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각(白閣) 내의 안쪽에는 흑빛의 대리석 석대위에는 금의곤포(錦衣袞袍)를 두른 괴인이 서 있었다. 괴인의 뒤로는 은과 흑옥으로 만든 대형거울(巨鏡)이 있었다. 금포인이 움직일 때마다 금포인의 뒷모습이 음사한 사기가 흘러나오는 거울에 비치곤 하였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금포인은 노출되어야 할 손과 발은 온통 백색 붕대로 감겨있고, 얼굴에는 괴기한 문양이 새겨진 가면으로 가려져 있었다. 마치 목내이(木乃伊;미이라)에 금포를 걸쳐 놓은 형상이었다. 석대 밑에는 백포를 걸친 노괴(老怪)가 허리를 구부리고 서 있었다.
"마존(魔尊)! 마존의 심려를 끼쳐드려 송구스럽습니다."
마존이라고 하였다. 나이든 노괴가 금포 괴인에게 감히 어깨를 펴지도 못하고 하는 말이었다.
".......!"
그러나 금포인은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다시 백포 노괴가 허리를 구부리며 말을 했다.
"마존! 백면수라군을......!?"
"그건 안 돼!"
백포노괴의 말은 채 이어지지 못하고 금포인의 일언지하에 말문을 닫았다.
"하오면.......?"
금포인은 무언가 심사숙고 하였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에 금포인이 입을 열었다.
"물러가 있소! 다시 부를 터이니......!"
백포노괴는 다시는 말을 꺼내지 못하고 백각을 나갔다. 백포노괴가 나간 후 금포인은 대형거울을 향해 돌아섰다. 돌아선 금포인의 입에서 사술의 주문 같은 음사스러운 구결이 흘러 나왔다.
"사천환경(邪天還鏡)......심마지천심(心魔之天心)....정멸사환(正滅邪還)....!"
놀랄 일이 발생하였다. 대형거울에서 적무가 뭉게뭉게 피어나왔다. 그러자 금포인은 구결을 흘리는 목소리가 커지며 거울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대형거울의 주변은 적무로 가득 메웠다.
그때였다. 적무가 가득한 거울 속에 언뜻 그림자가 비치고 거울 속에서 지하로부터 들리는 듯 목이 쉰 파음(破音)이 들려왔다.
"마~존! 무슨 일이냐~! "
"천(天)이시여! 삼가 소하(小下)가 함부로 할 일이 아닌 것 같아서 불충을 했습니다."
"말~하라~!"
"중원에 무명객이 소란을 피웠다가 척살된 줄 알았습니다만....... 천황궁에 그자가 또 다시 나타났다 합니다. 수라백마군(修羅白魔軍)으로 추살을......."
금포인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파음이 들려왔다.
"무슨~ 소리~? "
".........!"
금포인은 말을 잇지 못한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아직~멀었군~!"
"천명(天命)!"
금포인은 전신을 바닥에 부복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하나의~ 미물 때문에~ 수라군을 이용하느냐?~ 야래향(夜來香)을~ 이용하라~!"
파음은 혀를 차더니 그림자와 같이 사라져 갔다. 적무가 걷힌 후에도 한동안 금포인은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야래향이라고 했다. 살수집단인 동영(東瀛)의 인자(忍者)들이 중원대륙에 설치한 지부였다. 이들은 누구이기에 동영의 살수집단까지도 이용하고 있는 것인가?
중원대륙의 황실도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난국이건만, 중원 무림 또한 안개 속에 묻히고 있다.
감숙(甘肅) 천수현(天水縣) 북쪽 성벽(城壁).
성벽으로 부터 맥적산으로 이르는 구릉지인 이곳에는 천민들과 걸인들이 모여 사는 흙담집과 움막이 모여 있는 곳이다. 이제 곧 첫눈이 내리려는지 북풍이 불어오고 있다. 토담 양지쪽에는 햇볕을 쪼이는 얻소(乞小) 걸노(乞老)들이 누더기 소맷자락에 손을 넣고 앉아 있었다. 어려운 시기의 닥쳐오는 겨울이 그들에게는 반가울리 없었다.
그들에게는 생(生)의 의미도 죽음(死)의 두려움도 없다. 소외되고 천대 속에, 어지러운 난국과 흉년에 도탄지고를 겪고 있는 그들이었다. 그들에게는 내일의 태양이라곤 없다. 오직 오늘 하루를 배불리 먹고, 등 따뜻하게 자는 것으로 만족할 뿐이다. 산다는 것은 어차피 죽음으로 향한 길목일 뿐이런가?
양지쪽 햇살 밑에 의욕을 잃은 채 웅크리고 있는 그들의 뿌연 눈동자에는 눈빛이 없다. 그들의 무심한 시선은 토담으로 이어진 길 한가운데로 향해있다. 세 명의 걸인들이 왁자지껄 떠들고 있었다.
"아냐! 연무관(鍊武關) 창밖에서 본건데....... 이렇게 초식을 하는 거야!"
그들은 이십 세 안팎의 나이 또래들, 손과 발로 어설픈 무술을 시연하고 있다.
"히히히…! 아닌데 이렇게 하는 거야!"
그들은 어설프지만 육합권(六合拳)을 흉내 내고 있었다.
"야! 그런 거 알면 뭐하냐! 우리가........"
그들 중 한 명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그들을 핀잔했다.
"그런 소리 마! 난 어차피 귀한 목숨도 아닌걸.....!"
"하긴......!?"
"난 내일 죽더라도 무술을 배워서 그 잘난 놈들 코를 납작하게 할 거야!"
