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임 리와인더 (Time Rewinder)
- 이 소설은 소.라.넷(sora.net) 작가 "상상의신비"가 연재 중인 작품입니다.
무단 불펌을 삼가해 주시길 부탁드리며, 퍼가시더라도 출처와 작가명을 꼭 남겨주십시오.
창작가들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이자 도리입니다.
* 2부 1장
시간은 무한(無限)하다. 당연한 사실이겠지만 우리는 이를 쉽게 망각하고 살아간다. 삶이란 유한(有限)한 것이고,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허락하는 범위를 벗어간 시간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다. 생명이 다할 때까지 주어지는 한정적인 시간의 틀 속에서, 저마다 그것을 활용하여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간다. 대개의 경우, 인간의 삶은 그렇다.
하지만 나는 아니다. 나는 내 자신의 삶을 위한 시간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위한 시간으로 나의 평생을 도배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무한의 루프"를 따라가기 위해서 나는 내 발명품으로 육체의 노화를 정지시켰다. 그 초라한 골방이나 다름 없는 연구실에서 내가 몇 년에 걸쳐 만들어 낸 것은, 비단 시간을 되감는 시계 뿐만이 아니었다.
아마 나 이전에도 이러한 시도와 발명을 통해서, 시간축의 루프에 접근한 사람이 몇 사람 쯤은 있었을 지도 모른다. 내가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천재는 아니었을테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들이 나와 마찬가지로, 그러한 발명의 결과를 결코 인류의 발전을 위해 활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란 걸.
시간축을 넘나들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한 사람들은, 분명 그 능력을 빌어 저마다 무수한 세계를 창조해냈을 것이다. 시공(時空)이라는 것은 무수히 잘게 쪼개어진다. 거울 속에 비치는 무수한 장면들 하나하나가 그 자체로 독립 된 세계라고 설명한다면, 아마도 적절한 비유가 되리라. 나는 그 사실을 오랜 시간에 걸쳐 깨달았다.
틀림없이 지금 이 순간에도 보이지 않는 시간축의 건너편에서, 내가 알지 못하는 무수한 "나"가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수많은 나, 수많은 엄마, 수많은 아빠.... 그리고, 수많은 오빠.
"엄마, 아빠, 오빠."
어린아이가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숫자를 세듯이, 나는 내게 소중한 의미를 갖는 사람들의 존재를 하나하나 떠올려보았다. 나는 이 기적과도 같은 발명의 결과를 통해서, 거창한 것을 이루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그 오랜 세월에 걸친 노력은 그저 두 사람의, 한 남녀의 과거를 돌이켜주고 싶었기 때문일 뿐이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아빠의 삶을 바로 잡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고, 엄마의 삶을 행복하게 지켜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리고 또.... 오빠도 죽지 않았을 것이다.
"보고 싶어."
나에게도 꿈꾸고 있는 작은 행복이 있다. 지금에 와서는 무의미하게 여겨지기까지 하는, 한 남자와의 사랑을 지키는 것이 그 행복이다. 그것은 소박하되, 결코 소박하지 않은 꿈이었다.
어쩌면 내 삶은 이렇게도 엄마와 닮았을까? 고작 한 사람의 얼굴을 마음 속에서 지우지 못해 평생을 괴롭게 살아가야 하는 신세라니.... 처연하다 못해 정말 한심하지 않은가. 아빠를 그토록 사랑한 엄마의 그 바보 같은 마음을 한평생 어리석다고 비난해왔지만, 실은 나 자신도 별반 다를게 없었던 것이다.
두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이런 기분이 들 때면, 눈을 감고 있는 것이 차라리 낫다. 눈 앞에 보이는 표상에 불과한 세계보다는,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는 먼 옛날의 아득한 세계가 내게는 더욱 소중하므로.
"오빠, 보고 싶어."
내 이름은 최미란.... 그 외에는 달리 말할 것이 없다. 나는 한 남녀의 바보 같은 사랑에 의해 태어났으며, 엇갈린 운명으로 사랑하는 남자의 배다른 누이로 태어나버렸다. 하지만 이제와서 그걸 한탄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이 끊임 없는 무한의 루프를 이어가고 있는, 지긋지긋한 굴레의 시작과 끝을 쥐고 있는, 단지 몇 사람의 행복만을 간절히 바랄 뿐인 나는.... 너무도 기나긴 시간을 거쳐오며 이제는 내 나이마저 잊어버렸다.
*
첫 번째 기억.
나에게도 분명 "첫 번째 기억"이란 것이 있었을 터였다. 그것을 과연 "온전한" 첫 번째로 부를 수 있을지 없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이지만, 적어도 내 머릿속에 남겨진 기억으로써 얘기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랜 시간의 반복 속에서 그 기억조차도 이제는 대부분 옅어져 있다.
뇌리에 남아있는 장면은, 그저 몇 가지 단편적인 것들 뿐이다.
"오빠."
아주 가끔 있는 일이긴 했지만 아빠가 모처럼 현관문을 열고 들어올 때면, 엄마는 항상 아빠를 그렇게 부르며 맞이하곤 했다. 우습기 짝이 없는 얘기였다. 분명히 나는 저 두 남녀의 사이에서 태어났건만, 엄마는 생전에 단 한번도 아빠를 "오빠" 이외의 다른 이름으로 불러본 적이 없었다.
더욱이 지독한 사실은, 엄마가 아닌 다른 여인이 버젓이 아빠를 "여보"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곁에서 지켜봐 왔던 나는 알고 있다. 실은 엄마도 아빠를 그 이름으로 부르고 싶어했다는걸. 하지만 엄마는 끝내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것이 아빠의 마음에 부담을 준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다른 여인"과는 달리, 엄마는 아빠와 결혼을 할 수 없었다. 그 여자와 엄마의 차이라고는 단지 그것 뿐이었다. 똑같이 아이가 있었고, 똑같이 아빠를 사랑했다. 하지만 아빠는 엄마를 홀로 내버려두고 그 여자와 행복한 가정을 꾸렸다. 아마도 아빠는 법의 제약 때문이었다고 구차하게 변명할 테지.
"아아....! 오빠."
어쩌다 한번씩, 그러니까 정말 가뭄에 콩 나듯이, 아빠가 엄마를 찾아와 우리 집에서 자고 가는 날에는 엄마의 방에서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누는 소리가 간간히 들리곤 했다. 만약 그걸 정말로 "사랑"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면 말이다.
나는 조그마한 안방의 문 틈새로, 엄마가 아빠와 살을 섞는 모습을 매번 엿보곤 했다. 호기심 따위는 아니었다. 다만, 그저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다. 아빠가 정말로 엄마를 아끼고 사랑하는지를.
비록 인정하기는 싫었지만, 그럴 때마다 아빠와 엄마가 마치 한 몸처럼 섞여드는 모습을 보는 것이 신기했다. 때로는 다정하게, 때로는 음란하게, 때로는 애달프게....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누는 그 모습은 어린 내 눈에 정말로 여러가지 모습으로 비추어졌다.
아마 그래서 아빠를 마음 속 깊이 증오하지는 못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빠만이 엄마의 행복을 지켜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것을 내심 알고 있었기 때문일까?
그렇게 아빠가 다음날 엄마를 침대 위에 남겨두고 가버리면, 홀로 남은 엄마는 다시 아빠를 하염없이 기다리기 시작하는 과정을 매번 반복하곤 했다. 언제 올 거란 한 마디 기약도 없이 가버리는 그 야속한 아빠를, 그저 망부석처럼 또 가만히 기다리는 것이 엄마의 삶이었다.
아빠가 없는, 엄마와 나 단 둘만이 존재했던 그 작은 집에서, 엄마는 아빠를 기다리는 것이 정말 행복했을까?
"바보 같아."
누군가가 내게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을 묻는다면 나는 주저 않고 엄마를 떠올릴 것이다. 심지어 엄마는 눈을 감는 순간까지도 그런 바보 같은 삶을 살았고, 기어코 일생 동안 아빠를 미워하는 모습을 단 한번도 내게 보인 적이 없었다.
*
또 다른 장면.
엄마는 종종 내가 남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걱정하곤 했다. 아마도 엄마는 그저 내가 평범한 또래의 아이들처럼 순탄하게 살아가기만을 원했나보다. 하지만 그거야말로 얼마나 부질 없는 바람일까.
엄마가 아닌 다른 여인과 가정을 꾸리고 있는 남자를, 그것도 아빠라고 제대로 부르지도 못하며 자랐다는 점에서 이미 내 삶은 순탄과는 거리가 멀지 않았을까.
"이번엔 역사를 공부하고 있구나. 미란이는 공부가 즐거운 거니? 나중에 훌륭한 학자가 될 지도 모르겠구나."
학자? 엄마가 그런 말을 얼핏 했던 것 같지만 나는 사실 그런 것엔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나는 다만 연구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엄마는 내가 과학에만 관심이 있는 줄로 알았겠지만 실은 과학 만큼이나 역사학과 지리학도 내게는 중요한 분야였다.
만약 시공(時空)을 X축과 Y축으로 등분하듯이 나눌 수 있다면, 그 기준은 필히 시간축과 공간축이 될 것이다. 시간축은 역사학에, 공간축은 지리학에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과학의 힘을 빌어 그 경계를 넘나들 수 있다면, 시공을 자유로이 오고 가는 것이 가능할 지도 모른다.
내 관심사는 오로지 단 하나, 시간여행 이론 뿐이었다. 그리고 그 때의 나를 움직이게 했던 원동력은 아마도, 아빠에 대한 미움이었을 것이다. 시간을 되돌아가 아빠를 만난다면, 나는 아빠를 마음껏 꾸짖을 수가 있을 테니.
"아빠가 엄마를 선택하게 만들 거야. 그래서 엄마를 행복하게 해줄 거야. 그러면 나도 그제야 비로소 평범하게 살 수 있겠지.... 엄마가 늘 바랐던 대로."
