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중원무림은 그런대로 평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서녕(西寧)에는 월중난화(月中蘭花) 초가연(草嘉蓮)이라는 절세미인이 있었고, 검 한 자루로 풍운을 일으킨 목운객(牧雲客)이라는 협객과 정분을 맺고 있었다.
그런데 초가연을 한번 보게 된 고재령이 그녀의 재색에 반하여 짝사랑하게된 것이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고재령은 섭혼술로 초가연을 고성으로 유인하여 겁탈하고 말았다. 마음에도 없는 고재령의 아들을 낳은 그녀는 아들과 함께 은거하고 말았다.
그러나 초가연과의 사랑을 못 잊어 찾아다니던 목운객은 천신만고 끝에 아미산 암자에서 그녀를 찾게 되고, 그녀와 고재령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받아들여 그녀와의 사이에서 일남일녀를 낳으며 단란한 가정을 이루었다.
그런데 어느 해에 고재령은 또 다시 초가연에게 마수를 뻗혀왔다. 자신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인질로 잡고, 목운객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에게는 쇄골섭혼약을 투여하여 일 년에 한 번씩 해약을 먹지 않으면 발작과 아울러 골격이 삭는 병을 앓게 하였다.
목운객과 아들의 행복을 위하여 초가연은 고재령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고재령은 목운객에게 모종의 암약을 제시했고 목운객은 거절할 수 없었다. 사술에 병이든 아들과 초가연의 목숨을 담보로 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고재령은 자신에게 돌아온 초가연에게 환술로 사공을 익히게 하여 그녀는 사요(邪妖)의 마녀가 되었다.
목운객은 모든 것에 좌절하고 방탕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재기하여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고 무림의 한 종파를 세우는 종사가 되었다. 그가 재기할 수 있었던 것은 말없이 그를 극진히 보살핀 여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미파의 제자 월아선(月娥善)이 그녀였다.
목운객은 월아선과 재혼을 하고 화복한 생활을 하였다. 그런데 운명의 신은 목운객의 행복을 좌시하지 않았다. 십여 년이 지난 어느 날 고재령은 목운객에게 나타나 약속 이행을 요구했다. 그의 수하로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잊고 싶었던 과거가 되살아나는 목운객으로서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으나 거절 못하고 그의 수하로 들어갔다.
".....!?"
공숙이 말을 잠시 중단하고 설 무영과 소류진은 모두 말을 잃었다. 단지 분노와 격동을 감춘 침묵이 흐를 뿐이었다. 인간이 제일 무서운 것이 인간이라 하였다. 그러나 인간과 인간의 만남이란 가장 아름다워야 하거늘, 인간지간에 얽힌 욕망과 감정은 아름다움을 가장 추악하고 사악하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였다.
불연 듯 소류진은 침통한 표정으로 허공을 주시했다. 공 노인의 말은 분명히 그녀 가족에 관한 것이었다. 소류진이 어눌한 말투로 더듬거리며 흘렸다.
"월아선은 저의 어머니…! 그럼, 나의 생모가 초가연.......? 그리고 낮에 본 그들이 아버님과 오빠가 사실이네요."
"아마도......!"
설 무영은 소류진에 관한 얘기라면 남의 말 같지가 않았다. 설 무영이 연이어서 물었다.
"그렇다면 노 선배께서는 고재령이, 삼마살까지도 아수천의 거마들이라는 말씀인가요?"
"틀림이 없을 거네."
"........!"
"그게 확실하다면....... 그리고 모든 것이 아수천의 음모와 깊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면은, 초가연과 목운객은 아수천의 수하로 들어가 있을 확률이 높다."
".......!"
소류진의 두 눈에 눈물이 글썽이었다. 소류진의 기억 속에 안개 속 같은 아물아물한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쌍둥이 같은 두 오빠가 있었던 것 같은 아물아물한 기억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공 노인이 애잔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진아야! 그렇다고 좌절하지 마라. 어쩌면 살아 있어도 죽은 것이고 죽었어도 살아있는 것이나 진배없단다. 인륜지사(人倫之事) 제행무상(諸行無常)이란다."
설 무영이 소류진의 어깨를 토닥이며 그녀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다. 노인의 안색이 어두워지며 말을 이었다.
"지금 무림은 심각한 벼랑 끝으로 치닫고 있네."
"......!"
"마도맹은 단순한 마도의연맹이 아니네. 수라천의 본색일 것이야........"
설 무영이 술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키고는 물었다.
"그렇다면 정무맹은요......?"
"그건 마도맹의 암계(暗計)일 뿐이지."
"암계(暗計)......!?"
공노인도 술잔을 들이키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 수라천과는 무관한척하며 수라군으로 일거에 무림의 고수들을 멸살하는 한편, 무림의 방향을 동태를 살피자는 일석이조를 노린 것인데....... 자네 때문에 일단은 물거품이 된 것이지."
"......?"
"정도무림에는 마도의 섭혼술에 혼이 빼앗긴 첩자들이 많이 있다고 보네. 그것도 부족하다고 생각한 그들은 수라천을 공동의 적인 양 표면에 나타나 무림종파의 내막을 살피려 하네."
"그렇다고 무림은 쉽게 그들의 손아귀에 놀아날 수는 없습니다. 무림에는 아직도 구파일방과 절대종사자들이 남아 있습니다. 소출, 또한 그들을 막으려 혼신을 다할 것 입니다."
말하는 설 무영의 표정에는 굳은 결심과 신념이 흘러 넘쳤다. 공 노인이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일로 더욱 정도맹은 자네를 끌어들이려 할 것이네. 마도맹 또한 회유책으로 나올 것이네. 그들도 자네를 끌어들이기 위해서......."
