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타임 리와인더 (Time Rewinder)
- 이 소설은 소.라.넷(sora.net) 작가 "상상의신비"가 연재 중인 작품입니다.
무단 불펌을 삼가해 주시길 부탁드리며, 퍼가시더라도 출처와 작가명을 꼭 남겨주십시오.
창작가들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이자 도리입니다.
* 1부 2장
만약 당신에게 하루아침에 시간을 되감을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면 당신은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이를 두고 누군가는 전지전능한 능력이라 말할 것이고, 또 누군가는 미스터리한 능력이라 말할 것이다. 또한 누군가는 두려운 능력이라 말하기도 하겠지.
모두 맞는 말이다. 이 능력은 전지전능하며, 미스터리하고, 두려운 것이다. "말도 안된다"고 하는 말은 의미가 없었다. 이것은 현실이었기에.
우리는 종종 영화나 소설에서 시간을 부릴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가공 인물을 보며 괜한 망상을 한다. 캬, 저런 능력만 있어도! 과거로 돌아가 새 삶을! 복권으로 일확천금을! 남들이 모르는 미래의 정보로 엘리트의 인생을!
그 얼마나 달콤한 상상들인가. 하지만 막상 그런 능력을 가진 수수께끼의 물체를 소유하게 되고나니, 나는 그런 달콤한 상상들을 마음껏 현실로 이루어내기 이전에 두려워졌다. 이것은 허구의 세계가 아닌 현실, 즉 결과와 책임이 따르는 엄격한 인과의 세계다. 무엇인지도 모를 능력을 남발해서 혹시 모를 재앙이 따를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런 내 생각은 헛된 기우가 아닐 것이다. 나는 타임 리와인더의 능력을 한번 피부로 실감한 이후로 더욱 그 시계를 면밀히 관찰하기 시작했고, 특히 덮개 뒷면의 음각 문자들을 돋보기로 읽어내고 해석하는 작업에 몰두했다.
[The price is your lifespan]
나의 관심을 가장 강하게 끌어당겼던 설명은 바로 이것이었다. 가격은 당신의 수명이다. 가격... 가격이라는 말의 의미는 누가 보더라도 이 시계를 사용하는 댓가임에 틀림 없었다. 누가 보면 무슨 헛소리냐고 나를 꾸짖겠지만 이 시계의 능력을 눈으로, 피부로 확인한 이상 나로서는 이 말을 믿어야만 했다.
이 시계를 사용하는 댓가는 바로 나의 수명. 그렇다면 어쩌면 저번의 그 일로 인해 나의 수명은 벌써 감소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진짜로 줄어들었다면 도대체 얼마나 줄어든 걸까? 단순히 시간을 되돌린 만큼 비례하여 줄어드는건가? 아니면 수명과 되돌린 시간의 단위를 계산하는 공식이라도 있는건가?
머릿 속이 복잡했지만 대충 이제 그 설명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파란 바늘은 가장 작고 가느다란 바늘, 즉 일반시계의 초침이다. 이것은 1hour 즉, 한시간 단위로 시간을 되돌리는 기능을 한다. 그리고 초록 바늘은 분침이자 1day, 하루를 되돌리는 기능을 한다.
현주와의 해프닝을 되돌리기 위해 내가 우연히 건드린 이 초록바늘은 정확히 하루, 즉 24시간을 되돌렸으며 그 결과 나는 정확히 하루 전의 그 시간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현주와 저녁을 먹기도 전의 바로 그 시간으로 말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하나, 빨강 바늘이 의미하는 바는? 뻔하다. 1year. 무려 1년을 되돌리는 것이다.
1시간, 1일, 1년. 각각의 단위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기능을 이 시계는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정말이지.... 내가 겪었지만서도 너무도 비현실적인 얘기다.
"그렇다면 이 문장이 의미하는건 뭐지....?"
[Be careful surrounding object when use]
사용시 주변 물체들을 주의하라니..... 게다가 음각으로 새겨진 영문자들은 그 뒤로도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갈수록 너무도 세밀하게 새겨진 문자들은 웬만한 돋보기로는 이제 읽어낼 수가 없었고, 나는 어쩔 수 없이 더 정밀한 렌즈를 구하기 전까지 그 문장의 해석을 보류해야만 했다.
"이 모든 설명과 기능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옆집 여자랑 이야기를 해야만 해.... 하지만 그래서는...."
바보가 아닌 이상 이 시계가 어떻게 그런 기상천외한 일을 해낼 수 있는 것인지, 그리고 나머지 기능들은 무엇인지를 밝혀내기 위해서는 그 정체불명의 옆집 여자와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그것은 곧 내가 도둑질을 했음을 스스로 시인하는 꼴이며, 나아가서는 이 타임 리와인더를 다시 돌려줘야 함을 의미한다.
물론 이것은 내 물건이 아니지만.... 그래도, 그래도 이런 경의적인 물건을 한번 손에 넣은 이상 이것을 도로 포기한다는 것은 설사 성자라고 해도 힘든 일이었다. 게다가 지금까지는 별다른 문제 없이 잘 숨겨왔지 않은가? 옆집 여자는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고, 심지어는 이것을 도둑맞았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지내는 듯 한데 내가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면 옆집 여자와 만나지 않고 스스로 이 시계의 원리나 사용법을 알아내야한다는 건가?
"불가능해... 내가 과학자도 아니고."
애초에 이게 과학의 산물이긴 한건가? 과학기술의 발전이 아무리 극한까지 달했다 하더라도 이런 물건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타임머신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시간축과 공간축을 해석하면 시간여행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라고 했다지만 나로서는 뜬구름 잡는 별세계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도대체 이 물건은 뭐란 말인가....?
"아무튼 지금으로선 숨길 수 밖에 없어...."
그 이후로 나는 타임 리와인더를 몸에서 떨어뜨려놓지 않고 항상 지니고 다니게 되었다. 신기하게 그 이후로도 바깥에서 옆집 여자와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알 수 없는 불안함에 그 물건을 결코 함부로 사용하지 않았고, 늘 몸에 지니고 다니기만 했다. 그렇게 겨울방학은 지나갔고, 나는 개강 이후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
캠퍼스에는 아직 겨울바람의 쌀쌀함이 감돌고 있었지만 한편으론 봄의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개강 첫날 학교에 온 나는 우연히 상경대 입구에서 서연이와 마주쳤다.
"엇... 서연아."
"서, 선배."
지난 학기에 보기좋게 나를 퇴짜놓은 서연이. 나는 서연이에게 그 이후로도 숱하게 구애를 했지만 내 찌질한 대시를 그녀는 매번 가차없이 잘라냈고, 급기야 그녀는 이제 나를 불편해하여 누가 봐도 확연하게 나를 피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주기 시작했다.
"아, 안녕? 하하."
"네에.. 저, 제가 수업이 급해서... 이만."
"......."
웃기고 있다, 씨발년이. 지금이 수업 시작할 타이밍도 아닌데 수업이 급하긴. 아무리 내가 들이댔기로소니 이렇게까지 사람 개무시하며 무안을 줘야할까? 요새는 얼굴 예쁘고 성격 좋은 여자들도 많다던데 저 년은 이제보니 자기 얼굴 좀 반반하답시고 도끼병에 걸린 것만 같다. 문득 현주 생각이 났다.
그래, 서연이 년에 비하면 현주가 백배 낫지. 현주는 그 때 내가 시간을 되감아 그녀와의 해프닝을 수습한 이후로 오히려 내게 호감을 갖게 된 모양인지 우리는 방학 내내 소위 말하는 "썸을 타는" 사이로 잘 지내왔다. 하지만 나는 지난번과 같은 실수를 피하고자 결코 경거망동하지는 않았는데, 그것은 피치 못할 사태로 인해 뭐가 뭔지도 모른채 다시 한번 타임 리와인더를 사용해야 할 경우를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다음 주에 시내에서 데이트나 하자고 해야겠다. 정석대로 차근차근 밟아나가는거지 뭐."
굳이 실패한 서연이년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다. 우선 현주와의 관계부터 차근차근 발전시켜 나가면 된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고, 누굴 만나든 퀸카랑 만나서 즐기면 되는거 아니겠는가. 어느새 나는 그 날의 불가사의한 두려움을 많이 잊어버리고 일상으로 대충 돌아온 듯 했다.
수업이 끝나고 나는 곧장 자취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걸음을 서둘렀다. 요새 내 관심은 온통 타임 리와인더를 관찰하고 분석하는 일에 쏠려있었다. 분석을 한다고 해서 뭔가 얻어지는게 있는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사실 관찰이라곤 했지만 더 면밀히 살펴보는 일은 요새 거의 없고, 그보다는 만약 이 신비한 시계의 사용법을 제대로 알아낸다면 그 능력을 어떻게 활용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일지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자주 갖는 편이었다. 그런 상상은 아무리 해도 질리지 않는 법이니까.
"성진 선배 말이야... 너무 기분 나쁘지 않아?"
하지만 자취방으로 돌아가려던 내 상쾌한 기분을 삽시간에 망쳐놓는 불쾌한 해프닝이 예상 못한 곳에서 터지고 말았다. 도서관에서 혹시 도움이 될까 싶어 시간여행 이론에 대한 에세이 책을 하나 빌려 돌아가려고 책을 고르고 있던 참이었다. 맞은편 책장 너머에서 들려오는 여학생의 목소리가 내 주의를 끌었다.