돌이켜보면 정말로 우스운 이유였고, 지극히 어린 마음의 발로였을 뿐이다. 그 유치한 동기가 무한에 가까운 루프를 만들어 낼 것이라곤 아마 그 당시에는 실감하지 못 했겠지. 하지만 결국 나는 그 어린 마음을 포기하지 않았다.
*
오빠를 처음 만났을 때.
그 땐, 어땠더라? 지금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도 미워했겠지. 내가 그토록 증오했던, 엄마에게서 아빠를 빼앗아간 다른 여인의 아이였으니.
그래, 분명 그 때는 세상 누구보다도 오빠를 미워했을거야. 더불어 오빠의 엄마라는 그 여자도 말이지. 그래서 운명이란 참으로 기묘하고, 한편으론 얄궂은 거야. 그렇게 미워했던 사람을 사랑하게 될 거라고 내가 어떻게 상상이나 했겠어.
"안녕? 나는 민혁이야.... 최민혁."
첫 만남에서, 싸늘하게 굳은 내 얼굴을 조금은 두려워하면서도, 오빠는 목소리만큼은 또박또박하게 자신의 이름을 내게 밝혔다. 생각해보면 오빠는 늘 그랬어. 얄밉게도 언제나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날 대했지....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얼굴조차도 보기가 싫었다. 기억이 희미하지만 아마도 그랬던 것 같다. 그래도 단 한 가지는 여전히 또렷하게 기억난다. 그의 조심스러운 손이 내 어깨에 살며시 닿았을 때, 나는 끓어오르는 증오심을 누르지 못하고 소리쳤다.
"저리 치워!"
신경질적으로 내가 그의 손을 쳐내자, 그가 내가 덮어주려고 했던 담요 한 장이 허공에 흩날려 바닥으로 맥없이 가라앉았다. 아마도 매번 이렇게 옥상에 나와서 찬바람을 맞고 있는 내 모습이 안쓰러웠던 것이리라.
"미안해."
그는 내게 사과를 하고는, 조심스럽게 담요를 접어 내 옆에 내려놓고 재빨리 모습을 감추었다. 나는 그것을 거들떠 보지도 않고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여전히 을씨년스러운 야경을 내려다 볼 뿐이었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내 몸을 쓸고 지나가는게 느껴졌다.
그 날 따라, 추웠다.
*
시간이 제법 많이 흘렀다.
나는 중학생이 되었고, 그 때부터 엄마의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어느날 엄마는 쓰러져버렸고.... 그 때부터 병원 침대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그리고 의사는 그런 엄마에게 "폐암"이라는 무거운 말을 전했다.
"미안해, 미안해, 미란아.... 엄마가 너무 미안해."
바보 같이 엄마는 또 내게 사과를 한다. 엄마에게 허락된 삶이 꺼져가고 있는데도, 엄마는 여전히 자기 자신보다도 다른 누군가를 먼저 걱정한다. 죽는 것에 대한 걱정보다도, 남겨질 사람의 슬픔에 대한 걱정을 먼저 한다.
담배. 그 죽일 놈의 담배만 아니었으면 엄마가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겠지. 하지만 담배에 대한 미움보다도 아빠에 대한 미움이 더 컸다. 애초에 아빠가 아니었으면 엄마가 담배를 피울 일이 없었을 테니.
*
그것은 실수였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가 "실수"라는 것을 범했음을 스스로에게 시인했다. 하지만 인정한다고 해서 그것을 돌이킬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그 때의 나에게는, 아직 그런 능력이 없었다.
나는 한 생명을 죽여버리고 말았다. 어쩔 수 없었다며 스스로를 합리화했지만, 결국 그것은 살인이었다. 스스로가 끔찍한 괴물처럼 여겨졌고, 나는 버틸 수 없는 혐오감에 한없이 아래로 무너져내렸다. 나는 내가 천재라고 줄곧 생각해왔지만, 그것은 그저 착각이었던 것이다. 그 순간의 나는 천재가 아니라, 그저 살인자였다.
"무서워."
두려웠다. 생전 처음으로 공포에 직면하고 나서야 나는 내 초라한 존재를 인식할 수 있었다.
"괜찮아?"
그 절망적인 순간에, 나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었다.
"내가 곁에 있어줄게. 무서워하지 마."
덜덜 떨리는 내 몸에 그의 조심스러운 손길이 와서 닿았다. 하지만 나는 이번엔 그의 손길을 매몰차게 쳐낼 수가 없었다. 그만큼 두려웠고, 그만큼 누군가가 필요했다.
"온 세상 사람들이 너를 욕해도, 나는 네 편이 되어줄게. 괜찮아. 너에겐 그럴 이유가 있었을 거야."
그는 마치, 틀에 박힌 것 같은 이야기를 했다.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건넸던 그 뻔한 말들. 그러나 나에겐 그런 말들이 너무도 절실했고, 그는 내게 그런 말들을 해주었다. 그 말, 그 손길, 그 눈빛까지도....
그것은 차라리 구원이었다. 나는 그로 인해 구원받았고, 그로 인해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얻었다.
"넌 내게 소중한 사람이야. 언제나 그걸 잊지 마."
그 때, 오빠는 내게 그런 말을 했다.
바보 같이.... 그 말이 결국 나를 여기까지 이끌었다는걸 오빠는 알까? 그걸 알았다면, 오빠는 내게 그런 말을 했을까? 아니, 그걸 알았다면....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빠질 수 있었을까?
하긴, 지극히 의미 없는 물음이긴 하지.
*
"민혁이 왔구나."
엄마는 초췌해진 얼굴로 병실 침대에 누워서도, 오빠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엄마는 오빠가 밉지 않은 걸까? 엄마에게서 아빠를 빼앗아간 그 여자의 핏줄을, 정말 미워하지 않는 걸까?
"작은 엄마. 힘을 내세요."
오빠는 엄마를 항상 "작은 엄마"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내가 알기로 작은 엄마라는 이름은, 이토록 복잡한 사이에 쓸 수 있는 이름이 아니었다. 하지만 오빠는 언제나 그렇게 엄마를 불렀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흔히 알고 있는 "작은 엄마"란 이름의 의미가 아니었다. 그것은 오직 오빠와 엄마 간의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그 복잡한 관계를, 우리 나름대로 받아들였음을 보여주는 미세한 흔적이나 다름 없었다.
"내가 죽고나면, 미란이를 잘 돌봐줄 수 있겠니?"
"그런 말씀 마세요. 다시 건강하게 일어나실 거에요."
오빠는 엄마를 안심시키기 위해 애썼다. 그것은 심지어 아빠에게서조차 느껴보지 못 했던 위안이었다. 바보 같이 눈물이 핑 도는 것을, 애써 두 사람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나는 병실에서 달려나왔다. 저 멀리서 아빠가 걸어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요즘엔 엄마를 자주 찾아오는 것 같긴 했지만.... 이제 와서는 모두 부질 없는 짓이었다.
*
결국 엄마는 소나기가 내리던 날에, 눈을 감았다. 기왕 하늘나라로 떠나는 거라면, 그동안 아빠에게 차마 못 다한, 오랜 세월 속에 쌓아두었던 원망의 말들이나 실컷 내뱉고 갈 것이지..... 엄마는 끝까지 아빠에게 웃는 모습을 보이고 떠났다. 마지막 소원이라는게 기껏해야 아빠에게 "여보" 소리를 듣는 것이었다니, 정말 한심한 이야기였다.
장례식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왔다. 그 중에 한 여인의 모습도 보였다. 아빠의 아내였다.
아빠의 아내. 아빠의 아내. 아빠의 아내.... 나는 그 어색한 어감을 입 속으로 조용히 곱씹었다. 세상에 그만큼 구역질 나는 표현은 또 없으리라. 아빠의 아내라니.
"당신이 대체 왜 우는 거지? 우리 엄마가 죽었는데, 당신이 왜 우는 거야? 당신은 오히려 기뻐해야 하잖아?"
그 여자는 가증스럽게도, 엄마의 남은 흔적들을 보며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이중적인 여자 같으니. 당신만 없었더라면 엄마는 이런 식으로 죽지 않았을 거야.
증오가 가득 담긴 눈길로 그 여자를 노려보고 있는데, 눈물을 흘리는 그녀의 손을 조용히 감싸쥐는 손이 있었다. 오빠였다. 그 여자의 아들이자, 한편으로는 나의 배 다른 오빠....
"당신만 없었더라면 엄마는 행복했을 텐데."
살아오면서 수도 없이 떠올렸던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에는, 문득 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당신이 없었다면, 오빠도 없었을까?"
*
두려움을 배웠고, 그 다음엔 슬픔을 배웠다.
만약 인간다운 감정을 배워나가는 것이 보다 평범해지는 길이라면, 나는 아마도 점점 더 평범해지고 있었던 거겠지. 엄마가 살아 있었을 적에, 그토록 바랐던 대로.
"사랑해."
그리고 그 다음엔, 사랑을 배웠다.
나는 한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 우리는 서로 사랑해서는 안 될 사이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빠졌다. 어디 그게 내 맘 같이 되는 일이라면 엄마가 과연 아빠를 사랑했을까.
"항상 곁에 있을게."
"거짓말 하지 마."
"정말이야."
그는 몇 번이고 내게 철썩같이 약속을 했다. 어릴 적에 엄마가 내게 가끔 그랬듯이, 서로의 손가락을 걸고.
"이게 사랑일까?"
이것 때문에 엄마는, 평생 그 힘든 삶을 견뎌내야 했던 것일까? 만약에 정말로 그런거라면 나는 결코 사랑에 빠지고 싶지 않았다. 엄마 같은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사랑에 빠지고 나서야 나는 깨달았다. 이전에는 몰랐던 많은 것들을 깨달았고, 그로 인해 나는 좀 더 다른 인간이 되었다. 엄마가 이런 내 모습을 비난하지 않을까, 가끔은 그런 생각 때문에 마음이 불편했다. 하지만 엄마라면 분명 나를 이해해 줄 것이라고 나는 믿었다. 사랑 하나에 평생을 바친 엄마라면 분명히....