".......!?"
설 무영은 힐끔 주위를 살폈다. 설 무영의 귀에 무미건조한 전음이 들려오는 것이었다.
"정과 마, 사가 구별 없는 세상......,! 진정한 의(義)란 핍박받는 자들을 구원하는 길이 아닌가......?"
"댁은 누구시오?"
"노부는 마도맹의 내당령(內堂領), 시국을 같이 의논하고 싶네. 진정한 의협이라면 객점 뒤 숲 공터로 혼자만 나오게나."
전음을 듣고 있는 설 무영은 그는 공노인과 소류진이 눈치 채지 않게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설 무영은 당당한 자세를 취하는 한편에는 두려움이 앞섰다. 그리고 내당령의 말대로 가야할지에 대해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생각에 잠겼을 때 객점으로 들어온 무리들이 옆을 지나쳐갔다.
"........!?"
무리중의 한 사나이가 그를 스쳐갔다. 설 무영은 품속을 더듬으며 흠칫 놀랐다. 누군가 격공은투(隔空隱投)의 수법으로 그의 품속에 서찰을 넣은 것이다. 모두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설 무영은 노인과 소류진을 번갈아 처다 보았다.
(이들에게는 피해를 줄 수 없는 일.......)
설 무영은 그들 몰래 다녀올 것을 결심하였다. 그는 일어서며 소류진을 향해 말했다.
"진매, 잠시만 기다려."
".......!?"
소류진은 설 무영의 행동을 의아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노인이 히쭉 웃으며 말했다.
"부르는 곳이 많거늘....... 뒷간에도 따라가려느냐?"
"어머머…!"
소류진이 얼굴을 살짝 붉히며 노인을 바라보았다. 설 무영은 슬그머니 일어나 음식 값을 계산하는 척 일어섰다. 잠시 후 그는 객잔 뒤로 통하는 문으로 나와 품속의 서찰을 꺼내 펼쳐보았다
도화성주(桃花城主) 전(前).
당금 무림의 난형난항의 지경에 시국을 의논코자 초청함.
태청진인(太淸眞人).
정무맹의 임시 맹주를 맡은 곤륜의 장문인으로 부터 온 서한이었다. 설 무영은 서한을 접어 다시 품속에 넣고 숲으로 향했다. 소담한 숲으로 가려진 안쪽으로는 갈대가 무성한 공지가 나타났다.
그가 막 공터로 들어서자 괴이한 복장을 여인이 홀연히 나타났다. 얼굴 전체를 붕대로 칭칭 감고 있지만 궁장 여의복과 흐느적거리는 몸매만으로 여인임을 알 수 있었다. 붕대 속에서 흐르는 안광은 소름이 돋을 만큼 싸늘하였다. 여인은 달빛을 받아 백의의 유생처럼 보이는 설 무영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설 무영을 바라보던 여인이 입을 열었다.
"본녀는 마도맹의 혼마(魂魔) 음혼귀(陰魂鬼)요. 거두절미 묻겠소. 공자가 정말 흑설매이고 신검성황(神劍聖皇)의 후손이오?"
"그렇소!"
설 무영은 여인을 응시하며 짤막하게 대답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여인의 눈가에 기묘한 빛이 흘렀다.
"당금 강호 무림은 평화를 바라면서 분란을 만들고 정의를 외치면서 야망에 들뜬 위선자들로 가득하오. 그들의 야망에 억울하게 짓밟히고 죽어간 세인들이 부지기수였지. 당금 무림의 정도연맹을 어찌 생각하오?"
"........!?"
설 무영은 상대의 의도를 몰라 묵묵부답하였다. 여인의 음성은 그윽하면서도 은근히 설 무영의 마음을 떠보고 있었다.
"그렇다고 마도맹이 옳다는 것은 아니네. 우리도 과격하고 실수가 없지 않아 있었지. 그러나 우리마저 침묵하고 있다면 무고한 세인들을 대변할 자도 없고, 위선의 탈을 쓴 무림에 맞서 싸우지 않으면 강호의 평화란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네."
여인의 말은 틀리지 않은 말이었다. 누군가가 불의에 앞장서야 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이치였다. 여인은 설 무영의 눈치를 살피며 마도맹을 부각시키고 있었다.
"명색이 정의를 앞세운 정도맹이 있었으나, 그들의 야망에 걸림돌이 되는 자는 가차 없이 멸살하고, 정도문파는 가통(家統)을 앞세워 여타 문파의 정통성을 무마시키려는 데에만 급급하네. 무(武)의 근본은 정당하게 자신의 권리를 보호받고, 나약한자들을 돕는데 있는 것이 아닌가?"
".......!"
"하건데 오직 자신들만의 야망과 위치를 고수하며 여타 무인들은 멸시하고, 이에 대항하면 마도니 사도니 하고 멸살시킨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일인가?"
"........!"
여인은 요지부동 자신의 말을 귀담아 듣고 있는 설 무영을 보고 내심 쾌재를 하고 있었다.
(본녀의 말에 눈빛이 흔들린다......!)
여인은 설 무영의 심적 변화를 일으키는데 성공하였다고 판단을 하였다. 여인의 음성은 더욱 온유해졌다.
"당금 무림은 썩었네. 위선의 탈을 쓴 자들로 가득하고,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온갖 술수를 쓰고 있지 않은가?"
"......!"
