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동의없이는 누구도 당신이 열등감을 느끼게 할 수 없다."
- 엘리노어 루스벨트 -]
벌써부터 여기저기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시청 앞과 교회 앞엔 트리장식이 한창이다. 아파트 화단에도 반짝반짝 빛나는 장식들이 주렁주렁 달렸다.
한해가 마무리되는 12월은 묘한 마력을 가졌다. 1월 1일 카운트다운 직전까지, 매일 매일 그 마력을 더해간다.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그 마력이 절정에 이른다. 별 일도 없으면서 가슴이 설렌다.
같이 볼 사람도 없으면서 눈을 기다리게 되는 달이다. 뭔가 특별한 일이 생길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계절이다.
하지만 미소는 정말 죽을 맛이었다.
시청 앞에 트리가 세워지고, 스케이트장이 들어설 때까진 기분이 괜찮았다. 볼 것도 많아지고, 예쁘다는 단순한 이유였다. 하지만 크리스마스 트리와 스케이트장은 카페에 손님수 증가로 직결됐고, 이제는 그것들이 꼴도 보기 싫다. 정말 쉴새없이 손님들이 들이닥쳤다. 한잔에 만원하는 커피를 마시려는 사람이 이렇게 많다는게 놀라웠다. 물론, 분위기가 꽤 괜찮긴 했다. 해가 지고나면 통유리 너머로 커다란 트리 조명이 마주보였다. 시청을 장식한 알록달록한 장식들이나 예쁘게 차려입고 데이트를 나온 커플들 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그 커플 중 한명이 본인이 아는 사람이고, 그 사람의 애인도 알고 있지만, 함께 호텔을 찾은 남자가 본인이 아는 그 남자가 아니라는 점만 제외하면 말이다.
"뭐야...여시같은게...꼬리치는 거 봐라. 저거 저거."
거의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를 늘어트리고, 연신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앞에 앉은 남자랑 시시덕거리고 있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입에서 미소가 떠나질 않는다. 요리조리 다니며 힐끔 힐끔 테이블을 훔쳐봤다. 앞에 앉은 남자도 제법 상판대기가 쓸만하다. 하얀 얼굴이 조명을 받아 더 하얗게 보이는 남자였다. "나보다 더 하얀 거 같네...지미."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불륜현장을 목격한 사람마냥 시선을 피해 조심스럽게 주위를 맴돌았다. 사진이라도 한방 찍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든다.
"쯧쯧..병신 같은 새끼. 잘난 척하더니 지 여자친구 하나 못 지키고 털리게 생겼네." 카페를 나가 엘리베이터 앞에 선 남녀를 보며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미소 본인도 그렇지만, 예쁘게 생긴 것들은 꼭 얼굴값을 하는 법이다. 곰같은 그 놈 얼굴이 떠오른다.
시현이는 호텔이 처음이었다. 게다가 스위트룸이라니! 가끔 TV 드라마에서만 보던 곳을 보니 저도 모르게 감탄사가 나온다.
"와...진짜 넓다." 저도 모르게 쇼파를 팡팡 쳐본다. 보육원 원장실에 있는, 앉을때마다 푸쉬- 하고 한숨을 뱉는 낡은 가죽쇼파와는 차원이 달랐다. 푹신푹신한 감촉이 일품이다.
"어때? 구상이 좀 떠오르나?"
천진한 모습의 시현이를 보자 성우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오른다. 얼마남지 않은 프러포즈 이벤트를 위해 점검 차 호텔을 방문했다. 일생에 한 번뿐인 프러포즈다. 남 부럽지 않은 이벤트를 해주고 싶었다. 물 흐르듯이 이어지는 코스를 짜놓고 마지막으로 호텔방에서 반지를 껴줄 생각이다. 방을 꾸미기 위해 시현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어, 어. 잠시만요. 생각 해놓은 건 많았는데, 생각보다 훨씬 넓어서요."
시현이가 짐짓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팔짱을 낀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또 웃음이 나온다.
"고자야, 크리스마스때 뭐 할꺼냐?"
"뭘 뭐해. 집에서 뒹굴지."
진우의 심드렁한 대답에 김본좌가 벌떡 일어난다.
"와, 이 새끼, 존나 나쁜 새끼네."
"왜 지랄이야?"
"마, 니 연애하고 처음 맞는 크리스마스잖아."
"근데 뭐."
듣고있던 빠삭이가 옆에서 맞장구를 친다. "나쁜 새끼 맞네."
"아, 뭐가."
"으휴, 이새끼 아무래도 이번에 차이겠네." "축! 돌싱남"
김본좌와 빠삭이에게 한참 설교의 말을 들었다. 여자들은 분위기와 이벤트에 약한 법라느니, 그래서 크리스마스는 완벽하다느니, 이때 잘 하면 넘어트릴 수 있다느니 하는 시덥잖은 얘기였다.
사실 진우는 크리스마스에 대해 별 다른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크리스마스는 항상 같이 맞았다. 남녀관계로 바뀌긴 했지만, 별 다르게 생각하지 못했다. 그냥, 둘이 같이만 있어도 좋은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아, 이 위험한 새끼. 지극히 고추적인 발상을 하네."
"좋은 날 같이 시간 보내면 그게 좋은거지."
"이 무식한 새끼야. 거기에 플러스가 있어야지, 플러스가. 반지든, 시계든, 목걸이든 막 그런거 있잖아."
"그런게 필요하냐?"
".........축! 돌싱남!" 빠삭이과 김본좌가 하이파이브를 한다. 저 병신짓도 오랜만에 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현이도 진우랑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연인으로서 처음 맞는 크리스마스긴 했지만, 워낙에 같이 보낸 세월이 길었기 때문이다. 둘이 오피스텔에서 작은 파티를 해볼까 하는 생각도 들긴 했지만, 시간이 안 맞는다. 보육원에서 다 같이 파티를 해야 할텐데, 파티를 하고 다시 나올 방법이 없다. 시현이야 상관 없지만, 진우가 다시 나와버리면 외박을 해야 한다. 원장선생님이 절대 허락해주실리 없었다.
