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파의 맹주와 종사. 그리고 협객들이 소개 되는 사이에 설 무영은 의아한 시선으로 연단을 주시하고 있었다. 천마성의 성주 천마귀존이라는 마두의 모습이 어딘가 낯설지가 않았다.
(누구일까? 저자는 분명 역골신공을 익혀 변장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누구일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설 무영의 신안공(神眼功)으로 웬만한 역골신공으로 변장한 모습을 알 수가 있었다. 그런데 천마귀존은 분명히 안면을 바꾼 모습이었다.
(내가 잘못 본 것은 아닐까........?)
설 무영이 의구심을 일으키는 동안 줄지어 나온 각 종파의 종사와 사람들이 모두 착석한 후 회무(會務)를 담당한 곤륜의 도인이 연단위에 올라섰다.
"우선 정수맹 대회를 이끌 임시 맹주를 모셔야 하는바 정도맹 맹주를 대신한 소림의 천선대사와 마도맹 맹주이신 라마사존께서 본 곤륜의 장문인이신 태청진인을 천거 하셨습니다. 혹시 이의가 있으신 분이 있으면 말씀하여 주십시오!"
".......!"
허나 두 맹주가 동의한바 누구도 뒤늦게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나이가 육십을 넘겨 흰 수염을 늘어트린 태청진인(太淸眞人)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둥! 둥! 둥!
다시 대명고가 울려 퍼지고, 태청진인이 앞으로 나와 연단위에 올라섰다.
"감히 본 좌가 정, 사, 마를 대표하는 정의무림사수연맹의 임시 맹주로 대회가 시작됨을 선언합니다! 여기에 참석하시고 등록명부에 등록을 한 각 종파는 정수맹에 가입한 것으로 하고 정수맹이 정식으로 출범한 것을 선포합니다. 이에 이의가 있으신 분께서는 고견을 말씀하여 주시기 바라오."
".......!"
태청진인은 잠시 장내를 둘러보았다. 허지만 일부러 소란을 만들려는 사람은 없었다.
"그럼, 삼일간의 대회 일정을 시작하겠습니다. 오늘부터 이틀간의 성산비무대전을 치러 수호군을 이끌 잠룡을 선발하고 회합을 통해 맹주를 선발하겠습니다."
태청진인의 대회 선포에 이어 다시 회무를 맡은 곤륜도인이 올라섰다.
"성산비무대전에 신청한 사람은 모두 일백 십이 인이오. 일백 십이 인은 무작위 추천에 의해 비무를 하고 승자승(勝者昇)의 원칙으로 최종 비무가 펼쳐 질 것입니다. 잠시 후 호명되는 분은 수서에 의해 연무대로 오르시기 바랍니다. 비무에 관한 다른 원칙은 대자보를 참고 하시오."
소란스럽던 대회 시작 분위기와는 달리 순연하게 이루어졌다. 설 무영과 소류진은 사람들이 모여 쳐다보고 있는 대자보 앞으로 다가갔다.
다음과 같이 승패를 결정한다.
첫째, 본 비무는 백초 이내로 한정한다. 백초를 넘길 때는 판결에 의한다.
첫째, 패자가 스스로 패를 인정할 때는 비무에 관계없이 승자로 한다. 단 본인이 아닌 비무자 측 일행이 흰 수건을 던져 패배를 자인함도 인정한다.
둘째, 제삼자의 암계의 협력을 받은 자는 패자로 한다.
넷째, 본 비무 중에 당한 상처나 살생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는다.
정무맹 비무관
두~둥! 둥…둥…둥!
드디어 비무대전이 시작되는 대명고가 울렸다.
"구공지객과 사혼추는 갑 무대로 오르시오!"
"열비수와 시광검객은 을 무대로......."
비무자의 명단들이 속속히 불리고 사람들이 연무대 근처로 이리저리 이동을 하였다.
휘 리릭! 푸 르륵!
비무자들은 나름대로의 독가무공의 경공을 펼쳐 비무대로 올라섰다. 설 무영의 시선이 병의 비무대로 향했다. 설 무영이 안면이 있는 능서문(凌瑞雯)이 호쾌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묵검을 등에 맨 능서문은 청색의 무복을 걸친 채 긴장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상대는 체격이 우람한 사나이로서 한 자루의 패도를 불끈 쥐고 회포를 휘날리며 있었다.
그들은 잠시 상대를 응시하고 서 있다가 비무대를 중심으로 조금씩 원을 그리며 돌았다.
번쩍!
패도의 도광이 햇살에 번쩍이고 사나이의 몸이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호랑이와 같은 신천호패(身天虎覇)의 기세로 능서문을 향해 짓쳐갔다. 허나 능서문은 발검(拔劍)을 하지 않은 채 슬쩍 몸을 비틀어 능파미보(凌波迷步)의 수법으로 상대의 일초를 허초로 만들었다. 상승무공이 아니면 불가한 수법이었다.
일초식이 허초로 유발되자 자존심을 상한 사나이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럼 어디…?"
사나이는 몸을 쓰러지듯 몸을 날려 능서문의 하체를 회중포월(回中包月)의 수법으로 패도를 휘두르자 회오리가 지면으로 부터 일어나 능서문의 전신을 감쌌다. 아울러 사나이는 좌수로 맹렬한 광표장(狂彪掌)을 발산하였다.
크~르르! 콰아!
사람들은 극한 살수를 펼치는 광경에 경악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어느새 발검한 능서문의 검강이 사나이의 장과 도의 강기를 부수고 무서운 검기로 사나이에게로 쏟아져 갔다. 능서문의 비천류검법(飛天流劍法)이었다.
