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임 리와인더 (Time Rewinder)
- 이 소설은 소.라.넷(sora.net) 작가 "상상의신비"가 연재 중인 작품입니다.
무단 불펌을 삼가해 주시길 부탁드리며, 퍼가시더라도 출처와 작가명을 꼭 남겨주십시오.
창작가들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이자 도리입니다.
* 1부 에필로그 (epilogue)
"저기요. 초, 초면에 죄송하지만...."
"네?"
"그, 연락처, 좀 주실 수 있나요?"
서연은 한숨을 살짝 쉬었다. 민혁을 곁에 데리고 다니지 않으면 여전히 종종 이런 일이 생기곤 한다. 그녀는 자신의 연락처를 얻고 싶어하는 낯선 남성에게서 잠깐 시선을 거두고, 어느새 또 엉뚱한 곳에 정신을 파느라 그녀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있는 아들의 모습을 찾았다.
"최민혁! 엄마한테 가까이 붙어있으라고 그랬지! 자꾸 말 안 들으면 정말 혼난다?"
"알았어."
신혼 때 쓰던 세탁기가 너무 낡아서 새 것으로 바꿔볼까 싶어, 가전 제품 코너로 잠깐 구경을 왔더니 역시나 민혁은 잡다하게 진열된 기계들로부터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아마도 이번엔 스토브가 어떤 방식으로 가열되는가에 대해 혼자 골똘히 생각을 하고 있었나보다.
아들에게는 정말 남다른 구석이 있었다. 물론 기계와 조립에 관심을 보인다는 것은 그 나이 또래의 남자아이라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고, 게다가 공학적 소질의 측면에서 생각한다면 그것은 일종의 재능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들의 경우엔 그 정도가 너무 심해서, 시도 때도 없이 온갖 것들에 한 눈을 파느라 이렇게 종종 사라지곤 하는 일이 무척 빈번했다. 그래서 서연은, 엄마 된 입장에서 혹시라도 아들이 유괴를 당하진 않을까 내심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애엄마에요."
"네에?"
종종걸음으로 달려온 민혁을 안아들며, 서연은 낯선 남자를 향해 말했다. 그러자 역시나 그는 깜짝 놀라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서연은 속으로 생각했다. 조금만 더 길게 살펴봤다면, 아이를 데리고 왔다는걸 쉽게 알 수 있었을 텐데. 남자가 그만큼 즉흥적으로 행동했다는 뜻이리라.
나이가 스물 다섯도 채 되어 보이지 않는 젊은 대학생이었다. 서연은 그 청년이 더 길게 이야기하지 않게끔, 고개를 한번 꾸벅 숙이고는 민혁의 손을 잡고 다시 카트를 끌었다. 얼이 빠진 얼굴로 굳어 있던 대학생이, 친구들로 보이는 무리를 향해 돌아가 허탈하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렸다.
"세상에. 저 얼굴에 유부녀래."
서연은 그저 속으로 픽, 한번 웃고 말았다.
"민혁아, 너 자꾸 그렇게 엄마랑 멀리 떨어지고 그러면 안된다고 했잖아. 응? 너 그러다가 못된 사람들이 데려가면 어쩌려구 그래. 엄마가 이렇게 부탁하는 거니까, 이젠 밖에서는 그러면 안 돼. 알았지?"
"응. 알았어, 엄마."
아들은 얄밉게도 참 대답 하나는 잘한다. 썩 미덥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서연은 민혁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시내에 볼일이 있어서 잠깐 나왔다가, 모처럼 동네 가게가 아닌 번화가의 대형 마트에서 장을 봤더니 이런 일이 생기나보다. 동네에서라면 자신의 얼굴을 보고 유부녀라는걸 모르는 사람이 없을 텐데.
"집에 가자. 좀 있으면 아빠 오시겠다."
"응."
그래도 민혁은 기분이 좋아보였다. 마트에 온 김에 서연이 작은 조립식 장난감을 하나 사주었던 것이다. 아마도 아들은 집에 가서 또 그것의 관절이 움직이는 원리나, 부품이 결합되는 형식에 대해 고민하느라 분해와 조립을 반복할 것이다. 언제나 한결 같은 아들의 모습이 어쩐지 조금 귀엽기도 하여 서연은 민혁의 손을 꼭 잡았다.
*
"여보, 있잖아."
"응?"
남편은 지금도 가끔씩, 자신이 설거지를 대신 해주곤 했다. 서연은 그런 남편의 소소한 다정함이 좋았다. 자취를 하던 시절에 지겹게 해봤다며, 신혼 무렵에는 남편이 설거지 뿐만 아니라 아예 부엌일 자체를 한동안 도맡아 했던 적도 있었다. 민혁이 아직 그녀의 뱃속에 있었을 때에 말이다.
"오늘 시내 마트에서 장 보는데, 웬 대학생 남자애가 내 연락처를 물어보더라?"
"뭐?"
설거지를 하다 말고, 고무장갑을 낀 남편의 손이 우뚝 굳었다. 서연의 입에서 장난기 어린 웃음이 키득하고 터져나왔다. 하지만 그녀는 일부러 내색하지 않은 채 아무렇지 않은 어조로 덧붙였다.
"스물 다섯쯤 돼 보이는 남자였는데, 민혁이가 옆에 있는걸 몰랐나봐. 번호 좀 줄 수 없냐면서 끈질기게 묻던데?"
"참 나, 그래서?"
"폰 번호는 안 되겠다 싶어서, 집 전화번호라도 가르쳐줬어. 그리고 꼭 남편 없을 때만 연락하라고 했지."
물에 젖은 수세미를 손에 쥔 채로, 남편이 서연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심통이 잔뜩 나 있는 못마땅한 눈길 앞에 서연은 결국 깔깔 웃음을 터뜨리며 남편의 등에 와락 매달렸다.
"장난이야, 장난."
"아주 좋으셨겠어. 젊은 남자가 던지는 추파도 받아보고."
"그런데 그 남자 보니까, 여보 옛날 모습 생각나던데?"
"그건 또 무슨 말이야?"
"기억 안 나? 자기도 처음에 나한테 그런 식으로 치근덕거렸던 적 있잖아. 그 땐 진짜 진상이었는데."
아내는 가끔, 두 사람이 연애를 시작하기도 전의 일을 이런 식으로 심술스럽게 끄집어낼 때가 있었다. 이제는 거의 가물가물해진 희미한 기억이기도 하거니와, 떠올려봤자 순 창피하기만 한 기억일 뿐이라, 성진은 그럴 때마다 툴툴거리곤 했다.
"왜 시덥잖은 남자애 보면서 내 생각을 하고 그래?"
"그렇게 시답잖아 보이진 않았는데? 꽤 잘 생겼었어."
"아니, 이 여자가 점점? 그래서 그 젊은 남자가 맘에 든다는 거야, 뭐야?"
"흠, 글쎄~"
결국 뚜껑이 열린 성진은 싱크대 안으로 고무장갑을 홱 벗어던졌다. 그리고는 아내의 몸을 번쩍 들어, 식탁 위에 과격한 몸짓으로 내려놓았다. 잠옷으로 몸에 걸친 헐렁한 원피스를 남편이 마구잡이로 벗기려 들자, 서연은 깔깔거리면서도 핀잔을 주듯이 남편의 등짝을 찰싹하고 때렸다.
"혼나볼래?"
"아우, 정말! 민혁이 아직 안 잔단 말이야."
"그러게 장난도 정도껏 쳤어야지."
황소처럼 돌변한 남편이 원피스 자락 아래로 손을 밀어넣어 서연의 엉덩이를 콱 움켜쥐었다. 비록 맹랑한 장난에 대한 보복으로 시작한 행동이긴 하지만, 연애 시절보다 한층 더 육감적인 매력이 무르익어 있는 아내의 몸을 주무르자 성진도 알게 모르게 조금 달아오른 것 같았다.
"민혁이 진짜 아직 안 자?"
"그래! 조금만 참아. 하여튼 내가 애를 둘 키우는거나 마찬가지라니까."
아쉽게 입맛을 쩝 다시면서도 성진은 쉽사리 그만두지 못하고 슬금슬금 손을 올려 아내의 잘록한 허리를 더듬었다. 그 못된 손은 계속해서 올라가 란제리 속옷 안으로 파고들었다. 브래지어 아래로 비집고 들어간 손이 빼꼼 고개를 들고 있는 젖꼭지를 살며시 건드리자, 그제야 서연이 얼굴을 붉혔다.
"뭐 해?"
"조금만."
성진의 반대쪽 손이 서연의 목을 타고 원피스 안으로 들어가, 브래지어의 후크를 풀었다. 란제리를 걷어올린 성진은 본격적으로 한쪽 가슴을 손에 쥐었고, 반대쪽 가슴은 입으로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가슴이 있는 곳까지 남편의 손이 파고들자 원피스가 거의 벗겨지다시피 말려올라와서, 서연의 속살이 졸지에 훤히 드러나고 말았다.
거의 알몸을 홀랑 드러낸 채로 식탁 위에 누워있는 아내의 모습은, 그 자체로 호화로운 진수성찬이었다. 누가 그랬던가? 식욕을 해결하는 공간인 부엌에서의 섹스는 보다 색다른 자극으로 느껴질 수 있다고. 아내와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을 함께 보냈지만, 성진은 여전히 서연의 몸이 그리고 있는 매혹적인 굴곡에 이따금씩 감탄하곤 했다.
민혁을 낳고 나서도 관리를 잘한 덕분인지 아니면 그녀가 원래 몸매를 타고 난 경우인지는 모르겠지만, 서연의 몸에서는 이제 아가씨일 적엔 좀체 느낄 수 없었던 원숙한 관능미마저 물씬 배어나고 있었기에 성진은 오히려 연애시절보다 아내의 몸에 더 심취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생각해보면 사실 아내의 나이가 그리 많은 것도 아니었다. 가정을 꾸린지도 어느새 시간이 제법 흘러 가끔 망각하곤 하지만, 삼십 줄에 접어든 성진과는 다르게 서연은 비록 끝자락이긴 해도 아직 엄연한 이십 대였던 것이다. 그러니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아직 아내를 아가씨로 보는 사람이 있다 해도 결코 이상할 일이 아니었다.
하긴 그러니까 지금도 아내가 혼자 시내에 나가면 웬 날파리들이 줄기차게 꼬이는 것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괜스레 심술궂은 마음이 솟구쳐 성진의 행위는 더욱 과감해지기 시작했다.
"으응...!"
젖가슴을 물고 빨아대며, 한 손을 내려 보드라운 감촉의 팬티 위를 더듬자 아내가 달뜬 소리를 내었다. 보들보들한 천 조각 위로 조갯살을 쓰다듬는 느낌이 좋았다. 그 감촉을 한껏 즐기다가 팬티 위로 살짝 손가락을 밀어넣어보았다. 안쪽에서 끈적한 물이 찔금 배어 나오며, 브라와 한쌍인 란제리 팬티에 작은 얼룩을 만들었다.
"아이, 참.... 뭐하는 거야. 조금만 한다며?"
"그냥 하자."
"그러다 민혁이 나오면 어떡해?"
"오늘 장난감 사줬다며?"
"응."
"고 녀석, 한번 집중하면 방에서 잘 안 나오잖아. 괜찮지 않을까?"
"어휴, 정말. 그러다가 저번에도 위험했잖아. 애가 성교육 제대로 못 받고 비뚤어지면 다 당신 책임이야. 알겠어?"
"알았어, 내가 책임질게."
"퍽이나."
말은 그렇게 하지만 아내도 적잖이 달아오른 얼굴이었다. 이제는 눈을 감고 서연의 살결만 만지고 있어도, 아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충 알 수 있는 성진이었다. 그토록 익숙해졌음에도 여전히 서로를 향해 이렇게나 뜨겁게 타오를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고, 성진은 그것을 축복이라 여겼다.
"하아아응!"
서연은 하다못해 침대로 가자고 계속 보챘지만, 결국 그들은 그 날 식탁 위에서 섹스를 했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끈적하게 피어오르는 열락의 음색이 부엌 안에 간간히 울렸다.
*
남편과의 사랑은 여전히 뜨거웠고, 솔직했다. 서연은 그래서 행복했다. 때로는 사랑스럽게, 때로는 격정적이게 몸과 마음을 섞어가며 하나가 되는 그 느낌이 좋았다. 세월이 더 많이 흐르고 나면 지금의 아름다움도 시들해 질 테고, 남편도 언제까지나 지금과 같은 모습이지는 않겠지만 그녀는 그런 것이 크게 중요치 않다고 생각했다.
그 훗날에는, 그 훗날에 맞는 사랑의 형태가 있을 것이라고 그녀는 믿었다. 젊음이라는 이름의 빛이 사그라든다고 해서 남편과의 사랑이 시들해 질 것 같지는 않았다. 몸 뿐만이 아니라 이제는 마음까지도 그와 함께 나누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남편과의 지난 날들을 종종 떠올리곤 했다. 오로지 쾌감의 대화를 위해서만 시작되었던 그들의 관계가, 여기까지 도달하게 될 거라고는 그녀도 처음엔 생각하지 못했다. 몸의 경계를 넘어 마음과 영혼까지 나눌 수 있는 사이가 되리라고 그 때는 어찌 짐작이나 했을까.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후회하지 않았고, 남편도 그것을 후회하지 않아주어서 기뻤다.
"민혁아, 어린이집 가야지."
서연은 아들의 손을 잡고 집 밖으로 나와, 노란 빛깔의 버스가 오기를 기다렸다.
예나 지금이나 남편과의 사랑은, 어찌보면 철이 없을 정도로 여전히 뜨거웠지만, 그래도 그녀가 연애시절에 비해 많은 것이 달라져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남편과의 사이에 민혁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머니가 되어 본 여자와, 그렇지 못한 여자의 차이는 굳이 말로 표현할 필요가 없을 만큼 뚜렷한 것이니까.
"오늘따라 기사님이 늦네. 우리 혁이, 어린이집에서 친구들이랑 잘 놀다 올 수 있지?"
"응."
가끔씩 서연이는 아들의 그런 유별한 면모가, 또래의 아이들과 두루 어울리는데 지장을 주진 않을까 염려하기도 했다. 하지만 생각과는 다르게 아들은 별 무리없이 다른 아이들과 어울렸고, 서연은 그것이 기특했다.
요새는 그녀도 일자리를 알아보고 있는 중이었다. 민혁을 키우느라 그녀는 이십 대의 중반을 어떻게 흘려보냈는지도 모를 만큼 바쁘고 정신 없는 나날들을 보냈다. 하지만 이제 슬슬 그녀도 맞벌이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민혁이 자라날 수록 아마 경제적인 부담은 더욱 커질 것이고, 그녀는 남편에게만 그것을 맡겨두고 싶지 않았다.
