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타로짱♡>
<はい?>
운동장의 한켠의 벤취에서 남학생들의 축구운동을 건성으로 관람하며 생각에 잠겨있던
우쿄는 갑작스럽게 눈앞에 발랄한 웃음을 한 가득 머금은 채로 예쁜 얼굴을 들이미는
누나의 모습에 화들짝 놀랐다.
우쿄는 미나때문에 놀라서 벤치 뒤로 넘어갈 뻔 했다가 그녀들 중에 한명 덕분에
꼴사납게 뒤로 넘어지는 걸 모면謀免했다.
소현의 친구인 미나와 그외 3명 정도의 어여쁜 아가씨들이 소년을 마치 조그마한 강아지를 보는 것
같은 눈길로 바라보면서 곁에 앉았다.
근처에서 자기 팀을 열심히 응원하고 있던 남학생들은 소년을 주위로 꽃밭이 펼쳐지자
내심 질투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케타로짱, 우리 소현이를 악당의 마수에서 구해줬다며? >
그저께 저녁의 일이 미나에게서 나오자 우쿄는 얼굴이 확 달아오름을 느꼈다.
마침 소현도 같이 귀가하기 위해 미나들과 약속대로 벤치근처로 다가오고 있었다.
<お姉ちゃん!! 창피하게 一昨日仕事(그저께 일)을 얘기 하면 어떡해요? >
우쿄는 소현을 보자 얼굴이 빨개진 채로 불평했다.
<미안~~~~♡>
<근데 케타로짱은 정말 용감하구나? >
<저도 실은 あの時 すごく(그 때 엄청) 무서웠어요. >
우쿄는 약간 투정을 부리듯 했다.
<어머!! 정말? 그랬구나?>
<다른 애들 같으면 막 자랑하고 다닐 텐데 케타로짱은 겸손하네? >
<그렇게 부끄러워 할 일이 아니잖아? 오히려 자랑스러운 일일 텐데...... >
<でもただ阻んでばかりしたんで, それで通り魔と取り組んで争ったのでもなく.....
(하지만 그저 막기만 했던 거고, 그렇다고 토오리마하고 맞붙어 싸운 것도 아니고.....)>
우쿄는 고개를 약간 숙이고 말꼬리가 흐려졌다.
아가씨들은 소년이 부끄러워 하는 게 보이자 꺄르르하고 웃었다.
우쿄의 이럴 경우 웬만한 남자라면 여자들에게 강하게 어필하기 위해 떨 것 같은 허풍이나
허세虛勢라고는 0.00001%도 들어가지 않은 솔직한 말에 여학생들은 오히려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아참, 케타로짱은 혹시 음악 좋아하니? >
<音? 좋아는 해요. 피아노나 기타도 조금은 할 줄 알고...... >
<장르는 어떤 걸 좋아해? . 힙합? 댄스? 요즘 애들 그런 거 좋아하던데......>
<....... 뉴 에이지.....야니라든가..아. 클래식이나 우리나라-일본- 전통 음악도.... >
그 말에 미나들은 반가워하는 표정을 보였다.
<어머~~~ 잘됐다!! 그럼 우리 음악 동아리에 안 들어올래? >
그 말에 우쿄는 약간 멍한 표정이 되었다.
<...... 저 같은 외국인도 받아주나요? >
<어머머? 음악을 좋아하는 데 한국인이면 어떻고 외국인이면 어떻니? >
<それじゃ..... 良いですよ。(그러면..... 좋아요.) >
승락을 하는 우쿄의 말에 다들 은근히 좋아하는 표정을 보였다. 그러다 미나와 소현은 생각난 듯 물었다.
<근데 너랑 같이 다니는 한국인 학생 있잖아. 남궁.... >
<아. 석진형요 ? >
<응 맞아. 석진군은 어디 동아리 들은 데 있니? >
<그 형은 축구 동아리에 들었어요. 저기서 뛰고 있네요. >
마침 석진이 상대편 선수의 골을 뺏어서 골문으로 질주했다.
실제로 석진은 입학하기 무섭게 학교의 축구 동아리로 들어가 곧바로 에이스가 되었다.
작년의 한일 월드컵의 여파 때문인지 축구가 인기라는 것이다.
우쿄는 애초에 스포츠에 전연 관심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신경 쓸 여력도 없었고 반한反韓감정의
정도가 여전히 극에 달했던 때여서 나중에 일본이 8강에서 떨어진 것과는 대조적으로
한국이 8강에 진출했다는 얘기만 듣고 심술이 나서 속으로 왕창 져버려서 망신이나 실컷 당하라며
저주를 퍼붓고 아예 신경을 껐었는데 나중에 들으니 결국 4강에 진출했다 길래 잔뜩 약이 올랐었다.
그러다 막상 4위에서 그쳤을 때는 겉으로는 노골적으로 고소해 하면서도 내심 섭섭했지만……
<그럼 오늘은 우리 동아리 활동이 없으니까 내일 강의 스케줄이 끝나면 동아리 방으로 와. 음악과
교실이 그대로 동아리 방으로 쓰이니까 그리로 오면 돼. >
<네, 그럴게요. >
그렇게 약속을 하고 같이 가자는 누나들의 제안을 사양하고 먼저 보낸 우쿄는 석진이 쐐기골을
상대편의 골문에 힘차게 차 넣는 것을 끝으로 경기가 끝나는 것을 보고 벤치에서 일어섰다.
혁은 요즘 다른 일 때문에 바쁜 듯 했다. 좀 아쉽다 싶으면서도 오히려 다행이지 싶다.
토요일 밤에 혁을 오나펫으로 삼은 것을 생각하면 혁에게 도저히 얼굴을 들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게 너는 그 때 뭣하면 이 형님을 부르던가 하지. 괜히 나서서 사서 고생이니? >
<그럴 시간적 여유도 없었고...... 分かる人人だから(아는 사람들이니까......) >
토요일 밤의 일을 나중에 수진에게 들은 석진은 기꺼이 우쿄의 백기사白騎士역할을 자청하면서 약간의
잔소리를 했다. 한동안 우쿄는 특히 하교下校시간을 조심하기로 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악한에게
협박까지 받았으니 어쩔 수 없었다. 다행히 경찰관들이 눈에 띄게 많이 보여서 좀 안심이 되기는 했지만
좋은 일, 아니 당연한 일을 하고도 떨어야 한다는 게 좀 속상했다.
<그래도 너같은 비실이한테는 너무 무모했어. 내가 너라면 그냥 36계 줄행랑 이었을 걸? >
<兄さんだったら?(형이었다면?) >
우쿄의 약간 반발섞인 질문에 석진은 가슴에 힘을 주고 뻐기듯 말했다.
<그 자리에 내가 있었으면 당연히 그 또라이 새끼, 나한테 봉알이 깨졌지~~~ >
우쿄는 석진의 말에 질렸다는 표정이 지었다.
<형이 무슨 하나무라 만게츠야? >
<하나.... 뭐? 아. 일본의 유명한 소설가. 나도 그 아저씨 소설은 읽어봤지. 그러고 보니 그 쌍라이트
아저씨는 소설 두 편-게르마늄의 밤, 울鬱-에서 한명은 꼭 내시內侍를 만들더라...... >
개그스럽게 말하던 석진은 순간 움찔해졌다.
<하긴 남자로서는 끔찍한 일이지....... 무엇보다 너는 사실 싸움 같은 거 하고는 전혀 안 어울려.>
<형이 볼 때 내가 어떨지는 몰라도 이래뵈도 나도 남자니까, 특히나 일본남자로써 싸워야 할때는 싸워야
한다고 나 자신에게 다짐할때가 있어. >
우쿄의 말에 석진은 잠시 생각하다가 뭔가 섬뜩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카미가제神風라도 될 참이냐? >
<そうじゃなく!!!(그게 아니라!!!)>
석진의 장난스런 반문에 우쿄는 어째 말이 그 쪽으로 흐르냐는 표정을 지었다.
재작년에 우쿄가 깨달은 것 중에 하나는 자신의 것-그저 물질적인 것이 아닌 소신所信이나
절개節槪 같은 정신적인 가치, 자신 본연의 모습-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댓가를 치룰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게 이익이든 손해이든, 심지어 목숨을 담보로 하는 것이든.......
이건 아주 소소한 것에 속할 것이었다. 하긴 남에게 자신의 가치를 남에게 강요하면고 그것에 대항하면서
서로 싸우고 반목해야만 하는 현실이 서글프기 이를데 없지만............
<짜~~~식!! 이제보니 멋진 구석이 있구나?!!! >
석진은 우쿄의 감상에 거칠게 껴안으며 짓궂게 우쿄의 생머리카락을 흐트렸다.
<형아~~~!!! >
우주가 우쿄를 보자마자 방긋 웃으며 우쿄에게 달려왔다. 우경은 재판등으로 집을 비워야 할 때
어쩔 수 없이 근처의 어린이 집에 맡겨야 했다. 우주가 태어나면서부터 우경은 잠시 변호사 일을
중단했다가 최근에 다시 일을 시작하면서 우주의 탁아문제로 고민을 해야 했었다.
무엇보다 결혼하고 한국으로 오면서 우쿄를 일본에 놓아두고 온 것 때문에라도 우주를 엄마 곁에
떼어놓는 게 영 꺼림직 했다. 우주가 중학교에 진학할 때까지만이라도 일을 더 쉴까 했을 정도였다.
우경이 자기 일생에 첫번째 사무소를 이런저런 불이익을 감수하고 굳이 자택에 차렸던 것도 이런 고민 탓이었다. 굳이 따로 사무실을 얻어 차릴 필요가 없었던것은 처음 일 할 때에 쌓아둔 명성도 있었고 그러면서도
일처리는 확실하니까 제법 고객줄이 끊기지 않았던 덕분이다.
오히려 가정집에 변호사 사무실을 차리고 평범한 가정주부의 모습으로 고객을 대한다는 게 의뢰인들에게
편안한 느낌을 줘서 참신하게 어필된 듯 했다.
그녀는 주 고객을 한국에 주재하는 일본인이나 자신처럼 한국남자와 결혼했다가 법률적인 보호가 필요해진
외국인 처들로 삼았다. 석주는 신혼 초에 마산에서 아내가 변호사 사무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자신의
재능을 살리고 싶어하는 걸 -시댁 부모들의 눈치때문에 가능한 가사에 더 충실한다는 조건을 달긴 했지만-
굳이 막지 않고 지지해 주었다.
그로서는 원래 돈을 버는 일은 남자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고 무엇보다 자신때문에 -당시에 고국인
일본보다 후진국이었던- 한국까지 와서 여러가지로 고생을 하는 아내를 험한 세상에 내보내 돈까지 벌게
하는 것만은 절대 시키고 싶지 않았지만 이왕에 우경이 자신의 재주를 살릴 바에는 좋은 일에 쓰기를 바랬고
그래서 우경은 돈벌이에 구애받지 않고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일이 잘 풀리려는지 가사를 돌보면서
차근차근 준비한 뒤 대략 2번의 응시끝에 사법시험을 패스했던 우경이 사법 연수원에서 연수받을 때는 그
몇년 전에 요행히 석주도 그 근방인 일산의 고등학교로 전직轉職되어 살림집을 차릴 수 있게 되어서
두 부부가 따로 떨어져 주말부부가 되는 불상사는 피할 수 있었지만......
<재미있게 놀았어? >
<응 !!>
우주는 우쿄의 손에 이끌려 집으로 가면서 우쿄와 정답게 얘기했다.
석진은 오랜기간 떨어져 살아서 낮이 익지 않을 동생을 다정하게 대하는 우쿄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석진의 대략 3살 위의 형은 형이라고 거들먹거리며 늘 보는 동생을 툭하면 두들겨 패고 무슨 머슴
다루듯 하기 일쑤였고 -툭하면 형이면 다냐고 대들고 약올리고 까부는 게 일이었던 석진도 할 말은 없지만...
- 석진의 친구들 중에 형제들이 있는 경우 대개 그런 상황이었다.
휴대전화가 울려서 받아보니 우경이었다.
<もし家に行く中なの?(혹시 집에 가는 중이니?) >
< ん. 母さん. >
<それではちょっとすみませんが行く道に宇柱ちゃんを託兒所で送ってくれることができる?
(그럼 좀 미안하지만 우주를 -어린이 집에서 -집으로 데려다 줄 수 있지?) >
우쿄는 대답대신에 우주의 앞에 조그리고 앉아서 전화기를 우주의 귀로 갖다 대 주었다.
우주는 바로 엄마라는 걸 알아챘다.
<엄마~~~♡>
우주는 엄마와 다정스럽게 얘기한 뒤 우쿄에게 다시 전화를 돌려줬다.
<ありがとう,京太郞ちゃん。(고마워, 케타로짱.)>
<いいえ. 當たり前のことなのにです。(아니에요. 당연한 일인데요, 뭐.)>
<それでも, .... では日暮れ早く行く。(그래도, ....그럼, 저녁때 일찍 갈게.)>
<はい.>
전화를 끊고 나자 우주가 우쿄에게 귀엽게 물었다.
<형아, 엄마 언제 와? >
<응, 일찍 오신대. >
<근데.... 형아 엄마랑 무슨 말을 하는 거야? >
<응? 무슨 말? >
<형아랑, 누나랑 엄마랑 이상한 말을 해서 못알아듣겠어... >
우주는 호기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광경을 옆에서 지켜보던 석진이 끼어들었다.
<하이, 그것이노 일본말이므니다~~~ >
우쿄는 석진의 개그가 약간 이상하다고 느꼈다.
<형은 그거 무슨 말이야? >
<일본말이노 해 봤스므니다~~~ 한국식으로~~~ >
<それが何の日本語なのよ?(그게 무슨 일본말이야?)>
석진의 방정맞고도 익살스런 일본어 흉내에 우쿄는 눈살을 찌푸렸다.
우주는 여전히 고개를 갸우뚱 했다.
<형아, 왜 일본말을 해? >
<아... 그게.... >
우쿄는 약간 당혹스러웠다.
우쿄는 우주에게는 가능한 한국어로 얘기하고 있다. 자신의 친동생이지만 국적상 한국인인 우주는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아무 방해 받지 않고 확립하게 해줘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우쿄는 자기 동생이 자신과 똑같은 뼈아픈 상처를 받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비록 오빠와 대화를 일본어로 하기를 즐기는 수진에게도 그것은 같은 심정이었다.
그리고 나중에 무척 어린 동생에게 일본어로 대화하는 엄마나 형, 누나가, 그리고 자신에게도 반을
형성하고 있는 일본인의 혈통이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좀 걱정스러웠다.
우쿄 자신도 자기의 피의 반이 한국인의 것임을 알았을때의 충격은 이만저만한 게 아니었다.
더욱이 우주도 지금 알게 모르게 이런 저런 반일反日감정의 영향을 받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미 우주 나이에 읽는 동화에도 일본사람들이 -왜구라든가 일제시대 일본경찰같은 모습으로으로-아주
나쁘게 나오는 내용이 있는 것을 우연히 본적이 있던 참이었다.
실제로 며칠 전에 우쿄는 우석의 집에 갔다가 나오는 길에 괜히 옆의 어린애들에게 말을 걸었다가
약간 속상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그 꼬마들이 아직 한국어가 서툰 우쿄를 외면하더니 이렇게 쑤군댔던 것이다.
<저 언니. 일본사람인가봐, 나쁜 사람이지? >
우쿄는 잠시 머뭇거리다 그냥 얼버부렸다.
<......나중에 가르쳐 줄게. >
다음날 강의 스케줄을 마친 우쿄는 조금은 머뭇거리면서 음악과 교실로 들어섰다.