"그러나 우리는 다르네. 비록 마도와 사도로 천대 받지만, 모든 마도의 문파들이 스스로 힘을 키워 문파를 부흥시키고 있네. 우리는 누구위에 군림하지도 않고 간섭도 하지 않으며 단지 무공의 견해를 높여 경쟁에 패배하면 스스로의 지위를 물려줄 뿐이네. 결국은 그로인해 무공에도 발전이 있고, 평화는 존재하게 되네."
".......!"
여인이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말을 이었다.
"우리 마도맹에서는 공자와 같이 무림을 정화시키고, 발전시킬 잠룡을 필요로 하네! 맹주의 밀지를 전하겠네. 맹주께서는 그대에게 총령의 막중한 지위를 내리셨네. 우리 오두마를 지휘하고 사대 존과 대등한 위치일세."
".......?"
설 무영은 내심 놀라고 있었다. 총령이라면 마도 하늘에서 일인지하 마도무인들이 존망하는 대상의 위치였다. 설 무영은 마도맹주 라마사존(喇麻邪尊)이, 이 정도로 자신을 높이 평가 하리라고는 몰랐다. 여인은 설 무영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보며 전광석화처럼 빠르게 쾌거의 미소를 흘렸다.
"무영공자! 항상 문은 열려 있네. 자네를 위해 무림을 위해 자네를 기다릴 걸세."
서두르지 않는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흘린 여인이 득의의 미소를 흘렸다. 그 순간 침묵으로 일관하던 설 무영의 입이 열렸다.
"무학(武學)이란 정, 사, 마를 가리지 않소. 다만 어떤 마음으로 무학을 다루냐에 달렸소. 마도맹도 가면을 벗고 정심을 이루시오! 본 좌를 기다릴 필요 없이 사악한 마각을 거두시오!"
간단명료하고도 더 이상의 설득도 필요 없다는 단호한 대답이었다. 여인의 전신이 휘청거렸다. 붕대로 감겨있어 표정을 읽을 수 없지만, 아마도 무척 실망으로 인한 충격인 탓이었다. 더 이상은 말을 꺼낼 수 없는 지경으로 여인의 자만심이 여지없이 무너진 것이다. 침묵이 흐르는 공간으로 한 가닥 바람이 불어왔다. 여인은 혼자 읊조리듯 말했다.
"그 대답은 아마도 많은 혈겁을 불러일으킬 것이오........"
"......?"
돌연 여인이 설 무영에게 침통한 어조로 물어왔다.
"진아와는 정분의 사이인가요?"
"그…! 그게 무슨.......?"
급작스럽게 괴이한 여인의 질문에 설 무영은 더듬거렸다. 여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뇌까렸다.
"진아가 많이 컸구나! 알만하오......! 진아를 행복하게 해 줘요."
설 무영은 도저히 붕대로 가려진 여인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허지만 무슨 연유에선가 괴로워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불연 듯 공 노인의 말을 떠올린 설 무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진매를 어떻게 아시는지요? 혹시 초가연 노선배가 아니신지........"
"........!"
여인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채 묵묵부답이었다. 결국은 여인은 소류진의 생모임을 부정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녀는 단지 설 무영을 주시하고 있었다.
(과연 천의 안목대로 뜻을 굽히지 않는 인중지룡(人中之龍)이구나! 진아의 행복을 빈다.)
여인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설… 설마.......?"
다급해진 설 무영이 다시 확인을 하려할 때 여인은 분분히 뒤돌아서서 가고 있었다. 설 무영의 귓속으로 연연히 여인으로부터 전음이 들려왔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이 진정한 평화가 와야 할 텐데........! 요운산 천마성 금쇄옥(錦鎖獄)에 요음강시로 만들려는 여인들이 있소."
혼잣말 같지만 분명히 설 무영에게 들려주는 전음이었다. 여인이 사라진 자리에 설 무영은 한동안 넋을 잃고 서 있었다. 모든 인간의 은원은 욕망과 야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렇다고 욕망과 야망이 없는 인간은 무릇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는 미물인 것이었다.
영약도 과하면 독약이 되고 독약도 적당하면 영약이 되는 이치이거늘, 그 정도의 차이를 가늠할 수 있는 저울은 인간 각자의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는 것이기에 스스로의 욕망을 저울질할 수 없는 것이 문제였다.
설 무영은 급히 몸을 돌려 소류진이 기다리고 있을 객잔으로 향했다. 그가 객잔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에 소류진이 놀라는 표정으로 반색을 하였다.
"어디를 다녀오세요?"
설 무영이 겸연쩍은 표정으로 답변을 하였다.
"응…! 바람 좀 쏘이러......."
소류진은 의구심이 가득 찬 눈동자로 설 무영을 바라보았다. 설 무영은 그녀에게 그녀의 생모에 대한 진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다만 그녀를 더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 볼뿐이었다. 취기어린 눈빛으로 공 노인이 불쑥 그에게 물었다.
"노부는 소문을 듣고 있네만, 자네가 정녕 신검성황의 후손인가?"
음혼귀에 이어서 다시 한 번 듣는 질문이었다.
"네! 그렇습니다."
"허…! 어느 쪽도 자네를 가만히 놓아두지 않을 걸세......."
설 무영을 주시하는 공노인은 마치 모든 정황을 알고 있는 표정이다. 공 노인이 괴이한 미소를 지으며 부스스 일어섰다.
"크 흐~! 자네가 받지 않았지만, 닭다리 하나 분명히 주었네. 자네는 나에게 닭다리를 빚진 거야……."
"......!"
일어서는 공노인의 다리는 취기로 흔들렸다.
"끄윽! 언젠가 받을 걸세....... 난 이제 그만 가네. 또 봅세......."
"살펴 가십시오!"
"공숙 조심하세요!"
"그래…! 그래! 꽃향기에 너무 취하지 말고....... 끄윽!"
