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임 리와인더 (Time Rewinder)
- 이 소설은 소.라.넷(sora.net) 작가 "상상의신비"가 연재 중인 작품입니다.
무단 불펌을 삼가해 주시길 부탁드리며, 퍼가시더라도 출처와 작가명을 꼭 남겨주십시오.
창작가들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이자 도리입니다.
* 1부 1장
"저기.. 서.. 서연아.."
"네?"
"그... 저기... 혹시 괜찮으면... 그러니까 잠시 시간 좀 내줄 수 있으면... 우리 잠시 얘기 좀 하고 갈래? 카, 카페 같은 데서 차 한잔 마시는 것도 좋구...."
병신새끼. 내 목소리지만 언제나처럼 한심한 목소리였다. 용기내서 말을 걸었지만 목소리는 덜덜 떨리고 있었고 내용도 술주정처럼 횡설수설이다. 역시나 서연이의 표정이 애매하게 일그러진다. 내 스스로에게 마음 속으로 욕을 내뱉어본다.
"아.. 그.. 그게... 약속시간에 늦어서... 빨리 가야 되요."
"응? 그.. 그래. 그럼 밑에까지만 같이 갈까?"
"아뇨.. 늦어서 뛰어가려구요. 아, 안녕히 가세요. 선배."
"저, 저기.. 그럼 다음에..."
하지만 말을 끝맺기도 전에 서연이는 이미 저만치 달려가고 있었다. 하.. 씨발년. 요며칠간 들이댔던 내 태도로 미루어보아 결정적인 대시를 하려는걸 저 년도 내심 눈치챈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노골적으로 피하다니... 얼굴 반반하면 사람 이렇게 무시해도 되는거냐? 이 씨발년아?
기분이 상해 캠퍼스에 굴러다니는 돌맹이를 툭툭차며 정문까지 내려왔다. 항상 이런 식이다. 나는 연애는 젬병이지만 꼴에 여자 보는 눈은 높았다. 그래.. 안다. 내 주제를 모른다는 걸. 하지만 어쩌겠는가. 눈에 안 차는 년들은 애초부터 만나고 싶지도 않았다.
주서연. 학과 3대 퀸카 중 하나라고 꼽히는 저 년 정도는 되야 모름지기 계집이라고 할 만하다. 내 꿈은 저런 년과 사귀어보는 것이다. 그리고 사귄 다음엔 마음껏 섹스도 해야겠지. 뭇 남자들이 한결같이 우러러보고 탐하는 멋진 유방과 엉덩이, 허벅지 등등을 내 마음대로 주무른다면 그 얼마나 기분 째지겠느냔 말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건 망상일 뿐...."
이번에도 실패다. 매번 그렇듯이, 주제를 넘을만큼 높게 잡은 목표치는 내가 손에 넣기엔 너무 높은 목표였고 오늘도 난 이렇게 찌질한 실패를 경험할 뿐이다. 그리고 자취방으로 돌아가 편의점에서 산 맥주캔을 따고 인터넷을 뒤져 최대한 서연이와 닮은 야동 배우를 찾아 딸딸이를 치면서 오늘의 실패를 위로하겠지.
"정말... 찌질한 인생이야."
난 잘 생기지도 않았고, 능력이 좋지도 않고, 돈이 많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난 주제넘을지언정 예쁜 여자를 좋아하고, 언젠가는 꼭 저런 죽이는 년을 사귀고 말 것이다. 아직 한번도 성공한 적은 없지만.... 죽기 전에 한번은 기회가 오겠지... 씨발.
- 아앙.. 아아앙.. 아앙!!
모니터 속의 여배우가 굵직한 좆에 박혀가며 신음소리를 지른다. 최대한 서연이와 비슷한 배우로 찾아본 것이다. 하지만 역시 이딴게 위로가 되지는 않는다. 현실 속의 서연이는 주서연일 뿐, 어디까지나 저런 야동 배우가 아니기 때문에.
"으윽... 씨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지를 흔들다보면 좆물은 솟아오르기 마련. 별 위로가 되지 않는 사정의 시간을 보낸 후 나는 좆물 흥건한 크리넥스를 변기에 흘려보낸다. 기분이 더러워 맥주를 더 마시려고 나는 슬리퍼를 신고 자취방 밖으로 나섰다.
"응? 옆집 여자잖아."
302호 여자가 마침 문을 열고 들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303호인 내 자취방의 바로 옆 세대이니 따지고보면 이웃인 셈이다. 저 여자가 이 시간에 집에 있는 모습은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아침 일찍 나가는 모습이나 밤 늦게 들어오는 모습 밖에 보지 못 했는데...
302호 여자는 어딘가 삭막한 구석이 있었다. 심지어 집 안 모습을 한번도 본적이 없음에도 대문에서 그 삭막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얼굴 생김새가 못 생긴건 아니었다. 오히려 몸매 등을 놓고 전체적으로 보면 그럭저럭 키도 길쭉하고 볼륨도 적당히 갖춘 적당히 수수한 인상의 미인이었다.
그럼에도 그녀의 입에서 사소한 인사 한마디 나오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고, 복도에서 마주쳐도 그녀의 눈은 늘 초점없이 무미건조했기 때문에 나는 이상하게도 그녀를 이웃이라고 여겨본 적이 없었다. 아무튼 그런 여자가 오늘은 드물게도 이른 저녁에 귀가하는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별로 놀랄 일은 아니었지만.
"과학자랬나...? 저 여자?"
예전에 자취방 계약을 할 때 집주인에게서 얼핏 듣기로는 옆집 여자가 무슨 이름 있는 과학자의 딸이라고 했다. 자기 아버지의 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하고 있다고.... 그리고 방 안에서 혼자 무슨 연구를 하는건지 가끔은 불꽃이 튄다거나 진동음이 울리거나 하는 작은 소란이 간간히 있곤 한다고 말해주었다. 처음엔 찝찝했지만 옆집에서 지내보니 의외로 그리 큰 소음공해가 아니었기에 나는 여태껏 그런대로 불만을 가지지는 않았다.
아무튼 302호 여자를 금새 기억에서 지우고 나는 편의점에서 맥주를 몇캔 사서 다시 3층으로 올라왔다. 내 방으로 들어가려고 복도를 걷는데, 나는 어쩔 수 없는 호기심에 302호 앞에 잠시 멈춰서고 말았다. 보려고 본 것이 아니라 우연히 보게 된 거지만 302호의 문이 완전히 닫히지 않고 살짝 열려있는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실틈처럼 작은 틈새였지만 문이 닫히지 않았다는걸 확실히 알 수 있었고, 나는 나도 모르게 살짝 귀를 가져다댔다. 어쩌면 이 괴팍하고 젊은 여성 과학자가 무슨 실험을 해대는건지를 엿들을 수도 있지 않은가?
- 쏴아아아....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집 안에서는 옅은 물줄기 소리만이 새어나왔다. 이 건물에서 한 학기를 보낸 나는 알 수 있었다. 이건 분명히 샤워기의 물소리. 안에서 샤워를 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 그럼 이 여자 지금... 문을 열어놓고 안에서 샤워하고 있다는거?"
뭔가 야릇한 19금 소설의 한장면을 보는듯한 느낌에 나는 왠지 모르게 흥분이 되었다. 아까 딸딸이로 좆물을 뺐음에도 불구하고 맥주를 이미 꽤 마셨기 때문인지 약간 흥분이 솟아올랐다. 젊은 여자가 겁도 없이 문단속도 하지 않고 샤워를 하고 있으니 어찌 야릇한 상황이 아니겠느냔 말이다.
"......."
숨 죽이고 잠시 문 밖에 그대로 몇 초간 얼어있었다. 집 안에서 특별한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물소리만 간간이 들려올 뿐.... 아무리 생각해도 이 집에 이 여자 말고 다른 사람이 산다는 말은 들어본 적 없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이 문을 살짝 열어도.... 그녀는 모를 것이다.
취기에 휩쌓인 나는 겁도 없이 묘한 흥분에 이끌려 살짝 문을 열었다. 아무 생각 없이 무단 가택침입을 행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원룸의 구조는 신발장 바로 너머에 화장실이 있는 형태였기 때문에 문을 열자마자 화장실의 문이 닫혀 있는 것을 알 수 있었고, 그 너머에서 들리는 물소리로 보아 그녀가 안에서 샤워를 하고 있음까지 알 수 있었다. 그 증거로 역시나 방 안에는 사람이 없었다.
- 꿀꺽~
침 넘어가는 소리가 크게 들린다. 젊은 여자 혼자 사는 방에 몰래 들어오다니.... 왠지 범죄라도 저지르고 있는 기분이잖아. (사실 범죄 맞다) 그런데 난 뭐하려고 여기 들어온거지? 뭘 어떻게 해보려는 생각도 없이 무작정 들어온 나는 괜시리 화장실 문에 귀를 대고 젊은 여자의 샤워 소리를 감상했다. 이대로 그녀가 나오면 꼼짝없이 범죄자가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나.. 나가자.."
샤워하는 모습을 훔쳐볼 수 있다면 여기 더 있을 이유가 되겠지만 어차피 문을 열어볼 수도 없는 일, 나는 조금 특별한 경험을 했다는 점으로 만족하기로 하고 등을 돌렸다. 하지만 걸음을 떼려는 순간 이상하게 시선을 잡아끄는 물체가 있었다. 그것은 화장실 입구에 놓인 그녀의 속옷 더미들... 정확히 말하면 그 더미들 한가운데서 빛나는 반짝이는 무언가였다.
"뭐.. 뭐지? 반지 같은 건가?"
자세히 보니 그건 금속이긴 했지만 장신구의 종류는 아니었다. 투박한 은색 빛깔로 빛나고 있는 그것은 언뜻 보기에는 시계처럼 보였다. 아주 오래전에나 쓰였을 법한 아날로그 초시계 말이다. 젊은 여자의 집에 함부로 들어와 금품에 허락 없이 손을 대고 있는 내 상황이 영락없는 도둑의 형색이라는걸 알았지만 왠지 나는 그 순간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손을 뻗어 그 시계를 쥐었다.
한주먹에 쥐어질만한 크기임에도 불구하고 꽤나 무게감이 느껴지는 그 금속 덩어리의 표면에 음각으로 새겨진 영문 스펠링이 보였다. 12자의 알파벳이 이렇게 아로새겨져 있었다.