째~쟁쨍! 쩔그렁!
사나이는 대여섯 바퀴를 굴러 나뒹굴었다.
와아.......!
세인들의 탄성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사나이의 패도가 여지없이 조각나서 흩어져 있었다.
"내가 패했소!"
입가에 선혈을 먹음은 사나이가 두 손을 포권하고 비무대에서 내려갔다.
설 무영은 각 비무대를 두루 살펴보다가 병무대(丙武臺)에서 시선을 멈추었다. 천마성의 천마비랑(天魔飛郞)과 공동파의 화엄걸(華奄傑)의 비무가 벌어지고 있었다. 화엄걸은 이미 패색이 짙었다. 장력의 대결에서 두 사람은 모두 부동의 자세였으나 화엄걸의 발밑이 움푹 패어있었고, 두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아! 이제야 생각난다.........)
설 무영은 혼자 희소를 터트리며 화엄걸과 천마귀존을 번갈아 올려다봤다. 설 무영은 소류진에게 전음을 보냈다.
"진매! 병무대(丙武臺)의 천마비랑(天魔飛郞)과 연단의 천마귀존을 보고 느낀 것이 없소?"
"......?"
잠시 머뭇거리던 소류진의 눈빛이 반짝였다.
"저들은 옥문현의 매화반점(梅花飯店)......?"
"진매도 그리 봤소? 궁조민(宮朝敏)과 궁철상(宮哲象)........"
그렇다. 그들은 매화반점의 전주인 궁조민과 그가 사라진 후 양자로 매화반점을 운영하다가 행방이 모연해진 궁철상이었다.
"네! 소저의 짐작으로는........"
"그들이 어찌 마도의 종사자가 되었을까?"
그러나 설 무영은 분연히 일어나는 의구심을 풀 수는 없었다. 또 다른 한쪽에서는 도(刀)와 창(槍)의 강기가 난무하는 비무가 펼쳐지고 있었다. 여섯 곳의 비무가 이루어질 때마다 희귀한 무공들과 많은 격차를 갖은 무인들의 공력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유발하기에 충분하였다.
"무영객과 미라철마(彌羅鐵魔)는 정무대(丁武臺)로 오르시오."
문득 설 무영을 호명하는 회무도인의 목청을 돋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류진은 공연히 가슴이 두근거리며 설 무영을 바라보았다. 허나 짐짓 설 무영은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람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우~~! 우~
함성과 함께 세인들의 시선이 비어있는 정무대(丁武臺)를 향했다.
희~리릭!
하나의 검은 인영이 비무대 위로 날았다. 짙은 눈썹에 다부지게 각진 용모와 우람한 체격위에 흑색 도포의 청년 미라철마였다.
스 스슥!
한 가닥 구름이 흐르듯 백포자락이 비무대에 나부꼈다.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오관이 반듯한 영준한 모습에 지극히 청기 한 모습을 한 설 무영이었다. 그들은 서로를 응시한 채 부동의 자세였다. 단지 흑과 백의 도포가 흐느적거릴 뿐이었다.
세인들마저 숨을 죽이고 비무대 위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침묵을 지키지만 암중으로 상대의 공력을 측정하고 있는 것이었다. 연단의 각 종파의 종사들의 시선도 정무대(丁武臺)를 향하고 있었다. 미라철마의 뱀과 같은 사목(蛇目)이 꿈틀거렸다.
"놈! 쉬운 상대는 아니다. 속전속결뿐이다!"
미라철마는 내심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공력을 끌어 올렸다. 서서히 미라철마의 양손이 설 무영을 향해 뻗쳤다. 미라철마의 두 손에서 사악한 녹색 운무가 피어났다.
"우우…! 녹수마장(綠手魔掌)이다........"
미라철마는 처음부터 절전되었다고 알고 있는 극히 악랄한 마공을 실전한 것이었다.
번쩍! 콰르릉!
갑자기 비무대를 뒤흔드는 요란한 굉음을 동반한 녹무(綠霧)가 미라철마의 장심에서 쏟아져 나갔다. 녹무의 강기는 설 무영의 전신을 녹일 듯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뿜어져 나갔다.
"허~억! 극마 장공이다.......!"
세인들의 표정이 경악으로 긴장하였다. 허나 설 무영은 요지부동이었고 흰 도포만 유유히 나부끼고 있었다. 그런데 설 무영의 전신에서 오색 운무가 뿜어져 나와 녹수마장의 녹무를 튕겨 내는 것이었다.
연단에 있던 소림의 장문인이 소성을 발했다.
"헛! 저것은 본 소림의 절전무공인 건곤자전강(乾坤紫電 )........."
이어서 천마귀존(天魔鬼尊)이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항마선공을 익히다니........!"
녹무를 마주쳐간 오색 운무는 도리어 녹수마장의 강기보다 더한 공력으로 마라철마에게 덮쳐 가는 것이었다. 설 무영은 미라철마가 강력한 마공으로 공격하여 올 것을 알고 건곤자전강의 호신강기를 일으켜 보호하는 반면 반탄강기로 상대를 제압했던 것이다.
"크…헉!"
미라철마는 주춤거리며 다섯 걸음을 뒤로 물러났다. 그의 앞가슴은 갈래갈래 찢기고 입에서 토해낸 선혈이 낭자하였다. 그는 단 일 초식에, 그것도 자신의 공력을 되받아 패하고 만 것이었다. 놀람으로 홉뜬 미라철마의 두 눈동자는 분통함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내 녹수마장을 맞받다니......)
