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무협소설은 원래 주말에만 연재할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말에 추석이 끼었네요. -_-;
그래서 미리 올립니다. 즐겁고 건강한 한가위되시길 바랍니다.
참고로 이 무협은 아주 가벼운 분위기로 흘러갑니다.
감기가 워낙 머리 아픈 글이라.. 무협에서 만큼은 머리 아프고 싶지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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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떨어지고 바래진 옷, 그리고 녹이 슨 철검 한자루를 허리에 차고 있는 남자가 관
도를 따라 터벅 터벅 걸어가고 있다. 곧 관도의 끝자락에 관문이 나타나고, 관문위에
서 경계를 서던 초병들의 눈에 허름한 옷을 입은 자가 접근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지
금 그 낮선이가 오고 있는 쪽은 얼마전까지만 해도 치열한 전투가 연일 이어졌던 월
국과 국경이 맞닿아 있는 곳이었다. 수상한 자가 국경을 넘어 접근하고 있다는 보고
를 관문수장에게 올린 후 창을 비껴 든 초병이 남자를 향해 소리쳤다.
"더이상 다가오지 마라. 신원을 밝혀라. 그렇지 않으면 활을 쏘겠다."
선우영은 관문의 위에서 소리친 하급 군관의 말에 어이가 없어서 말이 나오지 않았
다. 배가 고파 서있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자신을 이렇게 경계하는 이유가 무엇인
지. 만약 관문위에서 정말 활을 쏜다면, 지금의 자신이라면 지푸라기로 만든 허수아
비 보다 더 잘 맞아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같은 대송군이라는 알량한 믿음 하
나로 자신의 신분 내역을 밝히기로 했다. 같은 황제의 소속인데 설마 굶기지는 않을
것 아닌가.
"의심하지 마시오. 난 황제폐하의 지엄하신 황명을 받잡고 월국정벌을 나섰던 남로
평정경략안무사의 휘하에 있던 남도위 선우영이라고 하오. 변경성에 급히 아뢸 전언
이 있으니 지금 관문으로 다가가는 것을 허락해 주시길 바라오. 급하오!"
마지막 말에 급하다고 외치고, 나지막히 말했다.
"배고파서.."
관문 위에선 일대 혼란이 일어났다. 지난 3년 동안 실종 또는 전멸되었다고 알려진
남로정벌군의 생존자가 이제서야 나타난 것이었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생존사 수색
을 위해 수색대를 파견했지만 어떻게 된 상황인지 수색을 나섰던 부대들 마저 실종이
되어 더이상 월국의 국경을 넘어 부대를 보내지도 못하고 그저 기다리고만 있던 상황
이었다. 그런데 그토록 궁금했었던 남로정벌군 본대의 생존자가 드디어 나타난 것이
다. 그것도 하급병졸이 아니라 군관이 혼자서.
"잠시만 기다리시오. 내 곧 가서 교위수장께 말씀드려 모셔오겠소. 잠시만 기다리시오."
"갈 때 가더라고 뭐 먹을거나 물 좀 주시구려. 목마르고 배고파 죽겠소."
관문을 내려갈려던 군관은 옆에 있던 장졸에게 무언가를 지시하고 뛰어가기 시작했
다. 그리고 닫혔던 관문이 힘겹게 조금 열리며 그 틈으로 장졸 몇이 잔뜩 긴장한 채로
창을 들고 다가왔다.
"별건 아니지만.. 여기 잠시 요기할 것을 가져왔습니다. 물은 여기..."
"고맙구려. 복 받으실게요."
"아니 그런 말씀은... 그럼.."
뭐가 그리 무서운지, 관문밖에 있는 것 조차 두렵다는 듯이 도망치는 병졸을 보며 선
우영은 살짝 웃다가 손에 든 물과 주먹밥을 꾸역 꾸역 먹기 시작했다.
"컥컥.. 몇 년만에 먹는 쌀밥인지.. 기필코 오늘은 고깃국을 먹어야지. 그거 하나 먹
으려고 죽다가 살아났는데.. 암 그렇지.."
한참을 주린 배를 채우느라 정신이 없는데, 다시 관문위에서 소란이 일어나고 누군
가의 말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는 다른 병졸이나 군관과 달리 붉은 갑주를 입고
있는 것이 멀리서도 보였다.
"이보시오. 당신이 정말 남로평정경략안무사의 휘하에 있던 남도위가 맞소?"
"뭐 그리 의심이 많으신게요? 소직이 이렇게 몰골이 말이 아니지만, 지엄하신 황명
을 받들어 출정한 군을 사사로이 입에 담을 만큼 담력이 큰 놈이 이니오. 소직은 개보
8년에 출정해서 월국 정벌을 나선 남로정벌군의 생존자, 남도위 선우영이라 하오."
"개보 8년이라고 하셨소? 그럼 혹시 군패라도 가지고 있으시오? 그걸 보여주시오.그
전까지는 들어올 수 없소"
부모가 살아와도 증거를 대보라고 할 것 같은 의심많은 군관의 서슬퍼런 말에 남도
위 군패를 품에서 꺼내 보였다.
"이 군패가 보이시오? 안보이면 내 관문쪽으로 다가가리다. 보고할 것도 있다니까
그러네"
"아니오. 여기서도 잘 보이오. 어서 관문을 열고, 저 분을 안으로 뫼시거라. 확인되었
으니 잠시만 기다리시오."
곧 육중한 소리를 내는 관문이 조금전 처럼 다시 열리기 시작하고, 병졸과 군관이 선
우영을 애워싸고 관문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관문안에는 붉은 갑주를 입은 조금
전 군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시오. 남도위. 그동안 정말 고생이 많으셨구려. 본관은 용주관문을 지키고
있는 용주교위수장 심훈이라고 하오. 그리고 이들은 본관의 휘하인 위사 팽정현과 위
사 윤진이오."
"용주관문 위사 팽정현이라 하옵니다."
"용주관문 위사 윤진이라 하옵니다."
자신에게 깍듯하게 인사를 하는 세명을 보며, 선우영은 속으로 웃음을 삼켜야만 했
다. 어쨋든 자신은 이제 도패수 선우영이 아닌 남도위 선우영이니까. 그런데 후군이
있는 전림을 향해 도망을 가고 있었다고 생각을 했는데, 뜬금없이 용주관문이라니 어
처구니가 없었다. 아무리 자신이 길치라고 하지만 이건 너무한게 아닌가. 그래도 이
젠 더이상 굶지 않아도 되니 그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다행이라 생각하는 선우영이
었다.
"몇 년만에 보는 황군인지 정말 반갑구려. 소직은 남로정벌군 남도위 선우영이라 하
오. 그간의 상황을 보고해야 하는데 안내해 주시겠소? 아 그 전에 좀 씻고 옷도 갈아
입고, 배도 좀 채웠으면 하오."
"걱정마시오. 개봉에 보낼 보고서는 소장이 작성할 준비를 해 놓을테니 우선 피곤한
몸을 좀 추스리고 소장이 있는 곳으로 오시구려. 여기, 두 위사가 안내해 줄 것이오."
"고맙소.. 그럼"
"남도위께선 저희를 따라 오시겠습니까? 쉬실 곳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고맙소. 부탁드리오."
두 위사를 따라 관문안의 길을 따라 걷자, 곧 영내에 있다고 말하기 어려운 객청이
나타났다. 아마도 가끔 황도에서 찾아오는 감찰사들을 맞이 하기 위해 마련 된 공간
인 듯 하다. 객청에 들어가자 팽정현이 지나가는 시비를 불러 씻을 준비와 음식들을
주문하기 시작했다.
"곧 씻으실 수 있을 겁니다. 따뜻한 물로 여독을 푸신 후 내려오시면 식사 준비가 되
어 있을 겁니다. 이 아이를 따라가시지요."
"저는 그동안 남도위께서 입으실 옷을 마련하러 가겠습니다. 혹시 원하시는 어떤 옷
이라도 있으신지요?"
"팽위사의 꼼꼼함에 소직이 정말 감탄했구려. 정말 고맙소이다. 아..그리고 윤위사.
소직은 그저 입고 다니기 편안한 옷이면 좋은데..색깔은 검은색이 좋겠구려. 때가 많
이 타면 좀 그렇잖소?"
"하하.. 그렇지요. 그럼 저는 남도위께서 입으실 옷을 마련하러 잠시 자리를 비우겠
습니다. 그 동안 쉬시고 있으시기를..."
"고맙소이다. 그럼 잠시 후에 두분을 다시 뵙겠소."
두 위사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선우영의 앞에 고개를 숙인 작은 여아가 다가와 말을
했다.
"대인 저를 따라오시지요.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서로 고개를 숙여 동시에 인사를 하고, 선우영은 작은 몸집을 가진 여아를 따
라 객청의 2층으로 올라갔다. 통나무로 짠 큼직한 목간통에는 뜨거운 물이 들어차 하
얀 김을 내뿜고 있었다. 욕탕을 안내한 여아는 고개를 숙이며 다시 뒷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문을 닫고 나갈려는 여아를 향해 선우영이 말했다. 한창 때의 선우영에게, 그
리고 여자 구경을 오랫동안 해보지 않은 선우영이기에 좁은 곳에 남녀가 함께 있는
이런 상황이 미묘하기만 했다. 그리고 지금 선우영의 눈앞에 있는 여아는 보기만 해
도 흐믓해지는 아이였다.
"어딜 가는게냐?"
"대인께서 다 씻으실 동안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나이다. 혹여 목욕 시중이 필요하시
다면 다른 아이를 불러 드리겠나이다."
"됐다. 난 여색을 탐하지 않으니 복도에서 기다리다가 물이나 갈아다오."
"예 대인.."
선우영이 이번에 저 아이를 취한다고 해서 누가 뭐라 할 사람도 없을 테지만, 그럴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월국에서 죽기 위해 먹었던 그 독초. 이름도 알 수 없는 그 독
초를 먹고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눈을 떴을 때, 온 몸이 발가벗겨져서 나무 구
덩이 속에 웅크리고 있던 자신을 발견했던 날. 그리고 뭔가 달라졌다고 느끼며 자신
의 몸을 살펴보던 선우영은 그 때 놀라서 기절하는 줄만 알았었다. 죽기 전 보다 훨씬
길고 굵어진 자신의 양물이 자신의 눈에 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더 놀라운건 양물의 색깔이 보라색이 되었다는 것. 월국의 독개
구리도 아니고 보라색으로 변한 자신의 양물을 어찌 처음 만난 여아에게 보여줄 수
있을까. 이걸 보여주면 저 아이는 아마 비명을 지르며 기절할게 불보듯 뻔한 상황이
었다. 솔직한 마음은 방금 방을 나간 저 여아의 옷을 벗기고 불타는 시간을 나누고 싶
지만, 그럴 수 없는 안타까움은 양물에 괜한 힘이 들어가게 만들었다.
"보여줄 수 없는 쓸모 없는 것이 힘만 잔뜩 들어가는구나... 독초를 먹는 것이 아니었
는데..."