아니, 그런 것보다도 먼저 화해를 해야 했다.
그 생각을 하니 다시금 가슴이 답답해진다. 지난 달 카페에서 싸운 뒤로 아직도 관계가 어색했다. 평소 같으면 헤헤 거리며 다가왔을 진우의 태도가 지나치게 냉랭했다. 혹시 성우 오빠를 질투하는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반응이 좀 격했다.
여성의 정신을 가진 시현이로서는 진우의 열등감을 이해하긴 어려운 것이다.
가뜩이나, 북적이던 시설에서 나와 외로움 타고 있는 때에, 찾아오지 않는 진우가 섭섭하게 느껴진다. 매일 하던 전화도 없고, 문자도 드문드문하다. 생각해보니 관계를 갖지 않은지도 거의 한달이 다 되어간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가슴이 서늘해졌다. 단순히 삐친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쩌면 그 여자애를 만나고 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러니 저러니해도 외박하던 날 무슨 짓을 했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곰곰이 생각하니 아귀가 들어 맞는다.
"나한테 벌써 질린건가" 하는 생각이 들자 서글픈 마음에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조용한 방 안이 서글픈 마음을 더욱 부채질하자, 저도 모르게 찔끔 눈물이 난다.
"개소리 하지마라. 죽는다, 진짜."
진우가 눈초리가 싸늘하다.
"야야, 진짜 엄창. 엄창찍고 진짜거든."
미소가 혀에 엄지를 댄 채 새끼손가락으로 이마를 찍는다. 그 모습을 보는 진우의 시선이 곱지 않다.
처음엔 슬쩍 떠 볼 생각이었다. 혹시 헤어진거 아닌가, 헤어졌으면 크리스마스에 데이트나 해볼까, 하는 그런 생각이었다. 근데 이 곰 같은 새끼는 사람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마냥 심드렁한게만 대답한다.
대시해보려고 했던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지며, 자존심이 팍 상했다. 말 나온 김에 그냥 터트려버렸지만 도통 믿지를 않는다.
"알바하다가 봤다니까."
처음엔 툭툭 건드리는 미소의 말에 그저 짜증스럽게 대꾸했지만, 가만히 듣다보니 말하는 태도가 제법 진지하다.
"진짜 봤냐. 나 장난치는 거 아니다. 그거 갖고 장난치면 진짜 죽여버린다."
"와, 선배, 속고만 살았냐. 내가 그런거 갖고 장난칠 년으로 보여?"
"어, 그렇게 보여."
그 사건 이후로는 조용했지만, 날라리 같은 미소를 신뢰하긴 어려웠다. 아니, 무조건 부정하고 싶은 말이었다. 그 말에 미소의 표정이 팍 일그러진다.
"아, 맘대로 해. 썅. 여자친구 뺏기고 질질 짜봐야 정신을 차리지. 기껏 생각해서 얘기해줬더니."
침을 찍- 뱉더니 그대로 돌아서 가버린다. 멀어지는 미소의 뒷모습을 보는 진우의 마음이 심란하다. 그럴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가슴이 철렁한다.
꽤 오랜만에 시현이가 보육원에 들렸다. 다 같이 저녁을 먹고 마루에 둘러앉아 TV를 봤다.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왠지 마음을 차분하게 한다. 후식을 먹을 때쯤 진우가 체육관에서 돌아왔다. 오랜만에 본 진우의 얼굴에 저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리고 화색이 돌았지만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했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진우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먼저 사과할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자꾸 카톡이 생각나서 다가갈 수가 없었다. 진우의 쌀쌀한 태도가 섭섭하다.
"시현아."
이런저런 생각에 잠긴 사이에 선미 언니가 팔을 잡자 깜짝 놀랐다. "어, 어? 왜?"
"어휴, 깜짝이야. 왜 이렇게 놀래. 언니가 더 놀랐다."
"아, 미안. 생각 좀 하느라." 곁눈질로 진우를 힐끔 쳐다봤지만, 이쪽으론 시선도 주지 않는다. 마음이 싸하게 저려왔다.
"응, 올해 크리스마스 파티에 올꺼지?"
"당연하지. 내가 어디 가겠어."
당연하다는 듯한 시현이의 말에, 선미가 진우를 슬쩍 본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표정이 보이질 않는다.
"그래. 그래서 말인데, 23일날 저녁에 물건 좀 사러 갈까 하는데, 시간 좀 괜찮아?"
"23일?"
얼른 머리를 굴려본다. 23일은 성우 오빠의 스위트룸 파티 데코레이션을 돕기로 했다. 24일의 프러포즈를 위해 전날 미리 셋팅을 완료하는 것이다. 스위트룸의 하루 대여비를 생각하면 어마어마한 금액이었지만, 성우 오빠는 전혀 아깝지 않다고 했다.
"어, 나 23일은 저녁에 약속 있는데......"
"그럼 안되겠네...아쉽다."
"잠깐만, 나 전화 좀 한번 해보고 올게."
"아니야, 그러지마. 약속 있으면 가야지."
"아냐, 아냐. 금방 전화 한통만 하고 올게."
어처피 방 꾸미기는 낮부터 시작하는 계획이었기에, 조금만 서두르면 저녁에는 시간을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자리에서 전화를 할까 했지만, 진우가 신경 쓰였다. 잘은 모르겠지만 진우가 성우 오빠를 견제하는 것만 같았다. 가뜩이나 차가워진 진우를 불필요하게 자극하고 싶진 않았다. 얼른 방으로 들어가 전화를 걸었다.
"네, 오빠 전데요...."