<어서와, 케타로짱. >
<ご....今日は。>
소현과 미나가 빼꼼히 문으로 고개를 내미는 우쿄를 반갑게 맞이하며 교실 안으로 이끌었다.
우쿄는 좀 창피해 하며 교실로 들어섰다.
우쿄가 들어서자 대략 10명 남짓이 있던 동아리 방은 회색 후드티와 청바지로 지나치게 가녀린
몸을 감싸고 있는 어린 소년에게 온 시선이 집중되었고 이내 여학생들은 우쿄를 에워쌌다.
<어머머. 요 꼬마는 뭐야? >
<설마 초딩은 아니겠지? >
이럴 때 우쿄가 적잖이 당황해 한다는 걸 알고 있는 미나는 우쿄와 여학생들을 떼어놓고 인사를 시켰다.
<자자~~다들 무슨 동물원에 원숭이 구경 났니? 여기는 이번에 우리 동아리에 새로 들어온 사오토메
우쿄군이야. 이름 정도는 들어 봤겠지? >
미나의 아무생각 없는 발언에 우쿄는 한달 여 전에 유진이 자신에게 했던 모욕이 다시 떠올라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어머!! 정말이에요? >
<거짓말~~~~!! >
정말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우쿄를 살펴보는 그녀들을 다시 진정시킨 미나는 우쿄에게 자기 소개를
시켰다.
<あの...... 여기 미나 선배님이 말씀하신 대로 저는 일본의 도쿄대에서 지금 OO대 한국사에 편입중인
사오토메 우쿄라고 합니다. 잘 부탁 드리겠습니다. >
의외로 제법 한국어를 정확한 발음으로 말하고 있었다.
우쿄가 다소 긴장하면서 하는 자기소개에 여학생들은 키득대고 있었고 두어 명 끼어있던 남학생들은
다소 냉정한 시선으로 우쿄를 응시하고 있었다.
<............ 다룰 줄 아는 악기 있나? >
<はい!! 피아노하고..... 기타를 좀..... >
그중에 한 학생이 내던지듯 묻자 우쿄는 좀 주눅이 든 표정으로 더듬더듬 대답했다.
<그럼 한번 해 볼래? >
우쿄의 대답에 여학생들은 우쿄를 피아노로 인도하면서 연주를 종용했다.
남학생들이 옆에서 우쿄를 조롱하듯 수군댔다.
<못해도 "학교종이 땡땡땡" 정도는 치겠지? >
<뭐 "나비야 나비야"는 치지 않겠냐. 크크크~~>
여학생들이 그 남학생들을 흘겨보는 가운데 우쿄가 더 위축이 되어서 좀 자신없어하는 표정으로 피아노
의자에 앉자 미나와 소현이 옆에서 다독였다.
<그냥 평소에 자신이 있을만큼만 치면 돼. >
<맞아. 여기는 음악을 배우면서 취미를 붙일 수 있게 하기 위해 만든 동아리니까. 천천히 배워나가면 될거야. >
두 누나들의 말에 우쿄는 약간 안심이 되었고 심호흡을 한 뒤 천천히 건반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막상 우쿄가 건반을 두들기기 시작하자 모두들, 우쿄를 조롱하던 남학생들은 말할 것도 없고
미나와 소현도 흠칫 놀라기 시작했다.
<이거...Liz Story의 Greensleeves아냐? >
<그러게?!! 저 곡은 나도 완벽하게는 치기 어려운 곡인데.....>
실제로 우쿄의 피아노 연주솜씨나 테크닉이 얼핏 들어도 보통의 수준이 아니라는 느낌이었다.
처음에 자신없어하면서 시작한 연주는 마음이 평정되기 시작하며 자신감이 생기자 활기를 더했다.
피아노의 신비로운 선율은 교실 안의 학생들을 그자리에서 굳게 만들었다.
마치 차갑고도 신비로운 기운으로 가득찬 숲속의 한가운데에 놓인 몽환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다.
이윽고 소년의 가는 손가락이 건반위에서의 유희遊戱를 멈추었을 때 다들 멍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고
엉겹결에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우쿄는 다시금 얼굴이 빨개졌다.
몸만 움직여서 몸만 때우는 노동動만이 노동이 아니다.
글을 쓰는 일도 상당한 육체적, 정신적 에너지가 필요한 중노동임에 틀림없다.
집에 들어서고 세면을 마치자 책상에 앉아 작업을 시작한 혁은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게 작업을
시작하자 눈에 피로를 느끼기 시작했다.일단 원서를 읽는 것 자체는 혁의 어학수준으로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특히 영어는 그에게는 이해도解度가 국어인 한국어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걸 종이에 옮겨 적는 것은 별 문제이다.
섣부른 지식으로 잘못 번역해서 원작자의 의도를 왜곡할 수도 있거나 전혀 다른 글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신중해야 한다. 번역일은 그저 돈을 버는 도구이기 전에 자신을 위한 학습이기도 했다.
어학실력도 높일 수 있고 그외 여러가지 다방면의 지식도 쌓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작업은 상당히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아마 주말 쯤, 미키나 우쿄등과 여의도에
소풍을 가기로 한 일요일 전엔 작업을 마치고 원고를 넘길 수 있을 것이었다.
손가락을 깍지 끼고 뒤로 젖혀 약간 경직된 온 몸의 근육을 약간 이완시키고 난 순간 책상의
유리 판 밑에 우표만한 크기의 스티커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그 사진은 한 가운데 손가락으로
V자를 그리며 천진한 미소를 짓고 있는 우쿄의 뒤에서 혁과 미키가 끼어들어 찍은 사진이다.
그 때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소년이 혁과 미키에게 처음 당한 굴욕(?)이었기 때문이다.
학교 근처의 편의점에는 최근에 들여놓은 즉석 스티커 사진기가 있었는데 지금은 여학생들에게
인기만점이지만 3주전까지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아서인지 사용하는 사람이 뜸했었다.
<あら(어머), 쟤, 사오토메군 아냐? >
미키와 함께 학교를 나와 길을 걷던 혁은 미키의 말에 사진기 앞에서 근방을 경계하는
소년을 볼 수 있었다. 우연찮게도 혁과 미키는 우쿄의 시야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근방에 아무도 없다고 확인하고 안심한 우쿄는 냉큼 사진기 장막 안으로 들어갔다.
장난기가 발동한 미키가 혁을 잡아끌고 마치 도둑고양이처럼 살며시 다가갔다. 둘이 아주 교묘하게
장막 안으로 끼어들었을 때는 플레임을 세팅한 뒤 촬영버튼을 누른 직후였다.
옆에 누가 있는지조차 모른 채 우쿄는 아주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었고 미키는
장난스럽게 아주 섹시한 포즈를 취했다. 혁은 엉거주춤 서 있을 따름이었다.
잠시후 플래시가 터진 뒤에 미키가 우쿄의 귓가에서 소곤댔다.
< ほら, 男ひとりこのようなこと取るのではないの。 陰気に見えるんだよ。
(얘, 남자애 혼자 이런 거 찍는 거 아냐. 음침해 보여~~~♡)>
그 순간 소년의 표정에서 핏기가 싹 가시더니 그제야 뒤의 둘의 존재를 알아채고 혼비백산했다.
혁은 그 코믹한 상황에 그 자리에서 배꼽이 빠지게 웃고 말았다.
< な, 何ですか, お二人とも!! 私の趣味をちゃにするといらっしゃったんですか?!!!
(뭐, 뭐예요, 두분!! 제 취미를 놀리시려고 오신 거예요?!!!)>
<ちゃにするとは.....違うよ。(놀리기는...... 아냐.) >
그 와중에 웃음을 겨우 수습한 혁의 시야에 한켠에 놓인 수첩 하나가 들어왔다.
<뭐냐. 이거? >
<わっ!! 見ないでください!!!(으악!! 보지 마세요!! )>
무슨 나쁜 짓을 하다 들키거나 하다못해 숨겨둔 도색잡지라도 들킨 듯 아주 비명을 지르는 우쿄를
뒤로 하고는 그 수첩을 펼쳐든 혁으로서는 아연실색한 뒤 나중에는 실소失笑를 금할 수 없었다.
죄다 혼자 찍은 스티커 사진만 잔뜩 붙어 있었던 것이다.
<진짜 여자친구 같은 걸 만든 적이 없다는 게 사실인가 보구나? >
혁은 수첩을 펼쳐보면서 우쿄에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소년의 울상 반 원망 반 섞인 표정이 귀엽다. 혁과 미키는 우쿄의 일면중에 하나를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일본에서 주치의가 권고해 정신과 치료목적으로 시작했던 건데 점차 재미를 들였다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앞의 사진에서는 경직된 채로 계속 어둡고 우울한 표정 뿐이었던 사진은 뒤로 갈 수록 밝아지는
느낌이더니 나중에 어느정도 어린 소년 특유의 장난기와 발랄함이 느껴지는 사진이 많아지고 있었다.
무책임한 어른들의 완악頑惡한 독선이 웃음도 잃어버리게 할만큼 소년의 마음을 멍들게 만들었고 좀 이상한
취미를 들이긴 했지만 이를 극복하려고 노력했다고 생각하자 대견함과 가련함이 동시에 들었다.
미키와 혁은 우쿄에게 비밀은 지켜줄테니 열심히 해보라고 격려를 해주었고, 그 뒤로 우쿄는 두 사람을 더
믿고 따르게 되었다. 우쿄로서는 이 사건을 계기로 오히려 두사람, 특히 혁에게는 더더욱 마음을 열게 된 것
같았다. 그 때의 이 사진은 우쿄로서는 스티커 사진 중에서는 처음으로 다른사람과 찍어본 사진이었다는
것이다.
미소를 지으며 불과 3주전의 추억에 젖어있던 혁은 도어폰이 울리자 책상에서 일어나 방문자를 확인했다.
<민혁씨, 저녁 아직이지? >
착 달라붙는 청바지와 앞의 단추를 풀어 골이 깊은 가슴 계곡을 살짝 드러낸 하얀색 불라우스의 몸매를 마의로
감싼 미키의 손에 시장을 봐온 저녁거리들이 든 비닐 봉지가 들려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일에 빠져서 식사도
잊은 채였다.
미키도 요리할 때만큼은 확실히 여자였다. 에이프런을 두르고 요리를 하는 뒷모습도 충분히 매력적이었고
그녀가 만든 일본식 가정요리도 언제 배웠는지 솜씨가 훌륭했다.
<요 근래 이렇게 맛있는 요리는 처음 먹어본 거 같애. >
<本當? 다행이다♡ >
미키의 도미매운탕 솜씨를 칭찬하자 미키는 그녀답지 않게 수줍어 하면서 뿌듯해 했다.
혁은 이런 단란한 분위기도 좋다고 느꼈다. 이런 행복감에 가정을 꾸리는구나 싶었다.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등의 뒷처리도 같이 한 뒤 혁은 미키에게 양해를 얻어 다시 작업을 재개했고 미키는
원서原書 의 여분권을 들어서 읽어보고는 금새 빠져들었다.
내용이 내용이라 좀 민망했는데 미키에게서 나온 탄성이 혁을 아연하게 만들었다.
< あら, この本面白いね。(어머, 이 책 재미있네. >
<그게 재미있어? 이 책 아주 사람 이상하게 만드는 거구만...... >
<どこがどうで?(어디가 어때서?) >
<성 풍속사라더니 어떻게 된 게 죄다 호모, 게이, 이반異般 얘기 뿐이야. >
혁의 투덜거림에 미키는 쾌활하게 웃었다. 혁이 내심 남성간의 동성애에 대해
그리 않좋은 시각을 갖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던 탓이다.
<푸하하하하~~~~ 하긴 민혁씨한테는 좀 이상하기는 했겠다.... >
<사실이잖아, 비정상인 건. 상식적으로 동성애라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이야? >
혁은 당연한 거 아닌가 하는 태도였다.
미키는 늘 완전무결한 남자라고 느꼈던 혁의 순진하다 싶은 고지식함이 귀엽게 느껴졌다.
<정상, 비정상. 그런 기준이 어딧어? 그냥 즐거우면 되는 것이지. 성생활이라는 게 단순히
생산수단인 것이고 그 외에는 비도덕적인 것이라는 도덕론에 매달려 살아야 하는 것만도 아니고,
아니한 말로 지금껏 민혁씨와 내가 즐겁게 엔조이 하기 위해 섹스를 한 거지, 애 낳고
결혼하자고 한 것도 아니잖아? >
미키는 늘 솔직하고 직설적이었다. 그런 성격은 섹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 글쎄...... >
미키의 말에 혁은 당황하면서 고개를 갸우둥하고 있었다.
사실 틀린 얘기는 아니라는 느낌이었다. 아니면 이번 작업이 자신의 생각을 교묘하게
틀어놓았든가......
<그리고 말은 동성애 같은 건 비정상이네 어쩌네 해도 남자들, 여자끼리의 레즈를 소재로 한 포르노
물을 꽤 좋아하던 것 같던데? >
<그건.....사실 그럴지도 모르지...... >
확실히 남자들이라는 게 이율배반적이게도 같은 동성애라도 호모섹스는 혐오하고 경멸해도 레즈비언에게는
색다른 색욕을 느끼는 것 같다.
언젠가 혁도 영진과 같이 레즈비언을 묘사한 포르노를 본적이 있는데 말로는 영진에게 "뭐, 이런 걸 보냐?"
하고 타박은 하면서 내심 꽤 흥분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여자도 좀 그런 게 있는 것 같아. 가령 요즘 여자애들 중에 “야오이”물이라는데
재미를 붙이는 애들이 있거든. >
<야오,,,,,,,, 도대체 그게 뭐야? >
<뭐 남자들끼리의 연애 담이라고나 할지…. >
혁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연애담? 남자끼리? >
< 순전히 호모섹스를 다룬 게 아니라 그냥 남녀간의 연애 물을 남자끼리로 바꿨다는 것이지. >
<하긴 . 근데 시커먼 사내녀석들끼리 그러는 게 그렇게 재미있겠어? 구역질이나 안 나오면
다행이겠다. >
<거긴 최소한 울끈불끈한 근육질의 괴물은 안 나와. 여자애들이 보는 거니까
당연하지만 대개 단정한 미남자와 귀여운 소년이 주인공이지. >
혁은 순간적으로 우쿄를 떠올렸다가 뜨끔했다.
<시답잖은!!!.................. 미키씨도 그런 걸 봐? >
<아 어쩌다 몇 번…… 본적이 있어. 꽤 재미있길래……어머, 나 만화나 애니메이션 무척 좋아해. 몰랐어?>
<옛날에 그런 줄은 알고 있지만. 지금 미키씨는 조교수야. 아직도 만화 같은 걸.......>
<어머. 문화콘텐츠를 즐기는 데 학력은 중요하지 않아. 그건 그렇고, 민혁씨도 다음에 한번 볼래?>
<뭘? >
<や.お.い.>
미키의 표정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돼, 됐어!! >
혁은 호기심에 잠시 마음이 동했다가 화들짝 놀라서 거절하고는 다시 책과 노트북 컴퓨터로 시선을 돌렸다.
혁의 반응에 미키는 자신의 늘 평소에는 남자답고 늠름한 남친이 오늘따라 귀엽게 느껴졌다.
일주일은 훌쩍 지나갔다. 다행히 우쿄는 이번에 든 동아리 활동때문에 귀가시간이 좀 늦어지긴 했지만 별
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그 치한도 그날 이후에 잠잠했다.
금요일에 혁은 작업을 완결지었고 다음날인 토요일 오후에 다른 작업을 맡아서 완성을 지은 석현과 같이
출판사로 가기로 하고 학교 교정에서 만났다.