공노인은 연신 트림을 하며 비틀비틀 객점 문을 나서고 있었다. 설 무영이 점소이를 손짓으로 불렀다. 그는 점소이에게 객실을 예약하고는 소류진에게 태청진인의 서찰을 보여줬다. 소류진의 흑수정 같은 눈망울이 반짝거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다녀오려고요?"
"어차피 정무맹 대회에 참여한 것은 강호와 수라천에 대한 동정을 살피려함이었소. 다녀오리다!"
"........!"
설 무영이 소류진의 허리를 감아쥐고 온유한 미소를 보냈다. 그녀는 그의 손길에서 다정다감한 체취를 느꼈다.
"빨리 와요......."
설 무영을 바라보는 소류진의 봉옥이 다홍색으로 변했다.
불야성(不夜城).
곤륜의 전각이 있는 주변은 온통 불이 밝혀져 대낮같이 환한 불야성이었다. 설 무영은 곤륜의 전각이 보이는 입구의 소로를 걷고 있다. 불빛으로 인하여 주변 산등성이의 두견화의 만개한 모습이 활화산같이 선연하게 나타났다.
푸드득!
둥지를 틀던 산새가 그의 발자국 소리에 놀라 밤하늘을 날아오른다. 이따금 이름 모를 산새의 짝을 찾는 울음소리가 밤의 정취를 더하게 한다.
스 슥! 스 슥!
누군가 설 무영의 뒤편에서 숨을 몰아쉬며 올라왔다. 그는 힐끗 뒤돌아보았다. 한 쌍의 월하미화(月下美花)련가, 홍의와 황의의 경장을 걸친 두 여인이 올라오고 있었다. 은하비선 수여빈(壽汝嬪)과 아미파의 아랑비화 진이화(秦梨花)였다.
".......!"
그와 두 여인의 눈길이 마주쳤다.
"어떻게 두 분이........?"
"예전에 아미에서 무공을 전수받을 때 아는 사이예요."
설 무영의 물음에 수여빈이 미소를 담고 답하였다. 아직도 그녀는 설 무영에게 쑥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어깨를 나란히 곤륜의 입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에게 섬세한 눈길을 주며 진이화가 그에게 물었다.
"내일의 비무를 포기하셨던데, 어찌 대협 같으신 분이 포기하셨나요?"
설 무영이 정면을 주시하고 발걸음을 옮기면서 빙긋이 웃었다.
"성산비무에 참여한 것은 수호군장으로 뽑히고자함이 아니었소."
"그렇다면 오늘의 사태가 일어날 줄 사전에 예견이라도.......?"
그를 힐끗 쳐다보는 진이화의 눈동자가 초롱초롱하게 빛을 발했다.
"글쎄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하여튼 수호군을 이끌어갈 협객들은 많으니까!"
그녀의 소담한 미모의 봉옥에서 존망의 표정이 일어났다.
저벅! 저벅!
그들의 뒤편에서 또 다른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거~참! 수컷 하나에 나긋한 암컷 둘이라. 불공평하군........"
사뭇 시비조의 굵직한 남자의 투덜거리는 음성이 들려왔다. 천태만상의 사람들이 다 모이는 대회이니만큼, 그들은 못들은 양 앞만 보고 걸었다.
"애구! 몸살 나는 몸매군. 하나는 이 어른이 즐거움을 줄 수도 있거늘........"
어지간히 얼큰하게 취기까지 어린 괴음은 듣기도 민망하였다.
"어 멋…!"
진이화의 화들짝 놀라는 비명이 흘러 나왔다. 아울러 쓰러지려는 두 여인을 설 무영이 가슴에 안았다. 뒤쫓아 오던 두 괴인이 그들의 옆을 지나치면서 여인들을 와락! 밀친 것이었다.
"무슨 짓들이야!"
진이화가 괴인들에게 앙칼지게 소리를 질렀다. 그들은 걷던 걸음을 멈추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백혼쌍마괴(魄魂雙魔傀)라 일컫는 지마괴(地魔傀)와 천마괴(天魔傀), 두 마괴였다.
"대로를 가로막은 것들이 잘못이지......."
대뜸 적반하장으로 지마괴가 고성을 질렀다. 순간 설 무영과 눈길이 마주친 백혼쌍마괴는 술기운이 확! 깨며 긴장감과 경계심을 가졌다.
(헉! 놈이다.......!)
이미 그들은 봉황객점에서 마주친 적이 있고, 오늘 있었던 격전을 보아 설 무영의 엄청난 위력을 알고 있는 터였다.
".......!"
그들을 지긋이 노려보던 설 무영이 중후하게 입을 열었다.
"가시오. 아녀자들 희롱하지 말고."
"길을 막지 마시오......!"
그래도 그들은 백혼쌍마귀라는 명예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말을 뱉어냈다. 그리고는 백혼쌍마괴는 그들끼리 서로 눈길을 마주치더니 슬그머니 앞질러갔다.
"어머…!"
이번에는 수여빈이 놀라며 몸을 떨쳤다. 설 무영에게 의지했던 두 여인중 수여빈 혼자 설 무영의 가슴에 안겨 있었던 것이었다.
"호호호......! 빈(嬪)아는 대협이 좋은가 봐요."
"얘는......."