미라철마가 누구인가? 당금 중원을 폭풍같이 몰아치고 있는 마도의 마룡 중 하나였다. 정도의 종사자들도 두려워하는 두 마룡이었다. 그런데 세인들이 마룡이라고 일컫던 무영객이 정종무공을 달성한 자일 줄은 미라철마 뿐만 아니라, 세인들도 몰랐던 일이었다.
미라철마는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상대로부터 반탄되어 온 내공의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심후한 것이었다. 미라철마는 이를 바드득! 갈았다.
"놈! 결코 네놈을 죽이고야 말겠다."
설 무영을 바라보는 마라철마의 두 눈은 핏빛으로 이글이글 타 올랐다.
스~르릉! 쩌정!
혈광이 반짝였다. 그가 활처럼 휘어진 마검을 빼어든 것이었다. 미라철마의 몸이 좌측으로 한 발자국 움직였다. 그림같이 동요도 없는 설 무영의 몸이 좌측으로 옮겨 있었다. 미라철마의 마검이 번뜩이며 침묵을 깨고 일곱 개의 혈광이 피어났다.
설 무영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흘렀다. 삼십년 전 중원을 일대 마의 지옥으로 이끌었던 오마(五磨)중 검마(劍魔)의 마혼강살검(魔魂 乷劍)이었다.
"마륜(魔輪)!"
일갈과 함께 미라철마의 검은 그림자가 허공을 치솟으며 검은 월륜이 허공을 매우고 설 무영의 전신을 쪼개갔다. 순간 흰 구름이 둥실 떠올라 일곱 개의 흑륜을 뚫고 나가더니 또 한 차례 탄력을 받은 백무가 더 높은 허공으로 치솟았다.
"하 앗........!"
허공에 시선을 머문 사람들의 입이 쩌 억! 벌어진 채 다물 줄을 몰랐다. 신검지경(身劍之境)! 설 무영의 우수에서 검강이 일어난 것이었다. 설 무영의 전신에서 일어난 가공할 무형의 기류가 수천수만의 검날이 되어 솟아나고 마치 빗발치듯 수천 가닥의 백색 검기가 비무대를 휩쓸고 이었다.
실로 끔찍하고 가공할 전설의 최상승 검술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었다. 너무나 빨라 인간의 시력으로 검의 방향과 실체를 볼 수가 없고 다만 눈부신 태양의 빛살이 맹렬한 잠경을 이루고 수많은 빛의 칼날이 미라철마의 전신을 휘감았다.
꼴~각!
침묵 속에 침을 삼키는 사람들의 시선은 온통 정무대(丁武臺) 위의 비무에 집중되어 있었다.
"허 걱~!"
갑자기 연단에서 비무를 주시하던 미라혈전(彌羅血殿)의 전주 미라제황(彌羅帝皇)이 분분히 비무대 위에 흰 수건을 던졌다.
"포기요!"
참패를 인정하는 미라제황은 자신의 영식의 생명을 걱정하는 아비의 심정에서였다. 그러자 맹렬한 잠경이 스르르 사라져가고 설 무영의 몸이 가볍게 비무대 위로 내려섰다. 그러나 이미 미라철마의 전신은 검기에 찢기고 온통 상흔마다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풀 석!
미라철마가 마검을 떨어트린 채 주저앉아 거친 숨을 내 쉬었다. 흉흉한 눈동자로 설 무영을 바라보던 미라제황이 미라철마와 마검을 거두어 비무대 아래로 내려갔다. 백포를 나부끼며 설 무영이 홀로 비무대에 서 있었다. 모든 종파의 종사를 비롯해 세인들의 시선이 설 무영을 바라보고 놀람과 경이의 표정을 지었다.
그의 무공은 성산비무에 참여한 자뿐만 아니라, 정무맹에 참여한 종파무림인들도 대적할 수 없는 최상승 무공이었다. 그리고 몇 사람의 절대 종사자들은 설 무영의 무공 내력을 알고 내심 부르르 몸을 떨었다.
"신검지경의 어기어검술…!"
"저런 무공이 있다니........!"
"천룡이 드디어......!"
정, 사, 마의 종사마다 느끼고 생각하는 방향이 달랐다. 그들이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에 비무대 위에 있던 설 무영의 모습은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설 무영과 소류진은 구석진 비무대에서 세인들 틈에 나란히 서 있었다. 그를 알아본 세인들이 힐끔 힐끔 쳐다보며 지나 다녔다. 그러나 그들은 무심한 표정으로 비무대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수고했어요."
설 무영의 귓전에 소류진의 전음이 들려왔다. 설 무영이 빙긋이 소류진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내심 그가 자랑스럽고 세인들만 없다면 그의 가슴에 안기고 싶은 심정이었다. 설 무영을 바라보는 수정같이 빤짝이는 눈망울에 가득한 애정이 담겨 있었다. 그녀가 갑자기 몸을 비틀었다.
"앗! 하지 마여. 사람들이 보면 어떡해......."
소류진의 전음이 촉촉하게 들려왔다. 장난기가 발동한 설 무영의 손길이 그녀의 둔부를 움켜 쥔 것이었다. 그녀는 결코 싫지 않으면서도 눈을 흘겼다. 싱거운 웃음을 씨 익! 흘린 설 무영의 눈길이 또 다른 비무대로 향했다.
그들이 바라보는 을무대(乙武臺)에서는 또 다른 경합이 벌어지고 있었다. 노도와 같은 철편(鐵鞭)에 맞서는 장검으로 맞서는 검객의 대결이었다.