집에 오니 시현이가 마루에 앉아 있다. 외출복 차림에 머리도 푸르고 있는 모습이 여전히 사랑스럽다. 오른쪽 머리를 귀 뒤로 넘겨서 귀와 목덜미가 살짝 보인다. 하얀 목덜미. 시현이를 안은지 너무 오래 됐다. 저도 모르게 아랫도리에 힘이 들어가는 것 같아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요새는 문자도 드문드문 하다. 자꾸 미소와 체육관 형들의 말이 떠오른다.
"아니겠지. 말도 안돼." 라는 생각으로 뿌리치려고 했지만 지워지지가 않는다. 생각해보니 성우라는 놈은 시현이의 정체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런 친절한 태도를 보인다고 생각하니 의심이 자꾸 커진다. 시현이를 이해할 수 있는 남자가 또 있다는 생각을 하니 뜨거운 질투가 밀려온다.
혼자 식탁에 밥을 차려 먹었다. 예전 같으면 시현이가 달려와서 반찬이라도 꺼내줬을텐데, 시현이는 미동도 없다. 괜시리 마음이 섭섭해진다. 조금 떨어진 거리와 TV 소리 탓에 작게 들리긴 했지만 시현이와 선미 누나의 대화 소리가 들린다. 크리스마스에 약속 없다는 시현이 말에, 선미가 진우를 힐끔 쳐다본다. 진우는 잽싸게 고개를 숙이고 식탁 위에 멸치를 째려봤다. 김본좌 말대로 뭔가 준비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23일날 물건 사러 같이 가자는 말에 시현이가 난색을 표한다. 예전 같으면 시현이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알겠지만 냉전 분위기 탓에 무슨 약속이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원래 보육원에서는 크리스마스 전에 동생들 선물을 사놓는다. 그럼에도 23일날 약속을 잡다니. 누구와의 약속이길래?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머리를 흔들어 털어냈다.
"아닐거야. 설마...설마.."
시현이가 전화를 하겠다며 방으로 들어가자, 저도 모르게 잽싸게 그 뒤를 따라갔다. 선미 누나가 모르는 척 쳐다보는 느낌이 들었지만, 애써 무시했다. 이런저런 계산 할 때가 아니었다. 최대한 조용히 문 뒤에 귀를 갖다댔다.
"네, 오빠 전데요...23일이요. 네, 좀 일찍 시작해야 할 것 같아요. 저녁에 언니가 보자고 해서....일단 저 먼저 들어가 있어도 되죠? 네,네..방은 잡았으니까. 그럼 저 로비에서 뭐라고 해야 되요? 성우 오빠 이름 말하면 되요?...."
그 새끼 이름이 나오는 순간, 머리에 하얗게 번개가 내려친 것 같았다. 며칠 전, 미소가 했던 얘기가 생각났다.
"호텔에서 어떤 남자랑 있는거 봤다니까."
"얼굴 허옇고 기생오라비 같이 생긴" "엘리베이터로 올라가는 거 봤어"
"웃음이 떠나질 않더만."
갑자기 머리가 뱅글뱅글 도는 기분이 들었다. 하마터면 다리가 풀려 문을 칠 뻔 했다. 평소보다 몇 배는 다리에 힘을 주고 방 문에서 물러섰다. 서있을 수가 없어 식탁 의자에 앉아 물을 들이켜는데, 시현이가 나왔다. 새초롬한 표정으로 복도를 건너 마루로 향한다. 잠깐 시선을 마주치더니 금세 고개를 돌린다. 근 한 달간 계속되는 모습이다.
그 모습을 보니 조금 전까지 온 몸을 감싸던 충격이 일순간 시뻘겋게 몸부림 치는게 느껴진다.
분노.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쥔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 들고, 피가 몰려 빨갛던 주먹이 순식간에 하얗게 변한다. 어금니가 바스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턱에서 힘을 뺄 수가 없었다. 지금 힘을 빼면 욕설이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아직이다. 아직이야. 확인. 확인을 해보자. 아직 아무것도 확실치 않잖아. 침착해. 침착해, 이 새끼야. 제발 좀!!!"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쥐고 속으로 계속 되뇌였다. 침착해라, 침착하자, 고.
오랜만에 창고 방에 혼자 눕자, 진우가 건너오지 않을까하는 기대가 들었다. 처음 진우가 건너오던 날처럼 가슴이 두근두근한다. 조용한 핸드폰을 보며, 혹시 꺼진게 아닐까 자꾸 폴더를 열어보지만, 파랗게 빛나는 액정 화면엔 "문자메시지 0통"이라고 써있다.
"나쁜 새끼...언제는 죽을 때까지 사랑할꺼라더니.."
이불을 이마까지 끌어올렸다. 금세 이불이 젖어든다.
이브를 하루 앞둔 거리 분위기는 더욱 시끌벅적해진다. 여기저기서 구세군 모금 종소리가 울리고, 크리스마스 캐롤이 울려퍼진다. 바쁘게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 얼굴에도 알 수 없는 설렘과 기대감이 자리 잡고 있다. 시청 앞 광장에도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포토포인트가 된 커다란 크리스마스 트리는 사진 찍으려는 사람들로 붐비고, 예년보다 넓은 스케이트장엔 사람들이 가득하다.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둔, 23일 풍경이었다.
그런 들뜬 분위기와 대조적으로 차가운 눈동자를 빛내는 남자가 호텔 커피숍에 앉아 있었다. 진우였다. 정오를 지나서부터 자리에 앉아 호텔 로비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을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노려본다.
이윽고, 진우의 눈에 시현이가 띄었다. 평소처럼 수수한 차림이었다.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스니커즈 운동화와 반들반들 닦여진 호텔 로비가 묘하게 매치된다. 로비로 다가가 뭔가 얘기를 하더니 복도로 사라졌다. 황급히 따라가보니 엘리베이터로 사라지는 뒷모습이 보인다. 꽉 깨문 아래턱이 딱딱해진다.
"아니야, 금방 나올 수도 있잖아."