- TIME REWINDER.
"타임... 리와인더? 메이커 이름인가?"
시계에 대해 무지한 나로서는 무슨 브랜드 상표겠거니 하며 그 투박한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별로 비싸 보이지는 않았지만 이런 골동품 느낌 나는 중세시대풍의 물건들은 종종 의외로 고가에 거래된다는 사실을 어디선가 줏어들은 것 같다. 그렇다면 이걸 훔칠 것이냐? 아니, 그랬다간 바로 건물에 경찰들이 들이닥칠텐데 굳이 절도범이 되고 싶을 리가....
"그.. 근데 왜 이렇게..."
왜 이렇게 눈을 떼기가 힘들지? 그 시계는 뭔가 시선을 잡아끄는 것만 같았다. 시침과 분침, 초침으로 보이는 3개의 바늘이 유리막 너머로 보인다. 하지만 시계는 수명이 다했는지 침이 움직이고 있지는 않았다. 잠시 살펴보던 나는 그 시계가 왜 이질감이 느껴지는지를 눈치챘다. 시침, 분침, 초침의 색깔이 그 골동품처럼 낡은 시계의 외관과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게도, 빨강, 초록, 파랑의 3원색으로 칠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투박한 은색의 금속물체에 세가지 원색으로 칠해진 침들이 박혀 있으니 뭔가 우스꽝스러워 보였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시계의 옆면에는 침을 조절하는 장치로 보이는 검은색 돌림쇠가 박혀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 돌림쇠를 두 손가락으로 집었다.
"그 때 알았다면 어땠을까?"
먼 미래에 나는 이 순간을 되돌아보면서 이렇게 자주 회상한다. 그 순간 그 돌림쇠를 돌리지만 않았어도, 아니, 그 시계를 얌전히 그 자리에 놓고 되돌아 나오기만 했어도 내 삶은 여전히 평범했을 것이다. 엄지와 검지로 그 시계의 가장 작은 바늘인 초침을 딱 한 칸 움직인 바로 그 순간, 내 삶이 완전히 바뀌었다.
"뭐지?"
물론 그 당시엔 아무 것도 몰랐다. 그저 지독한 정적만이 찾아왔다는걸 느꼈을 뿐이다. 하지만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바로 옆에서 얇은 문 하나 너머로 샤워소리가 들리고 있어야 하는데 갑자기 정적이라니.....
"잠... 깐...."
내가 느낀거라고는 마치 바이킹을 타듯이 아랫배가 울렁거리는 느낌이 한 차례 찾아왔다는 것 뿐이었다. 하지만 그 울렁이는 느낌이 지나가고나니, 거짓말처럼 옆에서 줄곧 들려오던 샤워소리가 멈추었다. 샤워소리가 멈춘 것 뿐만이 아니라, 인기척 자체가 아예 없어졌다.
여자가 샤워를 끝낸건가? 하지만 5분이 지나도록 안에서는 그 어떤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누가 말해주진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느낌이 이렇게 말해주고 있었다. 저 안에는 아무도 없다고.
- 똑똑.
미친놈처럼 나는 화장실 문을 노크했다. 남의 집에 무단침입해서 화장실 노크라니. 이 얼마나 경우없는 일인가. 하지만 더 놀랄 만한 일은 따로 있었다. 이상한 느낌을 이기지 못하고 화장실 문을 살짝 열어젖혔을 때, 화장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불도 켜져있지 않았다.
"뭐.. 뭐야..."
온몸에 소름이 돋은 나는 부리나케 그 집을 뛰쳐나왔다. 애초에 내가 물소리를 잘못 들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귀신에 홀린 듯한 기분에 나는 내 방으로 돌아와 문을 걸어잠그고 침대 위에 급히 걸터앉았다.
"이.. 이거.. 가져와 버렸는데..."
놀란 와중에 나는 그 초시계를 여전히 손에 쥐고 있었다. 타임 리와인더라는 이름이 새겨진 그 초시계는 여전히 시간이 멎어있었다. 내가 초침을 한칸 움직인 그 시간 그대로.....
"타임 리와인더라니...."
직역하면 "시간 되감개"라는 뜻이다. 순간 머릿속에 말도 안되는 한가지 가정이 스쳐 지나갔다. 이런 소재는 영화나 소설 등에서 간간히 쓰이곤 하지 않던가? 하지만... 하지만 이건 현실이다. 그런 말도 안되는 생각이....
"아무래도 맥주를 너무 많이 처먹었나보다. 빨리 정신차리고 이건 제자리에 다시 갖다놓자...."
술을 깨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심호흡을 하고 빨래를 건조하는 작은 베란다로 나갔다. 창문을 열고 공기를 크게 들이마셨다. 한 서너번 숨을 들이켰을까..... 나는 그 자세 그대로 그만 굳어버렸다.
"하늘 색깔이...."
창문 너머로 보이는 하늘 색깔은.... 아까보다 더욱 밝았다. 맥주를 사러 편의점에 들렀을 때 이미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는데 오히려 지금은 그때보다 해가 더욱 잘 보이고 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씨.. 씨발.. 말도 안돼..."
덜덜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집어보니 시간은 초저녁 무렵이었다. 아까 분명 이미 초저녁을 지나고 있지 않았던가? 맥주를 마셔서 확신은 못하겠다.... 하지만 휴대폰 액정에 떠오른 시간은 분명 아까 내가 시간을 확인했을 때보다 더 앞당겨져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미친놈처럼 방 안을 얼마나 서성거렸을까. 나는 이 기분 나쁜 물건을 제자리에 돌려놔야한다는 막연한 기분이 들어 조심스럽게 복도로 나섰다. 복도로 나서 옆집 여자의 대문 앞에 섰을 때 나는 문득 흘려보냈던 한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분명 아까 옆집 여자의 집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도.... 왠지 그 집에서 도망쳐나올 때는 문이 닫혀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문을 닫은 기억이 없는데 말이다. 게다가 곰곰히 생각해보니 문은 잠겨있기까지 했던 것 같다.
마치... 나도 그 여자도 "그 집에 들어오기 전"의 상태처럼 말이다.
"미친 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정신차려. 시계만 갖다놓으면 돼."
하지만 왠지 그 문을 열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 문을 여는 순간 뭔가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날 것처럼 불안했다. 이것도 술을 마셨기 때문일까?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아 그 집 앞에서 무려 40분을 서성거렸다.
인기척이 들린다. 문 앞을 서성이고 있던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고개를 들었다. 여자가 보인다. 그 옆집 여자가 계단을 올라와 복도를 걸어오고 있었다. 귀신이라도 되는 걸까? 역시 내가 샤워 소리를 잘못 들은건지도 모른다.
여자는 언제나처럼 초점없는 눈으로 복도를 걸어왔다. 엉거주춤 서있는 나를 바라보지도 않았다. 그녀가 자기 집 문을 열고 들어갈 때, 나는 그 모습이 아까의 모습과 하나도 다를 것 없이 똑같다는 느낌이 들어 등골이 오싹해졌다. 하지만 딱 하나 다른 점이 있었다. 그녀는 아까처럼 잠긴 문을 비밀번호로 열지 않았다. 그저 손잡이를 돌렸을 뿐이다.
문이 열려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 문은 아까 내가 도망쳐나올 때 열고 나왔으니까....
"......."
어정쩡한 자세로 서서 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가는 모습을 나는 가만히 보고 있었다. 문고리를 돌리던 그녀는 문이 잠겨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잠시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녀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처음으로 나는 그녀와 눈을 마주보았다. 초점 없는 눈에 아주 잠시 생기가 돌아온 것 같았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집 안으로 들어가버렸고, 나는 복도에 혼자 남게 되었다.
"어.. 어떡하지..."
복도에 남겨진 나는 다시금 굳게 닫힌 옆집 여자의 현관문 앞에서 똥개마냥 서성거렸다. 그리고 잠시 후, 굳게 닫힌 현관문 너머로도 희미하게 들을 수 있는 물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샤워소리... 그것은 아까 전에 들었던 것과 같은 바로 그 물줄기 소리였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한시간 정도를 더 복도에서 서성거리던 나는 다시 내 방으로 들어와 바닥에 주저 앉았다. 결국 나는 그 날 그 집에 시계를 돌려놓지 못했다. 그것은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9월 어느날의 일이었다.
*
내 기억은 그 후 세달 무렵 뒤로 이어진다. 학기가 끝나고 방학을 맞이했다. 그 후로 이상하게도 옆집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가끔씩 옆 방에서 들려오는 치직거리는 소음 등을 보아 그녀가 어디로 떠난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이따금씩 절도범으로 경찰이 방에 들이닥치는 꿈을 꾸곤 했고, 심지어 지금도 그녀가 내 도둑질을 알아챌까봐 노심초사했다. 하지만 내 우려와는 다르게 그녀는 집안에서 뭔가 사라졌다는 생각 자체를 못 하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나는 이상하게 그 정체 모를 은색 시계를 내다버릴 수가 없었다. 옷장 서랍 구석에 깊숙히 처박아둔 그 은색 초시계는 몇달 동안 그 자리에 그대로 박혀 있었고,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이 지나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걸 버릴 수 없었을까? 어쩌면 그렇게 못하도록 정해져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현주씨~ 오늘 끝나고 같이 밥먹기로 한거 잊지 않았죠?"
그러던 사이 나에겐 새로운 목표, 즉 새로운 이상형이 생겼다. 수많은 실패를 딛고 이번에 내 눈 앞에 나타난 이 박현주라는 여성은 헬스장에서 만난 아주 매력있는 여자였다. 작달만한 키에 얼굴은 그냥저냥이었지만 애교가 듬뿍 묻어나는 말투와 재치있는 성격, 볼륨감 있는 몸매 등등이 끌렸다. 그동안 숱하게 차이고 실패해왔지만 이번엔 왠지 잘 될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난주에 헬스장에서 과감하게 그녀에게 대시한 결과 오늘 운동 끝나고 같이 식사하기로 약속을 잡은 것이다.
