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폭풍속으로...........(11)
[ 시작하기에 앞서서..........
야설은 야설일 뿐! 현실과 혼동하지 마십시오!!
만약, 야설이나 기타 등등을 접한 이후로 자신이 뭔가 달라졌다 싶으신 분은
잠시 야설이나 기타 등등을 멀리하시고, 운동으로 좀 더 마음과 정신을 가다듬으신 후에
다시 찾아 주십시오. ]
“ 자, 이제 어디로 갈까? ”
아침을 먹고, 하룻밤 신세를 진 공터를 정리한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진이 배낭을 메면서 입을 연 순간, 사마영령과 장백천의 입은 굳게 다물어지고 말았다.
“ 나는 그냥 무조건 북쪽으로만 향하면서 왔었거든. 너희들은...... ”
그제서야 둘의 표정이 잔뜩 굳어있는 것을 본 진은 이상한 생각이 들어 슬며시 물어보았다.
“ 어디... 여행 중 아니었니? ”
“ 아...하...맞아요, 맞아. 저도 똑같이 북쪽으로 여행중이었습니다, 형님! ”
“ 저, 저도........ ”
진이 이상하게 여길까봐, 장백천과 사마영령은 후다닥 거의 동시에 대답하고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 혹시, 누님도.....?! ’
‘ 응?! 너도...... ?! ’
그건, 같은 경험을 하고 있는 둘만이 알아볼 수 있는 눈빛의 대화였다.
“ 흐흠.......! ”
뭔가 굉장히 수상쩍긴 했지만, 진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그래도 설마.... ’ 하는 마음도 있었고, 둘 다 평범한 소년과 소녀가 아닌, 상당한 수준의 무공을 익힌 무림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건 확인해야만 한다.
“ 둘 다 어디로 여행 가는지 부모님께서 알고는 계시겠지? ”
“ 그거야 당연하죠, 형님! ”
장백천은 냉큼 대답했다.
[ 바람 좀 쐬고 오겠습니다, 할아버지!! ]
단 한줄기 문구만 적은 종이를, 들킬새라 서재에다 몰래 놓고 오기는 했지만, 어?든 자신은 분명히 편지를 남겨놓았다.
“ 물론이예요! ”
장백천의 뒤를 이어 사마영령도 뒤질세라 냉큼 대답했다.
[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가출한 오라버니를 찾아올께요! ]
더군다나, 자신은 분명한 목적까지 있었다.
“ 뭐, 좋아. 그렇담 가자! 북쪽으로!! ”
그리 크지 않은 방 한쪽 벽면에는 서책으로 가득한 책장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그 반대편 벽면에는 수목화로 그린 그림이 차지하고 있었다. 창가에 놓여 있는 탁자에는 문방사우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벼루에는 방금 갈은 듯한 먹이 가득 차 있어, 은은한 묵향을 풍기고 있었다.
하지만, 서재로 보이는 듯한 방의 주인이자, 탁자의 주인은 의자에 앉아서, 탁자위에 펼쳐진 종이를 보면서 근심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 바람 좀 쐬고 오겠습니다, 할아버지!! ]
종이에는 목적지도, 기한도 없이 딸랑 그 한줄기 문구만 적혀있었다.
“ 하아...이것 참......!! 내가 너무 닦달했었던 건가....!! ”
손자는 지 애비와는 달리, 무에 대한 자질이 너무나 뛰어나, 어릴 때부터 자신이 키우다시피 하면서 무공수련을 시켰었다. 뭐, 그 수련 정도가 조금 지나친 감이 없지 않아 있긴 하지만, 그래도 당금 무림의 최고후기지수이자 앞으로 천하제일인이라 불리게 될지도 모를 ‘창천룡’ 남궁천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라고 자신하고 있었다.
해서, 구월에 있을 무림영웅대회에 출전시켜 그 동안의 노고를 씻어줄 겸, 손주며느리도 물색해 보려 했건만, 손자녀석이 한 발 먼저 빨라버렸다.
‘ 불만이 많은 줄은 알았지만, 이런 식으로 나오게 될 줄이야..... ’
탁자의 주인은 의자에서 일어나 열린 창문을 통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 너에게 면목이 없구나, 애비야! ”
하늘을 보고 누군가를 향해 말하듯 입을 연 그의 얼굴은 너무나 슬프고 쓸쓸해 보였다.
“ 하아....!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꼭 죽은 사람처럼 보이잖아요, 아버지!! ”
그 순간, 문을 열고 들어와 그 모습을 본 중년인이 이마에 핏줄을 잔뜩 세우고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하지만, 서재의 주인은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아들을 째려보며 입을 열었다.
“ 에잉?! 어째 네녀석은 분위기 잡고 있을 때마다 판을 깨는 거냐?! ”
“ 지금 아들놈이 가출했는데, 분위기나 잡고 있을 때입니까!! ”
“ 잉? 내 아들놈은 지금 눈앞에 있는데....”
“ 아! 버! 지!! ”
중년인이 눈을 부릅뜨며 노려보자, 그제서야 서재의 주인은 헛기침을 하고는 슬그머니 의자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 흐흠! 뭐, 이것도 다 널 닮아서 그런 거 아니냐. 너두 천이만 했을 때, 무공수련이 지겹다며 가출했다가, 며늘아가와 함께 돌아오지 않았더냐?! ”
“ 하아.... ”
중년인은 나직히 한숨을 쉬었다.
“ 그렇게 따지자면, 아버지는 저보다도 더하셨잖아요! ”
“ 잉? 그게 무슨 소리냐?! ”
내심 뜨끔했지만, 서재의 주인은 모른 척 능청을 떨었다.
“ 호오.....! 그래도 저나, 천이는 약관이 되서야 그랬다지만, 겨우 열 다섯에, 그것도 사문의 보검과 비상금을 가지고 편지만 딸랑 남겨놓은 체.......... ”
중년인의 말은 체 이어지지 못했다. 서재의 주인이 냉큼 일어나 그의 입을 막아버렸기 때문이다.
“ 애비야~! ”
서재의 주인은 식은 땀을 줄줄 흘리며 부드럽게 아들을 불렀다.
“ 그건 말이지.... 그건........... ”
하지만, 마땅히 변명할 꺼리도 없었다.
“ 에효....... ”
서재의 주인은 나직히 한숨을 내쉬며 힘없이 의자에 앉았다. 그 모습이 왠지 더욱 나이들어 보여, 중년인은 조금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버지. 덜렁대고 엉뚱해 보여도 천이는 똘똘한 아이입니다. 무공도 아버지의 진전을 거의 모두 익힌 아이입니다. 아버지와 제가 그랬던 것처럼, 집에 돌아올 때쯤에는 지 색시감까지 데려 올테니, 너무 심려치 마세요. ”
“ 그게 아니라....... ”
“ 네? ”
“ 내가 사문의 보검과 비상금을 들고 가출한 것을 천이 녀석과 손주며느리까지 알게 될까봐 그것이 걱정이로구나. 특히, 천이 녀석이 알게 되면 이걸 가지고 두고두고 놀려먹을 텐데.. 하아....! 진짜 걱정이로구나. ”
“ ............!! 하아........! ”
순간, 중년인은 아버지를 위로한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하고 또 탓했다. 철들 무렵부터 이런 아버지인줄은 진즉에 알았지만, 그래도 혹시나 했었는데, 역시나였다. 이럴 때는 그냥 후다닥 자리를 떠나는 게 최고다.
