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임용식 회장의 타계.
내가 기자들에게 인사를 하고 기자회견장을 나서는데, 송비서는 내 앞에 서고 다른 여비서들은 내 뒤를 따른다. 나는 송비서의 요염한 뒤태를 보면서 엘리베이터로 갔다. 나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송비서에게 물었다.
"실장님. 임비서가 무슨 일로 먼저 급하게 가버렸을까요?"
"우리도 아직은 전혀 모릅니다. 일단 올라가봐야 합니다."
"기자회견은요?"
"침착하게 잘 하셨습니다."
"전에는 기자회견을 누가 했었어요?"
"이번이 한강유통에서 처음으로 한 기자회견입니다."
송비서는 생긴 것처럼 말도 또박또박 잘한다. 우리는 엘리베이터로 올라왔다. 나는 여비서들과 헤어져서 내 방으로 왔다. 그런데 임영선과 최수희가 보이지 않는다. 무슨 일로 소리 없이 사라졌는지 엄청 궁금하다. 혹시 병원에 무슨 일이 생기지 않았을까?
전화기를 열어보니까 아이린에게서 카톡이 와있다. 주식 값이 조금씩 계속 오르는 중이고, 오늘 사들인 것까지 하면 지금까지 모두 6억원이 들어갔다고 한다.
송비서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전무님께서 찾으시는데요."
"지금?"
"밖에 전무님 비서가 와서 기다립니다."
"알았어요."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송비서가 내게로 가까이 왔다. 그녀의 입이 내 귀 가까이로 왔다.
"구형식 전무님은 회장님 다음으로 한강유통의 두 번째 실권을 쥐고 있고, 회장님의 강적입니다.
지금까지 계속 그랬지만, 특히 지난 번 이사회에서도 회장님을 곤란하게 했던 분입니다.
아마도 오늘 기자회견 내용 때문에 김비서님에게 뭐라고 나무라시려는 것 같습니다.
제가 김비서님과 같이 올라가겠습니다."
나는 송비서를 따라 나섰다. 우리는 9층에 있는 구형식 전무의 방으로 갔다. 그는 우리를 소파에 앉게 하면서 물었다.
"김비서, 송실장. 커피 한 잔씩 했나?"
"아직 못했습니다. 기자회견 끝나고 올라왔는데 찾으신다고 해서 바로 왔습니다."
"성은씨, 여기 커피 부탁해요."
그의 비서 황성은이 밖으로 나갔다.
"송실장. 혹시 병원에서 연락 받은 것 있어요?"
"지금 확인하려던 중이었습니다."
"내가 듣기로는 회장님께서 깨어나셨대."
"다행입니다."
그는 보도자료의 내용 중에서 몇 가지를 꼬치꼬치 캐물었다. 그런데 대답은 거의 다 송비서가 했다. 그러는 사이에 커피가 왔다. 나는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나에게 물었다.
"이번 주말에 의류시판은 왜 10군데에서만 하지?"
"시간이 너무 촉박하여 아직 물량이 없습니다. 우리가 과거에 했었던 자료도 충분하지 않아서 시장을 예측하기도 힘듭니다. 이번에는 시험적으로 시판 하려는 계획입니다."
"그럼 이번 주말에 결과가 나쁘면야 할 말이 없지만, 결과가 잘 나오면 어떻게 되지?"
"생산량을 검토해서 직영 매장 전체로 확장할 계획입니다."
"이런 얘기가 왜 보도자료에서는 빠져있지? 만일 기사로 나간다면 홍보효과도 있을텐데."
"의류 브랜드에 도전하는 것은 워낙 조심스럽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시험적으로 해보고, 그 결과를 보고 나서 공개할 계획이었습니다."
"이런 계획ㅡㄹ이 전부 자네 아이디어란 말인가?"
"아닙니다. 회장님과 한상무님도 같은 생각이셨습니다. 다만 지금이 워낙 불경기라서 시작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알았네."
그는 계속해서 예리한 질문을 던졌는데, 대부분은 의류 사업을 걱정하는 내용이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저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자신이 없다는 말인가?"
"자신이 있으니까 이 사업을 추진했습니다. 그렇지만 자신감 한가지 만으로 호언장담하는 것은 제 취향에 맞지 않습니다. 시장의 반응과 결과는 일요일 밤 늦게나 월요일 아침이 되기 전에는 누구도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나도 그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하네."