비록 아이가 있긴 하지만, 서연은 자신이 아직 충분히 젊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스스로가 그리 무능한 여자가 아니라고 믿었다. 이대로 전업주부가 되는 것보다는 넓은 세상으로 나가서 일을 하고, 지금보다 더 능력 있는 아내, 능력 있는 엄마가 되고 싶었다.
"엄마는 오늘 시내에 나갔다 올 거야. 볼 일 끝나구 우리 혁이 데리러 갈 테니까, 잘 놀고 있어야 해. 알았지?"
"응. 알았어."
언제나처럼 대답 하나는 또박또박 잘하는 아들. 서연은 활짝 웃으며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런 모자(母子)의 모습을, 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가 물끄러미 지켜보며 서 있었다. 아들의 손을 잡고 버스를 기다리고 있던 자리에, 아까부터 묘하게 신경 쓰였던 누군가의 인기척이 가까이 다가오자 서연은 고개를 들었다.
"안녕하세요."
상대방은 고개를 꾸벅 숙여 그녀에게 인사를 했다. 가느다란 목소리, 무미건조한 표정, 어깨 너머로 길게 내려오는 머리카락. 서연은 그 인기척의 주인이 한 여인이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녀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동네 사람일까? 처음 보는 얼굴인데."
조금은 삶에 찌든 것 같은, 염세적인 눈빛을 하고 있는 낯선 모습의 여인. 비록 모르는 사람이긴 했지만 먼저 인사를 받았기에 서연도 엉겁결에 고개를 꾸벅 숙였다. 쓸쓸한 느낌을 간직한 그 눈동자로, 어느새 낯선 여인은 자신의 아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드님인가봐요?"
"아, 네...."
여인은 민혁의 앞에 무릎을 굽히고는 쪼그려 앉았다. 자신의 키의 반도 되지 않는 어린 아들과 눈높이를 똑같이 맞추면서, 낯선 여인은 아들의 얼굴을 조용히 들여다보았다.
서연은 굉장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사실 평소에도 민혁이 유괴를 당하진 않을까 불쑥 걱정이 들곤 하던 그녀였다. 그녀는 낯선 사람이 아들의 가까이에 다가오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눈 앞의 낯선 여인이 아들에게 가까이 얼굴을 가져가는 것을 보면서도, 왠지 그녀를 말릴 수가 없었다.
아들을 바라보는 여인의 눈이 너무도 슬퍼보였기 때문이었다.
"이름이 뭐니?"
"민혁이요. 최민혁...."
여인은 나지막히 아들에게 물었고, 아들은 언제나처럼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아들의 목소리를 들은 낯선 여인이 옅은 웃음을 지었다. 서글프도록 애잔하게 느껴지는 그런 미소였다.
"민혁아."
"네."
낯선 여인이 아들의 이름을 소리내어 불렀다.
"지금처럼 꼭, 건강하고 씩씩하게 자라줘야 해. 아프지 말고, 다치지 말고.... 알겠지?"
엄마에게서나 들었던 말을 낯선 여인에게서 듣는다는 것이 이상했기 때문일까. 민혁은 서연의 얼굴을 한번 올려다보고는, 맑은 눈망울을 몇 번 깜빡거리더니, 이내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네."
"그래.... 착하구나."
삭막함이 가득했던 낯선 여인의 눈동자에 눈물 한 방울이 맺혔다. 여인이 고개를 숙이자 결국 눈가에 맺힌 눈물이 가만히 머물러 있지 못하고 아래로 툭 흘러내렸다. 돌바닥에 눈물을 떨군 여인이, 이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손으로 눈가를 훔치며, 아들의 이마에 대고 가볍게 입술을 한번 맞추었다.
낯선 여인이 아들에게 입을 맞추는 것을 보고서도, 서연은 쉽게 말문을 열 수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여인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미안합니다. 나도 모르게 실례를...."
"아, 아니에요."
낯선 여인은 서연을 향해 고개를 다시 꾸벅 숙였다. 서연은 비록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물을 본 것이, 어쩐지 타인의 치부를 너무도 심하게 헤집은 것 같은 기묘한 죄책감이 들어 더이상 아무런 말도 이을 수가 없었다. 왜 이렇게 불편한 기분이 드는지 서연 스스로도 도저히 이해 못할 일이었다.
"이렇게 만나서 정말 반가웠어요."
여인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 말을 자리에 남기고 떠났다. 서연은 그녀의 말이 무슨 의미였을까 생각해봤지만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그저 그 여인을, 속으로 낯선 여인이라 여기고 있으면서도, 그 언젠가 한번 정도는 어딘가에서 마주친 적이 있는 것 같단 막연한 느낌을 받을 뿐이었다.
"이상해. 분명 낯선 사람인데, 왜 한편으론 익숙한 기분이 드는 걸까?"
멀어져가는 낯선 여인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며, 서연은 그 자리에 잠시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노란 빛깔의 어린이집 버스가 경적 소리를 내며 저 멀리서부터 가까워져 왔다. 서연이 멍하니 서 있자, 민혁이 엄마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버스가 왔노라고 일러주었다.
서연은 여인의 뒷모습으로부터 시선을 거두었다.
*
일본의 수도, 도쿄.
번화와 활기의 물결이 넘치고 있는 그곳은, 고무술(古武術) "무신류"의 본관이 자리잡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오늘날 도심의 풍경과는 좀체 어울리지 않는, 녹림이 우거진 배경에 고아한 자태로 지어진 전통식 건물 한 채가 바로 무신류의 현 당주 한석진이 기거하는 별채였다.
별채에는 석진 뿐만이 아니라 그의 가족들이 함께 생활하며 지내고 있었는데, 몇 년 전부터는 그 식구가 한 사람 더 늘었다. 한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당주의 딸이 일본으로 돌아오면서부터 이 곳에 지내게 된 것이었다.
"누님, 편히 주무셨습니까?"
"응. 유진아. 너도 잘 잤니?"
유정은 그녀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는 남동생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유진. 어머니가 아버지와의 사이에서, 조금은 늦은 나이에 얻으신 자신의 친동생. 부모님으로부터 엄격한 교육을 받고, 걸음마를 떼는 순간부터 수양을 쌓으며 자랐기에 유진은 늘 매사에 의젓하게 행동하려 했지만 유정의 눈으로 보기에 그는 아직 어린티를 벗지 못한 평범한 꼬마일 뿐이었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뻣뻣한 태도를 내려놓고, 또래 아이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며 지낼 수 있다면 아마 유진이도 좀 더 행복할 텐데. 유정은 가문에 속박 된 삶의 무게감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런 남동생의 모습이 조금은 안쓰럽다는 생각을 종종 하곤 했다.
하지만 그녀가 함부로 이런 생각을 해선 안 되리라. 유진의 존재가 있기에 유정은 가문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일 테니.... 그렇게 생각하면 유정인 문득 서글퍼졌다. 안쓰러워하면서도 한편으론 고마워해야 한다니. 그건 너무 이중적이지 않은가.
"누님, 저.... 이야기 들으셨나요?"
"무슨?"
유진은 아직까지도 그녀를 조금 어려워하곤 했다. 하기사 어린 시절 내도록 누이와 떨어져 지냈기에 그럴 만도 할 것이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둘은 소중한 핏줄이기에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려 애썼다. 유진도 어린 마음에 그것을 느끼고 있기에, 마냥 편하지만은 않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유정과의 소통을 시도하려는 것일 터이다.
"하야토 가의 수제자가 어제 본관에 들어왔어요. 아버.... 아니, 당주님께 후대 계승에 대한 문제를 정식으로 여쭙고 싶어하는 것 같았어요."
"그러니?"
유정은 별 흥미가 없다는 듯, 그 소식을 한 귀로 흘렸지만 동생인 유진은 다급하게 물었다.
"누님은, 정말 괜찮으세요?"
"........"
그녀는 동생이 왜 이런 이야기를 자신에게 하는지 알고 있었다. 하야토 가의 그 사람이 아버지에게 후대 계승에 대한 문제를 여쭙는다는 것은 곧, 아버지의 딸인 자신과 혼례를 올릴 수 있도록 간청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아직은 아버지가 그럴 마음이 없으시겠지만, 언젠가 아버지가 그 청을 거절하지 못할 때가 되면 유정은 아마 그 남자와 결혼을 해야만 할 것이다. 결국 그것이 그녀의 운명일까?
"누님. 저, 저는.... 아직 어리기 때문에 잘은 모르지만, 누님이 그걸 원하지 않는다는걸 알고 있습니다. 저도 아버.... 아니, 당주님께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알 수 있어요. 누님은 한국에 남겨두고 오신 분이 있다고.... 누님은 그 분을 아직도 마음에 담고 계신다고 당주님이 늘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가 네게 그런 말씀을 하셨니?"
유정은 어쩐지 오늘따라 국화차의 향이 조금 쓰게 느껴진다는 생각을 했다. 아버지는 왜 어린 아들에게 그런 말씀을 하신 걸까?
"누님,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제가 비록 아직은 어리기 때문에 지금은 하야토 가의 제자를 따라갈 수 없지만.... 저는 당주님의 핏줄이니 앞으로 더욱 성장할 겁니다. 제가 실력으로 정정당당하게 다음 당주의 자리를 물려받는다면 원로들도 수긍할 것이고, 그러면 누님이 원치 않는 결혼을 억지로 하게 될 필요도 없어지지 않을까요?"
몸에 맞지도 않는 헐렁한 도복을 몸에 걸친 채로, 맹랑하게 그런 이야기를 하는 남동생의 모습을.... 유정은 지극히 고맙게 여겼다. 그녀는 아직 키도 다 자라지 않은 남동생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옅게 웃음 지었다.
"말이라도 정말 고맙구나. 네 그런 마음, 꼭 기억할게."
너무 당찬 포부를 밝혔다고 생각한 걸까, 동생은 약간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우리끼리 있을 때엔, 아버님을 편하게 아버님이라고 불러도 괜찮아. 어린 나이에 부모를 부모라고 부르지 못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불행이란다. 아마 아버님께서도 네게 당주님이라는 말보단 아버지라는 말을 더욱 듣고 싶어하실거야."
"네? 그럴리가요. 당주님은 분명...."
"아버님이 만약 너에게 달리 말씀하셨다면, 그건 분명 진심이 아니셨을거야."
동생은 그녀의 말을 아직까지는 잘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아마 시간이 좀 더 지나고 나면 동생도 자연스레 이해하게 되리라.
유정은 국화차를 한 모금 더 홀짝이고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찻잔 속에서 아른거리는 물결 위로, 괜스레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침부터 이런 기분에 빠져버리면 곤란한데.... 유정은 애써 그 얼굴을 눈 앞에서 지웠다.
*
남동생을 돌려보내고 나서 유정은 다시 별채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가 머물고 있는 방에 들어선 유정은, 자신이 찾는 얼굴이 보이지 않아서 마당으로 걸음을 옮겨보았다. 그러자 마당에서 나비를 쫓으며 뛰어다니고 있는 어린 여자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유정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미란아, 뭐하니?"
"엄마아."
엄마의 목소리를 들은 딸이 종종걸음으로 달려와 유정에게 안겼다. 딸아이는 품에 안기자마자 여느 때처럼 아리송한 말들을 했다.
"엄마, 시간축과 공간축이 있는데, 공간축을 해결하려면 날개가 필요해. 나비는 정말 좋겠다, 그치? 날아서 어디든 갈 수 있잖아. 근데 시간축은 어떻게 해결해야할까? 그건 아직 잘 모르겠어...."
"........"
딸아이는 가끔 이렇게 영문을 모를 말들을 유정에게 늘어놓곤 했다. 유정은 딸에게 비범한 면모가 있다는 사실을 진즉에 느끼고 있었지만 구태여 그것을 주변에 알리지는 않았다. 고리타분한 가문의 어른들이 그 사실을 알아봤자 딸에게 무슨 도움을 주겠는가.
그래도 가끔은 궁금해진다. 애아빠가.... 만약 딸의 이런 특이한 부분을 알았다면, 그는 뭐라고 말했을까?
"아...."
괜한 생각을 떠올렸나보다. 눈시울이 젖어드는 것을 느꼈다. 딸의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기 위해 그녀는 얼른 고개를 돌리고 다른 곳을 보았다. 다행히 딸아이는 여전히 나비의 자취를 눈으로 쫓고 있었다.
"미란아, 그럼 마당에서 좀 더 놀고 있을래? 엄마 잠깐 바람 쐬고 올게...."
"응."
폴짝폴짝 뛰기 시작하는 딸의 모습을 잠깐 내버려두고, 유정은 딸이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도록 멀찍이 떨어진 연못가로 걸음을 옮겼다. 물이 말라버린지 꽤 오래된, 지금은 흔적만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연못가였다.
유정은 품 속을 더듬었다. 그리고는 언제부터인가 지니고 다니기 시작한 물건을 꺼냈다.
스무살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도대체 왜 담배를 피는지, 그녀는 이해하지 못했었다. 건강을 망치고, 정신을 흐리게 하는 그 끊기 힘든 마약을 애초에 왜 입에 대는 걸까? 하지만 몇 년이 지난 지금, 그녀는 거의 하루에 한갑 씩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그것도 결코 순하지 않은 종류의 담배를....
"미안해. 미안해, 미란아....."
수행으로 심신을 가다듬어야 할 자신이 이런 유해물질 따위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에 그녀는 늘 죄책감을 느꼈다. 하지만 이런 것에라도 의지하지 않으면 너무도 버티기가 힘들었고, 쓸쓸했다.
그녀는 자기 자신에 대한 죄책감보다도, 딸에 대한 죄의식을 종종 느꼈다. 어린아이를 가까이 둔 엄마가 이렇게 주기적으로 흡연을 한다는 것은, 그녀 본인의 몸 뿐만 아니라 딸아이에게까지 분명 엄청난 악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담배를 끊지 못하는 자신의 나약함이 유정은 경멸스러웠다.
예전에 보았던 담뱃갑에 그런 문구가 적혀있었던 것 같다. 담배는 나 뿐만 아니라 내 가족들까지 병들게 하는 주범이라고..... 결코 틀린 말이 아니었다.
"보고 싶어."
담배를 태우면, 연기가 허공에 번지고, 그 틈새로 항상 한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어쩌면 유정은 그렇게나마 그의 얼굴을 새기고 싶어서 담배를 태우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란이를 위해서 끊기는 끊어야겠지. 항상 그렇게 마음만 먹는다는게 문제였지만 유정은 내일부턴 꼭 금연을 해보리라 다시금 마음 먹었다.
"어?"
품 안을 더듬어봤는데, 담뱃갑만 나오고 라이터는 나오질 않았다. 항상 지니고 다니던 건데 어디서 잊어버린걸까? 주머니를 뒤져보다가 문득 유정은 짚히는 바가 있었다. 다시 딸아이가 있던 마당으로 돌아가려고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때마침 딸아이가 저 멀리서부터 달려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엄마! 또 담배피려고 했지!"
"........"
어쩐지 조금은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아냐."
"거짓말! 할아버지한테 다 이를 거야! 엄마는 저번에도 할아버지한테 혼났으면서...."