"알았어. 믿을게."
*
나는 그를 믿었다.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를 사랑했기 때문에. 하지만 그 믿음으로 인해 나는 절망을 배워야만 했다. 두려움, 슬픔, 사랑.... 그 뒤에 찾아온 감정은 절망이었다. 서글프게도 그게 내게 주어진 순서였다.
오빠의 자그마한 무덤 앞에서, 나는 몇날 며칠을 뜬 눈으로 지새웠다. 바람이 내내 불어왔고, 살갗이 메말라갔지만 그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다. 결국 아빠가 나를 찾으러 왔다.
"아빠 때문이야!"
긴 세월 동안 속에 담아두었던 분노와 증오를, 나는 아빠를 향해 쏟아냈다.
"아빠만 아니었어도 오빠는 죽지 않았을 거야."
처참하게 망가진 내 모습을 보면서 아빠가 무슨 생각을 할지 따위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엄마, 그리고 오빠의 운명을 이렇게 만든 것이 모두 아빠의 잘못 때문인 것처럼 느껴졌다. 어떻게든 아빠에게 한 움큼이라도 더 죄책감을 안겨주고 싶었고, 그로 인해 아빠가 괴로워하길 바랐다.
"아빠가 정말 미워!"
"미안하구나, 미란아."
내 기억엔.... 아마 아빠도 그 날 눈물을 흘렸던 것 같다. 하지만 내 눈엔 가증스러워 보일 뿐이었다.
*
두 번째 기억.
두 사람의 죽음은, 기어코 나를 이 구질구질한 굴레 속으로 뛰어들게 만들었다. 수 년의 세월을 걸쳐 나는 결국 내가 원하던 것을 이루어냈고, 그 능력으로 모든 것을 바로 잡기를 원했다.
어쩌면 머나먼 그 옛날로 되돌아가, 내 손으로 직접 그 여자의 존재를 없애고 아빠의 삶을 바로 잡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기나긴 실패 끝에, 나는 그것이 불가능한 이야기임을 받아들이고 말았다.
그 어떤 능력이나 힘을 통해서도 인과의 법칙은 무너뜨릴 수 없다. 이미 그렇게 되도록 정해진 것들 중에는, 도저히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반드시 필요한 것들, 바꿔서는 안 되는 것들. "운명"이라는 이름의 굴레 속에는 그런 것들이 드문드문 존재하고 있다. 혐오스러웠지만, 그것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내가 직접 아빠의 정해진 미래를 바꿔버리는건 불가능해. 이것을 인정해야만 모든 것을 시작할 수 있어....
"타임 리와인더(Time Rewinder)"
나는 내 발명품에 그런 이름을 붙였다. 시간을 되감기 위한 시계라는 의미였다. 이 시계의 능력으로 나는 시간을 되감아, 아빠에게 다시 한번 선택을 종용할 것이다. 아빠의 삶을 직접 바꿔놓을 수 없다면, 적어도 그 선택의 과정과 결과를 곁에서 지켜볼 것이다.
인과의 법칙을 통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만약 신이라는 것이 실존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신의 영역이리라. 나는 그저 가늠할 수 밖에 없었다. 과연 어느 정도의 개입이, 아빠의 삶을 바꾸면서도 나의 존재를 비롯한 중요한 것들을 유지할 수 있게 해줄지.
"기다려, 엄마."
내가 곧 아빠를 다시 만나게 해줄게.
*
인과의 법칙이 무너지는 순간, 나는 나의 존재를 유지할 수 없게 된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곧 소멸(消滅)이었다. 난 그것이 두려웠다. 그 막막한 공포는, 마치 우주가 존재하기 이전의 새카만 어둠 속을 상상하는 것과 같았다. 아마도 다시는 오빠를 만나지 못하게 되리라.
아빠와 엄마가 다정하게 숲속을 걷고 있었다. 시간을 거슬러 돌아와, 나는 아빠에게 새로운 선택을 내리도록 종용했다. 아빠는 결국 엄마를 쫓아 일본으로 왔고, 두 사람은 이 곳에서 행복한 가정을 꾸렸다.
기모노를 입고 아빠의 곁에서 팔짱을 낀 채, 엄마는 잔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두 사람은 너무도 다정해보였고, 엄마도 그만큼 행복해보였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그래, 저 모습이야말로 내가 원했던 엄마의 삶이야. 왜 진작 그렇게 살지 못 했어, 엄마? 엄마도 아빠 곁에 있으니까 좋지? 지금부터는 평생 그렇게 행복하게 살면 돼. 다른 모든 것들을 잊고....
"다른 모든 것들을 잊고."
엄마의 배가 조금 부풀어있었다. 이미 엄마의 뱃속에서는 또 하나의 "나"가 자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나로 하여금, 필연적으로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떠올리게 만드는 사실이기도 했다.
아빠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잊을 수도 없는 사람을 한국에 남겨놓고 왔다.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대로 엄마가 이 곳에서 아빠와 행복해진다면, 머나먼 땅에 남겨진 오빠는 결코 행복하지 못하리라. 아니, 어쩌면 오빠가 제대로 태어날 수 있을지조차 모르는 일이지....
"오빠...."
그의 얼굴이 떠오른다. 엄마의 저 행복한 모습을 보고서도, 바보 같이 그의 얼굴이 떠오른다.
바보 같이.... 너무도 바보 같이.
*
결국 나는 인과의 법칙을 무너뜨리지 못 했다.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내 존재가 사라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을까, 아니면 오빠를 다시 만날 수 없게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을까. 잘은 모르겠다. 어쩌면 둘 다였을지도 모르지.
나는 누군가가 나를 이기적인 딸이라고 욕하지 않길 바랐다. 내가 소망하는 최소한의 행복을 누리길 바라는 마음이, 부디 이기심으로 치부되지 않길 바랐다. 행여나 엄마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나를 비난할까? 아빠와 엄마의 행복을 이루어주지 않은 못되먹은 딸이라고....?
"미안해. 엄마."
엄마의 행복한 삶을 보았으면서도, 나는 결국 시간을 되감을 수 밖에 없었다.
*
억겁(億劫)이나 다름 없는 기나긴 시간의 굴레가 그 때부터 반복되기 시작했다. 수없이 많은 순간을 되돌아가 나는 아빠의 젊은 시절을 함께 했고, 그 때마다 아빠에게 또 다른 선택의 기회를 열어주었다.
하지만 그 무수한 선택들은 결국 미래를 바꾸지 못했다. 이미 정해진, 허락되어 있는 미래는 오직 둘 중 하나일 뿐이었다. 엄마가 불행해지거나, 아니면 내가 인과의 법칙을 무너뜨리거나.
뫼비우스의 띠를 그리듯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굴레 속에서 내가 버텨내야 하는 시간의 양이 점점 늘어만 갔고, 나는 어느 순간부터 내 나이를 잊어버렸다. 화학작용으로 노화를 멈춘 육체는 나를 항상 그 모습 그대로 존재하게 해주었지만, 눈빛과 표정에서는 삭막함 이외에 다른 모든 것들이 사라져 버렸다.
"담배...."
어릴 적에, 엄마가 담배를 피우는 것이 너무도 싫었다. 그 어릴 적이라는 것도 이제는 얼마나 먼 과거의 일인지 아득해졌지만, 분명 나는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는 담배를 손에서 놓지 못하고 있다.
"난 정말, 어쩔 수 없는 엄마의 딸이구나."
어리석은 짓인걸 알면서도 마치 엄마처럼, 그렇게.... 엄마가 남긴 라이터까지 여전히 한 손에 쥔 채로.
*
이게 마지막이야.
어느 순간, 그렇게 마음 먹었다. 무의미하게 되풀이 되는 시간을 겪고 나서, 이제는 시체만도 못하게 변해 버린 몸과 마음만이 내게 남아있었다. 이제는 그냥 쉬고 싶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바보 같은 짓이었을지도.
나는 아빠와 엄마에게 있어 운명의 분기점이 되었던 그 공항으로, 아빠를 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아빠의 기억을 지워버린 것이다. 아빠가 엄마를 그저 흘러간 옛 추억 정도로만 여길 수 있도록.....
이것이 정답일 지도 몰라. 비록 나는 오빠를 다시 만나지 못하게 되겠지만, 그래도 오빠는 아빠의 아들로 태어나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살아갈 테니까.... 그러면 인과의 법칙도 제자리를 찾을 수 있겠지. 어쩌면 나는 지금까지 오빠에 대한 미련을 놓지 못해서 어린애처럼 고집을 부렸던 걸지도.
"오빠와 내가 가까이에 있으면, 필연적으로 엄마는 불행해 질 수 밖에 없어. 엄마는 아빠랑 절대로 결혼하지 못할 테니까..... 그저 바보같이 또 주변을 맴돌다가 죽겠지."
엄마, 제발 일본에서 아빠를 잊고 행복하게 살아줘. 세상에는 아빠가 아니더라도 엄마를 사랑해 줄 수 있는 남자가 있을거야. 엄마가 그런 사람을 만나서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비록 나는 아빠 없이 자라게 되겠지만, 그래도 괜찮아. 어차피 처음부터 내게는 엄마 뿐이었는걸.
"미안해요. 전 그럴 수 없어요."
엄마는 정녕 바보인 걸까?
낯선 일본 남자의 고백 앞에, 담담히 고개를 가로젓는 엄마의 모습을 나는 멍하니 지켜보았다. 빛나는 반지를 준비해가며 엄마에게 청혼을 했던 무신류 가문의 젊은 남자는, 애타게 엄마의 마음을 잡아보려 했지만.... 엄마는 단호하게 고개를 돌리며 이 말만을 남겼다.