<오느라 수고했어. 근데 일단 집에 들러야 돼. >
<아니, 왜? >
<원고하고 파일 시디를 집에 두고 왔거든. >
<이런~~~ 귀찮게.>
<밥줄이 걸린 중요한 거니 함부로 들고 나다닐 수는 없는 거 아니냐? >
말은 그렇게 하지만 기실 혁은 무언가를 잃어버린다거나 하는 칠칠맞음과는 무관했다.
교정의 한켠의 벚나무는 제법 소담스럽게 떤?이 피어나고 있었다.
다른 학생들이 귀가하기 위해 교문으로 걸음을 재촉하는 와중에 서서 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소년이
두 청년의 눈에 띄었다.
<사오토메군. >
우쿄는 자신을 부르는 친숙한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고 혁과 함께 석현이 우쿄에게 다가가면서 반갑다는
표정으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우쿄는 곧바로 그 쪽으로 몸을 돌려서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안... 뇽하세요.>
아뿔싸!! "어" 발음을 "오 オ"로 발음하고 말았다. 일본에서 재일한국인 친구에게 한국어를
배우면서 일본인이나 재일한국인들이 상습적으로 저지르는 실수를 우쿄도 그냥 같이 배운 건데 주의를
한다고 했긴 했지만 솔직히 일본인으로서는 발음이 좀 어렵다보니 가끔 이런 실수를 하기가 일쑤라
한국에서는 남학생들한테 "역시 쪽발이들은 혀가 짧아"라는 조롱을 듣기가 일쑤였다.
요즘은 그럭저럭 잘해와서 마음을 놓았었는데.......얼굴이 빨개져서 민망해 하는 소년에게
두 청년은 웃으면서 괜찮다는 듯 손짓을 했다.
두 청년에게는 소년의 실수가 오히려 사랑스러웠다.
<ひさしぶりだね。 うまく行ったの?(오래간만이구나. 잘 지냈니?) >
<はい。 >
석현은 우쿄에게 상당히 친밀하고도 상냥하게 말을 걸었다. 우쿄는 별 경계하는 기색 없이
석현을 대했다. 처음에 혁과 함께 자신을 바래다 준 것뒤로 간간이 보기 때문에 신뢰할 만 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혁은 석현이 우쿄에게 아주 친밀하게 대하자 살짝 질투심을 느끼고 짐짓 끼어들었다.
<"케타로".내일 여의도로 떤? 구경하기로 약속한 거 기억하지? 아침 9시쯤 데리러 갈게. >
혁은 우쿄의 애칭인 "케타로"라는 이름을 은연중에 강조했다. 혁도 전부터 우쿄에게 이름이나 "케타로"
"케이"같은 애칭으로 부르기는 하지만 아직도 "사오토메군"이라는 존칭이 익숙했던 참이었다.
은사인 석주가 아들에게 부르는 "우경"이라는 한국이름은 우쿄에게 실례인 것을 알고 있지만 은사인
석주의 사모님의 현재 한국이름이기도 해서 아예 입에 담지도 않았다.
<はい。그럼 내일 도시락 같은 거는 제가...... >
<아니, 그럴 필요는 없어. 미키씨가 레스토랑을 예약해 뒀으니까....뭐, 그리 대단 한 곳은 아니지만 말야. >
우쿄는 왠지 혁이나 미키에게 너무 신세지는 것 같아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 でも..... 알겠습니다. 내일 뵐게요. >
<,,,,아 수진양은 내일 어떻대니? 내일 별 일 없으면 끼어도 되는데.....>
<물어보겠습니다만... 아마 약속이 있을 거예요. >
<그래.. 그럼 내일 보자. >
우쿄는 역시 예의바리게 인사하고 지하철 역으로 향했고 두 청년은 소년에게 손을 흔들어 주며 배웅 한 뒤
일단 혁의 집으로 향했다.
<역시 두 분 다 훌륭하십니다. 특히나 강민혁씨는 다른 분들에 비해 빨리 일을 마무리 지으시는데도
내용이 부실하지 않고 완벽하군요. >
혁에게 원고파일이 든 CD디스크와 함께 프린터 해온 원고를 받아든 폅집장은 놀라워하고 동시에 흡족해
했다.
<과찬이십니다. >
<그렇지 않습니다. 처음에 김석현씨에게 추천 받았을 때는 솔직히 좀 반신반의했습니다만... 지금 생각하면
강 민혁씨를 그 때 놓쳤으면 제 손등을 찍고 싶었을 걸요.>
혁은 편집장의 칭찬이 왠지 부담스러웠다.
<어쨌든 마음에 드시니까 다행입니다. 다음에도 부탁드리겠습니다. >
그렇게 출판사를 나온 둘은 석현의 제안으로 근처의 바로 들어섰다.
<난 사실 그 책, 네가 "이걸 꼭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하고 좀 질질 끌 줄 알았어. >
<왜 그렇게 생각했는데? >
<그 책 내용들이 좀 그렇잖냐. 그날 영진씨네 집에서 네가 과민반응 한 것도 있고 하니까. >
<일은 일일 뿐이야. 개인감정하고는 별개 잖냐? >
<일이나 학업에 관해서는 철두철미한 걸 알지만 이번만은 그러지 않았을까 생각했을 뿐이야. 근데 말야.>
석현은 잔에 조금 남았던 와인을 마저 비운 뒤 혁에게 다소 짓궂은 표정을 보였다.
<민혁이 너는 동성애가 싫다지만 나는 사실 가끔은 어리고 귀여운 남자아이라면 생각이 좀
동하겠더라구. >
순간 혁은 마시던 와인이 식도로 역류하면서 사래를 걸리고 말았다.
<풋!!!! 컥컥컥!! 뭐,, 컥컥!! 뭐라? 쿨럭!!>
혁은 사래를 걸려서 기침을 하는 와중에도 석현에게 반문하고 있었다. 석현과 바텐더는
혁에게 등을 두들겨 주고 냅킨을 대어주었다.
<쿨럭쿨럭..... 그, 그게 무슨 소리야? >
<같은 남자라 하더라도 어리고 야들야들한 어린 소년이면 그것도 괜찮지 않아? 이를테면.....>
<이를테면 ? >
설마하며 반문하는 혁의 식도는 아직도 사래의 멍에에서 해방되지는 않았다.
석현의 표정에는 장난기가 더해가고 있었다.
<사오토메 우쿄군은 어때? 실은 그 꼬맹이가 생각하면 할수록 밤에 안아주고 싶더라니까.>
멍해진 혁은 순간적으로 "너도 그렇냐?" 하고 반문할 뻔 했다가 짐짓 정색을 했다.
<성 취향이야 그 사람 자유라지만 동등한 성인끼리 합의하에서나 가능한 얘기이지,
미성년자를 상대로 하는 것은 말도 안된다고 생각해. 거기다 ......>
혁은 바텐더에게 차가운 생수를 청해 단숨에 들이켰다.
다들 왜이러나 싶었다.
소년에게 주접을 떨었다 두들겨 맞은 양아치 같은 놈은 원래 그런 놈이지 싶어서 무시했지만 자신도
그래서 고민인데 심지어 "상식인常識人"으로 통했던 석현도 이러다니 좀 놀라울 뿐이었다.
사오토메 우쿄라는 소년이 동성의 남자들에게 묘한 성적매력을 풍기는 존재였나 싶기도 했다.
여학생들이 귀엽다고 쑤군대는 거야 그래도 이성이고 어리고 귀여운 외모의 소년에게 누나로써의
모성본능을 느낄 수 있으니 그렇다 칠 수 있다지만.....
<사오토메군은 내 고등학교 은사님의 친 아들이야. 특히나 그 아이가 지금까지 겪은 일들을 다시 생각하면
가엾기 이를 데 없잖아. 그런 애한테.... >
<말하자면 그렇다는 거지. 워낙에 남자애가 귀엽게도 하고...... >
석현은 처음 우쿄를 본 이후로 두세번 더 f었다. 혁에 비해 자주 보지는 못하지만 그래서인지 우쿄의 모습에
더더욱 매료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사실 석현도 그런 느낌은 처음이었고 그도 "자신은 상식인"이라며
스스로를 억누르고는 있지만 혁과는 달리 "뭐 그럴 수도 있지"하며 어느정도 융통성을 발휘하여 그렇게까지
당혹감이나 죄의식을 갖진 않고 있었다.
그렇더라도 석현이 요즘들어 노골적으로 동성애나 소년애에 대해서 긍적이다 못해서 오히려 당연한 거
아니냐는 식으로 나오니 혁으로서는 당혹스러웠다.
최근에 혁은 몇가지 색다른 성경험을 했다. 미키에게는 스타킹 풋잡같은 페티쉬 플레이를 경험했고 저번
주말에는 미국으로 귀국하는 티나에게 애널섹스를 처음 경험했다. 확실히 혁으로서는 그 두가지가 상당히
색달랐고 이질적이었다. 어느정도는 색다른 경험을 해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동등한 성인남녀끼리의 동등한 합의 하에서의 일이라고 혁은 생각했다.
혁은 석현의 말을 굳이 비난하거나 할 생각은 없었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 간간히 우쿄에게 이상충동을
느껴왔고 동시에 죄책감도 있있다.
하지만 이번의 작업을 해나가면서 자신의 감정에 다소의 정당성을 은연중에 부여하고 싶은 생각이 계속
들었고 거기에 놀라서 자신에게도 경계심마저 들었다.
<민혁이 너는 어때? 너야 뭐 확고한 면이 있긴 하지만 그런 미소년을 계속 대하다 보면..... >
<지금까지 한 얘기.....농담으로 듣겠어. >
혁은 그 말 한마디로 대충 얼버부려버렸다.
집에 도착해 보니 우주가 잠에서 깨어서 안방에서 나와 우쿄와 석진을 맞았다.
수진이 아직 학교에서 안돌아 왔는지 부재중이어서 석진은 약간 섭섭했다.
<잠깐 옷을 갈아입고 내려올게. >
우쿄는 석진에게 우주를 맡기고 학교에서 입고 있던 집에서 입는 추리닝과 티셔츠로 갈아입고 세수를
한 뒤 바로 1층으로 내려왔다. 요 일주일 동안 자신의 보디가드 역할을 해준 석진에게 뭔가 대접을 해주고
싶었고 우주의 간식도 챙겨주기 위해서였다.
내려오려는 순간 밑에서 피아노 치는 소리가 들렸고 보니까 석진이 우주에게 단순하고도
쾌활한 멜로디로 동요를 쳐주고 있었다. 아주 잠깐이나마 엄마도 없이 혼자 집을 지키려니
심심했던 우주는 즐거워서 손벽을 치면서 꺄르르하고 웃고 있었다.
<헤에~~~ 형도 피아노를 잘 치네? >
<야!! 너는 이 형님을 너무 얕보는 것 같다~~~~~!! >
짐짓 몰라준다는 언잖아하는 표정을 지으며 한껏 뻐기다가 우쿄가 미심쩍은 표정을 짓자 익살스럽게 울상을
지었다.
<실은 이 정도면 잘 친거야~~~ >
그러면서 우쿄에게 한번 쳐 볼 것을 종용했다.
<에엣?!! 僕(나)? >
사실 우쿄는 한국의 집에서는 피아노를 친 적은 없었다.
아직은 한국의 집은 여러모로 행동이 조심스러워져서였다.
거실에 베란다를 등지고 서 있는 피아노는 석주가 우경에게 결혼 10주년 선물로 사 준 것이다.
우경도 소시적의 취미가 피아노 치기였는데 다시 치면서 옛 감각이 살아나자 수진에게 피아노를
가르쳐주기도 했었다. 최근에는 우경도 수진도 칠 여가가 없는 듯 했다.
우쿄는 잠시 망설이다가 석진과 우주의 부추김으로 일단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혹시 신청곡이라도.... >
<아무거나 쳐봐. >
< 내가 아는 곡들은 형에게는 좀 지루한 곡일지도 모르는 데..... >
<나도 가끔은 조용한 곡이 좋더라... >
우쿄는 석진에게 미소를 띄운 뒤 조심스럽게 건반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잠깐 시장을 보고 오던 우경은 다른 곳도 아니고 집에서 나기 시작하는 피아노 연주소리를
듣고 멈칫 했다. 마침 수진, 우석과 같이 집으로 오던 석주도 아내와 피아노 소리를 들으며 마주치던 참이었다.
<집에 오디오라도 켜 놓고 나갔다 왔어? >
<아뇨? >
<근데 이 피아노 소리는 뭐예요? >
남편에 이어 수진의 질문에 우경은 잠시 피아노가 연주하는 곡 소리를 되새겼다.
<이 곡,La Solitude의 Alain Lefevre잖아? 아니, 그보다 우리집 피아노 소리야. >
네 사람이 마당과 현관에 들어서면서도 피아노 소리는 처음에 은은하고도 조용한 음률과 신비스런 분위기로
네 사람의 마음을 조용히 사로잡고 있었다.
조용히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그것을 알아챈 석진이 인사를 하려고 했다.
우쿄는 네사람이 너무 조용히 들어선 데다 등지고 있어서 누가 들어온지도 모르게 연주에 열중하고 있었다.
우주는 형의 피아노 연주에 넋을 빼고 있었다. 우경은 살짝 우쿄에게 다가갔다.
석주와 우경은 우쿄도 피아노나 기타 같은 걸 연주하는 걸 즐겨한 다는 걸 노조무나 카스미에게 들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들은 적은 없었다. 옛날에는 우쿄가 너무 수줍어하느라 친부모 앞에서 솜씨를 자랑하는 걸
꺼렸고 한국에 데려왔을 때는 그럴 정신적인 여유가 없엇던 탓에 역시 들을 기회가 없었다.
친부모로써 말로만 듣던 아들의 악기 연주 솜씨를 듣는 것은 처음인데 설마 이 정도였냐 싶을 정도였다.
예전처럼 자주 피아노를 손수 연주한다거나 하기는 어렵지만 틈틈히 음악을 즐겨 듣던 우경은 아들의 솜씨가
오디오에서 같은 곡을 들을 때와 전혀 차이가 없거나 오히려 테크닉이 더 훌륭함을 알 수 있었다.
연주를 마친 우쿄는 갑작스럽게 뒤에서 들려오는 석진 한명이 아니라 다수의 박수소리에
놀라서 돌라보고는 얼굴이 빨개졌다.
친부모와 동생들까지 자신의 피아노 연주를 들었다고 생각하자 부끄러웠다.
<い, いついらっしゃったんですか。(어, 언제 오신 거예요?)>
<언제 오긴? 근데 언제 이정도로 피아노를 연습했냐? 공부만 잘하는 줄 알았더니 이런 재주도 있었어.
이야~~~ 어떤 피아니스트가 와도 우리 우경이를 당할 사람이 없겠는데? 안그래, 마누라?>
가끔 예상치 못하는 재주로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하는 아들을 아버지로서의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석주의 칭찬에 우쿄는 더 얼굴이 빨개졌다.
우경은 말 없이 아들에게 대견하다는 미소를 지어주었다. 석진과 수진, 우석은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우쿄는 쑥스러움에 쓸쩍 피아노 의자에서 일어나려 했다.
<오빠. 이왕에 치는 거 한곡만 더 쳐줘봐~~~♡>
이번에는 수진이 우쿄에게 연주신청을 했다. 우쿄는 당황스러웠다.
<그래 한곡만 더 쳐 봐라.>
석주를 위시해 가족들의 간청에 우쿄는 쑥스러움을 억누르고 다시 연주를 시작했다.
한국의 가족과 친구들에게라면 이정도의 서비스는 당연했다.
<그럼 이번에 한국에 오기 전에 자주 쳤던 곡이에요. >
그러면서 치기 시작한 곡은 야니의 Until The Last Moment였다.