딸아이에게 꾸중을 듣는 엄마라니. 정말 한심하지 않은가. 아무래도 아직은 누군가의 엄마가 되기엔, 자기 자신부터가 너무 어리지 않나 하는 생각이 유정은 문득 들었다.
"미안해. 엄마가 잘못했어. 그런데 혹시 엄마 라이터를 또 몰래 가져가서 숨긴 거니?"
"아냐. 안 그랬어."
입장이 바뀌어 이번엔 딸이 어설픈 거짓말을 한다. 유정이는 쓴웃음을 지으며 딸아이를 달래었다.
"엄마 정말 담배 안 필게. 그 라이터가 엄마에게 소중한 물건이라서 그래. 그러니까 엄마 한번 믿고 돌려줄래?"
"그래놓고 또 담배피면 어쩔 거야?"
"자, 손가락 걸고 약속하자."
유정은 딸아이에게 손가락을 걸고 약속을 했다. 그제야 미란이는 머뭇거리며 주머니에 감춰두었던 은색의 지포라이터를 꺼내 유정에게 돌려주었다. 빛이 잔뜩 바래있는 그 네모낳고 투박한 물건. 자신이 왜 그것을 소중한 물건이라 여기고 있는지 유정은 모를 일이었지만, 언제부터인가 그 라이터는 유정의 꾸준한 소지품이 되었다.
"정말 순수하구나, 아이들은...."
아무리 비범한 구석이 있어도 미란이 역시 아이는 아이였다. 손가락을 걸었다고 해서 몇 번이고 그 말을 철썩같이 믿어버리는 순수함에 유정은 마음이 아렸다. 자신도 언젠가 누군가에게 저렇게 손가락을 걸고 약속을 받은 적이 있었다. 고요하고 아름다운 들판 위에서, 서로의 몸을 끌어안고선....
"내가 어디에 있든, 내 곁에 있어줄 수 있나요?"
너무나 많은 생각들이 떠오르는 아침이었다. 결국 참지 못하고 마음이 욱씬거렸다.
"엄마.... 왜 울어?"
딸아이가 물었다.
*
"오랜만입니다, 아가씨."
오랜만에 문 교관의 얼굴을 보게 되니 유정은 퍽 반가웠다. 아버지와 함께 한국에 왔을 때도, 일부러 시간을 내어 유정을 만나러 왔을 만큼 문 교관과 유정의 사이는 각별했다. 유정에게 있어 외지나 다름 없게 느껴지는 이 척박한 곳에서, 문 교관은 그녀가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어서 오세요, 그런데 오늘은 다른 손님도 계시는 군요."
하지만 오늘 유정은, 그런 문 교관의 방문을 마냥 반갑게 여길 수 만은 없었다. 문 교관은 옆에 한 사내를 대동하고 왔는데, 유정인 비록 몇 번 밖에 얼굴을 본 기억이 없지만 그 사내가 누구인지 정도는 떠올릴 수 있었다.
남동생인 유진이 내내 이야기했던, 그 하야토 가의 수제자였다. 아버지께 계속해서 그녀와 혼인을 맺을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을 드리고 있다는,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이미 자신의 약혼자로 내정되어 있는 바로 그 사람이었다.
유정은 일본에 온 이후로, 그의 얼굴을 어쩔 수 없이 몇 번 보게 될 일이 있었지만 여전히 이 남자의 얼굴을 봐도 아무런 감흥이 생기지 않았다. 심지어 이 남자와 언젠간 혼례를 올리게 될 거란 생각조차도 아직은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자신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테두리 바깥의 사람. 그는 유정에게 그런 사람이었다.
"지난 친선 행사에서 얼굴을 뵌 이후로는 처음 뵙는군요, 아가씨. 정말 오랜만입니다."
"그러네요. 오랜만이에요."
그는 그런 말을 했지만, 유정은 사실 언제 그의 얼굴을 봤었는지 제대로 기억조차 나질 않았다.
"문 교관님, 죄송합니다만 잠깐 자리를 피해주시겠습니까?"
하야토 가의 제자는 문 교관에게 양해를 구했다. 문 교관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나는 것을 보고, 유정은 오늘 문 교관의 방문이 순전히 가문의 문제 때문이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의 수제자인 문 교관은, 비록 여성의 몸이긴 했지만 가문 내에서도 그 특출한 실력을 인정받고 있기에 상당히 중요한 직책을 여러가지 겸하고 있었다. 특히 현 당주를 보좌하며 중요한 외교적 사안이나 외부 인사를 담당하고 대접하는 것 또한 그녀의 역할이었는데, 오늘 문 교관의 방문도 그러한 업무의 연장인 것 같았다.
아무래도 하야토 가의 인물쯤 되는 사람이니 문 교관이 직접 이렇게 대동하며 일을 보는 것이겠지만, 설마하니 그가 문 교관을 통해서 직접 자신을 만나러 올 줄은 몰랐기에 유정은 조금 당황스러웠다.
"아가씨, 이렇게 불쑥 찾아오게 되어 죄송합니다. 하지만 꼭 드리고 싶은 말이 있었습니다."
"뭐죠?"
그는 대답 대신 품 속에서 아주 자그마한 상자를 하나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것을 유정에게로 내밀었다. 유정이 그것을 받아들 생각도 못하고 있자 그는 직접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영롱한 빛깔로 반짝이는 반지 하나가 놓여있었다.
"이게.... 무슨 의미인가요?"
"아가씨가 한국에서 오랜 세월을 지내면서, 바깥 문화를 많이 접하셨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부분에 무척 서툴고, 아는 게 없지만.... 오늘날의 평범한 젊은 남녀들은 혼인을 청할 때 종종 반지를 선물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준비를 했습니다."
"그런 것 보다도, 왜 제게 이런걸 주시는 거죠?"
유정이 여전히 그가 내민 반지를 받아주지 않자, 그는 겸연쩍은 태도로 상자를 도로 닫으며 대신 말을 이었다.
"저는 아가씨가 저와의 혼인을 원치 않는다는걸 알고 있습니다. 아마 당주님도 그것을 알고 계시기에 저와 아가씨가 맺어지는 것을 꺼리시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저는 아가씨의 마음에 대해 생각해봤습니다. 아가씨가 저를 원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
"제 생각이지만 아가씨가 저와의 혼인을 원치 않는 이유는, 저와 아가씨 사이에 남녀로서의 정분이란 것이 없기 때문이겠지요. 얼굴도 제대로 모르고 살았던 남자와 갑자기 혼인을 하고 싶지는 않으실 테니까요."
"그래요. 그게 이상한가요?"
"아니요. 이상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렇게 꽉 막힌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아가씨의 그런 마음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적어도 제 마음만큼은 아가씨에게 확실히 전해드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비록 아가씨는 저에게 마음이 없으시겠지만, 저는 아가씨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마음에 두고 있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애타게 아가씨께 혼례를 청하는 이유는 비단 후계를 계승하고 싶어하는 마음 때문만이 아닙니다. 후계의 자리를 떠나서, 저는 한 남자로서 아가씨를 원합니다. 이런 제 마음을 알아주시겠습니까?"
유정도 여인이었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어쩌면 이 남자가 자신에게 그런 마음을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적은 있었다. 그녀를 보는 그의 눈빛이 미묘했던 것을 은연 중에 느꼈던 것이다. 하지만 유정은 이내 그런 생각을 마음에서 지워버렸었다. 어차피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유정의 마음이 변하지는 않는 것이니.
만약 사랑이라는 것이 일방통행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거라면, 이미 유정은 한국에서 그녀가 사랑했던 남자와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남자는 자신이 아닌 다른 여인과 사랑을 하기로 마음 먹었다.
유정은 고개를 들어 눈 앞의 남자를 보았다. 어쩌면 자신의 남동생인 유진과 마찬가지로, 이 사람 또한 가문의 영향 아래 지극히 올곧고 뚜렷한 길을 걸어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지극히 속박 된 삶이었다. 새장 속의 새처럼,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자신을 두르고 있는 울타리가 세상의 전부라고 믿어야만 하는 그런 가여운 삶.
그렇게나 보수적인 환경에서 자라났음에도 그가 지금 이렇게 진솔하게 마음을 터놓고 남녀로서의 감정을 자신에게 고백한다는 것은, 물론 그 진심 어린 당당함에 대해서는 찬사를 보내야 할 부분이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사랑이라는 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지에 대해서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자신이 겪어보지 못한 삶, 겪어보지 못한 세계의 이야기이므로.
"미안해요."
그래서 유정은 고개를 저었다.
"전 그럴 수 없어요."
"어, 어째서입니까....? 혹시, 따님 때문에 그러시는 겁니까?"
"........."
그는 미란이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일본으로 돌아왔을 때, 가문과는 아무 관련도 없는 한국인의 아이를 배에 덜컥 배어온 그녀를, 원로들은 하나같이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돌이켜보면 곱지 않은 정도가 아니었다.
은연 중에 그녀에게 쏟아졌던 비난의 눈길, 수군거림, 손가락질.... 그것이 노골적으로 심해지자 결국 아버지는 진노하셨고, 강경한 태도로 그들의 입을 막아버리셨다. 그로부터 시간이 어느 정도 흘러 이제는 유정도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고 있지만, 아마 지금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흉을 보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유정은 이 남자가 미란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못내 불편했다. 어쩌면 그도 한국인의 씨를 받아와 가문의 풍기를 흐리는 여자라며, 그녀를 속으로 창부 취급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 유정은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무덤덤해지기로 마음 먹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딸에 대한 비난까지 견뎌낼 자신은 없었다. 그래서 그가 딸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길 바랐다.
"알고 있습니다. 따님으로 인해서 더욱 마음이 불편하실 거라는걸. 하지만.... 하지만 전 개의치 않습니다. 만약 아가씨가 제게 마음을 허락해 주신다면, 저는 따님에게 좋은 아버지가 되려고 노력할 겁니다. 비록 제 핏줄이 아니더라도 말입니다."
"아니에요. 당신은 그렇게 하지 못할 거에요. 그리고...."
유정은 쓸쓸한 눈으로 덧붙였다.
"딸아이와는 관련 없는 문제에요. 저는 당신을 사랑할 수 없으니까요."
"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어째서 저에게 마음을 열 수 없다는 거죠?"
아마 이 남자는 결코 이해하지 못하리라. 스스로의 눈과 귀와 마음으로, 사랑을 겪어보기 전에는.
"왜냐하면.... 당신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그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유정은 그들 사이에 필요한 대화가 끝났음을 느꼈다.
*
"죄송합니다, 아가씨. 이런 일로 찾아뵙게 되어서."
"괜찮아요. 문 교관님이 원했던 것은 아닐 테니까요."
하야토 가의 수제자가 돌아가고 나서, 문 교관은 바쁜 와중에도 잠시 틈을 내어 유정과 대화를 했다.
"아가씨."
"네?"
"내일 저는 이곳을 떠납니다. 당주님께서 지시한 일이 있어.... 잠시 한국에 다녀오려 합니다."
한국....
유정의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 그 이름은 언제 들어도 아련하고, 가슴 저리게 느껴지는 이름이었다. 그녀가 스무 살까지의 세월을 보냈던 곳. 마음 한켠에 줄곧 간직해두고 있는 그녀의 고향.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이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을....
"혹시, 아가씨가 원하신다면 말이지만.... 저와 함께 가시겠습니까?"
"제... 가요? 왜요?"
유정은 문 교관에게 되물었지만, 문 교관에게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유정 스스로가 가장 잘 알지 않겠냐고, 문 교관은 그렇게 답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잘 모르겠어요. 이제와서 한국이라니...."
"한번이라도 얼굴을 보고 나면, 아가씨 마음 속의 짐이 조금은 줄어들 겁니다."
문 교관은 오직 그녀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그 이야기는 유정의 마음 속에 커다란 파문을 남겼다. 정말 그럴까?
"내일 오전에 떠납니다. 천천히 생각해보시고 마음이 내키신다면 저를 찾아와 주십시오."
*
유정은 힘 없는 걸음으로 마당으로 돌아왔다. 여전히 미란이가 마당에서 뛰어놀고 있었다.
"미란아."
이번에도 딸아이는 유정이 부르자마자 쫄래쫄래 달려와 안겼다.
"미란아, 엄마가 뭐 하나 물어봐도 돼?"
"응. 뭐든지."
"미란이는.... 아빠가 보고 싶지 않아?"
딸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엄마인 자신의 눈에도 무척 낯설어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질문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는 얼굴이었다. 잠깐 고민하던 딸은 엄지 손가락을 깨물며 어렵사리 대답했다.
"나한텐 아빠가 없다던데."
"누가? 누가 그래?"
"여기 어른들이 그랬어. 나한텐 아빠가 없다고.... 엄마랑 할아버지 뿐이라고."
순간 울컥하고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유정은 딸아이에 대한 미안함 이상의 어떤 안쓰러움을 주체할 수 없어서 딸의 자그마한 몸을 힘주어 끌어안았다. 딸이 버둥거리면서도 그녀에게 여린 팔을 둘러 엄마를 마주안았다.
"너한테 아빠가 왜 없어.... 아빠는 지금도 네 생각을 하고 계실 거야."
"정말? 그럼 나도 아빠가 있는 거야?"
"응."
미란이에게 우는 모습을 너무 많이 보이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역시 엄마가 되기엔 아직 어린거겠지....
*
많은 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가는 공항에 서서, 유정은 만감이 교차하는 것을 느꼈다.
"문 교관님, 저.... 잠깐만 혼자 있고 싶네요. 괜찮을까요?"
"알겠습니다. 따님은 제가 모시고 있겠습니다."
문 교관도 그런 유정의 마음을 눈치챈 것 같았다. 낯을 많이 가리는 미란이였지만 다행히 문 교관에게는 마음이 좀 놓이는 듯, 엄마가 잠시 자리를 비운다는데도 크게 투정부리지 않고 얌전히 있어주는 기색이었다.
유정은 천천히 걸었다. 사람들이 틈바구니를 헤치고, 그녀의 발걸음이 어느 한 군데로 하염없이 향했다. 계속해서 걷던 유정이 결국 기억 속에 남아있는 자리에서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그 곳은 아무 표시도, 특징도 없는 평범한 장소일 뿐이었지만.... 유정은 몇 년 전에 자신이 발 딛고 서 있었던 이 자리를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한 때 자신은, 이곳에 서서 한 남자가 오기만을 가만히 기다렸던 적이 있었다. 비행기에 오를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을 때에도, 그녀는 여전히 그가 자신을 만나기 위해 와줄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남자는 오지 않았고, 결국 그녀는 비행기에 올랐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지금이라도, 다시 만난다면.... 마지막이 아닐 수 있을까?"
하지만 이내 그런 생각을 떠올리지는 않기로 했다. 마음 속에서 기대를 부풀리다보면, 그만큼 큰 상처를 받게 된다. 그녀는 몇 년 전의 바로 이 자리에서, 그것을 실감했다.