부유한 자들에게 핍박받은 설음에 분노를 느끼는 그들이었다.
"그래! 맞아! 이래 죽어도 한 세상…! 저래 살아도 한 세상......."
그들은 손을 맞잡고 자신들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을 추스른다. 그들의 마음은 죽음을 무릅쓴 감정이건만, 토담 밑에 앉은 걸인들에게는 잡담으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그때 다섯 명의 장한들이 위풍당당하게 골목길로 들어섰다. 그들은 모두 병기를 들고 있어 무림인들임을 알 수 있었다.
장한들의 위세에 눌려 길을 가던 세인들이 모두 피했다. 허지만, 세 명의 걸인들은 그들을 보지 못하고 길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비켜! 그지 새끼들~!"
오인의 무인 중에 키가 큰 회포(灰布)의 무인이 걸인 한명의 등을 후려쳤다.
"퍽!"
등에 불의의 일격을 당한 걸인은 길바닥에 처 박혔다. 두 걸인은 어이가 없어 멀거니 키 큰 회포인을 올려다봤다.
"뭘 봐! 비키라니까!"
또 다시 회포인의 주먹이 다른 걸인의 가슴을 강타했다.
파팍!
가슴을 맞은 걸인이 울컥! 입에서 피를 토했다. 그 순간이었다. 바라보고 있던 또 한명의 걸인의 발이 회포인의 턱을 걷어찼다.
"떠그랄! 말로 하지 왜 때려!"
그러나 걸인의 발은 허공에 맴돌고 오히려 걸인은 길바닥에 주저앉았다. 길바닥에 주저앉은 걸인은 좌족이 없는 우족뿐이었다.
"잡것들이! 미쳤나?"
키 작은 회포인, 그리고 거구(巨軀)의 청포(淸布)인이 합세하여 걸인들을 무지막지하게 두들겨 패기 시작하였다. 도끼눈의 청포인과 백포인은 뒷짐을 짚고 서 있었다. 얼마가지 않아서 세 걸인들은 온몸이 피로 물들었다. 걸인들은 모두 불행하게도 모두 불구자들이다. 외눈박이, 절름발이, 좌수가 없는 외팔이였다.
어느 틈엔가 구경꾼들이 하나 둘 모여 들고 있었다. 그러나 감히 누구도 제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때였다.
"힘없는 불구자들에게 무력을 쓰다니.......!"
목직하게 내뱉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지막한 소리이지만, 심후한 저력이 실린 목소리였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목소리가 흘러 온 곳을 바라봤다. 묵인(默人)!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온통 흑의(黑衣)를 걸친 묵인이 서 있었다.
흑립을 쓴 묵인 뒤에는 다섯 명의 장한이 서 있었다. 그들은 모두 뽀얗게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어 초췌하게 보였다. 그들은 설무영과 혼마지옥(魂魔地獄)에서 탈출한 다섯 추씨 장한들이었다. 거구의 청포인이 설 무영에게 다가갔다.
"왜 참견이야? 뭐야? 넌…! 건방지게......."
"불쌍한 사람들에게, 너무하지 않소?"
"뭐가 너무해? 저 병신들이, 어른들 앞을 막았지!"
"말로 하면 되지 않소?"
"뭐 이런 것들이 다 있어?"
스르릉......!
거구의 청포인이 등에 걸친 도를 뽑아 들었다.
"감히~!"
그때 다소곳이 서 있던 추 씨 장한들이 앞으로 나섰다. 설 무영이 그들을 제재하고 말을 했다.
"도(刀)는 함부로 뽑는 것이 아니거늘......."
"혓바닥을 놀리는 것 보니 무예를 아는군. 어른을 몰라보는 그 혓바닥을 잘라주지!"
청포인의 도가 설 무영의 안면을 향하여 맹렬하게 휘둘러 왔다. 그 힘이 용맹하기 이를 데 없었다. 허지만, 설무영의 신형은 꿈쩍도 않고 서 있었다. 청포인은 희색이 만연한 표정으로 도신에 공력을 주었다.
털크렁...!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청포인의 도가 땅바닥에 뒹굴고 설 무영은 요지부동이었다. 구경을 하고 있는 군중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 무영의 탄지신통(彈指神通)이 청포인의 도를 떨어트린 것이었다. 설 무영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용비십구도(龍飛十九刀)......! 곤륜(崑崙)의 가솔들이구만......."
청포인은 기가 막혔다. 분당주(分堂主)를 맡고 있는 그가 탄지신통에 도를 놓치다니 어이가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자신이 사용한 초식을 알고 있는 것이었다. 나머지 사인의 무인들은 동료가 일초식에 무너지자, 자존심이 여지없이 무너짐을 느꼈다.
백포인이 앞으로 나섰다. 그는 눈빛이 날카로운 사목(蛇目)으로 설 무영을 바라봤다.
"무예에 잔재주가 있는 모양인데, 어디 이 어른의 일초를 받아 봐라~! 흐흐흐......!"
백포인이 백검을 빼어 들었다.
쩌..엉!
검명(劍鳴)이 울리고 검광이 번쩍! 하고 빛을 발했다. 백포인의 입가에 조소가 흘러 나왔다.
"흐흐흐…! 네가 자초한일, 부득이 목숨을 거두마!"
백포인의 일갈과 함께 번개 같은 검강이 설 무영의 허리를 두 동강이로 그어갔다. 그러나 설 무영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다음순간 용수갑을 착용한 설 무영의 우수가 나비처럼 춤을 주었다.
"헛!"