(녀석, 사내녀석이 기왕에 좀 활달한 곡을 치면 어디가 덧나냐? )
아들의 피아노 연주솜씨에 대한 놀라움이 가라앉자 아들이 연주하고 있는 곡에 내심 이의異義를 제기하던
석주는 무심결에 우경을 흘깃보다 놀랐다.
잠시 아들의 피아노 연주를 듣고 있던 우경은 신비로우면서도 어쩐지 슬픈 곡조의 연주가 알 수 없는
아련함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남편이 그녀의 얼굴에 손을 대어 고여 있던 눈물을 닦아 줄때까지 우경은
자신이 눈물을 보였다는 걸 깨닫지 못했을 정도였다.
우쿄의 연주솜씨가 듣는 이를 감흥시킬 만큼 훌륭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음악을 연주하는 아들의 모습이
너무나 고독하고 쓸쓸하게 느껴져 어머니로서 가슴이 아프고 가엾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전부터 귀여운 아들이 재작년에 너무나 큰 시련을 겪었고 마음의 상처를 받았던 것을 생각하면 속상했던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잠시 뒤 연주가 끝났을 때 우쿄는 자신의 몸을 따듯하게 감싸는 부드러운 존재에 조금 놀랐다.
다들 멍해진 채로 바라보기만는 하는 가운데 우경은 가련한 아들을 감싸안았다.
그 광경은 모두에게 하여금 다시금 뭉클한 느낌을 받게 하였다.
<ミンヒョックグンと遊びに行くと? それではあらかじめ言っておいたらお弁當でも準備したのに......
(민혁군이랑 놀러간다고? 그럼 미리 말해두었으면 도시락이라도 준비했을 텐데......)>
저녁 식사중에 삼겹살과 소고기 등심을 가스버너에 놓인 불판에 굽던 우경은 우쿄의 말에 뭔가 준비라도
해주었으면 좋았지 않았느냐고 했다.
<先輩がおいしいこと買ってくれるとそんな必要ないそうです。
(선배가 맛있는 거 사준다고 그럴 필요 없대요. )>
우쿄는 내일 소풍가는 어린이처럼 들떠있는 표정이었다. 우석과 석진은 그런 우쿄의 모습에서 아까의 피아노
연주 포스가 실감나지 않았다.
<하긴 이제 한국생활에도 익숙해지고 했으니 그렇게 선배나 친구도 사귀어서 같이 나들이도 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야.>
그렇게 말하는 석주는 재작년에 우쿄, 우석, 수진에 석진까지 다 같이, 특히나 한국에는 온지 얼마 안?
우쿄에게 우선 서울 시내에 있는 한국의 역사유적을 견학시켜 주기 위해 시내 나들이를 하며 말미末尾에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 간 적이 있었다.
역시 빼놓을 수 없는게 애국선열들의 항일민족투쟁의 장소를 보여 주는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전시시설 중에 석주는 우쿄에게 벽에 붙은 조그마한 문을 가리키며 열어보라고 했고 우쿄는 문 안의 공간이
사람의 사후에 시신을 넣는 관棺보다 작은 데 의아했다.
<これ監獄で使ったラッカ-ですか。(이거 감옥에서 쓰던 사물함이에요?) >
<벽관壁棺이라는 거야.>
<壁棺? >
<그것도 감옥이지. >
<これがですか(이게 요)?>
석주의 말에 우쿄는 못믿겠다는 반응이었다. 어린 꼬마의 입에서 일본어가 나오자 관람객들이
-여기가 어떤 곳인데 감히 일본말을!! 하는 표정으로- 전부 흘겨보고 있었다.
실은 우석도 이해가 안갔다. 문 안의 살인적으로 협소한 공간은 당시에 중학교 3학년생이었던
우석으로서도 들어가서 몇시간 버티기도 힘들어 보였다.
<그래. 일본경찰은 그때 독립운동을 하다가 잡혀온 한국의 애국지사들을 이런 데다 며칠씩
가두어 두기도 했어. 봐라!! 이런 데서 어떻게 사람이 며칠씩 갇혀있겠냐? 그만큼 우리의 애국선열들이 말로는
아무런 표현도 못할 고초를 겪어가며 나라를 ?기 위해 애쓰셨다는 것이지.>
<진짜!! >
할아버지에게 못이 박히도록 듣던 일제의 잔학함의 일면을 확인하고 치를 떨던 우석들과는 달리 우쿄는
담담하게 그 안을 유심히 들여다 봤다. 그러고 나온 말.....
<そうしてみるから, 我が國の學校で半分ごとにこんな大きさのロッカ-があるんですよ。同じクラスの子の
中に中村という女の子がいるのに...
(그러고 보니까, 우리나라-일본-의 학교에서 반마다 이런 크기의 락커가 있거든요?같은 반 애 중에
나카무라라는 여자애가 있는데 ... )>
<근데? >
석주의 반문에 우쿄는 돌아보며 한손가락으로 뺨을 긁적였다.
<あいつはたまに勉强したくないとロッカ-中で晝寢をしていたが....(그 애는 가끔 공부하기 싫다고 락커
안에서 낮잠을 자던데....) >
한국의 애국지사들의 고통과 숭고한 희생정신이 서려있는 벽관이 졸지에 일본여고생의 땡땡이용 락커와
동급으로 격하당하는 순간이었다.
<와!! 그 애 진짜 히트다!! >
<정말 그 언니 그런데서 잠이 왔데? >
<家にあるベッドよりはできないが意外に便するよ。(집에 있는 침대보다는 못하겠지만 의외로 편하대.)>
석진과 수진은 그 광경을 상상하자 나오는 웃음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석주는 순간 속으로 이번에 학교에서 들이기로 한 락커의 발주를 취소도록 건의해야 하나
하고 고민했다.
주위의 숙연한 분위기가 무색하게 모두들 한동안 웃은 뒤 석진이 하나 생각나는게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 "나까무라"라는 여자애, 혹시 친척중에 경찰 없대냐? >
<あ. あいつお父さんが警察官ですね。 家が代代に警察だったし. そういえばお爺さんが初めてお巡査で
朝鮮で在職したと中村が言ったことがあります。 あいつも後で大學を警察學校に進學するつもりだ
というのに....(아. 그 애 아버지가 경찰관이셔, 집안이 대대로 경찰이었고. 그러고 보니 할아버지가 처음
순경으로 한국에서 재직하셨다고 나카무라가 말한 적이 있어요. 그 애도 나중에 대학은 경찰학교로
진학할거라는데....) >
그 말에 석진은 더 웃음이 터졌다.
<여.... 역시 "일본순사 나까무라"는 실존했어!!! >
석진은 너무 웃다가 -역시 실은 웃기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꾹 참고 있던-석주에게 주의를 듣고 말았다.
우쿄로서는 자기 말이 그렇게 웃긴가 싶어서 어리둥절 했다.
석주는 그때의 일이 생각나서 속으로 쓴 웃음을 지었다. 아마도 우쿄는 자기 친 아버지의 흑심(?)에 일종의
반발을 했던 게 아니었을까? -그때는 석주도 이왕에 자기 아들을 한국인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갔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생님. 무슨 재미 있는 일이라도 생각나셨나요? >
석주의 웃음에 다들 어리둥절 했다. 질문하는 석진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표정을 지으며 소주를 따라준 뒤
우석에게도 소주를 권했다.
<아, 큰아버... 아니, 선생님. 저는 아직.... >
<야. 학교에서 선생님이지, 여기서는 큰 아버지 아니냐? >
선생님이건 큰아버지건 우석은 감히 술을 받는 게 망설여졌다.
우경도 아직은 미성년자이고 심지어 자신의 제자인 조카에게 이례적으로 술을 권하는 남편을 만류했다.
<맞아요 여보. 우석이는 당신이 가르치는 학생이잖아요. >
<어허!! 원래 술은 어른한테 배우는 거야. 어른이 주는 술은 괜찮아. 그리고 우석이도 그렇게
어린 나이도 아니고 가령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이었던 두보는 수진이만 할 때 이미 술꾼이었다던데 뭐.
나도 얘들만 할 때 깡소주 두병은 한 입거리도 안됐어.하기사 사고도 많이 치고 다녔지만... >
<어머머~~~ 저런 사람이 어떻게 학교에서 애들을 가르치나 몰라~~~. >
오늘 처음 안 남편의 과거 전과(?)를 듣고 질렸다는 우경의 비꼼에 다들 웃음을 터트렸다.
결국 우석은 석주가 따라주는 술을 공손히 받은 뒤 예법대로 고개를 뒤로 돌려 마셨다.
좀 쓰긴 하지만 이미 술맛을 이해하고 있는 우석으로서는 마실만 했다.
이미 우석은 할아버지나 자기 아버지에게 술 마시는 예법을 제대로 배웠던 것이다.
<우경이 너도 마셔볼래?>
우석의 예의 바르면서도 의젓한 음주 모습을 흡족하게 바라본 석주는 자기 아들에게도
술을 권해봤다.
<き,嫌いです。(시, 싫어요!!) >
우쿄는 곧바로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우쿄로서는 사실 아직 술맛같은 것은 잘 몰랐다.
아니 이런 쓰고 맛도 없는 걸 어른들-에 일본에서 몇몇 친구들-은 왜 좋아하는지 이해가 안갔다.
-전에 신입생 환영회에서는 경황도 없었고 한국인 선배들이 교묘하게 음료수에 술을 타서 줘서
자신이 마신 게 술인지도 몰랐다.-
<녀석, 저번에는 한국 경찰 앞에서 씩씩하게 "야마토 다마시"大和魂가 어쩌구 저쩌구 하더니 고작
술 한잔에 그렇게 꼬리를 내리냐? >
우쿄는 아버지의 말에 살짝 이의를 제기하고 싶은 생각을 하면서 마지못해 받아서 우석이 하던
모습을 흉내내 한모금 마셨다, 그리고는...
<み, 水!!!!!!!!!!(무,물!!!)>
하는 소리와 함께 입을 틀어막으며 주방으로 뛰쳐들어가 물을 마셨다.
<이런이런~~~ 에라이!!! 여보!! 저 녀석, 이따가 젖 좀 더 먹여!!>
겨우 소주 한모금에 물을 찾으며 호들갑을 떠는 우쿄의 모습에 석주는-아들이 아직은 순진하다고
느껴 기특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우경은 그러게 애한테 술을 왜 먹이느냐는 듯 남편을 흘겨보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다음날 오전 9시경에 혁은 석주의 집 앞에 차를 세운 뒤 미키와 함께 대문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눌렀다.
<네, 들어오세요. >
우경은 현관문을 열어서 두 사람을 맞아주었다. 석주도 현관 앞까지 나와 있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사모님도 안녕하셨어요. >
<그래. 어서 와라. 근데 이 숙녀분은? >
혁은 석주에게 그녀를 소개시켜주었다.
<지금 우리대학 조교수인 요시노 미키양孃입니다. 제 여자친구인데, 사오토메군의 영어강의를 맡고 있는
중입니다. 미키. 이분이 아까 말한 내 은사이신 권 석주 선생님. 사오토메군의 친 아버지이셔. >
혁이 석주를 우쿄의 친 아버지라고 대놓고 소개하자 석주와 우경은 적잖이 당황했다.
<아, 안녕하세요?>
<예. 반갑습니다. 근데………민혁아 이거...>
<이미 사오토메군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
석주의 집에 처음 와 보는 미키는 전부터 우쿄의 가정사는 처음에 우쿄에게, 다음에 혁에게 들어서
알 수 있었다. 참 이례적인 일임에 틀림 없다. 다른 사람에게는 고집스럽게 자신의 신변 얘기를 전혀
안했던 우쿄였다.
아마 미키는 -나이상 고등학생이었을 우쿄의 감각으로는- 지금 자신을 가르치는 선생이고 무엇보다
혁과 함께 신뢰할 수 있는 사람으로 여겨서일 것이다.
실제로 남의 비밀을 아무렇지 않게 떠벌리는 것과는 전혀 무관한 미키는 소년이 처한 상황을 십분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역시 원래 사용하는 언어나 외모, 습성, 사고방식등 모든 면에서 일본인이지만 국적상
한국인이고 그런 사정을 숨겨야 할 때가 있었던 그녀 자신의 입장과 겹치는 면이 많아서일 것이다.
요컨대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 할지.....
<어, 그렇군요... 근데 조교수님의 성함이.... 일본인이십니까? >
<저는 재일 한국인이에요. >
<아 그렇군요….. >
어느정도 안도한 석주로서는 거의 조카딸 정도의 나이인 미키의 미모가 별로 흥미를 끌지 못했-다면 당연히
남자로서 거짓말이겠-지만 진작에 재일한국인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어서 그녀가 재일동포 출신이라는
사실에 약간 흥미가 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석주는 우쿄의 학교 선생을 자신의 의녀義女이기도 한 미즈호를 제외하고 처음 대면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우쿄가 유독 자신을 맡고 있는 교수나 강사가 어떤 사람인지 말한 것은 극히 단편적-미인이고
상당히 학생들을 잘 가르치는 조교수라는 정도-이었다.
그 뒤에 혁은 우경을 소개하면서 약간 딜레머에 빠졌다.
<그리고 여기 이분은 선생님의 사모님이시고 사오토메군의 친어머니이신.......그러니까 ...... >
<實の母で末っ子叔母である早乙女宇京です。 韓國名前は "權宇京"です。
(친엄마이고 막내이모인 "사오토메 우쿄"입니다. 한국이름은 "권 우경"이고요.)>
약간 애매한 표정을 보이는 혁을 대신해 우경이 나서서 자기 소개를 했다.
미키는 자신의 애제자와 똑같은 이름의 친엄마의 존재에 다른 의미로 곤혹스러운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그 모습에 우경은 불쾌하기는 커녕 그녀가 귀엽게 느껴졌다. 우경은 자기보다 10살 연하일 미키가 왠지 마음에
들었다.
<こんにちは。 はじめまして。(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
<いらっしゃいませと。どころで私の息子と名前が同じでちょっと變でしょう。(어서오세요. 근데 제 아들하고
이름이 같아서 좀 이상하죠?) >
<いいえ。そのように見えたら申し譯ありません。(아니에요. 그렇게 보였다면 죄송합니다.) >
<そうじゃありません。(그렇지 않아요.) >
미키는 -실은 혁에게 사모님이 나이보다 한참 젊어보여서 얼핏 미키랑 같은 나이쯤으로 보일 거라고 미리
듣기는 했지만 그때는 농담이거나 자기를 놀리는 거라고 생각해서 막상 우경의 모습에 놀라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성함까지는 전해듣지 못했으므로 적잖이 당황하기도 했고- 우경이 겉보기에는 자기와 나이가 거의
같아보이는 무척 젊어보이는 모습과는 달리 큰 언니같은 인자한 모습을 보이자 푸근함과 편안함을 느꼈다.
<아참, 이거 손님들을 너무 현관에 세워둔 거 아냐? 잠깐 올라와서 차라도.....>
그 순간 가벼운 외출복 차림의 우쿄가 밑으로 내려오며 반갑게 인사했다.
<先パイ, 先生, 遲れてすみません。(선배님. 선생님. 늦어서 미안합니다.)>
혁은 한 손은 바짓 주머니에 쑤셔넣고 한손을 들어서 쾌활하게 미소를 지어주었다.
우쿄가 혁들에게 다가가 운동화를 신고 나서 혁은 우쿄의 어께를 다정하게 감싸며 석주에게
인사했다.
<그럼, 오늘 하루만 아드님을 빌리겠습니다. >
<그래 잘 부탁해. 선배님하고 조교수님한테 너무 버릇 없이 굴지 말거라. >
<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
<はい?>
운동장의 한켠의 벤취에서 남학생들의 축구운동을 건성으로 관람하며 생각에 잠겨있던
우쿄는 갑작스럽게 눈앞에 발랄한 웃음을 한 가득 머금은 채로 예쁜 얼굴을 들이미는
누나의 모습에 화들짝 놀랐다.