“ 손! 님! 이 오셨습니다, 아버지. ”
중년인은 일부러 손님을 강조하면서 품에 넣어두었던 동그란 패를 꺼내 탁자에 올려놓았다. 금박을 입혔거나, 통째로 금으로 만든 듯한 둥근 패에는 수려한 산세가 음각으로 그려져 있었고, ‘산’ 이라는 커다란 글자 하나만이 새겨져 있었다.
‘ 올 사람이 없을 텐데...’ 하면서 의아한 표정을 짓던 서재의 주인은 패를 보자마자 후다닥 손자녀석이 쓴 편지를 서랍에 감추고는 이내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아들을 바라보았다.
“ 헛험! 그래, 손님은 지금 어디에 계시냐? ”
“ 대청에 모셨습니다. ”
서재의 주인은 그 말을 듣자마자, 경공을 써서 서재를 나가버렸다. 그 모습을 보며 중년인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 하아... 저런 분이 ‘무림맹’ 의 맹주라니.... 역시... 그때 장문인들이 드신 차가 잘못된 게 틀림없었던 거야. ”
아들이 욕을 하던 말던 대청앞에 다다른 서재의 주인 즉, 무림맹의 맹주는 옷차림을 단정히 하고, 표정도 근엄한 표정을 한 후에, 헛기침을 한번 하고는 안으로 들어섰다.
대청 안에는 한 사람이 탁자에 앉아서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고 있는 차를 조심스레 호오~! 불어가면서 마시고 있었다. 아니, 눈까지 감으면서 맛을 음미하고 있었다. 가슴까지 드리워진 백염에, 반백의 머리, 그리고 온화한 듯한 인상은 신선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문이 열리고 서재의 주인이자, 무림맹의 맹주가 들어섰지만, 그는 힐끗 한번 바라만 봤을 뿐 이내 다시 눈을 지그시 감으며 차를 음미했다.
‘ 맹주가 왔는데도 불구하고 힐끗 눈길 한번 주고 차나 마시고 있다니!! ‘
무림맹의 원로들이 보면 길길이 날뛸 일이었지만, 맹주는 당연하다는 듯 조심스레 맞은 편 의자에 앉아서 상대방이 눈을 뜰 때까지 기다렸다가 살며시 입을 열었다.
“ 오랜만입니다, 형님! 그 동안 별고 없으셨습니까?! ”
현 무림맹의 맹주는 당연 일황이다. 무림에서의 배분도 은거한 기인이사들을 제외하고는 몇몇 동배의 인물들만을 제외한다면 가장 높다 할 수 있다. 그런 그가 형님이라 칭했다. 어투도 공손하기 이를 데 없이 말이다.
맹주로부터 형님이라 불리며 정중한 예우를 받고 있는 그가 맹주를 잠시 바라보다 이내 입을 열었다.
“ 자네도 참 많이 늙었구만. ”
“ 세월은 그 누구도 빗겨갈 순 없으니까요. 하지만, 형님은 오히려 더 젊어지신 듯 합니다. ”
십 여년 전만 하더라도 백발이었었는데, 지금은 반백에 나머지 반은 윤기가 흐르는 검은 머리다.
“ 허허..! 그러는 자네야말로 10여년 전 봤을 때보다도 더 젊어진 듯 하구만, 뭘 그러시나. ”
“ 하! 보자마자 참 많이 늙었다고 하시더니, 이제는 젊어졌다고 욕하시는 겁니까?! ”
“ 응?! 그게 욕이 되다니?! 허어...! 오늘 자네 덕분에 하나 배웠구만. 허어... 그게 욕이었다니... ”
“ 원, 형님도! ”
맹주는 담소는 이쯤이면 됐다 싶어, 본론으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 그나저나 진짜로 어인일이십니까, 형님?! ”
“ 왜?! 내가 못올데라도 온 것인가?! ”
“ 그게 아니라, 오면 온다고 기별이라도 넣으시던 분이 갑자기 오셨으니깐 궁금해서 말입니다. ”
맹주는 말끝을 살짝 흐리면서 그를 바라봤고, 그는 헛기침을 하면서 슬며시 시선을 돌렸지만, 맹주는 그가 살짝 당황한 것을 놓치지 않았다.
“ 혹, ‘산’....에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
“ 일은 무슨 일...!! ”
그가 얼버무렸지만, 맹주는 그가 더욱더 당황해 하는 걸 놓치지 않았다.
‘ 설마, 진짜로 무슨 일이 있는 건가....?! ’
만약, 그렇다면 그건 진짜로 큰일이었다. 그에게 뿐만 아니라, 중원무림 전체에 말이다.
‘ 허어....! 이것 참...!! ’
하지만, 맹주의 걱정과는 달리 그가 진짜로 당황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아니, 당황했다기 보다는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부끄럽고 창피해서였다.
[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가출한 오라버니를 찾아올께요! ]
세상에?! 손자 녀석이 가출한 것도 모자라서 가출한 오라버니를 찾아온답시고 손녀까지 가출했다고 어떻게 말을 꺼낸단 말인가?!
자신의 신분을 떠나 ‘형님’ 된 입장으로써 동생한테 하기에는 너무나 부끄럽고 창피한 일이요, 자신의 신분까지 생각한다면 더더욱 그러한 일이다. 그렇다고 말을 안 할 수도 없는 것이, 이렇게 아무런 연락도 없이 급히 아우님을 찾아온 이유가 다름 아닌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 흠흠...! 그게 말일세. 그러니깐 말이지...... ”
“ 네. 말씀하십시오, 형님. ”
“ 그러니깐 말이지......... ”
“ 네......... ”
“ 그게...... 사람 좀 찾아주게나! ”
결국, 그는 눈 딱 감고 여기에 온 목적을 말했다. 말하고 나니, 한편으론 오히려 속이 시원하기까지 했다.
“ 네?! 사람....이라니요?! ”
맹주의 반문에 대답 대신 그는 품에서 두루마리를 꺼내 맹주에게 넘겨주었다. 맹주는 넘겨받은 두루마리를 조심스레 펼쳐보더니, 이내 감탄사를 터뜨렸다.
펼쳐진 두루마리에는 한 폭의 미인도가 그려져 있었다. 초승달 같은 아미에, 크고 맑은 눈동자, 그리고 요염한 미소를 짓고 있는 앵두빛 붉은 입술은 뭇 사내의 애간장을 녹이기에 충분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하지만, 맹주는 이내 측은한 표정으로 의형을 바라보았다.
“ 형님!! ”
“ 응?! ”
“ 언제 형수님이 가출하신 겁니까?! ”
“ 응?!?! ”
맹주의 말에 부끄럽고 창피해서 일부러 시선을 돌리고 있던 그는 맹주고 들고 있던 두루마리를 빼앗다시피해서 확인해 보더니, 접어서 슬그머니 품에 갈무리하고는 다른 두루마리를 꺼내어 다시 건네주었다. 그러면서 무안함을 감추기 위해 짐짓 화난 듯한 어투로 한마디 했다.