"행복하게 살고 있을까?"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마음 먹었는데도, 자꾸만 그 사람 생각이 났다. 기어코 한국 땅을 밟았기 때문일 것이다.
유정은 마치 몇 년 전으로 돌아간 듯이, 그 자리에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느낌에 빠져 보았다. 지금이라도 이렇게 여기에 서서 기다리고 있으면 언젠가는 그가 자신을 찾아와 줄 것만 같았다. 숨을 헐떡이면서, 늦어서 미안하다는 말을 건네면서 말이다..... 그러면 자신은 그저 쓰게 한번 웃고, 그를 용서해 주어야 할까?
왜 그 자리에서 발을 뗄 수가 없었는지 모르겠다. 그저 그렇게 하염없이 기다리다보면 무언가가 정해질 것이라고 여겼던 것인지. 결국 과거의 흔적을 털고 유정이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저 멀리서부터 누군가가 희미하게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누구?"
유정은 아닐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순간 가슴이 울렁이는 것을 느꼈다.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작게 보였던 누군가의 인영이 점차 가까워졌고, 마침내는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눈 앞으로 다가왔다. 어깨 너머로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이 보였다. 여자였다.
짐작했으면서도 마음 속에 조금 씁쓸한 허탈감이 일었다. 유정은 그저 쓴웃음을 지었다. 여자들 중에서도 머리가 특히 긴 편에 속하는 유정이었지만, 다가오는 여인을 보고 있으니 그 여인도 만만치 않을 것 같았다. 왠지 여인에게서 자신과 비슷한 느낌이 풍겨서 유정은 조금 호기심을 가졌다.
"그거 알아?"
호기심에 곁눈질만 하고 있었는데, 여인이 자신에게 불쑥 말을 건네자 유정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세상엔 더 좋은 남자들이 많다는거 말이야. 굳이 그 사람을 만나지 않더라도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었을 거야. 그런데 왜 그렇게 오랜 시간을.... 홀로 힘들어 했어?"
낯선 여인은 유정이 놀라거나 말거나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입 밖으로 내었다. 유정은 어떻게 얼굴도 모르는 낯선 여자가 이런 말을 하는 건지 이해 할 수 없었지만,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주변을 분주하게 지나가던 사람들이 모두 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게 소란스러웠던 공항 안에, 순식간에 모든 흔적이 사라지고, 오직 낯선 여인과 유정 둘 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어쩌면 꿈을 꾸고 있는 걸까? 그래, 꿈이라도 좋으리라. 이 그리운 땅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볼 수 있다면.
"사랑, 해보셨나요?"
"응. 해봤지."
낯선 여인은 유정의 옆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아 주머니에서 담배를 빼물었다. 공항 내에서는 담배를 태워서는 안 되는게 상식일 텐데도 유정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그녀가 담배를 피든, 무엇을 하든 지금 이 이야기를 방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유정도 낯선 여인을 따라 바닥에 조심히 앉았다. 벤치도 아닌 맨바닥이었지만 상관 없었다. 그녀도 품 속에 지니고 다녔던 담뱃갑에서 한 개비를 꺼냈다. 하지만 불을 붙이려다가, 미란이가 또 라이터를 숨겼다는 것을 깨닫고 피식 웃고 말았다. 어쩌면 딸아이에게 또 혼이 나야 할 지도 모르겠구나.
낯선 여인이 대신 라이터로 불을 붙혀주었다. 은색칠이 거의 너덜너덜하게 벗겨진, 그렇잖아도 투박한 모양이 세월을 겪으며 더욱 투박해져버린 것 같은 금속 재질의 지포라이터였다. 유정은 어쩐지 그 라이터가 자신의 것과 너무도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여인이 불을 붙여준 담배의 연기를 한 모금 빨아들이고, 유정은 숨을 뱉음과 동시에 하려던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사랑을 해봤다면 당신도 알고 있을 거에요. 사랑은 그런게 아니에요. 누군가는 사랑을 우연이라고 말하지만, 내가 보기에 사랑은 차라리 기적이에요. 하늘 아래에서 숨 쉬는 그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나와 누군가가 만나고, 마음이 통하고, 사랑에 빠질 가능성은 얼마나 희박하겠어요. 나와 그 사람은 그런 기적에 빠졌고, 나는 그걸 소중한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어요. 시간이 아무리 많이 지나도 그럴 거에요."
"다시 선택의 순간이 온다고 해도 그 사람을 사랑할 거야?"
"물론이에요."
낯선 여인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짧은 침묵의 끝에, 그녀는 채 반도 태우지 않은 담배를 짓이기며 입을 열었다.
"바보."
"네?"
"엄마는.... 바보, 멍청이."
유정은 의아한 눈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여인의 모습을 올려다보았다. 낯선 여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유정의 입에서, 주저없이 담배를 뽑았다. 피던 담배를 빼앗긴 유정이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지만 여인은 그녀가 보는 앞에서 담배를 짓이겨버리고는, 유정이 손에 쥐고 있었던 담뱃갑까지 억지로 가져가버렸다.
"담배 피지 마."
"네?"
"또 담배 피면.... 정말 혼날 줄 알아. 엄마는 폐암으로 죽을 팔자니까, 제발 조심하란 말이야."
여인은 이해하기 힘든 말을 마지막으로 남긴 채, 그 자리를 떠났다. 유정은 여인이 사라져가는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비로소 그녀가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을 때, 유정은 여인이 머물렀던 그 자리에 은백색의 초시계 하나가 놓여있음을 깨달았다.
유정은 손을 뻗어, 그 시계를 손에 쥐어보았다. 마치 시계가 공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금속의 안쪽에서 미세하게 작은 떨림이 느껴져왔다. 상당한 무게감이 느껴지는 그 금속 덩어리의 표면에, 음각으로 새겨진 12자의 영문자가 보였다.
- TIME REWINDER
*
오토바이의 핸들을 잡아보는게 얼마만일까? 몇 년이나 지났지만 유정은 지금도 자신이 이것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녀가 예전에 탔던 오토바이를 여전히 보관해주고 있었던 문 교관이 너무도 고마웠다.
유정은 머리에 헬멧을 썼다. 그리고 실로 오랜만에 쥐어보는 액셀을 힘껏 당겼다. 세찬 바람이 불어왔고, 유정은 아득히 오래전에 잃어버렸던 것 같은 그 아찔한 감각에 녹아들었다.
오랜 시간을 달렸다. 이정표도, 표지판도 없었지만 그녀를 태운 바이크는 어느 한 곳을 뚜렷하게 향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1년 가까이 다녔던 대학교의 캠퍼스를 지나, 그리움이 묻어 있는 기억 속의 장소로 향했다.
"여전하구나."
원룸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그 골목의 모습은, 마치 어제 와본 것처럼 지금도 익숙했다. 하지만 자신이 한때 지냈던 건물을 둘러보고 싶은 마음에 문을 열어보려던 유정은, 모든 것이 예전과 같지는 않음을 깨닫고 쓴웃음을 지었다. 입구에 잠금장치가 걸려있었던 것이다.
유정은 다시 오토바이에 몸을 실었다. 다시 그녀를 태우고서 오토바이가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가지도 못해서 유정은 그 자리에 멈춰서고 말았다.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다.
건물 앞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잊지 못할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그 건물이, 그녀가 떠나지 못하도록 붙들고 있었다. 왠지 그 자리에는 익숙한 향기가 잠시 머물고 간 흔적이 배어 있었다.
유정은 품 속을 더듬어 무언가를 손에 쥐었다. 묵직한 금속성의 물건이 느껴졌다. 그것을 꺼내어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시계의 모양을 하고 있는 알 수 없는 물건.....
이렇게 자세히 들여다보니, 아까는 미처 볼 수 없었던 조금은 이질적인 흔적이 보였다. 실은 이 물건 자체가 이질적이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계의 테두리를 두르고 있는 미세한 눈금들 사이에서 유난히 한 부분이 짙게 색칠되어 있는 모습은 그녀의 눈길을 잡아끌었다.
"글씨가 적혀있는 것 같은데."
그것을 언뜻 색칠이라고 생각했지만, 더욱 자세히 보니 그것은 색이 아니라 너무도 미세한 글씨로 눈금 사이에 문자를 촘촘히 새겨놓은 것 같았다. 시력이 꽤 좋은 편이었던 유정이었지만 글씨가 너무 작아서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그녀는 끙끙대면서도 한자 한자, 그 글씨를 읽었다.
- 바늘을 여기에.
무슨 의미일까? 유정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무작정 그 초시계의 바늘을 감아보기 시작했다. 부드럽게 바늘이 흘러갔고, 마침내 글씨로 표시되어 있는 그 영역에 초록색 분침이 이르렀다.
순간 세상이 요동쳤고, 뱃속이 울렁거렸다. 유정은 어지러움을 참기 위해 눈을 꼭 감았다. 모르는 사이에 빈혈이라도 생긴 건지. 아무래도 담배를 끊긴 끊어야겠어.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는 다시 눈을 떴다.
여전히 눈 앞의 풍경은 그대로였다. 많은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자그마한 건물의 모습. 그리고, 많은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소중한 사람의 모습.
"어?"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멈추었던 액셀을 다시 당겨보았다. 엔진 소리를 울리며 오토바이가 움직였고, 그녀는 다시 그 추억 속의 건물 앞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그 곳으로, 그 사람이 서 있는 곳으로 달려가니 점점 더 눈앞에 누군가의 모습이 선명히 그려졌다. 그녀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사람의 모습.
그 자리에 서서 작은 건물을 말없이 올려다보고 있던 한 남자가, 오토바이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오토바이가 남자의 곁을 지나쳤고, 그녀와 그는 그렇게 서로를 스쳤다.
유정은 건물 앞에 오토바이를 세웠다. 그리고 헬멧을 벗어 손잡이에 걸었다. 폭포수처럼 긴 머리카락이 쏟아져 내리며 허공에 나풀거렸다. 그리고나서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다.
"신기루일까?"
눈과 눈이 마주쳤다. 마치 꿈을 꾸듯이, 넋을 놓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남자의 눈과 유정의 눈이 마주쳤다. 가슴이 울렁거렸고, 심장이 빠르게 뛰었고, 결국 눈가에도 눈물이 글썽이며 맺혔다. 그녀는 눈물을 보이지 않기 위해 애썼다. 눈물 대신에, 눈부시게 빛나는 미소를 보여주고 싶었다.
울지 마. 예쁘게 웃어야 해.
"오랜만이에요, 오빠."
미소 비슷한 것을 지었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이 흘렀다. 눈물이 땅에 닿기도 전에 남자가 달려오고 있었다. 남자의 떨리는 팔이 그녀의 몸을 끌어안았다.
"보고 싶었어."
그렁그렁하게 젖은 눈을 하고서도 유정은 활짝 웃음을 지었다. 눈부신 빛과 한줄기 바람이 두 사람을 감싸 안았다.
"나두요."
* 타임 리와인더 (Time Rewinder) 1부 완결.
<후기>
드디어.... 1부 완결이 났네요 ^^;
하고 싶은 말이 너무도 많습니다
하지만 그걸 여기에 다 적을 수는 없겠죠
저는 이 글을 처음 쓰기 시작했을 때부터, 1부의 에필로그를 반드시 이렇게 쓰겠다고 다짐하고 글을 써왔습니다
그동안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그래도 결국엔 우직하게 제가 쓰려는 이야기를 독자 여러분에게 꿋꿋이 전달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한 결말을, 다른 분들이 어떻게 봐주실지 저는 글을 쓰면서 항상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마음껏, 자유롭게 제가 하고 싶은 대로 이야기를 썼으니 이제 그것은 독자분들의 시선에 맡길 수 밖에요 ^^...
제가 타임 리와인더 1부 1장을 쓴 것이 올해 3월의 일이네요
거의 반년 가까이 소라에 연재를 하면서 글을 쓴다는 것으로 인해 저 역시 많은 활력소를 얻었습니다
댓글과 추천, 그리고 게시판과 쪽지를 통해서 애정을 보내주시고, 격려해주시고, 응원해주신 분들을 저는 너무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즐거움이 있었기에 계속 글을 쓸 수 있었겠죠~~
그동안 정말 즐거웠고 감사했습니다
그렇다고 완전히 소라를 뜨겠다는 것이 아니구요,
1부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독자분들에게 제 마음을 전하려는 겁니다
타임 리와인더는 처음에 2부작 혹은 3부작으로 계획했었습니다
전체적인 스토리를 전달하기 위해서 2부는 필수였고, 2부에서 행여나 전달력의 부족으로 못 다한 이야기가 남는다면 3부를 쓸 생각이었습니다
예상하신 분들도 있겠지만, 2부는 성진과 유정의 딸인 미란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이게 사실 재미있을지는 모르겠지만 1부의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나, 1부에서 다 전하지 못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는 점에서 저로서는 제 이야기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시도라고 할 수 있겠네요
타임 리와인더 1부를 쓰는 과정에서, 출판사의 편집자 분과 많은 이야기를 주고 받게 되었습니다.
만약 전자책을 출간하게 되면 소라에 올린 연재분을 모두 내려야 할 것 같아서 저는 적잖이 갈등했고,
전자책을 출간하거나 다른 컨텐츠로 제작을 하거나 하는 일이 있더라도 일단은 제가 글을 쓰기 시작한 소라넷이라는 사이트에서 1부 완결을 맺고 싶었습니다
제 글을 처음부터 읽어와주신 분들을 생각하면, 그 분들에게 어떻게든 이야기의 결말을 보여드리고 싶었던게 제 마음이었습니다. 다행히 편집자 분께서도 그걸 양해해주셨고, 8월 말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바짝 단기간 동안 글쓰기에 집중을 하여 1부의 마무리를 독자분들에게 보여드릴 수 있었습니다.
현재는 2부의 연재처 문제가 아직 결정이 나지 않은 상태입니다
가급적 소라에도 글을 쓰고 싶지만 이 부분은 아직 이야기가 다 진행된 것이 아니라서 조금 더 상의가 필요합니다
제가 어떤 결정을 하든 독자님들에겐 반드시 공지를 통해서든, 소설을 통해서든 납득할 만한 형태로 결론을 내겠습니다
(물론 타임 리와인더의 경우에만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이고, 다른 소설은 여전히 소라에 올릴 계획입니다. 많은 분들이 아시다시피 저는 야설 쓰는걸 좋아하기에.... 다른 잡다한 이야기를 또 올릴지도 모르겠네요 ^^)
중요한 이야기를 다 전한 듯 하여 마음이 홀가분합니다
독자 한분 한분에게 더 감사를 표하고 싶지만 독자분들도 제 마음을 알아주시리라 믿어요
감사합니다
- 이 소설은 소.라.넷(sora.net) 작가 "상상의신비"가 연재 중인 작품입니다.
무단 불펌을 삼가해 주시길 부탁드리며, 퍼가시더라도 출처와 작가명을 꼭 남겨주십시오.