우쿄는 미나때문에 놀라서 벤치 뒤로 넘어갈 뻔 했다가 그녀들 중에 한명 덕분에
꼴사납게 뒤로 넘어지는 걸 모면謀免했다.
소현의 친구인 미나와 그외 3명 정도의 어여쁜 아가씨들이 소년을 마치 조그마한 강아지를 보는 것
같은 눈길로 바라보면서 곁에 앉았다.
근처에서 자기 팀을 열심히 응원하고 있던 남학생들은 소년을 주위로 꽃밭이 펼쳐지자
내심 질투의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케타로짱, 우리 소현이를 악당의 마수에서 구해줬다며? >
그저께 저녁의 일이 미나에게서 나오자 우쿄는 얼굴이 확 달아오름을 느꼈다.
마침 소현도 같이 귀가하기 위해 미나들과 약속대로 벤치근처로 다가오고 있었다.
<お姉ちゃん!! 창피하게 一昨日仕事(그저께 일)을 얘기 하면 어떡해요? >
우쿄는 소현을 보자 얼굴이 빨개진 채로 불평했다.
<미안~~~~♡>
<근데 케타로짱은 정말 용감하구나? >
<저도 실은 あの時 すごく(그 때 엄청) 무서웠어요. >
우쿄는 약간 투정을 부리듯 했다.
<어머!! 정말? 그랬구나?>
<다른 애들 같으면 막 자랑하고 다닐 텐데 케타로짱은 겸손하네? >
<그렇게 부끄러워 할 일이 아니잖아? 오히려 자랑스러운 일일 텐데...... >
<でもただ阻んでばかりしたんで, それで通り魔と取り組んで争ったのでもなく.....
(하지만 그저 막기만 했던 거고, 그렇다고 토오리마하고 맞붙어 싸운 것도 아니고.....)>
우쿄는 고개를 약간 숙이고 말꼬리가 흐려졌다.
아가씨들은 소년이 부끄러워 하는 게 보이자 꺄르르하고 웃었다.
우쿄의 이럴 경우 웬만한 남자라면 여자들에게 강하게 어필하기 위해 떨 것 같은 허풍이나
허세虛勢라고는 0.00001%도 들어가지 않은 솔직한 말에 여학생들은 오히려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아참, 케타로짱은 혹시 음악 좋아하니? >
<音? 좋아는 해요. 피아노나 기타도 조금은 할 줄 알고...... >
<장르는 어떤 걸 좋아해? . 힙합? 댄스? 요즘 애들 그런 거 좋아하던데......>
<....... 뉴 에이지.....야니라든가..아. 클래식이나 우리나라-일본- 전통 음악도.... >
그 말에 미나들은 반가워하는 표정을 보였다.
<어머~~~ 잘됐다!! 그럼 우리 음악 동아리에 안 들어올래? >
그 말에 우쿄는 약간 멍한 표정이 되었다.
<...... 저 같은 외국인도 받아주나요? >
<어머머? 음악을 좋아하는 데 한국인이면 어떻고 외국인이면 어떻니? >
<それじゃ..... 良いですよ。(그러면..... 좋아요.) >
승락을 하는 우쿄의 말에 다들 은근히 좋아하는 표정을 보였다. 그러다 미나와 소현은 생각난 듯 물었다.
<근데 너랑 같이 다니는 한국인 학생 있잖아. 남궁.... >
<아. 석진형요 ? >
<응 맞아. 석진군은 어디 동아리 들은 데 있니? >
<그 형은 축구 동아리에 들었어요. 저기서 뛰고 있네요. >
마침 석진이 상대편 선수의 골을 뺏어서 골문으로 질주했다.
실제로 석진은 입학하기 무섭게 학교의 축구 동아리로 들어가 곧바로 에이스가 되었다.
작년의 한일 월드컵의 여파 때문인지 축구가 인기라는 것이다.
우쿄는 애초에 스포츠에 전연 관심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신경 쓸 여력도 없었고 반한反韓감정의
정도가 여전히 극에 달했던 때여서 나중에 일본이 8강에서 떨어진 것과는 대조적으로
한국이 8강에 진출했다는 얘기만 듣고 심술이 나서 속으로 왕창 져버려서 망신이나 실컷 당하라며
저주를 퍼붓고 아예 신경을 껐었는데 나중에 들으니 결국 4강에 진출했다 길래 잔뜩 약이 올랐었다.
그러다 막상 4위에서 그쳤을 때는 겉으로는 노골적으로 고소해 하면서도 내심 섭섭했지만……
<그럼 오늘은 우리 동아리 활동이 없으니까 내일 강의 스케줄이 끝나면 동아리 방으로 와. 음악과
교실이 그대로 동아리 방으로 쓰이니까 그리로 오면 돼. >
<네, 그럴게요. >
그렇게 약속을 하고 같이 가자는 누나들의 제안을 사양하고 먼저 보낸 우쿄는 석진이 쐐기골을
상대편의 골문에 힘차게 차 넣는 것을 끝으로 경기가 끝나는 것을 보고 벤치에서 일어섰다.
혁은 요즘 다른 일 때문에 바쁜 듯 했다. 좀 아쉽다 싶으면서도 오히려 다행이지 싶다.
토요일 밤에 혁을 오나펫으로 삼은 것을 생각하면 혁에게 도저히 얼굴을 들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게 너는 그 때 뭣하면 이 형님을 부르던가 하지. 괜히 나서서 사서 고생이니? >
<그럴 시간적 여유도 없었고...... 分かる人人だから(아는 사람들이니까......) >
토요일 밤의 일을 나중에 수진에게 들은 석진은 기꺼이 우쿄의 백기사白騎士역할을 자청하면서 약간의
잔소리를 했다. 한동안 우쿄는 특히 하교下校시간을 조심하기로 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악한에게
협박까지 받았으니 어쩔 수 없었다. 다행히 경찰관들이 눈에 띄게 많이 보여서 좀 안심이 되기는 했지만
좋은 일, 아니 당연한 일을 하고도 떨어야 한다는 게 좀 속상했다.
<그래도 너같은 비실이한테는 너무 무모했어. 내가 너라면 그냥 36계 줄행랑 이었을 걸? >
<兄さんだったら?(형이었다면?) >
우쿄의 약간 반발섞인 질문에 석진은 가슴에 힘을 주고 뻐기듯 말했다.
<그 자리에 내가 있었으면 당연히 그 또라이 새끼, 나한테 봉알이 깨졌지~~~ >
우쿄는 석진의 말에 질렸다는 표정이 지었다.
<형이 무슨 하나무라 만게츠야? >
<하나.... 뭐? 아. 일본의 유명한 소설가. 나도 그 아저씨 소설은 읽어봤지. 그러고 보니 그 쌍라이트
아저씨는 소설 두 편-게르마늄의 밤, 울鬱-에서 한명은 꼭 내시內侍를 만들더라...... >
개그스럽게 말하던 석진은 순간 움찔해졌다.
<하긴 남자로서는 끔찍한 일이지....... 무엇보다 너는 사실 싸움 같은 거 하고는 전혀 안 어울려.>
<형이 볼 때 내가 어떨지는 몰라도 이래뵈도 나도 남자니까, 특히나 일본남자로써 싸워야 할때는 싸워야
한다고 나 자신에게 다짐할때가 있어. >
우쿄의 말에 석진은 잠시 생각하다가 뭔가 섬뜩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카미가제神風라도 될 참이냐? >
<そうじゃなく!!!(그게 아니라!!!)>
석진의 장난스런 반문에 우쿄는 어째 말이 그 쪽으로 흐르냐는 표정을 지었다.
재작년에 우쿄가 깨달은 것 중에 하나는 자신의 것-그저 물질적인 것이 아닌 소신所信이나
절개節槪 같은 정신적인 가치, 자신 본연의 모습-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댓가를 치룰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게 이익이든 손해이든, 심지어 목숨을 담보로 하는 것이든.......
이건 아주 소소한 것에 속할 것이었다. 하긴 남에게 자신의 가치를 남에게 강요하면고 그것에 대항하면서
서로 싸우고 반목해야만 하는 현실이 서글프기 이를데 없지만............
<짜~~~식!! 이제보니 멋진 구석이 있구나?!!! >
석진은 우쿄의 감상에 거칠게 껴안으며 짓궂게 우쿄의 생머리카락을 흐트렸다.
<형아~~~!!! >
우주가 우쿄를 보자마자 방긋 웃으며 우쿄에게 달려왔다. 우경은 재판등으로 집을 비워야 할 때
어쩔 수 없이 근처의 어린이 집에 맡겨야 했다. 우주가 태어나면서부터 우경은 잠시 변호사 일을
중단했다가 최근에 다시 일을 시작하면서 우주의 탁아문제로 고민을 해야 했었다.
무엇보다 결혼하고 한국으로 오면서 우쿄를 일본에 놓아두고 온 것 때문에라도 우주를 엄마 곁에
떼어놓는 게 영 꺼림직 했다. 우주가 중학교에 진학할 때까지만이라도 일을 더 쉴까 했을 정도였다.
우경이 자기 일생에 첫번째 사무소를 이런저런 불이익을 감수하고 굳이 자택에 차렸던 것도 이런 고민 탓이었다. 굳이 따로 사무실을 얻어 차릴 필요가 없었던것은 처음 일 할 때에 쌓아둔 명성도 있었고 그러면서도
일처리는 확실하니까 제법 고객줄이 끊기지 않았던 덕분이다.
오히려 가정집에 변호사 사무실을 차리고 평범한 가정주부의 모습으로 고객을 대한다는 게 의뢰인들에게
편안한 느낌을 줘서 참신하게 어필된 듯 했다.
그녀는 주 고객을 한국에 주재하는 일본인이나 자신처럼 한국남자와 결혼했다가 법률적인 보호가 필요해진
외국인 처들로 삼았다. 석주는 신혼 초에 마산에서 아내가 변호사 사무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자신의
재능을 살리고 싶어하는 걸 -시댁 부모들의 눈치때문에 가능한 가사에 더 충실한다는 조건을 달긴 했지만-
굳이 막지 않고 지지해 주었다.
그로서는 원래 돈을 버는 일은 남자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고 무엇보다 자신때문에 -당시에 고국인
일본보다 후진국이었던- 한국까지 와서 여러가지로 고생을 하는 아내를 험한 세상에 내보내 돈까지 벌게
하는 것만은 절대 시키고 싶지 않았지만 이왕에 우경이 자신의 재주를 살릴 바에는 좋은 일에 쓰기를 바랬고
그래서 우경은 돈벌이에 구애받지 않고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일이 잘 풀리려는지 가사를 돌보면서
차근차근 준비한 뒤 대략 2번의 응시끝에 사법시험을 패스했던 우경이 사법 연수원에서 연수받을 때는 그
몇년 전에 요행히 석주도 그 근방인 일산의 고등학교로 전직轉職되어 살림집을 차릴 수 있게 되어서
두 부부가 따로 떨어져 주말부부가 되는 불상사는 피할 수 있었지만......
<재미있게 놀았어? >
<응 !!>
우주는 우쿄의 손에 이끌려 집으로 가면서 우쿄와 정답게 얘기했다.
석진은 오랜기간 떨어져 살아서 낮이 익지 않을 동생을 다정하게 대하는 우쿄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석진의 대략 3살 위의 형은 형이라고 거들먹거리며 늘 보는 동생을 툭하면 두들겨 패고 무슨 머슴
다루듯 하기 일쑤였고 -툭하면 형이면 다냐고 대들고 약올리고 까부는 게 일이었던 석진도 할 말은 없지만...
- 석진의 친구들 중에 형제들이 있는 경우 대개 그런 상황이었다.
휴대전화가 울려서 받아보니 우경이었다.
<もし家に行く中なの?(혹시 집에 가는 중이니?) >
< ん. 母さん. >
<それではちょっとすみませんが行く道に宇柱ちゃんを託兒所で送ってくれることができる?
(그럼 좀 미안하지만 우주를 -어린이 집에서 -집으로 데려다 줄 수 있지?) >
우쿄는 대답대신에 우주의 앞에 조그리고 앉아서 전화기를 우주의 귀로 갖다 대 주었다.
우주는 바로 엄마라는 걸 알아챘다.
<엄마~~~♡>
우주는 엄마와 다정스럽게 얘기한 뒤 우쿄에게 다시 전화를 돌려줬다.
<ありがとう,京太郞ちゃん。(고마워, 케타로짱.)>
<いいえ. 當たり前のことなのにです。(아니에요. 당연한 일인데요, 뭐.)>
<それでも, .... では日暮れ早く行く。(그래도, ....그럼, 저녁때 일찍 갈게.)>
<はい.>
전화를 끊고 나자 우주가 우쿄에게 귀엽게 물었다.
<형아, 엄마 언제 와? >
<응, 일찍 오신대. >
<근데.... 형아 엄마랑 무슨 말을 하는 거야? >
<응? 무슨 말? >
<형아랑, 누나랑 엄마랑 이상한 말을 해서 못알아듣겠어... >
우주는 호기심이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광경을 옆에서 지켜보던 석진이 끼어들었다.
<하이, 그것이노 일본말이므니다~~~ >
우쿄는 석진의 개그가 약간 이상하다고 느꼈다.
<형은 그거 무슨 말이야? >
<일본말이노 해 봤스므니다~~~ 한국식으로~~~ >
<それが何の日本語なのよ?(그게 무슨 일본말이야?)>
석진의 방정맞고도 익살스런 일본어 흉내에 우쿄는 눈살을 찌푸렸다.
우주는 여전히 고개를 갸우뚱 했다.
<형아, 왜 일본말을 해? >
<아... 그게.... >
우쿄는 약간 당혹스러웠다.
우쿄는 우주에게는 가능한 한국어로 얘기하고 있다. 자신의 친동생이지만 국적상 한국인인 우주는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아무 방해 받지 않고 확립하게 해줘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우쿄는 자기 동생이 자신과 똑같은 뼈아픈 상처를 받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비록 오빠와 대화를 일본어로 하기를 즐기는 수진에게도 그것은 같은 심정이었다.
그리고 나중에 무척 어린 동생에게 일본어로 대화하는 엄마나 형, 누나가, 그리고 자신에게도 반을
형성하고 있는 일본인의 혈통이 어떻게 받아들여질까 좀 걱정스러웠다.
우쿄 자신도 자기의 피의 반이 한국인의 것임을 알았을때의 충격은 이만저만한 게 아니었다.
더욱이 우주도 지금 알게 모르게 이런 저런 반일反日감정의 영향을 받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미 우주 나이에 읽는 동화에도 일본사람들이 -왜구라든가 일제시대 일본경찰같은 모습으로으로-아주
나쁘게 나오는 내용이 있는 것을 우연히 본적이 있던 참이었다.
실제로 며칠 전에 우쿄는 우석의 집에 갔다가 나오는 길에 괜히 옆의 어린애들에게 말을 걸었다가
약간 속상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그 꼬마들이 아직 한국어가 서툰 우쿄를 외면하더니 이렇게 쑤군댔던 것이다.
<저 언니. 일본사람인가봐, 나쁜 사람이지? >
우쿄는 잠시 머뭇거리다 그냥 얼버부렸다.
<......나중에 가르쳐 줄게. >
다음날 강의 스케줄을 마친 우쿄는 조금은 머뭇거리면서 음악과 교실로 들어섰다.
<어서와, 케타로짱. >
<ご....今日は。>
소현과 미나가 빼꼼히 문으로 고개를 내미는 우쿄를 반갑게 맞이하며 교실 안으로 이끌었다.