애써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금방 나오길 바라며, 뭔가를 전해주고 나오는거겠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섹스하는데 얼마나 걸리지." 세차게 머리를 털어냈다. 생각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자꾸 여기저기서 그런 생각이 솟아난다. 자지를 빨며 올려다보던 시현이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럴 때 시현이의 얼굴은 정말 섹시했다. 나 아닌 누군가가 그 모습을 봤을까.
시현이가 나오길 바라며 로비 복도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얼마나 있었을까. 그 새끼, 성우의 모습이 보였다. 설마 성우가 나타날꺼라고 생각도 못했던 탓에 반응이 늦었다. 잽싸게 뛰어갔지만, 엘리베이터가 닫혀버렸다.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숫자를 보고 있자니 몸 속에서 뭔가가 머리로 솟구쳐 오르는 느낌이 든다. 붉다 못해 하얗게 질려버린 뜨거운 기운이 머리 부위에서 터져버렸다. 손에 쥔 상자를 내팽겨쳤다. 작은 여자 시계가 자르륵- 쏟아진다. 가슴에 뜨거운 열기가 입으로 터져 나온다.
비명같은 외침 소리에 놀라 뛰쳐나가보니 곰탱이 새끼가 끌려나가고 있다. 평소에 그렇게 날라다니던 실력은 어디갔는지 병신같이 몸부림만 친다. 보안요원들에 끌려나가서도 한참을 씩씩대더니 어디론가 사라졌다. 하루종일 로비가 보이는 자리에 죽치고 앉아있더니 못 볼껄 봤나보다. 괜히 말해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언젠간 알게 될 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불쌍하기도 하고, 걱정도 된다.
저 새끼 성질도 보통이 아니던데.
약속했던 시간보다 일찍 방을 찾았지만, 벌써 교회 사람들이 작업을 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시현이는 예의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잡았다. 오랫동안 한 교회를 다닌 덕분에 성우 오빠의 인맥이 제법 넓은 모양이었다. 남자들도 있었지만, 여자들이 대다수다. "신부 언니가 싫어하겠네" 하는 익살스런 생각이 든다. 얼마간 작업을 하고 있으니, 성우 오빠가 들어온다.
"어, 오빠. 왜 이렇게 빨리 왔어요?"
"최대한 빨리 끝내고 왔지. 두근거려서 일이 손에 안 잡혀." 성우가 혀를 쏙 내밀며 말했다.
다들 자기 일처럼 열심히 해준 덕에 예상했던 시간보다 2시간이나 일찍 끝났다. 스스로 만족스러울만큼의 결과물도 나왔다. "야, 이거면 반지 받기 전에 눈물 흘리겠다." 성우 오빠가 장난스레 말하자 다 같이 빵 터진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일찍오지 말걸." 시현이가 귀엽게 웃었다.
호텔을 나서면서 핸드폰을 봤다. 문자메시지 0통. 마음이 시리다. 성우오빠 커플에 행복한 모습을 봐서 그럴까. 아니면 여기저기 가득한 크리스마스의 들뜬 분위기 탓일까. 들뜨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가 한결 초라하다. 잠시 시청 앞 트리를 올려다 봤다.
그러고보니 이 시기에, 여길 나와본 적이 없었다. 한 번도 커플인적이 없었으니까. 행복하게 웃는 커플들을 보니 갑자기 진우가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용기를 내 진우의 번호를 누르자, "전화기가 꺼져있어 음성사서함으로.." 하는 녹음된 목소리가 나온다.
"..하.."
저도 모르게 작은 한숨이 쉬어졌다. 시간을 보니 아직 선미 언니와의 약속시간이 한참이나 남아있다. 후텁지근한 스위트룸에서 집중 작업을 한 탓인지 안에 입은 나시티가 살짝 젖은 기분이 들었다. 집에 가서 옷이라도 갈아입어야겠다, 는 생각이 든다.
집 앞 골목에 들어서면서 보니 옆 집 단독주택 대문에 크리스마스 장식물이 걸려있다. 초록색 나뭇잎이 동그랗게 말려진 가운데에 "Merry Christmas"라는 문구가 써있다.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당 있는 집을 가져보고 싶다, 따뜻한 내 가정을 꾸미고 싶다, 크리스마스에는 트리 장식을 해야지...그런 생각들을 하며 걷느라 빨리 알아차리지 못했다.
오피스텔 건물에 거의 다 와서야 누군가 진입로 앞 주차장에 서있는 걸 봤다.
진우였다.
하마터면 펄쩍 뛸 정도로 기뻤다. 텔레파시가 통한 느낌이라고 해야 되나. 신기한 기분까지 든다.
진우는 고개를 숙여 땅바닥을 보고 있었다. 걸음을 재촉해서 진우에게 다가갔다. 한 달음에 달려가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왠지 지고 싶지 않다는 기분이 들었다.
진우의 앞에 서서 진우를 올려다 봤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진우는 시현이가 다가오는 걸 모르는 것 같았다.
"진우야." 시현이가 작게 부르자,
그제야 진우가 고개를 든다. 발갛게 충혈된 눈이 조금 부어있다.
순간, 진우의 눈동자가 떨린 것 같았다.
"짜--악!!!"
무슨 일이 일어난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눈에서 별이 튀는 느낌이 들더니, 왠지 모르게 몸이 주저 앉았다. 왼쪽 뺨이 불로 지진듯이 뜨거웠다.
시현이가 멍하니 진우를 올려다 봤다.
역광을 받은 진우의 얼굴이 새까만 그림자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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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다 쓰고 자겠다는 목표로 쓰다보니 12시가 넘었네요.
연속해서 올리는 글이 아니니 날짜변경 기준에 걸리진 않겠지요?
스토리의 연속성을 위해 여기까진 올려야겠어서 업로드 해봅니다.