그런데 내 전화기에서 진동음이 울렸다. 발신인이 임영선이다.
"전무님. 죄송합니다. 임비서에게서 온 전화입니다."
"일어설 필요 없네. 여기서 그냥 받게."
나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태현씨."
"어?"
"지금 어디야?"
"송실장이랑 같이 전무님 방에 와있어."
"아빠 방금 돌아가셨어."
"어떡해?"
"엄마 말로는 태현씨는 꼼짝 말고 자리를 잘 지키래."
송비서와 구전무는 나를 쳐다보고 있다. 그런데 밖에서 황비서가 들어온다. 그녀는 전무를 밖으로 불러낸다. 나는 송실장에게 임영선이 한 말을 전했다.
"김비서님은 사모님 말씀대로 전혀 동요하지 마십시오. 긴급 임시 이사회가 열릴 때까지 전무님은 회장 권한대행을 하시면서, 이사회에서 새 회장님을 선출해야 합니다."
"그게 언제쯤일까요?"
"토요일에 장례식이 있을테니까, 다음 주 초가 되겠죠."
"이사회에서 구전무를 새 회장으로 밀 가능성이 높은 것 같다던데, 아닌가요?"
"글쎄요. 저는 사모님으로부터 말씀을 들어봐야 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구전무가 다시 들어와서 자리에 앉았다.
"임비서가 전화로 회장님의 임종에 대해서 이야기했나?"
"예."
"그럼 나는 지금 병원에 가서 장례식 준비하는 것을 보겠네.
지금까지 김비서가 잘 해왔으니까 이번 주말에도 부탁하네."
"명심하겠습니다."
우리는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내 방으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송비서가 나를 불러서 회장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송실장은 이하리 비서를 불렀다.
"하리씨. 커피 두 잔 부탁해. 전화 들어오는 것은 전부 이리로 돌려."
송실장은 나를 회장 자리의 건너편에 있는 테이블에 앉게 했다. 그녀는 전화를 거는데, 아마도 병원에 있는 사모님과 통화를 하는 것 같다. 통화를 끝낸 그녀가 나에게 말했다.
"저는 어제 사모님으로부터 김비서님을 수행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이제부터 마트 사업은 한상무님과 김비서님 두 분 손에 달려있습니다. 원하신다면 새 회장님 오실 때까지 여기서 근무하셔도 됩니다."
"아닙니다. 나는 내 자리에서 일할께요."
이하리 비서가 우리에게 커피를 놓고 나갔다.
"지금 사모님 편에서 정혜영이라는 분이 우리 주식을 싹쓸이한다고 들었습니다. 김비서님도 아시는 분이라던데요?"
"맞아요."
"사모님 말씀은 그 분을 우리 이사로 모시라는데."
"절차상으로는 이번에 열릴 긴급 이사회에서 사모님이나 한상무님께서 이사로 추대하는 일이 가능하겠죠?"
"알겠습니다. 그럼 집무실과 비서 한 명을 준비시키겠습니다."
"빈소에는 누가 갑니까?"
"저 말고 다른 비서 세 명이 삼교대로 갑니다. 한 명은 벌써 출발했습니다."
"지금 주식은 어떻습니까?"
"정혜영씨께서 오후 세시에 시간외 주문을 넣으신 것 같습니다. 4시부터 6시까지는 단일매매시장입니다. 여기서 우리 주식이 호재성 공시에 떴습니다. 이제부터는 단일가매매로 거래됩니다. 아마도 이리로 엄청난 매도물량으로 쏟아질것입니다. 다들 팔려고 안달인데, 정혜영씨 혼자 사들이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자회견을 오후 3시에 한 것도 바로 이 주식 시장이 동요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으음. .. 그런데 구전무님도 오늘 보니까 괜찮던데요?"
"제가 봐도 이상해요. 평소에 하던 것과는 다르시네요. 김비서님을 견제하는 눈치인데, 그 분은 마트 사업에 대해서 너무 모르셔서 문제죠."
"실장님. 전무님이 나를 견제한다는 말은 절대로 입 밖으로 발설하시면 곤란합니다."
"알겠습니다."