그 목소리에 신경이 쓰인 이유는 첫 번째로 방금 나온 이름이 내 이름과 같았기 때문이고, 두 번째로 그 목소리가 왠지 낯익은 목소리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기척을 숨긴채로 슬쩍 옆으로 돌아 책장 너머에 있는 여학생이 누군지 확인했다. 바로 서연이었다.
"아까도 잠시 마주쳤는데.... 기분 나쁘게 웃는 꼬락서니하며... 진짜 왜 그렇게 껄떡대는지 모르겠어."
"그 선배 요새도 너한테 찝적거리고 그래?"
"몰라... 방학 때는 얼굴 안봐서 좋았는데 개강 첫날부터 똥 밟았지 뭐야... 휴학이나 해버리지 왜 또 이번학기에도 돌아다니는거야? 피해다니기도 피곤한데...."
책장에 몸을 숨기고 엿듣고 있었던 내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바보가 아닌 이상 내 이야기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저 씨발년이 진짜.... 내가 자기한테 뭘 그렇게 잘못했단 말인가? 좀 찌질하게 굴었기로소니 저렇게까지 욕을 먹어야 할 이유가 된단 말인가?
"하여튼 정말 기분나쁘긴 해.. 그 인간."
"야야, 됐어. 설마 그렇게 까여놓고 또 너한테 그럴까봐. 잊어버려."
"휴...그래. 잊어버리자."
"그건 그렇고 너 지환 오빠랑 사귄다는거 사실이야?"
"응? 아냐, 사귀긴. 아직 그냥 썸타는거지 뭐."
"기지배, 너 나한테까지 뻥치면 죽어. 아직이란 말은 조만간 뭐가 있을거라는 얘기 아냐."
"야야, 조용히 해. 누구 듣겠다. 나중에 말해줄게."
화나는건 화나는거고 그 와중에도 나는 그 중요한 뉴스를 놓치지 않았다. 서연이가 지환이 녀석이랑 사귄다고? 지환이는 학과 내에서 킹카 후보로 자주 언급되는 한 학번 아래의 후배였다. 서연이가 우리과 대표 퀸카라면 지환이는 우리과 대표 킹카라고 할 수 있었다. 학과를 대표하는 선남선녀인 둘 사이에 뭔가 스캔들이 흐르고 있다는 소문이 지난 학기부터 종종 나오곤 했었다. 서연이가 내 대시를 가차없이 걷어차고나서 조금 지난 후의 일이었다.
소문 만들어내기 좋아하는 학과 여자애들의 가십거리일 뿐인줄 알았는데, 설마 그 소문이 사실이었던걸까? 씨발년... 남자한텐 관심없다면서 도도한 척은 혼자 다하더니 역시 결국 지 수준에 맞는 곱상한 새끼 만나서 놀겠다 이거였잖아? 자기 입으로 썸이라는 얘기까지 했으니 뭔가 있기는 있다는 얘기였다.
"주서연... 이거 생각할수록 정말 개같은 년이네."
서연이년에게 느끼는 분노는 질투만은 아니었지만, 그 질투가 그렇지 않아도 아니꼽던 그 년에 대한 감정을 부채질한 것은 사실이었다. 지난 학기에 그 지랄을 했으니 뒤에서 친구들끼리 날 조롱할거란 생각을 하기는 했었지만 저렇게 험담까지 하고 다닐 줄은 몰랐다. 그래도 지 좋다고 쫓아다닌건데 이건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가 아니잖아. 설마 저렇게 못되먹은 년일줄 내가 알았겠냔 말이다.
"두고 보자, 이 년..."
그 후 내 분노가 폭발하게 된 계기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
"선배, 개총 행사 오실거죠?"
"글쎄, 별 생각 없는데..."
"에이, 그러지말고 오셔서 놀다가세요. 예비역 선배들이 좀 계셔줘야 자리가 모양새도 나고 그러죠."
이번 년도에 학회장이 된 홍규 녀석은 나보다 두학번이 밑이다. 말은 좋지만 결국 이녀석이 고학번 선배들을 초대하는 이유는 결국 술자리에서 고학번들이 씀씀이좋게 한푼씩 술값 좀 보태달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속이 뻔히 보였지만 그래도 어찌됐든 아무도 관심가져주지 않는 학교에서 이렇게 찾아주는 놈이 있다는게 고마울 정도로 내 학교 생활은 삭막했다.
"알았어, 시간 보고 갈게."
"와우, 감사합니다. 그럼 이따 뵈요!"
어차피 개총 행사는 볼 것도 없고, 그나마 관심 있는게 뒤풀이인데 이 나이 먹고 뒤풀이가봐야 여자 후배들이 놀아주는 것도 아니니 적당히 안주나 집어먹다 빠져나와야겠다 생각하며 나는 뒤풀이 장소인 술집으로 향했다. 새학기라 그런지 새내기들을 포함해서 학생들이 바글바글했다. 하지만 역시나 나와 놀아줄만한 녀석들은 보이지 않았고, 나는 자연스럽게 나와 비슷한 신세인 늙다리 고학번들의 테이블에 끼어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자자, 존경하는 선배님들, 그리고 사랑하는 학과 동생분들! 잠시 주목 좀 해주십시오."
술자리가 무르익어가고 여기저기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되어갈 무렵, 누군가가 소란을 뚫고 이목을 집중시켰다. 테이블 한 가운데에서 누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학과 사람들을 향해 연설을 하듯 소리를 높이고 있었는데, 학회장인 홍규 녀석이 아니라 바로 지환이였다.
"쟤 지환이잖아."
"뭐하려고 저래?"
고학번 예비역 테이블에서 아니꼬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역시 기생오라비처럼 생긴 녀석들은 주위의 시샘을 받기 마련이다. 나 또한 불과 며칠전에 도서관에서 들은 이야기가 생각났다.
"오늘 이렇게 사랑하는 OO과 식구들이 한자리에 모였으니 이 자리에서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실은 작년 12월부터 저 임지환과 여기 주서연은 서로 교제를 해왔습니다. 그동안 비밀로 하고 사귀었지만 이제 우리과 공식 커플이 되고 싶은 마음에 오늘 여러분들 앞에서 공개하고 싶었습니다. 좀 갑작스럽지만 다들 많이 축하해주세요, 하하하."
그러자 미리 바람잡이라도 심어놓은듯 여기저기서 환호와 박수갈채가 튀어나왔다. 몇몇 시샘하는 이들이 있긴 했어도 학과 대표 킹카와 퀸카가 사귀고 있다는 이 빅뉴스에 사람들은 열광하며 함성을 질렀다. 나를 포함한 몇몇 고학번들은 저게 대체 뭐하는 꼴값인가 생각했지만 후배들, 특히 어린 새내기들은 이런 열애설과 같은 핫이슈에 특히나 더 열광하는지 꺅꺅거리고 소리를 지르는등 술자리 분위기는 한층 더 후끈 달아올랐다.
"그나저나 사실이었구나... 주서연 이 씨발년...."
괜스레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하긴 그래, 나 같은 새끼보단 저런 곱상하게 생긴 놈이 더 좋은건 당연하겠지. 하지만 뒤에서 욕은 하지 말아야 할 거 아냐. 멀찍이 바라보니 지환이 놈 옆에 앉은 서연이는 주위에서 쏟아지는 박수갈채와 놀림에 얼굴을 붉히며 지환이 놈에게 핀잔을 주고 있었다.
"그런걸 왜 굳이 사람들 앞에서 말해, 바보야!"
"하하하, 왜, 좋잖아."
"기집애 너! 사귀는거 아니라더니 거짓말이었지!"
"으, 미안해, 연주야. 부끄러워서 그랬지."
"야, 괘씸해서 안되겠다. 벌주부터 마셔, 이 나쁜년!"
저 테이블은 거의 무슨 축제분위기였다. 나는 속이 쓰리고 배알이 꼴려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이내 느껴지는 누군가의 시선에 다시 그 테이블로 시선을 돌렸다. 지환이 놈이 멀리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순간 지환이 녀석이 나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기분 나쁘게 히죽 웃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야?"
의아한 내가 지환이를 노려보았지만 녀석은 이미 고개를 돌린 후였다. 나는 찝찝한 마음을 뒤로하고 왠지 기분이 잡쳐 더이상 술자리에 있을 이유를 느끼지 못하고 자리를 뜰 채비를 했다.
"어라? 선배, 벌써 가시려구요?"
"그래. 갈게."
"에이, 조금만 더 놀다 가세요. 야, 다들 여기와서 분위기 좀 띄워봐. 선배들 심심해하시잖아."
학과장인 홍규 녀석은 눈치도 없이 가려는 나를 붙들고 후배들을 데려와 테이블에 앉혔다. 그런데 테이블에 앉은 후배들 중에 지환이 녀석도 끼어있었다.
"지환이 너, 결국 서연이 물었구나. 축하한다, 자식."
"하하, 감사합니다, 선배들. 제 술한잔 받으세요."
지환이는 고학번 테이블의 선배들에게 차례로 술을 따랐다. 하지만 내 차례가 되자, 녀석은 나를 무시하고 내 잔을 건너뛰어버렸다. 황당해진 나는 지환이를 올려다보았고 지환이는 남들 모르게 내게 히죽 웃었다. 아까 내가 보았던건 착각이 아니었던 것이다.