벗은 옷을 탁자위에 올리고 오랜만에 뜨거운 물로 씻을 준비를 하던 중에, 조금전 관
문에서 보여주었던 남로정벌군 남도위 군패가 바닥에 떨어졌다.
"탱그렁 ..."
2년전, 같은 도패수였던 녀석의 군패였다. 월국 깊은 오지에서 한 대부락과의 전투
에서 큰 공을 세우고 도패수에서 남도위로 신분상승을 이루어 냈던 그 녀석은, 부대
가 전멸하던 그 날에도 공을 세우기 위해 전열의 가장 앞에 서서 용감하게 싸우다가
가장 먼저 죽어버렸다. 그리고 선우영은 그 녀석의 뒤에서 죽은 척을 하고 누워있다
가 녀석의 군패를 이렇게 빼왔던 것이다.
"이 사람아. 열심히 싸워서 죽으면 누가 알아주나.. 살아 있어야지. 하긴 나도 죽으려
고 했었지만.. 이보게 자네. 그거랑 그거는 좀 다르다네. 후후, 하여튼 고맙네. 내 가
끔 자네가 생각나면 고깃국을 제사상에 올려줌세. 자네가 못다 이룬 꿈을 내가 해주
겠네. 이제 마음 푹 놓고 영면하시게나. 큭큭"
도패수에서 남도위가 되게 만들어 주었던 동료의 군패를 손에 쥔 선우영은 그간 말
하지 못했던 속내를 먼저 떠난 그에게 고백하 듯이 군패를 보며 털어 놓았다. 소중하
게 탁자위에 군패를 갈무리를 한 선우영은 뜨거운 물이 가득 찬 욕조에 몸을 넣었다.
그간 몇 달의 밤과 낮동안 계속되었던 그 피말리는 월국군 추적의 피로가 뜨거운 물
속에 녹아 없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아... 몇 년만이냐. 뜨거운 물. 아아!.. 정말 좋다는 말 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구
나..여기에 술만 있으면 딱 좋은데.. 맞다"
갑자기 무언가 생각이 난다는 듯이 선우영은 복도에 기다리고 있을 시비 아이를 큰
소리로 불렀다.
"밖에 아직도 기다리고 있느냐? 잠시 들어와 보거라"
"네.. 대인"
다른 곳에 가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던 듯 여아는 부르자 마자 바로 문을 열고 들어와
서 고개를 숙이고 선우영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넌 지금 가서 요기할 것과 술을 조금 가져오너라. 내 지금 배가 너무 고파서 뭐라도
좀 먹어야 할 것 같구나."
"네 대인. 식사는 준비가 되었다고 하니, 간단히 드실 것을 차려오겠습니다."
"세심한 씀씀이가 고맙구나. 부탁한다."
"편히 말씀하소서 대인. 말씀이 과하시면 소녀 불편하옵니다."
"알겠다. 가보아라"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고 가는 여아를 바라보는 선우영. 뒤돌아 나가는 여아의 뒷모
습에서 잔털이 난 뽀얀 목덜미를 보자, 물속에 잠겨있는 양물이 화가 난듯 마구 요동
치기 시작했다. 먹음직한 먹이를 보았을 때의 뱀처럼, 선우영의 그것은 그렇게 잔뜩
화가 난채 물속에서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이 흉칙한 걸 보면 저 아이는 뭐라고 할까. 큭큭.. 나도 놀랐었는데 얼마나 놀랄지.."
시비가 가져온 술과 안주를 먹으며 목욕을 마친 선우영은 옷을 갈아입고 문을 나섰
다. 식사가 준비되어 있다는 방에 들어서자, 커다란 식탁위에 생전 보지 못했던 갖가
지 진미가 가득 차려져 있었다. 온 방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음식냄새. 예전보다 감각
이 예민해 졌는지 그 냄새가 선우영의 배를 더욱 자극하고 있었다.
"음식 냄새가 사람 미치게 하는구나...호오.. 좋다 좋아."
"대인 천천히 드시옵소서. 차린 음식은 많으니 조금씩 드시는 것이 몸에 좋을 줄 아
옵니다."
"허..그거 참. 넌 정말 이런데서 일하기엔 참 아깝구나.."
"과찬이옵니다."
"이름이 무엇이냐?"
"성은 없사옵고, 유경이라 하옵니다."
"그래 유경아. 여기서 가장 맛있는 것이 무엇이냐? 너무 많이 차려져 있으니 어느 것
부터 먹어야 할지 손이 안가는구나."
"아뢰옵기 죄송하오나, 대인들을 위해 준비한 상을 저같은 시비는 접할 길이 없어 맛
을 본 적이 없사옵니다. 대인의 말씀에 부응하지 못함을 용서해 주시길..."
"여기 있는 것을 하나도 먹은 적이 없어?"
"네 대인.."
고개를 숙이고 있는 유경을 보니, 이 아이의 마음 씀씀이가 마음에 든 선우영이었다.
"유경아. 그럼 내 옆에 앉아서 같이 먹자꾸나. 어차피 나 혼자 먹기에는 너무 많은 음
식이니 너 하나 더 먹는다고 어디 모자라기야 하겠느냐?"
"어찌 대인을 위해 준비되어 있는 상을 저같은 시비가 동석을 할 수 있겠나이까. 그
저 대인의 마음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식기 전에 음식을 드시옵소서."
"보는 이도 없는데 뭘 그리 조심하느냐. 내가 원하는데 넌 그저 먹기만 하면 된다. 그
리고 음식은 남기면 벌받는다. 차려준 것은 다 먹어야지. 어서 앉거라. 명령이다."
명령이라는 말에 고개를 숙이고 조심스럽게 선우영의 옆에 있는 의자에 다가와서 앉
는 유경. 그런 유경을 보며 다시 한번 그녀가 마음에 드는 선우영이었다.
"내가 가만히 있으면 많이 먹지도 못할 것 같으니, 여기 내가 내어주는 것은 니가 다
먹어야 한다. 다 못먹으면 널 크게 꾸짖을 테니 그리 알거라."
"대인.. "
"걱정 말고 자 먹자. 너도 몇 년 굶어 봐라. 아 좋다..자 자 먹자. 유경아."
빈 그릇에 몇가지 음식을 담아 유경의 앞에 내어주고, 그는 젖가락을 들고 음식을 먹
다가 성에 안차는지 손으로 쥐고 먹어대기 시작했다. 옆에서 조심스럽게 음식을 먹으
며 자신을 챙겨주는 선우영을 흘깃 흘깃 쳐다보던 그녀는 가끔식 비워진 그의 술잔을
채워주며 함께 식사를 이어갔다. 식사를 하던 중에 유경에 대해 이것 저것 물어가던
선우영은 급기야 가장 궁금했던 것을 묻기로 마음먹었다.
"유경아.."
"네 대인. 말씀하소서."
"내가 뭐 하나 좀 뭐 그런.. 뭐 하나 물어보아도 되겠느냐?"
"대인께서 물으신다면 소녀, 성심껏 대답하겠나이다."
지금까지 간단한 것들을 물으며 던졌던 무수한 떡밥들은 다 이 질문을 하기 위한 미
끼였다. 분위기 좋게 만들어서 반드시 듣고 싶었던 마지막 이 질문을 하기 위한 포석
이 드디어 완성된 순간이었다.
"유경아.. 너 처녀냐?"
"큭, 죄송하옵니다. 대인.. 소녀가 실례를.. 죄송하옵니다"
조심스럽게 음식을 먹던 유경의 입에서 작은 음식 조각이 튀어나왔다. 급히 사과를
하며 머리를 조아리는 유경을 보니, 괜한 마음에 어려운 말을 꺼내서 아이를 불편하
게 했다는 때늦은 후회가 들기 시작했다. 천천히 알아가면 그만인것을, 너무나 오랜
만에 만난 중원 여아를 보니 그만 성급해진 것 같았다. 한번의 어리석은 성급함은 모
든 것을 잃을 수 있다고 그렇게도 월국에서 몸으로 겪었건만..
"아.. 아니다. 내가 여인에게 묻기 곤란한 것을 물었는데 어찌 네 실수라 하느냐. 내
가 더 미안하구나. 괜한 것을 물었어. 미안하구나. 유경아. 조금전 말은 잊도록 해라."
대답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유경. 그리고 뻘쭘해진 선우영.
"내 말에 마음이 상했던 거 같구나. 미안하구나. 이미 한 말을 주워담을 수 없으니,
내 석잔의 술을 마셔 조금전 잘못을 사과하겠다. 미안하다."
그리고 유경에게 보란 듯이 술잔에 술을 부어 석잔을 연이어 마시는 선우영이었다.
그런 그를 지긋이 바라보던 유경은 무슨 생각인지 왼손에 쥐고 있던 그릇을 탁자위에
내리고, 소매를 살짝 겆어 선우영에게 보여주었다.
"저.. "
무엇을 보라는 듯이 부끄럽게 말을 하는 유경의 가느다란 팔을 보던 선우영의 눈에
선명하게 찍혀있는 붉은 반점이 보였다. 처녀들에게만 확인할 수 있다는 수궁사. 비
록 말은 없었지만 유경이 무슨 말을 하고자 했는지 알게 된 선우영의 입가에는 용주
관문에 들어선 이후 그 어떤 순간보다 진한 미소가 지어지기 시작했다. 자신도 아직
성혼을 하지 않았으니 누군가 먼저 뚫어간 여인에게 동정을 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월국에서 중원에 돌아와 처음 만난 마음에 든 여인이 처녀라는 것에 왜 이리 마음이
편안해지고 안심이 되는지 뜻 모를 미소만 자꾸 지어지는 선우영이었다.
갑자기 말이 없어진 유경과 갑자기 즐거워진 선우영이 그렇게 말없이 식사를 마치고
방을 나서자 두 위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장군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배가 고파 정신이 없었는데 이제 몸에 힘이 들어가는구려. 정말 고맙소. 그럼 교위
수장께 안내해주시겠소?"
두 위사를 따라 교위수장이 군무를 본다는 건물로 들어갔다.
"어서 오시오. 남도위. 그래 식사는 잘 하셨소?"
"챙겨주신 덕분에 몇 년만에 화려한 음식을 먹었습니다. 뱃속에서 난리가 난 것 같군요."
"허허.. 뭐 그리 좋은 거라고.. 음식은 충분하니 천천히 쉬시면서 더 드시구려. 그리
고 이제 슬슬 그간에 있었던 일을 보고서로 작성하는 것이 좋을 듯 싶소. 개봉에서도
남로정벌군에 대해 많이 궁금해 하시오. 사실 수색대도 여럿 보냈었지만 살아 돌아온
자는 남도위가 유일하니 말이오."
교위수장이 내어준 지필묵으로 그간 남로정벌군에 있었던 일을 적절한 가공과 사실
을 섞어 써내려가고 있었다. 몇 장을 그렇게 써서 종이에 묻은 먹이 마르기를 기다렸
다가 정리를 해서 교위수장에게 내어주었다.
"이것이 그간 제가 보고 겪었던 남로정벌군의 모든 것입니다. 이 보고서에 한치의 거
짓도 없음을 천지신명께서 증명해 주실 것입니다."
