼져있다는 기계의 알림음 뿐이었다.
"유정아."
나는 망연자실하게 그녀의 이름을 되뇌이며 책상에 얼굴을 파묻었다. 밤은 계속해서 깊어가고 있었다.
- 다음 화에 계속 -
처음에 글을 쓰기 시작할 때, 1부의 마무리가 50장 정도에서 끝날 것 같다는 예상을 하긴 했었는데
신기하게도 그게 딱 맞아떨어질 것 같네요
다음 49장에서 성진의 이야기가 마무리되고, 50장은 1부 에필로그로 뵙게 될 것 같습니다
마지막까지 화이팅 하겠습니다
늘 감사합니다 독자분들... ^^
- 이 소설은 소.라.넷(sora.net) 작가 "상상의신비"가 연재 중인 작품입니다.
무단 불펌을 삼가해 주시길 부탁드리며, 퍼가시더라도 출처와 작가명을 꼭 남겨주십시오.
창작가들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이자 도리입니다.
* 1부 48장
언제부터인가 나는.... 서연이가 날 위해 피임약을 먹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왔던 것 같다. 구태여 내가 신경을 쓰지 않더라도 그녀가 알아서 그렇게 하고 있으리라고 나는 줄곧 믿었다.
그녀는 언제부터 약을 입에 대지 않았던 걸까. 대체 어느 시점부터 그녀가 그렇게 마음 먹었는지 스스로 되짚어보려다, 나는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내가 추잡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그걸 알아서 뭐하게....?"
그걸 알아내면, 그 시점으로 되돌아가서 그 일을 없었던 것으로 지워버리려고?
"병신, 쓰레기, 한심한 새끼...."
극도의 자기혐오가 꾸역꾸역 솟구쳐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품 속에서 타임 리와인더를 꺼냈다. 어차피 옆집 여자가 사라진 시점 이전으로는 시간을 되감을 수 없으니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기도 했지만, 아마 그게 가능했다 할지라도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이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거냐?"
시간을 되감는 것으로 모든 일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아니, 실은 애초에 시간을 되감는 행위로 무언가를 해결해 보겠다는 생각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피로 얼룩진 시간을 거쳐서 간신히 그걸 깨달았음에도 내가 해결하기 힘든 상황에 직면하자 다시 한번 그 능력에 대해 떠올리고 있는 내가 너무도 싫었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조용히 옷장을 열었다. 그리고 가장 깊숙하게 느껴지는 서랍 안쪽에다가 타임 리와인더를 마구잡이로 밀어넣고는, 그것이 눈에 보이지 않도록 옷가지들을 마구 쑤셔박았다. 몸에서부터 그 은백색의 초시계가 완전히 떨어져 나갔음을 실감하고나서 나는 옷장 문을 닫았다.
그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나는 저 시계를 꺼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스스로에게 하는 약속이었다. 여기서 타임 리와인더를 이용해 서연이의 임신을 없던 일로 해버리고 나면, 말이 좋아서 "없던 일"이지 사실 그것은 내 손으로 한 생명을.... 그것도 내 아이를 죽여버리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구역질이 치밀었다. 낙태 수술을 받는 것과 그게 도대체 뭐가 다르단 말인가?
옷장 문을 닫고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던 나는, 고개를 돌려 잠든 서연이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퉁퉁 부은 눈을 한 채로 얌전히 잠들어 있는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결국 오늘도 그녀를 내 방 침대 위에서 재워야만 했다. 그녀를 위해 이별해야겠노라고 기껏 다짐했지만 나는 그녀를 이 방 밖으로 보내주는 것조차 하지 못한 것이다.
"서연이는 왜 약을 먹지 않았던 걸까?"
나를 위해서 피임약을 먹는다고 말했던 서연이.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그녀가 약을 먹지 않았던 것은 그저 실수였을까, 혹시나 그녀가 일부러 그랬던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자니 세상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처럼 어지럽고 괴로웠다.
나는 그런 생각들을 그만두었다. 지금 그런 생각을 하는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아니, 의미가 있더라도 사실은 그런 생각을 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눈 앞에 닥친 현실을 그저 뇌리에 새기고 받아들이는 것만으로도 너무 힘겨웠다. 나는 기계처럼 판단도, 사고도 멈춘 채 그저 서연이가 내게 했던 말들을 머릿속에서 계속 되뇌었다.
"지난 주에 병원에 다녀왔어.... 3주차야. 자기한테는 언제 말해야 할지 계속 고민하고 있었어."
실타래가 끊어진 인형처럼 나는 뻣뻣해진 몸으로 서연이를 가만히 끌어안고만 있었다. 그녀는 내 품에 안긴 채로 그동안 내게 전하지 못했던 말들을 털어놓았다. 그녀가 그동안 얼마나 고민했을지, 혼자서 당황해 했을지를 나는 충분히 느낄 수 있었음에도.... 대답 한 마디 제대로 해줄 수가 없었다.
3주차라니....? 그 순간 마음 속에서 극도의 분노가 다시 한번 치솟아 오르는걸 느꼈다. 서연이를 향한 분노가 아니었다. 지환이와 한수, 그리고 현아에 대한 분노였다. 만약 서연이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들이 서연이를 강간했을 때, 이미 그녀의 뱃속엔 우리의 아이가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자칫 잘못했으면 서연이 뿐만 아니라, 뱃속의 아이에게까지 큰 일이 생겼을 것이라 생각하니 심장이 철렁 내려앉으며 손이 떨려왔다. 죽일 놈들.... 만약 그랬다면 정말로 놈들은 죽어야 마땅했다. 당장이라도 가서 또 한번 놈들을 죽여버릴까? 어쩌면 죽여버리고 나서 시간을 되감지 않는다면 좀 더 화가 풀릴지도 몰라.... 그런 생각들을 하다가, 어느 순간 내 스스로가 너무도 끔찍하게 느껴져 나는 몸서리를 쳤다.