항상 읽어주시고, 추천댓글쪽지 주시는 독자분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 엘리노어 루스벨트 -]
벌써부터 여기저기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시청 앞과 교회 앞엔 트리장식이 한창이다. 아파트 화단에도 반짝반짝 빛나는 장식들이 주렁주렁 달렸다.
한해가 마무리되는 12월은 묘한 마력을 가졌다. 1월 1일 카운트다운 직전까지, 매일 매일 그 마력을 더해간다.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그 마력이 절정에 이른다. 별 일도 없으면서 가슴이 설렌다.
같이 볼 사람도 없으면서 눈을 기다리게 되는 달이다. 뭔가 특별한 일이 생길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계절이다.
하지만 미소는 정말 죽을 맛이었다.
시청 앞에 트리가 세워지고, 스케이트장이 들어설 때까진 기분이 괜찮았다. 볼 것도 많아지고, 예쁘다는 단순한 이유였다. 하지만 크리스마스 트리와 스케이트장은 카페에 손님수 증가로 직결됐고, 이제는 그것들이 꼴도 보기 싫다. 정말 쉴새없이 손님들이 들이닥쳤다. 한잔에 만원하는 커피를 마시려는 사람이 이렇게 많다는게 놀라웠다. 물론, 분위기가 꽤 괜찮긴 했다. 해가 지고나면 통유리 너머로 커다란 트리 조명이 마주보였다. 시청을 장식한 알록달록한 장식들이나 예쁘게 차려입고 데이트를 나온 커플들 보는 재미도 쏠쏠했다.
그 커플 중 한명이 본인이 아는 사람이고, 그 사람의 애인도 알고 있지만, 함께 호텔을 찾은 남자가 본인이 아는 그 남자가 아니라는 점만 제외하면 말이다.
"뭐야...여시같은게...꼬리치는 거 봐라. 저거 저거."
거의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를 늘어트리고, 연신 앞머리를 쓸어넘기며 앞에 앉은 남자랑 시시덕거리고 있다. 뭐가 그렇게 좋은지 입에서 미소가 떠나질 않는다. 요리조리 다니며 힐끔 힐끔 테이블을 훔쳐봤다. 앞에 앉은 남자도 제법 상판대기가 쓸만하다. 하얀 얼굴이 조명을 받아 더 하얗게 보이는 남자였다. "나보다 더 하얀 거 같네...지미."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불륜현장을 목격한 사람마냥 시선을 피해 조심스럽게 주위를 맴돌았다. 사진이라도 한방 찍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 든다.
"쯧쯧..병신 같은 새끼. 잘난 척하더니 지 여자친구 하나 못 지키고 털리게 생겼네." 카페를 나가 엘리베이터 앞에 선 남녀를 보며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미소 본인도 그렇지만, 예쁘게 생긴 것들은 꼭 얼굴값을 하는 법이다. 곰같은 그 놈 얼굴이 떠오른다.
시현이는 호텔이 처음이었다. 게다가 스위트룸이라니! 가끔 TV 드라마에서만 보던 곳을 보니 저도 모르게 감탄사가 나온다.
"와...진짜 넓다." 저도 모르게 쇼파를 팡팡 쳐본다. 보육원 원장실에 있는, 앉을때마다 푸쉬- 하고 한숨을 뱉는 낡은 가죽쇼파와는 차원이 달랐다. 푹신푹신한 감촉이 일품이다.
"어때? 구상이 좀 떠오르나?"
천진한 모습의 시현이를 보자 성우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오른다. 얼마남지 않은 프러포즈 이벤트를 위해 점검 차 호텔을 방문했다. 일생에 한 번뿐인 프러포즈다. 남 부럽지 않은 이벤트를 해주고 싶었다. 물 흐르듯이 이어지는 코스를 짜놓고 마지막으로 호텔방에서 반지를 껴줄 생각이다. 방을 꾸미기 위해 시현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어, 어. 잠시만요. 생각 해놓은 건 많았는데, 생각보다 훨씬 넓어서요."
시현이가 짐짓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팔짱을 낀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또 웃음이 나온다.
"고자야, 크리스마스때 뭐 할꺼냐?"
"뭘 뭐해. 집에서 뒹굴지."
진우의 심드렁한 대답에 김본좌가 벌떡 일어난다.
"와, 이 새끼, 존나 나쁜 새끼네."
"왜 지랄이야?"
"마, 니 연애하고 처음 맞는 크리스마스잖아."
"근데 뭐."
듣고있던 빠삭이가 옆에서 맞장구를 친다. "나쁜 새끼 맞네."
"아, 뭐가."
"으휴, 이새끼 아무래도 이번에 차이겠네." "축! 돌싱남"
김본좌와 빠삭이에게 한참 설교의 말을 들었다. 여자들은 분위기와 이벤트에 약한 법라느니, 그래서 크리스마스는 완벽하다느니, 이때 잘 하면 넘어트릴 수 있다느니 하는 시덥잖은 얘기였다.
사실 진우는 크리스마스에 대해 별 다른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크리스마스는 항상 같이 맞았다. 남녀관계로 바뀌긴 했지만, 별 다르게 생각하지 못했다. 그냥, 둘이 같이만 있어도 좋은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아, 이 위험한 새끼. 지극히 고추적인 발상을 하네."
"좋은 날 같이 시간 보내면 그게 좋은거지."
"이 무식한 새끼야. 거기에 플러스가 있어야지, 플러스가. 반지든, 시계든, 목걸이든 막 그런거 있잖아."
"그런게 필요하냐?"
".........축! 돌싱남!" 빠삭이과 김본좌가 하이파이브를 한다. 저 병신짓도 오랜만에 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현이도 진우랑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연인으로서 처음 맞는 크리스마스긴 했지만, 워낙에 같이 보낸 세월이 길었기 때문이다. 둘이 오피스텔에서 작은 파티를 해볼까 하는 생각도 들긴 했지만, 시간이 안 맞는다. 보육원에서 다 같이 파티를 해야 할텐데, 파티를 하고 다시 나올 방법이 없다. 시현이야 상관 없지만, 진우가 다시 나와버리면 외박을 해야 한다. 원장선생님이 절대 허락해주실리 없었다.