진이화의 놀림에 수여빈의 봉옥이 빨개지며 눈을 흘겼다. 진이화는 희색이 만연하여 걷고 있건만, 수여빈과 설 무영은 서먹한 감정으로 걸었다. 난장판으로 어지럽혀졌던 대회장이 정리가 되고 한산한 풍경이 낮보다 더 밝은 불빛아래에 놓여있었다.-------------------------------------------------
그런데 초가연을 한번 보게 된 고재령이 그녀의 재색에 반하여 짝사랑하게된 것이다.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고재령은 섭혼술로 초가연을 고성으로 유인하여 겁탈하고 말았다. 마음에도 없는 고재령의 아들을 낳은 그녀는 아들과 함께 은거하고 말았다.
그러나 초가연과의 사랑을 못 잊어 찾아다니던 목운객은 천신만고 끝에 아미산 암자에서 그녀를 찾게 되고, 그녀와 고재령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받아들여 그녀와의 사이에서 일남일녀를 낳으며 단란한 가정을 이루었다.
그런데 어느 해에 고재령은 또 다시 초가연에게 마수를 뻗혀왔다. 자신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인질로 잡고, 목운객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에게는 쇄골섭혼약을 투여하여 일 년에 한 번씩 해약을 먹지 않으면 발작과 아울러 골격이 삭는 병을 앓게 하였다.
목운객과 아들의 행복을 위하여 초가연은 고재령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고재령은 목운객에게 모종의 암약을 제시했고 목운객은 거절할 수 없었다. 사술에 병이든 아들과 초가연의 목숨을 담보로 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고재령은 자신에게 돌아온 초가연에게 환술로 사공을 익히게 하여 그녀는 사요(邪妖)의 마녀가 되었다.
목운객은 모든 것에 좌절하고 방탕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재기하여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고 무림의 한 종파를 세우는 종사가 되었다. 그가 재기할 수 있었던 것은 말없이 그를 극진히 보살핀 여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미파의 제자 월아선(月娥善)이 그녀였다.
목운객은 월아선과 재혼을 하고 화복한 생활을 하였다. 그런데 운명의 신은 목운객의 행복을 좌시하지 않았다. 십여 년이 지난 어느 날 고재령은 목운객에게 나타나 약속 이행을 요구했다. 그의 수하로 들어오라는 것이었다. 잊고 싶었던 과거가 되살아나는 목운객으로서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으나 거절 못하고 그의 수하로 들어갔다.
".....!?"
공숙이 말을 잠시 중단하고 설 무영과 소류진은 모두 말을 잃었다. 단지 분노와 격동을 감춘 침묵이 흐를 뿐이었다. 인간이 제일 무서운 것이 인간이라 하였다. 그러나 인간과 인간의 만남이란 가장 아름다워야 하거늘, 인간지간에 얽힌 욕망과 감정은 아름다움을 가장 추악하고 사악하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였다.
불연 듯 소류진은 침통한 표정으로 허공을 주시했다. 공 노인의 말은 분명히 그녀 가족에 관한 것이었다. 소류진이 어눌한 말투로 더듬거리며 흘렸다.
"월아선은 저의 어머니…! 그럼, 나의 생모가 초가연.......? 그리고 낮에 본 그들이 아버님과 오빠가 사실이네요."
"아마도......!"
설 무영은 소류진에 관한 얘기라면 남의 말 같지가 않았다. 설 무영이 연이어서 물었다.
"그렇다면 노 선배께서는 고재령이, 삼마살까지도 아수천의 거마들이라는 말씀인가요?"
"틀림이 없을 거네."
"........!"
"그게 확실하다면....... 그리고 모든 것이 아수천의 음모와 깊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면은, 초가연과 목운객은 아수천의 수하로 들어가 있을 확률이 높다."
".......!"
소류진의 두 눈에 눈물이 글썽이었다. 소류진의 기억 속에 안개 속 같은 아물아물한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쌍둥이 같은 두 오빠가 있었던 것 같은 아물아물한 기억이 떠오르는 것 같았다. 공 노인이 애잔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진아야! 그렇다고 좌절하지 마라. 어쩌면 살아 있어도 죽은 것이고 죽었어도 살아있는 것이나 진배없단다. 인륜지사(人倫之事) 제행무상(諸行無常)이란다."
설 무영이 소류진의 어깨를 토닥이며 그녀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다. 노인의 안색이 어두워지며 말을 이었다.
"지금 무림은 심각한 벼랑 끝으로 치닫고 있네."
"......!"
"마도맹은 단순한 마도의연맹이 아니네. 수라천의 본색일 것이야........"
설 무영이 술잔을 들어 단숨에 들이키고는 물었다.
"그렇다면 정무맹은요......?"
"그건 마도맹의 암계(暗計)일 뿐이지."
"암계(暗計)......!?"
공노인도 술잔을 들이키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네…! 수라천과는 무관한척하며 수라군으로 일거에 무림의 고수들을 멸살하는 한편, 무림의 방향을 동태를 살피자는 일석이조를 노린 것인데....... 자네 때문에 일단은 물거품이 된 것이지."
"......?"
"정도무림에는 마도의 섭혼술에 혼이 빼앗긴 첩자들이 많이 있다고 보네. 그것도 부족하다고 생각한 그들은 수라천을 공동의 적인 양 표면에 나타나 무림종파의 내막을 살피려 하네."
"그렇다고 무림은 쉽게 그들의 손아귀에 놀아날 수는 없습니다. 무림에는 아직도 구파일방과 절대종사자들이 남아 있습니다. 소출, 또한 그들을 막으려 혼신을 다할 것 입니다."
말하는 설 무영의 표정에는 굳은 결심과 신념이 흘러 넘쳤다. 공 노인이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일로 더욱 정도맹은 자네를 끌어들이려 할 것이네. 마도맹 또한 회유책으로 나올 것이네. 그들도 자네를 끌어들이기 위해서......."
".......!?"