"뭐지 이 새끼? 시비거는건가?"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지만 따지고 들기에도 애매한 문제라서 나는 몸을 일으켰다. 더이상 여기 있다간 기분만 잡칠게 뻔했다. 하지만 내가 술집 밖으로 나오자 뒤에서 지환이 녀석도 따라나왔다.
"선배님, 벌써 가시나요?"
구태여 나를 따라 밖으로 나오는 것을 보니 역시 이 새끼가 나한테 뭔가 품은게 있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 뭐냐? 아까부터 나한테 왠지 시비걸고 있는거 같은데."
"시비거는게 아니라요. 선배님께 부탁하고 싶은게 있어서 그럽니다."
"뭐? 부탁?"
"예. 서연이한테 앞으로 더 추근대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뭐라고?"
"서연이한테 대충 얘기 들었습니다. 선배님이 작년부터 따라다니셨다고... 구태여 이렇게 사람 많은 자리에서 공개한건 앞으로 선배님 포함 다른 남자들이 서연이 불편하게 하지 않았으면 해서 그랬던 겁니다."
"니가 무슨 말을 들었는진 몰라도 나 서연이 안 쫓아다닌지 꽤 됐다. 니 여자친구가 그러더냐? 내가 불편하게 한다고?"
"예전엔 쫓아다니신거 맞잖습니까. 서연이 입장에선 불편할 수 밖에 없죠. 그러니 조금만 조심해달라는 겁니다."
"조심? 웃기고 있네. 뭘 조심하란거야?"
"학과애들 사이에서도 선배님 소문 자자한걸로 압니다."
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뻗친 나는 다시 술집으로 들어가 주서연이 앉아있는 테이블로 걸어갔다. 지환이 새끼가 나를 따라 들어왔지만 나는 아랑곳 않고 서연이 년을 일으켜세웠다.
"야, 주서연. 너 나 좀 보자."
"무.. 무슨 일이에요?"
"너 왜 뒤에서 내 욕 하고 다니냐?"
"무슨 말씀이세요?"
"몰라서 물어? 니 친구들한테 내 험담하고 다니는건 알고 있었지만 말야. 내가 애초에 너한테 그렇게 욕먹을 만큼 잘못한거냐? 그렇게 뒷다마 까고 다니는게 잘하는 짓이야?"
내가 으르렁거리며 쏘아붙이자 서연이 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으며 내 시선을 회피한다. 이 더러운 년....
"왜 이러세요? 말이 너무 지나치신거 아닙니까?"
"넌 빠져. 너희가 사귀던 말던 관심 없지만 내가 지금 못 따질거 따지고 있는게 아니니까."
지환이 놈이 끼어들어 설치는 꼴이 그렇게 보기 싫을 수가 없었다.
"추태 부리시지말고 그냥 조용히 들어가세요. 제가 할말은 다 전했으니까요."
"뭐? 추태? 이 새끼가 진짜...."
순간 열이 뻗친 나는 지환이의 멱살을 잡아올렸다. 주변에서 웅성거리며 나를 만류했고, 많은 사람들이 우리 두 사람을 떼어놓기 위해 몰려들었다.
"야야, 너 왜 이래? 갈거면 그냥 조용히 들어가."
"그래, 너 취했냐?"
아무 것도 모르는 새끼들이 웅성대는 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그 웅성거림 속에서 유독 또렷하게 들리는 목소리는 서연이년의 경멸에 찬 한 마디였다. 그 년은 나를 징그러운 벌레보듯이 바라보며 테이블에서 멀찍이 떨어지려 하고 있었다. 그 년의 한 마디를 나는 듣고 말았다.
"미친 새끼..."
"뭐?"
순간 이성을 잃은 나는 테이블에 놓인 잔을 집어 서연이년의 얼굴에 냅다 뿌려버렸다. 주변에서 계집애들이 꺄악거리며 비명을 질렀고, 나는 별안간 뒤통수에 번쩍 하며 주먹질을 받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지환이 놈이 나를 두들겨패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지환이놈을 걷어찼고, 우리는 술집 바닥에 서로 나뒹굴며 주먹질을 해댔다. 많은 사람들이 들러붙어 우리를 떼냈고, 결국 나는 비참하게 인파들의 힘에 밀려 술집 밖으로 쫓겨났으며, 혼자 버려지듯 그 자리를 떠나 자취방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
"어떻게 됐어?"
"너 지금 소문 진짜 안좋아. 미친 놈이라고 학과에 소문 쫙 났어."
다음날 몇 안되는 내 편인 동기 창진이가 소식을 전해주었다. 학과에는 이미 내가 싸이코로 소문이 났다고 한다. 화가 나는건 둘째치고 어이가 없었다. 전후사정이야 어쨌건 간에 인사이더 두명이서 아웃사이더 하나 매장시키는건 참 일도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 이제 어쩔거냐?"
"몰라.. 일단 끊자. 대충 무슨 상황인지 알겠으니까."
전화를 끊고나서 나는 깊고 고요한 분노 상태에 빠져들었지만 한편으로 떠오르는 충동을 자꾸만 억누르는데도 애를 써야만 했다. 머릿 속에서는 자꾸 하나의 목소리가 하나의 답을 제시하고 있었다.
"타임 리와인더."
시간을 되돌리면 간단히 해결될 문제다. 현주 때처럼 하루 전으로만 돌아가서 그 행사에 아예 안 가버리면 끝나는 일이다. 그럼 지금의 이 소란은 말끔히 해결 된다.
"하지만 그걸로 좋은 건가?"
내가 뭘 잘못했단 말인가. 설사 이번 소란을 그냥 넘긴다쳐도 주서연이 내 험담을 하고 다닌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고, 무엇보다 이렇게 넘어간다한들 내 화가 풀리는 것도 아니었다.
"기왕 시간을 되돌릴거라면 이렇게 시시하게 써먹을 순 없어...."
그동안 여러가지 불안함 때문에 시계를 사용하고 싶은 충동을 애써 억눌러왔다. 어찌보면 이번 해프닝은 그런 내 욕구와 충동을 터트릴 만한 기폭제가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호기심과 불안함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하고 있던 내게 이 상황은 일종의 계기가 되어주었던 것이다.
"좋아.... 기왕 사용할 거라면, 아주 제대로 사용해주겠어. 주서연, 각오해."
처음으로 내 온전한 의지에 의해 타임 리와인더를 사용하기로 마음 먹은 순간이었다. 더불어 그것이 내 시간 되돌리기 인생의 본격적인 시발점이라고 봐도 좋으리라.
*
다음 날부터, 나는 모자와 마스크를 착용하고 학교에서부터 주서연을 미행했다. 약간의 우여곡절이 있기는 했지만 나는 이틀만에 서연이의 집을 알아냈다. 집의 위치를 파악하고 나서는 서연이의 귀가 시간이나 가족들이 주로 드나드는 시간 등을 스토커처럼 관찰했다. 집주변을 맴돌며 그것들을 대충 파악하는데 꼬박 3일이 걸렸다.
그동안 나는 학교 수업들을 모조리 빼먹고 말았다. 거사를 치르기로 마음 먹은 날, 나는 미리 준비한 도구들과 계획을 다시 한번 꼼곰히 체크한 이후 학교로 향했다. 교양수업에 들어가니 평소 알고 지냈던 후배 하나가 뛰어와서 소식을 전해주었다.
"형, 큰일 났어요."
"왜?"
"형 조별과제 점수 빵점이래요."
"아니, 왜?"
"과제발표 날에 결석하셨잖아요. 어제였는데."
"교수님이 F준대?"
"사실 결석했다고 다 빵점은 아닌데... 발표자가 발표할 때 형을 조원 목록에서 빼서 그런가봐요."
"뭐야? 누가 발표를 했는데?"
"지환 선배요."
"........"
이 년놈들이 쌍으로 날 엿먹이는데 재미가 들렸나보다. 나는 심호흡을 하며 흥분을 가라앉히고는 냉정하게 앞으로의 계획을 되새겼다. 그래, 이까짓 조별 과제가 대수냐. 어차피 시간을 되감을 수만 있다면 이깟 발표 점수 정도는 문제도 아냐. 게다가 임지환.... 네가 나를 자극해봤자 앞으로 너희 년놈들이 겪을 불행만 더 커지는 거지.
복수의 칼날이 한층 더 예리해진 기분이다. 나는 슬쩍 서연이를 보았다. 이 교양수업은 서연이도 듣는 수업이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 년은 나 따위는 거들떠도 보지 않고 있었다. 그저 친구들과 여느 때처럼 시시껄렁한 수다를 떨며 깔깔대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얼마 전에 한 사람을 학교에서 생매장시켜버린 사건 따위는 벌써 다 잊었다는 듯이.
그래, 그 편이 낫다. 그렇게 내게 신경을 끄고 있어주는 편이 좋다. 네 년은 잠시 후에 지옥을 맛보게 될 테니.
수업이 끝나자마자 나는 부리나케 택시를 타고 서연이의 집으로 향했다. 혹시라도 그 년이 나보다 먼저 집에 도착할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지난 며칠간 파악한 바로는 지금 이 시간에 서연이 집에는 아무도 없다. 부모님은 맞벌이를 하는지 두시간은 있어야 귀가를 하곤 했다. 들쭉날쭉 드나드는 남동생 한 명이 변수이긴 했지만 그걸 확인하기 위해 미리 서연이의 집 대문 앞에 서서 초인종을 한번 눌러보았다. 역시나 아무도 없다.