창작가들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이자 도리입니다.
* 1부 에필로그 (epilogue)
"저기요. 초, 초면에 죄송하지만...."
"네?"
"그, 연락처, 좀 주실 수 있나요?"
서연은 한숨을 살짝 쉬었다. 민혁을 곁에 데리고 다니지 않으면 여전히 종종 이런 일이 생기곤 한다. 그녀는 자신의 연락처를 얻고 싶어하는 낯선 남성에게서 잠깐 시선을 거두고, 어느새 또 엉뚱한 곳에 정신을 파느라 그녀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있는 아들의 모습을 찾았다.
"최민혁! 엄마한테 가까이 붙어있으라고 그랬지! 자꾸 말 안 들으면 정말 혼난다?"
"알았어."
신혼 때 쓰던 세탁기가 너무 낡아서 새 것으로 바꿔볼까 싶어, 가전 제품 코너로 잠깐 구경을 왔더니 역시나 민혁은 잡다하게 진열된 기계들로부터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아마도 이번엔 스토브가 어떤 방식으로 가열되는가에 대해 혼자 골똘히 생각을 하고 있었나보다.
아들에게는 정말 남다른 구석이 있었다. 물론 기계와 조립에 관심을 보인다는 것은 그 나이 또래의 남자아이라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었고, 게다가 공학적 소질의 측면에서 생각한다면 그것은 일종의 재능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아들의 경우엔 그 정도가 너무 심해서, 시도 때도 없이 온갖 것들에 한 눈을 파느라 이렇게 종종 사라지곤 하는 일이 무척 빈번했다. 그래서 서연은, 엄마 된 입장에서 혹시라도 아들이 유괴를 당하진 않을까 내심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애엄마에요."
"네에?"
종종걸음으로 달려온 민혁을 안아들며, 서연은 낯선 남자를 향해 말했다. 그러자 역시나 그는 깜짝 놀라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서연은 속으로 생각했다. 조금만 더 길게 살펴봤다면, 아이를 데리고 왔다는걸 쉽게 알 수 있었을 텐데. 남자가 그만큼 즉흥적으로 행동했다는 뜻이리라.
나이가 스물 다섯도 채 되어 보이지 않는 젊은 대학생이었다. 서연은 그 청년이 더 길게 이야기하지 않게끔, 고개를 한번 꾸벅 숙이고는 민혁의 손을 잡고 다시 카트를 끌었다. 얼이 빠진 얼굴로 굳어 있던 대학생이, 친구들로 보이는 무리를 향해 돌아가 허탈하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렸다.
"세상에. 저 얼굴에 유부녀래."
서연은 그저 속으로 픽, 한번 웃고 말았다.
"민혁아, 너 자꾸 그렇게 엄마랑 멀리 떨어지고 그러면 안된다고 했잖아. 응? 너 그러다가 못된 사람들이 데려가면 어쩌려구 그래. 엄마가 이렇게 부탁하는 거니까, 이젠 밖에서는 그러면 안 돼. 알았지?"
"응. 알았어, 엄마."
아들은 얄밉게도 참 대답 하나는 잘한다. 썩 미덥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서연은 민혁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시내에 볼일이 있어서 잠깐 나왔다가, 모처럼 동네 가게가 아닌 번화가의 대형 마트에서 장을 봤더니 이런 일이 생기나보다. 동네에서라면 자신의 얼굴을 보고 유부녀라는걸 모르는 사람이 없을 텐데.
"집에 가자. 좀 있으면 아빠 오시겠다."
"응."
그래도 민혁은 기분이 좋아보였다. 마트에 온 김에 서연이 작은 조립식 장난감을 하나 사주었던 것이다. 아마도 아들은 집에 가서 또 그것의 관절이 움직이는 원리나, 부품이 결합되는 형식에 대해 고민하느라 분해와 조립을 반복할 것이다. 언제나 한결 같은 아들의 모습이 어쩐지 조금 귀엽기도 하여 서연은 민혁의 손을 꼭 잡았다.
*
"여보, 있잖아."
"응?"
남편은 지금도 가끔씩, 자신이 설거지를 대신 해주곤 했다. 서연은 그런 남편의 소소한 다정함이 좋았다. 자취를 하던 시절에 지겹게 해봤다며, 신혼 무렵에는 남편이 설거지 뿐만 아니라 아예 부엌일 자체를 한동안 도맡아 했던 적도 있었다. 민혁이 아직 그녀의 뱃속에 있었을 때에 말이다.
"오늘 시내 마트에서 장 보는데, 웬 대학생 남자애가 내 연락처를 물어보더라?"
"뭐?"
설거지를 하다 말고, 고무장갑을 낀 남편의 손이 우뚝 굳었다. 서연의 입에서 장난기 어린 웃음이 키득하고 터져나왔다. 하지만 그녀는 일부러 내색하지 않은 채 아무렇지 않은 어조로 덧붙였다.
"스물 다섯쯤 돼 보이는 남자였는데, 민혁이가 옆에 있는걸 몰랐나봐. 번호 좀 줄 수 없냐면서 끈질기게 묻던데?"
"참 나, 그래서?"
"폰 번호는 안 되겠다 싶어서, 집 전화번호라도 가르쳐줬어. 그리고 꼭 남편 없을 때만 연락하라고 했지."
물에 젖은 수세미를 손에 쥔 채로, 남편이 서연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심통이 잔뜩 나 있는 못마땅한 눈길 앞에 서연은 결국 깔깔 웃음을 터뜨리며 남편의 등에 와락 매달렸다.
"장난이야, 장난."
"아주 좋으셨겠어. 젊은 남자가 던지는 추파도 받아보고."
"그런데 그 남자 보니까, 여보 옛날 모습 생각나던데?"
"그건 또 무슨 말이야?"
"기억 안 나? 자기도 처음에 나한테 그런 식으로 치근덕거렸던 적 있잖아. 그 땐 진짜 진상이었는데."
아내는 가끔, 두 사람이 연애를 시작하기도 전의 일을 이런 식으로 심술스럽게 끄집어낼 때가 있었다. 이제는 거의 가물가물해진 희미한 기억이기도 하거니와, 떠올려봤자 순 창피하기만 한 기억일 뿐이라, 성진은 그럴 때마다 툴툴거리곤 했다.
"왜 시덥잖은 남자애 보면서 내 생각을 하고 그래?"
"그렇게 시답잖아 보이진 않았는데? 꽤 잘 생겼었어."
"아니, 이 여자가 점점? 그래서 그 젊은 남자가 맘에 든다는 거야, 뭐야?"
"흠, 글쎄~"
결국 뚜껑이 열린 성진은 싱크대 안으로 고무장갑을 홱 벗어던졌다. 그리고는 아내의 몸을 번쩍 들어, 식탁 위에 과격한 몸짓으로 내려놓았다. 잠옷으로 몸에 걸친 헐렁한 원피스를 남편이 마구잡이로 벗기려 들자, 서연은 깔깔거리면서도 핀잔을 주듯이 남편의 등짝을 찰싹하고 때렸다.
"혼나볼래?"
"아우, 정말! 민혁이 아직 안 잔단 말이야."
"그러게 장난도 정도껏 쳤어야지."
황소처럼 돌변한 남편이 원피스 자락 아래로 손을 밀어넣어 서연의 엉덩이를 콱 움켜쥐었다. 비록 맹랑한 장난에 대한 보복으로 시작한 행동이긴 하지만, 연애 시절보다 한층 더 육감적인 매력이 무르익어 있는 아내의 몸을 주무르자 성진도 알게 모르게 조금 달아오른 것 같았다.
"민혁이 진짜 아직 안 자?"
"그래! 조금만 참아. 하여튼 내가 애를 둘 키우는거나 마찬가지라니까."
아쉽게 입맛을 쩝 다시면서도 성진은 쉽사리 그만두지 못하고 슬금슬금 손을 올려 아내의 잘록한 허리를 더듬었다. 그 못된 손은 계속해서 올라가 란제리 속옷 안으로 파고들었다. 브래지어 아래로 비집고 들어간 손이 빼꼼 고개를 들고 있는 젖꼭지를 살며시 건드리자, 그제야 서연이 얼굴을 붉혔다.
"뭐 해?"
"조금만."
성진의 반대쪽 손이 서연의 목을 타고 원피스 안으로 들어가, 브래지어의 후크를 풀었다. 란제리를 걷어올린 성진은 본격적으로 한쪽 가슴을 손에 쥐었고, 반대쪽 가슴은 입으로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가슴이 있는 곳까지 남편의 손이 파고들자 원피스가 거의 벗겨지다시피 말려올라와서, 서연의 속살이 졸지에 훤히 드러나고 말았다.
거의 알몸을 홀랑 드러낸 채로 식탁 위에 누워있는 아내의 모습은, 그 자체로 호화로운 진수성찬이었다. 누가 그랬던가? 식욕을 해결하는 공간인 부엌에서의 섹스는 보다 색다른 자극으로 느껴질 수 있다고. 아내와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을 함께 보냈지만, 성진은 여전히 서연의 몸이 그리고 있는 매혹적인 굴곡에 이따금씩 감탄하곤 했다.
민혁을 낳고 나서도 관리를 잘한 덕분인지 아니면 그녀가 원래 몸매를 타고 난 경우인지는 모르겠지만, 서연의 몸에서는 이제 아가씨일 적엔 좀체 느낄 수 없었던 원숙한 관능미마저 물씬 배어나고 있었기에 성진은 오히려 연애시절보다 아내의 몸에 더 심취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게다가 생각해보면 사실 아내의 나이가 그리 많은 것도 아니었다. 가정을 꾸린지도 어느새 시간이 제법 흘러 가끔 망각하곤 하지만, 삼십 줄에 접어든 성진과는 다르게 서연은 비록 끝자락이긴 해도 아직 엄연한 이십 대였던 것이다. 그러니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아직 아내를 아가씨로 보는 사람이 있다 해도 결코 이상할 일이 아니었다.
하긴 그러니까 지금도 아내가 혼자 시내에 나가면 웬 날파리들이 줄기차게 꼬이는 것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니 괜스레 심술궂은 마음이 솟구쳐 성진의 행위는 더욱 과감해지기 시작했다.
"으응...!"
젖가슴을 물고 빨아대며, 한 손을 내려 보드라운 감촉의 팬티 위를 더듬자 아내가 달뜬 소리를 내었다. 보들보들한 천 조각 위로 조갯살을 쓰다듬는 느낌이 좋았다. 그 감촉을 한껏 즐기다가 팬티 위로 살짝 손가락을 밀어넣어보았다. 안쪽에서 끈적한 물이 찔금 배어 나오며, 브라와 한쌍인 란제리 팬티에 작은 얼룩을 만들었다.
"아이, 참.... 뭐하는 거야. 조금만 한다며?"
"그냥 하자."
"그러다 민혁이 나오면 어떡해?"
"오늘 장난감 사줬다며?"
"응."
"고 녀석, 한번 집중하면 방에서 잘 안 나오잖아. 괜찮지 않을까?"
"어휴, 정말. 그러다가 저번에도 위험했잖아. 애가 성교육 제대로 못 받고 비뚤어지면 다 당신 책임이야. 알겠어?"
"알았어, 내가 책임질게."
"퍽이나."
말은 그렇게 하지만 아내도 적잖이 달아오른 얼굴이었다. 이제는 눈을 감고 서연의 살결만 만지고 있어도, 아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충 알 수 있는 성진이었다. 그토록 익숙해졌음에도 여전히 서로를 향해 이렇게나 뜨겁게 타오를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고, 성진은 그것을 축복이라 여겼다.
"하아아응!"
서연은 하다못해 침대로 가자고 계속 보챘지만, 결국 그들은 그 날 식탁 위에서 섹스를 했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끈적하게 피어오르는 열락의 음색이 부엌 안에 간간히 울렸다.
*
남편과의 사랑은 여전히 뜨거웠고, 솔직했다. 서연은 그래서 행복했다. 때로는 사랑스럽게, 때로는 격정적이게 몸과 마음을 섞어가며 하나가 되는 그 느낌이 좋았다. 세월이 더 많이 흐르고 나면 지금의 아름다움도 시들해 질 테고, 남편도 언제까지나 지금과 같은 모습이지는 않겠지만 그녀는 그런 것이 크게 중요치 않다고 생각했다.
그 훗날에는, 그 훗날에 맞는 사랑의 형태가 있을 것이라고 그녀는 믿었다. 젊음이라는 이름의 빛이 사그라든다고 해서 남편과의 사랑이 시들해 질 것 같지는 않았다. 몸 뿐만이 아니라 이제는 마음까지도 그와 함께 나누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는 남편과의 지난 날들을 종종 떠올리곤 했다. 오로지 쾌감의 대화를 위해서만 시작되었던 그들의 관계가, 여기까지 도달하게 될 거라고는 그녀도 처음엔 생각하지 못했다. 몸의 경계를 넘어 마음과 영혼까지 나눌 수 있는 사이가 되리라고 그 때는 어찌 짐작이나 했을까.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후회하지 않았고, 남편도 그것을 후회하지 않아주어서 기뻤다.
"민혁아, 어린이집 가야지."
서연은 아들의 손을 잡고 집 밖으로 나와, 노란 빛깔의 버스가 오기를 기다렸다.
예나 지금이나 남편과의 사랑은, 어찌보면 철이 없을 정도로 여전히 뜨거웠지만, 그래도 그녀가 연애시절에 비해 많은 것이 달라져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남편과의 사이에 민혁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어머니가 되어 본 여자와, 그렇지 못한 여자의 차이는 굳이 말로 표현할 필요가 없을 만큼 뚜렷한 것이니까.
"오늘따라 기사님이 늦네. 우리 혁이, 어린이집에서 친구들이랑 잘 놀다 올 수 있지?"
"응."
가끔씩 서연이는 아들의 그런 유별한 면모가, 또래의 아이들과 두루 어울리는데 지장을 주진 않을까 염려하기도 했다. 하지만 생각과는 다르게 아들은 별 무리없이 다른 아이들과 어울렸고, 서연은 그것이 기특했다.
요새는 그녀도 일자리를 알아보고 있는 중이었다. 민혁을 키우느라 그녀는 이십 대의 중반을 어떻게 흘려보냈는지도 모를 만큼 바쁘고 정신 없는 나날들을 보냈다. 하지만 이제 슬슬 그녀도 맞벌이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민혁이 자라날 수록 아마 경제적인 부담은 더욱 커질 것이고, 그녀는 남편에게만 그것을 맡겨두고 싶지 않았다.
비록 아이가 있긴 하지만, 서연은 자신이 아직 충분히 젊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스스로가 그리 무능한 여자가 아니라고 믿었다. 이대로 전업주부가 되는 것보다는 넓은 세상으로 나가서 일을 하고, 지금보다 더 능력 있는 아내, 능력 있는 엄마가 되고 싶었다.