아니, 그런 것보다도 먼저 화해를 해야 했다.
그 생각을 하니 다시금 가슴이 답답해진다. 지난 달 카페에서 싸운 뒤로 아직도 관계가 어색했다. 평소 같으면 헤헤 거리며 다가왔을 진우의 태도가 지나치게 냉랭했다. 혹시 성우 오빠를 질투하는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렇다고 하기엔 반응이 좀 격했다.
여성의 정신을 가진 시현이로서는 진우의 열등감을 이해하긴 어려운 것이다.
가뜩이나, 북적이던 시설에서 나와 외로움 타고 있는 때에, 찾아오지 않는 진우가 섭섭하게 느껴진다. 매일 하던 전화도 없고, 문자도 드문드문하다. 생각해보니 관계를 갖지 않은지도 거의 한달이 다 되어간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가슴이 서늘해졌다. 단순히 삐친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쩌면 그 여자애를 만나고 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러니 저러니해도 외박하던 날 무슨 짓을 했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곰곰이 생각하니 아귀가 들어 맞는다.
"나한테 벌써 질린건가" 하는 생각이 들자 서글픈 마음에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조용한 방 안이 서글픈 마음을 더욱 부채질하자, 저도 모르게 찔끔 눈물이 난다.
"개소리 하지마라. 죽는다, 진짜."
진우가 눈초리가 싸늘하다.
"야야, 진짜 엄창. 엄창찍고 진짜거든."
미소가 혀에 엄지를 댄 채 새끼손가락으로 이마를 찍는다. 그 모습을 보는 진우의 시선이 곱지 않다.
처음엔 슬쩍 떠 볼 생각이었다. 혹시 헤어진거 아닌가, 헤어졌으면 크리스마스에 데이트나 해볼까, 하는 그런 생각이었다. 근데 이 곰 같은 새끼는 사람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마냥 심드렁한게만 대답한다.
대시해보려고 했던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지며, 자존심이 팍 상했다. 말 나온 김에 그냥 터트려버렸지만 도통 믿지를 않는다.
"알바하다가 봤다니까."
처음엔 툭툭 건드리는 미소의 말에 그저 짜증스럽게 대꾸했지만, 가만히 듣다보니 말하는 태도가 제법 진지하다.
"진짜 봤냐. 나 장난치는 거 아니다. 그거 갖고 장난치면 진짜 죽여버린다."
"와, 선배, 속고만 살았냐. 내가 그런거 갖고 장난칠 년으로 보여?"
"어, 그렇게 보여."
그 사건 이후로는 조용했지만, 날라리 같은 미소를 신뢰하긴 어려웠다. 아니, 무조건 부정하고 싶은 말이었다. 그 말에 미소의 표정이 팍 일그러진다.
"아, 맘대로 해. 썅. 여자친구 뺏기고 질질 짜봐야 정신을 차리지. 기껏 생각해서 얘기해줬더니."
침을 찍- 뱉더니 그대로 돌아서 가버린다. 멀어지는 미소의 뒷모습을 보는 진우의 마음이 심란하다. 그럴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가슴이 철렁한다.
꽤 오랜만에 시현이가 보육원에 들렸다. 다 같이 저녁을 먹고 마루에 둘러앉아 TV를 봤다. 시끌벅적한 분위기가 왠지 마음을 차분하게 한다. 후식을 먹을 때쯤 진우가 체육관에서 돌아왔다. 오랜만에 본 진우의 얼굴에 저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리고 화색이 돌았지만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했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진우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먼저 사과할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자꾸 카톡이 생각나서 다가갈 수가 없었다. 진우의 쌀쌀한 태도가 섭섭하다.
"시현아."
이런저런 생각에 잠긴 사이에 선미 언니가 팔을 잡자 깜짝 놀랐다. "어, 어? 왜?"
"어휴, 깜짝이야. 왜 이렇게 놀래. 언니가 더 놀랐다."
"아, 미안. 생각 좀 하느라." 곁눈질로 진우를 힐끔 쳐다봤지만, 이쪽으론 시선도 주지 않는다. 마음이 싸하게 저려왔다.
"응, 올해 크리스마스 파티에 올꺼지?"
"당연하지. 내가 어디 가겠어."
당연하다는 듯한 시현이의 말에, 선미가 진우를 슬쩍 본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표정이 보이질 않는다.
"그래. 그래서 말인데, 23일날 저녁에 물건 좀 사러 갈까 하는데, 시간 좀 괜찮아?"
"23일?"
얼른 머리를 굴려본다. 23일은 성우 오빠의 스위트룸 파티 데코레이션을 돕기로 했다. 24일의 프러포즈를 위해 전날 미리 셋팅을 완료하는 것이다. 스위트룸의 하루 대여비를 생각하면 어마어마한 금액이었지만, 성우 오빠는 전혀 아깝지 않다고 했다.
"어, 나 23일은 저녁에 약속 있는데......"
"그럼 안되겠네...아쉽다."
"잠깐만, 나 전화 좀 한번 해보고 올게."
"아니야, 그러지마. 약속 있으면 가야지."
"아냐, 아냐. 금방 전화 한통만 하고 올게."
어처피 방 꾸미기는 낮부터 시작하는 계획이었기에, 조금만 서두르면 저녁에는 시간을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자리에서 전화를 할까 했지만, 진우가 신경 쓰였다. 잘은 모르겠지만 진우가 성우 오빠를 견제하는 것만 같았다. 가뜩이나 차가워진 진우를 불필요하게 자극하고 싶진 않았다. 얼른 방으로 들어가 전화를 걸었다.
"네, 오빠 전데요...."