"크.. 심장 떨리네. 잘 할 수 있을까?"
기왕 저지를 거라면 실수가 없어야만 했다. 나는 품 속에 숨겨두었던 타임 리와인더를 꺼냈다. 지금 시각은 5시 12분. 함부로 쓰지 않는게 좋겠다고 여태껏 생각해왔지만... 어차피 사용하기로 마음 먹은 거라면, 시범 구동으로 한번 정도는 미리 써보는게 좋을 것이다. 혹시나 중요한 순간에 작동하지 않는다면 돌이킬 수도 없지 않은가.
"1hour.... 파란 초침을 한 칸만 이동해보자."
가장 아랫쪽 돌림쇠를 두 손가락으로 살짝 돌린다. 회오리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특유의 느낌이 아랫배를 옥죄었다. 세번째 겪다보니 이제 이 느낌도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다.
감았던 눈을 뜨자마자 나는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정확히 4시 12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성공이구나.
"어엇! 이봐, 조심해! 언제부터 서 있었던거야, 빨리 비켜!!"
안도하던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방금 전, 시계를 돌리기 전까지만 해도 아무 것도 없었던 내 옆에 웬 우람한 체격의 장정 두 사람이 박스를 나르고 있었다. 척 보니 택배회사 직원들이다. 내 옆에 방금 전에는 있지도 않았던 택배 트럭과 직원들이 서 있었던 것이다.
"잠깐... 이거...."
그제야 나는 세번째 설명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용시 주변 물체를 주의하라.
"그랬구나."
과학에 대해 문외한이었던 나지만 (애초에 과학적인 물건으로 치부할 수도 없지만) 비로소 대충 감이 오는 듯 했다. 이건 시간축을 되돌려주지만, 공간축을 바꾸어주지는 않는다. 무슨 말이냐 하면 내가 한 시간 전으로 돌아간다고 한들 한 시간 전에 있었던 그 공간, 그 장소로 돌아가는게 아니라 "지금" 존재하는 공간과 장소에서 시간축만 한 시간 전으로 되돌리는 것이다.
즉, 그렇기 때문에 내가 시간을 과거로 되돌리고 나면 그 공간과 장소에 방금 전까지 없던 물체나 사람이 존재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새, 생각보다 위험하잖아?"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하겠지만 조금만 곰곰히 생각해봐도 그렇지가 않다. 일단 방금 전까지 옆에 없었던 사람이 갑자기 튀어나온다면 나도 놀라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갑자기 튀어나온 내 모습을 보며 어떻게 생각하겠냔 말이다. 문제는 그 뿐만이 아니다. 방금 전에는 운 좋게 택배 트럭을 피해서 시간이 전이되었지만 몇 발자국만 옆이었더라도 택배 트럭과 "겹치는" 공간으로 시간축이 이동했을 것이다.
그렇게 될 경우엔 어떻게 될까? 한 공간에 두 물체가 겹치게 된다. 그럴 경우에 "공존"한다는건 말이 안 된다. 아무리 꼴통이라도 상대성 이론을 들먹일 필요도 없이 그게 말이 안된다는건 본능으로 느낄 수 있다. 만약 트럭과 겹치는 곳에서 시간을 되감았다면 택배 트럭에 깔리게 되었을까? 아니면 시간이 움직이지 않았을까?
"에, 에이.. 모르겠다.. 나중에 생각하자."
우선은 타임 리와인더가 정상적으로 구동된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그것으로 됐다. 덕분에 1시간을 더 이 자리에서 기다리게 되었지만 감수해야지. 그런데 1시간 전이면 내가 교양수업을 받고있었을텐데.... 이렇게 된 경우는 어떻게 될까? 나는 처음부터 아예 그 수업에 가지 않았던게 되는 걸까? 머릿 속이 복잡하다.
"택배 왔습니다!"
여러가지 생각으로 골이 지끈거릴만큼 머릿 속이 복잡해져 있는데, 아까의 택배 직원이 서연이의 집 초인종을 눌렀다. 방금 전,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한 시간 후의 내가 눌렀을 때는 아무도 없었지만 지금은 한 시간을 되감은 상태이니 누군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과연 서연이의 남동생으로 보이는 학생 하나가 나와서 택배를 받아드는 모습이 보였다.
남동생은 박스를 들고 다시 안으로 들어가더니, 20분쯤 다시 집 밖으로 나왔다. 외출 하는 것 같았다. 저렇게 나가서 한 시간 후엔 없었던 거로군. 이렇게 돌이켜보니 꽤 아슬아슬한 타이밍이었지만 덕분에 집에 없다는건 분명히 확인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숨어서 다시 두 시간 정도를 기다리니 마침내 서연이가 집으로 돌아왔다.
"왔구나, 이 년!"
나는 서연이가 자기 손으로 현관문의 잠금을 풀 때까지 기다렸다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려는 타이밍에 그녀를 멀리서 불러세웠다.
"잠시만요!"
미리 준비한 자그마한 상자 하나를 품에 끌어안고, 그녀가 알아보지 못하도록 마스크와 모자를 푹 눌러쓴 채 의이해하는 그녀에게로 달려갔다. 문을 닫으려다 어정쩡한 자세로 멈춰 선 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직은 나인 줄 눈치채지 못한 것 같다. 집 안으로 들어가버리면 인터폰으로 내 모습을 확인하고 열어주지 않을테니 이 타이밍을 노릴 수 밖에.
"택배입니다. 주서연 씨 맞으시죠?"
"아.. 네. 그런데 제 앞으로 올 택배는 없는데... 동생 앞으로 오는건 아까 동생이 받았다고 했는데..."
"아. 그건 말이죠..."
순간 나는 서연이가 어떻게 움직이거나 반응할 틈도 없이 그녀를 집 안으로 밀어버렸다. 애매하게 열려있던 대문 너머로 나동그라지는 그녀. 주변을 돌아보니 다행히 보고 있는 사람은 없다. 나는 잽싸게 집 안으로 따라들어가 문을 잠구고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그녀에게 달려들어 냅다 입을 틀어막았다. 소리라도 지르면 피곤하니까.
"소리 지르지 마. 입 뻥긋하는 날엔 너 죽어. 장난 아냐."
나는 품고 뛰어왔던 그 작은 상자 안에서 뭉툭한 물체 하나를 꺼냈다. 밀리터리 매니아들이 좋아하는 군용 나이프의 모조품이었다. 실제로 이걸로는 사람을 죽이기는커녕 무나 제대로 썰 수 있을런지 모르겠지만, 이 계집년이 모조품인지 진짜 칼인지를 눈으로만 봐서 어떻게 알겠는가. 겉모양만큼은 살벌하게 생긴 나이프를 보니 역시나 서연이년의 표정이 새하얗게 질리며 틀어막은 입이 부르르 떨린다.
"멍청하게 소리지르면서 시끄럽게 굴면 그 순간 세상 하직하는거야.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 이 년아?"
"우... 우읍... 우으읍...."
틀어막은 손 틈새로 서연이년의 침이 줄줄 새어나온다. 온 몸을 바르르 떨어대는 모습을 보니 복수의 서막이 열린 것 같아서 짜릿했다.
"알아듣냐구, 이 씨발년아!"
"흡..."
덜덜 떨며 고개를 끄덕끄덕하는 서연이. 나는 서연이의 팔 하나를 뒤로 꺾어 도망가지 못하게 제압하고는 남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집 내부로 그녀를 끌고 들어갔다. 발냄새나는 신발장을 거쳐 안으로 들어서니 적막이 깔려있는 것이, 역시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며칠 간의 스토킹으로 얻어낸 정보 덕분에 타이밍 하나는 잘 잡은 것이다.
"자, 이제 잠시 잠들어 줘야겠다."
버둥거리는 그녀의 허리춤에 미리 준비한 전기충격기를 한방 먹여주었다. 기절할 줄 알고 악당같은 대사를 내뱉은건데 하라는 기절은 안하고 온 몸을 뒤틀며 퍼덕거리기만 한다.
"에잇 썅!"
강도를 높여 한방 더 지져주니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입을 뻐끔거리다가 몸을 추욱 늘어뜨린다. 입을 틀어막고 있던 손 틈새로 서연이의 침이 질질 새어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정신을 잃은 서연이를 번쩍 들어 그녀의 집 안으로 옮겼다. 그리고는 우선 상자 안에서 밧줄과 테이프를 꺼내어 그녀의 팔과 다리를 단단히 묶었다. 기왕 범죄자가 되기로 한거, 평소에 상상만으로 해보던 걸 오늘 다 해보자는 심산이었다. 테이프로 입까지 꽁꽁 돌려 막아놓고, 나는 천천히 그녀의 집 안을 살폈다.
집을 탐사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그녀의 방으로 추측되는 곳을 찾을 수 있었다. 양다리가 묶여 인어공주처럼 바닥에 늘어져있는 서연이의 몸을 들어 나는 그녀를 방으로 옮겼다.
이제 호된 맛을 보여줄 시간인 것이다.
- 다음 화에 계속 -
잘 부탁드립니다. 열심히 쓰겠습니다.
- 이 소설은 소.라.넷(sora.net) 작가 "상상의신비"가 연재 중인 작품입니다.