“ 헛험! 미안하이. 그림이 바뀌었네. 뭐, 그럴수도 있지, 그런 걸 가지고 참...! 험험! ”
“ 형님도 참! ”
맹주는 웃음을 참으며 짐짓 억울하다는 투로 말을 건네면서 받아든 두루마리를 펼쳤다. 역시나 두루마리안에는 한폭의 미인도가 펼쳐져 있었는데, 좀 전의 것이 성숙하고 농염한 여인인데 반해, 이번의 것은 이제 막 소녀티를 벗기 시작한 풋풋한 여인의 미인도였다.
“ 호오....! ”
하지만,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눈가가 살짝 젖은 모습이 요염해 보이는 것이 몇 년 후에는 뭇 사내들의 애간장을 녹이고도 남을 듯 했다.
“ 영령이가 벌써 이렇게 자랐군요, 형님. ”
맹주는 10여년이란 세월의 무게를 실감했다. 그러다, 이내 자신의 의형이 이 그림을 건네준 이유를 깨달았다.
“ 엇?! 설마, 영령이가....... ?! ”
이왕 이리된 거 더 이상 감추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 딸랑 이것만 남겨 놓고 가출했다네. ”
그러면서 그는 품에서 고이 접힌 편지를 꺼내 맹주에게 넘겨주고는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넘겨받은 편지를 조심스레 펼쳐 든 맹주는 이내 떨떠름한 표정으로 의형을 불렀다.
“ 형님! ”
“ 하아....! 나도 답답하다네. 오죽했으면 내가 자네를 찾아왔겠나?! ”
“ 그게 아니라, 형님! ”
“ 응?! ”
“ 이거 형님이 형수님께 보낸 연애편지........ ”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금나수를 펼쳐 편지를 회수해 품안에 구겨넣다시피 한 그는 고개를 숙여 품안을 확인해서 손녀가 남긴 편지를 꺼내 맹주에게 넘기고는 다시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 ......인데요. ”
이제야 말을 끝낸 맹주의 손에 새로운 편지가 놓여졌다.
“ 쩝.....!! ”
맹주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 동안 당한 복수를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었는데..... 아쉬워하면서 다시 펼쳐든 종이에는 딸랑 한 문장만이 적혀 있었다.
[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가출한 오라버니를 찾아올께요! ]
‘ 아아..........! ’
맹주는 눈물이 날것만 같았다. 혼자만 이런 힘든 일을 겪고 있는 줄 알았는데, 의형도 자신의 처지와 똑같다니.....!!
“......... 형님! ”
“ 응?! ”
맹주의 부름에 짐짓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맹주를 바라본 그는 깜짝 놀랐다. 당장이라도 눈물이 흘러내릴 것처럼 맹주의 두 눈동자에 눈물이 글썽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깜짝 놀라면서도 한편으론 맹주에게 감동했다.
‘ 아! 의동생이 날 이렇게 생각해 주다니........!! ’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맹주의 두 손을 잡으며 맹주를 달래려 했다.
“ 고맙네, 자네! 자네가 날 이렇게까지 생각해 주고 있었다니.... 하지만, 자네가 그렇게 마음 상해할 필요는 없다네. 영령이가 워낙 영악한 애라, 자네가 그리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네. ”
“ 사실은, 그게요, 형님.....! ”
“ 말해보게나. ”
“ 우리 천이도 가출했습니다, 형님! ”
“ .........아! 그런가?! 그래서 자네도.......?! ”
“ 네, 형님! ”
같은 아픔(?)을 공유한 두 노인네의 시선이 허공에서 잠시 마주쳤다.
“ 아우님! ”
“ 형님! ”
서로의 두 손을 굳게 잡으며 다정히 서로를 불렀다.
“ 으허허허헝~~~!! ”
그리고는 이내 눈물을 터트리며, 한편의 신파극을 연출하기 시작했다.
‘ 에효.....! 아버지나, 백부님이나.....! ’
십여년동안 담가둔 술을 들고 대청안으로 들어서려던 중년인은 안에서 펼쳐진 한편의 신파극에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어쩌랴! 두 분 다 손주에게는 한없이 약한 노인네들인 것을! 그래도............
“ 10년 동안 담궈 둔 소홍주를 가져왔는데, 생각들이 없으신가 봅니다. ”
이렇게 술 얘기만 나오면...
“ 커흠! 거 무슨 섭한 소리를!! 내 고넘을 얼마나 기다렸는데! 기다리다 못해 이렇게 눈물까지 훌렸을 지경이다. 커흠흠! ”
“ 그럼요, 그럼요! 제가 형님드릴려고 무려 십년동안이나 묵혀둔 겁니다. 아, 모해?! 어서 이리 가져오지 않고서!! ”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까지 싹 바꿔가며 닦달하기 시작한다.
“ 네, 네. 갑니다, 가요! ”
중년인은 좀 더 시간을 끌며 천천히 들어갈까 하다가 관두기로 했다. 중년을 바라보는 나이에, 야밤에 수련장에서 아버지에게 매를 맞는 게 무서워서 그러는 게 절대 아니다. 절대로!
술병과 안주가 놓인 쟁반이 탁자에 놓이기가 무섭게 맹주는 술병을 낚아채듯 집어들고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봉인해 놓은 마개를 열었다.
“ 으음....! ”
“ 아....! ”
“ 햐아....! ”
은은하고 향긋한 술내음이 두 노인과 중년인의 콧속으로 스며들어 절로 감탄사를 자아내게 만들었다.
수많은 술중에서 명주중의 하나요, 오래 묵을수록 그 가치가 높아지는 것이 바로 소홍주다.
“ 좋구나, 좋아! ”
한 두해도 아니고 무려 십년이나 담궈 놓은 소홍주다. 맹주는 연신 감탄을 터뜨리며, 의형에게 잔을 내밀고는 조심스레 술을 따랐다.
‘ 쪼르르르륵~~~~!! ’
술잔에 담기는 소리조차 청아하고, 주향은 더욱더 진하고 그윽하게 풍겨나왔다.
“ 자네도 한 잔 받게나. ”
“ 예, 형님! ”
“ 예, 백부님! ”
대답은 두 군데서 흘러나왔지만, 술잔은 맹주에게 건네졌다.
‘ 쩝.....! 이럴 줄 알았으면 내꺼도 가져오는 건데..... ’
중년인은 잔에 채워지고 있는 소홍주의 향기를 가득 들이마시며, 아쉬운 마음에 연신 입맛을 다셨다. 술을 좋아하긴 하지만, 낮에 마시는 것은 별로라 일부러 술잔을 가져오지 않은 것인데, 그게 이렇게 한이 될 줄이야..
“ 자, 그럼! ”
“ 예, 형님! ”
두 개의 잔이 허공에서 부딪치고, 이제 마시는 일만 남았는데, 두 노인네는 뭐가 아쉽고 아까운 지, 술잔을 바라보다 눈을 지그시 감고 향기만 들이키고 있었다.
