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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1 23:52 1,258회 0건
** 축하해주신 여러 독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축하해주지 않으신 여러 독자님들께도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진심은 절대 아님!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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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먹구름인가?





한바탕 몰아치던 격정의 바람이 잦아들고 조용해지자 최은희는 내가 집에 가려는 것을 눈치챘다. 그녀는 말렸지만 나는 가야 한다고 말하고 일어나서 씻고 옷을 입었다.



"두세시간이면 아침인데, 그 동안만이라도 눈 좀 붙이고 가요."
"누나. 오늘 따라 왜 이래? 요새는 애들이 셋이나 돼."

"애들 많으면 꼭두새벽에 들어가야 해?"
"늦게 가면 보는 눈이 많아진다니까."

"그렇기는 한데 .. 아이 참. .."



현관에서 우리는 서로를 부등켜 안고 키스하며 작별을 하고,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최은희가 오늘 마치 어리광부리듯 하며 나를 잡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벌써 새벽 4시이다. 그런데 오늘은 내 침대에 지혜가 없다. 나는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옷만 갈아입고 바로 뻗어서 잤다.


오늘도 다른 일요일처럼 낮에는 애들과 같이 공부했다. 그런데 하루 종일 최은희가 나를 말리던 모습이 자꾸 떠오른다. 혹시 그녀에게 내게 말하지 않는 무슨 일인지가 있기라도 한 것일까? 저녁때 수업을 마친 후에는 애들을 대학 도서관에 데려다 주었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나는 최은희를 불러내서 같이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다시 최은희의 침대에서 시간을 보냈다. 최은희는 뭔가 새로운 세계에 눈을 뜨는 것처럼 정신 없이 몰두했다. 그녀는 피곤해서 지쳐가면서도 나에게 끝없이 요구해왔다. 내가 집으로 돌아올 때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있었다.

나도 몸을 가누기가 힘든 상태였다. 자정이 지나서 나는 애들을 집으로 데려왔다. 애들은 각기 제 방으로 돌아가고, 나도 내 방으로 와서 잠들었다.


=*=*=*=*=*=*=*=*=*=



다음날 아침에 임영선은 나를 태우고 회사로 가면서 자기 아빠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회장은 한상무와 함께 주말 내내 물류센터를 다니면서 PB 상품들이 입고되는 상황을 직접 체크했다고 한다. 어제 일요일에 신선 식품까지 모두 입고가 마무리되었고, 심야에 배송이 완료되어서 오늘 아침부터는 판매가 시작된다고 한다. 예정보다 이틀 정도가 앞당겨진 셈이다. 이번 시판은 전체 매장에서 동시에 이루어진다.

오늘도 회장과 한상무는 회사로 나오지 않고 계속 물류센터에 있겠다고 했다. 나는 임영선과 최수희와 함께 내 방에서 커피를 마셨다. 그런데 카운트다운이 시작된 이 마당에 커피나 마시면서 그녀들의 수다에 말을 섞는 것이 내가 할 일은 아니었다. 한마디로 나는 불안하고 초조했다.


나라마트에서 이번에 PB상품을 시판한다는 사실은 다른 마트들이나 언론에서 관심을 갖고 있다. 그런데 그들이 우리를 보는 시각은 성공할 확률이 낮다면서 부정적이다. 그 이유는 이번 시판에 대해서 언론 매체를 이용한 광고를 일체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유통업계에서는 처음 시도하는 일이다.

언론 매체들은 광고라는 매커니즘을 휘두르며 우리 같은 유통 업체들 위에 폭군으로 군림하고 있다. 이번에 우리가 기획하는 것은 일종의 반항이다. 광고 없이는 판매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고정관념에 반기를 드는 것이다. 이 일은 순전히 나의 고집이었으며, 회장이나 한상무도 처음에는 선뜻 동의하지 않았던 일이다.

일을 이 정도까지 벌여놓은 나는 완전 초조한 마음이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서 나는 디자인팀이 일하고 있는 작업실로 올라갔다. 그렇지만 거기서도 나의 불안함과 초조함은 조금도 가시지 않는다.

그런데 주은혜가 완전 뜻밖의 일을 벌이겠다고 했다.



"나에게도 쉽지 않은 결정이었어."
"도대체 뭔데 그래?"



