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惡魔)의 유혹>- 8부.
김필중의 다이어리 2.
3
간간히 들리는 발자국 소리, 정확하진 않지만 두러두런 말소리같은 울림들, 극심한 통증이 머리를 뽀개듯 해온다.
어떻게 맞아버렸는지 거의 눈을 떴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초점이 맞지 않아 바로 옆의 사물도 금세 분간하지 못
하고 있었다.
찝찌름한 것이 얼굴에 잔뜩 뭍어있었다. 느낌상 피일거라고 짐작해 보았다.
단단히 뒤로 고정되어 있는 손이 끈적해졌다. 얼마나 감아대었는지 테이프의 본드들이 늘어붙어버린 것 같다.
난 최대한 상체를 틀어 일어나 보려 애썼다. 시야가 확보되지 않아 몇번을 데굴데굴 구르듯 몸이 말을 듣지 않았
다.
서서히 눈에 들어오는 주위를 재빠르게 훑었다.
너저분한 물건들이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쌓여있는걸로 봐서 낯설지만 어느 공장의 창고쯤 되어 보였다. 그러다,
한쪽 끄트머리에 쓰러진 또 다른 사람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낯설지 않은 사내의 옆얼굴...
[서...성준아! ]
난 허벅지와 무릎으로 억지로 기어 녀석에게 다가갔다.
[으윽.]
심하게 당해 만신창이가 되어 있는 녀석의 얼굴은 정말 눈 뜨고 쳐다볼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다. 거기다 몸 조차도
성한데 없을것 같이 구타당한 흔적이 역력하다.
[성준아! 임마!]
무릎으로 녀석을 흔들며 혹시나 이미 죽어버린건 아닐까 하며 가슴 한구석을 찔러오는 감정을 애써 억눌렀다.
[으...으으...]
몰라보게 터져있는 녀석의 입사이로 가느다란 신음이 새어나왔다.
[성진아! 정신 차려! 야!]
[...효....횬.....니인....]
[말하지마. 묻는 말에 고개만 끄덕여.]
녀석은 고통에 일그러지는 얼굴을 애써 참으며 미미하게 머리를 움직인다.
[쿠데타냐?]
고개가 끄덕인다.
[우리 애들도 포함됐냐?]
또 고개가 끄덕여졌다.
[너네 애들은 아닐테고... 혹시... ]
녀석이 고개를 다시 끄덕이며 힘겹게 입을 연다.
[전...본...사....장...녀....쇼......뜨을...]
[전 사장 따르던 녀석들이?]
녀석의 대답을 확인한 후 난 이가 부서져라 갈아버렸다. 어렴풋이 짐작은 했지만 설마 그러리라고는...
[이런 개애 새끼들! 살려줬더니 뒤통수를 쳐?! ]
힘에 겨운듯 성준이의 눈이 다시 감겼다. 숨을 내쉬는걸 확인하고 난 몸을 일으켜 세워 몸 상태를 확인해보았다.
조심스럽게 문에 기대어 바깥의 상황을 확인하는 한편, 실내를 빠르게 둘러보며 결박을 풀 방법을 생각하기
바빴다.
[내가 왜 말뚝인지... 내가 왜 개 좆같은 개 말뚝인지... 보여주겠어. 씹세이들...]
물건을 쌓아둔 앵글들의 모서리가 눈에 들어왔다. 철저하게 조사를 한건지 딱히 손에 감긴 테이프를 제거할만한
물건이 보이지 않았다. 허술하게 그런걸 놔둘리가 없겠지만 최대한 이용할수 있는것을 찾다가 선반을 이루고 있
는 앵글들의 각진 모서리가 좋은 방법으로 떠올라버렸다.
-스윽. 슥슥. 스윽. 슥슥...
마찰력으로 손목 윗부분이 뜨거워졌다. 별 방법이 없다는 판단으로 난 이를 악물며 참았다.
조금씩 느슨해지는 느낌이 통증을 따라 뇌리를 스친다. 급히 생각해낸것 치고는 괜찮은 결과가 나왔다.
한동안 손목을 비벼대다가 어느순간 힘껏 닿아있는 손에 힘을 주자 쭈욱 늘어나듯이 테이프가 끊어지고 말았다.
붙어있는 테이프를 떼며 형편없이 까지고 긁힌 상처에 침을 발랐다.
성준이를 다시 확인하고 난 일어나 몸을 추스렸다. 허리에 차고 있던 혁띠를 풀러 오른쪽 주먹에 잡고 칭칭감듯
거머쥐었다.
[다 죽여버리겠어. 이제 씨발... 막장이야.]
##
-쾅쾅쾅!!! 쾅쾅!!
거세게 문을 걷어찬 후 난 귀를 기울이며 벽으로 잔뜩 몸을 웅크렸다. 곧이어 다급한 발자국소리들이 조금씩 커
진다 싶었다가 어느새 가까이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뭐야! 아무일도 없잖아!]
[깨어 났으면 쥐죽은듯 있지. 지랄을 해요 지랄을.]
[도착할때까지 별일 없게 하라했는데 확인 해볼까요. 형님?]
세명이다. 난 주먹을 다시 강하게 쥐어본다.
[그냥 냅둡시다. 형님. 지가 무슨 용빼는 재주가 있는것도 아니고.]
[너 손 잘 묶었지?]
[그럼요. 거의 한통 다 쳐 발라버렸는데요.]
[에이...씨부랄. 전화 다시 때려봐. 언제 도착하냐고. 개새끼가 꼴통부린다고 전해.]
[네 형님.]
[넌. 문 열어봐. 혹시 모르니 연장 들고.]
-끼릭! 덜커덩!
불쑥 들어오는 머리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가 급하게 회수한다. 그 사이로 시커먼 그림자가 길게 사내의 얼굴로 빠
르게 날아갔다.
-쉬익!
[우욱!]
동시에 몸을 일으킨 난 뒤따르던 녀석을 공중으로 몸을 띄우다가 내려앉으며 얼굴에 정확하게 주먹을 내리 꼿았
다.
-퍼억!
[흐억!]
전화를 걸고 있던 나머지 한녀석이 빠르게 다가왔지만 난 창고를 빠져 나오며 이미 반대쪽으로 빠르게 몸을 날렸
다.
(성준아... 조금만 참고 견뎌라. 얼른 끝내고 병원 데려가줄테니...)
[저 새끼 쫓아! 아놔! 이 씨발새끼! 명령이고 나발이고! 저새끼 담궈버렷!]
어지간히 맞은게 억울했는지 녀석들은 씩씩거리며 내 뒤를 쫓아오고 있었다.
난 통로를 뛰면서 스치는 것들을 살폈다. 그러다, 한쪽에 넘어져 있는 대걸레를 발견한다.
[좋았어.]
끝부분을 정확하게 발로 내리치자 보기좋게 손잡이의 나무가 꺾이며 마음에 드는 무기가 되어주었다.
도망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섰다. 뒤쫓아 오던 녀석들이 숨을 몰아쉬며 오만인상을 써댔다.
난 비릿하게 녀석들을 향해 미소지었다.
[니들은 이제 다 뒤졌어... 내가 씨발놈들아... 영등포 말뚝이야... 좆만한 것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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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석들이 발가벗고 있던 내게 옷을 입힌다고 입힌게 바지와 와이셔츠뿐인데도 몸이 편했다. 원래 아무것도 입지
않고 격렬한 운동을 하면 이렇게 자유로운 느낌이 드는건지 몰랐었다.
이미 셔츠는 피투성이가 되어있다. 목을 쥐고 쓰러져 움직임이 없는 녀석의 신발을 벗겨 신어보았다. 약간 헐렁
한 편이어도 쉽게 벗겨지진 않겠다.
바닥에 떨어져있는 손잡이를 빼면 한뼘쯤 되는 사시미를 주워 들고 계단 위와 바깥으로 통하는 입구에 신경을 집
중했다.
사시미를 찔러오다 팔이 부러져 역으로 배를 찔린 세명중 지위가 높은 녀석의 신음소리가 들려왔지만 안중에도 없
었다.
너덜한 옷들을 바로하고는 난 사시미를 쥔 손에 다시 힘을 주고 눈을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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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히 밖으로 나가려는데 공장건물 입구옆으로 사무실처럼 생긴 방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웬만하면 그냥 지나쳐 쓰러져있는 성준이의 치료를 위해 어떻게라도 구급차를 먼저 불러야 했지만 그 와중에도 이
상하게 내 발을 잡는 무언가가 느껴져 문에 바싹 기대었다.
[변태든...뭐든... 일단은 살려둔걸...고마워해 개자식아....훅훅...우...보지보다 쎈데...]
[아윽... 그만요! 살려주세요!]