"네, 그래요. 저 샤워하고 올테니 이따가 입구에서 만나요~"
현주 씨는 고양이 같은 웃음을 잘 짓곤 했다. 나는 종종 그녀가 침대 위에서도 그렇게 고양이같은 표정을 지을까 하는 상상을 하곤 했다. 일이 잘 풀린다면 이번에야말로 그런 내 망상을 충족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현주 씨와 조용한 일식집에서 식사를 하는 동안 나는 되도록 많은 대화를 시도했고,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너무 껄떡댄다는 느낌을 주지 않도록 자제했다. 다행히 그녀는 내 말에 잘 반응하거나 웃어주었고, 나 역시 "뭔가 될 것 같다"는 느낌이 점점 더 확신에 차고 있었다.
"저어.. 현주 씨, 괜찮으시면 맥주 한잔 더 하고 들어가실래요? 2차도 제가 쏠게요."
순간 너무 들떠 약간 호구처럼 제안해버렸다. 하지만 현주 씨는 구김살 없이 살풋 웃으며 승낙했다.
"호호, 좋아요. 밥은 오빠가 샀으니 2차는 내가 낼게요. 그리고 말 편하게 해요. 나보다 오빠잖아요."
"하, 하하, 그럴까, 그럼?"
아... 정말 매력있는 년이다. 어쩌면 천사가 아닐까? 솔직히 좀 어장관리같은 느낌이 들긴 하지만 나는 이렇게 내 말에 잘 반응해주는 여자를 본 지가 너무 오래되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감격스러웠다. 이번에는 정말 잘해봐야겠다는 생각에 더더욱 의욕이 충만해졌다.
근처 조용한 스몰비어로 자리를 옮겨 현주와 가볍게 맥주 한잔을 즐겼다. 생각보다 술을 곧잘 마시는 현주의 주량 덕에 어느 정도 서로 취기가 오르자 3차까지 가게 되었다. 바로 자리를 옮길 때 즘엔 서로가 적당히 기분이 좋아져 있는 상태였고, 나는 어느정도 작업을 시작해도 좋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럼 오빠는 OO대 다니는 거에요? 어쩐지 좀 똑똑해보이더라니. 거기 공부 잘해야 갈수 있잖아요."
"에이, 아냐. 그냥 하고싶은 전공 찾아서 가다보니까 가게 된거지. 현주는 XX대 다닌다며?"
"네, 완전 꼴통대학이에요. 호호."
"꼴통대학은 무슨~ 거기 여자애들 예쁘기로 유명하잖아. 솔직히 난 그 소문 안믿었는데 현주 너 보니까 사실인 것 같기도 하다."
"에이 참~ 갑자기 무슨 아부에요."
"아부 아냐. 나 처음 봤을때부터 너 되게 예쁘다고 생각했어."
"진짜요?"
"당연하지. 솔직히 말하면 나 너한테 호감 있어. 그러니까 이렇게 밥 먹자고 들이대는거지."
"장난으로 하는 얘기 아니죠?"
"물론이지. 이런 말을 장난으로 하겠어?"
분위기가 뭔가 "이건 되는 분위기다" 라는게 느껴졌다. 꽤 노골적으로 대시를 했음에도 별로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여기서 너무 앞서나가지만 않고 깔끔하게 마무리를 하면 오늘은 대성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말인데 현주야, 우리 좀더 가깝게 연락하고 지내도 될까? 난 아무에게나 대시하는 편이 아니지만 너한텐 정말 호감이 있거든. 네가 부담스럽지만 않다면 더 가깝게 지내보고 싶은데, 넌 어때?"
적당한 멘트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주도 별로 거북해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그냥 잠시 속으로 뭔가를 재는 듯이 모호하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문득 현주의 봉긋한 가슴 볼륨과 운동으로 다져진 탄탄한 허벅지에 눈길이 갔다. 일이 잘 풀리면 저 볼륨감 있는 몸을 머지않아 내 맘대로 주무를 수 있을 것이다. 아.. 그런 일이 정말 일어날까?
"흠... 뭐, 나도 좋아요~ 나도 오빠 싫진 않으니까."
됐다! 이건 이제 반은 먹고 들어가는 게임이다. 나는 너무 들뜨지 않으려 애썼다. 바에 들어온 이후 데킬라를 좀 마셨더니 자꾸 취기가 올라 뭔가 실수를 할 것 같은 기분이 자꾸 들었다. 괜히 술김에 또 실수를 해서 90퍼센트 다 된 밥에 재를 뿌린다면 그보다 더한 참사가 어디있겠는가? 오늘은 이 정도만해도 충분히 대성공이라는 생각이 들어 나는 슬슬 자리를 마무리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하, 그럼 우리 다음주에 영화나 같이 보러갈까?"
"히히~ 생각해보구요."
크크.. 씨발년.. 귀엽기도 하지. 벌써부터 현주의 알몸을 볼 생각을 하니 아랫도리가 벌떡 서는 것만 같다. 그 상상이 이젠 현실로 이루어질지도 모르는 것이다. 나는 신사답게 현주를 데려다 주기로 하고 같이 바를 나왔다. 이럴때 자가용이 있다면 더욱 폼이 나겠지만 나는 일개 학생신분일 뿐이기에 아쉬운 대로 택시를 잡았다.
데킬라를 좀 마셨기 때문인지 현주는 뒷좌석에 타고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집이 대충 어느동 어디라고 들어두어서 우선 그쪽으로 향하긴 했지만 정확히 어디로 가야하는지는 몰랐다. 하지만 곯아떨어진 현주를 보니 왠지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이것은 필시 알콜에 의한 흥분이겠지만, 그걸 알면서도 그 흥분을 거부하기가 힘들었다.
"아.. 안되는데.. 술기운에 실수해서 재 뿌리면 안되는데..."
머리 속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달아오른 아랫도리는 뭔가 다른 요구를 해대고 있었다. 이것이 정상적인 판단이 아님을 알고 있었지만 결국 나는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현주 몰래 택시를 돌렸다.
"여기서 내릴게요, 아저씨."
택시를 세운 곳은 다름 아닌 모텔촌. 조심스럽게 현주를 부축해 내릴때까지도 현주는 세상 모르게 잠들어 있었다. 두방망이 치는 심장을 억눌러 진정시키며 나는 머릿 속을 빠르게 팽팽 굴렸다. 그래봤자 술에 절어 이성이 마비된 머리였지만 말이다.
"그래.. 현주가 깨어나질 못해서 집을 알아낼 수가 없었어. 현주가 일어나면 그렇게 설명하면 되지. 길바닥에서 재울 순 없잖아. 그래, 현주가 못 일어났기 때문이야. 그렇게 변명하면 돼. 일단 모텔에만 들어가면...."
일단 모텔에만 들어가면 끝이다. 머릿 속에는 그러한 공식이 막연히 세워지고 있었다. 눈 앞에 보이는 모텔의 빨간색 간판이 내게 손짓하는 듯 했다. 저곳을 넘어 들어가기만 하면 내 소원이자 꿈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이게 무모한 짓임을 알면서도 도저히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다.
생각해보라. 지금 아니면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오겠는가. 일이 잘 풀려서 현주를 꼬신다한들 따먹을 수 있다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꿈에 그리던 퀸카와의 섹스가 코앞이다. 망설일 이유가 없다.
"이.. 이모. 방 하나만 주세요."
"쯧쯧. 아가씨가 많이 마셨나보네. 조용한 방으로 드릴게."
모텔 이모의 은근한 웃음을 보니 오늘이 바로 퀸카와 섹스하는 날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엘리베이터를 오르는 순간이 왜 이렇게 길게 느껴질까.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나는 다급히 현주를 침대 위로 던지다싶이 눕혔다. 그리고 짐승처럼 그 위로 몸을 날렸다.
"꺄아악!!"
그 순간 터져나오는 찢어질 듯한 비명소리.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침대 위로 뛰어들려던 그 자세 그대로 굳어졌다. 현주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얼이 빠진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람?
"혀.. 현주야. 일어났어?"
"오빠.. 지, 지금 뭐하는 짓이에요?"
씨발년이 보면 모르나... 모텔에 들어왔으면 척이지. 눈치껏 그냥 계속 자는척이라도 하고 있던가... 나는 어정쩡한 자세로 어설프게 웃으며 자세를 바로 잡았다.
"아.. 아니.. 네가 일어나질 못하길래... 집도 모르고... 그래서 편하게 자라고... 옷이라도 좀 벗겨줄... 아, 아니, 양말만 벗겨주려고 했는데...."
뭔 소리를 하는지 주절거리는 내 얼굴을 싸늘하게 올려다보면 현주가 서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오른손을 들어 크게 휘둘렀다. 철썩 소리가 나면서 내 고개가 반대편으로 돌아갔다.
"쓰레기 같은 새끼... 실망이야."
현주는 그렇게 욕지거리를 내뱉고 방을 나가버렸다. 뺨을 맞은 나는 어안이 벙벙해서 그 자리에 그대로 잠깐 굳어져있었다. 그 후로 어떻게 자취방까지 돌아왔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다음날 나는 자취방 침대에서 부스스 몸을 일으키자마자 머리를 마구 쥐어뜯으며 절규했다. 욕을 쩌렁쩌렁 내뱉으며 광분을 해댔다.
"씨발! 씨발! 씨발!!!!"
어째 일이 잘 풀린다 싶더니, 이렇게 또 불길한 예감이 들어맞아 다 된밥에 재를 뿌리고 말았다. 왜 나는 이렇게 찌질한걸까? 내 인생은 왜 이렇게 찌질하지? 그놈의 술기운만 아니었어도!
"씨발.. 어떡하지? 이제부터 현주 그 년 얼굴 어떻게 보지? 아니, 그게 문제가 아냐.... 이년이 작정하고 소문이라도 내는 날엔... 어쩌면 성추행으로 감방까지 가는거 아냐?"
술이 깨고 나니 이성적인 판단들이 머릿 속에 떠오르면서 나는 금새 무서워졌다. 망신을 당하는 것은 기본이요, 어쩌면 큰 댓가를 치르게 될지도 모른다. 순간 머릿 속이 새햐얀 백지장으로 변하면서 나는 그만 맥이 빠졌다. 백지장으로 변한 머릿 속에 처음으로 떠오른 생각은 이거였다.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아마 그 생각과 동시에 옷장 구석에 오래도록 처박아뒀던 무언가가 함께 떠오른 것은 결코 우연은 아니었을 것이다. 인간은 미지의 현상 앞에 더없이 무지하지만 적어도 한번 경험을 해본 이상 완전히 무지하다고 볼 수는 없으니 말이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애써 잊어버리기 위해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오랜 시간 숨겨두었던 것을, 그러나 한편으로는 결코 버릴 수는 없었던 그 미지의 물건을 꺼내었다. 은백색의 투박한 아날로그 초시계.