"낳을 거야.... 낳고 싶어."
서연이가 그렇게 말했을 때, 마치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는게 싫었다. 부끄럽게도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유정이의 얼굴을 떠올렸다. 서연이가 나의 아이를 가졌다는데. 나는 서연이의 몸을 걱정하기 이전에 다른 여인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게 너무도 나를 미치게 만들었다.
"자기야, 무슨 생각해....?"
언제부터 깨어있었던 걸까. 서연이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그녀는 여전히 나를 "자기"라고 부르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침대로 다가가 그녀가 누운 머리맡에 앉았다. 어둠 속에서 나를 올려다보는 서연이의 두 눈망울....
"미안해. 나 때문에 깼어?"
"아니야. 꿈을 꿔서 그래."
그녀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너무나도 안쓰러워 나는 그녀의 얼굴을 닦아주며 물었다.
"무슨 꿈이었는데?"
"자기가 날 버리고 떠났어. 나랑 아기를 버리고..... 그냥 그렇게 가버렸어. 그래도 나는 아이를 키웠어. 언젠가 자기가 돌아올거라고 생각하면서 말이야. 그렇게 기다리다가, 너무 지쳐서 깨버린 것 같아."
"........"
어쩌면 그녀는 그런 꿈을 꾸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저 나를 더욱 붙들고 두고 싶었던 것일 뿐. 하지만 그런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미안해, 서연아."
"미안하다고 하지 마."
한번 현실적으로 생각해 보았다. 만약 서연이와 아이를 낳아서 키우게 된다면, 아마 우리는 결혼을 해야만 하겠지? 아이가 있는데 계속 연인 사이로만 지낸다는 것도 말이 안 되는 거니까.... 어쩌면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타임 리와인더가 도움이 될 지도 몰라. 적어도 돈 걱정을 할 필요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다른 문제들은?
"유정이는....?"
유정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관장님에게서 들었던 이야기들도 떠올랐다. 서연이와 결혼을 하게 되면 유정이와는 어떤 형태로든 더이상 만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결국 그녀는 자신의 가문으로 돌아갈 것이고, 거기에서 얼굴도 모르는 약혼자를 만나, 생각해 본 적도 없는 결혼을 하겠지.
"뭐야, 이게?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거지...? 도대체 왜...."
유정이가 원치 않는 결혼을 하게 되는걸 나는 두고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연이를 이대로 버리는게 과연 가당키나 한가? 이 시점에서, 그녀와 헤어지는 것은 더이상 단순한 결별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곧 나의 아이, 한 생명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느냐 없느냐의 선택이었다.
만약 그것을 선택이라고 표현한다면, 지금껏 살아오면서 내게 이만큼 가혹한 선택은 없었다. 무엇을 선택하더라도 나는 후회하게 될 것이고, 또한 누군가는 상처 입을 것이다. 신이라는 존재가 정말로 있다면 어떻게 이런 장난을 칠 수 있을까?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자기.... 나 안아주면 안 돼?"
"......."
영리한 여자이니만큼, 서연이는 내가 지금 힘겨운 갈등의 기로에 서 있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을 것이다. 내게서 온갖 고뇌와 번민이 느껴질 텐데도 그녀는 옆에서 자꾸만 내 옷깃을 잡아당겼고, 어린아이처럼 칭얼거렸다. 하지만 나는 그런 그녀를 미워할 수 없었다. 나는 품 안으로 그녀를 힘주어 끌어안았다.
"다음에 병원 갈 때.... 같이 가보면 안 될까? 응?"
"알았어. 그러자...."
왠지 그 순간의 그녀는, 그런 사소한 약속을 통해서 우리의 관계를 조금이라도 단단히 묶어두고 싶었던 것 같았다. 다시는 내 입에서 이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게끔 만들고 싶었던 것이리라.
서연이의 말 속에 담긴 의미를 대강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그녀의 부탁에 승낙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사람 새끼로 태어난 이상 차마 그 순간 거절의 대답을 할 수는 없었다.
"키스해 줘."
포옹을 하고, 약속을 했다. 하지만 그녀의 요구는 하나둘씩 더 늘어나고 있었다. 점점 더 뚜렷한 형태로,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이대로 계속해서 서연이의 요구를 들어주다보면 결국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 될지 나는 알고 있었기에 망설였다.
족쇄라고 여기기 싫었지만, 만약 서연이의 마음을 거절하지 못한다면 나는 결국 유정이와 이별하게 될 것이다. 생각하기 싫은 현실이었지만, 그것만큼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하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연이의 입술이 내 입술을 덮었다. 어떻게든 나에게서 조금이라도 더 많은 애정을 느끼려 하는 그녀의 애절한 몸부림을 나는 떨쳐낼 수 없었다. 뻣뻣하게 머뭇거리던 내 입술이 서연이의 입술을 어색하게 감싸고 들자, 그녀는 곧장 혀를 내밀어 내 혀를 휘감아 왔다.
서로의 혀가 얽히는 와중에 서연이는 조용히 손을 내밀어 나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내 손을 이끌어 자신의 젖가슴 위에 살며시 올려놓았다. 내가 아무리 세상에 둘도 없는 병신 머저리라고 해도 그녀가 지금 나와 섹스하길 원한다는 사실을 모를 만큼 멍청하진 않았다. 마음 속으로는, 손이 너무도 떨려와서 그녀의 몸을 어루만질 수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자.... 하고 싶어."
내 머뭇거림이 다른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했는지, 그녀는 결국 답답한 내 모습에 자신의 입으로 직접 그 말을 꺼냈다. 독하게 거절을 하지도 못하는 주제에, 나는 머뭇거리며 괜히 애매한 대답을 던지고 만다.