어차피 자기 밖에 살아온 자가 없으니 천지신명께서도 이해해 주실 거라 스스로 생
각하며 거짓과 과장으로 점철된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 보고서를 한참을 읽어가던 교
위수장은 마지막 장에 자신의 직인을 찍으며, 자신이 보는 앞에서 작성한 것임을 증
명하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 이제 남도위께선 어떻게 하실 생각이시오? 비록 부대가 전멸을 했다고는 하
나, 공이 적지는 않으니 변경성에 가면 어느 정도 포상이 기다리고 있을 텐데.. 내 남
도위를 위해 군마와 여비를 내어줄 수도 있소."
"처음 남로정벌군에 징집이 되었을 때는 저는 하급 병졸이었습니다. 은 5냥에 팔려
죽음이 기다리는 그곳 월국에서 매일같이 이어지는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며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살아 돌아가면 기다리고 있을 포상도, 관직의 상승도 아니옵고, 그저
생존한 자가 보고서를 작성하면 그 징집에 대한 군역을 면해준다는 단서 조항때문이
었습니다. 원래 남로정벌군의 후군이 있는 전림 관문에 가서 이 보고서를 제출했어야
마땅하나, 제가 산중에 길을 잃어 이렇게 이곳에 제출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저는 약
조한 대로 군역을 면하고 평범한 황제폐하의 백성으로 살아가고 싶을 따름입니다."
"호오..그렇게 말씀하시니 정말 아깝구려. 남도위같은 백전명장을 이렇게 평범한 범
부로 보내어야 한다는 것이, 같은 군무에 몸을 담고 있는 한 사람으로써 정말 아깝기
그지 없소. 그러나 남도위의 얼굴을 보니 말 몇 마디에 말을 바꿀 분도 아니고... 허
허.. 그래. 그럼 이제 길을 떠나셔야 할건데 본관에게 부탁할거라도 있으시오? 내 힘
닿는 대까지 도와드리리다."
"흐음.. 좀 부끄러운 청이 하나 있사온데.."
"무슨 청이길래 이리 뜸을 들이시오? 어서 말을 해보시오. 내 비록 이런 변방에 있지
만, 공을 세운 분에게 나름 응대를 해야 한다는 상식은 있는 몸이오. 말해보시구려."
"흐음.. 흠흠.. 저 유경이라는 아이를 제가 데리고 갈 수 있는지 싶어서... 흐음.."
선우영의 말이 끝나자 교위수장의 눈이 잔뜩 찌푸려 지는 것이 보였다. 말이 너무 노
골적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 찰라, 교위수장이 말을 꺼냈다.
"그 아이가 마음에 드신 것은 참으로 고마운 일이오나... 그 아이는 여타의 시비와 다
른 아이오. 혹 다른 아이로는 안되겠소?"
"아.. 제가 교위수장께 무례한 청을 한 것 같습니다. 몇년 동안 오지에 있다가 돌아온
터라 잠시 중원의 예의를 잊었다고 생각하시고 용서해주시길 바라옵니다. 진정 사과
드립니다."
"후우.. 그런 것이 아니라..그 아이는 내 딸과 같은 아이라오. 그런데 어찌 선뜻 허락
할 수 있겠소. 수양딸로 들이고 싶으나 그 아이가 스스로 거절을 한터라 아직 시비인
몸이지만, 내 마음속에는 이미 그 아이는 내 딸과 다름이 없소. 한 때의 지나가는 마
음으로 그 아이를 취하고 버릴 수 있는 여아가 아니란 말이오. 내 말을 오해없이 들으
시길 바라오."
"아니오. 아니오. 정말 그렇다면 내 교위수장께 지울 수 없는 실수를 한 것이오."
그 말을 하면서 선우영은 자리에 일어나서 고개를 깊이 숙여 다시 한번 사과를 했다.
"소관 남도위 선우영. 용주교위수장 심훈 장군께 진심으로 사과드리오. 소관이 모르
고 한 말이 이렇게 큰 실수인줄 정녕 모르고 있었소. 수양딸과 같은 분에게 내뱉은 말
을 되물릴 수는 없으니 교위수장께서 말씀하신 다면 그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겠소이다. "
고개를 숙이며 진심으로 사과하는 선우영을 바라보는 심훈의 눈은 복잡하기만 했다.
전쟁으로 일가족을 잃고 방황하던 아이를 거두어 키운지 벌써 십여년. 이제 성혼을
할 나이가 되었지만, 이곳에서는 심훈의 숨겨 놓은 딸이라는 소문이 흘러 그 누구도
선뜻 청해오는 자가 없었다. 간혹 황도에서 내려오는 감찰사들이 그녀를 하룻밤 품어
보는 장난감으로 청할 때가 있었지만, 감찰사의 눈밖에 나는 것을 각오하고 자신의
하나 뿐인 딸이라고 간곡하게 말해 매번 거절했던 터였다.
언젠가 다시 전쟁이 나면 불타 사라질지도 모르는 국경 관문. 군복을 벗고 범부로 살
아갈거라는 선우영은 어쩌면 딸과 같은 그 아이가 한 평생 의탁할 수 있는 남편이 되
어줄지도 모른다고 생각이 드는 심훈이었다. 그리고 그를 바라보는 심훈의 머릿속에
는 오늘 아침의 점괘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 아이는 내 딸과 같은, 아니 내 딸이오. 비록 그 아이가 내 수양딸이 되기를 거부
하던 터라 성을 받지는 않았지만, 난 이미 그 아이를 내 하나 뿐인 딸, 심유경이라 마
음에 세기고 살아왔소. 하룻밤 인연이 아니라 평생을 챙겨주실 수 있으시오?"
"장군?"
"언젠가 이 관문도 전쟁으로 사라질지도 모르오. 그리고 나도 그 난리통에 죽을지도
모르고.. 아니 어쩌면 그것이 아니라도 누군가의 모함으로 형장에서 사라질지도 모르
오. 그게 조정에 몸을 담는 순간부터 옥죄어 오는 무장들의 숙명이 아니겠소. 그 아이
가 마음편히 평생을 살아갔으면 좋겠구려. 환란틈에 생긴 병마로 아내도 떠난 지금,
그것이 내 마지막 남은 소원이오."
선우영이 느끼는 심훈의 마음은 장난이 아니었다. 언젠가 닥칠지 모르는 위험에서
딸을 구하고자 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것이, 그저 허허 하며 웃으
며 넘어갈 분위기가 결코 아니었다. 조금전 사과를 하던 자세에서 몸을 반듯하게 추
스리고 옷을 단정히 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절을 하며 심훈에게 말을 했다.
"비록 가진 것이 없는 몸이라 폐물을 준비하지 못하였습니다. 언젠가 손에서 사라질
것이 아니라, 제 몸에 흐르는 이 피로 장군의 따님을 아내로 맞이함을 서약하고자 하
옵니다."
그리고 허리에 패용되어 있던 철검을 꺼내 왼손을 지긋이 그었다. 손바닥을 타고 흐
르는 뜨거운 피. 그 피가 방울지다가 급기야 핏줄기가 되어 바닥에 쏟아지기 시작했
다.
"이 피를 이 땅이 기억하는 동안 장군의 소중한 따님을 아내로 맞아 한 평생을 함께
할 것을 천지신명과 이 몸에 흐르는 뜨거운 피에 대고 맹세하옵니다."
피를 흘리며 맹세를 하는 선우영을 바라보는 심훈의 눈은 눈물에 젖어가고 있었다.
그토록 기다려왔던 사람. 언젠가 나타나서 자신의 딸을 책임져 줄 거라 기다렸던 사
람을 이제서야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즐겁고 뜻깊은 날, 술이 없으면 어찌 이 날을 기억할 수 있으리오. 사위. 이
제 일어나시게나."
"장군.. 아니 장인어른. "
다시 한번 고개를 숙여 절을 한 선우영은, 심훈이 내어준 손을 잡고 일어났다. 눈물
이 글썽거리는 심훈의 얼굴을 보니, 그가 얼마나 자신의 딸을 아끼고 사랑하는지 마
음 한 부분을 알 수 있었다.
처음으로 여인을 취해볼까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했던 말이, 너무나 진지하게 받아
들이는 심훈으로 인해 얼떨결에 아내를 맞이하게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후회
는 들지 않았다. 비록 보잘것 없는 변방의 관문 수장이지만 딸을 자기 목숨보다 귀하
게 생각하는 장인어른이 생겼고, 그리고 무엇보다 사려심이 깊고 처녀인 부인이 생긴
다는 사실이 선우영이 바라보는 세상의 모든 것을 행복하게 만들었다. 동정남인 자신
에게 예쁘고 착하고, 그리고 그 무엇보다 처녀인 여인이 생긴다는데, 선우영의 지금
심정으로는 월국땅에서만 구할 수 있다는 귀한 독약이라도 웃으며 마실 수 있을 것
같았다.
심훈과 술자리를 마치고 늦은 밤, 처소로 돌아가고 있을 때 고개를 숙이고 자신을 따
라오는 그림자가 있었다. 심훈에게 언질을 받았던지 말없이 따라오고 있는 유경. 뒤
돌아 자신을 바라보는 선우영의 눈길이 부끄러운 듯 그저 두 손을 모으고 그의 대답
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유경.. 아니 이젠 소저라고 불러야겠구려. 심소서. "
"말씀 낮추소서. 소녀 감당하기 힘드옵니다."
"아니오. 어찌 내가 그리 쉽게 소저를 대할 수 있게겠소. 그래, 심장군께 무슨 말을
들으신게 있으시오?"
심훈에게 들은 말을 입밖에 꺼내는 것이 부끄러운 듯, 고개를 다소곳이 돌리고 조용
히 몇번 끄떡이는 유경이었다.
"밤 깊은 시각에 남녀가 함께 있으면 안된다고 어릴적 들었지만, 이미 소저도 알다시
피 우리는 곧 혼인을 할 사이가 아니오. 소저께서 괜찮으시다면 잠시 이야기를 하고
싶소. 이제는 서로가 조금씩 알아가야 할 사이가 아니오? 소저도 나에 대해 궁금한
것이 있을 테고, 나 또한 소저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다오."
준비된 자신의 처소에 문을 열고 들어간 선우영은 그녀가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조
용한 발걸음으로 남자의 방에 들어간 유경은 부끄러운 듯 문가에 서서 그의 말을 기
다리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혼례 이야기가 나와서 많이 혼란스러울 줄 아오. 나 또한 그렇지만, 쉽
게 결정한 일은 아니라는 것을 미리 말해주고 싶구려. 혹여, 나와 혼례를 하는 것이
싫다거나, 아니면 마음에 두고 있는 정인이 있다면 지금 말을 해주겠소? 심소저 처럼
어여쁜 여인이 지금까지 남자가 없었다는 것은 어쩌면 너무 웃긴 이야기가 아닌가 생
각될 정도니 말이오. "
선우영의 말에 그저 고개를 가로 젖는 것으로 남자가 없었음을 피력한 유경. 그런 그
녀를 보며 선우영은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낮에만 하더라도 자신에게 조심스러움은
있었지만, 이렇게 말을 못 할 정도는 아니었지 않은가. 혼례를 할 사이라고 인식을 해
서 그럴까. 너무나 수줍음을 타는 그녀가 귀엽기도 하고, 이런 정결한 여인을 자신에
게 내어주는 심훈의 마음을 선뜻 이해하기 힘든 선우영이었다. 만약 자신이 심훈이었
다면 천년 만년 데리고 살고 싶을 정도로 마음에 쏙 드는 딸이 아닌가.