휘 이이잉! 쩌정!
철편과 장검이 불꽃을 일으키며 부딪쳤다. 철편이 맹렬한 속도로 원을 그리며 장검으로 막아가는 검객의 전신을 휘감았다.
"참(斬)!"
검객(劍客)의 일갈과 함께 맹룡한 검형이 일어나 철편의 강기에 마주쳐 갔다.
쩌 러렁!
검형에서 일어나는 반탄강기에 철편이 튕겨나고, 종횡으로 이어진 검기가 철편을 휘두르는 무인의 정수리를 향했다.
"허 걱!"
철편을 쥔 무인이 세 걸음을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기회를 놓치지 않고 검객은 설화비참(雪花飛斬)의 수법으로 상대의 목 줄기를 베어갔다.
쓰스승! 쩔그렁!
철편이 비무대에 나뒹굴고, 철편을 놓친 무인은 비무대 밖으로 떨어졌다.
"아랑비화(娥浪飛花) 승(勝)!"
비무관의 판결이 떨어졌다. 검객의 눈이 햇살에 반짝였다. 검객은 아미파의 제자 아랑비화 진이화(秦梨花)라는 미모의 여협이었다.
우~우~!
주시하던 사람들로부터 야유인지 찬사인지 모를 함성이 터졌다. 결과는 철편의 노도와 같은 강기에 밀리던 여검객이 삼십여 초 만에 승을 거둔 것이다. 순간 소류진의 눈빛이 반짝 빛을 발하며 옥성을 흘렸다.
"아니 분명........."
".........?"
소류진은 중앙 석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설 무영이 소류진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석단의 한곳을 주시했다. 북두마존의 뒤편에 앉아있는 육십 세가량의 장년과 삼십 세가량의 청년의 모습, 결코 낯설지 않은 사람이었다.
불쑥 설 무영이 자신도 모르게 뇌까렸다.
"아니 진매의 춘장(春丈)어른과 호형(虎兄)이......."
"맞죠.…!?"
분명히 죽은 줄 알았던 소류진의 가친과 오빠였다. 그런데 넋을 잃고 바라보던 소류진이 신음성을 발했다.
"엇! 사라졌네요......!"
"........?"
분명히 보았던 두 사람의 모습이 사라지고 없었다. 소류진이 황급히 연단으로 향했다. 설 무영도 그녀의 뒤를 쫓았다.
".......?"
"........!?"
그러나 두 사람이 있던 자리에는 전혀 다른 사람이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귀신에 홀린 듯 망연자실하였다.
"분명히 가군도 봤죠?"
"음! 분명한 것 같았는데........"
의기소침한 소류진과 설 무영은 되돌아왔다. 소류진은 헛것을 보았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얼마 안 되서 설 무영의 이차 대결이 있었다. 하지만 일차에 내상을 입고 승리한 상대 검객은 삼초도 못 견디고 설 무영의 반탄강기에 무너져 버렸다.
황혼(黃昏).
불게 물든 구름이 불바다처럼 서쪽으로부터 펼쳐진 유시(酉時),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가
고 있었다. 시각이 흐를수록 성산비무에 대한 세인들의 관심은 고조되어 갔다. 비무가 이루어질수록 점차 무공의 절대 강자들은 윤곽이 들어났다. 그에 따라 포기하는 비무자들도 속출하고 있었다.
이제 윤곽이 들어나 막강한 무공의 소유자, 정무맹의 잠룡으로서 그 위력을 떨칠 고수들은 여덟 명으로 압축되었다. 설 무영은 이승(二勝)만으로 여덟 명의 명단에 올랐다. 한 번은 부전승으로 한 번은 상대가 설 무영의 비무를 관전하고는 자신의 무공이 비약함을 알고는 포기하고 말았다.
삼잠삼마룡 중에는 고혼신룡(枯魂迅龍)이 남궁세가의 남궁종(南宮宗)에 패하였고, 미라철마는 설 무영에게 패배하여 탈락하였다. 벽보에 남아있는 중원 성산비무에 남은 것은 팔룡이었다.
남궁세가(南宮世家) 소가주 남궁종(南宮宗).
천검성(天劍城)의 소성주 능서문(凌瑞雯).
천마성(天魔城)의 천마비랑(天魔飛郞).
소림사(少林寺)의 속가제자 범호진성(梵虎眞星).
남황문(南荒門)의 황성옥(黃聖鈺).
아미파(峨嵋派)의 아랑비화(娥浪飛花) 진이화(秦梨花).
서천도성(西天刀城)의 도천패혼(刀天覇魂).
도화성주(桃花城主) 무영객(霧影客).
의외로 여인인 아미파의 아랑비화가 팔룡에 끼어 있었다. 중원천하의 성산비무대회의 팔룡에 든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허지만 비무에 참가하지 않은 사람들 중에도 그들보다 상승무공을 지닌 무인들이 있다. 그들은 표면에 나타나지 않고 무학에만 열중하는 은둔자들이다.
설 무영은 중앙 석단의 연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그의 뒤에서는 소류진이 고개를 숙인 채 못내 아쉬운 표정을 감추고 있었다. 설 무영이 성산비무 추진단에 다음 비무에 포기를 하고 내려오는 중이기 때문이었다.