아마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뾰족한 해결책이 없으니 그런 헛된 망상에 의지하게 된 것이겠지만 나는 근 4개월만에 내가 옆집 여자로부터 훔쳤던 그 초시계, "타임 리와인더"를 옷장에서 꺼냈다. 그것은 내가 처음에 옷장에 숨겼던 그 모습 그대로, 심지어 시계바늘 역시 그 자리에 똑같이 고정된 채로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오래간만에 꺼내든 절도의 결과물을 손에 쥐니 예전에 느꼈던 그 미스터리한 기분과 그 날의 오싹한 기분이 되살아나는 듯 하여 기분이 섬뜩했다. 하지만 그런 신비감이 오히려 지푸라기라도 잡아보자는 내 절박함을 부채질해 주었다. 나는 이전보다 더욱 자세히, 더욱 세밀하게 그 물건을 이리저리 살폈다. 자세히 보니 시계 뒤편에 덮개를 분리할 수 있는 홈이 있었다. 일반 시계로 따지면 배터리를 교체하기 위한 기능이겠지만 형태로 보아하니 이 초시계의 경우는 보다 손쉽게 열고 닫을 수 있게끔 조인트와 홈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이건...."
딸칵 소리와 함께 초시계의 뒷면을 열었다. 조잡한 기계장치들이 보이는 시계의 뒷면과 함께 열려진 케이스 백의 반대면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의 눈으로는 도저히 알아보기 힘든 낙서같은 것들이 음각으로 반대면에 새겨져 있는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나는 그 길로 곧장 밖으로 나가 돋보기를 하나 사왔다.
알아보기 힘든 그 음각의 문자들을 렌즈로 확대시켜보니 나는 그것이 영문 글자를 정밀하게, 아주 정밀하게 새겨놓은 것이라는걸 알 수 있었다. 그 영문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Blue - 1hour // Green - 1Day // Red - 1year]
[The price is your lifespan]
[Be careful surrounding object when use]
돋보기를 썼음에도 알아볼 수 없는 문장들도 있었고, 너무 자잘하게 새겨진 탓에 처음 세 문장을 해석하는 것도 간신히 해냈다. 우선 읽어낸 영문자들을 대충 해석한다면 이랬다.
[파랑 - 1시간 // 초록 - 1일 // 빨강 - 1년]
[가격은 당신의 수명이다]
[사용시 주변 물체를 주의하라]
"대체 이게 다 무슨 소리야?"
이 정도 해놨으면 이건 더이상 가벼운 장난질이라고 의심하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새겨진 음각 문자들의 의미를 파악하기 힘든건 둘째치고 시계 내부의 기계장치들은 척 봐도 일반 시계의 기능을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문득 지금 내 모습을 다른 사람들이 본다면 무슨 소리를 할까 싶었다. 내가 생각해도 지금 내 모습이 미친놈같은데.... 그래도 밑져야 본전이잖아?
"에라이 모르겠다 씨발!"
나는 홧김에 초록색 분침을 옆으로 한칸 옮겼다. 지난번에 건드린 파란색 초침과는 다른 바늘이었다. 그것이 분침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건 좀 후의 일이지만, 어쨌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세 개의 조임쇠 중 가운데 조임쇠를 엄지와 검지로 살짝 돌린 후였다.
그리고 그 순간, 세상이 울렁였다.
*
절벽에서 떨어지는 것 같은 아찔한 울렁임.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몸을 일으켰다. 언제부턴지 모르겠지만 바닥에 쓰러져 있었던 것이다. 어리버리하게 몸을 일으켜 고개를 돌려보았다. 차마 핸드폰 액정에 떠오른 날짜를 확인할 용기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세상 사람 모두가 지금 내 심정을 읽는다면 미쳤다고 말하겠지만.... 내 생각이 맞다면, 내 가정이 맞다면, 지금 나는 어제로 돌아와 있어야 한다. Green - 1 Day 라는 설명이 맞다면 말이다....
나는 일부러 날짜를 확인할 수 있을만한 것은 무엇이든 눈에 담지 않은 채로 그 길로 집 밖으로 나섰다. 태양은 방금 전과 같은 위치에 있었다. 별로 달라진 것은 없었다. 심지어 길을 지나가고 있는 사람들도 내가 방금 전까지 창 밖으로 바라보던 사람들인 것만 같았다. 역시 내 착각이었을까? 내가 잠시 미친 망상에 빠졌던 걸까?
그 길로 헬스장으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서니 현주가 보인다.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 이미 소문을 낸건 아닐까? 하지만 내 얼굴을 발견한 현주는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했다. 입가엔 미소까지 띄고 있었다. 어제 내게 보여주었던 바로 그 고양이 같은 웃음이다.
"혀, 현주야..."
"안녕하세요, 오빠!"
어제 내 뺨을 때리고 욕을 내뱉고 모텔을 나간 현주가 내 앞에서 생글 웃으며 인사를 건네고 있다. 나는 도둑이 제발을 저리듯 현주의 시선을 피하며 탈의실로 몸을 피했다. 어제였다면 이 타이밍에 나는 현주에게 오늘 같이 저녁먹기로 한 약속 잊지 않았냐고 물었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묻지 않았다.
등 뒤로 현주의 의아한 시선이 날아와 꽂힌다. 자리를 피하려는 내 귓가에 현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오늘 우리 같이 저녁 먹기로 했던 날 아니었어요?"
"......."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 어...? 어... 그, 그랬지..."
"치. 오빠가 아무 말 없어서 까먹은 줄 알았네. 그럼 이따 운동 끝나고 봐요."
"어... 으, 응."
그리고나서 어떻게 들어왔는진 모르지만, 정신을 차리고보니 비틀대는 걸음으로 화장실 안에 들어와있었다. 화장실에 들어온 나는 변기를 부여잡고 토악질을 해댔다. 속이 울렁거렸다.
"우.. 우웨에에엑!"
토할 것도 없이 한바탕 신물만을 게워낸 나는 숨을 헐떡이며 변기통 옆에 주저앉았다. 등골이 오싹하고 온 몸엔 식은땀이 흐른다. 머릿 속에서는 도저히 믿기지 않지만 내게 이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나는 아무래도.... 도저히 믿기 힘든 물건을 손에 넣은 것 같다고.
*
"그럼 오빠는 OO대 다니는 거에요? 어쩐지 좀 똑똑해보이더라니. 거기 공부 잘해야 갈수 있잖아요."
"에이, 아냐. 그냥 하고싶은 전공 찾아서 가다보니까 가게 된거지. 현주는 XX대 다닌다며?"
"네, 완전 꼴통대학이에요. 호호."
"꼴통대학은 무슨~ 거기 여자애들 예쁘기로 유명하잖아. 솔직히 난 그 소문 안믿었는데 현주 너 보니까 사실인 것 같기도 하다."
"에이 참~ 갑자기 무슨 아부에요."
"아부 아냐. 나 처음 봤을때부터 너 되게 예쁘다고 생각했어."
"진짜요?"
"당연하지. 솔직히 말하면 나 너한테 호감 있어. 그러니까 이렇게 밥 먹자고 들이대는거지."
"장난으로 하는 얘기 아니죠?"
"물론이지. 이런 말을 장난으로 하겠어?"
이건 되는 분위기다. 어제와 같은 흐름이 이어진다. 별로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현주의 모습.
"그래서 말인데 현주야, 우리 좀더 가깝게 연락하고 지내도 될까? 난 아무에게나 대시하는 편이 아니지만 너한텐 정말 호감이 있거든. 네가 부담스럽지만 않다면 더 가깝게 지내보고 싶은데, 넌 어때?"
적당한 멘트. 나는 마치 대본을 그대로 베낀 듯이 어제와 똑같은 대사를 뱉는다.
"흠... 뭐, 나도 좋아요~ 나도 오빠 싫진 않으니까."
"하하, 그럼 우리 다음주에 영화나 같이 보러갈까?"
"히히~ 생각해보구요."
데킬라에 의한 취기까지 어제 느낌 그대로다. 다음 순서는 바를 나가서 택시를 타는 거다. 역시나 뒷좌석에 오른 현주는 곧이어 졸기 시작한다. 나는 택시를 돌려 어제와 똑같은 모텔촌에 내렸고, 현주를 부축하여 어제 보았던 모텔 이모로부터 똑같은 키를 받아 어제와 똑같은 모텔방에 들어섰다.
딱 하나, 다른게 있었다. 모텔 TV 위에 올려놓은 짧은 메모 한장.
[집이 어딘지 몰라서 어쩔 수 없이 이리로 왔어. 오늘은 여기서 자고 내일 일어나면 연락 줘, 오빠는 집에 들어가서 잘게. 내일 보자.]
메모를 남겨두고 나는 황급히 모텔 방을 나왔다. 뒤에서 새근거리는 현주가 진짜로 자고 있는건지 어제처럼 정신이 든 상태인지는 내 알바 아니었다. 나는 도망치듯 모텔을 뛰어나왔고, 그 길로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아까부터 내내 몸에 지니고 있었던 은색 초시계를 다시 한번 꺼내어 바라본다. 바라보고 또 바라본다. 그렇게 잠을 이루지 못하고 새벽까지 침대 위에서 뜬 눈으로 뒤척였다. 아침이 밝아올 무렵 현주로부터 문자 한통이 날아왔다.
[오빠, 일어나서 쪽지 봤어요. 고마워요. ^^ 오빠 보기보다 멋있는 사람이네요.]
현주의 문자가 찍힌 핸드폰을 멍하니 손에 들고 떠오르는 아침해를 바라보았다.
이건 뭘까?
꿈? 아니면 신의 장난?
- 다음 편에 계속 -
잘 부탁드립니다.
- 이 소설은 소.라.넷(sora.net) 작가 "상상의신비"가 연재 중인 작품입니다.