주은혜는 이번에 남성, 여성, 그리고 아동을 위한 언더웨어도 출시하자고 제안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처음에 이야기한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녀는 나에게 속옷만 걸치고 있는 마네킨들을 보여주었다. 그러는 바람에 내 촉은 온통 그리로 쏠려버린다.


"실물도 아니고 마네킨인데, 뭘 그렇게 열심히 봐? 하하."

"아니거든요."

"아니긴, 개뿔. 남자라는 동물들은 역시 하나같이 똑같다니까.
브라랑 팬티만 걸치면 무조건 정신이 증발한다니까. 하하."


"여성들의 언더웨어는 몸의 가장 민감한 부분에 직접 접촉하는 옷들이잖아.
값이 싸다는 이유만으로 사는 옷이 아니잖아? 모험인 것 같네."

"여자라면 누구나 다 주머니에 돈이 있을 때에는 팬티나 브래지어 만큼은 가능한 한 비싼 브랜드로 입으려고 한단 말이야.
비산 브랜드는 브랜드 값을 한다고 믿으니까 품질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고 믿을만하다고 생각하거든."

"여자들이 갖고 있는 편견인가?"

"편견일 수도 있고. .. 그런데 가난한 엄마들은 브랜드에 대해서 약간 달라요.
얄팍한 지갑으로 식구들이나 집안 살림을 생각해야 하니까 마음처럼 그렇게는 못하죠.
그러니까 10개를 산다면 한두개 정도야 무리를 해서라도 유명 브랜드로 사겠죠?
나머지는 울며 겨자 먹기로 값이 싼 걸로 때워야 하는 서러움이 있어."

"그럼 그 값싼 것을 이번에 누나가 공략하겠다고?"

"그녀들은 한가지씩 양보할 때 마다 서러움으로 꽁꽁 뭉쳐진 눈물을 꾸역꾸역 삼켜야 한단 말이야.
돈이 없다는 이유 때문에 브랜드야 양보할 수는 있겠지만 품질까지 기꺼이 양보하려고 할까?"

"누나가 값 비싼 브랜드의 품질을 엄청 싼 값에 제공하면 그녀들의 반응은 과연 어떨까?"

"일단 쉽게 믿으려고 하지는 않겠지?
값싼 떡은 역시 비지떡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니까. .."

"맞아요. 누나가 그 터부를 깨면 될텐데."

"할 수 있어.
홈쇼핑이나 인터넷 쇼핑몰들도 하는데, 우리가 왜 못해?
소비자가 직접 와서, 직접 보고 사는데."

"누나. 어쩌면 긴 시간 싸움이 될지도 모르겠네."

"걱정 마. 어차피 처음부터 우리는 개고생하기로 결정했거든?"



주은혜의 디자인팀이 주말에 날밤을 새우다시피 해서 만든 속옷들은 모두 50 여가지나 된다. 이 속옷들은 마네킨에서는 이상이 없었다고 한다. 그녀는 란제리 쇼를 열겠다고 했지만, 지금은 모두 신경과민이므로 그럴 분위기가 아니어서 일단 보류하기로 했다. 심플하면서도 예쁜 디자인 그리고 무엇보다도 실용성이 주 안건이다.


점심시간이 되어 나는 임영선과 최수희와 함께 식사하러 밖에 있는 한식집으로 갔다. 임영선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전산실에 가면 매장들이 전산망으로 연결되어있으니까 PB상품의 매출 현황을 리얼타임으로 파악하는 것이 어떨까?"

"월요일은 매출액 자체가 낮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맞아. 자기 말이 옳은 것 같아.
임비서가 아빠 때문에 마음을 너무 조급하게 먹는 것 아냐?"

"언니. 아빠도 아빠지만 태현씨가 너무 초조해하니까 못 봐주겠어서 그래."
"자기야. 판매 피크타임이 주말에 오도록 했었어야 하지 않나?"

"주말에 몰리든가, 주중으로 분산되든가. 그게 그거 아니겠어?"

"자기 말은 일주일 내내 조금씩 팔리더라도 그것이 오히려 홍보효과를 내게되면 주말에 대박을 터트릴 수도 있다고?"

"영선씨가 너무 불안해하는 것 같다."

"우리 문제는 홍보 기간이 턱없이 부족했다는 것이거든.
어쩌지? 오늘은 첫날이니까 꼭 대박이 나야 할텐데 .."