우쿄는 좀 창피해 하며 교실로 들어섰다.
우쿄가 들어서자 대략 10명 남짓이 있던 동아리 방은 회색 후드티와 청바지로 지나치게 가녀린
몸을 감싸고 있는 어린 소년에게 온 시선이 집중되었고 이내 여학생들은 우쿄를 에워쌌다.
<어머머. 요 꼬마는 뭐야? >
<설마 초딩은 아니겠지? >
이럴 때 우쿄가 적잖이 당황해 한다는 걸 알고 있는 미나는 우쿄와 여학생들을 떼어놓고 인사를 시켰다.
<자자~~다들 무슨 동물원에 원숭이 구경 났니? 여기는 이번에 우리 동아리에 새로 들어온 사오토메
우쿄군이야. 이름 정도는 들어 봤겠지? >
미나의 아무생각 없는 발언에 우쿄는 한달 여 전에 유진이 자신에게 했던 모욕이 다시 떠올라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어머!! 정말이에요? >
<거짓말~~~~!! >
정말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우쿄를 살펴보는 그녀들을 다시 진정시킨 미나는 우쿄에게 자기 소개를
시켰다.
<あの...... 여기 미나 선배님이 말씀하신 대로 저는 일본의 도쿄대에서 지금 OO대 한국사에 편입중인
사오토메 우쿄라고 합니다. 잘 부탁 드리겠습니다. >
의외로 제법 한국어를 정확한 발음으로 말하고 있었다.
우쿄가 다소 긴장하면서 하는 자기소개에 여학생들은 키득대고 있었고 두어 명 끼어있던 남학생들은
다소 냉정한 시선으로 우쿄를 응시하고 있었다.
<............ 다룰 줄 아는 악기 있나? >
<はい!! 피아노하고..... 기타를 좀..... >
그중에 한 학생이 내던지듯 묻자 우쿄는 좀 주눅이 든 표정으로 더듬더듬 대답했다.
<그럼 한번 해 볼래? >
우쿄의 대답에 여학생들은 우쿄를 피아노로 인도하면서 연주를 종용했다.
남학생들이 옆에서 우쿄를 조롱하듯 수군댔다.
<못해도 "학교종이 땡땡땡" 정도는 치겠지? >
<뭐 "나비야 나비야"는 치지 않겠냐. 크크크~~>
여학생들이 그 남학생들을 흘겨보는 가운데 우쿄가 더 위축이 되어서 좀 자신없어하는 표정으로 피아노
의자에 앉자 미나와 소현이 옆에서 다독였다.
<그냥 평소에 자신이 있을만큼만 치면 돼. >
<맞아. 여기는 음악을 배우면서 취미를 붙일 수 있게 하기 위해 만든 동아리니까. 천천히 배워나가면 될거야. >
두 누나들의 말에 우쿄는 약간 안심이 되었고 심호흡을 한 뒤 천천히 건반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막상 우쿄가 건반을 두들기기 시작하자 모두들, 우쿄를 조롱하던 남학생들은 말할 것도 없고
미나와 소현도 흠칫 놀라기 시작했다.
<이거...Liz Story의 Greensleeves아냐? >
<그러게?!! 저 곡은 나도 완벽하게는 치기 어려운 곡인데.....>
실제로 우쿄의 피아노 연주솜씨나 테크닉이 얼핏 들어도 보통의 수준이 아니라는 느낌이었다.
처음에 자신없어하면서 시작한 연주는 마음이 평정되기 시작하며 자신감이 생기자 활기를 더했다.
피아노의 신비로운 선율은 교실 안의 학생들을 그자리에서 굳게 만들었다.
마치 차갑고도 신비로운 기운으로 가득찬 숲속의 한가운데에 놓인 몽환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다.
이윽고 소년의 가는 손가락이 건반위에서의 유희遊戱를 멈추었을 때 다들 멍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고
엉겹결에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우쿄는 다시금 얼굴이 빨개졌다.
몸만 움직여서 몸만 때우는 노동動만이 노동이 아니다.
글을 쓰는 일도 상당한 육체적, 정신적 에너지가 필요한 중노동임에 틀림없다.
집에 들어서고 세면을 마치자 책상에 앉아 작업을 시작한 혁은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게 작업을
시작하자 눈에 피로를 느끼기 시작했다.일단 원서를 읽는 것 자체는 혁의 어학수준으로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특히 영어는 그에게는 이해도解度가 국어인 한국어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걸 종이에 옮겨 적는 것은 별 문제이다.
섣부른 지식으로 잘못 번역해서 원작자의 의도를 왜곡할 수도 있거나 전혀 다른 글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신중해야 한다. 번역일은 그저 돈을 버는 도구이기 전에 자신을 위한 학습이기도 했다.
어학실력도 높일 수 있고 그외 여러가지 다방면의 지식도 쌓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작업은 상당히 순조롭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아마 주말 쯤, 미키나 우쿄등과 여의도에
소풍을 가기로 한 일요일 전엔 작업을 마치고 원고를 넘길 수 있을 것이었다.
손가락을 깍지 끼고 뒤로 젖혀 약간 경직된 온 몸의 근육을 약간 이완시키고 난 순간 책상의
유리 판 밑에 우표만한 크기의 스티커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그 사진은 한 가운데 손가락으로
V자를 그리며 천진한 미소를 짓고 있는 우쿄의 뒤에서 혁과 미키가 끼어들어 찍은 사진이다.
그 때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소년이 혁과 미키에게 처음 당한 굴욕(?)이었기 때문이다.
학교 근처의 편의점에는 최근에 들여놓은 즉석 스티커 사진기가 있었는데 지금은 여학생들에게
인기만점이지만 3주전까지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아서인지 사용하는 사람이 뜸했었다.
<あら(어머), 쟤, 사오토메군 아냐? >
미키와 함께 학교를 나와 길을 걷던 혁은 미키의 말에 사진기 앞에서 근방을 경계하는
소년을 볼 수 있었다. 우연찮게도 혁과 미키는 우쿄의 시야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근방에 아무도 없다고 확인하고 안심한 우쿄는 냉큼 사진기 장막 안으로 들어갔다.
장난기가 발동한 미키가 혁을 잡아끌고 마치 도둑고양이처럼 살며시 다가갔다. 둘이 아주 교묘하게
장막 안으로 끼어들었을 때는 플레임을 세팅한 뒤 촬영버튼을 누른 직후였다.
옆에 누가 있는지조차 모른 채 우쿄는 아주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포즈를 취하고 있었고 미키는
장난스럽게 아주 섹시한 포즈를 취했다. 혁은 엉거주춤 서 있을 따름이었다.
잠시후 플래시가 터진 뒤에 미키가 우쿄의 귓가에서 소곤댔다.
< ほら, 男ひとりこのようなこと取るのではないの。 陰気に見えるんだよ。
(얘, 남자애 혼자 이런 거 찍는 거 아냐. 음침해 보여~~~♡)>
그 순간 소년의 표정에서 핏기가 싹 가시더니 그제야 뒤의 둘의 존재를 알아채고 혼비백산했다.
혁은 그 코믹한 상황에 그 자리에서 배꼽이 빠지게 웃고 말았다.
< な, 何ですか, お二人とも!! 私の趣味をちゃにするといらっしゃったんですか?!!!
(뭐, 뭐예요, 두분!! 제 취미를 놀리시려고 오신 거예요?!!!)>
<ちゃにするとは.....違うよ。(놀리기는...... 아냐.) >
그 와중에 웃음을 겨우 수습한 혁의 시야에 한켠에 놓인 수첩 하나가 들어왔다.
<뭐냐. 이거? >
<わっ!! 見ないでください!!!(으악!! 보지 마세요!! )>
무슨 나쁜 짓을 하다 들키거나 하다못해 숨겨둔 도색잡지라도 들킨 듯 아주 비명을 지르는 우쿄를
뒤로 하고는 그 수첩을 펼쳐든 혁으로서는 아연실색한 뒤 나중에는 실소失笑를 금할 수 없었다.
죄다 혼자 찍은 스티커 사진만 잔뜩 붙어 있었던 것이다.
<진짜 여자친구 같은 걸 만든 적이 없다는 게 사실인가 보구나? >
혁은 수첩을 펼쳐보면서 우쿄에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소년의 울상 반 원망 반 섞인 표정이 귀엽다. 혁과 미키는 우쿄의 일면중에 하나를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일본에서 주치의가 권고해 정신과 치료목적으로 시작했던 건데 점차 재미를 들였다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앞의 사진에서는 경직된 채로 계속 어둡고 우울한 표정 뿐이었던 사진은 뒤로 갈 수록 밝아지는
느낌이더니 나중에 어느정도 어린 소년 특유의 장난기와 발랄함이 느껴지는 사진이 많아지고 있었다.
무책임한 어른들의 완악頑惡한 독선이 웃음도 잃어버리게 할만큼 소년의 마음을 멍들게 만들었고 좀 이상한
취미를 들이긴 했지만 이를 극복하려고 노력했다고 생각하자 대견함과 가련함이 동시에 들었다.
미키와 혁은 우쿄에게 비밀은 지켜줄테니 열심히 해보라고 격려를 해주었고, 그 뒤로 우쿄는 두 사람을 더
믿고 따르게 되었다. 우쿄로서는 이 사건을 계기로 오히려 두사람, 특히 혁에게는 더더욱 마음을 열게 된 것
같았다. 그 때의 이 사진은 우쿄로서는 스티커 사진 중에서는 처음으로 다른사람과 찍어본 사진이었다는
것이다.
미소를 지으며 불과 3주전의 추억에 젖어있던 혁은 도어폰이 울리자 책상에서 일어나 방문자를 확인했다.
<민혁씨, 저녁 아직이지? >
착 달라붙는 청바지와 앞의 단추를 풀어 골이 깊은 가슴 계곡을 살짝 드러낸 하얀색 불라우스의 몸매를 마의로
감싼 미키의 손에 시장을 봐온 저녁거리들이 든 비닐 봉지가 들려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일에 빠져서 식사도
잊은 채였다.
미키도 요리할 때만큼은 확실히 여자였다. 에이프런을 두르고 요리를 하는 뒷모습도 충분히 매력적이었고
그녀가 만든 일본식 가정요리도 언제 배웠는지 솜씨가 훌륭했다.
<요 근래 이렇게 맛있는 요리는 처음 먹어본 거 같애. >
<本當? 다행이다♡ >
미키의 도미매운탕 솜씨를 칭찬하자 미키는 그녀답지 않게 수줍어 하면서 뿌듯해 했다.
혁은 이런 단란한 분위기도 좋다고 느꼈다. 이런 행복감에 가정을 꾸리는구나 싶었다.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등의 뒷처리도 같이 한 뒤 혁은 미키에게 양해를 얻어 다시 작업을 재개했고 미키는
원서原書 의 여분권을 들어서 읽어보고는 금새 빠져들었다.
내용이 내용이라 좀 민망했는데 미키에게서 나온 탄성이 혁을 아연하게 만들었다.
< あら, この本面白いね。(어머, 이 책 재미있네. >
<그게 재미있어? 이 책 아주 사람 이상하게 만드는 거구만...... >
<どこがどうで?(어디가 어때서?) >
<성 풍속사라더니 어떻게 된 게 죄다 호모, 게이, 이반異般 얘기 뿐이야. >
혁의 투덜거림에 미키는 쾌활하게 웃었다. 혁이 내심 남성간의 동성애에 대해
그리 않좋은 시각을 갖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던 탓이다.
<푸하하하하~~~~ 하긴 민혁씨한테는 좀 이상하기는 했겠다.... >
<사실이잖아, 비정상인 건. 상식적으로 동성애라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이야? >
혁은 당연한 거 아닌가 하는 태도였다.
미키는 늘 완전무결한 남자라고 느꼈던 혁의 순진하다 싶은 고지식함이 귀엽게 느껴졌다.
<정상, 비정상. 그런 기준이 어딧어? 그냥 즐거우면 되는 것이지. 성생활이라는 게 단순히
생산수단인 것이고 그 외에는 비도덕적인 것이라는 도덕론에 매달려 살아야 하는 것만도 아니고,
아니한 말로 지금껏 민혁씨와 내가 즐겁게 엔조이 하기 위해 섹스를 한 거지, 애 낳고
결혼하자고 한 것도 아니잖아? >
미키는 늘 솔직하고 직설적이었다. 그런 성격은 섹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 글쎄...... >
미키의 말에 혁은 당황하면서 고개를 갸우둥하고 있었다.
사실 틀린 얘기는 아니라는 느낌이었다. 아니면 이번 작업이 자신의 생각을 교묘하게
틀어놓았든가......
<그리고 말은 동성애 같은 건 비정상이네 어쩌네 해도 남자들, 여자끼리의 레즈를 소재로 한 포르노
물을 꽤 좋아하던 것 같던데? >
<그건.....사실 그럴지도 모르지...... >
확실히 남자들이라는 게 이율배반적이게도 같은 동성애라도 호모섹스는 혐오하고 경멸해도 레즈비언에게는
색다른 색욕을 느끼는 것 같다.
언젠가 혁도 영진과 같이 레즈비언을 묘사한 포르노를 본적이 있는데 말로는 영진에게 "뭐, 이런 걸 보냐?"
하고 타박은 하면서 내심 꽤 흥분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여자도 좀 그런 게 있는 것 같아. 가령 요즘 여자애들 중에 “야오이”물이라는데
재미를 붙이는 애들이 있거든. >
<야오,,,,,,,, 도대체 그게 뭐야? >
<뭐 남자들끼리의 연애 담이라고나 할지…. >
혁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연애담? 남자끼리? >
< 순전히 호모섹스를 다룬 게 아니라 그냥 남녀간의 연애 물을 남자끼리로 바꿨다는 것이지. >
<하긴 . 근데 시커먼 사내녀석들끼리 그러는 게 그렇게 재미있겠어? 구역질이나 안 나오면
다행이겠다. >
<거긴 최소한 울끈불끈한 근육질의 괴물은 안 나와. 여자애들이 보는 거니까
당연하지만 대개 단정한 미남자와 귀여운 소년이 주인공이지. >
혁은 순간적으로 우쿄를 떠올렸다가 뜨끔했다.
<시답잖은!!!.................. 미키씨도 그런 걸 봐? >
<아 어쩌다 몇 번…… 본적이 있어. 꽤 재미있길래……어머, 나 만화나 애니메이션 무척 좋아해. 몰랐어?>
<옛날에 그런 줄은 알고 있지만. 지금 미키씨는 조교수야. 아직도 만화 같은 걸.......>
<어머. 문화콘텐츠를 즐기는 데 학력은 중요하지 않아. 그건 그렇고, 민혁씨도 다음에 한번 볼래?>
<뭘? >
<や.お.い.>
미키의 표정에 장난기가 가득했다.
<......돼, 됐어!! >
혁은 호기심에 잠시 마음이 동했다가 화들짝 놀라서 거절하고는 다시 책과 노트북 컴퓨터로 시선을 돌렸다.
혁의 반응에 미키는 자신의 늘 평소에는 남자답고 늠름한 남친이 오늘따라 귀엽게 느껴졌다.
일주일은 훌쩍 지나갔다. 다행히 우쿄는 이번에 든 동아리 활동때문에 귀가시간이 좀 늦어지긴 했지만 별
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그 치한도 그날 이후에 잠잠했다.
금요일에 혁은 작업을 완결지었고 다음날인 토요일 오후에 다른 작업을 맡아서 완성을 지은 석현과 같이
출판사로 가기로 하고 학교 교정에서 만났다.