"괜... 찮을까?"
"부드럽게 하면 괜찮을 거야. 우리 아기 놀라지 않도록.... 평소하곤 다르게 조심해서 하자."
우리 아기.... 그 우리 아기라는 표현이 나로 하여금 얼마나 복잡한 감정을 느끼게 했는지 서연이는 알까.
급류에 휩쓸리듯이 우리는 무작정 몸을 섞기 시작했다. 아마 그것은 내가 지금까지 서연이와 했던 섹스들 중에서 가장 소극적인 섹스였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 섹스는 나와 서연이가 여지껏 맺어왔던 관계의 방식을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기도 했다.
육체의 감각, 강렬한 자극, 뒤섞이는 격정.... 처음으로 그런 것들을 모조리 내려놓은 채 우리는 그저 서로의 존재에 대해 집중했다. 쾌락을 우선으로 하지 않는 섹스. 나와 서연이가 그런게 가능할 거라고 어디 상상이나 했을까. 하지만 그 날 우리는 그런 섹스를 했고, 서연이가 그런 나의 변화로 인해 행복했는지는 모를 일이다.
"아...!"
어디를 어떻게 애무했는지도 모르겠다. 심지어 무슨 자극을 받고 내 물건이 빳빳하게 세워졌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저 내 물건이 지극히 조심스럽게 서연이의 몸 안으로 들어갔을 때, 그녀가 나지막한 탄성을 질렀다는 것이 기억 속에 희미하게 남아있다.
"괜찮아....? 안 아퍼?"
"으응.... 괜찮아. 좋아."
"불안해. 애가 다치면 어쩌지?"
임산부가 매사에 조심을 해야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막상 이런 상황이 되고보니 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조심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나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다는걸 깨달았다. 이런 덜떨어진 놈이 애아빠랍시고 뱃속에 생명을 잉태시켜놨는데, 서연이는 얼마나 막막했을까 생각을 하니 눈물이 핑 돌았다.
나는 그 지옥 같았던 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서연이와의 섹스는, 한편으로는 나로 하여금 그 트라우마을 되새기게 만들 수 밖에 없는 과정이기도 했다. 나는 그걸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내 몸 아래에서 나를 조심스럽게 끌어안는 서연이의 얼굴을 보니.... 처음으로, 그 날의 다른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괜찮아."
그녀는 자신의 몸이 망가져가면서도,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그런 말을 했었다.
"힘들지만 괜찮아. 참을 수 있어. 나중에 자고 나면 다 잊어버릴거야. 난 자기랑 할 때가 가장 즐겁고 행복해. 내 마음 알지? 그러니까 불안해 하지 마. 무서워 할 필요도 없어."
눈가에 맺힌 눈물이 결국 참지 못하고 아래로 흘러내렸다. 그녀의 말대로 그녀는 결국 그 기억을 잊어버렸지만, 나는 그녀의 마음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 기억을 떠올리는 것이 여전히 너무도 힘들고 괴로웠지만, 그 와중에도 그녀가 내게 보여주었던 헌신적인 사랑을 나는 아마 평생토록 기억할 것이다.
"미안해, 서연아...."
"왜 그래, 자기야. 왜 울어?"
"다시는 널 울리고 싶지 않은데. 네가 눈물 흘리는 모습을 두번 다시 보고 싶지 않은데...."
바보같이 나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한번 울음이 터지고 나니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펑펑 흘렀다. 언제 이렇게 울어봤나 싶을 정도로 나는 하염없이 울었다. 떨리는 내 몸을 서연이의 두 팔이 감싸 안았다. 그녀는 내 등을 말없이 쓸어주었고, 나는 서연이의 품에서 울다 지쳐 그렇게 잠이 들었다.
아마.... 그 날도 가족에 대한 꿈을 꾸었던 것 같다.
*
그 어떤 일이 일어나도, 시간은 공평하게 흘러간다.
어느새 한 주가 흘러가 토요일이 되었다. 현주를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우리는 여느 때처럼 만나서 함께 거리를 걸었다. 데이트를 하는 내내, 나는 처음으로 현주를 만났을 때를 떠올려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그녀와의 만남에 이제와서 다른 의미부여를 하고 싶진 않았다. 나는 현주를 사랑했고, 현주도 나를 사랑해주었다. 그 자체로 우리의 만남은 소중한 것이었다. 나는 딱 거기까지만 생각하기로 마음 먹었다.
"헤어지자."
"벌써? 이제 겨우 초저녁인데.... 좀 더 있다 가도 돼."
아파트 입구에 다다랐을 때, 나는 현주에게 말했다. 왠지 그녀도 서연이와 마찬가지로 기껏 마음 먹고 내뱉은 말에 순 엉뚱한 대답을 했다. 어쩌면 여자들은 본능적으로 치명적인 말을 회피하려는 감각을 지니고 있는건 아닐까? 나는 어쩔 수 없이 다시 못 박았다.
"그게 아니라.... 우리 이제 그만 만나."
"뭐?"
이별하는 과정의, 특히 이런 순간의 괴로움을 쉽게 견딜 수 있는 사람은 그리 흔치 않을 것이다. 덤덤하게 여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굳어지는 현주의 얼굴을 보는건 역시나 힘든 일이었다.
"갑자기 무슨 소리야....?"
"갑자기가 아니야. 너는 나 같은 사람을 만나서는 안 돼."
서연이가 그랬듯이, 그녀도 결코 짧지 않은 지독한 침묵에 빠졌다. 어쩌면 내가 예전에 처음으로 그녀에게 이별하자는 것과 비슷한 이야기를 했을 때부터, 그녀는 내 입에서 재차 이런 말이 나올 것을 늘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화내거나 눈물을 흘리는 대신에, 지금껏 내게 한번도 보여준 적이 없는 딱딱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결국 나보다 서연 씨를 택했다는 거지?"
