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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1 23:54 1,252회 0건





50. 프레젠테이션 & 불안한 기다림




겉표지가 비춰진다. 이경숙은 내 오른 손이 사인을 할 때마다 페이지를 넘긴다.
그는 나를 보고, 나는 그를 보았다.
나는 이야기를 하고, 그는 내 이야기를 경청한다.
준비한 10가지의 문제점을 제기하고, 이 문제점이 부각된 배경과 해결책을 제시했다.
나는 때로는 잔잔히 흐르는 강물처럼, 때로는 거센 바람처럼 이야기했다.
그는 때로는 웃으며, 때로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내가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마지막 페이지가 끝나자 나는 한마디 덧붙였다.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르고, 우리가 탄 이 배가 어디를 향가 가는 줄도 모르고 출발해서 오늘까지 열심히 노를 저었습니다.
어디인 줄도 모르고 도착한 곳이 여기 20% 초과달성이라는 곳입니다.
그렇지만 자만의 결과는 패망입니다.
이대로 더 이상의 성장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냉정하게 스스로를 반성하고 개선해서 집중한다면 왜 30% 초과를 달성하지 못하겠습니까?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돕지 않으면 하늘도 우리를 외면할 것입니다.

경청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내 말이 끝나자 모두 손뼉을 친다. 부장은 강은희 과장에게 말했다.



"늦었으니까 과장님은 모두들 퇴근하도록 조치하고, 내 방으로 와요."



회의실을 나서는데 강과장이 내 팔짱을 낀다.



"우리 막내 브리핑 과장을 시켜야겠어."
"그건 또 뭐야?"

"짧은 시간 안에 만든 PT파일도, 프레젠테이션 하는 것도 어쩜 그렇게 잘 해?
박대리, 안그래요?"

"맞아요. 저는 그렇게 잘 하는 프레젠테이션 처음 봤어요.
그런데 우리 자기 한 것에 대해서 부장님은 왜 가타부타 말이 없으셔?"

"잘못 됐어봐.
아까 그 자리에서 당장 불호령이 떨어졌지.
그런 말 일체 없이 날보고 올라오라고 하셨잖아?
그건 잘 했다는 말이야.
이따가 분명 따로 무슨 말씀이 있으실거야."

"하긴. 그렇네.
참. 막내는 최수희씨랑 쎄트 아닌가?
그런데 얘가 지금은 왜 과장님 품에서 벗어나지를 못해?"

"내가 가슴이 좀 있잖아.
이런 정도는 어쩌다 한번 잡히면 나한테는 느낌도 안 오는데,
얘는 도통 헤어나지를 못 하나봐. 하하."



강과장은 마치 집채만한 그녀의 가슴 속으로 파묻으려는 듯 내 팔을 인정사정 없이 강하게 끌어간다. 누구에게도 내 팔을 빼앗기지 않겠다는 단호한 결심인 것 같다. 나도 모르는 척 하고 그 팔을 푹신한 그녀의 그 곳으로 슬그머니 밀어 붙여서 지긋이 눌러본다. 당장 강과장의 다른 손이 와서 내 팔을 꼬집는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쳐다본다. 그녀는 나에게 눈을 흘긴다. 그렇지만 결코 미워하지는 않겠다는 듯이, 그녀의 얼굴에 온화한 미소가 천천히 번진다.



"걸을 때는 앞을 봐야지. 그러다 넘어져."
"누나 얼굴이 너무 예쁘잖아요."

"아이 참. 이누므 미모때문에 .. 히히.
그런데 막내 너 느끼한 말도 은근히 잘하는 것 알아?"



우리가 사무실에 도착해서야 내 팔은 풀려났다. 그런데 내 팔은 쓸데없는 해방보다는 구속을 훨씬 더 즐긴 것 같다. 우리는 모두 퇴근했다. 사무실을 나서면서 이경숙에게 나는 고맙다는 말을 했다.



"경숙이가 파일을 워낙 빨리 만들었잖아.
그래서 오늘 일이 너무 세련되게 잘 넘어간 것 같아."

"내가 쫌 원래 그래. 하하.
오빠 아까 말빨 진짜 완전 죽이더라.
혹시 업무 보고서랑 업무 일지를 통째로 외워버린 것 아니야?"

"야아아. 나한테 언제 그럴 시간이나 있었냐?"
"그러게."

"오빠는 초안 기획을 빨리 만들고, 나는 파일을 빨리 만들고, 오빠는 말발 완전 짱이고.
이거 완전 환상의 찰떡 궁합 같지 않아?"