낯익은 목소리. 혜미라 했던가... 빠르게 그녀의 모습이 눈앞을 스치며 지나갔다.
자세를 낮춰 옆으로 조금 이동한 후 조심스럽게 창문으로 안쪽을 확인했다.
내 시선과 등을 진 사내녀석과 혜미일것 같은 조그마한 몸이 뒤엉켜 열기를 뿜고 있다. 민망하게 엎드려 사내의 좆
을 박히고 있는 그녀의 뒷모습이 상당히 힘들어보인다고 느낀건 내 개인적인 생각일 뿐일까.
다른 놈이 보이지 않아 다행스러웠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쾅!
문을 박차고 들어서자 놀란 눈으로 날 쳐다보는 녀석에게 몸을 날리며 사시미를 쭉 내밀었다. 배를 움켜쥔 그 놈이
채 죽지 않은 자지를 덜렁이며 뒤로 벌렁 넘어간다.
내 몰골과 쓰러진 녀석을 번갈아보며 벌벌 떨고 있는 그녀에게 시선을 돌리며 널려져 있는 옷가지를 집어 던져준
다. 달랑거리는 그녀의 작은 자지가 잠깐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옷인지 쓰러진 녀석의 옷인지 분간할 정신도 없었는데 앙큼한 그녀의 엉덩이를 가리는 타이트한 모습을
보니 그것만큼은 그녀의 옷이 맞는가 보았다.
[얼른 입어.]
그녀는 얼어붙은 모습 그대로 어기적 어기적 몸을 움직였다.
쓰러진 녀석의 머리를 움켜쥐고 살짝 일으키자 고통에 일그러진 녀석의 얼굴이 끙끙대고 있다.
[죽을 정도는 아니야 씹세야! 제대로 안 쑤셨거든. 묻는말에 잘 대답 안하면 아주 골로 보내줄테니 알아서 해 썅노
므 새끼야!]
꾸역꾸역 흐르는 피가 이미 바닥까지 적시고 있었다.
[여기 어디야! 어디쯤이냐고!]
[도... 도봉산...아래....]
[여기 공장 이름!]
[창대... 창대 물산....]
[여기 몇명이 지키고 있었어!]
[넷이서.... 네명....]
안에서 쓰러뜨른 놈들과 합하면 녀석까지 네명이다. 그렇다면 이제 성준이를 데리고 여길 뜨는것이 더 빠르지 않
겠는가. 난 재빠르게 머리를 굴리고 다시 녀석을 다그쳤다.
[여기 누가 오기로 했나본데 다른 일행은 언제 오는거야? 엉!]
[중...중간...지점서 인솔할....사람이...있대서... 몇...십분내로...도착 할거요...]
시간이 얼마 없다. 녀석을 팽개치고 방안을 둘러보며 무언가를 급히 찾기 시작했다. 남자 점퍼의 주머니에서 내가
찾던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레깅스 위로 셔츠와 점퍼로 대충 걸친 그녀를 돌아보며 휴대폰을 쥐어주고 밖으로 나섰다.
언제부터 내렸는지 얇게 쌓인 눈이 계속 내리고 있었다. 점점 우리들에게 불린한 조건만 생기고 있었다.
넓은 마당 옆으로 두대의 승용차가 멀리 눈에 띈다.
[너 내 말 잘들어!]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얼른 끄덕이는 그녀가 불안했지만 달리 방법이 없다.
[저기 차 보이지? 좀 춥겠지만 죽는거 보다 났잖아. 저 뒤로 가서 안보이게 숨어있어. 그리고... 112에 신고하든
어디로 전화하든 해서 짭새들 좀 불러. 여기 도봉산 밑에 창대물산이다. 내말 무슨 말인지 알겠어?]
내 손을 따라갔던 시선이 다시 날 올려보며 급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파르르 떠는 어깨가 두려운 마음도 있겠지만 몹시 추워하는것 같았다.
[안에 내 일행이 있다. 데리고 오면서 입을 옷이라도 있나 찾아볼테니... 잘 숨어있어. 혹시... 어떤 놈들이 오더라
도 절대 움직이지 말고 알았어?!]
[네.............]
잔뜩 움츠린 몸을 이끌고 내가 시킨곳으로 걸어가는 뒷모습을 본 후 급히 몸을 돌렸다.
사무실에 쓰러진 녀석 주변을 다시 뒤져보지만 나오는건 없었다. 신음이 약해졌다. 깊이는 맞춰 찔렀는데 피를 많
이 흘리고 있어 빨리 옮기지 않으면 위험할수도 있을것이다.
안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세 놈은 이제 전부 움직임이 없다. 죽었는지 기절한건지 나에겐 별 상관이 없었다.
녀석들의 옷을 전부 뒤지다 사시미를 들고 설쳤던 일행중 지위가 높은 놈의 허리춤에서 열쇠꾸러미를 떼어냈다.
갇혀있던 창고로 달린다.
[성준아! 임마! 정신차려봐!]
[으...으...]
아직 늦지 않아보여 한시름이 놓였다.
성준이는 힘겹게 눈을 뜨며 형편없는 얼굴에도 씨익 웃는것 같아 보였다.
[일어나봐. 여기 얼른 떠야돼. 놈들이 도착하면 우리 다 죽는다. 조금만 힘내라.]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켜 보지만 왼쪽 다리는 전혀 움직임이 없었다. 그나마 버티는 오른쪽 다리도 성한편이
아니었기에 거의 내 몸에 의지해야 겨우 발을 뗄수 있을 정도였다.
축 늘어져 부축을 받은 몸의 성준이와 사무실쪽 입구까지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도 짐작할수 없을만큼 더디게
아주 더디게 도착했다.
공장 마당으로 나서며 차갑게 내려와 녹는 눈의 느낌을 받으며 한걸음을 옮겼다.
내가 지시한대로 두대의 승용차에 숨어 있을것 같은 그녀를 찾아보지만 잘 숨어 있는건지 내 위치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걸어가는 길 뒤로 축 늘어져 있는 반대편 팔에서 떨어진 피가 한방울씩 점을 찍고 있었다.
[조금만 참아라... 죽어버리면... 나한테... 뒤지는 줄 알어...]
걸음을 제촉해보지만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거의 중간쯤을 지났을까.
정문부터 환해지는 불빛들과 요란한 엔진소음이 내 머리를 촤악 세워버린다.
다가오는 소리와 종류로 봐서 한 두대정도의 무리는 결코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윽고 정문을 재빠르게 통과하며 급회전을 해대는 숫자가 열을 넘어갔다. 승용차와 승합차가 뒤섞인 그 무리들은
정문을 거의 막은 채 굉음(轟音)을 낸다.
잠시 후 시동이 꺼지고 헤트라이트 사이로 그림자들이 일제히 차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설마 나 하나 때문에 이 많은 인원이 모이게 된건 아닐텐데도 엄청난 숫자가 헤트라이트를 등지고 버티고 선다.
연장을 챙겨든 무리들을 헤집고 세사람이 앞으로 나서는것을 보면서 난 메고 있던 성준이의 한팔을 다시 고쳐
잡아본다. 여차하면 안고서라도 뛸 작정이었다.
그런 내 꼼수를 비웃기라도 하듯 온 몸의 털이 곤두서는 목소리가 내 귀를 때려왔다.
[이여~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예상밖으로 운동 좀 하셨나봐? 주인님?]
(주... 주...주인님...?)
찰나의 순간에 뇌리를 스치는 한가지가 생각하기도 싫은 상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어라어라. 한달 겨우 지났는데 벌써 이 목소리를 잊어버리신건 아닐테고... 천하에 김필중이란 사람이 설마 쫄아
버렸나? 말좆 자랑이라도 하실줄 알았는데 말이야.]
[너... 설마...]
난 온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설마 그녀일줄이야.
보스에게 바쳐졌던 설란. 그녀가 우리 신진파의 일에 개입되었을 줄이야.
[그럼... 네년이... 회장님을 부추겼단 말이냐?]
난 이를 갈며 말을 뱉었다.
[회장님? 어떤 회장님? 아~ 그 코끼리 같은 늙탱이 말하는거야?]
[뭐 뭐? 늙탱이?]
[그 돼지같은 영감이라면 지금쯤 내가 먹인 마약에 쩔어서 홍콩을 헤매고 있지 않을까?]
[뭐?]
[내가 아직도 김필중 너의 노예로 보이나보지? 왜 내가 너에게 이런 얘기를 해주는지는 모르겠지만, 한가지만
말해주지. 곧 죽을테니 죽기전 마지막 선물로 생각해도 되고...]
[이런...쳐 죽일... 이러는 이유가 뭐야!!]
목에서 뿔룩 핏대가 생길만큼 난 고함을 쳤다.