무단 불펌을 삼가해 주시길 부탁드리며, 퍼가시더라도 출처와 작가명을 꼭 남겨주십시오.
창작가들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이자 도리입니다.
* 1부 2장
만약 당신에게 하루아침에 시간을 되감을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면 당신은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이를 두고 누군가는 전지전능한 능력이라 말할 것이고, 또 누군가는 미스터리한 능력이라 말할 것이다. 또한 누군가는 두려운 능력이라 말하기도 하겠지.
모두 맞는 말이다. 이 능력은 전지전능하며, 미스터리하고, 두려운 것이다. "말도 안된다"고 하는 말은 의미가 없었다. 이것은 현실이었기에.
우리는 종종 영화나 소설에서 시간을 부릴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가공 인물을 보며 괜한 망상을 한다. 캬, 저런 능력만 있어도! 과거로 돌아가 새 삶을! 복권으로 일확천금을! 남들이 모르는 미래의 정보로 엘리트의 인생을!
그 얼마나 달콤한 상상들인가. 하지만 막상 그런 능력을 가진 수수께끼의 물체를 소유하게 되고나니, 나는 그런 달콤한 상상들을 마음껏 현실로 이루어내기 이전에 두려워졌다. 이것은 허구의 세계가 아닌 현실, 즉 결과와 책임이 따르는 엄격한 인과의 세계다. 무엇인지도 모를 능력을 남발해서 혹시 모를 재앙이 따를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런 내 생각은 헛된 기우가 아닐 것이다. 나는 타임 리와인더의 능력을 한번 피부로 실감한 이후로 더욱 그 시계를 면밀히 관찰하기 시작했고, 특히 덮개 뒷면의 음각 문자들을 돋보기로 읽어내고 해석하는 작업에 몰두했다.
[The price is your lifespan]
나의 관심을 가장 강하게 끌어당겼던 설명은 바로 이것이었다. 가격은 당신의 수명이다. 가격... 가격이라는 말의 의미는 누가 보더라도 이 시계를 사용하는 댓가임에 틀림 없었다. 누가 보면 무슨 헛소리냐고 나를 꾸짖겠지만 이 시계의 능력을 눈으로, 피부로 확인한 이상 나로서는 이 말을 믿어야만 했다.
이 시계를 사용하는 댓가는 바로 나의 수명. 그렇다면 어쩌면 저번의 그 일로 인해 나의 수명은 벌써 감소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진짜로 줄어들었다면 도대체 얼마나 줄어든 걸까? 단순히 시간을 되돌린 만큼 비례하여 줄어드는건가? 아니면 수명과 되돌린 시간의 단위를 계산하는 공식이라도 있는건가?
머릿 속이 복잡했지만 대충 이제 그 설명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파란 바늘은 가장 작고 가느다란 바늘, 즉 일반시계의 초침이다. 이것은 1hour 즉, 한시간 단위로 시간을 되돌리는 기능을 한다. 그리고 초록 바늘은 분침이자 1day, 하루를 되돌리는 기능을 한다.
현주와의 해프닝을 되돌리기 위해 내가 우연히 건드린 이 초록바늘은 정확히 하루, 즉 24시간을 되돌렸으며 그 결과 나는 정확히 하루 전의 그 시간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현주와 저녁을 먹기도 전의 바로 그 시간으로 말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하나, 빨강 바늘이 의미하는 바는? 뻔하다. 1year. 무려 1년을 되돌리는 것이다.
1시간, 1일, 1년. 각각의 단위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기능을 이 시계는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정말이지.... 내가 겪었지만서도 너무도 비현실적인 얘기다.
"그렇다면 이 문장이 의미하는건 뭐지....?"
[Be careful surrounding object when use]
사용시 주변 물체들을 주의하라니..... 게다가 음각으로 새겨진 영문자들은 그 뒤로도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갈수록 너무도 세밀하게 새겨진 문자들은 웬만한 돋보기로는 이제 읽어낼 수가 없었고, 나는 어쩔 수 없이 더 정밀한 렌즈를 구하기 전까지 그 문장의 해석을 보류해야만 했다.
"이 모든 설명과 기능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옆집 여자랑 이야기를 해야만 해.... 하지만 그래서는...."
바보가 아닌 이상 이 시계가 어떻게 그런 기상천외한 일을 해낼 수 있는 것인지, 그리고 나머지 기능들은 무엇인지를 밝혀내기 위해서는 그 정체불명의 옆집 여자와 이야기를 해야 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그것은 곧 내가 도둑질을 했음을 스스로 시인하는 꼴이며, 나아가서는 이 타임 리와인더를 다시 돌려줘야 함을 의미한다.
물론 이것은 내 물건이 아니지만.... 그래도, 그래도 이런 경의적인 물건을 한번 손에 넣은 이상 이것을 도로 포기한다는 것은 설사 성자라고 해도 힘든 일이었다. 게다가 지금까지는 별다른 문제 없이 잘 숨겨왔지 않은가? 옆집 여자는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고, 심지어는 이것을 도둑맞았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지내는 듯 한데 내가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면 옆집 여자와 만나지 않고 스스로 이 시계의 원리나 사용법을 알아내야한다는 건가?
"불가능해... 내가 과학자도 아니고."
애초에 이게 과학의 산물이긴 한건가? 과학기술의 발전이 아무리 극한까지 달했다 하더라도 이런 물건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타임머신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시간축과 공간축을 해석하면 시간여행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라고 했다지만 나로서는 뜬구름 잡는 별세계의 이야기일 뿐이었다.
도대체 이 물건은 뭐란 말인가....?
"아무튼 지금으로선 숨길 수 밖에 없어...."
그 이후로 나는 타임 리와인더를 몸에서 떨어뜨려놓지 않고 항상 지니고 다니게 되었다. 신기하게 그 이후로도 바깥에서 옆집 여자와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알 수 없는 불안함에 그 물건을 결코 함부로 사용하지 않았고, 늘 몸에 지니고 다니기만 했다. 그렇게 겨울방학은 지나갔고, 나는 개강 이후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
캠퍼스에는 아직 겨울바람의 쌀쌀함이 감돌고 있었지만 한편으론 봄의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개강 첫날 학교에 온 나는 우연히 상경대 입구에서 서연이와 마주쳤다.
"엇... 서연아."
"서, 선배."
지난 학기에 보기좋게 나를 퇴짜놓은 서연이. 나는 서연이에게 그 이후로도 숱하게 구애를 했지만 내 찌질한 대시를 그녀는 매번 가차없이 잘라냈고, 급기야 그녀는 이제 나를 불편해하여 누가 봐도 확연하게 나를 피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주기 시작했다.
"아, 안녕? 하하."
"네에.. 저, 제가 수업이 급해서... 이만."
"......."
웃기고 있다, 씨발년이. 지금이 수업 시작할 타이밍도 아닌데 수업이 급하긴. 아무리 내가 들이댔기로소니 이렇게까지 사람 개무시하며 무안을 줘야할까? 요새는 얼굴 예쁘고 성격 좋은 여자들도 많다던데 저 년은 이제보니 자기 얼굴 좀 반반하답시고 도끼병에 걸린 것만 같다. 문득 현주 생각이 났다.
그래, 서연이 년에 비하면 현주가 백배 낫지. 현주는 그 때 내가 시간을 되감아 그녀와의 해프닝을 수습한 이후로 오히려 내게 호감을 갖게 된 모양인지 우리는 방학 내내 소위 말하는 "썸을 타는" 사이로 잘 지내왔다. 하지만 나는 지난번과 같은 실수를 피하고자 결코 경거망동하지는 않았는데, 그것은 피치 못할 사태로 인해 뭐가 뭔지도 모른채 다시 한번 타임 리와인더를 사용해야 할 경우를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다음 주에 시내에서 데이트나 하자고 해야겠다. 정석대로 차근차근 밟아나가는거지 뭐."
굳이 실패한 서연이년과의 관계를 회복시키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다. 우선 현주와의 관계부터 차근차근 발전시켜 나가면 된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고, 누굴 만나든 퀸카랑 만나서 즐기면 되는거 아니겠는가. 어느새 나는 그 날의 불가사의한 두려움을 많이 잊어버리고 일상으로 대충 돌아온 듯 했다.
수업이 끝나고 나는 곧장 자취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걸음을 서둘렀다. 요새 내 관심은 온통 타임 리와인더를 관찰하고 분석하는 일에 쏠려있었다. 분석을 한다고 해서 뭔가 얻어지는게 있는건 아니었지만 말이다.
사실 관찰이라곤 했지만 더 면밀히 살펴보는 일은 요새 거의 없고, 그보다는 만약 이 신비한 시계의 사용법을 제대로 알아낸다면 그 능력을 어떻게 활용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일지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자주 갖는 편이었다. 그런 상상은 아무리 해도 질리지 않는 법이니까.
"성진 선배 말이야... 너무 기분 나쁘지 않아?"
하지만 자취방으로 돌아가려던 내 상쾌한 기분을 삽시간에 망쳐놓는 불쾌한 해프닝이 예상 못한 곳에서 터지고 말았다. 도서관에서 혹시 도움이 될까 싶어 시간여행 이론에 대한 에세이 책을 하나 빌려 돌아가려고 책을 고르고 있던 참이었다. 맞은편 책장 너머에서 들려오는 여학생의 목소리가 내 주의를 끌었다.