백포인의 눈은 공포로 가득하였다. 설 무영의 우수의 손가락들이 모두 검으로 변하여 검형을 이루는 것이었다. 그 검형 속에서 여러 개의 검날이 자신의 온몸을 사방에서 베어 오는 것이었다. 신체를 검처럼 사용하는 신검지경(身劍之境)이었다. 그는 검을 회수하고 피할 수도 없었다.
백포인은 설무영을 베어가던 도를 거두어 급히 검강(劍 )으로 막아갔다.
쩌저…쩡! 쾅!
검강이 부딪쳐 뇌성 같은 소리를 자아냈다.
"헉!..."
백포인은 십장을 튕겨나가 뒤로 벌렁 나둥그러졌다. 그의 옷은 갈기갈기 찢기고 가슴에는 선혈이 낭자했다. 설 무영은 흑립을 깊게 눌러쓴 채 흑빛 태산처럼 버티고 서 있었다.
"오.......!"
주위에 있던 세인들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찰나에 일어난 일인지라 어떻게 쓸어졌는지 무섭게 살기를 띠고 달려든 백포인은 중상을 입고 쓸어져 있었다. 백포인의 동료들은 어이가 없었다. 그럴수록 그들은 설 무영에 대한 살심이 깊어갔다.
"창궁무애검법(蒼穹無涯劍法)이군. 언제부터 남궁세가(南宮世家)가 무뢰한들과 어울리게 됐지?"
설 무영의 무심히 내뱉는 말은 그들의 살심을 더욱 부채질하였다.
"놈! 여기가 너의 무덤이 될 것이다!"
키가 큰 회포(灰布)인이 뇌까리며 성난 말처럼 설 무영의 앞으로 걸어 나왔다. 중상을 입은 백포인까지 다섯 명의 무인들이 한꺼번에 설 무영을 둘러쌓다. 주위의 세인들이 숨을 죽이고 바라봤다. 검과 도를 든 무인들에 둘러싸인 설 무영은 전혀 무방비 상태였다. 적막이 흐르고 있었다.
"죽어랏!"
적막을 깨는 호통과 함께 다섯 개의 검과 도가 설 무영의 몸을 도륙하려 달려들었다. 설 무영의 흑포가 바람에 나부꼈다. 검강과 도강이 설 무영의 몸을 에워싸며 우레와 같은 소리를
일으켰다.
그르르......! 스스…! 콰쾅!
순간 설 무영의 우수에서 용상검이 튕겨 나왔다가 사라지는 것을 본 사람은 없었다. 다만 수많은 검이 우박처럼 삼장이내에 쏟아졌다는 착각뿐이었다.
"헉! 크윽! 켁!"
외마디와 함께 주위는 선혈이 낭자하였다. 설 무영은 흑립을 들어 올렸다. 번뜩이는 눈빛 속에 신비로운 고독감이 흘렀다. 키큰 회포인과 거구의 청포인은 숨을 거두고 있었다. 가슴에 선혈을 흘리는 백포인은 혼이 나간 듯 설 무영을 바라보았다.
"인간이 아니다! 저승 야차(夜叉).....!"
백포인은 공포감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바득! 허나…! 잊지 않으마.......!"
키 작은 회포인과 청포인이 비틀거리며 일어나 백포인을 부축하였다. 비틀거리는 그들의 모습은 세인들의 시야로부터 사라져갔다. 그들이 사라지자, 세인들도 설 무영을 힐긋힐긋 바라보며 사라졌다.
".......!"
불구 걸인들의 시선이 설 무영을 응시하였다. 그 순간 한 걸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외쳤다.
"영(影)아다! 영아 맞지?"
외팔이 걸인이 후다닥 설 무영에게 매달렸다.
"뭐!? 어디…? 어디…?"
절름발이와 외눈박이도 그에게 달려들어 그를 바라봤다.
"아이고! 영아다! 영아가 맞다! 죽은 줄 알았던.......!"
금새, 세 명의 불구자 걸인들은 설 무영을 둘러싸고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설 무영인들 왜 모르랴! 말을 하고 싶어도 말을 못하고 들어도 듣지 않은 척 해야 하는 시절, 그러나 마음만은 눈빛으로 알아주던 막역지우, 그들이 아닌가?
외눈박이 우막(優莫) 우안이 없음. 가족; 형.(부모는 사망.)
절름발이 낙일조(駱壹照) 좌족이 없음. 가족; 모
외팔이 곽걸(郭杰) 좌수가 없음. 가족; 부. 매
설 무영은 그들과 같이 천대받고 소외당하던 시절 또한 잊을 수는 없다. 그의 몸은 중원과 변방을 헤매고 있으나 그의 마음은 부모가 횡사한 이곳을 잊을 수는 없다. 무너질 듯 버티고 있는 타야소(陀也所)의 움막과 때 묻은 친구들의 얼굴이다. 비록 그를 버버리라고 비웃으며 놀리던 그들이지만, 그들의 마음은 항상 그를 따뜻하게 해 주었다.
"잘 있었어? 친구들.......!"
설 무영이 환하게 웃으며 말을 했다.
"억! 영아가 말을 한다. 와아! 말하는 영아!"
"와아! 영아는 우리들 영웅이야!"
비록 가난하지만 순박한 그들에게는 설 무영이 영웅일수 밖에 없었다.
"조용히 해!"
외팔이 곽걸이 소리를 질렀다. 다른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하여 그를 쳐다봤다. 곽걸이 설 무영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무공을 가르쳐줘! 영아는 나의 사부다~!"
곽걸을 바라보던 절름발이 낙일조도 털썩 땅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나도…!"
또 다시 우막이 설 무영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난. 네 거다!"