"엄마는 오늘 시내에 나갔다 올 거야. 볼 일 끝나구 우리 혁이 데리러 갈 테니까, 잘 놀고 있어야 해. 알았지?"
"응. 알았어."
언제나처럼 대답 하나는 또박또박 잘하는 아들. 서연은 활짝 웃으며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런 모자(母子)의 모습을, 멀지 않은 곳에서 누군가가 물끄러미 지켜보며 서 있었다. 아들의 손을 잡고 버스를 기다리고 있던 자리에, 아까부터 묘하게 신경 쓰였던 누군가의 인기척이 가까이 다가오자 서연은 고개를 들었다.
"안녕하세요."
상대방은 고개를 꾸벅 숙여 그녀에게 인사를 했다. 가느다란 목소리, 무미건조한 표정, 어깨 너머로 길게 내려오는 머리카락. 서연은 그 인기척의 주인이 한 여인이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녀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었다.
"동네 사람일까? 처음 보는 얼굴인데."
조금은 삶에 찌든 것 같은, 염세적인 눈빛을 하고 있는 낯선 모습의 여인. 비록 모르는 사람이긴 했지만 먼저 인사를 받았기에 서연도 엉겁결에 고개를 꾸벅 숙였다. 쓸쓸한 느낌을 간직한 그 눈동자로, 어느새 낯선 여인은 자신의 아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드님인가봐요?"
"아, 네...."
여인은 민혁의 앞에 무릎을 굽히고는 쪼그려 앉았다. 자신의 키의 반도 되지 않는 어린 아들과 눈높이를 똑같이 맞추면서, 낯선 여인은 아들의 얼굴을 조용히 들여다보았다.
서연은 굉장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사실 평소에도 민혁이 유괴를 당하진 않을까 불쑥 걱정이 들곤 하던 그녀였다. 그녀는 낯선 사람이 아들의 가까이에 다가오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눈 앞의 낯선 여인이 아들에게 가까이 얼굴을 가져가는 것을 보면서도, 왠지 그녀를 말릴 수가 없었다.
아들을 바라보는 여인의 눈이 너무도 슬퍼보였기 때문이었다.
"이름이 뭐니?"
"민혁이요. 최민혁...."
여인은 나지막히 아들에게 물었고, 아들은 언제나처럼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아들의 목소리를 들은 낯선 여인이 옅은 웃음을 지었다. 서글프도록 애잔하게 느껴지는 그런 미소였다.
"민혁아."
"네."
낯선 여인이 아들의 이름을 소리내어 불렀다.
"지금처럼 꼭, 건강하고 씩씩하게 자라줘야 해. 아프지 말고, 다치지 말고.... 알겠지?"
엄마에게서나 들었던 말을 낯선 여인에게서 듣는다는 것이 이상했기 때문일까. 민혁은 서연의 얼굴을 한번 올려다보고는, 맑은 눈망울을 몇 번 깜빡거리더니, 이내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네."
"그래.... 착하구나."
삭막함이 가득했던 낯선 여인의 눈동자에 눈물 한 방울이 맺혔다. 여인이 고개를 숙이자 결국 눈가에 맺힌 눈물이 가만히 머물러 있지 못하고 아래로 툭 흘러내렸다. 돌바닥에 눈물을 떨군 여인이, 이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손으로 눈가를 훔치며, 아들의 이마에 대고 가볍게 입술을 한번 맞추었다.
낯선 여인이 아들에게 입을 맞추는 것을 보고서도, 서연은 쉽게 말문을 열 수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여인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미안합니다. 나도 모르게 실례를...."
"아, 아니에요."
낯선 여인은 서연을 향해 고개를 다시 꾸벅 숙였다. 서연은 비록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눈물을 본 것이, 어쩐지 타인의 치부를 너무도 심하게 헤집은 것 같은 기묘한 죄책감이 들어 더이상 아무런 말도 이을 수가 없었다. 왜 이렇게 불편한 기분이 드는지 서연 스스로도 도저히 이해 못할 일이었다.
"이렇게 만나서 정말 반가웠어요."
여인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 말을 자리에 남기고 떠났다. 서연은 그녀의 말이 무슨 의미였을까 생각해봤지만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그저 그 여인을, 속으로 낯선 여인이라 여기고 있으면서도, 그 언젠가 한번 정도는 어딘가에서 마주친 적이 있는 것 같단 막연한 느낌을 받을 뿐이었다.
"이상해. 분명 낯선 사람인데, 왜 한편으론 익숙한 기분이 드는 걸까?"
멀어져가는 낯선 여인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며, 서연은 그 자리에 잠시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노란 빛깔의 어린이집 버스가 경적 소리를 내며 저 멀리서부터 가까워져 왔다. 서연이 멍하니 서 있자, 민혁이 엄마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버스가 왔노라고 일러주었다.
서연은 여인의 뒷모습으로부터 시선을 거두었다.
*
일본의 수도, 도쿄.
번화와 활기의 물결이 넘치고 있는 그곳은, 고무술(古武術) "무신류"의 본관이 자리잡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오늘날 도심의 풍경과는 좀체 어울리지 않는, 녹림이 우거진 배경에 고아한 자태로 지어진 전통식 건물 한 채가 바로 무신류의 현 당주 한석진이 기거하는 별채였다.
별채에는 석진 뿐만이 아니라 그의 가족들이 함께 생활하며 지내고 있었는데, 몇 년 전부터는 그 식구가 한 사람 더 늘었다. 한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당주의 딸이 일본으로 돌아오면서부터 이 곳에 지내게 된 것이었다.
"누님, 편히 주무셨습니까?"
"응. 유진아. 너도 잘 잤니?"
유정은 그녀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는 남동생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유진. 어머니가 아버지와의 사이에서, 조금은 늦은 나이에 얻으신 자신의 친동생. 부모님으로부터 엄격한 교육을 받고, 걸음마를 떼는 순간부터 수양을 쌓으며 자랐기에 유진은 늘 매사에 의젓하게 행동하려 했지만 유정의 눈으로 보기에 그는 아직 어린티를 벗지 못한 평범한 꼬마일 뿐이었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뻣뻣한 태도를 내려놓고, 또래 아이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며 지낼 수 있다면 아마 유진이도 좀 더 행복할 텐데. 유정은 가문에 속박 된 삶의 무게감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런 남동생의 모습이 조금은 안쓰럽다는 생각을 종종 하곤 했다.
하지만 그녀가 함부로 이런 생각을 해선 안 되리라. 유진의 존재가 있기에 유정은 가문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일 테니.... 그렇게 생각하면 유정인 문득 서글퍼졌다. 안쓰러워하면서도 한편으론 고마워해야 한다니. 그건 너무 이중적이지 않은가.
"누님, 저.... 이야기 들으셨나요?"
"무슨?"
유진은 아직까지도 그녀를 조금 어려워하곤 했다. 하기사 어린 시절 내도록 누이와 떨어져 지냈기에 그럴 만도 할 것이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둘은 소중한 핏줄이기에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려 애썼다. 유진도 어린 마음에 그것을 느끼고 있기에, 마냥 편하지만은 않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유정과의 소통을 시도하려는 것일 터이다.
"하야토 가의 수제자가 어제 본관에 들어왔어요. 아버.... 아니, 당주님께 후대 계승에 대한 문제를 정식으로 여쭙고 싶어하는 것 같았어요."
"그러니?"
유정은 별 흥미가 없다는 듯, 그 소식을 한 귀로 흘렸지만 동생인 유진은 다급하게 물었다.
"누님은, 정말 괜찮으세요?"
"........"
그녀는 동생이 왜 이런 이야기를 자신에게 하는지 알고 있었다. 하야토 가의 그 사람이 아버지에게 후대 계승에 대한 문제를 여쭙는다는 것은 곧, 아버지의 딸인 자신과 혼례를 올릴 수 있도록 간청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아직은 아버지가 그럴 마음이 없으시겠지만, 언젠가 아버지가 그 청을 거절하지 못할 때가 되면 유정은 아마 그 남자와 결혼을 해야만 할 것이다. 결국 그것이 그녀의 운명일까?
"누님. 저, 저는.... 아직 어리기 때문에 잘은 모르지만, 누님이 그걸 원하지 않는다는걸 알고 있습니다. 저도 아버.... 아니, 당주님께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알 수 있어요. 누님은 한국에 남겨두고 오신 분이 있다고.... 누님은 그 분을 아직도 마음에 담고 계신다고 당주님이 늘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가 네게 그런 말씀을 하셨니?"
유정은 어쩐지 오늘따라 국화차의 향이 조금 쓰게 느껴진다는 생각을 했다. 아버지는 왜 어린 아들에게 그런 말씀을 하신 걸까?
"누님,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제가 비록 아직은 어리기 때문에 지금은 하야토 가의 제자를 따라갈 수 없지만.... 저는 당주님의 핏줄이니 앞으로 더욱 성장할 겁니다. 제가 실력으로 정정당당하게 다음 당주의 자리를 물려받는다면 원로들도 수긍할 것이고, 그러면 누님이 원치 않는 결혼을 억지로 하게 될 필요도 없어지지 않을까요?"
몸에 맞지도 않는 헐렁한 도복을 몸에 걸친 채로, 맹랑하게 그런 이야기를 하는 남동생의 모습을.... 유정은 지극히 고맙게 여겼다. 그녀는 아직 키도 다 자라지 않은 남동생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옅게 웃음 지었다.
"말이라도 정말 고맙구나. 네 그런 마음, 꼭 기억할게."
너무 당찬 포부를 밝혔다고 생각한 걸까, 동생은 약간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우리끼리 있을 때엔, 아버님을 편하게 아버님이라고 불러도 괜찮아. 어린 나이에 부모를 부모라고 부르지 못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불행이란다. 아마 아버님께서도 네게 당주님이라는 말보단 아버지라는 말을 더욱 듣고 싶어하실거야."
"네? 그럴리가요. 당주님은 분명...."
"아버님이 만약 너에게 달리 말씀하셨다면, 그건 분명 진심이 아니셨을거야."
동생은 그녀의 말을 아직까지는 잘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아마 시간이 좀 더 지나고 나면 동생도 자연스레 이해하게 되리라.
유정은 국화차를 한 모금 더 홀짝이고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찻잔 속에서 아른거리는 물결 위로, 괜스레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침부터 이런 기분에 빠져버리면 곤란한데.... 유정은 애써 그 얼굴을 눈 앞에서 지웠다.
*
남동생을 돌려보내고 나서 유정은 다시 별채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가 머물고 있는 방에 들어선 유정은, 자신이 찾는 얼굴이 보이지 않아서 마당으로 걸음을 옮겨보았다. 그러자 마당에서 나비를 쫓으며 뛰어다니고 있는 어린 여자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유정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미란아, 뭐하니?"
"엄마아."
엄마의 목소리를 들은 딸이 종종걸음으로 달려와 유정에게 안겼다. 딸아이는 품에 안기자마자 여느 때처럼 아리송한 말들을 했다.
"엄마, 시간축과 공간축이 있는데, 공간축을 해결하려면 날개가 필요해. 나비는 정말 좋겠다, 그치? 날아서 어디든 갈 수 있잖아. 근데 시간축은 어떻게 해결해야할까? 그건 아직 잘 모르겠어...."
"........"
딸아이는 가끔 이렇게 영문을 모를 말들을 유정에게 늘어놓곤 했다. 유정은 딸에게 비범한 면모가 있다는 사실을 진즉에 느끼고 있었지만 구태여 그것을 주변에 알리지는 않았다. 고리타분한 가문의 어른들이 그 사실을 알아봤자 딸에게 무슨 도움을 주겠는가.
그래도 가끔은 궁금해진다. 애아빠가.... 만약 딸의 이런 특이한 부분을 알았다면, 그는 뭐라고 말했을까?
"아...."
괜한 생각을 떠올렸나보다. 눈시울이 젖어드는 것을 느꼈다. 딸의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기 위해 그녀는 얼른 고개를 돌리고 다른 곳을 보았다. 다행히 딸아이는 여전히 나비의 자취를 눈으로 쫓고 있었다.
"미란아, 그럼 마당에서 좀 더 놀고 있을래? 엄마 잠깐 바람 쐬고 올게...."
"응."
폴짝폴짝 뛰기 시작하는 딸의 모습을 잠깐 내버려두고, 유정은 딸이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도록 멀찍이 떨어진 연못가로 걸음을 옮겼다. 물이 말라버린지 꽤 오래된, 지금은 흔적만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연못가였다.
유정은 품 속을 더듬었다. 그리고는 언제부터인가 지니고 다니기 시작한 물건을 꺼냈다.
스무살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도대체 왜 담배를 피는지, 그녀는 이해하지 못했었다. 건강을 망치고, 정신을 흐리게 하는 그 끊기 힘든 마약을 애초에 왜 입에 대는 걸까? 하지만 몇 년이 지난 지금, 그녀는 거의 하루에 한갑 씩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그것도 결코 순하지 않은 종류의 담배를....
"미안해. 미안해, 미란아....."
수행으로 심신을 가다듬어야 할 자신이 이런 유해물질 따위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에 그녀는 늘 죄책감을 느꼈다. 하지만 이런 것에라도 의지하지 않으면 너무도 버티기가 힘들었고, 쓸쓸했다.
그녀는 자기 자신에 대한 죄책감보다도, 딸에 대한 죄의식을 종종 느꼈다. 어린아이를 가까이 둔 엄마가 이렇게 주기적으로 흡연을 한다는 것은, 그녀 본인의 몸 뿐만 아니라 딸아이에게까지 분명 엄청난 악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담배를 끊지 못하는 자신의 나약함이 유정은 경멸스러웠다.
예전에 보았던 담뱃갑에 그런 문구가 적혀있었던 것 같다. 담배는 나 뿐만 아니라 내 가족들까지 병들게 하는 주범이라고..... 결코 틀린 말이 아니었다.
"보고 싶어."
담배를 태우면, 연기가 허공에 번지고, 그 틈새로 항상 한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어쩌면 유정은 그렇게나마 그의 얼굴을 새기고 싶어서 담배를 태우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란이를 위해서 끊기는 끊어야겠지. 항상 그렇게 마음만 먹는다는게 문제였지만 유정은 내일부턴 꼭 금연을 해보리라 다시금 마음 먹었다.
"어?"
품 안을 더듬어봤는데, 담뱃갑만 나오고 라이터는 나오질 않았다. 항상 지니고 다니던 건데 어디서 잊어버린걸까? 주머니를 뒤져보다가 문득 유정은 짚히는 바가 있었다. 다시 딸아이가 있던 마당으로 돌아가려고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 때마침 딸아이가 저 멀리서부터 달려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엄마! 또 담배피려고 했지!"
"........"
어쩐지 조금은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아냐."
"거짓말! 할아버지한테 다 이를 거야! 엄마는 저번에도 할아버지한테 혼났으면서...."