그 목소리에 신경이 쓰인 이유는 첫 번째로 방금 나온 이름이 내 이름과 같았기 때문이고, 두 번째로 그 목소리가 왠지 낯익은 목소리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기척을 숨긴채로 슬쩍 옆으로 돌아 책장 너머에 있는 여학생이 누군지 확인했다. 바로 서연이었다.
"아까도 잠시 마주쳤는데.... 기분 나쁘게 웃는 꼬락서니하며... 진짜 왜 그렇게 껄떡대는지 모르겠어."
"그 선배 요새도 너한테 찝적거리고 그래?"
"몰라... 방학 때는 얼굴 안봐서 좋았는데 개강 첫날부터 똥 밟았지 뭐야... 휴학이나 해버리지 왜 또 이번학기에도 돌아다니는거야? 피해다니기도 피곤한데...."
책장에 몸을 숨기고 엿듣고 있었던 내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바보가 아닌 이상 내 이야기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저 씨발년이 진짜.... 내가 자기한테 뭘 그렇게 잘못했단 말인가? 좀 찌질하게 굴었기로소니 저렇게까지 욕을 먹어야 할 이유가 된단 말인가?
"하여튼 정말 기분나쁘긴 해.. 그 인간."
"야야, 됐어. 설마 그렇게 까여놓고 또 너한테 그럴까봐. 잊어버려."
"휴...그래. 잊어버리자."
"그건 그렇고 너 지환 오빠랑 사귄다는거 사실이야?"
"응? 아냐, 사귀긴. 아직 그냥 썸타는거지 뭐."
"기지배, 너 나한테까지 뻥치면 죽어. 아직이란 말은 조만간 뭐가 있을거라는 얘기 아냐."
"야야, 조용히 해. 누구 듣겠다. 나중에 말해줄게."
화나는건 화나는거고 그 와중에도 나는 그 중요한 뉴스를 놓치지 않았다. 서연이가 지환이 녀석이랑 사귄다고? 지환이는 학과 내에서 킹카 후보로 자주 언급되는 한 학번 아래의 후배였다. 서연이가 우리과 대표 퀸카라면 지환이는 우리과 대표 킹카라고 할 수 있었다. 학과를 대표하는 선남선녀인 둘 사이에 뭔가 스캔들이 흐르고 있다는 소문이 지난 학기부터 종종 나오곤 했었다. 서연이가 내 대시를 가차없이 걷어차고나서 조금 지난 후의 일이었다.
소문 만들어내기 좋아하는 학과 여자애들의 가십거리일 뿐인줄 알았는데, 설마 그 소문이 사실이었던걸까? 씨발년... 남자한텐 관심없다면서 도도한 척은 혼자 다하더니 역시 결국 지 수준에 맞는 곱상한 새끼 만나서 놀겠다 이거였잖아? 자기 입으로 썸이라는 얘기까지 했으니 뭔가 있기는 있다는 얘기였다.
"주서연... 이거 생각할수록 정말 개같은 년이네."
서연이년에게 느끼는 분노는 질투만은 아니었지만, 그 질투가 그렇지 않아도 아니꼽던 그 년에 대한 감정을 부채질한 것은 사실이었다. 지난 학기에 그 지랄을 했으니 뒤에서 친구들끼리 날 조롱할거란 생각을 하기는 했었지만 저렇게 험담까지 하고 다닐 줄은 몰랐다. 그래도 지 좋다고 쫓아다닌건데 이건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가 아니잖아. 설마 저렇게 못되먹은 년일줄 내가 알았겠냔 말이다.
"두고 보자, 이 년..."
그 후 내 분노가 폭발하게 된 계기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
"선배, 개총 행사 오실거죠?"
"글쎄, 별 생각 없는데..."
"에이, 그러지말고 오셔서 놀다가세요. 예비역 선배들이 좀 계셔줘야 자리가 모양새도 나고 그러죠."
이번 년도에 학회장이 된 홍규 녀석은 나보다 두학번이 밑이다. 말은 좋지만 결국 이녀석이 고학번 선배들을 초대하는 이유는 결국 술자리에서 고학번들이 씀씀이좋게 한푼씩 술값 좀 보태달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속이 뻔히 보였지만 그래도 어찌됐든 아무도 관심가져주지 않는 학교에서 이렇게 찾아주는 놈이 있다는게 고마울 정도로 내 학교 생활은 삭막했다.
"알았어, 시간 보고 갈게."
"와우, 감사합니다. 그럼 이따 뵈요!"
어차피 개총 행사는 볼 것도 없고, 그나마 관심 있는게 뒤풀이인데 이 나이 먹고 뒤풀이가봐야 여자 후배들이 놀아주는 것도 아니니 적당히 안주나 집어먹다 빠져나와야겠다 생각하며 나는 뒤풀이 장소인 술집으로 향했다. 새학기라 그런지 새내기들을 포함해서 학생들이 바글바글했다. 하지만 역시나 나와 놀아줄만한 녀석들은 보이지 않았고, 나는 자연스럽게 나와 비슷한 신세인 늙다리 고학번들의 테이블에 끼어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자자, 존경하는 선배님들, 그리고 사랑하는 학과 동생분들! 잠시 주목 좀 해주십시오."
술자리가 무르익어가고 여기저기 왁자지껄한 분위기가 되어갈 무렵, 누군가가 소란을 뚫고 이목을 집중시켰다. 테이블 한 가운데에서 누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학과 사람들을 향해 연설을 하듯 소리를 높이고 있었는데, 학회장인 홍규 녀석이 아니라 바로 지환이였다.
"쟤 지환이잖아."
"뭐하려고 저래?"
고학번 예비역 테이블에서 아니꼬운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역시 기생오라비처럼 생긴 녀석들은 주위의 시샘을 받기 마련이다. 나 또한 불과 며칠전에 도서관에서 들은 이야기가 생각났다.
"오늘 이렇게 사랑하는 OO과 식구들이 한자리에 모였으니 이 자리에서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실은 작년 12월부터 저 임지환과 여기 주서연은 서로 교제를 해왔습니다. 그동안 비밀로 하고 사귀었지만 이제 우리과 공식 커플이 되고 싶은 마음에 오늘 여러분들 앞에서 공개하고 싶었습니다. 좀 갑작스럽지만 다들 많이 축하해주세요, 하하하."
그러자 미리 바람잡이라도 심어놓은듯 여기저기서 환호와 박수갈채가 튀어나왔다. 몇몇 시샘하는 이들이 있긴 했어도 학과 대표 킹카와 퀸카가 사귀고 있다는 이 빅뉴스에 사람들은 열광하며 함성을 질렀다. 나를 포함한 몇몇 고학번들은 저게 대체 뭐하는 꼴값인가 생각했지만 후배들, 특히 어린 새내기들은 이런 열애설과 같은 핫이슈에 특히나 더 열광하는지 꺅꺅거리고 소리를 지르는등 술자리 분위기는 한층 더 후끈 달아올랐다.
"그나저나 사실이었구나... 주서연 이 씨발년...."
괜스레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하긴 그래, 나 같은 새끼보단 저런 곱상하게 생긴 놈이 더 좋은건 당연하겠지. 하지만 뒤에서 욕은 하지 말아야 할 거 아냐. 멀찍이 바라보니 지환이 놈 옆에 앉은 서연이는 주위에서 쏟아지는 박수갈채와 놀림에 얼굴을 붉히며 지환이 놈에게 핀잔을 주고 있었다.
"그런걸 왜 굳이 사람들 앞에서 말해, 바보야!"
"하하하, 왜, 좋잖아."
"기집애 너! 사귀는거 아니라더니 거짓말이었지!"
"으, 미안해, 연주야. 부끄러워서 그랬지."
"야, 괘씸해서 안되겠다. 벌주부터 마셔, 이 나쁜년!"
저 테이블은 거의 무슨 축제분위기였다. 나는 속이 쓰리고 배알이 꼴려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이내 느껴지는 누군가의 시선에 다시 그 테이블로 시선을 돌렸다. 지환이 놈이 멀리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럴 리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순간 지환이 녀석이 나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기분 나쁘게 히죽 웃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야?"
의아한 내가 지환이를 노려보았지만 녀석은 이미 고개를 돌린 후였다. 나는 찝찝한 마음을 뒤로하고 왠지 기분이 잡쳐 더이상 술자리에 있을 이유를 느끼지 못하고 자리를 뜰 채비를 했다.
"어라? 선배, 벌써 가시려구요?"
"그래. 갈게."
"에이, 조금만 더 놀다 가세요. 야, 다들 여기와서 분위기 좀 띄워봐. 선배들 심심해하시잖아."
학과장인 홍규 녀석은 눈치도 없이 가려는 나를 붙들고 후배들을 데려와 테이블에 앉혔다. 그런데 테이블에 앉은 후배들 중에 지환이 녀석도 끼어있었다.
"지환이 너, 결국 서연이 물었구나. 축하한다, 자식."
"하하, 감사합니다, 선배들. 제 술한잔 받으세요."
지환이는 고학번 테이블의 선배들에게 차례로 술을 따랐다. 하지만 내 차례가 되자, 녀석은 나를 무시하고 내 잔을 건너뛰어버렸다. 황당해진 나는 지환이를 올려다보았고 지환이는 남들 모르게 내게 히죽 웃었다. 아까 내가 보았던건 착각이 아니었던 것이다.