"그런게 아니야. 진작 이랬어야 하는걸 욕심 때문에 미뤄왔던 거야. 나는 너에게 한번도 좋은 남자친구였던 적이 없었기 때문에.... 아름다운 이별을 하는건 힘들겠지만, 그래도 더이상 미루지 않는게 너에 대한 마지막 배려라고 생각해."
그 순간 얄궂게도, 바람이 불었다. 세찬 바람이 불어와 나와 현주 사이를 가르고 지나갔다. 현주라면 아마도 내게 할 말이 많을 거라고 생각했다. 나는 세월이 흐르고나서 현주의 마음 속에 내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 지가 조금은 궁금했다. 내가 그녀의 아픈 상처를 치료하는데 도움을 주긴 했지만, 그것이 과연 그녀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을 수 있을지는 모를 일이었다. 그것을 결정하는건 현주의 몫이었다.
"좋은 남자친구였어."
"응?"
하지만 현주는 내가 짐작했던 그 수많은 말들을 대신해서, 그렇게 답했다.
"좋은 남자친구였다구. 난 그렇게 생각해."
"현주야...."
마지막으로 한번 안아준다거나, 웃어준다거나 하는 것은 힘들거라 생각했다. 나는 현주에게 그럴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 여겼다. 하지만 현주는 그런 나를 대신해서 내게 다가오더니, 아주 가볍게 나를 살짝 한번 안아주었다.
"잘 지내. 그리고 오빠도 날 좋은 기억으로 남겨줘."
"......."
내게 있어 현주는.... 좋은 사람이었다. 두 말할 필요도 없이 그녀는 내게 과분할 정도로 좋은 연인이었다. 그녀는 마치 내가 데이트를 마치고 그녀의 집 앞에서 그녀를 보내주었던 것처럼, 그렇게 평소와 다름 없는 모습의 이별을 택했다. 엘리베이터를 타러 들어가는 현주의 뒷모습에 대고 나는 그녀에게 마지막 한 마디를 전했다.
"좋은 기억으로 간직할게. 꼭...."
그녀가 그 말을 들었을 지는 모르겠다. 현주의 모습이 사라진 자리를 나는 한동안 계속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녀와의 기억들이 남아있는 이 아파트 단지의 모습이 내 마음 한 켠에 오래도록 남을 것 같았다. 왠지 또 바보처럼 울어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나는 온갖 감정의 덩어리들을 바닥에 내려놓고, 걸음을 옮겼다.
단지를 나서는 길에 그녀를 마주치게 된 것은, 돌이켜보면 다행스런 일일지도 몰랐다. 어찌됐든 그녀와의 관계에서도 나름대로의 마무리가 필요했을테니 말이다. 어쩌면 그녀는 아까부터 줄곧 우리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던 듯, 너무도 자연스럽게 나타나 내 눈 앞에 섰다.
"현아 씨."
그녀는 말이 없었다. 그녀의 얼굴을 보았을 때, 나는 더이상 미칠 듯한 분노가 솟아오르지 않는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고, 또 그 사실에 스스로 감사했다.
피 튀기던 모습 앞에 비명을 지르던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비록 그녀는 그 기억을 잊어버렸겠지만, 여전히 그녀는 내게 있어 불쌍한 여인이었다. 내가 만났던 여인들 중에 가장 위험하고, 가장 어리석고, 가장 안쓰러운 여인.
"당신은 결국 이런 식으로 내 동생을 버리는 군요."
무미건조한 분노. 살아오면서 수많은 남자들을 미워했지만 진심으로 증오했던 것은 내가 겨우 두 번째라고 말했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누군가에게 그토록 미움 받는 존재가 된다는 것은 뭐랄까.... 마치 일부러 0점 짜리 시험지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었다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순전히 찍기만 해도 만들기 힘들다는 그 0점 짜리 시험지. 왜 구태여 그걸 만들어보려고 애썼던 걸까? 어디다 자랑이라도 하고 싶었던 걸까?
"현아 씨, 부탁이 있어요."
나는 그녀의 손 끝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다행히 그녀가 그걸 뿌리치지는 않았다.
"현주는 행복해질 수 있어요. 나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나면 틀림없이 행복해 질 거에요.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현아 씨가 달라져야만 해요. 지금의 모습 그대로 살아가면 안 돼요."
그녀는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답할 가치가 없다고 여겼을 수도 있고, 여전히 내게 이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어차피 받아들이는건 그녀의 역할이었고, 판단하는 것도 그녀의 몫이었다. 나는 내가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최선의 도리를 다할 뿐이었다.
아마도.... 분명 내심으로는, 그녀도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녀의 잘못된 선택이 결국엔 현주를 두 번이나 위험으로 몰고 갔지만 나는 애초에 그녀가 그 정도로까지 어리석은 인간은 아닐 거라 믿었다. 그저 나에 대한 분노로 잠시 눈이 멀었을 뿐이리라. 마음 속에 담아놓은 과거의 잔재만 천천히 내려놓을 수 있다면, 아마 현주 뿐만 아니라 현아 씨 본인도 행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역할이 내게 달린 것은 아니었다. 지극히 무책임하지만 나는 이만 그녀들의 앞에서 사라져줘야 했다.
"마음의 짐을 내려놓으세요. 그리고 당신의 행복을 찾으려 노력하며 살아보세요. 당신은 현주의 행복을 보는 것이 자신의 행복이라 여기고 있을지 모르지만, 현주도 분명히 당신이 진정으로 행복해지는 모습을 보고 싶어 할 테니까요. 미워하지도 않는 남자들을 애써 미워하려고 하는 삶은 이제 그만 두세요. 그런 미움을 마음 속에서 스스로 만들어내면서 살지 말아요. 당신을 위해서, 또 현주를 위해서...."