<오느라 수고했어. 근데 일단 집에 들러야 돼. >
<아니, 왜? >
<원고하고 파일 시디를 집에 두고 왔거든. >
<이런~~~ 귀찮게.>
<밥줄이 걸린 중요한 거니 함부로 들고 나다닐 수는 없는 거 아니냐? >
말은 그렇게 하지만 기실 혁은 무언가를 잃어버린다거나 하는 칠칠맞음과는 무관했다.
교정의 한켠의 벚나무는 제법 소담스럽게 떤?이 피어나고 있었다.
다른 학생들이 귀가하기 위해 교문으로 걸음을 재촉하는 와중에 서서 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소년이
두 청년의 눈에 띄었다.
<사오토메군. >
우쿄는 자신을 부르는 친숙한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고 혁과 함께 석현이 우쿄에게 다가가면서 반갑다는
표정으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우쿄는 곧바로 그 쪽으로 몸을 돌려서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안... 뇽하세요.>
아뿔싸!! "어" 발음을 "오 オ"로 발음하고 말았다. 일본에서 재일한국인 친구에게 한국어를
배우면서 일본인이나 재일한국인들이 상습적으로 저지르는 실수를 우쿄도 그냥 같이 배운 건데 주의를
한다고 했긴 했지만 솔직히 일본인으로서는 발음이 좀 어렵다보니 가끔 이런 실수를 하기가 일쑤라
한국에서는 남학생들한테 "역시 쪽발이들은 혀가 짧아"라는 조롱을 듣기가 일쑤였다.
요즘은 그럭저럭 잘해와서 마음을 놓았었는데.......얼굴이 빨개져서 민망해 하는 소년에게
두 청년은 웃으면서 괜찮다는 듯 손짓을 했다.
두 청년에게는 소년의 실수가 오히려 사랑스러웠다.
<ひさしぶりだね。 うまく行ったの?(오래간만이구나. 잘 지냈니?) >
<はい。 >
석현은 우쿄에게 상당히 친밀하고도 상냥하게 말을 걸었다. 우쿄는 별 경계하는 기색 없이
석현을 대했다. 처음에 혁과 함께 자신을 바래다 준 것뒤로 간간이 보기 때문에 신뢰할 만 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혁은 석현이 우쿄에게 아주 친밀하게 대하자 살짝 질투심을 느끼고 짐짓 끼어들었다.
<"케타로".내일 여의도로 떤? 구경하기로 약속한 거 기억하지? 아침 9시쯤 데리러 갈게. >
혁은 우쿄의 애칭인 "케타로"라는 이름을 은연중에 강조했다. 혁도 전부터 우쿄에게 이름이나 "케타로"
"케이"같은 애칭으로 부르기는 하지만 아직도 "사오토메군"이라는 존칭이 익숙했던 참이었다.
은사인 석주가 아들에게 부르는 "우경"이라는 한국이름은 우쿄에게 실례인 것을 알고 있지만 은사인
석주의 사모님의 현재 한국이름이기도 해서 아예 입에 담지도 않았다.
<はい。그럼 내일 도시락 같은 거는 제가...... >
<아니, 그럴 필요는 없어. 미키씨가 레스토랑을 예약해 뒀으니까....뭐, 그리 대단 한 곳은 아니지만 말야. >
우쿄는 왠지 혁이나 미키에게 너무 신세지는 것 같아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 でも..... 알겠습니다. 내일 뵐게요. >
<,,,,아 수진양은 내일 어떻대니? 내일 별 일 없으면 끼어도 되는데.....>
<물어보겠습니다만... 아마 약속이 있을 거예요. >
<그래.. 그럼 내일 보자. >
우쿄는 역시 예의바리게 인사하고 지하철 역으로 향했고 두 청년은 소년에게 손을 흔들어 주며 배웅 한 뒤
일단 혁의 집으로 향했다.
<역시 두 분 다 훌륭하십니다. 특히나 강민혁씨는 다른 분들에 비해 빨리 일을 마무리 지으시는데도
내용이 부실하지 않고 완벽하군요. >
혁에게 원고파일이 든 CD디스크와 함께 프린터 해온 원고를 받아든 폅집장은 놀라워하고 동시에 흡족해
했다.
<과찬이십니다. >
<그렇지 않습니다. 처음에 김석현씨에게 추천 받았을 때는 솔직히 좀 반신반의했습니다만... 지금 생각하면
강 민혁씨를 그 때 놓쳤으면 제 손등을 찍고 싶었을 걸요.>
혁은 편집장의 칭찬이 왠지 부담스러웠다.
<어쨌든 마음에 드시니까 다행입니다. 다음에도 부탁드리겠습니다. >
그렇게 출판사를 나온 둘은 석현의 제안으로 근처의 바로 들어섰다.
<난 사실 그 책, 네가 "이걸 꼭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하고 좀 질질 끌 줄 알았어. >
<왜 그렇게 생각했는데? >
<그 책 내용들이 좀 그렇잖냐. 그날 영진씨네 집에서 네가 과민반응 한 것도 있고 하니까. >
<일은 일일 뿐이야. 개인감정하고는 별개 잖냐? >
<일이나 학업에 관해서는 철두철미한 걸 알지만 이번만은 그러지 않았을까 생각했을 뿐이야. 근데 말야.>
석현은 잔에 조금 남았던 와인을 마저 비운 뒤 혁에게 다소 짓궂은 표정을 보였다.
<민혁이 너는 동성애가 싫다지만 나는 사실 가끔은 어리고 귀여운 남자아이라면 생각이 좀
동하겠더라구. >
순간 혁은 마시던 와인이 식도로 역류하면서 사래를 걸리고 말았다.
<풋!!!! 컥컥컥!! 뭐,, 컥컥!! 뭐라? 쿨럭!!>
혁은 사래를 걸려서 기침을 하는 와중에도 석현에게 반문하고 있었다. 석현과 바텐더는
혁에게 등을 두들겨 주고 냅킨을 대어주었다.
<쿨럭쿨럭..... 그, 그게 무슨 소리야? >
<같은 남자라 하더라도 어리고 야들야들한 어린 소년이면 그것도 괜찮지 않아? 이를테면.....>
<이를테면 ? >
설마하며 반문하는 혁의 식도는 아직도 사래의 멍에에서 해방되지는 않았다.
석현의 표정에는 장난기가 더해가고 있었다.
<사오토메 우쿄군은 어때? 실은 그 꼬맹이가 생각하면 할수록 밤에 안아주고 싶더라니까.>
멍해진 혁은 순간적으로 "너도 그렇냐?" 하고 반문할 뻔 했다가 짐짓 정색을 했다.
<성 취향이야 그 사람 자유라지만 동등한 성인끼리 합의하에서나 가능한 얘기이지,
미성년자를 상대로 하는 것은 말도 안된다고 생각해. 거기다 ......>
혁은 바텐더에게 차가운 생수를 청해 단숨에 들이켰다.
다들 왜이러나 싶었다.
소년에게 주접을 떨었다 두들겨 맞은 양아치 같은 놈은 원래 그런 놈이지 싶어서 무시했지만 자신도
그래서 고민인데 심지어 "상식인常識人"으로 통했던 석현도 이러다니 좀 놀라울 뿐이었다.
사오토메 우쿄라는 소년이 동성의 남자들에게 묘한 성적매력을 풍기는 존재였나 싶기도 했다.
여학생들이 귀엽다고 쑤군대는 거야 그래도 이성이고 어리고 귀여운 외모의 소년에게 누나로써의
모성본능을 느낄 수 있으니 그렇다 칠 수 있다지만.....
<사오토메군은 내 고등학교 은사님의 친 아들이야. 특히나 그 아이가 지금까지 겪은 일들을 다시 생각하면
가엾기 이를 데 없잖아. 그런 애한테.... >
<말하자면 그렇다는 거지. 워낙에 남자애가 귀엽게도 하고...... >
석현은 처음 우쿄를 본 이후로 두세번 더 f었다. 혁에 비해 자주 보지는 못하지만 그래서인지 우쿄의 모습에
더더욱 매료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사실 석현도 그런 느낌은 처음이었고 그도 "자신은 상식인"이라며
스스로를 억누르고는 있지만 혁과는 달리 "뭐 그럴 수도 있지"하며 어느정도 융통성을 발휘하여 그렇게까지
당혹감이나 죄의식을 갖진 않고 있었다.
그렇더라도 석현이 요즘들어 노골적으로 동성애나 소년애에 대해서 긍적이다 못해서 오히려 당연한 거
아니냐는 식으로 나오니 혁으로서는 당혹스러웠다.
최근에 혁은 몇가지 색다른 성경험을 했다. 미키에게는 스타킹 풋잡같은 페티쉬 플레이를 경험했고 저번
주말에는 미국으로 귀국하는 티나에게 애널섹스를 처음 경험했다. 확실히 혁으로서는 그 두가지가 상당히
색달랐고 이질적이었다. 어느정도는 색다른 경험을 해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동등한 성인남녀끼리의 동등한 합의 하에서의 일이라고 혁은 생각했다.
혁은 석현의 말을 굳이 비난하거나 할 생각은 없었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 간간히 우쿄에게 이상충동을
느껴왔고 동시에 죄책감도 있있다.
하지만 이번의 작업을 해나가면서 자신의 감정에 다소의 정당성을 은연중에 부여하고 싶은 생각이 계속
들었고 거기에 놀라서 자신에게도 경계심마저 들었다.
<민혁이 너는 어때? 너야 뭐 확고한 면이 있긴 하지만 그런 미소년을 계속 대하다 보면..... >
<지금까지 한 얘기.....농담으로 듣겠어. >
혁은 그 말 한마디로 대충 얼버부려버렸다.
집에 도착해 보니 우주가 잠에서 깨어서 안방에서 나와 우쿄와 석진을 맞았다.
수진이 아직 학교에서 안돌아 왔는지 부재중이어서 석진은 약간 섭섭했다.
<잠깐 옷을 갈아입고 내려올게. >
우쿄는 석진에게 우주를 맡기고 학교에서 입고 있던 집에서 입는 추리닝과 티셔츠로 갈아입고 세수를
한 뒤 바로 1층으로 내려왔다. 요 일주일 동안 자신의 보디가드 역할을 해준 석진에게 뭔가 대접을 해주고
싶었고 우주의 간식도 챙겨주기 위해서였다.
내려오려는 순간 밑에서 피아노 치는 소리가 들렸고 보니까 석진이 우주에게 단순하고도
쾌활한 멜로디로 동요를 쳐주고 있었다. 아주 잠깐이나마 엄마도 없이 혼자 집을 지키려니
심심했던 우주는 즐거워서 손벽을 치면서 꺄르르하고 웃고 있었다.
<헤에~~~ 형도 피아노를 잘 치네? >
<야!! 너는 이 형님을 너무 얕보는 것 같다~~~~~!! >
짐짓 몰라준다는 언잖아하는 표정을 지으며 한껏 뻐기다가 우쿄가 미심쩍은 표정을 짓자 익살스럽게 울상을
지었다.
<실은 이 정도면 잘 친거야~~~ >
그러면서 우쿄에게 한번 쳐 볼 것을 종용했다.
<에엣?!! 僕(나)? >
사실 우쿄는 한국의 집에서는 피아노를 친 적은 없었다.
아직은 한국의 집은 여러모로 행동이 조심스러워져서였다.
거실에 베란다를 등지고 서 있는 피아노는 석주가 우경에게 결혼 10주년 선물로 사 준 것이다.
우경도 소시적의 취미가 피아노 치기였는데 다시 치면서 옛 감각이 살아나자 수진에게 피아노를
가르쳐주기도 했었다. 최근에는 우경도 수진도 칠 여가가 없는 듯 했다.
우쿄는 잠시 망설이다가 석진과 우주의 부추김으로 일단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혹시 신청곡이라도.... >
<아무거나 쳐봐. >
< 내가 아는 곡들은 형에게는 좀 지루한 곡일지도 모르는 데..... >
<나도 가끔은 조용한 곡이 좋더라... >
우쿄는 석진에게 미소를 띄운 뒤 조심스럽게 건반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잠깐 시장을 보고 오던 우경은 다른 곳도 아니고 집에서 나기 시작하는 피아노 연주소리를
듣고 멈칫 했다. 마침 수진, 우석과 같이 집으로 오던 석주도 아내와 피아노 소리를 들으며 마주치던 참이었다.
<집에 오디오라도 켜 놓고 나갔다 왔어? >
<아뇨? >
<근데 이 피아노 소리는 뭐예요? >
남편에 이어 수진의 질문에 우경은 잠시 피아노가 연주하는 곡 소리를 되새겼다.
<이 곡,La Solitude의 Alain Lefevre잖아? 아니, 그보다 우리집 피아노 소리야. >
네 사람이 마당과 현관에 들어서면서도 피아노 소리는 처음에 은은하고도 조용한 음률과 신비스런 분위기로
네 사람의 마음을 조용히 사로잡고 있었다.
조용히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그것을 알아챈 석진이 인사를 하려고 했다.
우쿄는 네사람이 너무 조용히 들어선 데다 등지고 있어서 누가 들어온지도 모르게 연주에 열중하고 있었다.
우주는 형의 피아노 연주에 넋을 빼고 있었다. 우경은 살짝 우쿄에게 다가갔다.
석주와 우경은 우쿄도 피아노나 기타 같은 걸 연주하는 걸 즐겨한 다는 걸 노조무나 카스미에게 들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직접 들은 적은 없었다. 옛날에는 우쿄가 너무 수줍어하느라 친부모 앞에서 솜씨를 자랑하는 걸
꺼렸고 한국에 데려왔을 때는 그럴 정신적인 여유가 없엇던 탓에 역시 들을 기회가 없었다.
친부모로써 말로만 듣던 아들의 악기 연주 솜씨를 듣는 것은 처음인데 설마 이 정도였냐 싶을 정도였다.
예전처럼 자주 피아노를 손수 연주한다거나 하기는 어렵지만 틈틈히 음악을 즐겨 듣던 우경은 아들의 솜씨가
오디오에서 같은 곡을 들을 때와 전혀 차이가 없거나 오히려 테크닉이 더 훌륭함을 알 수 있었다.
연주를 마친 우쿄는 갑작스럽게 뒤에서 들려오는 석진 한명이 아니라 다수의 박수소리에
놀라서 돌라보고는 얼굴이 빨개졌다.
친부모와 동생들까지 자신의 피아노 연주를 들었다고 생각하자 부끄러웠다.
<い, いついらっしゃったんですか。(어, 언제 오신 거예요?)>
<언제 오긴? 근데 언제 이정도로 피아노를 연습했냐? 공부만 잘하는 줄 알았더니 이런 재주도 있었어.
이야~~~ 어떤 피아니스트가 와도 우리 우경이를 당할 사람이 없겠는데? 안그래, 마누라?>
가끔 예상치 못하는 재주로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하는 아들을 아버지로서의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석주의 칭찬에 우쿄는 더 얼굴이 빨개졌다.
우경은 말 없이 아들에게 대견하다는 미소를 지어주었다. 석진과 수진, 우석은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우쿄는 쑥스러움에 쓸쩍 피아노 의자에서 일어나려 했다.
<오빠. 이왕에 치는 거 한곡만 더 쳐줘봐~~~♡>
이번에는 수진이 우쿄에게 연주신청을 했다. 우쿄는 당황스러웠다.
<그래 한곡만 더 쳐 봐라.>
석주를 위시해 가족들의 간청에 우쿄는 쑥스러움을 억누르고 다시 연주를 시작했다.
한국의 가족과 친구들에게라면 이정도의 서비스는 당연했다.
<그럼 이번에 한국에 오기 전에 자주 쳤던 곡이에요. >
그러면서 치기 시작한 곡은 야니의 Until The Last Moment였다.