"왜냐하면 당신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바보, 멍청이.... 오래 전에 이미 메말라 버렸다고 생각한 눈동자에서, 기어코 눈물 한 방울이 흘렀다.
*
"사랑, 해보셨나요?"
나는 엄마의 옆에 걸터앉아, 조용히 담배를 빼물었다. 서글프게도 나는 이제.... 엄마보다 훨씬 나이가 많다. 내 나이가 몇인지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엄마보다는 훨씬 많으리라. 자조 섞인 웃음이 나왔다.
"응. 해봤지."
그래도 엄마는 언제까지나 나의 엄마일 뿐이었다. 하긴 나이라는게 뭐 그리 중요할까. 그저 흘러간 시간의 양을 재기 위한 것일 뿐인데.... 품 안에 달려들고 싶었지만 나는 그저 담배 연기를 허공에 뱉는 것으로 그것을 대신했다.
엄마는 품 안을 뒤져,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하지만 이내 라이터가 없음을 깨닫고 쓴웃음을 짓는다. 내 입가에도 왠지 실 없는 웃음이 한줄기 떠오르려는 것을 애써 지웠다.
저 시절의 나는 엄마의 라이터를 종종 감추곤 했지. 돌이켜보면 정말 바보 같았어. 차라리 담배를 감췄어야지 왜 라이터를 감췄을까? 그렇게 감추던 라이터가 이제는 내 물건이 되어버렸지만 말이야.
엄마가 남겼던 그 낡고 낡은 라이터로, 엄마의 담배에 불을 붙였다. 콩알 만큼 작았던 그 딸아이가 이렇게 커서, 눈 앞에 앉아 맞담배를 피고 있다는걸 알면 엄마는 아마 놀라겠지. 그러면 나를 혼낼까? 그런 생각들을 뒤로 하고 나는 엄마에게 물었다.
"다시 선택의 순간이 온다고 해도, 그 사람을 사랑할 거야?"
"물론이에요."
어쩜 이렇게 한결 같이 바보 같을까. 자기가 바보라는 사실을 과연 알긴 알까?
"바보, 멍청이."
엄마의 입에서 담배를 빼앗고는, 나는 그 자리에서 떠났다. 엄마에게 있어서는 아빠와의 갈림길이 되어야만 했던 그 어수선한 공항의 한복판.... 바로 이곳에서 이번에는 엄마가 선택을 내릴 차례인 것이다. 그것을 돕기 위해 나는, 떠나온 자리에 내 소중한 물건을 남겼다.
"아."
그러고보니 문득 생각이 났다. 왜 처음에 그 시계를 만들기 시작했는지....
아마 지금도 그 시계는 엄마의 손길을 주인이라 여기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애초에 이것은 엄마의 삶을 바꾸기 위한 물건이었으니까.
*
오토바이를 타고 떠나는 엄마의 뒷모습을 나는 바라보았다. 엄마가 아빠를 다시 만나면, 어떤 선택을 할 지 사실은 이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걸 모른다면 내가 엄마의 딸일 수가 없겠지.
"왜 이제와서 그걸 돕는 걸까?"
나는 이대로, 영영 엄마와 아빠를 만나지 못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어쩌면 그 편이 엄마에게 있어서는 더 행복한 일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내가 그렇게 생각해서 해왔던 일들이, 결국 엄마를 행복하게 만들었던가....?
"엄마에겐 정말로 아빠를 쫓아가는 것만이 행복인 거야?"
난 그런거 싫어. 엄마가 그렇게 바보 같이 살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런데 나는 왜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구태여 시계에 표시를 해두었던 걸까? 그런 괜한 짓만 하지 않았어도 엄마는 아빠랑 만나지 못 했을 텐데....
눈 앞의 장면이 바뀌었다.
눈물이 한가득 맺힌 눈을 하고서도, 활짝 웃는 엄마의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그런 엄마를 끌어안는 아빠의 모습이 보였다. 내가 너무도 싫어했던, 그 시절 아빠의 모습....
"엄마."
행복하게 웃는 엄마의 얼굴을 보며, 나는 마음 속으로 말했다.
"이번엔 정말로 행복해야 해."
힘들 거라는거 알아. 하지만 제발 그래줬음 좋겠어. 시간을 되감고 싶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을 만큼, 한평생 행복하게 살아줘. 아빠 곁에서 말이야. 그러면 아마 나는 더이상 "나"로서 존재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르지. 그래도 상관없어.... 나는 이제 너무 지쳤으니까.
만약 엄마가 정말로 아빠 곁에서 행복해 질 수 있다면, 나도 오빠와 좀 더 행복한 모습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 행복을 누릴 나는 비록 내가 아니겠지만 말이야. 엄마가 내 존재를 알지 못하더라도 난 괜찮아. 그저 지금처럼 엄마의 딸인 나를 아껴주고 사랑해주면 돼. 난 그런 엄마의 모습이 정말 좋았어....
"그리고 아빠."
내가 정말로 싫어했던 아빠.
아마 이번에도 비슷한 운명이 아빠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시간이라는 것은 그런 거니까. 당연히 일어날 일의 순서가 있을 뿐인걸. 그 뻔한 운명 속에서, 아빠가 조금이라도 엄마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기를 난 바래. 그렇게 해준다면 아빠를 조금이나마 용서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바보구나, 나는."
결국 이런 선택을 하기 위해 그 길고 긴 시간을 거쳐왔던 걸까? 너무도 바보 같아서 눈물이 흘렀다. 하지만 눈물과 동시에 웃음도 나왔다. 나는 마지막으로, 엄마의 남은 삶을 한번 더 지켜보기로 마음 먹었다.
내 이름은 최미란. 한 남녀의 바보 같은 사랑에 의해 태어났으며, 사랑하는 남자의 배다른 누이로 태어나버린 여자다. 하지만 이제와서 그걸 한탄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 얄궂은 것도 운명이라면 받아들일 수 밖에.
그저, 그저 이번엔 엄마가 행복해질 수 있길.
"그리고, 나도...."
- 다음 화에 계속 -
반갑습니다, 상상의신비입니다 ^^
1부의 에필로그로 인사를 드렸던 것이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이번엔 2부의 첫발로 인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1부 에필로그에서 간략하게 밝혔듯이, 지금은 2부의 연재처 문제가 정확하게 정해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현재 저는 타임 리와인더 1부의 수정작업을 거치고 있습니다, 새로운 연재처에서 연재를 겸하기 위해서요
비속적인 표현이나 너무 노골적인 섹스씬을 약간 순화하고, 로맨스적인 요소를 조금 더 부각시킬 생각이라
아마 소라 독자분들의 기억 속에 남은 1부의 모습과는 다소 달라질 수도 있을 듯 합니다~~
다행히 거기에서도 성인소설로써 연재해나갈 계획이라 성애에 대한 요소 자체가 사라지지는 않겠지만요
(사실 제 이야기가 섹스라는 부분을 빼고 싶어도 뺄 수가 없죠 ^^;)
하지만 2부는 가급적 소라에 올렸던 글 그대로, 수정작업 없이 이후에 새 연재처로 옮겨갈 계획입니다
그만큼 처음부터 신경을 써서 쓰겠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새 연재처에 글을 올리기 전까지는 소라 독자분들에게 2부의 이야기를 최대한 보여드리고 싶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제 나름대로는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한 이곳 소라넷에 큰 애착을 가지고 있어서.... 가능한 기간 동안은 소라에서 2부 연재를 해나가다가, 옮길 시기가 되면 새로운 연재처로 옮겨가는 방안이 저에게도 독자분들에게도 서로 좋은 방법이 아닐까 판단을 내렸습니다. 아마 1부의 원고 수정 작업이 모두 끝나게 되면 새로운 연재처로 옮겨가게 되겠죠. 그 정확한 시기에 대해서는 뚜렷해지는대로 꼭 공지를 드리겠습니다
아무튼 부끄럽지만 이렇게 또 2부 연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저도 사람인지라, 솔직하게 말하면 연재처를 옮겨간 후에도 독자분들이 제 글을 보러 와주시길 간절히 바라지만, 그걸 대놓고 바라는건 너무 큰 욕심이겠죠 ^^ 언젠가는 소라에서 잊혀지더라도, 지금은 우선 제가 구상한 이야기를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만약 끝까지 제 글에 함께하기 위해 와주시는 분들이 있다면 정말 제가 허리 숙여 감사해야 할 분들이겠지요.
조금은 부끄럽고 죄송스런 이야기를 전해서 마음이 무겁습니다... 생계를 위한 결정이라 이해해주시길 바랄게요.
좀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예전에 어느 독자분께서 "타임 리와인더"가 성인웹툰으로 태어난다면 좋을거란 말씀을 해주신 적이 있습니다 (방금 찾아보고 왔습니다 1부 28장에서 "인셜"님이 그런 말씀을 해주셨네요 ^^ 감사합니다) 저도 그렇게 된다면 참 좋겠다, 상상한 적이 있는데 어쩌면 그 상상이 이루어질지도 모르겠네요
출판사의 편집자분께서 "타임 리와인더"의 장편웹툰화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물론 성인웹툰으로요. 애착을 갖고 글을 써왔던 저로서는 정말 두근거리는 이야기였죠.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생각만으로도 즐겁더군요. 이 문제에 대해서도 자세한 내용이 정해지면 소라 독자분들에게 전달을 해드리고 싶어요.
2부 연재에 대한 이야기와 1부 웹툰화에 대한 이야기.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역시 그 마음을 다 표현할 수는 없네요 ^^.. 우선은 중요한 사실을 대략적으로 전해드린 것 같아 다음 화에서 또 전해드릴 소식이 생긴다면 덧붙이겠습니다
그럼 오늘도 즐거운 하루 되시고,
항상 감사합니다
- 이 소설은 소.라.넷(sora.net) 작가 "상상의신비"가 연재 중인 작품입니다.