여전히 아무런 대답이 없는 그녀. 나는 잡았던 그녀의 손끝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등을 돌렸다.
사라지는 내 모습을 보면서도 현아는 끝내 말이 없었다. 나는 왠지 모르게 언젠가는 그녀와 한번쯤 더 마주치게 될 일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지만, 생각과는 다르게 그것이 우리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 이후, 그녀의 소식을 접한 것은 신기하게도 먼 훗날 학과 동문회에서였다. 그 자리에서 나는 우연히 지환이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녀석은 어느 보험 회사의 젊은 여성 설계사를 강제로 겁간한 혐의를 받고, 증거자료로 호텔 스위트룸에서 촬영된 몰래카메라의 영상이 제출되어 빼도 박도 못하는 실형을 선고받았다고 한다.
학과 동창들의 입소문에 의하면, 지환이를 고소한 그 여성 설계사가 너무도 치밀한 증거를 들이민데다가 보통 독한 여자가 아니어서 재판 끝에 지환이를 감옥으로 보내버렸다며, 하필 건드려도 그런 여자를 건드렸다고 딱하게 여기는 눈치였다.
그들은 정말로 지환이가 그 여성 설계사를 추행한 것인지, 아니면 지환이가 단순히 꽃뱀에게 잘못 물려 인생을 망친 경우인지를 두고 자기들끼리 옥신각신거렸고, 술자리에서의 이야기가 대개 그렇듯이 결국엔 그 또한 하나의 술안주로 전락해버렸다.
우연히 듣게 된 동창들의 그 이야기에서, "현아"라는 이름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았지만 나는 지환이를 고소한 그 여성 설계사의 정체를 알 수 있을 듯 했기에 일부러 말을 아꼈던 것 같다. 좌우지간 그 때 나는 오랜 세월 기억에 묻어두었던 그녀의 이름을 한번 더 끄집어 낼 수 있었고, 그 이후로는 이름조차 떠올릴 일이 다시는 없었다.
*
기말고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곧, 나의 졸업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학번은 달랐지만 학년은 같았기에, 아마도 나는 서연이와 함께 졸업을 하게 될 것이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열심히 시험 공부에 임했다. 아니, 임하려고 했다. 비록 공부에 집중이 안 되는 상황인게 너무도 당연하긴 했지만 그래도 노력만은 해보려고 했다. 아마도 이번 학기에서 중간고사까지의 내 성적은 완벽에 가까울 것이다. 중간고사를 치를 때는 타임 리와인더를 썼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젠 그러고 싶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그 날 밤, 옷장 속에 타임 리와인더를 묻어버린 이후로 다시는 그것을 도로 꺼내지 않기 위해 나는 마음을 다잡고 있었다. 글쎄, 어쩌면 살아가면서 정말로 힘든 순간이 온다면 한번 쯤은 크게 갈등할 지도 모르지.... 하지만 내 노력으로 해결 가능한 일이라면 웬만해선 그러고 싶지 않았다.
"너무 열심히 하는거 아니야? 쉬엄쉬엄 해."
서연이가 내 책상에 손수 타 온 커피 한잔을 내려놓았다. 요새 들어서 서연이는 부쩍 잠이 늘었다. 처음엔 같이 공부를 해보려고 책상 앞에 나란히 앉았던 그녀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또 요새 그녀는, 함께 있다보면 입덧을 자주 하곤 했다. 배도 서서히 눈에 띌 만큼 부풀어오르고 있었다. 평소 그녀를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아직까지는 살 쪘냐는 식으로 의아해하고 넘길 수 있는 수준이었지만, 아마 앞으로 점점 더 뱃속의 아이는 커질 것이고 주변 사람들도 자연히 알게 될 것이다.
지난 주에 나는 그녀와 함께 산부인과에 다녀왔다. 함께 사진을 보고, 아이의 윤곽을 보았다. 의사선생님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귀기울여 들었다. 나처럼 예비 신부의 손을 잡고 병원을 방문한 사람들도 드문드문 보이긴 했지만, 서연이처럼 젊고 아름다운 산모를 데리고 온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불편하기도 했고, 부끄럽기도 했다. 하지만 서연이 앞에서는 내색하지 않았다.
"자기, 있잖아...."
"응."
어느새 졸음에서 잠깐 깨어난 서연이가 조심스러워하며 내 눈치를 살폈다. 서연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할 때엔 집중해서 들어주는 것이 요새들어 버릇이 되어버렸다. 나는 펜을 내려놓고 책을 덮었다. 그러자 서연이가 머뭇거리며 말을 꺼냈다.
"아빠 엄마가, 자기를 만나고 싶어해. 집에 데려와보라고...."
"그러셨어?"
서연이의 집에서 얼마나 큰 난리가 났을지, 안 봐도 훤한 일이었다. 대학도 아직 졸업하지 않은 꽃 다운 나이의 딸이 누군지도 모를 놈의 아이를 덜컥 배어왔으니.....
그녀의 부모님이 받으셨을 충격과 분노를 생각하면, 솔직히 당장이라도 그 분들이 자취방으로 달려와 내 뺨을 후려치지 않는 것이 놀라울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선은 나를 집으로 불러서 이야기를 해보겠다고 하시는걸 보면, 서연이의 부모님이 얼마나 참을성 있는 분들인가를 말해주는 극적인 단면이기도 했다.
"그리고 나도 자기네 부모님을 한번 뵈어야 하지 않을까?"
"음...."