‘ 아...! 나도 향기만이라도........!! ’
옆에서 입맛만 다시던 중년인은 향기라도 맡아보고 싶은 마음에, 술병으로 얼굴을 들이밀었지만, 어찌 알았는지 눈을 지그시 감은 체, 향기를 음미하고 있던 맹주가 살며시 내밀며 막는 손길에 포기해야만 했다.
“ 참, 치사하십니다, 아버지! ”
“ 허허! 그러게, 누가 잔을 가져오지 말랬더냐?! ”
치사한 마음에, 중년인은 한마디 불평을 했지만, 맹주는 여전히 눈을 감고 향기를 음미하면서 여유롭게 대꾸했다.
“ 백부님!! ”
혹시나 싶어 백부에게 응원을 청해보았지만, 눈을 지그시 감은 체 미동도 안하는 것이 못들은 체 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 네, 네! 갑니다, 가요! 두 분이서 실컷 자십시요! 아우~! 서러워라! ”
분명 두 분이서 자신이 낮술을 즐겨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놀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당하는 것은 자신이다. 혹시나 싶어 문앞에서 살짝 뒤를 돌아보았지만, 두 분은 여전히 그대로다.
“ 쳇! 다음엔 저도 기필코 낮에 술을 마시고 말겁니다. ”
결코 실현되지 못할 것이란 걸 알지만, 그래도 아쉬운 마음은 달래야 한다.
중년인이 나가고 문이 닫히자, 두 노인네는 눈을 뜨고 서로를 보며 빙그레 웃으며 잔을 들이켰다.
“ 역시... 저 녀석 놀리는 재미는 쏠쏠하단 말이야. ”
“ 허허...! 저도 그렇습니다, 형님! 천이 녀석은 너무 놀리는 맛이 없어서 말입니다. ”
“ 말도 말게. 우리 영령이 요녀석이 얼마나 영악한 지...! 내가 당하지나 않음 오히려 다행일세! ”
“ 허허..! 깜찍하고 귀엽잖습니까, 형님?! ”
“ 음...! 그건 그러이. ”
그렇게 몇 순배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술병을 거의 비워갈 때쯤, 그는 진지한 어투로 아우를 찾아온 또 다른 용건을 넌지시 꺼내기 시작했다.
“ 요즘, 중원은 어떠한가?! ”
의형의 진지한 어투에, 맹주도 진지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 조용~~ 합니다. 너무나 조용합니다, 형님. 마치......... ”
이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맹주는 조심스레 덧붙였다.
“ 폭풍전의 고요처럼 말입니다. ”
“ 역시나.....자네도 느끼고 있었군. ”
‘ 음?! ’
순간, 맹주는 의형이 갑작스레 자신을 찾아온 또 다른 목적이 여기에 있음을 깨달았지만, 아무 말 않고 의형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는 그런 아우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나직히 탄식하며 입을 열었다.
“ 아....! 솔직히 나는 지금도 자네에게 미안하다네. 나만 아니었다면, 불씨를 완전히 꺼버릴 수 있었을 텐데..... ”
“ 그런 말씀 마십시오, 형님. 강호는 어차피 피로 만들어진 대지입니다. 피를 적게 흘렸냐, 많이 흘렸냐 그 차이일 뿐! 그리고, 이십년입니다. 그 동안 고요했으니, 이제 한바탕 폭풍이 불 차례가 왔을 뿐입니다. ”
“ 하아! 아우님! 난 그게 불안하다네. 내가 살려둔 불씨가 어디 보통 불씨였던가?! ”
“ 지금의 무림도 20년 전하고는 다릅니다, 형님!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
지금의 무림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황금기라고 부를 정도로 고수들이 넘쳐났고, 구파일방과 팔대세가를 포함한 정도와 사파의 세 또한 20년 전하고는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강하기 그지없었다. 그도 그걸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너무나 불안했다.
“ 받게나. ”
그는 품에서 서찰을 꺼내어 맹주에게 건네주며 말을 이었다.
“ ‘산’ 에서조차 간신히 파악한 놈들의 거처일세. 하지만, 곁가지에 불과할 뿐이네. ”
“ 이 귀한 것을....! 감사합니다, 형님! ”
곁가지에 불과하다고는 하지만, 그것 하나만으로도 대단한 가치를 지닌 정보다.
“ 비이각주말로는 반년 후에는 놈들이 거동할 것으로 보고 있다네. 그러니, 그때를 대비해서 자네가 힘 좀 써주게나. ”
“ 물론입니다, 형님! ”
“ 그리고... 영령이도 부탁하네. 마음 같아선 실컷 강호를 구경하도록 놔두고 싶지만, 시기가 너무 안좋아. ”
“ 걱정마십시오, 형님. 십여 년 전에 봤을 때도 무척 똘똘했던 아이이니, 별 탈 없을 것입니다. ”
“ 그러면 다행이네만..... ”
“ 그렇게 걱정하지 마시고..... 소홍주가 아직 많이 남았는데.... 그거라도 드시면서 시름좀 달래십시오, 형님! ”
그러면서, 맹주는 탁자 옆 벽면에 달려있는 줄들 중에서 맨 왼쪽 것을 잡아당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중년인이 투덜거리면서 소홍주 두병을 들고 나타났다.
“ 이번에도 제 몫은 없는 거겠죠? ”
“ 잘 알면서 그걸 왜 묻느냐?! ”
“ 쳇! 적당히 자십시오. ”
중년인은 더 이상 암말 않고 물러났다. 중년인이 대청을 나가자, 두 노인네는 빙그레 웃고는 술잔이 아닌, 술병을 하나씩 들고는 마시기 시작했다.
“ 캬아! 역시나 좋구나. 그나저나, 우리 영령이 잘 좀 부탁하겠네. ”
“ 걱정마십시오, 형님. 혹, 압니까?! 우리 천이를 만나서 둘이 같이 있을지....... ”
“ 그렇다면, 나도 한시름 놓겠네만은..... ”
“ 자자, 너무 걱정마시고 어여 드십시오, 형님! ”
같은 시각!!
“ 푸엣취~! ”
난데없이 터져 나온 기침소리에 진은 장백천을 바라봤다.
“ 괜찮냐?! ”
“ 별 거 아닙니다, 형님. 그냥 이상하게 갑자기 기침이 나와서요. ”
그러더니, 장백천은 다시 한 번 기침을 했다. 진은 조금 걱정이 되었다.
‘ 설마, 감기는 아니겠지? ’
무림인이라고 해서 감기나 병에 안걸리는 것은 아니다. 혹시나 싶어, 사마영령을 바라보니, 그녀는 계속해서 귀를 매만지고 있었다.
“ 괜찮니? ”
진의 걱정스런 물음에, 사마영령은 후다닥 귀를 매만지던 손길을 거두고 입을 열었다.
“ 예에. 괜찮아요, 오라버니. ”
하지만, 사마영령은 이상하게도 계속 귀가 가려웠다.
‘ 귀가 간지러운 것은 누군가가 자기 욕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던데....음... 설마.. 할아버지가?! ’
[ 시작하기에 앞서서..........