무단 불펌을 삼가해 주시길 부탁드리며, 퍼가시더라도 출처와 작가명을 꼭 남겨주십시오.
창작가들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이자 도리입니다.
* 1부 1장
"저기.. 서.. 서연아.."
"네?"
"그... 저기... 혹시 괜찮으면... 그러니까 잠시 시간 좀 내줄 수 있으면... 우리 잠시 얘기 좀 하고 갈래? 카, 카페 같은 데서 차 한잔 마시는 것도 좋구...."
병신새끼. 내 목소리지만 언제나처럼 한심한 목소리였다. 용기내서 말을 걸었지만 목소리는 덜덜 떨리고 있었고 내용도 술주정처럼 횡설수설이다. 역시나 서연이의 표정이 애매하게 일그러진다. 내 스스로에게 마음 속으로 욕을 내뱉어본다.
"아.. 그.. 그게... 약속시간에 늦어서... 빨리 가야 되요."
"응? 그.. 그래. 그럼 밑에까지만 같이 갈까?"
"아뇨.. 늦어서 뛰어가려구요. 아, 안녕히 가세요. 선배."
"저, 저기.. 그럼 다음에..."
하지만 말을 끝맺기도 전에 서연이는 이미 저만치 달려가고 있었다. 하.. 씨발년. 요며칠간 들이댔던 내 태도로 미루어보아 결정적인 대시를 하려는걸 저 년도 내심 눈치챈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노골적으로 피하다니... 얼굴 반반하면 사람 이렇게 무시해도 되는거냐? 이 씨발년아?
기분이 상해 캠퍼스에 굴러다니는 돌맹이를 툭툭차며 정문까지 내려왔다. 항상 이런 식이다. 나는 연애는 젬병이지만 꼴에 여자 보는 눈은 높았다. 그래.. 안다. 내 주제를 모른다는 걸. 하지만 어쩌겠는가. 눈에 안 차는 년들은 애초부터 만나고 싶지도 않았다.
주서연. 학과 3대 퀸카 중 하나라고 꼽히는 저 년 정도는 되야 모름지기 계집이라고 할 만하다. 내 꿈은 저런 년과 사귀어보는 것이다. 그리고 사귄 다음엔 마음껏 섹스도 해야겠지. 뭇 남자들이 한결같이 우러러보고 탐하는 멋진 유방과 엉덩이, 허벅지 등등을 내 마음대로 주무른다면 그 얼마나 기분 째지겠느냔 말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건 망상일 뿐...."
이번에도 실패다. 매번 그렇듯이, 주제를 넘을만큼 높게 잡은 목표치는 내가 손에 넣기엔 너무 높은 목표였고 오늘도 난 이렇게 찌질한 실패를 경험할 뿐이다. 그리고 자취방으로 돌아가 편의점에서 산 맥주캔을 따고 인터넷을 뒤져 최대한 서연이와 닮은 야동 배우를 찾아 딸딸이를 치면서 오늘의 실패를 위로하겠지.
"정말... 찌질한 인생이야."
난 잘 생기지도 않았고, 능력이 좋지도 않고, 돈이 많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난 주제넘을지언정 예쁜 여자를 좋아하고, 언젠가는 꼭 저런 죽이는 년을 사귀고 말 것이다. 아직 한번도 성공한 적은 없지만.... 죽기 전에 한번은 기회가 오겠지... 씨발.
- 아앙.. 아아앙.. 아앙!!
모니터 속의 여배우가 굵직한 좆에 박혀가며 신음소리를 지른다. 최대한 서연이와 비슷한 배우로 찾아본 것이다. 하지만 역시 이딴게 위로가 되지는 않는다. 현실 속의 서연이는 주서연일 뿐, 어디까지나 저런 야동 배우가 아니기 때문에.
"으윽... 씨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지를 흔들다보면 좆물은 솟아오르기 마련. 별 위로가 되지 않는 사정의 시간을 보낸 후 나는 좆물 흥건한 크리넥스를 변기에 흘려보낸다. 기분이 더러워 맥주를 더 마시려고 나는 슬리퍼를 신고 자취방 밖으로 나섰다.
"응? 옆집 여자잖아."
302호 여자가 마침 문을 열고 들어가는 모습이 보인다. 303호인 내 자취방의 바로 옆 세대이니 따지고보면 이웃인 셈이다. 저 여자가 이 시간에 집에 있는 모습은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아침 일찍 나가는 모습이나 밤 늦게 들어오는 모습 밖에 보지 못 했는데...
302호 여자는 어딘가 삭막한 구석이 있었다. 심지어 집 안 모습을 한번도 본적이 없음에도 대문에서 그 삭막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얼굴 생김새가 못 생긴건 아니었다. 오히려 몸매 등을 놓고 전체적으로 보면 그럭저럭 키도 길쭉하고 볼륨도 적당히 갖춘 적당히 수수한 인상의 미인이었다.
그럼에도 그녀의 입에서 사소한 인사 한마디 나오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고, 복도에서 마주쳐도 그녀의 눈은 늘 초점없이 무미건조했기 때문에 나는 이상하게도 그녀를 이웃이라고 여겨본 적이 없었다. 아무튼 그런 여자가 오늘은 드물게도 이른 저녁에 귀가하는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별로 놀랄 일은 아니었지만.
"과학자랬나...? 저 여자?"
예전에 자취방 계약을 할 때 집주인에게서 얼핏 듣기로는 옆집 여자가 무슨 이름 있는 과학자의 딸이라고 했다. 자기 아버지의 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하고 있다고.... 그리고 방 안에서 혼자 무슨 연구를 하는건지 가끔은 불꽃이 튄다거나 진동음이 울리거나 하는 작은 소란이 간간히 있곤 한다고 말해주었다. 처음엔 찝찝했지만 옆집에서 지내보니 의외로 그리 큰 소음공해가 아니었기에 나는 여태껏 그런대로 불만을 가지지는 않았다.
아무튼 302호 여자를 금새 기억에서 지우고 나는 편의점에서 맥주를 몇캔 사서 다시 3층으로 올라왔다. 내 방으로 들어가려고 복도를 걷는데, 나는 어쩔 수 없는 호기심에 302호 앞에 잠시 멈춰서고 말았다. 보려고 본 것이 아니라 우연히 보게 된 거지만 302호의 문이 완전히 닫히지 않고 살짝 열려있는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실틈처럼 작은 틈새였지만 문이 닫히지 않았다는걸 확실히 알 수 있었고, 나는 나도 모르게 살짝 귀를 가져다댔다. 어쩌면 이 괴팍하고 젊은 여성 과학자가 무슨 실험을 해대는건지를 엿들을 수도 있지 않은가?
- 쏴아아아....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집 안에서는 옅은 물줄기 소리만이 새어나왔다. 이 건물에서 한 학기를 보낸 나는 알 수 있었다. 이건 분명히 샤워기의 물소리. 안에서 샤워를 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 그럼 이 여자 지금... 문을 열어놓고 안에서 샤워하고 있다는거?"
뭔가 야릇한 19금 소설의 한장면을 보는듯한 느낌에 나는 왠지 모르게 흥분이 되었다. 아까 딸딸이로 좆물을 뺐음에도 불구하고 맥주를 이미 꽤 마셨기 때문인지 약간 흥분이 솟아올랐다. 젊은 여자가 겁도 없이 문단속도 하지 않고 샤워를 하고 있으니 어찌 야릇한 상황이 아니겠느냔 말이다.
"......."
숨 죽이고 잠시 문 밖에 그대로 몇 초간 얼어있었다. 집 안에서 특별한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물소리만 간간이 들려올 뿐.... 아무리 생각해도 이 집에 이 여자 말고 다른 사람이 산다는 말은 들어본 적 없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이 문을 살짝 열어도.... 그녀는 모를 것이다.
취기에 휩쌓인 나는 겁도 없이 묘한 흥분에 이끌려 살짝 문을 열었다. 아무 생각 없이 무단 가택침입을 행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원룸의 구조는 신발장 바로 너머에 화장실이 있는 형태였기 때문에 문을 열자마자 화장실의 문이 닫혀 있는 것을 알 수 있었고, 그 너머에서 들리는 물소리로 보아 그녀가 안에서 샤워를 하고 있음까지 알 수 있었다. 그 증거로 역시나 방 안에는 사람이 없었다.
- 꿀꺽~
침 넘어가는 소리가 크게 들린다. 젊은 여자 혼자 사는 방에 몰래 들어오다니.... 왠지 범죄라도 저지르고 있는 기분이잖아. (사실 범죄 맞다) 그런데 난 뭐하려고 여기 들어온거지? 뭘 어떻게 해보려는 생각도 없이 무작정 들어온 나는 괜시리 화장실 문에 귀를 대고 젊은 여자의 샤워 소리를 감상했다. 이대로 그녀가 나오면 꼼짝없이 범죄자가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나.. 나가자.."
샤워하는 모습을 훔쳐볼 수 있다면 여기 더 있을 이유가 되겠지만 어차피 문을 열어볼 수도 없는 일, 나는 조금 특별한 경험을 했다는 점으로 만족하기로 하고 등을 돌렸다. 하지만 걸음을 떼려는 순간 이상하게 시선을 잡아끄는 물체가 있었다. 그것은 화장실 입구에 놓인 그녀의 속옷 더미들... 정확히 말하면 그 더미들 한가운데서 빛나는 반짝이는 무언가였다.
"뭐.. 뭐지? 반지 같은 건가?"
자세히 보니 그건 금속이긴 했지만 장신구의 종류는 아니었다. 투박한 은색 빛깔로 빛나고 있는 그것은 언뜻 보기에는 시계처럼 보였다. 아주 오래전에나 쓰였을 법한 아날로그 초시계 말이다. 젊은 여자의 집에 함부로 들어와 금품에 허락 없이 손을 대고 있는 내 상황이 영락없는 도둑의 형색이라는걸 알았지만 왠지 나는 그 순간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손을 뻗어 그 시계를 쥐었다.
한주먹에 쥐어질만한 크기임에도 불구하고 꽤나 무게감이 느껴지는 그 금속 덩어리의 표면에 음각으로 새겨진 영문 스펠링이 보였다. 12자의 알파벳이 이렇게 아로새겨져 있었다.