설 무영은 할 말을 잃고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들은 무도의 무자도 모르고, 생사지간을 드나드는 고통을 모른다. 단지 가난에 대한 원한만으로는 무인이 될 수 없는 일이었다.
"제자로 안 받아주면 난 이 자리에서 죽을란다."
"나도…!"
"난 네 거야!"
그들은 죽음을 목정에 둔 사람들처럼 설 무영의 발에 매달렸다. 설 무영은 뒤편에 서 있는 오인의 혈사대원을 처다 보았다. 그들이라고 뾰족한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다. 미소로 답할 뿐이었다. 그들의 요구를 들어 줄 수도 거절하여 마음 상하게 할 수도 없었다.
진퇴양난의 길에서 설 무영은 생각한다. 아무리 미천한 사람도 자기 나름 데로의 특출한 계명구도(鷄鳴狗盜)가 있다. 그는 심중한 목소리를 뱉었다.
"단지. 조건이 있다!"
"뭔데…!?"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물었다.
"첫째, 가족을 버려라!"
"그리고…?"
"너희들의 목숨도 버려라!"
"또…!?"
"없다!"
"..........!"
그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설 무영은 첫째 순간의 동요하는 마음을 시험하는 것이고, 둘째는 그들의 신념과 결의를 시험하는 말이었다.
"각오가 된 사람만 가족과 이별 후, 일 시진 후에 모란장원으로 오라!"
냉혹하게 말을 마친 설 무영은 앞을 향하여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오인의 혈사대원들이 그의 뒤를 따라 토담을 돌아 사라졌다. 걸인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설 무영이 제시하는 말뜻을 헤아리고 있었다.
월야(月夜).
밤의 어둠을 밝히는 달빛이 차갑게 내려앉고 있다. 이제 닥쳐올 한파의 겨울을 맞이하려는가? 아니면 깊어가는 밤을 대비하는 것일까? 세파에 찌든 세인들의 발걸음이 분주해지고 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세인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검은 하늘을 올려다본다.
사그락! 사그락!
검은 밤하늘에 하얀 눈송이가 날아 내리고 있었다. 초설(初雪)이 내리고 있었다. 마치 하얀 솜뭉치처럼 대지위로 날아서 내려앉고 있었다. 어느새 세인들의 얼굴에는 초설처럼 미소가 깃든다.
그러나 초설의 기쁨에 설레는 세인들 사이로 무표정한 모습이 있다. 바람(風)과 비(雨)와 눈(雪), 꽃(花)의 계절도 잊어버린 설 무영이다.
그는 혼마지옥에서 나온 다섯 명의 사내와 함께 매화반점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잠시 후, 그를 기다리고 있던 오인의 유라혈사대원과 함께 매화반점을 나섰다. 매화반점을 나선 설 무영과 십 인의 사내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얼마 후, 설 무영의 모습은 폐허가 된 모란장원에 나타났다. 그곳에는 삼인의 불구자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왔는가.......?"
"..........!"
설 무영의 이 한마디는 모든 것을 대변하는 말이었다.
"목숨을 버렸느냐?"
"이미…!"
설 무영의 의미심장한 말에 그들은 서슴없이 답을 하였다. 설 무영인들 모를 리 없다. 생명의 존엄성과 귀중함에 대해서. 목숨을 버리라는 것은 또 다른 생명을 갈구하는 것이었다.
".........."
그와 삼인의 불구자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흰 눈송이들이 내려와 어깨를 덮었을 때 즈음에 그들의 모습은 모란장원에서 볼 수 없었다.
열흘이 지난 후, 설무영은 황보전장(黃寶錢莊)의 장주, 금화상군(金貨商君) 금원상(錦圓常)과 마주 앉아 있었다.
"........!?"
금원상의 두 눈에 광채가 가득하였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자단목(紫檀木) 탁자위에 가득한 희귀 보물이었다. 천축(天竺)에서 건너온 황금불상(黃金佛像), 색목국(色目國)의 오색영롱한 향로(香爐), 바다를 건너온 동영(東瀛)의 칠보탑(七寶塔), 묘강(苗疆)의 삼옥장도(三玉粧刀) 등, 그 어느 것 하나만의 값어치만으로도 능히 거성(巨城)을 몇 개 살만한 가치였다.
이 모든 것은 설 무영이 연화동의 보고(寶庫)에서 가져온 일부 고금기보(古今奇寶)이었다. 금원상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중원의 황금을 주무르는 금원상이건만, 그 자신이 무척 작아지고 있다는 공포감에 휩싸였다.
금원상은 귀금보석과 설 무영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의 앞에는 석상처럼 설 무영이 서 있었다. 그 가치를 따질 수 없는 희귀보물을 쏟아놓은 사나이는 무표정한 모습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묵인의 청년은 범할 수 없는 신비의 분위기를 쏟아 놓고 있었다.
금원상은 묵인의 청년이 낯설지만 하지 않았다. 그에게 아련히 떠 올리는 기억이 있었다. 황금선녀상이었다. 도난당했던 황금선녀상을 들고 와서 폐허가 된 도화성으로 바꾸어 간 묵인! 금원상은 희대보물과 묵인의 위압감에 눌려 겁에 질린 목소리로 물었다.
"도…도화성......!?"
"......!"