"허허.. 낮에는 그렇게 꼬박 꼬박 대답을 잘하더니 이제는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구
려. 소저의 목소리를 이제 더이상 들을 수 없으니, 혼례를 하게 된 것이 무척 후회가
되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대의 고운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만족을 했어야 하는데..
허허"
어머니는 아버지에 대해 말을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의 말을 돌아보면,
아마도 아버지는 화류계에서 꽤나 유명했던 사람이지 않을까 싶어지는 선우영이었
다. 여인과의 대화에 대해 배운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자신이, 만난지 얼마 안되는 여
인에게 이렇게 부드럽게 작업을 걸 수 있다니. 나중에 어머니를 만나게 된다면 자신
의 몸속에 흐르는 놈팽이 기질을 가진 이 피의 반쪽이 누군인지 꼭 한번 물어보고자
다짐을 하는 선우영이었다.
그의 낮뜨거운 말에 더욱 고개를 숙이며 서있는 유경이 마음에 드는지, 의미 모를 미
소를 가득 지은 선우영은 그녀의 손을 잡고 의자로 이끌었다.
"소저, 잠시라도 앉으시오. 내 차를 내어드리리다."
"어머....팔에 피가.."
조금 전 심훈앞에서 유경과 혼례를 할 것이라고 맹세를 하며 그었던 왼손. 붕대를 구
해서 대충 감아 놓기는 했었지만, 분위기에 취해 그만 너무 그었던지 한동안 피가 멎
지 않았었다. 그 피가 붕대에 베어 붉게 물들어 있는 것을 유경이 보고 놀란 것이었다.
"후후. 내 말에 그렇게 대답을 안해주더니, 다친 것을 보고 말을 해주니 기분이 묘하
구려. 소저. 내 소저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 매일 다쳐야만 할 것 같소. "
"어찌 그런 말씀을... "
한 방안에 함께 있어서 인지, 유난히 부끄러워 하는 유경은 선우영의 왼손를 치료하
기 위해 감겨진 붕대를 풀어 가고 있었다. 남정네의 손을 잡는 다는 것이 쑥스러운 듯
고개를 푹 숙이고 붕대를 풀어가던 유경이 나지막히 선우영을 불렀다.
"가가.. 상처가.."
"허허..가가라.. 정말 듣기 좋은 말이구려. 소저도 내가 싫지는 않은 것 같아 정말 안
심이 되오. 다시 한번 불러 주시겠소? 내 귀가 어두운지 소저의 말을 잘 못들었소."
"아이 참.. 가가, 상처가.. 났었던게 맞는지요? 피는 묻어있는데 상처가..."
어여쁜 여인이 남자가 있었을까 궁금했던 마음은 이내 사라지고, 그녀가 자신을 가
가라고 부르자 마음속 가득 행복한 감정이 가득차는 선우영이었다. 그녀의 말을 몇번
이나 속으로 곱씹어 생각하던 선우영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가 말한 왼손을 바라보았
다. 가느다란 붉은 선이 낮에 칼로 그었던 상처가 그 자리에 있었음을 말해주는 듯 하
지만, 그 어느 곳에도 그 외에 별다른 상처가 보이지 않았다.
"아.. 상처가 다 나았구려. 왜 그런지 몰라도 난 이상하게 상처가 빨리 낫는다오. 앞
으로 일부러 자주 다칠테니 소저가 지금처럼 치료해주시구려. 부탁하리다."
"가가.. 그러지 않아도.. 소녀는.. "
"소녀는? 그 다음 말이 궁금하오. 어서 말해보시오."
"아이.. 그런게 있사옵니다."
유경의 두 손을 잡은 선우영은 고개를 숙이고 있는 유경을 지그시 바라보다 그녀를
살짝 끌어 안았다. 자신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파고드는 유경. 생전 처음으로 여인을
안은 느낌과 이제는 자신이 평생 책임을 저야 하는 부인이 생겼다는 묘한 두 감정 사
이를 느끼다가 그녀의 귀에 대고 말을 했다.
"이러다가 해가 떠도 우리 이러고 있을 것 같구려. 소저와 할 말이 많았는데.. 소저,
내가 아무리 좋아도 잠시 참아보시구려. 우리 할 얘기가 있지 않소?"
"어머.. 가가!"
"내가 원래 눈치가 좀 빠르다오. 허허. 나한테 푹 빠진 소저가 눈에 보이는구려"
농을 던지자 부끄러운 듯 하면서도 눈을 살짝 흘기는 그녀가 하염없이 예뻐보이는
선우영이었다. 탁자 옆에 놓인 작은 의자에 그녀를 앉혀주고 다기를 꺼내 차를 준비
했다. 따뜻한 차를 그녀의 찻잔에 부어주고 그녀의 옆에 의자를 바짝 당겨 앉았다. 그
리고 찻잔을 만지고 있는 그녀의 한쪽 손을 잡아 만지며 유경에게 부드럽게 말을 했다
"소저. 지금부터 내 하는 말 잘 들으시길 바라오. 난 홑어머니와 함께 살다가 기근으
로 여자 아이는 유곽에 팔려가고, 남자 아이는 군대에 팔려갈 때, 나도 은 5냥에 어머
니의 손에 팔려 그렇게 군에 끌려갔소. 고향 땅이 섬서의 어디라고 얼핏 기억이 나지
만 다시 찾아갈 정도로는 잘 모른다오. 사실 돌아가고 싶은 생각도 없소. 자신을 팔아
사지로 내몬 고향에 돌아가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소?"
그때부터 시작된 선우영의 어릴적 이야기. 배가 고파서 무슨 짓이던 해야 했던 마을
사람들과 애정이라고는 손톱의 떼 만큼이나 받지 못했던 어머니 밑에서 살았던 자신
의 기억. 그리고 입대하여 이국의 땅에서 겪어야 했던 일들을 설명해 주었다.
"우리 만큼 서로에 대해 모르고 살다가 갑작스레 혼약을 하는 경우도 없을 텐데 말이
오. 지금까지 말했던 지난 날이 내 모든 과거라고 생각하면 되오. 비록 말주변이 없어
모든 것을 다 설명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앞으로 내가 소저를 어떻게 생각할건지는
내 말속에 충분히 묻어났을 거라 감히 말할 수 있소."
선우영이 잡은 손위에 자신의 손을 겹쳐 그의 체온을 느끼고 있는 유경. 비록 대답은
없지만 그가 하는 말 하나 하나 놓치지 않으려는 그녀의 마음이 서로가 잡고 있는 손
을 통해 전해져 온다.
"소저도 알다시피 난 가진게 하나도 없소. 남도위라는 이 직책도 이제 며칠 후면 내
스스로 벗어 던지고 작은 산이나 얕으막한 강가에 자리를 잡고 농사나 지어볼까 생각
하고 있다오. 솔직히 말하건데, 소저는 내게 참으로 아깝소. 배운것 없고 가진 것 하
나 없는 내가 이렇게 곱게 자라고, 소중하게 보살펴 주시는 아버지까지 있는 여식을
단지 내 욕심 하나로 데리고 살기에는 소저 그대가 참으로 아깝소."
이야기를 듣는 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던 유경은 선우영의 마지막 말에 그의 가슴에
파고 들며 나지막히 말을 했다.
"소녀는.. 소녀는 그저.. 가가의 그 마음 하나 만으로 그저 고맙고 감사할 뿐입니다."
"많은 것을 함께 할 수는 없겠지만, 소저가 힘들어 할 때 내가 바로 옆에 있겠소. 그
리고 소저를 힘들게 하는 것이 있다면 내가 소저 앞에 항상 있을 것이오. 내 약속드릴
수 있는 것은 그것 하나 뿐이구려. 이런 내 마음을 받아줄 수 있겠소?"
"가가.. 소녀는.."
그의 말에 눈물을 흘리며 선우영을 바라보는 유경. 서로의 마음이 통했던지 잠시 서
로를 바라보던 그들의 얼굴이 조금씩 다가가서 하나로 합쳐지기 시작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해보는 여인과의 입맞춤. 따스하게 다가오는 그녀의 체온과 코를 스며드는
향긋한 내음이 지금 품에 안고 있는 여인이 이제 자신이 한 평생 책임져야 하는 정인
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일깨우는 순간이었다.
한동안의 입맞춤이 끝이 나고, 입맞춤의 긴 여운을 느끼는 순간이 다가왔다. 가슴에
안겨 고개를 숙이고 있는 유경을 안고 있는 선우영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지어졌
다. 그에겐 그토록 저주스럽기만 했던 남로정벌군이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그
저 보고서 몇 장만 쓰고 군역을 면제 받기를 바랐을 뿐인데, 이런 소중한 여인과의 인
연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생각이라도 한 적이 있었던지. 중원 그 어떤 여염집의 딸들
도 자신의 품에 있는 여인보다 귀하고 예쁘지 않을거라 생각을 하는 선우영이었다.
"소저.. 날이 밝으면 나와 함께 심장군에게 가서 인사를 드립시다. 그리고 장군께 듣
기로 소저가 심장군의 성을 아직 받지 않았다고 하던데, 내가 있는 자리에서 정식으
로 그 분의 수양딸이 되도록 하시구려. 소저를 위해 목숨을 잃은 부모님을 생각하는
소저의 마음을 내 모르는 것은 아니나, 그래도 소저를 친 딸처럼 지금까지 키워주셨
던 그 분의 은혜도 부모님의 그것에 못지 않을거라 감히 난 생각하오. 소저가 나와 혼
례를 올리고 이 곳을 떠나더라도 그 분이 지금까지 주신 은혜를 소저도 나도 잊으면
안되지 않소?"
"가가..소녀는 가가를 만난 것을 삼생의 복으로 여기겠습니다. 가가.."
다시 그의 품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는 유경. 그녀의 머리를 만져주며 복잡할 유경
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기로 마음먹는 선우영이었다.
"내가 원래 좀 멋있는 놈이오. 오죽하면 그대가 한 눈에 반했겠소."
"풋.. "
"허허.. 울다가 웃으면 어디에 털이 난다던데.. 혼례식때 꼭 확인해 보아야겠구려. "
"가가.. 나빠요."
"우리 이렇게 이야기만 합시다. 소저가 아무리 욕심이 나도 조금만 참으시오. 내 소
저의 마음을 내가 잘 아오. 허허허"
"어머!...."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유경에게 농담을 하는 선우영. 만난지 얼마 안된 사이지만 마
치 수십년을 함께 살아온 정인사이 처럼 다정해진 선우영과 유경이었다. 그 둘은 오
랫동안 대화를 하며 몰랐던 서로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주말에 추석이 끼었네요. -_-;
그래서 미리 올립니다. 즐겁고 건강한 한가위되시길 바랍니다.