"얘는? 우리 지금 알바하는 중이거든."
"나는 알바생이지만, 오빠는 정규직이잖아."

"그런데 무슨 궁합?"
"다르니까 궁합이지, 같으면 무슨 궁합이 필요해?"



방효은이 기도 안찬다는 듯이 한마디 한다.



"이 그림 참 .. 완전 꼴볼견이네."



우리 셋은 같이 사무실을 나섰다. 생각해보면 이 사건의 일등공신은 뭐니뭐니해도 방효은이 제안한 몰카 동영상이다. 또 이경숙은 방효은이 터뜨린 사고를 수습했을 뿐 아니라, 오늘은 PT 파일을 엄청 잘 만들었다. 이 둘이 없었다면 내가 비록 농담이지만 과장이라는 소리를 듣는 일은 불가능 했을 것이다.

우리 셋이 계단으로 가는데, 최수희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그녀들의 뒤를 따라 걸으며 그녀들의 수다에 가끔씩 휩쓸린다. 내 눈길은 세 여성의 빵빵한 엉덩이에서 떠나지 못한다. 맨 오른쪽에 잇는 최수희의 뒤태가 단연 돋보인다. 우연의 일치인지 세 명 다 똑같이 몸에 딱 붙는 청바지를 입고 있다. 매장에 잠입해야 하는 외근 때문인가?

우리는 모두 문 밖으로 나왔다. 여자들 세 명은 걸음을 멈추고 나를 향하여 돌아선다. 최수희가 내게 물었다.



"자기야. 얘네 둘도 같이 타고 가면 안돼?
다리 건너까지만."

"그래요. 같이 타요."

"와앙. 고마워요."



최수희는 내 옆자리로, 나머지 둘은 뒷자리로 탔다. 차 안은 순식간에 여자냄새로 가득해진다. 그녀들의 수다는 끝난 것 같다. 이경숙이 나에게 묻는다.



"오빠, 어제 밤에 무슨 꿈꿨어?"
"별로 기억나는 것이 없는데. 왜?"

"세 명의 미녀를 모시고 가는 지금 이 기분이 어때? 헤헤."
"참나. .."

"오빠 진짜 수상하다.
이 차 오빠 차야?"

"그런데, 왜?"
"왜 이렇게 예쁜 거야?"

"내가 쫌 예쁘다는 소리를 듣는 편이긴 해."
"이 오빠 지금 뭐라는 거야? 차가 예쁘다니까. 히히."

"주인이 예쁘니까 차도 따라서 예뻐보이는 것이 아닐까?"
"이 자뻑은 해도 너무 심한 것 아니야?"



방효은은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창 밖을 보고 있다. 우리는 한강을 건넜다. 지하철 신도림역 입구에서 방효은과 이경숙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차에서 내렸다.

우리는 최수희의 아파트로 출발했다. 최수희는 변속기어에 올려진 내 손을 잡는다. 긴 손가락이 내 손등을 살짝 긁는다. 그녀는 오늘 외근에서 있었던 일과, 내 프레젠테이션에 대한 얘기를 했다. 나는 차를 그녀의 아파트 입구에 세웠다.



"잠시 올라가서 커피 한잔?"
"그럴까? "

"오늘 저녁에 시간 안되지?"
"미안해. 주말까지는 안돼요. 무슨 일 있어요?"

"일은 무슨 일? 일단 올라가."



집 안에 들어서자 최수희의 입술이 내 입술에 왔다. 우리는 서로를 안고 서로의 입술을 빨았다. 그런데 최수희의 키스는 예전처럼 거칠다. 나는 최수희에게 물었다.



"누나. 키스야? 아니면 커피야?"
"그건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잖아?"

"무슨 키스를 이렇게 거칠게 해?"
"미안. 너무 오래 만에 하니까 그러나?"

"우리가 키스를 몇 달 동안 했는데? 안 한 것은 고작 2주야."
"그런가? 헤헤."



그녀는 주방으로 나를 데리고 가서 커피메이커에 커피를 얹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안고 키스를 했다. 이번에는 조심을 하는지 키스가 많이 부드럽다. 최수희는 키스에 몰입하는 것 같다.

그런데 커피메이커에서는 커피 내리는 소리도 들리지 않고, 커피 향도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입을 떼어내고 최수희의 몸을 밀어냈다.



"누나, 뭐 이상한 것 못느껴?"
"별로. .. 뭐가 이상해? 또 키스가 거칠었어?"