설 무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금원상의 머리가 회전하기 시작하였다. 묵인은 무엇을 요구할 것이고, 이 엄청난 보물과 바꾸어줄 재산이 자신에게 있을 것인가? 자신의 전 재산을 주어도 바꿀 수 없는 물건이었다. 그렇다면 보물에 대한 욕심을 버릴 수밖에 없는 노릇이 아닌가? 금원상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욕심을 포기하니 오히려 마음은 담담해졌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금포인은 노출되어야 할 손과 발은 온통 백색 붕대로 감겨있고, 얼굴에는 괴기한 문양이 새겨진 가면으로 가려져 있었다. 마치 목내이(木乃伊;미이라)에 금포를 걸쳐 놓은 형상이었다. 석대 밑에는 백포를 걸친 노괴(老怪)가 허리를 구부리고 서 있었다.
"마존(魔尊)! 마존의 심려를 끼쳐드려 송구스럽습니다."
마존이라고 하였다. 나이든 노괴가 금포 괴인에게 감히 어깨를 펴지도 못하고 하는 말이었다.
".......!"
그러나 금포인은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다시 백포 노괴가 허리를 구부리며 말을 했다.
"마존! 백면수라군을......!?"
"그건 안 돼!"
백포노괴의 말은 채 이어지지 못하고 금포인의 일언지하에 말문을 닫았다.
"하오면.......?"
금포인은 무언가 심사숙고 하였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에 금포인이 입을 열었다.
"물러가 있소! 다시 부를 터이니......!"
백포노괴는 다시는 말을 꺼내지 못하고 백각을 나갔다. 백포노괴가 나간 후 금포인은 대형거울을 향해 돌아섰다. 돌아선 금포인의 입에서 사술의 주문 같은 음사스러운 구결이 흘러 나왔다.
"사천환경(邪天還鏡)......심마지천심(心魔之天心)....정멸사환(正滅邪還)....!"
놀랄 일이 발생하였다. 대형거울에서 적무가 뭉게뭉게 피어나왔다. 그러자 금포인은 구결을 흘리는 목소리가 커지며 거울을 향해 무릎을 꿇었다. 대형거울의 주변은 적무로 가득 메웠다.
그때였다. 적무가 가득한 거울 속에 언뜻 그림자가 비치고 거울 속에서 지하로부터 들리는 듯 목이 쉰 파음(破音)이 들려왔다.
"마~존! 무슨 일이냐~! "
"천(天)이시여! 삼가 소하(小下)가 함부로 할 일이 아닌 것 같아서 불충을 했습니다."
"말~하라~!"
"중원에 무명객이 소란을 피웠다가 척살된 줄 알았습니다만....... 천황궁에 그자가 또 다시 나타났다 합니다. 수라백마군(修羅白魔軍)으로 추살을......."
금포인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파음이 들려왔다.
"무슨~ 소리~? "
".........!"
금포인은 말을 잇지 못한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아직~멀었군~!"
"천명(天命)!"
금포인은 전신을 바닥에 부복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하나의~ 미물 때문에~ 수라군을 이용하느냐?~ 야래향(夜來香)을~ 이용하라~!"
파음은 혀를 차더니 그림자와 같이 사라져 갔다. 적무가 걷힌 후에도 한동안 금포인은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야래향이라고 했다. 살수집단인 동영(東瀛)의 인자(忍者)들이 중원대륙에 설치한 지부였다. 이들은 누구이기에 동영의 살수집단까지도 이용하고 있는 것인가?
중원대륙의 황실도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난국이건만, 중원 무림 또한 안개 속에 묻히고 있다.
감숙(甘肅) 천수현(天水縣) 북쪽 성벽(城壁).
성벽으로 부터 맥적산으로 이르는 구릉지인 이곳에는 천민들과 걸인들이 모여 사는 흙담집과 움막이 모여 있는 곳이다. 이제 곧 첫눈이 내리려는지 북풍이 불어오고 있다. 토담 양지쪽에는 햇볕을 쪼이는 얻소(乞小) 걸노(乞老)들이 누더기 소맷자락에 손을 넣고 앉아 있었다. 어려운 시기의 닥쳐오는 겨울이 그들에게는 반가울리 없었다.
그들에게는 생(生)의 의미도 죽음(死)의 두려움도 없다. 소외되고 천대 속에, 어지러운 난국과 흉년에 도탄지고를 겪고 있는 그들이었다. 그들에게는 내일의 태양이라곤 없다. 오직 오늘 하루를 배불리 먹고, 등 따뜻하게 자는 것으로 만족할 뿐이다. 산다는 것은 어차피 죽음으로 향한 길목일 뿐이런가?
양지쪽 햇살 밑에 의욕을 잃은 채 웅크리고 있는 그들의 뿌연 눈동자에는 눈빛이 없다. 그들의 무심한 시선은 토담으로 이어진 길 한가운데로 향해있다. 세 명의 걸인들이 왁자지껄 떠들고 있었다.
"아냐! 연무관(鍊武關) 창밖에서 본건데....... 이렇게 초식을 하는 거야!"
그들은 이십 세 안팎의 나이 또래들, 손과 발로 어설픈 무술을 시연하고 있다.
"히히히…! 아닌데 이렇게 하는 거야!"
그들은 어설프지만 육합권(六合拳)을 흉내 내고 있었다.
"야! 그런 거 알면 뭐하냐! 우리가........"
그들 중 한 명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그들을 핀잔했다.
"그런 소리 마! 난 어차피 귀한 목숨도 아닌걸.....!"
"하긴......!?"
"난 내일 죽더라도 무술을 배워서 그 잘난 놈들 코를 납작하게 할 거야!"
부유한 자들에게 핍박받은 설음에 분노를 느끼는 그들이었다.
"그래! 맞아! 이래 죽어도 한 세상…! 저래 살아도 한 세상......."