설 무영이 성산비무에 왜 참여하였고, 또 포기를 하였는지 소유진은 전혀 알 수가 없어 아리송했다. 허지만, 공연히 포기를 한 것이 섭섭하였던 것이다. 그가 만인의 찬사와 우상이 될 수록 그녀 자신이 공명심에 젖었던 것이다.-------------------------------------------------------
(누구일까? 저자는 분명 역골신공을 익혀 변장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누구일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설 무영의 신안공(神眼功)으로 웬만한 역골신공으로 변장한 모습을 알 수가 있었다. 그런데 천마귀존은 분명히 안면을 바꾼 모습이었다.
(내가 잘못 본 것은 아닐까........?)
설 무영이 의구심을 일으키는 동안 줄지어 나온 각 종파의 종사와 사람들이 모두 착석한 후 회무(會務)를 담당한 곤륜의 도인이 연단위에 올라섰다.
"우선 정수맹 대회를 이끌 임시 맹주를 모셔야 하는바 정도맹 맹주를 대신한 소림의 천선대사와 마도맹 맹주이신 라마사존께서 본 곤륜의 장문인이신 태청진인을 천거 하셨습니다. 혹시 이의가 있으신 분이 있으면 말씀하여 주십시오!"
".......!"
허나 두 맹주가 동의한바 누구도 뒤늦게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나이가 육십을 넘겨 흰 수염을 늘어트린 태청진인(太淸眞人)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둥! 둥! 둥!
다시 대명고가 울려 퍼지고, 태청진인이 앞으로 나와 연단위에 올라섰다.
"감히 본 좌가 정, 사, 마를 대표하는 정의무림사수연맹의 임시 맹주로 대회가 시작됨을 선언합니다! 여기에 참석하시고 등록명부에 등록을 한 각 종파는 정수맹에 가입한 것으로 하고 정수맹이 정식으로 출범한 것을 선포합니다. 이에 이의가 있으신 분께서는 고견을 말씀하여 주시기 바라오."
".......!"
태청진인은 잠시 장내를 둘러보았다. 허지만 일부러 소란을 만들려는 사람은 없었다.
"그럼, 삼일간의 대회 일정을 시작하겠습니다. 오늘부터 이틀간의 성산비무대전을 치러 수호군을 이끌 잠룡을 선발하고 회합을 통해 맹주를 선발하겠습니다."
태청진인의 대회 선포에 이어 다시 회무를 맡은 곤륜도인이 올라섰다.
"성산비무대전에 신청한 사람은 모두 일백 십이 인이오. 일백 십이 인은 무작위 추천에 의해 비무를 하고 승자승(勝者昇)의 원칙으로 최종 비무가 펼쳐 질 것입니다. 잠시 후 호명되는 분은 수서에 의해 연무대로 오르시기 바랍니다. 비무에 관한 다른 원칙은 대자보를 참고 하시오."
소란스럽던 대회 시작 분위기와는 달리 순연하게 이루어졌다. 설 무영과 소류진은 사람들이 모여 쳐다보고 있는 대자보 앞으로 다가갔다.
다음과 같이 승패를 결정한다.
첫째, 본 비무는 백초 이내로 한정한다. 백초를 넘길 때는 판결에 의한다.
첫째, 패자가 스스로 패를 인정할 때는 비무에 관계없이 승자로 한다. 단 본인이 아닌 비무자 측 일행이 흰 수건을 던져 패배를 자인함도 인정한다.
둘째, 제삼자의 암계의 협력을 받은 자는 패자로 한다.
넷째, 본 비무 중에 당한 상처나 살생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는다.
정무맹 비무관
두~둥! 둥…둥…둥!
드디어 비무대전이 시작되는 대명고가 울렸다.
"구공지객과 사혼추는 갑 무대로 오르시오!"
"열비수와 시광검객은 을 무대로......."
비무자의 명단들이 속속히 불리고 사람들이 연무대 근처로 이리저리 이동을 하였다.
휘 리릭! 푸 르륵!
비무자들은 나름대로의 독가무공의 경공을 펼쳐 비무대로 올라섰다. 설 무영의 시선이 병의 비무대로 향했다. 설 무영이 안면이 있는 능서문(凌瑞雯)이 호쾌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묵검을 등에 맨 능서문은 청색의 무복을 걸친 채 긴장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상대는 체격이 우람한 사나이로서 한 자루의 패도를 불끈 쥐고 회포를 휘날리며 있었다.
그들은 잠시 상대를 응시하고 서 있다가 비무대를 중심으로 조금씩 원을 그리며 돌았다.
번쩍!
패도의 도광이 햇살에 번쩍이고 사나이의 몸이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호랑이와 같은 신천호패(身天虎覇)의 기세로 능서문을 향해 짓쳐갔다. 허나 능서문은 발검(拔劍)을 하지 않은 채 슬쩍 몸을 비틀어 능파미보(凌波迷步)의 수법으로 상대의 일초를 허초로 만들었다. 상승무공이 아니면 불가한 수법이었다.
일초식이 허초로 유발되자 자존심을 상한 사나이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럼 어디…?"
사나이는 몸을 쓰러지듯 몸을 날려 능서문의 하체를 회중포월(回中包月)의 수법으로 패도를 휘두르자 회오리가 지면으로 부터 일어나 능서문의 전신을 감쌌다. 아울러 사나이는 좌수로 맹렬한 광표장(狂彪掌)을 발산하였다.
크~르르! 콰아!
사람들은 극한 살수를 펼치는 광경에 경악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어느새 발검한 능서문의 검강이 사나이의 장과 도의 강기를 부수고 무서운 검기로 사나이에게로 쏟아져 갔다. 능서문의 비천류검법(飛天流劍法)이었다.
째~쟁쨍! 쩔그렁!
사나이는 대여섯 바퀴를 굴러 나뒹굴었다.