야설은 야설일 뿐! 현실과 혼동하지 마십시오!!
만약, 야설이나 기타 등등을 접한 이후로 자신이 뭔가 달라졌다 싶으신 분은
잠시 야설이나 기타 등등을 멀리하시고, 운동으로 좀 더 마음과 정신을 가다듬으신 후에
다시 찾아 주십시오. ]
“ 자, 이제 어디로 갈까? ”
아침을 먹고, 하룻밤 신세를 진 공터를 정리한 것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진이 배낭을 메면서 입을 연 순간, 사마영령과 장백천의 입은 굳게 다물어지고 말았다.
“ 나는 그냥 무조건 북쪽으로만 향하면서 왔었거든. 너희들은...... ”
그제서야 둘의 표정이 잔뜩 굳어있는 것을 본 진은 이상한 생각이 들어 슬며시 물어보았다.
“ 어디... 여행 중 아니었니? ”
“ 아...하...맞아요, 맞아. 저도 똑같이 북쪽으로 여행중이었습니다, 형님! ”
“ 저, 저도........ ”
진이 이상하게 여길까봐, 장백천과 사마영령은 후다닥 거의 동시에 대답하고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 혹시, 누님도.....?! ’
‘ 응?! 너도...... ?! ’
그건, 같은 경험을 하고 있는 둘만이 알아볼 수 있는 눈빛의 대화였다.
“ 흐흠.......! ”
뭔가 굉장히 수상쩍긴 했지만, 진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그래도 설마.... ’ 하는 마음도 있었고, 둘 다 평범한 소년과 소녀가 아닌, 상당한 수준의 무공을 익힌 무림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건 확인해야만 한다.
“ 둘 다 어디로 여행 가는지 부모님께서 알고는 계시겠지? ”
“ 그거야 당연하죠, 형님! ”
장백천은 냉큼 대답했다.
[ 바람 좀 쐬고 오겠습니다, 할아버지!! ]
단 한줄기 문구만 적은 종이를, 들킬새라 서재에다 몰래 놓고 오기는 했지만, 어?든 자신은 분명히 편지를 남겨놓았다.
“ 물론이예요! ”
장백천의 뒤를 이어 사마영령도 뒤질세라 냉큼 대답했다.
[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가출한 오라버니를 찾아올께요! ]
더군다나, 자신은 분명한 목적까지 있었다.
“ 뭐, 좋아. 그렇담 가자! 북쪽으로!! ”
그리 크지 않은 방 한쪽 벽면에는 서책으로 가득한 책장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고, 그 반대편 벽면에는 수목화로 그린 그림이 차지하고 있었다. 창가에 놓여 있는 탁자에는 문방사우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벼루에는 방금 갈은 듯한 먹이 가득 차 있어, 은은한 묵향을 풍기고 있었다.
하지만, 서재로 보이는 듯한 방의 주인이자, 탁자의 주인은 의자에 앉아서, 탁자위에 펼쳐진 종이를 보면서 근심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 바람 좀 쐬고 오겠습니다, 할아버지!! ]
종이에는 목적지도, 기한도 없이 딸랑 그 한줄기 문구만 적혀있었다.
“ 하아...이것 참......!! 내가 너무 닦달했었던 건가....!! ”
손자는 지 애비와는 달리, 무에 대한 자질이 너무나 뛰어나, 어릴 때부터 자신이 키우다시피 하면서 무공수련을 시켰었다. 뭐, 그 수련 정도가 조금 지나친 감이 없지 않아 있긴 하지만, 그래도 당금 무림의 최고후기지수이자 앞으로 천하제일인이라 불리게 될지도 모를 ‘창천룡’ 남궁천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라고 자신하고 있었다.
해서, 구월에 있을 무림영웅대회에 출전시켜 그 동안의 노고를 씻어줄 겸, 손주며느리도 물색해 보려 했건만, 손자녀석이 한 발 먼저 빨라버렸다.
‘ 불만이 많은 줄은 알았지만, 이런 식으로 나오게 될 줄이야..... ’
탁자의 주인은 의자에서 일어나 열린 창문을 통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 너에게 면목이 없구나, 애비야! ”
하늘을 보고 누군가를 향해 말하듯 입을 연 그의 얼굴은 너무나 슬프고 쓸쓸해 보였다.
“ 하아....!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꼭 죽은 사람처럼 보이잖아요, 아버지!! ”
그 순간, 문을 열고 들어와 그 모습을 본 중년인이 이마에 핏줄을 잔뜩 세우고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하지만, 서재의 주인은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아들을 째려보며 입을 열었다.
“ 에잉?! 어째 네녀석은 분위기 잡고 있을 때마다 판을 깨는 거냐?! ”
“ 지금 아들놈이 가출했는데, 분위기나 잡고 있을 때입니까!! ”
“ 잉? 내 아들놈은 지금 눈앞에 있는데....”
“ 아! 버! 지!! ”
중년인이 눈을 부릅뜨며 노려보자, 그제서야 서재의 주인은 헛기침을 하고는 슬그머니 의자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 흐흠! 뭐, 이것도 다 널 닮아서 그런 거 아니냐. 너두 천이만 했을 때, 무공수련이 지겹다며 가출했다가, 며늘아가와 함께 돌아오지 않았더냐?! ”
“ 하아.... ”
중년인은 나직히 한숨을 쉬었다.
“ 그렇게 따지자면, 아버지는 저보다도 더하셨잖아요! ”
“ 잉? 그게 무슨 소리냐?! ”
내심 뜨끔했지만, 서재의 주인은 모른 척 능청을 떨었다.
“ 호오.....! 그래도 저나, 천이는 약관이 되서야 그랬다지만, 겨우 열 다섯에, 그것도 사문의 보검과 비상금을 가지고 편지만 딸랑 남겨놓은 체.......... ”
중년인의 말은 체 이어지지 못했다. 서재의 주인이 냉큼 일어나 그의 입을 막아버렸기 때문이다.
“ 애비야~! ”
서재의 주인은 식은 땀을 줄줄 흘리며 부드럽게 아들을 불렀다.
“ 그건 말이지.... 그건........... ”
하지만, 마땅히 변명할 꺼리도 없었다.
“ 에효....... ”
서재의 주인은 나직히 한숨을 내쉬며 힘없이 의자에 앉았다. 그 모습이 왠지 더욱 나이들어 보여, 중년인은 조금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버지. 덜렁대고 엉뚱해 보여도 천이는 똘똘한 아이입니다. 무공도 아버지의 진전을 거의 모두 익힌 아이입니다. 아버지와 제가 그랬던 것처럼, 집에 돌아올 때쯤에는 지 색시감까지 데려 올테니, 너무 심려치 마세요. ”
“ 그게 아니라....... ”
“ 네? ”
“ 내가 사문의 보검과 비상금을 들고 가출한 것을 천이 녀석과 손주며느리까지 알게 될까봐 그것이 걱정이로구나. 특히, 천이 녀석이 알게 되면 이걸 가지고 두고두고 놀려먹을 텐데.. 하아....! 진짜 걱정이로구나. ”
“ ............!! 하아........! ”
순간, 중년인은 아버지를 위로한 자신의 어리석음을 탓하고 또 탓했다. 철들 무렵부터 이런 아버지인줄은 진즉에 알았지만, 그래도 혹시나 했었는데, 역시나였다. 이럴 때는 그냥 후다닥 자리를 떠나는 게 최고다.