"영선씨. 오늘 당장 어떤 기대를 하지 마요.
수희 누나처럼 마음을 차분하게 가져요.
어떻게 되는가는 내일 아침에 결산 올라오는 것을 보면 알게 되겠죠."

"자기도 못하면서 누구보고 하래?"

"자기야. 차라리 영선씨랑 나랑 오후에 매장 몇 군데를 돌아볼까?"

"수희 누나. 진짜 좋은 생각인 것 같네요.
어차피 사무실에 있어도 일이 손에 잡히지도 않거든."

"그래. 매장의 매출도 오전에는 별 볼일 없어. 오후가 훨씬 많아."

"그런데 어쩌지? 우리 자기는 같이 못 가겠네?"

"자기는 시험 공부나 해. 우리가 폰으로 현장에서 생생하게 중계해줄께. 하하."




그녀들이 말한 대로, 나는 퇴근하고 집에서 애들하고 공부했다. 저녁 8시가 넘으니까 최수희와 임영선으로부터 카톡이 날아온다. 그녀들은 여섯개의 매장에서 본 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알려온 것이다. 사진도 보내주었다.

결론은 모든 매장에서 우리 PB 상품들이 많이 팔렸다. 그것은 나뿐만 아니라 회장이나 한상무도 이미 예상한 일이다.

그렇다면 값싼 PB 상품이 팔리는 바람에 NB 상품 매출이 떨어져서 전체 매출액은 감소했는가? 아니면 PB 상품 판매의 효과가 과연 다른 상품의 매출로까지 확산되느냐가 문제이다.

이것은 그녀들이 매장에서 눈으로 보고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녀들이 전산망에 접근하지 않는 한 오늘 시판의 결과는 내일 아침이 돼야 알 수 있다.


매장은 밤 10시면 마감이다. 그런데 이미 자정이 가까워진다. 그녀들에게서 더 이상 오는 것이 없다. 매장들은 이미 당일 결산이 끝났을 것이다. 이 애들마저 가버리면 나 혼자 이 오피스텔에 있을 수가 없다. 날더러 이 초조한 밤을 어떻게 보내며, 도대체 무슨 재주로 날더러 잠을 자란 말인가?


애들은 돌아갔다. 전화기에서 알람을 확인한 후에 충전기에 꽂았다. 부재중 전화나 문자메시지들이 있지만, 다 씹고 욕실로 갔다. 찬물과 더운물을 교대로 틀면서 샤워를 했다. 잠옷으로 갈아 입고 침대에 누웠다.

그런데 또 전화가 온다. 이번에는 받았다. 임영선이다. 너무 뜻밖이다.



"태현씨."
"어?"

"내일 아침에 태현씨 태우러 갈께."
"뭐야? 그 얘기 하려고 이 시간에 전화했어?"

"아까부터 전화했는데, 통화가 안돼. .."
"애들이랑 공부할 때는 무음이거든."

"그러니까. 그게. .."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빠가. .."
"회장님이 왜? 무슨 일이 생겼어?"

"아빠가 쓰러지셨어."

"뭐야? 왜? 어디서 어쩌다가 쓰러지셨는데?
많이 다치셨어? 지금 어디 계셔?"

"아니야. 이러시는 것이 한두번이 아니야.
원래 안 좋으시거든. 심근경색 때문에 ..
아무튼 태현씨는 그렇게만 알고, 내일 출근이나 해."

"야아! 임영선!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차라리 말을 하지를 말든가.
회장님 어디 계셔?"

"서울이 아니야. 지방에 계셔.
상무님도 계시고, 엄마도 내려가셨으니까 우리는 신경 쓰지 말자.
우리한테는 내일 할 일이 있잖아?"

"그럼 지금 집에 혼자 있어?"
"내 동생도 같이 있어."

"아아. 진짜 돌겠다."
"돌아도 내가 돌아야지, 태현씨가 왜 도는데?"

"알았어. 내일 아침에 보자."
"태현씨. 잘 자요."

"지금 이 판국에 어떻게 잠이 와?"
"그래도 우리는 침착해야 하거든요."



통화가 끝났다. 내가 침착해야 한다는 임영선의 말이 맞다. 그렇지만 어떻게 가능한가? 매장에서의 결과 한가지 만으로도 초조했다. 이 판국에 회장의 병이 재발하는 일까지 일어났다면 이것은 회사를 위해서 먹구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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