"뭐지 이 새끼? 시비거는건가?"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지만 따지고 들기에도 애매한 문제라서 나는 몸을 일으켰다. 더이상 여기 있다간 기분만 잡칠게 뻔했다. 하지만 내가 술집 밖으로 나오자 뒤에서 지환이 녀석도 따라나왔다.
"선배님, 벌써 가시나요?"
구태여 나를 따라 밖으로 나오는 것을 보니 역시 이 새끼가 나한테 뭔가 품은게 있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 뭐냐? 아까부터 나한테 왠지 시비걸고 있는거 같은데."
"시비거는게 아니라요. 선배님께 부탁하고 싶은게 있어서 그럽니다."
"뭐? 부탁?"
"예. 서연이한테 앞으로 더 추근대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뭐라고?"
"서연이한테 대충 얘기 들었습니다. 선배님이 작년부터 따라다니셨다고... 구태여 이렇게 사람 많은 자리에서 공개한건 앞으로 선배님 포함 다른 남자들이 서연이 불편하게 하지 않았으면 해서 그랬던 겁니다."
"니가 무슨 말을 들었는진 몰라도 나 서연이 안 쫓아다닌지 꽤 됐다. 니 여자친구가 그러더냐? 내가 불편하게 한다고?"
"예전엔 쫓아다니신거 맞잖습니까. 서연이 입장에선 불편할 수 밖에 없죠. 그러니 조금만 조심해달라는 겁니다."
"조심? 웃기고 있네. 뭘 조심하란거야?"
"학과애들 사이에서도 선배님 소문 자자한걸로 압니다."
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뻗친 나는 다시 술집으로 들어가 주서연이 앉아있는 테이블로 걸어갔다. 지환이 새끼가 나를 따라 들어왔지만 나는 아랑곳 않고 서연이 년을 일으켜세웠다.
"야, 주서연. 너 나 좀 보자."
"무.. 무슨 일이에요?"
"너 왜 뒤에서 내 욕 하고 다니냐?"
"무슨 말씀이세요?"
"몰라서 물어? 니 친구들한테 내 험담하고 다니는건 알고 있었지만 말야. 내가 애초에 너한테 그렇게 욕먹을 만큼 잘못한거냐? 그렇게 뒷다마 까고 다니는게 잘하는 짓이야?"
내가 으르렁거리며 쏘아붙이자 서연이 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으며 내 시선을 회피한다. 이 더러운 년....
"왜 이러세요? 말이 너무 지나치신거 아닙니까?"
"넌 빠져. 너희가 사귀던 말던 관심 없지만 내가 지금 못 따질거 따지고 있는게 아니니까."
지환이 놈이 끼어들어 설치는 꼴이 그렇게 보기 싫을 수가 없었다.
"추태 부리시지말고 그냥 조용히 들어가세요. 제가 할말은 다 전했으니까요."
"뭐? 추태? 이 새끼가 진짜...."
순간 열이 뻗친 나는 지환이의 멱살을 잡아올렸다. 주변에서 웅성거리며 나를 만류했고, 많은 사람들이 우리 두 사람을 떼어놓기 위해 몰려들었다.
"야야, 너 왜 이래? 갈거면 그냥 조용히 들어가."
"그래, 너 취했냐?"
아무 것도 모르는 새끼들이 웅성대는 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그 웅성거림 속에서 유독 또렷하게 들리는 목소리는 서연이년의 경멸에 찬 한 마디였다. 그 년은 나를 징그러운 벌레보듯이 바라보며 테이블에서 멀찍이 떨어지려 하고 있었다. 그 년의 한 마디를 나는 듣고 말았다.
"미친 새끼..."
"뭐?"
순간 이성을 잃은 나는 테이블에 놓인 잔을 집어 서연이년의 얼굴에 냅다 뿌려버렸다. 주변에서 계집애들이 꺄악거리며 비명을 질렀고, 나는 별안간 뒤통수에 번쩍 하며 주먹질을 받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지환이 놈이 나를 두들겨패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지환이놈을 걷어찼고, 우리는 술집 바닥에 서로 나뒹굴며 주먹질을 해댔다. 많은 사람들이 들러붙어 우리를 떼냈고, 결국 나는 비참하게 인파들의 힘에 밀려 술집 밖으로 쫓겨났으며, 혼자 버려지듯 그 자리를 떠나 자취방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
"어떻게 됐어?"
"너 지금 소문 진짜 안좋아. 미친 놈이라고 학과에 소문 쫙 났어."
다음날 몇 안되는 내 편인 동기 창진이가 소식을 전해주었다. 학과에는 이미 내가 싸이코로 소문이 났다고 한다. 화가 나는건 둘째치고 어이가 없었다. 전후사정이야 어쨌건 간에 인사이더 두명이서 아웃사이더 하나 매장시키는건 참 일도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 이제 어쩔거냐?"
"몰라.. 일단 끊자. 대충 무슨 상황인지 알겠으니까."
전화를 끊고나서 나는 깊고 고요한 분노 상태에 빠져들었지만 한편으로 떠오르는 충동을 자꾸만 억누르는데도 애를 써야만 했다. 머릿 속에서는 자꾸 하나의 목소리가 하나의 답을 제시하고 있었다.
"타임 리와인더."
시간을 되돌리면 간단히 해결될 문제다. 현주 때처럼 하루 전으로만 돌아가서 그 행사에 아예 안 가버리면 끝나는 일이다. 그럼 지금의 이 소란은 말끔히 해결 된다.
"하지만 그걸로 좋은 건가?"
내가 뭘 잘못했단 말인가. 설사 이번 소란을 그냥 넘긴다쳐도 주서연이 내 험담을 하고 다닌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고, 무엇보다 이렇게 넘어간다한들 내 화가 풀리는 것도 아니었다.
"기왕 시간을 되돌릴거라면 이렇게 시시하게 써먹을 순 없어...."
그동안 여러가지 불안함 때문에 시계를 사용하고 싶은 충동을 애써 억눌러왔다. 어찌보면 이번 해프닝은 그런 내 욕구와 충동을 터트릴 만한 기폭제가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호기심과 불안함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를 하고 있던 내게 이 상황은 일종의 계기가 되어주었던 것이다.
"좋아.... 기왕 사용할 거라면, 아주 제대로 사용해주겠어. 주서연, 각오해."
처음으로 내 온전한 의지에 의해 타임 리와인더를 사용하기로 마음 먹은 순간이었다. 더불어 그것이 내 시간 되돌리기 인생의 본격적인 시발점이라고 봐도 좋으리라.
*
다음 날부터, 나는 모자와 마스크를 착용하고 학교에서부터 주서연을 미행했다. 약간의 우여곡절이 있기는 했지만 나는 이틀만에 서연이의 집을 알아냈다. 집의 위치를 파악하고 나서는 서연이의 귀가 시간이나 가족들이 주로 드나드는 시간 등을 스토커처럼 관찰했다. 집주변을 맴돌며 그것들을 대충 파악하는데 꼬박 3일이 걸렸다.
그동안 나는 학교 수업들을 모조리 빼먹고 말았다. 거사를 치르기로 마음 먹은 날, 나는 미리 준비한 도구들과 계획을 다시 한번 꼼곰히 체크한 이후 학교로 향했다. 교양수업에 들어가니 평소 알고 지냈던 후배 하나가 뛰어와서 소식을 전해주었다.
"형, 큰일 났어요."
"왜?"
"형 조별과제 점수 빵점이래요."
"아니, 왜?"
"과제발표 날에 결석하셨잖아요. 어제였는데."
"교수님이 F준대?"
"사실 결석했다고 다 빵점은 아닌데... 발표자가 발표할 때 형을 조원 목록에서 빼서 그런가봐요."
"뭐야? 누가 발표를 했는데?"
"지환 선배요."
"........"
이 년놈들이 쌍으로 날 엿먹이는데 재미가 들렸나보다. 나는 심호흡을 하며 흥분을 가라앉히고는 냉정하게 앞으로의 계획을 되새겼다. 그래, 이까짓 조별 과제가 대수냐. 어차피 시간을 되감을 수만 있다면 이깟 발표 점수 정도는 문제도 아냐. 게다가 임지환.... 네가 나를 자극해봤자 앞으로 너희 년놈들이 겪을 불행만 더 커지는 거지.
복수의 칼날이 한층 더 예리해진 기분이다. 나는 슬쩍 서연이를 보았다. 이 교양수업은 서연이도 듣는 수업이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 년은 나 따위는 거들떠도 보지 않고 있었다. 그저 친구들과 여느 때처럼 시시껄렁한 수다를 떨며 깔깔대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얼마 전에 한 사람을 학교에서 생매장시켜버린 사건 따위는 벌써 다 잊었다는 듯이.
그래, 그 편이 낫다. 그렇게 내게 신경을 끄고 있어주는 편이 좋다. 네 년은 잠시 후에 지옥을 맛보게 될 테니.
수업이 끝나자마자 나는 부리나케 택시를 타고 서연이의 집으로 향했다. 혹시라도 그 년이 나보다 먼저 집에 도착할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지난 며칠간 파악한 바로는 지금 이 시간에 서연이 집에는 아무도 없다. 부모님은 맞벌이를 하는지 두시간은 있어야 귀가를 하곤 했다. 들쭉날쭉 드나드는 남동생 한 명이 변수이긴 했지만 그걸 확인하기 위해 미리 서연이의 집 대문 앞에 서서 초인종을 한번 눌러보았다. 역시나 아무도 없다.