참고로 이 무협은 아주 가벼운 분위기로 흘러갑니다.
감기가 워낙 머리 아픈 글이라.. 무협에서 만큼은 머리 아프고 싶지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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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떨어지고 바래진 옷, 그리고 녹이 슨 철검 한자루를 허리에 차고 있는 남자가 관
도를 따라 터벅 터벅 걸어가고 있다. 곧 관도의 끝자락에 관문이 나타나고, 관문위에
서 경계를 서던 초병들의 눈에 허름한 옷을 입은 자가 접근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지
금 그 낮선이가 오고 있는 쪽은 얼마전까지만 해도 치열한 전투가 연일 이어졌던 월
국과 국경이 맞닿아 있는 곳이었다. 수상한 자가 국경을 넘어 접근하고 있다는 보고
를 관문수장에게 올린 후 창을 비껴 든 초병이 남자를 향해 소리쳤다.
"더이상 다가오지 마라. 신원을 밝혀라. 그렇지 않으면 활을 쏘겠다."
선우영은 관문의 위에서 소리친 하급 군관의 말에 어이가 없어서 말이 나오지 않았
다. 배가 고파 서있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자신을 이렇게 경계하는 이유가 무엇인
지. 만약 관문위에서 정말 활을 쏜다면, 지금의 자신이라면 지푸라기로 만든 허수아
비 보다 더 잘 맞아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같은 대송군이라는 알량한 믿음 하
나로 자신의 신분 내역을 밝히기로 했다. 같은 황제의 소속인데 설마 굶기지는 않을
것 아닌가.
"의심하지 마시오. 난 황제폐하의 지엄하신 황명을 받잡고 월국정벌을 나섰던 남로
평정경략안무사의 휘하에 있던 남도위 선우영이라고 하오. 변경성에 급히 아뢸 전언
이 있으니 지금 관문으로 다가가는 것을 허락해 주시길 바라오. 급하오!"
마지막 말에 급하다고 외치고, 나지막히 말했다.
"배고파서.."
관문 위에선 일대 혼란이 일어났다. 지난 3년 동안 실종 또는 전멸되었다고 알려진
남로정벌군의 생존자가 이제서야 나타난 것이었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생존사 수색
을 위해 수색대를 파견했지만 어떻게 된 상황인지 수색을 나섰던 부대들 마저 실종이
되어 더이상 월국의 국경을 넘어 부대를 보내지도 못하고 그저 기다리고만 있던 상황
이었다. 그런데 그토록 궁금했었던 남로정벌군 본대의 생존자가 드디어 나타난 것이
다. 그것도 하급병졸이 아니라 군관이 혼자서.
"잠시만 기다리시오. 내 곧 가서 교위수장께 말씀드려 모셔오겠소. 잠시만 기다리시오."
"갈 때 가더라고 뭐 먹을거나 물 좀 주시구려. 목마르고 배고파 죽겠소."
관문을 내려갈려던 군관은 옆에 있던 장졸에게 무언가를 지시하고 뛰어가기 시작했
다. 그리고 닫혔던 관문이 힘겹게 조금 열리며 그 틈으로 장졸 몇이 잔뜩 긴장한 채로
창을 들고 다가왔다.
"별건 아니지만.. 여기 잠시 요기할 것을 가져왔습니다. 물은 여기..."
"고맙구려. 복 받으실게요."
"아니 그런 말씀은... 그럼.."
뭐가 그리 무서운지, 관문밖에 있는 것 조차 두렵다는 듯이 도망치는 병졸을 보며 선
우영은 살짝 웃다가 손에 든 물과 주먹밥을 꾸역 꾸역 먹기 시작했다.
"컥컥.. 몇 년만에 먹는 쌀밥인지.. 기필코 오늘은 고깃국을 먹어야지. 그거 하나 먹
으려고 죽다가 살아났는데.. 암 그렇지.."
한참을 주린 배를 채우느라 정신이 없는데, 다시 관문위에서 소란이 일어나고 누군
가의 말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는 다른 병졸이나 군관과 달리 붉은 갑주를 입고
있는 것이 멀리서도 보였다.
"이보시오. 당신이 정말 남로평정경략안무사의 휘하에 있던 남도위가 맞소?"
"뭐 그리 의심이 많으신게요? 소직이 이렇게 몰골이 말이 아니지만, 지엄하신 황명
을 받들어 출정한 군을 사사로이 입에 담을 만큼 담력이 큰 놈이 이니오. 소직은 개보
8년에 출정해서 월국 정벌을 나선 남로정벌군의 생존자, 남도위 선우영이라 하오."
"개보 8년이라고 하셨소? 그럼 혹시 군패라도 가지고 있으시오? 그걸 보여주시오.그
전까지는 들어올 수 없소"
부모가 살아와도 증거를 대보라고 할 것 같은 의심많은 군관의 서슬퍼런 말에 남도
위 군패를 품에서 꺼내 보였다.
"이 군패가 보이시오? 안보이면 내 관문쪽으로 다가가리다. 보고할 것도 있다니까
그러네"
"아니오. 여기서도 잘 보이오. 어서 관문을 열고, 저 분을 안으로 뫼시거라. 확인되었
으니 잠시만 기다리시오."
곧 육중한 소리를 내는 관문이 조금전 처럼 다시 열리기 시작하고, 병졸과 군관이 선
우영을 애워싸고 관문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관문안에는 붉은 갑주를 입은 조금
전 군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시오. 남도위. 그동안 정말 고생이 많으셨구려. 본관은 용주관문을 지키고
있는 용주교위수장 심훈이라고 하오. 그리고 이들은 본관의 휘하인 위사 팽정현과 위
사 윤진이오."
"용주관문 위사 팽정현이라 하옵니다."
"용주관문 위사 윤진이라 하옵니다."
자신에게 깍듯하게 인사를 하는 세명을 보며, 선우영은 속으로 웃음을 삼켜야만 했
다. 어쨋든 자신은 이제 도패수 선우영이 아닌 남도위 선우영이니까. 그런데 후군이
있는 전림을 향해 도망을 가고 있었다고 생각을 했는데, 뜬금없이 용주관문이라니 어
처구니가 없었다. 아무리 자신이 길치라고 하지만 이건 너무한게 아닌가. 그래도 이
젠 더이상 굶지 않아도 되니 그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다행이라 생각하는 선우영이
었다.
"몇 년만에 보는 황군인지 정말 반갑구려. 소직은 남로정벌군 남도위 선우영이라 하
오. 그간의 상황을 보고해야 하는데 안내해 주시겠소? 아 그 전에 좀 씻고 옷도 갈아
입고, 배도 좀 채웠으면 하오."
"걱정마시오. 개봉에 보낼 보고서는 소장이 작성할 준비를 해 놓을테니 우선 피곤한
몸을 좀 추스리고 소장이 있는 곳으로 오시구려. 여기, 두 위사가 안내해 줄 것이오."
"고맙소.. 그럼"
"남도위께선 저희를 따라 오시겠습니까? 쉬실 곳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고맙소. 부탁드리오."
두 위사를 따라 관문안의 길을 따라 걷자, 곧 영내에 있다고 말하기 어려운 객청이
나타났다. 아마도 가끔 황도에서 찾아오는 감찰사들을 맞이 하기 위해 마련 된 공간
인 듯 하다. 객청에 들어가자 팽정현이 지나가는 시비를 불러 씻을 준비와 음식들을
주문하기 시작했다.
"곧 씻으실 수 있을 겁니다. 따뜻한 물로 여독을 푸신 후 내려오시면 식사 준비가 되
어 있을 겁니다. 이 아이를 따라가시지요."
"저는 그동안 남도위께서 입으실 옷을 마련하러 가겠습니다. 혹시 원하시는 어떤 옷
이라도 있으신지요?"
"팽위사의 꼼꼼함에 소직이 정말 감탄했구려. 정말 고맙소이다. 아..그리고 윤위사.
소직은 그저 입고 다니기 편안한 옷이면 좋은데..색깔은 검은색이 좋겠구려. 때가 많
이 타면 좀 그렇잖소?"
"하하.. 그렇지요. 그럼 저는 남도위께서 입으실 옷을 마련하러 잠시 자리를 비우겠
습니다. 그 동안 쉬시고 있으시기를..."
"고맙소이다. 그럼 잠시 후에 두분을 다시 뵙겠소."
두 위사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선우영의 앞에 고개를 숙인 작은 여아가 다가와 말을
했다.
"대인 저를 따라오시지요.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서로 고개를 숙여 동시에 인사를 하고, 선우영은 작은 몸집을 가진 여아를 따
라 객청의 2층으로 올라갔다. 통나무로 짠 큼직한 목간통에는 뜨거운 물이 들어차 하
얀 김을 내뿜고 있었다. 욕탕을 안내한 여아는 고개를 숙이며 다시 뒷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문을 닫고 나갈려는 여아를 향해 선우영이 말했다. 한창 때의 선우영에게, 그
리고 여자 구경을 오랫동안 해보지 않은 선우영이기에 좁은 곳에 남녀가 함께 있는
이런 상황이 미묘하기만 했다. 그리고 지금 선우영의 눈앞에 있는 여아는 보기만 해
도 흐믓해지는 아이였다.
"어딜 가는게냐?"
"대인께서 다 씻으실 동안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나이다. 혹여 목욕 시중이 필요하시
다면 다른 아이를 불러 드리겠나이다."
"됐다. 난 여색을 탐하지 않으니 복도에서 기다리다가 물이나 갈아다오."
"예 대인.."
선우영이 이번에 저 아이를 취한다고 해서 누가 뭐라 할 사람도 없을 테지만, 그럴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월국에서 죽기 위해 먹었던 그 독초. 이름도 알 수 없는 그 독
초를 먹고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눈을 떴을 때, 온 몸이 발가벗겨져서 나무 구
덩이 속에 웅크리고 있던 자신을 발견했던 날. 그리고 뭔가 달라졌다고 느끼며 자신
의 몸을 살펴보던 선우영은 그 때 놀라서 기절하는 줄만 알았었다. 죽기 전 보다 훨씬
길고 굵어진 자신의 양물이 자신의 눈에 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더 놀라운건 양물의 색깔이 보라색이 되었다는 것. 월국의 독개
구리도 아니고 보라색으로 변한 자신의 양물을 어찌 처음 만난 여아에게 보여줄 수
있을까. 이걸 보여주면 저 아이는 아마 비명을 지르며 기절할게 불보듯 뻔한 상황이
었다. 솔직한 마음은 방금 방을 나간 저 여아의 옷을 벗기고 불타는 시간을 나누고 싶
지만, 그럴 수 없는 안타까움은 양물에 괜한 힘이 들어가게 만들었다.
"보여줄 수 없는 쓸모 없는 것이 힘만 잔뜩 들어가는구나... 독초를 먹는 것이 아니었
는데..."
벗은 옷을 탁자위에 올리고 오랜만에 뜨거운 물로 씻을 준비를 하던 중에, 조금전 관
문에서 보여주었던 남로정벌군 남도위 군패가 바닥에 떨어졌다.