그들은 손을 맞잡고 자신들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을 추스른다. 그들의 마음은 죽음을 무릅쓴 감정이건만, 토담 밑에 앉은 걸인들에게는 잡담으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그때 다섯 명의 장한들이 위풍당당하게 골목길로 들어섰다. 그들은 모두 병기를 들고 있어 무림인들임을 알 수 있었다.
장한들의 위세에 눌려 길을 가던 세인들이 모두 피했다. 허지만, 세 명의 걸인들은 그들을 보지 못하고 길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비켜! 그지 새끼들~!"
오인의 무인 중에 키가 큰 회포(灰布)의 무인이 걸인 한명의 등을 후려쳤다.
"퍽!"
등에 불의의 일격을 당한 걸인은 길바닥에 처 박혔다. 두 걸인은 어이가 없어 멀거니 키 큰 회포인을 올려다봤다.
"뭘 봐! 비키라니까!"
또 다시 회포인의 주먹이 다른 걸인의 가슴을 강타했다.
파팍!
가슴을 맞은 걸인이 울컥! 입에서 피를 토했다. 그 순간이었다. 바라보고 있던 또 한명의 걸인의 발이 회포인의 턱을 걷어찼다.
"떠그랄! 말로 하지 왜 때려!"
그러나 걸인의 발은 허공에 맴돌고 오히려 걸인은 길바닥에 주저앉았다. 길바닥에 주저앉은 걸인은 좌족이 없는 우족뿐이었다.
"잡것들이! 미쳤나?"
키 작은 회포인, 그리고 거구(巨軀)의 청포(淸布)인이 합세하여 걸인들을 무지막지하게 두들겨 패기 시작하였다. 도끼눈의 청포인과 백포인은 뒷짐을 짚고 서 있었다. 얼마가지 않아서 세 걸인들은 온몸이 피로 물들었다. 걸인들은 모두 불행하게도 모두 불구자들이다. 외눈박이, 절름발이, 좌수가 없는 외팔이였다.
어느 틈엔가 구경꾼들이 하나 둘 모여 들고 있었다. 그러나 감히 누구도 제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때였다.
"힘없는 불구자들에게 무력을 쓰다니.......!"
목직하게 내뱉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지막한 소리이지만, 심후한 저력이 실린 목소리였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목소리가 흘러 온 곳을 바라봤다. 묵인(默人)!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온통 흑의(黑衣)를 걸친 묵인이 서 있었다.
흑립을 쓴 묵인 뒤에는 다섯 명의 장한이 서 있었다. 그들은 모두 뽀얗게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어 초췌하게 보였다. 그들은 설무영과 혼마지옥(魂魔地獄)에서 탈출한 다섯 추씨 장한들이었다. 거구의 청포인이 설 무영에게 다가갔다.
"왜 참견이야? 뭐야? 넌…! 건방지게......."
"불쌍한 사람들에게, 너무하지 않소?"
"뭐가 너무해? 저 병신들이, 어른들 앞을 막았지!"
"말로 하면 되지 않소?"
"뭐 이런 것들이 다 있어?"
스르릉......!
거구의 청포인이 등에 걸친 도를 뽑아 들었다.
"감히~!"
그때 다소곳이 서 있던 추 씨 장한들이 앞으로 나섰다. 설 무영이 그들을 제재하고 말을 했다.
"도(刀)는 함부로 뽑는 것이 아니거늘......."
"혓바닥을 놀리는 것 보니 무예를 아는군. 어른을 몰라보는 그 혓바닥을 잘라주지!"
청포인의 도가 설 무영의 안면을 향하여 맹렬하게 휘둘러 왔다. 그 힘이 용맹하기 이를 데 없었다. 허지만, 설무영의 신형은 꿈쩍도 않고 서 있었다. 청포인은 희색이 만연한 표정으로 도신에 공력을 주었다.
털크렁...!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청포인의 도가 땅바닥에 뒹굴고 설 무영은 요지부동이었다. 구경을 하고 있는 군중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 무영의 탄지신통(彈指神通)이 청포인의 도를 떨어트린 것이었다. 설 무영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용비십구도(龍飛十九刀)......! 곤륜(崑崙)의 가솔들이구만......."
청포인은 기가 막혔다. 분당주(分堂主)를 맡고 있는 그가 탄지신통에 도를 놓치다니 어이가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자신이 사용한 초식을 알고 있는 것이었다. 나머지 사인의 무인들은 동료가 일초식에 무너지자, 자존심이 여지없이 무너짐을 느꼈다.
백포인이 앞으로 나섰다. 그는 눈빛이 날카로운 사목(蛇目)으로 설 무영을 바라봤다.
"무예에 잔재주가 있는 모양인데, 어디 이 어른의 일초를 받아 봐라~! 흐흐흐......!"
백포인이 백검을 빼어 들었다.
쩌..엉!
검명(劍鳴)이 울리고 검광이 번쩍! 하고 빛을 발했다. 백포인의 입가에 조소가 흘러 나왔다.
"흐흐흐…! 네가 자초한일, 부득이 목숨을 거두마!"
백포인의 일갈과 함께 번개 같은 검강이 설 무영의 허리를 두 동강이로 그어갔다. 그러나 설 무영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다음순간 용수갑을 착용한 설 무영의 우수가 나비처럼 춤을 주었다.
"헛!"
백포인의 눈은 공포로 가득하였다. 설 무영의 우수의 손가락들이 모두 검으로 변하여 검형을 이루는 것이었다. 그 검형 속에서 여러 개의 검날이 자신의 온몸을 사방에서 베어 오는 것이었다. 신체를 검처럼 사용하는 신검지경(身劍之境)이었다. 그는 검을 회수하고 피할 수도 없었다.