와아.......!
세인들의 탄성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사나이의 패도가 여지없이 조각나서 흩어져 있었다.
"내가 패했소!"
입가에 선혈을 먹음은 사나이가 두 손을 포권하고 비무대에서 내려갔다.
설 무영은 각 비무대를 두루 살펴보다가 병무대(丙武臺)에서 시선을 멈추었다. 천마성의 천마비랑(天魔飛郞)과 공동파의 화엄걸(華奄傑)의 비무가 벌어지고 있었다. 화엄걸은 이미 패색이 짙었다. 장력의 대결에서 두 사람은 모두 부동의 자세였으나 화엄걸의 발밑이 움푹 패어있었고, 두 다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아! 이제야 생각난다.........)
설 무영은 혼자 희소를 터트리며 화엄걸과 천마귀존을 번갈아 올려다봤다. 설 무영은 소류진에게 전음을 보냈다.
"진매! 병무대(丙武臺)의 천마비랑(天魔飛郞)과 연단의 천마귀존을 보고 느낀 것이 없소?"
"......?"
잠시 머뭇거리던 소류진의 눈빛이 반짝였다.
"저들은 옥문현의 매화반점(梅花飯店)......?"
"진매도 그리 봤소? 궁조민(宮朝敏)과 궁철상(宮哲象)........"
그렇다. 그들은 매화반점의 전주인 궁조민과 그가 사라진 후 양자로 매화반점을 운영하다가 행방이 모연해진 궁철상이었다.
"네! 소저의 짐작으로는........"
"그들이 어찌 마도의 종사자가 되었을까?"
그러나 설 무영은 분연히 일어나는 의구심을 풀 수는 없었다. 또 다른 한쪽에서는 도(刀)와 창(槍)의 강기가 난무하는 비무가 펼쳐지고 있었다. 여섯 곳의 비무가 이루어질 때마다 희귀한 무공들과 많은 격차를 갖은 무인들의 공력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유발하기에 충분하였다.
"무영객과 미라철마(彌羅鐵魔)는 정무대(丁武臺)로 오르시오."
문득 설 무영을 호명하는 회무도인의 목청을 돋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류진은 공연히 가슴이 두근거리며 설 무영을 바라보았다. 허나 짐짓 설 무영은 태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사람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우~~! 우~
함성과 함께 세인들의 시선이 비어있는 정무대(丁武臺)를 향했다.
희~리릭!
하나의 검은 인영이 비무대 위로 날았다. 짙은 눈썹에 다부지게 각진 용모와 우람한 체격위에 흑색 도포의 청년 미라철마였다.
스 스슥!
한 가닥 구름이 흐르듯 백포자락이 비무대에 나부꼈다. 이목구비가 또렷하고 오관이 반듯한 영준한 모습에 지극히 청기 한 모습을 한 설 무영이었다. 그들은 서로를 응시한 채 부동의 자세였다. 단지 흑과 백의 도포가 흐느적거릴 뿐이었다.
세인들마저 숨을 죽이고 비무대 위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들은 침묵을 지키지만 암중으로 상대의 공력을 측정하고 있는 것이었다. 연단의 각 종파의 종사들의 시선도 정무대(丁武臺)를 향하고 있었다. 미라철마의 뱀과 같은 사목(蛇目)이 꿈틀거렸다.
"놈! 쉬운 상대는 아니다. 속전속결뿐이다!"
미라철마는 내심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공력을 끌어 올렸다. 서서히 미라철마의 양손이 설 무영을 향해 뻗쳤다. 미라철마의 두 손에서 사악한 녹색 운무가 피어났다.
"우우…! 녹수마장(綠手魔掌)이다........"
미라철마는 처음부터 절전되었다고 알고 있는 극히 악랄한 마공을 실전한 것이었다.
번쩍! 콰르릉!
갑자기 비무대를 뒤흔드는 요란한 굉음을 동반한 녹무(綠霧)가 미라철마의 장심에서 쏟아져 나갔다. 녹무의 강기는 설 무영의 전신을 녹일 듯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뿜어져 나갔다.
"허~억! 극마 장공이다.......!"
세인들의 표정이 경악으로 긴장하였다. 허나 설 무영은 요지부동이었고 흰 도포만 유유히 나부끼고 있었다. 그런데 설 무영의 전신에서 오색 운무가 뿜어져 나와 녹수마장의 녹무를 튕겨 내는 것이었다.
연단에 있던 소림의 장문인이 소성을 발했다.
"헛! 저것은 본 소림의 절전무공인 건곤자전강(乾坤紫電 )........."
이어서 천마귀존(天魔鬼尊)이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섰다.
"항마선공을 익히다니........!"
녹무를 마주쳐간 오색 운무는 도리어 녹수마장의 강기보다 더한 공력으로 마라철마에게 덮쳐 가는 것이었다. 설 무영은 미라철마가 강력한 마공으로 공격하여 올 것을 알고 건곤자전강의 호신강기를 일으켜 보호하는 반면 반탄강기로 상대를 제압했던 것이다.
"크…헉!"
미라철마는 주춤거리며 다섯 걸음을 뒤로 물러났다. 그의 앞가슴은 갈래갈래 찢기고 입에서 토해낸 선혈이 낭자하였다. 그는 단 일 초식에, 그것도 자신의 공력을 되받아 패하고 만 것이었다. 놀람으로 홉뜬 미라철마의 두 눈동자는 분통함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내 녹수마장을 맞받다니......)