[호호호. 병신같은 새끼. 아직까지도 좆또 모르고 있네. 너 같은 피래미 잡으려고 이 고생하고 있는줄 아니? 내가
그렇게 싸 보여? 넌 그저 대 동방파를 잡는데에 걸리적 거리는 쓰레기에 불과한 놈이야. 알아?]
(동방파를 잡아?)
그녀의 옆에 서있던 두 그림자가 몇발자국 앞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희미하던 얼굴이 가까워지면서 그들의 진면목(眞面目)이 드러났다.
[당신들은........]
난 주체할수 없는 두려움과 답답함으로 부축하고 있던 성준이를 놓고 말았다. 풀썩 쓰러지는 성준이를 살피지도
못하고 얼굴을 드러낸 그들에게 시선을 고정한채 팔을 덜덜 떨어댔다.
[이거이거. 요즘 건달세계 왜 이래. 하늘같은 선배보고 당신이라질 않나 한딱까리도 안되는 것들이 기어오르질
않나. 물 좆같이 흐려졌구만 그래.]
왼쪽의 사내가 이죽거리며 말하고 있다.
서방파(西方派)... 서울 외곽의 맹주(盟主)... 그 서방파의 보스. 흑호(黑虎) 조경두...
예전 사장이 있을 당시 3대 보스들의 회합(會合)이 있던 날 감히 가까이에 가지도 못했지만 먼 발치에서 본적이
있는 사내였다.
힘도 장사였지만 권술(拳術)에 상당한 실력이 있어서 권투(拳鬪)도 즐기고 격투기 또한 대단한 실력이라는 소문
이 자자했다. 그가 관리하는 권투 체육관과 격투기 도장이 서울에만 수십개가 된다는걸 보면 그리 헛소문은 절대
아닐것이다.
그도 놀랍지만, 더욱 놀라는 인물은 그 옆의 사내였다.
따지고 보면 나와도 적대(敵對)관계가 아닐수 없는 그.
강북연합파의 보스가 이자리에 조경두와 같이 버티고 서있다는건 보통 일은 결코 아니다.
뭔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은 분명한데 삶을 마감할것 같은 이런 상황이 되어서야 겨우 눈
치를 채다니 정말 내 자신이 멍청하다.
강북연합파는 말 그대로 명동을 일대로 군소(群小) 조직들이 연합하여 배부른 강남지역의 동방파와 적대관계를
이루고 있는 조직이다. 특히,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를 거치고 혼란했던 대한민국의 건국전후를 아우르는 초창
기 건달조직의 명맥(命脈)을 유지하려는 전통을 중시해 이름만 들어도 일반인들도 잘 알고 있는 옛 건달들을 존
경하는 마음으로 조직을 꾸려오고 있어서 자부심만으로는 동방파 조차도 비교될 수준도 못된다.
그런 그 강북연합파의 연합회장. 왕손이. 나조차도 이름은 모르고 그저 왕손이라고만 들었던 그 인물.
유명한 김두환이 잇뽕으로 발차기 한번에 한놈씩 나가 떨어졌다면 왕손이는 주먹 한방에 안나가 떨어지는 인물이
없을꺼라고 한다. 만약 권술에 능한 조경두와 주먹 한방이라는 왕손이가 붙으면 어떻게 될까하고 일어날것 같지
않은 상상을 하며 내기를 해본적도 있을 정도였다.
서로 주먹을 맞대야 할 두 사람이 저 쳐죽일 년과 나란히 서서 내 눈 앞에 나타났으니 이런 경우를 어떻게 받아들
여야 하겠는가.
분명한건 그녀가 얼핏 말한 내용으로 봐서 지금 동방파에도 이상기류(異常氣流)가 있다는 것과 동방파 보스인
차명환의 신상(身上)에도 뭔가가 진행중이라는건 확실해 보였다.
(뭐가 되었든 빠져 나가야 한다. 어떻게든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러는 이유가 뭡니까? 두분은 적이지 않습니까? 또 서로 불가침(不可侵)하기로 정하셨잖습니까?]
[불가치임? 좆 빠는 소리하고 앉았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同志)가 되는거고 어제의 약속이 오늘 깨질수도
있는거야 짜샤!]
입을 굳게 다문채 기둥처럼 조용히 버티고 선 왕손이와는 달리 조경두는 뭐가 그리 못마땅한지 툭툭 내뱉는 음성
에 짜증이 잔뜩 뭍어 있었다.
또각거리는 소리를 내며 그녀가 그들 사이로 다가오자 특유의 잘빠진 실루엣이 아른거린다.
[오빠들. 2진들 도착할 시간 다 되어가요. 쓰레기는 얼른 치우고 안으로 들어가죠.]
끝을 알리는 소리같이 그녀의 말이 섬뜩하게 들려왔다.
난 다급히 돌아서는 그녀에게 외쳤다.
[당신... 도대체 이러는 이유가 뭐야! 우리 조직에 접근한것도... 나에게 접근한것도... 아니... 이 모든게 다...다
니가... 니가 계획한거야?! 그런거야?!!]
미끈한 다리에 신긴 섹시한 하이힐이 돌아선다. 도발적으로 팔짱을 낀 자세로 엉덩이 한쪽을 치켜 세우며 날 노려
보기 시작했다.
[어이... 이 저능아 같은 새끼야. 시시콜콜 너 같은 새끼에게 다 말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이것만 기억하고 염라
대왕 만나러 가라...... 난 말이야. 킹콩인지 땅콩인지 하는 새끼랑 동방파를 쳐 부셔버릴수만 있다면 내 부모도 팔
수 있어. 넌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를 못하겠지만 말이야. 그러니 조용히 뒤져............................]
[이... 씨발....괴물같은.....]
[아! 한가지 더. 그래도 니 좆은 괜찮았어. 어쩔때는 정말 뿅가기도 했다구. 이건........진심이야. 잘가....말좆.]
[이이..........으아아아아~~~]
내 울부짖음에 그녀는 등을 돌려 멀어졌고 두 보스도 그녀를 따랐다. 그들 사이로 한녀석이 한눈에 보기에도 날카
롭고 긴 칼을 끼고 장갑을 끼우며 다가왔다.
잔뜩 긴장한 난 자세를 잡아 보았지만 다가오는 녀석의 쭉 ?어진 매서운 눈이 말려 올라가며 혀를 찬다.
[쯧쯧쯧. 소용없어. 어차피 뒤질꺼 나한테 깨끗하게 가는게 고통도 덜할꺼다.]
전혀 협박으로만 들리지 않는건 다가오는 사내의 칼쓰는 실력이 그만큼 상당한 수준일거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보통 그런류의 인간을 보면 평범한 사람들은 절대 가질 수 없는 능력을 발휘한다.
첫번째가 아니면 두번째에는 위험하다. 정말 난 죽는것일까...
한손만으로 칼을 뱅그르르 돌려댄다. 움직임이 장난이 아니었다.
비릿한 미소가 입에 걸렸다 싶은 순간,
-쇄액~!
움직임을 놓쳤다. 눈 깜짝할 순간에 한걸음 안으로 들어오는 녀석의 움직임을 읽을수가 없었다. 그리고, 가까워지
는 빛줄기...
-푸욱!
[으으....]
몸도 가누지 못하던 성준이가 날 감싸며 등에 녀석의 칼이 깊숙히 꼿혀있다.
[서... 성준아!]
[효....혀.....니임...어...어...서....으으...]
[이런 제길!]
녀석이 성준의 등에서 칼을 빼내고 있다. 난 얼른 성준이를 내려놓으며 달려들었다.
녀석의 손목을 움켜쥐고 반대편 팔을 들어 팔꿈치로 정확하게 안면을 가격했다.
[크윽!]
얼굴을 감싸쥐는 틈을 노려 손목을 낚아채 칼을 빼앗으려 힘을 썼다. 뺏기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녀석을 재차
가격하고 칼을 조금씩 녀석의 목 가까이로 가져다 댄다.
있는 힘을 다하다 난 인정사정없이 눌러버렸다.
-쓰악!
[꾸르륵...끅...끅!!!]
목을 움켜쥔 채 데굴데굴 구르는 녀석을 발로 걷어차고 성준이를 내려다본다. 어느새 분노에 가득찬 내 눈에 이슬
이 맺혔다.
갖가지 연장들을 챙겨든 녀석들이 물밀듯이 달려든다.
양손에 칼을 들고 난 다가오는 녀석마다 한번씩 휘둘러 저지했다. 하지만, 한계가 곧 찾아왔다.
-퍽 퍼퍽!
[으악...윽윽...]
비틀거리면서도 다가오는 두어명에게 다시 칼자국을 내고 버티려 애썼다.
