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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1 23:50 1,286회 0건
11. 비요일의 기억



그는 비 오는 날을 싫어했다. 그리고 비가 오는 날이면 영락없이 나를 찾아오곤 했다. 오래도록 기억될 그 날에도.

초인종 소리가 울렸을 때, 나는 이미 그란 걸 알고 있었다. 역시나 문을 열자 그가 서 있었다. 비를 흠뻑 맞은 채로.

“애처럼 왜 비를 맞고 다녀요?”

나도 모르게 짜증스런 말이 튀어나갔다. 화장실로 뛰어가 수건을 들고는 여전히 비를 떨구며 문 앞에 서 있는 그에게 가서 머리부터 물기를 닦았다. 그런 나를 그는 장승처럼 서서 슬픈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가슴이 아파왔다.

“준비… 됐니?”

그의 말이 천둥처럼 마음에 울렸다.

“그럼요. 진작에.”

최대한 밝고 명랑하게 말을 했지만 가는 떨림까지도 숨길 수는 없었다. 나도 사람이니까. 산전수전 다 겪었음에도 아직도 여전히 여자니까.

“가자.”

그의 그 말이 무서웠다.

“왔으니까 차나… 한 잔해요.”

그가 다시 나를 물끄러미 들여다봤다. 떨리는 내 마음이 들켰는지도 모르겠다.

“춥잖아요. 어서 들어와요. 내가 따뜻한 커피 한 잔 타줄게요. 그 정도 시간은 있죠?”

그가 대답 없이 신발을 벗었다. 나는 서둘러 그의 양복 겉옷을 받아 들었다. 눈물 같은 빗물이 거실에 점점이 떨어져 내렸다.




손이 왜 이렇게 떨리는지 모르겠다. 그의 앞에 내려 놓는 잔이 자꾸만 무언가에 부딪힌 듯 소리를 냈다.

“지혜는?”
“제건…… 바보같이 제건 안탔네요. 히힛…… 시간 없잖아요. 전 아까 많이 마셨어요.”

그가 또 나를 본다. 도무지 적응 안 되는 그의 눈. 비요일의 그의 눈은 왜 그리도 슬퍼 보이는 걸까?

“가져와. 같이 마시게.”

이번엔 내가 그를 본다. 한 번도 그가 내게 차를 같이 마시자 한 적이 없었다. 그토록 많은 술을 같이 마셨어도 단 한 번도.

“그래요.”

가슴이 뛰는 건 좋아서 인지, 아니면 슬퍼서인지 모르겠다. 어쩌면 오늘이란 시간이 주는 마법인지도 모른다.

등을 보이고 커피를 준비하는 내 뒤로 그가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지금 그의 눈을 보면 울고 싶어질지도 모르니까. 그가 내 몸을 뒤에서 안아왔다. 그의 몸과 내 몸이 닿는 그 순간의 느낌은 짜릿하고 숨이 막히고 쓰러질 것 같은 현기증이 나는 그런 것. 나도 모르게 그의 품에 쓰러지듯 안겼다. 식탁 위에 커피가 흘렀지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그가 나를 안고 있다는 그것만이 중요할 뿐이었다.




어둠을 뚫고 달려가는 차창에 떨어지는 빗물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그가 시계를 봤다. 이제 겨우 9시가 조금 넘은 시간. 말로는 여유롭다 말을 했지만 그의 마음은 조금 초조한 듯 보였다. 마치 처음 우리가 만나던 그 날, 떨리는 손으로 술잔을 들어 올려 단 숨에 독한 양주를 뱃속에 털어 넣던 그 모습처럼.

“무슨 일이 있으신가 봐요.”

내 질문에 그의 얼굴이 나를 향했다가 돌아갔다. 그가 다시 빈 잔에 양주를 부었다.

“제가 따라드릴게요.”
“아냐, 됐어.”

내 손을 뿌리치고 그는 떨리는 손으로 양주를 따랐다. 잔이 넘친 양주가 흘러 내렸고, 그는 흐르는 잔을 들어 쉴 틈도 없이 바로 입 속에 쏟듯이 들이부었다. 그렇게 양주 한 병이 다 비도록 그는 말없이 혼자 술을 마셨다.

“제가 필요 없으실 것 같아요.”

자리에서 일어서는 나를 그의 팔이 잡아 끌었다. 그 힘에 나는 다시 의자에 주저 앉아야만 했다.

“그냥 있어.”

그 때 알았다. 그의 몸이 몹시도 추운 듯 떨고 있다는 것을.




운전하는 그의 옆 모습을 지켜본다. 언제나 검은 선글라스를 낀 그의 얼굴이 궁금했었다. 처음엔 무슨 기관원인 줄 알았다. 그런 내 말에 그는 코웃음을 쳤다.