"탱그렁 ..."
2년전, 같은 도패수였던 녀석의 군패였다. 월국 깊은 오지에서 한 대부락과의 전투
에서 큰 공을 세우고 도패수에서 남도위로 신분상승을 이루어 냈던 그 녀석은, 부대
가 전멸하던 그 날에도 공을 세우기 위해 전열의 가장 앞에 서서 용감하게 싸우다가
가장 먼저 죽어버렸다. 그리고 선우영은 그 녀석의 뒤에서 죽은 척을 하고 누워있다
가 녀석의 군패를 이렇게 빼왔던 것이다.
"이 사람아. 열심히 싸워서 죽으면 누가 알아주나.. 살아 있어야지. 하긴 나도 죽으려
고 했었지만.. 이보게 자네. 그거랑 그거는 좀 다르다네. 후후, 하여튼 고맙네. 내 가
끔 자네가 생각나면 고깃국을 제사상에 올려줌세. 자네가 못다 이룬 꿈을 내가 해주
겠네. 이제 마음 푹 놓고 영면하시게나. 큭큭"
도패수에서 남도위가 되게 만들어 주었던 동료의 군패를 손에 쥔 선우영은 그간 말
하지 못했던 속내를 먼저 떠난 그에게 고백하 듯이 군패를 보며 털어 놓았다. 소중하
게 탁자위에 군패를 갈무리를 한 선우영은 뜨거운 물이 가득 찬 욕조에 몸을 넣었다.
그간 몇 달의 밤과 낮동안 계속되었던 그 피말리는 월국군 추적의 피로가 뜨거운 물
속에 녹아 없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아... 몇 년만이냐. 뜨거운 물. 아아!.. 정말 좋다는 말 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구
나..여기에 술만 있으면 딱 좋은데.. 맞다"
갑자기 무언가 생각이 난다는 듯이 선우영은 복도에 기다리고 있을 시비 아이를 큰
소리로 불렀다.
"밖에 아직도 기다리고 있느냐? 잠시 들어와 보거라"
"네.. 대인"
다른 곳에 가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던 듯 여아는 부르자 마자 바로 문을 열고 들어와
서 고개를 숙이고 선우영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넌 지금 가서 요기할 것과 술을 조금 가져오너라. 내 지금 배가 너무 고파서 뭐라도
좀 먹어야 할 것 같구나."
"네 대인. 식사는 준비가 되었다고 하니, 간단히 드실 것을 차려오겠습니다."
"세심한 씀씀이가 고맙구나. 부탁한다."
"편히 말씀하소서 대인. 말씀이 과하시면 소녀 불편하옵니다."
"알겠다. 가보아라"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고 가는 여아를 바라보는 선우영. 뒤돌아 나가는 여아의 뒷모
습에서 잔털이 난 뽀얀 목덜미를 보자, 물속에 잠겨있는 양물이 화가 난듯 마구 요동
치기 시작했다. 먹음직한 먹이를 보았을 때의 뱀처럼, 선우영의 그것은 그렇게 잔뜩
화가 난채 물속에서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이 흉칙한 걸 보면 저 아이는 뭐라고 할까. 큭큭.. 나도 놀랐었는데 얼마나 놀랄지.."
시비가 가져온 술과 안주를 먹으며 목욕을 마친 선우영은 옷을 갈아입고 문을 나섰
다. 식사가 준비되어 있다는 방에 들어서자, 커다란 식탁위에 생전 보지 못했던 갖가
지 진미가 가득 차려져 있었다. 온 방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음식냄새. 예전보다 감각
이 예민해 졌는지 그 냄새가 선우영의 배를 더욱 자극하고 있었다.
"음식 냄새가 사람 미치게 하는구나...호오.. 좋다 좋아."
"대인 천천히 드시옵소서. 차린 음식은 많으니 조금씩 드시는 것이 몸에 좋을 줄 아
옵니다."
"허..그거 참. 넌 정말 이런데서 일하기엔 참 아깝구나.."
"과찬이옵니다."
"이름이 무엇이냐?"
"성은 없사옵고, 유경이라 하옵니다."
"그래 유경아. 여기서 가장 맛있는 것이 무엇이냐? 너무 많이 차려져 있으니 어느 것
부터 먹어야 할지 손이 안가는구나."
"아뢰옵기 죄송하오나, 대인들을 위해 준비한 상을 저같은 시비는 접할 길이 없어 맛
을 본 적이 없사옵니다. 대인의 말씀에 부응하지 못함을 용서해 주시길..."
"여기 있는 것을 하나도 먹은 적이 없어?"
"네 대인.."
고개를 숙이고 있는 유경을 보니, 이 아이의 마음 씀씀이가 마음에 든 선우영이었다.
"유경아. 그럼 내 옆에 앉아서 같이 먹자꾸나. 어차피 나 혼자 먹기에는 너무 많은 음
식이니 너 하나 더 먹는다고 어디 모자라기야 하겠느냐?"
"어찌 대인을 위해 준비되어 있는 상을 저같은 시비가 동석을 할 수 있겠나이까. 그
저 대인의 마음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식기 전에 음식을 드시옵소서."
"보는 이도 없는데 뭘 그리 조심하느냐. 내가 원하는데 넌 그저 먹기만 하면 된다. 그
리고 음식은 남기면 벌받는다. 차려준 것은 다 먹어야지. 어서 앉거라. 명령이다."
명령이라는 말에 고개를 숙이고 조심스럽게 선우영의 옆에 있는 의자에 다가와서 앉
는 유경. 그런 유경을 보며 다시 한번 그녀가 마음에 드는 선우영이었다.
"내가 가만히 있으면 많이 먹지도 못할 것 같으니, 여기 내가 내어주는 것은 니가 다
먹어야 한다. 다 못먹으면 널 크게 꾸짖을 테니 그리 알거라."
"대인.. "
"걱정 말고 자 먹자. 너도 몇 년 굶어 봐라. 아 좋다..자 자 먹자. 유경아."
빈 그릇에 몇가지 음식을 담아 유경의 앞에 내어주고, 그는 젖가락을 들고 음식을 먹
다가 성에 안차는지 손으로 쥐고 먹어대기 시작했다. 옆에서 조심스럽게 음식을 먹으
며 자신을 챙겨주는 선우영을 흘깃 흘깃 쳐다보던 그녀는 가끔식 비워진 그의 술잔을
채워주며 함께 식사를 이어갔다. 식사를 하던 중에 유경에 대해 이것 저것 물어가던
선우영은 급기야 가장 궁금했던 것을 묻기로 마음먹었다.
"유경아.."
"네 대인. 말씀하소서."
"내가 뭐 하나 좀 뭐 그런.. 뭐 하나 물어보아도 되겠느냐?"
"대인께서 물으신다면 소녀, 성심껏 대답하겠나이다."
지금까지 간단한 것들을 물으며 던졌던 무수한 떡밥들은 다 이 질문을 하기 위한 미
끼였다. 분위기 좋게 만들어서 반드시 듣고 싶었던 마지막 이 질문을 하기 위한 포석
이 드디어 완성된 순간이었다.
"유경아.. 너 처녀냐?"
"큭, 죄송하옵니다. 대인.. 소녀가 실례를.. 죄송하옵니다"
조심스럽게 음식을 먹던 유경의 입에서 작은 음식 조각이 튀어나왔다. 급히 사과를
하며 머리를 조아리는 유경을 보니, 괜한 마음에 어려운 말을 꺼내서 아이를 불편하
게 했다는 때늦은 후회가 들기 시작했다. 천천히 알아가면 그만인것을, 너무나 오랜
만에 만난 중원 여아를 보니 그만 성급해진 것 같았다. 한번의 어리석은 성급함은 모
든 것을 잃을 수 있다고 그렇게도 월국에서 몸으로 겪었건만..
"아.. 아니다. 내가 여인에게 묻기 곤란한 것을 물었는데 어찌 네 실수라 하느냐. 내
가 더 미안하구나. 괜한 것을 물었어. 미안하구나. 유경아. 조금전 말은 잊도록 해라."
대답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는 유경. 그리고 뻘쭘해진 선우영.
"내 말에 마음이 상했던 거 같구나. 미안하구나. 이미 한 말을 주워담을 수 없으니,
내 석잔의 술을 마셔 조금전 잘못을 사과하겠다. 미안하다."
그리고 유경에게 보란 듯이 술잔에 술을 부어 석잔을 연이어 마시는 선우영이었다.
그런 그를 지긋이 바라보던 유경은 무슨 생각인지 왼손에 쥐고 있던 그릇을 탁자위에
내리고, 소매를 살짝 겆어 선우영에게 보여주었다.
"저.. "
무엇을 보라는 듯이 부끄럽게 말을 하는 유경의 가느다란 팔을 보던 선우영의 눈에
선명하게 찍혀있는 붉은 반점이 보였다. 처녀들에게만 확인할 수 있다는 수궁사. 비
록 말은 없었지만 유경이 무슨 말을 하고자 했는지 알게 된 선우영의 입가에는 용주
관문에 들어선 이후 그 어떤 순간보다 진한 미소가 지어지기 시작했다. 자신도 아직
성혼을 하지 않았으니 누군가 먼저 뚫어간 여인에게 동정을 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월국에서 중원에 돌아와 처음 만난 마음에 든 여인이 처녀라는 것에 왜 이리 마음이
편안해지고 안심이 되는지 뜻 모를 미소만 자꾸 지어지는 선우영이었다.
갑자기 말이 없어진 유경과 갑자기 즐거워진 선우영이 그렇게 말없이 식사를 마치고
방을 나서자 두 위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장군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배가 고파 정신이 없었는데 이제 몸에 힘이 들어가는구려. 정말 고맙소. 그럼 교위
수장께 안내해주시겠소?"
두 위사를 따라 교위수장이 군무를 본다는 건물로 들어갔다.
"어서 오시오. 남도위. 그래 식사는 잘 하셨소?"
"챙겨주신 덕분에 몇 년만에 화려한 음식을 먹었습니다. 뱃속에서 난리가 난 것 같군요."
"허허.. 뭐 그리 좋은 거라고.. 음식은 충분하니 천천히 쉬시면서 더 드시구려. 그리
고 이제 슬슬 그간에 있었던 일을 보고서로 작성하는 것이 좋을 듯 싶소. 개봉에서도
남로정벌군에 대해 많이 궁금해 하시오. 사실 수색대도 여럿 보냈었지만 살아 돌아온
자는 남도위가 유일하니 말이오."
교위수장이 내어준 지필묵으로 그간 남로정벌군에 있었던 일을 적절한 가공과 사실
을 섞어 써내려가고 있었다. 몇 장을 그렇게 써서 종이에 묻은 먹이 마르기를 기다렸
다가 정리를 해서 교위수장에게 내어주었다.
"이것이 그간 제가 보고 겪었던 남로정벌군의 모든 것입니다. 이 보고서에 한치의 거
짓도 없음을 천지신명께서 증명해 주실 것입니다."