후들거리는 다리는 바람만 불어도 꺾일것이다. 이제 할만큼 한것이라고 속으로 위안을 삼았다.
(아... 이렇게 죽는구나... 그러고 보니... 내 태어날때도 눈이 왔다던거 같은데... 잊어버렸네...)
겨우 버티는 몸으로 슬쩍 바라본 하늘에서는 여전히 눈발이 흩날린다. 소복히 쌓여있던 넓은 마당은 수많은 발
자국들과 시릴정도로 밝은 선홍빛 피들이 여기저기 꽃잎처럼 뿌려져 있었다.
이제 칼을 들고 반격할 힘도 없었다. 녀석들이 다가오는데도 팔이 들리지 않았다.
-끼이이이익~
내 어딘가로 칼이 박히는 소리가 들릴꺼라고 자포자기하는 순간, 날카로운 바퀴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렸다.
내가 찍어둔 자동차 두대 중 한대가 급하게 후진을 하며 몇명의 사내들을 들이받아 버린다.
갑작스런 상황에 날 둘러싸고 있던 녀석들도 당황하며 멈칫거렸다.
후진하던 승용차가 긴 원을 그리며 녀석들을 몰아세우다가 기어소리와 함께 다시 급발진하듯 내가 버티고 선 곳
으로 돌진해왔다.
-끼이익!
차를 피하려 여러명의 구르는 순간 내 옆을 스치던 차가 멈춘다.
[빨리 타시오! 우물쭈물할 시간 없소. 얼른!]
뒷좌석에 엎드린 채 꼼짝을 안하고 있는 혜미도 보인다. 낯선 사내였지만 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재빨리 조수석으로 몸을 날렸다.
차가 움직이자 뒷유리로 연장들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운전하던 사내는 앞쪽만 시선을 고정한채 벌써 서너명의
녀석들을 들이받으며 교묘하게 속도를 올렸다.
아슬아슬한 공간을 뚫고 정문을 빠져 나오자 몇대의 차들이 머리를 돌리고 있는것이 멀어지고 있었다. 곧 따라잡
힐것 같았지만 운전석의 그라면 왠지 따돌릴수 있을것 같아 보였다. 왜 그를 믿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이 상황을 피하는게 상책이라고 마음 먹었다.
난 뒷좌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엎드려 있던 그녀가 빼꼼 머리만 들고 눈만 이러저리 굴리고 있었다.
[이리와.]
그녀가 일어나 조수석 가까이에 몸을 기댔다.
난 얼른 그녀의 여기저기를 만지며 몸을 확인했다.
[다친데 없어?]
똥그란 눈이 금세 울듯했지만 그녀는 크게 고개만 끄덕이며 울음을 참고 있었다.
난 그런 그녀의 머리를 한차례 쓰다듬고는 툭툭거려 보았다.
그런 날 운전하던 그가 슬쩍 쳐다보고 있다는 걸 알았다.
[고맙긴 한데... 누구슈? 초면인거 같은데...]
[아직 안전한건 아니오. 차차 얘기하고 뒤나 잘 살펴주시오. 잠시 후에 지름길로 빠질테니.]
그의 말대로 쫓아오는 차들이 있을것이 분명하기에 난 뒤를 살폈다.
급하게 꺾이는 차로 인해 난 손잡이를 꽉 붙잡았다.
(성준아...)
난 점점 멀어지는 건물에 시선을 던지며 빠드득 소리를 내며 이를 연속으로 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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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상 주차장에 아무렇게나 차를 세우고 그를 따라 미리 준비해놓았는지 파킹된 SUV 차에 올랐다.
[차를 바꿨으니 이제 조금은 안심입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차가 멈출때에는 서로 조심합시다.]
그녀와 같이 뒷좌석에 올라탄 난 백미러의 눈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히터가 나올때까지 약하게 떨던 그녀를 살짝 안은 자세로 옆을 살피며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뒤를 바라보는 사내의 눈이 자주 이어졌지만 왠지 꿍꿍이가 있어보이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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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으로 들어선 차가 주변으로 아파트 건설이 한창인 지역으로 이동하더니 지은지 얼마 안되는 건물 지하주차장
에 멈춰 섰다.
주차장에서 부터 이어진 엘리베이터로 상당히 높은층까지 올라가자 그가 따라오라는 손짓을 한다.
신축건물답게 페인트 냄새가 곳곳에서 풍겼다.
넓은 실내에도 마찬가지로 신축건물 냄새 살짝 나고 있다. 이래서 새집증후군이라는 말이 나오나보다라고 생각해
보았다.
깔끔하게 잘 정돈 된 실내가 그래도 긴장감을 풀어주고 있었다.
[당분간은 여기서 지내시오. 웬만하면 밖에 안 나가는게 좋을거요. 혹시라는게 있으니 말이요.]
쇼파에 앉자마자 그가 손에 든것을 내밀었다.
[뭐 필요한게 있으며 이리로 전화하시오. 겨우 빠져나온것을 잊지 말고 섣불리 바깥으로 나가는 일이 없었으면
싶소.]
[얘는 몰라도 난 할일이 있수. 여기서 미적거릴 시간이 없다고. 얼른 위에다 알려야...]
[알고 있소. 그 점도 이미 다 파악했소. 동방파 안에 내게 연락을 주는 사람이 있으니 김필중씨는 내 말대로 당분
간 참고 기다리면 됩니다.]
[당신 내 이름은 어떻게 아는거요?]
[차차 설명하도록 하고... 일단 저쪽 옷방에 가면 두분 다 갈아 입을 것들이 있을거요. 김필중씨는 나랑 체격이 비
슷하니 웬만하면 맞을거요. 그리고... 여성분은... 내 애인 옷이 조금 크겠군요. 아주 아담하시니... 그래도 맞는 옷
을 찾아보시오. 그런대로 입을만 할겁니다.]
[이봐요. 구해준건 고맙지만, 우리 조직이 지금 위험하다니까 그러네. 그러니 옷 갈아입고 차 좀 빌립시다. 얼른
알려야 한다고 엉?]
[지금 그곳에 가면 당신은 정말 죽어. 그 마녀(魔女)가 그리 허술하게 있을리 없다고...]
[마...마녀?]
[좋은 말 할때 내 말 들어. 동방파 보스가 위험한 상황에 처해지는건 십중팔구 사실이 되겠지만 아직은 그저 별일
없이 지내고 있다. 문제는 그 마녀랑 보스 주변에 그들이 심어둔 배신자들이라고. 지금 김필중 당신이 그곳으로
달려가면 입도 뻥긋 못하고 그대로 세상 하직하는거야. 상황이 바뀌면 가기 싫어도 가게 될테니 내가 말한대로 일
단 몸도 추스리고 차분히 생각 좀 하자고.]
[마녀? 배신자?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어야 할거 아냐. 이런 젠장할...]
[궁금해도 일단 상황을 지켜봐야 해. 조바심 나도 좀 참아. 동방파에는 아직 별다른 상황이 없다니까.]
사내가 일어나며 나갈 채비를 하는듯 했다.
[만약 당신이 밖을 돌아다니거나 동방파 본부로 뛰어가거나 해서 다행히 죽기만 하면 그만이지만 혹시라도 그로
인해서 내 존재가 드러나게 된다해도 난 충분히 숨을 자신이 있어. 그저 그러지 않길 빌 뿐이지.]
일단은 그의 말을 따라야했다. 나에게 무언가를 바라고 있는것 같지도 않고 뭘 원한다는 말도 없었다. 그렇다고
날 현혹(眩惑)하듯 하는 말투도 아니었다.
[좋아. 좋다고. 대신... 지금까지 한말 조금이라도 틀린말이 있으면 나 정말 돌아버릴꺼야.]
그가 내 말에도 씨익 웃어버린다.
[틀린말이 아니라 진짜 진실을 듣게 될때 당장 죽이겠다고 뛰쳐 나가지나 마시오.]
[젠장할...... 좋아. 그럼 다른건 그렇다 치고 당신이 누군지나 좀 압시다. 날 구해준 은인의 정체정도는 알아야 원
수를 갚든 은혜를 갚든 할거 아니오?]
자리를 피하던 그가 멈칫했다.
[벨이 두번 울리고 끊어지는 전화 외에는 받지 마시오. 그리고............. 강상철이란 이름 기억나시오?]
그의 입에서 뜻밖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가...강상철......]
[나 그놈 친구인 윤선호라 합니다.]
[치...친구.........]
섬뜩한 얼굴을 하면서도 미소를 지우지 않던 그가 다시 입을 뗀다.
[당신과 함께... 여러사람 잡아 먹은 마녀(魔女)나 사냥해 볼까 하고 말이오.................]
-To be continued.
김필중의 다이어리 2.