(녀석, 사내녀석이 기왕에 좀 활달한 곡을 치면 어디가 덧나냐? )
아들의 피아노 연주솜씨에 대한 놀라움이 가라앉자 아들이 연주하고 있는 곡에 내심 이의異義를 제기하던
석주는 무심결에 우경을 흘깃보다 놀랐다.
잠시 아들의 피아노 연주를 듣고 있던 우경은 신비로우면서도 어쩐지 슬픈 곡조의 연주가 알 수 없는
아련함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남편이 그녀의 얼굴에 손을 대어 고여 있던 눈물을 닦아 줄때까지 우경은
자신이 눈물을 보였다는 걸 깨닫지 못했을 정도였다.
우쿄의 연주솜씨가 듣는 이를 감흥시킬 만큼 훌륭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음악을 연주하는 아들의 모습이
너무나 고독하고 쓸쓸하게 느껴져 어머니로서 가슴이 아프고 가엾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전부터 귀여운 아들이 재작년에 너무나 큰 시련을 겪었고 마음의 상처를 받았던 것을 생각하면 속상했던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잠시 뒤 연주가 끝났을 때 우쿄는 자신의 몸을 따듯하게 감싸는 부드러운 존재에 조금 놀랐다.
다들 멍해진 채로 바라보기만는 하는 가운데 우경은 가련한 아들을 감싸안았다.
그 광경은 모두에게 하여금 다시금 뭉클한 느낌을 받게 하였다.
<ミンヒョックグンと遊びに行くと? それではあらかじめ言っておいたらお弁當でも準備したのに......
(민혁군이랑 놀러간다고? 그럼 미리 말해두었으면 도시락이라도 준비했을 텐데......)>
저녁 식사중에 삼겹살과 소고기 등심을 가스버너에 놓인 불판에 굽던 우경은 우쿄의 말에 뭔가 준비라도
해주었으면 좋았지 않았느냐고 했다.
<先輩がおいしいこと買ってくれるとそんな必要ないそうです。
(선배가 맛있는 거 사준다고 그럴 필요 없대요. )>
우쿄는 내일 소풍가는 어린이처럼 들떠있는 표정이었다. 우석과 석진은 그런 우쿄의 모습에서 아까의 피아노
연주 포스가 실감나지 않았다.
<하긴 이제 한국생활에도 익숙해지고 했으니 그렇게 선배나 친구도 사귀어서 같이 나들이도 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야.>
그렇게 말하는 석주는 재작년에 우쿄, 우석, 수진에 석진까지 다 같이, 특히나 한국에는 온지 얼마 안?
우쿄에게 우선 서울 시내에 있는 한국의 역사유적을 견학시켜 주기 위해 시내 나들이를 하며 말미末尾에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 간 적이 있었다.
역시 빼놓을 수 없는게 애국선열들의 항일민족투쟁의 장소를 보여 주는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전시시설 중에 석주는 우쿄에게 벽에 붙은 조그마한 문을 가리키며 열어보라고 했고 우쿄는 문 안의 공간이
사람의 사후에 시신을 넣는 관棺보다 작은 데 의아했다.
<これ監獄で使ったラッカ-ですか。(이거 감옥에서 쓰던 사물함이에요?) >
<벽관壁棺이라는 거야.>
<壁棺? >
<그것도 감옥이지. >
<これがですか(이게 요)?>
석주의 말에 우쿄는 못믿겠다는 반응이었다. 어린 꼬마의 입에서 일본어가 나오자 관람객들이
-여기가 어떤 곳인데 감히 일본말을!! 하는 표정으로- 전부 흘겨보고 있었다.
실은 우석도 이해가 안갔다. 문 안의 살인적으로 협소한 공간은 당시에 중학교 3학년생이었던
우석으로서도 들어가서 몇시간 버티기도 힘들어 보였다.
<그래. 일본경찰은 그때 독립운동을 하다가 잡혀온 한국의 애국지사들을 이런 데다 며칠씩
가두어 두기도 했어. 봐라!! 이런 데서 어떻게 사람이 며칠씩 갇혀있겠냐? 그만큼 우리의 애국선열들이 말로는
아무런 표현도 못할 고초를 겪어가며 나라를 ?기 위해 애쓰셨다는 것이지.>
<진짜!! >
할아버지에게 못이 박히도록 듣던 일제의 잔학함의 일면을 확인하고 치를 떨던 우석들과는 달리 우쿄는
담담하게 그 안을 유심히 들여다 봤다. 그러고 나온 말.....
<そうしてみるから, 我が國の學校で半分ごとにこんな大きさのロッカ-があるんですよ。同じクラスの子の
中に中村という女の子がいるのに...
(그러고 보니까, 우리나라-일본-의 학교에서 반마다 이런 크기의 락커가 있거든요?같은 반 애 중에
나카무라라는 여자애가 있는데 ... )>
<근데? >
석주의 반문에 우쿄는 돌아보며 한손가락으로 뺨을 긁적였다.
<あいつはたまに勉强したくないとロッカ-中で晝寢をしていたが....(그 애는 가끔 공부하기 싫다고 락커
안에서 낮잠을 자던데....) >
한국의 애국지사들의 고통과 숭고한 희생정신이 서려있는 벽관이 졸지에 일본여고생의 땡땡이용 락커와
동급으로 격하당하는 순간이었다.
<와!! 그 애 진짜 히트다!! >
<정말 그 언니 그런데서 잠이 왔데? >
<家にあるベッドよりはできないが意外に便するよ。(집에 있는 침대보다는 못하겠지만 의외로 편하대.)>
석진과 수진은 그 광경을 상상하자 나오는 웃음을 주체하기 힘들었다.
석주는 순간 속으로 이번에 학교에서 들이기로 한 락커의 발주를 취소도록 건의해야 하나
하고 고민했다.
주위의 숙연한 분위기가 무색하게 모두들 한동안 웃은 뒤 석진이 하나 생각나는게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 "나까무라"라는 여자애, 혹시 친척중에 경찰 없대냐? >
<あ. あいつお父さんが警察官ですね。 家が代代に警察だったし. そういえばお爺さんが初めてお巡査で
朝鮮で在職したと中村が言ったことがあります。 あいつも後で大學を警察學校に進學するつもりだ
というのに....(아. 그 애 아버지가 경찰관이셔, 집안이 대대로 경찰이었고. 그러고 보니 할아버지가 처음
순경으로 한국에서 재직하셨다고 나카무라가 말한 적이 있어요. 그 애도 나중에 대학은 경찰학교로
진학할거라는데....) >
그 말에 석진은 더 웃음이 터졌다.
<여.... 역시 "일본순사 나까무라"는 실존했어!!! >
석진은 너무 웃다가 -역시 실은 웃기기는 마찬가지였지만 꾹 참고 있던-석주에게 주의를 듣고 말았다.
우쿄로서는 자기 말이 그렇게 웃긴가 싶어서 어리둥절 했다.
석주는 그때의 일이 생각나서 속으로 쓴 웃음을 지었다. 아마도 우쿄는 자기 친 아버지의 흑심(?)에 일종의
반발을 했던 게 아니었을까? -그때는 석주도 이왕에 자기 아들을 한국인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갔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생님. 무슨 재미 있는 일이라도 생각나셨나요? >
석주의 웃음에 다들 어리둥절 했다. 질문하는 석진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표정을 지으며 소주를 따라준 뒤
우석에게도 소주를 권했다.
<아, 큰아버... 아니, 선생님. 저는 아직.... >
<야. 학교에서 선생님이지, 여기서는 큰 아버지 아니냐? >
선생님이건 큰아버지건 우석은 감히 술을 받는 게 망설여졌다.
우경도 아직은 미성년자이고 심지어 자신의 제자인 조카에게 이례적으로 술을 권하는 남편을 만류했다.
<맞아요 여보. 우석이는 당신이 가르치는 학생이잖아요. >
<어허!! 원래 술은 어른한테 배우는 거야. 어른이 주는 술은 괜찮아. 그리고 우석이도 그렇게
어린 나이도 아니고 가령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이었던 두보는 수진이만 할 때 이미 술꾼이었다던데 뭐.
나도 얘들만 할 때 깡소주 두병은 한 입거리도 안됐어.하기사 사고도 많이 치고 다녔지만... >
<어머머~~~ 저런 사람이 어떻게 학교에서 애들을 가르치나 몰라~~~. >
오늘 처음 안 남편의 과거 전과(?)를 듣고 질렸다는 우경의 비꼼에 다들 웃음을 터트렸다.
결국 우석은 석주가 따라주는 술을 공손히 받은 뒤 예법대로 고개를 뒤로 돌려 마셨다.
좀 쓰긴 하지만 이미 술맛을 이해하고 있는 우석으로서는 마실만 했다.
이미 우석은 할아버지나 자기 아버지에게 술 마시는 예법을 제대로 배웠던 것이다.
<우경이 너도 마셔볼래?>
우석의 예의 바르면서도 의젓한 음주 모습을 흡족하게 바라본 석주는 자기 아들에게도
술을 권해봤다.
<き,嫌いです。(시, 싫어요!!) >
우쿄는 곧바로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우쿄로서는 사실 아직 술맛같은 것은 잘 몰랐다.
아니 이런 쓰고 맛도 없는 걸 어른들-에 일본에서 몇몇 친구들-은 왜 좋아하는지 이해가 안갔다.
-전에 신입생 환영회에서는 경황도 없었고 한국인 선배들이 교묘하게 음료수에 술을 타서 줘서
자신이 마신 게 술인지도 몰랐다.-
<녀석, 저번에는 한국 경찰 앞에서 씩씩하게 "야마토 다마시"大和魂가 어쩌구 저쩌구 하더니 고작
술 한잔에 그렇게 꼬리를 내리냐? >
우쿄는 아버지의 말에 살짝 이의를 제기하고 싶은 생각을 하면서 마지못해 받아서 우석이 하던
모습을 흉내내 한모금 마셨다, 그리고는...
<み, 水!!!!!!!!!!(무,물!!!)>
하는 소리와 함께 입을 틀어막으며 주방으로 뛰쳐들어가 물을 마셨다.
<이런이런~~~ 에라이!!! 여보!! 저 녀석, 이따가 젖 좀 더 먹여!!>
겨우 소주 한모금에 물을 찾으며 호들갑을 떠는 우쿄의 모습에 석주는-아들이 아직은 순진하다고
느껴 기특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우경은 그러게 애한테 술을 왜 먹이느냐는 듯 남편을 흘겨보다가 웃음을 터트렸다.
다음날 오전 9시경에 혁은 석주의 집 앞에 차를 세운 뒤 미키와 함께 대문 앞에 서서 초인종을 눌렀다.
<네, 들어오세요. >
우경은 현관문을 열어서 두 사람을 맞아주었다. 석주도 현관 앞까지 나와 있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사모님도 안녕하셨어요. >
<그래. 어서 와라. 근데 이 숙녀분은? >
혁은 석주에게 그녀를 소개시켜주었다.
<지금 우리대학 조교수인 요시노 미키양孃입니다. 제 여자친구인데, 사오토메군의 영어강의를 맡고 있는
중입니다. 미키. 이분이 아까 말한 내 은사이신 권 석주 선생님. 사오토메군의 친 아버지이셔. >
혁이 석주를 우쿄의 친 아버지라고 대놓고 소개하자 석주와 우경은 적잖이 당황했다.
<아, 안녕하세요?>
<예. 반갑습니다. 근데………민혁아 이거...>
<이미 사오토메군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
석주의 집에 처음 와 보는 미키는 전부터 우쿄의 가정사는 처음에 우쿄에게, 다음에 혁에게 들어서
알 수 있었다. 참 이례적인 일임에 틀림 없다. 다른 사람에게는 고집스럽게 자신의 신변 얘기를 전혀
안했던 우쿄였다.
아마 미키는 -나이상 고등학생이었을 우쿄의 감각으로는- 지금 자신을 가르치는 선생이고 무엇보다
혁과 함께 신뢰할 수 있는 사람으로 여겨서일 것이다.
실제로 남의 비밀을 아무렇지 않게 떠벌리는 것과는 전혀 무관한 미키는 소년이 처한 상황을 십분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역시 원래 사용하는 언어나 외모, 습성, 사고방식등 모든 면에서 일본인이지만 국적상
한국인이고 그런 사정을 숨겨야 할 때가 있었던 그녀 자신의 입장과 겹치는 면이 많아서일 것이다.
요컨대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 할지.....
<어, 그렇군요... 근데 조교수님의 성함이.... 일본인이십니까? >
<저는 재일 한국인이에요. >
<아 그렇군요….. >
어느정도 안도한 석주로서는 거의 조카딸 정도의 나이인 미키의 미모가 별로 흥미를 끌지 못했-다면 당연히
남자로서 거짓말이겠-지만 진작에 재일한국인 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어서 그녀가 재일동포 출신이라는
사실에 약간 흥미가 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석주는 우쿄의 학교 선생을 자신의 의녀義女이기도 한 미즈호를 제외하고 처음 대면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우쿄가 유독 자신을 맡고 있는 교수나 강사가 어떤 사람인지 말한 것은 극히 단편적-미인이고
상당히 학생들을 잘 가르치는 조교수라는 정도-이었다.
그 뒤에 혁은 우경을 소개하면서 약간 딜레머에 빠졌다.
<그리고 여기 이분은 선생님의 사모님이시고 사오토메군의 친어머니이신.......그러니까 ...... >
<實の母で末っ子叔母である早乙女宇京です。 韓國名前は "權宇京"です。
(친엄마이고 막내이모인 "사오토메 우쿄"입니다. 한국이름은 "권 우경"이고요.)>
약간 애매한 표정을 보이는 혁을 대신해 우경이 나서서 자기 소개를 했다.
미키는 자신의 애제자와 똑같은 이름의 친엄마의 존재에 다른 의미로 곤혹스러운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그 모습에 우경은 불쾌하기는 커녕 그녀가 귀엽게 느껴졌다. 우경은 자기보다 10살 연하일 미키가 왠지 마음에
들었다.
<こんにちは。 はじめまして。(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
<いらっしゃいませと。どころで私の息子と名前が同じでちょっと變でしょう。(어서오세요. 근데 제 아들하고
이름이 같아서 좀 이상하죠?) >
<いいえ。そのように見えたら申し譯ありません。(아니에요. 그렇게 보였다면 죄송합니다.) >
<そうじゃありません。(그렇지 않아요.) >
미키는 -실은 혁에게 사모님이 나이보다 한참 젊어보여서 얼핏 미키랑 같은 나이쯤으로 보일 거라고 미리
듣기는 했지만 그때는 농담이거나 자기를 놀리는 거라고 생각해서 막상 우경의 모습에 놀라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성함까지는 전해듣지 못했으므로 적잖이 당황하기도 했고- 우경이 겉보기에는 자기와 나이가 거의
같아보이는 무척 젊어보이는 모습과는 달리 큰 언니같은 인자한 모습을 보이자 푸근함과 편안함을 느꼈다.
<아참, 이거 손님들을 너무 현관에 세워둔 거 아냐? 잠깐 올라와서 차라도.....>
그 순간 가벼운 외출복 차림의 우쿄가 밑으로 내려오며 반갑게 인사했다.
<先パイ, 先生, 遲れてすみません。(선배님. 선생님. 늦어서 미안합니다.)>
혁은 한 손은 바짓 주머니에 쑤셔넣고 한손을 들어서 쾌활하게 미소를 지어주었다.
우쿄가 혁들에게 다가가 운동화를 신고 나서 혁은 우쿄의 어께를 다정하게 감싸며 석주에게
인사했다.
<그럼, 오늘 하루만 아드님을 빌리겠습니다. >
<그래 잘 부탁해. 선배님하고 조교수님한테 너무 버릇 없이 굴지 말거라. >
<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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