- TIME REWINDER.
"타임... 리와인더? 메이커 이름인가?"
시계에 대해 무지한 나로서는 무슨 브랜드 상표겠거니 하며 그 투박한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별로 비싸 보이지는 않았지만 이런 골동품 느낌 나는 중세시대풍의 물건들은 종종 의외로 고가에 거래된다는 사실을 어디선가 줏어들은 것 같다. 그렇다면 이걸 훔칠 것이냐? 아니, 그랬다간 바로 건물에 경찰들이 들이닥칠텐데 굳이 절도범이 되고 싶을 리가....
"그.. 근데 왜 이렇게..."
왜 이렇게 눈을 떼기가 힘들지? 그 시계는 뭔가 시선을 잡아끄는 것만 같았다. 시침과 분침, 초침으로 보이는 3개의 바늘이 유리막 너머로 보인다. 하지만 시계는 수명이 다했는지 침이 움직이고 있지는 않았다. 잠시 살펴보던 나는 그 시계가 왜 이질감이 느껴지는지를 눈치챘다. 시침, 분침, 초침의 색깔이 그 골동품처럼 낡은 시계의 외관과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게도, 빨강, 초록, 파랑의 3원색으로 칠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투박한 은색의 금속물체에 세가지 원색으로 칠해진 침들이 박혀 있으니 뭔가 우스꽝스러워 보였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시계의 옆면에는 침을 조절하는 장치로 보이는 검은색 돌림쇠가 박혀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 돌림쇠를 두 손가락으로 집었다.
"그 때 알았다면 어땠을까?"
먼 미래에 나는 이 순간을 되돌아보면서 이렇게 자주 회상한다. 그 순간 그 돌림쇠를 돌리지만 않았어도, 아니, 그 시계를 얌전히 그 자리에 놓고 되돌아 나오기만 했어도 내 삶은 여전히 평범했을 것이다. 엄지와 검지로 그 시계의 가장 작은 바늘인 초침을 딱 한 칸 움직인 바로 그 순간, 내 삶이 완전히 바뀌었다.
"뭐지?"
물론 그 당시엔 아무 것도 몰랐다. 그저 지독한 정적만이 찾아왔다는걸 느꼈을 뿐이다. 하지만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바로 옆에서 얇은 문 하나 너머로 샤워소리가 들리고 있어야 하는데 갑자기 정적이라니.....
"잠... 깐...."
내가 느낀거라고는 마치 바이킹을 타듯이 아랫배가 울렁거리는 느낌이 한 차례 찾아왔다는 것 뿐이었다. 하지만 그 울렁이는 느낌이 지나가고나니, 거짓말처럼 옆에서 줄곧 들려오던 샤워소리가 멈추었다. 샤워소리가 멈춘 것 뿐만이 아니라, 인기척 자체가 아예 없어졌다.
여자가 샤워를 끝낸건가? 하지만 5분이 지나도록 안에서는 그 어떤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았다. 누가 말해주진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느낌이 이렇게 말해주고 있었다. 저 안에는 아무도 없다고.
- 똑똑.
미친놈처럼 나는 화장실 문을 노크했다. 남의 집에 무단침입해서 화장실 노크라니. 이 얼마나 경우없는 일인가. 하지만 더 놀랄 만한 일은 따로 있었다. 이상한 느낌을 이기지 못하고 화장실 문을 살짝 열어젖혔을 때, 화장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불도 켜져있지 않았다.
"뭐.. 뭐야..."
온몸에 소름이 돋은 나는 부리나케 그 집을 뛰쳐나왔다. 애초에 내가 물소리를 잘못 들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귀신에 홀린 듯한 기분에 나는 내 방으로 돌아와 문을 걸어잠그고 침대 위에 급히 걸터앉았다.
"이.. 이거.. 가져와 버렸는데..."
놀란 와중에 나는 그 초시계를 여전히 손에 쥐고 있었다. 타임 리와인더라는 이름이 새겨진 그 초시계는 여전히 시간이 멎어있었다. 내가 초침을 한칸 움직인 그 시간 그대로.....
"타임 리와인더라니...."
직역하면 "시간 되감개"라는 뜻이다. 순간 머릿속에 말도 안되는 한가지 가정이 스쳐 지나갔다. 이런 소재는 영화나 소설 등에서 간간히 쓰이곤 하지 않던가? 하지만... 하지만 이건 현실이다. 그런 말도 안되는 생각이....
"아무래도 맥주를 너무 많이 처먹었나보다. 빨리 정신차리고 이건 제자리에 다시 갖다놓자...."
술을 깨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심호흡을 하고 빨래를 건조하는 작은 베란다로 나갔다. 창문을 열고 공기를 크게 들이마셨다. 한 서너번 숨을 들이켰을까..... 나는 그 자세 그대로 그만 굳어버렸다.
"하늘 색깔이...."
창문 너머로 보이는 하늘 색깔은.... 아까보다 더욱 밝았다. 맥주를 사러 편의점에 들렀을 때 이미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는데 오히려 지금은 그때보다 해가 더욱 잘 보이고 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씨.. 씨발.. 말도 안돼..."
덜덜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집어보니 시간은 초저녁 무렵이었다. 아까 분명 이미 초저녁을 지나고 있지 않았던가? 맥주를 마셔서 확신은 못하겠다.... 하지만 휴대폰 액정에 떠오른 시간은 분명 아까 내가 시간을 확인했을 때보다 더 앞당겨져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미친놈처럼 방 안을 얼마나 서성거렸을까. 나는 이 기분 나쁜 물건을 제자리에 돌려놔야한다는 막연한 기분이 들어 조심스럽게 복도로 나섰다. 복도로 나서 옆집 여자의 대문 앞에 섰을 때 나는 문득 흘려보냈던 한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분명 아까 옆집 여자의 집 문을 열고 들어갔는데도.... 왠지 그 집에서 도망쳐나올 때는 문이 닫혀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문을 닫은 기억이 없는데 말이다. 게다가 곰곰히 생각해보니 문은 잠겨있기까지 했던 것 같다.
마치... 나도 그 여자도 "그 집에 들어오기 전"의 상태처럼 말이다.
"미친 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정신차려. 시계만 갖다놓으면 돼."
하지만 왠지 그 문을 열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 문을 여는 순간 뭔가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날 것처럼 불안했다. 이것도 술을 마셨기 때문일까?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아 그 집 앞에서 무려 40분을 서성거렸다.
인기척이 들린다. 문 앞을 서성이고 있던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고개를 들었다. 여자가 보인다. 그 옆집 여자가 계단을 올라와 복도를 걸어오고 있었다. 귀신이라도 되는 걸까? 역시 내가 샤워 소리를 잘못 들은건지도 모른다.
여자는 언제나처럼 초점없는 눈으로 복도를 걸어왔다. 엉거주춤 서있는 나를 바라보지도 않았다. 그녀가 자기 집 문을 열고 들어갈 때, 나는 그 모습이 아까의 모습과 하나도 다를 것 없이 똑같다는 느낌이 들어 등골이 오싹해졌다. 하지만 딱 하나 다른 점이 있었다. 그녀는 아까처럼 잠긴 문을 비밀번호로 열지 않았다. 그저 손잡이를 돌렸을 뿐이다.
문이 열려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 문은 아까 내가 도망쳐나올 때 열고 나왔으니까....
"......."
어정쩡한 자세로 서서 그녀가 문을 열고 들어가는 모습을 나는 가만히 보고 있었다. 문고리를 돌리던 그녀는 문이 잠겨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잠시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녀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처음으로 나는 그녀와 눈을 마주보았다. 초점 없는 눈에 아주 잠시 생기가 돌아온 것 같았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집 안으로 들어가버렸고, 나는 복도에 혼자 남게 되었다.
"어.. 어떡하지..."
복도에 남겨진 나는 다시금 굳게 닫힌 옆집 여자의 현관문 앞에서 똥개마냥 서성거렸다. 그리고 잠시 후, 굳게 닫힌 현관문 너머로도 희미하게 들을 수 있는 물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샤워소리... 그것은 아까 전에 들었던 것과 같은 바로 그 물줄기 소리였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한시간 정도를 더 복도에서 서성거리던 나는 다시 내 방으로 들어와 바닥에 주저 앉았다. 결국 나는 그 날 그 집에 시계를 돌려놓지 못했다. 그것은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9월 어느날의 일이었다.
*
내 기억은 그 후 세달 무렵 뒤로 이어진다. 학기가 끝나고 방학을 맞이했다. 그 후로 이상하게도 옆집 여자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가끔씩 옆 방에서 들려오는 치직거리는 소음 등을 보아 그녀가 어디로 떠난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이따금씩 절도범으로 경찰이 방에 들이닥치는 꿈을 꾸곤 했고, 심지어 지금도 그녀가 내 도둑질을 알아챌까봐 노심초사했다. 하지만 내 우려와는 다르게 그녀는 집안에서 뭔가 사라졌다는 생각 자체를 못 하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나는 이상하게 그 정체 모를 은색 시계를 내다버릴 수가 없었다. 옷장 서랍 구석에 깊숙히 처박아둔 그 은색 초시계는 몇달 동안 그 자리에 그대로 박혀 있었고,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이 지나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걸 버릴 수 없었을까? 어쩌면 그렇게 못하도록 정해져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현주씨~ 오늘 끝나고 같이 밥먹기로 한거 잊지 않았죠?"
그러던 사이 나에겐 새로운 목표, 즉 새로운 이상형이 생겼다. 수많은 실패를 딛고 이번에 내 눈 앞에 나타난 이 박현주라는 여성은 헬스장에서 만난 아주 매력있는 여자였다. 작달만한 키에 얼굴은 그냥저냥이었지만 애교가 듬뿍 묻어나는 말투와 재치있는 성격, 볼륨감 있는 몸매 등등이 끌렸다. 그동안 숱하게 차이고 실패해왔지만 이번엔 왠지 잘 될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난주에 헬스장에서 과감하게 그녀에게 대시한 결과 오늘 운동 끝나고 같이 식사하기로 약속을 잡은 것이다.