“기관원은 무슨 얼어 죽을! 나 운전 기사야.”
“에이 설마!”
“내가 실없는 말 할 사람처럼 보여?”

그럴 리 없었다. 그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는 우리 가게 모든 사람, 아니 근방의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어느 자리에 먼저 들어가 있어도 그가 오면 두말하지 않고 나를 그에게로 돌려주곤 했다. 한가지 사건 이후로.

그 날도 비가 왔었고, 세 번째인가 네 번째인가, 그가 우리 가게를 와서 나를 찾았을 때였다. 그 때 나는 제법 잘 나간다는 주먹들과 함께였다. 어느 계파의 중간 보스로 알려진 주먹이 중요한 인물을 접대한다며 몇 주 전부터 예약을 했던 자리였다. 그 자리엔 우리 가게뿐 아니라 근방의 가게에서 에이스라 하는 아이들이 모두 모였었다. 그런 자리에 그가 들어왔다. 그리곤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나와.”

그 다음의 일은 내가 설명하기 어려웠다. 다만 일어섰던 주먹들이 모두 그에게 쓰러졌다는 것이 짧은 순간 일어난 일의 다였다. 그렇지만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어디 소속이야? 너 내가 누군지 알고 이러는 거야?”
“누군데?”

그의 말은 늘 짧았다. 그것이 상대방의 기분을 나쁘게 한다는 걸 그는 모르는 모양이었다.

“깡패면 깡패답게 놀아. 아무데서나 날 뛰지 말고. 아무리 무식한 놈들이지만 그래도 가릴 건 가려야지.”

상석에 앉아 그 와중에도 여유롭게 술을 마시던 자였다.

“누구냐고.”
“나, 동부지검 형사1부장 오준택이야.”
“그래서?”
“뭐어?”

그는 태연했고 검사라고 신분을 밝힌 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얼굴을 붉혔다. 때마침 누가 신고했는지 경찰들이 들이 닥쳤다.

“저 새끼 폭행죄로 당장 체포해!”

신분증을 들이대며 한 그의 말에 경찰들이 그를 붙잡았다.

“잠깐, 나 전화 한 통만 하지.”

오검사란 자가 웃음을 흘렸다.

“그래, 어디 줄이라도 제법 있나 보지? 해봐. 어떤 줄인지 내가 싹둑 잘라줄 테니. 내가 자식아 어떤 클래슨줄 알고 장난이야? 응?”

오검사의 자신감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가 전화하고 나서 얼마 후 오검사의 핸드폰이 울렸다.

“예, 검사장님.”
“……”
“네? 아니 현장 폭행범입니다. 감히 제 앞에서……”
“……”
“정말, 1번지에서… 말입니까?”
“……”
“알겠습니다.”
“……”
“죄송합니다.”

그리곤 모든 것이 역전됐다.

“저, 죄송하게 됐습니다. 사과 드리겠습니다.”

오검사가 깊이 머리를 숙이자 그는 단지 나를 향해 손짓을 했을 뿐이다. 그리고 나는 어안이 벙벙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이후 가게에서 다시는 오검사와 함께 했던 자들을 보지 못했다. 더불어 그가 오는 날은 나는 늘 그를 위해 어떤 자리고 일어서야 했다. 딱히 내가 할 일은 없었다. 그는 늘 혼자였고, 늘 자작해서 술을 마셨으며, 내게 아무런 요구도 없었다. 나는 그저 그의 옆에 있기만 하면 될 뿐이었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용기를 내서 물어봤다.

“그 선글라스 한 번만 벗어보면 안돼요?”

그가 움찔했다. 입술 가까이 있던 술잔이 흔들려 술이 흘렀다. 한번도 나에게 화를 낸 적이 없는 그였지만 그날은 그가 화를 낼 것만 같아 무서웠다.

“왜?”
“그냥…… 눈이… 보고 싶어서요. 어떤 분인지…… 불편하시면 안 벗으셔도……”

그의 손이 얼굴로 향했다. 곧 한 번도 본 적 없던 그의 눈을 보았다.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선한 눈. 아니 오른쪽 눈. 그러나 이마에서부터 비스듬히 그어진 상처의 흔적. 그리고 왼쪽의 죽은 눈.

놀란 내 눈을 의식한 듯 그가 처음으로 보일 듯 말 듯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비록 금방 사라졌지만 그것은 틀림없는 미소였다.

“지금 본 것은 잊어버려.”
“왜…요?”

그가 술을 잔에 따르며 말했다.

“내 눈을 본 사람은 모두…… 죽었거든.”




그는 한 번도 내 몸을 요구한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그가 온 날은 늘 2차를 갔다. 그의 눈을 본 그 날 이후부터 쭉. 그는 내 몸을 어루만지며 잠이 들곤 했다.