집에 오니 시현이가 마루에 앉아 있다. 외출복 차림에 머리도 푸르고 있는 모습이 여전히 사랑스럽다. 오른쪽 머리를 귀 뒤로 넘겨서 귀와 목덜미가 살짝 보인다. 하얀 목덜미. 시현이를 안은지 너무 오래 됐다. 저도 모르게 아랫도리에 힘이 들어가는 것 같아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요새는 문자도 드문드문 하다. 자꾸 미소와 체육관 형들의 말이 떠오른다.
"아니겠지. 말도 안돼." 라는 생각으로 뿌리치려고 했지만 지워지지가 않는다. 생각해보니 성우라는 놈은 시현이의 정체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런 친절한 태도를 보인다고 생각하니 의심이 자꾸 커진다. 시현이를 이해할 수 있는 남자가 또 있다는 생각을 하니 뜨거운 질투가 밀려온다.
혼자 식탁에 밥을 차려 먹었다. 예전 같으면 시현이가 달려와서 반찬이라도 꺼내줬을텐데, 시현이는 미동도 없다. 괜시리 마음이 섭섭해진다. 조금 떨어진 거리와 TV 소리 탓에 작게 들리긴 했지만 시현이와 선미 누나의 대화 소리가 들린다. 크리스마스에 약속 없다는 시현이 말에, 선미가 진우를 힐끔 쳐다본다. 진우는 잽싸게 고개를 숙이고 식탁 위에 멸치를 째려봤다. 김본좌 말대로 뭔가 준비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23일날 물건 사러 같이 가자는 말에 시현이가 난색을 표한다. 예전 같으면 시현이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알겠지만 냉전 분위기 탓에 무슨 약속이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원래 보육원에서는 크리스마스 전에 동생들 선물을 사놓는다. 그럼에도 23일날 약속을 잡다니. 누구와의 약속이길래?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머리를 흔들어 털어냈다.
"아닐거야. 설마...설마.."
시현이가 전화를 하겠다며 방으로 들어가자, 저도 모르게 잽싸게 그 뒤를 따라갔다. 선미 누나가 모르는 척 쳐다보는 느낌이 들었지만, 애써 무시했다. 이런저런 계산 할 때가 아니었다. 최대한 조용히 문 뒤에 귀를 갖다댔다.
"네, 오빠 전데요...23일이요. 네, 좀 일찍 시작해야 할 것 같아요. 저녁에 언니가 보자고 해서....일단 저 먼저 들어가 있어도 되죠? 네,네..방은 잡았으니까. 그럼 저 로비에서 뭐라고 해야 되요? 성우 오빠 이름 말하면 되요?...."
그 새끼 이름이 나오는 순간, 머리에 하얗게 번개가 내려친 것 같았다. 며칠 전, 미소가 했던 얘기가 생각났다.
"호텔에서 어떤 남자랑 있는거 봤다니까."
"얼굴 허옇고 기생오라비 같이 생긴" "엘리베이터로 올라가는 거 봤어"
"웃음이 떠나질 않더만."
갑자기 머리가 뱅글뱅글 도는 기분이 들었다. 하마터면 다리가 풀려 문을 칠 뻔 했다. 평소보다 몇 배는 다리에 힘을 주고 방 문에서 물러섰다. 서있을 수가 없어 식탁 의자에 앉아 물을 들이켜는데, 시현이가 나왔다. 새초롬한 표정으로 복도를 건너 마루로 향한다. 잠깐 시선을 마주치더니 금세 고개를 돌린다. 근 한 달간 계속되는 모습이다.
그 모습을 보니 조금 전까지 온 몸을 감싸던 충격이 일순간 시뻘겋게 몸부림 치는게 느껴진다.
분노.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쥔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 들고, 피가 몰려 빨갛던 주먹이 순식간에 하얗게 변한다. 어금니가 바스라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턱에서 힘을 뺄 수가 없었다. 지금 힘을 빼면 욕설이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아직이다. 아직이야. 확인. 확인을 해보자. 아직 아무것도 확실치 않잖아. 침착해. 침착해, 이 새끼야. 제발 좀!!!"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쥐고 속으로 계속 되뇌였다. 침착해라, 침착하자, 고.
오랜만에 창고 방에 혼자 눕자, 진우가 건너오지 않을까하는 기대가 들었다. 처음 진우가 건너오던 날처럼 가슴이 두근두근한다. 조용한 핸드폰을 보며, 혹시 꺼진게 아닐까 자꾸 폴더를 열어보지만, 파랗게 빛나는 액정 화면엔 "문자메시지 0통"이라고 써있다.
"나쁜 새끼...언제는 죽을 때까지 사랑할꺼라더니.."
이불을 이마까지 끌어올렸다. 금세 이불이 젖어든다.
이브를 하루 앞둔 거리 분위기는 더욱 시끌벅적해진다. 여기저기서 구세군 모금 종소리가 울리고, 크리스마스 캐롤이 울려퍼진다. 바쁘게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 얼굴에도 알 수 없는 설렘과 기대감이 자리 잡고 있다. 시청 앞 광장에도 많은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포토포인트가 된 커다란 크리스마스 트리는 사진 찍으려는 사람들로 붐비고, 예년보다 넓은 스케이트장엔 사람들이 가득하다.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둔, 23일 풍경이었다.
그런 들뜬 분위기와 대조적으로 차가운 눈동자를 빛내는 남자가 호텔 커피숍에 앉아 있었다. 진우였다. 정오를 지나서부터 자리에 앉아 호텔 로비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을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노려본다.
이윽고, 진우의 눈에 시현이가 띄었다. 평소처럼 수수한 차림이었다.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스니커즈 운동화와 반들반들 닦여진 호텔 로비가 묘하게 매치된다. 로비로 다가가 뭔가 얘기를 하더니 복도로 사라졌다. 황급히 따라가보니 엘리베이터로 사라지는 뒷모습이 보인다. 꽉 깨문 아래턱이 딱딱해진다.
"아니야, 금방 나올 수도 있잖아."