설 무영은 힐끔 주위를 살폈다. 설 무영의 귀에 무미건조한 전음이 들려오는 것이었다.
"정과 마, 사가 구별 없는 세상......,! 진정한 의(義)란 핍박받는 자들을 구원하는 길이 아닌가......?"
"댁은 누구시오?"
"노부는 마도맹의 내당령(內堂領), 시국을 같이 의논하고 싶네. 진정한 의협이라면 객점 뒤 숲 공터로 혼자만 나오게나."
전음을 듣고 있는 설 무영은 그는 공노인과 소류진이 눈치 채지 않게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설 무영은 당당한 자세를 취하는 한편에는 두려움이 앞섰다. 그리고 내당령의 말대로 가야할지에 대해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생각에 잠겼을 때 객점으로 들어온 무리들이 옆을 지나쳐갔다.
"........!?"
무리중의 한 사나이가 그를 스쳐갔다. 설 무영은 품속을 더듬으며 흠칫 놀랐다. 누군가 격공은투(隔空隱投)의 수법으로 그의 품속에 서찰을 넣은 것이다. 모두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설 무영은 노인과 소류진을 번갈아 처다 보았다.
(이들에게는 피해를 줄 수 없는 일.......)
설 무영은 그들 몰래 다녀올 것을 결심하였다. 그는 일어서며 소류진을 향해 말했다.
"진매, 잠시만 기다려."
".......!?"
소류진은 설 무영의 행동을 의아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노인이 히쭉 웃으며 말했다.
"부르는 곳이 많거늘....... 뒷간에도 따라가려느냐?"
"어머머…!"
소류진이 얼굴을 살짝 붉히며 노인을 바라보았다. 설 무영은 슬그머니 일어나 음식 값을 계산하는 척 일어섰다. 잠시 후 그는 객잔 뒤로 통하는 문으로 나와 품속의 서찰을 꺼내 펼쳐보았다
도화성주(桃花城主) 전(前).
당금 무림의 난형난항의 지경에 시국을 의논코자 초청함.
태청진인(太淸眞人).
정무맹의 임시 맹주를 맡은 곤륜의 장문인으로 부터 온 서한이었다. 설 무영은 서한을 접어 다시 품속에 넣고 숲으로 향했다. 소담한 숲으로 가려진 안쪽으로는 갈대가 무성한 공지가 나타났다.
그가 막 공터로 들어서자 괴이한 복장을 여인이 홀연히 나타났다. 얼굴 전체를 붕대로 칭칭 감고 있지만 궁장 여의복과 흐느적거리는 몸매만으로 여인임을 알 수 있었다. 붕대 속에서 흐르는 안광은 소름이 돋을 만큼 싸늘하였다. 여인은 달빛을 받아 백의의 유생처럼 보이는 설 무영을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설 무영을 바라보던 여인이 입을 열었다.
"본녀는 마도맹의 혼마(魂魔) 음혼귀(陰魂鬼)요. 거두절미 묻겠소. 공자가 정말 흑설매이고 신검성황(神劍聖皇)의 후손이오?"
"그렇소!"
설 무영은 여인을 응시하며 짤막하게 대답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여인의 눈가에 기묘한 빛이 흘렀다.
"당금 강호 무림은 평화를 바라면서 분란을 만들고 정의를 외치면서 야망에 들뜬 위선자들로 가득하오. 그들의 야망에 억울하게 짓밟히고 죽어간 세인들이 부지기수였지. 당금 무림의 정도연맹을 어찌 생각하오?"
"........!?"
설 무영은 상대의 의도를 몰라 묵묵부답하였다. 여인의 음성은 그윽하면서도 은근히 설 무영의 마음을 떠보고 있었다.
"그렇다고 마도맹이 옳다는 것은 아니네. 우리도 과격하고 실수가 없지 않아 있었지. 그러나 우리마저 침묵하고 있다면 무고한 세인들을 대변할 자도 없고, 위선의 탈을 쓴 무림에 맞서 싸우지 않으면 강호의 평화란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네."
여인의 말은 틀리지 않은 말이었다. 누군가가 불의에 앞장서야 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이치였다. 여인은 설 무영의 눈치를 살피며 마도맹을 부각시키고 있었다.
"명색이 정의를 앞세운 정도맹이 있었으나, 그들의 야망에 걸림돌이 되는 자는 가차 없이 멸살하고, 정도문파는 가통(家統)을 앞세워 여타 문파의 정통성을 무마시키려는 데에만 급급하네. 무(武)의 근본은 정당하게 자신의 권리를 보호받고, 나약한자들을 돕는데 있는 것이 아닌가?"
".......!"
"하건데 오직 자신들만의 야망과 위치를 고수하며 여타 무인들은 멸시하고, 이에 대항하면 마도니 사도니 하고 멸살시킨다는 것이 말이나 되는 일인가?"
"........!"
여인은 요지부동 자신의 말을 귀담아 듣고 있는 설 무영을 보고 내심 쾌재를 하고 있었다.
(본녀의 말에 눈빛이 흔들린다......!)
여인은 설 무영의 심적 변화를 일으키는데 성공하였다고 판단을 하였다. 여인의 음성은 더욱 온유해졌다.
"당금 무림은 썩었네. 위선의 탈을 쓴 자들로 가득하고,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온갖 술수를 쓰고 있지 않은가?"
"......!"
"그러나 우리는 다르네. 비록 마도와 사도로 천대 받지만, 모든 마도의 문파들이 스스로 힘을 키워 문파를 부흥시키고 있네. 우리는 누구위에 군림하지도 않고 간섭도 하지 않으며 단지 무공의 견해를 높여 경쟁에 패배하면 스스로의 지위를 물려줄 뿐이네. 결국은 그로인해 무공에도 발전이 있고, 평화는 존재하게 되네."