어차피 자기 밖에 살아온 자가 없으니 천지신명께서도 이해해 주실 거라 스스로 생
각하며 거짓과 과장으로 점철된 보고서를 제출했다. 그 보고서를 한참을 읽어가던 교
위수장은 마지막 장에 자신의 직인을 찍으며, 자신이 보는 앞에서 작성한 것임을 증
명하고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 이제 남도위께선 어떻게 하실 생각이시오? 비록 부대가 전멸을 했다고는 하
나, 공이 적지는 않으니 변경성에 가면 어느 정도 포상이 기다리고 있을 텐데.. 내 남
도위를 위해 군마와 여비를 내어줄 수도 있소."
"처음 남로정벌군에 징집이 되었을 때는 저는 하급 병졸이었습니다. 은 5냥에 팔려
죽음이 기다리는 그곳 월국에서 매일같이 이어지는 죽음의 공포를 이겨내며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살아 돌아가면 기다리고 있을 포상도, 관직의 상승도 아니옵고, 그저
생존한 자가 보고서를 작성하면 그 징집에 대한 군역을 면해준다는 단서 조항때문이
었습니다. 원래 남로정벌군의 후군이 있는 전림 관문에 가서 이 보고서를 제출했어야
마땅하나, 제가 산중에 길을 잃어 이렇게 이곳에 제출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저는 약
조한 대로 군역을 면하고 평범한 황제폐하의 백성으로 살아가고 싶을 따름입니다."
"호오..그렇게 말씀하시니 정말 아깝구려. 남도위같은 백전명장을 이렇게 평범한 범
부로 보내어야 한다는 것이, 같은 군무에 몸을 담고 있는 한 사람으로써 정말 아깝기
그지 없소. 그러나 남도위의 얼굴을 보니 말 몇 마디에 말을 바꿀 분도 아니고... 허
허.. 그래. 그럼 이제 길을 떠나셔야 할건데 본관에게 부탁할거라도 있으시오? 내 힘
닿는 대까지 도와드리리다."
"흐음.. 좀 부끄러운 청이 하나 있사온데.."
"무슨 청이길래 이리 뜸을 들이시오? 어서 말을 해보시오. 내 비록 이런 변방에 있지
만, 공을 세운 분에게 나름 응대를 해야 한다는 상식은 있는 몸이오. 말해보시구려."
"흐음.. 흠흠.. 저 유경이라는 아이를 제가 데리고 갈 수 있는지 싶어서... 흐음.."
선우영의 말이 끝나자 교위수장의 눈이 잔뜩 찌푸려 지는 것이 보였다. 말이 너무 노
골적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 찰라, 교위수장이 말을 꺼냈다.
"그 아이가 마음에 드신 것은 참으로 고마운 일이오나... 그 아이는 여타의 시비와 다
른 아이오. 혹 다른 아이로는 안되겠소?"
"아.. 제가 교위수장께 무례한 청을 한 것 같습니다. 몇년 동안 오지에 있다가 돌아온
터라 잠시 중원의 예의를 잊었다고 생각하시고 용서해주시길 바라옵니다. 진정 사과
드립니다."
"후우.. 그런 것이 아니라..그 아이는 내 딸과 같은 아이라오. 그런데 어찌 선뜻 허락
할 수 있겠소. 수양딸로 들이고 싶으나 그 아이가 스스로 거절을 한터라 아직 시비인
몸이지만, 내 마음속에는 이미 그 아이는 내 딸과 다름이 없소. 한 때의 지나가는 마
음으로 그 아이를 취하고 버릴 수 있는 여아가 아니란 말이오. 내 말을 오해없이 들으
시길 바라오."
"아니오. 아니오. 정말 그렇다면 내 교위수장께 지울 수 없는 실수를 한 것이오."
그 말을 하면서 선우영은 자리에 일어나서 고개를 깊이 숙여 다시 한번 사과를 했다.
"소관 남도위 선우영. 용주교위수장 심훈 장군께 진심으로 사과드리오. 소관이 모르
고 한 말이 이렇게 큰 실수인줄 정녕 모르고 있었소. 수양딸과 같은 분에게 내뱉은 말
을 되물릴 수는 없으니 교위수장께서 말씀하신 다면 그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겠소이다. "
고개를 숙이며 진심으로 사과하는 선우영을 바라보는 심훈의 눈은 복잡하기만 했다.
전쟁으로 일가족을 잃고 방황하던 아이를 거두어 키운지 벌써 십여년. 이제 성혼을
할 나이가 되었지만, 이곳에서는 심훈의 숨겨 놓은 딸이라는 소문이 흘러 그 누구도
선뜻 청해오는 자가 없었다. 간혹 황도에서 내려오는 감찰사들이 그녀를 하룻밤 품어
보는 장난감으로 청할 때가 있었지만, 감찰사의 눈밖에 나는 것을 각오하고 자신의
하나 뿐인 딸이라고 간곡하게 말해 매번 거절했던 터였다.
언젠가 다시 전쟁이 나면 불타 사라질지도 모르는 국경 관문. 군복을 벗고 범부로 살
아갈거라는 선우영은 어쩌면 딸과 같은 그 아이가 한 평생 의탁할 수 있는 남편이 되
어줄지도 모른다고 생각이 드는 심훈이었다. 그리고 그를 바라보는 심훈의 머릿속에
는 오늘 아침의 점괘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 아이는 내 딸과 같은, 아니 내 딸이오. 비록 그 아이가 내 수양딸이 되기를 거부
하던 터라 성을 받지는 않았지만, 난 이미 그 아이를 내 하나 뿐인 딸, 심유경이라 마
음에 세기고 살아왔소. 하룻밤 인연이 아니라 평생을 챙겨주실 수 있으시오?"
"장군?"
"언젠가 이 관문도 전쟁으로 사라질지도 모르오. 그리고 나도 그 난리통에 죽을지도
모르고.. 아니 어쩌면 그것이 아니라도 누군가의 모함으로 형장에서 사라질지도 모르
오. 그게 조정에 몸을 담는 순간부터 옥죄어 오는 무장들의 숙명이 아니겠소. 그 아이
가 마음편히 평생을 살아갔으면 좋겠구려. 환란틈에 생긴 병마로 아내도 떠난 지금,
그것이 내 마지막 남은 소원이오."
선우영이 느끼는 심훈의 마음은 장난이 아니었다. 언젠가 닥칠지 모르는 위험에서
딸을 구하고자 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것이, 그저 허허 하며 웃으
며 넘어갈 분위기가 결코 아니었다. 조금전 사과를 하던 자세에서 몸을 반듯하게 추
스리고 옷을 단정히 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절을 하며 심훈에게 말을 했다.
"비록 가진 것이 없는 몸이라 폐물을 준비하지 못하였습니다. 언젠가 손에서 사라질
것이 아니라, 제 몸에 흐르는 이 피로 장군의 따님을 아내로 맞이함을 서약하고자 하
옵니다."
그리고 허리에 패용되어 있던 철검을 꺼내 왼손을 지긋이 그었다. 손바닥을 타고 흐
르는 뜨거운 피. 그 피가 방울지다가 급기야 핏줄기가 되어 바닥에 쏟아지기 시작했
다.
"이 피를 이 땅이 기억하는 동안 장군의 소중한 따님을 아내로 맞아 한 평생을 함께
할 것을 천지신명과 이 몸에 흐르는 뜨거운 피에 대고 맹세하옵니다."
피를 흘리며 맹세를 하는 선우영을 바라보는 심훈의 눈은 눈물에 젖어가고 있었다.
그토록 기다려왔던 사람. 언젠가 나타나서 자신의 딸을 책임져 줄 거라 기다렸던 사
람을 이제서야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즐겁고 뜻깊은 날, 술이 없으면 어찌 이 날을 기억할 수 있으리오. 사위. 이
제 일어나시게나."
"장군.. 아니 장인어른. "
다시 한번 고개를 숙여 절을 한 선우영은, 심훈이 내어준 손을 잡고 일어났다. 눈물
이 글썽거리는 심훈의 얼굴을 보니, 그가 얼마나 자신의 딸을 아끼고 사랑하는지 마
음 한 부분을 알 수 있었다.
처음으로 여인을 취해볼까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했던 말이, 너무나 진지하게 받아
들이는 심훈으로 인해 얼떨결에 아내를 맞이하게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렇다고 후회
는 들지 않았다. 비록 보잘것 없는 변방의 관문 수장이지만 딸을 자기 목숨보다 귀하
게 생각하는 장인어른이 생겼고, 그리고 무엇보다 사려심이 깊고 처녀인 부인이 생긴
다는 사실이 선우영이 바라보는 세상의 모든 것을 행복하게 만들었다. 동정남인 자신
에게 예쁘고 착하고, 그리고 그 무엇보다 처녀인 여인이 생긴다는데, 선우영의 지금
심정으로는 월국땅에서만 구할 수 있다는 귀한 독약이라도 웃으며 마실 수 있을 것
같았다.
심훈과 술자리를 마치고 늦은 밤, 처소로 돌아가고 있을 때 고개를 숙이고 자신을 따
라오는 그림자가 있었다. 심훈에게 언질을 받았던지 말없이 따라오고 있는 유경. 뒤
돌아 자신을 바라보는 선우영의 눈길이 부끄러운 듯 그저 두 손을 모으고 그의 대답
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유경.. 아니 이젠 소저라고 불러야겠구려. 심소서. "
"말씀 낮추소서. 소녀 감당하기 힘드옵니다."
"아니오. 어찌 내가 그리 쉽게 소저를 대할 수 있게겠소. 그래, 심장군께 무슨 말을
들으신게 있으시오?"
심훈에게 들은 말을 입밖에 꺼내는 것이 부끄러운 듯, 고개를 다소곳이 돌리고 조용
히 몇번 끄떡이는 유경이었다.
"밤 깊은 시각에 남녀가 함께 있으면 안된다고 어릴적 들었지만, 이미 소저도 알다시
피 우리는 곧 혼인을 할 사이가 아니오. 소저께서 괜찮으시다면 잠시 이야기를 하고
싶소. 이제는 서로가 조금씩 알아가야 할 사이가 아니오? 소저도 나에 대해 궁금한
것이 있을 테고, 나 또한 소저에 대해 궁금한 것이 많다오."
준비된 자신의 처소에 문을 열고 들어간 선우영은 그녀가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조
용한 발걸음으로 남자의 방에 들어간 유경은 부끄러운 듯 문가에 서서 그의 말을 기
다리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혼례 이야기가 나와서 많이 혼란스러울 줄 아오. 나 또한 그렇지만, 쉽
게 결정한 일은 아니라는 것을 미리 말해주고 싶구려. 혹여, 나와 혼례를 하는 것이
싫다거나, 아니면 마음에 두고 있는 정인이 있다면 지금 말을 해주겠소? 심소저 처럼
어여쁜 여인이 지금까지 남자가 없었다는 것은 어쩌면 너무 웃긴 이야기가 아닌가 생
각될 정도니 말이오. "
선우영의 말에 그저 고개를 가로 젖는 것으로 남자가 없었음을 피력한 유경. 그런 그
녀를 보며 선우영은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낮에만 하더라도 자신에게 조심스러움은
있었지만, 이렇게 말을 못 할 정도는 아니었지 않은가. 혼례를 할 사이라고 인식을 해
서 그럴까. 너무나 수줍음을 타는 그녀가 귀엽기도 하고, 이런 정결한 여인을 자신에
게 내어주는 심훈의 마음을 선뜻 이해하기 힘든 선우영이었다. 만약 자신이 심훈이었
다면 천년 만년 데리고 살고 싶을 정도로 마음에 쏙 드는 딸이 아닌가.