3
간간히 들리는 발자국 소리, 정확하진 않지만 두러두런 말소리같은 울림들, 극심한 통증이 머리를 뽀개듯 해온다.
어떻게 맞아버렸는지 거의 눈을 떴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초점이 맞지 않아 바로 옆의 사물도 금세 분간하지 못
하고 있었다.
찝찌름한 것이 얼굴에 잔뜩 뭍어있었다. 느낌상 피일거라고 짐작해 보았다.
단단히 뒤로 고정되어 있는 손이 끈적해졌다. 얼마나 감아대었는지 테이프의 본드들이 늘어붙어버린 것 같다.
난 최대한 상체를 틀어 일어나 보려 애썼다. 시야가 확보되지 않아 몇번을 데굴데굴 구르듯 몸이 말을 듣지 않았
다.
서서히 눈에 들어오는 주위를 재빠르게 훑었다.
너저분한 물건들이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쌓여있는걸로 봐서 낯설지만 어느 공장의 창고쯤 되어 보였다. 그러다,
한쪽 끄트머리에 쓰러진 또 다른 사람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낯설지 않은 사내의 옆얼굴...
[서...성준아! ]
난 허벅지와 무릎으로 억지로 기어 녀석에게 다가갔다.
[으윽.]
심하게 당해 만신창이가 되어 있는 녀석의 얼굴은 정말 눈 뜨고 쳐다볼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다. 거기다 몸 조차도
성한데 없을것 같이 구타당한 흔적이 역력하다.
[성준아! 임마!]
무릎으로 녀석을 흔들며 혹시나 이미 죽어버린건 아닐까 하며 가슴 한구석을 찔러오는 감정을 애써 억눌렀다.
[으...으으...]
몰라보게 터져있는 녀석의 입사이로 가느다란 신음이 새어나왔다.
[성진아! 정신 차려! 야!]
[...효....횬.....니인....]
[말하지마. 묻는 말에 고개만 끄덕여.]
녀석은 고통에 일그러지는 얼굴을 애써 참으며 미미하게 머리를 움직인다.
[쿠데타냐?]
고개가 끄덕인다.
[우리 애들도 포함됐냐?]
또 고개가 끄덕여졌다.
[너네 애들은 아닐테고... 혹시... ]
녀석이 고개를 다시 끄덕이며 힘겹게 입을 연다.
[전...본...사....장...녀....쇼......뜨을...]
[전 사장 따르던 녀석들이?]
녀석의 대답을 확인한 후 난 이가 부서져라 갈아버렸다. 어렴풋이 짐작은 했지만 설마 그러리라고는...
[이런 개애 새끼들! 살려줬더니 뒤통수를 쳐?! ]
힘에 겨운듯 성준이의 눈이 다시 감겼다. 숨을 내쉬는걸 확인하고 난 몸을 일으켜 세워 몸 상태를 확인해보았다.
조심스럽게 문에 기대어 바깥의 상황을 확인하는 한편, 실내를 빠르게 둘러보며 결박을 풀 방법을 생각하기
바빴다.
[내가 왜 말뚝인지... 내가 왜 개 좆같은 개 말뚝인지... 보여주겠어. 씹세이들...]
물건을 쌓아둔 앵글들의 모서리가 눈에 들어왔다. 철저하게 조사를 한건지 딱히 손에 감긴 테이프를 제거할만한
물건이 보이지 않았다. 허술하게 그런걸 놔둘리가 없겠지만 최대한 이용할수 있는것을 찾다가 선반을 이루고 있
는 앵글들의 각진 모서리가 좋은 방법으로 떠올라버렸다.
-스윽. 슥슥. 스윽. 슥슥...
마찰력으로 손목 윗부분이 뜨거워졌다. 별 방법이 없다는 판단으로 난 이를 악물며 참았다.
조금씩 느슨해지는 느낌이 통증을 따라 뇌리를 스친다. 급히 생각해낸것 치고는 괜찮은 결과가 나왔다.
한동안 손목을 비벼대다가 어느순간 힘껏 닿아있는 손에 힘을 주자 쭈욱 늘어나듯이 테이프가 끊어지고 말았다.
붙어있는 테이프를 떼며 형편없이 까지고 긁힌 상처에 침을 발랐다.
성준이를 다시 확인하고 난 일어나 몸을 추스렸다. 허리에 차고 있던 혁띠를 풀러 오른쪽 주먹에 잡고 칭칭감듯
거머쥐었다.
[다 죽여버리겠어. 이제 씨발... 막장이야.]
##
-쾅쾅쾅!!! 쾅쾅!!
거세게 문을 걷어찬 후 난 귀를 기울이며 벽으로 잔뜩 몸을 웅크렸다. 곧이어 다급한 발자국소리들이 조금씩 커
진다 싶었다가 어느새 가까이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뭐야! 아무일도 없잖아!]
[깨어 났으면 쥐죽은듯 있지. 지랄을 해요 지랄을.]
[도착할때까지 별일 없게 하라했는데 확인 해볼까요. 형님?]
세명이다. 난 주먹을 다시 강하게 쥐어본다.
[그냥 냅둡시다. 형님. 지가 무슨 용빼는 재주가 있는것도 아니고.]
[너 손 잘 묶었지?]
[그럼요. 거의 한통 다 쳐 발라버렸는데요.]
[에이...씨부랄. 전화 다시 때려봐. 언제 도착하냐고. 개새끼가 꼴통부린다고 전해.]
[네 형님.]
[넌. 문 열어봐. 혹시 모르니 연장 들고.]
-끼릭! 덜커덩!
불쑥 들어오는 머리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가 급하게 회수한다. 그 사이로 시커먼 그림자가 길게 사내의 얼굴로 빠
르게 날아갔다.
-쉬익!
[우욱!]
동시에 몸을 일으킨 난 뒤따르던 녀석을 공중으로 몸을 띄우다가 내려앉으며 얼굴에 정확하게 주먹을 내리 꼿았
다.
-퍼억!
[흐억!]
전화를 걸고 있던 나머지 한녀석이 빠르게 다가왔지만 난 창고를 빠져 나오며 이미 반대쪽으로 빠르게 몸을 날렸
다.
(성준아... 조금만 참고 견뎌라. 얼른 끝내고 병원 데려가줄테니...)
[저 새끼 쫓아! 아놔! 이 씨발새끼! 명령이고 나발이고! 저새끼 담궈버렷!]
어지간히 맞은게 억울했는지 녀석들은 씩씩거리며 내 뒤를 쫓아오고 있었다.
난 통로를 뛰면서 스치는 것들을 살폈다. 그러다, 한쪽에 넘어져 있는 대걸레를 발견한다.
[좋았어.]
끝부분을 정확하게 발로 내리치자 보기좋게 손잡이의 나무가 꺾이며 마음에 드는 무기가 되어주었다.
도망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섰다. 뒤쫓아 오던 녀석들이 숨을 몰아쉬며 오만인상을 써댔다.
난 비릿하게 녀석들을 향해 미소지었다.
[니들은 이제 다 뒤졌어... 내가 씨발놈들아... 영등포 말뚝이야... 좆만한 것들아~]
##
녀석들이 발가벗고 있던 내게 옷을 입힌다고 입힌게 바지와 와이셔츠뿐인데도 몸이 편했다. 원래 아무것도 입지
않고 격렬한 운동을 하면 이렇게 자유로운 느낌이 드는건지 몰랐었다.
이미 셔츠는 피투성이가 되어있다. 목을 쥐고 쓰러져 움직임이 없는 녀석의 신발을 벗겨 신어보았다. 약간 헐렁
한 편이어도 쉽게 벗겨지진 않겠다.
바닥에 떨어져있는 손잡이를 빼면 한뼘쯤 되는 사시미를 주워 들고 계단 위와 바깥으로 통하는 입구에 신경을 집
중했다.
사시미를 찔러오다 팔이 부러져 역으로 배를 찔린 세명중 지위가 높은 녀석의 신음소리가 들려왔지만 안중에도 없
었다.
너덜한 옷들을 바로하고는 난 사시미를 쥔 손에 다시 힘을 주고 눈을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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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히 밖으로 나가려는데 공장건물 입구옆으로 사무실처럼 생긴 방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웬만하면 그냥 지나쳐 쓰러져있는 성준이의 치료를 위해 어떻게라도 구급차를 먼저 불러야 했지만 그 와중에도 이
상하게 내 발을 잡는 무언가가 느껴져 문에 바싹 기대었다.
[변태든...뭐든... 일단은 살려둔걸...고마워해 개자식아....훅훅...우...보지보다 쎈데...]
[아윽... 그만요! 살려주세요!]
낯익은 목소리. 혜미라 했던가... 빠르게 그녀의 모습이 눈앞을 스치며 지나갔다.