나는 내 방으로 건너와서 아이린에게 전화를 했다. 아이린은 지금 은행 지점장실에 있으며, 그녀는 회장의 임종에 대한 소식을 이미 회장 부인으로부터 들어서 알고 있었다. 아이린은 주식 매매 때문에 여섯시까지는 은행을 떠날 수 없다고 했다. 학교에서 애들을 차로 데려오는 문제는 조해수 엄마가 맡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나를 안심시킨다.
나는 자리를 정리하고 퇴근을 준비했다. 내 방을 나서서 송실장에게 퇴근한다고 말하러 갔다. 송실장의 말로는 벌써 회사 내에 있는 게시판에는 회장이 타계한 것과 구전무가 권한대행을 맡는다는 소식이 붙어있다고 한다.
"빈소에는 몇시 쯤에 가십니까?"
"이따가 새벽 1시즘에요."
"제가 댁으로 모시러 가겠습니다."
"아닙니다. 내가 갑니다. 정혜영씨를 모시고 갈 수도 있어요."
"알겠습니다. 그럼 빈소에서 뵙겠습니다."
나는 집에 와서 쉬었다가 애들과 공부를 시작했다. 그런데 지혜와 조해수는 당장 내일부터 시험이 시작된다. 조해수는 이번 시험처럼 시험공부를 착실히 해본 적이 없다며 은근히 자신감을 드러낸다. 지혜는 이번에는 최소한 두 과목에서는 일등급을 받을꺼라면서 나에게 혀를 쑤욱 내민다.
지혜와 해수는 내일 시험인 과목을 공부한다면서 주방에 있는 식탁으로 갔다. 나는 경식이랑 같이 공부하면서 지혜나 해수가 부를 때에만 한번씩 갔다.
자정이 되고 애들은 돌아갔다. 아이린이 조해수의 엄마와 함께 우리가 공부하는 곳으로 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지혜가 원가 낌새를 챘다.
"뭐야아. 줌마 둘이 오빠를 어떻게 해보려는거야?"
"얘는 무슨 말을 이렇게 해? 우리 지금 장례식장에 가야해요."
"이 야심한 시간에 장식장에? 구신 도깨비 나올텐데?"
"그렇기는 한데, 선생님 말씀이 너희들 시험공부가 더 중요하다고 이제 끝내시잖아."
"그런거야?"
우리는 아이린의 차에 탔다. 아이린은 아까 저녁때 지혜 아빠와 같이 가서 사모님을 만났고 왔다고 한다. 아이린은 조해수 엄마에게 말했다.
"미진아. 선생님 하시는 것 봤지?"
"보기는 뭘 봐?"
"임회장님 빈소에 가더라도, 애들 시험 준비 시킬 것 다 시키고, 밤 늦게 가시는 것 안보여?"
"으이구우. 알았어. 내가 쥑일년이다."
"누가 죽인대? 그만큼 애들을 끔찍하게 생각한다 이거지."
"그러니까 나도 마음 놓고 보냈잖아. 하하."
"웃지마. 우리 지금 고인의 명복을 빌러 가는 중이야."
"쏘뤼."
우리는 병원에 도착했다. 아이린과 윤미진이 내 뒤를 따른다. 입구에는 크고 작은 화환들이 엄청 많이 서있는데 제일 그룹의 서전무가 보낸 화환도 있다. 영전 앞에는 송비서가 최수희와 같이 임영선과 같이 서있다. 임영선 엄마도 우리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구전무와 함께 우리에게 나타났다.
나는 영정 사진을 들여다 보았다. 그는 환하게 웃는 얼굴로 우리를 보고 있다. 아침마다 같이 커피를 마시는 자리에서 내 어깨를 툭툭 치면서 나를 격려해주던 그의 모습이다. 사모님의 말로는 고생만 실컷 하다가 떠난 불쌍한 사람이라고 했다.
나는 분향을 하고 절을 했다. 아이린과 윤미진은 내 뒤에 서서 묵념을 하고 있다. 사모님과 인사를 나누는데, 그녀가 내게 말했다.
"조금만 더, 몇 달만 더 살아 있었으면 좋은 날을 볼 수도 있었는데, 뭐가 그리 급한지 .."
"그래도 잘되는 시작은 보셨습니다. 저희들에게 일거리를 잔뜩 주시고 가셨네요."