딸아이에게 꾸중을 듣는 엄마라니. 정말 한심하지 않은가. 아무래도 아직은 누군가의 엄마가 되기엔, 자기 자신부터가 너무 어리지 않나 하는 생각이 유정은 문득 들었다.
"미안해. 엄마가 잘못했어. 그런데 혹시 엄마 라이터를 또 몰래 가져가서 숨긴 거니?"
"아냐. 안 그랬어."
입장이 바뀌어 이번엔 딸이 어설픈 거짓말을 한다. 유정이는 쓴웃음을 지으며 딸아이를 달래었다.
"엄마 정말 담배 안 필게. 그 라이터가 엄마에게 소중한 물건이라서 그래. 그러니까 엄마 한번 믿고 돌려줄래?"
"그래놓고 또 담배피면 어쩔 거야?"
"자, 손가락 걸고 약속하자."
유정은 딸아이에게 손가락을 걸고 약속을 했다. 그제야 미란이는 머뭇거리며 주머니에 감춰두었던 은색의 지포라이터를 꺼내 유정에게 돌려주었다. 빛이 잔뜩 바래있는 그 네모낳고 투박한 물건. 자신이 왜 그것을 소중한 물건이라 여기고 있는지 유정은 모를 일이었지만, 언제부터인가 그 라이터는 유정의 꾸준한 소지품이 되었다.
"정말 순수하구나, 아이들은...."
아무리 비범한 구석이 있어도 미란이 역시 아이는 아이였다. 손가락을 걸었다고 해서 몇 번이고 그 말을 철썩같이 믿어버리는 순수함에 유정은 마음이 아렸다. 자신도 언젠가 누군가에게 저렇게 손가락을 걸고 약속을 받은 적이 있었다. 고요하고 아름다운 들판 위에서, 서로의 몸을 끌어안고선....
"내가 어디에 있든, 내 곁에 있어줄 수 있나요?"
너무나 많은 생각들이 떠오르는 아침이었다. 결국 참지 못하고 마음이 욱씬거렸다.
"엄마.... 왜 울어?"
딸아이가 물었다.
*
"오랜만입니다, 아가씨."
오랜만에 문 교관의 얼굴을 보게 되니 유정은 퍽 반가웠다. 아버지와 함께 한국에 왔을 때도, 일부러 시간을 내어 유정을 만나러 왔을 만큼 문 교관과 유정의 사이는 각별했다. 유정에게 있어 외지나 다름 없게 느껴지는 이 척박한 곳에서, 문 교관은 그녀가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어서 오세요, 그런데 오늘은 다른 손님도 계시는 군요."
하지만 오늘 유정은, 그런 문 교관의 방문을 마냥 반갑게 여길 수 만은 없었다. 문 교관은 옆에 한 사내를 대동하고 왔는데, 유정인 비록 몇 번 밖에 얼굴을 본 기억이 없지만 그 사내가 누구인지 정도는 떠올릴 수 있었다.
남동생인 유진이 내내 이야기했던, 그 하야토 가의 수제자였다. 아버지께 계속해서 그녀와 혼인을 맺을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을 드리고 있다는,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이미 자신의 약혼자로 내정되어 있는 바로 그 사람이었다.
유정은 일본에 온 이후로, 그의 얼굴을 어쩔 수 없이 몇 번 보게 될 일이 있었지만 여전히 이 남자의 얼굴을 봐도 아무런 감흥이 생기지 않았다. 심지어 이 남자와 언젠간 혼례를 올리게 될 거란 생각조차도 아직은 현실감이 들지 않았다. 자신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테두리 바깥의 사람. 그는 유정에게 그런 사람이었다.
"지난 친선 행사에서 얼굴을 뵌 이후로는 처음 뵙는군요, 아가씨. 정말 오랜만입니다."
"그러네요. 오랜만이에요."
그는 그런 말을 했지만, 유정은 사실 언제 그의 얼굴을 봤었는지 제대로 기억조차 나질 않았다.
"문 교관님, 죄송합니다만 잠깐 자리를 피해주시겠습니까?"
하야토 가의 제자는 문 교관에게 양해를 구했다. 문 교관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러나는 것을 보고, 유정은 오늘 문 교관의 방문이 순전히 가문의 문제 때문이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의 수제자인 문 교관은, 비록 여성의 몸이긴 했지만 가문 내에서도 그 특출한 실력을 인정받고 있기에 상당히 중요한 직책을 여러가지 겸하고 있었다. 특히 현 당주를 보좌하며 중요한 외교적 사안이나 외부 인사를 담당하고 대접하는 것 또한 그녀의 역할이었는데, 오늘 문 교관의 방문도 그러한 업무의 연장인 것 같았다.
아무래도 하야토 가의 인물쯤 되는 사람이니 문 교관이 직접 이렇게 대동하며 일을 보는 것이겠지만, 설마하니 그가 문 교관을 통해서 직접 자신을 만나러 올 줄은 몰랐기에 유정은 조금 당황스러웠다.
"아가씨, 이렇게 불쑥 찾아오게 되어 죄송합니다. 하지만 꼭 드리고 싶은 말이 있었습니다."
"뭐죠?"
그는 대답 대신 품 속에서 아주 자그마한 상자를 하나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것을 유정에게로 내밀었다. 유정이 그것을 받아들 생각도 못하고 있자 그는 직접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영롱한 빛깔로 반짝이는 반지 하나가 놓여있었다.
"이게.... 무슨 의미인가요?"
"아가씨가 한국에서 오랜 세월을 지내면서, 바깥 문화를 많이 접하셨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부분에 무척 서툴고, 아는 게 없지만.... 오늘날의 평범한 젊은 남녀들은 혼인을 청할 때 종종 반지를 선물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준비를 했습니다."
"그런 것 보다도, 왜 제게 이런걸 주시는 거죠?"
유정이 여전히 그가 내민 반지를 받아주지 않자, 그는 겸연쩍은 태도로 상자를 도로 닫으며 대신 말을 이었다.
"저는 아가씨가 저와의 혼인을 원치 않는다는걸 알고 있습니다. 아마 당주님도 그것을 알고 계시기에 저와 아가씨가 맺어지는 것을 꺼리시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저는 아가씨의 마음에 대해 생각해봤습니다. 아가씨가 저를 원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
"제 생각이지만 아가씨가 저와의 혼인을 원치 않는 이유는, 저와 아가씨 사이에 남녀로서의 정분이란 것이 없기 때문이겠지요. 얼굴도 제대로 모르고 살았던 남자와 갑자기 혼인을 하고 싶지는 않으실 테니까요."
"그래요. 그게 이상한가요?"
"아니요. 이상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렇게 꽉 막힌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아가씨의 그런 마음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적어도 제 마음만큼은 아가씨에게 확실히 전해드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비록 아가씨는 저에게 마음이 없으시겠지만, 저는 아가씨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마음에 두고 있었습니다. 제가 이렇게 애타게 아가씨께 혼례를 청하는 이유는 비단 후계를 계승하고 싶어하는 마음 때문만이 아닙니다. 후계의 자리를 떠나서, 저는 한 남자로서 아가씨를 원합니다. 이런 제 마음을 알아주시겠습니까?"
유정도 여인이었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어쩌면 이 남자가 자신에게 그런 마음을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적은 있었다. 그녀를 보는 그의 눈빛이 미묘했던 것을 은연 중에 느꼈던 것이다. 하지만 유정은 이내 그런 생각을 마음에서 지워버렸었다. 어차피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유정의 마음이 변하지는 않는 것이니.
만약 사랑이라는 것이 일방통행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거라면, 이미 유정은 한국에서 그녀가 사랑했던 남자와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남자는 자신이 아닌 다른 여인과 사랑을 하기로 마음 먹었다.
유정은 고개를 들어 눈 앞의 남자를 보았다. 어쩌면 자신의 남동생인 유진과 마찬가지로, 이 사람 또한 가문의 영향 아래 지극히 올곧고 뚜렷한 길을 걸어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지극히 속박 된 삶이었다. 새장 속의 새처럼,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자신을 두르고 있는 울타리가 세상의 전부라고 믿어야만 하는 그런 가여운 삶.
그렇게나 보수적인 환경에서 자라났음에도 그가 지금 이렇게 진솔하게 마음을 터놓고 남녀로서의 감정을 자신에게 고백한다는 것은, 물론 그 진심 어린 당당함에 대해서는 찬사를 보내야 할 부분이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사랑이라는 것이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지에 대해서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은 자신이 겪어보지 못한 삶, 겪어보지 못한 세계의 이야기이므로.
"미안해요."
그래서 유정은 고개를 저었다.
"전 그럴 수 없어요."
"어, 어째서입니까....? 혹시, 따님 때문에 그러시는 겁니까?"
"........."
그는 미란이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일본으로 돌아왔을 때, 가문과는 아무 관련도 없는 한국인의 아이를 배에 덜컥 배어온 그녀를, 원로들은 하나같이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돌이켜보면 곱지 않은 정도가 아니었다.
은연 중에 그녀에게 쏟아졌던 비난의 눈길, 수군거림, 손가락질.... 그것이 노골적으로 심해지자 결국 아버지는 진노하셨고, 강경한 태도로 그들의 입을 막아버리셨다. 그로부터 시간이 어느 정도 흘러 이제는 유정도 그러려니 하고 받아들이고 있지만, 아마 지금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흉을 보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유정은 이 남자가 미란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못내 불편했다. 어쩌면 그도 한국인의 씨를 받아와 가문의 풍기를 흐리는 여자라며, 그녀를 속으로 창부 취급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 유정은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무덤덤해지기로 마음 먹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딸에 대한 비난까지 견뎌낼 자신은 없었다. 그래서 그가 딸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길 바랐다.
"알고 있습니다. 따님으로 인해서 더욱 마음이 불편하실 거라는걸. 하지만.... 하지만 전 개의치 않습니다. 만약 아가씨가 제게 마음을 허락해 주신다면, 저는 따님에게 좋은 아버지가 되려고 노력할 겁니다. 비록 제 핏줄이 아니더라도 말입니다."
"아니에요. 당신은 그렇게 하지 못할 거에요. 그리고...."
유정은 쓸쓸한 눈으로 덧붙였다.
"딸아이와는 관련 없는 문제에요. 저는 당신을 사랑할 수 없으니까요."
"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어째서 저에게 마음을 열 수 없다는 거죠?"
아마 이 남자는 결코 이해하지 못하리라. 스스로의 눈과 귀와 마음으로, 사랑을 겪어보기 전에는.
"왜냐하면.... 당신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그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유정은 그들 사이에 필요한 대화가 끝났음을 느꼈다.
*
"죄송합니다, 아가씨. 이런 일로 찾아뵙게 되어서."
"괜찮아요. 문 교관님이 원했던 것은 아닐 테니까요."
하야토 가의 수제자가 돌아가고 나서, 문 교관은 바쁜 와중에도 잠시 틈을 내어 유정과 대화를 했다.
"아가씨."
"네?"
"내일 저는 이곳을 떠납니다. 당주님께서 지시한 일이 있어.... 잠시 한국에 다녀오려 합니다."
한국....
유정의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 그 이름은 언제 들어도 아련하고, 가슴 저리게 느껴지는 이름이었다. 그녀가 스무 살까지의 세월을 보냈던 곳. 마음 한켠에 줄곧 간직해두고 있는 그녀의 고향.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이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을....
"혹시, 아가씨가 원하신다면 말이지만.... 저와 함께 가시겠습니까?"
"제... 가요? 왜요?"
유정은 문 교관에게 되물었지만, 문 교관에게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유정 스스로가 가장 잘 알지 않겠냐고, 문 교관은 그렇게 답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잘 모르겠어요. 이제와서 한국이라니...."
"한번이라도 얼굴을 보고 나면, 아가씨 마음 속의 짐이 조금은 줄어들 겁니다."
문 교관은 오직 그녀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그 이야기는 유정의 마음 속에 커다란 파문을 남겼다. 정말 그럴까?
"내일 오전에 떠납니다. 천천히 생각해보시고 마음이 내키신다면 저를 찾아와 주십시오."
*
유정은 힘 없는 걸음으로 마당으로 돌아왔다. 여전히 미란이가 마당에서 뛰어놀고 있었다.
"미란아."
이번에도 딸아이는 유정이 부르자마자 쫄래쫄래 달려와 안겼다.
"미란아, 엄마가 뭐 하나 물어봐도 돼?"
"응. 뭐든지."
"미란이는.... 아빠가 보고 싶지 않아?"
딸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엄마인 자신의 눈에도 무척 낯설어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질문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는 얼굴이었다. 잠깐 고민하던 딸은 엄지 손가락을 깨물며 어렵사리 대답했다.
"나한텐 아빠가 없다던데."
"누가? 누가 그래?"
"여기 어른들이 그랬어. 나한텐 아빠가 없다고.... 엄마랑 할아버지 뿐이라고."
순간 울컥하고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유정은 딸아이에 대한 미안함 이상의 어떤 안쓰러움을 주체할 수 없어서 딸의 자그마한 몸을 힘주어 끌어안았다. 딸이 버둥거리면서도 그녀에게 여린 팔을 둘러 엄마를 마주안았다.
"너한테 아빠가 왜 없어.... 아빠는 지금도 네 생각을 하고 계실 거야."
"정말? 그럼 나도 아빠가 있는 거야?"
"응."
미란이에게 우는 모습을 너무 많이 보이는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역시 엄마가 되기엔 아직 어린거겠지....
*
많은 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가는 공항에 서서, 유정은 만감이 교차하는 것을 느꼈다.
"문 교관님, 저.... 잠깐만 혼자 있고 싶네요. 괜찮을까요?"
"알겠습니다. 따님은 제가 모시고 있겠습니다."
문 교관도 그런 유정의 마음을 눈치챈 것 같았다. 낯을 많이 가리는 미란이였지만 다행히 문 교관에게는 마음이 좀 놓이는 듯, 엄마가 잠시 자리를 비운다는데도 크게 투정부리지 않고 얌전히 있어주는 기색이었다.
유정은 천천히 걸었다. 사람들이 틈바구니를 헤치고, 그녀의 발걸음이 어느 한 군데로 하염없이 향했다. 계속해서 걷던 유정이 결국 기억 속에 남아있는 자리에서 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그 곳은 아무 표시도, 특징도 없는 평범한 장소일 뿐이었지만.... 유정은 몇 년 전에 자신이 발 딛고 서 있었던 이 자리를 결코 잊을 수가 없었다.
한 때 자신은, 이곳에 서서 한 남자가 오기만을 가만히 기다렸던 적이 있었다. 비행기에 오를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을 때에도, 그녀는 여전히 그가 자신을 만나기 위해 와줄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남자는 오지 않았고, 결국 그녀는 비행기에 올랐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지금이라도, 다시 만난다면.... 마지막이 아닐 수 있을까?"
하지만 이내 그런 생각을 떠올리지는 않기로 했다. 마음 속에서 기대를 부풀리다보면, 그만큼 큰 상처를 받게 된다. 그녀는 몇 년 전의 바로 이 자리에서, 그것을 실감했다.