백포인은 설무영을 베어가던 도를 거두어 급히 검강(劍 )으로 막아갔다.
쩌저…쩡! 쾅!
검강이 부딪쳐 뇌성 같은 소리를 자아냈다.
"헉!..."
백포인은 십장을 튕겨나가 뒤로 벌렁 나둥그러졌다. 그의 옷은 갈기갈기 찢기고 가슴에는 선혈이 낭자했다. 설 무영은 흑립을 깊게 눌러쓴 채 흑빛 태산처럼 버티고 서 있었다.
"오.......!"
주위에 있던 세인들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였다. 찰나에 일어난 일인지라 어떻게 쓸어졌는지 무섭게 살기를 띠고 달려든 백포인은 중상을 입고 쓸어져 있었다. 백포인의 동료들은 어이가 없었다. 그럴수록 그들은 설 무영에 대한 살심이 깊어갔다.
"창궁무애검법(蒼穹無涯劍法)이군. 언제부터 남궁세가(南宮世家)가 무뢰한들과 어울리게 됐지?"
설 무영의 무심히 내뱉는 말은 그들의 살심을 더욱 부채질하였다.
"놈! 여기가 너의 무덤이 될 것이다!"
키가 큰 회포(灰布)인이 뇌까리며 성난 말처럼 설 무영의 앞으로 걸어 나왔다. 중상을 입은 백포인까지 다섯 명의 무인들이 한꺼번에 설 무영을 둘러쌓다. 주위의 세인들이 숨을 죽이고 바라봤다. 검과 도를 든 무인들에 둘러싸인 설 무영은 전혀 무방비 상태였다. 적막이 흐르고 있었다.
"죽어랏!"
적막을 깨는 호통과 함께 다섯 개의 검과 도가 설 무영의 몸을 도륙하려 달려들었다. 설 무영의 흑포가 바람에 나부꼈다. 검강과 도강이 설 무영의 몸을 에워싸며 우레와 같은 소리를
일으켰다.
그르르......! 스스…! 콰쾅!
순간 설 무영의 우수에서 용상검이 튕겨 나왔다가 사라지는 것을 본 사람은 없었다. 다만 수많은 검이 우박처럼 삼장이내에 쏟아졌다는 착각뿐이었다.
"헉! 크윽! 켁!"
외마디와 함께 주위는 선혈이 낭자하였다. 설 무영은 흑립을 들어 올렸다. 번뜩이는 눈빛 속에 신비로운 고독감이 흘렀다. 키큰 회포인과 거구의 청포인은 숨을 거두고 있었다. 가슴에 선혈을 흘리는 백포인은 혼이 나간 듯 설 무영을 바라보았다.
"인간이 아니다! 저승 야차(夜叉).....!"
백포인은 공포감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바득! 허나…! 잊지 않으마.......!"
키 작은 회포인과 청포인이 비틀거리며 일어나 백포인을 부축하였다. 비틀거리는 그들의 모습은 세인들의 시야로부터 사라져갔다. 그들이 사라지자, 세인들도 설 무영을 힐긋힐긋 바라보며 사라졌다.
".......!"
불구 걸인들의 시선이 설 무영을 응시하였다. 그 순간 한 걸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외쳤다.
"영(影)아다! 영아 맞지?"
외팔이 걸인이 후다닥 설 무영에게 매달렸다.
"뭐!? 어디…? 어디…?"
절름발이와 외눈박이도 그에게 달려들어 그를 바라봤다.
"아이고! 영아다! 영아가 맞다! 죽은 줄 알았던.......!"
금새, 세 명의 불구자 걸인들은 설 무영을 둘러싸고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설 무영인들 왜 모르랴! 말을 하고 싶어도 말을 못하고 들어도 듣지 않은 척 해야 하는 시절, 그러나 마음만은 눈빛으로 알아주던 막역지우, 그들이 아닌가?
외눈박이 우막(優莫) 우안이 없음. 가족; 형.(부모는 사망.)
절름발이 낙일조(駱壹照) 좌족이 없음. 가족; 모
외팔이 곽걸(郭杰) 좌수가 없음. 가족; 부. 매
설 무영은 그들과 같이 천대받고 소외당하던 시절 또한 잊을 수는 없다. 그의 몸은 중원과 변방을 헤매고 있으나 그의 마음은 부모가 횡사한 이곳을 잊을 수는 없다. 무너질 듯 버티고 있는 타야소(陀也所)의 움막과 때 묻은 친구들의 얼굴이다. 비록 그를 버버리라고 비웃으며 놀리던 그들이지만, 그들의 마음은 항상 그를 따뜻하게 해 주었다.
"잘 있었어? 친구들.......!"
설 무영이 환하게 웃으며 말을 했다.
"억! 영아가 말을 한다. 와아! 말하는 영아!"
"와아! 영아는 우리들 영웅이야!"
비록 가난하지만 순박한 그들에게는 설 무영이 영웅일수 밖에 없었다.
"조용히 해!"
외팔이 곽걸이 소리를 질렀다. 다른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하여 그를 쳐다봤다. 곽걸이 설 무영 앞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무공을 가르쳐줘! 영아는 나의 사부다~!"
곽걸을 바라보던 절름발이 낙일조도 털썩 땅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나도…!"
또 다시 우막이 설 무영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난. 네 거다!"
설 무영은 할 말을 잃고 그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들은 무도의 무자도 모르고, 생사지간을 드나드는 고통을 모른다. 단지 가난에 대한 원한만으로는 무인이 될 수 없는 일이었다.