".......!"
여인이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말을 이었다.
"우리 마도맹에서는 공자와 같이 무림을 정화시키고, 발전시킬 잠룡을 필요로 하네! 맹주의 밀지를 전하겠네. 맹주께서는 그대에게 총령의 막중한 지위를 내리셨네. 우리 오두마를 지휘하고 사대 존과 대등한 위치일세."
".......?"
설 무영은 내심 놀라고 있었다. 총령이라면 마도 하늘에서 일인지하 마도무인들이 존망하는 대상의 위치였다. 설 무영은 마도맹주 라마사존(喇麻邪尊)이, 이 정도로 자신을 높이 평가 하리라고는 몰랐다. 여인은 설 무영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보며 전광석화처럼 빠르게 쾌거의 미소를 흘렸다.
"무영공자! 항상 문은 열려 있네. 자네를 위해 무림을 위해 자네를 기다릴 걸세."
서두르지 않는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흘린 여인이 득의의 미소를 흘렸다. 그 순간 침묵으로 일관하던 설 무영의 입이 열렸다.
"무학(武學)이란 정, 사, 마를 가리지 않소. 다만 어떤 마음으로 무학을 다루냐에 달렸소. 마도맹도 가면을 벗고 정심을 이루시오! 본 좌를 기다릴 필요 없이 사악한 마각을 거두시오!"
간단명료하고도 더 이상의 설득도 필요 없다는 단호한 대답이었다. 여인의 전신이 휘청거렸다. 붕대로 감겨있어 표정을 읽을 수 없지만, 아마도 무척 실망으로 인한 충격인 탓이었다. 더 이상은 말을 꺼낼 수 없는 지경으로 여인의 자만심이 여지없이 무너진 것이다. 침묵이 흐르는 공간으로 한 가닥 바람이 불어왔다. 여인은 혼자 읊조리듯 말했다.
"그 대답은 아마도 많은 혈겁을 불러일으킬 것이오........"
"......?"
돌연 여인이 설 무영에게 침통한 어조로 물어왔다.
"진아와는 정분의 사이인가요?"
"그…! 그게 무슨.......?"
급작스럽게 괴이한 여인의 질문에 설 무영은 더듬거렸다. 여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뇌까렸다.
"진아가 많이 컸구나! 알만하오......! 진아를 행복하게 해 줘요."
설 무영은 도저히 붕대로 가려진 여인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허지만 무슨 연유에선가 괴로워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불연 듯 공 노인의 말을 떠올린 설 무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진매를 어떻게 아시는지요? 혹시 초가연 노선배가 아니신지........"
"........!"
여인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채 묵묵부답이었다. 결국은 여인은 소류진의 생모임을 부정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녀는 단지 설 무영을 주시하고 있었다.
(과연 천의 안목대로 뜻을 굽히지 않는 인중지룡(人中之龍)이구나! 진아의 행복을 빈다.)
여인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설… 설마.......?"
다급해진 설 무영이 다시 확인을 하려할 때 여인은 분분히 뒤돌아서서 가고 있었다. 설 무영의 귓속으로 연연히 여인으로부터 전음이 들려왔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이 진정한 평화가 와야 할 텐데........! 요운산 천마성 금쇄옥(錦鎖獄)에 요음강시로 만들려는 여인들이 있소."
혼잣말 같지만 분명히 설 무영에게 들려주는 전음이었다. 여인이 사라진 자리에 설 무영은 한동안 넋을 잃고 서 있었다. 모든 인간의 은원은 욕망과 야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렇다고 욕망과 야망이 없는 인간은 무릇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는 미물인 것이었다.
영약도 과하면 독약이 되고 독약도 적당하면 영약이 되는 이치이거늘, 그 정도의 차이를 가늠할 수 있는 저울은 인간 각자의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는 것이기에 스스로의 욕망을 저울질할 수 없는 것이 문제였다.
설 무영은 급히 몸을 돌려 소류진이 기다리고 있을 객잔으로 향했다. 그가 객잔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에 소류진이 놀라는 표정으로 반색을 하였다.
"어디를 다녀오세요?"
설 무영이 겸연쩍은 표정으로 답변을 하였다.
"응…! 바람 좀 쏘이러......."
소류진은 의구심이 가득 찬 눈동자로 설 무영을 바라보았다. 설 무영은 그녀에게 그녀의 생모에 대한 진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다만 그녀를 더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 볼뿐이었다. 취기어린 눈빛으로 공 노인이 불쑥 그에게 물었다.
"노부는 소문을 듣고 있네만, 자네가 정녕 신검성황의 후손인가?"
음혼귀에 이어서 다시 한 번 듣는 질문이었다.
"네! 그렇습니다."
"허…! 어느 쪽도 자네를 가만히 놓아두지 않을 걸세......."
설 무영을 주시하는 공노인은 마치 모든 정황을 알고 있는 표정이다. 공 노인이 괴이한 미소를 지으며 부스스 일어섰다.
"크 흐~! 자네가 받지 않았지만, 닭다리 하나 분명히 주었네. 자네는 나에게 닭다리를 빚진 거야……."
"......!"
일어서는 공노인의 다리는 취기로 흔들렸다.
"끄윽! 언젠가 받을 걸세....... 난 이제 그만 가네. 또 봅세......."
"살펴 가십시오!"
"공숙 조심하세요!"
"그래…! 그래! 꽃향기에 너무 취하지 말고....... 끄윽!"