그러고보면 타지에서 자취 생활을 하면서도, 부모님께 연락을 드린지가 참 오래 된 것 같다. 하지만 기껏 오랜만에 연락해서 드린다는 소식이 "손자를 안겨드릴 것 같습니다."라면 너무하지 않은가. 아직은 자신이 없어 그동안 집에 알리기 꺼려했던 것인데, 서연이는 용기를 내어 부모님께 말씀드렸다니 참 놀라운 일이었다.
그녀의 용기가 감탄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론 어쩐지 그녀가 나보다 더 적극적으로 지금의 이 현실을 받아들이려 애쓰는 것 같아서 마음이 무거웠다. 보통은 남자 입장에서 여자가 불안해하지 않도록 이끌어줘야 마땅한 것일 텐데.... 이런 내가 만약에 서연이와 가정을 이룬다 쳐도, 정말 그녀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까?
"미안해. 공부하는데 내가 또 괜히 심란하게 했지?"
"아냐. 그런 말 하지마."
나는 서연이의 배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아이를 지우고 싶지 않았다. 그건 나 또한 그녀의 마음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 사실을 받아들이려면 필연적으로 또 하나의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유정이는.... 어떻게 지낼까?"
어느 날부턴가, 유정이는 학교에 나오지 않고 있었다. 그녀가 머물렀던 같은 건물의 원룸으로 찾아가봐도 유정이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이따금씩 유정이가 없는 그녀의 방 안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밤이 늦어서야 다시 내 방으로 돌아오곤 하는 것을 반복하곤 했다.
서연이는 유정이가 나와 같은 건물에 잠깐 동안 살았었다는 사실을 끝내 알지 못했다. 나도 구태여 그녀에게 그걸 밝히고 싶지 않았다. 다만 유정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그게 미치도록 궁금할 뿐이었다.
아마도 그녀는 그 눈부시게 아름다운 한옥집에서 관장님과 함께 머물고 있을 것이다. 이 건물이 아니면 그녀가 지낼 곳은 그 곳 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내가 유정이를 만나기 위해 그녀의 원룸으로 찾아가는 것과, 그 한옥집을 다시 찾아가는 것은 차원이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적어도 그 한옥집을 다시 내 발로 방문할 때에는, 관장님이 내게 하셨던 이야기에 대한 대답 정도는 스스로 결정한 상태여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럴 수 없었다. 뱃속에 내 아이를 품은 여인을 두고 관장님과 그 문제에 대해 논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우선은 서연이와 양가 부모님을 만나뵙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만 신경을 썼다.
내가 두 가지 기로에서 어떤 갈등을 하고 고민을 하든, 내가 맞닥뜨려야 할 문제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눈 앞에 닥치는 대로 우선 중요한 것들을 해결해 나갈 수 밖에 없다. 어차피 그 문제들은 싫으나 좋으나 해결되어야만 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피한다고 해서 피해지는게 아닌, 그리고 피하려고 해서도 안 될 문제들.
그래서 나는 유정이를 보러가고 싶은 너무도 간절한 그 바람을.... 애써 잠시동안 마음 속에 묻었다.
"자기야."
"응."
서연이가 내 어깨에 얼굴을 기대며 팔을 둘러왔다.
"나.... 우리 사이가 그렇게 시작이 아름답지 못했다는거 알고 있어. 그리고 지금도 내가 아이를 핑계로 자기를 내 옆에 묶어두려 하고 있는 것 같아서 마음이 불편한 것도 인정해. 하지만 난 자기를 정말 사랑해. 자기가 다른 모든 것들을 잊고 나와 함께 해준다면, 우리가 누구보다 행복하게 살 수 있을거라고 나는 믿어. 자기 마음 속에 아직 누군가가 남아있다는거 알고 있지만 그래도 자기가 내 곁을 지켜주기로 한다면 나는 행복할 거야. 시간이 지나면 해결 될 테니까."
"........"
시간이 지나면.... 정말 그럴까?
"그러니까 자기가 내 마음을 믿어줬으면 좋겠어. 지금 내가 보여줄 수 있는게 이 마음 밖엔 없지만, 그래도 자기가 계속 혼란스럽다면 자기를 사랑하는 내 마음에 대해서 떠올려 줘. 그러면 아마 조금은 편해질 거야...."
비록 나는 내 명확한 의지로 결정을 내리지 않았지만, 물고기가 물살에 휩쓸려 가듯이 나는 그렇게 서연이의 곁에 머물러가고 있었다. 그게 자의든 타의든 나는 서연이의 곁을 떠날 수가 없었고, 그것은 그 자체로 이미 하나의 선택이 되어버린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그 당시의 내게는 너무도 어려운 문제였다....
*
기말고사가 끝났고, 겨울방학이 찾아왔다. 말이 겨울방학이지 나와 서연이에게는 졸업이나 다름 없었다. 내년에 졸업식이 남아있긴 하지만 아마 그 때까지는 이제 학교에 갈 일이 좀체 없을 것이다.
학기 마지막 무렵에, 서연이는 결국 학회장 자리를 다른 누군가에게 넘겼다. 올해 행사들도 거의 마무리 되었기 때문에 남은 일이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연말 결산이나 다음 년도 회장 선출 등의 중요한 일들이 몇 가지 남아 있었고, 서연이는 지금은 그런 문제에 신경 쓰는 것보다 태아의 건강을 먼저 챙기기로 결정한 것이다.
끝물에 이르러 역할을 넘겨받게 되었으니 이번에 자리를 맡게 된 학회장은 사실 후임이라기보단 대리에 가까운 개념이었지만 어쨌거나, 이 소식을 통해 우리 과의 학회장은 올해 총 두 번이나 교체가 되었다는 점으로 잠시 동안 교내에서 구설수에 올랐다.