무단 불펌을 삼가해 주시길 부탁드리며, 퍼가시더라도 출처와 작가명을 꼭 남겨주십시오.
창작가들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이자 도리입니다.
* 2부 1장
시간은 무한(無限)하다. 당연한 사실이겠지만 우리는 이를 쉽게 망각하고 살아간다. 삶이란 유한(有限)한 것이고,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허락하는 범위를 벗어간 시간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다. 생명이 다할 때까지 주어지는 한정적인 시간의 틀 속에서, 저마다 그것을 활용하여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간다. 대개의 경우, 인간의 삶은 그렇다.
하지만 나는 아니다. 나는 내 자신의 삶을 위한 시간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위한 시간으로 나의 평생을 도배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무한의 루프"를 따라가기 위해서 나는 내 발명품으로 육체의 노화를 정지시켰다. 그 초라한 골방이나 다름 없는 연구실에서 내가 몇 년에 걸쳐 만들어 낸 것은, 비단 시간을 되감는 시계 뿐만이 아니었다.
아마 나 이전에도 이러한 시도와 발명을 통해서, 시간축의 루프에 접근한 사람이 몇 사람 쯤은 있었을 지도 모른다. 내가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천재는 아니었을테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들이 나와 마찬가지로, 그러한 발명의 결과를 결코 인류의 발전을 위해 활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란 걸.
시간축을 넘나들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한 사람들은, 분명 그 능력을 빌어 저마다 무수한 세계를 창조해냈을 것이다. 시공(時空)이라는 것은 무수히 잘게 쪼개어진다. 거울 속에 비치는 무수한 장면들 하나하나가 그 자체로 독립 된 세계라고 설명한다면, 아마도 적절한 비유가 되리라. 나는 그 사실을 오랜 시간에 걸쳐 깨달았다.
틀림없이 지금 이 순간에도 보이지 않는 시간축의 건너편에서, 내가 알지 못하는 무수한 "나"가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수많은 나, 수많은 엄마, 수많은 아빠.... 그리고, 수많은 오빠.
"엄마, 아빠, 오빠."
어린아이가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숫자를 세듯이, 나는 내게 소중한 의미를 갖는 사람들의 존재를 하나하나 떠올려보았다. 나는 이 기적과도 같은 발명의 결과를 통해서, 거창한 것을 이루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 그 오랜 세월에 걸친 노력은 그저 두 사람의, 한 남녀의 과거를 돌이켜주고 싶었기 때문일 뿐이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아빠의 삶을 바로 잡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고, 엄마의 삶을 행복하게 지켜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리고 또.... 오빠도 죽지 않았을 것이다.
"보고 싶어."
나에게도 꿈꾸고 있는 작은 행복이 있다. 지금에 와서는 무의미하게 여겨지기까지 하는, 한 남자와의 사랑을 지키는 것이 그 행복이다. 그것은 소박하되, 결코 소박하지 않은 꿈이었다.
어쩌면 내 삶은 이렇게도 엄마와 닮았을까? 고작 한 사람의 얼굴을 마음 속에서 지우지 못해 평생을 괴롭게 살아가야 하는 신세라니.... 처연하다 못해 정말 한심하지 않은가. 아빠를 그토록 사랑한 엄마의 그 바보 같은 마음을 한평생 어리석다고 비난해왔지만, 실은 나 자신도 별반 다를게 없었던 것이다.
두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이런 기분이 들 때면, 눈을 감고 있는 것이 차라리 낫다. 눈 앞에 보이는 표상에 불과한 세계보다는,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는 먼 옛날의 아득한 세계가 내게는 더욱 소중하므로.
"오빠, 보고 싶어."
내 이름은 최미란.... 그 외에는 달리 말할 것이 없다. 나는 한 남녀의 바보 같은 사랑에 의해 태어났으며, 엇갈린 운명으로 사랑하는 남자의 배다른 누이로 태어나버렸다. 하지만 이제와서 그걸 한탄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이 끊임 없는 무한의 루프를 이어가고 있는, 지긋지긋한 굴레의 시작과 끝을 쥐고 있는, 단지 몇 사람의 행복만을 간절히 바랄 뿐인 나는.... 너무도 기나긴 시간을 거쳐오며 이제는 내 나이마저 잊어버렸다.
*
첫 번째 기억.
나에게도 분명 "첫 번째 기억"이란 것이 있었을 터였다. 그것을 과연 "온전한" 첫 번째로 부를 수 있을지 없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이지만, 적어도 내 머릿속에 남겨진 기억으로써 얘기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랜 시간의 반복 속에서 그 기억조차도 이제는 대부분 옅어져 있다.
뇌리에 남아있는 장면은, 그저 몇 가지 단편적인 것들 뿐이다.
"오빠."
아주 가끔 있는 일이긴 했지만 아빠가 모처럼 현관문을 열고 들어올 때면, 엄마는 항상 아빠를 그렇게 부르며 맞이하곤 했다. 우습기 짝이 없는 얘기였다. 분명히 나는 저 두 남녀의 사이에서 태어났건만, 엄마는 생전에 단 한번도 아빠를 "오빠" 이외의 다른 이름으로 불러본 적이 없었다.
더욱이 지독한 사실은, 엄마가 아닌 다른 여인이 버젓이 아빠를 "여보"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곁에서 지켜봐 왔던 나는 알고 있다. 실은 엄마도 아빠를 그 이름으로 부르고 싶어했다는걸. 하지만 엄마는 끝내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것이 아빠의 마음에 부담을 준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다른 여인"과는 달리, 엄마는 아빠와 결혼을 할 수 없었다. 그 여자와 엄마의 차이라고는 단지 그것 뿐이었다. 똑같이 아이가 있었고, 똑같이 아빠를 사랑했다. 하지만 아빠는 엄마를 홀로 내버려두고 그 여자와 행복한 가정을 꾸렸다. 아마도 아빠는 법의 제약 때문이었다고 구차하게 변명할 테지.
"아아....! 오빠."
어쩌다 한번씩, 그러니까 정말 가뭄에 콩 나듯이, 아빠가 엄마를 찾아와 우리 집에서 자고 가는 날에는 엄마의 방에서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누는 소리가 간간히 들리곤 했다. 만약 그걸 정말로 "사랑"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면 말이다.
나는 조그마한 안방의 문 틈새로, 엄마가 아빠와 살을 섞는 모습을 매번 엿보곤 했다. 호기심 따위는 아니었다. 다만, 그저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다. 아빠가 정말로 엄마를 아끼고 사랑하는지를.
비록 인정하기는 싫었지만, 그럴 때마다 아빠와 엄마가 마치 한 몸처럼 섞여드는 모습을 보는 것이 신기했다. 때로는 다정하게, 때로는 음란하게, 때로는 애달프게....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누는 그 모습은 어린 내 눈에 정말로 여러가지 모습으로 비추어졌다.
아마 그래서 아빠를 마음 속 깊이 증오하지는 못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빠만이 엄마의 행복을 지켜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것을 내심 알고 있었기 때문일까?
그렇게 아빠가 다음날 엄마를 침대 위에 남겨두고 가버리면, 홀로 남은 엄마는 다시 아빠를 하염없이 기다리기 시작하는 과정을 매번 반복하곤 했다. 언제 올 거란 한 마디 기약도 없이 가버리는 그 야속한 아빠를, 그저 망부석처럼 또 가만히 기다리는 것이 엄마의 삶이었다.
아빠가 없는, 엄마와 나 단 둘만이 존재했던 그 작은 집에서, 엄마는 아빠를 기다리는 것이 정말 행복했을까?
"바보 같아."
누군가가 내게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을 묻는다면 나는 주저 않고 엄마를 떠올릴 것이다. 심지어 엄마는 눈을 감는 순간까지도 그런 바보 같은 삶을 살았고, 기어코 일생 동안 아빠를 미워하는 모습을 단 한번도 내게 보인 적이 없었다.
*
또 다른 장면.
엄마는 종종 내가 남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걱정하곤 했다. 아마도 엄마는 그저 내가 평범한 또래의 아이들처럼 순탄하게 살아가기만을 원했나보다. 하지만 그거야말로 얼마나 부질 없는 바람일까.
엄마가 아닌 다른 여인과 가정을 꾸리고 있는 남자를, 그것도 아빠라고 제대로 부르지도 못하며 자랐다는 점에서 이미 내 삶은 순탄과는 거리가 멀지 않았을까.
"이번엔 역사를 공부하고 있구나. 미란이는 공부가 즐거운 거니? 나중에 훌륭한 학자가 될 지도 모르겠구나."
학자? 엄마가 그런 말을 얼핏 했던 것 같지만 나는 사실 그런 것엔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나는 다만 연구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엄마는 내가 과학에만 관심이 있는 줄로 알았겠지만 실은 과학 만큼이나 역사학과 지리학도 내게는 중요한 분야였다.
만약 시공(時空)을 X축과 Y축으로 등분하듯이 나눌 수 있다면, 그 기준은 필히 시간축과 공간축이 될 것이다. 시간축은 역사학에, 공간축은 지리학에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과학의 힘을 빌어 그 경계를 넘나들 수 있다면, 시공을 자유로이 오고 가는 것이 가능할 지도 모른다.
내 관심사는 오로지 단 하나, 시간여행 이론 뿐이었다. 그리고 그 때의 나를 움직이게 했던 원동력은 아마도, 아빠에 대한 미움이었을 것이다. 시간을 되돌아가 아빠를 만난다면, 나는 아빠를 마음껏 꾸짖을 수가 있을 테니.
"아빠가 엄마를 선택하게 만들 거야. 그래서 엄마를 행복하게 해줄 거야. 그러면 나도 그제야 비로소 평범하게 살 수 있겠지.... 엄마가 늘 바랐던 대로."