“ 손! 님! 이 오셨습니다, 아버지. ”
중년인은 일부러 손님을 강조하면서 품에 넣어두었던 동그란 패를 꺼내 탁자에 올려놓았다. 금박을 입혔거나, 통째로 금으로 만든 듯한 둥근 패에는 수려한 산세가 음각으로 그려져 있었고, ‘산’ 이라는 커다란 글자 하나만이 새겨져 있었다.
‘ 올 사람이 없을 텐데...’ 하면서 의아한 표정을 짓던 서재의 주인은 패를 보자마자 후다닥 손자녀석이 쓴 편지를 서랍에 감추고는 이내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아들을 바라보았다.
“ 헛험! 그래, 손님은 지금 어디에 계시냐? ”
“ 대청에 모셨습니다. ”
서재의 주인은 그 말을 듣자마자, 경공을 써서 서재를 나가버렸다. 그 모습을 보며 중년인은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 하아... 저런 분이 ‘무림맹’ 의 맹주라니.... 역시... 그때 장문인들이 드신 차가 잘못된 게 틀림없었던 거야. ”
아들이 욕을 하던 말던 대청앞에 다다른 서재의 주인 즉, 무림맹의 맹주는 옷차림을 단정히 하고, 표정도 근엄한 표정을 한 후에, 헛기침을 한번 하고는 안으로 들어섰다.
대청 안에는 한 사람이 탁자에 앉아서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고 있는 차를 조심스레 호오~! 불어가면서 마시고 있었다. 아니, 눈까지 감으면서 맛을 음미하고 있었다. 가슴까지 드리워진 백염에, 반백의 머리, 그리고 온화한 듯한 인상은 신선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문이 열리고 서재의 주인이자, 무림맹의 맹주가 들어섰지만, 그는 힐끗 한번 바라만 봤을 뿐 이내 다시 눈을 지그시 감으며 차를 음미했다.
‘ 맹주가 왔는데도 불구하고 힐끗 눈길 한번 주고 차나 마시고 있다니!! ‘
무림맹의 원로들이 보면 길길이 날뛸 일이었지만, 맹주는 당연하다는 듯 조심스레 맞은 편 의자에 앉아서 상대방이 눈을 뜰 때까지 기다렸다가 살며시 입을 열었다.
“ 오랜만입니다, 형님! 그 동안 별고 없으셨습니까?! ”
현 무림맹의 맹주는 당연 일황이다. 무림에서의 배분도 은거한 기인이사들을 제외하고는 몇몇 동배의 인물들만을 제외한다면 가장 높다 할 수 있다. 그런 그가 형님이라 칭했다. 어투도 공손하기 이를 데 없이 말이다.
맹주로부터 형님이라 불리며 정중한 예우를 받고 있는 그가 맹주를 잠시 바라보다 이내 입을 열었다.
“ 자네도 참 많이 늙었구만. ”
“ 세월은 그 누구도 빗겨갈 순 없으니까요. 하지만, 형님은 오히려 더 젊어지신 듯 합니다. ”
십 여년 전만 하더라도 백발이었었는데, 지금은 반백에 나머지 반은 윤기가 흐르는 검은 머리다.
“ 허허..! 그러는 자네야말로 10여년 전 봤을 때보다도 더 젊어진 듯 하구만, 뭘 그러시나. ”
“ 하! 보자마자 참 많이 늙었다고 하시더니, 이제는 젊어졌다고 욕하시는 겁니까?! ”
“ 응?! 그게 욕이 되다니?! 허어...! 오늘 자네 덕분에 하나 배웠구만. 허어... 그게 욕이었다니... ”
“ 원, 형님도! ”
맹주는 담소는 이쯤이면 됐다 싶어, 본론으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 그나저나 진짜로 어인일이십니까, 형님?! ”
“ 왜?! 내가 못올데라도 온 것인가?! ”
“ 그게 아니라, 오면 온다고 기별이라도 넣으시던 분이 갑자기 오셨으니깐 궁금해서 말입니다. ”
맹주는 말끝을 살짝 흐리면서 그를 바라봤고, 그는 헛기침을 하면서 슬며시 시선을 돌렸지만, 맹주는 그가 살짝 당황한 것을 놓치지 않았다.
“ 혹, ‘산’....에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
“ 일은 무슨 일...!! ”
그가 얼버무렸지만, 맹주는 그가 더욱더 당황해 하는 걸 놓치지 않았다.
‘ 설마, 진짜로 무슨 일이 있는 건가....?! ’
만약, 그렇다면 그건 진짜로 큰일이었다. 그에게 뿐만 아니라, 중원무림 전체에 말이다.
‘ 허어....! 이것 참...!! ’
하지만, 맹주의 걱정과는 달리 그가 진짜로 당황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아니, 당황했다기 보다는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부끄럽고 창피해서였다.
[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가출한 오라버니를 찾아올께요! ]
세상에?! 손자 녀석이 가출한 것도 모자라서 가출한 오라버니를 찾아온답시고 손녀까지 가출했다고 어떻게 말을 꺼낸단 말인가?!
자신의 신분을 떠나 ‘형님’ 된 입장으로써 동생한테 하기에는 너무나 부끄럽고 창피한 일이요, 자신의 신분까지 생각한다면 더더욱 그러한 일이다. 그렇다고 말을 안 할 수도 없는 것이, 이렇게 아무런 연락도 없이 급히 아우님을 찾아온 이유가 다름 아닌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 흠흠...! 그게 말일세. 그러니깐 말이지...... ”
“ 네. 말씀하십시오, 형님. ”
“ 그러니깐 말이지......... ”
“ 네......... ”
“ 그게...... 사람 좀 찾아주게나! ”
결국, 그는 눈 딱 감고 여기에 온 목적을 말했다. 말하고 나니, 한편으론 오히려 속이 시원하기까지 했다.
“ 네?! 사람....이라니요?! ”
맹주의 반문에 대답 대신 그는 품에서 두루마리를 꺼내 맹주에게 넘겨주었다. 맹주는 넘겨받은 두루마리를 조심스레 펼쳐보더니, 이내 감탄사를 터뜨렸다.
펼쳐진 두루마리에는 한 폭의 미인도가 그려져 있었다. 초승달 같은 아미에, 크고 맑은 눈동자, 그리고 요염한 미소를 짓고 있는 앵두빛 붉은 입술은 뭇 사내의 애간장을 녹이기에 충분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하지만, 맹주는 이내 측은한 표정으로 의형을 바라보았다.
“ 형님!! ”
“ 응?! ”
“ 언제 형수님이 가출하신 겁니까?! ”
“ 응?!?! ”
맹주의 말에 부끄럽고 창피해서 일부러 시선을 돌리고 있던 그는 맹주고 들고 있던 두루마리를 빼앗다시피해서 확인해 보더니, 접어서 슬그머니 품에 갈무리하고는 다른 두루마리를 꺼내어 다시 건네주었다. 그러면서 무안함을 감추기 위해 짐짓 화난 듯한 어투로 한마디 했다.