자세를 낮춰 옆으로 조금 이동한 후 조심스럽게 창문으로 안쪽을 확인했다.
내 시선과 등을 진 사내녀석과 혜미일것 같은 조그마한 몸이 뒤엉켜 열기를 뿜고 있다. 민망하게 엎드려 사내의 좆
을 박히고 있는 그녀의 뒷모습이 상당히 힘들어보인다고 느낀건 내 개인적인 생각일 뿐일까.
다른 놈이 보이지 않아 다행스러웠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쾅!
문을 박차고 들어서자 놀란 눈으로 날 쳐다보는 녀석에게 몸을 날리며 사시미를 쭉 내밀었다. 배를 움켜쥔 그 놈이
채 죽지 않은 자지를 덜렁이며 뒤로 벌렁 넘어간다.
내 몰골과 쓰러진 녀석을 번갈아보며 벌벌 떨고 있는 그녀에게 시선을 돌리며 널려져 있는 옷가지를 집어 던져준
다. 달랑거리는 그녀의 작은 자지가 잠깐 눈에 들어왔다.
그녀의 옷인지 쓰러진 녀석의 옷인지 분간할 정신도 없었는데 앙큼한 그녀의 엉덩이를 가리는 타이트한 모습을
보니 그것만큼은 그녀의 옷이 맞는가 보았다.
[얼른 입어.]
그녀는 얼어붙은 모습 그대로 어기적 어기적 몸을 움직였다.
쓰러진 녀석의 머리를 움켜쥐고 살짝 일으키자 고통에 일그러진 녀석의 얼굴이 끙끙대고 있다.
[죽을 정도는 아니야 씹세야! 제대로 안 쑤셨거든. 묻는말에 잘 대답 안하면 아주 골로 보내줄테니 알아서 해 썅노
므 새끼야!]
꾸역꾸역 흐르는 피가 이미 바닥까지 적시고 있었다.
[여기 어디야! 어디쯤이냐고!]
[도... 도봉산...아래....]
[여기 공장 이름!]
[창대... 창대 물산....]
[여기 몇명이 지키고 있었어!]
[넷이서.... 네명....]
안에서 쓰러뜨른 놈들과 합하면 녀석까지 네명이다. 그렇다면 이제 성준이를 데리고 여길 뜨는것이 더 빠르지 않
겠는가. 난 재빠르게 머리를 굴리고 다시 녀석을 다그쳤다.
[여기 누가 오기로 했나본데 다른 일행은 언제 오는거야? 엉!]
[중...중간...지점서 인솔할....사람이...있대서... 몇...십분내로...도착 할거요...]
시간이 얼마 없다. 녀석을 팽개치고 방안을 둘러보며 무언가를 급히 찾기 시작했다. 남자 점퍼의 주머니에서 내가
찾던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레깅스 위로 셔츠와 점퍼로 대충 걸친 그녀를 돌아보며 휴대폰을 쥐어주고 밖으로 나섰다.
언제부터 내렸는지 얇게 쌓인 눈이 계속 내리고 있었다. 점점 우리들에게 불린한 조건만 생기고 있었다.
넓은 마당 옆으로 두대의 승용차가 멀리 눈에 띈다.
[너 내 말 잘들어!]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얼른 끄덕이는 그녀가 불안했지만 달리 방법이 없다.
[저기 차 보이지? 좀 춥겠지만 죽는거 보다 났잖아. 저 뒤로 가서 안보이게 숨어있어. 그리고... 112에 신고하든
어디로 전화하든 해서 짭새들 좀 불러. 여기 도봉산 밑에 창대물산이다. 내말 무슨 말인지 알겠어?]
내 손을 따라갔던 시선이 다시 날 올려보며 급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파르르 떠는 어깨가 두려운 마음도 있겠지만 몹시 추워하는것 같았다.
[안에 내 일행이 있다. 데리고 오면서 입을 옷이라도 있나 찾아볼테니... 잘 숨어있어. 혹시... 어떤 놈들이 오더라
도 절대 움직이지 말고 알았어?!]
[네.............]
잔뜩 움츠린 몸을 이끌고 내가 시킨곳으로 걸어가는 뒷모습을 본 후 급히 몸을 돌렸다.
사무실에 쓰러진 녀석 주변을 다시 뒤져보지만 나오는건 없었다. 신음이 약해졌다. 깊이는 맞춰 찔렀는데 피를 많
이 흘리고 있어 빨리 옮기지 않으면 위험할수도 있을것이다.
안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세 놈은 이제 전부 움직임이 없다. 죽었는지 기절한건지 나에겐 별 상관이 없었다.
녀석들의 옷을 전부 뒤지다 사시미를 들고 설쳤던 일행중 지위가 높은 놈의 허리춤에서 열쇠꾸러미를 떼어냈다.
갇혀있던 창고로 달린다.
[성준아! 임마! 정신차려봐!]
[으...으...]
아직 늦지 않아보여 한시름이 놓였다.
성준이는 힘겹게 눈을 뜨며 형편없는 얼굴에도 씨익 웃는것 같아 보였다.
[일어나봐. 여기 얼른 떠야돼. 놈들이 도착하면 우리 다 죽는다. 조금만 힘내라.]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일으켜 보지만 왼쪽 다리는 전혀 움직임이 없었다. 그나마 버티는 오른쪽 다리도 성한편이
아니었기에 거의 내 몸에 의지해야 겨우 발을 뗄수 있을 정도였다.
축 늘어져 부축을 받은 몸의 성준이와 사무실쪽 입구까지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도 짐작할수 없을만큼 더디게
아주 더디게 도착했다.
공장 마당으로 나서며 차갑게 내려와 녹는 눈의 느낌을 받으며 한걸음을 옮겼다.
내가 지시한대로 두대의 승용차에 숨어 있을것 같은 그녀를 찾아보지만 잘 숨어 있는건지 내 위치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걸어가는 길 뒤로 축 늘어져 있는 반대편 팔에서 떨어진 피가 한방울씩 점을 찍고 있었다.
[조금만 참아라... 죽어버리면... 나한테... 뒤지는 줄 알어...]
걸음을 제촉해보지만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거의 중간쯤을 지났을까.
정문부터 환해지는 불빛들과 요란한 엔진소음이 내 머리를 촤악 세워버린다.
다가오는 소리와 종류로 봐서 한 두대정도의 무리는 결코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윽고 정문을 재빠르게 통과하며 급회전을 해대는 숫자가 열을 넘어갔다. 승용차와 승합차가 뒤섞인 그 무리들은
정문을 거의 막은 채 굉음(轟音)을 낸다.
잠시 후 시동이 꺼지고 헤트라이트 사이로 그림자들이 일제히 차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설마 나 하나 때문에 이 많은 인원이 모이게 된건 아닐텐데도 엄청난 숫자가 헤트라이트를 등지고 버티고 선다.
연장을 챙겨든 무리들을 헤집고 세사람이 앞으로 나서는것을 보면서 난 메고 있던 성준이의 한팔을 다시 고쳐
잡아본다. 여차하면 안고서라도 뛸 작정이었다.
그런 내 꼼수를 비웃기라도 하듯 온 몸의 털이 곤두서는 목소리가 내 귀를 때려왔다.
[이여~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예상밖으로 운동 좀 하셨나봐? 주인님?]
(주... 주...주인님...?)
찰나의 순간에 뇌리를 스치는 한가지가 생각하기도 싫은 상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어라어라. 한달 겨우 지났는데 벌써 이 목소리를 잊어버리신건 아닐테고... 천하에 김필중이란 사람이 설마 쫄아
버렸나? 말좆 자랑이라도 하실줄 알았는데 말이야.]
[너... 설마...]
난 온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설마 그녀일줄이야.
보스에게 바쳐졌던 설란. 그녀가 우리 신진파의 일에 개입되었을 줄이야.
[그럼... 네년이... 회장님을 부추겼단 말이냐?]
난 이를 갈며 말을 뱉었다.
[회장님? 어떤 회장님? 아~ 그 코끼리 같은 늙탱이 말하는거야?]
[뭐 뭐? 늙탱이?]
[그 돼지같은 영감이라면 지금쯤 내가 먹인 마약에 쩔어서 홍콩을 헤매고 있지 않을까?]
[뭐?]
[내가 아직도 김필중 너의 노예로 보이나보지? 왜 내가 너에게 이런 얘기를 해주는지는 모르겠지만, 한가지만
말해주지. 곧 죽을테니 죽기전 마지막 선물로 생각해도 되고...]
[이런...쳐 죽일... 이러는 이유가 뭐야!!]
목에서 뿔룩 핏대가 생길만큼 난 고함을 쳤다.