돌이켜보면 정말로 우스운 이유였고, 지극히 어린 마음의 발로였을 뿐이다. 그 유치한 동기가 무한에 가까운 루프를 만들어 낼 것이라곤 아마 그 당시에는 실감하지 못 했겠지. 하지만 결국 나는 그 어린 마음을 포기하지 않았다.
*
오빠를 처음 만났을 때.
그 땐, 어땠더라? 지금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도 미워했겠지. 내가 그토록 증오했던, 엄마에게서 아빠를 빼앗아간 다른 여인의 아이였으니.
그래, 분명 그 때는 세상 누구보다도 오빠를 미워했을거야. 더불어 오빠의 엄마라는 그 여자도 말이지. 그래서 운명이란 참으로 기묘하고, 한편으론 얄궂은 거야. 그렇게 미워했던 사람을 사랑하게 될 거라고 내가 어떻게 상상이나 했겠어.
"안녕? 나는 민혁이야.... 최민혁."
첫 만남에서, 싸늘하게 굳은 내 얼굴을 조금은 두려워하면서도, 오빠는 목소리만큼은 또박또박하게 자신의 이름을 내게 밝혔다. 생각해보면 오빠는 늘 그랬어. 얄밉게도 언제나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날 대했지....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얼굴조차도 보기가 싫었다. 기억이 희미하지만 아마도 그랬던 것 같다. 그래도 단 한 가지는 여전히 또렷하게 기억난다. 그의 조심스러운 손이 내 어깨에 살며시 닿았을 때, 나는 끓어오르는 증오심을 누르지 못하고 소리쳤다.
"저리 치워!"
신경질적으로 내가 그의 손을 쳐내자, 그가 내가 덮어주려고 했던 담요 한 장이 허공에 흩날려 바닥으로 맥없이 가라앉았다. 아마도 매번 이렇게 옥상에 나와서 찬바람을 맞고 있는 내 모습이 안쓰러웠던 것이리라.
"미안해."
그는 내게 사과를 하고는, 조심스럽게 담요를 접어 내 옆에 내려놓고 재빨리 모습을 감추었다. 나는 그것을 거들떠 보지도 않고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여전히 을씨년스러운 야경을 내려다 볼 뿐이었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내 몸을 쓸고 지나가는게 느껴졌다.
그 날 따라, 추웠다.
*
시간이 제법 많이 흘렀다.
나는 중학생이 되었고, 그 때부터 엄마의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어느날 엄마는 쓰러져버렸고.... 그 때부터 병원 침대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그리고 의사는 그런 엄마에게 "폐암"이라는 무거운 말을 전했다.
"미안해, 미안해, 미란아.... 엄마가 너무 미안해."
바보 같이 엄마는 또 내게 사과를 한다. 엄마에게 허락된 삶이 꺼져가고 있는데도, 엄마는 여전히 자기 자신보다도 다른 누군가를 먼저 걱정한다. 죽는 것에 대한 걱정보다도, 남겨질 사람의 슬픔에 대한 걱정을 먼저 한다.
담배. 그 죽일 놈의 담배만 아니었으면 엄마가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겠지. 하지만 담배에 대한 미움보다도 아빠에 대한 미움이 더 컸다. 애초에 아빠가 아니었으면 엄마가 담배를 피울 일이 없었을 테니.
*
그것은 실수였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가 "실수"라는 것을 범했음을 스스로에게 시인했다. 하지만 인정한다고 해서 그것을 돌이킬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그 때의 나에게는, 아직 그런 능력이 없었다.
나는 한 생명을 죽여버리고 말았다. 어쩔 수 없었다며 스스로를 합리화했지만, 결국 그것은 살인이었다. 스스로가 끔찍한 괴물처럼 여겨졌고, 나는 버틸 수 없는 혐오감에 한없이 아래로 무너져내렸다. 나는 내가 천재라고 줄곧 생각해왔지만, 그것은 그저 착각이었던 것이다. 그 순간의 나는 천재가 아니라, 그저 살인자였다.
"무서워."
두려웠다. 생전 처음으로 공포에 직면하고 나서야 나는 내 초라한 존재를 인식할 수 있었다.
"괜찮아?"
그 절망적인 순간에, 나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었다.
"내가 곁에 있어줄게. 무서워하지 마."
덜덜 떨리는 내 몸에 그의 조심스러운 손길이 와서 닿았다. 하지만 나는 이번엔 그의 손길을 매몰차게 쳐낼 수가 없었다. 그만큼 두려웠고, 그만큼 누군가가 필요했다.
"온 세상 사람들이 너를 욕해도, 나는 네 편이 되어줄게. 괜찮아. 너에겐 그럴 이유가 있었을 거야."
그는 마치, 틀에 박힌 것 같은 이야기를 했다.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 건넸던 그 뻔한 말들. 그러나 나에겐 그런 말들이 너무도 절실했고, 그는 내게 그런 말들을 해주었다. 그 말, 그 손길, 그 눈빛까지도....
그것은 차라리 구원이었다. 나는 그로 인해 구원받았고, 그로 인해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얻었다.
"넌 내게 소중한 사람이야. 언제나 그걸 잊지 마."
그 때, 오빠는 내게 그런 말을 했다.
바보 같이.... 그 말이 결국 나를 여기까지 이끌었다는걸 오빠는 알까? 그걸 알았다면, 오빠는 내게 그런 말을 했을까? 아니, 그걸 알았다면....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빠질 수 있었을까?
하긴, 지극히 의미 없는 물음이긴 하지.
*
"민혁이 왔구나."
엄마는 초췌해진 얼굴로 병실 침대에 누워서도, 오빠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엄마는 오빠가 밉지 않은 걸까? 엄마에게서 아빠를 빼앗아간 그 여자의 핏줄을, 정말 미워하지 않는 걸까?
"작은 엄마. 힘을 내세요."
오빠는 엄마를 항상 "작은 엄마"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내가 알기로 작은 엄마라는 이름은, 이토록 복잡한 사이에 쓸 수 있는 이름이 아니었다. 하지만 오빠는 언제나 그렇게 엄마를 불렀다.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흔히 알고 있는 "작은 엄마"란 이름의 의미가 아니었다. 그것은 오직 오빠와 엄마 간의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그 복잡한 관계를, 우리 나름대로 받아들였음을 보여주는 미세한 흔적이나 다름 없었다.
"내가 죽고나면, 미란이를 잘 돌봐줄 수 있겠니?"
"그런 말씀 마세요. 다시 건강하게 일어나실 거에요."
오빠는 엄마를 안심시키기 위해 애썼다. 그것은 심지어 아빠에게서조차 느껴보지 못 했던 위안이었다. 바보 같이 눈물이 핑 도는 것을, 애써 두 사람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나는 병실에서 달려나왔다. 저 멀리서 아빠가 걸어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요즘엔 엄마를 자주 찾아오는 것 같긴 했지만.... 이제 와서는 모두 부질 없는 짓이었다.
*
결국 엄마는 소나기가 내리던 날에, 눈을 감았다. 기왕 하늘나라로 떠나는 거라면, 그동안 아빠에게 차마 못 다한, 오랜 세월 속에 쌓아두었던 원망의 말들이나 실컷 내뱉고 갈 것이지..... 엄마는 끝까지 아빠에게 웃는 모습을 보이고 떠났다. 마지막 소원이라는게 기껏해야 아빠에게 "여보" 소리를 듣는 것이었다니, 정말 한심한 이야기였다.
장례식에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왔다. 그 중에 한 여인의 모습도 보였다. 아빠의 아내였다.
아빠의 아내. 아빠의 아내. 아빠의 아내.... 나는 그 어색한 어감을 입 속으로 조용히 곱씹었다. 세상에 그만큼 구역질 나는 표현은 또 없으리라. 아빠의 아내라니.
"당신이 대체 왜 우는 거지? 우리 엄마가 죽었는데, 당신이 왜 우는 거야? 당신은 오히려 기뻐해야 하잖아?"
그 여자는 가증스럽게도, 엄마의 남은 흔적들을 보며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이중적인 여자 같으니. 당신만 없었더라면 엄마는 이런 식으로 죽지 않았을 거야.
증오가 가득 담긴 눈길로 그 여자를 노려보고 있는데, 눈물을 흘리는 그녀의 손을 조용히 감싸쥐는 손이 있었다. 오빠였다. 그 여자의 아들이자, 한편으로는 나의 배 다른 오빠....
"당신만 없었더라면 엄마는 행복했을 텐데."
살아오면서 수도 없이 떠올렸던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에는, 문득 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당신이 없었다면, 오빠도 없었을까?"
*
두려움을 배웠고, 그 다음엔 슬픔을 배웠다.
만약 인간다운 감정을 배워나가는 것이 보다 평범해지는 길이라면, 나는 아마도 점점 더 평범해지고 있었던 거겠지. 엄마가 살아 있었을 적에, 그토록 바랐던 대로.
"사랑해."
그리고 그 다음엔, 사랑을 배웠다.
나는 한 남자와 사랑에 빠졌다. 우리는 서로 사랑해서는 안 될 사이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에 빠졌다. 어디 그게 내 맘 같이 되는 일이라면 엄마가 과연 아빠를 사랑했을까.
"항상 곁에 있을게."
"거짓말 하지 마."
"정말이야."
그는 몇 번이고 내게 철썩같이 약속을 했다. 어릴 적에 엄마가 내게 가끔 그랬듯이, 서로의 손가락을 걸고.
"이게 사랑일까?"
이것 때문에 엄마는, 평생 그 힘든 삶을 견뎌내야 했던 것일까? 만약에 정말로 그런거라면 나는 결코 사랑에 빠지고 싶지 않았다. 엄마 같은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사랑에 빠지고 나서야 나는 깨달았다. 이전에는 몰랐던 많은 것들을 깨달았고, 그로 인해 나는 좀 더 다른 인간이 되었다. 엄마가 이런 내 모습을 비난하지 않을까, 가끔은 그런 생각 때문에 마음이 불편했다. 하지만 엄마라면 분명 나를 이해해 줄 것이라고 나는 믿었다. 사랑 하나에 평생을 바친 엄마라면 분명히....