애써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 금방 나오길 바라며, 뭔가를 전해주고 나오는거겠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섹스하는데 얼마나 걸리지." 세차게 머리를 털어냈다. 생각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자꾸 여기저기서 그런 생각이 솟아난다. 자지를 빨며 올려다보던 시현이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럴 때 시현이의 얼굴은 정말 섹시했다. 나 아닌 누군가가 그 모습을 봤을까.
시현이가 나오길 바라며 로비 복도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얼마나 있었을까. 그 새끼, 성우의 모습이 보였다. 설마 성우가 나타날꺼라고 생각도 못했던 탓에 반응이 늦었다. 잽싸게 뛰어갔지만, 엘리베이터가 닫혀버렸다.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숫자를 보고 있자니 몸 속에서 뭔가가 머리로 솟구쳐 오르는 느낌이 든다. 붉다 못해 하얗게 질려버린 뜨거운 기운이 머리 부위에서 터져버렸다. 손에 쥔 상자를 내팽겨쳤다. 작은 여자 시계가 자르륵- 쏟아진다. 가슴에 뜨거운 열기가 입으로 터져 나온다.
비명같은 외침 소리에 놀라 뛰쳐나가보니 곰탱이 새끼가 끌려나가고 있다. 평소에 그렇게 날라다니던 실력은 어디갔는지 병신같이 몸부림만 친다. 보안요원들에 끌려나가서도 한참을 씩씩대더니 어디론가 사라졌다. 하루종일 로비가 보이는 자리에 죽치고 앉아있더니 못 볼껄 봤나보다. 괜히 말해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언젠간 알게 될 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불쌍하기도 하고, 걱정도 된다.
저 새끼 성질도 보통이 아니던데.
약속했던 시간보다 일찍 방을 찾았지만, 벌써 교회 사람들이 작업을 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시현이는 예의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잡았다. 오랫동안 한 교회를 다닌 덕분에 성우 오빠의 인맥이 제법 넓은 모양이었다. 남자들도 있었지만, 여자들이 대다수다. "신부 언니가 싫어하겠네" 하는 익살스런 생각이 든다. 얼마간 작업을 하고 있으니, 성우 오빠가 들어온다.
"어, 오빠. 왜 이렇게 빨리 왔어요?"
"최대한 빨리 끝내고 왔지. 두근거려서 일이 손에 안 잡혀." 성우가 혀를 쏙 내밀며 말했다.
다들 자기 일처럼 열심히 해준 덕에 예상했던 시간보다 2시간이나 일찍 끝났다. 스스로 만족스러울만큼의 결과물도 나왔다. "야, 이거면 반지 받기 전에 눈물 흘리겠다." 성우 오빠가 장난스레 말하자 다 같이 빵 터진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일찍오지 말걸." 시현이가 귀엽게 웃었다.
호텔을 나서면서 핸드폰을 봤다. 문자메시지 0통. 마음이 시리다. 성우오빠 커플에 행복한 모습을 봐서 그럴까. 아니면 여기저기 가득한 크리스마스의 들뜬 분위기 탓일까. 들뜨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가 한결 초라하다. 잠시 시청 앞 트리를 올려다 봤다.
그러고보니 이 시기에, 여길 나와본 적이 없었다. 한 번도 커플인적이 없었으니까. 행복하게 웃는 커플들을 보니 갑자기 진우가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용기를 내 진우의 번호를 누르자, "전화기가 꺼져있어 음성사서함으로.." 하는 녹음된 목소리가 나온다.
"..하.."
저도 모르게 작은 한숨이 쉬어졌다. 시간을 보니 아직 선미 언니와의 약속시간이 한참이나 남아있다. 후텁지근한 스위트룸에서 집중 작업을 한 탓인지 안에 입은 나시티가 살짝 젖은 기분이 들었다. 집에 가서 옷이라도 갈아입어야겠다, 는 생각이 든다.
집 앞 골목에 들어서면서 보니 옆 집 단독주택 대문에 크리스마스 장식물이 걸려있다. 초록색 나뭇잎이 동그랗게 말려진 가운데에 "Merry Christmas"라는 문구가 써있다.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당 있는 집을 가져보고 싶다, 따뜻한 내 가정을 꾸미고 싶다, 크리스마스에는 트리 장식을 해야지...그런 생각들을 하며 걷느라 빨리 알아차리지 못했다.
오피스텔 건물에 거의 다 와서야 누군가 진입로 앞 주차장에 서있는 걸 봤다.
진우였다.
하마터면 펄쩍 뛸 정도로 기뻤다. 텔레파시가 통한 느낌이라고 해야 되나. 신기한 기분까지 든다.
진우는 고개를 숙여 땅바닥을 보고 있었다. 걸음을 재촉해서 진우에게 다가갔다. 한 달음에 달려가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왠지 지고 싶지 않다는 기분이 들었다.
진우의 앞에 서서 진우를 올려다 봤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진우는 시현이가 다가오는 걸 모르는 것 같았다.
"진우야." 시현이가 작게 부르자,
그제야 진우가 고개를 든다. 발갛게 충혈된 눈이 조금 부어있다.
순간, 진우의 눈동자가 떨린 것 같았다.
"짜--악!!!"
무슨 일이 일어난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눈에서 별이 튀는 느낌이 들더니, 왠지 모르게 몸이 주저 앉았다. 왼쪽 뺨이 불로 지진듯이 뜨거웠다.
시현이가 멍하니 진우를 올려다 봤다.
역광을 받은 진우의 얼굴이 새까만 그림자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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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다 쓰고 자겠다는 목표로 쓰다보니 12시가 넘었네요.
연속해서 올리는 글이 아니니 날짜변경 기준에 걸리진 않겠지요?
스토리의 연속성을 위해 여기까진 올려야겠어서 업로드 해봅니다.
항상 읽어주시고, 추천댓글쪽지 주시는 독자분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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