“ 헛험! 미안하이. 그림이 바뀌었네. 뭐, 그럴수도 있지, 그런 걸 가지고 참...! 험험! ”
“ 형님도 참! ”
맹주는 웃음을 참으며 짐짓 억울하다는 투로 말을 건네면서 받아든 두루마리를 펼쳤다. 역시나 두루마리안에는 한폭의 미인도가 펼쳐져 있었는데, 좀 전의 것이 성숙하고 농염한 여인인데 반해, 이번의 것은 이제 막 소녀티를 벗기 시작한 풋풋한 여인의 미인도였다.
“ 호오....! ”
하지만,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눈가가 살짝 젖은 모습이 요염해 보이는 것이 몇 년 후에는 뭇 사내들의 애간장을 녹이고도 남을 듯 했다.
“ 영령이가 벌써 이렇게 자랐군요, 형님. ”
맹주는 10여년이란 세월의 무게를 실감했다. 그러다, 이내 자신의 의형이 이 그림을 건네준 이유를 깨달았다.
“ 엇?! 설마, 영령이가....... ?! ”
이왕 이리된 거 더 이상 감추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 딸랑 이것만 남겨 놓고 가출했다네. ”
그러면서 그는 품에서 고이 접힌 편지를 꺼내 맹주에게 넘겨주고는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넘겨받은 편지를 조심스레 펼쳐 든 맹주는 이내 떨떠름한 표정으로 의형을 불렀다.
“ 형님! ”
“ 하아....! 나도 답답하다네. 오죽했으면 내가 자네를 찾아왔겠나?! ”
“ 그게 아니라, 형님! ”
“ 응?! ”
“ 이거 형님이 형수님께 보낸 연애편지........ ”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금나수를 펼쳐 편지를 회수해 품안에 구겨넣다시피 한 그는 고개를 숙여 품안을 확인해서 손녀가 남긴 편지를 꺼내 맹주에게 넘기고는 다시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 ......인데요. ”
이제야 말을 끝낸 맹주의 손에 새로운 편지가 놓여졌다.
“ 쩝.....!! ”
맹주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 동안 당한 복수를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었는데..... 아쉬워하면서 다시 펼쳐든 종이에는 딸랑 한 문장만이 적혀 있었다.
[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가출한 오라버니를 찾아올께요! ]
‘ 아아..........! ’
맹주는 눈물이 날것만 같았다. 혼자만 이런 힘든 일을 겪고 있는 줄 알았는데, 의형도 자신의 처지와 똑같다니.....!!
“......... 형님! ”
“ 응?! ”
맹주의 부름에 짐짓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맹주를 바라본 그는 깜짝 놀랐다. 당장이라도 눈물이 흘러내릴 것처럼 맹주의 두 눈동자에 눈물이 글썽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깜짝 놀라면서도 한편으론 맹주에게 감동했다.
‘ 아! 의동생이 날 이렇게 생각해 주다니........!! ’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맹주의 두 손을 잡으며 맹주를 달래려 했다.
“ 고맙네, 자네! 자네가 날 이렇게까지 생각해 주고 있었다니.... 하지만, 자네가 그렇게 마음 상해할 필요는 없다네. 영령이가 워낙 영악한 애라, 자네가 그리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네. ”
“ 사실은, 그게요, 형님.....! ”
“ 말해보게나. ”
“ 우리 천이도 가출했습니다, 형님! ”
“ .........아! 그런가?! 그래서 자네도.......?! ”
“ 네, 형님! ”
같은 아픔(?)을 공유한 두 노인네의 시선이 허공에서 잠시 마주쳤다.
“ 아우님! ”
“ 형님! ”
서로의 두 손을 굳게 잡으며 다정히 서로를 불렀다.
“ 으허허허헝~~~!! ”
그리고는 이내 눈물을 터트리며, 한편의 신파극을 연출하기 시작했다.
‘ 에효.....! 아버지나, 백부님이나.....! ’
십여년동안 담가둔 술을 들고 대청안으로 들어서려던 중년인은 안에서 펼쳐진 한편의 신파극에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어쩌랴! 두 분 다 손주에게는 한없이 약한 노인네들인 것을! 그래도............
“ 10년 동안 담궈 둔 소홍주를 가져왔는데, 생각들이 없으신가 봅니다. ”
이렇게 술 얘기만 나오면...
“ 커흠! 거 무슨 섭한 소리를!! 내 고넘을 얼마나 기다렸는데! 기다리다 못해 이렇게 눈물까지 훌렸을 지경이다. 커흠흠! ”
“ 그럼요, 그럼요! 제가 형님드릴려고 무려 십년동안이나 묵혀둔 겁니다. 아, 모해?! 어서 이리 가져오지 않고서!! ”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까지 싹 바꿔가며 닦달하기 시작한다.
“ 네, 네. 갑니다, 가요! ”
중년인은 좀 더 시간을 끌며 천천히 들어갈까 하다가 관두기로 했다. 중년을 바라보는 나이에, 야밤에 수련장에서 아버지에게 매를 맞는 게 무서워서 그러는 게 절대 아니다. 절대로!
술병과 안주가 놓인 쟁반이 탁자에 놓이기가 무섭게 맹주는 술병을 낚아채듯 집어들고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봉인해 놓은 마개를 열었다.
“ 으음....! ”
“ 아....! ”
“ 햐아....! ”
은은하고 향긋한 술내음이 두 노인과 중년인의 콧속으로 스며들어 절로 감탄사를 자아내게 만들었다.
수많은 술중에서 명주중의 하나요, 오래 묵을수록 그 가치가 높아지는 것이 바로 소홍주다.
“ 좋구나, 좋아! ”
한 두해도 아니고 무려 십년이나 담궈 놓은 소홍주다. 맹주는 연신 감탄을 터뜨리며, 의형에게 잔을 내밀고는 조심스레 술을 따랐다.
‘ 쪼르르르륵~~~~!! ’
술잔에 담기는 소리조차 청아하고, 주향은 더욱더 진하고 그윽하게 풍겨나왔다.
“ 자네도 한 잔 받게나. ”
“ 예, 형님! ”
“ 예, 백부님! ”
대답은 두 군데서 흘러나왔지만, 술잔은 맹주에게 건네졌다.
‘ 쩝.....! 이럴 줄 알았으면 내꺼도 가져오는 건데..... ’
중년인은 잔에 채워지고 있는 소홍주의 향기를 가득 들이마시며, 아쉬운 마음에 연신 입맛을 다셨다. 술을 좋아하긴 하지만, 낮에 마시는 것은 별로라 일부러 술잔을 가져오지 않은 것인데, 그게 이렇게 한이 될 줄이야..
“ 자, 그럼! ”
“ 예, 형님! ”
두 개의 잔이 허공에서 부딪치고, 이제 마시는 일만 남았는데, 두 노인네는 뭐가 아쉽고 아까운 지, 술잔을 바라보다 눈을 지그시 감고 향기만 들이키고 있었다.