"알았어. 믿을게."
*
나는 그를 믿었다.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를 사랑했기 때문에. 하지만 그 믿음으로 인해 나는 절망을 배워야만 했다. 두려움, 슬픔, 사랑.... 그 뒤에 찾아온 감정은 절망이었다. 서글프게도 그게 내게 주어진 순서였다.
오빠의 자그마한 무덤 앞에서, 나는 몇날 며칠을 뜬 눈으로 지새웠다. 바람이 내내 불어왔고, 살갗이 메말라갔지만 그 자리를 떠날 수가 없었다. 결국 아빠가 나를 찾으러 왔다.
"아빠 때문이야!"
긴 세월 동안 속에 담아두었던 분노와 증오를, 나는 아빠를 향해 쏟아냈다.
"아빠만 아니었어도 오빠는 죽지 않았을 거야."
처참하게 망가진 내 모습을 보면서 아빠가 무슨 생각을 할지 따위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엄마, 그리고 오빠의 운명을 이렇게 만든 것이 모두 아빠의 잘못 때문인 것처럼 느껴졌다. 어떻게든 아빠에게 한 움큼이라도 더 죄책감을 안겨주고 싶었고, 그로 인해 아빠가 괴로워하길 바랐다.
"아빠가 정말 미워!"
"미안하구나, 미란아."
내 기억엔.... 아마 아빠도 그 날 눈물을 흘렸던 것 같다. 하지만 내 눈엔 가증스러워 보일 뿐이었다.
*
두 번째 기억.
두 사람의 죽음은, 기어코 나를 이 구질구질한 굴레 속으로 뛰어들게 만들었다. 수 년의 세월을 걸쳐 나는 결국 내가 원하던 것을 이루어냈고, 그 능력으로 모든 것을 바로 잡기를 원했다.
어쩌면 머나먼 그 옛날로 되돌아가, 내 손으로 직접 그 여자의 존재를 없애고 아빠의 삶을 바로 잡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기나긴 실패 끝에, 나는 그것이 불가능한 이야기임을 받아들이고 말았다.
그 어떤 능력이나 힘을 통해서도 인과의 법칙은 무너뜨릴 수 없다. 이미 그렇게 되도록 정해진 것들 중에는, 도저히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반드시 필요한 것들, 바꿔서는 안 되는 것들. "운명"이라는 이름의 굴레 속에는 그런 것들이 드문드문 존재하고 있다. 혐오스러웠지만, 그것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내가 직접 아빠의 정해진 미래를 바꿔버리는건 불가능해. 이것을 인정해야만 모든 것을 시작할 수 있어....
"타임 리와인더(Time Rewinder)"
나는 내 발명품에 그런 이름을 붙였다. 시간을 되감기 위한 시계라는 의미였다. 이 시계의 능력으로 나는 시간을 되감아, 아빠에게 다시 한번 선택을 종용할 것이다. 아빠의 삶을 직접 바꿔놓을 수 없다면, 적어도 그 선택의 과정과 결과를 곁에서 지켜볼 것이다.
인과의 법칙을 통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만약 신이라는 것이 실존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신의 영역이리라. 나는 그저 가늠할 수 밖에 없었다. 과연 어느 정도의 개입이, 아빠의 삶을 바꾸면서도 나의 존재를 비롯한 중요한 것들을 유지할 수 있게 해줄지.
"기다려, 엄마."
내가 곧 아빠를 다시 만나게 해줄게.
*
인과의 법칙이 무너지는 순간, 나는 나의 존재를 유지할 수 없게 된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곧 소멸(消滅)이었다. 난 그것이 두려웠다. 그 막막한 공포는, 마치 우주가 존재하기 이전의 새카만 어둠 속을 상상하는 것과 같았다. 아마도 다시는 오빠를 만나지 못하게 되리라.
아빠와 엄마가 다정하게 숲속을 걷고 있었다. 시간을 거슬러 돌아와, 나는 아빠에게 새로운 선택을 내리도록 종용했다. 아빠는 결국 엄마를 쫓아 일본으로 왔고, 두 사람은 이 곳에서 행복한 가정을 꾸렸다.
기모노를 입고 아빠의 곁에서 팔짱을 낀 채, 엄마는 잔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두 사람은 너무도 다정해보였고, 엄마도 그만큼 행복해보였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그래, 저 모습이야말로 내가 원했던 엄마의 삶이야. 왜 진작 그렇게 살지 못 했어, 엄마? 엄마도 아빠 곁에 있으니까 좋지? 지금부터는 평생 그렇게 행복하게 살면 돼. 다른 모든 것들을 잊고....
"다른 모든 것들을 잊고."
엄마의 배가 조금 부풀어있었다. 이미 엄마의 뱃속에서는 또 하나의 "나"가 자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나로 하여금, 필연적으로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떠올리게 만드는 사실이기도 했다.
아빠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잊을 수도 없는 사람을 한국에 남겨놓고 왔다.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대로 엄마가 이 곳에서 아빠와 행복해진다면, 머나먼 땅에 남겨진 오빠는 결코 행복하지 못하리라. 아니, 어쩌면 오빠가 제대로 태어날 수 있을지조차 모르는 일이지....
"오빠...."
그의 얼굴이 떠오른다. 엄마의 저 행복한 모습을 보고서도, 바보 같이 그의 얼굴이 떠오른다.
바보 같이.... 너무도 바보 같이.
*
결국 나는 인과의 법칙을 무너뜨리지 못 했다.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내 존재가 사라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을까, 아니면 오빠를 다시 만날 수 없게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을까. 잘은 모르겠다. 어쩌면 둘 다였을지도 모르지.
나는 누군가가 나를 이기적인 딸이라고 욕하지 않길 바랐다. 내가 소망하는 최소한의 행복을 누리길 바라는 마음이, 부디 이기심으로 치부되지 않길 바랐다. 행여나 엄마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나를 비난할까? 아빠와 엄마의 행복을 이루어주지 않은 못되먹은 딸이라고....?
"미안해. 엄마."
엄마의 행복한 삶을 보았으면서도, 나는 결국 시간을 되감을 수 밖에 없었다.
*
억겁(億劫)이나 다름 없는 기나긴 시간의 굴레가 그 때부터 반복되기 시작했다. 수없이 많은 순간을 되돌아가 나는 아빠의 젊은 시절을 함께 했고, 그 때마다 아빠에게 또 다른 선택의 기회를 열어주었다.
하지만 그 무수한 선택들은 결국 미래를 바꾸지 못했다. 이미 정해진, 허락되어 있는 미래는 오직 둘 중 하나일 뿐이었다. 엄마가 불행해지거나, 아니면 내가 인과의 법칙을 무너뜨리거나.
뫼비우스의 띠를 그리듯이 빙글빙글 돌아가는 굴레 속에서 내가 버텨내야 하는 시간의 양이 점점 늘어만 갔고, 나는 어느 순간부터 내 나이를 잊어버렸다. 화학작용으로 노화를 멈춘 육체는 나를 항상 그 모습 그대로 존재하게 해주었지만, 눈빛과 표정에서는 삭막함 이외에 다른 모든 것들이 사라져 버렸다.
"담배...."
어릴 적에, 엄마가 담배를 피우는 것이 너무도 싫었다. 그 어릴 적이라는 것도 이제는 얼마나 먼 과거의 일인지 아득해졌지만, 분명 나는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는 담배를 손에서 놓지 못하고 있다.
"난 정말, 어쩔 수 없는 엄마의 딸이구나."
어리석은 짓인걸 알면서도 마치 엄마처럼, 그렇게.... 엄마가 남긴 라이터까지 여전히 한 손에 쥔 채로.
*
이게 마지막이야.
어느 순간, 그렇게 마음 먹었다. 무의미하게 되풀이 되는 시간을 겪고 나서, 이제는 시체만도 못하게 변해 버린 몸과 마음만이 내게 남아있었다. 이제는 그냥 쉬고 싶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바보 같은 짓이었을지도.
나는 아빠와 엄마에게 있어 운명의 분기점이 되었던 그 공항으로, 아빠를 가지 못하게 만들었다. 아빠의 기억을 지워버린 것이다. 아빠가 엄마를 그저 흘러간 옛 추억 정도로만 여길 수 있도록.....
이것이 정답일 지도 몰라. 비록 나는 오빠를 다시 만나지 못하게 되겠지만, 그래도 오빠는 아빠의 아들로 태어나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살아갈 테니까.... 그러면 인과의 법칙도 제자리를 찾을 수 있겠지. 어쩌면 나는 지금까지 오빠에 대한 미련을 놓지 못해서 어린애처럼 고집을 부렸던 걸지도.
"오빠와 내가 가까이에 있으면, 필연적으로 엄마는 불행해 질 수 밖에 없어. 엄마는 아빠랑 절대로 결혼하지 못할 테니까..... 그저 바보같이 또 주변을 맴돌다가 죽겠지."
엄마, 제발 일본에서 아빠를 잊고 행복하게 살아줘. 세상에는 아빠가 아니더라도 엄마를 사랑해 줄 수 있는 남자가 있을거야. 엄마가 그런 사람을 만나서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비록 나는 아빠 없이 자라게 되겠지만, 그래도 괜찮아. 어차피 처음부터 내게는 엄마 뿐이었는걸.
"미안해요. 전 그럴 수 없어요."
엄마는 정녕 바보인 걸까?
낯선 일본 남자의 고백 앞에, 담담히 고개를 가로젓는 엄마의 모습을 나는 멍하니 지켜보았다. 빛나는 반지를 준비해가며 엄마에게 청혼을 했던 무신류 가문의 젊은 남자는, 애타게 엄마의 마음을 잡아보려 했지만.... 엄마는 단호하게 고개를 돌리며 이 말만을 남겼다.