"크.. 심장 떨리네. 잘 할 수 있을까?"
기왕 저지를 거라면 실수가 없어야만 했다. 나는 품 속에 숨겨두었던 타임 리와인더를 꺼냈다. 지금 시각은 5시 12분. 함부로 쓰지 않는게 좋겠다고 여태껏 생각해왔지만... 어차피 사용하기로 마음 먹은 거라면, 시범 구동으로 한번 정도는 미리 써보는게 좋을 것이다. 혹시나 중요한 순간에 작동하지 않는다면 돌이킬 수도 없지 않은가.
"1hour.... 파란 초침을 한 칸만 이동해보자."
가장 아랫쪽 돌림쇠를 두 손가락으로 살짝 돌린다. 회오리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특유의 느낌이 아랫배를 옥죄었다. 세번째 겪다보니 이제 이 느낌도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다.
감았던 눈을 뜨자마자 나는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정확히 4시 12분.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성공이구나.
"어엇! 이봐, 조심해! 언제부터 서 있었던거야, 빨리 비켜!!"
안도하던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방금 전, 시계를 돌리기 전까지만 해도 아무 것도 없었던 내 옆에 웬 우람한 체격의 장정 두 사람이 박스를 나르고 있었다. 척 보니 택배회사 직원들이다. 내 옆에 방금 전에는 있지도 않았던 택배 트럭과 직원들이 서 있었던 것이다.
"잠깐... 이거...."
그제야 나는 세번째 설명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용시 주변 물체를 주의하라.
"그랬구나."
과학에 대해 문외한이었던 나지만 (애초에 과학적인 물건으로 치부할 수도 없지만) 비로소 대충 감이 오는 듯 했다. 이건 시간축을 되돌려주지만, 공간축을 바꾸어주지는 않는다. 무슨 말이냐 하면 내가 한 시간 전으로 돌아간다고 한들 한 시간 전에 있었던 그 공간, 그 장소로 돌아가는게 아니라 "지금" 존재하는 공간과 장소에서 시간축만 한 시간 전으로 되돌리는 것이다.
즉, 그렇기 때문에 내가 시간을 과거로 되돌리고 나면 그 공간과 장소에 방금 전까지 없던 물체나 사람이 존재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
"새, 생각보다 위험하잖아?"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하겠지만 조금만 곰곰히 생각해봐도 그렇지가 않다. 일단 방금 전까지 옆에 없었던 사람이 갑자기 튀어나온다면 나도 놀라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갑자기 튀어나온 내 모습을 보며 어떻게 생각하겠냔 말이다. 문제는 그 뿐만이 아니다. 방금 전에는 운 좋게 택배 트럭을 피해서 시간이 전이되었지만 몇 발자국만 옆이었더라도 택배 트럭과 "겹치는" 공간으로 시간축이 이동했을 것이다.
그렇게 될 경우엔 어떻게 될까? 한 공간에 두 물체가 겹치게 된다. 그럴 경우에 "공존"한다는건 말이 안 된다. 아무리 꼴통이라도 상대성 이론을 들먹일 필요도 없이 그게 말이 안된다는건 본능으로 느낄 수 있다. 만약 트럭과 겹치는 곳에서 시간을 되감았다면 택배 트럭에 깔리게 되었을까? 아니면 시간이 움직이지 않았을까?
"에, 에이.. 모르겠다.. 나중에 생각하자."
우선은 타임 리와인더가 정상적으로 구동된다는 것을 확인했으니 그것으로 됐다. 덕분에 1시간을 더 이 자리에서 기다리게 되었지만 감수해야지. 그런데 1시간 전이면 내가 교양수업을 받고있었을텐데.... 이렇게 된 경우는 어떻게 될까? 나는 처음부터 아예 그 수업에 가지 않았던게 되는 걸까? 머릿 속이 복잡하다.
"택배 왔습니다!"
여러가지 생각으로 골이 지끈거릴만큼 머릿 속이 복잡해져 있는데, 아까의 택배 직원이 서연이의 집 초인종을 눌렀다. 방금 전,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한 시간 후의 내가 눌렀을 때는 아무도 없었지만 지금은 한 시간을 되감은 상태이니 누군가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과연 서연이의 남동생으로 보이는 학생 하나가 나와서 택배를 받아드는 모습이 보였다.
남동생은 박스를 들고 다시 안으로 들어가더니, 20분쯤 다시 집 밖으로 나왔다. 외출 하는 것 같았다. 저렇게 나가서 한 시간 후엔 없었던 거로군. 이렇게 돌이켜보니 꽤 아슬아슬한 타이밍이었지만 덕분에 집에 없다는건 분명히 확인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숨어서 다시 두 시간 정도를 기다리니 마침내 서연이가 집으로 돌아왔다.
"왔구나, 이 년!"
나는 서연이가 자기 손으로 현관문의 잠금을 풀 때까지 기다렸다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려는 타이밍에 그녀를 멀리서 불러세웠다.
"잠시만요!"
미리 준비한 자그마한 상자 하나를 품에 끌어안고, 그녀가 알아보지 못하도록 마스크와 모자를 푹 눌러쓴 채 의이해하는 그녀에게로 달려갔다. 문을 닫으려다 어정쩡한 자세로 멈춰 선 그녀는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직은 나인 줄 눈치채지 못한 것 같다. 집 안으로 들어가버리면 인터폰으로 내 모습을 확인하고 열어주지 않을테니 이 타이밍을 노릴 수 밖에.
"택배입니다. 주서연 씨 맞으시죠?"
"아.. 네. 그런데 제 앞으로 올 택배는 없는데... 동생 앞으로 오는건 아까 동생이 받았다고 했는데..."
"아. 그건 말이죠..."
순간 나는 서연이가 어떻게 움직이거나 반응할 틈도 없이 그녀를 집 안으로 밀어버렸다. 애매하게 열려있던 대문 너머로 나동그라지는 그녀. 주변을 돌아보니 다행히 보고 있는 사람은 없다. 나는 잽싸게 집 안으로 따라들어가 문을 잠구고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그녀에게 달려들어 냅다 입을 틀어막았다. 소리라도 지르면 피곤하니까.
"소리 지르지 마. 입 뻥긋하는 날엔 너 죽어. 장난 아냐."
나는 품고 뛰어왔던 그 작은 상자 안에서 뭉툭한 물체 하나를 꺼냈다. 밀리터리 매니아들이 좋아하는 군용 나이프의 모조품이었다. 실제로 이걸로는 사람을 죽이기는커녕 무나 제대로 썰 수 있을런지 모르겠지만, 이 계집년이 모조품인지 진짜 칼인지를 눈으로만 봐서 어떻게 알겠는가. 겉모양만큼은 살벌하게 생긴 나이프를 보니 역시나 서연이년의 표정이 새하얗게 질리며 틀어막은 입이 부르르 떨린다.
"멍청하게 소리지르면서 시끄럽게 굴면 그 순간 세상 하직하는거야.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 이 년아?"
"우... 우읍... 우으읍...."
틀어막은 손 틈새로 서연이년의 침이 줄줄 새어나온다. 온 몸을 바르르 떨어대는 모습을 보니 복수의 서막이 열린 것 같아서 짜릿했다.
"알아듣냐구, 이 씨발년아!"
"흡..."
덜덜 떨며 고개를 끄덕끄덕하는 서연이. 나는 서연이의 팔 하나를 뒤로 꺾어 도망가지 못하게 제압하고는 남은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집 내부로 그녀를 끌고 들어갔다. 발냄새나는 신발장을 거쳐 안으로 들어서니 적막이 깔려있는 것이, 역시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며칠 간의 스토킹으로 얻어낸 정보 덕분에 타이밍 하나는 잘 잡은 것이다.
"자, 이제 잠시 잠들어 줘야겠다."
버둥거리는 그녀의 허리춤에 미리 준비한 전기충격기를 한방 먹여주었다. 기절할 줄 알고 악당같은 대사를 내뱉은건데 하라는 기절은 안하고 온 몸을 뒤틀며 퍼덕거리기만 한다.
"에잇 썅!"
강도를 높여 한방 더 지져주니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입을 뻐끔거리다가 몸을 추욱 늘어뜨린다. 입을 틀어막고 있던 손 틈새로 서연이의 침이 질질 새어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정신을 잃은 서연이를 번쩍 들어 그녀의 집 안으로 옮겼다. 그리고는 우선 상자 안에서 밧줄과 테이프를 꺼내어 그녀의 팔과 다리를 단단히 묶었다. 기왕 범죄자가 되기로 한거, 평소에 상상만으로 해보던 걸 오늘 다 해보자는 심산이었다. 테이프로 입까지 꽁꽁 돌려 막아놓고, 나는 천천히 그녀의 집 안을 살폈다.
집을 탐사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그녀의 방으로 추측되는 곳을 찾을 수 있었다. 양다리가 묶여 인어공주처럼 바닥에 늘어져있는 서연이의 몸을 들어 나는 그녀를 방으로 옮겼다.
이제 호된 맛을 보여줄 시간인 것이다.
- 다음 화에 계속 -
잘 부탁드립니다. 열심히 쓰겠습니다.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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