이 사건의 여파는 나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왜냐하면 서연이가 학회장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과정에서 그녀의 임신 사실이 학과 내에 파다하게 퍼져버렸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입소문을 통해 알게 된 것이겠지만 일부 지인들의 경우는 서연이가 직접 이야기를 해주기도 했기에, 그것은 이제 학교 사람들에게도 빼도 박도 못하는 사실이 되어버렸다.
누군가는 경악했고, 누군가는 부러워했고, 누군가는 그저 수군거렸다. 하지만 나는 귀를 닫고 신경을 꺼버렸다. 아무 상관도 없는 이들이 뒤에서 재잘대며 입방아를 찧어대는 것이야 한 때 내가 지겹도록 겪은 일이었으니 말이다. 나는 그저 두 가지가 걱정될 뿐이었다.
첫 번째는 서연이가 느낄 심적 부담이었다. 아무래도 그런 입소문에 있어서는 남자보단 여자 쪽이 느낄 부담이 더 크지 않겠는가. 하지만 의외로 서연이는 그런 문제들에 있어서 무덤덤한 반응이었다. 어차피 알게 될 사실을 사람들이 조금 일찍 알게 된 것이 뭐 그리 대수겠냐고 그녀는 과감히 받아넘겼다. 이전에도 서연이의 강한 멘탈에 이따금씩 놀라곤 했던 기억이 있지만, 다시 봐도 그녀는 정말 강한 여인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이 이야기를 듣고 나서 유정이가 보일 반응이었다. 아마도 이것이야말로 내가 그동안 가장 두려워했던 문제일 것이다. 새삼스럽게도 나는 서연이의 임신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 유정이와 한번도 만난 적이 없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그녀는 이미 이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을까? 그래서 어쩌면 나를 보지 않으려 하는 걸까? 얼굴을 못 본 것이야 둘째치고, 우리는 그동안 전화나 메시지조차 주고 받은 적이 없었다. 나는 그동안 유정이가 가문의 문제로 바빴기 때문일 것이라며 스스로를 애써 달래왔지만, 사실 조금만 생각해봐도 그건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유정아."
유정이가 보고 싶었다. 사무치도록 그녀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겨울방학 첫 날에, 나는 결국 더 참지 못하고 유정이를 찾아서 예전에 내가 잠시 신세를 졌던 그 한옥집을 찾아나섰다.
유정이가 내려주었던 그 정류장에서부터 시작해, 그녀가 나를 오토바이로 태워주었던 길을 최대한 더듬어가며 거슬러 올라갔다. 걸어서 가기에는 먼 거리였지만 나는 아랑곳 않고 두 다리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집을 찾아가는 그 여정의 가운데, 나는 왠지 익숙하게 느껴지는 넓고 고요한 풀밭을 만났다. 그 순간 눈에 눈물이 글썽이며 맺혔다. 그곳은 나와 유정이가 사랑을 나누었던, 그녀가 나의 상처를 보듬어주었던 소중한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바로 그 장소였다.
이정표도 표지판도 없이, 정처없이 걷던 내 눈에 산이 들어왔다. 관장님과 내가 함께 올랐던 그 싱그러운 녹빛의 산. 나는 정신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산 밑에 그림처럼 자리잡고 있는 한옥집이 보였다.
"유정아....!"
고요한 적막이 내리깔린 마당에 들어서서 유정이를 불러보았다. 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하지만 안쪽에서 들려오는 대답도 없었고, 말 없이 고개를 빼꼼 내미는 유정이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유정아! 관장님!"
여전히 너무 넓게만 느껴지는 한옥집 마당과 안채를 돌아다니며 나는 하염없이 유정이를 불렀고, 관장님을 불렀다. 하지만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완연한 쌀쌀함을 품고 있는 겨울바람이 나 말곤 아무도 없는 그녀의 본가를 황량하게 휩쓸고 지나갔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유정아! 어디있어? 대답해 줘!"
이 곳에 오면 반드시 유정이가 있을 것이라 믿었다. 마당에 허무한 메아리가 수차례 울렸지만 유정이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소리치는 내 눈가에 바보처럼 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유정아....!"
목이 갈라질 때까지 한옥집을 배회하다가, 나는 평상 위에 힘 없이 주저앉았다. 마지막으로 유정이와 함께 밥을 먹었던 바로 그 자리였다. 아름다운 추억을 남겼던 그 자리에 지금은 차가운 바람만이 불어오고 있었다.
*
주말에 서연이의 부모님을 뵙기로 한 것이 어느새 하루 전으로 다가와 있었다. 내가 많이 긴장했다고 생각했는지 서연이는 계속 전화를 걸어서 나를 안심시켜주려고 애썼다. 자신이 부모님께 계속해서 좋게 말을 하고 있다며, 가족들을 설득하려고 지금도 애쓰고 있다는 등.... 그런 얘기들을 하며 나를 달래려고 했던 것 같다.
- 긴장하지 말고 내일 약속한 시간에 만나. 내가 마중나가 있을게.
"응.... 아, 아니야. 몸도 불편한데 그냥 집에 있어. 내가 집으로 찾아갈게."
- 치, 같이 데리고 들어가는게 아빠 엄마 눈에도 더 보기 좋을 것 같아서 그래.
전화를 끊기 전에, 서연이는 휴대폰 너머로 뽀뽀하는 듯한 소리를 들려주었다. 이전에도 그랬지만 요새들어 그녀는 애정을 표현하는데에 더욱 거리낌이 없었다. 어쩌면 그게 아이에게도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 생각했을지도.
통화가 끝나자 나는 휴대폰을 손에 쥐고 의자에 몸을 기댄 채,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되는 걸까? 결국은 이 방향으로 흘러가는게 맞는 걸까? 언제나 유정이를 운명의 상대라고 생각해왔는데.... 그건 그냥 내 착각이었나?