미라철마가 누구인가? 당금 중원을 폭풍같이 몰아치고 있는 마도의 마룡 중 하나였다. 정도의 종사자들도 두려워하는 두 마룡이었다. 그런데 세인들이 마룡이라고 일컫던 무영객이 정종무공을 달성한 자일 줄은 미라철마 뿐만 아니라, 세인들도 몰랐던 일이었다.
미라철마는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상대로부터 반탄되어 온 내공의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심후한 것이었다. 미라철마는 이를 바드득! 갈았다.
"놈! 결코 네놈을 죽이고야 말겠다."
설 무영을 바라보는 마라철마의 두 눈은 핏빛으로 이글이글 타 올랐다.
스~르릉! 쩌정!
혈광이 반짝였다. 그가 활처럼 휘어진 마검을 빼어든 것이었다. 미라철마의 몸이 좌측으로 한 발자국 움직였다. 그림같이 동요도 없는 설 무영의 몸이 좌측으로 옮겨 있었다. 미라철마의 마검이 번뜩이며 침묵을 깨고 일곱 개의 혈광이 피어났다.
설 무영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흘렀다. 삼십년 전 중원을 일대 마의 지옥으로 이끌었던 오마(五磨)중 검마(劍魔)의 마혼강살검(魔魂 乷劍)이었다.
"마륜(魔輪)!"
일갈과 함께 미라철마의 검은 그림자가 허공을 치솟으며 검은 월륜이 허공을 매우고 설 무영의 전신을 쪼개갔다. 순간 흰 구름이 둥실 떠올라 일곱 개의 흑륜을 뚫고 나가더니 또 한 차례 탄력을 받은 백무가 더 높은 허공으로 치솟았다.
"하 앗........!"
허공에 시선을 머문 사람들의 입이 쩌 억! 벌어진 채 다물 줄을 몰랐다. 신검지경(身劍之境)! 설 무영의 우수에서 검강이 일어난 것이었다. 설 무영의 전신에서 일어난 가공할 무형의 기류가 수천수만의 검날이 되어 솟아나고 마치 빗발치듯 수천 가닥의 백색 검기가 비무대를 휩쓸고 이었다.
실로 끔찍하고 가공할 전설의 최상승 검술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었다. 너무나 빨라 인간의 시력으로 검의 방향과 실체를 볼 수가 없고 다만 눈부신 태양의 빛살이 맹렬한 잠경을 이루고 수많은 빛의 칼날이 미라철마의 전신을 휘감았다.
꼴~각!
침묵 속에 침을 삼키는 사람들의 시선은 온통 정무대(丁武臺) 위의 비무에 집중되어 있었다.
"허 걱~!"
갑자기 연단에서 비무를 주시하던 미라혈전(彌羅血殿)의 전주 미라제황(彌羅帝皇)이 분분히 비무대 위에 흰 수건을 던졌다.
"포기요!"
참패를 인정하는 미라제황은 자신의 영식의 생명을 걱정하는 아비의 심정에서였다. 그러자 맹렬한 잠경이 스르르 사라져가고 설 무영의 몸이 가볍게 비무대 위로 내려섰다. 그러나 이미 미라철마의 전신은 검기에 찢기고 온통 상흔마다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풀 석!
미라철마가 마검을 떨어트린 채 주저앉아 거친 숨을 내 쉬었다. 흉흉한 눈동자로 설 무영을 바라보던 미라제황이 미라철마와 마검을 거두어 비무대 아래로 내려갔다. 백포를 나부끼며 설 무영이 홀로 비무대에 서 있었다. 모든 종파의 종사를 비롯해 세인들의 시선이 설 무영을 바라보고 놀람과 경이의 표정을 지었다.
그의 무공은 성산비무에 참여한 자뿐만 아니라, 정무맹에 참여한 종파무림인들도 대적할 수 없는 최상승 무공이었다. 그리고 몇 사람의 절대 종사자들은 설 무영의 무공 내력을 알고 내심 부르르 몸을 떨었다.
"신검지경의 어기어검술…!"
"저런 무공이 있다니........!"
"천룡이 드디어......!"
정, 사, 마의 종사마다 느끼고 생각하는 방향이 달랐다. 그들이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에 비무대 위에 있던 설 무영의 모습은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설 무영과 소류진은 구석진 비무대에서 세인들 틈에 나란히 서 있었다. 그를 알아본 세인들이 힐끔 힐끔 쳐다보며 지나 다녔다. 그러나 그들은 무심한 표정으로 비무대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수고했어요."
설 무영의 귓전에 소류진의 전음이 들려왔다. 설 무영이 빙긋이 소류진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내심 그가 자랑스럽고 세인들만 없다면 그의 가슴에 안기고 싶은 심정이었다. 설 무영을 바라보는 수정같이 빤짝이는 눈망울에 가득한 애정이 담겨 있었다. 그녀가 갑자기 몸을 비틀었다.
"앗! 하지 마여. 사람들이 보면 어떡해......."
소류진의 전음이 촉촉하게 들려왔다. 장난기가 발동한 설 무영의 손길이 그녀의 둔부를 움켜 쥔 것이었다. 그녀는 결코 싫지 않으면서도 눈을 흘겼다. 싱거운 웃음을 씨 익! 흘린 설 무영의 눈길이 또 다른 비무대로 향했다.
그들이 바라보는 을무대(乙武臺)에서는 또 다른 경합이 벌어지고 있었다. 노도와 같은 철편(鐵鞭)에 맞서는 장검으로 맞서는 검객의 대결이었다.
휘 이이잉! 쩌정!