"행복하게 살고 있을까?"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마음 먹었는데도, 자꾸만 그 사람 생각이 났다. 기어코 한국 땅을 밟았기 때문일 것이다.
유정은 마치 몇 년 전으로 돌아간 듯이, 그 자리에 서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느낌에 빠져 보았다. 지금이라도 이렇게 여기에 서서 기다리고 있으면 언젠가는 그가 자신을 찾아와 줄 것만 같았다. 숨을 헐떡이면서, 늦어서 미안하다는 말을 건네면서 말이다..... 그러면 자신은 그저 쓰게 한번 웃고, 그를 용서해 주어야 할까?
왜 그 자리에서 발을 뗄 수가 없었는지 모르겠다. 그저 그렇게 하염없이 기다리다보면 무언가가 정해질 것이라고 여겼던 것인지. 결국 과거의 흔적을 털고 유정이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저 멀리서부터 누군가가 희미하게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누구?"
유정은 아닐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순간 가슴이 울렁이는 것을 느꼈다.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작게 보였던 누군가의 인영이 점차 가까워졌고, 마침내는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눈 앞으로 다가왔다. 어깨 너머로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이 보였다. 여자였다.
짐작했으면서도 마음 속에 조금 씁쓸한 허탈감이 일었다. 유정은 그저 쓴웃음을 지었다. 여자들 중에서도 머리가 특히 긴 편에 속하는 유정이었지만, 다가오는 여인을 보고 있으니 그 여인도 만만치 않을 것 같았다. 왠지 여인에게서 자신과 비슷한 느낌이 풍겨서 유정은 조금 호기심을 가졌다.
"그거 알아?"
호기심에 곁눈질만 하고 있었는데, 여인이 자신에게 불쑥 말을 건네자 유정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세상엔 더 좋은 남자들이 많다는거 말이야. 굳이 그 사람을 만나지 않더라도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었을 거야. 그런데 왜 그렇게 오랜 시간을.... 홀로 힘들어 했어?"
낯선 여인은 유정이 놀라거나 말거나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입 밖으로 내었다. 유정은 어떻게 얼굴도 모르는 낯선 여자가 이런 말을 하는 건지 이해 할 수 없었지만,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주변을 분주하게 지나가던 사람들이 모두 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렇게 소란스러웠던 공항 안에, 순식간에 모든 흔적이 사라지고, 오직 낯선 여인과 유정 둘 만이 존재하고 있었다. 어쩌면 꿈을 꾸고 있는 걸까? 그래, 꿈이라도 좋으리라. 이 그리운 땅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볼 수 있다면.
"사랑, 해보셨나요?"
"응. 해봤지."
낯선 여인은 유정의 옆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아 주머니에서 담배를 빼물었다. 공항 내에서는 담배를 태워서는 안 되는게 상식일 텐데도 유정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그녀가 담배를 피든, 무엇을 하든 지금 이 이야기를 방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유정도 낯선 여인을 따라 바닥에 조심히 앉았다. 벤치도 아닌 맨바닥이었지만 상관 없었다. 그녀도 품 속에 지니고 다녔던 담뱃갑에서 한 개비를 꺼냈다. 하지만 불을 붙이려다가, 미란이가 또 라이터를 숨겼다는 것을 깨닫고 피식 웃고 말았다. 어쩌면 딸아이에게 또 혼이 나야 할 지도 모르겠구나.
낯선 여인이 대신 라이터로 불을 붙혀주었다. 은색칠이 거의 너덜너덜하게 벗겨진, 그렇잖아도 투박한 모양이 세월을 겪으며 더욱 투박해져버린 것 같은 금속 재질의 지포라이터였다. 유정은 어쩐지 그 라이터가 자신의 것과 너무도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여인이 불을 붙여준 담배의 연기를 한 모금 빨아들이고, 유정은 숨을 뱉음과 동시에 하려던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사랑을 해봤다면 당신도 알고 있을 거에요. 사랑은 그런게 아니에요. 누군가는 사랑을 우연이라고 말하지만, 내가 보기에 사랑은 차라리 기적이에요. 하늘 아래에서 숨 쉬는 그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나와 누군가가 만나고, 마음이 통하고, 사랑에 빠질 가능성은 얼마나 희박하겠어요. 나와 그 사람은 그런 기적에 빠졌고, 나는 그걸 소중한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어요. 시간이 아무리 많이 지나도 그럴 거에요."
"다시 선택의 순간이 온다고 해도 그 사람을 사랑할 거야?"
"물론이에요."
낯선 여인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짧은 침묵의 끝에, 그녀는 채 반도 태우지 않은 담배를 짓이기며 입을 열었다.
"바보."
"네?"
"엄마는.... 바보, 멍청이."
유정은 의아한 눈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여인의 모습을 올려다보았다. 낯선 여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유정의 입에서, 주저없이 담배를 뽑았다. 피던 담배를 빼앗긴 유정이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지만 여인은 그녀가 보는 앞에서 담배를 짓이겨버리고는, 유정이 손에 쥐고 있었던 담뱃갑까지 억지로 가져가버렸다.
"담배 피지 마."
"네?"
"또 담배 피면.... 정말 혼날 줄 알아. 엄마는 폐암으로 죽을 팔자니까, 제발 조심하란 말이야."
여인은 이해하기 힘든 말을 마지막으로 남긴 채, 그 자리를 떠났다. 유정은 여인이 사라져가는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비로소 그녀가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을 때, 유정은 여인이 머물렀던 그 자리에 은백색의 초시계 하나가 놓여있음을 깨달았다.
유정은 손을 뻗어, 그 시계를 손에 쥐어보았다. 마치 시계가 공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금속의 안쪽에서 미세하게 작은 떨림이 느껴져왔다. 상당한 무게감이 느껴지는 그 금속 덩어리의 표면에, 음각으로 새겨진 12자의 영문자가 보였다.
- TIME REWINDER
*
오토바이의 핸들을 잡아보는게 얼마만일까? 몇 년이나 지났지만 유정은 지금도 자신이 이것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녀가 예전에 탔던 오토바이를 여전히 보관해주고 있었던 문 교관이 너무도 고마웠다.
유정은 머리에 헬멧을 썼다. 그리고 실로 오랜만에 쥐어보는 액셀을 힘껏 당겼다. 세찬 바람이 불어왔고, 유정은 아득히 오래전에 잃어버렸던 것 같은 그 아찔한 감각에 녹아들었다.
오랜 시간을 달렸다. 이정표도, 표지판도 없었지만 그녀를 태운 바이크는 어느 한 곳을 뚜렷하게 향하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1년 가까이 다녔던 대학교의 캠퍼스를 지나, 그리움이 묻어 있는 기억 속의 장소로 향했다.
"여전하구나."
원룸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그 골목의 모습은, 마치 어제 와본 것처럼 지금도 익숙했다. 하지만 자신이 한때 지냈던 건물을 둘러보고 싶은 마음에 문을 열어보려던 유정은, 모든 것이 예전과 같지는 않음을 깨닫고 쓴웃음을 지었다. 입구에 잠금장치가 걸려있었던 것이다.
유정은 다시 오토바이에 몸을 실었다. 다시 그녀를 태우고서 오토바이가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가지도 못해서 유정은 그 자리에 멈춰서고 말았다.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다.
건물 앞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부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잊지 못할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그 건물이, 그녀가 떠나지 못하도록 붙들고 있었다. 왠지 그 자리에는 익숙한 향기가 잠시 머물고 간 흔적이 배어 있었다.
유정은 품 속을 더듬어 무언가를 손에 쥐었다. 묵직한 금속성의 물건이 느껴졌다. 그것을 꺼내어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시계의 모양을 하고 있는 알 수 없는 물건.....
이렇게 자세히 들여다보니, 아까는 미처 볼 수 없었던 조금은 이질적인 흔적이 보였다. 실은 이 물건 자체가 이질적이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계의 테두리를 두르고 있는 미세한 눈금들 사이에서 유난히 한 부분이 짙게 색칠되어 있는 모습은 그녀의 눈길을 잡아끌었다.
"글씨가 적혀있는 것 같은데."
그것을 언뜻 색칠이라고 생각했지만, 더욱 자세히 보니 그것은 색이 아니라 너무도 미세한 글씨로 눈금 사이에 문자를 촘촘히 새겨놓은 것 같았다. 시력이 꽤 좋은 편이었던 유정이었지만 글씨가 너무 작아서 알아보기가 힘들었다. 그녀는 끙끙대면서도 한자 한자, 그 글씨를 읽었다.
- 바늘을 여기에.
무슨 의미일까? 유정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무작정 그 초시계의 바늘을 감아보기 시작했다. 부드럽게 바늘이 흘러갔고, 마침내 글씨로 표시되어 있는 그 영역에 초록색 분침이 이르렀다.
순간 세상이 요동쳤고, 뱃속이 울렁거렸다. 유정은 어지러움을 참기 위해 눈을 꼭 감았다. 모르는 사이에 빈혈이라도 생긴 건지. 아무래도 담배를 끊긴 끊어야겠어.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는 다시 눈을 떴다.
여전히 눈 앞의 풍경은 그대로였다. 많은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자그마한 건물의 모습. 그리고, 많은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소중한 사람의 모습.
"어?"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멈추었던 액셀을 다시 당겨보았다. 엔진 소리를 울리며 오토바이가 움직였고, 그녀는 다시 그 추억 속의 건물 앞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그 곳으로, 그 사람이 서 있는 곳으로 달려가니 점점 더 눈앞에 누군가의 모습이 선명히 그려졌다. 그녀에게는 너무도 익숙한 사람의 모습.
그 자리에 서서 작은 건물을 말없이 올려다보고 있던 한 남자가, 오토바이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오토바이가 남자의 곁을 지나쳤고, 그녀와 그는 그렇게 서로를 스쳤다.
유정은 건물 앞에 오토바이를 세웠다. 그리고 헬멧을 벗어 손잡이에 걸었다. 폭포수처럼 긴 머리카락이 쏟아져 내리며 허공에 나풀거렸다. 그리고나서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다.
"신기루일까?"
눈과 눈이 마주쳤다. 마치 꿈을 꾸듯이, 넋을 놓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던 남자의 눈과 유정의 눈이 마주쳤다. 가슴이 울렁거렸고, 심장이 빠르게 뛰었고, 결국 눈가에도 눈물이 글썽이며 맺혔다. 그녀는 눈물을 보이지 않기 위해 애썼다. 눈물 대신에, 눈부시게 빛나는 미소를 보여주고 싶었다.
울지 마. 예쁘게 웃어야 해.
"오랜만이에요, 오빠."
미소 비슷한 것을 지었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눈물이 흘렀다. 눈물이 땅에 닿기도 전에 남자가 달려오고 있었다. 남자의 떨리는 팔이 그녀의 몸을 끌어안았다.
"보고 싶었어."
그렁그렁하게 젖은 눈을 하고서도 유정은 활짝 웃음을 지었다. 눈부신 빛과 한줄기 바람이 두 사람을 감싸 안았다.
"나두요."
* 타임 리와인더 (Time Rewinder) 1부 완결.
<후기>
드디어.... 1부 완결이 났네요 ^^;
하고 싶은 말이 너무도 많습니다
하지만 그걸 여기에 다 적을 수는 없겠죠
저는 이 글을 처음 쓰기 시작했을 때부터, 1부의 에필로그를 반드시 이렇게 쓰겠다고 다짐하고 글을 써왔습니다
그동안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그래도 결국엔 우직하게 제가 쓰려는 이야기를 독자 여러분에게 꿋꿋이 전달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한 결말을, 다른 분들이 어떻게 봐주실지 저는 글을 쓰면서 항상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마음껏, 자유롭게 제가 하고 싶은 대로 이야기를 썼으니 이제 그것은 독자분들의 시선에 맡길 수 밖에요 ^^...
제가 타임 리와인더 1부 1장을 쓴 것이 올해 3월의 일이네요
거의 반년 가까이 소라에 연재를 하면서 글을 쓴다는 것으로 인해 저 역시 많은 활력소를 얻었습니다
댓글과 추천, 그리고 게시판과 쪽지를 통해서 애정을 보내주시고, 격려해주시고, 응원해주신 분들을 저는 너무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즐거움이 있었기에 계속 글을 쓸 수 있었겠죠~~
그동안 정말 즐거웠고 감사했습니다
그렇다고 완전히 소라를 뜨겠다는 것이 아니구요,
1부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독자분들에게 제 마음을 전하려는 겁니다
타임 리와인더는 처음에 2부작 혹은 3부작으로 계획했었습니다
전체적인 스토리를 전달하기 위해서 2부는 필수였고, 2부에서 행여나 전달력의 부족으로 못 다한 이야기가 남는다면 3부를 쓸 생각이었습니다
예상하신 분들도 있겠지만, 2부는 성진과 유정의 딸인 미란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이게 사실 재미있을지는 모르겠지만 1부의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나, 1부에서 다 전하지 못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는 점에서 저로서는 제 이야기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시도라고 할 수 있겠네요
타임 리와인더 1부를 쓰는 과정에서, 출판사의 편집자 분과 많은 이야기를 주고 받게 되었습니다.
만약 전자책을 출간하게 되면 소라에 올린 연재분을 모두 내려야 할 것 같아서 저는 적잖이 갈등했고,
전자책을 출간하거나 다른 컨텐츠로 제작을 하거나 하는 일이 있더라도 일단은 제가 글을 쓰기 시작한 소라넷이라는 사이트에서 1부 완결을 맺고 싶었습니다
제 글을 처음부터 읽어와주신 분들을 생각하면, 그 분들에게 어떻게든 이야기의 결말을 보여드리고 싶었던게 제 마음이었습니다. 다행히 편집자 분께서도 그걸 양해해주셨고, 8월 말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바짝 단기간 동안 글쓰기에 집중을 하여 1부의 마무리를 독자분들에게 보여드릴 수 있었습니다.
현재는 2부의 연재처 문제가 아직 결정이 나지 않은 상태입니다
가급적 소라에도 글을 쓰고 싶지만 이 부분은 아직 이야기가 다 진행된 것이 아니라서 조금 더 상의가 필요합니다
제가 어떤 결정을 하든 독자님들에겐 반드시 공지를 통해서든, 소설을 통해서든 납득할 만한 형태로 결론을 내겠습니다
(물론 타임 리와인더의 경우에만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이고, 다른 소설은 여전히 소라에 올릴 계획입니다. 많은 분들이 아시다시피 저는 야설 쓰는걸 좋아하기에.... 다른 잡다한 이야기를 또 올릴지도 모르겠네요 ^^)
중요한 이야기를 다 전한 듯 하여 마음이 홀가분합니다
독자 한분 한분에게 더 감사를 표하고 싶지만 독자분들도 제 마음을 알아주시리라 믿어요
감사합니다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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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 2016-08-11 | ||
접속일 | 2024-11-26 | ||
서명 | 황진이-19금 성인놀이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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