"네, 그래요. 저 샤워하고 올테니 이따가 입구에서 만나요~"
현주 씨는 고양이 같은 웃음을 잘 짓곤 했다. 나는 종종 그녀가 침대 위에서도 그렇게 고양이같은 표정을 지을까 하는 상상을 하곤 했다. 일이 잘 풀린다면 이번에야말로 그런 내 망상을 충족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현주 씨와 조용한 일식집에서 식사를 하는 동안 나는 되도록 많은 대화를 시도했고,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너무 껄떡댄다는 느낌을 주지 않도록 자제했다. 다행히 그녀는 내 말에 잘 반응하거나 웃어주었고, 나 역시 "뭔가 될 것 같다"는 느낌이 점점 더 확신에 차고 있었다.
"저어.. 현주 씨, 괜찮으시면 맥주 한잔 더 하고 들어가실래요? 2차도 제가 쏠게요."
순간 너무 들떠 약간 호구처럼 제안해버렸다. 하지만 현주 씨는 구김살 없이 살풋 웃으며 승낙했다.
"호호, 좋아요. 밥은 오빠가 샀으니 2차는 내가 낼게요. 그리고 말 편하게 해요. 나보다 오빠잖아요."
"하, 하하, 그럴까, 그럼?"
아... 정말 매력있는 년이다. 어쩌면 천사가 아닐까? 솔직히 좀 어장관리같은 느낌이 들긴 하지만 나는 이렇게 내 말에 잘 반응해주는 여자를 본 지가 너무 오래되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감격스러웠다. 이번에는 정말 잘해봐야겠다는 생각에 더더욱 의욕이 충만해졌다.
근처 조용한 스몰비어로 자리를 옮겨 현주와 가볍게 맥주 한잔을 즐겼다. 생각보다 술을 곧잘 마시는 현주의 주량 덕에 어느 정도 서로 취기가 오르자 3차까지 가게 되었다. 바로 자리를 옮길 때 즘엔 서로가 적당히 기분이 좋아져 있는 상태였고, 나는 어느정도 작업을 시작해도 좋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럼 오빠는 OO대 다니는 거에요? 어쩐지 좀 똑똑해보이더라니. 거기 공부 잘해야 갈수 있잖아요."
"에이, 아냐. 그냥 하고싶은 전공 찾아서 가다보니까 가게 된거지. 현주는 XX대 다닌다며?"
"네, 완전 꼴통대학이에요. 호호."
"꼴통대학은 무슨~ 거기 여자애들 예쁘기로 유명하잖아. 솔직히 난 그 소문 안믿었는데 현주 너 보니까 사실인 것 같기도 하다."
"에이 참~ 갑자기 무슨 아부에요."
"아부 아냐. 나 처음 봤을때부터 너 되게 예쁘다고 생각했어."
"진짜요?"
"당연하지. 솔직히 말하면 나 너한테 호감 있어. 그러니까 이렇게 밥 먹자고 들이대는거지."
"장난으로 하는 얘기 아니죠?"
"물론이지. 이런 말을 장난으로 하겠어?"
분위기가 뭔가 "이건 되는 분위기다" 라는게 느껴졌다. 꽤 노골적으로 대시를 했음에도 별로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여기서 너무 앞서나가지만 않고 깔끔하게 마무리를 하면 오늘은 대성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말인데 현주야, 우리 좀더 가깝게 연락하고 지내도 될까? 난 아무에게나 대시하는 편이 아니지만 너한텐 정말 호감이 있거든. 네가 부담스럽지만 않다면 더 가깝게 지내보고 싶은데, 넌 어때?"
적당한 멘트라는 생각이 들었다. 현주도 별로 거북해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그냥 잠시 속으로 뭔가를 재는 듯이 모호하게 웃고 있을 뿐이었다. 문득 현주의 봉긋한 가슴 볼륨과 운동으로 다져진 탄탄한 허벅지에 눈길이 갔다. 일이 잘 풀리면 저 볼륨감 있는 몸을 머지않아 내 맘대로 주무를 수 있을 것이다. 아.. 그런 일이 정말 일어날까?
"흠... 뭐, 나도 좋아요~ 나도 오빠 싫진 않으니까."
됐다! 이건 이제 반은 먹고 들어가는 게임이다. 나는 너무 들뜨지 않으려 애썼다. 바에 들어온 이후 데킬라를 좀 마셨더니 자꾸 취기가 올라 뭔가 실수를 할 것 같은 기분이 자꾸 들었다. 괜히 술김에 또 실수를 해서 90퍼센트 다 된 밥에 재를 뿌린다면 그보다 더한 참사가 어디있겠는가? 오늘은 이 정도만해도 충분히 대성공이라는 생각이 들어 나는 슬슬 자리를 마무리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하, 그럼 우리 다음주에 영화나 같이 보러갈까?"
"히히~ 생각해보구요."
크크.. 씨발년.. 귀엽기도 하지. 벌써부터 현주의 알몸을 볼 생각을 하니 아랫도리가 벌떡 서는 것만 같다. 그 상상이 이젠 현실로 이루어질지도 모르는 것이다. 나는 신사답게 현주를 데려다 주기로 하고 같이 바를 나왔다. 이럴때 자가용이 있다면 더욱 폼이 나겠지만 나는 일개 학생신분일 뿐이기에 아쉬운 대로 택시를 잡았다.
데킬라를 좀 마셨기 때문인지 현주는 뒷좌석에 타고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집이 대충 어느동 어디라고 들어두어서 우선 그쪽으로 향하긴 했지만 정확히 어디로 가야하는지는 몰랐다. 하지만 곯아떨어진 현주를 보니 왠지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이것은 필시 알콜에 의한 흥분이겠지만, 그걸 알면서도 그 흥분을 거부하기가 힘들었다.
"아.. 안되는데.. 술기운에 실수해서 재 뿌리면 안되는데..."
머리 속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달아오른 아랫도리는 뭔가 다른 요구를 해대고 있었다. 이것이 정상적인 판단이 아님을 알고 있었지만 결국 나는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현주 몰래 택시를 돌렸다.
"여기서 내릴게요, 아저씨."
택시를 세운 곳은 다름 아닌 모텔촌. 조심스럽게 현주를 부축해 내릴때까지도 현주는 세상 모르게 잠들어 있었다. 두방망이 치는 심장을 억눌러 진정시키며 나는 머릿 속을 빠르게 팽팽 굴렸다. 그래봤자 술에 절어 이성이 마비된 머리였지만 말이다.
"그래.. 현주가 깨어나질 못해서 집을 알아낼 수가 없었어. 현주가 일어나면 그렇게 설명하면 되지. 길바닥에서 재울 순 없잖아. 그래, 현주가 못 일어났기 때문이야. 그렇게 변명하면 돼. 일단 모텔에만 들어가면...."
일단 모텔에만 들어가면 끝이다. 머릿 속에는 그러한 공식이 막연히 세워지고 있었다. 눈 앞에 보이는 모텔의 빨간색 간판이 내게 손짓하는 듯 했다. 저곳을 넘어 들어가기만 하면 내 소원이자 꿈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이게 무모한 짓임을 알면서도 도저히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다.
생각해보라. 지금 아니면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오겠는가. 일이 잘 풀려서 현주를 꼬신다한들 따먹을 수 있다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꿈에 그리던 퀸카와의 섹스가 코앞이다. 망설일 이유가 없다.
"이.. 이모. 방 하나만 주세요."
"쯧쯧. 아가씨가 많이 마셨나보네. 조용한 방으로 드릴게."
모텔 이모의 은근한 웃음을 보니 오늘이 바로 퀸카와 섹스하는 날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엘리베이터를 오르는 순간이 왜 이렇게 길게 느껴질까.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나는 다급히 현주를 침대 위로 던지다싶이 눕혔다. 그리고 짐승처럼 그 위로 몸을 날렸다.
"꺄아악!!"
그 순간 터져나오는 찢어질 듯한 비명소리.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침대 위로 뛰어들려던 그 자세 그대로 굳어졌다. 현주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얼이 빠진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람?
"혀.. 현주야. 일어났어?"
"오빠.. 지, 지금 뭐하는 짓이에요?"
씨발년이 보면 모르나... 모텔에 들어왔으면 척이지. 눈치껏 그냥 계속 자는척이라도 하고 있던가... 나는 어정쩡한 자세로 어설프게 웃으며 자세를 바로 잡았다.
"아.. 아니.. 네가 일어나질 못하길래... 집도 모르고... 그래서 편하게 자라고... 옷이라도 좀 벗겨줄... 아, 아니, 양말만 벗겨주려고 했는데...."
뭔 소리를 하는지 주절거리는 내 얼굴을 싸늘하게 올려다보면 현주가 서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오른손을 들어 크게 휘둘렀다. 철썩 소리가 나면서 내 고개가 반대편으로 돌아갔다.
"쓰레기 같은 새끼... 실망이야."
현주는 그렇게 욕지거리를 내뱉고 방을 나가버렸다. 뺨을 맞은 나는 어안이 벙벙해서 그 자리에 그대로 잠깐 굳어져있었다. 그 후로 어떻게 자취방까지 돌아왔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다음날 나는 자취방 침대에서 부스스 몸을 일으키자마자 머리를 마구 쥐어뜯으며 절규했다. 욕을 쩌렁쩌렁 내뱉으며 광분을 해댔다.
"씨발! 씨발! 씨발!!!!"
어째 일이 잘 풀린다 싶더니, 이렇게 또 불길한 예감이 들어맞아 다 된밥에 재를 뿌리고 말았다. 왜 나는 이렇게 찌질한걸까? 내 인생은 왜 이렇게 찌질하지? 그놈의 술기운만 아니었어도!
"씨발.. 어떡하지? 이제부터 현주 그 년 얼굴 어떻게 보지? 아니, 그게 문제가 아냐.... 이년이 작정하고 소문이라도 내는 날엔... 어쩌면 성추행으로 감방까지 가는거 아냐?"