최수희가 바보처럼 얼빵해진 모습으로 나를 쳐다본다. 나는 커피메이커의 아래쪽에 있는 파워스위치를 눌렀다. 그녀는 나를 보고 있다가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 한숨을 내쉰다.



"하아. .. 나, 오늘 왜 이러니?"



최수희는 욕실로 가고, 나는 전화기를 꺼냈다. 아이린에게서 카톡이 들어와있다.



"혹시 지혜한테 연락 온 것 없어요?"



나는 부재중 전화와 문자메시지를 살폈으나 지혜로부터 온 연락은 없다. 아이린이 왜 지혜에게서 연락을 기다릴까? 지혜는 오늘 소풍이다. 어제 밤에 아이린에게 가슴을 이야기하면서 뽕이 필요하다는 말도 했다. 그럼 지혜가 혹시 무슨 사고라도 치는 것일까? 시간은 여섯시가 되고 있다. 나는 곧바로 지혜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전원이 꺼져있다. 나는 답답한 마음으로 아이린에게 전화를 했다.



"누나, 지혜에게 무슨 일이 생겼어요?"
"세시 쯤이면 소풍은 끝날 꺼라고 했는데, 아직 집에도 오지 않고, 연락도 안되고.."

"어디 가서 놀고 있겠죠."
"나도 그럴꺼라고 생각은 하는데. .."

"사고치는 스타일은 아니니까 조금 더 기다려요."
"자기는 퇴근 안 해? 언제 와?"

"아직 30분 정도 더 걸려요."
"알았어요. 수고해."



기다림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 시간이 지나가야 무슨 일이 생겨도 생긴다. 이 기다리는 것은 누구나 해야 하는 일이지만, 누구나 다 잘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다행히도 나는 지금까지는 비교적 잘 하는 편에 속했다.

그런데 오늘은 문제가 약간 다른 것 같다. 전과는 다르게 마음이 답답해지고 초조해오는 것이다. 나는 지혜가 모처럼 공부를 하지 않고 밖에서 보내는 시간을 즐기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기껏해야 노래방, 영화, PC방, 아니면 친구 집 어딘가에 있을 텐데, 내 마음에서는 은근히 걱정이 시작된다.

최수희가 홈웨어로 갈아입고 주방으로 돌아왔다. 맑고 깨끗한 마스크와 늘씬한 몸을 감추는 원피스가 내 눈길을 사로잡는다. 그렇지만 내 마음은 이미 콩밭에 가 있다.

나는 커피를 따르고, 최수희는 사과를 꺼내서 깎았다.



"이 집에서 이사할까 생각중이야."
"이사를? 왜?"

"엄마가 안 계시니까, 이 집이 너무 크단 말이야.
혼자 살려니까 무섭기도 하고. .."

"엄마는 집으로 안 오시나?"

"지금은 엄마가 요양병원에 잘 적응하시거든.
나중에 나오시더라도 이제는 아들한테 가실꺼야."




우리는 사과를 먹고 커피를 마셨다. 최수희는 밤에 무섭다면서, 나에게 와서 같이 자고, 아침에 출근하자고 했다. 그렇지만 나는 주말에 오겠다는 말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누나, 엄청 예뻐진 것 알아?"

"자기가 나를 몇 일 안보다가 봐서 그러나?
그 말 아침에 봤을 때 했어야 하는 것 아냐?"

"뭐가 달라지긴 했는데."
"치이. .. 주말에 머리 손봤다. 그것을 못 찾아내다니 말이 돼?"



우리는 서로를 안고 입술에 키스했다. 그리고 나는 집으로 왔다. 지혜에게서는 아무 연락도 오지 않는다. 나는 너무 초조해져서 집 안에 머무를 수가 없어서 PC방으로 갔다. 아이린은 나를 보고 핸드백을 들고 나온다.



"아직 아무 연락 없어요?"
"아직이야."

"밖에서 놀다가 휴대폰 배터리가 방전 됐나?"
"무슨 일이 생기지는 않았겠지?"




나와 아이린은 내 오피스텔로 왔다. 나는 소파에 앉아있고, 아이린은 주방에서 탁탁 소리를 몇 번 낸다. 그녀는 접시 주전부리할 과자, 치즈, 초콜릿 들을 담아서 들고 왔다.



"먹으면서 기다리면 덜 지겨워."



나는 몇 개를 집어먹다가 전화기에서 진동음이 나는 것을 들었다. 우리는 거의 동시에 말했다.



"누나. 전화 왔다."
"자기야. 전화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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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속일 2024-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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