공노인은 연신 트림을 하며 비틀비틀 객점 문을 나서고 있었다. 설 무영이 점소이를 손짓으로 불렀다. 그는 점소이에게 객실을 예약하고는 소류진에게 태청진인의 서찰을 보여줬다. 소류진의 흑수정 같은 눈망울이 반짝거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다녀오려고요?"
"어차피 정무맹 대회에 참여한 것은 강호와 수라천에 대한 동정을 살피려함이었소. 다녀오리다!"
"........!"
설 무영이 소류진의 허리를 감아쥐고 온유한 미소를 보냈다. 그녀는 그의 손길에서 다정다감한 체취를 느꼈다.
"빨리 와요......."
설 무영을 바라보는 소류진의 봉옥이 다홍색으로 변했다.
불야성(不夜城).
곤륜의 전각이 있는 주변은 온통 불이 밝혀져 대낮같이 환한 불야성이었다. 설 무영은 곤륜의 전각이 보이는 입구의 소로를 걷고 있다. 불빛으로 인하여 주변 산등성이의 두견화의 만개한 모습이 활화산같이 선연하게 나타났다.
푸드득!
둥지를 틀던 산새가 그의 발자국 소리에 놀라 밤하늘을 날아오른다. 이따금 이름 모를 산새의 짝을 찾는 울음소리가 밤의 정취를 더하게 한다.
스 슥! 스 슥!
누군가 설 무영의 뒤편에서 숨을 몰아쉬며 올라왔다. 그는 힐끗 뒤돌아보았다. 한 쌍의 월하미화(月下美花)련가, 홍의와 황의의 경장을 걸친 두 여인이 올라오고 있었다. 은하비선 수여빈(壽汝嬪)과 아미파의 아랑비화 진이화(秦梨花)였다.
".......!"
그와 두 여인의 눈길이 마주쳤다.
"어떻게 두 분이........?"
"예전에 아미에서 무공을 전수받을 때 아는 사이예요."
설 무영의 물음에 수여빈이 미소를 담고 답하였다. 아직도 그녀는 설 무영에게 쑥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어깨를 나란히 곤륜의 입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에게 섬세한 눈길을 주며 진이화가 그에게 물었다.
"내일의 비무를 포기하셨던데, 어찌 대협 같으신 분이 포기하셨나요?"
설 무영이 정면을 주시하고 발걸음을 옮기면서 빙긋이 웃었다.
"성산비무에 참여한 것은 수호군장으로 뽑히고자함이 아니었소."
"그렇다면 오늘의 사태가 일어날 줄 사전에 예견이라도.......?"
그를 힐끗 쳐다보는 진이화의 눈동자가 초롱초롱하게 빛을 발했다.
"글쎄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하여튼 수호군을 이끌어갈 협객들은 많으니까!"
그녀의 소담한 미모의 봉옥에서 존망의 표정이 일어났다.
저벅! 저벅!
그들의 뒤편에서 또 다른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거~참! 수컷 하나에 나긋한 암컷 둘이라. 불공평하군........"
사뭇 시비조의 굵직한 남자의 투덜거리는 음성이 들려왔다. 천태만상의 사람들이 다 모이는 대회이니만큼, 그들은 못들은 양 앞만 보고 걸었다.
"애구! 몸살 나는 몸매군. 하나는 이 어른이 즐거움을 줄 수도 있거늘........"
어지간히 얼큰하게 취기까지 어린 괴음은 듣기도 민망하였다.
"어 멋…!"
진이화의 화들짝 놀라는 비명이 흘러 나왔다. 아울러 쓰러지려는 두 여인을 설 무영이 가슴에 안았다. 뒤쫓아 오던 두 괴인이 그들의 옆을 지나치면서 여인들을 와락! 밀친 것이었다.
"무슨 짓들이야!"
진이화가 괴인들에게 앙칼지게 소리를 질렀다. 그들은 걷던 걸음을 멈추고 그들을 바라보았다. 백혼쌍마괴(魄魂雙魔傀)라 일컫는 지마괴(地魔傀)와 천마괴(天魔傀), 두 마괴였다.
"대로를 가로막은 것들이 잘못이지......."
대뜸 적반하장으로 지마괴가 고성을 질렀다. 순간 설 무영과 눈길이 마주친 백혼쌍마괴는 술기운이 확! 깨며 긴장감과 경계심을 가졌다.
(헉! 놈이다.......!)
이미 그들은 봉황객점에서 마주친 적이 있고, 오늘 있었던 격전을 보아 설 무영의 엄청난 위력을 알고 있는 터였다.
".......!"
그들을 지긋이 노려보던 설 무영이 중후하게 입을 열었다.
"가시오. 아녀자들 희롱하지 말고."
"길을 막지 마시오......!"
그래도 그들은 백혼쌍마귀라는 명예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말을 뱉어냈다. 그리고는 백혼쌍마괴는 그들끼리 서로 눈길을 마주치더니 슬그머니 앞질러갔다.
"어머…!"
이번에는 수여빈이 놀라며 몸을 떨쳤다. 설 무영에게 의지했던 두 여인중 수여빈 혼자 설 무영의 가슴에 안겨 있었던 것이었다.
"호호호......! 빈(嬪)아는 대협이 좋은가 봐요."
"얘는......."
진이화의 놀림에 수여빈의 봉옥이 빨개지며 눈을 흘겼다. 진이화는 희색이 만연하여 걷고 있건만, 수여빈과 설 무영은 서먹한 감정으로 걸었다. 난장판으로 어지럽혀졌던 대회장이 정리가 되고 한산한 풍경이 낮보다 더 밝은 불빛아래에 놓여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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