술이 깨고 나니 이성적인 판단들이 머릿 속에 떠오르면서 나는 금새 무서워졌다. 망신을 당하는 것은 기본이요, 어쩌면 큰 댓가를 치르게 될지도 모른다. 순간 머릿 속이 새햐얀 백지장으로 변하면서 나는 그만 맥이 빠졌다. 백지장으로 변한 머릿 속에 처음으로 떠오른 생각은 이거였다.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아마 그 생각과 동시에 옷장 구석에 오래도록 처박아뒀던 무언가가 함께 떠오른 것은 결코 우연은 아니었을 것이다. 인간은 미지의 현상 앞에 더없이 무지하지만 적어도 한번 경험을 해본 이상 완전히 무지하다고 볼 수는 없으니 말이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애써 잊어버리기 위해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오랜 시간 숨겨두었던 것을, 그러나 한편으로는 결코 버릴 수는 없었던 그 미지의 물건을 꺼내었다. 은백색의 투박한 아날로그 초시계.
아마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뾰족한 해결책이 없으니 그런 헛된 망상에 의지하게 된 것이겠지만 나는 근 4개월만에 내가 옆집 여자로부터 훔쳤던 그 초시계, "타임 리와인더"를 옷장에서 꺼냈다. 그것은 내가 처음에 옷장에 숨겼던 그 모습 그대로, 심지어 시계바늘 역시 그 자리에 똑같이 고정된 채로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오래간만에 꺼내든 절도의 결과물을 손에 쥐니 예전에 느꼈던 그 미스터리한 기분과 그 날의 오싹한 기분이 되살아나는 듯 하여 기분이 섬뜩했다. 하지만 그런 신비감이 오히려 지푸라기라도 잡아보자는 내 절박함을 부채질해 주었다. 나는 이전보다 더욱 자세히, 더욱 세밀하게 그 물건을 이리저리 살폈다. 자세히 보니 시계 뒤편에 덮개를 분리할 수 있는 홈이 있었다. 일반 시계로 따지면 배터리를 교체하기 위한 기능이겠지만 형태로 보아하니 이 초시계의 경우는 보다 손쉽게 열고 닫을 수 있게끔 조인트와 홈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이건...."
딸칵 소리와 함께 초시계의 뒷면을 열었다. 조잡한 기계장치들이 보이는 시계의 뒷면과 함께 열려진 케이스 백의 반대면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의 눈으로는 도저히 알아보기 힘든 낙서같은 것들이 음각으로 반대면에 새겨져 있는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나는 그 길로 곧장 밖으로 나가 돋보기를 하나 사왔다.
알아보기 힘든 그 음각의 문자들을 렌즈로 확대시켜보니 나는 그것이 영문 글자를 정밀하게, 아주 정밀하게 새겨놓은 것이라는걸 알 수 있었다. 그 영문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Blue - 1hour // Green - 1Day // Red - 1year]
[The price is your lifespan]
[Be careful surrounding object when use]
돋보기를 썼음에도 알아볼 수 없는 문장들도 있었고, 너무 자잘하게 새겨진 탓에 처음 세 문장을 해석하는 것도 간신히 해냈다. 우선 읽어낸 영문자들을 대충 해석한다면 이랬다.
[파랑 - 1시간 // 초록 - 1일 // 빨강 - 1년]
[가격은 당신의 수명이다]
[사용시 주변 물체를 주의하라]
"대체 이게 다 무슨 소리야?"
이 정도 해놨으면 이건 더이상 가벼운 장난질이라고 의심하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새겨진 음각 문자들의 의미를 파악하기 힘든건 둘째치고 시계 내부의 기계장치들은 척 봐도 일반 시계의 기능을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문득 지금 내 모습을 다른 사람들이 본다면 무슨 소리를 할까 싶었다. 내가 생각해도 지금 내 모습이 미친놈같은데.... 그래도 밑져야 본전이잖아?
"에라이 모르겠다 씨발!"
나는 홧김에 초록색 분침을 옆으로 한칸 옮겼다. 지난번에 건드린 파란색 초침과는 다른 바늘이었다. 그것이 분침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건 좀 후의 일이지만, 어쨌든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세 개의 조임쇠 중 가운데 조임쇠를 엄지와 검지로 살짝 돌린 후였다.
그리고 그 순간, 세상이 울렁였다.
*
절벽에서 떨어지는 것 같은 아찔한 울렁임.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몸을 일으켰다. 언제부턴지 모르겠지만 바닥에 쓰러져 있었던 것이다. 어리버리하게 몸을 일으켜 고개를 돌려보았다. 차마 핸드폰 액정에 떠오른 날짜를 확인할 용기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세상 사람 모두가 지금 내 심정을 읽는다면 미쳤다고 말하겠지만.... 내 생각이 맞다면, 내 가정이 맞다면, 지금 나는 어제로 돌아와 있어야 한다. Green - 1 Day 라는 설명이 맞다면 말이다....
나는 일부러 날짜를 확인할 수 있을만한 것은 무엇이든 눈에 담지 않은 채로 그 길로 집 밖으로 나섰다. 태양은 방금 전과 같은 위치에 있었다. 별로 달라진 것은 없었다. 심지어 길을 지나가고 있는 사람들도 내가 방금 전까지 창 밖으로 바라보던 사람들인 것만 같았다. 역시 내 착각이었을까? 내가 잠시 미친 망상에 빠졌던 걸까?
그 길로 헬스장으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서니 현주가 보인다. 순간 심장이 철렁했다. 이미 소문을 낸건 아닐까? 하지만 내 얼굴을 발견한 현주는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를 했다. 입가엔 미소까지 띄고 있었다. 어제 내게 보여주었던 바로 그 고양이 같은 웃음이다.
"혀, 현주야..."
"안녕하세요, 오빠!"
어제 내 뺨을 때리고 욕을 내뱉고 모텔을 나간 현주가 내 앞에서 생글 웃으며 인사를 건네고 있다. 나는 도둑이 제발을 저리듯 현주의 시선을 피하며 탈의실로 몸을 피했다. 어제였다면 이 타이밍에 나는 현주에게 오늘 같이 저녁먹기로 한 약속 잊지 않았냐고 물었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묻지 않았다.
등 뒤로 현주의 의아한 시선이 날아와 꽂힌다. 자리를 피하려는 내 귓가에 현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오늘 우리 같이 저녁 먹기로 했던 날 아니었어요?"
"......."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 어...? 어... 그, 그랬지..."
"치. 오빠가 아무 말 없어서 까먹은 줄 알았네. 그럼 이따 운동 끝나고 봐요."
"어... 으, 응."
그리고나서 어떻게 들어왔는진 모르지만, 정신을 차리고보니 비틀대는 걸음으로 화장실 안에 들어와있었다. 화장실에 들어온 나는 변기를 부여잡고 토악질을 해댔다. 속이 울렁거렸다.
"우.. 우웨에에엑!"
토할 것도 없이 한바탕 신물만을 게워낸 나는 숨을 헐떡이며 변기통 옆에 주저앉았다. 등골이 오싹하고 온 몸엔 식은땀이 흐른다. 머릿 속에서는 도저히 믿기지 않지만 내게 이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나는 아무래도.... 도저히 믿기 힘든 물건을 손에 넣은 것 같다고.
*
"그럼 오빠는 OO대 다니는 거에요? 어쩐지 좀 똑똑해보이더라니. 거기 공부 잘해야 갈수 있잖아요."
"에이, 아냐. 그냥 하고싶은 전공 찾아서 가다보니까 가게 된거지. 현주는 XX대 다닌다며?"
"네, 완전 꼴통대학이에요. 호호."
"꼴통대학은 무슨~ 거기 여자애들 예쁘기로 유명하잖아. 솔직히 난 그 소문 안믿었는데 현주 너 보니까 사실인 것 같기도 하다."
"에이 참~ 갑자기 무슨 아부에요."
"아부 아냐. 나 처음 봤을때부터 너 되게 예쁘다고 생각했어."
"진짜요?"
"당연하지. 솔직히 말하면 나 너한테 호감 있어. 그러니까 이렇게 밥 먹자고 들이대는거지."
"장난으로 하는 얘기 아니죠?"
"물론이지. 이런 말을 장난으로 하겠어?"
이건 되는 분위기다. 어제와 같은 흐름이 이어진다. 별로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현주의 모습.
"그래서 말인데 현주야, 우리 좀더 가깝게 연락하고 지내도 될까? 난 아무에게나 대시하는 편이 아니지만 너한텐 정말 호감이 있거든. 네가 부담스럽지만 않다면 더 가깝게 지내보고 싶은데, 넌 어때?"
적당한 멘트. 나는 마치 대본을 그대로 베낀 듯이 어제와 똑같은 대사를 뱉는다.
"흠... 뭐, 나도 좋아요~ 나도 오빠 싫진 않으니까."
"하하, 그럼 우리 다음주에 영화나 같이 보러갈까?"
"히히~ 생각해보구요."
데킬라에 의한 취기까지 어제 느낌 그대로다. 다음 순서는 바를 나가서 택시를 타는 거다. 역시나 뒷좌석에 오른 현주는 곧이어 졸기 시작한다. 나는 택시를 돌려 어제와 똑같은 모텔촌에 내렸고, 현주를 부축하여 어제 보았던 모텔 이모로부터 똑같은 키를 받아 어제와 똑같은 모텔방에 들어섰다.
딱 하나, 다른게 있었다. 모텔 TV 위에 올려놓은 짧은 메모 한장.
[집이 어딘지 몰라서 어쩔 수 없이 이리로 왔어. 오늘은 여기서 자고 내일 일어나면 연락 줘, 오빠는 집에 들어가서 잘게. 내일 보자.]
메모를 남겨두고 나는 황급히 모텔 방을 나왔다. 뒤에서 새근거리는 현주가 진짜로 자고 있는건지 어제처럼 정신이 든 상태인지는 내 알바 아니었다. 나는 도망치듯 모텔을 뛰어나왔고, 그 길로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아까부터 내내 몸에 지니고 있었던 은색 초시계를 다시 한번 꺼내어 바라본다. 바라보고 또 바라본다. 그렇게 잠을 이루지 못하고 새벽까지 침대 위에서 뜬 눈으로 뒤척였다. 아침이 밝아올 무렵 현주로부터 문자 한통이 날아왔다.
[오빠, 일어나서 쪽지 봤어요. 고마워요. ^^ 오빠 보기보다 멋있는 사람이네요.]
현주의 문자가 찍힌 핸드폰을 멍하니 손에 들고 떠오르는 아침해를 바라보았다.
이건 뭘까?
꿈? 아니면 신의 장난?
- 다음 편에 계속 -
잘 부탁드립니다.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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