“우리 안 해요?”
“뭘?”
“섹스 말이에요.”
“해야만 해?”
“그럼 뭐 하러 2차는 계산하는 거에요?”
“시간을 뺏었잖아.”
“혹시… 내가 매력 없어요?”
“매력… 있어.”
“혹시 불능이에요?”
“만져봐.”

곧 그의 물건이 무섭게 일어섰다.

“됐지?”
“그런데 안 해요?”
“하고 싶어?”

몸을 파는 일에 익숙한 나도 그 날은 얼굴이 달아올랐다.

“본능이잖아요!”
“너 힘들까 봐.”
“뭐에요?”
“해줘?”
“기가 막혀서. 관둬요!”
“잘 자.”

그의 손이 언제나처럼 내 가슴을 만져왔다. 그는 유독 내 가슴을 만지는 것을 좋아했다. 뒤에서 안으며 내 가슴의 돌기를 살살 돌리고 어루만지는 것이 그는 무척이나 좋다고 했다. 느낌이 좋다고.

“술집… 그만 나가면 어때?”

한 번도 해 본적 없는 대화였다.

“이유… 있어?”
“돈이 필요해요.”
“얼마나?”
“아주 많이.”
“왜?”
“……”

선뜻 대답할 수 없었던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다. 그로부터 동정 받는 것이 싫고, 그가 내 구차한 삶을 들여다보는 것이 싫고, 내 좌절과 포기에 간여하는 것이 싫어서였다.

“잘 자.”




“여보세요?”
“아저씨가 뭔데 이러는 거에요?”
“지혜야..”
“뭔데 이러는 거냐구요!”
“……”
“아저씨……”
“미안하다.”
“뭐가 미안해요? 나 도와준 거 그거 미안한 거에요? 그렇게 미안할 걸 왜 도와주구 그래요? 누가 도와달라고 했어요? 아저씨가 내 인생 책임질 거에요? 그것도 아니면서 왜 도와주구 미안하다 그래요? 아저씨 도대체 뭐에요!”
“……”

전화기 너머의 그의 숨소리가 이렇게 생생하게 들리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 깊은 한 숨. 내 투정에 대한 너무도 소심한 그의 반응.

“아저씨 자꾸 이러지 마요. 이러면……”
“……”
“나 아저씨한테 자꾸 욕심 내게 되잖아요. 바보처럼…… 더러운 몸뚱이 주제에… 그러면 안되잖아요……”
“너… 예……”

눈물이 솟구쳐 그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뭐라구요?”
“예, 예쁘다구!”

몸이 파르르 떨렸다.

“예쁜 사람이야, 지혜는...”
“아저씨……”




그를 생각할 때면 떠오르는 것 중에 하나, 악몽. 그래, 악몽! 그는 내가 옆에 있어야 깊은 잠을 잘 수 있다 했다. 그렇지만 새벽이면 열의 아홉은 비명 속에 깨는 그를 보곤 했다. 깨어나서 그는 늘 화장실로 가서 얼굴에 물을 퍼붓듯 세수를 했다. 가끔은 세면대를 붙잡고 소리 없이 눈물 흘리는 그를 봤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그와 나의 보이지 않는 벽과 같았다. 나는 그에게 다가갈 수 없었고, 그는 내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고통의 늪에서 그는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고, 헤어나오려 하지 않았다.




“어려운 부탁이 있는데……”
“뭔데요?”
“그게……”
“아저씨답지 않게 왜 그래요? 말해봐요. 아저씨가 저에게 부탁한 적, 한 번도 없잖아요. 어서 해봐요. 내가 다 들어줄 테니까.”
“지혜야……”

그의 부탁이라면 나는 무엇이라도 다 들어줄 수 있었다. 그것이 설령 지금까지 내가 겪었던 모든 고통보다 더한 고통일지라도.




(아저씨는 모르죠? 내가 아저씨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요. 나 같은 애가 아저씨를 사랑해도 되는지 모르지만, 아니 그래서 미안하지만, 나도 어쩔 수가 없는 걸요. 그래서 미안하단 말은 하지 않을게요. 그냥... 그런 거니까. 그런데 아저씨! 아저씨 부탁 들어드리고 나면, 아저씨도 내 부탁 하나 들어줘야 해요. 내가… 아저씨 사랑한다는 것… 말할 수 있게. 나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말하고 싶어요.)

저기 비 내리는 도시의 어둠이 우리를 집어 삼킬 듯 했지만 우리는 그 어둠을 피하지 않고 곧장 내달렸다. 가끔 그의 얼굴을 바라다보며 나는 스멀거리며 올라오는 긴장을 억누를 수 있었다. 그는 내게 세상의 고통을 빠져나가는 비상구 불빛과 같은 존재였으니까.

(사랑해요... 재복… 아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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