"왜냐하면 당신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바보, 멍청이.... 오래 전에 이미 메말라 버렸다고 생각한 눈동자에서, 기어코 눈물 한 방울이 흘렀다.
*
"사랑, 해보셨나요?"
나는 엄마의 옆에 걸터앉아, 조용히 담배를 빼물었다. 서글프게도 나는 이제.... 엄마보다 훨씬 나이가 많다. 내 나이가 몇인지 세어보지는 않았지만, 적어도 엄마보다는 훨씬 많으리라. 자조 섞인 웃음이 나왔다.
"응. 해봤지."
그래도 엄마는 언제까지나 나의 엄마일 뿐이었다. 하긴 나이라는게 뭐 그리 중요할까. 그저 흘러간 시간의 양을 재기 위한 것일 뿐인데.... 품 안에 달려들고 싶었지만 나는 그저 담배 연기를 허공에 뱉는 것으로 그것을 대신했다.
엄마는 품 안을 뒤져,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하지만 이내 라이터가 없음을 깨닫고 쓴웃음을 짓는다. 내 입가에도 왠지 실 없는 웃음이 한줄기 떠오르려는 것을 애써 지웠다.
저 시절의 나는 엄마의 라이터를 종종 감추곤 했지. 돌이켜보면 정말 바보 같았어. 차라리 담배를 감췄어야지 왜 라이터를 감췄을까? 그렇게 감추던 라이터가 이제는 내 물건이 되어버렸지만 말이야.
엄마가 남겼던 그 낡고 낡은 라이터로, 엄마의 담배에 불을 붙였다. 콩알 만큼 작았던 그 딸아이가 이렇게 커서, 눈 앞에 앉아 맞담배를 피고 있다는걸 알면 엄마는 아마 놀라겠지. 그러면 나를 혼낼까? 그런 생각들을 뒤로 하고 나는 엄마에게 물었다.
"다시 선택의 순간이 온다고 해도, 그 사람을 사랑할 거야?"
"물론이에요."
어쩜 이렇게 한결 같이 바보 같을까. 자기가 바보라는 사실을 과연 알긴 알까?
"바보, 멍청이."
엄마의 입에서 담배를 빼앗고는, 나는 그 자리에서 떠났다. 엄마에게 있어서는 아빠와의 갈림길이 되어야만 했던 그 어수선한 공항의 한복판.... 바로 이곳에서 이번에는 엄마가 선택을 내릴 차례인 것이다. 그것을 돕기 위해 나는, 떠나온 자리에 내 소중한 물건을 남겼다.
"아."
그러고보니 문득 생각이 났다. 왜 처음에 그 시계를 만들기 시작했는지....
아마 지금도 그 시계는 엄마의 손길을 주인이라 여기고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애초에 이것은 엄마의 삶을 바꾸기 위한 물건이었으니까.
*
오토바이를 타고 떠나는 엄마의 뒷모습을 나는 바라보았다. 엄마가 아빠를 다시 만나면, 어떤 선택을 할 지 사실은 이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걸 모른다면 내가 엄마의 딸일 수가 없겠지.
"왜 이제와서 그걸 돕는 걸까?"
나는 이대로, 영영 엄마와 아빠를 만나지 못하게 만들 수도 있었다. 어쩌면 그 편이 엄마에게 있어서는 더 행복한 일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내가 그렇게 생각해서 해왔던 일들이, 결국 엄마를 행복하게 만들었던가....?
"엄마에겐 정말로 아빠를 쫓아가는 것만이 행복인 거야?"
난 그런거 싫어. 엄마가 그렇게 바보 같이 살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런데 나는 왜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구태여 시계에 표시를 해두었던 걸까? 그런 괜한 짓만 하지 않았어도 엄마는 아빠랑 만나지 못 했을 텐데....
눈 앞의 장면이 바뀌었다.
눈물이 한가득 맺힌 눈을 하고서도, 활짝 웃는 엄마의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그런 엄마를 끌어안는 아빠의 모습이 보였다. 내가 너무도 싫어했던, 그 시절 아빠의 모습....
"엄마."
행복하게 웃는 엄마의 얼굴을 보며, 나는 마음 속으로 말했다.
"이번엔 정말로 행복해야 해."
힘들 거라는거 알아. 하지만 제발 그래줬음 좋겠어. 시간을 되감고 싶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을 만큼, 한평생 행복하게 살아줘. 아빠 곁에서 말이야. 그러면 아마 나는 더이상 "나"로서 존재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르지. 그래도 상관없어.... 나는 이제 너무 지쳤으니까.
만약 엄마가 정말로 아빠 곁에서 행복해 질 수 있다면, 나도 오빠와 좀 더 행복한 모습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 그 행복을 누릴 나는 비록 내가 아니겠지만 말이야. 엄마가 내 존재를 알지 못하더라도 난 괜찮아. 그저 지금처럼 엄마의 딸인 나를 아껴주고 사랑해주면 돼. 난 그런 엄마의 모습이 정말 좋았어....
"그리고 아빠."
내가 정말로 싫어했던 아빠.
아마 이번에도 비슷한 운명이 아빠를 기다리고 있을 거야. 시간이라는 것은 그런 거니까. 당연히 일어날 일의 순서가 있을 뿐인걸. 그 뻔한 운명 속에서, 아빠가 조금이라도 엄마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기를 난 바래. 그렇게 해준다면 아빠를 조금이나마 용서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바보구나, 나는."
결국 이런 선택을 하기 위해 그 길고 긴 시간을 거쳐왔던 걸까? 너무도 바보 같아서 눈물이 흘렀다. 하지만 눈물과 동시에 웃음도 나왔다. 나는 마지막으로, 엄마의 남은 삶을 한번 더 지켜보기로 마음 먹었다.
내 이름은 최미란. 한 남녀의 바보 같은 사랑에 의해 태어났으며, 사랑하는 남자의 배다른 누이로 태어나버린 여자다. 하지만 이제와서 그걸 한탄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 얄궂은 것도 운명이라면 받아들일 수 밖에.
그저, 그저 이번엔 엄마가 행복해질 수 있길.
"그리고, 나도...."
- 다음 화에 계속 -
반갑습니다, 상상의신비입니다 ^^
1부의 에필로그로 인사를 드렸던 것이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이번엔 2부의 첫발로 인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1부 에필로그에서 간략하게 밝혔듯이, 지금은 2부의 연재처 문제가 정확하게 정해지지 않은 상태입니다
현재 저는 타임 리와인더 1부의 수정작업을 거치고 있습니다, 새로운 연재처에서 연재를 겸하기 위해서요
비속적인 표현이나 너무 노골적인 섹스씬을 약간 순화하고, 로맨스적인 요소를 조금 더 부각시킬 생각이라
아마 소라 독자분들의 기억 속에 남은 1부의 모습과는 다소 달라질 수도 있을 듯 합니다~~
다행히 거기에서도 성인소설로써 연재해나갈 계획이라 성애에 대한 요소 자체가 사라지지는 않겠지만요
(사실 제 이야기가 섹스라는 부분을 빼고 싶어도 뺄 수가 없죠 ^^;)
하지만 2부는 가급적 소라에 올렸던 글 그대로, 수정작업 없이 이후에 새 연재처로 옮겨갈 계획입니다
그만큼 처음부터 신경을 써서 쓰겠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새 연재처에 글을 올리기 전까지는 소라 독자분들에게 2부의 이야기를 최대한 보여드리고 싶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제 나름대로는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한 이곳 소라넷에 큰 애착을 가지고 있어서.... 가능한 기간 동안은 소라에서 2부 연재를 해나가다가, 옮길 시기가 되면 새로운 연재처로 옮겨가는 방안이 저에게도 독자분들에게도 서로 좋은 방법이 아닐까 판단을 내렸습니다. 아마 1부의 원고 수정 작업이 모두 끝나게 되면 새로운 연재처로 옮겨가게 되겠죠. 그 정확한 시기에 대해서는 뚜렷해지는대로 꼭 공지를 드리겠습니다
아무튼 부끄럽지만 이렇게 또 2부 연재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저도 사람인지라, 솔직하게 말하면 연재처를 옮겨간 후에도 독자분들이 제 글을 보러 와주시길 간절히 바라지만, 그걸 대놓고 바라는건 너무 큰 욕심이겠죠 ^^ 언젠가는 소라에서 잊혀지더라도, 지금은 우선 제가 구상한 이야기를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만약 끝까지 제 글에 함께하기 위해 와주시는 분들이 있다면 정말 제가 허리 숙여 감사해야 할 분들이겠지요.
조금은 부끄럽고 죄송스런 이야기를 전해서 마음이 무겁습니다... 생계를 위한 결정이라 이해해주시길 바랄게요.
좀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예전에 어느 독자분께서 "타임 리와인더"가 성인웹툰으로 태어난다면 좋을거란 말씀을 해주신 적이 있습니다 (방금 찾아보고 왔습니다 1부 28장에서 "인셜"님이 그런 말씀을 해주셨네요 ^^ 감사합니다) 저도 그렇게 된다면 참 좋겠다, 상상한 적이 있는데 어쩌면 그 상상이 이루어질지도 모르겠네요
출판사의 편집자분께서 "타임 리와인더"의 장편웹툰화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물론 성인웹툰으로요. 애착을 갖고 글을 써왔던 저로서는 정말 두근거리는 이야기였죠.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생각만으로도 즐겁더군요. 이 문제에 대해서도 자세한 내용이 정해지면 소라 독자분들에게 전달을 해드리고 싶어요.
2부 연재에 대한 이야기와 1부 웹툰화에 대한 이야기.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역시 그 마음을 다 표현할 수는 없네요 ^^.. 우선은 중요한 사실을 대략적으로 전해드린 것 같아 다음 화에서 또 전해드릴 소식이 생긴다면 덧붙이겠습니다
그럼 오늘도 즐거운 하루 되시고,
항상 감사합니다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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