[호호호. 병신같은 새끼. 아직까지도 좆또 모르고 있네. 너 같은 피래미 잡으려고 이 고생하고 있는줄 아니? 내가
그렇게 싸 보여? 넌 그저 대 동방파를 잡는데에 걸리적 거리는 쓰레기에 불과한 놈이야. 알아?]
(동방파를 잡아?)
그녀의 옆에 서있던 두 그림자가 몇발자국 앞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희미하던 얼굴이 가까워지면서 그들의 진면목(眞面目)이 드러났다.
[당신들은........]
난 주체할수 없는 두려움과 답답함으로 부축하고 있던 성준이를 놓고 말았다. 풀썩 쓰러지는 성준이를 살피지도
못하고 얼굴을 드러낸 그들에게 시선을 고정한채 팔을 덜덜 떨어댔다.
[이거이거. 요즘 건달세계 왜 이래. 하늘같은 선배보고 당신이라질 않나 한딱까리도 안되는 것들이 기어오르질
않나. 물 좆같이 흐려졌구만 그래.]
왼쪽의 사내가 이죽거리며 말하고 있다.
서방파(西方派)... 서울 외곽의 맹주(盟主)... 그 서방파의 보스. 흑호(黑虎) 조경두...
예전 사장이 있을 당시 3대 보스들의 회합(會合)이 있던 날 감히 가까이에 가지도 못했지만 먼 발치에서 본적이
있는 사내였다.
힘도 장사였지만 권술(拳術)에 상당한 실력이 있어서 권투(拳鬪)도 즐기고 격투기 또한 대단한 실력이라는 소문
이 자자했다. 그가 관리하는 권투 체육관과 격투기 도장이 서울에만 수십개가 된다는걸 보면 그리 헛소문은 절대
아닐것이다.
그도 놀랍지만, 더욱 놀라는 인물은 그 옆의 사내였다.
따지고 보면 나와도 적대(敵對)관계가 아닐수 없는 그.
강북연합파의 보스가 이자리에 조경두와 같이 버티고 서있다는건 보통 일은 결코 아니다.
뭔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은 분명한데 삶을 마감할것 같은 이런 상황이 되어서야 겨우 눈
치를 채다니 정말 내 자신이 멍청하다.
강북연합파는 말 그대로 명동을 일대로 군소(群小) 조직들이 연합하여 배부른 강남지역의 동방파와 적대관계를
이루고 있는 조직이다. 특히,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를 거치고 혼란했던 대한민국의 건국전후를 아우르는 초창
기 건달조직의 명맥(命脈)을 유지하려는 전통을 중시해 이름만 들어도 일반인들도 잘 알고 있는 옛 건달들을 존
경하는 마음으로 조직을 꾸려오고 있어서 자부심만으로는 동방파 조차도 비교될 수준도 못된다.
그런 그 강북연합파의 연합회장. 왕손이. 나조차도 이름은 모르고 그저 왕손이라고만 들었던 그 인물.
유명한 김두환이 잇뽕으로 발차기 한번에 한놈씩 나가 떨어졌다면 왕손이는 주먹 한방에 안나가 떨어지는 인물이
없을꺼라고 한다. 만약 권술에 능한 조경두와 주먹 한방이라는 왕손이가 붙으면 어떻게 될까하고 일어날것 같지
않은 상상을 하며 내기를 해본적도 있을 정도였다.
서로 주먹을 맞대야 할 두 사람이 저 쳐죽일 년과 나란히 서서 내 눈 앞에 나타났으니 이런 경우를 어떻게 받아들
여야 하겠는가.
분명한건 그녀가 얼핏 말한 내용으로 봐서 지금 동방파에도 이상기류(異常氣流)가 있다는 것과 동방파 보스인
차명환의 신상(身上)에도 뭔가가 진행중이라는건 확실해 보였다.
(뭐가 되었든 빠져 나가야 한다. 어떻게든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러는 이유가 뭡니까? 두분은 적이지 않습니까? 또 서로 불가침(不可侵)하기로 정하셨잖습니까?]
[불가치임? 좆 빠는 소리하고 앉았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同志)가 되는거고 어제의 약속이 오늘 깨질수도
있는거야 짜샤!]
입을 굳게 다문채 기둥처럼 조용히 버티고 선 왕손이와는 달리 조경두는 뭐가 그리 못마땅한지 툭툭 내뱉는 음성
에 짜증이 잔뜩 뭍어 있었다.
또각거리는 소리를 내며 그녀가 그들 사이로 다가오자 특유의 잘빠진 실루엣이 아른거린다.
[오빠들. 2진들 도착할 시간 다 되어가요. 쓰레기는 얼른 치우고 안으로 들어가죠.]
끝을 알리는 소리같이 그녀의 말이 섬뜩하게 들려왔다.
난 다급히 돌아서는 그녀에게 외쳤다.
[당신... 도대체 이러는 이유가 뭐야! 우리 조직에 접근한것도... 나에게 접근한것도... 아니... 이 모든게 다...다
니가... 니가 계획한거야?! 그런거야?!!]
미끈한 다리에 신긴 섹시한 하이힐이 돌아선다. 도발적으로 팔짱을 낀 자세로 엉덩이 한쪽을 치켜 세우며 날 노려
보기 시작했다.
[어이... 이 저능아 같은 새끼야. 시시콜콜 너 같은 새끼에게 다 말하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이것만 기억하고 염라
대왕 만나러 가라...... 난 말이야. 킹콩인지 땅콩인지 하는 새끼랑 동방파를 쳐 부셔버릴수만 있다면 내 부모도 팔
수 있어. 넌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를 못하겠지만 말이야. 그러니 조용히 뒤져............................]
[이... 씨발....괴물같은.....]
[아! 한가지 더. 그래도 니 좆은 괜찮았어. 어쩔때는 정말 뿅가기도 했다구. 이건........진심이야. 잘가....말좆.]
[이이..........으아아아아~~~]
내 울부짖음에 그녀는 등을 돌려 멀어졌고 두 보스도 그녀를 따랐다. 그들 사이로 한녀석이 한눈에 보기에도 날카
롭고 긴 칼을 끼고 장갑을 끼우며 다가왔다.
잔뜩 긴장한 난 자세를 잡아 보았지만 다가오는 녀석의 쭉 ?어진 매서운 눈이 말려 올라가며 혀를 찬다.
[쯧쯧쯧. 소용없어. 어차피 뒤질꺼 나한테 깨끗하게 가는게 고통도 덜할꺼다.]
전혀 협박으로만 들리지 않는건 다가오는 사내의 칼쓰는 실력이 그만큼 상당한 수준일거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보통 그런류의 인간을 보면 평범한 사람들은 절대 가질 수 없는 능력을 발휘한다.
첫번째가 아니면 두번째에는 위험하다. 정말 난 죽는것일까...
한손만으로 칼을 뱅그르르 돌려댄다. 움직임이 장난이 아니었다.
비릿한 미소가 입에 걸렸다 싶은 순간,
-쇄액~!
움직임을 놓쳤다. 눈 깜짝할 순간에 한걸음 안으로 들어오는 녀석의 움직임을 읽을수가 없었다. 그리고, 가까워지
는 빛줄기...
-푸욱!
[으으....]
몸도 가누지 못하던 성준이가 날 감싸며 등에 녀석의 칼이 깊숙히 꼿혀있다.
[서... 성준아!]
[효....혀.....니임...어...어...서....으으...]
[이런 제길!]
녀석이 성준의 등에서 칼을 빼내고 있다. 난 얼른 성준이를 내려놓으며 달려들었다.
녀석의 손목을 움켜쥐고 반대편 팔을 들어 팔꿈치로 정확하게 안면을 가격했다.
[크윽!]
얼굴을 감싸쥐는 틈을 노려 손목을 낚아채 칼을 빼앗으려 힘을 썼다. 뺏기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녀석을 재차
가격하고 칼을 조금씩 녀석의 목 가까이로 가져다 댄다.
있는 힘을 다하다 난 인정사정없이 눌러버렸다.
-쓰악!
[꾸르륵...끅...끅!!!]
목을 움켜쥔 채 데굴데굴 구르는 녀석을 발로 걷어차고 성준이를 내려다본다. 어느새 분노에 가득찬 내 눈에 이슬
이 맺혔다.
갖가지 연장들을 챙겨든 녀석들이 물밀듯이 달려든다.
양손에 칼을 들고 난 다가오는 녀석마다 한번씩 휘둘러 저지했다. 하지만, 한계가 곧 찾아왔다.
-퍽 퍼퍽!
[으악...윽윽...]
비틀거리면서도 다가오는 두어명에게 다시 칼자국을 내고 버티려 애썼다.
후들거리는 다리는 바람만 불어도 꺾일것이다. 이제 할만큼 한것이라고 속으로 위안을 삼았다.