철편과 장검이 불꽃을 일으키며 부딪쳤다. 철편이 맹렬한 속도로 원을 그리며 장검으로 막아가는 검객의 전신을 휘감았다.
"참(斬)!"
검객(劍客)의 일갈과 함께 맹룡한 검형이 일어나 철편의 강기에 마주쳐 갔다.
쩌 러렁!
검형에서 일어나는 반탄강기에 철편이 튕겨나고, 종횡으로 이어진 검기가 철편을 휘두르는 무인의 정수리를 향했다.
"허 걱!"
철편을 쥔 무인이 세 걸음을 뒤로 물러났다. 그러나 기회를 놓치지 않고 검객은 설화비참(雪花飛斬)의 수법으로 상대의 목 줄기를 베어갔다.
쓰스승! 쩔그렁!
철편이 비무대에 나뒹굴고, 철편을 놓친 무인은 비무대 밖으로 떨어졌다.
"아랑비화(娥浪飛花) 승(勝)!"
비무관의 판결이 떨어졌다. 검객의 눈이 햇살에 반짝였다. 검객은 아미파의 제자 아랑비화 진이화(秦梨花)라는 미모의 여협이었다.
우~우~!
주시하던 사람들로부터 야유인지 찬사인지 모를 함성이 터졌다. 결과는 철편의 노도와 같은 강기에 밀리던 여검객이 삼십여 초 만에 승을 거둔 것이다. 순간 소류진의 눈빛이 반짝 빛을 발하며 옥성을 흘렸다.
"아니 분명........."
".........?"
소류진은 중앙 석단을 바라보고 있었다. 설 무영이 소류진의 시선이 향하고 있는 석단의 한곳을 주시했다. 북두마존의 뒤편에 앉아있는 육십 세가량의 장년과 삼십 세가량의 청년의 모습, 결코 낯설지 않은 사람이었다.
불쑥 설 무영이 자신도 모르게 뇌까렸다.
"아니 진매의 춘장(春丈)어른과 호형(虎兄)이......."
"맞죠.…!?"
분명히 죽은 줄 알았던 소류진의 가친과 오빠였다. 그런데 넋을 잃고 바라보던 소류진이 신음성을 발했다.
"엇! 사라졌네요......!"
"........?"
분명히 보았던 두 사람의 모습이 사라지고 없었다. 소류진이 황급히 연단으로 향했다. 설 무영도 그녀의 뒤를 쫓았다.
".......?"
"........!?"
그러나 두 사람이 있던 자리에는 전혀 다른 사람이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은 귀신에 홀린 듯 망연자실하였다.
"분명히 가군도 봤죠?"
"음! 분명한 것 같았는데........"
의기소침한 소류진과 설 무영은 되돌아왔다. 소류진은 헛것을 보았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얼마 안 되서 설 무영의 이차 대결이 있었다. 하지만 일차에 내상을 입고 승리한 상대 검객은 삼초도 못 견디고 설 무영의 반탄강기에 무너져 버렸다.
황혼(黃昏).
불게 물든 구름이 불바다처럼 서쪽으로부터 펼쳐진 유시(酉時),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가
고 있었다. 시각이 흐를수록 성산비무에 대한 세인들의 관심은 고조되어 갔다. 비무가 이루어질수록 점차 무공의 절대 강자들은 윤곽이 들어났다. 그에 따라 포기하는 비무자들도 속출하고 있었다.
이제 윤곽이 들어나 막강한 무공의 소유자, 정무맹의 잠룡으로서 그 위력을 떨칠 고수들은 여덟 명으로 압축되었다. 설 무영은 이승(二勝)만으로 여덟 명의 명단에 올랐다. 한 번은 부전승으로 한 번은 상대가 설 무영의 비무를 관전하고는 자신의 무공이 비약함을 알고는 포기하고 말았다.
삼잠삼마룡 중에는 고혼신룡(枯魂迅龍)이 남궁세가의 남궁종(南宮宗)에 패하였고, 미라철마는 설 무영에게 패배하여 탈락하였다. 벽보에 남아있는 중원 성산비무에 남은 것은 팔룡이었다.
남궁세가(南宮世家) 소가주 남궁종(南宮宗).
천검성(天劍城)의 소성주 능서문(凌瑞雯).
천마성(天魔城)의 천마비랑(天魔飛郞).
소림사(少林寺)의 속가제자 범호진성(梵虎眞星).
남황문(南荒門)의 황성옥(黃聖鈺).
아미파(峨嵋派)의 아랑비화(娥浪飛花) 진이화(秦梨花).
서천도성(西天刀城)의 도천패혼(刀天覇魂).
도화성주(桃花城主) 무영객(霧影客).
의외로 여인인 아미파의 아랑비화가 팔룡에 끼어 있었다. 중원천하의 성산비무대회의 팔룡에 든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허지만 비무에 참가하지 않은 사람들 중에도 그들보다 상승무공을 지닌 무인들이 있다. 그들은 표면에 나타나지 않고 무학에만 열중하는 은둔자들이다.
설 무영은 중앙 석단의 연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그의 뒤에서는 소류진이 고개를 숙인 채 못내 아쉬운 표정을 감추고 있었다. 설 무영이 성산비무 추진단에 다음 비무에 포기를 하고 내려오는 중이기 때문이었다.
설 무영이 성산비무에 왜 참여하였고, 또 포기를 하였는지 소유진은 전혀 알 수가 없어 아리송했다. 허지만, 공연히 포기를 한 것이 섭섭하였던 것이다. 그가 만인의 찬사와 우상이 될 수록 그녀 자신이 공명심에 젖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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