‘ 아...! 나도 향기만이라도........!! ’
옆에서 입맛만 다시던 중년인은 향기라도 맡아보고 싶은 마음에, 술병으로 얼굴을 들이밀었지만, 어찌 알았는지 눈을 지그시 감은 체, 향기를 음미하고 있던 맹주가 살며시 내밀며 막는 손길에 포기해야만 했다.
“ 참, 치사하십니다, 아버지! ”
“ 허허! 그러게, 누가 잔을 가져오지 말랬더냐?! ”
치사한 마음에, 중년인은 한마디 불평을 했지만, 맹주는 여전히 눈을 감고 향기를 음미하면서 여유롭게 대꾸했다.
“ 백부님!! ”
혹시나 싶어 백부에게 응원을 청해보았지만, 눈을 지그시 감은 체 미동도 안하는 것이 못들은 체 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 네, 네! 갑니다, 가요! 두 분이서 실컷 자십시요! 아우~! 서러워라! ”
분명 두 분이서 자신이 낮술을 즐겨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놀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적이 한 두 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당하는 것은 자신이다. 혹시나 싶어 문앞에서 살짝 뒤를 돌아보았지만, 두 분은 여전히 그대로다.
“ 쳇! 다음엔 저도 기필코 낮에 술을 마시고 말겁니다. ”
결코 실현되지 못할 것이란 걸 알지만, 그래도 아쉬운 마음은 달래야 한다.
중년인이 나가고 문이 닫히자, 두 노인네는 눈을 뜨고 서로를 보며 빙그레 웃으며 잔을 들이켰다.
“ 역시... 저 녀석 놀리는 재미는 쏠쏠하단 말이야. ”
“ 허허...! 저도 그렇습니다, 형님! 천이 녀석은 너무 놀리는 맛이 없어서 말입니다. ”
“ 말도 말게. 우리 영령이 요녀석이 얼마나 영악한 지...! 내가 당하지나 않음 오히려 다행일세! ”
“ 허허..! 깜찍하고 귀엽잖습니까, 형님?! ”
“ 음...! 그건 그러이. ”
그렇게 몇 순배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술병을 거의 비워갈 때쯤, 그는 진지한 어투로 아우를 찾아온 또 다른 용건을 넌지시 꺼내기 시작했다.
“ 요즘, 중원은 어떠한가?! ”
의형의 진지한 어투에, 맹주도 진지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 조용~~ 합니다. 너무나 조용합니다, 형님. 마치......... ”
이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맹주는 조심스레 덧붙였다.
“ 폭풍전의 고요처럼 말입니다. ”
“ 역시나.....자네도 느끼고 있었군. ”
‘ 음?! ’
순간, 맹주는 의형이 갑작스레 자신을 찾아온 또 다른 목적이 여기에 있음을 깨달았지만, 아무 말 않고 의형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는 그런 아우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나직히 탄식하며 입을 열었다.
“ 아....! 솔직히 나는 지금도 자네에게 미안하다네. 나만 아니었다면, 불씨를 완전히 꺼버릴 수 있었을 텐데..... ”
“ 그런 말씀 마십시오, 형님. 강호는 어차피 피로 만들어진 대지입니다. 피를 적게 흘렸냐, 많이 흘렸냐 그 차이일 뿐! 그리고, 이십년입니다. 그 동안 고요했으니, 이제 한바탕 폭풍이 불 차례가 왔을 뿐입니다. ”
“ 하아! 아우님! 난 그게 불안하다네. 내가 살려둔 불씨가 어디 보통 불씨였던가?! ”
“ 지금의 무림도 20년 전하고는 다릅니다, 형님!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
지금의 무림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황금기라고 부를 정도로 고수들이 넘쳐났고, 구파일방과 팔대세가를 포함한 정도와 사파의 세 또한 20년 전하고는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강하기 그지없었다. 그도 그걸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너무나 불안했다.
“ 받게나. ”
그는 품에서 서찰을 꺼내어 맹주에게 건네주며 말을 이었다.
“ ‘산’ 에서조차 간신히 파악한 놈들의 거처일세. 하지만, 곁가지에 불과할 뿐이네. ”
“ 이 귀한 것을....! 감사합니다, 형님! ”
곁가지에 불과하다고는 하지만, 그것 하나만으로도 대단한 가치를 지닌 정보다.
“ 비이각주말로는 반년 후에는 놈들이 거동할 것으로 보고 있다네. 그러니, 그때를 대비해서 자네가 힘 좀 써주게나. ”
“ 물론입니다, 형님! ”
“ 그리고... 영령이도 부탁하네. 마음 같아선 실컷 강호를 구경하도록 놔두고 싶지만, 시기가 너무 안좋아. ”
“ 걱정마십시오, 형님. 십여 년 전에 봤을 때도 무척 똘똘했던 아이이니, 별 탈 없을 것입니다. ”
“ 그러면 다행이네만..... ”
“ 그렇게 걱정하지 마시고..... 소홍주가 아직 많이 남았는데.... 그거라도 드시면서 시름좀 달래십시오, 형님! ”
그러면서, 맹주는 탁자 옆 벽면에 달려있는 줄들 중에서 맨 왼쪽 것을 잡아당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중년인이 투덜거리면서 소홍주 두병을 들고 나타났다.
“ 이번에도 제 몫은 없는 거겠죠? ”
“ 잘 알면서 그걸 왜 묻느냐?! ”
“ 쳇! 적당히 자십시오. ”
중년인은 더 이상 암말 않고 물러났다. 중년인이 대청을 나가자, 두 노인네는 빙그레 웃고는 술잔이 아닌, 술병을 하나씩 들고는 마시기 시작했다.
“ 캬아! 역시나 좋구나. 그나저나, 우리 영령이 잘 좀 부탁하겠네. ”
“ 걱정마십시오, 형님. 혹, 압니까?! 우리 천이를 만나서 둘이 같이 있을지....... ”
“ 그렇다면, 나도 한시름 놓겠네만은..... ”
“ 자자, 너무 걱정마시고 어여 드십시오, 형님! ”
같은 시각!!
“ 푸엣취~! ”
난데없이 터져 나온 기침소리에 진은 장백천을 바라봤다.
“ 괜찮냐?! ”
“ 별 거 아닙니다, 형님. 그냥 이상하게 갑자기 기침이 나와서요. ”
그러더니, 장백천은 다시 한 번 기침을 했다. 진은 조금 걱정이 되었다.
‘ 설마, 감기는 아니겠지? ’
무림인이라고 해서 감기나 병에 안걸리는 것은 아니다. 혹시나 싶어, 사마영령을 바라보니, 그녀는 계속해서 귀를 매만지고 있었다.
“ 괜찮니? ”
진의 걱정스런 물음에, 사마영령은 후다닥 귀를 매만지던 손길을 거두고 입을 열었다.
“ 예에. 괜찮아요, 오라버니. ”
하지만, 사마영령은 이상하게도 계속 귀가 가려웠다.
‘ 귀가 간지러운 것은 누군가가 자기 욕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던데....음... 설마.. 할아버지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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