(아... 이렇게 죽는구나... 그러고 보니... 내 태어날때도 눈이 왔다던거 같은데... 잊어버렸네...)
겨우 버티는 몸으로 슬쩍 바라본 하늘에서는 여전히 눈발이 흩날린다. 소복히 쌓여있던 넓은 마당은 수많은 발
자국들과 시릴정도로 밝은 선홍빛 피들이 여기저기 꽃잎처럼 뿌려져 있었다.
이제 칼을 들고 반격할 힘도 없었다. 녀석들이 다가오는데도 팔이 들리지 않았다.
-끼이이이익~
내 어딘가로 칼이 박히는 소리가 들릴꺼라고 자포자기하는 순간, 날카로운 바퀴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렸다.
내가 찍어둔 자동차 두대 중 한대가 급하게 후진을 하며 몇명의 사내들을 들이받아 버린다.
갑작스런 상황에 날 둘러싸고 있던 녀석들도 당황하며 멈칫거렸다.
후진하던 승용차가 긴 원을 그리며 녀석들을 몰아세우다가 기어소리와 함께 다시 급발진하듯 내가 버티고 선 곳
으로 돌진해왔다.
-끼이익!
차를 피하려 여러명의 구르는 순간 내 옆을 스치던 차가 멈춘다.
[빨리 타시오! 우물쭈물할 시간 없소. 얼른!]
뒷좌석에 엎드린 채 꼼짝을 안하고 있는 혜미도 보인다. 낯선 사내였지만 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재빨리 조수석으로 몸을 날렸다.
차가 움직이자 뒷유리로 연장들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운전하던 사내는 앞쪽만 시선을 고정한채 벌써 서너명의
녀석들을 들이받으며 교묘하게 속도를 올렸다.
아슬아슬한 공간을 뚫고 정문을 빠져 나오자 몇대의 차들이 머리를 돌리고 있는것이 멀어지고 있었다. 곧 따라잡
힐것 같았지만 운전석의 그라면 왠지 따돌릴수 있을것 같아 보였다. 왜 그를 믿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이 상황을 피하는게 상책이라고 마음 먹었다.
난 뒷좌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엎드려 있던 그녀가 빼꼼 머리만 들고 눈만 이러저리 굴리고 있었다.
[이리와.]
그녀가 일어나 조수석 가까이에 몸을 기댔다.
난 얼른 그녀의 여기저기를 만지며 몸을 확인했다.
[다친데 없어?]
똥그란 눈이 금세 울듯했지만 그녀는 크게 고개만 끄덕이며 울음을 참고 있었다.
난 그런 그녀의 머리를 한차례 쓰다듬고는 툭툭거려 보았다.
그런 날 운전하던 그가 슬쩍 쳐다보고 있다는 걸 알았다.
[고맙긴 한데... 누구슈? 초면인거 같은데...]
[아직 안전한건 아니오. 차차 얘기하고 뒤나 잘 살펴주시오. 잠시 후에 지름길로 빠질테니.]
그의 말대로 쫓아오는 차들이 있을것이 분명하기에 난 뒤를 살폈다.
급하게 꺾이는 차로 인해 난 손잡이를 꽉 붙잡았다.
(성준아...)
난 점점 멀어지는 건물에 시선을 던지며 빠드득 소리를 내며 이를 연속으로 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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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상 주차장에 아무렇게나 차를 세우고 그를 따라 미리 준비해놓았는지 파킹된 SUV 차에 올랐다.
[차를 바꿨으니 이제 조금은 안심입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차가 멈출때에는 서로 조심합시다.]
그녀와 같이 뒷좌석에 올라탄 난 백미러의 눈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히터가 나올때까지 약하게 떨던 그녀를 살짝 안은 자세로 옆을 살피며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뒤를 바라보는 사내의 눈이 자주 이어졌지만 왠지 꿍꿍이가 있어보이진 않았다.
##
인천으로 들어선 차가 주변으로 아파트 건설이 한창인 지역으로 이동하더니 지은지 얼마 안되는 건물 지하주차장
에 멈춰 섰다.
주차장에서 부터 이어진 엘리베이터로 상당히 높은층까지 올라가자 그가 따라오라는 손짓을 한다.
신축건물답게 페인트 냄새가 곳곳에서 풍겼다.
넓은 실내에도 마찬가지로 신축건물 냄새 살짝 나고 있다. 이래서 새집증후군이라는 말이 나오나보다라고 생각해
보았다.
깔끔하게 잘 정돈 된 실내가 그래도 긴장감을 풀어주고 있었다.
[당분간은 여기서 지내시오. 웬만하면 밖에 안 나가는게 좋을거요. 혹시라는게 있으니 말이요.]
쇼파에 앉자마자 그가 손에 든것을 내밀었다.
[뭐 필요한게 있으며 이리로 전화하시오. 겨우 빠져나온것을 잊지 말고 섣불리 바깥으로 나가는 일이 없었으면
싶소.]
[얘는 몰라도 난 할일이 있수. 여기서 미적거릴 시간이 없다고. 얼른 위에다 알려야...]
[알고 있소. 그 점도 이미 다 파악했소. 동방파 안에 내게 연락을 주는 사람이 있으니 김필중씨는 내 말대로 당분
간 참고 기다리면 됩니다.]
[당신 내 이름은 어떻게 아는거요?]
[차차 설명하도록 하고... 일단 저쪽 옷방에 가면 두분 다 갈아 입을 것들이 있을거요. 김필중씨는 나랑 체격이 비
슷하니 웬만하면 맞을거요. 그리고... 여성분은... 내 애인 옷이 조금 크겠군요. 아주 아담하시니... 그래도 맞는 옷
을 찾아보시오. 그런대로 입을만 할겁니다.]
[이봐요. 구해준건 고맙지만, 우리 조직이 지금 위험하다니까 그러네. 그러니 옷 갈아입고 차 좀 빌립시다. 얼른
알려야 한다고 엉?]
[지금 그곳에 가면 당신은 정말 죽어. 그 마녀(魔女)가 그리 허술하게 있을리 없다고...]
[마...마녀?]
[좋은 말 할때 내 말 들어. 동방파 보스가 위험한 상황에 처해지는건 십중팔구 사실이 되겠지만 아직은 그저 별일
없이 지내고 있다. 문제는 그 마녀랑 보스 주변에 그들이 심어둔 배신자들이라고. 지금 김필중 당신이 그곳으로
달려가면 입도 뻥긋 못하고 그대로 세상 하직하는거야. 상황이 바뀌면 가기 싫어도 가게 될테니 내가 말한대로 일
단 몸도 추스리고 차분히 생각 좀 하자고.]
[마녀? 배신자?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어야 할거 아냐. 이런 젠장할...]
[궁금해도 일단 상황을 지켜봐야 해. 조바심 나도 좀 참아. 동방파에는 아직 별다른 상황이 없다니까.]
사내가 일어나며 나갈 채비를 하는듯 했다.
[만약 당신이 밖을 돌아다니거나 동방파 본부로 뛰어가거나 해서 다행히 죽기만 하면 그만이지만 혹시라도 그로
인해서 내 존재가 드러나게 된다해도 난 충분히 숨을 자신이 있어. 그저 그러지 않길 빌 뿐이지.]
일단은 그의 말을 따라야했다. 나에게 무언가를 바라고 있는것 같지도 않고 뭘 원한다는 말도 없었다. 그렇다고
날 현혹(眩惑)하듯 하는 말투도 아니었다.
[좋아. 좋다고. 대신... 지금까지 한말 조금이라도 틀린말이 있으면 나 정말 돌아버릴꺼야.]
그가 내 말에도 씨익 웃어버린다.
[틀린말이 아니라 진짜 진실을 듣게 될때 당장 죽이겠다고 뛰쳐 나가지나 마시오.]
[젠장할...... 좋아. 그럼 다른건 그렇다 치고 당신이 누군지나 좀 압시다. 날 구해준 은인의 정체정도는 알아야 원
수를 갚든 은혜를 갚든 할거 아니오?]
자리를 피하던 그가 멈칫했다.
[벨이 두번 울리고 끊어지는 전화 외에는 받지 마시오. 그리고............. 강상철이란 이름 기억나시오?]
그의 입에서 뜻밖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가...강상철......]
[나 그놈 친구인 윤선호라 합니다.]
[치...친구.........]
섬뜩한 얼굴을 하면서도 미소를 지우지 않던 그가 다시 입을 뗀다.
[당신과 함께... 여러사람 잡아 먹은 마녀(魔女)나 사냥해 볼까 하고 말이오.................]
-To be continued.
최고관리자
가입일 | 2016-08-11 | 접속일 | 2024-11-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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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 2016-08-11 | ||
접속일 | 2024-11-26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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