전화가 울렸다. 서연이가 참 어지간히도 내 걱정이 되나보다. 이 늦은 시간에 전화가 오는걸 보니, 당연히 서연이일거라 생각하며 화면에 떠오른 이름도 확인하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
"나 괜찮아. 이제 그만 달래줘도 돼."
- 오빠.
그 순간, 나는 정말로 심장이 입으로 튀어나오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유.... 정아?"
- 잘 지내고 있나요?
유정이의 목소리였다. 내가 그토록 듣고 싶었던....
"유, 유정아. 진짜 유정이니? 지금 어디야? 어디서 뭐하고 있어? 나... 나는 네가...."
가슴이 쿵쾅거렸고, 목소리가 떨렸다. 말이 너무 횡설수설 나와서 내가 뭐라고 떠들고 있는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갈라지는 목소리로 한참 동안 유정이에게 지금 어디에 있는지, 그동안 왜 연락이 안된 건지, 학교엔 왜 안 나왔는지 등에 대해서 두서 없이 물었던 것 같다. 그 지극히 감정적인 동요를 유정이는 말없이 차분하게 듣고만 있다가, 쓸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 오빠....
"으응."
- 서연 언니 소식 들었어요.
"......."
들었구나. 짐작은 했지만 유정이의 목소리를 통해 들으니 돌덩이 하나가 마음 속에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 실은 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어느날 원룸에 갔을 때.... 때마침 바깥으로 나오는 오빠랑 서연 언니를 먼발치에서 보고 있었거든요. 확신할 순 없었지만 서연 언니의 모습을 보는 순간 한 눈에 짐작할 수 있었어요. 아이를 품고 있다는걸.... 그리고 얼마 전에 자퇴 신청을 하러 학교에 갔을 때 소문을 듣고는 확실히 알 수 있었죠.
"그, 그럼 넌 그것 때문에 그 동안....."
- .......
유정이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나는 문득 불안해졌다. 강해보이지만 실은 누구보다 여린 유정이의 속을 알고 있기에, 그녀가 이런 상황에 마주하여 무슨 생각을 할지 나로서도 대강 짐작이 갔다. 그래서 너무도 불안했다.
- 오빠, 나는 내일 일본으로 떠나요.
"뭐?"
깜짝 놀라 눈에서 흐르던 눈물마저 멎어버렸다. 유정이는 담담한 말투로 계속 말했다.
- 아버지와 함께 일본으로 돌아갈 거에요. 얼마 전에 아버지와 오빠가 나누었던 얘기를 저도 전해들었어요. 오빠도 짐작하고 있었죠....? 내가 곧 떠날 것이란걸.
"하, 하지만 이렇게 빨리...."
관장님께 들어 알고는 있었지만 그 시기가 이렇게 빨리 찾아올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따져 물으려다가 나는 멈칫하고 말았다. 설마 나 때문에 일부러 빨리 떠나려는 걸까....?
- 오빠, 나는....
"가지 마, 유정아! 난 아직...."
목소리가 이어나오지 않았다. 뭐라고 말해야 좋을까? 아직 난 너를 버린게 아니라고? 아직 서연이와 결혼한게 아니라고? 그런 구질구질한 이야기를 늘어놓아야 하는 걸까? 내 이런 고민에도 유정이는 차분하게 자신이 하려던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 오빠, 나는 가족의 품으로부터 오랜 시간을 떨어져 살아봤기 때문에 잘 알 수 있어요. 아이에게는.... 부모의 품이 꼭 필요해요. 곧 태어날 어린 아이라면 더더욱 말이에요....
"유정아....."
- 예전에 나와 했던 약속을 기억하나요? 내가 어디에 있든지 내 곁에 있어달라고 했던....
유정이가 내 모습을 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나는 바보처럼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지만 유정이는 보지 않고서도 내 대답을 들은 것 같았다.
- 그 약속, 못 지켜줘도 난 오빠를 절대 원망하지 않을게요. 대신 마지막으로 내 부탁 하나만 들어줬으면 해요.
"뭐, 뭐든지 좋아.... 어서 말해 줘."
- 내일 공항으로 와줄 수 있나요?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얼굴을 보고 싶어요. 그리고 나도.... 오빠에게 꼭 해야 할 이야기가 있어요.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유정이가 불러주는 항공편의 시간을 손에 받아적었다. 혹시라도, 만에 하나 그것을 잊어버릴까봐 잉크로 새기고 또 새겼다.
"물론이야.... 꼭 갈게. 무슨 일이 있어도 갈 거야. 난 널...."
- 아직도 절 사랑하나요?
지금에 이르러서는 너무 잔인한 질문이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아이를 배에 품고 있는 서연이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 감정을 속일 수는 없었다....
"사랑해. 정말 사랑해."
- 그러면.... 내일 꼭 나를 보러 와줘요.
유정이는 그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도저히 참을 수 없어 그녀에게로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돌아온 목소리라곤 전화가 꺼져있다는 기계의 알림음 뿐이었다.
"유정아."
나는 망연자실하게 그녀의 이름을 되뇌이며 책상에 얼굴을 파묻었다. 밤은 계속해서 깊어가고 있었다.
- 다음 화에 계속 -
처음에 글을 쓰기 시작할 때, 1부의 마무리가 50장 정도에서 끝날 것 같다는 예상을 하긴 했었는데
신기하게도 그게 딱 맞아떨어질 것 같네요
다음 49장에서 성진의 이야기가 마무리되고, 50장은 1부 에필로그로 뵙게 될 것 같습니다
마지막까지 화이팅 하겠습니다
늘 감사합니다 독자분들... ^^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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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 2016-08-1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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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 | 황진이-19금 성인놀이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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