"제자로 안 받아주면 난 이 자리에서 죽을란다."
"나도…!"
"난 네 거야!"
그들은 죽음을 목정에 둔 사람들처럼 설 무영의 발에 매달렸다. 설 무영은 뒤편에 서 있는 오인의 혈사대원을 처다 보았다. 그들이라고 뾰족한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다. 미소로 답할 뿐이었다. 그들의 요구를 들어 줄 수도 거절하여 마음 상하게 할 수도 없었다.
진퇴양난의 길에서 설 무영은 생각한다. 아무리 미천한 사람도 자기 나름 데로의 특출한 계명구도(鷄鳴狗盜)가 있다. 그는 심중한 목소리를 뱉었다.
"단지. 조건이 있다!"
"뭔데…!?"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물었다.
"첫째, 가족을 버려라!"
"그리고…?"
"너희들의 목숨도 버려라!"
"또…!?"
"없다!"
"..........!"
그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설 무영은 첫째 순간의 동요하는 마음을 시험하는 것이고, 둘째는 그들의 신념과 결의를 시험하는 말이었다.
"각오가 된 사람만 가족과 이별 후, 일 시진 후에 모란장원으로 오라!"
냉혹하게 말을 마친 설 무영은 앞을 향하여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오인의 혈사대원들이 그의 뒤를 따라 토담을 돌아 사라졌다. 걸인들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설 무영이 제시하는 말뜻을 헤아리고 있었다.
월야(月夜).
밤의 어둠을 밝히는 달빛이 차갑게 내려앉고 있다. 이제 닥쳐올 한파의 겨울을 맞이하려는가? 아니면 깊어가는 밤을 대비하는 것일까? 세파에 찌든 세인들의 발걸음이 분주해지고 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세인들이 발걸음을 멈추고 검은 하늘을 올려다본다.
사그락! 사그락!
검은 밤하늘에 하얀 눈송이가 날아 내리고 있었다. 초설(初雪)이 내리고 있었다. 마치 하얀 솜뭉치처럼 대지위로 날아서 내려앉고 있었다. 어느새 세인들의 얼굴에는 초설처럼 미소가 깃든다.
그러나 초설의 기쁨에 설레는 세인들 사이로 무표정한 모습이 있다. 바람(風)과 비(雨)와 눈(雪), 꽃(花)의 계절도 잊어버린 설 무영이다.
그는 혼마지옥에서 나온 다섯 명의 사내와 함께 매화반점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잠시 후, 그를 기다리고 있던 오인의 유라혈사대원과 함께 매화반점을 나섰다. 매화반점을 나선 설 무영과 십 인의 사내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얼마 후, 설 무영의 모습은 폐허가 된 모란장원에 나타났다. 그곳에는 삼인의 불구자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왔는가.......?"
"..........!"
설 무영의 이 한마디는 모든 것을 대변하는 말이었다.
"목숨을 버렸느냐?"
"이미…!"
설 무영의 의미심장한 말에 그들은 서슴없이 답을 하였다. 설 무영인들 모를 리 없다. 생명의 존엄성과 귀중함에 대해서. 목숨을 버리라는 것은 또 다른 생명을 갈구하는 것이었다.
".........."
그와 삼인의 불구자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흰 눈송이들이 내려와 어깨를 덮었을 때 즈음에 그들의 모습은 모란장원에서 볼 수 없었다.
열흘이 지난 후, 설무영은 황보전장(黃寶錢莊)의 장주, 금화상군(金貨商君) 금원상(錦圓常)과 마주 앉아 있었다.
"........!?"
금원상의 두 눈에 광채가 가득하였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자단목(紫檀木) 탁자위에 가득한 희귀 보물이었다. 천축(天竺)에서 건너온 황금불상(黃金佛像), 색목국(色目國)의 오색영롱한 향로(香爐), 바다를 건너온 동영(東瀛)의 칠보탑(七寶塔), 묘강(苗疆)의 삼옥장도(三玉粧刀) 등, 그 어느 것 하나만의 값어치만으로도 능히 거성(巨城)을 몇 개 살만한 가치였다.
이 모든 것은 설 무영이 연화동의 보고(寶庫)에서 가져온 일부 고금기보(古今奇寶)이었다. 금원상은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중원의 황금을 주무르는 금원상이건만, 그 자신이 무척 작아지고 있다는 공포감에 휩싸였다.
금원상은 귀금보석과 설 무영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의 앞에는 석상처럼 설 무영이 서 있었다. 그 가치를 따질 수 없는 희귀보물을 쏟아놓은 사나이는 무표정한 모습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묵인의 청년은 범할 수 없는 신비의 분위기를 쏟아 놓고 있었다.
금원상은 묵인의 청년이 낯설지만 하지 않았다. 그에게 아련히 떠 올리는 기억이 있었다. 황금선녀상이었다. 도난당했던 황금선녀상을 들고 와서 폐허가 된 도화성으로 바꾸어 간 묵인! 금원상은 희대보물과 묵인의 위압감에 눌려 겁에 질린 목소리로 물었다.
"도…도화성......!?"
"......!"
설 무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금원상의 머리가 회전하기 시작하였다. 묵인은 무엇을 요구할 것이고, 이 엄청난 보물과 바꾸어줄 재산이 자신에게 있을 것인가? 자신의 전 재산을 주어도 바꿀 수 없는 물건이었다. 그렇다면 보물에 대한 욕심을 버릴 수밖에 없는 노릇이 아닌가? 금원상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고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욕심을 포기하니 오히려 마음은 담담해졌다.---------------------------------------------------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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