"허허.. 낮에는 그렇게 꼬박 꼬박 대답을 잘하더니 이제는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구
려. 소저의 목소리를 이제 더이상 들을 수 없으니, 혼례를 하게 된 것이 무척 후회가
되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대의 고운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만족을 했어야 하는데..
허허"
어머니는 아버지에 대해 말을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의 말을 돌아보면,
아마도 아버지는 화류계에서 꽤나 유명했던 사람이지 않을까 싶어지는 선우영이었
다. 여인과의 대화에 대해 배운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자신이, 만난지 얼마 안되는 여
인에게 이렇게 부드럽게 작업을 걸 수 있다니. 나중에 어머니를 만나게 된다면 자신
의 몸속에 흐르는 놈팽이 기질을 가진 이 피의 반쪽이 누군인지 꼭 한번 물어보고자
다짐을 하는 선우영이었다.
그의 낮뜨거운 말에 더욱 고개를 숙이며 서있는 유경이 마음에 드는지, 의미 모를 미
소를 가득 지은 선우영은 그녀의 손을 잡고 의자로 이끌었다.
"소저, 잠시라도 앉으시오. 내 차를 내어드리리다."
"어머....팔에 피가.."
조금 전 심훈앞에서 유경과 혼례를 할 것이라고 맹세를 하며 그었던 왼손. 붕대를 구
해서 대충 감아 놓기는 했었지만, 분위기에 취해 그만 너무 그었던지 한동안 피가 멎
지 않았었다. 그 피가 붕대에 베어 붉게 물들어 있는 것을 유경이 보고 놀란 것이었다.
"후후. 내 말에 그렇게 대답을 안해주더니, 다친 것을 보고 말을 해주니 기분이 묘하
구려. 소저. 내 소저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 매일 다쳐야만 할 것 같소. "
"어찌 그런 말씀을... "
한 방안에 함께 있어서 인지, 유난히 부끄러워 하는 유경은 선우영의 왼손를 치료하
기 위해 감겨진 붕대를 풀어 가고 있었다. 남정네의 손을 잡는 다는 것이 쑥스러운 듯
고개를 푹 숙이고 붕대를 풀어가던 유경이 나지막히 선우영을 불렀다.
"가가.. 상처가.."
"허허..가가라.. 정말 듣기 좋은 말이구려. 소저도 내가 싫지는 않은 것 같아 정말 안
심이 되오. 다시 한번 불러 주시겠소? 내 귀가 어두운지 소저의 말을 잘 못들었소."
"아이 참.. 가가, 상처가.. 났었던게 맞는지요? 피는 묻어있는데 상처가..."
어여쁜 여인이 남자가 있었을까 궁금했던 마음은 이내 사라지고, 그녀가 자신을 가
가라고 부르자 마음속 가득 행복한 감정이 가득차는 선우영이었다. 그녀의 말을 몇번
이나 속으로 곱씹어 생각하던 선우영은 고개를 숙이고 그녀가 말한 왼손을 바라보았
다. 가느다란 붉은 선이 낮에 칼로 그었던 상처가 그 자리에 있었음을 말해주는 듯 하
지만, 그 어느 곳에도 그 외에 별다른 상처가 보이지 않았다.
"아.. 상처가 다 나았구려. 왜 그런지 몰라도 난 이상하게 상처가 빨리 낫는다오. 앞
으로 일부러 자주 다칠테니 소저가 지금처럼 치료해주시구려. 부탁하리다."
"가가.. 그러지 않아도.. 소녀는.. "
"소녀는? 그 다음 말이 궁금하오. 어서 말해보시오."
"아이.. 그런게 있사옵니다."
유경의 두 손을 잡은 선우영은 고개를 숙이고 있는 유경을 지그시 바라보다 그녀를
살짝 끌어 안았다. 자신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파고드는 유경. 생전 처음으로 여인을
안은 느낌과 이제는 자신이 평생 책임을 저야 하는 부인이 생겼다는 묘한 두 감정 사
이를 느끼다가 그녀의 귀에 대고 말을 했다.
"이러다가 해가 떠도 우리 이러고 있을 것 같구려. 소저와 할 말이 많았는데.. 소저,
내가 아무리 좋아도 잠시 참아보시구려. 우리 할 얘기가 있지 않소?"
"어머.. 가가!"
"내가 원래 눈치가 좀 빠르다오. 허허. 나한테 푹 빠진 소저가 눈에 보이는구려"
농을 던지자 부끄러운 듯 하면서도 눈을 살짝 흘기는 그녀가 하염없이 예뻐보이는
선우영이었다. 탁자 옆에 놓인 작은 의자에 그녀를 앉혀주고 다기를 꺼내 차를 준비
했다. 따뜻한 차를 그녀의 찻잔에 부어주고 그녀의 옆에 의자를 바짝 당겨 앉았다. 그
리고 찻잔을 만지고 있는 그녀의 한쪽 손을 잡아 만지며 유경에게 부드럽게 말을 했다
"소저. 지금부터 내 하는 말 잘 들으시길 바라오. 난 홑어머니와 함께 살다가 기근으
로 여자 아이는 유곽에 팔려가고, 남자 아이는 군대에 팔려갈 때, 나도 은 5냥에 어머
니의 손에 팔려 그렇게 군에 끌려갔소. 고향 땅이 섬서의 어디라고 얼핏 기억이 나지
만 다시 찾아갈 정도로는 잘 모른다오. 사실 돌아가고 싶은 생각도 없소. 자신을 팔아
사지로 내몬 고향에 돌아가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겠소?"
그때부터 시작된 선우영의 어릴적 이야기. 배가 고파서 무슨 짓이던 해야 했던 마을
사람들과 애정이라고는 손톱의 떼 만큼이나 받지 못했던 어머니 밑에서 살았던 자신
의 기억. 그리고 입대하여 이국의 땅에서 겪어야 했던 일들을 설명해 주었다.
"우리 만큼 서로에 대해 모르고 살다가 갑작스레 혼약을 하는 경우도 없을 텐데 말이
오. 지금까지 말했던 지난 날이 내 모든 과거라고 생각하면 되오. 비록 말주변이 없어
모든 것을 다 설명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앞으로 내가 소저를 어떻게 생각할건지는
내 말속에 충분히 묻어났을 거라 감히 말할 수 있소."
선우영이 잡은 손위에 자신의 손을 겹쳐 그의 체온을 느끼고 있는 유경. 비록 대답은
없지만 그가 하는 말 하나 하나 놓치지 않으려는 그녀의 마음이 서로가 잡고 있는 손
을 통해 전해져 온다.
"소저도 알다시피 난 가진게 하나도 없소. 남도위라는 이 직책도 이제 며칠 후면 내
스스로 벗어 던지고 작은 산이나 얕으막한 강가에 자리를 잡고 농사나 지어볼까 생각
하고 있다오. 솔직히 말하건데, 소저는 내게 참으로 아깝소. 배운것 없고 가진 것 하
나 없는 내가 이렇게 곱게 자라고, 소중하게 보살펴 주시는 아버지까지 있는 여식을
단지 내 욕심 하나로 데리고 살기에는 소저 그대가 참으로 아깝소."
이야기를 듣는 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던 유경은 선우영의 마지막 말에 그의 가슴에
파고 들며 나지막히 말을 했다.
"소녀는.. 소녀는 그저.. 가가의 그 마음 하나 만으로 그저 고맙고 감사할 뿐입니다."
"많은 것을 함께 할 수는 없겠지만, 소저가 힘들어 할 때 내가 바로 옆에 있겠소. 그
리고 소저를 힘들게 하는 것이 있다면 내가 소저 앞에 항상 있을 것이오. 내 약속드릴
수 있는 것은 그것 하나 뿐이구려. 이런 내 마음을 받아줄 수 있겠소?"
"가가.. 소녀는.."
그의 말에 눈물을 흘리며 선우영을 바라보는 유경. 서로의 마음이 통했던지 잠시 서
로를 바라보던 그들의 얼굴이 조금씩 다가가서 하나로 합쳐지기 시작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해보는 여인과의 입맞춤. 따스하게 다가오는 그녀의 체온과 코를 스며드는
향긋한 내음이 지금 품에 안고 있는 여인이 이제 자신이 한 평생 책임져야 하는 정인
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일깨우는 순간이었다.
한동안의 입맞춤이 끝이 나고, 입맞춤의 긴 여운을 느끼는 순간이 다가왔다. 가슴에
안겨 고개를 숙이고 있는 유경을 안고 있는 선우영의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지어졌
다. 그에겐 그토록 저주스럽기만 했던 남로정벌군이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그
저 보고서 몇 장만 쓰고 군역을 면제 받기를 바랐을 뿐인데, 이런 소중한 여인과의 인
연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생각이라도 한 적이 있었던지. 중원 그 어떤 여염집의 딸들
도 자신의 품에 있는 여인보다 귀하고 예쁘지 않을거라 생각을 하는 선우영이었다.
"소저.. 날이 밝으면 나와 함께 심장군에게 가서 인사를 드립시다. 그리고 장군께 듣
기로 소저가 심장군의 성을 아직 받지 않았다고 하던데, 내가 있는 자리에서 정식으
로 그 분의 수양딸이 되도록 하시구려. 소저를 위해 목숨을 잃은 부모님을 생각하는
소저의 마음을 내 모르는 것은 아니나, 그래도 소저를 친 딸처럼 지금까지 키워주셨
던 그 분의 은혜도 부모님의 그것에 못지 않을거라 감히 난 생각하오. 소저가 나와 혼
례를 올리고 이 곳을 떠나더라도 그 분이 지금까지 주신 은혜를 소저도 나도 잊으면
안되지 않소?"
"가가..소녀는 가가를 만난 것을 삼생의 복으로 여기겠습니다. 가가.."
다시 그의 품을 끌어안고 눈물을 흘리는 유경. 그녀의 머리를 만져주며 복잡할 유경
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기로 마음먹는 선우영이었다.
"내가 원래 좀 멋있는 놈이오. 오죽하면 그대가 한 눈에 반했겠소."
"풋.. "
"허허.. 울다가 웃으면 어디에 털이 난다던데.. 혼례식때 꼭 확인해 보아야겠구려. "
"가가.. 나빠요."
"우리 이렇게 이야기만 합시다. 소저가 아무리 욕심이 나도 조금만 참으시오. 내 소
저의 마음을 내가 잘 아오. 허허허"
"어머!...."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유경에게 농담을 하는 선우영. 만난지 얼마 안된 사이지만 마
치 수십년을 함께 살아온 정인사이 처럼 다정해진 선우영과 유경이었다. 그 둘은 오
랫동안 대화를 하며 몰랐던 서로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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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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