"김비서님. 회장님 살아계실 때 말씀하신 사업들 전부 다 밀어붙여주세요."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영선이가 너무 철이 없지만, 잘 부탁합니다."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요새 임비서가 일을 진짜로 열심히 잘합니다."
"어디 일하는 것만 그렇겠어요? 애가 세상을 몰라도 너무 몰라요."
사모님은 아이린과 같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임영선은 내 팔짱을 끼고 테이블로 가서 나를 자리에 앉혔다. 송실장이 술과 음식을 내왔다. 조해수 엄마도 같이 내 옆에 앉았다. 임영선은 내게 소주 한잔을 따르고 빈소로 갔다.
"실장님. 여기는 별 이상 없죠?"
"전무님께서 일일이 다 챙기시네요. 갑자기 저러시니까 뭔가 이상해요."
"실장님 말고 누가 여기에 와있죠?"
"아까 낮에 보신 이하리입니다."
"기자회견 했던 내용이 TV 저녁 뉴스에 났어요?"
"일곱시, 여덟시 뉴스에 난 것은 봤습니다."
"증권시장에서는요?"
"4시 이후부터 엄청나게 쏟아졌다던데, 그 분께서 가만히 보고만 있다가 막판에 싹쓸으셨대요."
"이제부터는 확실하게 뜨겠네요."
"그렇지만 지금 회장님 부고가 나가면 또 떨어집니다."
"월요일에는 우리가 또 주말 결과를 보도자료를 내면 되죠."
"물론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안그래도 찌라시 쪽에서 다 알아서 미리 터뜨릴겁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번 주말까지 잘 견디는 것이네요."
"김비서님. 이를 악물고 버티십시오. 저희도 열심히 돕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송비서가 따라주는 술잔을 비웠다. 그러자 옆에 있던 조해수 엄마도 한잔 따라주면서 마시라고 했다. 그 때 아이린이 우리 자리로 왔다.
"이따가 갈 때 미진이 네가 운전해라."
"나는 집에 가야 하는데?"
"시끄럽고, 오늘은 해수 침대에서 해수를 꼭 안고 자. 내일이 해수 시험이잖아."
"알았어."
아이린이 웃긴다. 지혜 시험 전날 아이린은 지혜를 안고 자는 일이 없다. 그런데 조해수 엄마에게는 그러라고 시킨다.
나는 아이린의 잔에 소주를 따르면서 송비서에게 나는 아이린이 정혜영여사라고 말해주었다. 그녀들은 지난 번에 본 적이 있다면서 이야기를 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임영선에게 가서 모녀에게 인사를 했다.
"자기 어떡하니? 장례식 끝날 때까지 나는 회사에 못 나가는데."
"걱정마. 나는 실장님이랑 일하면 돼."
우리는 작별하고 나는 최수희와 함께 빈소를 나왔다. 아이린도 윤미진과 송실장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송실장은 나에게 내일 보자고 인사를 하고 자기 차에 탔다. 나는 최수희와 함께 아이린의 차 뒷자리로 탔다. 아이린은 먼저 최수희를 그녀의 아파트 앞에서 내려주고 내 오피스텔 앞으로 왔다.
우리는 엘리베이터에 탔고, 아이린은 지혜의 방으로 간다며 3층에서 내렸다. 나는 5층에서 내리면서 윤미진에게 잘 자라고 인사를 했다.
그런데 궁금한 것은 구전무의 생각이다. 그는 지금까지 사건마다 회장과 각을 세웠었는데, 송실장의 말로는 그가 갑자기 태도를 바꿔서 나나 서모님께 호의적인 모드이다. 그가 노리는 것이 무엇일까? 그가 회장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 최대주주인 사모님과 한 배에 타려는 수작일까?
나는 내 오피스텔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지혜가 조해수와 함께 아직 공부하고 있다.
"자려고 누웠는데, 시험이 은근히 걱정돼서 잠이 안 와.."
"나는 자려고 누웠는데, 해수가 이리로 오는 바람에 .."
"시험 전날에는 일찍 자야 맑은 정신으로 시험을 치죠."
아니나 다를까. 얘네들의 엄마 둘이 내 방으로 와서 각자 자기 딸들을 데리고 나갔다. 나도 씻고 침대에 누웠다.
어쨌든 오늘이 나에게는 너무 긴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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